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박석무의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_03

醉月 2009. 11. 29. 13:04
망국에 단식 자살로 항거한 이만도上
국치 앞에 목숨을 끊어 절의를 지키다
퇴계의 도학(道學)에 이만도의 절의(節義)
1910년, 500년의 조선왕조가 망하여 일본에 합병되자, 의혈(義血)의 조선 선비들이 곳곳에서 목숨을 끊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참을 수 없는 자신의 분노를 땅 속에 묻어야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세 분을 꼽는다면 경상도 출신의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 : 1842~1910), 전라도 출신의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 충청도 출신의 일완 홍범식(一阮 洪範植 : 1871~1910 : 벽초 홍명희의 부친)이다. 이만도는 69세, 황현은 56세, 홍범식은 40세에 전화나 휴대폰으로 연락할 수도 없을 때, 약속이나 한 듯이 단식으로, 독약으로, 목매달아서 목숨을 끊어 핏빛 의혼을 청사에 길이 휘날리게 했다.

향산고택의 전경. <사진작가 황헌만>

매섭고 무서운 선비들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자신이 끊는다는 ‘자결’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살고 싶은 마음이야 인간의 본능이고,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싫은 일이던가. 그래도 그들은 인간의 보통 마음을 뛰어넘어 나라를 빼앗겨 망했다는 분노와 울분 때문에, 사람이라면 모두가 넘기 어려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위대하고 성스러운 독한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고 말았다. 장하고 대단하며 무서운 일이다.

황현은 미미한 가문의 출신으로 뛰어난 시재(詩才)와 문장으로 겨우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에 그치고 벼슬에도 오르지 못한 전라도 구례의 꼿꼿한 선비였지만, 이만도와 홍범식은 명문대가의 후예로 그야말로 기득권층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풍산홍씨로 벌열의 집안에서 태어난 홍범식은 충청도 괴산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음직(蔭職)으로 금산군수(錦山郡守)로 재직하다가 합병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이만도는 경상도 안동 출신으로 세상에서 유명한 퇴계 이황의 11세 후손이었다. 대대로 학문과 벼슬로 이름이 높았지만, 할아버지·아버지와 함께 3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린 기득권층인 데다 자신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더욱 혁혁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이들이 모든 명예와 기득권을 통째로 버리고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죽음을 스스로 택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만도가 세상을 떠나자 호남 장성의 대학자이자 한말의 의병장이던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 1846~1916)은 이만도의 ‘묘갈명’(墓碣銘)에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우리 조선이 한창 융성하자 퇴계 선생께서 도학(道學)으로써 한 차례 문명(文明)의 운세를 열어 다스려지게 하더니, 국가가 망하자 향산 선생이 절의(節義)로써 만세토록 내려오는 강상(綱常)의 중요함을 붙드셨다. 대체로 도학과 절의는 다른 길이면서도 하나로 모아지고, 일이야 다르지만 공로는 한 가지여서 하늘과 땅 사이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조선왕조는 유교국가였다. 유교의 가장 큰 덕목은 도학과 절의이다. 퇴계는 성리학이라는 도학으로 조선왕조 철학의 근간을 세워 나라 융성의 기틀을 세웠고 향산은 유교의 다른 덕목의 하나인 절의를 몸으로 실천하여 조선의 혼을 천하에 떨쳤으니 역사적 임무를 그 집안에서 완성했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이만도의 가계
이만도의 자는 관필(觀必), 호가 향산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의 직계 후손이니 조선왕조 유학의 최고봉 집안에서 태어났다. 퇴계 가문의 학문이야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대대로 벼슬길도 끊이지 않아 높은 명성을 얻은 집안이니 특권층이자 기득권층 출신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만도의 고조할아버지 이세사(李世師)는 문과에 급제한 학자·관인(官人)이었고, 증조부 이귀서(李龜書)도 학문이 높아 여러 벼슬이 내려졌으나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던 학자였다. 이른바 3대 문과 집안이라고 일컬어지는 가계는 조부 때부터 시작된다.

할아버지 이가순(李家淳)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에 이른 문신으로 하계(霞溪)라는 호로 널리 알려진 분이며, 아버지 이휘준(李彙濬)도 호가 복재(復齋)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오른 명망 높은 선비였다. 거기다가 자신이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니 가문의 융성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그냥 알아볼 수 있다. 퇴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나 시례(詩禮)의 유풍을 흠뻑 적시며 살았던 이만도는 바로 자기 아버지의 뜻 깊은 교훈을 잊지 않고 살았으니 가문의 유풍은 한 인간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25세인 1866년 이만도가 문과에 장원하자, 아버지 복재공은, “선비가 벼슬에 나가면 태평한 시대에야 임금을 도와 백성들에게 혜택을 끼쳐야 하지만,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는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니 너는 힘쓸지어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이런 가문의 가르침은 끝내 그를 역사적 인물에 오르게 했다.

이만도의 가계는 분명히 특권층이었다. 그러한 계층에 속하면서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초개처럼 목숨까지 버렸다는 점에서 그의 인품과 덕행이 더욱 고결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귀족에게 부하된 높은 의무, 그런 책임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런 책임을 완수했던 점에서 그의 영광된 삶을 예찬하게 된다. 나라가 망하자 높은 신분과 귀한 집안에서는 일본에 아부하고 협력하며 그들에게 동화되는 일에 앞장서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적은 수효지만,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생명까지 바친 사람이 있었던 것은, 그래도 의리를 숭상하던 유교정신이 길러준 민족혼의 긍정적 측면이었다. 이만도의 후손들이 보여준 독립운동의 혁혁한 역할에서도 그의 가계는 대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벼슬살이
이만도는 25세에 장원급제한 이래, 명문의 후예라야만 가능한 여러 청직(淸職)을 거치며 많은 벼슬을 역임한다. 성균관의 전적(典籍),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명예로운 옥당벼슬인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오른다.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임금에게 곧은 진언(進言)을 하기 시작하자 대신들의 칭찬이 자자했고, 국가의 장래와 미래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밝힐 때에는 모두가 옛날 대신(大臣)의 풍모가 있다는 격려를 받았었다. 옥당에 들어간 이후에는 교리·부교리·장령을 역임했고, 지평·병조좌랑·응교·부응교·사간원 집의·성균관 사성·장악원정 등의 여러 버슬을 두루 역임했다. 그 뒤 고향에서 가까운 양산군(梁山郡)의 군수로 발령 받아 부모님 봉양에 편하도록 조치해주었으니, ‘이양산(李梁山)’이라는 호칭은 그래서 얻게 되었다.

41세이던 1882년에는 통정대부의 위계에 올라 공조참의·동부승지라는 당상관에 제수되었다. 그때는 벌써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던 때로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곧장 고향으로 내려와 책을 읽고 뜻을 구하며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42세 때에도 연달아 동부승지의 제수(除授)가 있었지만 전혀 응하지 않고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후학들과의 강학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43세에 비로소 ‘주서절요’(朱書節要)를 읽었다는 연보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그 무렵부터 주자학과 성리학 연구에 침잠했음을 알게 된다. 그 무렵 당대의 학자이던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등과도 학문토론을 시작했고 많은 글을 짓고 학자들과의 교류를 확대하며 수양과 학문 연마에 정열을 바쳤다.

1895년 향산은 54세였다. 이 해는 기울던 나라에 흉측한 참변이 일어났으니 명성황후 민비의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의분을 견디지 못한 향산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대를 쳐부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도모를 시도하면서 참았으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부끄러움을 이기느라 통곡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64세의 1905년에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죽어야 한다는 뜻을 더욱 굳혔다. 나라가 망하던 무렵에 옛 신하들에게 의미 없는 벼슬 위계만 높여서 내렸으니 1907년에는 가선대부, 1909년인 68세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위계에 올랐으나 일절 받지도 않았고 사용하지도 않았다. 당상관인 동부승지가 마지막 벼슬이었고, 제대로 행한 벼슬은 양산군수가 마지막이어서 세상에서는 전라도의 홍금산(洪錦山 : 금산군수 홍범식-그때 금산군은 전라도 소속이었음), 경상도의 이양산(양산군수 이만도)을 망국에 절사한 의인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마침내 경술년의 국치(國恥)
향산은 융희 4년인 1910년, 69세의 노인이 되었다. 망국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있던 그 시절, 마음을 안정하지 못한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생활을 했다. 그 전해에 광덕(廣德)으로 이사 가서 살던 향산은 다시 명동(明洞)으로 옮겼으며, 다시 사동(思洞)으로 옮겼다가 또 명동으로, 광덕에서 백동(栢洞)으로 옮겨 살았다. 그해 음력으로 7월25일(양력 8월29일) 나라가 일본에 합방되어 고종황제는 덕수궁왕(德壽宮王)이 되고 융희황제는 창덕궁왕(昌德宮王)으로 강등되어 나라 없는 백성들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깊은 산속 마을에 숨어서 살던 이만도는 음력 8월1일에야 친구들인 유필영(由必永)·권재훈(權載勳) 등이 찾아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죽는 일 아니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이만도는 부모님 묘소에 올라가 통곡하는 일만 계속했다. 14일 동안 통곡으로 보내다가 음력 8월14일부터 음식을 끊고 부모님 묘소에 올라가 통곡한 뒤, 안동 예안군의 청구리(靑丘里) 율리(栗里) 마을 재종손(再從孫) 이강흠(李綱欽)의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망국에 단식 자살로 항거한 이만도下

“나는 당당한 조선의 관리다 왜경이 어찌 나를 위협하느냐”
청구유허비문
이만도가 청구리 율리 마을에서 음력 8월14일에서 9월8일까지 24일간 단식하다 마침내 운명한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재종손 이강흠의 집이다. 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 신하가 어떻게 자신의 집에서 편히 죽어갈 수 있느냐고 여기면서, 모든 선산을 찾아가 통곡하면서 이곳저곳의 거친 야외만 찾아다니다가 끝내는 죽을 장소를 청구의 율리 마을로 정하였다. 이만도의 의혼을 기리기 위해 우리가 찾아간 그곳에는 참으로 초라한 비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이름 하여 ‘청구유허비’(靑丘遺墟碑)였다. 빗돌을 살펴보니 위당 정인보가 글을 짓고 백범 김구가 앞 비문을 쓴 민족의 보물이었다.

향산의 유적지에는 청구비와 묘소와 고택만이 남아 있다. 청구유허비(왼쪽)는 위당 정인보가 글을 짓고 백범 김구가 글씨를 썼다. 사진작가 황헌만

“경술(1910)의 국치에 앞전의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였던 향산 이만도공이 합방소식을 듣자 조상의 묘소에서 통곡하며 하직하고는 먹지 않고 24일이나 줄곧 지내다가 돌아가셨는데 여기가 그 장소다. 그해(1910)는 공의 나이 69세였다. 음력 7월 병인(25)일에 나라가 망했으나 공은 외진 곳에 살고 있어 음력 8월1일에야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아파 살고 싶지 않았다. 을유(14)일에 아침을 들지 않고 집에서 나가, 재종손 강흠(綱欽)의 초가집에 이르자 밥이 들어오기에 물리치라고 명하였다. 아침에도 밥이 들어오자 또 그랬다.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뜻을 결정했다고 일렀다. 아우와 아들이 달려와 울어대자,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울지 마라’하고는 돌아가기를 권하면서, ‘우리 임금님은 갈 곳이 없으신데 어떻게 차마 집에서 거처하겠느냐’고 하였다. 선비나 벗들이 찾아와 안부를 물으며 의(義)를 지키려고 그러느냐고 말하면, 처량한 모습으로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했다. 을사(9월5일)일에 왜인 경찰관이 와서 이유를 물었다. 그런 뒤에는 곁의 사람에게 미음을 가져오게 하여 주사기로 입에 넣으려 했다. 공이 박차고 일어나 큰 소리로 꾸짖으니 목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모두 낯빛이 변해서 달아나 버렸다. 그 후 4일 뒤에야 눈을 감으니 바로 9월8일 무신일이었다. 이강흠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자 초가집은 무너졌다. 왜가 패한 3년 만에 손자 이동흠(李棟欽)이 표석(表石) 세우기를 도모하기에 정인보가 삼가 그에 관한 일을 기록하였다. 생각컨대 빗돌이 서게 되면 이 장소도 유명해질 것이다. 그러니 이 장소에 대하여 자세하게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삼가 이어서 적는다. 이곳은 예안의 청구촌인데 작은 마을로는 율리(栗里)다. 마을 앞에는 산이 있으니 문산(文山)이다. 위당 정인보가 삼가 지음.”

조선의 마지막 학자이자 문장가이던 위당 정인보의 글맛이 제대로 나타나 있는 짧고도 내용이 넉넉한 글이다. 앞면의 큰 글씨는 애국자 백범 김구의 글씨이다. 위당의 글에 백범의 글씨라면 이 나라의 국보가 되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이 빗돌의 주인공은 민족의 의혼(義魂), 향산 이만도가 아닌가.

향산 고택, 안동시 안막리
오래 전부터 안동을 가면 찾아가던 곳이 시내 안막리에 있는 ‘향산고택’이다. 본디는 퇴계의 묘소에서 가까운 하계(下溪) 마을이 진성이씨 집성촌이자 향산 이만도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았던 마을이다. 그곳에 있는 향산의 고택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마을이 온통 수몰되자 집을 통째로 옮겨 안동시 안막리에 다시 세웠다.

3대 문과에 3대 독립운동가라는 세상에 드문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이 거기에 덩실하게 자리 잡고 있다. 유림정신이 강하고 유교문화의 맥을 그런대로 지키고 있다는 안동의 오늘은 그 향산고택을 말하지 않고는 논할 수 없다.

해마다 40~50명의 전국 선비들이 모여 퇴계의 학문을 논하고 향산의 의혼을 말하면서 향산고택의 향기는 온 나라로 퍼져나간다. 필자도 오래 전부터 ‘향산고택을 출입하는 사람들’ 모임에 가담하여 그곳을 출입한 지 오래다.

물속에 잠긴 옛날의 터전이야 찾을 길 없고, 이제는 향산의 유적지라고는 ‘청구비’와 ‘묘소’와 고택이 있을 뿐이다. 비록 퇴락한 옛날의 기와집이지만, 방에 들어가면 이가순·이휘준·이만도 3대 문과급제 교지(敎旨)가 복사되어 벽에 붙어 있고, 이만도와 그의 아들 이중업(李中業), 그의 손자 이동흠(李棟欽) 3대 독립운동가 서훈장이 복사되어 전시돼 있다. 나라를 잃자 분통을 이기지 못하는 애국심으로 24일간 단식으로 자결한 애국자·독립운동가 이만도,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파리장서 등 온갖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이중업, 왜정 때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를 치른 이동흠, 이들 3대는 물론이려니와 이중업의 부인 김씨, 둘째 아들 이종흠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 집안에서 배출되었다. 퇴계와 향산으로 이어진 성리학적 의리개념과 애국심이 그러한 가문을 이루었을 것이다.

청구일기
세상에 이런 희한한 일기도 있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을 방도를 찾느라 10여일을 배회하다가, 마침내 단식으로 결정하고 죽을 장소까지 집이 아닌 외딴 곳으로 정하고 나서, 이만도는 음식을 끊었다. 시작한 날에서 목숨을 거둔 날까지 24일간, 죽어가는 기록, 죽음의 일기를 ‘청구일기’(靑丘日記)라는 이름으로 남겼다. 죽어간 그 장소가 청구리였기에 붙인 이름이다. 원문이야 휘둘러 쓴 초서가 많아 읽기도 쉽지 않았는데, 최근에 안동의 한국학진흥원에서 탈초하여 번역까지 마쳐 ‘향산전서’(響山全書)로 간행하였기에 아무나 읽고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몇 대목을 간추려 읽어보자. 운명하기 직전의 이만도는 자신의 일생을 간단하게 회고하였다.

“나는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을미(1895)년 국모시해 사건에 한 차례 죽지 못했고, 을사(1905)보호조약 때 두 번째로 죽지 못했다. 산으로 들어가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했던 것은 오히려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이제는 희망이 이미 끊어졌다. 죽지 않고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나라에 위기가 다가올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였으나 가느다란 희망으로 때를 기다렸건만, 끝내 그런 희망이 끊기자, 그는 결연히 자결을 택해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는 길을 가고야 말았다.

정인보의 비문에도 이미 언급되어 있지만, 망국에 항거하여 자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왜의 경찰당국은 매우 긴장하고 자주 찾아와 동태를 살피면서 예의주시하였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방문객이 찾아와 격려하고 위로하던 중이어서 왜경은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단식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아차린 왜경은 마침내 이만도에게 강제급식을 통해 자결을 방지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운명하기 3일 전인 음력 8월5일의 기록이다.

“예안 주재 왜경 한 사람과 수비병 세 명, 순검 세 명이 와서 위협하고 공갈하는 것이 전보다 더했다. 그러고는 ‘영감님께서 정신을 수습할 수 있겠소?’라고 말하였다. 모시는 사람이 ‘정신은 이미 수습하기 어렵소’라고 하였다. 왜경이 ‘정신이 있을 때 권해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면 정신이 없을 때 모시는 사람들이 음식을 왜 올리지 않는가?’라고 하고는 ‘속히 미음을 가져오라. 내가 당장 주사기로 강제로 음식을 먹여야겠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 곧바로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는 내 명대로 자진하고자 하거늘 지금 너희들은 나를 빨리 죽이고 싶어하는가? 내 빨리 죽고 싶으니 즉시 총포로 나를 죽여라’고 하였다. 이에 창문을 열고 가슴을 내보이면서 계속하여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일본인이 드디어 당황하여 황급히 문을 닫고 피했다. ‘상부의 명령이지 우리가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물러갔다. 선생은 계속하여 소리지르며, “‘나는 당당한 조선의 정이품 관리다.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설득한다는 것이고,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위협하는 것이냐. 너는 도대체 어떤 놈이냐?’라고 다그쳤다”라는 대목이 있다.

강제급식에 항거하여 죽는 순간에도 조선 선비의 의혼을 통쾌하게 외치던 향산의 목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지면서, 조선의 독립과 해방의 종소리는 먼 데서 들려오기 시작했었다. 이런 의인이 바로 향산 이만도다.

마지막 유시(遺詩)
가슴 속의 피 다하니
이 마음 다시 허하고 밝아지네 此心更虛明
내일이면 깃털이 돋아나 明日生羽翰
옥경에 올라가 소요하리라 逍遙上玉京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가슴에 피가 마르니 마음이 더 허하고 밝아진다니 얼마나 투철한 정신인가. 오히려 죽어가면 날개를 달고 옥황상제가 있는 하늘로 올라가 즐겁게 거닐겠다니 이 얼마나 뜨거운 의혼인가. 호생오사(好生惡死)! 사는 것은 좋고 죽기는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보통 마음, 어찌하여 그렇게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대의를 찾아 당당하게 떠날 수 있었을까. 대단하다.

이만도의 ‘묘갈명’을 지은 호남의 학자이자 의병장이던 기우만은 “회고해보건대, 나야 구차스럽게 목숨을 훔쳐서 사는 사람, 향산공께서 마땅히 가볍고 천하게 여길 사람인데, 그분을 평가하는 일대기를 짓는 일까지 맡다니 홀로 마음 속에 부끄러움이 없을쏘냐”라고 말하여 죽지 못한 사람의 수치심을 토로하였다. 어디 그것이 기우만만의 부끄러움이겠는가. 못 죽은 모든 인간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기우만은 명문(銘文)의 마지막에서, “뒷날 죽는 사람들 / 그 묘소 곁에 묻히고 싶으리”(他日有死 願埋其側)라고 읊어서 향산 이만도의 묘소 곁에 묻히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글을 마쳤다.
애국지사 황현(黃玹)의 詩心과 의혼上
“망국에 한 사람도 자결않는다면 되겠는가”

문장으로 유명한 사람이 태어난다던 곳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石沙里)의 서석(西石)마을은 지리산 줄기의 문덕봉(文德峯) 아래에 자리잡은 아늑한 마을이다. 그곳은 예전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인물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 전설을 사실로 증명해 줄 때가 왔으니, 1855년 음력 12월11일 그 마을에서 매천 황현(梅泉 黃玹·1855~1910)의 탄생이 바로 그 때였다.

광양시 석사리의 매천이 태어난 집. <사진작가 | 황헌만>

황현은 조선왕조 최후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장가이며, 나라가 망하는 비참한 때를 맞아 선비로서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고 말았던 탁월한 애국지사였다.

산과 들에 봄꽃이 가득하고 온갖 수목에 새잎이 돋아나 천지가 가장 아름다운 봄날, 봄의 햇살을 가득 안으며 우리 일행은 매천 황현의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섬진강의 굽이굽이에 은어가 뛰놀고, 한창 참게가 커가며 미식가들에게 구미를 돋우는 4월의 하순, 강변의 꽃길을 돌고 돌아 석사리의 서석마을, 초가지붕으로 새롭게 단장해 복원된 매천의 생가에 이른 때는 오전 10시가 다되어 찬란하게 햇살이 비추던 시각이었다.

필자는 20년 전인 겨울에 최초로 그곳을 찾았었는데, 그때는 매천이 태어난 안채는 없어지고 사랑채 한 칸이 겨우 남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최근에 시청에서 제대로 복원하여 덩실한 매천의 생가가 우람하게 서 있으니 얼마나 다행하고 기분이 좋은가. 더구나 초가집의 원형대로 다시 세웠으니 더욱 보기에도 좋았다.

‘매천황현선생 생가’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기둥에는 주련까지 새겨 걸어서 운치가 더욱 빛났다. 기분이 좋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큰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부터 골목마다에 간판을 세워 매천의 생가를 자세히 가리켜주어 찾아가기도 쉬웠으니, 잘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일은 그런 데서도 돋보이기만 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뒷산의 황씨 선산 매천의 묘소를 찾아가는 데도, 곳곳에 안내 푯말을 세워 찾기가 쉽기만 했으니 얼마나 친절한 행정인가.

매천이 누구인가
매천의 절명시 4수(친필). <사진작가 | 황헌만>
뛰어난 시인이던 매천은 당대의 훌륭한 역사가였다. 한말 최고의 역사책인 ‘매천야록’은 매천의 높은 사안(史眼)과 통찰력 때문에 최근 세사의 연구에 높은 평가를 받는 저술인데, 그 역사책에는 황현 자신의 약전(略傳)이 실려 있어 간단하게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대한(大韓)은 망하고 전 진사(進士) 황현은 독약을 마시고 죽다. 현의 자는 운경(雲卿), 그의 선대는 장수인(長水人)이다. 임진왜란 때 충청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무인공 진(進)의 후손으로 호가 매천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슬기가 있었으며 노사 기정진(奇正鎭)을 찾아뵙자 선생이 기특하게 여겨주었다. 어른이 되자 서울로 올라가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 등과 좋은 벗으로 사귀었다. 34세 때인 고종황제 무자(戊子·1888)년에 진사가 되었다. 담론을 잘하고 기절(奇節)을 좋아했으나, 세상이 잘되어갈 수 없음을 알고서 고향집으로 돌아와 시와 글에 자기의 뜻을 맡겨 훌륭한 작품을 지어냈으며,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융희 4년 8월3일 합병령을 군청에서 마을까지 반포하자 그날 밤에 아편을 마시고 다음 날에 목숨이 끊어졌다. 유시(遺詩) 4수를 남겼다”라는 이 처절한 기록이 ‘매천야록’의 맨 끝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유시 4수를 그대로 옮겨놓았다.

매천은 세종 때의 명정승 황희의 후손이지만 임진왜란 때의 이름난 장수 황진의 10대 후손이었다. 진주성 싸움에서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 장수의 의혼이 매천의 피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망국의 소식을 듣자 비탄에 빠진 선비 황현은 참다운 선비가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처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선비정신은 제대로 살리기만 하면 그렇게 멋있구나 하는 본질을 보여준 자결이 바로 매천의 죽음이었다.

그의 짤막한 유서(遺書)는 떨리는 손으로 쓰여졌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아래로 평소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지어다”라는 유서는 비장하기보다는 오히려 담담한 선비의 일상적인 담론으로 느끼게 해준다.

충(忠)이 아니라 인(仁)을 이룸이다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유시에서 같은 뜻을 밝히고 있다.
큰 집을 지탱함에 서까래 반쪽의 공도 없었으니 曾無支厦半椽功
다만 인을 이루려 함이지 충은 아니라네 只是成仁不是忠
겨우 윤곡(尹穀)을 쫓는 데에 그쳤을 뿐이니 止竟僅能進尹穀
당시의 진동(陳東)의 행동 실천 못함 부끄러워라 當時愧不陳東

이렇게 읊어서 죽는 이유를 또 설명했다. 나라에 벼슬하여 정치에 관여한 일도 없고 녹을 받아 생활한 적도 없으니 나라에 충성하려는 생각보다는 인간된 도리, 선비된 도리를 이루려는 인(仁)을 실현하려는 뜻에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북송 때의 진동처럼 간신들을 처단하자는 독한 상소를 올려 죽음당한 일을 못하고, 겨우 남송 때의 윤곡처럼 나라의 망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나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고 한탄하는 대목에서 그의 의기는 더욱 굳세게 보였다.

새나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오 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우리나라 이미 망했구려 槿花世界已沈淪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 역사 회고하니 秋燈掩卷懷千古
글자나 아는 사람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難作人間識字人

이 절명시는 글자나 아는 사람, 즉 지식인의 책무가 얼마나 무겁다는 것을 통절히 읊어준 시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역사의식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가는 일반인들처럼 글을 몰랐다면 왜 죽을 이유가 있겠는가.

옛 성현들의 글을 읽어 인생이 무엇이고 역사와 세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지식인이기 때문에, 나라가 위기를 당해서 괴롭고 아프다는 내용이 가슴을 떨리게 해주고 있다.

4대의 무덤이 있는 매천의 묘소
매천의 절명시(絶命詩)를 읊으며 생가를 등지고 마을 뒷산 아래의 황씨의 선산을 찾았다. 매천의 선대는 본디 남원에서 세거하였다. 매천의 할아버지 직()이라는 분이 광양으로 내려와 석사리에 자리 잡고 살면서 가세를 일으켰는데, 선산의 맨 위에 있는 무덤이 바로 할아버지의 묘소였다. 그 묘소 아래 오른쪽의 묘소가 매천의 아버지 황시묵(黃時默)의 묘소이고 왼쪽이 ‘애국지사 황현의 묘’라는 초라한 비가 서있는 매천의 묘소다. 아버지 묘소에서 더 아래쪽 오른편의 묘소가 매천의 큰아들 황암현(黃巖顯)의 묘소였다. 이렇게 4대의 묘소가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고, 그 아래에는 문중의 제각(祭閣)이 서있었다.

위인의 묘소라서 반드시 웅장하고 근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애국지사라는 빗돌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게 매천의 묘소는 정말로 초라했다. 내년이면 거기 묻힌 지 100년째, 그 다음해인 2010년이면 매천 서세 100주년이 된다. 그런 무서운 의혼과 시심이 묻혀 있는 무덤이 꼭 그렇게 보잘 것 없어야 하는지는 모두가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생가를 볼품 있게 복원하여 의젓하게 보여주는 정신으로 묘소에 대한 무엇인가가 거론되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망국에 자결한 의인 중의 최고 문학가
망국 무렵의 큰학자 박문호(朴文鎬)는 ‘매천황공묘표’라는 이름의 매천의 일대기를 담담한 표현으로 서술하였다. 평생토록 매천과 가장 친했던 동지이자 문우였던 창강 김택영은 ‘본전(本傳)’이라는 이름으로 매천의 역사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 글의 끝부분에서 창강은 당시 나라가 망하자 의분에 못 이겨 자결한 당대의 의인을 모두 열거하였다. 조선에 선비의 혼이 살아있고, 애국심을 지닌 투철한 의혼의 인물이 즐비했음을 알리는 뜻이기도 했다.

금산군수 홍범식, 판서 김석진, 참판 이만도, 참판 장태수, 정언(正言) 정재진, 승지 이재윤, 의관 송익면, 감역 김지수, 무인 전주의 정동식, 유생 연산 이학순, 전의 오강표, 홍주 이근주, 태인 김영상, 공주 조장하 및 환관 반씨 성을 가진 사람 등 15인을 열거하고는 그중에서 매천이 문학가로서는 가장 저명했던 분이라고 했다.

이런 의인들에 대하여 역사는 너무 무정하다. 홍범식·이만도·김석진·황현 등은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세상에 이름이 전하지만 대부분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결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500년의 조선이 선비를 기른 유교 국가였는데, 겨우 그만한 분들만이 망국에 즈음하여 목숨을 끊었던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그만한 의인들이 그렇게 역사에 묻히고 마는 일은 더욱 서럽다. 탁월한 시인, 희대의 애국자가 묻혀 있는 쓸쓸한 묘소를 떠나오며 동행했던 순천대 조원래 교수도 그 점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애국지사 황현(黃玹)의 詩心과 의혼 下
광양에서 구례로
매천 황현은 29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시골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내려지자, 청운의 뜻을 버리고 하향하여 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오던 광양의 석사리를 떠나 이웃고을인 구례로 옮겨 살았다. 지리산의 지맥인 백운산 아래 만수동(萬壽洞)이었는데, 지금의 행정구역은 구례군 간전면 효동 양천리에 해당되는 곳이다. 싸리문을 굳게 닫고 출세는 포기하고, 숨어살면서 학문에 전념키로 했었다. 그곳에 구안실(苟安室)이라는 서재를 짓고 연구와 강학에 열중하면서 기울어가는 나라 걱정에 마음을 놓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나 부모님의 간절한 요구를 저버리지 못해, 다시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하였다. 34세인 고종 25년 마침내 생원시에 장원하여 진사(進士)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부정부패가 연이어지고 탐관오리들이 세상을 농락하던 시절, 나라꼴을 더 이상 볼 수 없자, 마침내 모든 희망을 접고 구례로 낙향하고 말았다. 학문을 닦고 학동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모든 정력을 바쳤다. 1898년 평생의 동지이자 문우였던 이건창이 세상을 떠나자 600리 먼 길을 걸어서 강화도의 이건창 빈소를 찾아 조문하는 의리를 지켰다.



다시 월곡(月谷)으로 옮기다
만수동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월곡으로 이사하여 영주할 뜻을 굳혔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라는 마을이다. 1905년 51세의 매천은 을사늑약의 비통한 현실을 당하자, ‘문변3수(聞變三首)’라는 시를 지어 망해가는 나라의 서러움과 울분을 토하고,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매국노를 성토하고 애국지사들을 애도하였다. “을사년 10월 변란(을사늑약)에 조병세(趙秉世) 정승 등 3공(조병세·민영환·홍만식)이 자결하였다. 내가 그 소식을 듣고 사모의 정을 느껴 두보(杜甫)의 8애시를 모방하여 시를 지었다”라고 설명하고 세 분 이외에 면암 최익현과 영재 이건창 두 분을 포함하고는, 아직 살아는 있으나 앞으로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을 예상하여 최익현은 포함시키고,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이건창은 현재에 인물이 없어 추모의 뜻으로 그분을 넣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5애시’만 보아도 그가 벌써부터 자결의 뜻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을사늑약 이후인 1906년에 면암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패전하고 몸은 대마도에 구속되었고, 끝내는 단식으로 왜와 싸우다가 순절하였으니, 매천은 이미 최익현의 죽음까지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 무렵 평생 동지이자 문우였던 창강 김택영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나라의 독립을 위한 계책을 세우자, 이건창도 없이 혼자 고향에 칩거하던 매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찢어지는 가슴을 달래고 어떻게 해야 선비로서의 마지막을 제대로 정리할까 궁리하면서 우울한 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효효병()에 뜻을 의탁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숭상하는 유교정신으로 다듬어진 선비로서, 실질적으로 국권을 상실한 을사늑약 이후의 대한제국, 나라는 망했다고 여기면서 삶을 마무리할 생각에 골똘하였다. 천고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귀감이 될 만한 역사적 인물들을 찾아내, 그들이 살았던 길을 걸으며 선비의 도를 지킬 것만 마음에 두었다. 난세에 몸을 깨끗이 하고 의인의 지조를 지켰던 중국역사상 10명을 찾아냈으니 다름 아닌 매복(梅福)·관영(管寧)·도잠(陶潛)·고염무(顧炎武) 등이었다. 그들의 행적과 형상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그림마다 시를 한수씩 지어서 열 폭 병풍을 만들어 거실에 비치해두었다. 병풍의 이름을 ‘효효병’이라 짓고, 제자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의 글씨와 그림으로 제작하여 지금까지 전해지니 보물로서의 가치도 높다.

매천사(梅泉祠)를 찾아서
구례의 4월은 영산홍의 계절이다. 매천의 영혼을 모시고 그의 고매한 충절을 기리는 사당, 매천사를 찾아가는 길은 앞뒤 좌우가 모두 꽃으로 덮여 있었다. 하필이면 이 시절에 논에는 그렇게도 자운영꽃이 만발했는지. 모처럼 구경하는 자운영 논에서 옛날의 추억이 새로웠다. 광의면 수월리, 월곡이라는 마을은 매천이 48세에서 56세까지 생애를 정리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다. 20년 전에 찾아왔을 때에도 초옥의 허름한 사랑채가 남아있었다. 그 사랑채의 왼쪽 방이 매천이 거처하던 서실로, 바로 그곳이 매천이 운명했던 방이었다.

이제 옛날의 상랑채는 허물어 없어지고 새로 덩실하게 기와집으로 복원하였다. 다만 터가 좁아 4칸이던 집은 3칸으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니 그것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절명시 4수를 짓고, 유서를 쓰고, 아편을 먹고 운명했던 그 방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지 않음은 너무도 마음 아팠다. 그러나 ‘매천사’라는 현판을 달고 단청도 찬란하고 의젓하게 서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매천황현선생신위’라는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매천의 영정이 당대 화가 채용신의 솜씨로 그려져, 그대로 보관되어 있으니 매천의 매서운 눈빛과 얼굴 모습에 경배를 올리면서 마음이 으슥해졌다. 매천사 경내를 둘러보니 그런 대로 매천의 혼과 뜻이 느껴졌다. 매화가 꽃은 졌으나 잎이 파래서 매천의 혼이 느껴졌고, 동백이나 소나무 등 곧고 바른 뜻의 수목이 고르게 배치된 것도 매천의 정서를 느끼게 했다.

구례군 광의면 매천의 신주를 모신 사당 매천사의 전경과 매천사 안에 걸려있는 매천의 영정(오른쪽 위). | 사진작가 황헌만


시대를 통찰했던 지식인
매천의 막역한 지기이고 특출한 시인이자 문인이며 역사가였던 김택영은 매천의 본전(本傳)에서 이렇게 썼다. “… 기개가 오올하여 남에게 굽히려 하지 않았다. 교만하거나 자신이 귀하다고 여기는 무리들을 보면 그 자리에서 면박하였으니, 당시에 세도를 부리던 권력층들은 매천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대하면 따뜻한 봄날처럼 화기롭게 담소하였다. 마음이 맞는 친구 중에서 멀리 귀양을 가거나 상을 당하는 경우에는 백리나 천리의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도보로 달려가 진심으로 위로하고 돌봐주며 조문하였다. 평소에 글을 읽다가 충신이나 의사(義士)들이 곤경에 처하여 액운과 싸우던 원통한 대목을 보면 그만 철철 눈물을 흘렸다”라고 적고 있다.

불의와 악에는 철저한 미움을 토로하면서도 옳고 바른 일에는 따뜻한 인간애를 잃지 않았던 매천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그러한 그의 정신과 삶의 태도가 그로 하여금 목숨을 끊는 무서운 용기를 갖게 하였으리라. 인간됨의 깊은 뿌리가 없고서는 창조적 역사행위를 실천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거세고 억센 목소리와 행동 뒤에는 잔잔하고 따뜻한 인간의 숨결이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남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남의 딱한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바꾸어 함께 괴로워하는 마음이 뿌리하고 있는 인간만이 옳은 행동을 해낸다. 매천의 의혼은 그런 바탕에서 생성되었을 것이다.

매천은 그의 인간적 한계나 시대적 한계를 모두 벗어난 진보적 학자는 아니었다. 봉건적 유학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도 많았지만, 당시의 일반적 유자들이 매몰되었던 성리학 위주의 고루한 학자는 아니었다. 가슴에 타고 있던 충의의 정신을 버리지 않고 의분심에 치떨던 용기를 잃지도 않았지만, 의분심과 충의의 마음으로 세상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창강이 기술한 그의 학문 태도를 보자.

“학문하는 태도는 글을 읽어 그 진의에 통하기만 하면 그만이었고, 세속에서 흔히 보던 고루한 형식의 강의나 강학하는 사람들과는 교류하기도 즐기지 않았다. 역대의 역사책으로 치란흥망의 자취에 마음을 기울였고, 병형(兵刑)·전곡(錢穀)의 제도에 관한 것과 새로운 서양의 신문화에서 들어온 민생과 이용후생의 방법까지도 항상 유의하여 나라의 가난을 구제해보려고 애썼다…”라고 했던 대로,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꿰뚫어 본 매천은 구태의연한 학문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식의 흡수와 전수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는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에 한없는 흠모의 정을 보내며 그의 학문적 업적에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나라를 건지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내려는 그의 강한 의지를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인 1908년 신식 사립학교를 건립하여 신교육을 해야 한다고 했음은 그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게 해준다.

호양학교(壺陽學校)
방호산(方壺山) 남쪽의 학교여서 호양학교라고 이름 지어 학동들을 가르쳤으니, 시대를 인식했던 그의 뜻은 높기만 했다. ‘매천야록’이란 역사서와, ‘오하기문’이라는 매천의 역사비평서는 매천의 역사의식 및 그의 뛰어난 비판정신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대표적인 저서다. 천재 시인이던 매천, ‘매천시집’이나 ‘매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문에 나타난 문학정신이나 경세논리는 그가 조선의 마지막 최고 시인임은 물론 탁월한 역사가이고 시대적 진운에 눈감지 않았던 큰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이라는 세 지기지우들이 망해가던 무렵의 조선에 있었기에 그래도 세상은 덜 쓸쓸했다. 전통과 고전에 높은 식견을 지녔고, 변화하는 시대와 역사에 눈을 뜬 그들이 있었기에 역사의 단절은 오지 않았다. 매천사를 뒤로 하고 구례를 떠나오던 우리의 가슴에는 무언가 허전함이 가시지 않았다. 왜 오늘의 지식인들은 고전과 전통에 그렇게도 약한 것인지. 그러니 어떻게 높은 수준의 역사 창조가 가능하단 말인가.

재야 학자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上
실학을 세워 변화의 논리를 개척하다

“이러다가는 망하겠다”는 세상
‘시대가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하기가 어렵다. 독특한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환경이 위대한 인간을 배출해내기도 하지만,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한 인간의 역할 때문에 새로운 물꼬가 터지면서 시대와 사회는 변혁의 기틀을 이루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성호선생의 사당인 첨성사. 오른쪽 위는 성호 선생 문집. <사진작가 황헌만>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누구도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실학의 비조는 당연히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73)이다. 반계의 체계적인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실학사상을 정립하고 새로운 변화의 논리를 개척했던 학자이자 사상가였던 분은 바로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이었다. 성호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아 광대무변한 실학의 집대성자는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었기에, 위당 정인보는 오래 전에 조선 후기의 3대 학자로 반계·성호·다산을 꼽고, 일조(一祖)는 반계, 이조(二祖)는 성호, 삼조(三祖)는 다산이라 하여 실학사상의 계승과 발전에 관한 주장을 폈었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은 40여년의 사이를 두고 일어난 조선 최대의 병란이자 국가와 민족의 참혹한 비극의 역사였다. 어떻게 보면 나라가 망한 정도의 생지옥 속에서 인민들은 죽지 못해 살아가야 했던 고난의 연속이자 질곡의 세월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몸소 병자호란의 참상을 목격하며 어려운 삶을 이어온 반계는 오래지 않아 세상을 등지고 저 멀고 먼 전라도 땅, 부안(扶安)에 은거하면서 ‘이러하고는 나라가 망하겠다’라는 생각으로, 나라와 백성을 건질 계책에 온 생애를 바치며 ‘반계수록’이라는 대저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나라나 세상은 ‘반계수록’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갈수록 세상은 더욱 부패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반계가 세상을 떠난 8년 뒤에 태어난 성호, 자신의 당내(堂內)집안의 외손이어서 척의까지 있던 때문에 일찍부터 반계의 학문에 주목하며 도탄에 빠진 백성과, 침몰해가는 나라를 구제할 우국충정에 불탔었다. 그는 반계학문을 해석하며 자신의 논리를 세웠다. 그러나 역시 성호도 ‘이러다가는 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던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못했다. 성호의 학문과 사상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배태된다. 성호는 ‘반계수록’에 서문을 짓고, ‘반계선생유집’에도 서문을 썼으며, ‘반계선생전(磻溪先生傳)’을 지어 반계의 학문과 사상을 높게 평가하고 그의 삶에 대한 전모를 밝히는 대단한 업적을 이룩해놓기도 했다.

반계의 시대 못지않게 성호의 시대도 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으며, 성호가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에 태어난 다산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해석한 분이 바로 위당 정인보였다. 그러한 시대와 사회적 환경 아래서 반계·성호·다산의 학문이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찾을 길 없는 유적지
성호는 여흥 이씨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좌찬성의 고관을 지낸 학자였고, 조부 이지안(李志安)도 지평(持平)의 벼슬에 학자로 이름이 컸으며, 아버지 매산 이하진(梅山 李夏鎭)은 대사헌(大司憲)의 고관에 명성이 높은 남인으로 당쟁에 연루되어 평안북도 운산(雲山)으로 귀양 갔으며, 귀양 간 다음 해에 성호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성호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벼슬할 생각은 버리고 재야에 숨어서 큰 학문적인 업적을 이룩하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83세의 장수를 누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뒤이어 성호의 중형(仲兄) 이잠(李潛) 또한 당쟁의 여파로 젊은 시절에 장살(杖殺)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으니 가정적으로는 매우 비참하였다. 외동아들이자 뛰어난 경세가(經世家)이던 이맹휴(李孟休)가 일찍 세상을 뜨고 며느리까지 성호 앞에서 세상을 떠나 만년은 참으로 곤궁함과 슬픔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불운에도 좌절하지 않고 천수를 다 누리고 큰 학파를 이루는 학자로 자리했다.

본디 성호 집안은 정릉 이씨라는 호칭을 들었듯이, 지금의 서울 정동(貞洞)에서 세거하였다. 그러나 성호는 그곳을 뒷날에도 가끔 찾아다니기는 했어도 거주한 적은 없다. 아버지를 이별한 뒤에 어머니 권씨(權氏)를 따라 선산 아래인 경기 광주(廣州)에 속했던, 지금의 안산시 개발지역의 어디쯤에 있는 첨성리의 성호장(星湖莊)에서 일생을 보냈다. 여행이나 친척을 방문하는 때가 아니고는 그곳을 뜨지 않고 80 평생을 살았던 곳이 가장 분명한 성호의 유적지다. 순암 안정복, 소남 윤동규, 하빈 신후담, 녹암 권철신 등 제제다사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학문과 의리를 논했던 곳이 바로 거기다. 자신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이맹휴, 손자 이구환은 물론 조카 이병휴·이용휴, 종손들인 이가환·이삼환 등 가학을 이은 학자들이 항상 모여 글을 배우고 실학의 논리를 익혔던 곳이 또 거기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개발되어 흔적도 없고 찾을 길도 없다.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이런 것을 일러 상전벽해라고 하는가보다. 조선 후기 남인계 학파로는 가장 큰 학단이자, 사상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진보적 실학사상이 싹터서 성립된 ‘성호장’의 옛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민족의 불행이다.

묘소의 묘비명을 읽으며
조선후기 명정승의 한 분인 번암 채제공은 단 한 차례 성호장으로 성호선생을 찾아 뵈운 적이 있다. 경기도관찰사라는 고관을 역임하여 지역을 순방하다가 첨성리로 성호를 방문했노라는 기록이 있다.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던 돌아가시기 몇 해 전의 성호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한 부분도 있다. 성호 사후이지만 다산도 22세에 그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희대의 유적지는 더욱 빛날 곳인데 찾지 못하는 아쉬움에, 우리는 성호의 혼이라도 뵈우려고 성호의 묘소를 찾았다. 생전에 선공감 가감역(假監役)이라는 학자에게 내리는 벼슬이 내려졌건만 성호는 벼슬에 응하지 않았다. 세상 뜨기 바로 전에 나이 많은 노인에게 내리는 중추부사에 제수되나 나가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일생을 포의(布衣)로 마친 재야학자였다. 그래서인지 묘소는 정말로 검소하고 아담했다. 묘소 앞에는 당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던 영의정 채제공이 지은 ‘묘갈명’이 새겨진 비 하나가 초라하게 서 있었다. 그걸 어떻게 초라하다고 하겠는가. 겉이야 초라해도 그 글 속에 담긴 내용은 아무리 훌륭하게 치장한 화려한 신도비라도 당해낼 수 없는 천고의 멋진 내용이 담겨있었다.

도(道)를 안고서도 혜택을 끼치지 못했으니 한세대의 불행이로다(抱道而莫能致澤 一世之不幸) / 책을 저술해 아름다운 혜택이 넉넉했으니 백세의 다행이로다 (著書而亦足嘉惠 百世之幸) / 하늘의 뜻은 아마도 거기에 있었지 않을까 한 세대야 짧지만 백세는 길도다(天之意無乃在是歟 一世短而百世永) / 선생의 명문을 지으며 우리 후학들에게 권면하노니 왜 선생의 저서를 읽지 않으려 하나(銘先生而勉吾黨 與讀先生書) / 학통을 전해가는 일 자기가 해야지 남이 해줄 것인가(傳統由己而由人乎)

이런 명문의 명(銘)을 읽어가다가 아쉽고 서운함은 싹 가셨다. 묘소가 아무리 초라해도, 생전에 그렇게 오래도록 거주하면서 연구와 사색에 잠기고, 그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낸 옛집이야 흔적도 없지만, 저서를 통한 성호의 혜택은 백세토록 영원하리라는 그 글 속에 모든 유적이 살아나 있기 때문이었다. 성호의 혜택이 크고 넓어서인지, 왕조가 망한 왜정 때에야 ‘성호문집’이 간행되었고, 이제는 ‘성호전서’가 완간되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호의 위대한 학문을 접할 수 있으니, 역시 혜택은 백세토록 영원하리라는 채제공의 높은 식견은 옳게만 여겨진다.

성호기념관을 돌아보며
근래에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명인달사들의 유물관이나 기념관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고 있다. 성호의 묘소 앞에 도로가 있고 도로 곁에는 ‘성호기념관’이 덩실하게 서 있다. 성호를 만나는 기분으로 기념관으로 들어갔더니, 우선 성호의 초상이 눈에 들어온다. 생전의 모습은 아니고 뒷세상에서 상상해 그린 유상이겠지만, 우선 학자이자 선비이던 성호의 모습의 역력했다. 벼슬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은 재야학자, 그런 꼿꼿하고 총명한 모습이 성호를 회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이외의 성호 유품이나 수택(手澤)이 완연한 친필 글씨나 저술 및 서한들이 그런대로 유품으로서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저 날림공사로 체면치레의 보통 기념관이나 유물관과는 다르게 매우 정성과 뜻이 담긴 유물관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만한 기념관을 만들고 유지도 제대로 해주는 안산시 당국은 칭찬받기에 마땅했다.

기념관 밖의 넓은 공간의 조경도 그럴싸하고, 정리 정돈된 모습이 매우 좋았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성호의 초상화에 찬사를 바친 글을 지었다. 그 글을 읊으며 기념관을 나오는 우리의 발길은 그런대로 가벼웠다.

…저 덕성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윤기 흐르고 함치르함이여
도가 저 몸속에 가득 쌓여 있는 데다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움으로만 흠뻑 적셔 있구료
…누가 이 분을 다시 일으켜 세워
억센 물결 물리치고 공자의 학문으로 돌이킬까. 슬프지고.

재야 학자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 下
“가진 자의 富는 덜어내고 없는 자에게는 보태주라”
학해(學海)를 이룬 성호학문

성호 선생의 묘소와 사당 전경. 왼쪽 아래는 성호사설. <사진작가 | 황헌만>

조선후기 18세기의 대표적 실학자는 성호 이익이다. 반계 유형원이 17세기의 학자라면 다산 정약용은 19세기 최고 학자 가운데 한 분이다. 성호가 일생 동안 반계의 학문을 천착하고 정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완성했듯이, 다산은 일생 동안 성호의 학문을 천착하고 연구하면서 조선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한우근 교수는 성호학문을 가장 넓고 깊게 연구한 학자였다. “평생을 두문분출하며 학문에만 몰두하였던 성호의 식견은 넓고 깊었다. 천문·지리에서부터 일반 민속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의 학문과 덕망은 널리 알려져서 따라서 배우는 사람이 늘어나 하나의 ‘학해(學海)’를 이루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모든 강물이 흐르고 흘러서 큰 바다로 들어오듯이, 성호의 넓고 깊은 학문 때문에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학자들이 ‘성호장’으로 모여들어서 학문의 바다를 이룬 곳이 성호학파였다는 뜻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평생 국학연구에 몸 바치고 계시는 이우성 교수도 “실학의 개척자로서 실학의 가치를 확고하게 정립시킨 학자”라고 성호의 학문을 찬양하고 있다.

성호의 학문에 대한 평가는 근래의 학자들에게서만 나오지 않았다. 성호장에서 함께 생활하며 제자로서 성호의 학문을 익힌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학문적 업적과 덕행에 대하여 공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40년 가까이 성호를 모시고 학문을 닦은 조카 정산 이병휴(貞山 李秉休)는 성호의 가장(家狀)과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성호의 삶과 사상, 학문적 업적까지 유감없이 서술하여 성호에 대한 기본적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병휴가 내린 성호학문의 결론은 이렇다.

진부(陳腐)한 선비들과는 달랐다
“학문의 대요(大要)를 거론해보면, 경학(經學)은 주자의 집주(集註)를 경유하여 육경(六經)의 본뜻에 거슬러 올라갔는데 옛날의 유자들이 논하지 못했던 것을 주장한 바가 많다. 예(禮)에 대한 이론으로는, 반드시 사치는 버리고 검소함만 따랐으며, 경제정책을 논함에는 지위 높은 고관의 재산은 덜어내고 지위 낮은 서민들에게는 이익이 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했다”라는 평가다.

다시 부연하여 설명하면, 경전에 대한 연구는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여 선진시대의 고경(古經)을 두루 연구했는데 주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냈다는 것이다. 주자학에 매몰되었던 당시의 일반 유자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새 이론을 개발하여 새로운 학설을 첨가한 경학연구라는 것이다. 이른바 ‘번문욕례’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예학은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웠다. 예대로 지키고 실천하다가는 딱 망하기 십상인 세상이었다. 그런 이유로 성호는 모든 예를 간소하고 절약하게 지켜야 한다면서 가능한 한 검소한 것만 따르고 사치스럽거나 호화로운 예는 모두 삭제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실용적이고 실사구시적인 논리가 제대로 실행되는 부면이다. 경제정책의 기본도 매우 진보적이다. 빈익빈·부익부의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기본 목표 아래, 가진 자의 것을 덜어다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보태주는 정책, ‘손상익하(損上益下)’의 탁월한 경제논리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래서 성호의 학문이나 사상은 일반 세상의 유자들의 진부하고 무용(無用)의 공언(空言), 즉 실현 불가능한 논리들과는 분명하게 달랐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성호의 학문이 다산 정약용의 ‘다산학’의 원류이자 바탕이라는 주장이 증명되는 것이다. 성호가 옛날의 유자들이 주장하지 못한 새로운 경학논리를 주장하여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점이, 곧 다산학이 성호학문과 주자학을 뛰어넘어 다산경학이라는 독창적인 실학적 경학사상이 정립되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가진 자의 부는 가능한 덜어내고 없는 사람에게는 보태주려는 ‘손상익하’의 경제정책이야말로 다산 경제학의 기본 요소였다. 다산의 유명한 토지제도론인 ‘전론(田論)’이나 ‘정전의(井田議)’ 등은 바로 성호의 경제정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진부하고 무용한 공언이나 일삼던 성리학자들의 관념적인 유희와는 다르게 실질·실용·실사구시적 실학사상을 정립했다는 주장이 여기에서 부합되고 있다.

문인 윤동규의 행장
소남 윤동규는 성호 문하의 큰 학자로 성호의 행장을 기술했다. 성호의 일생을 차례대로 서술하고 그의 학문적 업적과 공업에 대하여도 빠짐없이 자상하게 기록했다. 자신의 말대로 이병휴의 가장에서 8~9할을 인용하여 기술했노라면서 이병휴를 포함한 많은 제자들의 선생에 대한 주장을 종합하여 적었노라고 했다. 그러나 윤동규는 성호의 죽음에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슬픔이 조선 인민의 슬픔임을 토로하였다. “한 차례 시행해보지도 못하고 뜻만 품은 채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라고 애통한 말을 남겼다. 이것은 성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학자들의 사상과 철학이 부와 권력에만 집착했던 집권층이나 벼슬아치들에 의하여 천대받고 말았던가. 반계·성호·다산의 그 높은 사상과 철학이 현실을 개혁하고 백성들이 편하게 살아갈 정책으로 전혀 구현되지 못했음은 역사의 비운이자 조선인민의 불행이었다.

제자 안정복의 『동사강목』
성호학파에는 우파와 좌파로 나뉜다는 학설이 있다. 이우성 교수의 주장이다. 다산 정약용은 오래 전에 성호 가문의 찬란한 학문역량에 대한 찬탄을 발한 적이 있다. “성호선생은 하늘에서 솟아나고 사람 중에서 빼어나며 도덕과 학문이 고금에 초월했던 분이라 자제들 중에서 직접 학문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 모두 대유(大儒)로 성장했다. 조카 이병휴는 역학(易學)과 예학(禮學)에, 아들 맹휴는 경제와 실용학문에, 조카 이용휴는 문장학에, 족손 철환은 박식으로, 종손 삼환은 예학으로 뛰어나고, 손자 구환(九煥)도 할아버지를 이어 명성을 날렸다”라고 했던 것처럼 집안 전체가 ‘학해’를 이루기도 했지만, 제자 중에서도 가장 크게 성호의 학문을 이은 분은 순암 안정복이었다. 안정복이 40대에 완성한 역사책인 ‘동사강목’은 성호의 의견을 대체로 반영한 안정복의 저서다. 성호와 순암이 주고받은 많은 편지를 분석해보면, 동사강목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많은 질문서를 순암이 성호에게 보냈으며, 성호의 답변에 따라 내용에 많은 보충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성호가 가장 믿고 사랑했던 제자 안정복. 성호라는 스승을 가장 존숭하면서 광주의 경안에서 안산의 성호장까지 100여리의 먼 길을 네 차례나 직접 찾아가 학문을 물었고, 이후 수없이 많은 편지로 학문을 논했던 제자가 안정복이었다.

안정복은 성호의 우파 제자다. 그가 성호의 뜻에 따라 ‘동사강목’을 저술하고, 성호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을 수정가필하고 요령 있게 정선한 ‘성호사설유선’이라는 대작을 편찬하였다. 순암 문하에서도 제제다사들이 배출되었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도 그 문하에 출입했던 기록이 있다. 대표자는 하려 황덕길이고 하려의 제자가 성재 허전(許傳)으로 조선 최후의 성호학파의 큰 학통을 이었다.

성호문하의 좌파 권철신
성호는 일찍부터 서양 학문과 사상을 접했다. 특히 서양의 과학사상에는 전적으로 크게 찬성하면서 서양인들의 우수성에 대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 사상으로 천주교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성호문하의 좌우파는 여기서 갈리고 있다. 서양의 과학사상에는 그런대로 수긍하지만 곧 난리를 당하고 파멸될 것이 분명한 천주교사상에는 절대로 승복할 수 없다는 부류가 우파에 속한다. 좌파의 효장은 성호문하에서 가장 젊은 층에 속하던 녹암 권철신이다. 성호의 비판적 주자학을 넘어 새로 경학논리를 수립한 학파다. 서양의 과학사상은 물론, 천주교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밝히지 못했던 학자들이 권철신과 함께 했던 좌파다. 정약전·정약용도 애초에는 그 일파였으나 가장 철저한 좌파는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순암의 사위)이나 이벽이 그 학파의 효장이었다. 물론 그들은 순암 안정복의 예언대로 1801년 신유옥사에 의해 철저하게 파멸하고 말았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불꽃으로 변하듯이, 천주교로 파멸한 성호의 좌파들은 다산 정약용을 통해 실학사상으로는 큰 공업을 이룩했으나, 성호의 학통을 지키고 학문을 전파한 계승자들은 우파에 속하는 안정복 문하의 학자들이었다. 건전한 보수 우파는 그런데서 학문 계승의 큰 역할도 해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전통시대의 평가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성호의 큰 학파는 다산 정약용으로 집결된다. 16세에 성호의 유저를 읽어보고 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던 다산. 평소에 “내 학문의 큰 틀은 성호를 따라 사숙(私淑)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다”라고 했던 대로 성호가 뿌린 실학사상은 다산을 통해 제대로 집대성되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중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스스로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천지의 웅대함과 해와 달의 광명함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성호선생의 힘이었습니다”라고 갈파했듯이, 조선의 가장 진보적 논리이자 대표적 사유의 한 체계인 실학사상은 성호를 거쳐 다산에 이르러서야 구체적 논리로서 민족의 지혜로 자리잡게 되었다. 반계·성호·다산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진보성이, 언제쯤 활짝 꽃을 피우고 제대로 열매를 맺을 것인지. 역사와 사회의 겉에 우파만이 판치는 지금 우울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고산 윤선도-시인·풍류객·직신·예학자(上)
곧은 절의에 깃든 섬세한 詩心
해남의 문풍(文風)과 절의정신

금남 최부(錦南 崔溥:1454~1504)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은 조선의 땅 끝 벽지인 해남 땅에 유학(儒學)과 절의정신을 꽃피게 했던 결정적 단서를 마련해준다. ‘표해록’의 저자로, 나주 출신이면서 처가 고을인 해남에서 활동하며 살았던 이유로 그곳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해남에 어느 곳보다 뛰어난 유교문화를 전파하고 진리와 정의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높은 절의정신의 전통을 세워주었다.
동촌석실에서 바라본 부용동. 사진작가 | 황헌만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서울에서 벼슬하던 최부는 호남 명문 집안인 해남 윤씨 가문에 혁혁한 제자를 두었으니 그가 바로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이다. 갑자사화와 을사사화에 절의와 정도를 지키다 효수 당했던 스승인 금남의 정신을 이은 윤효정은 진사과에 합격한 뒤로 패악한 정치에 발을 끊고 고기 잡고 풀 베는 일에 숨어버리고 세상과 단절하는 의리를 지켰다. 윤효정의 아들 윤구(尹衢)는 호가 귤정(橘亭)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의 당당한 문신이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더 이상 벼슬을 하지 못하고 절의를 지키다가 세상을 떠난다. 윤구의 증손자가 바로 고산 윤선도(1587~1671)다.

최부의 외손자에는 미암 유희춘이 있다. 미암도 사화에 연루되어 20년 넘게 귀양살이로 젊음을 바쳤다. 문인·학자에 절의정신이 높던 미암도 해남 출신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윤선도는 정의감과 절의정신이 몸에 배었고, 나라가 바르게 가지 못하거나 나라의 예(禮)에 어긋남이 있으면 곧바로 상소하고 항의하는 직신(直臣)의 정신을 올곧게 지켰다. 그래서 전후 16년이 넘는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혁혁한 해남 윤씨 가문
윤효정·윤구의 정통을 이은 후손들도 만만찮은 존재가 많다. 윤구의 아들 윤의중(尹毅中)은 좌참찬이라는 고관을 역임하고 그 아들 윤유기(尹惟幾)는 강원도 관찰사이니 바로 고산의 백부이자 양아버지였다. 어머니 순흥 안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윤선도는 자가 약이(約而), 호는 고산, 해옹(海翁)으로 많이 알려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명민했던 윤선도는 10여세의 나이에 경사(經史)는 물론 의약·복서·음양·지리 등의 서적을 두루 공부하여 문장과 식견이 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올랐다고 한다. 17세에 남원 윤씨와 결혼하고 그해에 진사초시에 합격한다.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그 해에 생부의 상을 당하기도 했다. 태어나기는 서울의 동부 연화방이었지만 그의 생활 근거지는 선대의 고향인 해남이어서 서울과 해남을 오고가면서 일생을 보냈다.

예조판서 이이첨의 권력 농단을 비판
1616년은 광해군 8년으로 간신 이이첨의 권력 농단이 극에 이르고 왕비의 오빠 유희분, 척신 박승종 등의 권력 남용이 도를 벗어나자 30세의 젊고 당당한 윤선도는 비록 진사로 포의(布衣)의 신분이었으나 비분강개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들 모두를 비판하는 이른바 ‘병진소(丙辰疏)’를 올려 세상을 발칵 뒤집고 말았다. 이이첨은 죽여야 하고 나머지도 합당한 죄를 물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 상소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런 이유로 권력의 탄압은 피할 수 없어 그 다음해에 윤선도는 서울에서 2000리가 넘는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귀양 가 안치되었다. 거기서 3년을 보내다가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옮겨 귀양 살다가 8년째인 해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마침내 해배되어 도사(都事) 벼슬에 오르게 된다.

37세의 장년 나이에 이른 윤선도는 벼슬에 뜻이 없어 주로 고향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의기가 뛰어난 그를 조정에서는 그냥 두지 않았다. 여러 벼슬을 내렸으나 바로 사직하고 응하지 않았으나, 인조 6년 42세이던 고산은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두 왕자를 가르치는 사부에 임명되어 성실한 왕가의 스승으로 충실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인조의 신임이 크고 대군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높아 다른 벼슬을 겸직하면서까지 5년의 세월을 사부로 보냈다.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사부직을 마친 윤선도는 고향에서 지내다, 기왕에 벼슬을 하려면 문과급제를 통해서 출사해야 한다는 뜻에서 47세의 나이인 인조 10년 1632년에야 증광시험에 장원급제의 명예를 안게 된다. 그래서 시강원의 문학(文學)이라는 벼슬에 제수된다. 48세에는 경상도 성산(星山)고을의 원님이 되어 목민관 생활을 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있던 인조 14년은 1636년으로 고산의 나이 50세, 전대미문의 큰 난리인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가 온통 전운에 휩싸이고 만다. 의분에 못 견디던 고산은 의병과 노비들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강화도로 달려갔으나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남한산성은 임금이 계시지만 통로가 막혀 접근할 수가 없자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1637년 2월, 인조대왕은 마침내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 이런 소식을 접한 고산은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도 부끄러워, 제주도로 건너가 일생을 마칠 계획으로 해남에서 제주를 향해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가 좋고 산수가 아름다운 보길도를 발견하자 거기에 짐을 풀고 살아가려고 정착한다.

보길도 부용동(芙蓉洞) 생활
51세의 고산은 보길도에서 살아갈 마을 이름을 부용동이라 짓고, 격자봉이라는 산 아래에 낙서재(樂書齋)라는 서실을 짓고, 천하에 아름다운 세연정을 짓고 연못을 파 경관이 뛰어난 정원을 꾸미고 한 세월을 보냈다. 여기에서 시가 있고 노래가 있으며 풍류의 격이 높은 고산의 삶이 전개된다.

조선시대 정원의 대표적인 명승지, 재력도 있었고 미의식도 뛰어난 고산이었기에, 그런 아름답고 격조 높은 정원을 꾸며 선비문화의 정형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직하고 정의롭던 고산에게는 적이 많았다. 병자호란 뒤에 신하로서 임금에게 안후를 살피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시골에 은거하던 고산에게 귀양살이의 명령이 내려진다. 경상도 영덕(盈德)으로 유배되어 53세의 봄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해남 고향의 가까운 지역인 수정동·금쇄동에 명승지를 개발하여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며 아름다운 경관을 꾸몄다.

56세에는 세상에 유명한 ‘산중신곡(山中新曲)’이라는 16장의 한글 시조를 짓는다. 그 뒤 보길도에서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편과 ‘오우가’ 등의 시조로 조선 시조의 백미를 저작하기에 이른다.

장가에는 송강, 단가에는 고산
조선 가곡(歌曲)의 명인으로는 대체로 3인을 꼽는 것이 정설이다.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가 그들이다. 그러나 위당 정인보는 송강과 고산에 주목하여 수준 높은 평가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우리나라의 가곡으로 보록이 남아있는 것은 대개 조선시대 이후요, 그 중에서 특출한 명인을 고르면, 몇 분 속에도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 두 분은 500년을 통틀어 그를 당할 이가 없다”라고 평했다. 이어서 “고산은 대체로 담아(淡雅:담박하고 우아함)한 길로 나아가 저 강호연파(江湖煙波)와 배합되는데 좋다”라고 고산 단가의 독특한 경지와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였다.(‘담원국학산고’, ‘정송강과 국문학’) 또 위당은 ‘어부사시사’에 대해서도 “고산은 ‘어부사시사’에 ‘우는 것이 뻐꾸기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같은 것은 물외한인(物外閒人)의 우유(優游)하는 심경을 흔적 없이 나타냈고 ‘하마 밤들거냐 자규소리 맑게 난다’와 같은 것은 호남 산수 간의 밤경치를 귀신같이 그려냈다”라고 평하여 신필(神筆)에 가까운 고산문학의 경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한글 시조나 단가에 있어서 고산의 솜씨는 당대 제1인자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포의의 신분으로 이이첨의 권력남용을 통쾌하게 비판하여 8년의 귀양살이를 했던 과격한 정의파에게 어찌하여 그런 섬세한 문학의 혼이 깃들었을까. 대단한 일임에 분명하다.

효종의 등극으로 벼슬이 오르다
고산의 나이 64세, 인조가 붕어하고 고산의 제자인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임금 보위에 오른다. 1652년 효종 3년, 66세이던 고산은 효종의 사부였다는 덕택에 성균관 사예 벼슬에 올라 임금을 인견하게 되고, 곧바로 동부승지라는 당상관에 올라 한 나라의 대부(大夫) 직위에 오른다. 그해 8월에는 그의 마지막 벼슬인 예조참의에 제수된다. 5년이나 글을 가르친 군왕의 사부로 조금만 고분고분 벼슬살이를 했다면 더 높은 고관의 벼슬도 어렵지 않게 제수 받을 수 있었건만, 직신이자 과격한 정의파 윤선도는 곧바로 ‘시무8조소’라는 상소를 올려 시급한 해결책을 열거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임금을 채찍질하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바로 당대 세력가이던 원평부원군 원두표(元斗杓)의 부당한 처신을 비판하는 강력한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벼슬에서 쫓겨나 고향인 해남으로 하향하고 말았다. 69세에는 벼슬길이 다시 열렸으나, 곧바로 ‘시무4조’라는 상소를 올려 조정의 문제점을 낱낱이 비판하였다. 글 잘하고 한글 단가에 능했던 고산, 문인이자 학자로서의 훌륭한 역량이 있었지만, 그의 정책적 건의와 주장은 정치에 실현되거나 반영되지 못하고 당파싸움에 휘말리면서 70이 넘은 노인에게는 더 큰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고 있었다.

효종 만년인 1658년, 고산의 나이 72세에 이르자 격화되던 당쟁은 갈수록 치열해 서인과 남인의 대결은 그칠 줄 몰랐다. 시인이자 문인이고 학자이던 고산은 당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자리잡게 된다.

고산 윤선도-시인·풍류객·직신·예학자 下
“내 비록 포의의 신분이나 권신의 횡포 눈감을 수 없다”
불굴의 투사, 나이 들수록 더 강해져

포의한사로 벼슬도 하지 않던 30세의 나이에 권신들의 무도한 정치를 차마 놓아둘 수 없어 독한 탄핵상소를 올렸던 곧은 선비가 윤선도다. “비록 포의의 신분이었으나 군부(君父)의 위태로운 처지를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라는 마음에서 충성심과 분노의 마음을 이기지 못해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후손 자격으로 상소를 올렸다는 역사가들의 평가를 받은 사람도 윤선도였다.
<녹우당 전경 사진작가 | 황헌만>

윤선도는 억울하게 탄압을 받다 희생된 선배들에 대해서도 절대로 그냥 두지 않고 진실을 밝혀 그들의 억울함을 푸는 데도 언제나 앞장섰다. 이른바 ‘기축옥사’라는 정여립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한 호남의 선배 학자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의 신원과 문집간행에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학자라 칭송하면서 정개청의 문집인 ‘우득록(愚得錄)’을 교정하고 정리하며 완전한 책으로 만들어 간행을 서둘렀으며, 그가 억울하게 죽어간 상황을 제대로 밝혀 원상으로 회복시키지 않으면 국시(國是)에 어긋난다 하여 수천자에 이르는 장문의 ‘국시소(國是疏)’를 올려 반대파들의 혹독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힘없고 약하며 세력에 밀리는 학자들 편에 서서 진리와 정의를 두둔하던 윤선도의 정신은 나이가 더 들수록 강해지기만 하였다.

기해 예송의 한 복판에 자리하다
고산 73세, 1659년이던 기해년에 10년 재위의 효종이 세상을 떠났다. 효종의 장사를 치르며 산릉(山陵)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자의대비의 복제(服制) 문제가 서인과 남인의 당쟁으로 격화되면서 예학자(禮學者)로서 윤선도의 학설은 남인계열의 중심이론으로 정리되었다. 송시열·송준길 등의 서인들이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가 죽어서 자의대비가 3년 복을 입었으니 효종은 인조의 차자로 기년의 복을 입으면 된다고 결정했다. 이에 윤선도는 종통(宗統)을 부인했다고 송시열을 비난하며 강력한 반대 상소를 올린다. 윤선도 주장의 핵심은 서인들이 ‘비주이종(卑主二宗)’의 잘못을 저질러 나라의 예(禮)를 완전히 무너지게 했다는 지적이었다. 임금에 오른 효종이 종통을 잇는 것이므로 효종의 상사에 당연히 3년복을 입어야지 기년(朞年)의 복을 입음은 종통을 두 개로 갈리게 하는 죄를 짓고 만다는 것이었다. ‘임금을 낮추고 종통을 둘이게’ 했다는 윤선도의 주장은 송시열 계열과 대립하던 미수 허목 등의 중심논리를 제공한 선구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런 윤선도의 주장은 그가 평안도 끝의 삼수(三水)로 귀양가는 불행을 안아야 했다.

효종이 붕어하자 풍수에 밝았던 윤선도에게 간산(看山:묘자리 선정)의 일이 맡겨졌다. 윤선도는 수원(지금의 사도세자 묘소)에 길지가 있음을 말하고 그곳으로 장지를 정하자고 했으나 송시열 일파는 그것도 반대하며 다른 곳으로 정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윤선도의 상소문 불태우다
서인들의 권력남용은 극도에 이른다. 역사에 없는 악한 일이 벌어졌으니, 윤선도의 복제설(服制說)에 대한 상소문을 정원에서 임금께 올리지도 않고 불태워버린 사건이다. 상소 내용에 잘못이 있다면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고, 그에게 벌을 내리면 되지, 그것을 불태우는 일은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패악한 권력에 맞서 윤선도는 싸우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현종 1년 74세의 윤선도는 삼수로 귀양 가 안치되고 그 다음 해에는 함경도 북청으로 이배되려 했으나 취소되고 더 무겁게 가시울타리를 씌우는 형편에 이른다. 그 이유는 남인으로 대제학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올랐던 용주 조경(趙絅 : 1586~1669)이 윤선도의 억울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려 삭탈관작되는 사건이 일어난 이유에서다.

남인 4선생의 활약
서인과 남인이 복제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에, 송시열 일파와 맞서 탁월한 예론(禮論)으로 그들을 압박했던 남인의 네 학자가 있었으니, ‘비주이종’의 이론을 세운 고산 윤선도, 용주 조경, 미수 허목(1595~1682), 남파 홍우원(南坡 洪宇遠 : 1605~1687)이 그들이었다. 조경은 윤선도를 비호하다 삭탈관작을 당했으나 언제나 윤선도가 옳다고 주장한 학자였고, 미수 허목은 우의정에 오른 학자였으나 뒷날 윤선도의 ‘신도비명’을 지어 그의 일생을 찬양하였다. 77세의 노학자 윤선도가 삼수에서 귀양 살던 현종 3년에 홍우원은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금고(禁固)를 당하는 화를 맞는다. 남인 4선생 가운데 가장 오래까지 살았던 홍우원은 뒤에 윤선도의 시장(諡狀)을 지어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정확하게 기술하였다. 용주 조경이 윤선도를 평했다는 말이 허목의 신도비에 전해진다. “예로부터 나라가 흥망의 기로에 선 시기에는 하늘이 반드시 한 인물을 내려 보내 목숨을 걸고 예의(禮義)를 지키게 하여 한 세상에 경종을 울려주고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바로 윤선도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윤선도의 일생은 바로 조경의 이 한 마디에 모두 정리되었다. 현종 6년 79세의 윤선도는 평안도의 삼수에서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 장소가 옮겨졌다. 거기서 3년을 보낸 뒤, 81세의 노직신 윤선도는 임금의 특명으로 마침내 귀양살이가 풀렸다. 80의 노령으로 무려 8년에 이르는 긴긴 유배생활이었다.

가난한 백성을 위해 의장(義庄)을 설치하다
81세의 늙은이로 고향 해남으로 돌아온 윤선도는 다시 보길도의 부용동으로 들어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우국충정을 달래며 살았다. 가곡을 지어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으며 노년의 안온한 삶을 보냈다. ‘오우가’를 부르며 ‘어부사시사’도 읊고, ‘산중신곡’ ‘속산중신곡’을 읊조리면서 부용동 생활에 만족하였다.

조선왕조 중기에 호남에는 3대 부호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나주목사를 지낸 광주의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 공조참의를 지낸 보성의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과 고산 윤선도가 그들이다. 특히 윤선도의 집안은 고조할아버지이던 윤효정 시대 때부터 당대의 갑부였다고 한다. 윤효정은 정씨(鄭氏) 집안으로 장가드는데 그 정씨 집안이 당대의 부호였고, 무남독녀인 윤효정의 부인은 친정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다 머리가 뛰어난 윤효정의 후손들은 대부분 문과에 급제하여 고관을 지내며 재산을 늘리지는 못했어도 줄이지는 않아 계속 부가 상속되었다.

그런 재산 때문에 윤선도는 서울에도 집이 있었고 지금의 남양주시 덕소 근처의 고산(孤山)에도 별장이 있었으며, 해남 일대와 보길도 일대에는 토지와 산을 많이 소유하게 되어 곳곳에 별장과 정자가 있었다. 그래서 윤선도는 언제나 가난한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84세 때에는 ‘의장(義庄 :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농장)’을 마련하여 의곡(義穀)을 비치해두고 극빈자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양심적인 선비로서의 삶에 한 치의 부족함이 없는 일생을 보낸 사람이 윤선도였다.

윤선도가 부자였기 때문에, 인민을 착취한 반민중적 문인이었느니, 노예들을 학대하여 부를 축적하고 풍류나 즐겼다는 등의 악의적인 뒷사람들의 평은 일고의 가치 없음을 그의 일생은 보여주고 있다. 권력에 맞서 그만큼 싸웠던 투사,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온갖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전후 16년의 유배생활을 자초했던 것만으로도 그의 평가를 달리할 이유가 없다. 그는 의인이자 시인이고 예학자였다.

녹우당을 찾아서
해남하면 녹우당이다. 윤선도의 고조할아버지 윤효정 이래로 500년이 넘는 명승지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라는 윤선도의 고향 집이다. 녹우당(綠雨堂)이라는 현판은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의 글씨다. 이서는 고산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와 가까운 친구였다. 천하에 명필로 유명한 이서가 친구를 위해 써준 글씨가 지금의 현판으로 걸려있다. 본디 이 녹우당은 효종이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집인데, 뒷날 바다를 통해 그대로 고향으로 옮겨서 지은 집이다. 고산과 공재를 비롯한 학자이자 문인이던 그들의 유품이 대체로 보관된 유물관도 덩실하게 서 있다. 그곳의 뒷동산에는 비자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윤효정 등 고산 선조들의 묘소가 아름답게 가꿔져 있다. 윤선도의 묘소에는 미수 허목이 지은 신도비가 서 있다. 비면이 마멸되어 글은 읽을 수 없으나, 문집에 수록되어 있으니 자료는 넉넉하다.

녹우당은 고산의 14대 종손 윤형식씨가 지키고 있다. 85세로 부용동에서 세상을 떠난 선조의 학문과 의혼, 풍류의 멋진 삶을 세상에 전하려고 종손으로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노인에 이르도록 희생한 그분의 삶도 멋지다. 사당·녹우당·묘소·종산(宗山) 등을 돌보고 보살펴서, 녹우당은 한국 최고 명승지의 하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윤선도의 수많은 가사(歌辭) 친필본이 그대로 전해지며, 예조참의 벼슬을 내린 임금 교지, ‘고산선생유고’,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등 천고에 빛나는 유품들이 그대로 보관된 유물관은 바로 우리 한국의 국보임에 분명하다. 불의에 맞서 굽히지 않고 싸웠던 직신, 여유 있는 가정이어서 언제나 가난한 이웃을 도왔던 의인, 당대의 예학이론으로 서인과 맞서 명쾌한 논리를 폈던 예학자, 고산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흠모의 정을 감출 수 없었음은 그의 삶이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묘소를 돌아보고 나오면서 남인의 거목 미수 허목이 지은 신도비의 명문(銘文)을 읽으면서 이렇게 곧은 선비가 조선 땅에서 살았던 것이 자랑스러웠다.

비간은 심장을 갈라 죽었고 比干剖心
백이는 굶어 죽었네 伯夷餓死
굴원은 강물에 빠져 죽었고 屈原沈江
고산은 궁색할수록 더욱 뜻이 굳어 翁窮且益堅
죽음에 이르도록 변치 않았으니 至死不改
의를 보고 목숨 걸기는 마찬가지였네 其見義守死一也

천하의 의인이자 직신들인 비간·백이·굴원 등과 같은 인물이었다는 고산에 대한 평이 얼마나 지당한가.

의병장 최익현의 기개와 애국심 上
서슬퍼런 권력에 들이댄 비판의 날
도학자(道學者) 이항로(李恒老)에게 수학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은 조선이 망해가던 무렵, 가장 투철하게 충의(忠義)의 유학정신을 발현하여 뛰어난 애국심으로 나라에 목숨을 바친 대표적 충신 중 한 사람이었다. 최익현이 순국한 4년 뒤에 나라는 끝내 망했지만 그가 나라를 위해 바친 열혈의 애국심은 우리의 조국이 이어지는 한, 영원한 민족의 사표로 길이 추앙받기에 넉넉한 투혼이었다.
면암 유택의 안채(위)와 화서 이항로 선생의 친필인 ‘면암’(오른쪽 아래). 뒤에 최익현의 호가 되었다. | 사진작가 황헌만

최익현은 본디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경주 최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순조 33년인 1833년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골격이 비범하고 눈빛은 별처럼 빛났으며, 호랑이처럼 무서운 얼굴에 제비꼬리 같은 턱을 지녀서 어린이 때의 이름이 기남(奇男)이었다고 한다. 여섯 살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한 면암은 14세의 어린 나이로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군)의 벽계리에 은거하며 당대의 도학자로 큰 명성을 날리던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유교경전에 대한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소년이었지만 비범함을 알아차린 화서는 면암(勉菴)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기증했고, 그 ‘면암’은 평생 동안의 호가 되었다.

23세인 1855년은 철종 6년인데, 그해에 면암은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니 14세에서 23세에 이르는 10여 년간은 화서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과거공부에 열중했던 수학기였다. 영특한 면암은 이때 이미 높은 수준의 학문에 이르렀고 벼슬길에 올랐지만 여가에는 언제나 독서와 궁리(窮理)에 게으르지 않아 연령이 높아질수록 학문도 넓고 깊어졌다. 특히 도학자 화서의 학문과 인격에 깊은 존경심을 지녔던 면암은 ‘힘쓰는 사람’이라는 호를 잊지 않았고, 15세에 화서가 직접 글씨를 써서 내려준 ‘낙경민직(洛敬민直)’이라는 네 글자를 평생토록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고 한다. 중국의 송나라 때, ‘경(敬)’을 크게 강조한 정자(程子)의 사상과 ‘직(直)’을 주장한 주자의 사상을 지키며 살았다는 뜻이다.

‘탐적전말(耽謫顚末)’이라는 면암의 글을 읽어보면, 스승 화서의 영향이 면암에게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면암이 41세이던 1873년에 대원군의 정치관여를 비판하는 ‘계유소(癸酉疏)’를 올리고 탄핵 받아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때에 지은 것으로, 왜 자신이 그런 무서운 상소를 올릴 수밖에 없었나를 설명한 내용이다. ‘탐라도에 귀양 오게 된 전말’을 기록한 내용이라는 뜻이다. 이 글에서 면암은 23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스승 화서를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자, 화서가 두 가지 교훈을 주셨다는 것이다. “첫째, 이제 포의에서 나라의 벼슬아치가 되었으니 운명이 바뀌었다. 순조롭게 벼슬하면 당연히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 될 텐데, 책읽기에 부지런하여 뒷날 큰 벼슬살이의 밑거름이 되게 하라. 남의 유혹에 끌려 가볍게 논박하는 일은 절대로 삼가라. 둘째, 임금의 신하가 되어 마땅히 상소를 해야 할 사건이 있게 마련인데, 입을 꼭 다물고 묵살하며 그냥 국록이나 타먹는 일은 매우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다”라는 교훈이었다고 한다. 면암은 일생 동안 화서의 이 교훈을 잊지 않고 몸소 행하고 실천했던 착실한 제자였음이 분명하다.

대원군을 하야시키다
12세의 어린 임금 고종이 등극하자 천하의 권력은 모두 한때 파락호이던 대원군에게 넘어갔다. 대원군 10년의 권력 앞에 누가 감히 잘못과 부당함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30세에 신창(충남 아산시)현감의 외직으로 나갔으나 충청감사의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벼슬을 던져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면암은 또 화서 선생을 찾아뵙고 “주자서를 읽은 사람의 기개를 지켰다”라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34세에 언관(言官)의 지위인 지평(持平)이 되자 바로 6개 조항의 상소를 올리고, 36세에는 사헌부 장령이라는 중책을 맡자 바로 대원군의 정책에 비판을 가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른바 ‘무진소(戊辰疏)’인데, 토목공사중지·수탈정책중지·당백전철폐·사문세(四門稅) 폐지를 주장하여 천하에 최익현의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조야에서 우레 같은 박수를 받은 상소가 그것이니, 당상관인 돈령부도정이라는 정3품의 벼슬에 오른다. 이 상소 5년 뒤 1873년은 면암 41세이자 고종 10년, 대원군 집권 10년 차로, 조야에 원성이 자자하여 누군가가 한 차례 소리를 내야 할 때였다. 바로 면암은 불속으로 섶을 들고 들어가듯, 대원군은 임금의 아버지로 대접이나 크게 받아야 할 처지인데 국정에 관여하여 나라가 어지럽기 그지없다면서 대원군의 권력남용을 통렬히 비판하는 ‘계유소(癸酉疏)’를 올렸다.

마침내 화약고를 터트린 것이다. 22세에 이른 고종, 친정을 담당하기를 원하던 때와 맞물리고, 그것을 극히 바라던 민비가 학수고대하던 때여서 면암의 입장은 한편으로 위대했지만 한편으로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6월에 상소가 올라가고 8월에 면암은 우부승지와 동부승지로 제수되었고, 바로 이어 재신의 지위인 호조참판에 올랐다. 물론 면암은 모두 사직소를 올리고 벼슬에 임하지 않았으나, 끝내 대원군은 양주 땅으로 하야해 권력을 잃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해 11월8일 면암은 반대파들의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천륜(天倫)을 이간시켰다는 죄목으로 머나먼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정조 시절 영의정이던 채제공 이후, 남인은 몰락하여 대관(大官)을 배출하지 못하다가 대원군의 집권으로 몇 사람의 남인 정승이 나오고 비교적 세력이 확대되던 때였는데, 면암의 상소와 이에 따른 대원군의 하야로 남인세력은 매우 큰 타격을 받아야 했다. 대원군 탄핵상소 직후 호조참판의 높은 지위까지 제수받자, 남인들은 면암은 ‘민노(閔奴)’, 즉 민비 측의 종이라는 악명으로 숱한 비판을 가하게 된다. 이 문제는 면암과 동시대를 살았던 22년 후배 매천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어준다.

‘매천야록’에 면암의 입장 해명
무섭게 역사적 필봉을 휘둘렀던 황현은 그의 붓 아래 완전한 사람이 없었지만, 유독 면암에 대해서는 극히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1905년은 면암이 73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망했다고 고관대작들은 물론 애국지사들이 경향에서 울분을 토하며 자결을 감행했다. 충정공 민영환, 정승 조병세, 판서 홍만식 등 저명한 고관들이 자결하자 황현은 그들을 애도하는 5애시(五哀詩)를 지었다. 두보의 8애시를 모방한 시로 자결한 세 분 이외에 살아 있는 최익현과, 이미 세상을 떠난 영재 이건창을 합한 다섯 분을 애도했다. 5명을 맞춰야 하는데, 세 분 이외에 죽은 이건창은 포함시킬 만한 인물이고, 면암은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나라를 위해 죽을 사람임이 명백하기 때문에 포함한다는 기막힌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면암에 대한 황현의 기대와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호조참판에 오른 3년 뒤인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면암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꿇어앉아 조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다섯 가지 내용을 상소했다.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도끼로 목을 베어달라는 무서운 기개의 상소였다.

매천 황현은 이 대목에서 고종과 민비 일파들이 주도한 병자조약에 도끼를 들고 반대상소를 올린 사실로, ‘계유상소’가 민씨들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이 명확하게 증명되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말았다.

도끼 들고 상소(持斧上疏)
고려시대의 우탁(禹卓), 조선시대의 중봉 조헌(趙憲)이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서 죽여달라며 상소를 올린 적이 있다. 면암은 바로 이 두 분의 옛일을 본받아 자신도 죽음을 각오한 조약반대 상소를 올린다면서 광화문 앞에 꿇어앉았다. 대단한 기개다. 죽음을 각오한 면암은 관원들의 힘에 못 이겨 떼밀려 저 머나먼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 외롭고 쓸쓸한 외딴 섬에서 4년, 그는 독서를 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긴긴 세월을 보낸다. 자신을 하야시킨 면암, 대원군으로서는 무척 미운 사람이었지만, 병자수호조약에 반대하는 곧은 기개에 탄복한 대원군은 면암의 유배가 풀리자 바로 자헌대부 공조판서라는 높은 벼슬로 면암을 위로했다. 물론 면암이 그런 벼슬에 응하지 않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국권은 점점 상실되고 뜻 있는 선비로서 차마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세상의 변화가 계속되자, 면암은 연일 상소를 올리면서 옛 제도의 복원을 위한 보수적 논리를 거듭 폈다. 지금의 잣대로야 참으로 답답하고 보수적으로 평가되지만, 망해가는 나라를 지키려던 면암의 애국심이야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단발령에 반대하여 “내 목은 잘라도 되지만 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라는 유명한 상소를 올리면서 의복이나 두발의 옛 제도 복원을 끝없이 주장했다. 의정부 찬정(贊政)이라는 고관이 내려도 전혀 응하지 않던 면암. 마침 새로운 도모를 위해 정든 고향땅 포천의 가채리를 떠나 온 가족을 이끌고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송암리(속칭 장구동)라는 마을로 이사한다. 68세 고령의 노인이었다. 호서와 호남의 선비들과 교유하면서 망해가는 나라를 붙들 어떤 계책을 세우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곳에 안채와 사랑채인 ‘구동정사(龜洞精舍)’를 짓고 팔도의 선비들이 모여앉아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하며 나라 지킬 큰 계획을 세우면서 날을 보냈다.

의병장 최익현의 기개와 애국심 下
“쌀 한톨 물 한모금도 왜놈 것은 먹을 수 없다”
대마도에서 숨을 거두다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하면서 절대로 조약의 체결은 불가하다고 주장하고, 조약을 체결하려면 우선 자신의 목을 베어달라던 놀라운 기개. 그런 무서운 의인도 숨을 거둘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1902년 70세의 노인에게 궁내부 특진관이라는 고위 직책을 내렸으나 면암은 쳐다보지도 않고 거절하였고, 의정부 찬정도 거절했다. 권력이 면암을 회유하려고 경기도관찰사에 임명했으나 단호히 거절하면서 그는 죽어야 할 때와 장소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많은 유림과 학자들이 모여 의병 궐기를 모의하고 춘추대의를 강론했던 구동정사. <사진작가 황헌만>

마침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조인되고 경향에서 여러 계층의 애국자들이 자결을 택했다. 면암은 그냥 죽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나라를 건지기 위해 싸우다가 죽자는 뜻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때를 기다렸다. ‘구동정사’에 모여든 선비들과 의병을 일으키기로 몇 차례 다짐하고, 제자들이 많기도 하지만 투쟁정신이 강하고 의병의 전통이 뚜렷한 호남으로 거사 장소를 정하고 남으로 내려왔다. 1906년 2월, 마침내 집안의 사당에 절하며 선조들에게 하직을 고하고, 집에서 멀지 않은 논산의 노성면 ‘권리사’(공자 사당)에 전국의 선비들이 모여 대집회를 열고 4개 조항의 격문을 짓고 8도의 국민에게 거의를 알리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일로 남행, 모든 선비들과 함께 정읍시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최익현의 선조 고운 최치원의 사당)에서 창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왜 의병을 일으켜야 하는가의 이유를 밝히는 창의소(倡義疏)를 올리고 일본 정부가 의리를 배반한 16개 조항의 편지를 보내 일본의 잘못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조선민족으로서의 높은 기개를 보이고 일본의 불법침략을 성토하는 빈틈없는 논리가 그 편지에 상세하다. 의병들을 모으며 순창으로 이동했지만 황제의 선유로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고, 74세의 고령인 면암은 끝내 체포되는 신세가 되어 일본 헌병의 이송으로 저 일본 땅, 대마도의 감옥에 갇히는 비극을 맞아야 했다.

74세의 고령 의병장
젊어서야 혈기로라도 의를 위해 소리칠 수 있다. 그러나 고령에는 어떤 장사도 기력이 쇠하여 혈기의 용기를 부리기 어렵다. 그러나 호랑이처럼 무서운 얼굴의 ‘기남(奇男)’이라는 면암은 예의 사람과는 달랐다. 노쇠한 몸에 어디에서 그런 기운이 솟았는지, 74세의 노구로 총을 든 무서운 왜병 앞에 맨주먹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는 것인가. ‘성충사’라는 영당에 부릅뜬 눈으로 천하를 노려보는 면암의 영정을 보면서 섬뜩한 무서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화서 이항로에게 배운 ‘경(敬)’과 ‘직(直)’이 힘을 발휘해 주었고 ‘춘추대의’라는 전통적 유학정신이 죽음을 두렵게 여기지 않는 힘을 솟아나게 하였으리라.

대마도의 엄원 위수령 경비대에 수감된 면암은 너무나 당당한 모습이어서 일본 헌병들도 감히 말을 걸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한 노인 의병장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쌀 한 톨, 물 한 모금인들 왜놈의 것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계속했다. 정신은 살았어도 허약한 육체가 견딜 수 없어 끝내 11월17일 해가 뜰 무렵에 눈을 감아 나라를 위해 순국하는 거룩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채산사(채山祠)와 모덕사(慕德祠)
충남 예산군 관음리의 면암 최익현 묘소. 몸은 묻혔으나 혼은 살아 지금도 일본을 꾸짖고 있을 것이다. <사진작가 황헌만>
경기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嘉채里)는 면암의 태생지이자 한평생을 근거지로 살아갔던 고향 마을이다. 채계(채溪), 채산(채山)이라는 여러 이름으로 알려졌으니 면암의 명성만큼이나 유명한 마을이다. 화서 이항로의 문하를 출입하던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의암 유린석, 용서 유기일 등 당대의 학자들이 출입하던 마을이요, 한말 위정척사파의 큰 의혼이 배태되었던 역사적인 마을이다. 68세에 그곳을 떠나 충청도 청양의 장구동으로 이사했기에, 우리가 찾은 가채리에는 초라하게 ‘채산사’라는 면암의 영정을 모신 영당 하나가 서 있었다. 그곳은 필자의 증조부 민재 박임상(敏齋 朴淋相:1864~1944)공이 33세의 한창 나이에 64세의 노학자 면암을 찾아뵈었던 곳이다. 1896년 갑오경장, 갑오동학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전라도 무안에서 명성 높은 스승의 제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괴나리 봇짐을 지고 찾아갔던 곳이다. 110년이 넘은 지난해, 우리 일행이 찾은 채산사는 너무나 외로웠다. 면암이 1897년 음력 8월이라는 날짜가 명기된 친필로 필자의 증조부에게 내린 증서(贈書) 한 통은 그때의 세태와 면암의 높은 뜻을 지금도 읽게 해준다.

그러나 68세에서 74세, 6년의 세월을 살다가 집안 사당을 고별할 때까지 살았던 청양군 장구동의 ‘모덕사’는 그렇게 외롭지 않았다. 거처했던 유택과 사랑채인 ‘구동정사’, 영정을 모신 ‘성충사’, 위패를 모신 ‘모덕사’, 장서각인 ‘춘추각’, 유물을 온전하게 보관한 ‘대의관’이라는 유물관이 덩실하게 서있는 데다 청양군청에서 공무원이 파견되어 관리하는 관리사까지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은 그런 대로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더구나 경내에서 가까운 뜨락 앞에 커다란 저수지까지 축조되어 경관도 더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그만한 의인, 그만한 학자, 그만한 충신의 사당과 유택이 이 정도로는 관리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필자는 구동정사, 즉 면암이 거처하며 수많은 유림과 학자들이 모여 의병 궐기를 모의하고 춘추대의를 강론했던 사랑채 마루에 앉아 온갖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자가 된 민재공이 1900년 68세의 면암선생을 모시고 수많은 제자들과 동지들이 강론할 때에 함께 참석했던 기록이 있어서다. 그 뒤 논산 노성의 궐리사의 대집회에도 민재공은 동참했으니, 108년 전의 증조할아버지가 앉아계셨던 곳에 증손자인 필자가 앉아 있는 감회는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면암이 세상을 뜬 뒤, 그곳에서 장례식을 치를 때에도 제문을 바치러 민재공은 먼 길을 찾아와 유림장(儒林葬)에 참석한 기록이 있다. 제문도 문집에 온전하게 실려 있다.

모덕사의 제향 때에는 필자의 조부나 선인께서도 참석했지만, 지금 살아계신 사백(舍伯)께서도 가끔 참석했으니 우리 집안과 모덕사의 관계는 그냥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4대 째의 끈끈한 인연이다. 그러나 각설하자.


최충신(崔忠臣)은 순국 후에 더 빛나다
어려서 책을 끼고 화서(華西)의 문을 두드렸고
총명한 열다섯에 벽계(蘗溪를 물러날 제
스승이 면암(勉菴) 두 자를 크게 써서 주니라
잃었던 그 나라를 도로 찾은 오늘이외다
이제는 웃으옵소서 님의 뜻을 이뤘소이다
겨레의 가슴마다에 길이 살아 곕소서
18수로 된 이은상의 면암 찬양 시조의 둘째 연과 마지막 연이다. 이제는 정말로 겨레의 가슴마다에 길이 살아계신 분이 면암이다.
더구나 요즘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일본의 망언과 망발에 더더욱 항일의 투사 면암의 마음은 우리의 가슴속에서 살아나고 있다.

고종 10년, 대원군을 탄핵하다 감옥에 갇혀 목숨이 살아나기 어렵다고 여기다가 그가 살아서 서울 거리를 걸어서 제주도로 귀양가자, 서울의 모든 백성들이 ‘최충신’이 살아났다고 탄성을 올리던 그 장면에서 면암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여겨진다.

조선왕조 최후의 역사책으로는 가장 정확하고 비판적 역사관에 의하여 서술된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은 면암이 일본 정부에 보낸 16조 죄상의 글을 그대로 실었고,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 고종황제에게 유소(遺疏)로 올린 상소문을 온전하게 실었는데 그의 충성심은 말할 것 없지만 유려한 문장의 솜씨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해준다. ‘조선유학사’의 저자 현상윤도 그의 책 ‘척사위정파’의 서술에서 면암의 유소를 대부분 인용하여 마치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버금가는 글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면암의 유해가 대마도에서 부산항에 도착하자 부산시민은 완전히 철시하고 임시의 빈소를 찾아 남녀노소가 통곡하였고, 자택인 청양으로 상여꾼에 의해 운구될 때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애도한 사실만으로도 그의 삶은 죽을 수 없는 위대한 혼을 세상에 남겼다. 마침내 군중의 소요를 염려한 일본당국은 강제로 기차로 운구케 하였고 본가에 도착하여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를 때에는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거대한 유림장으로 장사를 지냈다.

이제 100년이 넘도록 면암의 혼은 묘소에 묻혀 있다. 유적지를 살펴보고 귀로에 찾아간 묘소는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의 1에 있었다. 초라한 선비의 묘소 그대로다. 몸은 땅에 묻혔으나 혼은 살아서, 지금도 면암은 일본을 꾸짖고 계시리라.

당대의 역사가이자 대시인이던 황현, 면암의 죽음에 어찌 그의 평가가 없을 것인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6수로 된 황현의 ‘곡면암선생(哭勉菴先生)’이라는 만사(輓詞)를 외우며 그의 일생을 정리해보았다.

물고기나 용도 오열하고 귀신도 슬퍼하는데
펄럭이는 붉은 명정 바다위에 두둥실
골목마다 통곡소리 삼백 고을에 이어졌으니
나라의 정화(精華)가 배 한척에 가득찼네
끓는 충의의 정신 지하에서라도 왜 사라지랴
충신의 넋은 땅 속에도 변할 리 없네
제(祭)지내느라 술 떨어지니 겨울 해가 저무는데
통곡하는 이 몸도 백발 성성하답니다
(魚龍鳴咽鬼神愁 獵獵紅旌海上浮 巷哭相連三百郡 國華滿載一孤舟 握捲豈待還丹力 藏血번驚化碧秋 酒盡西臺寒日暮 謝參軍亦雪盈頭:六首의 마지막 시)

면암의 순국에 인간은 물론 모든 짐승까지 슬피 울고, 조선 300군의 골목마다에 통곡소리가 이어졌다고 읊었다. 중국의 절개 높은 충신들인 변호(卞壺)·장홍(장弘)·문천상(文天祥)·사고(謝고)를 인용하여 몸과 정신은 죽어서도 썩지 않으리라고 칭송한 만사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번암 채제공의 경륜과 충성심 上
당쟁 소용돌이서 국정을 바로잡다
채제공의 죽음

번암 채제공의 73세 때의 초상화. 정조의 어진을 그렸던 당대의 화가 이명기의 솜씨다. |사진작가 황헌만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평가 받기가 어렵다. 운명하고 난 뒤, 관의 뚜껑을 덮고 나야만 그 사람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옛날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다. 1720년에 태어나 80수를 누리고 1799년 초봄에 세상을 떠난 당대의 명재상이자 경륜 높은 정치가에다 시문에도 뛰어났던 채제공은 죽은 뒤에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채제공은 숙종 46년에 태어나 영조 11년인 1735년에 16세로 향시에 급제하고 영조 19년인 1743년에 24세의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 무렵 영조의 탕평책이 어느 정도 시행되던 때였기에 남인계열이던 채제공은 그런 분위기에서 한림학사가 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영조의 특명에 의해서 29세에 한림벼슬을 거쳐 34세에는 충청도 암행어사가 돼 균역법의 폐단을 알아냈고 변방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국왕에게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벼슬은 1798년 79세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날 때까지 55년의 세월 동안 계속됐고, 영의정이라는 최고의 벼슬에 올라 영조·사도세자·정조의 3대에 걸친 명재상으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던 문신이 채제공이었다.

나라가 어지럽고 세상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때는 언제나 어진 재상이 생각나게 마련. 오늘 우리의 현실도 그렇게 순탄하지 않은 세상이어서 어진 재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번암 채제공의 삶과 높은 경륜의 지혜를 살펴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번암은 애초에 충청도 홍주, 지금의 청양군에서 태어났다. 후손들이 고향을 떠나 흩어져 살아가는 이유로, 고향인 청양읍에는 ‘상의사(尙義祠)’라는 조그만 사당이 있을 뿐 번암의 생가나 유적지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그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5번지가 대표적인 유적지다. 또 근래에는 후손들이 경기도 수원시에 번암의 유품이나 유물의 대부분을 기증해 수원시의 ‘화성역사박물관’에 보존되고 전시될 예정이니 바로 그곳이 번암의 삶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이다.

1776년 3월, 52년 동안 왕위에 있던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57세의 호조판서 채제공은 국장도감 제조에 임명돼 총책임을 지고 영조의 장례를 치렀고, 정조의 치세를 맞아 본격적으로 국왕을 보필하는 희대의 재상으로 온갖 역량을 발휘해 격화된 시·벽의 당쟁 속에서도 국정을 제대로 바로잡는 중신의 임무를 다해냈다. 정조 재위 24년 중 23년을 보좌하고 정조보다 1년을 앞서 영면한 번암은 인신(人臣)으로서는 최대의 예우와 최상의 대접 속에서 장례를 치르게 된다. 평생 동안 번암의 친구로 형조판서에, 홍문제학의 지위에,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세상에 큰 이름을 얻었던 해좌 정범조(海左 丁範祖 : 1723~1801)는 번암의 일대기로 정리한 ‘신도비(神道碑)’라는 장문의 글에서 그가 타계한 뒤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열거하고 있다.

1799년 1월18일 부음을 들은 정조는 식사를 폐하며 슬퍼했고, 바로 하교(下敎)해 자신과 채제공의 깊은 인연에 대한 말을 전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고 성복일(成服日)에는 승지를 보내 치제하고 시장(諡狀)도 없이 시호를 올리게 해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그해 3월28일 장례일에는 임금이 직접 뇌문(文:祭文)을 지어 각신(閣臣)으로 해 읽도록 했다. 신하에 대한 최대의 찬사이자 높은 칭송으로 세상에 없는 예우가 아닐 수 없었다. 파란만장한 번암의 일생은 500여 글자에 가까운 정조의 제문에 모두 열거됐으니, 다른 어떤 역사가의 평도 필요 없이 당대의 제왕이 내린 평가에 온전하게 그의 일생이 정리돼 있다.

3대를 섬긴 재상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선생집’.
번암은 24세 때 문과에 급제해 하급관료에서 영의정이라는 수상(首相)의 지위에 오르고 79세의 치사(致仕) 때까지 55년의 긴긴 세월 동안 영조·사도세자·정조로 이어진 세 조정의 큰 신하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절이나, 그가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삶을 마칠 때까지 번암은 온갖 충성심을 발휘해 세자를 보살폈다. 당쟁에 휩싸여 세자를 폐위한다는 영조의 비망기(備忘記)가 내려졌던 1758년, 39세의 도승지 채제공은 죽음을 각오하고 뿌리치는 영조의 옷소매를 붙잡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하게 애걸복걸해 그 부당한 명령을 취소하게 했던 세자의 충신이었다. 1772년 53세의 판서 채제공은 21세의 세손(世孫)이던 정조의 우빈객(右賓客)이 돼 세손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 이래,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의 정승으로 꼬박 10년을 보필해 정조의 치세를 이룩하게 했다.

1775년 24세의 세손 정조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평안감사로 있던 번암은 다시 궁궐로 돌아와 호조판서를 맡아 세손을 돕고 다음해에 영조가 승하하자 국사를 책임지고 새로운 임금 정조를 보필한다. 사도세자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구제하려 했으나, 1762년 아버지 상을 당해 조정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 그런 끔찍한 뒤주 안의 죽음이 일어나고 말았다. 수십년간 영조의 조정에서 중신으로 일했던 채제공이었기에, 영조도 그를 너무나 잘 알았고 그의 능력을 크게 인정했다. 마침내 영조는 왕위를 세손인 정조에게 물러주기 직전, 채제공에 대한 명언을 남겼다. 정조가 전해준 말에 의하면, “영조께서 제 손을 잡고 해주시는 말씀에, ‘나와 너로 해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은혜를 온전하게 해준 사람은 채제공이다. 나에게는 순신(純臣)이지만 너에게는 충신이다.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해주셨다”라는 내용이었다. 죽어서 말이 없는 사도세자야 채제공을 평할 수 없었지만, 영조와 정조는 채제공에 대해 ‘순신’과 ‘충신’이라는 가장 명확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는 것이다.(정약용의 ‘번옹유사’에 나오는 이야기)

1791년은 ‘신해옥사’가 일어난 해다. 번암의 나이 72세로 몇 년째 정승의 지위에 있으며 노재상으로 마음껏 정치의 경륜을 펴며 정조의 문예부흥기가 전성기에 이르던 때다. 70평생 동안 지었던 시문(詩文)을 정리해 ‘번암시문고’라는 이름으로 엮어놓자, 그 소식을 들은 정조는 그 시문집에 대한 평을 겸한 서문을 지어주었다. ‘어제어필(御制御筆)’이라고 앞에 쓰고 ‘서번암시문고(書樊巖詩文稿)’라는 글을 내렸다. 제왕이 신하의 문집에 서문을 짓고, 친필로 써서 하사하는 일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세상에 드문 일이자 신하로서의 영광은 어떻게 비교할 방법이 없는 일이다. 노재상의 글솜씨를 찬양하고 그의 인간됨을 칭찬한 전고에 없는 큰 문자다.

걸출한 기운 구사하며 필력도 굳세니
초상화의 그대 모습 그대로 보는 듯하오
거침 없이 치달리는 곳은 큰 파도의 기세가 있고
강개한 대목에는 감개하고 슬픈 소리 많아라
북극의 풍운은 만년의 만남에 밝았고
창강의 갈매기는 옛 맹약에 속했네
호주(湖洲) 이후에도 그만한 후손이 있으니
중국의 사안(謝安) 같은 재상 문장가가 나왔음을 다시 기뻐하노라

종고조인 호주 채팽륜은 판서에 대제학으로 큰 문장가였다. 그 후손에 번암이 나왔음을 칭찬하고 높은 재상의 지위에서도 시문으로 뛰어났다는 내용은 얼마나 정조가 번암의 시문을 애호했는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60의 나이에야 정조와 번암은 함께 정치를 시작했다. 그래서 만년의 만남이 밝았다고 했다. 생전에도 정조는 모든 정치를 채제공에게 의뢰해 시행했다. 채제공의 문집도 임금인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했고, 또 책의 체제나 편찬도 왕명에 의해서 정리돼 그대로 따랐다.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 대부분을 채제공과 의논했고, 채제공의 조언을 받아 집행했음을 문집의 소차(疏箚)조항이나 서계(書啓)나 헌의(獻議)에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정조시대의 대부분의 정책이 채제공과의 의논 속에서 나왔음을 바로 보여주고 있다.

채제공의 번암집(樊巖集)
1788년에서 1790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우의정과 좌의정으로 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제대로 강화시킨 채제공은 1793년 새로 설치된 화성유수부의 초대 화성유수가 돼 정조의 꿈을 실현하는 일에 앞장선다. 화성유수에서 바로 영의정에 올라 1794~1796년 3년 가까운 세월 동안 화성을 쌓는 성역의 최고 책임자인 총리대신이 된다. 그의 지도력으로 화성을 2년 9개월 만에 완공했다. 탁월한 영의정 채제공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비명에 보냈던 정조의 한을 그렇게 해서 풀어주었다. 이런 신하를 정조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정조는 생전에 시문집의 평을 써준 글을 문집의 서문으로 삼아 국가에서 간행하도록 채제공 장례일의 치제문에서 엄명했다.

채제공의 장례를 치르자 이가환·정약용 등이 번암의 양자 채홍원과 힘을 합해 문집을 교정하고 정리해 인쇄만 하면 간행되게 했으나, 채제공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에 49세의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그 다음해인 1801년 신유년에 신유옥사가 일어나 채제공 일파는 온통 풍비박산으로 궤멸되면서 문집간행도 중지됐다. 1801년 가을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신서파의 원로로 지목받아 채제공은 모든 관작이나 시호까지 추탈당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정조 재위 24년 동안 큰 힘을 못 쓰던 벽파들이 정조의 죽음으로 재등장, 반동보수로 우회전하여 일대 보복정치를 감행해 ‘번암집’은 간행이 중단돼 다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번암 채제공의 경륜과 충성심 下
독과점 철폐 경제 살린 명재상
신서파의 수난과 벽파의 득세

번암 채제공의 묘소 앞에 서있는 어사뇌문비(御賜 文碑). 정조가 직접 애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 사진작가 황헌만
영조에서 정조로 이어지던 조선후기, 이른바 문예부흥기라는 밝은 역사의 시대를 이끌었던 노재상 번암대감이 세상을 뜨고 정조가 승하하자 밝고 찬란했던 역사는 큰 서리를 맞으면서 반동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오랫동안 궁중의 안방에 묻혀지내던 영조의 계비 정순대비가 11세의 어린 순조를 수렴청정하면서 모든 실권이 그에게 돌아가자 바야흐로 벽파의 시대가 왔다. 1762년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뒤주에 갇혀 죽게 했던 주동자들이 대체로 벽파에 속한다.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할 일을 한 적이 없고 영조의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던 채제공 일파가 다름 아닌 시파였다. 시벽의 싸움은 대단한 당쟁이었다. 벽파의 방해로 천신만고의 어려움을 겪고 겨우 왕위에 오른 세손 정조는 자연스럽게 시파를 선호하지 않을 수 없었고, 채제공·이가환·정약용 등 시파의 유능한 신하들이 정조를 보필하면서 정조의 치세가 왔다. 그러나 정조의 승하는 이런 정치판도를 바꿔놓았다. 어린 순조를 대신한 정순대비의 집권으로 시파는 신서파, 즉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종교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파와 공서파, 즉 서양의 모든 것은 ‘사(邪)’라고 규명하며 사를 물리치기 위해 신서파를 공격해야 한다는 정파로 갈리게 되었다.

정조의 장례를 마친 1800년 11월이 지나 1801년 신유년이 되자, 그 해 벽두부터 정순대비의 ‘척사윤음’이 내려 천주교와 관계되는 모든 사람은 역적으로 몰아 코를 베어 죽여야 한다는 법령이 반포되기에 이른다. ‘신유옥사’라는 전대미문의 대학살이 진행되었다. 어떤 기록에는 죽은 사람만 300여 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이가환·권철신·이승훈·정약종 등이 옥사하거나 참수 당했고 정약용 형제 등 수많은 사람이 귀양가는 핍박을 받아야 했다. 1801년 가을의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심지어 채제공까지도 관직을 추탈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역사의 반동은 또 다른 힘에 의하여 그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그 신유옥사 이후 18년째에 다산 정약용은 귀양지에서 돌아왔고, 23년째인 1823년에 채제공은 영남 선비 1만여 명의 상소에 의하여 다시 모든 관작이 복권되고 신원될 수 있었다. 그 때에야 ‘번암집’도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된다.

직신으로, 경륜 높던 영의정
1788년 69세 노령의 나이에 우의정에 올라 1798년 79세로 모든 벼슬에 물러나던 10년 사이, 번암은 정승의 지위에 번갈아 오르며 최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1791년 신해년에는 조선왕조 상업사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 바로 채제공이 도고법(都고法)의 폐지를 주장한다. 독점적인 매점(買占)행위가 ‘도고’인데 정부에서 인정해준 ‘육의전’ 이외의 ‘시민도고법’이라는 독점행위가 난무하여 상거래의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고, 힘없고 약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상거래가 매우 힘들고 어려웠다. 채제공은 이런 악폐의 철폐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임금이 이것을 받아들이자 마침내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는 획기적인 조치가 이루어져 조선후기 상업사에 큰 변혁을 가져오기에 이른다. 모두 채제공의 정치적 경륜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18세기 후반 중국을 통해서 서양의 문물이 급속하게 조선으로 밀려들어왔다. 특히 연암 박지원 일파인 북학파에서도 중국으로부터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이용후생법을 배워오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던 때가 그 무렵이다. 박제가의 ‘북학의’ 저술이 있던 시절이다.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남인계열에서도 서양의 과학사상은 반드시 수입하여 이용후생의 방도가 강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른바 ‘신서파’가 그들인데 매우 진보적인 그룹이었다. 이가환·정약용·이기양·권철신 등이 그들이고, 이들의 후원세력이자 지지세력의 중심이 채제공이었다. 뒷날 이가환이나 정약용도 그랬듯이 채제공은 서양사상인 천주교를 신앙으로 믿는 문제에는 절대로 반대입장에 있었다.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이용후생의 논리가 그 무렵 그 정도로 도입되어 발전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채제공의 힘이 가장 크게 적용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불의나 부정직에도 절대로 굽힐 줄 모르던 채제공, 특히 홍국영의 세도에 억울하게 당한 곧고 바른 사람은 모두 신원하여 명예를 회복케 했던 것도 채제공의 노력에서 왔고, 유능한 인재들을 강력히 추천하고 발탁하여 제대로 행정과 통치가 이룩되도록 임금을 설득하는 경륜을 지닌 사람도 채제공이었다.

채제공의 묘소와 영정
생가나 종가가 유지되지 못한 선현들의 유적지를 찾기는 어렵다. 그만한 일세의 정치가 채제공의 유적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다행히 근래에 6대 후손인 채호석(蔡虎錫)씨와 그의 부인 김양식(金良植) 시인이 어렵게 보관해오던 유물과 유품을 모두 수원시의 화성사업소에 기증했기 때문에 국보급 유물들을 접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가장 덥다는 금년 8월8일은 말복날이었다. 우리 일행은 화성사업소의 김준혁 박사 안내로 번암의 유적지를 찾아나섰다. 정조는 자신의 영정을 그리게 한 후, 어명으로 채제공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궁중에 보관하고 여본은 본가에서 보관토록 하였다. 당대의 화가 이명기가 어진을 그린 솜씨로 73세의 노재상 채제공의 초상화를 그렸다. 살아서 천하를 호령이라도 하는 듯한 품위 있고 유순한 모습이 너무나 너그럽게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새것처럼 온전하게 보관될 수 있었는지, 후손들의 지극한 정성에 감복할 뿐이다.

이런 화상에 바친 정약용의 찬양시는 채제공의 일생을 넉넉하게 설명해준다.
바라보면 근엄해 무섭게도 보이지만
대면해보면 유화하여 뜻이 잘도 통하네
고요히 계실 때야 쌓아둔 옥이나 물에 잠긴 구슬 같으나
움직였다면 산이 울리고 바다가 진동하도다
거센 파도 휘몰아쳐도 부서지지 않고
돌 무더기 짓눌러도 닳지를 않네
아무리 짧고 길며 작고 큰 창날이 겨누어도
정승으로 발탁됨을 막지 못했네
그 웅위하고도 걸특한 기개는
천 길 높이 깎아지른 절벽의 기상이었지만
남을 해롭게 하거나 사물을 해치려는 생각은
조금도 마음속에 두질 않았네
군자답도다 이 어른이여
정약용의 ‘번옹화상찬(樊翁화像贊)’
이런 분 아니면 백성들이 그 누구를 믿겠는가. 평생에 아들처럼 귀여움을 받았던 정약용은 평생의 은혜를 이 화상찬으로 갚았다. 42세 연상이던 번암, 정약용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10세 연상인 번암을 가장 경륜 높은 정치가로 여기며 아버지나 스승처럼 따르며 많은 것을 배웠다. 정약용의 꿈은 채제공 같은 국가 원로이자 대신이던 재상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뜻과 같지 않아, 재상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희대의 학자로 남고 말았다.

1월18일에 운명하고 아직 상중이던 한 달 뒤인 2월19일자로 임금의 교지가 내렸다. 의정부 영의정, 경연·홍문관·춘추관·관상감의 영사(領事)를 지냈고 규장각 검교제학을 지낸 채제공에게 문숙공(文肅公)이라는 시호를 증한다는 내용이다. 영의정에 문숙공, 그만하면 최고 정치인·문신에 맞는 시호임에 분명하다

용인의 묘소를 찾아
화성사업소에서 유품과 유물을 살펴본 뒤 우리는 또 용인시 처인구 역북리에 있는 묘소를 찾았다. 참으로 더운 복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꼭 한번 찾아보고 싶었던 번암대감의 묘소에 올랐다. 그만한 학식·국량·인품으로 조선 500년의 대표적 재상의 묘소에 참배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바라던 소망이었다. 그래도 볼품 있고 소박하게 꾸며진 묘역이나 묘소, 그렇게 서운한 생각은 없었다. 입구에 비각으로 단청된 건물 앞에 ‘어사뇌문(御賜뢰文)’이라는 제목 아래, 480여 글자에 이르는 장문의 애도문이 있었다. 장례일에 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써서 매장하기 전에 낭독하고 뒤에 묘소 앞에 비로 세우도록 명령하였기에 지금은 ‘뇌문비(뢰文碑)’라고 알려진 세상에 드문 빗돌이다. 번암의 죽음이 얼마나 애통했기에 일국의 제왕이 직접 애도문을 짓고 글씨까지 썼다는 것인가. 대단한 일이다. 그만큼 채제공은 크고 높았다.

묘비로 세워져 있고 ‘번암집’에도 실려 있지만,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도 ‘문숙공 채제공의 장례일에 치제한 글’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의정부영의정 규장각제학 화성부유수 장용외사 사시(賜諡) 문숙공 채제공의 장례일에 규장각 신하를 보내어 그 영전에 대신 영결을 고하게 하노라”라고 풀어쓰고는 네 자로 된 120줄의 애도시이니 480자로, 500여 글자에 이른다는 정조의 말에 부합하고 있다. 세손시절부터 재위 24년 동안 가장 가깝게 믿고 의지하며 함께 30년의 정치역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우뚝 홀로 서서 어떤 세속의 일에도 흔들림 없던 군자(君子)라고 추앙하는 글을 썼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완역한 ‘홍재전서’에 온전하게 실려 있으니 채제공의 일생은 뛰어난 학자군주 정조의 글솜씨에서 그대로 살아있게 되었다.

“사람과 함께 없어지지 않는 것은/서가에 가득한 문고(文稿)이니/인쇄에 부쳐/장차 오래 전하게 하려네/친히 뇌문(뢰文)을 지으니/오백여 말일세/평소의 일을 두루 서술하니/나의 글에 부끄러움은 없네/아들 홍원(弘遠)에게 이르노니/선친 욕되게 말고 그대로 따르라.”

이렇게 글을 마쳐 자신의 애도의 정을 토로하였다. 신도비도 웅장한 꾸밈도 없는 단조롭고 아담한 번암의 묘소, 정조대왕의 뇌문 속에 그의 일생이 살아있고, 문집과 왕조실록, 홍재전서에 시와 문이 전해지고 있는 한, 그는 조선의 탁월하고 뛰어난 명재상으로 길이 빛나리라.

조선 최후의 문장가 이건창의 삶과 사상 上
논객들이 첫손 꼽은 강화학파 효장
강화도에서 피어난 문장과 의리

조선의 팔도강산, 그 땅 어디에 역사의 흔적이 없는 곳이 있으며 그 땅 어디에 조선의 사상과 혼이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모든 곳 중에서도 강화도는 특별하다. 고려시대에는 몇 대에 걸쳐 왕도(王都)로서 역사의 한복판이기도 했으나 고려인의 넋을 지키고 국가를 지켜내려던 항몽정신의 본거지였고 삼별초의 피나는 항쟁정신이 그대로 간직된 역사의 땅이다.
영재 이건창의 생가. | 사진작가 황헌만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서세동점의 외세가 물밀듯 몰려들어올 때에는 민족혼이 거세게 고동치기도 했지만 병자호란의 국가적 비극에는 얼마나 많은 충신열사들이 몸을 던지고 목숨을 끊으며 조선의 혼을 발휘했던 곳이던가. 의기가 펄펄 넘치던 투쟁의 혼만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정통의 유학사상에서는 크게 대접받지 못하던 소수파의 학문이면서도, 끝내는 크게 학문적 성과를 이룩해낸 ‘양명학’이라는 큰 학맥이 생성, 발전돼 우리 학술사에 얼마나 큰 빛을 발해주었던 곳인가. 포은 정몽주의 후손이자 정승 정유성의 손자로 효종의 부마 정제현(鄭齋賢)의 아우였던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1649~1736)가 강화도의 하일리에 숨어살면서 제자들을 모아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이유로 양명학, 즉 ‘강화학파’라는 독특한 학파가 이룩되기에 이르렀다.

강화도 출신으로는 최후의 강화학파의 효장이 다름 아닌 이건창(李建昌:1852~1898)이다. 대대로 이름난 벼슬아치나 학자들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영재(寧齋) 이건창은 자가 봉조(鳳藻:鳳朝)요, 당호는 명미당(明美堂)이었다. 영재의 할아버지 사기 이시원(沙磯 李是遠:1790~1866)은 그의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외국의 군대에 함락된 병인양요의 억울함을 참지 못해 형제가 나란히 목숨을 끊어 자결했던 당대의 의인이다.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른 고관대작으로 나라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린 할아버지의 의혼을 이어서 영재도 나라를 위해서는 의로운 벼슬아치로 살았지만 끝내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명성을 얻어 의리와 문장이 함께 빛나는 역사의 땅으로 강화도를 자리매김해주었다.

이건창의 가계
조선 제2대 임금은 정종(定宗)이다. 정종의 별자(別子)에 후생(厚生)이라는 분이 덕천군(德泉君)에 봉해졌는데 그 후손들은 왕통을 이은 집안을 제외한 전주이씨 집안에서는 크게 현달한 사람이 많은 유명한 집안이었다. 인조 때의 판서에 오른 석문 이경직(石門 李景稷), 영의정에 오른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 형제가 대표적으로 유명한 분들인데 석문의 후손에는 높은 벼슬의 후손도 많았지만 특별히 뛰어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해 학술사에 큰 공헌을 남긴 분들이 많았다. 이광사·이광여·이광명 등이 학자로 이름이 높았고 실학자로서 크게 알려진 이긍익·이충익·이영익 등도 모두 그 집안 출신들이다. 연려실 이긍익은 이광사의 아들로 ‘연려실기술’이라는 대저를 남긴 분이었고, 이충익-이면백-이시원-이상학-이건창-이건승(李建升:1858~1924)으로 이어지는 학자들의 계통은 바로 이건창의 집안이 어떤 가문인가를 그냥 짐작하게 해준다.

영재의 문집인 ‘명미당집’.
강화도 초봉산(椒峯山) 아래에 살면서 초원(椒園)이라는 호로 불리던 이충익은 벼슬보다는 학자로 높은 이름을 얻었고, 그 아들 대연 이면백(垈淵 李勉伯)은 진사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고 다산 정약용 등과 교류가 있었던 당대의 학자였다. 그 아들이 이시원 판서, 판서의 아들이 이상학(李象學)으로 양산군수를 지냈고 그 아들이 이건창·이건승이고 그의 당질이 난곡 이건방(蘭谷 李建芳)으로 위당 정인보의 스승이었다. 모두 양명학을 계승한 강화학파의 주요 멤버들이었다.

이건창·이건승·이건방의 세 학자만으로도 강화도는 학문의 고장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장 어렸던 이건방은 1861년생으로 193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흐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찾은 강화도의 의리와 학문은 크게 보이지 않고 매우 쓸쓸하기만 했다.

사기리(沙磯里)의 옛터를 찾아서
추석이 가까워오는 9월12일, 청랑한 가을 날씨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코스모스 길이 시원하게 뚫린 오후, 우리는 강화도로 건너가 이건창의 고향 마을 사기리를 찾았다. 그곳이 어떤 곳인가. 대대로 양명학을 배워서 가르치던 곳이요, 충정공 이시원이 과거에 급제해 이조판서에 오르고 나라가 위급해지자 아우와 함께 자결했던 의향이 아닌가. 이시원의 손자 이건창 형제들이 태어나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조선의 당쟁사를 가장 정직하고 바르게 정리했다는 이건창의 저서 ‘당의통략’이라는 명저가 저술된 곳이다. 다행히 강화군 당국의 배려로 터만 남았던 그곳에 초가집으로 새롭게 복원해 영재 이건창이 살았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지금이야 모두 농토로 변한 곳이지만 당시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해변가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곳 어디에 영기(靈氣)가 서렸기에 그만한 인물들이 태어났을까. 영재의 생가는 마을의 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 입구에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가 영재의 생가를 살피려 왔다는 것을 알아챈 탓인지 묻지 않은 말을 했다. “이 집의 앞길은 아무나 그냥 지나는 곳이 아니여. 대감님 집이기에 말이나 가마는 타고 지나가지도 못하고 반드시 내려서 걸어가서도 안 되고 기어가야만 되었어. 우리 어머님이 시집오시며 가마를 타고 오시다가 이 집 앞에서는 내려 그냥 기어서 오셨다고 들었어!” 70이 넘은 어떤 노인의 말씀이었다. 이 한마디 말에 그때 그 시절 집안의 영화가 어느 정도였나를 금방 짐작하게 해준다. 이시원이 이조판서, 아들 이상학이 양산군수, 손자 이건창이 15세에 문과에 급제해 암행어사를 지내고 황해도 관찰사와 공조참판에 이른 집안이니 어떻게 홀대할 방법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다. 후손이 거처하지 않고 빈집으로 외형만 초가집이지 혼과 삶이 없는 집이어서 너무나 쓸쓸했다. 그 집에서 멀지 않은 건평리(乾坪里)의 영재 선생의 묘소를 들렀을 때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말문이 막혔다. 강화학파의 학맥을 잇고, 판서 이경직의 핏줄을 이어 할아버지 이조판서의 무릎에서 자랐고, 자신이 공조참판에 올라 조선후기 최고의 문장가이자 ‘당의통략’의 저자로 그만한 명성을 얻은 위인의 묘소가 이렇게 버려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아무리 도가 무너지고 인심이 변했다 해도 이렇게 돼도 되는 것인가. 생전에 사람 구실을 못하고 거지로 살다가 죽어간 사람의 묘소라고 해도 이렇게는 버려두지 못했을 것이다. 문화재 당국이나 행정 당국은 무엇을 하는가. 아니, 영재 이건창의 묘소가 어떤 민간인의 집 뒤꼍의 풀에 가려서 묘소인 것도 알 수 없게 버려져 있어야 되느냐는 것이다.

이건창의 친구들
망해가던 조선왕조의 끝자락, 대단한 위인들이 셀 수 없이 태어나 활동했건만 끝내 망국의 비운을 막지 못하고 나라는 망해버렸다. 의혼으로, 학문과 문장으로, 꺼져가던 조국의 빛을 회복하려 노력했던 대단한 인물들이 영재 곁에 모여 있었다. 해학 이기,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은 영재와 함께 나라를 걱정했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그리고 영재가 강화도에서 이웃에 살던 고관 출신 두 친구를 함께 거명했다. 이계 홍양호의 후손인 홍승헌, 하곡 정제두의 6대종손인 정원하는 두 분 모두 참판의 지위에 오른 분인데 이들은 세 사람이 연명해 상소를 올리며 나라를 제대로 바로잡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일 때문에 모두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런 가까운 친구들이 있었기에 사후의 영재는 외롭지 않았다. 아우 이건승의 노력으로 영재의 문집인 ‘명미당집’ 20권이 중국에서 활자로 간행될 수 있었고, 김택영은 문집의 서문을 지어 영재의 인품과 문장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내렸고, 매천 황현은 영재의 죽음에 제문과 만사를 지어 슬픔도 표했지만 인물에 대한 평도 올바르게 내렸다. 이건승은 죽은 형의 행장을 지어 일생을 소상하게 밝혔고, 친구 이조참판을 지낸 홍승헌은 영재의 묘갈명을 지어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의 일생을 대체로 바르게 평하고 있다.

해학 이기(1848~1909)는 김택영의 문집인 ‘소호당고’의 서문에서, 조선 500년간 당·송나라의 문장을 이은 조선인으로는 월사 이정귀·계곡 장유·농암 김창협·연암 박지원·연천 홍석주·대산 김매순 등 5~6명뿐인데 이들을 이을 수 있는 사람은 이건창과 김택영 두 사람이라고 했다. 김택영도 영재의 문집 서문에서 조선 후기의 문장가로는 홍석주와 김매순인데 이들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이건창으로 조선 후기 3대가라고 지목했다. 조선 500년을 대표하고 조선의 끝자락을 상징할 수 있는 문장가가 바로 이건창이라는 것을 당대에 함께 글을 짓고 세상을 논했던 친구들이 사심없이 내린 평가였다면 그 이상의 어떤 평가가 필요하겠는가.

이건창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아우인 경재(耕齋) 이건승이다. 나라가 망하자 친구들과 함께 자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죽기가 쉬운 일인가. 마침내 형의 친구이자 자신의 친구들인 홍승헌·정원하 등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풍찬노숙으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나, 이제는 종적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너무나 슬픈 일이다.

조선 최후의 문장가 이건창의 삶과 사상 下
탐관오리 벌벌 떨게 한 암행어사, 백성의 아픔 절창하다
조선 7대 문장가

이건창과 가장 많이 어울리면서 문장과 학문을 논하며 세상을 걱정했던 친구는 창강 김택영이었다. 전라도 구례에서 살았던 매천 황현도 지기지우였으나 살아가던 곳의 거리가 서로 멀어 자주 만나거나 어울릴 수 없었음은 당연했다. 서울과 강화도는 멀지 않은 곳이요, 벼슬살이에 서울 생활이 잦았던 이건창은 활동무대가 서울이던 김택영과는 자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최근의 기록에서 강화학파의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고, 또 강화학파라는 이름을 명명한 민영규 교수는 김택영이 제대로 이건창을 알지 못했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도 있으나 무엇으로 판단해도 김택영은 영재의 지기지우였다.
영재의 묘소. 묘소인 것도 알 수 없게 쓸쓸히 버려져 있었다. |사진작가 황헌만

김택영은 고려·조선 천년의 문장가를 식별하여 고려의 김부식·이제현 두 문장가에 조선의 장유·이식·김창협·박지원·홍석주·김매순·이건창 등 7인을 더해 ‘여한9가’, 즉 고려와 조선의 9대 문장가를 선정하였다. 나라가 망할 무렵 중국으로 망명해버린 김택영은 자신의 제자인 개성의 왕성순(王性淳)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라는 망했지만 역대 문장가들의 글은 없어지지 않고 세상에 영원토록 전해지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왕성순은 김택영의 명을 받아 그 책을 간행하였다. 자신의 스승인 김택영의 글을 뽑아 함께 넣어 ‘여한10가문’이라는 책으로 중국 양계초의 서문을 받아 1921년 중국의 남통에서 간행하였다. 이른바 ‘여한10가문’이라는 책이 그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그렇다면 이건창은 김택영에 의하여 뽑힌 조선 7대 문장가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이건창이 조선 7대 문장가로 뽑힘은 김택영 개인의 의견은 아니었다. 이미 언급했던 대로 해학 이기도 이건창은 문장가의 반열에 오름을 말하였다. 당대의 공론에 의하여 그러한 선발이 가능했으리라 믿는다.

문장가에 못지않은 시인
이건창, 타계한 지 벌써 110년이 넘었다. 근래에는 그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고 있다. 문장가와 시인이기 이전에 그의 마음에는 뜨거운 애국심과 인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라의 위급한 때를 당해 할아버지가 자결하던 때가 영재의 나이 15세였다. 이미 학문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고, 세상물정을 대부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시절이다. 그 해에 문과에 급제, 조선 500년 최연소 문과 급제자임도 그의 자랑이었다. 영재가 살아가던 시대가 어떤 때인가. 병자수호조약이 이룩되기 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쳤고, 임오군란에 갑신정변, 갑오동학운동에 갑오경장, 급변하던 시국, 마침내 을미년에는 민비시해라는 전대미문의 국란이 일어났다. 왕비가 외국인의 침입으로 살해되는 비통한 시절, 그에게 어찌 나라에 대한 아픔이 없었겠는가.

이 무렵, 영재는 ‘민시우국(憫時憂國)’, 시대를 고민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수많은 시를 짓는다. ‘전가추석(田家秋夕)’이나 ‘협촌기사(峽村記事)’ 같은 절창의 시는 바로 다산의 ‘상시분속(傷時憤俗)’,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는 시들을 연상케 해준다. 국가나 인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애정이 있었기에, 가난하고 병들어 끼니도 제대로 못 먹는 인민들의 아픔에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핍진하고 생동적인 현실비판시를 저작하기에 이른다. 인민의 아픔에 한없이 속상해하면서도 그가 지나거나 목격했던 조국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의 혼이 서린 곳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곱고 아름다운 시어로 생생하게 묘사해냈다.

조선의 직신으로, 누구에게도 아부하거나 굽실거릴 수 없던 영재, 암행어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서는 탐관오리들을 한 치의 양보 없이 무섭게 징치하는 무서운 어사였다. 온갖 위계와 꼬임으로 탄핵에서 벗어나려던 수령들의 농간에도 전혀 흔들리거나 굽힘없이 참으로 통쾌한 어사 임무를 수행하였다. 오죽했으면 고종황제가 도신(道臣)이나 수령을 제수할 때 올바른 목민관 생활을 당부하면서 “만약 잘못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이건창을 암행어사로 파견하겠다”고 하고, 벼슬아치들이 암행어사 이건창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겠는가.

소론과 남인
이건창의 가계는 오래전부터 소론계의 집안이었다. 강화학파는 주로 소론계로 형성된 학파였다. 노론계와는 대립관계였고, 그 때문에 노론계와 반대파이던 남인계와 소론계는 가까웠다. 양명학의 원조 정제두의 손서에는 이광명(李匡明)과 신대우(申大雨)가 있었다. 이광명은 이건창의 5대조였고, 고관대작이던 신대우는 다산 정약용과 가까웠던 석천 신작(石泉 申綽) 형제들의 아버지였다. 때문에 이건창의 선대는 정약용 집안과도 교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강화학파의 이긍익·이충익·이영익 등이 독실한 실학자였고, 다산 일파도 뛰어난 실학자였음을 상기하면 이들의 교류는 너무나 당연했다. 특히 노론들과도 학문적 교류에 소홀하지 않았던 정약용의 입장에서 보면 실학자들과 교류는 정말로 당연했다. 교류의 구체적인 증거가 많지 않으나 짐작이 가는 점들은 매우 많다.

정약용이 나라와 인민을 사랑했던 이유로 그런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시를 많이 읊었듯이, 이건창도 그런 시를 많이 읊었다. 정약용이 지나거나 목격했던 강산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땅을 놓치지 않고 시를 읊었듯이 이건창도 그가 지나간 강산이나 역사적인 땅에 대한 시를 많이 지었다. 중국에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읊은 시, 암행어사로 다니면서 목격한 백성의 아픔을 노래한 시는 대체로 다산풍이다. 한때 전라도 보성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오면서 지났던 전라도의 명승지나 유적지에 대한 이건창의 기행시는 절창이 아닌 것이 없다. 그는 그만큼 뛰어난 시인이었다. 한말 호남의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노사 기장진의 유택을 찾아가 읊었던 시, 그 유명한 면앙정 송순의 정자 면앙정에서 읊은 시들은 지금 읽어도 명작임을 금방 이해하게 된다. 대단한 시인이었다.

이건창은 충신의 손자로 15세라는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곧고 바른 그의 성품과 높은 기개 때문에 당로의 고관들과는 언제나 마찰을 빚어 벼슬길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30년의 벼슬살이에 참판의 지위에 올랐으나 47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타계하면서 애석한 생애를 마쳤다. 대원군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권신들과도 늘 상반되는 견해로 귀양살이를 떠나거나 고향에 칩거하는 때가 많았다. 그런 불우한 시기에 그는 시로 마음을 달래고 저술로 울분을 풀었다. 그의 뛰어난 산문이나 시들의 대부분이 그런 시절에 완성되었으니, 불우한 시절이 있었기에 그의 문장과 시가 세상에 이름을 날린 것도 사실이다.

‘당의통략’이라는 명저
조선 500년의 당쟁은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다. 서인과 동인으로 싸우다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고 끝내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면서 4색당파라 일컫지만, 거기도 갈래갈래 나뉘어 누구도 제대로 가닥을 추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당쟁의 계파다. 소론 계열의 이건창도 당색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가장 공정한 안목과 비판정신으로, 당색이나 가문의 계통에 구애받지 않은 당쟁관계 저술이 바로 ‘당의통략’이라는 책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일단 조선의 당쟁사를 거론할 때 이 책을 참고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충익-이면백-이시원으로 내려오는 역사학에 대한 추적이 바로 ‘당의통략’에 간추려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건창은 자신의 조부 이시원의 행략(行略)이라는 글에서 할아버지가 보학에 뛰어났음을 언급하였다. 지나간 역사나 남의 집안 내력을 그만큼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할아버지 슬하에서 그런 내용을 많이 듣고 알았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가학(家學)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런 가정의 학문에서 이건창 같은 뛰어난 문장가·역사가가 나올 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강화도, 산자락이나 골목마다에 역사의 흔적과 문화유산의 보고들이 널려 있다. 남한 땅에 단군의 유적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 강화군 문화원 양태부 사무국장의 안내로 돌아본 강화도는 대단한 역사의 땅이다. 하곡 정제두의 묘소도 둘러보고 이건창의 유적지를 살펴보면서 또 하나의 제안이 생각났다. 형인 이건창의 유적지가 제대로 복원되고 아우 이건승의 역사적 유적이 복원되어야 한다. 그만한 애국지사, 학자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야 되겠는가. 문화재 당국은 제발 영재의 묘소를 제대로 단장하고 이건승의 유적도 제대로 찾아내 새로 꾸며야 한다고 여긴다. 조국의 미래를 위해 계명의숙을 창설하여 육영에 힘쓰고 ‘서행별곡(西行別曲)’이라는 우국개세의 국문시를 지은 그의 업적은 반드시 재조명되어야만 한다.

영재의 죽음
1852년 음력 5월26일 태어난 이건창은 47세를 일기로 1898년 6월18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친구 매천 황현은 3년이 지나기 직전, 구례에서 강화도까지 천리길을 걸어서 문상을 왔다. 슬프고 애처로운 제문과 만사를 지어 가지고 와서 영위에 고해 바쳤다. 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그런 나라의 슬픔까지를 영재의 죽음에 함께 담은 너무도 슬픈 제문이었다. 뒤에 매천은 ‘매천야록’이라는 뛰어난 역사책에 이건창의 졸기(卒記)를 올렸다. 먼저 죽은 뛰어난 문장가 친구를 그렇게 해서 이별하였다.

“전 참판 이건창이 죽었다. 그는 성품이 청렴 개결하여 악을 증오하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벼슬길이 순탄치 않아 급제한 30년 만에야 가선대부(참판)의 위계에 올랐다. 갑오년 6월에 통곡하고 고향에 내려가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았다. 중풍으로 시골집에서 죽었으니 47세였다. 소식을 들은 모두가 애도를 표했다. 이건창은 문장이 고아하여 홍석주와 어깨를 견줄 만하였다.”

패악한 정치에 분노, 자연에 숨은 도학자 김인후 上
천재학자, 군왕 실정 서슴없이 꾸짖다
하서 김인후의 생애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는 조선 중종 5년인 1510년 음력 7월19일 오후,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에서 태어났다. 큰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참봉이라는 말단 벼슬에 그친 아버지 영(齡)이라는 분은 행실이 옳고 글도 잘해 선비의 칭호가 높던 분이었다. 하서는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기상이 헌걸차서 비범한 인물임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나타나 있다.
김인후의 생가는 빈터만 쓸쓸하게 남아있고,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했던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만 근래에 복원되어 있다. | 사진작가 황헌만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그냥 문리가 터졌을 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태도가 일반 아이들과는 달랐다. 하루는 파(蔥)를 들고는 하나하나 껍질을 벗기며 속 내부까지 파헤치는 놀이를 하자, 아버지가 그런 장난질을 하지 말라고 타이르니까, 물건이 태어나는 이치를 알아보고 싶어서 그랬노라고 답해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알았다는 기록도 있다. 5세에 시를 짓기 시작했고, 6세에는 저 인구에 회자하는 <영천시(口永天詩)>, 즉 하늘을 읊은 시를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모형은 둥글고 아주 커서 너무나 현묘해(形圓至大又窮玄)
넓고 넓은데 허허롭게 땅 가를 둘렀네(浩浩空空繞地邊)
덮여 있는 사이에 온갖 만물 포용했는데(覆巾韋中間容萬物)
어쩌다 기(杞)나라 사람들 ◀무너질까 걱정하지(杞國何爲恐顚連)

지구를 통째로 뒤덮은 하늘, 크고 넓고 현묘하기까지 하건만, 중국의 기(杞)나라 사람들은 왜 하늘이 무너질 것을 걱정했느냐라는 5세 어린이의 지적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구겠는가. 이런 시가 사람들 입으로 전해지면서 김인후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 무렵 전라도 관찰사로 정암 조광조의 숙부이던 조원기(趙元紀)공이 하서 소문을 듣고 전주 감영에서 장성의 하서를 찾았다. 재주를 시험해보고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솜씨에 할 말을 잃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그 무렵에 기묘명현으로 이름 높던 복재(服齋) 기준(奇遵)이 고향인 장성을 찾았다가 하서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붓 한 자루를 선물하면서 나라의 동량으로 크도록 격려했다는 내용도 있다. 천재로 이름이 났지만, 공부에 게으르지 않던 하서는 어린 시절부터 면앙정 송순, 신재 최산두, 모재 김안국 등 당대의 석학들을 찾아가 뵈며 학문에 온갖 정성을 바쳤다.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던 모재 김안국에게 수학하던 하서는 모재가 귀경하자 서울까지 왕래하며 글을 배웠다.

19세에 서울에 노닐면서 대제학이던 용재 이행(李荇)이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자, 이에 참석한 하서는 <칠석부(七夕賦)>를 지어 장안의 선비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24세에 진사과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두했다. 이때 진사과 동방(同榜)인 퇴계 이황과 만나면서 평생의 학문적 동지가 된다. 31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가 시작된다. 이후 32세에는 초급 관리로 가장 명예로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얻어 호당(湖堂)에 들어가 학문연찬에 정력을 바친다. 이때에도 퇴계 이황 등 당대 명사들과 동기동창이 돼 서로의 학문을 도우며 함께 생활했다. 32세의 하서와 9세 연상인 퇴계는 41세, 이들이 호당에서 함께 자고 먹으며 학문을 토론하고 강론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제대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하서나 퇴계의 학문은 그 시절에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서는 누구인가
인종(仁宗)이 하서 김인후에게 손수 그려 하사한 묵죽도(墨竹圖).
호당의 공부를 마치자 선비라면 원하는 벼슬이 옥당, 즉 홍문관의 벼슬인데 하서에게 홍문관의 정자(正字)·저작(著作) 등의 벼슬이 내려졌고 34세에는 홍문관 박사(博士)에 시강원 설서(設書)로 세자를 가르치는 임무에 종사한다. 높은 군왕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세자, 뒷날의 인종(仁宗)과의 만남은 바로 물고기가 물을 만났다는 어수지계(魚水之契)의 본보기로서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의 만남이었다. 요순시대의 도래가 점쳐졌다는 당시의 이야기들에서 당시 하서의 학문과 덕망이 얼마나 높았고 세자의 호학하는 자질이 얼마나 훌륭했나를 대변해준다. 하서의 인품과 학문에 매료된 세자는 온갖 예우를 다 했고, 심지어 하서에게 손수 묵죽도(墨竹圖)를 그려 하사하는 정성을 바치기도 했다. 궁중에 있던 <주자대전> 한 질을 하서에게 선물하면서 가르쳐주는 공에 보답하기도 했다.

34세의 여름에 하서는 홍문관 부수찬에 오르고 언관(言官)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했으니 기묘사화에 억울하게 죽은 충신들을 사면해 신원시키라는 감히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정책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갈고 닦은 학문의 뒷받침과 수양한 의리정신을 발휘해 본격적인 벼슬아치로서의 역할을 해낸다. “예부터 훌륭한 정치를 하는 군주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하고,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는 일로 근본을 삼았습니다.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해 보필을 받고 교화하는 일을 맡깁니다.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아야 인륜이 밝혀지고 풍속을 순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기묘사화 때의 억울한 신하들에게 모든 선비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마음 아파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나 본심을 개진하지 못하고 무죄를 주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직언을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결자해지의 뜻으로 기묘사화를 통해 간신배들의 농락으로 실정을 거듭한 중종이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장한 내용이 바로 하서의 그 차자(箚子)였다. 너무나 옳은 하서의 주장에 은연히 마음이 동한 중종은 그때부터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게 되고, 그런 하서의 주장이 원인이 돼 끝내 그 문제는 풀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 그러나 그런 요순정치를 아무나 하는 것인가. 하서의 옳고 바른 주장도 쉽게 실현될 기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요순군민(堯舜君民), 요순 같은 임금에 그 치세에 살아가던 백성의 시대를 열자는 하서의 꿈과 희망은 참으로 위대했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요순시대를 꿈꾸며 학문과 수양에 힘썼던 하서, 세상을 한 번 통째로 개혁하고 싶은 욕망이야 가득했지만, 시대는 결코 하서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과거에 합격하던 무렵 김안로(金安老)가 쫓겨났고 김안국·이언적 등 여러 어진 신하들이 조정에 들어가며 한 번 치세가 도래하려는 희망도 있었으나 외척들인 소윤(小尹)과 대윤(大尹)이 알력을 일으켜 시사(時事)가 도리어 우려됐다”라는 하서 연보(年譜)의 기록처럼 화란의 징조만 높아지고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화란의 기미가 높아가자 부모봉양을 앞세워 고향근처의 수령으로 나가기를 원해, 하서는 34세 12월에 옥과현감(玉果縣監:곡성군 소속)으로 부임한다. 그 다음해 중종대왕이 승하하고 인종이 등극해 세상이 바뀌는 듯했으나, 대소윤(大小尹)의 싸움은 그치지 않았고 병약한 인종이 이유를 알 수 없이 갑자기 붕어하면서 정국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고, 큰 꿈의 소유자 천재 학자이던 하서는 영원히 자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역사적 평가
명종 15년, 1560년 음력 정월 16일 51세의 하서 김인후는 세상을 떠난다. 인종의 등극 이후 한 차례 서울에 온 뒤, 인종이 승하한 36세 이후, 그는 영원히 서울을 떠나 고향인 장성, 그 이웃 고을인 담양·순창 등의 자연 속에 몸을 숨기고 강학과 교육에 일생을 바치며 먼 훗날 요순시대의 도래를 위한 도학(道學)을 정립하고 도학자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명종실록 16년 정월 16일의 기사는 그의 죽음을 알리고 그의 인품과 학문, 그의 고결한 생애를 정리해 기록하고 있다.

“앞전의 홍문관 교리(校理) 김인후가 세상을 떠났다. 자(字)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다른 호는 담재(湛齋)였다. 장성 출신이다. 타고난 자질이 맑고 순수했다. 5~6세에 문자를 이해해 글을 지으면 사람을 놀라게 했고, 커서는 시문(詩文)을 지으면 청아하고 고묘해 당대에는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시와 술을 아주 즐겼고, 마음이 관대해 남들과 다투는 적이 없었다. 그의 뜻한 바는 예의와 법도를 실천하려는 것이어서 전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은 세상물정에 어둡지 않은가라고 의심하기도 했다. 30세 이후에 문과에 급제해 부수찬을 지내고 옥과현감이 됐으나, 오래지 않아 중종·인종의 상을 당하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몸이 상해 을사년 겨울 마침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간 뒤에는 여러 벼슬이 내렸으나 일절 응하지 않았다. 고향집에 거처하면서는 성현의 학문에 전념해 조금도 쉬지 않고 사색하고 연구하며 순서대로 힘쓰며 실천했다. 만년에는 조예가 더욱 정밀하고 깊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상·제례(喪祭禮)에 삼간 마음으로 실천했다. 모든 제사에는 아무리 병중이라도 반드시 참례했고 세속의 금기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자제들을 가르칠 때에도 효제충신을 먼저하고 문예(文藝)는 뒤에 하게 했다. 남과 대화할 때에도 자기의 견해만 주장하지 않았으나 한 번 스스로 정립한 원칙은 매우 확고해 뽑아낼 수가 없었고 너무 높아 따를 수가 없었다. 해서와 초서를 잘 써서 필적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51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하서집(河西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조선왕조의 정사(正史)에 이만하면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명확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패악한 정치에 분노, 자연에 숨은 도학자 김인후 下
실천하는 지성, 한평생 요순시대를 꿈꾸다
필암서원을 찾아서

뛰어난 학자 군주인 인종대왕이 등극한 지 8개월째에 붕어하자 그의 죽음이 결코 병사일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하서 김인후. 약원의 처방전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자고 요구했으나 확인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고 거절당하자, 인종의 죽음에는 반드시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고 믿고, 뛰어난 군왕이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패악한 정치에 몸담을 수 없다고, 35세의 젊디젊은 나이에 관계를 미련 없이 떠난 사람이 바로 하서였다. 인종의 이복 아우 명종이 등극하고 그의 생모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무서운 독재가 진행되고, 을사사화가 발발해 어진 학자나 선비 벼슬아치들이 온통 살육의 화란에 빠지자, 혹자는 하서가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미리 점치고 낙향하고 말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가슴에 품었던 이상이나 이루고자 했던 꿈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겠는가.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요순시대의 신하들처럼 뛰어난 어진이들이 임금을 보필해 참다운 요순시대를 만들자는 꿈을 접고 세상을 등지고 낙향할 때의 그의 심정이 오죽 했겠는가.
하서 김인후가 후학들을 가르쳤던 필암서원(筆巖書院)의 전경. | 사진작가 황헌만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아마도 절로 삼긴 인생이라 절로절로 늙사오리(已矣哉 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패악한 정치에 분노해 세상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온 하서의 ‘자연가(自然歌)’라는 시조다. 후손 김시서(金時瑞)는 호가 자연당(自然堂)인데, 글 잘하는 사람에게 의뢰해 국문 시조를 한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김시서는 하서의 5대손이니 집에서 전해오는 시조를 애송하다가 자신의 호를 ‘자연당’이라 하였으니 다른 견해도 있지만 그 시조의 작자가 하서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연 속에서 노닐면서 자신의 수양과 인격함양으로 도학자에 이르고 미래의 지도자가 될 후학들을 가르쳤던 하서의 유적지인 생가와 필암서원과 묘소를 찾아갔다. 후손 김재수 교수와 김진석 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청랑하기 그지없는 가을 하늘과 황금빛 들판을 구경하면서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와 맥호동 일대를 살펴봤다.

진리란 그렇게 연착하는 기차인가. 하서가 세상을 떠난 그 날짜의 왕조실록의 졸기(卒記)에 그만한 평가를 받은 도학자의 현양사업은 왜 그렇게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서 사후 8년째인 1568년에 제자 조희문(趙希文)이 쓴 <하서전집> 서문을 보면 일찍부터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梁子징)에 의해 1561년, 하서 타계 직후에 가장(家狀)까지 지어졌으나, 국가적 현양이나 후학들의 찬양 작업은 먼 뒷날을 기다려야 했다.

사후 110년이 넘은 1662년에야 박세채(朴世采)에 의해서 행장(行狀)이 완성되고, 필암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이 그 해인 1662년인 현종 3년에야 내려졌다. 우리가 찾은 필암서원(筆巖書院). 당대의 명필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글씨로도 명성이 높은 서원이다. 대원군 시절에 전라도 일대의 모든 서원이 다 훼철되었으나 오직 이 서원만은 그대로 보존된 호남 제일의 서원이다. 지금의 장성군 진원면은 옛날에는 지원현이었다. 그 지원현이 폐현되면서 옮겨온 관아의 건물로 지었다는 ‘확연루(廓然樓)’는 조선의 어떤 서원에도 없는 필암서원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이란다. 신실에 동재·서재가 격식에 맞게 갖추어져 있었고, 더구나 근래에 성역사업이 이룩돼 광활한 서원의 광장이 공원으로 꾸며졌고, 기념관이나 유물관이 새로 건립되어 규모로는 세상에 없는 우람한 서원이었다. 하서의 도학정신과 학덕이 탄생 500주년(2010)이 다 되는 금년에야 빛을 보는 셈이니, 역시 진리는 연착하는 기차와 같지 않은가.

하서의 묘소 앞에서
하서 김인후의 신도비(神道碑).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
황룡면 필암리의 필암서원에서 멀지 않은 대맥동(大麥洞:麥湖洞)에는 하서가 태어나고 자랐던 생가의 터가 그대로 있었다. 하서가 생전에 글을 읽고 시를 지으며 술을 마셨고,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했던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만 근래에 복원돼 옛 정취를 보여줄 뿐, 생가는 빈터만 남아 있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하서의 부모 묘소와 하서의 묘소가 있는 울산김씨의 선산이 있다. 입구에 당대의 학문과 정치의 대로(大老)였던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우람하게 서 있고, 묘소도 초라하지 않게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묘의 바로 앞에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지은 묘표(墓表)의 글을 새긴 비가 서 있어서 그의 일생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었다.

이 유적지에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기막히는 사연이 있었다. 생가의 백화정이나 묘소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보면 산과 산 사이에 계란같이 둥그런 조그마한 산이 있다. 그 산이 바로 난산(卵山)으로 인종의 제삿날이면 하서가 그 산속에 들어가 통곡했다는 통곡단(痛哭壇)이 있었다. 하서의 애제자 송강 정철은 하서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하서가 죽은 뒤 추억하는 글에서 인종의 제삿날에는 반드시 ‘난산’에 올라가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런 내용이 담긴 ‘난산비(卵山碑)’가 세워져 있는데, 정조 때 윤행임(尹行恁)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묘소와 생가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난산, 거기서의 통곡이 하서를 다시는 정치에 가담하지 못하게 했고 또 평생 동안 임금을 그리워하며 도학을 닦으며 자연과만 어울리는 삶을 살게 해줬으니, 어떻게 보면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문묘에 배향
서울에는 종묘(宗廟)와 문묘(文廟)가 있다. 이씨 왕조의 종통(宗統)을 이은 제왕들의 신주를 모셔 왕권을 상징하는 곳이 종묘이고, 유교(儒敎)의 창시자인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을 모시고 우리나라 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18명의 어진이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 문묘이니, 바로 학문과 사상의 상징이다. 신라 때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 때의 안향과 정몽주, 조선의 퇴계와 율곡 등 14명이 배향된 곳이다. 퇴계·율곡 등은 오래전에 배향됐건만 하서는 많은 선비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요구가 강력했으나 결실을 못 맺고 지연되고만 있었다. 하서가 타계한 뒤 237년이 되는 정조 10년(1786)에야 하서가 문묘에 배향된다.

호학의 군주 정조는 일찍부터 하서의 학문을 접하고 크게 칭찬하면서 그런 학자가 배향의 절차에 빠진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필암서원에 사제문(賜祭文)을 내리고 문묘에 배향하라는 교서를 내려 절차에 맞게 배향 고유제를 지냈다. 호남 출신으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분이 바로 하서였다. 퇴계가 그렇게 찬양했고, 고봉 기대승이나 율곡이 그처럼 숭앙했던 하서의 배향이 그렇게 늦었음도 또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라도 그런 절차가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도학자의 일생
2010년이면 하서 탄생 500주년이다. 이황·유성룡·김성일 등의 500년 400년은 세상이 그렇게 요란했는데, 하서의 500년은 아직도 조용하다. 도학(道學)·문장(文章)·절의(節義)를 모두 제대로 갖춰야만 참다운 도학자다. 비록 하서의 높은 철학사상인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라는 글과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이라는 글이 일실되어 하서 학문의 진면목을 설명하기 어렵다 해도, 이미 알려진 <천명도(天命圖)>나 많은 도학문자나 도학시(道學詩)에서 나타나 있듯이, 하서는 도학에 뛰어났고 문장도 탁월했으며 임금과 나라를 걱정했던 애국적인 절의정신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송시열의 <신도비명>은 저간의 사정을 제대로 설명해주고 있다. 패악의 정치에 분노해 정계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와 자연시와 우국시를 읊었지만, 요순시대를 만들어야한다는 사명감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생애가 바로 하서의 삶이었다.

실록의 정사(正史)에도 명확히 기록했듯이 그는 시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했다. 시로 의분을 달래고 술로 끓는 가슴을 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전북대 김기현 교수의 주장대로, “시는 어두운 사회에 깨어 있는 지성의 아픔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주는 의의를 지녔으며, 술은 그의 도의정신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파격이었다”(<하서 김인후의 도학과 절의정신>)라는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시에 탐닉하고 술에 세상을 잊으면서도 그는 절대로 예의와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관(史官)의 평가를 기억해야 한다. 도덕과 윤리가 파괴된 패악의 정치시대에 세속의 권력에 합류하지 않고, 가장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 위해 자신을 지키며 높은 사상과 철학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도학자다. 하서야말로 자신을 자학한 삶이 아니라 도의를 몸소 지켜 나라와 인민을 보전할 철학적 기반을 닦으며 살았던 일생이었다.

조선 500년에 도학과 절의를 하서만큼 크게 앙양시킨 사람은 많지 않다. 문장가들이야 많았지만 마음에서 얻어낸 철학과 사상을 실제의 삶에서 행동으로 보여주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 권력과 부를 미련 없이 뿌리치고도 예의 법규에 벗어나지 않게, 시와 술로 자연을 벗 삼아 살았던 삶을 몇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정조대왕은 문묘에 배향을 마치고 하서에게 영의정의 벼슬을 증직하고 문정(文正)으로 개시(改諡)했으니 “바름으로 남을 굴복시켰다(以正服人)”는 의미를 확실하게 밝혀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던 실학자 정약용 上
임금께 병든 국정실상 조목조목 따지다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

영조 38년, 1762년은 오래된 조선이라는 나라에 한줄기 서광이 비치던 해였다. 조선 최고의 학자로, 희대의 실학자로, 높은 수준의 개혁가이던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해였다. 음력 6월16일 다산은 태어났지만, 그 한 달 전에는 조선 최대의 비극으로 꼽히는 ‘임오(壬午)사건’, 즉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야 했던 참극이 일어난 해였음을 알아야 한다.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馬峴)마을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與猶堂).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여유당전서>를 완성하며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하였다. <사진작가 황헌만>

사도세자의 죽음과 다산의 탄생, 참으로 무관한 일이었지만, 역사의 전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라는 당쟁이 격화되었고, 시파 계열에 속하던 자신의 집안 가계로 인해, 다산은 자연스럽게 시파에 속하게 되었다.

벼슬하던 동안의 어려움이나, 감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고, 귀양살이의 긴긴 고난이 이런 정치적 관계로 연유되었으니 세자의 죽음과 다산의 탄생은 따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세자의 죽음에 한없이 분노한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세월을 보내던 때에 다산이 태어났고, 패악한 정치의 계절에 가슴아파하던 아버지는 태어난 아들이 벼슬하는 것보다는 농사나 지으며 행복하게 살라는 뜻으로 다산에게 ‘귀농(歸農)’이라는 아명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와 세월은 변하며 흘러가는 것이다. 관료생활에 길이 들었던 아버지는 얼마 뒤에 다시 벼슬길에 올랐고,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 덕택에 다산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비록 아홉 살 때에 어머니 해남윤씨께서 세상을 떠나 비애에 젖기도 했으나, 영특한 다산은 주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다산이 조선 최고의 학자요, 사상가라면, 그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기본적 학문을 습득했던 곳, 벼슬살이와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한 <여유당전서>를 완성하느라 18년을 보냈던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馬峴)마을은 그야말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다. 세상을 바꾸고 국가를 통째로 개혁하자던 그의 꿈과 희망이 영글었던 생가가 복원되어 덩실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가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바로 생가의 뒷동산에 묻혀 지금까지 170년이 넘도록 고이 잠들고 계시는 곳이 바로 그곳이니, 그곳을 어찌 역사의 땅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생가인 ‘여유당(與猶堂:다산 서재)’은 바로 사상의 고향이다. 비록 먼 뒷날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그의 주저(主著)들이 완성되었지만, 그의 사상과 철학이 배태되었던 곳은 바로 그의 서재가 아니었겠는가. 1818년 귀양지이던 ‘다산초당’에서 완료한 <경세유표>라는 대저는 누가 보아도 그의 경세학으로는 대표적 저술이다. 나라를 경륜할 계책이 있지만, 죄인의 신분으로 어찌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 유언(遺言)으로 올리는 정책이라는 뜻으로 ‘유표(遺表)’라는 이름을 지었으니 국가경영의 방책과 통째로 나라를 개혁하자던 그의 계책은 대체로 그 책에 정리되어 있다.

왜 책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가. 어떻게 나라를 개혁할 것인가. 큰 계책은 무엇이며, 세부적인 방안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해놓은 문자가 ‘경세유표서문’이라는 글이다.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신하의 입장에서 임금께 국가경영의 정책을 조목조목 아뢰어 바친 내용이 바로 <경세유표>다. 그래서 다산은 그의 자서전 격인 <자찬묘지명>에서 경세유표의 저작 목적을 밝혔는데, 글자로는 다섯 자인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이었으니,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였다. 전제조건이 ‘개혁’이라는 두 글자다. 개혁하지 않으면 우선 나라가 망한다는 무서운 경고를 하면서, 법과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대안으로 <경세유표>를 저작하였다.

법과 제도가 제대로 집행되려면 공무원들이 청렴한 도덕성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에 <목민심서>를 저작하였다.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이 확보되어야만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 사는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에 <흠흠신서>를 저작하였다. 국민 모두의 실천과 행위가 없이는 나라가 개혁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정신과 철학을 근본 뿌리부터 바꿔주기 위해서 국민의 교과서였던 주자학의 사서육경을 재해석하여, 성리학적 경서를 민중적이고 실학적으로 전환시킨 232권의 방대한 경학연구서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서양서적을 읽으며 마음이 열리다
1792년은 정조 16년이었다. 그해 31세이던 다산은 벼슬아치라면 최고의 명예로 여기던 옥당벼슬에 임명된다. 옥당인 홍문관의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 이런 낭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무렵, 세상이 무너지는 비보를 받았으니, 진주목사로 재임하던 아버지가 임지에서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고 말았다. 진주까지 달려가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으로 반장하여 장례를 치른 뒤, 집상(執喪) 중이던 다산에게 정조대왕의 명령이 내려졌다. 집상하는 때야말로 책을 보고 글을 짓기 좋은 시간이라며 수원 화성을 축조키로 하였으니 성(城)을 쌓을 설계도와 방법을 올리라는 분부였다. 다산 아니면 그런 큰 역사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정조의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다산은 사실 23세 때인 1784년부터 친구 이벽(李檗)을 통해 천주교 관계서적이나 서양 책들을 읽기 시작했었다. 우물 안 개구리이던 조선 사람으로 서양에 대한 눈을 뜨면서 다산의 마음은 넓고 크게 열리고 있었다. 그 후 1791년에는 자신의 외종형인 진산의 윤지충이 천주교도로는 최초로 순교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산은 천주교에서는 손과 마음을 떼었다고 했지만,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기술에 대한 책들은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던 다산에게 정조는 성의 설계도에 참고할 만한 서적이라고 하면서 <도서집성(圖書集成)> 안에 있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주었다. 중국에 와 있던 서양선교사가 쓴 과학기술서적이다. 이런 책을 참고하여 다산은 기중기나 거중기 등의 성 쌓는 도구들을 발명해내는 위업을 성취할 수 있었다. 중국과 조선의 옛날 고전에 해박했던 다산, 거기에 서양의 과학사상과 근대적 논리가 합해지면서 그의 실학사상은 뿌리가 튼튼한 실용주의적 논리로 굳어지게 되었다.

일본의 경학연구서도 읽었다
“일본에서는 요즘 훌륭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물부쌍백(物部雙柏)이 바로 그런 사람으로 호를 조래(徠)라 하고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으며 제자들을 많이 거느렸단다. 지난번 수신사가 오는 편에 소본렴(篠本廉)의 글 세 편을 얻어왔는데 글이 모두 정예(精銳)하였다. 대개 일본이라는 나라는 원래 백제에서 책을 얻어다 보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몽매하였다. 그 후 중국의 강소·절강지방과 직접 교역을 트면서 좋은 책을 모조리 구입해갔다. 책도 책이려니와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는 그런 제도가 없어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는 그 학문이 우리나라를 능가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示二兒)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두 아들아 보거라’라는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람들은 무조건 일본은 왜(倭)이고 못된 나라로 학문도 별볼 것 없는 나라로 여겼다. 그러나 다산은 예의 유학자들과는 달랐다. 일본의 경학연구서를 얻어 보면서 그들의 학문수준이 어느 정도였나를 명확히 관찰하고 있었다. <일본론(日本論)>이라는 몇 편의 논문을 지어서 일본 사정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중국과 조선의 학문만을 고수하지 않고, 서양과 일본의 학문에 눈을 돌리고 마음을 기울이면서 세계사적 안목을 넓혔던 다산의 학문 경향은 확실히 남다른 면이 많았다. 요즘 말로는 이른바 ‘세계화 마인드’를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산의 열린 마음과 바로 뜬 눈에서 근대의 여명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지만, 탐관오리나 세도정치의 탐학과 부패에 시달리던 조선은 다산을 유배 보내 바닷가에 유폐시키고는 긴긴 어둠의 중세만을 계속하고 말았다.

역사의 땅 마현
다산의 고향 마현마을, 다산이 열수(洌水)라고 부르던 한강물이 넘실대고, 멀리 운길산의 수종사가 종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여 나라의 개혁과 인민의 해방이 완성되는 희망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산은 눈을 감고 지하에 영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역사의 땅이다. 정약현·약전·약종·약용 등 4형제의 뛰어난 학문과 사상이 피어나 형성된 곳이다. 천주교의 초기 신앙인들인 이벽·이승훈·황사영 등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곳이다. 정약종과 그의 두 아들 정철상·정하상, 그의 조카사위이던 황사영이 죽음을 무릅쓰고 천주교의 수호를 위해 장렬하게 순교한 피가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정약용과 그의 중형 정약전의 실학사상이 자라났고, 다산의 두 아들인 정학연·정학유 등의 계승, 다산의 외손자 윤정기가 외가를 드나들면서 실학사상을 꽃피게 했던 곳도 그곳이다.

더구나 다산이 해배한 뒤, 1818년에서 세상을 떠나던 1836년까지의 18년 동안에는 얼마나 많은 당대의 석학들이 그곳을 출입하면서 다산과의 교유를 통해 학문의 범위를 넓혀갔던가. 석천 신작과 대산 김매순의 학문논평의 서찰이 수없이 오고갔고, 홍석주·길주·현주 3형제와 다산과의 교유는 얼마나 성대했던가. 그 모든 사람 중에서 또 정조대왕의 외동사위인 해거도위 홍현주의 마현출입은 외로운 다산의 노년에 얼마나 위로되던 일이던가. 이런 모든 역사를 그냥 말없이 간직하고 있는 마현, 그러나 열수라던 한강은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만 있다.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던 실학자 정약용 下
선각자의 혜안으로 역사와 백성을 보듬다
다산학의 산실 다산초당

유교의 창시자는 공자였다. 뒤이어 맹자가 태어나 공자의 인(仁)에 대한 사상을 계승하고 더 확대하여 의(義)를 첨가하여 유교의 중심사상으로 확립했으니, 바로 인의(仁義)의 세계가 경(經)으로 집약되었다. 대표적인 경은 공맹의 철학으로 사서육경(四書六經)에 수렴되었다. 진(秦)나라 때에 분서갱유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을 만나 경은 대부분 일실되었으나, 한(漢)나라 때에 대부분 복원되고 새로운 주석으로 경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었으니, 본격적인 경의 연구인 경학(經學)이 학문의 맨 윗자리를 점하게 되었다. 때문에 한문(漢文)·한자(漢字)·한학(漢學) 등으로 한나라 때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일에 인색할 수가 없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에 있는 다산초당. 이곳에서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의 저서가 이룩되고 다산학이 완성되었다. <사진작가 황헌만>

그러나 한나라 때의 경전해석학은 당나라에 이르러 매우 쇠퇴하여 불교의 연구를 따라갈 수 없었으나, 송나라에 이르러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의 등장으로 유교의 부흥기를 맞게 된다. 정자의 철학을 계승하여 더 확대심화시킨 주자의 공이 너무 컸기 때문에 주자학(朱子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새롭게 성리학(性理學)적 논리로 해석한 유학이 한 때 동양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로 자리잡아 고려말엽에 한반도에 상륙하였다. 조선은 바로 주자학, 즉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정하고 국교(國敎)에 버금가는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사서육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주자학과 병칭될 수 있는 ‘다산학’을 수립해내기 이전의 조선 사회는 주자학을 교조적으로 신봉하고 절대시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18년의 귀양살이에서 유배 초기 강지읍내의 사의재(四宜齋)라는 주막집 방에서 연구하고 강진읍내의 뒷산에 있던 고성사에서도 연구는 계속했지만,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의 뒷산인 다산에 있던 윤씨들의 서재인 ‘다산초당’에서 다산학이 완성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이며, 행위와 실천보다는 이론 위주의 학문인 성리학에서 관념과 사변적인 것보다는 실용적이며 실천적인 다산학을 연구했음은 조선 500년 온갖 학문 중의 금자탑이었다.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 경세학이 이룩되고 경학인 다산학이 수립된 다산초당이야말로 다산학의 산실임에 분명하다. ‘다산초당’은 생가인 ‘여유당’과 함께 조선 학문의 금자탑인 다산학의 양대 보금자리였다.

다산초당을 둘러보자. 소유권도 연고권도 전혀 없는 남의 산정(山亭), 다산은 그 산정을 자신이 소유주인 양 경관을 참으로 아름답게 꾸몄다. 물을 끌어다가 비류폭포인 인공폭포도 만들고, 그 물이 고이는 곳에 연못을 파서 경치를 아름답게 단장했다. 흐르는 물을 받아 산자락에 계단밭을 일구어 미나리를 가꾸며 용돈도 벌고 반찬감도 장만했다. 바위 절벽에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겨 징표로 삼았고, 약천·다조 등 아름다움의 최상을 만들어 선비의 연구처로 삼았다. 귤동마을에는 가을이면 노랗게 유자가 익어가고, 마을 앞까지 밀려오던 구강포의 바닷물은 빠져나가면서 다산의 시름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초당의 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학승 혜장선사가 거처하던 백련사 절이 있어 답답한 가슴을 식히기에 넉넉하였다.

백성의 참 힘을 발견하다
강진 유배살이는 다산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시골의 무지렁이 백성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 당하던 압제와 핍박의 생생한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른바 다산의 사회시 및 참여시라는 그 많은 시들은 그 속에 핍박받는 인민들을 해방시키자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었다. 그가 황해도 곡산도호부사 시절에 직접 판결했던 이계심(李啓心) 사건(시위 주도자를 무죄석방한 재판)이 머리 속에 담겨 있어, 백성들을 등에 업고 투쟁하면 이기지 못할 싸움이 없다고 주장했던 생각이나, ‘목위민유(牧爲民有·통치자는 백성을 위하는 일을 할 때만 존재이유가 있다’(<원목>)라고 선언한 그의 사상은 역시 백성들의 힘을 가장 구체적으로 발견해낸 선각자의 철학이었다. 19세기 후반의 농민전쟁이나 민란 및 민중봉기로 타오르던 횃불은 그런 역사적 평가에서 연유했다는 고찰도 필요하리라고 생각해본다.

다산은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강진읍내의 사의재에서 낮은 신분의 제자를 가르쳤다면 다산초당에서는 양반신분의 자제 18명을 가르쳐내, 이른바 ‘다산학단’이라는 학파를 형성해냈다. 쟁쟁한 제자들이 다산의 학문을 계승하여 망해가던 나라에 온갖 방법으로 복무(服務)했던 점은 또 다른 다산의 공로였다. 근래에 <다산학단문헌집성>이라는 자료가 책으로 간행되어, 이제야 본격적으로 다산이 조선후기 사회에 미친 학문적 영향도 제대로 밝혀질 기회가 오게 되었다.

조선 사람들은 조선시를 짓자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본을 ‘왜’라고 얕잡아보았고,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는 야만국이자 ‘뙤놈’의 나라라고 백안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인들은 한·당·송·명의 중국은 한없이 우월시하면서 시를 지어도 중국시, 글을 지어도 중국글을 지어야만 참다운 시이자 글이라고 고집하고 살았었다. 역사책을 읽어도 중국의 <사기>·<한서>·<송사> 등에 매달리면서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 등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 나라의 역사나 문학의 전통은 아예 백안시하고, 그저 미국이나 서양 학문과 사상에만 매력을 느끼는 현대인들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을 것인가. 중국의 모든 역사와 학문을 섭렵하였고 조선의 역사와 학문을 제대로 연구한 다산은 그렇던 당시의 지식인들 태도에 한없이 분노하면서, “나는 조선사람, 즐거이 조선시를 짓겠노라”(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는 혁명적 선언을 감행하였다.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여도 우리의 역사적 사실, 글을 지어도 우리식 글을 짓자는 그의 주장은 바로 오늘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고하는 주장이 아닐는지.

다산은 아들에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 “수십년 이래로 한 가지 괴이한 논의가 있어 우리 문학을 매우 배척하고 있다. 여러 가지 우리의 옛 문헌이나 문집에는 눈도 주지 않으려 하니 이거야말로 큰 병통이다. 사대부집안 자제들이 우리나라 옛일들을 알지 못하고 선배들이 의논했던 것을 읽지 않는다면 비록 그 학문이 고금을 꿰뚫고 있다 해도 엉터리일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책이나 옛날의 어진 이들의 문집이나 저서들을 탐독하도록 권장하였다. 겸하여 우리나라의 역사적 내용만으로 시를 지은 유득공(柳得恭)의 시가 중국에서 간행되었고 중국인들이 즐겨 읽는다는 것까지 첨부하였다.

‘가장 한국적인 것만이 가장 세계적이다’, ‘가장 조선적인 것만이 가장 보편적이다’라는 멋진 뜻을 다산은 익히 인식하고 있었으니 그의 혜안은 역시 높기만 했다. 내 나라, 내 민족, 우리 정서에는 눈을 감고, 세계화라는 잘못된 인식으로 밖으로 외국으로만 향하는 지식인들은 이점에서 한번쯤 다산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다산의 유적지를 다니면서
황해도 북쪽에 위치한 곡산(谷山)땅, 36세 때부터 2년 가까이 다산이 목민관으로 지낸 곳이다. 참으로 <목민심서>의 내용대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백성을 위해서만 선정을 베풀었던 곳이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북녘 땅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 마현리는 1801년 2월부터 10월까지 다산이 귀양 살았던 쓰라린 곳이다. 18년 유배살이의 시리디 시린 강진은 다산학의 산실이다. 그가 나고 자랐으며 학문을 마무리하고 세상을 떠나 지금까지 묻혀있는 마현은 고향이자 영원한 안식처다. 17~18세의 젊은 시절, 사또 자제로 형제들과 함께 지냈고, 그곳의 학자나 학승들과 어울려 지냈던 전남 화순군 화순읍은 그의 이상과 꿈이 키워졌던 낙토였다. 천주교에 관계했다고 정치적 반대파들의 드센 공격 때문에 귀양살이처럼 턱없이 좌천되어 생활했던 충청남도 청양군의 금정도찰방으로 지냈던 유적지는 흔적도 없어졌다.

실학자, 사상가의 위상에서 더 높은 현자의 대접을 받아야 할 다산 정약용, 그가 남긴 저서도 귀중하게 여기며 간행하고 번역해야 하지만, 그의 유적지도 그냥 버려져서는 안 된다. 다산을 가장 깊이 연구하여 가장 정확하게 다산학을 재발견한 위당 정인보는 “다산선생 한 분에 대한 고구(考究), 곧 조선역사의 연구, 조선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심혼(朝鮮心魂)의 밝혀지고 가리워졌음과 전체 조선의 성쇠존멸(盛衰存滅)에 대한 연구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도 과장이나 잘못 판단한 내용이 아니다. 그보다 더 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학문적 대업을 이룩한 분이 또 누가 있는가.

때문에 필자는 40년에 이르도록 다산학에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다산이 그처럼 부패하고 부란(腐爛)한 조선사회의 개혁과 변화를 요구했듯이, 오늘의 우리 사회도 너무나 도덕성은 해이되었고 부패는 만연해있다. 세상이 썩고 부란해질수록 다산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공직자들의 최고 덕목으로 다산이 그렇게도 강조했던 청렴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까. 다산이 그처럼 강조했던 법과 제도의 개혁으로 정의로운 사람들이 대접받고 수사와 재판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이 올 것인가. 내 나라, 내 민족, 내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나와 우리를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 세상이 올 것인가. 다산이 들었던 횃불을 다시 잡아 백성들이 주인이고,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인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다산의 유적지는 길이 보전되어야 하리라.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맥[李陌]의 太白逸史  (0) 2009.12.01
배달의 꽃 무궁화  (0) 2009.11.30
대한민국 新 택리지_파주  (0) 2009.11.28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 열전_05  (0) 2009.11.27
살아있는 한반도_1부  (0) 2009.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