잔잔하게 떠오르는 태양이 미래도시 파주의 모습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
1>>‘1000년 수도권’, 다시 파주 천도론이 일다
분수령(分水嶺)은 물방울 하나가 둘로 나뉘는 산봉우리다. 금강산 봉우리에 떨어진 빗방울은 서남으로 내달리면 한강과 서해에 닿는다. 과연 그런가 따라가 보자. 백두대간은 금강산 어름에서 일만이천 번을 흔희작약(欣喜雀躍)하며 남쪽으로 뛰어 한북정맥(漢北正脈)을 토해낸다.
그 정맥이 서쪽으로 자맥질하여 강원과 경기북부의 산세를 이룬다. 그 중 한 줄기가 곡릉천을 만나 갈라지며 물굽이 따라 몸을 틀면서 남쪽으로 노고산-고봉산-장명산으로, 북쪽은 계명산-금병산-월롱산-박달산-파평산으로 어깨를 세우면서 옹기종기 구릉지대를 이룬다. 파주는 곡릉천 남북에 걸쳐 야트막한 산과 곡창의 들판을 가진 도시다.
파주는 임진강과 한강을 물고 있다. 원래 파주는 파평(坡平)에서 나왔다고 한다. 언덕과 평지, 즉 ‘파평’이라는 브랜드만큼 파주의 지형을 잘 설명해주는 말도 없으리라. 파주는 백두대간이 후련히 달려 이윽고 몸을 깊이 묻는 자리, 그 북쪽 개성에는 고려의 도읍이 들어섰고, 그 남쪽 서울에는 조선과 대한민국의 수도가 들어섰다.
파주는 개성과 서울 사이, 문명의 중심지를 양쪽에 끼고 앉은 1000년 수도권이다. “왜란과 역변(逆變)이 잦고 조정 관리들이 패거리로 싸우며, 그리고 사방의 산들이 모두 벌거벗는 까닭은 국도(國都) 한양의 땅 기운이 쇠하였기 때문입니다. 왕기(旺氣)가 성한 교하(交河, 현재의 파주)에 도성을 세워 국운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1612년(광해군 4년) 당대의 최고 풍수학자였던 통례원(종6품) 이의신(李懿信)은 왕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왕은 크게 마음이 동해 삼사(三司)에 명하여 교하 일대를 연구하도록 했다. 이것이 유명한 ‘교하 천도론’이다. 하지만 중신들의 반대로 논의는 무산되고 한양 도성 내에 궁궐을 증축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최근 들어 저명한 풍수지리 전문가인 서울대 최창조 교수는 교하가 통일 수도의 최적지라는 주장을 폈다. 통일이 되면 서울과 평양 어느 한 쪽을 수도로 할 경우 남북의 한 쪽이 불만을 지닐 수 있으므로 지역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제3의 도시를 찾아야 하는데 파주가 적합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수도의 조건은 세월 따라 변하는데, 지금의 서울은 위로는 북한산과 도봉산, 아래로는 한강에 가로막혀 더 클 수 없는 형국이라고 지적하고, 입지조건은 장풍국(藏風局, 바람을 가둔 형세, 경주와 개성)에서 득수국(得水局, 강 가까이 있는 형세, 서울과 공주)을 지나 이제는 평지룡(平地龍)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평지라서 땅의 기운도 좋을뿐더러 국토의 중앙인데다 한강·임진강·예성강 등 3강의 교회처(交會處)이며 항만의 입지도 좋은 파주가 이에 해당한다. 특히 최 교수는 교하의 주산인 장명산의 맥에 자리 잡은 옛 교하중학교(지금은 다율방과후학교로 바뀌었다) 건물 뒤쪽에 있는 작은 정자가 천하명당이며 대통령 관저와 정부 청사가 들어설 자리라고 꼭 집어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주장에 이견을 제시하는 학자도 있어 논의는 아직 익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파주는 이 논의에서 두 가지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다. 하나는 풍수의 기운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풍수 전문가인 고산 윤선도가 질투할 정도로 뛰어난 안목을 지녔다는 이의신은 당시 궁중에서 쓸 능 터를 잡을 정도로 신뢰받던 사람이었다.
그가 천도(遷都) 의견을 낸 것은 단순히 시류에 영합한 것이 아니라 파주 일대의 기운을 읽었기 때문이다. 최근 독일인 출신으로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된 이참 씨는 “조선의 궁궐을 관광자원화하는 데 기(氣)라는 신비한 힘으로 서양사람에게 다가가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파주의 왕기(旺氣)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관광 스토리를 개발한다면 강력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최 교수가 주장하는 통일 한국의 중심지라는 개념을 좀 더 구체화해 파주의 정체성으로 삼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남북화해와 통일문제의 비전을 담은 ‘미래도시’. 이것이야말로 파주가 지형적·역사적 조건과 교하 천도론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핵심 키워드가 될 만하다.
2>>조선의 지도자 ‘빅2’를 지닌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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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도, 초정 박제가도, 추사 김정희도 이 길을 통해 연행(燕行)을 떠났다. 이 길은 실학의 길이며 성숙의 길이었다. 당시로서는 천지개벽과 같은 신세계에 눈을 뜨고 처연하게 자기비판과 성찰을 하는 정신사적 실크로드였다.
서구 문물이 전파되는 동아시아 문명길은 의주대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의주대로는 서울-고양-파주의 160리 길에서 끊겨 통제된다. 파주는 서울에서 보면 변두리로 보일지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의주대로에 펼쳐진 세계문명을 호흡하는 도시였다. 이런 자존심을 이해해야 조선 최고의 정치가 황희(1363~1452)와 조선 최고의 지식인 이이(1536~84)가 살고 죽은 이곳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조선에는 1.5명의 정치가가 있었다는 말이 있다. 그 중 1명은 황희이며 나머지 0.5명은 동고(東皐) 이준경을 가리킨다. 동고는 명종 사후 선조를 옹립했을 때 원상(院相, 왕 대신 임시로 정무를 총괄하는 정승)을 맡았던 사람으로, 여진족과 왜적을 물리친 공로가 있으며 당쟁을 예언하기도 했다.
‘1.5명 재상’론은 황희에 의지하여 동고를 부각시키기 위해 나온 말이니 조선사람들에게 황희의 입지가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파주에는 황희가 관직을 물러난 후 머물렀던 반구정(伴鷗亭, 갈매기와 벗하는 정자)이 있고,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방촌영당(尨村影堂)이 있으며, 또 탄현면 금승리에는 그의 묘가 있다.
그는 개성에서 태어났으나, 세종은 황희에게 파주에 농장을 마련해준다. 이때가 83세였고, 황희는 4년 더 벼슬을 지낸 뒤 은퇴해 90수를 누리고 이곳에 묻힌다. 세종의 수많은 치적 뒤에는 황희의 뛰어난 보필이 숨어 있다. 황희는 왜 위대한가? 많은 갈래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으나, 필자는 전환기를 살아간 긍정적 지식인의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을 들고 싶다.
그의 이름은 ‘기쁨[喜]’이다. 고려와 조선. 하루아침에 왕조가 뒤바뀌는 격변 속에서 지식인들은 ‘왕조에 대한 충성’과 ‘국민에 대한 봉사’가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맞는다. 두문동에 들어간 72현은 전자에 충실했고, 거기서 등을 떼밀려 나온 젊은 황희는 후자에 충실하기로 했다.
변절(變節)했다는 자괴감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이런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정치적·문명적 격변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소모적 갈등과 당파적 이기심에 매몰되는 것은 황희가 권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얽혀 있는 두 개의 고사(故事)는 문제를 풀어가는 인내심과 포용력을 잘 말해준다. 하나는 여종 두 명이 다투는 상황이다. 첫 번째 여종이 황희에게 호소하러 왔다. 이러이러하니 정말 억울하다. 그러자 황희는 말한다.
“네 말이 옳다.”
두 번째 여종이 읍소한다.
“아닙니다. 진짜 억울한 것은 저입니다.”
황희는 말한다.
“네 말이 옳구먼.”
그러자 곁에서 듣고 있던 부인이 말한다.
“이쪽도 옳다 하고 저쪽도 옳다 하니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 맞아. 부인 말씀이 옳소.”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황희의 줏대 없음을 비웃었다면 자신의 내공(內功)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황희는 세 사람의 주장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세 사람의 말이 모두 옳을 수 없는 것인데, 세 사람은 각각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니, 그것이 모순임을 스스로 깨달으라는 판결이다.
모든 사람이 주장할 때는 자신의 옳은 점만 부각시키고 그것의 허점은 감추게 마련이다. 실상 곰곰이 자신의 주장을 검토해 보면 문제에 이미 답이 있음을 알게 된다. 변화한 새 시대를 살아가는 이에게 이견과 갈등은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그것을 푸는 원칙은 하나의 입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 속에서 같은 점을 찾아내고 다른 점을 타협해 가는 것임을 말해준 훌륭한 예화(例話)라고 할 만하다.
화석정. |
또 하나. 이웃 사람 이야기. 한 사람이 황희를 찾아왔다.
“아버지 제삿날인데 암소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래도 제사를 지내야겠지요?”
황희는 대답한다.
“지내는 것이 좋겠군.”
나중에 다른 한 사람이 찾아왔다.
“아버지 제삿날인데 암소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황희는 대답한다.
“지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아들 치신이 물었다.
“똑같은 일인데 어찌 대답이 다른지요?”
그는 대답한다.
“앞사람은 제사를 지내고 싶어 나를 찾아왔고, 뒷사람은 지내고 싶지 않아 찾아온 것이네. 앞사람에게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하면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제사를 지낼 것이고, 뒷사람에게 지내라고 하면 마뜩하지 않게 생각하며 지내지 않을 것 아닌가?”
황희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벗고 철저히 타인중심적 사고를 함으로써 갈등을 푸는 방법을 보여준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양대 왕국의 모든 왕에게 사랑받은 황희의 저력이다. 생각이 다른 무리를 공격하는 극단적 논쟁이 들끓는 이 시대는 황희의 특강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파주는 예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불렸다.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과 학문이 번성한 곳을 의미한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이 율곡을 좌장으로 하는 기호학파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파주지역에 독자적 학풍인 파산학(坡山學)을 태동시킨다.
율곡을 비롯해 백인걸·성수침·성혼·송익필이 파산학파다. 파주에는 이이의 ‘나도밤나무’ 전설을 간직한 율곡리가 있으며, 그가 8세 때 올라가 5언율시를 읊은 화석정이 가을잎 소리를 들으며 임진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를 모신 사당이 있는 자운서원과 묘가 있다.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 또한 여기에 묻혀 있다. 그는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세거(世居)한 곳은 파주였다. 파주가 이 시대 이 나라를 향해 가장 소리 높여 외칠 수 있는 것은 율곡의 교육사상이다. 화석정에 앉아 강남의 교육을 생각하는 세미나를 왜 열지 않는지 답답하다.
율곡의 교육사상의 핵심은 ‘출세를 위한 학문’을 하지 말고 ‘근본을 위한 학문[聖學]’을 하라는 것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율곡은 높은 뜻을 갖는 법을 가르치라고 말한다. 대통령이나 장군 같은 현실적 모델에 대한 야망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실천이 완전해진 성인(聖人)을 꿈꾸라고 한다.
이것이 교육의 기초이며 공부의 근본이다. 스스로 작게 여기는 태도야말로 교육에서 떨쳐내야 할 해악이라고 말한다. 왜 공부하는가? 단순한 지식 습득이라면 할 필요도 없는 것이며, 제대로 잘살고 인간답게 행동하고 판단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율곡의 교육이론은 지금도 전혀 낡지 않았으며 오히려 쩌렁쩌렁한 울림이 있다.
율곡의 삶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대목은 가족공동체 실험이다. 율곡리에서 살던 그는 41세 때 처가가 있는 해주로 가족 100여 명을 이주시켜 소박한 마을을 꾸려간다. 함께 사는 규율을 정해놓은 ‘동거계사’를 쓰고 아이들을 위해 <격몽요결(擊蒙要訣)>도 짓는다. 그는 대장간을 세우고 호미를 생산 판매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고급관리가 몸소 노동하고 땀을 흘리는 모습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과거에 아홉 번이나 수석으로 합격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던 그가 승승장구하던 벼슬을 뒤로 한 채 이 같은 시골의 삶을 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부모를 여의고 고독하게 자랐던 삶이 동경해온 공동체를 실천한 것일 수 있지만, 그보다 탁상공론으로 개혁이 지지부진해지는 현실정치를 향해 노동하는 삶의 가치를 일깨우려 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율곡을 파주의 위대한 인물로 추앙하는 것은, 이황과의 화려한 논쟁이나 정치적 업적, 임진왜란의 예견뿐 아니라 바로 이런 단호한 실천력과 결단이 당대와 후대의 지식인을 감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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