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의 장

박정진_무맥_03

醉月 2011. 4. 21. 09:19

[박정진의 무맥] (36) 國技 ‘십팔기’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 시급

전통무예도 국가브랜드 시대… 글로벌 경쟁력 높인다
세계 각국은 지금 자신들의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혹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이는 유네스코 등재가 바로 세계에서 인정받는 계기가 되면서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효과는 물론이고 관광 수입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지난 8월 1일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제34차 회의에서 허난성 덩펑시의 샤오린쓰와 쑹양서원 등 11개 건축물로 이뤄진 ‘톈디즈중(天地之中·천지의 중심)’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무술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처음이다.

◇세계 소림무술의 본산인 소림사 정문. 중국은 소림무술 권역인 ‘톈디즈중(天地之中·천지의 중심)’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에 따라 소림사와 소림무술의 중흥을 꾀하고 있다.
‘소림쿵푸(功夫)’는 현재 ‘상하이 엑스포’(2010년 5월 1일∼8월 31일) 멀티미디어 쇼 ‘소림사 무승 전기(傳奇)’로 푸시(浦西)단지의 종합예술홀 무대에 올린 가운데 관람객의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무술이 좋은 관광상품이 된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무술 하면 소림무술, 중국 하면 소림사’를 연상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중국과 홍콩의 수많은 무술영화에 소림무술이 등장하지 않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소림무술이 중국의 브랜드가 된 것을 안 중국은 지금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임을 강화해가고 있다. 소림무술 권역이 ‘천지의 중심’으로 명명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경제력에서 미국과 대등한 세계중심 진입에 이어 이제 자연·문화에서도 세계유산등재를 끈질기게 추진하는 것은 중화사상의 현대판을 이룩하기 위해서다.

이번에 소림사가 세계유산에 지정되면서 중국은 문화유산 28건, 자연유산 8건, 문화·자연복합유산 4건 등 모두 40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명실공히 경제와 문화, 자연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소림사 ‘천지의 중심(天地之中)’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상징적 의미가 크다. 허난성은 중국의 중심으로 고대 문명의 발상지임은 물론이고 고대 천문과 황권(皇權) 개념이 싹튼 곳이기 때문이다. 중화의 중화는 허난성이다.

중국 허난(河南)성 덩펑(登封)시에 자리 잡은 숭산(嵩山)은 해발 1491.7m로, 중국에서는 그리 크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동의 태산, 서의 화산, 북의 항산, 남의 형산 등과 더불어 중국 5악(岳)의 하나이다. 숭산 서쪽 끝자락 소실산(少室山)에 ‘천하제일명찰(天下第一名刹)’ 소림사가 있다.

소림무술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소림사는 6세기 중국 선종을 창시한 달마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마대사가 선승들의 건강 유지를 위해서 역근경(易筋經)을 짓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소림무술이 구성된 것으로 알려진 것이 달마를 신화로 한 남북조기원설이다. 이에 대해 최근의 연구 결과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허난성(河南省) 안양사범대학 연구팀의 보고서에 따르면 소림사 무술의 창시자는 달마대사가 아니라 소림사 2대 주지 초우선사였다는 것. 마아이민 교수팀의 보고서는 “우선 달마대사가 허난성에 머물던 시기에는 ‘소림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2대 주지인 ‘초우(稠)선사 창시설’을 제시한다. 인도 승려였던 보리달마대사가 소림사 일대인 허난성 송루어 지방에 머문 문헌상의 시점은 북위시대 초인 효문제 10년(486년)에서 19년(495년) 사이다. 그러나 당시 송루어에는 소림사라는 절은 있지도 않았다는 것.

소림사 창건주는 인도에서 온 보투어(跋陀)선사. 제2대 주지에 오른 스님이 초우선사. 초우선사는 현재의 안양현(安養縣)에 위치한 예시아 사원에서 무술을 연마해 소림사 최초의 무승(武僧)이 되었다는 것. 그가 주지가 된 뒤 소림사는 본격적인 무술 단련의 장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아마도 후대에 달마의 이름을 빌려서 ‘기공(氣功)과 무술’이 결합하여 승려들의 권법과 무술이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소림무술관 앞에 세워진 무술상.
한편 수(隨)나라 말년에 농민이 의군을 조직해서 소림사를 공격했고, 이에 승려들은 농민군에 항거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에 당시에 무술이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당(唐)나라 초기에 소림 승려들이 당태종 이세민을 도와서 동도(東都) 낙양(洛陽) 일대를 잡고 있던 왕세충(王世充)을 이기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설도 있다. 이때 소림사 일대는 왕의 직속이 되어 여러 혜택을 입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이 소림무술의 수당기원설이다. 참선만 하는 승려들은 흔히 신체적인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고, 건강을 해치면 참선도 소용이 없기에 무술은 가장 필요한 종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중국 사람들이 처음에 미약한 소림무술을 시대를 더하면서 확대재생산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소림사 내부에 전해 내려오는 ‘권법도감(拳譜)’의 기록에 따르면, 소림쿵후의 권법은 원래 708가지였다. 현재까지 545가지가 보존되어 있고, 이 중 이지선(二指禪)·타산문(打山門)·동자공(童子功) 등 200가지는 수련이 가능하다.

소림사 주지 석영신(釋永信) 스님은 “소림쿵후는 소림사 스님들이 선(禪)을 수련하는 과정의 하나이다. 소림사는 전통적인 사사(師事) 방식을 부활시켜 현재 12명의 고승이 제자들에게 무예를 전수하고 있으며, 확인된 전수자는 50명에 달한다”고 말한다. 현재 소림사 무승단의 무승은 120명쯤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하의 무술은 소림이 낳았고, 소림무술은 천하의 으뜸이다.” 소림무술은 중국의 중원무술이며, 강인함을 강조하는 화하문화(華夏文化)를 대표하는 무술이다. 소림파의 무술 특징은 경(硬)자로 표현할 수 있다. 모든 동작이 공격 아니면 방어로 멋 부리기가 없다. 동작이 크고 박진감이 넘치며 신속하여 덩치가 큰 중원 사람들의 체격에 걸맞은 무술이다.

소림무술은 중원무술이기에 북의 발기술, 남의 손기술을 융합하여 손놀림과 발놀림에 둘 다 능하다. “싸움에서 동(動)일 때는 바람처럼 빨라야 하고, 정(靜)일 때는 말뚝처럼 땅에 뿌리박아야 한다. 날카로운 활이 가죽을 뚫듯 매섭게 공격하고 물러날 때는 강인하고 온건하게 물러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소림무공은 권선일체(拳禪一切)를 추구한다. 또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기보다는 외강내유(外强內柔) 혹은 외강내강(外强內强)이라고 할 수 있다. 소림무공의 명성이 높아갈수록 북방의 많은 유파가 모두 소림이라고 스스로를 칭하였다. 이렇듯 소림파는 사실상 중국 북방의 거의 모든 무술 유파를 포괄하게 되었고, 소림무술은 북방 무술의 총칭이 되었다. 소림의 명성과 함께 상표 등록과 관련한 각종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현재 중국 전역 80개 무술도장에서 샤오린이라는 이름으로 무술을 가르치고 있고, 술집·호텔·맥주·자동차·배·가구에 이르기까지 상표도용은 354건이 넘는다는 것이 샤오린스 측의 설명이다. 샤오린스는 절 이름을 지키고 상업적으로 남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허난(河南) 샤오린사 산업개발’이라는 회사까지 설립해 놓고 있다. 중국상표특허청이 5대륙 11개 국가와 지역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샤오린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상품이 117개나 되나 샤오린사와 협의한 것은 단 한 개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에 소림무술이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일설에 따르면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세운 왕건을 도운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의 권법이 바로 소림권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도선의 권법은 흔히 ‘팔진도법(八眞道法)’으로 불리는데 이것이 승가에 전승되어 임진왜란 때에 서산과 사명대사가 이끈 승군의 실질적인 무예가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런 승가무술의 전통들이 오늘에 이어져 양익 스님을 중흥조로 삼는 선무도·불무도 등이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도선의 팔진도법은 소림권을 우리에 맞게 개조한 것으로 그가 오래 주석한 광양 백운산 영대암에서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 팔진도법의 특징은 높이 공중에 날아올라 상대의 머리나 상체를 발로 차는 것이다. ‘불갑사 도선수미 왕사비’에는 당나라 일행(一行) 스님에게 권법을 배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선이 도갑사에서 수도를 하고 있을 무렵, 궁예·왕건·견훤이 각기 찾아왔다고 한다. 도선은 사람됨을 본 뒤 왕건에게 권법을 전했다고 한다.

‘무예보도통지’는 소림무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당송(唐宋) 이래로 권용(拳勇)의 기술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외가(外家)가 되고 다른 하나는 내가(內家)가 된다. 외가(外家)는 소림(少林)이 성대하였다. 소림사(少林寺)는 등봉현(登封縣)의 소실산(少室山)에 있다. ‘일지록(日知錄)’에 이르기를 당(唐)나라 초기에 소림사 승려 13명이 왕세충(王世充)을 토벌하는 데 공(功)이 있었다. 이것은 소림의 승병(僧兵)이 일어났음이다. 가정년간(嘉靖年間·1522∼1566)에는 소림사의 승려 월공(月空)이 도독(都督) 만표(萬表)의 격문(檄文)을 받고 송강(松江)에서 왜구를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소림권법 시연동작.
중국 무술을 크게 나눌 때 양자강을 기준으로 북퇴남권(北腿南拳)이라고 한다. 이 말은 북쪽은 추운 지방이기에 발로 도약하여 차는 것이 특징이고, 남쪽은 더운 지방이기에 발로 도약하기보다는 손으로 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뜻이다. 물론 북퇴에는 씨름이나 레슬링의 기술처럼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거나 내던지는 솔각(?脚)기술도 포함된다. 광의로는 몽골의 씨름이나 러시아의 ‘삼보’도 포함된다.

남권에는 가라테의 시조로 알려진 백학권(白鶴拳)과 영춘권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중국의 넓은 대륙을 양쯔강을 기준으로 다 말한다는 무리이다. 실지로 중국 무술의 대명사로 알려진 소림권과 태극권은 둘 다 허난성에 있고, 둘은 지리적으로도 가깝다. 이들은 북태에 속하지만 ‘중원무술’로 별도로 대접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중원무술 가운데에 소림권은 외가권으로, 태극권은 내가권을 대표한다. 특히 소림권은 사실상 중국 북방의 거의 모든 무술 유파를 포괄하게 되었고, 북방 무술의 총칭이 되었다.

중국 무술을 하남 숭산의 소림파(少林派), 호북 무당산의 무당파(武當派), 사천 아미산의 아미파(峨嵋派)로 구분하기도 한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중국에는 기원이 확실하고 권법의 이치가 뚜렷하며 그 양식이 독특하게 체계화된 권법이 총 131종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도 소림·무당·아미파의 역사가 가장 길고 영향도 크다고 한다.

실지로 오늘날 소림권법이 멸실되지 않고 전해진 데는 중흥조 각원선사(覺圓禪師)의 힘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각원선사는 저 유명한 회창멸법(會昌滅法)의 피해에서 소림무술 복구에 앞장선 선사이다. 각원선사는 원래는 속가제자였다가 나중에 출가하여 권술의 정리에 힘을 쏟게 되는데 무술에 정진하기 위하여 명사(明師)를 찾는 등 백방의 노력을 한다. 이때 만난 사람이 소림무술의 명가인 백옥봉(白玉峰)과 이수(李?)이다. 각원선사는 두 사람을 스승의 예로 모시고 끝내 함께 소림사로 돌아와 권술을 집대성한다.

 

백옥봉은 기존의 소림권 중의 ‘나한십팔수(羅漢十八手)’를 개편하여 크게 증편하였고(처음에 72수에서 나중에 173수까지 늘렸다는 설이 있음), 실전한 권법을 총정리하고 화타(華?)의 오금희를 본떠서 용(龍)·호(虎)·표(豹)·사(蛇)·학(鶴) 등 소위 소림오권(少林五拳)을 창시하였다. 이수는 특히 대홍권(大紅拳)·소홍권(小紅拳)과 곤법(棍法)에 특히 정통하였다고 한다. 이들 뒤에도 홍익(洪益)·일관(一貫)·징은(澄隱)·독장(獨杖) 등의 명인들이 나와서 소림무술의 중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중국 당국이 소림무술을 중국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재 무술로 지원하고 있지만, 1965년부터 10여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소림무술이 거의 전폐되다시피 하였다. 1980년대에 덩샤오핑에 의해 소림사와 그 무술이 복원되었지만 소림사 승려는 축출될 당시에 어렸던 사미승(沙彌僧) 몇 명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소림사와 소림무술이 또다시 중흥의 기틀은 마련했다고 하지만 승려들에 의한 전승의 맥은 사실상 끊겼고, 민간에 있던 소림 무술가에 의해 역수입된 것이 전부이다.

어쨌든 이번에 소림무술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 정부의 무술에 대한 무관심을 질타하고 싶다. 한국도 무술 분야에서 소외된 지역은 아니다.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무술 경전이자 무경(武經)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적 기록문화유산 ‘무예도보통지’라는 책을 가지고 있다. 소림무술도 여러 종류의 무술책자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대개 후대에 쓰인 것으로 ‘오래된 무경’임을 입증할 자료가 없다

 

[박정진의 무맥] (37) ‘랑의 무예’ 한풀

자음과 모음 조합하듯 갖은 기술 만드는 ‘무술의 한글’
동아시아 고대사를 보면 대체로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선진문화가 이동하는 경로를 갖는다. 고대사 중에서도 상고시대, 즉 삼황오제 시대는 물론이고, 주(周) 이전 하은(夏殷)의 문화, 다시 말하면 당시 동이족이 개입한 문화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이 함께 이룩한 문명의 성격이 강하다. 문화란 돌고 도는 경향이 있어서 그 원류가 불분명한 경우도 없지 않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크게 보면 한국에서 이주한 세력이 일본의 지배층이 되어 고대사를 이끌었고, 일본 왕가는 핏줄로 한국과 섞여 있다. 혈통뿐 아니라 고대문화의 한일관계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경우가 많다. 동아시아 무예사에서 ‘택견(태껸)-테고이(手乞)-태권(跆拳)’의 발음(언어학자는 能記라고 한다)이 유사한 것은 아무래도 범상치 않다. 문화의 끊임없는 교류를 말하는 것이다.
◇대동류 달인 덕암 최용술의 제자 김정윤에 의해 1965년 5월 민족 무예로 탄생한 ‘한풀’을 수련생들이 열심히 배우고 있다(맨 위). 김정윤의 대를 잇는 신상득 가승이 실전을 방불케 하는 강도 높은 시범을 보이고 있다(아래 두 사진). 송원영 기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의 택견은 그 옛날(신라 혹은 가야시대로 추정됨)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것은 오늘날 일본에서 테고이(手乞)로 남아 있다. ‘테고이’는 일본 고무예(古武藝)의 대표적인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가라테 시연을 보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태껸’을 떠올리고, ‘태껸이구먼!’이라고 했고, 그 발음으로 인해 한국의 무예가들은 일본의 가라테를 발판으로 다시 태권(跆拳·태권도)을 재창조해냈다. 물론 이 같은 창조에는 전통 택견이 큰 몫을 했다. 전통 택견은 태권도뿐만 아니라 합기술(대동류 유술)에 기술적 기반을 둔 ‘한풀’의 재창조에도 크게 기여한다. 이것이 무술의 본능이다.

한국의 태권도가 일본 가라테의 도움을 받은 반면에 일본의 대동류 및 합기도라는 것은 한국의 택견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테고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테고이 무예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 1965년 재창조한 것이 ‘한풀’이다. 한풀은 1985년 택견을 만나면서 우리 고유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다. ‘한풀’은 한민족이 잃어버린 ‘고(古)무예’를 되살린 오늘의 무예이다. 이것을 두고 법고창신, 온고지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한풀’의 뜻은 ‘크고 바른 하나 되는 기운의 무예’이다. 크고 바르게 되자면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하나 되는 기운의 무예’ ‘한 기운의 무예’이다. ‘한풀’은 ‘랑(郞)의 무예’라고도 한다. ‘랑의 무예’는 쉽게 말하면 ‘화랑도의 무예’라는 뜻이다.

‘한풀’은 대중적으로 보면 합기술(合氣術)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합기도(合氣道)라는 말이 일본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덕암의 무예를 순우리말로 새롭게 만들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고견을 들어 ‘한풀’(1965년 4월)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일제 식민시절엔 선진 일본문화가 물밀 듯이 한반도에 역류하여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는 오래전 우리에게서 흘러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들이 많다. 물론 그 옛날 흘러간 것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있다가 그대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 것은 없다. 그동안 일본이 자신의 문화로 갈고 닦은 것이다. 문화란 결국 사용하는 자가 주인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소유를 무시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 원류는 추적할 만하다. 그 속에 문화의 원형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랑의 무예’도 그러한 경우이다. 흔히 우리는 ‘랑’(郞)을 ‘사내’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에 한자를 붙인 것이고, 그 이전에는 ‘더불어’의 뜻이고, ‘더불어 하나 됐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할 때의 랑, ‘너랑 나랑’할 때의 랑이 그 흔적을 가지고 있다. ‘랑의 무예’의 마지막 형태가 신라의 ‘화랑’이다. 그러고 보면 ‘아리랑’의 랑도 범상치 않고, 갓 결혼한 남자를 지칭하는 ‘신랑’의 랑도 예삿일은 아니다. 한민족은 어쩌면 ‘랑’을 지향하는 민족인 것 같다.

흔히 우리 고대문화의 원형은 천지인 사상이라고 한다. ‘랑의 무예’는 영(靈·넋)과 혼(魂), 몸뚱이(魄)가 하나 되는 것을 지향하는, 무예의 ‘인중천지’(人中天地)를 실천하고 있는 무예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神)은 예전에 ‘검’이라고도 했는데 이 ‘검’자도 심상치 않다. 왜 검이 신이고, 칼의 옛 이름이 검(劍)이고, 왕을 왜 임금(임검)이라고 하는가. 임금은 실은 ‘검임’의 말바꿈이다. ‘검’자에 ‘이다’ ‘되다’의 서술어가 붙어서 ‘검이 된’의 뜻에서, 다시 그것이 명사화되어 ‘검이 된 자’의 뜻이다. ‘검이 된 자’는 ‘임금’이고 바로 ‘랑이 된 자’를 말한다. 그 옛날의 지도자는 바로 ‘랑’이 되는 것이 필수과정이었던 것이다.

‘랑’이란 결국 오늘날 문무가 겸전된 자를 말한다. 그 무예의 전통이 가장 타락하여 구한말에는 ‘화랭이’가 되었고, 그래서 결국 나라가 망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일제 식민의 시절에 일본으로부터 ‘랑의 무예’가 조상을 찾아온다. 문화의 흐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DNA 같은 것이 있어서 제 조상을 찾는지도 모른다. 일본인의 이름에 유독 ‘랑(郞)’이라는 글자가 많은 것은 한국문화의 정수를 일본이 갖고 있는 것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한풀’이 처음 우리나라에 상륙할 때는 이름이 ‘대동류(大東流)’ 혹은 ‘대동류유술(大東流柔術)’, ‘야와라’였다. ‘한풀’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 최현배 선생은 고민이 컸다. 주시경 선생이 훈민정음을 ‘한글’이라고 지은 기억을 되살려 ‘크고 바른’의 의미를 되살려 ‘한’자를 쓰고 나머지는 ‘기운’을 뜻하는 순우리말의 ‘풀’이라는 말을 보태 ‘한풀’이 탄생했다고 한다. 기운의 순우리말은 ‘풀’이다. 우리는 지금도 ‘풀이 죽었다’라는 말을 쓴다. 바로 기운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기’라는 말도 순우리말인데도 한자말로 ‘기(氣)’자를 많이 쓰기 때문에 ‘풀’자를 선택했다. ‘한풀’이 후일 동아시아에서 우리 문화의 독자성이나 차별성을 줄 것으로 짐작했음은 물론이고, 그때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대동류는 ‘합기도’를 다룰 때 이미 소개한(세계일보 2010년 2월16일자) 덕암(德庵) 최용술(崔龍述·1899∼1986)에 의해 국내에 전해졌다. 결국 한풀은 대동류의 전통 위에 새롭게 정리 개발된 ‘전통적 창시무술’이 된다. 한풀은 최용술에게 가장 오랜 기간 수련을 하였고, 수제자 김정윤(金正允·1936∼)에 의해 탄생했다. 김정윤은 ‘한풀’을 창시하고 을지로에 ‘한풀수련소(밝터)’라는 간판을 내건 1965년 5월부터 2000년까지 신현배·이승희·김성열·정영태 등 100여명의 사범을 배출했다. 현재는 그를 잇는 신상득(申相得·48) 가승(스승에 가까이 다가간 제자라는 뜻의 순우리말)이 충무로에서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신상득 가승은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합류하여 ‘한풀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일본 현지 답사를 통해 ‘랑의 환국’(2005년, 이채) 전3권을 집필하는 한편 한풀의 부흥을 위해 열을 다하고 있다. 그는 1982년 신학공부를 할 때 한풀수련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28년간 한풀에 몸담아왔다.

50년대까지 최용술의 대동류는 야와라·유술·합기유술·유권술·유은술·기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다가 1960년대 들어 최용술의 제자들에 의해 합기도·국술·한풀 등이 탄생한다. 이 중 합기도는 대한합기도·국술원·국제연맹합기도 등 큰 단체에서부터 수도관·용술관·정기관 등 작은 단체까지 다양하게 분파된다.

이러한 제 유파의 수장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인물이 바로 김정윤이다. 김정윤은 1960년대에 초반 20대의 나이로 ‘합기술’ ‘기도’라는 책을 펴냈으며, 또한 2000년대에는 택견의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였던 송덕기 옹의 시연을 담은 ‘태견원전’(한풀에서는 택견을 태견이라고 한다)이라는 책을 냈다. 당시 이 책은 한국 무술의 뿌리를 알려주는 것으로 무예계에선 저마다 전범으로 삼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풀’이 택견을 만나면서 한 단계 진화하고, 민족무술과 그 원류에 대해 확신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택견과 한풀이 만나서 이룩한 문화의 확대재생산의 일종이고, 이는 택견과 한풀의 공동의 공일 것이다.

택견의 대명사인 품밟기는 상대를 어르는 기술이다. 공격하는 듯하면서 물러나고, 물러나는 듯하면서 공격하는, 상대를 종잡을 수 없게 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이다. 택견의 여러 기술은 대동류와 통하는 것이 많았다. 택견의 과시(꽈시, 꺽과시)는 대동류의 야추노바쿠(野中幕)라는 관절기를 통칭하는 것이었다. 한풀의 화려한 관절기는 이것을 원류로 한다. 대동류의 혈(신경)차단기는 택견의 ‘물주’, 힘빼기(力의 拔)는 품밟기, 활갯짓에 해당하는 것이다. 대동류의 매발톱수(다카노쓰메카타)는 월정(月挺)이었고, 미키리(見切)는 택견의 눈재기였다.

김정윤의 스승, 덕암 최용술은 살아있을 제에 합기도 계통의 도주(道主)로 숭앙받았다. 실지로 그가 한국 무예계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한국 현대무술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합기유술의 지도를 보면, 일본의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의 ‘아이키도’(合氣道) 계통이 있고, 일본의 대동류유술 계통이 있고, 그리고 가장 폭넓은 제자와 지지층을 거느리고 있는 최용술을 도주로 삼는 합기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기(合氣)라는 이름의 사용은 마치 합기도 계통 전부가 일본의 ‘아이키도’에서 전수된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합기도인 가운데는 합기도의 이름아래 전해진 대동류의 무술이 다른 이름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있어왔다.

합기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 대동류계통의 무술로는 ‘한풀’ 이외에도 ‘국술’ 등 여러 창시무술이 있다. 이 가운데 대동류의 전통에 가장 충실한 무예가 ‘한풀’이다. 그러나 김정윤은 한풀을 창제하면서 대동류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는 우리 무예로의 재탄생을 주창하는 것이었다. 김정윤은 가장 최근(2010년 2월)에 낸 저서에서 덕암의 무예이름을 ‘大東武’(밝터)라고 명명하여, 한풀과 차별화를 기했다.

한풀의 기술은 참으로 방대하다. 최용술의 방대한 기술을 일정한 원리와 공식을 찾아내 정리한 기술이다. 흔히 격투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술인 손파람을 12기본기법으로 정리하였다. 12기본기법은 기본형·이동기술·공격기술·방어기술·공격방어기술로 나뉜다. 기본형은 몸맨두리라고 하는데 공격과 방어를 위해 취하는 기본자세로 겨룸새·투그림새·몸한새가 있다.

이동기술에는 걸음새·뜀새·구르기가 있고, 공격에는 지르기·후리기가 있고, 방어에는 걷어내기·비켜나기·채기·받아내기 등이 있고, 공방에는 몸풀어나기·태질(태지기) 등이 있다. 손파람은 대표적인 맨몸기술이며 이 중에서 맨손으로 하는 기술을 손따수라고 한다. 맨몸기술에는 이밖에도 다리로 상대를 차고, 넘기고, 꺾는 다리수와 가장 기술의 양과 폭이 큰 꺾과시(관절기술)가 있다. 꺾과시 기술만도 이루 헬 수가 없을 정도이다.

한풀에는 맨몸기술 외에 무기를 사용하는 무기술과 던지기를 하는 팔매가 있다. 무기술에는 목검을 사용하는 빌랑대와 검을 사용하는 검랑대, 막대기를 사용하는 지팡대가 있다. 팔매에는 사슬(쇠·가죽·천)과 활, 태(칼 던지기)가 있다. 한풀에 현전하는 대동류에는 보이지 않는 이런 폭넓은 기술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풀의 기술은 마치 ‘한글’이 자모음을 조합하여 글자를 만들 듯이 그렇게 무술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무술의 한글이라고 할 수 있다. 한풀의 기술은 줄잡아 보면 손파람·꺾과시·빌랑대·다리수·풀달기술(기운을 닦달해서 상승·집중시키는 수련) 등 크게 5가지로 분류된다.

김정윤은 대동류가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고대무술이었고, 일본의 다케다 소카쿠(武田忽角源正義·다케다 소카쿠 미나모토노 마사요시)를 징검다리로 다시 한국의 최용술에 넘어온 것이라는 점, 이에 앞서 신라 화랑의 후예 ‘신라(시라기) 사부로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新羅三郞源義光)’를 시조로 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대동류가 우리의 전통 무예와 어딘가에 연결점이 있을 것이라는 데에 초점을 두고 연구를 해왔다. 그것이 바로 한국의 택견이었다.

김정윤은 후쿠시마(福島) 아이즈(會津)를 비롯하여 일본 전역을 탐방하면서 ‘웅야’(熊野·구마노) 혹은 ‘우흑’(羽黑·하구로) 등 일본신사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무인상 ‘테고이(手乞)’상이 있음을 보게 됐다. 일본에서는 ‘테고이’를 일본 무술과 씨름의 원류로 보고 있다. ‘테고이’라는 일본 발음은
<박정진 문화평론가>
한국의 ‘택견’과 크게 차이가 없다. 그는 일본탐방에서 도리어 우리의 신선교(神仙敎)의 전통을 그들이 잇고 있으며, 그들의 신도(神道)가 바로 그러한 전통의 연속임을 알았다. 말하자면 일본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고대의 문화가 남아 있었다. 테고이는 일본에서 발견한 ‘잃어버린 택견’이었다. 

오늘날 택견은 그 옛날 우리 화랑무술의 일부가 남아 있는, 마치 구한말에 놀이처럼 취급된 일종의 유실된 형태였는데, 그나마 무형문화재가 됨으로써 기사회생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무예의 본능이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끈질긴 것이 무예이다. 이것은 또한 기(氣)의 전통이기도 하다. 기(氣)는 책으로 전해지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반드시 실기로서, 실천으로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진의 무맥] (38) 무예가 박무웅씨의 꿈, 무술사관학교

‘國術’전통계승… 진취·긍정적인 한국인 기상 드높인다
무술은 본능이다. 만약 지금 예부터 전승되는 무술이 없다고 하더라고 무술은 누군가에 의해서 새롭게 복원되고 정립될 것임에 틀림없다. 단지 무예의 사제지간이 있고, 무술에 관한 책이 있다는 것은 좀 더 쉽게, 체계적으로 검증된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갖는 것이다. 우리의 무술은 일제 식민시대로 인한 단절과 왜곡의 여파로 지리멸렬하다시피 했다가 1960년대 민족 정체성의 부흥과 함께 몇몇 선구자에 의해 겨우 복원, 개발되거나 창시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장봉으로 상대의 약점을 강타하고 있다. 무인의 눈빛이 날카롭다.
그래서 어느 무술에 종사하건 어려운 생활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무술인의 삶이었다. 합기술, 혹은 합기도 계통이 창시무술의 바탕이 된 것은 많지만 그 가운데 ‘국술(國術)’도 빼놓을 수 없다. 국술은 1960년대 한국무술을 이끌어왔으며 태권도나 합기도에 못지않게 일반에 알려진 무술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무술을 해외에 알릴 때는 언제나 국술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무술은 우리의 고도성장과 관계없는 사각지대에 있다. 무술은 또 시대적 요구와도 먼 거리에 있다. 그러나 무술도 문화인 한, 자신이 평생 바친 무술을 후세에 전하고 싶고, 동시에 최고의 무술로 키우고 싶은 게 무예인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예가 박무웅(朴武雄·68)은 7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무술사관학교’의 꿈에 부풀어 있다. 그의 이름에 호반 무(武)자, 수컷 웅(雄)자가 들어 있는 값을 하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무예 진흥에 대한 그의 열성은 대단하다.

그가 ‘무술사관학교’를 생각하고 특허청에 등록출원을 한 것은 2004년(8월17일)이다. 무술의 ‘민족사관학교’에 대한 꿈은 2006년에 등록신고(1월3일)가 완료되면서 무르익는 것 같았다. 그는 무예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체계화와 대량화가 필요한데 이는 개별 도장에서의 교육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대학을 생각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유도대학, 태권도대학 같은 것을 무예의 전 분야에서 실현하는 종합무술대학교이다. 당시 문교부에 8개 학과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것이 재정난으로 무산되면서 꿈은 좌절되었다.

◇박무웅 선생이 국술의 고수들이 시연하는 운학형에 들어가기 전에 기본자세를 취하고 있다.
박무웅은 어릴 적 울산에서 자랐다. 중학교 2학년 때 ‘국술원 울산체육관 분관’에서 국술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 후 1967년 군에서 제대한 뒤 서울 답십리 국술원 도장을 찾아 훈련을 재개하면서 국술과의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국술을 창시한 서인혁씨가 대구에서 부산 현대극장 옆으로 본부를 옮긴 뒤, 다시 국술의 세계화를 이룬다는 명목으로 1974년 미국으로 갔다. 이에 동생인 서인선씨가 그 후 국술원(총관장)을 맡게 되었다.

박무웅씨는 서울에서 유단회 회장으로 국술원의 대외업무(유단회 회장)를 맡았다. 당시 대전 이북에 있던 유일한 국술원 도장이었던 서울도장은 서울에서 벌어지는 국제행사는 거의 주도하는 처지가 되었다.

국술은 합기도를 바탕으로 여러 전통무술을 융합한 퓨전 창시무술이다. 그래서 합기도와는 친교가 남달랐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 무술의 문교부 법인 1호인 ‘대한기도회’에 통합세력으로 참가하였고, 서인선씨는 대한기도회의 운영에 깊이 관계한다. 서인선씨는 그 뒤 대한기도회와 결별한 뒤 따로 ‘한민족합기도협회’를 설립하면서 국술원과 갈라진다. 당시 국술원 출신으로 다른 단체나 법인을 설립한 사람은 무려 십수명에 달했다.

무술계의 분가 혹은 분파는 실질적으로 살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나누어지지 않으면 도장 경영의 타산을 맞출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또 무술의 이름도 새 이름으로 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대한기도회’에 이어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통합의 깃발을 들어 잠시 합기도 통합이 성공한 적(대한민국합기도협회, 1979년)도 있고, 그 후 전경환씨가 무술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새마을합기도’란 이름으로 합기도계를 통합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합기도는 태권도와 같은 대동을 이루지 못하고 각자의 살림살이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의 창시무술은 합기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통합을 이루지 못한 대신 여러 분가를 한 셈이다.

이런 와중에 국술은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무술 시범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이때 박무웅씨는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된다. 1975년 5월에 있었던 ‘세계국술시범 및 선수권대회’(5월1∼2일 문화체육관)는 세계 각지에서 무려 140여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 중 70여명이 외국인이었을 정도로 세계화를 이루었다. 대구 K2공군부대, 군산 팬텀기 부대, 부산 하야리아부대(보급창), 동두천 2사단 장병들에게 국술의 인기가 높았던 때문이다.

국술은 1975년 ‘호국무예’로 뽑혀 당시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벌어진 시범은 국립영화제작소에 의해 문화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이듬해 4개 국어로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무예로서 각광을 받았다. 이 문화영화는 제16회 파나마영화제 최우수상, 제1회 아말피영화제 민족문화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발차기 시범을 보이는 박무웅 선생. 상대방을 제압하는 기운이 묻어난다.
1994년에는 ‘호국무예의 맥을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다시 9분이 추가 된 29분 분량으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당시 국술은 합기도, 태권도와 함께 방영되었는데 가장 오랜 시간 방영되었을 정도이다.

박무웅씨는 1980년 ‘대한국술원’ 연수원장을 맡기도 했다. 1990년에는 국술세계대회 한국대표로 캐나다와 미국을 들렀다. 2000년에 접어들어 대한봉술협회를 설립하면서 각종 무술협회를 조직하고, 독자적인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는 무술사관학교 설립의 기초를 닦기 위한 것이었다. 2002년에는 (사)한국호국무예국술협회를 설립한다. 그가 무술사관학교의 설립을 생각한 것도 실은 당시 여러 국제행사를 치르면서 얻은 경험의 소산이었다.

그간 그는 경찰서·대학교·관공서 등 무술을 필요로 하는 곳에 외래강사, 실기교수로 나가면서 수십년간 무술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흰머리를 휘날리면서도 기회가 닿으면 어느 곳이든 가서 무술시험을 보이는 까닭은 무술이야말로 한국인의 기질을 진취적이고 긍정적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교육프로그램은 국술과정을 비롯하여 검술과정, 경호과정, 봉술과정, 무기술과정, 호신물과정, 합기술과정, 태권술과정 등 모두 8개 과정이다. 각 과정은 초급·중급·고급·대급으로 나뉘고, 각 수련과정은 다시 여러 종류, 여러 단계로 훈련이 실시된다.

예컨대 호신술초급의 경우 기본술, 손목술, 의복술, 악수술, 맥치기술, 맥차기술 등으로 나뉘고 이들은 다시 여러 기술로 세분화된다. 그의 프로그램은 무술의 연결동작을 세분화하여 여러 단계로 습득할 수 있게 하였다는 데 특징이 있다.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듯이 세분화하였다. 그래서 무술에 재능이 없는 사람도 소화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무술사관학교를 설립해야만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을 다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무술사관학교의 교가도 직접 만들었다. “호국정신 깃발을 높이 들어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자/ 호국무예 이어갈 대한의 자손들아/ 민족의 주체성을 잊지 말아라….”

◇박정진 문화평론가그는 ‘무술사관학교’(2권)라는 책자를 만들기도 했다. 현재 대한기도회(합기도협회) 공인 9단 지도관장, 대한봉술협회 공인 9단 연수원장, 무기술 아카데미 원장이기도 하다. 무술의 달인으로 통하는 박무웅씨. 백발이 된 신선 같은 외모로 한복을 입고 시연을 하는 그를 보면 한 마리 학이 춤을 추는 것 같다. 좌중은 숙연해진다.

그는 최근 무술사관학교의 꿈을 현실로 잡을 뻔했다. 2008년 충주시 이루면 만정리 일대 6만2000여평 부지에 ‘무술사관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현지 (주)국제유스호스텔 측과 당시 그가 대표로 있던 (사)국술협회 사이에 약정서(2008년 7월10일)를 교환하기도 했다.

당시 임시 교육장과 기숙사 건립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지금도 그는 당시 홍보관에 마련되었던 도장과 무술사관학교 로고를 생각하면 감회에 젖곤 한다. 잘 진행되다가 문교부 당국과 대학 설립자 간에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었고, 교수요원의 확보도 여의치 않아 결국 문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한국과 같이 무예를 천시하는 나라에서, 진로가 막연한 나라에서 무예를 교과목으로 해서 대학 신입생을 뽑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장학금 등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신입생을 모집할 예정이었다. 그 꿈은 잠시 접지 않으면 안 되었고, 지금까지 무술사관학교는 꿈에 머물고 있다.

45년 무술 경력의 그는 합기도에서 새롭게 태어난 국술을 접한 뒤, 오랜 수련 끝에 이제 무술사관학교의 여러 무술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무술의 형이 없던 것이 형을 얻게 되고, 무기술을 더하게 되고, 다시 세분화된 기술로 정규 교육과정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커리큘럼화하였다.

“제가 구태여 무술학교를 사관학교로 명명한 것은 사관학교와 같이 철저하게 군인정신으로 무장된 무예인을 기르기 위한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 무예는 현실적으로 요구와 필요가 많이 줄어든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도리어 전문요원들은 전문교육기관에서 양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도와 태권도인만 양성할 것이 아니라 다른 무술도 함께 육성함으로써 민족문화의 보존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여러 무술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여러 무술을 관통하는 무예의 정신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무술은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이 있긴 하지만 결국 정신입니다. 정신을 통일해야 제대로 술기를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상대를 제압하기 이전에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모든 수련이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무술은 단순히 몸을 움직여서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이 아니라 우선 수신(修身)하는 기술입니다.

-많은 무술과 여러 동작이 있는데 결국 자신이 즐겨 쓰는 술기를 사용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수련을 할 때는 여러 무술과 기술을 배웁니다만 결국 그 가운데 자신에게 맞는 무술과 기술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마다 체형과 체질이 다르고, 무술의 목적 또한 다릅니다. 그래서 결국 적재적소에 쓰지 못하면 여러 무술을 습득하였다고 하더라도 효과적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신체적 조건이나 상황에 따른 무기를 사용하여야 하며, 특히 필요할 때는 생활 속의 어떤 도구도 무기로의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임기응변 같은 것도 필요합니다. 결국, 무예도 생활과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이 문을 숭상하고 무를 멸시하는 전통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무를 멸시하는 전통은 문화의 운영에서 은연 중에 실질과 실천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일본에서는 무인을 크게 존경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도리어 현실에서는 예의 바르고, 절도가 있는 국민으로 세계적으로 칭송받고 있지 않습니까. 어릴 때부터 어떤 종류의 무술이라도 수련한 경험이 있는 학생이 장래 공부도 잘하고, 사회적으로 교우관계도 좋고, 진취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송원영 기자

바로잡습니다. 

지난 4월7일 게재된 ‘무맥 (27)한국 현대무예의 지형도1’에서 일본 체술원 출신 반기하 선생을 소개하면서 “집안 내력이 친일 귀족이었다는 점에서 자숙하는 의미에서 현실 참여에 회의적이었고”라고 표현한 구절은 본인에게 직접 들은 사실이 아니고, 반 선생은 고인이 되었기에 본의 아니게 누가 될 수 있음을 사과드립니다. 이 구절은 특히 해법 김광석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게재하면서 다루었기에, 해법 선생의 전언으로 오해될 수 있기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혀드립니다.

 

[박정진의 무맥] (39) 혈기도(穴氣道), 땅에서 천기(天氣)를 먹는다

하늘의 기운과 천기를 수련 통해 몸에 축적 젊음 유지
하늘과 땅은 인간이 편의상 나누어놓은 것이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 천지가 조응하지 않으며 일어나는 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태초에 인간들은 하늘에 순응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그것에 반하는 삶의 체계를 만들어 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명이 이룩한 체계와 자연의 체계가 상충되면서 자연은 이제 언제 인간에게 재앙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는 가운데 인간에게 여러 질병이 발생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당뇨병, 고혈압, 암 등과 같은 각종 성인병들이다.

◇우혈 허장수 선생이 ‘혈기도’ 행공에 앞서 몸을 풀고 있다. 17년간 산중에서 수련하며 356가지 행공을 익혔다는 우혈 선생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고관절이 360도 자유자재로 회전한다.
허정호 기자
이들 성인병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현대병들이다. 적당히 움직이면서(노동하면서), 적당히 먹으면서, 적당히 자연과 순환관계를 유지하면서 살라고 하는 천명을 어긴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다. 혈기도(穴氣道)의 입장에서 보면 병원신세를 지면서 노후생명을 연장하는 고령화사회는 무의미하다. 건강하게 젊음을 유지하면서 오래 살아야 한다.

혈기도는 자연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해주는 내공(內功)무예이다. 신선들은 하늘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서 시간을 보내는 한가한 초월집단처럼 흔히 전해지지만 실제 신선들은 피나는 고생을 하면서 수련을 한 존재들이다. 사는 동안 자연친화적으로 살며 남보다 젊음을 더 유지하고, 끝내 육신을 버릴 때는 죽음을 초월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부류의 인간이다.

혈기도를 비롯한 선도(仙道)는 하늘의 기운, 천기, 생기를 수련을 통해서 우리 몸에 축적함으로써 젊음을 오래 유지하는 무예이다. 신선이 되는 무예는 다른 무예처럼 반드시 사제지간이 있어서 전수되는 것도 아니다. 선도는 기통(氣通)에 의해서 솟아오르기 때문에 다른 무술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계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중간에 끊어지는 수가 종종 있다. 그래서 간헐적으로 스스로 터득하는 수련자들이 나온다.

혈기도도 1889년 천우(天宇·1875∼1982) 스승이 금강산에서 한 신선을 만남으로써 가까스로 전해져 4대째 이어 온 선도이다. 천우 스승은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서 12살에 홀어머니를 여의고 불가로 출가하였으나 2년 후 선도에 입문함으로써 오늘을 있게 했다. 

◇대퇴(미골과 선골)의 기운을 경추에 교감시키는 행공.
혈기도는 본래 이름이 없었다. 산중무예에서 시중으로 내려오면서 천우 스승의 제자 우혈(宇穴) 허장수(許章壽·1936∼) 선생이 도장을 열기로 결심함에 따라 ‘생명을 상징하는 붉은 점과 원’으로 구성된 혈기도의 마크를 만들고, 이름도 짓게 된다.

혈기도는 ‘혈(穴·Hole)+기(氣·Energy)+도(道·Method)’로 이루어졌다. 우주는 블랙홀과 화이트홀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 구멍이다. 또 원자나 소립자도 하나의 작은 에너지 구멍이다. 인체 역시 세포라고 하는 무수히 작은 구멍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주는 매크로코스모스든, 마이크로코스모스든 구멍과 에너지로 이루어진 유기체이다.

인체에는 아홉 개의 구멍(大穴·九竅)이 있다. 혈기도는 이 구멍과 피부세포의 수많은 구멍을 통해서 인체에 외부의 천기가 자유롭게 드나들게 함으로써 양생하는 수련법이다. 혈기도에선 몸이 정신의 주인이다. 몸을 정신의 도구로 생각하면 잘못이다. 혈기도에선 우주는 거대한 몸체계이다. 몸은 바로 마음이고, 몸이 있어야 정신이 있고, 몸이 있어야 혼백도 있게 된다.

혈기도 세계연맹총재 허장수 선생은 올해 만 74세이다. 겉모습은 덥수룩하지만 실지로 그의 몸은 아직도 청년 같다. 제자들이 떼로 달려들어도 선생을 이기지 못한다. 경희대 체육과를 졸업하고 한때 권투선수로 활동했던 그는 어릴 적부터 무술을 좋아하여 태권도 등 여러 무술을 섭렵하였다. 각종 무예를 수련하면서도 일찍부터 도(道)에 목말라 했다. “과연 도가 있을까, 신선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항상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29세(1965년)에 천재일우의 기회로 내설악 한계령에서 천우(天宇) 스승을 만났다. 만나는 순간 ‘이분이 도인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천우 스승이 우혈 선생을 받아들일 때가 세수 90세였다. 우혈을 만날 때까지 단 한 명의 제자도 두지 않았던 천우 스승은 좀체 입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려 6개월을 머문 끝에 승낙을 얻어냈다. 어떤 질문이라도 하면 그날로 하산한다는 ‘무문부답’(無問不答)이 조건이었다. 나중에 그가 깨달은 것이지만 질문과 대답은 혈기도에 필요 없고, 오직 실천과 경험만이 득도의 경지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었다. 질문과 대답은 도리어 방해가 될 뿐이다.

우혈 선생은 17년간 산중에서 수련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은 토굴을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1982년, 세수 107세였다. 스승은 등선(登仙)할 날을 알고, 미리 음식과 수분을 조절하여 뼈와 가죽만 토굴에 남겨두고 시해등선(屍解登仙)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크게 깨달았다. “아! 이런 것이구나.” 스승은 말 없는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말이 있으면 초월할 수 없다.” “말로서 아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 알아야만 제대로 아는 것이다.”

우혈 선생은 스승과 이별한 뒤 설악산 한계령에서 하산하여 3년여 여러 명산대천을 주유천하하다가 1985년 서울 아현동에서 첫 도장을 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도장을 옮겨 다니다가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제자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현재 서울 인사동(153-3) 놀이마당 건너편 골목에 ‘혈기도세계연맹’ 본부도장을 열고 있다. 혈기도는 현재 미국, 캐나다에 지부가 있다.

우혈 선생은 지금도 시중에서 제자들을 양성하지만 틈만 나면 훌쩍 가평군 현리에 마련한 은거지로 숨어버리기 일쑤다. 산이야말로 혈기도인이 거처할 영원한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산만큼 기운이 생동하는 곳은 없다고 한다. 주문을 외우기를 좋아하는 중국의 도교와 한국의 신선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한다.

◇좌신하고 있는 모습. ‘혈기도’ 수련의 일환이다.
혈기도의 수련은 이렇게 시작한다. 반가부좌로 좌정을 하고 ‘지이∼(地)’ 하는 구령과 함께 숨을 내뱉는다. 이것이 토(吐·날숨)호흡이다. 어떤 호흡보다 토호흡을 중시한다. 토호흡은 배가 등짝에 붙을 정도로 이어진다. 토호흡은 몸에 쌓인 오장육부의 탁기를 몰아내는 호흡이다. 이어지는 구령은 ‘처언∼(天)’이다. 천은 들숨이다. 우주의 에너지를 혈을 통해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때 사람의 몸은 풍선과 같다. 풍선에 바람을 넣고, 풍선에 바람을 빼는 것이다. 이때 몸의 중심은 물론 단전(丹田)이다. 단전을 사람이 몸에서 농사를 짓는 자리이다. 그래서 단전이다.

이어 발목 관절 풀기와 허리 굽히기, 다리 가위 벌리기 등 예비 행공이 계속된다. 앉아서 허리를 굽히면 상체가 가볍게 땅에 밀착하고, 양 다리를 완전히 벌려 한 일(一)자를 만든다. 일흔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고관절이 360도 자유자재로 회전한다.

한 동작은 본래 10분씩 계속되지만 요즘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세태를 감안하여 1분으로 줄였다고 한다. 불과 몇 동작만에 온몸에서 땀이 맺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땀이 비 오듯 한다. 몸에서 혈문(穴門)이 열린 탓이다. 혈문이 열려야 땅에서 천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본래 행공은 무려 300여 가지(356가지)가 있지만 수련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예비 행공과 본 행공을 합해도 30여 종에 불과하다. 이를 소화할 제자가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 중에는 의사, 교수, 금융인, 공무원, 언론인도 있고, 주부들도 상당수 있다.

올해 11년째 수련을 하고 있는 문조웅 사범(삼성병원 초대 치과과장)은 “무엇보다 젊고 활기차게 살 수 있는 것이 보람입니다. 관절과 뭉쳐진 근육을 풀어주고, 각종 욕망과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도 혈기도를 한 덕분입니다. 심신의 밸런스를 되찾는 데는 매우 효과적입니다”하고 말한다.

정오성 목사(종로구 재활센터장)는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혈기도를 하면서 인생의 자신감을 되찾았습니다. 주변에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에게 혈기도를 소개했는데 병을 고쳤습니다. 직업적으로는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관념도 새롭게 형성했습니다.”

혈기도를 하면 음식을 많이 먹지 않게 된다. 지상의 음식물로만 영양을 보충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대기 중의 천기, 즉 하늘음식을 먹으니까 지상의 음식을 줄여도 충분하게 영양보충을 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과다한 음식과 욕망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 현대인은 모두 과다한 영양과 운동부족, 그러면서도 욕망으로 인해 각종 스트레스를 스스로 쌓고, 그 짐을 지고 가느라 허덕인다. 인간은 참으로 지혜로운 것 같지만 실은 자연의 동식물보다 못하다. 이제 자연으로부터 도리어 배울 차례이다. 도대체 적당히 먹는 것을 모르고, 만족할 줄 모른다. 그것이 도리어 자연을 황폐화하고, 그 반대급부(자연으로부터의 보복)로 스스로를 황폐화하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우혈 선생의 하루 식사는 산야초와 두부 몇 조각이 전부. 몇 년 전부터 주변의 권유로 곡기(밥)를 시작했지만 두세 술이면 배가 불러 많이 먹을 수도 없다. 몇 해 전 사고로 인해 척추압박을 당해 보통사람 같으면 휠체어 신세를 질 정도였지만, 수술을 마다하고 혈기도 수련으로 다시 회복 중이지만, 그는 검버섯이 없어 청년처럼 맑다.

그는 한 호흡에 윗몸 일으키기 50회가 가능하다. 한 호흡 반이면 잠이 든다. 자기 몸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한다. 엄지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를 한다. 50일간의 단식도 수행의 일부다. 그는 끼니라는 개념 없이 배가 고플 때 조금씩 먹는다. 자연은 그렇게 배 고플 때 먹고, 배부르면 먹지 않는다. 그런데 현대인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고프다. 현대인의 병은 ‘많이 먹기 때문’이고, ‘모자라는 듯이 먹어야 건강’하다고 한다.

◇박정진 문화평론가“인간이 두 발로 걸으면서 좋아진 것은 척추의 척수에너지가 머리로 올라가서 두뇌용량이 늘어난 것이지만 그 반대로 척추가 압박을 받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따라서 척추의 건강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척수를 충만하게 해야 젊음이 유지됩니다. 무병장수하려면 단전에 내공을 쌓아 요추를 강하게 해야 합니다.”

혈기도(穴氣道)는 혈(구멍)에 기(에너지)를 불어넣는 도(방법)이다. 호흡은 혈을 소통하는 행공의 기본이면서 몸의 피로물질이나 유해산소인 ‘탁기’(濁氣)와 ‘객기’(客氣)를 버리고, 하늘과 땅의 기운(천기·지기)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호흡은 마음이고, 호흡은 영(靈)이고, 호흡은 맛있는 음식이다.

단전에 축기를 많이 한 사람은 저절로 신선에 가까워진다. 척추의 힘은 유한하지만 단전의 힘은 무한하다. 척추 자체는 힘이 없다. 척추를 받쳐주는 것이 요추이며, 요추를 받쳐주는 것이 단전이다. 그래서 단전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다른 선도 수련 단체들과 크게 다른 점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지식(止息) 호흡을 하면 안 된다는 점과 토(吐)호흡을 중시하는 점이다. 지식호흡은 도리어 호흡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인위적으로, 강제로 끊어놓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노출한다는 것이다. 토호흡은 탁기를 배출하는 것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미골(尾骨)과 선골(仙骨)이 분리되는 것이 중요하다. 개와 쥐 같은 동물도 미골과 선골이 분리되어 움직이는데 문명인은 척추압박으로 인해 그것이 붙어있다. 수련을 통해 점차 척추 마디마디를 분리하고 유연하게 만들면 천기의 소통이 더 활발해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직립보행함에 따르는 문제점을 보완하는 셈이다.

“행공을 하면 몸에 다른 기운이 들어옵니다. 척수에 다른 기운이 들어와서 운기가 되면 정신은 몽롱해집니다. 그게 천기입니다. 행공에는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요추가 뒤로 빠져 있으면 행공이 아니라 노동이 됩니다.”

기(氣)란 바로 현재의 것이지만 그것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드물다. 기(氣)가 물질처럼 정체성이 없다. 따라서 동일한 기는 없다.

“세포는 100일만 지나면 바뀝니다. 공부는 내일 해도 되지만 오늘 하지 못한 행공은 다시는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불치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이렇다.

“세포는 100일이면 한번 바뀝니다. 100일을 살 기력이 있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100일 미리 죽는 것입니다. 몸이 잘못된 시점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호흡하고 행공하면 바로 잡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대우주의 에너지로 살아갑니다. 아픔을 쫓아가야 아픔이 사라지고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몸철학은 어떤 현대의 의사나 몸철학자보다 한 수 위이다. 또 교(敎)는 중심을 정하고, 울타리를 치지만, 도(道)는 중심이 없는 까닭에 울타리도 치지 않고, 대자연과 대우주의 에너지와 심신합일(心身合一)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선도(仙道)의 부활만이 우리 민족이 자주성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교(敎)는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도(道)는 간단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즉 아아애(我我愛)입니다. 도는 나를 찾는 것이고, 몸을 놔주는 것입니다. 몸을 놔줘야 몸이 머리를 잘 보필합니다. 어릴 때는 몸을 놔줄 줄 알지만 크면서 그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머리가 몸을 간섭하면 안 됩니다. 몸은 주면 받고 안 주면 끊어버립니다. 몸은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판단을 하지 않는 몸에게는 진기(眞氣)를 주어야 합니다. 진기를 주면 그다음은 몸이 다 알아서 합니다. 어떤 기운이 오면 몸은 머리가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그 기운을 받아들입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몸을 완성시킬 수 없습니다.”
 
[박정진의 무맥] (40) 통일무도(統一武道)

 

참사랑 바탕으로 각종 무술 창조적 재구성한 ‘평화의 무예’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인 우주는 팽창과 수렴을 반복한다. 그것은 흔히 문명적으로 분열과 통합으로 나타난다. 지금은 수렴과 통합의 계절이다. ‘통일무도’는 무예의 통일과 인격의 완성을 위해 통일교에서 개발한 자생무예이다. 무예의 정수를 모아 새롭게 창시된 통일무도는 각종 무예가 각자의 개성대로 있게 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장점을 따오는 한편 통합에 따른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기존의 기술을 향상시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각종 무예의 장점을 따오기 위해선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강물이 바다가 되는 것과 같다.

◇남양주 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2010 원구피스컵 대회에서 통일무도 시범을 보이고 있는 선문대 학생들.
송원영 기자
무예인들은 대개 자기의 무예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시무술인 통일무도는 통합을 위해서 낮아지고, 낮아지기 때문에 각종 무예의 장점을 볼 수 있다. 통일무도는 살수의 무예가 아니라 제압의 무예이고, 전쟁을 위한 무예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무예이다. 그래서 고난이도의 기술을 가르치지만 무술시합에서 치명적인 기술을 쓰지 못하게 하고, 쓰면 감점을 하게 되는 특이한 무예이다.

통일무도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서 헬멧을 쓰게 하고 글러브를 끼게 한다. 각종 무술의 여러 기술을 동시에 쓰게 하되, 별도의 통일무도 체계를 완성해 놓고 있다. 종합무예적인 성격은 용인대학의 용무도와 같다. 통일무도는 여하한 공격에도 비무장적인 상태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공격보다는 방어가 목적인 평화의 무도이다.

종래 무술이 걸어오던 길과 반대의 길이다. 전쟁의 기술로서의 무예가 이제 심신 단련과 정신통일, 건강 증진, 호신과 인격 완성에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평화 시에 무술 본래의 목적이기도 하다. 통일무도에는 기술로서의 무술, 예술로서의 무예, 깨달음의 도로서의 무도가 다 들어 있다.

지난 12일 경기 남양주시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10 가인·아벨 원구(圓球) 피스컵(Peace Cup) 천주연합대회’(4회째)는 통일사상을 스포츠와 문화로 실현하는 대회였다. 이 자리에서 통일무도를 익힌 선문대학 학생들이 무술시범을 보였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선수들로 성황을 이룬 통일교 세계문화체육대전은 마치 작은 올림픽처럼 진행됐다. 이어 오후에 경기 청평 청심원 체육관에서 열린 ‘제5회 세계무도 피스컵 토너먼트’는 세계 통일무도인이 한바탕 실력을 겨루는 자리였다.

올해 치러진 ‘세계무도 피스컵 대회’는 대륙별로 치러지며, 짝수 격년제로 실시된다. 이와 달리 통일무도가 실시하는 또 다른 대회인 ‘세계 무도 월드컵 대회’는 무도 종목별로 홀수 격년제로 치러진다.

통일무도는 1979년 1월5일 미국에서 시작됐다. 통일교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의 제안과 지도로 통일교 경전을 뒷받침하는 심신단련 무도로서 시작됐다. 문 총재는 ‘단련용진(鍛鍊勇進)’이라는 휘호를 내렸다. 세계통일무도연맹 석준호(石俊淏) 회장은 1983년 1월 당시 미국 원리연구회 책임자로 발령 난 것을 기회로 미국 여러 대학캠퍼스를 순회하면서 ‘무도와 통일사상’이라는 강좌와 통일무도 시범을 개최하기에 이른다. 보스턴, 텍사스, 위스콘신, 캘리포니아 대학 등 공산주의 운동의 본거지를 집중 공략했다.

문 총재가 창시한 통일무도를 구체화하면서 지금까지 이끌어온 석준호 회장은 “통일무도가 통일교의 선교에 큰 힘이 되는 것을 오랜 미국 활동과 해외 각국의 선교를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면서 “앞으로도 통일교가 가는 곳에 통일무도가 함께했으면 한다”고 말한다.

◇남미 아르헨티나에서는 2세대 어린 아동들도 통일무도 수련에 열중하고 있다.
통일무도는 통일원리를 중심으로 각종 무술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택했다. 말하자면 창조적 재구성이다. 때마침 국내에서는 1976년 문 총재의 현몽(영계의 지시)으로 한봉기(韓奉基) 선생이 창시한 원화도(圓和道)가 있어서 둘은 안팎으로 상생관계를 이루면서 발전하였다.

통일무도는 원형운동을 중심(주체)으로 하고 직선운동을 주변(대상)으로 함으로써 완성됐다. 원형운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원화도이다. 원화도는 정확하게 말하면 원구(圓球)운동이다. 공처럼 구르는 형상을 모델로 했다. 통일교의 행사에서 ‘원구(圓球·Won-Gu)’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은 원구의 의미가 원을 중심 삼고 상하좌우 전후가 90각도로 온전히 하나되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등한 관계를 이룬다는 통일교의 원리를 내포한 때문이다.

원형운동은 힘의 소모가 없는 주체적 운동이고, 직선운동은 힘의 소모가 있는 대상적 운동이다. 이는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는 통일사상을 기조로 무도를 재구성한 결과이다.

“모든 기술과 동작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인격완성으로 나아가는 게 목적이다.”

통일무도는 참사랑과 양심의 도리를 기본으로 하여 동양과 서양의 가치, 전통과 현대의 가치, 정신과 물질적 가치를 조화·통일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우주적 가치인 통일원리를 중심으로 무도를 체계화했다.

통일무도에는 동작의 각 단계마다 철저히 통일원리와 사위기대(四位基臺)가 적용된다. 예컨대 무도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자리에는 통일원리(心情·참사랑)가 있고, 그 아래 좌우에 원형운동으로 부드러운(柔) 동작, 직선운동으로 강한(剛) 동작이 있다. 이들이 다시 하나가 될 때 통일무도가 완성된다.

참사랑을 기준으로 하면 마음과 몸, 그리고 성숙한 인격이 있고, 가정으로 보면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가 있다. 이렇게 사위기대는 수많은 원형과 변형이 가능하다. 통일무도의 본(本)은 몸과 마음의 조화를 이루고 손과 발동작의 조화를 증진시키며 겨루기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통일무도의 첫째 본은 ‘평화의 본’이다. ‘평화의 본’은 완전히 긴장을 풀고, 깊은 단전호흡을 하면서 끊임없이 물결치는 것과 같은 동작으로 구성되며 원형동작과의 혼연일치를 통해 구형적(球形的) 비전을 갖는다. ‘평화의 본’의 원리는 참사랑을 바탕으로 몸과 마음의 통일을 기하고 내적 평화를 이루고, 그 평화가 가정·종족·사회·국가·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통일무도에는 이 밖에도 ‘사위기대의 본’ ‘원화의 본’ ‘성화의 본’ ‘삼단계의 본’ ‘참가정의 본’ ‘통일의 본’ ‘창조의 본’ ‘천승의 본’ ‘참 사랑의 본’ ‘왕권의 본’이 있다. 앞으로 계속해서 개발되고 확장될 예정이다. 재미있는 것은 통일무도의 기본형이 바로 통일원리를 도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며 아이콘(圖象)이라는 점이다. ‘무도의 도상’이다.

통일무도에는 또 ‘통일무도 발레’를 비롯하여 ‘일보 겨루기’ ‘프리스타일 다단계 겨루기’ ‘기본 호신술’ ‘진보된 호신술’ ‘자유 겨루기’ ‘무기술’ 등이 있다.

석 회장은 중학 시절부터 유도를 했다. 아버지는 유도계의 ‘유성’(柔聖)으로 불리는 고(故) 석진경(石鎭慶) 선생이다. 아버지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유도의 최고 경지인 10단에 오른 인물이다. 일본 교토의 입명관(立命館)대학 법학과를 나온 아버지는 문무를 겸전한 대표적인 유도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수많은 제자들과 전 유도계가 슬픔에 잠길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문무겸전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그래서 무술을 한다고 해서 공부를 안 하거나 체육선수라고 해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무술이든 학교 공부든 모두 공부이다. 인격 완성을 위해서는 다 필요하다. 실제로 무술을 닦으면서 공부를 하면 심신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학교 공부도 더 잘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는 미국 한 대학교의 실험조사에서 증명된 바 있다. 무도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그리고 무도를 주먹과 폭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것은 무도인의 자업자득이다.

석 회장은 승단이 어렵기로 소문난 한국 유도계에서 9단에 올랐다. 아직 아버지의 10단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감히 넘나볼 수 없는 자리이지만 10은 완성수이다.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는 승단할 때마다 무도인으로서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 무예계에 가장 필요한 것이 겸손함이라는 것을 일찍 터득한 때문이다. 통일무도계에선 창설자로 10단이다.

그는 서울고등학교 3학년 때 유도를 하다가 다치는 바람에 대학입시를 앞두고 크게 방황한 적이 있고, 그 후 3년여 청년기의 질풍노도 시대를 보냈다. 그때 어느 날 꿈에서 ‘통일교를 찾아가보라’는 하늘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후 통일교 신자가 되었다. 그것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는 무도를 배웠고, 문선명 총재로부터는 통일사상을 배웠다. 그래서 그 둘이 만나서 오늘날 통일무도를 만든 셈이다. 통일무도는 태생적으로 문무겸전의 무예이다.

석 회장은 문 총재가 탄생한 나라인 한국에,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찾듯이 앞으로 세계 통일교인들이 두고두고 한국을 찾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 문화적으로 볼 때도 그동안 외국에서 수입하기에 급급하였지만 이제 수출이 더 많아질 날이 머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벌써 문화예술의 수출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통일무도도 훌륭한 문화수출의 주역이 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번 피스컵 대회에 참가한 일본인 다가미츠 호시코(聖子孝光·61·통일무도 7단)는 “통일교와 통일무도는 세계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미래 세계문화를 선도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한다.

러시아에서 온 시라프니코바(28·통일무도 2단)는 “통일무도를 배우면서 삶의 활기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현재 모스크바 일원에는 100여명의 통일무도 수련생이 있으며, 러시아 전체에는 수천명에 달합니다.” 10여년째 통일무도를 수련하고 있는 그녀는 통일무도 발레의 선수이기도 하다.

국제평화지도자대학(IPLC·International Peace Leadership College) 교수이며 세계통일무도연맹 아시아지역 회장인 비너스(Vinus G. Agustin)는 “필리핀에 소재한 이 대학에서는 졸업생 전원이 통일무도를 필수로 이수하기로 되어 있다”고 소개한다.

세계 각국에서 온 언어와 피부 색깔이 다른 여러 선수와 심판들을 보면서 ‘무도의 세계화’라는 것이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세계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 중앙에 통일무도가 있는 것이다. 통일무도는 현재 세계 120여개국에 소개되고 있으며 앞으로 통일교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손발처럼 따라갈 예정이다.

통일무도의 세계화 여정을 보면 1980년대 초기 통일무도 간부인 겐사쿠 타카하시는 영국과 독일을 방문해 지도를 했고, 네덜란드에서 유럽 대륙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마이클 켈렛은 통일무도 학교를 샌프란시스코에 설립하였으며 여기서 수련한 핀란드 수련생은 고국으로 돌아가 첫 유럽지부를 세웠다. 바로 직후 에스토니아에도 통일무도 학교가 세워졌는데, 에스토니아는 당시 소비에트연방에 속해 있었다. 에스토니아를 기반으로 석준호 회장과 다카하시는 문선명 총재의 소련 방문 전에 입국할 수 있었다.

통일무도 핵심사범들은 그 후 동서유럽과 브라질, 아르헨티나, 케냐, 필리핀, 타일랜드 등지에서 특별 프로그램을 개최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100여명의 유단자를 배출할 수 있었다. 이들을 통해 다시 수천명의 수련자들이 통일무도를 배웠다. 특히 필리핀은 마닐라를 중심으로 전국에 40개의 지부를 세울 수 있었다. 필리핀 사범 중에는 동남아, 아프리카, 남미 등지로 나가 통일무도를 전파한 이도 많았다.

◇박정진 문화평론가1980년대 말 아르헨티나 국가 지도자인 구스타보 줄리아노는 통일무도를 브라질, 우루과이와 남미 다른 나라에 소개했다. 루나파크 스타디움에서는 5000명의 관중 앞에서 통일무도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케냐에서는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는데 헨리 뭉가이가 후렌시스 니루와 함께 통일무도 도장을 32개나 열어 총 1000여명의 학생을 보유하였고, 이들은 에티오피아의 롼다에 도장을 열었다. 콩고민주공화국에는 필리핀인 후로레스에 의해 통일무도가 소개됐다. 통일무도 교관은 에스토니아 대통령의 경호원들을 가르쳤으며, 독일에서도 히로시 가리타가 경찰학교와 여러 대학에서 지도했다.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후 1992년 다카미츠 호시코가 이끄는 통일무도 시범단이 에스토니아·우크라이나·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범을 보였고, 이 순회 후에 마이클 켈렛과 돈 하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통일무도 분부를 설립했다.

말하자면 세계인의 참여로 통일무도는 세계화될 수 있었다. 이는 태권도가 세계화를 이룬 이후 무예계에서 이룬 세계화 가운데 가장 괄목할 만한 공적이다. 통일무도는 문 총재의 러시아 방문과 러시아 개혁·개방에도 일조를 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무술인, 무도인이야말로 세계의 변화와 문명의 새로운 전개에 앞장설 수 있음을 보여준 실례이다. 문사(문인)들은 보래 보수적이다. 무사(무인)들이야말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개척하는 용기를 갖춘 장본인들이다. 무골이야말로 큰일을 수행하는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통일무도의 세계화는 여러모로 태권도에 비할 수 있다. 태권도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그 후 기업인들이 세계경영을 하는 데에 손발이 되어준 것처럼 통일무도도 앞으로 통일사상을 세계에 알리는 첨병이 될 것으로 보인다. 통일사상은 일개의 종교가 아니다. 인류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종교에서, 철학에서, 문명에서, 고금(古今)에서 실현하는 사상이다.

세계화의 성공이 어느 정도 실현된 후에 문 총재는 2001년 5월4일 미국 뉴욕 이스트 가든에서 열린 모임에서 통일무도 로고를 선정했다. 로고의 가운데 붉은 점은 참사랑(심정)을 나타내고, 붉은 점 주변의 노란색과 푸른 색의 태극은 주체와 대상을, 원 둘레의 붉은 테두리는 수수(授受)작용을 표현하여 쌍방향의 화살표가 있다. 통일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통일무도가 정립됨으로써 통일교는 문무겸전을 실현한 셈이다. 통일무도는 행동하는 통일교이다. 석 회장은 현재 통일교 한국회장(제13대)도 맡고 있으며, 선문대학교·선화예술고등학교를 비롯하여 통일교 8개 교육기관이 들어 있는 선문학원 이사장(제6대)직을 겸하고 있다. 또 무예계에선 세계평화무도연합회 회장, 세계경찰무도연맹 회장직을 맡고 있다. 문무겸전의 대표적 인물인 셈이다.

통일무도는 현재 수련생 가운데 비통일교인이 80%를 차지할 정도로 일반에 널리 퍼지고 있으며, 앞으로 ‘원화(圓和)통일무도’라는 새 이름으로 새 도약을 꿈꾸고 있다. 석 회장은 문선명 총재가 써준 휘호 ‘충효지도 만승지원(忠孝之道 萬勝之源)’을 언제나 가슴에 새기고 있다고 했다.
 
[박정진의 무맥] (41) 원구(圓球)의 무예, 원화도(圓和道)

 

춤추고 노래하고 하늘에 빌던 자연스런 몸짓을 무도로 체계화
한국 무술 가운데 가장 한국적이고 때로는 평범한 것 같은 무술이 원화도이다. 원화도는 특별히 어느 누구 한 사람, 또는 어떤 집단에만 은밀하게 비전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조상이 언제 어디서든지 해오던 아주 간단하고 작은, 그러나 긴요한 ‘삼무(巫, 舞, 武)’ 동작을 말하며 그 시원은 ‘비손’(비는 손)에 있다. 일상의 삶 속에서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비비며 살아온 한민족. 지구상에서 가장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 한민족이다. 그래서 한민족은 문명권에서 살면서도 한 번도 먼저 남의 나라를 침공한 적이 없다. 그러한 수비적 자세는 때로는 역사에서 온갖 어려움을 불러오기도 했다.

◇원화도의 창시자 한봉기 선생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원화도의 원리를 강의하고 있는 모습.수많은 외세의 침공, 그리고 가장 최근세사에서 일제의 강점과 식민통치, 남북분단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질곡 속에서 우리 문화의 정수는 부분적으로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단절의 아픔을 맛보았다. 무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가장 한국적인 무예, 원화도의 부활은 한봉기(韓奉基) 선생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화도는 한봉기 선생이 정리하기 시작하여 어언 30년에 이르고 있다. 원화도는 원의 회전과 공격과 방어를 하나의 동작으로 구현하는 전통 창시무술이다. 원화도는 1972년 3월에 출발하였고, 1976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한 선생은 통일교 문선명 총재를 비롯하여 수많은 영계의 선인들로부터 전수를 받았다고 한다. 한 선생은 명상수련 도중 한 사람 앞에 4수씩 3000명의 선인으로부터 1만2000수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 같지만 아마도 한 선생의 열성에 감복한 신선들이 도왔거나, 아니면 한 선생이 스스로 연구에 열중하다 보니 꿈에서도 스스로 현몽하게 되었을 것이다. 원화도의 이런 유래는 도리어 대중화하는 데 장애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사실인 것을 어찌하랴. 서울 성동구 화양리 작은 셋집에서 숙식과 도장을 겸하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는데 어떤 때는 양식거리가 없어 굶기를 다반사로 하였다고 한다.

현재 세계원화도연맹 부총재로 있는 전기화(全基華)씨는 당시의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어느 날 도장에 들렀는데 선생님은 며칠을 굶었는지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제대로 먹지를 못하고 힘든 무예를 연구하고 연마하였으니 민족무예의 복원이라는 사명감 없이는 한시도 끌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봉기 선생은 원화도를 다 배우고 개발하는 데 약 6년이 걸렸다고 한다. 원화도의 기술은 본래 공격수 6000수, 상대수 6000수 등 총 1만2000수로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는 8방향 5가지씩 총 40개(8×5)의 기본형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의 기본형 이전에 팔괘의 원리를 기본으로 한 기본형이 있었다. 팔괘를 기본으로 하는 기본형은 한 가지 기술로 짧게 구성되었으며, 방향은 다시 3방향으로 나누어 총 24방향(3×8)이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신바람의 민족이었다. 천지신명을 믿는 소박한 믿음의 동작이 어깨를 타고 온몸으로 흐를 때 희열을 이기지 못해 드러내는 것이 몸짓이요 신바람인 것이다.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것을 까마득히 잊은 듯하나, 언제라도 바람이 불기만 하면 ‘소리를 내는 갈대처럼’ 우리는 저절로 신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원화도는 원구를 추구하는 무예로서 주로 회전운동으로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동작을 동시에 한다.
신바람은 더러는(평화로운 때) 춤으로, 더러는(위급할 때) 무도로 나타났으며, 더러는 어울려 노는 놀이로 나타났다. 예부터 가무를 좋아하던 우리 민족이 아닌가. 원화도는 춤추고 노래하고 하늘에 빌고 하던 우리 민족의 자연스러운 몸짓이 무도로 정리된 것이다.

그래서 원화도는 무당 무(巫)자 무도(巫道), 춤출 무(舞)자 무도(舞道), 그리고 호반 무(武)자 무도(武道)로 구성된다. 이른바 ‘삼무’이다. 삼무는 제1의 무도(巫道), 제2의 무도(舞道), 제3의 무도(武道)를 한꺼번에 이르는 말이다.

무도(巫道)란 ‘하늘을 아는 무도’로서 만상의 근원이 하늘에 있음을 아는 무도이다. 나아가 하늘의 조화와 순리를 따라 사는 삶을 말한다. ‘하늘을 안다’함은 곧 ‘하늘의 뜻을 안다’함이며, 그 하늘의 뜻이란 ‘널리 사람을 유익하게 함’인 홍익정신이다. 이것은 이기(利己)와 이타(利他)를 함께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이다.

우리의 옛 조상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여 하늘백성(天孫民族)이라 한다. 그러기에 하늘의 뜻을 알아 나라를 세울 때도, 백성을 다스릴 때에도 하늘의 뜻을 좇았다. 한 해를 여닫을 때도 감사와 반성으로 기원(祈願)했으며, 한 달과 하루를 보내고 맞음에도 하늘의 뜻을 따르려 기원했기에 제사(祭祀)지내는 제천민족(祭天民族)이라고도 했다. 이런 제1의 무를 오늘의 의미에서 특정 종교의 것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제2의 무도(舞道)란 ‘사람을 아는 무도’이다. 사람을 아는 무도(舞道)란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삶을 말한다. 공동체적 삶이란 너와 내가 따로 존재함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하는 홍익(弘益)의 삶을 말하며, 우리 모두가 더불어 하나임을 말한다. 이를 나타내어 감사하며 축수(祝手)하는 신앙이 가무(歌舞)로 나타났으며 가무(歌舞;群舞)야말로 민족이 하나임을 자각하게 하는 생활(生活)이요 신앙(信仰)이었다.

제3의 무도(武道)란 순응과 조화, 절제와 규범을 말하는 무도이다. 순응(順應)과 조화(調和)라 함은 자연의 섭리에 대하여 경건함이요, 절제와 규범이라 함은 사람과 삶에 대한 엄중한 질서와 규범을 말한다. 이것은 바로, 이기(利己)와 이타(利他)의 공존을 위한 것으로, 결코 이기를 위하여 이타가 희생되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이타만을 위하여 이기 또한 무시되어서는 안 됨을 뜻한다.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가 눈을 감으면 우리들 마음의 눈에 선하게 되살아 비쳐오는 여러 몸짓, 춤 같기도 무도 같기도 하며, 서로 어울려 노는 놀이 같기도 한 것, 이것이 어느 한 사람으로 출발했다면 이는 어리석은 말이 된다. 노래를 좋아하는 이는 소리꾼이 되었고, 춤을 좋아하는 이는 춤꾼이 되었으며, 무도를 즐긴 이는 무사가 된 것이리라.

원화도 작명의 ‘원화’(圓和)는 ‘여러 원(圓)의 어울림(和)’을 뜻하고, 도(道)는 ‘할 짓과 말 짓’을 구별함을 뜻한다.

원화도는 원(圓)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구(球)를 추구하는 운동이다. 무술을 하면 결국 신체를 움직여야 하고, 신체를 움직이는 것은 원구(圓球)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원화도는 운동되어지는 모든 형태가 원을 그리는 것과 같이 구성되어 진행되며, ‘수직의 원’과 ‘수평의 원’을 기본으로 하여 그 기울기의 변화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구(球)를 추구하게 된다. 구는 지속성·영원성을 갖게 하고, 이 구의 변화 즉, 회전방향(각도), 회전거리(모양), 회전속도, 그리고 힘의 강약에 의하여 여러 가지 공방의 형태가 나타난다.

인간의 행동양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나를 기준으로 하면 ‘가는 움직임’과 ‘오는 움직임’,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말하면 ‘미는 움직임’과 ‘당기는 움직임’이다. 이것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이 원운동이 된다. 원화도의 기술이 그 원운동을 변화시키면 얼마든지 유도류와 같은 넘기기, 태권도류와 같은 치기, 차기 그리고 합기도류와 같은 관절죄기의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원은 원화도 공방(攻防)의 기본 원리로서 공방의 모양이다. 모든 공방은 힘을 내뿜거나 끌어당김으로 이루어진다. 힘의 내보냄과 끌어당김이란 바로 생존의 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힘의 내보냄과 끌어당김, 또는 보내고 맞이함, 주고받음, 밀고 당김이 어느 한 순간에도 끊어짐 없이 영속(永續)되어야 한다. 이러한 흐름을 보이는 선(線)으로 나타낸 것이 원이다.

원은 동작의 겉모양과 속모양, 그리고 그것들의 회전운동을 함께 나타낸 것으로 정원과 타원, 태극원을 포함하여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 모든 공방이 원 또는 타원, 태극원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무엇보다 우선될 일은 마음의 모양을 둥글게 하는 것이다.

화(和)란 어울림이다. 하나의 원에서 다른 원으로 옮겨가거나 옮겨올 때, 아무런 무리나 마찰이 없이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다. 어울림이란 음(陰)과 양(陽)의 조화, 강(剛)과 유(柔)의 조화를 말한다. 성급히 구는 상대에게는 느긋함으로, 느긋하게 구는 상대에게는 분주하도록, 힘을 위주로 하는 상대에게는 부드러움과 탄력으로 화(和)를 이루며, 발이 긴 상대에게는 짧은 동작으로 상대의 공격기지를 무너뜨린 다음 깊숙이 파고드는 방법 등이 화(和)이다. 이 화(和)를 제대로 이룰 때 더불어 이로움을 얻게 되는 것이다.

화란 스스로는 물론 상대와도 잘 어울림이다. 그러할 때 훌륭한 공방이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공방 자체가 근본적으로 살상에 있지 않고 상대의 불의(不義)를 돌려 의(義)로 돌아오게 함에 있기 때문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고, 싸움에 임하게 될 경우에는 일격필살이 아닌 일격필활(一擊必活)의 정신으로 반드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공방의 최종은 살상이 아니라 상생(相生)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화도의 궁극은 잘 어울려 사는 삶에 있다.

도(道)란 누구나 가고 오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길을 길답게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원화의 도란 길을 길답게 사용하므로 잘 주고 잘 받아 잘 어울려 사는 삶을 말한다. 따라서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상(傷)하게 한다는 논리를 원화도는 거부한다.

도(道)는 예(禮)와 통한다. 예(禮)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표현이다. 특히 무도에서 예(禮)는 생명과 통한다. 신뢰와 정성이 담기지 않는 예로서 시작된 무(武)는 생명을 다치게 한다. 무(武)에는 상해와 살상의 능력만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로잡아 생명의 존귀함을 가르치고 실행케 하는 것이 도(道)이며, 도의 진정한 표현이 예(禮)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도(武道)의 참된 궁극은 ‘상생과 화합’이지 결코 ‘살상과 투쟁’이 아니다. 원화도의 궁극은 무(武)의 능력을 도(道)와 예(禮)의 경지로 정착시켜 이를 대중에 보급하여 서로 화합하고 공존(共存)하는 생활로 이끄는 데 있다. 따라서 무도(武道)의 궁극은 상생이어야만 한다.

원화도의 동작은 여럿이지만 실은 ‘비손=비는 손’에서 시작한다. 비손은 바로 원무(圓巫)이다. 예로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하늘에 공(功)을 드릴 때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정성껏 비비는 제행(祭行)동작이다. 한 해와 한 달과 하루의 무사와 안일을 이 비손으로 기원(祈願)했다. 어쩌다 실족한 삶에 대하여도 이 비손으로 용서를 빌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평화와 안녕, 화합과 결속 그리고 반성과 다짐도 이 비손으로 축수(祝手)했으며, 삶과 죽음에도 이 비손으로 풀었으니 실로 비손이야말로 오랜 예부터 한민족에게 있어서 길흉화복(吉凶禍福)과 생노병사(生老病死)뿐만 아니라 인생사의 모든 문제를 맺고 푸는 열쇠요 믿음이며 신앙이었다.

비손에서 다스리기와 다스려 치기로 발전한다. 다스리기란 생기를 일으켜 신체상의 결함 부위를 바로잡아 기능과 순환을 잘되게 하기 위한 비손은 ‘쓰다듬기와 비비기’를 말한다. 다스려 치기라 함은 ‘다스림과 치기’의 두 동작을 말한다. 치기란 손으로 두드림, 동물이 새끼를 나아 퍼뜨림, 식물이 가지를 내돋게 함과 같이 생육의 의미를 지닌다. 다스리기와 다스려 치기를 하기 위해서는 비손으로 ‘정심’(正心)하여 생긴 마음의 힘을 비손에 모아 ‘생기(生氣)손’이 되게 하여 신체상 필요로 하는 부위에 보내어 생기를 보내어 정기(精氣)를 북돋운다는 뜻이다. 이는 원화도의 몸 풀기의 기본 동작이다.

비손에서 춤사위로 발전하는 것이 원화도의 원무(圓舞)이다. 비손에서 양어깨를 타고 흐르는 동작은 춤사위와도 같아서 마음속으로부터의 신명(神明)을 불러 몸 밖으로 표출해 낸다.

비손에서 공방(攻防)으로 이어지는 원무(圓武)가 된다. 원무는 비손에서 이루어지는 원의 회전을 공방으로 부려 썼을 때를 말하며, 이를 회전공방이라 한다. 회전공방은 원화도에서 행할 수 있는 모든 동작을 가능케 하는데, 치기와 받아치기, 넘기기와 차기, 관절죄기와 봉 동작이 그러하다.

◇박정진 문화평론가원(또는 원의 회전)은 꺾이는 각(角)이 없고 오직 360도 각에서 공방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방어이면서 공격이고 또한 공격이면서 방어인 것이 일반 무도의 ‘직선 왕복형’의 동작과 큰 차이가 있다. 치기와 받아치기는 상해의 위험이 따르므로 수련 차원(상대에 대한 배려와 보호)에서 실행토록 하며, 다스려 치기의 방식으로 함이 유익하다. 다스려 치기는 공방적 요소와 보건과 놀이적 성향을 함께 느끼며 수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습은 충분히 하되 상해의 위험에서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이때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은 ‘해야 할 것’(생각과 행위)은 반드시 하되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결코 하지 않아야 상대를 지키고 나를 제대로 지킬 수 있다. 무도 수련의 궁극의 목표는 상생(相生)이어야 하며, 보편적인 삶을 위한 무도만이 진정한 무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도(武道)란 무엇인가? 무(武)란 살상의 꾀하는 힘과 칼과 같다. 도(道)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케 하는 지혜이다. 지혜란 종과 횡을 상통케 하는 무한의 이치며, 상생하는 무궁의 조화이다. 이는 생명의 궁극이다. 그렇게 보면 삼무인 원무도는 없을 무(無)자를 보태 ‘사무(巫, 舞, 武, 無)’가 되는 셈이다. 없을 무(無)자는 자기를 비우는 것이며, 자기를 세상의 가장 작은 점으로 만드는 것(無所其內)이며, 자기를 세상의 가장 큰 원으로 만드는 것(無所其外)이다.

현재 세계원화도연맹본부는 경남 함안군 칠원면 장암리 902번지에 있으며, 1500여평의 부지에 실내 및 야외도장을 갖추고 있다. 지난 2월 작고한 한봉기 선생의 뒤를 아들 한형석 사범이 잇고 있다. 한편 서울(봉천동)과 전주(중화산동)에 지부가 있으며, 경기 가평군 설악면 소재 통일교의 청심신학대학원대학교(가평교육원)에서는 전봉기씨가 가르치고 있다. 원화도 가평수련원에는 문선명 총재의 휘호 ‘신인지관계(神人之關係), 부자지인연(父子之因緣)’(1987년 9월 10일 서명)이 걸려 있다.

미국, 일본, 아일랜드, 독일, 오스트리아, 리투아니아 등 15개국의 해외지부에는 1000여명의 수련생이 있다. 한봉기 선생의 작고로 제2기를 맞고 있는 원화도의 발전이 기대된다.
 
[박정진의 무맥] (42) 무예인류학으로 본 무예1

 

국가흥망 좌우하는 무사의 덕목은 충성과 정의
이순신 장군의 말이 생각난다. “살자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자고 하면 살 것이다.” 이보다 완벽한 무인의 말은 없다. 이러한 ‘생즉필사 사즉필생’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안중근 의사에 이르러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 되었다. 이 두 인물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문무겸전의 사표이다.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명랑해전을 앞두고 위의 결의를 다졌으며,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던 날 아침에 간수에게 위의 말을 했다. 이와 반대로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두 말은 매우 상반되지만 각자는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후자는 생(生)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 게다. 두 말은 서로 바꾸면 반면교사가 된다. 특히 후자는 비천하게, 비굴하게 생을 영위하라는 말의 의미보다는 그만큼 생을 보람되게 살라는 역설일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무술은 역시 활쏘기이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은 한국인의 DNA에 흐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 때마다 선보이는 세계 최고의 양궁 실력은 그것의 증거이다.
무사도 정신, 사무라이 정신의 나라인 일본문화의 심층에는 ‘죽음의 미학’이 깔려 있다. 일본에서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에게 보이는 일반인과 학자들의 경외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의 세계 해전사의 명성은 실은 일본에 의해 알려졌다. 일본인은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영국의 넬슨 제독보다 이순신 장군을 더 치켜올렸다. 일본 미야기(宮城)현 구리하라(栗原)군의 어느 절의 스님은 안 의사의 무사로서의 충정과 동양평화정신을 사모해서 안중근 의사를 모시고 있다. 일본은 남의 나라, 적국의 무인들도 존경하는 훌륭한 무사이다.

이에 비해 선비의 나라인 한국에는 ‘삶의 미학’이 깔려 있다. 한국인의 삶의 미학은 때로는 주체성이 부족한 것을 두둔하고 부정부패를 합리화하는 경향도 없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두 나라 문화의 심층은 크게 다르다. 문은 삶과 관련이 있고, 무는 죽음과 관련이 있다. 무인들은 항상 죽음을 가까이하고 사는 족속들이다.

유전자 분석으로는 한국과 일본은 그 어떤 나라보다 가깝다. 그렇다면 결국 두 나라의 풍토와 역사가 정반대의 상황을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섬나라의 무엇이, 반도의 무엇이 그것을 결정하였을까. 폐쇄된 섬나라는 그렇게 ‘깨끗한 죽음’이라는 배수진을 쳐야 하고, 반대로 수많은 외침을 받으면서 금수강산에 살아온 한국인은 왜 ‘개똥밭의 삶’을 택하여야 하였던 것인가.

일본문화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은 무사정신과 장인정신이다. 둘은 서로 상통한다. 사람이 한 곳에서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경우, 무사와 장인이 가장 유리하다. 무사는 특히 권력경쟁이나 전쟁이 일어나면 승패에서 진 쪽은 죽든가, 노예가 되든가,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문화가 오늘날도 그러한 무적 특성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유전자가 많은 부류가 한반도에서 넘어갔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반도에서 무인들이 일본열도로 넘어간 것은 크게 네 차례로 보인다. 첫째는 가야가 망하였을 때이다. 둘째는 백제가 망하였을 때이다. 물론 고구려가 망했을 때도 있기는 했을 것이지만, 고구려는 대체로 북방에 합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는 신라가 망하였을 때이다. 넷째는 고려 중엽 몽고에 저항하던 삼별초의 부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 세력은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의 담당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로 나라의 흥망에는 반드시 대규모로 저항하던 무사들의 이동이 있게 마련이다. 일본 역사서 ‘서기(書紀, 720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대체로 가야와 백제(660년 망함) 이주민의 입장에서 당시 일본과 한국(한반도)의 역사를 연계하고 회고하면서 썼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한국과 일본의 정체성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모호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기록자의 입장이 이중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인이 만주나 동북아시아를 생각하는 태도와 닮아 있을 것이다. 이게 이주민의 역사관이다. 지역적으로는 이동하였으면서도 의식적으로는 아직 이동하지 않았고, 이동한 자신이 아직 과거 거주하던 땅의 주체가 되는, 주체와 객체를 혼동하고 도치하게 된다.

◇한국무예의 대표적인 상징이며 축조물인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에서는 요즘도 종종 무예시범이 열리고 있다.
일본열도로 밀려난 백제인들은 신라에 대한 패배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쓰게 하고 왜곡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670년경에 일본으로 나라 명칭을 변경한 야마토 왜(倭)는 712년에 백제인 태안만려(太安萬侶)로 하여금 고사기(古事記)를 편찬하게 하고, 720년에 역시 그로 하여금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는 백제 유민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국을 세운 후 신라에 대한 패배감을 극복하고 일본국의 역사를 미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가야의 철기문화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음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알려져 있다. 여러 금속제 마구들은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가야가 신라에 복속한 것은 매우 평화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게 될 리가 없다. 권력의 생리상 그렇다. 가야의 보수 집권세력들은 크게 저항했을 터이다. 백제는 비록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했지만, 일본에서 출발한 대규모 백제 지원 원정군이 백강전투에서 패했던 사실은 백제와 왜의 동맹관계 이상의 왕족 혈연관계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왜는 당시 자신의 군사력의 반 이상을 보냈던 것이다. 백제 멸망 후 왜가 일본이 된 것은 백제의 망함에 이은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신라의 멸망(935년, BC 57년∼AD 935년)을 전후하여 많은 무사들이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일본의 무사도는 대체로 11세기를 전후로 형성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신라의 멸망은 고려로 순탄하게 선양된 것 같지만 마의태자의 불복종을 비롯하여 많은 지배세력의 이탈을 가져왔다. 이들 이탈세력들은 대륙의 북방과 바다 건너 일본으로 건너감으로써 동아시아사의 세력 판도 변화의 도미노를 초래했을 것이다.

고려 중엽 대몽항쟁을 펼친 삼별초의 행방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지만 진도에서 마지막으로 제주도로 간 후 대규모 군대가 특별한 전쟁의 기록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유력한 설이 일본이나 오키나와로의 대규모 망명설이다. 전쟁 후 무사들은 이동한다. 무사들은 비록 전쟁에서 승패에 승복하였다고 하더라도 항상 반란과 정국 불안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잠재성 집단이다. 이 때문에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에 무사들은 결국 위험한 이주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일본이 사무라이 정신으로 대표되는 것은 바로 대륙에서의 흥망의 부침과 쟁패의 결과, 일본열도로의 이주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과 흥망의 결과는 무사와 장인 유전자와 기술의 일본 대이동을 초래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한반도에는 대체로 새로 들어서는 정권에 문사적 봉사를 할 수 있는 유전자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한국에서 숭문주의가 부각되는 것은 고려 광종의 과거제 도입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과거의 급제와 낙방에 따라 가문의 흥망이 교차했고, 그에 따라 무사들에 의해 유지되는 봉건주의가 쇠퇴하고 중앙집권 관료제가 한반도에 정착된다. 이는 중국도 비슷하다. 한국과 일본은 문(文)을 숭상하는 반면 일본은 무(武)를 숭상하고 있다.

한국에서 무가 급격하게 쇠퇴하는 것은 조선조에 들어서이다. 조선조는 밖으로는 친명(親明) 사대정책과 함께 안으로는 정권에 도전하는 무인세력을 제어하는 데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지방 토호들과 왕족·귀족이 거느린 사병들을 거세하는 한편 무력을 중앙집권적으로 재편성한다. 무사의 생리는 중앙집권 관료적일 때보다는 봉건영주제일 때가 적합하다. 무사들은 바로 봉건영주였던 것이다. 서양의 기사도도 바로 중세 봉건주의 때 형성된 것이다. 일본의 봉건제는 바로 무사도가 자리할 기반이었다는 점에서 서양과 닮아 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원로 무예가 K씨에 따르면 예전에 한 사람의 무사를 키울 때는 무술을 가르치기 전에 인간교육, 인성교육을 미리 했다고 한다. 또 인간의 신체에 대한 충분한 해부학적 지식과 한의학적 이해를 거친 후에 무술을 배우도록 하였다. 신체적 조건과 정신과의 관계를 잘 모를 경우 결국 훌륭한 무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인을 한 사람 키우는 것은 한 사람의 선비를 키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무사들은 충(忠)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하였다고 한다. 무사는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무사의 덕목은 바로 충성과 정의였다.

무사는 인간의 몸 공부를 충분히 숙지한 후에 동작(초식과 투로)과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생체에 대한 한의학적 지식은 물론 동양적 우주론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의술, 침구술, 무술, 내공 등을 두루 갖추어야 무인이라고 했다. 인간을 두고 흔히 정기신(精氣神)이라고 말한다. 이때 정(精)은 인간의 신체를 말하고, 기(氣)는 호흡을 뜻한다. 기(氣)라는 말을 두고 혹자는 신비스럽게 말하는 이도 있는데 바로 호흡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먹어야 사는 생물이고, 동시에 호흡을 하여야 하는 존재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예는 당시 한의학적 지식과 무기체계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이었다. 요즘은 전쟁의 병장기가 고도화되어서 옛 무예가 거의 필요 없게 되었다. 군사무예는 점차 의미를 상실해가지만 무예의 정신만은 오늘도 여전히 필요하다. 군사무예는 나 혹은 아군에게는 적은 손실로써 상대 혹은 적군에게는 큰 피해를 주는 것, 다시 말하면 적은 손실과 큰 이익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요즘의 무예는 결국 수양무예를 말한다. 수양무예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대체로 건강과 체육, 호신술 등이 포함되면서 고차원에 이르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계’에 이른다. 이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를 오늘의 의미로 보면 결국 자연과학이 되면서 동시에 자연과학 이상의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에 이르게 된다.

흔히 문화를 두고 문무(文武)라고 하는데 문(文)은 일종의 표상(기표)이 되고, 무(武)는 그 아래에서 문을 도우는 것처럼 인식한다. 그러나 이것을 생성적으로 보면 무(武)가 없는 문(文)은 없다. 무(武)는 자연으로부터 연결되는 것으로 문화의 하부구조이다. 그래서 역으로 무인은 당연히 문무를 겸전하여야 한다.

결국 무인과 문인도 이분법적으로 쉽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기만 휘두르고, 힘만 쓰는 것이 무인이 아니라는 얘기다. 수양무예는 결코 놀이무예는 아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무예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옛 본래적 무예로서의 무예는 사라졌다고 하는 것이 옳다. 무술도 변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옛 술기 중에서도 현대에 맞는 것과 개조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

무예도 사람이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사는 것에 필요가 없다면 무예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다른 모든 과학과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무엇을 열심히 하다 보면 마치 사람이 어떤 분야를 위해서 사는 것같이 착각하고 주객이 전도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삶을 위해서 존재한다. 동식물은 삶과 죽음이 크게 이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에 이르면 크게 이분되어 있어서 생물의 숙명인 죽음에 대해서 초연해질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는 것을 배우면 이보다 더 큰 공부는 없을 것이다.

무예도 실은 의식주와 마찬가지로 환경이라는 변수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환경이 인과론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매트릭스처럼 기능을 한다.

무예인의 살아남기는 현재에 여러 가지로 실험되고 있다. ‘무예인 구하기’가 실은 문화운동으로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다. 문인은 사대해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무인은 사대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대주의를 물리치려면 무인정신, 무혼(武魂)을 키울 수밖에 없다. 국민 모두가 하나의 무예, ‘일인일기’(一人一技)를 하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이다. 이는 동시에 국민 모두에게 문무겸전을 이루게 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아무리 좋은 무예도 살아 있는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면 사라지는 것이 엄연한 생존의 법칙이다.

무예계가 일각에서 혼탁해진 것도 실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며,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적응훈련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무예계가 분파가 심하고, 신종 무예가 범람하는 것도 실은 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누가 정통이니 전통이니 하면서 무예인끼리 싸울 일이 아니다. 이것은 무예인 내부의 분열이다. 남의 무예를 인정하는 것이 무예인의 살길이다. 안에서 단합할 때 밖에서 도와주고 어여삐 보는 것이다. 남을 인정할 때 도리어 자신에게 긍정적인 힘이 솟아나온다. 이것인 진정한 음양의 이치이다.

재미있는 것은 신체 활동을 하는 무예도 정신 활동을 하는 공부와 다르지 않게 결국 목표는 같다고 하는 점이다. 지구상의 수많은 종교가 추구하는 정신적 이상세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심입명의 경지, 우주와 합일이 되는 범아일체의 경지 등을 무예인도 추구한다. 정신적인 최고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종교인이나 학자 혹은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무예인에게도 그래서 신(神)에 도달하는 경지가 있다. 무엇을 하든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면 접신의 경지라고 말한다. 이것을 신공(神功)이라고 하든, 무슨 이름으로 하던 상관이 없다.
 
[박정진의 무맥](43)·무예인류학으로 본 무예2 

 

사고하고 행동하는 文武가 하나돼야 국가가 번성
무예의 정신을 집대성한 ‘무덕(武德)’이라는 책을 쓴 무예연구가 신성대씨는 “무예는 기백(氣魄)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무혼(武魂)이 없는 나라는 망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훌륭한 무예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특정 종목인가, 아니면 기백과 혼령을 균형감 있게 키우는 것인가. 물론 후자이다. 그래서 어떤 무예이든 명가의 무예는 우선 기본에 충실하다.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은 어떤 신종의 테크닉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특정 테크닉을 우선하는 무예는 기본이 없는 관계로 다른 술기를 배우기 어렵다. 공부는 문과 공부이든 무과 공부이든 마찬가지이다. 명가 무예의 비기라는 것도 알고 보면 바로 기본인 경우가 많다. 기본이라는 것은 마치 원의 중앙에서 주변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과 같다.

◇조선 후기 정조 때 편찬한 무술 경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원본. 다른 군사서적들이 전략·전술 등 이론을 위주로 한 것임에 비해 이 책은 동작 하나하나를 그림과 글로 해설한 실전 훈련서라는 특징을 지닌다.어떤 무예이든 정(靜)을 우선한다. 정을 우선하면 동(動)을 힘들이지 않고 배우게 된다. 그러나 동을 우선하면 정이 부족한 관계로 항상 무예의 힘과 기운이 실리지 않는다. 무인은 기백(氣魄)이 충실해야 한다. 기백이 충실하지 못하면 마음만 앞서고 흔들리기 십상이다. 기백이 허약하면 혼령(魂靈)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혼령에 시달리게 된다. 흔히 선비정신이라고 하는데 그 정신은 문장이나 지식이 아니라 실은 무혼(武魂)이다. 그래서 무골의 선비가 큰 선비가 되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는 ‘선비문화’로 대표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무혼이 필요한 것이다.

문과 무는 서로 교차하는 것이 있다. 훌륭한 무인도 글공부를 많이 하지 않으면 달성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만 하고 체육을 등한시하거나 체육을 한다고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은 문무를 둘 다 놓치는 꼴이 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일제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사람은 만해 한용운 등 몇몇에 불과하다. 만해는 실은 무골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종5품의 무관이었다. 문무가 이렇게 교차되어야 훌륭한 무관이 되는 것이다. 이순신이 문무를 겸전한 장수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선비도 적지 않았다. 동방도학의 비조인 정몽주도 그랬고, 사육신도 그랬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이라는 인물이 있다. 박제상은 눌지왕 2년(418)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장수왕을 설득해 눌지왕의 아우 복호(卜好)를 데려왔다. 또 같은 해에 다시 왜국(倭國)으로 가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쳐왔다고 속인 다음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빼돌려 신라로 도망치게 하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왜왕(倭王)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 보냈다가 목을 베었다. 박제상의 순절은 한국문화의 살신성인의 비조 격이다.

한국이 지구상에서 이름을 유지하고 생존한 것은 훌륭한 선비나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무가 균형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무기와 무예와 군대가 약해진다는 뜻이 아니고 ‘무의 정신’이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무의 정신이 사라지면 문의 정신도 약해지게 마련이다. 문과 무는 그렇게 상관적이다. 유가의 오덕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지만 병가의 오덕은 엄용인지신(嚴勇仁智信)이다. 덕(德)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덕인 것이다. 성(性)이 본래 타고난 품성이라면 성이 동하면 덕이 된다. 그래서 실천하지 않는 덕은 없는 것이다.

어떤 무예이든 제일 먼저 정신집중, 혹은 정신통일이 필요하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어떤 훈련도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이런 훈련의 과정을 정신통일, 내공(內功), 외공(外功), 그리고 본격적으로 무기를 다루는 무공(武功)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무예이든 호흡은 매우 중요하다. 일상생활의 움직임과는 다르게 심하게 몸을 움직여야 하는 무예에서 호흡조절은 절대적이다. 호흡조절에 실패하면 바로 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예의 모든 움직임에서 호흡과 균형은 절대적이다.

내공은 무술 종목마다 다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깊은 호흡인 단전호흡을 하는 것이다. 도가에서는 호흡(呼吸·날숨과 들숨)을 토납(吐納·날숨과 들숨)이라고 한다. 일상에서는 들숨이 더 중요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단전호흡에서는 날숨이 더 중요하다. 날숨이 충분하게 몸속 구석구석의 노폐물을 몸 밖으로 잘 뱉어내야 그 빈 곳에 들숨이 잘 들어온다. 단전호흡은 결국 기(氣)를 운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단전호흡으로 축기를 많이 해두면 무예를 하는 데 유리하다. 어떤 무예이든 훈련과정의 시작과 끝은 선후관계가 아니라 순환관계에 있다. 또 과정과 과정 사이가 겉으로는 단계를 끊어놓았지만 실지로는 연속적이다. 문인들이 볼 때는 무인이 무슨 정신공부를 그렇게 할까, 의심할 수 있지만 실제로 거의 접신의 경지에 든 무인들도 적지 않다. 초기의 정신통일과 이 신공이 만나서 무예가 완성된다.

◇문무를 겸전한 진정한 무인(武人)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 광화문 세종로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은 선비문화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희구하는 한민족의 집단무의식적 염원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것은 원의 중심과 가장자리의 관계와 같다. 원에서 중심은 표시를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원이 되는 데에 지장이 없다. 반대로 중심만을 표시하고 원이 없이도 된다. 우주에는 중심이 없기에 내가 중심이 될 수 있다. 중심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중심이 된다는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훈련하는 개인인 자아(소아)와 천지신명인 대우주(대아)가 하나가 되는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도가 계열의 원로무예가 K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죽었다고 생각한다. 나를 무(無)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는 것을 삼간다.” 제자를 3000여명 길러낸 무술계 최고 원로인 그는 해방 후 근대무예 초장기 원로들이 거의 사라진 지금, 당시 실정을 가감 없이 제대로 전하고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만 얼굴을 내민다고 한다.

원로무예가 P씨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의 힘이란 땅에서는 안정감, 몸에서는 유동성, 불에서는 간결함, 바람에는 자유로운 움직임이다. 그래서 이것을 익히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다. 오직 수련을 해야 한다. 수련을 하면서 부정한 생각을 품지 않아야 한다.”

자연과 참선을 통한 심신합일의 경지에 대해서 그는 “자연의 길이란 강물의 흐름이나 계절의 변화를 말한다. 무사들은 참선을 통해 마음 경지를 비우는 데 도달할 수 있고,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무사들은 공포나 의심, 죄의식이나 증오심, 잡념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상대를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술에 있어서 기(氣)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기란 공기 중에 사라지는 수증기와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술에서 기란 신체를 타고 흐르는 에너지를 말한다. 실제로 느끼는 기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고, 명상을 통해 마음이 안정될 때에만 기를 북돋을 수 있다. 기공에서는 신체의 모든 부분을 고루 발달시켜야 한다. 적이 어느 부분을 공격해 와도 보호할 수 있도록 온몸 어느 곳에라도 순간적으로 기를 집중시킬 수 있도록 수련을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원로무예가 U씨는 “기를 수련하는 이유는 우리 몸에서 객기와 탁기를 빼기 위한, 즉 탈기(脫氣)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의 탈기는 흔히 말하는 기운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나쁜 기운을 빼는 것이다. 탈기를 한 뒤 신선한 천기(天氣)를 받아들여서 기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아기화(我氣化)이다. 이렇게 하면 어린아이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요즘 시중의 여러 기 수련 단체에 가보면 초심자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호흡시간을 늘리는 수련을 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하다. 제대로 된 자세가 되기도 전에 그렇게 하면 상기증(上氣症)에 걸린다. 이는 제대로 단전이 잡히지도 않았는데 운기를 무리하게 함으로써, 기가 위로 올라간 것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호흡수련의 부작용이다. 운기란 기를 위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운기하는 것이다. 기의 순환이 잘 일어나야 한다. 하단전 수련, 중단전 수련, 상단전 수련 이렇게 점차 수준을 높여야 하는데 마음이 급한 나머지, 월반하려는 것과 같다. 기도 공부인 한 월반은 없다. 수학에 왕도가 없는 것과 같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 “제대로 호흡을 하기 위해서는 척추를 정위치에 놓아야 한다. 가부좌를 틀고 심신분리 상태에까지 이르려면, 요추가 배 쪽으로 밀려들어가 골반 위에 자연스럽게 얹혀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일반인들은 바닥에 앉게 되면 요추가 뒤로 물러나오는데 이런 상태에서 허리를 펴고 앉으려면 억지로 허리에 힘을 주어야 한다. 따라서 조금만 오래 앉아 있으면 근육의 긴장으로 인해 혈액순환이 되지 않고, 경련이 일어나서 호흡삼매의 무아경(無我境)에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 육체를 강건하게 만들어놓아야 심신분리법을 통해 심신합일이라는 최상의 경지에 입문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무예연구가 S씨는 한국무예의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한국의 경우 선비들이 무인들의 자주정신을 배워야 하는데 도리어 무인들이 선비들의 사대주의를 배운 것 같다. 무술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사부노릇이나 하려고 들고, 몸 공부를 게을리하면서 선비인 체하면서 감투싸움이나 하는 일이 많다.”

무언(武諺)에 이르기를 “글로는 마음을 평하고, 무(武)로는 덕을 살핀다(文而評心 武而觀德)”고 하였다. 이 시대에 와서 덕(德)이란 진리와 행동에 대한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한다. 강력한 통찰력, 실현 중인 능동적 인식이어야 한다.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것, 저항하고 극복하는 것, 즉 행동하기이다. 문(文)이 사고하는 철학이라면, 무(武)는 행동하는 철학이다. 내덕(武德)은 닦아야 하고, 외덕(文德)은 쌓아야 한다. 진정한 내외합일(內外合一), 즉 문무(文武)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文)은 문약(文弱)에 흐르기 쉽고, 무(武)는 무단(武斷)에 흐르기 쉽다. 그래서 문과 무는 상대방을 동반하여야 한다. 역설적으로 문의 완성은 무에서 이루어지고 무의 완성은 문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포유류 중에서도 뇌 용량이 가장 커서 머리를 사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흔히 인간의 머리 이외의 신체는 무시되기 쉽다. 그러나 문에 성공한 사람들은 머리 이외의 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안다. 더욱이 머리와 몸이 하나라는 것을 안다. 분명히 뇌는 신체의 중심이고 꽃이다. 그러나 뇌가 명령을 하기도 하지만 사지의 보고에 따라 반응한다. 우리는 의외로 배(腹)와 사지에 대해 무관심하다. 무예는 중심을 잡고 사지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위해서 배와 사지에 대해 가장 민감한 것이다.

자기 몸에 맞는 문화는 마치 음식과 같아서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래서 물질문화인 의식주는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 가미되어 있는 형상인 것이다. 무예도 그렇다. 한 나라의 무예의 확립이야말로 실은 문화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일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우리 역사를 보면 화랑(花郞)의 문무겸전(文武兼全)을 실현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고, 문약에 빠진 백제와 무단에 빠진 고구려는 망했고, 무신을 업신여기던 고려는 결국 무신(武臣) 정권이 들어서 혼란 끝에 망하였다. 고려를 이은 조선은 문치(文治)를 표방하였으나 무(武)를 소홀히 하다가 결국 일제 식민지를 맞는다. 문은 확실히 개인이든, 사회든, 나라든 안으로 다스리는 데에 특성이 있고 무는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방어하는 데에 특성이 있다.

한반도의 역사를 보면 북에서 고구려가 막고 있을 때에 백제와 신라는 해양세력을 강화하였다. 바다가 아니고는 중국 대륙과 소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북한이 막고 있으니까 남한은 해양세력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국이 오늘날 해양대국이 된 것은 그러한 장애를 극복한 것이다. 만약 통일이 된다면 비용이 적게 드는 육로를 택하여 중국과 러시아 등과 거래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면 해양세력이 약화될 소지도 있다. 역사는 항상 인간이 대응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유리(有利)와 불리(不利)가 교차되는 일이 많다.

해양세력이 역사를 주도하는 21세기, 한국의 미래는 해외로 관심을 넓히고, 시장을 개척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튼튼한 무혼(武魂)이 함께해야 선진국가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 광화문 세종로에는 세종대왕의 좌상과 이순신 장군의 입상이 동시에 서 있다. 이것은 한국문화의 문무를 상징하는 것이다. 세종로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은 선비문화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희구하는 한민족의 집단무의식적 염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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