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미인(王美人)이 동탁(董卓)을 끌어들여 가뜩이나 혼란한 나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면 초선은 독재자 동탁을 죽여 새 왕조의 시대를 앞당기는 데 초석을 놓은 여인이었다. 그녀가 동탁 앞에서 춤을 추었을 때의 모습을 후세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춤추는 미인은 본래 소양궁 궁녀로다
그 모습 놀란 기러기처럼 날씬하고
동정호 봄물 따라 나르는 듯하다
양주곡에 맞춰 경쾌하게 춤추니
또한 바람에 하늘거리는 나뭇가지 같도다
화당에 향이 풍기어 누를 길 없는 춘정
原是昭陽宮裏人
驚鴻宛轉掌中身
只疑飛過洞庭春。
按徹梁州蓮步穩
好花風褭一枝新
畫堂香暖不勝春。
너무도 짧았던 조조(曹操)와의 첫사랑, 포악한 동탁의 애첩으로 보낸 서글픈 나날, 단번에 매혹된 여포(呂布)와의 열정적인 사랑, 그리고 다시 조조에게 되돌아간 기구한 운명의 여인 초선. 그녀는 나라를 위해 동탁을 제거한 구국의 성녀이며, 또한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기도 한 지극히 여성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녀의 그러한 운명이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또 격정에 차오르게 한다.
어린 시절의 초선
동탁은 권력을 잡은 후 한없이 교만하고 방자해졌다. 장안성에서 250여 리 떨어진 곳에 별궁을 짓고, 25만명을 혹사시켜 장안성과 다름없는 높은 벽을 세우고는 거기에 20년 이상 먹을 곡식을 쌓아두었다. 황금, 보물, 비단이 산더미에다 각지에서 잡아들인 미녀만 1000여 명이었다. 그뿐 아니다. 북지군(北地郡)에서 투항해 온 포로들의 수족을 자르고 눈알을 후벼내고 혀를 뽑고 큰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만행을 태연히 저지르고는 마냥 즐거워하였다. 포로들의 비명은 천지에 퍼졌고 백관들은 공포심에 오그라들기만 하였다.
그동안 동탁에게 협조해 온 사도 왕윤(王允)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나라는 이르렀다. 왕윤에게는 양녀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 유명한 초선이다.
황건의 난이 일어났을 때 초선의 양친은 황건적에게 살해되었다. 그녀는 당시 여덟 살로 길거리에서 음식을 주워 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다 황건적이, 어린 나이에도 미모가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 잡아서 노예로 비싸게 팔아먹었다. 천만다행으로 그녀를 산 자는 당시 예주의 자사(刺史)로 황건적을 물리쳐 그 명성이 궁중에도 알려진 왕윤이었다. 노예로 끌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하도 처량하고, 처량한 것 이상으로 예뻐 돈을 아끼지 않고 그녀를 사 집으로 데리고 왔다.
“얘야. 이제는 아무 걱정 마라. 여기가 너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지내렴.”
상가에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란 그녀였지만 모든 것이 낯선데다 두렵기만 해 벌벌 떨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왕윤은 아이가 너무도 가여웠다.
“오늘부터 너는 나의 딸이다. 내가 너를 잘 길러서 좋은 가문에 시집보낼 것이야.”
왕윤은 소녀의 낡고 누덕누덕한 옷을 벗기고 물을 데워 목욕시켰다. 부끄러워하며 몸을 움츠리는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왕윤은 이 소녀에게 특별히 매혹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목이 길고 얼굴이 작고 또한 눈동자에 빛이 있어 매우 영리해 보였다. 코에서 턱으로 예쁘고 균형 있게 갈라져 뻗은 법령, 그 안에서 평행으로 길게 뻗친 인중, 발그레한 뺨과 입이 멋진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가 방울소리처럼 울리니 귀엽기 그지없었다.
밤마다 그녀는 왕윤의 팔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었고 그는 그 천진무구한 모습을 보며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후에 동탁을 매혹하고 여포를 꾀어 동탁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기 8년 전의 일이다.
황건의 난이 수습되자 왕윤은 투옥되었다. 왕윤이 황건적과 내통했다고 환관이 모함한 때문이었다. 왕윤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황건의 난 때 공을 세운 이들의 탄원으로 목숨만은 건졌다. 왕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자 초선은 기뻐하며 그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밤새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얘야. 고맙다. 이제는 아무 걱정 없다. 나는 너하고 평생을 같이할 것이야.”
이처럼 두 사람은 아버지와 딸의 정으로 얽혀 서로를 보듬었다.
하진 장군을 거절하는 초선
중평 6년(189), 환관을 보호해 온 영제(靈帝)가 죽자 누이동생인 하태후의 배경을 업고 대장 하진이 실권을 쥐었다. 당시 초선은 13세로, 낙양의 장관인 왕윤의 양녀가 된 지 어느덧 5년이 되었는데 여자다운 매력이 활짝 피어나는 중이었다. 그녀가 연주하는 금(琴)은 듣는 이의 마음을 녹였고 그녀가 움직일 적마다 다양하게 연출되는 몸맵시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옥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흰 살결에다 무용으로 가꾼 날씬한 몸매는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일찍부터 수많은 혼처가 있었으나 왕윤은 그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왕윤이 양녀를 데리고 살 생각이라는 소문을 냈다.
대장군 하진도 초선을 보는 순간 바로 매혹되었다. 왕윤의 저택에서는 자주 연회가 벌어졌는데 하루는 술이 거나해진 하진이 용기를 내어, 초선을 자기에게 달라고 떼를 썼다.
“하진 나리. 부탁건대 그것만은 좀 참아주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진과 그녀가 맺어지면 막강한 권력을 손아귀에 쥘 수 있다는 걸 곱씹고 있었다. 이에 왕윤은 초선에게 하진의 뜻을 넌지시 전했다. 당시의 관습으로 아버지의 말은 법과 같은 것이었다. 초선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그 남자는 별로 쓸모가 없는 인물입니다. 누이동생 덕에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덕도 없고 재능도 없는 실로 한심한 인간입니다. 제아무리 부귀영화가 좋다 해도 그런 사람과 살 수는 없어요.”
이에 왕윤이 탄식하며 말했다.
“정말 영리하구나. 네 말이 옳다. 네 뜻을 알았으니 하진 장군은 내가 잘 설득해 돌려세우마. 집안에 화가 미치지 않게 조심해서 일을 처리해야겠구나.”
이듬해 하진이 환관들에게 살해돼 왕윤은 한숨을 돌렸다. 하나 이내 그보다 더 고약한 악이 나타났으니 바로 서량의 태수 동탁의 등장이었다.
권력을 잡은 동탁의 신임을 얻은 왕윤은 사도(司徒)의 직책을 갖게 되었다. 동탁은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제멋대로 행동하며 왕미인의 아들이자 유변의 이모제(異母弟)인 유협을 옹립하고 하태후와 유변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동탁의 약탈과 능욕이 도를 넘으니 낙양은 공포의 잿빛으로 물들었다. 왕윤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바로잡고 싶었으나 구체적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궁중에 나가서도 제대로 건의도 못 하고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조조의 과감한 계획
당시 왕윤과는 달리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동탁에 맞서려고 한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조조였다. 조조는 ‘나에게 칠성검(七星劍)만 있다면 반드시 동탁을 처치해 보이겠다’고 큰소리쳤다. 칠성검은 왕윤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보도였다. 조조는 황건의 난에서 크게 활약한 바가 있어 낙양에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왕윤은 그의 날카롭고 자신에 넘치는 눈초리를 보고 그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기로 했다.
왕윤은 초선에게 멋진 향연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이윽고 잔칫상이 차려지고 조조가 초대되어 왕윤과 단둘이 대작하게 되었다. 차를 나르고 물러나는 초선을 눈여겨본 조조가 말했다.
“왕윤 나리… 저 여인은 누굽니까?”
여느 사내들처럼 조조도 첫눈에 초선에게 반한 것 같았다. 왕윤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중대사를 앞두고 여자의 꽁무니부터 좇는 자가 동탁을 과연 처치할 수 있을까?’
“저의 양녀올시다.”
“그래요?”
순간 조조는 여인에 대한 호기심을 거두고 큰 결단을 앞둔 대장부의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에 왕윤은 안도하였다. 그날 밤 초선이 왕윤에게 아뢰었다.
“저분은 하늘이 낳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가문의 배경 없이도 큰일을 할 수 있는 분 같습니다.”
이튿날 조조가 다시 왕윤을 찾아왔다.
“어제 본 그 아이…. 이름이 초선이라 했나요. 정말 매력이 넘치더군요.”
벌써 초선에게 홀딱 반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조조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저 애를 동탁에게 헌납하는 게 어떻겠소. 저 애가 연주하는 금과 요염한 춤을 보면 놈은 정신을 못 차릴 게 분명하오. 그럼 놈은 분명 연회를 열고 술에 취해 그녀를 안고 깊은 잠에 빠지게 될 것이오.”
조조가 양녀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 이유를 알게 되자 왕윤은 당황하였다.
“초선을 동탁에게 바치라 말이오? 그 포악한 놈에게?”
“아니 바치는 연극을 꾸미자는 거요. 거사가 성공하면 그때 나리의 딸과 내가 결혼하리다.”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동탁의 목은 우리 것이나 다름없겠지요. 하지만 초선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조라면 초선의 짝으로 맞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나 조조의 계획을 들은 후 왕윤은 고심하기 시작했다. 역시 조조는 조조였다. ‘어찌할까?’ 왕윤이 고심할 때 숨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초선이 갑자기 튀어나와 외쳤다.
“의부님. 그 역할을 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녀의 눈에는 강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얘야. 네가 함부로 나설 일이 아니다. 가서 잠이나 자거라.”
“아니에요. 이번만은 의부님의 명을 듣지 않겠습니다. 의부님이 그토록 심한 시름에 빠져 있는데 제가 편히 잠을 잘 수 있다고는 생각 마세요. 저는 당장에라도 조조 나리와 함께 동탁에게로 가겠습니다.”
“어허 네 뜻이 천 근 바위보다 무겁구나. 그럼 초선아… 기어이 그리하겠다면 내 너에게 뒷일을 부탁한다. 이제 나라의 운명이 한 어린 여인의 손에 달렸는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과 함께 왕윤은 조조에게 “자 조조 나리, 이제 초선을 동탁에게 데려가 주시오”하고 부탁했다. 초선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조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사모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뜨거운 눈동자이자 그 사랑을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는, 그 나이의 여자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강렬한 염원의 눈동자였다.
왕윤은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지낸 그 숱한 시간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초선을 안았다. 초선은 왕윤의 품에서 소리 죽여 울었다.
초선의 매혹적인 춤으로 시작된 조조의 동탁 암살극
그로부터 열흘 후 왕윤의 집으로 온 조조는 초선을 조심스럽게 안아 말에 태웠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지만 왕윤은 초선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조는 태연하게 왕윤이 준 칠성검을 뽑아 빛을 내는 7개의 보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왕윤 나리. 거사가 성공하면 이 칼은 제가 가져도 될는지요.”
“물론이오. 자 시간이 없으니 어서 칼을 집어넣고 떠나시오.”
이미 초선도 칠성검도 다 가진 듯한 조조의 행동이었다. 길을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왕윤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황건적에게 살해당한 아이의 친아버지처럼 이 아이의 운명도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왕윤은 두려움에 떨며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자책하였지만 배는 이미 떠난 뒤였다.
동탁의 인상은 조조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흉악하였다. 날카로운 눈초리에 냉혹함마저 느껴지는 엷은 입술. 그의 주위에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긴장으로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때려죽이거나 혀나 눈을 뽑아버리거나 손발을 절단하거나 미인을 데리고 논 다음 요리해 먹는다는 소문이 결코 헛소문은 아닌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를 대면하기 무섭게 기가 죽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조조는 잠시나마 왕윤에게 큰소리치며 보검까지 빌려 여기 온 것을 후회하였다. 넓은 방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조조가 동탁에게 말했다.
“오늘 이 검으로 멋진 검무를 보여드리고자 하나이다.”
“검무라니?”
“네. 제가 오늘 금을 기가 막히게 잘 타는 낙양 제일의 미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조조의 뒤 멀찌감치 서 있던 초선이 고개를 들었다. 요염한 웃음을 짓고 있는 초선을 본 순간 동탁은 눈을 크게 떴다. 일찍이 보지 못한 미모였다. 손만 까딱하면 달려와 품에 안길 궁녀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지만 그녀는 다른 그 누구와도 달랐다. 동탁은 꿀꺽 침을 삼켰다. 비대한 살이 욕망으로 떨렸지만 동탁은 짐짓 태연한 척 조조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럼 어디 자네의 검무 솜씨를 한 번 볼까.”
넋이 나갈 듯한 초선의 금 연주에 맞춰 검무를 활달하고도 멋지게 추고 난 조조는 초선과 함께 동탁이 마련한 잔칫상에 앉았다. 동탁은 시종일관 초선만을 바라보았다. 살인마의 어두운 눈이 이번에는 욕정으로 이글거렸다.
술을 한 잔 올린 조조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장군께서 마음이 있으시다면 곁에 두시지요.”
“그게 진심인가?”
“네. 초선도 동탁 나리라면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그럼 술부터 한 잔 따르라고 해보라.”
초선은 고개를 숙인 채 동탁에게 다가가 섬섬옥수를 들어 술을 따랐다. 그녀가 술을 따르자 술마저 그녀의 체취를 담은 듯 입안에서 더없이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왔다. 동탁은 오감이 다 만족하여 조조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고맙군. 자네 오늘은 우리 집에 머물지 그러나. 자 이 잔부터 받게.”
“네. 황공합니다.”
잔을 들이켜면서 조조는 ‘오늘 밤이 네놈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속으로 외쳤다.
보름달이 너무나 밝았다.
“날을 잘못 택한 건가.”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반드시 끝장을 내야 했다. 술에 잔뜩 취한 동탁은 장안의 최고 미녀를 헌상한 조조를 거듭 치하한 후 비곗덩어리 몸에 초선을 꿰차고 침실로 들어갔다. 많이 취한데다 지나치게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초선의 위에서 조급하게 행위를 마치고 난 동탁은 곧 깊은 잠에 든 듯했다. 객실을 빠져나간 조조는 미리 눈여겨봐 둔 동탁의 침실로 접근해 갔다. ‘이제 곧 동탁의 머리가 굴러 떨어지고 초선 너는 나의 여자가 될 것이다.’ 조조는 호위병들을 피해 동탁의 침실로 그림자처럼 스며들어갔다. 그 순간 으스스한 기운이 조조를 사로잡았다.
“왔느냐.”
동탁이 눈을 크게 뜨고 웃고 있었다.
당황한 조조를 즐거운 듯 바라보는 동탁의 손에는 한 장의 종이가 쥐여 있었다.
왕윤이, ‘조조의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오늘 밤 조심하라’는 밀서를 이미 동탁에게 보내놓은 것이었다. 조조가 실패할 경우 초선도 죽게 되리라는 어버이의 염려에서, 우선은 그녀를 살리고 보자는 조급한 마음이 그렇게 시킨 것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절망적인 얼굴로 쳐다보는 초선을 외면하며 조조가 외쳤다.
“동탁,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하지만 나 조조 기필코 다시 오겠다. 그때는 동탁 너 돼지의 목을 따 주마.”
“이런 미친놈.”
조조는 이번에는 무섭게 초선을 노려보았다.
“네년이 저 돼지를 깨워 나를 기다리게 한 거냐. 요망한 것이 눈치도 빠르구나. 어디 돼지와 함께 한번 잘 살아보거라.”
이렇게 외치고 조조는 날쌔게 침실에서 사라졌다.
“멍청한 놈. 날 죽이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나. 초선아 저놈 말 들었지. 널 저주하다니 제정신이 아닌 놈이다. 하여튼 이제부터 너는 나의 곁을 떠나지 마라. 그래야 네 양부도 늘그막에 편안히 지내지. 조조놈은 내가 씹어먹고 말 테니 염려 놓거라.”
초선은 그래도 무섭다는 듯 동탁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어디 잘 살아보거라’고 한 조조의 말이 원망스러워서가 아니었다. 행여 공모의 의심을 받게 될까 봐 임기응변으로 한 말임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노려보던 눈 속에 서려 있던 안타까움과 연모의 빛을 초선은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조님 부디 무사히 벗어나세요. 언젠가 만날 날이 오겠지요. 오늘 당신의 그 말씀 그 어떤 사랑의 달콤한 말보다 더 내 가슴을 울리는군요.”
동탁의 부하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조조를 잡으려고 애썼으나 조조는 용케 변장을 하고 빠져나가 낙양을 벗어났다.
여포의 등장
후궁에는 미녀가 800명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탁은 자신의 침실에 틀어박혀 초선의 몸만 미친 듯 탐닉하였다. 조조의 예에서 보듯 언제 누가 또다시 암살하러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녀를 탐하고 싶을 만큼 그녀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여자였다.
왕윤은 동탁에게 조조의 습격을 피하셨다니 천만다행이라고 겉치레로 아뢰었다. 밀서를 보내 암살을 모면케 한 왕윤의 충정을 동탁은 치하하며 앞으로도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왕윤은 원하지 않게 동탁의 오른팔이 되었다. 도읍을 낙양에서 장안으로 옮긴 후에도 그 관계는 변치 않았다. 왕윤은 모든 것을 체념하였다. 동탁을 거역할 수도 없고 초선을 되찾아 올 수도 없었다. 특히 초선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암살이 실패한 그날 밤 이래로 초선은 조조가 자기를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밤마다 동탁의 무거운 몸에 깔려, 압사되는 듯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조조가 전국의 제후들에게 반동탁연합의 격문을 보내 군사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선은 다시 희망에 부풀었다. 조조의 무공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때가 멀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런 중 장안으로 가는 동탁을 추격했던 조조의 군대가 그만 참패하고 말았다. 패퇴를 거듭한 반동탁연합군이 마침내 해산되자 초선은 희망을 버려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삶의 보람이 있다면 그건 여포였다. 그녀가 처음 여포를 만난 것은 수도가 아직 낙양에 있던 무렵으로 반동탁군과 동탁군이 패수관에서 격돌하기 며칠 전이었다. 그날 동탁의 명으로 초선은 장군들 앞에서 악곡을 연주하였다. 전투 전에 장군들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두 그녀의 미모에 사로잡혀 연주를 들으며 정신을 잃는 가운데 여포가 나타났다.
“여쭙니다. 곳곳에서 전투가 치열한데 동탁 나리께서 도통 전투에 나서지 않으시니 그 연유를 묻고 싶습니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한낱 여자에게 빠지신 건지….”
여포는 동탁 앞에서도 당당했다. 머리털을 3으로 가르고 그 위에 사자의 모습이 그려진 투구를 썼는데 붉은 군복에는 야수들이 싸우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서 대답하시오. 동탁 나리!”
“어허, 유능한 장수들이 모두 나섰거늘 내가 그들의 공적을 뺏어야 옳단 말이냐?”
동탁은, 스스로 생각해도 명답을 말했다는 듯 거만하게 웃었다.
“그래서 누가 나리께 확실한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까?”
오만하리만큼 당당한 목소리로 여포가 외쳤다.
옆에 있는 장수가 초선에게 “저분이 여포요”하고 속삭였다. 초선도 여포의 소문은 익히 들은 바 있었다. 낙양을 점령한 동탁과 부자의 연을 맺고 양부 정원을 죽인 사나이, 야수처럼 전쟁터를 뛰어다녀 모든 장수가 두려워하는 자. 이 세상에서 그처럼 강해 보이는 인간을 초선은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여포의 그 힘차고 늠름하고 거대한 모습을 보며 초선은 갑자기 유두가 돌덩이처럼 굳어지는 것을 감지했다. 동탁에게서는 경험하지 못한, 처음으로 성욕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뒤이어 부끄러움과 강한 자책의 염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유두는 여전히 딱딱했고 이제는 몸의 어딘가가 젖어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지…. 내겐 그보다 머리가 훨씬 뛰어나고 교양 있는 데다 멋진 시를 읊는 조조가 있거늘….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내 몸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초선의 뜻하지 않은 육체의 반응과는 관계없이 장내의 긴장감은 높아만 갔다. 왕좌에 앉은 동탁의 다소 언짢은 듯한 표정을 무시하고 여포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저에게 적토마를 주면 저 혼자서라도 적군 20만쯤은 섬멸해 드리겠소!”
초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 정말 멋지구나. 아무리 적토마라지만 혼자서 20만 병사를 무찌를 수는 없지. 죽는 것은 뻔한 일. 그래도 그는 해볼 만한 일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조조는 도망의 선수인데 여포는 투쟁의 선수로구나…. 정말 양극이야.’ 초선은 적토마를 타고 달리는 여포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가슴에 안겨 숲 속을 달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포. 내 너에게 적토마를 내릴 테니 마음껏 전쟁터를 달려보라.”
이 말을 듣자 여포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여포는 이곳에 들어온 후 초선과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반면 초선은 여포만을 처음부터 끝까지 쳐다보며 계속 감탄하고 있었다. 동탁은 초선의 마음속 미묘한 동요는 눈치채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초선아. 저놈은 아주 단순하고 순수하지만 난폭하고 강하기로도 천하제일인 여포라는 녀석이다. 보기만 해도 늠름하지 않으냐.”
여포를 이용해 동탁을 치려는 초선의 비책
남자 가운데 남자다운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 으뜸가는 적토마가 있다. 활통을 등에 메고 손에는 긴 창을 든 여포가 바람처럼 빠른 적토마를 타고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장쾌한 모습! 관운장과의 멋진 대결과 패수관에서의 여포의 활약에 대해, 환도한 장안에서 동탁에 안겨 들은 바 있는 초선은 때때로 여포를 생각하며 감회에 젖고는 하였다. 반동탁연합군이 패수관에서 괴멸되고 조조의 반격군이 참패한 것은 오직 여포의 공적으로 봐야 했다. 희망의 싹이 짓뜯긴 곳의 상처가, 여포를 생각할 때마다 치유되어 가는 것을 초선은 느꼈다. 동탁의 무거운 몸 아래서도 초선은 여포를 생각하며 행복감을 맛보았다. 조조에 대한 연정과는 또 다른 연모였다. 한마디 말도 주고받은 적 없건만 초선은 여포에 대한 그리움으로 온몸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성은 조조를 사랑하라고 하고 있었으나 본능은 여포를 추구하고 있었다.
초선은 동탁의 허락을 받고 오랜만에 왕윤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즈음 왕윤은 동탁의 폭정에 하늘을 우러러 비통해하며 참담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동탁의 애첩이 된 초선이 잠시 다니러 오니 부녀의 정을 다시금 확인하며 작은 위안을 받고 있었다.
하루는 모란정 근처에서 길게 탄식하는 기척이 있어 초선이 다가가 보니 의부 왕윤이었다.
“아버님, 밤이 늦었사온데 어이 주무시지 않고 이리 나와 계시는지요. 무슨 근심이 있으신 게옵니까.”
왕윤은 과년한 딸 초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나이 어느새 16세. 동탁 같은 돼지가 갖기엔 그 재주와 용모가 너무나 아까운 아이였다.
초선의 말을 듣고 왕윤은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초선아, 네가 이렇게 나오는데 내 어찌 입을 다물고 있겠느냐. 이 나라의 운명이 어쩜 한 여인의 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나라의 운명이… 이 말은 예전에도 들은 바가 있었다. 조조와 함께 동탁에게 가기 전의 일이었다. 초선은 다시 때가 온 것을 알았다.
“우선 화각으로 가자.”
화각에 이르자 왕윤은 초선을 자리에 앉히고 갑자기 절을 했다. 초선이 깜짝 놀라 꿇어앉았다.
“대감, 어찌 이러십니까!”
“초선아. 네 정녕 이 나라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긴다면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왕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초선도 그 눈물의 뜻을 아는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말씀드린바 이 몸 나라 일에 소용이 된다면 백 번 만 번 죽어도 사양치 않겠습니다.”
“그래. 내 모두 말하마. 알다시피 지금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동탁이라는 놈이 호시탐탐 천자의 자리를 노리는데도 조정의 문무백관은 그저 눈치만 보고 있구나.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잘 들어라. 동탁에게는 여포라는 양자가 있는데 둘 다 보기 드문 호색한이다. 맞불을 놓아 산불 끄듯 연환지계(連環之計)를 쓴다면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선 너를 여포에게 보여주었다가 다시 동탁에게 돌려보낼 것이다. 무슨 뜻인 줄 알겠느냐?”
“미련한 년이지만 어찌 대감의 뜻을 모르겠나이까. 걱정 마시고 제게 맡겨주세요. 제가 두 장수의 눈을 멀게 하여 거꾸로 세상을 밝히겠나이다.”
왕윤은 초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대견하기도 하고 가엾기도 했다. 왕윤은 탄식하며 속말을 했다. ‘내 이러려고 너를 키운 게 아니건만 난세가 너를 요구하는구나. 네가 두 사람 사이를 이간하여 여포의 손으로 동탁을 죽이게만 한다면 그날로 천하가 바로잡힐 것이다.’
“의부님. 그럼 이제 여포를 부르세요.”
“알겠다. 하지만 그는 여간 난폭한 자가 아니다. 조심해야 할 거야.”
“그만큼 단순하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맡겨두세요.”
동탁에게 그토록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총명한 초선의 눈동자를 보고 왕윤은 탄식과 함께 안도를 하였다. 왕윤은 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의부님,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여기서 나라를 위해 조조와 계획을 짠 것을요.”
“오, 그랬지. 하나 조조가 먼저 칼을 뽑았고 그는 실패했다. 그 뒤로 나는 또다시 너를 위험에 빠뜨리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해서 그때 우리가 계획한, 동탁을 암살하는 일은 잊기로 한 것이다.”
“아니에요, 아버님. 지금이야말로 기회입니다. 일전에 여포를 보고 바로 계책이 떠올랐어요. 이참에 여포 장군의 손으로 동탁을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저 여포만 이리로 불러오시면 됩니다.”
‘하지만 동탁의 양아들 여포가 과연 응할 것인가? 초선이 동탁의 애첩인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여포가 이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왕윤의 속을 꿰뚫어본 듯 초선이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여포 나리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사모하는 사람의 손을 통해 짐승에게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니 동탁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의 뜻대로 되도록 제가 일을 꾸미겠습니다.”
‘뭐라고? 여포를 사모한다고? 어허 여자의 마음은 어찌 이리도 알 수가 없는가.’ 왕윤은 탄식을 하였다.
“묻겠다. 조조에 대한 그리움은 없느냐.”
“그는 옛 남자일 뿐입니다. 개의치 마시어요.”
왕윤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여포의 어떤 매력이 초선을 사로잡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탁보다는 인간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인이 사나이에게 미쳤는데 더 이상 무슨 도리가 있겠나. 초선의 너무나 확고한 결심과 애원하는 눈동자를 보고 왕윤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쩜 진짜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지만 나라의 운명보다 더 중히 여길 수는 없지. 내가 어리석었어. 동탁에게 밀서 따위를 보내 조조가 그를 죽일 수 있는 천우의 기회를 날려버리게 하다니. 아, 나야말로 사소한 부녀의 정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있는 소인배구나.’ 심한 자책 속에서 왕윤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운과 나라의 운명을 제대로 걸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