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 열전_05

醉月 2009. 11. 27. 09:13
[사마천]두 황제를 이긴 인간승리

진시황과 한무제에 당당하게 맞선 역사가 사마천, 분서갱유의 참극을 수습하다

 

한 황제가 있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한 뒤 적이었던 나라들의 무기를 몰수하고 화폐를 통일하고 문자를 통일했다. 그리고 북방 이민족과의 경계선에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장성을 쌓고 자신만의 제국을 선언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통치철학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다른 6개 나라의 역사서를 모조리 불태우도록 했다. 반대의견을 말하는 유학자 수백명도 산 채로 매장돼 죽어갔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천하는 이 엄청난 문화말살 앞에서 온몸을 떨었다. 천하는 수백년 만에 찾아온 통일의 평화를 제대로 누려보기도 전에 새로운 야만과 암흑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갔다.


궁형을 선택한 채 살아남아 붓을 들다

»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사마천. 그는 환관의 몸으로 자신의 불행을 승화해 위대한 작품 <사기>를 남겼다.
그로부터 100여년 뒤 또 한 황제가 나타나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잇따라 사방의 이민족을 공격하며 영토를 넓혀나갔다. 황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들의 가족을 출세시키기 위해 변칙적인 인사를 거듭한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흉노와의 전쟁은 계속되고…. 5천명을 이끄는 장군 하나가 지원도 끊긴 채 10만 흉노군에 포위된 채 분전하다가 화살마저 모두 떨어져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이 장군의 정황을 옹호하던 한 역사가에 대해 노발대발한 황제는 최고의 극악한 처벌을 명령한다…. 이 역사가는 죽음 대신 끔찍한 불명예를 안기는 궁형(남성의 성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선택한 채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시 붓을 든다.

진시황과 한무제.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성과를 거둔 황제로 꼽히는 두 사람. 이 막강한 권력자에 맞선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여기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 사마천.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그는 그런 길을 갔다. 한무제가 자신에게 가한 가장 처참한 형벌을 참고 이겨낸 채 또 다른 절대황제 진시황이 저지른 분서갱유의 참극을 수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남긴 역사서 <사기>는 ‘한 인간이 두 황제를 이긴’ 인간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한나라 전성기 때 용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으로 천문을 맡고 있었다. 사마천은 20살 때부터 경험을 쌓기 위해 중국 전역을 여행했다. 주요 유적지를 관찰하고 책자와 전설, 경험담 등 사료를 폭넓게 수집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과 회하를 여행하고 회계산에 올라 우 임금의 동굴유적을 찾아보았으며, 절강성과 구의산 등을 보았다. 그 뒤 원수·상수 등의 강을 내려갔다가 북쪽으로 문수·사수를 건넜다. 제나라와 노나라의 도시에서 학업도 하고, 공자의 유풍도 관찰했다. 그 뒤 파, 설, 팽성에서 곤란을 겪었으며, 양과 초를 통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35살이던 기원전 110년 한무제는 한왕실의 봉선례를 시행했다. 그런데 태사령이면서도 이 행사에 참가를 허가받지 못한 아버지 사마담은 분노와 실의로 중병을 얻어 죽게 된다. 사마담은 아들에게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3년 뒤 사마천은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된다. 그는 황실과 조정의 석실금궤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수많은 사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한다. 사마천은 그 뒤 유명한 ‘이릉 사건’을 만난다. 흉노에 항복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결국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된 것이다.

“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역사 사실들을 주워모아서 기록하고 정리하고자 합니다…. 위로는 황제 헌원에서 아래로는 바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세계를 연구할 것입니다…. 만약 이 글이 세상에 나와 나의 뜻을 아는 사람에게 전해지고 널리 퍼진다면, 지금까지 마음에 쌓여 있던 굴욕스러움이 조금은 보상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 환관으로 중서령에 오른 사마천은 역사 집필에 혼신을 정열을 기울여 마침내 12본기, 10표, 8서, 30세가, 70열전 등 모두 130편, 52만6500자로 이뤄진 <사기>를 완성한다.

»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고통받았던 진시황(왼쪽)과 한무제. 사마천은 이 두사람을 그저그런 '본기'로 기록한다.

사마천의 업적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을 주목할 만하다.

(1) 그는 기본적으로 역사가이다.
(2) 그의 <사기>는 진시황의 분서갱유(기원전 313년) 이후 처음으로 기록된 본격적인 역사서라는 점에서 분서갱유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3)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분서갱유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사마천은 이 피해를 어떻게 수습했는지 이해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진시황의 분서는 고대의 문헌에 타격을 주었다. 그렇다고 문헌 전부가 한꺼번에 소멸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마천이 일부 남아 있는 고문헌을 확보해 당시 이미 나타나고 있던 위작(僞作)을 배척하고 고문헌의 보존을 꾀한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분서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것은 <서경>을 비롯해 각 제후의 연대기였다고 한다. 진시황이 조·위·한·초·제·연 등 경쟁 6개국의 역사서를 모조리 불태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고대의 영웅들을 부활시켜라”

사마천은 분서령 이후 아직 여러 군데에 여러 형태로 상당히 잔존해 있던 자료들을 모으고 모아 <사기>에 담았다. 프랑스의 사마천 연구자 샤반은 사마천이 종종 지방의 역사를 그대로 옮겼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컨대 사마천은 위나라(권 44), 연나라(권 34)에 대한 사건을 서술하면서 ‘우리 군대’ ‘우리 성’ ‘우리 도읍’ 등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사마천이 사라지는 위기에 놓인 사료들을 얼마나 살려내려 노력했는지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열전> 등을 쓰기 위해 수많은 책을 모으고 읽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망실 위기에 놓인 역사들이 <사기>에 수록되거나 녹아들어 살아남는다. 나아가 사마천은 <사기>를 만들기 위해 사료의 저자는 물론 그의 문장 스타일, 그의 생애, 나아가 저작 자체도 모으고 연구했다. 그래서 저작에 나오는 주요한 문장이 발췌돼서 실리곤 했다.

바로 이런 덕으로 고대의 진귀한 문장이 후세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예컨대 사마천은 천재적인 학자 가의의 ‘과진론’(過秦論·진나라의 실책에 관한 연구)과 시 2수도 발굴해 보존시키고 있다. 나아가 사마상여의 이색적인 작품인 부(賦·중국 시문의 한 형식),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기 전에 지은 부, 한비자의 ‘세난’(說難·유세하는 것의 어려움을 주제로 쓴 글), 명의 편작의 의론(醫論·의학에 관한 글) 등등 수많은 작품들이 이렇게 해서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사마천은 동시대의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진시황이 전국 각지에 남긴 5개의 각석(刻石)을 비롯해 한나라의 황제들이 그 황자들에게 광대한 영토를 줄 때의 수령문, 항우와 유방의 시 같은 게 그런 예이다.

‘내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는 세상을 뒤덮을 수 있건만
때가 불리하여 추(騶·항우의 오추마)도 나아가지 않네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우(虞·항우의 총희 우희)여! 우여! 너를 어찌 하리.’(항우의 마지막 시)

수많은 공적인 보고서, 명령문서, 변론, 담화 등도 모두 사마천의 손을 거쳐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치 눈앞에서 오자서와 손빈이 울분을 딛고 복수에 성공하며, 노자와 공자가 천지와 인간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감동을 만나게 된다. 영원히 소멸될 수도 있었던 고대의 영웅들은 그렇게 해서 부활한 것이다.

» 분서갱유를 묘사한 후세의 회화. 6개 나라의 역사서를 모조리 불태웠고, 반대 의견을 말하는 유학자 수백명도 산 채로 매장해 죽였다.

기록자는… 기록은 무서운 것!

진시황과 한무제, 두 절대자는 결국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고통받았다. 법가였던 진시황이나 유학을 발흥시킨 한무제나 모두 말년에는 불로장생의 욕망 때문에 똑같이 불사사상과 술사·방사에 집착한다. 묘한 일이다. 두 황제의 이런 귀결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어떤 섬뜩함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 권력자의 탈을 썼지만,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인간인 이런 황제들에게 사마천은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겪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자신의 불행을 승화해 위대한 작품을 남긴다. 역사를 쥐고 우뚝 선 그 앞에서 진시황은 ‘본기’의 하나일 뿐이다. 한무제도 그저 그렇고 그런 ‘본기’의 하나로 자림매김한다. 역사가 앞에선 절대권력자도 그저 작은 먼지 같은, 지나가는 자연현상과 비슷할 따름이었던 것일까? 기록자는, 기록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치욕 속에서 피어난 처절한 문학성

» 후세에 출간된 <사기>. 사마천은 왜 끝내 <사기>를 남겼을까.
사마천은 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의 궁형을 당하면서도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는지, 왜 끝내 <사기>를 남겼는지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편지 하나에 담아 후대에 남겼다. 사형수로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익주자사 출신의 임안에게 보낸 편지는 그 처절한 문학성으로 동양 최고의 명문장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죽음은 단 한번이지만, 다만 그 죽음이 어느 때는 태산보다도 더 무겁고, 어느 때는 새털보다도 더 가볍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먼 옛날 주나라 서백(문왕)은 제후의 신분이면서도 유리에 갇힌 몸이 되었으며, 이사는 진의 재상까지 지냈으면서도 다섯 가지 형벌을 다 받고 죽었고, 팽월 장오는 한때 왕의 칭호까지 받았으나 갖은 문초를 받아야 했고, 강후 주발은 한나라 가문과 원수지간인 여씨 일족을 주살해 권세가 비할 데 없는 몸이면서도 취조실에 들어갔습니다. 협객으로 유명한 계포는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했습니다….

예로부터 어려움을 극복해 고난 속에서도 남달리 뛰어난 일들을 이뤄낸 인물들은 몇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칭송되고 있습니다. 주나라의 문왕은 감옥에 갇혀서 <주역>을 연구해 글로 남겼으며, 공자는 곤액을 당하고 나서 <춘추>를 썼습니다. 좌구명은 두 눈이 먼 뒤에 <국어>를 지어냈고, 손빈은 두 다리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고서 그 유명한 <병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여불위는 촉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에 <여씨춘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혔기에 <세난> <고분>의 글을 썼습니다. <시경>에 실린 시 300편도 대부분은 성현께서 분발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훌륭한 일들은 생각이 얽혀서 잘 풀리지 않고 마음이 통할 곳을 잃었을 때 이루어집니다. 즉 궁지에 몰려 있을 때라야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면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좌구명이 시력을 잃고 손자가 다리를 절단당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다시 일어서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참혹한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물러나서 글을 쓰고, 방책을 저술했으며, 울분을 토로했고, 문장을 남겨서 자신의 진정을 표현했습니다.”


인류의 적, 수많은 분서사건들

‘분서’ 사건은 인류문명에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 수천년 또는 수백년에 걸쳐 집적된 인류의 지식과 문명의 결정체를 영원히 소멸시켜버린다는 점에서 이런 분서사건은 무섭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 페르가몬의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화재 이후 장서를 크게 늘려 유명해졌으나 결국 안토니우스의 주도로 장서들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빼앗긴다.
서양에서도 분서사건은 역사를 거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졌다.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무대로 벌어졌던 일련의 방화와 약탈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점령 뒤 이집트에 새 왕조를 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당시 동서양 여러 문명의 책자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일을 벌인 데서 비롯됐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마지막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 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서반구 문명권의 주요 저서 70만권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규모는 그 뒤 1500년 뒤 타자기가 발명되기 전 유럽 전체가 보유하고 있던 도서의 10배에 이르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기원전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 7세 때 한차례, 로마의 이집트 점령 초기에 한차례, 4세기 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때 또 한차례 방화의 피해를 입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방화사건 때는 각각 4만권, 20만권씩 불에 탄 것으로 전해진다. 또 도서관의 책들은 서기 640년 아랍인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면서 바그다드로 옮겨졌다.

또 다른 대형 분서사건은 몽골제국 초기의 서방원정 때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13세기 초 칭기즈칸과 그 아들들의 서방원정 기간 동안 몽골군에게 점령당한 대도시의 도서들은 무수히 불태워졌다. 점령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는 것과 함께 도서관과 책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슬람 정통신앙과 학문의 중심지였던 사마르칸트, 니샤푸르, 부하라, 메르브, 테르메스 등 대도시의 도서관과 책들은 불길에 휩싸였다. 칭기즈칸이 죽은 뒤인 1250년대에도 몽골 대칸 몽케의 동생인 훌라구의 공격을 받아 함락된 이란 지역 알라무트의 도서관도 파괴됐고, 이어서 바그다드도 무자비하게 약탈당했다.

이런 분서 행위로 얼마나 많은 인류의 유산들이 영원히 사라졌는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바둑]승부와 유희를 뛰어넘어…

21세기 두뇌 스포츠의 총아 ‘바둑’… IT · 금융자본과의 만남 속에 올림픽 넘보며 새로운 시대로

“지난 3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한국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가장 뛰어난 업적을 거둔 분야는?”


1. 양궁 2. 축구 3. 쇼트트랙 스케이팅 4. 국제영화상 수상 5. 국제논문 게재 수 6. 휴대전화 세계 생산 점유비율 7. 문화콘텐츠 수출증가율 8. 스타크래프트 국제대회 9. 바둑 10. 노벨상

»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짐작하시겠지만, 정답은 바둑이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잘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바둑이 사실상 한국과 한국인의 이름을 해당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게 드높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바둑은 지난 2001년 하반기부터 2003년 상반기까지 세계대회란 세계대회에서 한국이 23차례나 연속으로 우승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잉창치배, 삼성화재배, 후지쓰배, LG기왕전, 훈란배, 농심신라면배, TV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 도요타&덴소배….

세상에 어떤 분야도 이처럼 한국인이 절대 우위를 점하며 우승을 독차지한 분야는 없다. 온 국민이 그토록 열광한 월드컵도 그저 한 차례 4강에 들어갔을 뿐이다. 아무리 양궁과 쇼트트랙이 한국의 메달박스라고 하지만 그토록 20여 차례나 연속으로 금메달을 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세계 바둑인구가 인터넷에서 만난다

2004년 5월 초 한국기원 사이트는 대단히 흥미로운 뉴스 하나를 보도했다.

“한국의 세계사이버기원(주)이 일본기원 인터넷 대국 서비스 사업자로 선정돼 세계 최초로 본격적인 한국·중국·일본 3국의 통합바둑 서비스를 실현하게 됐다. …앞으로 펼칠 사업의 내용은 인터넷 대국 서비스를 중심으로 국제 레이팅 사업(세계프로기사 및 아마추어 강자 랭킹 매기기), 기타 인터넷 관련 사업 등 인터넷 바둑 관련 사업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 뉴스의 핵심은 대략 다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한국이 가장 우수한 국제바둑대회 성적에, 가장 뛰어나다는 인터넷 바둑 서비스를 결합해 세계 인터넷 바둑 시장을 선점했다.
(2)1차적으로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바둑애호가 수천만명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인터넷으로 바둑을 둘 수 있다.
(3)마침내 전 세계 바둑인구가 하나의 사이트에서 만나서 대국하는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 1999년 열린 잉창치배 컴퓨터 바둑대회에서 컴퓨터프로그램끼리의 대국 기보. 백52, 흑75 같은 수는 컴퓨터 바둑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수이다.
과거 유한 계층의 오락 정도로나 치부되던 바둑이 어느덧 사랑방과 담배 연기 자욱한 기원에서 벗어나 21세기 수많은 인류가 어울리는 무한의 디지털 공간으로 찬란하게 비상하고 있다. 나아가 그 바둑의 콘텐츠와 테크놀로지 면에서 한국인이 우수성을 발휘하며 당당하게 선두로서 치고 나가는 형국인 것이다.

바둑은 정보기술(IT)과 접목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자본과도 조우하기 시작했다. 세계 금융자본의 대표 브랜드 가운데 하나인 JP모건이 바둑에 소액이지만 ‘투자’하고 나섰다. 올해부터 대만기원이 출범시키는 새 국제바둑대회에 ‘JP모건배 아시아바둑초청대회’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JP모건배는 우승 상금 200만 대만달러(한화 약 7천만원) 수준으로 세계바둑대회 가운데 B급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금 액수나 현재의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 자본이 바둑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동아시아 4개국 기업(잉창치그룹·삼성·LG·도요타자동차·춘란그룹·동양그룹·농심·한국담배인삼공사·일본항공 등)만이 스폰서로 나서던 바둑에 이제 본격적으로 다국적 브랜드, 그것도 금융자본이 결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간단히 지나칠 일이 아니다. 오히려 (1)동아시아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 가능성 (2)인터넷 문명의 발달에 따른 바둑 세계화의 확산 가능성 등에 힘입어 21세기형 문화코드인 바둑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과 투자 역시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인터넷 바둑의 비약적인 성장에 따라 전 세계 바둑 고수들을 참여시키는 훨씬 편리하고 다양한 인터넷 바둑 이벤트가 활발하게 개발되고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 바둑을 즐기는 미국인들.
이런 기세를 타고 현재 바둑을 올림픽 종목으로 진입시키려는 움직임도 동아시아 3개국을 중심으로 본격화되고 있다. 일본 기원이 199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맹 신청을 내면서 본격화된 이 움직임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공개 바둑 경기를 개최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 아래 일본·한국·중국이 힘을 합쳐 재추진할 예정이다. 바둑이 국제올림픽위원회의 가맹 단체가 돼 공식 올림픽 경기가 되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이 가운데 국가별 협회를 전 세계에 75개 이상 조직해야 하는 조건이 있는데, 현재 국가별 바둑협회는 66개국 수준까지 와 있다. 한국에서도 세계적 움직임에 발맞춰 한국기원이 지난 2002년 대한체육회에 인정단체로 가입한 뒤 2003년부터 전국체전에서 전시종목으로 출전하기 시작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정식종목?

이미 IT산업이나 금융자본 및 기업홍보와 접목된 뒤 올림픽을 1차 목표로 달려가는 바둑은 21세기형 문화산업의 가능성도 충분히 함축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문화 콘텐츠 산업의 강점으로 꼽히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례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만화 <고스트 바둑왕>(일본 원제 ‘히카루의 바둑’)의 예를 보자. 히카루라는 소년이 고대 바둑고수의 혼령을 만난 뒤 벌어지는 내용을 다룬 이 일본 만화는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뒤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됐다. 나아가 이제는 영어판, 불어판, 한국어판 등으로도 번역돼 세계 시장으로 나가고 있다. 이와 함께 신포석을 공동 창안한 뒤 2차대전을 전후해 그 유명한 ‘10번기’로 일본 바둑계를 사실상 평정해 ‘20세기의 살아 있는 기성’으로 추앙받는 중국 출신 오청원 9단의 일대기를 중국에서 TV드라마용 영화로 제작하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 일본만화 <히카루의 바둑> 표지. 우리나라에 <고스트 바둑왕>으로 번역된 이 만화는 영어 · 불어로도 출판돼 크게 히트했다.
바둑은 이처럼 21세기 들어 새롭게 무장한 채 중흥기를 맞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바둑인구는 약 7천만~1억명 정도로 추산된다. 중국이 약 3천만명 정도, 일본이 2천만명, 한국이 1천만명으로 집계된다. 여기에 대만·홍콩·싱가포르 등 동남아의 화교권, 그리고 유럽·미국·캐나다·라틴아메리카·오스트레일리아 등 오세아니아 등에 각각 수천~수십만의 바둑인구가 흩어져 있다.

한국이 새로운 문화코드인 바둑 분야에서 현재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전망은 그리 밝다고만 하기는 어렵다.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생산할 시스템과 그 기반이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바둑 실력이라는 콘텐츠에서 볼 때 한국의 강점은 몇 가지 요인에 기반한다.

(1)국제기전이 제한시간 3시간으로 정착하면서 한국인과 한국 기사들의 조건과 기질에 잘 들어맞는다.
(2)제한시간 때문에 실수가 상대적으로 많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전투력이 강한 바둑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전투력을 강조하는 순장 바둑의 전통을 지닌 한국 바둑이 이 전투력 측면에서 더 강해질 수 있었다.
(3)한국인의 솔직하고 가식 없는 기질이 기사들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충암고 출신을 중심으로 한국기계의 정보공유·공동연구의 분위기가 크게 확산됐다.
(4)한국은 컴퓨터를 바둑의 공동연구와 보급에 가장 유효적절하게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과 일본의 대단한 저력

그러나 이런 상대적 우위 요소는 모두 경쟁국이 복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공동연구는 이미 중국의 기사들이 활발하게 복사하고 있다. 나아가 소수의 천재형 기사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한국 바둑은 결정적으로 취약하다. 이와 함께 국제 바둑이 3시간짜리로 단축되는 등 현대화되고 있지만, 더욱 복잡해지고 바빠지는 현대화의 속도라는 관점에서 볼 때 바둑의 대국시간은 역시 지나치게 길다. 현대인을 끌어들이는 데 점점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한국 바둑은 바둑인구의 두터움과 대국시간의 스피드라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중국이 바둑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13억명을 웃도는 인구의 두터움에 시간에 크게 구애하지 않는 국민성과 라이프스타일….

» ‘살아있는 기성’ 중국 출신 오청원 9단의 10번기 모습 회화. 그의 일대기는 중국에서 TV드라마용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나아가 일본의 저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일본은 중국에서 전래된 바둑을 발전시켜 현대 바둑으로 정착시킨데다 바둑의 이론화, 세계화 등에 가장 돋보이는 공헌을 했다. 만일 바둑이 올림픽으로 정착된다면 가장 큰 공로자는 역시 일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그 국제용어는 일본식으로 정착될 가능성이 높다. 바둑은 ‘고’(Go), 공제는 ‘고미’(Gomi) 등으로 말이다. 어느 의미에선 이렇게 ‘기본을 점령하는 것’이 일정 시기에 몇개의 국제 타이틀을 따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 기사들이 국제기전의 ‘1일 대국-3시간 제한시간’ 때문에 자신들의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성적을 진심으로 수긍하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는 있다.)

과연 이런 도전을 한국 바둑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러시아의 수학교수 라자레프(Lazarev. A. V.)는 지난 2001년 발표한 ‘고대 바둑이 현대과학과 경제학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바둑의 운명과 관련해 대단히 정곡을 찌르는 문제를 하나 제기한 바 있다.

“바둑이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단순한 놀이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는 결론적으로 “솔직히 말해서 바둑을 과학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무엇보다 과학은 일반적으로 자연 연구에 도움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든가 인간의 일상생활에 이용할 수 있든가 하는 데 반해 ‘비록 바둑을 둘 때 최적의 연속수를 두었다고 할지라도 바둑판 이외에는 어디서도 그 수가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앞으로 바둑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바둑이 라자레프가 함의하듯 “새로운 수학적 도구와 방법을 연구개발하기 위한 시험대” 정도로 되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돌파구를 열어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하는” 그 무엇을 보여주든지 해야 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바둑은 천문학에서 나왔다”

그런데… 어째 이상하다. 이건 마치 어디선가 지나왔던 것 같은 길이 아닌가? 살아 있는 기성 오청원 9단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웬일인가?

“원래 바둑이라는 것은 고대 중국의 철학인 360의 음양, 즉 천문학에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대의 천문학은 천체를 360으로 따졌거든요. …당초에 바둑은 승부를 겨루는 유희가 아니고, 천문을 연구하기 위한 어떤 도구나 장치가 아니었을까요?”

처음과 끝이 같다? 놀라울 따름이다. 어쩌면 우리는 전쟁 대용품으로서의 바둑, 승부를 가리는 바둑, 유희로서의 바둑에서 벗어나 그 근원부터 되찾아야만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리알 유희’와 바둑

바둑은 과연 인류에게 어떤 존재일까? 현재 바둑을 스포츠-엄밀히 하면 두뇌 스포츠-로 분류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시키려는 움직임으로부터 학문의 하나로 정립하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는 양상은 이 물음이 얼마나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가를 잘 반증해주고 있다.

» <유리알 유희>를 쓴 헤르만 헤세.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바둑의 위상과 관련해 매우 흥미 있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는 1997년 <월간 바둑>에 기고한 ‘유리알 유희와 바둑’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헤르만 헤세의 철학소설에서 묘사한 이 유희가 사실상 오늘날의 바둑과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나타냈다.

다음은 그 요지이다.

“헤세의 이 장편소설에서 유리알 유희는 마치 중세의 귀족이 모두 무술을 배우고 고대 희랍인이 철학을 하듯, 미래의 인간이 최고선으로서 배우고 익히는 음악과 수학과 명상이 종합된 놀이다… 말하자면 유리알 유희는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 최선의 가치의 상징인 동시에 가장 아름답고 자혜로운 예술적 창조적 경지인 것이다… 20년 전의 인상으로는 주역에서의 괘(卦), 효(爻)를 잡은 것이 이와 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제 바둑알이 유리알 유희에 보다 접근한 놀이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인간이 고안해낸 놀이 중 가장 예술적이고 이성적이며 선(禪)적인 것들이 결합된 최고의 놀이가 바둑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모르는 대로 인상을 말하자면, 주역의 우주관을 놀이로 구체화시킨 것이 바둑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놀이 중에서 가장 추상성이 높은 놀이일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헤세가 동양에서 발견한 선자, 성자의 지혜로 만들어낸 유리알 유희를 우리가 실제로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헤르만 헤세는 철학장편소설인 <유리알 유희>를 집필하는 데 10여년의 세월을 쏟아부었으며, 마침내 이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클레오파트라] 사랑과 야망을 그대에게!

‘마지막 고대 여성권력의 패배’ 클레오파트라, 그는 왜 증오에 가득 찬 비방의 대상이 되었던가

 

역사는 어느 의미에선 ‘승자의 기록’일 뿐이다. 이긴 자들이 살아남아 패배한 자들의 역사를 지워버리거나 뒤틀어버리곤 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존속해오는 동안 이런 식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라지거나 왜곡된 진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그린 클레오파트라. 그에겐 성적 매력과 사랑도 무기였다.
여기 한 인물이 있다. 비록 패배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의 조국이 숭상하던 태양처럼 너무나도 강렬한 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패배했기에… 승자쪽의 역사가 끊임없이 자신을 왜곡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주인공을 둘러싼 진실과 오해는 지난 2천년 동안 빛과 어둠처럼, 해와 달처럼 극적으로 갈라져왔다.

로마 옥타비아누스의 적개심

“야심에 찬 탐욕스러운 여왕은 자신의 혈육을 남김없이 잔인하게 살해한 뒤 그 분노를 외국인에게 돌렸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품에 안긴 채 가장 훌륭한 이들을 모략하고 죽이도록 해서 그들의 유품을 횡령했다.”(AD 1세기.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모두가 확신하는 그의 연인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뿐이다. 당시 로마 여인들의 난잡한 생활과 비교해본다면 그 둘은 결코 많은 수가 아니다. 게다가 그 관계는 정식으로 인정된 것이었다.”(BC 1세기. 수에토니우스)

“아름답지만 탐욕스럽고 뻔뻔한 여왕에게 이집트 왕조의 모든 악덕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울 바가 없다. 해로운 나뭇가지 끝에 독을 품은 꽃이 피듯 그는 라지드 왕가의 마지막 영예이자 오점인 것이다.”(1904년. 부세 르클레르)

“이집트에서는 그에 대한 기억이 빛나는 전설로 승화된다. 학자들은 그를 ‘이집트의 가장 사려깊은 여인’으로 칭송하고, 국민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거대한 기념관에서 그를 기린다.”(1990년. P. M. 마르탱)

클레오파트라!

왜 로마는 이 여성을 이토록 증오에 가득 차서 왜곡하고 비방했을까?

왜 로마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세력 가운데 실질적인 주력군인 안토니우스 대신 클레오파트라를 겨냥해서 선전포고하는 방법을 선택했을까?

“역사상 가장 광활하고 비옥한 땅을 호령해온 우리 로마인이 한낱 이집트 여인에게 짓밟히고 멸시당한다면 조상을 뵐 낯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여인의 수중에서 농락당한다면 어찌 우리의 위대한 영웅들이 원한에 사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원전 31년 클레오파트라와 적대하던 로마의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을 앞두고 이렇게 외쳤다고 로마의 역사가 카시우스는 전하고 있다. 이에 앞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베스타 신전에서 빼앗아와 원로원에서 공개했다. 그런 방식은 로마에선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범죄적 행위였다. 이어서 그는 초기 로마의 전통의상 차림으로 군신 마르스의 들판으로 나가 전쟁의 여신 벨로나 신전에서 가져온 피묻은 창을 던진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하는 방식을 취한다.

치밀한 각본에 따라 연출되는 것처럼 전쟁으로 치닫는 발전과정을 자세히 보면 하나의 집요한 이데올로기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로마=남성’이라는 논리다. 자연히 그 반대편에 서는 것은 ‘이집트=여성’이라는 논리가 될 수밖에 없다. 후세의 역사가가 어떻게 파악하건 이 전쟁의 한쪽 당사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을 ‘로마 대 이집트의 전쟁’이자 ‘남성 대 여성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의미에선 역대 로마 황제 가운데 가장 영특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옥타비아누스(훗날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진실로 라이벌 의식을 느꼈던 것은 자신보다 군사적 경험이나 행정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원전 31년 9월 악티움에는 이런 운명적 전쟁의 승부를 가리기 위해 일찍이 보기 어려운 대군이 대치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500척의 군함에 7만명의 병력을, 옥타비아누스 진영은 400척의 군함에 8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클레오파트라는 200척의 배를 안토니우스에게 지원하고 있었고, 엄청난 금과 은 그리고 보석으로 이뤄진 이집트의 군자금을 배에 싣고 전장에 출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 · 안토니우스와의 사랑

이 운명의 대결 전장에 이르기까지 클레오파트라는 크고 작은 난관을 헤쳐나와야 했다. 그 생애를 보자.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그 이전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공주가 태어나면 클레오파트라라는 그리스식 이름을 붙인 사례가 많다. 따라서 그는 클레오파트라 7세라고 불린다. (그의 언니 중에 클레오파트라 6세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녀가 6명 있었기에 후계를 둘러싸고 갈등과 암투가 심했다. 동시에 왕국은 유럽에서 새롭게 세력을 확장해 이집트까지 밀려오는 로마의 영향력 앞에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왕국은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대리석상(오른쪽).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이자 강력한 후원자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대리석상(왼쪽).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그는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뒤 자살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침내 18살 때 파라오에 오를 수 있었다. 관습에 따라 10살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해 공동으로 통치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친로마정책을 취한 데 대한 반작용으로 점차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세력으로부터 인심을 잃어 고립된다. 결국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야 했다. 사실상의 국내 망명생활은 로마의 새로운 실력자 카이사르가 경쟁자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이집트까지 들어오는 상황에 따라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카이사르와의 협상을 모색하고 그 과정에서 카이사르와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카이사르의 지원으로 다시 파라오 자리에 복귀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견제하던 궁정세력을 제압하고 이집트의 중흥을 꾀했다. 그 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와 로마의 지배자로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했다. 이집트의 부와 로마의 군사력으로 동서를 통일해 함께 다스리다가 아들 카이사리온에게 물려주려는 자신의 계획에 카이사르를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이런 계획의 일환으로 로마에 간 클레오파트라는 뜻하지 않게 황제에 오르려던 카이사르가 공화파에게 암살되는 사태를 맞게 된다. 이에 따라 이집트로 급히 돌아왔다.

이집트에서 로마 정정의 변화를 주시하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 암살세력을 쳐부수고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안토니우스와 연합하게 된다.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근위대 대장 출신인 레피두스 세 사람으로 이뤄진 제2차 삼두정치에 들어간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남녀 쌍둥이를 낳고 3년 뒤 안토니우스와 결혼한다. 이와 함께 안토니우스에게 군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시리아와 페니키아 해안의 부유한 도시들, 살리시아 해안의 일부, 유대의 해안지역 등 과거 이집트 전성시대의 소유 영토 대부분을 할양받는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원정을 성공시키고 돌아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중요한 의식을 거행한다. 클레오파트라를 ‘왕 중의 여왕’, 그리고 카이사리온을 ‘왕 중의 왕’으로 선포하면서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적출자’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조치는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스스로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공언하던 옥타비아누스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로마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들을 지배할 계획임을 알고 급격하게 반안토니우스-반클레오파트라 분위기로 전환했다. 결국 세력 확장에 나선 옥타비아누스군과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그리스 서부 해안 악티움에서 최후 결전을 벌이게 된다. 강력한 부권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신흥세력 로마냐? 아니면 오랜 역사를 이어오는 모권과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전통세력 이집트냐?

야망의 스케일이 컸다, 찬스에 강했다

» 독사를 이용해 자살하는 클레오파트라. 이집트 여신 이시스의 화신인 뱀을 통해 영생으로 들어가는 의식을 재현한 셈이다.
도대체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어떤 강점이 있기에 여기에 이른 것일까?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야망의 스케일이 컸다. 그가 후반 생애에서 전심을 다해 추구한 것은 아들 카이사리온의 세계 지배라고 할 수 있다.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로 인정받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로마까지 지배하는 꿈…. 실제로 이 꿈은 악티움 해전 직전까지 현실화될 가능성을 안은 채 전진해나간다.

2. 찬스에 강했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베팅한다. 로마의 실력자 카이사르와 인맥을 구축하고 파라오 재등극을 위한 계기를 잡으려 실제 그는 결정적 장면을 연출한다. 잠재적 암살자나 밀고자들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양탄자로 몸을 만 채 그야말로 영화처럼 카이사르의 숙소에 잠입하는 것이다.

3. 무엇보다 총력전의 화신이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무기다. 성적 매력이라든가 사랑도 무기로 동원된다. 또 남성은 전쟁에서 이겨 전리품만을 갖지만, 여성은 자식을 낳음으로써 모든 자의 미래를 장악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활용했다.

4. 외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깨달았다. 로마를 잡으면 승리한다는 것을 깨닫고, 로마를 통해 완전한 승리를 꿈꿨다. 10개 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어 능력과 해박한 교양도 모두 이런 외교전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5. 이집트의 마음을 읽었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인간들은 사실상 이집트어를 배우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이 언어를 배웠다. 나아가 어느 왕족보다도 알렉산드리아 왕궁 밖에 사는 800만에 이르는 비그리스계 이집트인들을 이해하고 싶어했다. 바로 이것이 클레오파트라를 영원히 사는 길로 이끌게 된다.

6. 통치능력이 뛰어났다. 이집트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금화가치를 3분의 1로 격하해 수출 증대를 도모하는가 하면, 의무공채를 발행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경제도 잘 알았던 셈이다.

클레오파트라의 꿈은, 여성의 꿈은 결국 실패한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패배했던 것이다. 남성성과 부권, 그리고 군사력의 세계가 이긴 것이다. 아니, 여성성과 모권 그리고 문화가 패배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 표현이 세계사적으로 더 정확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감금된 숙소에 몰래 들여온 독사를 이용해 자살했다. 이집트 여신 이시스의 화신인 뱀을 통해 영생으로 들어가는 의식을 재현한 셈이다. 그 뒤 2천년, 클레오파트라의 꿈은 아직껏 실현되지 않았다.


로마가 기죽을 이집트의 여권

» 이집트 여신 이시스. 죽은 자를 살려내는 영웅담의 주인공이 이집트에선 여성이었다.
이집트는 어떤 문명보다도 여성의 권한이 강력했다. 여성이 최고권력자 파라오에 오르는 것도 일반적으로 일어났다. 이 때문에 초기 그리스인들은 ‘나일강 연안에는 모권제가 존재했다’고 잘못 알았을 정도다. 물론 여성 파라오의 경우 반드시 결혼을 해 남편과 공동으로 통치하는 형식을 띠었다. 이에 따라 여성 파라오는 오빠, 남동생 심지어 아들과 결혼해 공동 통치하곤 했다. 상황에 따라 실질적인 결혼관계를 유지한 경우도 있고, 형식적인 형태에 그친 경우도 있다.

사실상 남녀평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이런 전통은 무엇보다 이집트 신화에 잘 반영돼 있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는 수동적이기는커녕 대단히 주체적이다. 이시스는 남편 오시리스가 동생 세트의 음모로 죽은 뒤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남편을 소생시키는 놀라운 존재이다. 죽은 뒤 갈래갈래 찢긴 남편의 주검 조각을 모두 찾아내어 다시 짜맞춘 다음 ‘신성한 주술로’ 생명을 되돌려내는 것이 이시스다. 온갖 간난을 헤치고 죽은 자마저 살려내는 거대 영웅담의 주인공이 이집트에서는 바로 ‘여성’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역사상으로도 기원전 16세기 이민족인 힉소스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해방전쟁을 사실상 주도해 성공시킨 아호텝도 여성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남녀는 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평등했다. 오늘날 가장 여권이 발달했다고 하는 서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여성의 지위는 높게 유지됐다. 이에 따라 아버지의 성이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따른 비문들도 많이 발견되고, 지체 높은 사람의 무덤에 영원불멸을 위해 어머니의 모습을 새겨놓는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특히 여성이 고위 성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세상의 어떤 종교와도 확연히 구별된다.

결혼에서도 남과 여는 똑같이 여럿의 배우자를 둘 수 있었다. 일부다처와 마찬가지로 일처다부도 자연스럽게 운용됐다. 이에 반해 로마는 대단히 남성중심주의적인 시스템이었다. 물론 아주 오래 전에는 모계사회의 성격을 띤 시기도 있었지만, 역사시대 이후에는 전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일부일처제를 유지했다. 로마 가족의 전체 생활을 지배하는 이런 가부장적인 권위는 ‘파트리아 포테스타스’(Patria Potestas)라고 불렸다. 외형적으로는 일부일처제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자유연애’라든가 ‘매춘’ 등의 형태를 띠는 자유로운 성관계가 결혼제도와 공존했다. 한편 이민족과의 결혼은 인정하지 않았다. 정치와 권력에 관한 한 로마는 여성에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고 남성이 독점했다. 당연히 이집트와 달리 여왕이라는 존재도 부상할 수 없었다.

 

[링컨] 무력의, 무력에 의한, 무력을 위한!

남북전쟁을 통해 제국의 통합을 관철한 링컨… 21세기에도 미국은 그 통합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역사상의 모든 위대한 영웅과 정치가 가운데 링컨만이 오로지 진정한 거인이다. 알렉산더, 프리드리히 대왕, 나폴레옹, 글래드스턴과 심지어 워싱턴조차도 인격의 크기, 감정의 깊이, 그리고 어떤 도덕적 박력에서는 링컨에게 훨씬 뒤떨어진다. …그는 그리스도의 축소된 모습이며 인간성을 풍부히 지닌 성자였으니, 그의 이름은 오고 오는 시대의 전설 속에서 앞으로도 수천년 동안 살아남을 것이다.”(러시아 문호 레프 톨스토이)


링컨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

» 에이브러햄 링컨.
야후 사이트(www.yahoo.com)에서 링컨(lincoln)을 치면 관련 사이트가 무려 ‘약 1910만개’라는 놀라운 사실과 맞부닥친다. 아마존 사이트(www.amazon.com)에서 역시 링컨(lincoln)을 치면 ‘4만4703권’이라는 책의 숫자를 만나게 된다. 이 엄청난 숫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만큼 미국, 아니 세계에 에이브러햄 링컨의 이름은 유명하기 짝이 없으며 중요하다는 것이리라.

우리나라의 경우도 어느 정도 이런 흐름을 반영해 대부분의 사람이 링컨이라는 이름만큼은 한번쯤 들어보았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중학교 정도만 나온 사람이라면 그가 미국에서 흑인노예를 해방시켰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저 유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라는 연설문 구절을 다 알 정도는 된다. 링컨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말을 한 미국 대통령
2.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 대통령
3. 남북전쟁에서 북부를 승리로 이끈 미국 대통령

어쨌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식하는 인물의 중요도도 이 순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거꾸로이다. 21세기 한국의 기준으로 볼 때, 나아가 비판적 관점을 적용한다고 할 때 의미 있는 링컨의 평가는 이 순서의 거꾸로라고 할 수 있다. 3번의 ‘남북전쟁에서 북부를 승리로 이끈 미국 대통령’을 변형해서 더욱 심화시키면 이렇게 된다. ‘전쟁을 통해 미국이라는 제국의 통합을 관철한 대통령’. 바로 이 관점이 맨 앞으로 나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이것을 심화 발전시키면 이런 가설이 성립한다.

» 빅스버그 전투 장면도. 그랜트 장군이 이끈 이 전투의 승리로 북부군(깃발 든 부대)은 승기를 잡게 된다.
‘과연 미국이라는 제국은 21세기에도 통합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선 1860년대 남북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수단까지 동원해 제국의 통합을 관철시킨 링컨과 당시의 미국을 정확히 연구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 미국 켄터키 놀린 크리크의 산골마을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농부인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일한 링컨은 평생 정식 학교교육을 1년밖에 받지 못했으나 주의회 하원의원을 거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다. 일리노이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링컨은 몇 차례의 실패 끝에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된다. 그 뒤 다시 하원, 상원, 부통령 선거 등에서 실패했으나 당시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번지던 노예제 이슈를 타고 급격하게 정치적 논쟁의 중심인물로 부상한다. 결국 링컨은 1860년 11월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이듬해인 1861년 3월 미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링컨은 취임을 전후해 노예제에 찬성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앨라배마,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플로리다, 조지아, 텍사스 등 남부 7개주가 연방에서 탈퇴해 이른바 ‘남부연합’(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하는 총체적 국가 분열 사태에 직면한다. (나중에 이 남부연합에는 아칸소,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4개주가 가담해 11개주가 된다.) 북부의 경우 공업이 발전해 노예제에 대한 필요가 점차 격감해가고 있던 반면 남부는 면화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전해 토지에 긴박되는 노예와 그 노예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높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남북의 대립은 1861년 4월 남부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항의 포트섬터에 주둔하던 북군을 공격하면서 남북전쟁으로 발전한다. 링컨은 전쟁 초기 인구나 산업생산, 무기생산 등 기본적인 자원 면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해 3달 만에 남군에 이길 수 있다는 예상과 달리 크게 고전한다. 이에 따라 4년 동안의 장기간에 걸친 격전 끝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군사상의 필요’에 따른 노예해방령

링컨의 신화와 관련해 남북전쟁을 한번 개괄할 필요가 있다. 남북전쟁은 북군 사망자 36만명, 부상자 200만명, 그리고 남군 사망자 25만명, 부상자 7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명을 희생시켰다. 국토도 황폐화됐다. 당시 북부의 인구가 2300만명, 남부의 인구가 900만명 정도(그 가운데 400만명은 흑인노예)였으며, 전투기도 없는 등 무기 수준이 20세기나 21세기에 비해 대단히 낙후해 있던 점까지 감안하면 피해는 대단히 컸다. 이런 엄청난 피해까지 감내하면서 링컨은, 미국은 무력을 통한 제국의 통합이라는 첫 번째 신화를 완성했던 것이다. (나아가 이런 남북전쟁의 성격은 앞으로도 미국의 통합 문제를 해결하는 지렛대로서 상당기간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 흑인 병사의 사진.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은 북부군에 입대해 남북전쟁 승리에 크게 기여한다.
링컨의 두 번째 신화인 노예해방에 대해 보자. 링컨은 원래 노예제 폐지론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지지한 사람들이 폐지론자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투쟁에서 내 최고의 목표는 연방(미국)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제도를 존속시키거나 파괴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부를 해방시키고, 일부의 노예들을 남겨둠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링컨은 점차 노예해방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이끌려간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결행하지 못한 내부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는 헌법상의 문제다. 하루아침에 대통령령 같은 것으로 노예제를 폐지할 경우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대통령 취임선서를 어기는 것이다. 두 번째로 노예해방을 강행할 경우 노예제를 인정하면서도 북부에 가담한 델라웨어, 미주리, 켄터키, 메릴랜드 4개주가 북부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있었다. 어쨌든 링컨이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노예해방령을 발포했다는 것은 스스로도 인정한 바 있다.

당시 남부연합은 인구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흑인노예들을 군수공장, 요새 및 진지 구축, 식량생산 등에 군 노무자로 동원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링컨은 노예제의 토대를 흔들면 남부연합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실제로 처음 발포된 노예해방령도 이런 군사상의 필요에 초점을 맞춰 남부연합주에 소속된 지역에서만 노예를 해방하는 안으로 진행됐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링컨이 노예해방령을 발포하고 그 결과 인류사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은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여기서 ‘제국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21세기 미국의 상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현재 통합을 위협하는 몇 가지 단서들을 엿보이고 있다.

» 링컨의 암살 장면 상상도. 남부를 지지하는 배우 존 부스가 극장에서 링컨을 권총으로 쏘고 있다.

미국 군부의 영향력을 높여주다

첫째는 9·11 테러와 그 이후 부시 정권이 지속적으로 조장한 종교-문명 충돌적 성격이 미국의 다민족 국가적 통합원리에 새로운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슬람권을 겨냥해 일방적으로 몰아친 공격적 국제정책으로 미국의 ‘인종 용광로’의 효율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용광로 내벽의 훼손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인구 구성상의 불균형 문제이다. 현재 미국에는 그동안 다수를 차지하던 유럽계 백인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히스패닉계와 흑인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지속적으로 미국에 건너오고 있는 히스패닉계는 가톨릭 교리 등의 영향으로 낙태를 회피하면서 자녀를 상대적으로 많이 낳는다. 흑인들 역시 백인에 비해 이런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이런 현상을 반영해 부시 대통령은 전국 라디오 연설에 영어와 함께 스페인어 연설도 추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미국이 지역적으로 산업의 편차가 심하다는 기본 특성도 주요 변수다. 이런 편차는 남북전쟁 당시 제국의 분열을 부른 결정적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예기치 못한 사태 발전에 따라 폭발이 일어나면 그 가능성은 더 높을 것이라는 논지다.

링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 정확히 6일 만인 1865년 4월15일 남부를 지지하는 한 배우의 총격을 받고 암살됐다. 최초로 암살된 미국 대통령이 된 것이다. 제국을 휩쓴 갈등과 대립이 종식됐어도 그 여진은 무섭다는 사실을 세상에 각인시킨 셈이다. 나아가 링컨의 남북전쟁 이후 전쟁영웅이 미국 대통령으로 등장하는 사례도 두드러진다. 북군 총사령관 출신인 율리시스 그랜트는 미국 제18대 대통령에 오르고,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웅 아이젠하워는 제34대 대통령에 올랐다. 대형 전쟁 이후 미국 군부의 영향력은 놀랄 정도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예고하는 것은 아닐까?


링컨 vs 노무현

한국에서 대표적인 링컨 마니아로는 노무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실제로 링컨을 주제로 <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년, 학고재)이라는 책을 쓰기까지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정치가로서 링컨을 ‘매우 심각하게 의식한 채’ 정치를 해나가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링컨과 노 대통령은 서로 닮은 점이 적지 않다. 첫째, 잠재역량 이동(Potential Shift. Power Shift보다는 이 표현이 더 적확할 듯하다)의 시기에 각각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대응해 집권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노 대통령의 경우 한국에서 산업화 시대 이후 밀어닥친 정보통신 시대의 정치·문화적 욕구에 유효적절하게 대응해 부상한 측면이 강하다. 링컨 역시 미국의 서부 팽창에 따라 독립전쟁 이후 거의 1세기 동안 유지되던 동부와 남부 중심의 정치·경제가 급격하게 서부로 중심을 옮겨가는 데 맞춰 부상한 정치가라는 성격을 띤다.

둘째, 두 사람 모두 전통적 의미에서 엘리트주의와 전혀 뿌리를 달리하는 탈엘리트주의·서민주의 정치를 토대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다 명문대학과는 거리가 멀고, 링컨의 경우는 아예 ‘학교에 다닌 기간이 인생을 통틀어 1년’에 지나지 않을 정도다. 셋째, 개인사적으로 두 사람 모두 실패의 경험이 매우 많으며, 각각 그 정치적 위기를 극적으로 역전시키는 승부사적 기질이 강하다. 링컨은 주의원 선거 1차례, 연방 하원의원 2차례(1번은 공천 실패), 상원의원 2차례, 부통령 선거에 1차례 실패했다. 그는 이 모든 난관을 이기고 끝내 대통령에 당선돼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다. 노 대통령도 국회의원, 부산시장 선거 등에서 패배한 경험이 있으며, 대통령 집권 중에는 국회의 탄핵까지 받았다가 극복한다.

넷째, 두 사람 모두 내용상의 소수정권으로 안팎의 비판자가 지나치게 많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언론의 견제와 비난 역시 두 사람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두 사람 다 변호사 출신으로 연설을 대단히 잘하는 편이며, 50대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집권한 점도 비슷하다.

두 사람이 사는 나라나 시대가 같지 않기에 당연히 다른 점도 많다. 첫째, 각각 맞닥뜨린 시대사적 과제의 무게가 아직까지는 서로 큰 차이가 있다. 링컨의 경우 기본적으로 ‘미국이라는 제국의 통합’이라는 거대 의제에 맞서 끝내 이것을 해결한 지도자라는 성격을 띤다. 한국에서 이런 정도의 무게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한국전쟁과 민족통일이라 할 수 있지만, 민족의 통일까지는 아직 가지 못한 상태다.

둘째, 건전한 의미의 여야 협력을 실현하는 데 링컨은 성공한 반면 노 대통령은 아직 그 계기를 잡지 못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링컨의 경우 다행스럽게도 괜찮은 야당 파트너를 만났다. 특히 노예제 문제를 놓고 대통령 선거에서도 맞섰던 평생의 정치적 라이벌 스티븐 더글러스라는 야당(민주당) 지도자는 남북전쟁 발발 직후 초당적 협력에 나서 적극적으로 링컨을 지원한다. (더글러스는 대중연설 등을 통해 민주당원들이 연방정부를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한편, 북부 주민들이 연방군에 참여하도록 모병을 독려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다가 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다.)

셋째, 통치 스타일에서 링컨은 외부에서 비롯된 난제를 결정적인 국면에 개입해 해결하는 ‘수동적 대기만성형’의 성격이 강한 반면, 노 대통령은 적극성이 매우 강하다. 넷째, 사람을 쓰는 데서 링컨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반대자까지 아우르며 설복시키는 등 포용형+설득형에 가까운데, 노 대통령은 사람에 대한 좋고 싫음의 선을 분명하게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쨌든 현실성과 상관없이 링컨 연구는 노 대통령의 정치철학, 정치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손자] 21세기 비즈니스맨!

전세계 경영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병법가, 그의 신화가 세상을 흔들고 있다

» 전쟁에 이기기 위한 기술을 책으로 펴낸 손자.(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약 2500여년 전 중국 대륙에선 제자백가들의 토론과 저술, 유세 등으로 사상의 대폭발이 거듭됐다.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 후세에 모두 189개로 분류될 춘추전국시대의 이 사상가 집단은 저마다 천지의 도와 인간의 본질 그리고 치세와 천하통일을 위한 방략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로부터 2500여년이 흘렀다. 천하를 주름잡던 제가백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느 문파가 끝까지 살아남았을까? 과연 21세기에 이르러 마지막 승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 장군이 되다

진시황의 천하통일로 최초의 패자임을 자랑하던 법가는 진나라에 이어 통일천하를 장악한 한나라가 유가를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삼으면서 역사의 전면에서 후퇴해야 했다. 그 유가조차 지금은 국가의 지도이념이라는 지위에서 내려와 그저 개인의 처세나 인생관의 토대로나 작동할 뿐이다.

여기 한 사상가가 있다. 그는 무엇보다 유가, 도가 등 형이상학적 우주관이 주류를 이루다시피 하던 춘추시대에 국가사회의 물적 토대를 이루는 자원의 제한성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전쟁은 국가의 대사로서 백성들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어 신중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무릇 군대를 운용할 때는 마차 1천대, 군수품 수송용 마차 1천대, 무장병 10만으로 구성된다. 1천리나 되는 곳에 군량을 보내려면 안팎의 경비와 빈객들의 접대비, 군수물자의 조달과 차량과 병기의 보충 등을 위해 1일 1천금을 써야 10만 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 전쟁에서 이길지라도 오래 끌면 병사들이 지쳐 전력이 약화된다. …그러므로 전쟁은 서툴더라도 빠르게 끝내야 하며, 오래 끌면 안 된다. 전쟁을 오래 끌고서 국가에 이익이 된 적은 여태껏 한번도 없었다.”

» 손자가 오나라 왕의 후궁에 있는 미녀 180명을 동원해 군사훈련을 하는 장면의 상상도(왼쪽). 손자의 조각상(오른쪽).

이 대전제 아래 그는 전쟁을 이기기 위한 기술-병법을 시계(始計), 작전(作戰), 모공(謀攻), 군형(軍形), 병세(兵勢), 허실(虛實), 군쟁(軍爭), 구변(九變), 행군(行軍), 지형(地形), 구지(九地), 화공(火攻), 용간(用間) 등 13편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전했다. <손자병법>, 제가백가 가운데 21세기 들어 사라져가는 다른 문파를 압도한 채 오히려 더욱 각광을 받는 문파는 바로 손자를 시조로 둔 병가인 것이다. 그러나 병가의 부활을 가져오는 이유는 슬프도록 역설적이기도 하다. 아직도 세상 곳곳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전쟁을 이기려는 사람들의 경쟁은 무제한적으로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처절한 현실 때문에 지금도 웨스트포인트로부터 화랑대에 이르기까지,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케이프타운에 이르기까지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사관학교에서는 손자의 병법이 어김없이 강의되고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손자-오기열전’ ‘오자서열전’ 등을 종합하면 손자는 대략 이런 인물로 묘사할 수 있다.

“손자는 본명이 손무이다. 제나라 사람으로 병법이 뛰어나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 왕 합려의 장군이 됐다. 손무는 합려가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 오자서 등과 함께 초나라를 쳐서 서라는 지역을 빼앗고 예전에 초나라에 투항한 두 공자를 사로잡는 승리를 거둔다. 합려는 승세를 몰아 초나라의 수도 영(?)까지 쳐들어가려 했으나 손무가 만류했다.

“백성들이 지쳐 있으니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합려 4년, 오나라는 다시 초나라를 공격해 육과 잠 땅을 차지하고, 그 이듬해에는 월나라를 공격해 승리했다. 합려 6년에는 초나라가 오나라를 쳐들어왔으나 오자서가 나가 예장에서 초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초나라의 거소까지 빼앗았다.

합려 9년, 오나라 왕은 오자서와 손무에게 물었다.

“앞서 그대들은 초나라의 수도 영을 칠 때가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은 어떻소?”

두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초나라 장군 자상은 탐욕스러워 속국인 당나라와 채나라가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왕께서 대대적으로 초나라를 치려면 반드시 당나라와 채나라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이십시오.”

합려는 이 조언을 좇아 군사를 모두 동원해 당, 채 두 나라와 힘을 합쳐 초나라를 공격했다. 승기를 잡은 오나라는 5차례의 접전 끝에 마침내 초나라 수도 영을 함락시켰다. 이렇게 오나라는 오자서와 손무의 계책을 채용해 서쪽으로는 강한 초나라를 깨뜨리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나라를 눌렀으며, 남쪽으로는 월나라를 복종시켰다.”

<손자병법>, 일본 경영자 추천도서 1위

<사기열전>에 따르면 손무는 여기까지만 나온다. 오나라가 합려의 아들 부차로 넘어가 ‘와신상담’으로 유명한 오월전쟁의 국면으로 넘어간 뒤에는 손무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와 명콤비를 이루던 맹장 오자서는 계속 오나라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데 반해 손무는 그 사이 죽었는지 은퇴했는지조차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어쨌든 <손자병법>,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손자>라는 저서는 후세로 전해져 21세기의 승자로 부활한 셈이다.

21세기 들어 손자병법은 군사 세계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즈니스 세계에서 그 탁월성을 인정받아 더욱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다.

-<불패전략, 최강의 손자>(일본)
-<자기관리 손자병법>(일본)
-<손자병법과 전략경영>(싱가포르)
-<손자와 비즈니스의 기술>(Sun Tzu and the Art of Business)(영국)
-<경영자를 위한 손자병법>(The Art of War for Executives)(미국)
-<관리자를 위한 손자병법>(The Art of War for Managers)(미국)
-<투자 손자병법>(Sun Tzu on Investing)(미국)
-<파란 눈이 들려주는 손자병법 세일즈 이야기>
(The Art of War & The Art of Sales)(미국)
-<일하는 여자들의 손자병법>
(Working Woman’s Art of War: Without Confrontation)(미국)….

일본에서는 경영자를 위한 추천도서 가운데 1위를 다투는 책이 바로 <손자병법>이다. 싱가포르의 위초후 교수 같은 사람은 “일본의 최고경영자들이 <손자병법>을 애독했다는 역사적 맥락과 함께, 남이 개발한 아이디어와 작품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어내는 일본인의 독특한 개선기술을 고려한다면, <손자병법>이야말로 오늘날 일본의 성공을 가능케 한 그들 특유의 경영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일본이 2차대전 이후 수많은 제품과 산업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석권해나가는 전략이 군사적이며 손자의 전쟁전략과 매우 유사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 주택 및 화학제품으로 유명한 세키스이(積水) 그룹은 <손자병법>의 군형편에 나오는 표현을 따서 그룹의 이름을 짓기까지 하고 있다.

“승리하는 자는 싸움을 주도하면서 천길 높은 골짜기에 ‘가두어둔 물’(積水)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쌓여 있는 힘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승리의 기세인 군형이다.”

일본의 맥주업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던 기린맥주를 시장점유율에서 추월한 아사히맥주의 나카조 다카노리 회장을 비롯해 스미토모생명의 우에야마 야스히고 회장, NEC의 세키모토 다다히로 회장 등 유수한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손자병법을 응용한 경영 성공 사례를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형 금융과 IT분야에서도 위력

이른바 최첨단을 자랑하는 21세기형 금융과 정보기술(IT) 분야에서도 손자의 위력은 똑같이 발휘된다. 손자 마니아로 유명한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는 아예 손자의 이론에 자신의 경영철학을 합쳤다는 ‘손자의 제곱병법’을 세상에 공개하기까지 했다.

»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도 손자 마니아로 유명하다.(사진/ AFP연합)
일류공수군(一流攻守群)
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
정정략칠투(頂情略七鬪)
풍림화산해(風林火山海)

“일류 경영은 공격과 수비의 균형을 취하며, 무리를 지어 싸워야 한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선 도(깨끗한 정치), 천(날씨 등 기후조건), 지(지리), 장(지도자), 법(규율·효율)의 5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장수(지도자)는 지혜, 신뢰, 어짐, 용기, 엄격함의 5가지를 충족시켜야 한다. 그리고 정상에 올라서 전체를 바라보고 전략을 세운 뒤 7할의 승산이 있을 때라야 싸운다. 이동은 질풍처럼, 정지 상태에선 숲처럼, 공격은 거센 불길처럼, 방어는 산처럼 하며, 삼킬 때는 바다처럼 하라.”

컴퓨터업계의 최강자이자 세계 최고의 부자이기도 한 빌 게이츠도 <생각의 속도>에서 손자를 자주 인용하고 있어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영에 끼친 그의 영향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고, 휼렛패커드 회장인 칼리 피오리나 회장도 취임식에서 손자를 인용한 바 있다. 국경을 넘어, 산업의 경계를 넘어, 시대의 차이를 넘어 손자의 신화는 세상을 여전히 흔들고 있다.


<손자병법>은 손무 작품

» 청대에 발간된 <손자병법>.
현재 <손자>라는 책명이 전해지고 있는 <손자병법>은 그 치밀하고 뛰어난 내용 때문에 손무가 살던 춘추시대라기보다는 그 이후 전국시대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돼왔다. 손무가 사마천의 <사기>에 2번밖에 등장하지 않고, 다른 고전에도 그 이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등 불확실한 요소들 때문이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의 손자 가운데 손무보다 100여년 뒤인 전국시대의 손빈이 <손자>의 저자일 것이라는 주장이 유력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그런데 1972년 4월 중대한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 산둥성 임기라는 마을 교외에서 한나라 시대 무덤 2개를 발굴한 결과 <손자>의 연대와 저자를 추정케 하는 죽간들이 발견된 것이다. 같이 출토된 엽전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기원전 140~181년의 것으로 분석되는 총 4942매에 이르는 죽간은 글귀에 약간 다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손자>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고전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손자>의 경우 현재 전해진 13편의 편명을 토대로 대략적으로 현존하는 것과 같은 본문을 복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손자>와 별도로 당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병법을 적은 상당량의 죽간의 존재도 확인됐다. 그 내용을 해독한 결과 놀랍게도 제나라 위왕과 ‘손자’의 문답(여기서의 손자는 당연히 손빈일 수밖에 없다), 위왕과 장군 전기 그리고 ‘손자’가 주고받았던 말, 나아가 ‘손자’가 위나라 장군 방연을 생포한 작전의 과정 등이 서술돼 있었다. 손무 아닌 손빈의 병법인 셈이다.

중국 학계는 이 발굴과 그 이후의 연구를 토대로 대략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1. 오늘날 <손자>(손자병법)라고 전해지는 책은 <사기>에 나오는 ‘13편’으로 이뤄진 <손자병법>과 동일한 것으로 손무가 쓴 것이다.

2. 새로 발견된 자료(손빈의 병법을 담고 있는 것)는 <사기>에 나온 손빈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병법’과 동일하다.

(이 견해를 따서 이번 글에서는 <손자병법>의 저자를 손무로 국한하기로 한다.)



손자, 베트남에서 이라크까지

» 1991년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사막의 폭풍’작전에서 ‘손자병법’은 다시 한번 위력을 발휘했다.(사진/ GAMMA)
최근에 벌어진 전쟁 가운데 손자를 많이 응용한 전쟁으로는 1991년 미국 등이 이라크를 공격한 제1차 걸프전쟁(사막의 폭풍)이 있다. 당시 다국적군 사령관이었던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은 기자가 걸프전에서 채택할 전략에 대해 묻자 <손자병법>의 ‘허실편’에 나오는 ‘실로써 허를 공격한다’는 말을 인용해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우리의 장점을 이용해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다국적군은 ‘사막의 폭풍’ 작전에 들어가며 플라스틱으로 만든 헬리콥터와 전차 그리고 150명의 병사가 배치된 기지를 만들고 무선으로 거짓 정보를 흘려보냈다. 나아가 페르시아만에 미 해병대를 대기시켜 마치 동쪽 바다에서 기습공격을 할 것처럼 위장하다가 반대편에서 기습했다. 당시 걸프전에 파견된 미군 해병대는 배낭에 <손자병법>의 번역본을 휴대하고 있었으며, 헤드폰을 통해서도 그것을 들을 수 있도록 카세트 테이프까지 지니고 있었다. 결국 이 걸프전에선 이라크군 10만명 이상이 전사한 데 반해 다국적군은 사망자 199명, 부상자 388명이라는 피해밖에 입지 않았다. <손자병법>이 사실상 하이테크 전쟁의 효시를 이루는 걸프전에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미국이 이처럼 손자를 연구하고 전쟁에 응용하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비롯됐다. 역으로 <손자병법>을 최대로 응용했다고 할 수 있는 베트남 해방세력에 패배한 미국은 그 교훈으로 손자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걸프전에서는 (1) 베트남식의 장기전은 절대로 피한다. (2) 미국 본토로부터 지시를 받아 현장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지휘체계의 혼선은 되풀이하지 않는다. (3) 오히려 우리가 속임수를 적절히 활용해 적을 혼란시킨다는 방식을 채택했다. 실제로 슈워츠코프나 콜린 파월 등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이런 경험을 잘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걸프전쟁이라 할 수 있는 현재의 이라크 사태에서는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다. 오히려 미군은 이라크 저항세력의 손자병법적 다각 공세에 휘말려 고전하는 양상이다. 압도적 화력의 우위에 취했기 때문일까? 럼즈펠드 등 미군 지휘부는 또다시 손자병법의 교훈을 잊어버린 듯하다.

 

[제갈량] 제갈량 같은 참모만 있다면…

세상을 놀라게 한 동방 최고의 지략가… 단 한치의 영토도 없던 유비를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다

 

난세, 한 영웅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후손이라는 그는 별다른 기반조차 없이 천하쟁패전에 뛰어들었기에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신세였다.


» 제갈량. 참모 하나의 능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기고 한때 적이었던 조조에게 망명….

황제의 밀명으로 조조 제거 계획에 가담했다가 탈출해 원소에게 망명….

원소의 주력군에서 이탈해 예주목으로 있다가 조조에 쫓겨 다시 유표에 망명….

서기 207년 영웅 유비는 그런 처지에서 형주 융중의 초려를 세 번째 방문한 끝에 제갈량을 만나게 된다. 당시 47살이던 유비는 그렇게 별 볼일 없는 망명 장군의 신세이면서도 놀랍게도 자신의 주변에 인재가 많다고 생각했다. 관우·장비·조운 같은 무장들과 손건·미축 같은 문신들…. 그러나 당시 27살에 지나지 않던 이 천재 전략가로부터 나오는 계책은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영웅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탁월한 발상, 정확한 미래 예측 능력

“지금 조조는 100만이나 되는 무리로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고 있으니 그와 다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손권 역시 삼대의 통치로 안정돼 있는데다 능력 있는 이들을 등용하고 있어 연합세력이 될 뿐이지 공략할 수는 없습니다. …형주는 지리적으로도 반드시 차지해야 할 곳으로 지금 이곳을 차지한 자는 지킬 능력이 없으니 여기를 취해야 합니다. 익주는 비옥한 땅이 천리나 이어진 천연의 부고로서 역시 주인이 무능해 총명한 새 주인을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형주와 익주를 차지해 서쪽과 남쪽의 각 민족을 어루만지며 손권과 연합한 뒤 천하의 형세 변화가 있을 때 형주와 익주 양면에서 북벌을 감행한다면 통일의 패업은 달성될 것입니다.”

»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가는 삼고초려 장면.
천하삼분지계-이미 북방을 평정한 막강한 조조의 세력과, 장강의 지세에 의지해 강남을 공고하게 장악해가는 손권의 세력에 맞서 중원의 남서쪽에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천하를 삼분한 뒤 궁극적 천하통일을 달성하자는 계책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동양 5천년 역사에서 사실상 최고의 참모로 꼽히곤 하는 제갈량의 천하 데뷔를 알리는 이 천하삼분지계는 다음 3가지 점에서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1. 그 발상 자체가 탁월했다.

2. 실제로 역사는 이 발상에서 예견한 대로 흘러가는 등 정확한 미래 예측 능력을 함축하고 있다.

3. 무엇보다 이 발상 자체를 근본부터 불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삼고초려 직후 잇따라 터져나왔는데도, 이 모든 난관을 헤치고 제갈량은 발상의 원래 그림을 관철해나갔다.

이 발상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벤처’적이다. 형주와 익주의 경제력과 전략적 가능성을 정확한 미래 예측 능력과 결합해 리노베이션하는 모델…. 형주부터 보자. 7군 117개 현으로 이뤄진 형주는 전한 시대에 비해 후한 시대에 엄청난 인구 증가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국력과 무력의 절대 기초를 이루는 인구가 전한 때 360만명에서 후한 말기 630만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후한 말기 이후 군웅할거에 따른 전투 등으로 중국 전역에서 인구가 격심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형주 지역은 상대적으로 전투의 피해를 적게 입은데다 오히려 전란을 피해 들어온 이주민이 적지 않아 ‘형주 인구 600만명설’은 충분히 가능하다. 익주는 형주보다 더욱 전란의 피해가 적었고, 장기간 안정적으로 농업 발전이 이뤄졌기에 인구가 650만~700만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그러니까 형주·익주를 합쳐 1400만 선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정도면 형주 점령 직전 조조 세력의 관할 인구 2900만명의 절반에 육박한다. 여기에 손권 세력과 연합해서 동쪽과 서쪽에서 양면작전을 유효적절하게 구사한다면 한번 해볼 만한 쟁패전이 된다. 게다가 형주에서 한수를 넘어 신야-완을 거쳐 진격하면 중원의 심장이 바로 지척에 놓인다는 전략적 이점도 빼놓을 수 없다. 나아가 한나라 때부터 대규모 군수품 저장기지를 설치해온 형주와 익주에 당시 엄청난 군수물자가 비축돼 있었다는 점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제갈량의 위대성은 그 전략을 공식적으로 발안했다는 것 자체를 뛰어넘는다. 오히려 숱한 난관을 돌파하면서 이 계책을 현실로 만들어나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유비가 형주의 전격 점령을 채택하지 않은 상태에서 형주의 새 후계자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을 시작으로 삼분지계는 그 뒤 숱한 난관과 좌절을 극복해나가야 했다. 그 결과 제갈량이라는 걸출한 참모를 만났을 때 단 한치의 영토도 가지고 있지 못하던 유비는 삼분천하의 한 축을 장악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참모 하나의 능력으로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이다.

»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죽음을 맞는 유비. 이 자리에서 유비는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이 모자라다면 대신 황제에 오르라는 유언을 남긴다.

유비의 놀라운 유언

게다가 참모 제갈량은 천하삼분지계를 시작으로 맺어진 군신 관계를 죽을 때까지 멸사봉공의 자세로 지켜나간다. 유비는 죽어가며 공개적으로 이런 유언을 남긴다. “그대의 재능은 참칭자인 조비의 열배나 되오.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켜 대사를 반석 위에 놓아줄 것이 틀림없소. 만약 내 아들 유선에게 보좌할 만한 그런 재능이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오.” 이건 놀라운 유언이다. 그보다 700여년 전 춘추시대에 오나라 왕 합려에 이어 등극한 부차가 선왕과 자신의 등극을 위해 공헌한 오자서에게 나라를 쪼개주려고 한 적은 있지만, 왕이 진심으로 속마음으로부터 신하에게 아들 대신 즉위하라고 유언을 남긴 전례는 없다. 거기에 대해 정사 <삼국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제갈량, 울면서 ‘신은 고굉의 힘을 다하여 충절을 지켜나갈 것이며, 신이 뒤를 잇는 일 같은 것은 죽는 한이 있어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최고의 참모가 최고의 충신과 결합하고, 그리고 그들이 약소국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다가 쓰러지는 비극적 서사구조 앞에 숱한 동양권 민중들은 1800여년 동안 하염없는 슬픔과 함께 끝없는 사랑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답한다.

왜 제갈량은 유비를 주군으로 선택한 것일까? 당시 최대 세력 조조 역시 엄청난 열정으로 인재를 모으고 환대했으며, 손권 역시 인재 등용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제갈량 정도의 인재가 출사할 경우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 제갈량은 약소국 촉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발명에도 힘을 썼다. 촉에서 중원으로 나가는 좁고 험한 잔도에서 이용하기 위해 발명한 외바퀴 수송기구인 목우의 모습.
연구자들은 조조를 선택하지 않은 큰 이유 가운데 하나로 서주 태생인 제갈량이 소년 시절 조조군의 만행을 경험했으리라고 공통적으로 꼽는다. 조조의 아버지가 서주에서 서주군의 호위를 받고 이동하다가 갑자기 도적으로 돌변한 서주군에 의해 살해된 데 대한 보복전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이 때 조조는 대단히 비이성적으로 잔인한 살육과 파괴를 지시해 ‘수만명이 학살되고 그야말로 개 한 마리 살아남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아가 어느 정도의 부정을 용인하더라도 자유경제의 경쟁원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식의 조조(둔전제 실시 등)에 대해 제갈량 같은 정부개입주의자, 도덕적 명분론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손권의 경우도 인재는 두루 찾았지만, 이미 둔전의 일종인 부곡제의 세습화로 신참이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구조로 고착화해가고 있었다. 나아가 이미 천하삼분지계의 대구상을 가지고 있던 벤처형 참모 공명에게는 역시 조조나 손권과 같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벤처형 주군이 가장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왜 제갈량의 능력에도 촉나라의 천하통일은 실패한 것일까?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엄청난 국력의 격차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형주를 오나라에 빼앗긴 뒤 국력의 격차는 끔찍할 정도다. 위나라가 통칭 3천만을 넘는 인구를 장악한 반면, 촉나라는 그 5분의 1 선인 600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천하삼분지계에서 기본 전제로 확인된 오나라와의 동맹이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수차례 깨지면서 약소 2개국의 국력이 서로 약화돼갔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오촉동맹을 파괴하는 근본 동인은 형주를 둘러싼 오나라-촉나라 갈등에서 비롯됐지만, 그 구체적인 계기는 촉나라 황제 유비의 의형제 관우가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형주의 통치와 방어를 맡고 있던 그가 제갈량의 방략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위나라 정벌에 나서고 그 반대급부로 오나라로부터 배후 공격을 받아 형주를 빼앗긴 것이다. 관우 자신도 포로로 잡혀 죽는다.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비가 전군을 동원하다시피 해서 삼분지계의 가동을 위해 계속 동맹국으로 남겨두어야 할 오나라를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전쟁으로 두 나라는 국력이 크게 약화돼(유비와 장비가 이 소용돌이 속에서 잇따라 죽었다) 위나라와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게 된다.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죽었다?

제갈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근본적으로 인구와 국력의 격차가 심화되는 구조에 맞서 운명을 건 승부를 벌일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게다가 형주 없이 익주 하나로 통일전쟁의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남만의 오랑캐로 구성한 ‘비군’이나 서량의 기마병도 북벌에 동원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북벌에 나서면서도 항상 보급 문제로 골머리를 썩어 중원 아닌 훨씬 서쪽 농서지방의 농산물을 겨냥한 작전을 지속적으로 벌이기까지 한다. 따라서 출사표로 표현되는 5차례의 북벌은 영웅의 죽음으로 마감되는 ‘중국판 그리스 비극’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위나라에는 제갈량을 이길 수는 없어도 제갈량을 막을 수는 있는 사마의가 버티고 있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인 촉나라를 강화하기 위해, 이 촉나라가 옛 한나라의 수도 낙양을 수복하고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제갈량은 신상필벌의 엄격한 법치를 끝까지 관철했다. 인재가 부족한 촉나라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군령을 어긴 인재 마속을 벤 일(읍참마속·泣斬馬謖)은 이런 고뇌의 표현이다. 그가 국력 양성을 위해 얼마나 앞장서 근검절약을 했는지는 병이 깊어지면서 후주 유선에게 남긴 이런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지금 저에게는 성도에 뽕나무 팔백 그루가 있고 척박한 땅이나마 열다섯경이 있으니 자식의 의식을 해결하기에는 넉넉합니다. …제가 죽는 날 안팎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재물을 지니지 않게 함으로써 폐하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해주옵소서.”

오늘날 의학적으로 분석하면 제갈량의 죽음은 과로와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질병 때문이라는 견해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훗날 당나라의 시성 두보는 죽을 때까지 처절하게 살아야 했던 제갈량을 기려 이런 시를 남겼다.

삼고초려 이래 숱한 천하의 계책 내고
三顧頻繁天下計
양조 열어 빚 갚는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
兩朝開濟老臣心
출사해 이기지 못한 채 몸이 먼저 스러지니
出師未捷身先死
영원히 영웅의 눈물 옷깃 적시게 하누나
長使英雄淚滿襟


유비는 통일을 포기했나

»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촉동맹을 깨고 오나라를 침공한다.
삼국지 시대는 사실상 관우의 북벌로부터 제1차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그가 위나라 번성을 공격하면서 결국 오나라 여몽으로부터 불의의 기습을 당해 자신도 죽고 형주도 함락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형주를 둘러싼 오나라와 촉나라의 갈등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를 이어 유비가 곧바로 보복전쟁에 나서 오나라 정벌을 결행하면서 사태는 급변한다. 왜 유비는 제갈량의 반대를 무릅쓴 채 오나라와 전면전을 벌인 것일까? 과연 그는 승리를 확신했던 것일까?

이 의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전쟁을 결행한다는 것 자체가 천하통일을 포기하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유비의 결정은 이성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유비는 참모 제갈량의 진언을 대부분 다 수용한 데 반해 이 문제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 중요도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제갈량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비는 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관우와 장비 의형제 그룹과의 임협적 의리를 선택하고 말았다. 바꿔 말해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가 이성적 관계라면, 유비-관우-장비의 관계는 더 근원적인 감정적 관계였던 것이다.

유비는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을까? 개전 초기에는 현실로서는 확신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면서 차츰 승리를 확신한 성격이 짙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오나라를 가볍게 보다가 결국 육손의 계책에 말려 이릉전투에서 참패하는 재앙을 맞게 된다. 촉이 패배한 것과 관련해선 1) 전쟁을 이끈 장군들을 보면 오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장군들이 <삼국지> 오서에 나올 정도로 관록과 경험이 많은 데 반해 촉나라의 경우 마량, 황권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 2) 전쟁이 길어지면서 공격군의 예봉이 둔화되는 반면 수비군인 오나라의 저력이 차츰 발휘돼 역전에 이른 점 등을 들기도 한다.

형주의 상실과 이릉전투의 패전은 촉나라에 매우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했다. 무엇보다 엄청난 전력 손실을 가져왔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형주의 상실로 북벌을 위한 물적 구조의 안정적인 수급 시스템이 무너졌는가 하면, 북벌의 루트가 한중 한 곳으로 고정돼 길목 하나만을 지켜도 되는 위나라의 방어 전략에 끌려가는 식으로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나라와 촉나라가 이 전쟁에 투입한 모든 자원을 위나라에 대한 북벌에 집중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점을 종합할 때, 유비는 오나라와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사실상 천하통일을 포기한다는 각오까지 한 게 아닌가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 과정을 지켜보아야 했던 제갈량의 심정은 참으로 비통했을 것이다.

 

[석가] 경영학원론, 석가의 가르침!

‘주식회사 불교’는 어떻게 2600여년을 살아남아 세상에 널리 확산될 수 있었나

 

“이제 깨달은 자, 부처는 깨달음을 얻은 장소와 그 근처에서 7주를 보낸다. …선정과 명상 그리고 수행이 계속된다. 이 무렵 그는 한 가지 어려운 문제로 궁리를 거듭했다. 자신이 깨달은 바를 중생들에게 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그는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발견한 진리는 극히 난해해 보통의 이해력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법을 설교해주어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이 법은 부당하게 포기될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생각해서 설법을 단념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신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부탁한다.


» 석가의 고행 당시 모습을 그린 상. 고행 6년째로 피골이 상접해 있는 처절한 모습이다.
‘마의 군세를 쳐부수고, 그 마음은 월식을 벗어난 달과 같소. 자, 일어서시오. 지혜의 빛으로 어둠을 비춰주시오.’

‘성자여, 법을 설해주소서. 반드시 깨닫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마가다국에서는

때묻은 자들이

부정한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감로의 문을 열어주소서.

무구한 부처님의 법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소서.’

부처는 이제 연꽃이 가득한 연못을 본다. 어떤 연꽃은 물 속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어서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어떤 연꽃은 수면 위로 올라와 활짝 꽃을 피웠고, 어떤 연꽃은 수면 위로 올라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부처는 사람도 이 세 종류의 연꽃처럼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의 노예가 된 사람, 진리를 발견한 사람, 아직도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세 번째 부류, 그러니까 아직 갈 길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은 가르침이 필요한데, 이런 사람들이 세속에는 훨씬 더 많다. 이 사람들은 조금만 도움을 주면 구제될 수 있다. 부처는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법에 주력하기로 결심한다.”

부처, 설법을 단념하려 했던 갈림길

2600여년 전 세상 사람들은 아직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한 것도, 나아가 그가 자신들을 위한 설법을 단념하려고 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불교적 논법에 따르면, 인류는 자신들이 인식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의 한도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진리를 영원히 놓쳐버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었던 셈이다. 이때 내린 부처의 결심 하나가 결국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는다. 무엇보다 그가 ‘경영자’로 21세기의 인류를 다시 만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해 이 결심을 내렸다는 사실이야말로 부처가 얼마나 탁월한 경영자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적 경영의 논리로 표현하면 ‘아이디어를 아이디어 자체에 그치지 않은 채 사업으로 연결하고, 직접 경영을 통해 높은 수익을 올리는 회사’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 석가가 성불한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가장 유명한 불교 성지이다.
“4가지 종족이나 계급은 그 사람의 혈통이나 신분으로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누구든지 번뇌가 없어지고 청정한 계행을 성취해 생사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완전한 지혜를 얻어 해탈의 도를 이루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사성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남전 장부 사문과경>)

두 번째, 경영자로서 석가의 위대성은 그가 교단을 만들어서 운용했다는 데 있다. 특히 이 교단이 파격적으로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따른 차별을 무시하고 누구나 환영했으며, 여성도 받아들여 세계 종교로의 확장을 조직적 측면에서도 확실하게 뒷받침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맨 처음 석가의 설법을 듣고 출가한 첫 출가자인 야사스와 첫 재가신자가 된 야사스의 부모는 인도 사람도 아닌데다 카스트제도로는 평민인 바이샤 출신이었다. 나중에 석가의 수제자가 된 우팔리는 이발사였으며 하층 계급인 수드라 출신이었다. 나아가 석가는 자신을 길러준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프라자파티를 최초의 비구니로 교단에 받아들였다.

초기 석가의 설법 이후 불교에 귀의한 제자들과 신도들은 불교 공동체 ‘상가’(Sangha)의 구성원이 된다. 비구라는 출가한 남자 승려, 비구니라는 출가한 여자 승려, 그리고 우바새라는 출가하지 않은 남자 신도, 우바이라는 출가하지 않은 여자 신도의 4부대중(四部大衆)이 상가를 이룬다. 교단을 운용함으로써 불교는 석가의 입적 이후에도 하나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한 채 그 뒤 수천년을 헤쳐나가는 생명력의 추진 엔진을 가지게 된다. 이 교단이 중심을 이뤄 석가 입적 직후에 석가의 가르침을 하나로 모으고, 교단의 분열을 교정하기 위해 소집된 제1차 결집(고승들의 회의체)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결집은 다시 100년 뒤 제2차 결집으로, 다시 100여년 뒤 제3차 결집으로 이어지면서 불교경전의 성립과 교세의 확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다시 현대적 경영의 논리로 해석한다면, ‘주주총회와 이사회 등의 조직을 갖춘 주식회사로 발전시킴으로써 기업의 연속성과 확장성을 결정적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태주의 대안경제의 길을 제시하다

» 석가의 첫 설법인 초전법륜의 모습을 새긴 부조. 이 설법으로 부처는 포교자이자 경영자의 첫발을 내딛는다.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원한 없이 살아나가자. 괴로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우리들은 괴로워함 없이 살아나가자. 탐내는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탐냄이 없이 살아나가자.”(<법구경>)

세 번째 석가의 위대성은 평화주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석가는 교단과 세속의 영역을 구별했다. 교단이 세속의 권력을 추구하는 식의 신정일치는 제시하지 않았다. 나아가 세속 대중이 교단에 귀의하는 것도 설법 이후 자발적인 결단에 의존한 성격이 강하다. 일부 예외가 있다면, 아들인 라훌라를 출가시킨 것을 비롯해 가까운 친척들을 적극적으로 출가토록 한 것이다. 이와 함께 다른 종교도 배척하지 않았다. 석가는 입적을 얼마 앞두고 인도의 강대국 마가다국의 왕이 브리지족을 상대로 전쟁을 하려는 것을 막으려 설득한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7불쇠법’(七不衰法: 한 가지라도 지키면 망하지 않는다. 바꿔 말해 공격할 수 없다는 7개조의 기준임)을 밝히면서 종교적 관용의 정신을 천명한다. ‘안팎의 종묘와 각양각색의 종교를 존경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막으려 했고, 그 전쟁을 막는 논리적 근거로서 종교적 관용을 제시한 셈이다. 바로 이런 평화주의적 원칙이 없었더라면 그 뒤 2600여년을 거치며 불교가 살아남아 이처럼 세상에 널리 확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불교의 평화주의적, 무저항주의적 관점이 불교의 생명력의 토대를 이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성격을 현대 경영의 논리로 표현한다면, 독점을 추구하지 않는 등 기본적으로 독점 체제를 반대하고, 공정 경쟁의 룰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몸뚱이는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새가 있다. 공명조라는 새다. 한쪽 새가 독약을 먹자 온몸에 독이 퍼져 다른 한쪽 새도 함께 죽었다.”(<불본행집경>)

네 번째 위대성은 생태주의적 대안경제의 길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현대의 경제는 사실상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함축하고 있는 ‘사냥문화’의 속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세상을 ‘나 자신’과 ‘나 이외의 사물’로 구별한 다음 필요와 욕망의 매개에 따라 ‘나 이외의 사물‘을 나가서 잡아들이는 문화이다. 그 결과 현대는 갖가지 문제점에 봉착해 신음하고 있다. 성장의 부작용으로서 환경의 파괴, 사막화의 급격한 확산, 국가간·계급간·세대간 불균형의 확대, 전쟁과 불안정성의 증대 등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숱한 위기 징후가 포착된다.

이 과정에서 제시되는 대안경제 가운데 불교적 방식-불교의 길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생명과 생태에 대한 존중, 욕망의 절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동근동체로서 자타불이적(自他不二的) 관계로 파악된다. 이렇기 때문에 동체자비심으로 모든 생명체를 보호하고 구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은 단순한 생명존중이랄까 생태주의적 지향이라는 단계를 넘어 더 근본적으로 현대 인류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적극적 해결책으로서 진지하게 평가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현대 경영적 관점을 빌린다면, 불교는 자원의 유한성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전제로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모색하는 경제철학을 내세워 2600여년 만의 대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노사관계도 불교적으로!

» 석가 생존시 불교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빔비사라 왕의 석가 방문 모습 부조.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석가의 가르침-불교는 현재 경제 및 경영의 관점에서 다각도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독일의 E. F. 슈마허가 쓴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든가 일본의 이노우에 신이치가 쓴 <상생의 불교 경영학>이 대안경제로서 불교의 가능성을 점검하는 거시적 접근이라면, 게셰 마이클 로치의 <다이아먼드 커터>는 불교적 경영 마인드를 적용한 개별 기업에 관한 미시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츠 메트카프와 갤러거 해틀리가 같이 쓴 <부처는 직장에서 어떻게 할까?>는 경제 현장에서 부닥치는 여러 가지 딜레마에 대한 불교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고, 역시 메트카프가 쓴 <부처를 부르세요-끔찍한 상사, 교통지옥, 악몽 같은 배우자, 그 밖에 일상생활에서 고통스러운 것들에 대한 불교적 해법>은 더욱 확산시킨 일반론적 불교 처세술이라 할 만하다. 이 책들은 다 적지 않게 팔려나가 불교적 경영과 처세술의 위력을 과시했다. 이 가운데 특히 슈마허는 현대 산업문명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적정 규모의 절제 있는 소비로 인간의 만족을 극대화하자는 발상의 전환을 촉구해 크게 각광받은 바 있다.

생태적 접근방법과 함께 노사관계에서도 불교적 방식의 유용성을 새롭게 주목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육방예경>에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할 자세를 이렇게 기술해놓고 있다.

*고용인

1. 하인의 능력에 맞추어 업무를 맡겨라.

2. 보수를 넉넉하게 지급하라.

3. 하인이 병들었을 때 그들을 보살펴주어라.

4. 좋은 것을 하인과 나눠 가져라.

5. 정기적으로 휴가를 주어라.

*피고용인

1. 아침에 주인보다 먼저 일어나라.

2. 주인이 자기 전에 먼저 자지 말라.

3. 자신이 맡은 모든 일에 정직하라.

4.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라.

5. 주인의 좋은 명성을 손상시키지 말라.

비록 오늘날 이런 식의 고용-피고용 관계를 액면 그대로 상정하거나 실행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 불경에 나타난 상호관계의 정신은 눈여겨볼 만하다.

불교는 지난 2600여년을 이어온 더디지만 큰 발걸음처럼 새로운 울림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켄 블랜차드의 석가경영론

» 버마 셰다곤 파고다의 동승들.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로서 ‘켄 블랜차드 컴퍼니’(The Ken Blanchard Companies)의 회장이자 베스트셀러 저술가인 켄 블랜차드 교수는 경제 현장에서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석가의 가르침은 대단히 유용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세계 곳곳에 사무실이 포진돼 있는 자기 회사의 업무를 수행하며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강조한다. 그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기업을 경영하면서 경험적으로 깨달은 결론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한번 살펴보자.

“나는 켄 블랜차드 컴퍼니의 최고 정신지도자(Chief Spiritual Officer·참 재미있는 발상을 담은 직책이지 않은가?)로서 매일 아침 전세계 사무실에 음성 메시지를 발송한다. 우리 직원들이 최선을 다하며 우리의 사명과 가치를 잊지 않도록 격려하기 위해서다.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지에 흩어져 있는 280개가 넘는 사무실에 매일 인트라넷을 통해 이 메시지는 전달된다. 나는 예수의 제자로서 바로 그가 진리요, 길이라고 믿는다. 자연히 성서에 기록된 예수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곤 한다. 하지만 전세계 사무실에는 온갖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비롯해 종교 아닌 인간의 선의를 최고로 간주하는 이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만일 내가 기독교적 관점에서만 메시지를 작성한다고 낙인찍히면 결국 사람들이 보지도 않고 그 메시지를 삭제해버리는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예수 이외에 부처, 마호메트, 모세, 간디, 요가 철학자, 달라이 라마, 넬슨 만델라, 마틴 루서 킹, 함마슐트 등도 영감의 출처로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부처는 신도, 구세주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현명한 교사이자 심리학자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향해 기도를 올리지 말라고 했다. 그 대신 사람들을 자기의 예를 따라 해탈에 이르도록 초대한다. 그는 길을 가리키지만 길 그 자체는 아니다. …그의 가르침 가운데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은 특히 많은 도움을 준다. 부처의 영감과 말씀은 우리가 경제 현장에서 보다 친절하고 보다 고결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블랜차드의 고백은 (1)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도 다른 종교에 대해 대단히 포용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고 (2)불교적 관점이 현대 경제 현장에서도 유용성을 지닌다고 설파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블랜차드는 <겅호!-조직 인간 활성법>를 비롯해 <부자의 생각을 훔쳐라> <열광하는 팬> <1분경영>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등 경영 및 처세에 관한 많은 책을 썼으며, 이 책들은 전세계 25개 언어로 번역돼 출판됐다.

 

[마호메트] 마호메트가 당신 곁에 왔다

이슬람을 일으켰던 그의 세계사적 모래폭풍, 1400년을 지나 이제 한반도에 몰아닥친 것인가

» 마호메트.(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대제국 비잔틴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두 강대국이 각각 서쪽과 북쪽을 압박하고, 풍요한 중계무역의 혜택을 누리는 ‘아라비아 펠릭스’(행복한 아라비아)가 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 아랍인들은 아직 진이라는 정령과 수백이 넘는 우상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같은 일신교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민족으로서 통일된 정체성은 더더욱 갖지 못한 상태였다. 유목과 약탈을 통해 과격한 호전성과 빠른 기동력을 갖춘 그들은 탁월한 지도자도, 효율적인 정치 체제도 없이 그저 주변국가에게 ‘골치 아픈 침략자’ 정도로 취급받고 있었다.


메카인들의 반발을 진압하다

사막도 뜨겁게 달궈지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일까?

흩어진 모래알 같던 아랍인은 한 지도자를 만나자 세상을 뒤흔드는 강력한 모래폭풍으로 탈바꿈한다. 그들은 하나의 신 알라를 신봉하며 강력한 신정일치의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유일신과 무력을 결합한 새로운 집단은 곧바로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하고 중동 일대와 아프리카 북부, 유럽, 인도아 대륙과 중앙아시아로 진출해나갔다. 이 ‘신에게 복종하는 자’ 무슬림과 그들의 종교 이슬람교는 그 뒤 1400년 세계 역사를 바꿔버렸다. 21세기 들어 세계 인류 13억명이 신도라고 일컫는 이슬람교의 근원에는 창시자 모하메트(아랍어로는 무함마드)가 자리잡고 있다.

“서기 570년 무렵(일설에는 571년) 마호메트는 아라비아반도의 서부 상업도시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메카를 정복한 쿠라이시족의 지도자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6살 때 고아가 돼 할아버지와 삼촌의 손에 양육됐다. 자라서 무역일을 하던 그는 고용주로 자신보다 14살 정도 더 많은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명상생활’을 집중적으로 하게 된다. 40살 때 동굴 속에서 기도와 명상을 계속하던 그에게 ‘천사장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찾아온다. ‘코란’을 전송받는다.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가브리엘로부터 코란의 구절을 주기적으로 전해받았다고 한다.

» 마호메트의 기적 모습 그림.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왼쪽 얼굴 없는 사람이 마호메트이다(이슬람 미술에서 마호메트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금기시돼왔다).
마호메트는 처음 친척과 친구들에게 설교해 소수의 신도를 얻었다. 그러나 다신교를 믿던 대다수 쿠라이시 가문 사람들과 메카인들은 그의 메시지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메카인들의 압박과 살해 움직임이 계속됐다. 마호메트는 야스리브 사람들의 주선으로 서기 622년 메카를 탈출해 야스리브로 간다. 메카인 암살대를 피해 우여곡절 끝에 야스리브에 무사히 도착한 이 사건은 이후 ‘헤지라’(이주 또는 망명이라는 뜻)로 기록돼 이슬람교의 큰 전환점을 이룬다. 아울러 622년은 이슬람교 원년인 헤지라 원년이 된다. 이슬람교는 이 헤지라로 최초의 종교공동체(움마·ummah)를 갖추게 됐다. 나아가 마호메트는 ‘메디나의 헌장’을 채택해 공동체의 최종결정권을 장악했다. 강력한 신정일치 체제를 세운 것이다.

그 뒤 마호메트는 야스리브에서 새로이 ‘메디나’(예언자의 도시라는 뜻)로 이름을 바꾼 이 도시의 움마에 참여하고 있던 유대인 정주자 세력을 단계적으로 추방-배제하고 이슬람교의 아랍화를 강력하게 추진한다. 다른 한편으로 다신교인 메카 세력과 여러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여 승리하는 등 초기 이슬람 세력을 급속도로 팽창하는 데 성공한다. 헤지라 7년인 서기 628년 메디나의 이슬람 세력에 밀려 휴전에 동의했던 메카 세력은 2년 뒤 마호메트가 휴전을 깨고 1만명의 무장세력으로 진군해오자 그대로 항복한다. 메카에 들어간 마호메트는 다신교의 중심이던 카바(신의 처소라는 뜻)에서 유일신 알라를 상징하는 흑석만을 남긴 채 다른 우상의 상징물들을 다 없애버리는 정화 의식을 벌인다.

마호메트의 죽음, 그 뒤

메카 점령 뒤 이슬람 세력은 629년 비잔틴제국이 지배하던 시리아에 원정대를 보내는 등 세력 팽창에 진력한다. 곧이어 거의 모든 아랍 부족들이 움마의 구성원이 되겠다는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그러나 서기 632년 메카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온 마호메트는 갑자기 고열과 두통을 동반한 병에 걸려 죽고 만다.

» 예멘군을 공격하는 새의 그림. 새들이 메카를 공격하는 군대를 격퇴했다는 신화적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다.
마호메트가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은 채 갑자기 죽는 바람에 벌어진 이슬람교의 위기를 맞아 무슬림들은 고심 끝에 쿠라이시 부족 출신인 아부 바크르를 ‘칼리파’라는 직함을 가진 공동체의 ‘이맘’(예배인도자)으로 결정한다. 신권적 군주제를 채택한 것이다.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 세력을 다시 결속하기 위해 대외전쟁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이 전략은 절묘하게 성공한다. 양 강대국 비잔틴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서로 반목하고 견제하는 상황과, 무슬림의 기동성 높은 전투 능력이 결합해 군사적 승리를 잇따라 거둔 것이다. 그 결과 이슬람 세력은 채 30년도 안 되는 시기에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북아프리카, 호라산(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을 정복한다. 마호메트는 죽었어도 그 후계자들은 그가 남긴 강력한 정복국가적 신정일치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가동해 세계 역사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서기 610년 무렵 마호메트가 처음으로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교리를 따라 개종한 사람은 부인인 하디자와 두 양아들 알리와 제이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처음 메카 세력을 공격했을 때 무장병력의 규모는 수십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세력이 불과 30년밖에 안 되는 시간에 세상을 뒤흔들 만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우리는 가장 강성한 왕국, 막강한 힘, 엄청난 수의 백성을 거느리고 다른 국가들을 지배하고 있는 초강대국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에 맞섰다. 무기도 장비도 식량도 없이 맨몸으로 나가 맞서 싸웠다. 신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 우리가 그들의 나라를 정복해 그들의 땅과 집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게 허락해주셨다.”(후대의 한 이슬람 작가)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종교적으로는 가장 후발 종교라 할 수 있고, 군사적으로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무기 체계도 우세하지 않던 이 집단이 단기간에 가장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둔 원인은 무엇일까?

신정일치와 무력주의의 결합

마호메트의 성공 원인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일신교와 민족적 정체성의 통일 등 이론화 작업에서 성공했다

2. 신정일치 체제+무력주의=전면전 시스템의 완성

3. 종교공동체주의를 성장엔진으로 삼아 성공했다

4. 교리에 현세주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5. 물적 토대를 중시했다

첫 번째로, 이론화 작업을 보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마호메트의 지렛대가 종교이고, 종교는 본질적으로 메시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아라비아반도에선 곳곳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야훼(여호와)의 유대교를, 일부 아랍인들이 비잔틴제국의 영향으로 예수의 그리스도교를 확산하는 등 유일신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구약성경과 탈무드 등으로 이미 수천년 역사를 관통하는 종교적·역사적 이론작업을 완성해놓았다고 할 수 있는 유대교와, 세계제국 비잔틴의 문명을 뒤에 업는 등 앞서가는 그리스도교를 따라잡기 위해선 아라비아의 새 종교는 이론 면에서 발군의 비약이 필요했다.

» 아랍어로 마호메트라고 쓴 서체.
마호메트는 이미 다른 종교의 교리와 움직임에 누구보다 정통해 있었다. 대상이었던 그는 여러 종교와 접촉할 기회도 많았다. 결혼 뒤 부인 하디자의 조카로 학식이 높은 바라카를 통해 그가 시리아의 그리스도복음서를 히브리어와 아라비어로 옮긴 것이라든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일신론인 ‘하니프’를 접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그 결과 마호메트는 혈통적으로는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모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간주하는 아브라함(아랍어로는 이브라힘)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선조로 규정한다(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정실 부인 사라의 몸종 출신인 하갈이 낳은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이다). 교리적으로는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와 비슷하게 계시나 예언 그리고 유일신인 하나님(알라)을 채택한다. 자연스런 결과로,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등장하는 28명의 예언자 가운데 21명이 그리스도교의 예언자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리스도교 성경의 마리아가 신의 계시로 예수를 수태한 것을 인정하고, 예수도 예언자로 인정한다(그러나 그 신성(神性)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요소에 더해 마호메트는 새 종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극적으로 확립한다. 헤지라 3년인 서기 624년 바로 기도의 방향(키블라)을 예루살렘이 아닌 메카로 바꾼 것이다. 이슬람교를 교리상의 뿌리가 유사한 유대교의 아류가 아닌 아랍의 종교로서 정립한 것이다.

두 번째, 신정일치와 무력주의를 결합한 부분도 매우 중요하다. 뛰어난 비교종교 연구가의 자질을 갖춘 것으로 추정되는 마호메트는 신정일치의 특장점도 잘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의 경우 역사상 신정일치의 시기를 넘어 왕정의 형태를 유지하다 멸망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나아가 신정일치 체제에 최초로 무력 해결 방식까지 도입한다. 아라비아반도 유목민의 약탈 전통에서 비롯된 이 방식은 애초 메디나로 망명한 마호메트 세력의 생존을 위해 채택한 뒤 종교적 독트린으로까지 발전해나갔다. 그 결과 호전적 유목민이 종교적 열정을 안고 싸우는 강력한 군사집단으로 변모한 것이다.

생계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주는 시스템

세 번째, 종교공동체주의를 성장엔진으로 삼았다는 부분은 다른 일반적인 제국과 비교할 경우 훨씬 그 효과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종교공동체인 움마는 급속도로 다른 모든 기존 조직을 해체하고 종교의 우산 아래 기존의 역량을 재결집했다. 이제 아랍인들은 그 혈통을 떠나, 그 계급을 떠나 이슬람의 깃발 아래 단결해나간다. 움마는 정복전쟁의 경제적 이익을 분점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군대의 병력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른 제국의 팽창 과정을 보면 기존 세력과의 연대나 견제가 불가피해 성장 속도가 느린 사례가 얼마나 많았던가?

» 7세기 양피지에 고대 아라비아 문자로 쓴 코란.
네 번째, 이슬람의 현세주의적 요소는 다른 세계 종교와 상당히 구별된다. 사후의 심판에 대해 규정한 부분은 대단히 놀라울 정도이다. “죄가 없는 자는 천국에 가고, 거기서 생전에는 얻지 못했던 것, 즉 나무 그늘이나 시원한 동산, 맑은 물, 훌륭한 음식, 빛나는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 등을 얻게 된다.”

어느 종교도 이처럼 사후의 보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현세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이와 함께 일부다처제 등의 요소는 확실히 다른 문명권으로부터 비판받는 요소이다. 그러나 내부 신자들에게는 더 실질적이고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보상 체계를 제시해 이슬람교가 일정 정도 ‘현세적 경쟁력’을 갖추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물적 토대의 요소를 보자.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의 5가지 의무인 ‘오행’ 가운데 법적 의무로 보시라는 뜻의 ‘자카’는 이슬람 세력의 강대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자카의 목적이 바로 ‘메디나의 무슬림을 먹여 살리고 강군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세금을 내는 것’이다. 강력한 군대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서기 626년부터 도입된 ‘지지아’라고 불리는 새 인두세 역시 그런 목적으로 시작됐다. 10세기에 성립한 <리잘라>라는 규범집은 이슬람교의 물질주의적 관점을 잘 보여준다. 이른바 ‘지하드’(성전)가 끝나고 전리품을 나누는 방식을 참가자의 종류, 성격, 계급 등에 따라 대단히 자세하게 분류돼 있다. 사원이든 군대든 이슬람에 복무할 경우 그 생계는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시스템을 지향한 것이다. 어느 누가 용감히 싸우지 않겠는가?

이슬람은 본질적으로 호전적인가

9·11 테러를 계기로 한국은 이라크 파병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내 김선일씨 살해사건까지 경험하는 등 이슬람 세력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경착륙적인 충돌 국면으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이런 문명론적인 성격과 별도로 한국의 현재 경제-기술적 성격은 불가피하게 중동의 에너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구조에 고착돼 있다. 인류의 문명론적 충돌이 한국의 경제-기술적 생존을 위협하는 극도로 불안정한 국면으로 들어선 것이다.

이슬람은 과연 본질적으로 테러 등 호전성을 안고 있는 것일까?

한국은 과연 무력을 피한 채 에너지 생존전략을 평화적으로 펴나갈 수 있을까?

마호메트가 일으킨 모래폭풍은 1400년을 지나 이제 한반도에까지 밀어닥쳤다.

 

[이라크1-테러리즘] 디지털 하이테크형 테러 시대!

한명의 테러리스트가 수백만을 타격하고 수십억명을 놀래는 점점 더 무서운 세상이 다가온다

 

“마르코 폴로는 1295년 머나먼 동방 여행으로부터 돌아와 심혈을 기울여 책을 구술해나갔다. ‘…페르시아에 거주하는 이 장로의 이름은 알로아딘으로 사람들로부터 예언가로 불렸다. 산꼭대기의 성채에 살고 있던 그는 매우 부유해 협곡 전체를 거대한 정원으로 아름답게 꾸며놓고 있었다. 정자나 전각이 즐비하게 늘어서고 나무에는 온갖 열매가 가지가 휘어지도록 달려 있었다. 시내에는 물뿐만 아니라 포도주와 우유도 흐르고, 정자에는 아름다운 무희들이 살고 있었다. 예언자 마호메트가 약속한 파라다이스 그 자체이다. …산의 장로는 누군가를 제거할 필요를 느끼면 추종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 실행을 명령하고 대가로 파라다이스에서의 영원한 삶을 약속했다. 추종자는 목숨을 버리고라도 주저 없이 그 명령을 실행했다. 파라다이스가 어떤 것인지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우선 암살 예비군을 마약으로 잠재우고 정원으로 데려다놓는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면 아름다운 무희가 그를 둘러싸고… 음식이나 포도주를 권하며 몸을 맡긴다. …며칠이 지나면 다시 그 사나이는 마약으로 잠재워져서 성채로 운반된다. 한번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자기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다시 그 파라다이스를 제 것으로 하고 싶어서 애태운다.’ …마르코 폴로는 이 암살 예비군을 ‘아시신’이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전한다.”


» 터키인 3명을 살해 위협하는 ‘유일신과 성전’의 무장세력들. 김선일씨 등의 납치 살해로 이름을 알린 ‘유일신과 성전’은 현대 미디어 문명을 고도로 활용하는 수법을 구사하고 있다.(사진/ AP연합)

1천년 전부터 존재했던 암살대

“1981년 10월6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제4차 중동전쟁 개전 8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가 벌어지고 있을 때 일단의 무장 군인들이 귀빈석에서 참관하고 있던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자동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사다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암살됐다. 당시 사다트는 전격적으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이스라엘의 국가를 인정하는 등 현실주의적 정책을 취해 이슬람 과격파의 표적이 돼 있었다. …자신들을 ‘알 지하드’(성전) 소속이라고 밝힌 군인 등 암살 조직원 24명은 한달 보름 뒤 열린 최고군사법원 재판정에 들어서자 일제히 외치기 시작했다. ‘알라 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주모자 가운데 하나인 이슬람블리 중위는 붉은 표지의 코란을 흔들며 외쳤다. ‘우리는 파라오를 죽였다. 우리는 사다트를 죽였다. …그를 죽인 게 우리는 자랑스럽다. 그것은 종교적 대의를 위해서다. 이슬람법과 모순되는 이집트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에겐 죄가 없다.’ 대부분 암살 관련자를 총살형·교수형·종신형으로 처벌했지만, ‘알 지하드’라는 이름은 이후 중동 역사에 그 실체를 명확하게 기록한다.”

“마침내 2002년 9월11일, 저 유명한 오사마 빈 라덴이 주도하는 항공기를 이용한 동시다발 테러가 미국의 세계무역기구 건물과 국방부 건물을 대상으로 벌어져 전세계를 뒤흔든다.”

»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급진파 테러를 세계화 · 하이테크화해서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사진/ AP연합)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처음으로 이슬람 암살대의 존재를 전했을 때 유럽인들은 믿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라며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암살대는 지금으로부터 1천년 전쯤 실제로 존재했으며, 모든 것이 진실이었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 장로의 이름은 하산 빈 사바로 이란 엘부르즈산맥에 ‘알라무트’라는 성채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암살 예비군의 이름 아사신은 이제 암살자를 의미하는 ‘assassin’으로 웹스터사전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나아가 아사신은 대마를 뜻하는 ‘하시시’가 어원으로서, 암살 예비군들이 실제로 하시시를 코로 마시고 감각이 마비된 상태에서 죽이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도 확인되고 있다.

1천년 역사를 헤아리는 이슬람 암살대의 존재는 이제 한 나라 대통령의 암살은 물론 초강대국의 심장부를 겨냥해 대형 테러를 동시다발적으로 벌이는 양상으로까지 발전했다. 나아가 컴퓨터로 운영되는 거대 시스템을 겨냥한 하이테크 테러로 최대의 효과를 노릴 수 있는데다, 첨단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세계 인류에게 디지털 속도로 그 테러의 목표와 효과를 선전하는 것도 가능한 디지털 하이테크형 테러 시대로 돌입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21세기형 테러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규모와 발상의 세계화

2. 기술적 측면에서 디지털 하이테크화

3 .대상의 무차별화

4. 본격적 전쟁 수행 수단으로 변화

5. 문명전쟁 양상에 따라 이슬람 세력의 전면화

6. 전통적 테러와 하이테크 테러를 수시로 오가는 탄력적인 활용 양상

7. 선전효과의 극대화에 주력

오사마 빈 라덴과 ‘듀아’

이런 21세기형 테러의 특징을 모두 관철하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오사마 빈 라덴이다(‘오사마’라는 이름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신뢰하던 한 유능한 장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002년 9·11 테러로 세상에 확실하게 그 존재를 각인시킨 오사마 빈 라덴은 현재 이라크 전쟁의 후폭풍으로 벌어지는 이라크 반미항전 세력의 테러에 이르기까지 이슬람권에서 벌어지는 테러의 정신적 대부로 군림하고 있다.

테러를 통한 지하드를 주장하는 오사마 빈 라덴의 전략은 1998년 2월20일 발표된 ‘아잠기구’의 ‘듀아’와 그대로 맥을 같이한다. 아잠기구는 아프가니스탄과 보스니아 지역 이슬람주의 전사들의 모태로서 서구로 이민한 이슬람교도 공동체 안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지주 역할을 해오고 있다. 듀아는 이슬람의 부름에 신자들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기도이자 강론으로서, 전세계 이슬람교도들이 금요기도회에서 이를 낭독한다. 아잠기구의 이 듀아는 서구에 대한 총력적인 지하드가 이슬람주의 지도자들로부터 합법성과 권위를 인정받게 됐다고 선언했다.

» 9·11 테러는 테러리즘의 규모와 성격을 전지구화 · 하이테크놀로지화 · 무차별화의 단계로 진입했음을 세상에 선언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오, 알라여! 전세계에 퍼져 있는 중요하고 전략적이고 막강한 영향력을 갖춘 이슬람교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으시어, 그것이 컴퓨터 지식이든 금융에 관한 능력이든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전세계의 적들에게 보복을 가하도록 하소서!”

“오, 알라여! 이 보복을 통해 빈 라덴과 아라비아만 출신의 용감한 전사들이 페르시아만 국가에 있는 외국 군대에 타격을 가할 수 있도록 이끌소서!”

“오, 알라여! 침략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파괴되고 혼란에 빠지게 하시어 그들이 옛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큰 손실을 입혀 걸프전이 무의미함을 느끼도록 하소서!”

테러는 역사적으로 약자가 사용하던 투쟁 형태 중 하나였다. 현재 중동 지역의 이슬람권에서 특히 테러리즘이 극도로 활성화된 이유 역시 역사적인 배경에서 비롯된다. 멀리는 우마이야조와 압바스조의 세속적인 칼리프 권력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투쟁에서부터, 가깝게는 걸프전쟁과 이라크 전쟁의 경험에 이르기까지 거대 파워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특히 18세기 이후 서구와의 관계에서 본격적으로 세력 균형의 역전을 경험하면서 이슬람권의 이런 절망적 상황은 거의 2세기 넘게 지속되고 있는데다, 무장력과 국력의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지는 양상으로 치닫았던 것이다. 이와 함께 상대적으로 이슬람권의 민주화와 경제 성장이 진전되지 않아 내부적 모순과 빈부 격차가 심화되면서 잠재적 폭발성을 더욱 높인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슬람의 성직자와 학자, 지식인들은 점차 현실을 변혁하는 길로서 이슬람적 가치관의 급진적 적용과 확산에 몰입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79년 성공한 이란혁명은 이런 이슬람권에 새로운 희망과 복음으로 작용했다. 세속주의와 서구화를 모두 거부하고, 현세에서도 ‘신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암살은 바로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졌다. 실제로 알 지하드는 사다트 암살과 함께 봉기를 일으켜 이집트에 이란 회교공화국과 같은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지상에서 이슬람 대의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 테러와 무장봉기, 식량폭동, 여객기 납치 등도 모두 신의 뜻을 지상에서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첨단 기술과 미디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는 이란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이 본격적으로 중동 사태에 개입하고 걸프전쟁을 계기로 이슬람 중심부에 더 깊숙이 진입하는 데 대한 반발이자 대항전쟁의 성격을 띤다. 이런 정치군사적 맥락과 함께 현재 진전되고 있는 세계화와 첨단기술, 매스미디어 등 갖가지 요소가 결합해 복합적인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테러가 전쟁의 한 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정착하는 흐름은 대단히 위험하고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점점 빨라지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맞물려 전쟁 수단으로 변화하는 테러는 인류의 안정적인 평화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듯한 기세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과거 기관총과 수류탄 따위로 무장하던 테러리스트들은 이제 발칸포, 대전차로켓포, 대전차미사일, 휴대용 대항미사일, 박격포, 컴퍼지션 시리즈의 플라스틱 폭탄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종래와 달리 집단이 아니라 소수, 그것도 개인이 이런 무기류를 동원해 테러에 나서는 것이 가능한 시대로 돌입했다. 무엇보다 이런 첨단 무기류로 무장한 개인 테러리스트들이 필요에 따라 전통적인 목적테러에 나서거나, 현대적 양상이라 할 수 있는 군중 잠입형 돌발테러를 감행하는 다각-복합-속도 테러의 국면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핵무기를 비롯해 화학무기, 세균무기 등 다량살상 무기를 테러집단이 입수하고 장악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은 상황도 주목해야 한다. 총력전의 관점에서 본다면, 단 한명의 테러리스트가 수십·수백만명을 대상으로 ‘전쟁’을 벌이고 그 선전효과를 한꺼번에 수십억명에게 전파할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서구 지지 국가 향한 세균테러도 가능

이슬람 급진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테러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봇물 터진 듯 세력을 확산하고 있다. 이 사태는 단순히 누가 현재의 상황에서 승리하느냐의 문제를 넘어섰다. 이슬람권의 미래 방향을 극단론으로 밀고 가는 식으로 이미 결론나지 않았는가 하는 우려를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급진파의 승리는 중·장기적으로 (그들 내부의 논리를 따른다면) 엄혹한 상황을 극복하고 최후의 승리를 이룩한 대지하드로서 자리매김하게 돼, 이슬람권의 미래 지표 설정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칠 것이 확실하다. 단기적으로는 급진파들은 승리를 위해 그 어떤 수단도, 대상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테러를 무제한적으로 동원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특히 비아랍권-서구세력 지지 국가에 대한 세균무기류의 극악한 테러도 논리적으로나 정황적으로 가능하다. 무서운 시대는 끝내 오고 말 것인가?


마호메트가 본 테러리즘

» 마호메트는 적어도 같은 유일신을 신봉하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를 적대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 이슬람 급진파의 시각과 전혀 다르다.
마호메트는 어느 의미에선 테러리즘의 ‘피해자’였다고 할 수 있다. 헤지라 원년인 서기 622년 그가 비밀리에 메카를 탈출해 메디나에 이주한 것도 메카 세력의 암살 위협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청부살인자 그룹의 위협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부족 전체의 암살 결의가 떨어져 있었다. 마호메트가 이슬람을 확산시키면서 무력주의를 채택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의 무력주의는 전투 또는 전쟁의 개념에 가깝지 ‘무차별 테러’라든가 ‘전쟁 수단으로서 테러’라는 관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는 정식으로 전투를 벌이고 공개적으로 전쟁을 수행했지, 대항 논리로서 암살 등 테러적 행위에 의존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전쟁에서 이긴 뒤에도 과거의 적에 대해 상당한 관용을 베푼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메카를 점령한 뒤 수없이 여러 번 암살자를 고용하고 스스로 마호메트 자신을 노렸던 사프완도 용서했으며, 이슬람교도들의 귀나 코, 혀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춤을 추는 등 끔찍한 이슬람교 탄압에 앞장섰던 힌트라는 여장부도 사면하는 등 숱한 관용을 보여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대 이슬람 급진파들이 극도로 적대시하고 있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에 대해 마호메트는 생전에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우선 마호메트는 우상숭배자와 달리 유대교도와 그리스도교도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메디나의 헌장’에 따르면 유대교도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우리와 동맹하는 유대교도는 우리의 원조나 보호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그들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되고, 그들에게 칼을 드는 자를 지원해서는 안 된다. 살인은 반좌법에 의해 처벌된다.”

마호메트는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틴제국과 전쟁을 벌이곤 했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해 대단히 우호적인 정책을 유지한 성격이 강하다. 그가 쓴 서한은 그리스도교도의 권리와 의무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그들의 손에 있는 모든 것, 교회, 예배당, 수도원은 그들에게 귀속된다. …그들의 권리, 권한에 어떠한 변경도 가해지지 않는다. 그들이 진지하게 처신하고 그들의 의무에 충실히 행동하는 한, 신과 그 사도의 보호는 보증된다. 그들은 박해에 굴복하지도 않으며, 박해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마호메트는 그리스도교 순교도시인 네주란의 사절단이 메디나에 와서 미사를 올릴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요청하자, 메디나의 모스크를 빌려주기도 했다. 마호메트가 현대에 다시 와 이슬람 급진파의 테러를 본다면 대단히 놀랄 것임에 틀림없다.

 

[이라크2-종교전쟁] “신이시여, 저들을 죽이소서”

종교적 편견 속에 정교 분리 원칙마저 깨버린 미국과의 동맹으로 우리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이집트) 사람이요, 이름이 하갈이라.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해…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도망하였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만나 가로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네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나서서 베르셰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물이 다한지라 모자가 마주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하갈이 샘물을 보았더라.”(<구약성서> 창세기 16장, 21장)


»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랍인 조상 하갈과 이스마엘의 고난 모습. 유대인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사라에게 쫓겨난 모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물을 발견해 살아난다.

‘하나님’으로부터 갈라진 세개의 종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이자 뿌리가 유대- 기독교라는 이유로 증오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사탄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나의 하나님은 그들의 신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며… 부시 대통령은 유권자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임명받았다. 나는 군대의 상관으로부터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는다.”(윌리엄 보이킨 미 국방부 정보담당 부차관)

마호메트가 <코란>을 구술할 때 아랍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신의 언약을 받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는 인식이 암묵적으로 퍼져 있었다. 마호메트는 이 암묵적인 인식을 교리로 발전시켜 ‘문자’로 표현해 이슬람 경전을 완성해낸 셈이다. 유대인이 기록한 구약의 창세기를 계속해서 따라가보면 이스마엘은 자라서 광야에 살며 활 쏘는 자가 된다. 그리고 바란 광야에 살 때 애굽 땅 여인과 결혼하게 한다. 아브라함이 죽자 이스마엘은 사라에게서 낳은 이복동생 이삭과 함께 아비를 헤브론에 장사지냈다. 나중에 아브라함의 손자가 역시 아브라함의 손녀이기도 한 이스마엘의 딸과 결혼하는 등 이스마엘과 그 후손의 역사적 혈통의 실체는 유대인의 기록인 구약에서도 확립돼 있다.

유대교는 구약을 근거로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정실 사라의 계보를 따라 독점적인 언약의 민족을 이룬다고 ‘직렬적 정통성’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 이슬람교는 역시 이 구약을 바탕으로 ‘하나님’라든가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언약받은 민족으로서 아랍인의 정체성을 제시하는 ‘병렬적 정통성’을 주장한다. 이와 별도로 유대교의 폐쇄적 성격을 깨고 새로운 세계종교의 지평을 연 그리스도교도 주역으로 등장해 중동 지역의 복잡다기한 종교 구조를 획정하고 있다. ‘하나의 하나님’으로부터 ‘세개의 종교’가 갈라진 것이다.

역사에서 이 갈라진 종교는 다시 여러 요인에 따라 자기분열을 계속한다. 먼저 그리스도교는 가톨릭과 그리스정교로 갈라진 뒤 근세에 이르러 새로이 개신교가 생겨난다. 비록 개신교는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세력을 얻을 수 없었지만, 현재 다시 여러 종파로 갈라진 채 이 지역에 재상륙하고 있다. 후발 주자인 이슬람교 역시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라진다. 유대교는 서기 70년 무렵 로마에 대한 반란의 실패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겨나거나 흩어진 유대인이 1900여년 뒤 다시 이 지역으로 무더기로 몰려오면서 새로운 종교지도의 한 축을 형성한다. 이런 종교상의 분열 양상이 오늘날 중동을 전쟁의 불길 속으로 밀어넣는 제1요인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종교는 단순히 갈라진 채 수동적으로 놓여 있는 경우란 좀처럼 없다. 자기 논리(또는 교리)에 따라 외부적으로 능동적인 대립과 갈등의 주체로 기능하면서 다시 내부적으로 자기분열도 멈추지 않는다. 그 결과 중동 지역은 그 어떤 지역보다 더 첨예하게 모든 종교와 종파가 자기 이외의 모든 종교와 종파와 대립하는 양상을 보인다.

» 서기 680년 벌어진 카르발라의 비극. 마호메트의 손자이자 사위인 알 후사인 알리가 이곳에서 피살되면서 이슬람교는 그를 추종하는 시아파와 반대세력인 수니파로 갈리게 된다.

»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해방시키기 위해 출발했지만, 전과가 없자 엉뚱하게도 동방정교회의 중심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미국의 정체성은 ‘유대-기독교’일까

종교적 대립 양상에 더해 2차적으로 민족적·정치적 요인이 결합해 상황을 훨씬 폭발적으로 만들고 있다. 이라크만을 예로 들더라도, 민족적으로 다수파인 아랍 민족을 비롯해 쿠르드인, 터키계인 투르크멘, 이란계 페르시아인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다, 다시 정치적으로는 이슬람 급진파부터 세속주의적 바트주의 정치 노선, 서구형 민주주의파 등 잠재적 갈등요인이 적잖게 내재해 있다.

이해하기 쉽게 이 도식을 단계화해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1단계: 유대교 vs 이슬람교

2단계: 유대교 초정통파 vs 이슬람 시아파

3단계: 유대교 초정통파 정착촌 건설론자 vs 이슬람 시아파 급진 테러리스트

현재 이라크전은 미군의 침입과 진주에 따라 자주 대 외세라는 1차적 모순을 전면화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 변화에 따라 종교적·민족적 정치 체제의 요소가 언제든지 1차 모순을 대체하는 더 폭발적인 단계로 진입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중동의 종교가 늘 서로를 적대시하고 상대를 박멸 대상으로 보았던 것은 아니다. 역사를 보면 서로 공존하고 평화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이 엄청나게 많다.

» 부시 미국 대통령. 부시는 완고한 근본주의 기독교로서 이슬람에 대한 미국의 공세를 주도하고 있다.(사진/ AFP연합)
서기 30년 무렵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은 중동 지역의 종교지도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순교는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중동 및 유럽 확산을 결정지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유대인에 대한 적대심을 높여주었다. 이 반유대인 감정(anti-semitism)에 따라 유대인들은 중동 지역과 유럽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 유대인은 이슬람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나은 입지를 확보한다. 이슬람교 국가가 유대인을 ‘책을 가진 백성’으로서 관대한 대우를 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초기 마호메트가 유일신을 같이 섬긴다는 배경에서 유대교도와 그리스도교도에 다른 종교에 비해 특혜적 대우를 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윌리엄 보이킨 미 국방차관의 논리는 현재 미국 지배세력의 인식과 전략이 얼마나 이라크의 역사적·실체적 진실과 동떨어졌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보이킨은 기술적으로 교묘하게 미국의 정체성을 ‘유대-기독교’로 규정하고 있다. 속임수로 논리 비약을 꾀하는 것이다. 둘째, 그는 이라크의 후세인 체제는 물론 이라크 전체 민중까지도 급진파로 규정해 적대적 공격을 합리화하려 한다. 셋째, 정교 분리 원칙을 깨버리고 있다. 무엇보다 이슬람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조차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왜곡하고 있다.

종교전쟁 주재하는 신의 진정한 뜻은?

이런 점을 종합할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가설이 가능해진다.

1. 이런 발언이 나온 시점이 2003년 10월이라는 점에서 그 의도는 이라크 전쟁 자체의 승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2004년 대선을 겨냥하고 있다.

2. 더 본질적으로 이라크 전쟁을 벌인 미국의 목적이 더 근원적인 것, 즉 이라크 나아가 중동 지역의 원유 자원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겨냥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뤄지는 한국군의 추가 파병은 결국 한국이라는 시스템을 중동발 종교전쟁과 중동발 테러리즘의 사정권 안에 직접적으로 밀어넣고 있다. 미국과의 동맹적 행동 통일을 선택한 뒤 우리에게 밀어닥칠 대가가 무엇인지 그 실체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의 선택이 과연 옳은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이미 실효 없는 논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우리의 생존 기반으로서 ‘에너지 라인’이 너무나 길고 험난한 곳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써 그것을 잊고 행복한 과거만이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낙관론은 종교전쟁이라는 대양에 침몰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총과 무기를 든다. 자신이 죽이려는 자도 자신과 같은 뿌리를 가진 신에게 기도드리는 데도 처참한 죽음을 향한 행진은 멈추지 않는다. 이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전쟁을 주재하시는 신의 진정한 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성서와 코란은 어떻게 기록됐나

종교와 문자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주요 종교는 모두 문자를 전제로 한 경전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어느 의미에선 오직 종교나 문자를 가진 집단만이 역사의 주도권을 갖거나 장기간 생존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논지도 설득력을 갖는다. 종교와 문자는 민족의 생존을 위한 ‘와룡’이나 ‘봉추’인 셈이다.

» 예루살렘 ‘통곡의 벽’을 모세 5경(토라)의 두루마리를 들고 행진하는 유대인들.
유대교는 천지를 창조한 조물주인 야훼(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유대인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유대교는 모세가 썼다는 모세 5경(구약성서 가운데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의 다섯 율법서)을 히브리어로 기록해 전승해오고 있다. 이 히브리어로 쓴 성서의 존재와 전승이 유대인과 유대교의 생존을 가능케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히브리어로 된 유대인의 성서는 기원전 25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에 의해 당시의 국제어이던 그리스어로 번역됐다. 이것을 보통 ‘70인역’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전세계에 퍼져 있는 회당인 시나고그(synagogue)를 중심으로 히브리어로 된 토라(모세 5경)를 읽고 기도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해나간다. 민족적으로나 혈통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을 수천년 세월 동안 그들의 정체성을 하나로 확립해준 것은 바로 이 히브리어의 토라인 것이다.

나아가 초기 이슬람교의 확산 시기 중동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코란이 시기적으로 자신들의 경전보다 훨씬 늦게 나온데다, 내용상으로도 자신들의 경전에 상당 부분 의존했다는 점에서 평가절하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입장이 두 종교간의 화해에 적잖은 부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교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을 그대로 채용하고, 다시 예수 이후의 신약을 헬라어라고 불리는 그리스어로 기록했다. 이 통용 그리스어는 고전 그리스어가 아니라 당시 일반인들이 상거래 등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던 언어 문자다. 유대인 출신으로 신약의 절대 분량을 기록한 바울이 유대인의 문자인 히브리어가 아닌 당시 세계어인 그리스어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세계종교로의 비상이 가능했다는 측면도 강하다. 만일 이 신약을 히브리어로 기록했다면 그리스도교의 세계화는 결정적으로 제약받았으리라는 가정도 가능하다. 어느 의미에선 그리스어로 기록했다는 사실 자체가 보편종교, 세계종교로의 강렬한 의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교는 코란을 통해 종교적 교리를 확립하면서 동시에 이 문자(언어)를 만들고 쓰는 민족인 아랍인의 정체성도 강화할 수 있었다. 코란은 그 원래 뜻인 ‘읽다’ ‘읊다’에서 알 수 있듯이,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마호메트에게 온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읽거나 읊은 것이라는 데서 나왔다. 114장 6천절로 신약성서의 약 5분의 4 정도 되는 분량의 내용을, 그것도 매우 시적으로 아름다운 말로 읊은 뒤 마호메트 사후 20년 뒤에 기록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코란은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똑같은 자손으로 인식하면서도 유대인과 달리 유일신도, 그 유일신을 담은 자기 말로 된 경전도 갖지 못한 아랍인에게 ‘기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아가 코란의 권위는 코란 자체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종교보다 신도들에게 더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