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민삿갓의 팔도기행_땅끝마을

醉月 2010. 12. 26. 09:16
봄처녀 살포시 미소 짓는 ‘남도답사 1번지’ 땅끝 가는 길
 
봄! 코끝에 걸려드는 한 줄기 훈풍에서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오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이즈음. 성미 급한 이들은 기다림에 지쳐 남도 땅끝마을로 떠난다. 남해를 건너와 한반도 땅끝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봄처녀를 만나기 위해.

▲ 땅끝마을 앞바다 풍광. 왼쪽의 갯바위는 일출 명소로 알려진 맴섬, 오른쪽은 형제바위다.

해남 땅끝은 우리나라 남서쪽 끄트머리에 있어 어느 지방에서 접근하든 제법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땅끝 여정을 제대로 즐기려면 1박2일로는 조금 무리가 되고 2박3일 정도는 돼야 무난하다.

서해안고속도로 남단의 목포 나들목을 빠져나와 2번 국도를 타고 강진을 향해 달린다. 가는 도중 왼쪽을 힐끗 보면 저 멀리서 남도 명산 월출산이 유혹한다. 그곳엔 유명한 무위사·월남사지 등이 있지만 이번 땅끝 나들이에선 이런 명소들을 잠시 지나치자. 그렇지 않으면 사나흘이 걸려도 땅끝까지 가는 일이 까마득할지도 모르니.

올 봄, 땅끝 여정 첫 대상지는 강진읍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된 고을이다. 사의재, 보은산방 등 다산 선생이 유배 초기에 머물던 곳이 복원돼 있다. 무엇보다 이런 봄날엔 모란꽃 활짝 핀 영랑생가를 꼭 들러보자. 첫날 점심은 이곳 강진읍내에서 해결하는 게 좋다. 유명한 맛집이 많다.

이어 다산 선생의 중·후기 유배지였던 다산초당으로 간다. 물론 백련사 동백숲에서의 사색도 빼놓을 수 없다. 다산기념관~다산초당~백련사 산책은 남도 여행의 필수 코스다. 왕복 2시간 정도 걸린다.

이번엔 18번 국도로 해남읍내를 거쳐 녹우단(녹우당)으로 간다. 녹우단은 조선시대 명문장가인 고산 윤선도 종손이 살고 있는 해남 윤씨 종가다. 고택 답사, 국보와 보물들이 여러 점 보관돼 있는 고산유물관, 뒷산의 비자림 등을 둘러보는 데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어 대흥사가 있는 두륜산으로 간다. 일정이 1박2일이든 2박3일이든 이곳에서 숙박하는 게 무난하다. 숙소와 식당이 넉넉하다. 대흥사·일지암 구경과 두륜산 산행까지 여유롭게 섭렵할 수 있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산행을 1~2시간 절약할 수 있다.


▲ ‘땅끝지맥’이 바다로 빠져드는 갯바위에 서 있는 땅끝탑. 이곳이 땅끝임을 알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다.

이튿날, 두륜산을 벗어난다. 13번 국도를 타고 다시 땅끝으로 길을 잡지만, 한반도 최남단에 자리한 절집인 달마산 미황사의 유혹도 뿌리칠 수 없다. 봄볕에 정갈하게 씻긴 부도밭 가는 동백길 산책도 좋다. 도솔암은 도솔봉 암벽에 제비집처럼 자리 잡은 아담한 암자다. 여기서 보는 다도해 풍광이 빼어나다.

도솔암을 빠져나오면 드디어 땅끝. 2박3일 일정이라면 여기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숙박업소와 식당이 많다. 이튿날 아침에 땅끝탑까지 산책을 꼭 즐긴다. 이어 전망대에 오르면 백두산부터 뻗어내려온 산줄기가 바다로 잦아드는 장엄한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 땅끝마을 산책은 코스에 따라 다르지만 1~2시간 정도 걸린다.

이제 귀가할 시각. 만약 오후 늦게 떠나도 괜찮다면 고산 윤선도가 말년을 보낸 보길도에 갔다 오는 것도 좋다. 2~3시간 정도 더 잡아야 한다.

땅끝 여정을 1박2일로 잡았다면, 영랑생가~사의재~다산초당~녹우단~대흥사~(숙박)~미황사~도솔암~땅끝마을 순서로 둘러보고 귀갓길에 오르면 된다.

꽃샘추위 탓에  봄처녀 발걸음이 굼뜨기만 하더니, 봄비가 몇 차례 대지를 적시자 하루가 다르게 봄처녀의 숨결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4월이 되면 황톳빛 남도 산하는 연둣빛 신록으로 점차 물들어가고, 그 사이로는 처절하게 스러지는 동백꽃의 마지막 절규가 오히려 ‘화사’하다.

‘끝’이라는 말은 마지막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끝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땅끝’이라는 말은 ‘섣달에 그리는 춘삼월’처럼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남도, 그 중에서도 강진·해남을 거쳐 땅끝마을로 여정을 잡았을 땐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땅끝 가는 길은 멀다. 서울에서든 부산에서든 최소 5시간이 넘게 걸린다. 하지만 고속도로만 벗어나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아니 지루할 틈이 전혀 없다. 눈을 놀라게 하는 경치에다가 혀를 호사시켜주는 별미가 가득하고, 무엇보다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에도 깊은 내력이 있는 남도 답사 1번지 아닌가.

땅끝 가는 길, 가만히 귀 기울여보자. 남녘 바다를 건너온 봄처녀가 가슴 깊이 숨겨 놓았던 그 기나긴 사연을 소곤소곤 들려줄 테니.


영랑생가&사의재


해마다 찾아오는 ‘찬란한 슬픔의 봄’

강진읍내에서 땅끝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강진읍내 풍광은 남도 해안가에 자리한 여느 읍내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평범한 읍내 풍경이지만 이곳은 남도 여행의 중요한 베이스캠프다.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1903~1950) 시인을 먼저 만난다. ‘북도에 소월이라면 남도에 영랑’이라던 서정시의 대가. 소월이 북도의 투박한 사투리로 독특한 가락을 표현했다면, 영랑은 남도의 곰살스러운 사투리로 시심을 노래했다. 영랑생가 행랑채 앞 큼직한 돌엔 저 유명한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져 있다. 차분히 읊어보고 봄을 느껴보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전문


▲ 1 영랑문학제가 열리는 4월 하순 영랑생가를 찾아 활짝 핀 모란을 감상하는 사람들. 2 김영랑 시인의 생가. 시인은 이 집에서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주옥같은 시를 쓰기 위해 시심을 가다듬었다. 3 강진 동쪽 관문의 영랑공원엔 김영랑 시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시를 읊었다면 이젠 생가를 둘러볼 차례. 문화유산해설사가 항상 생가에 상주하니 언제라도 도움을 청할 수 있다. 물론 무료다.

잠시 영랑의 이력을 거칠게나마 살펴보자. 우리나라 서정시의 거목인 영랑은 이 집에서 태어났다. 영랑은 강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가 서울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우고 휘문의숙에 입학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했으나 발각되는 바람에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이듬해엔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편입한다. 그러다 1923년 동경대지진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8·15광복 후 영랑은 우익청년운동에 힘을 쏟는다. 1948년 영랑 일가는 이 집을 팔고 서울로 이사한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 영랑은 서울을 벗어나지 못해 지하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거리에 나왔다가 포탄 파편에 부상을 입고 이튿날 세상을 떠나고 만다. 48세라는 길지 않은 일생이다.

영랑 일가가 집을 팔고 떠난 뒤 주인이 몇 차례 바뀌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된 것을 1985년 강진군에서 사들인 뒤 영랑 가족의 고증을 얻어 옛 집에 가깝게 복원했다. 생전에 영랑은 나라 잃은 한과 슬픔을 달래기 위해 대숲으로 둘러싸인 이 생가에서 북을 치면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집 주변엔 영랑 시의 소재였던 굽은 돌담, 돌로 쌓은 우물, 장독대와 감나무, 모란과 대숲과 동백나무들이 있다. 무엇보다 영랑의 대표 시의 소재가 된 모란꽃을 보려면 4월 하순에 찾으면 된다. 영랑생가의 문화유산해설사는 “이곳 영랑생가 모란꽃은 보통 4월 20일 무렵 피어나기 시작해 4월 30일 이전에 활짝 피어난다”고 귀띔한다.

매년 4월 하순 무렵, 모란이 피는 때를 맞춰 영랑의 시심을 기리는 영랑문학제가 열린다.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는 영랑문학제는 4월 23일(금)부터 25일(일)까지 사흘간 열린다. 그러니 4월에 땅끝 여행을 계획한다면 ‘모란이 피는 찬란한 봄’ 풍경이 펼쳐지는 4월 넷째 주말 무렵에 일정을 잡는 게 좋겠다. 영랑생가 061-430-3185

다산 정약용 선생이 머물던 주막 사의재

강진읍내엔 다산의 체취가 가득하다. 하여 영랑생가를 나온 뒤 바로 다산초당으로 달려가기보단 이곳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의 체취를 느껴보자.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됐을 때 바로 다산초당으로 가지 않았다. 다산은 이곳 읍내에서만 세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1801년 다산은 신유박해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지자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다시 유배길에 올랐다. 형은 흑산도, 아우는 강진이었다. 형제는 나주 율정점 주막에 도착한 뒤 이튿날 이별한다. 동생은 ‘율정별(栗亭別)’이란 시를 남긴다.


▲ 1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처음 유배왔을 때 머물던 주막집. 다산은 ‘사의재’란 이름을 붙였다. 2 다산 선생은 백련사 혜장선사의 주선으로 고성사의 보은산방으로 옮기게 된다.

띠로 이은 주막집 새벽 등잔불 푸르르 꺼지려는데 / 일어나 샛별을 보니 헤어질 일 참담하네 /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두 사람 서로 할 말을 잃어 /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오열하네’

1801년 11월 22일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주모 할머니의 배려로 강진의 동문 밖 주막집에 머무른다. 제 아무리 다산이라 해도 유배 초기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술로 시름을 달랬던 모양이다. 어느 날 주모가 다산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찌 그냥 이렇게 헛되이 사시렵니까.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둬준 주모의 닦달에 다산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자신의 거처를 사의재(四宜齋)라 하고 학문 연구에 매진하기로 다짐한다. 결국 다산이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을 극복하고 조선 최고의 사상가로 거듭나게 된 데엔 주모의 자극이 큰 도움이 됐던 것이다. 당호인 사의(四宜)란 ‘마땅히 해야 할 네 가지’란 뜻이다. 네 가지는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고난에 닥쳐서도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던 학자의 자존심을 읽을 수 있다. 이 무렵 유명한 실학자가 강진으로 귀양왔다는 소문을 들은 백련사의 혜장선사와도 인연을 맺게 된다.

강진군은 다산이 머물던 사의재를 2007년 복원했다. 그런데 그냥 빈 집이 아니고 음식과 차 등을 들 수 있는 진짜 주막이다. 음식도 1인분에 모두 5,000원 수준. 만약 강진읍내에서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했다면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해결하는 것도 괜찮겠다. 숙박은 할 수 없다.

1805년 10월 8일, 다산은 약 4년 동안 머물던 사의재를 떠나 5리쯤 떨어진 고성사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물론 혜장선사의 주선이 있었다. 다산은 이곳에서 <주역> 연구서를 저작하고, 52편의 시를 집필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6년 9월 1일 이학래의 집으로 옮기게 된다. 이학래는 강진 6제자(황상, 손병조, 황취, 황지초, 김재정, 이학래) 중 막내다. 이학래 집터는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다. 강진군에서는 현재 도암만 가까운 곳의 폐가 터를 이학래 집터로 지정해 복원 준비를 하는 중이다.

숙식>> 강진읍내엔 프린스장(061-433-7800), 가필드(061-433-1212), 모두모텔(061- 433-8776) 등 모텔급 숙박시설이 많다.

강진 한정식은 강진만 개펄과 탐진강, 그리고 주변의 들녘에서 구한 온갖 재료로 맛을 낸 요리를 푸짐하게 내는 것이 특징. 해태식당(061-434-2486), 명동식당(061-434-2147) 등이 유명하다. 보통 기본 2인상에 5만 원 내외.

동해회관(061-433-1180)에서 차리는 자연산 짱뚱어 요리도 아주 유명하다. 짱뚱어탕 1인분 6,000원, 짱뚱어 전골(4인 기준)은 3만4,000원.

다산이 머물던 주막인 사의재(061-433-3223)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다. 새싹비빔밥 5,000원, 추어탕 5,000원. 주막집답게 동동주(5,000원)도 마실 수 있다. 안주로는 매생이전(5,000원), 간재미찜(1만 원) 등이 준비돼 있다.


다산초당&백련사

“다산 선생도 저 붉은 동백꽃에 반했으리”

강진 제자의 집에서 두 번의 겨울을 지낸 1808년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에 다산은 드디어 해남 윤씨 소유인 만덕산(409m) 기슭의 초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산은 해남 윤씨와 혈연관계가 있었다. 다산의 모친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손녀고,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니 해남 윤씨 집안은 다산의 먼 외가 친척 관계다.

다산은 초당에서 해남 윤씨 집안의 각별한 배려로 1818년 9월 해배될 때까지 본격적으로 학문을 탐구하게 된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이른바 ‘다산학’이라 일컬어지는 방대한 저술을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었다.


▲ 1 강진 만덕산 백련사. 고려 후기에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을 개설한 절집으로 널리 알려졌다. 2 조선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의 18년 귀양살이 가운데 10년을 이 다산초당에서 지냈다. 3 다산 선생이 형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던 자리에 세워진 천일각.

강진읍내 쪽에서 다산초당으로 접근하다 보면 아스팔트로 포장된 큰길에서 백련사, 다산초당, 다산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이 각각 1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예전엔 백련사에서 내려 다산초당으로 걸어갔다 오든지, 아니면 다산초당에서 접근해 백련사까지 다녀오는 이들이 많았다.

요즘 답사 순서는 다산기념관에서 다산의 학문과 일생을 먼저 살핀 다음, 다산초당을 거쳐 백련사로 가는 코스가 주를 이룬다. 만약 차량 지원이 가능한 단체관람이라면 차량을 백련사 주차장에 기다리게 하면 되고, 그렇지 않은 가족 단위 여행객이라면 다시 다산기념관으로 되돌아오면 된다. 다산기념관~(20분)~다산초당~(30분)~백련사 왕복 코스가 걷는 데만 1시간30분쯤 걸린다. 따라서 2시간 정도면 봄날의 여유로운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산책길인 것이다.

한편 최근 강진군에서는 다산의 체취가 묻어 있는 유적지를 연결한 ‘다산유배길’을 조성했다. 다산기념관~다산초당~백련사~도암만 둑방길~이학래 집터~사의재~영랑생가~보은산방은 총 거리가 약 17km. 꽉 찬 하루가 필요한 거리다. 걷기에 자신이 있거나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번 시도해보자. 그렇지만 보통 여행객들은 다산수련원~다산초당~백련사 왕복 코스로 아쉬움을 달랜다.

다산기념관을 출발하면 초입의 운치 있는 두충나무 군락지, 정호승 시인이 이름 붙여준 ‘뿌리의 길’을 차례로 지난다. 호젓한 길을 20분 정도 걸으면 다산초당에 다다른다.

현재 기와로 지붕을 올린 다산초당은 본디 초가였다. 이는 다산과 교분이 있던 해남 일지암의 초의선사가 다산과 함께 1812년 가을 월출산 구경을 하고 오다가 그렸다는 ‘다산초당도’가 발견되면서 확인됐다.

이렇듯 원래 초가였던 것을 복원할 때 매년 짚을 갈아주는 번거로움 때문에 지붕을 기와로 올리는 바람에 ‘와당’이 되어버려 ‘초당’의 소박한 정취를 느낄 수 없지만, 주변엔 다산의 체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동암(東庵)은 다산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거처하던 건물로서 여기에서 저술작업이 이루어졌다. 서암(西庵)은 다산의 제자들이 머물던 곳이다. 동암과 서암 모두 1970년대에 복원했다.

뜰 앞의 평평한 바윗돌은 다산이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찻물을 끓이던 부엌인 다조요, 초당 왼편 뒤쪽의 샘물은 다산이 찻물로 쓰던 약천(藥泉)이다. 동백 그늘 드리워진 뜰 오른쪽의 아담한 연못은 다산이 직접 축대를 쌓고 못을 파 물고기도 기르고, 꽃나무도 줄지어 심고 물을 끌어 폭포도 만들었던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다. 또 초당 뒤쪽의 바위벽엔 다산 선생이 해배될 때 썼다는 정석(丁石)이란 글씨가 있는데, 이 네 가지를 일컬어 ‘다산4경’이라 한다.

다산은 다산초당으로 들어오면서 생활의 안정을 얻어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두하는 한편 혜장선사와 함께 다도를 즐겼다. 만덕산엔 야생 차나무도 많았다. 다산은 백련사 혜장선사에게 “목마르게 바라노니 부디 선물을 아끼지 말기를” 하며 걸명소(乞茗疎)를 보내기도 했다.

백련사 부도밭 주변에 떨어진 동백꽃 장관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 초입의 산등성이는 다산초당에서 가장 전망이 트인 곳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흑산도에 유배된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멀리 도암만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천일각(天一閣)은 이를 기리기 위해 1970년대에 세워진 것이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오솔길은 다산 선생과 혜장선사가 서로 만나기 위해 오가던 길이다. 동백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도암만 풍경은 고즈넉하고, 대나무와 차나무와 동백나무가 어우러져 있으니 사색하며 걷기에 더없이 좋다.

고려 말 천태종 부흥의 본산이었던 유서 깊은 백련사(白蓮寺) 주변의 수백 년 묵은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동백림(천연기념물 제151호)은 남도의 봄을 봄답게 해주는 곳이다. 아름드리 동백나무 1500여 그루에서 피어나는 동백꽃들은 도암만 바다, 그리고 단아한 절집과 조화를 이룬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 절을 가리켜 ‘남쪽 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며 동백 또한 곁들여서 창취가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표현했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동백숲에서 부도밭 주변의 정취가 일품이다. 이 동백숲에서 붉은 기운을 느끼려면 한겨울보다 동백꽃이 바닥을 뒤덮는 3월 이후에 찾으면 된다. 물론 4월에도 이런 운치를 즐길 수 있다.


▲ 1 다산 선생이 차를 달일 때 쓰던 샘물인 약천. 2 다산초당 근처에 세워져 있는 다산기념관. 다산의 일생과 학문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3 백련사 부도밭의 동백.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림은 3~4월에 온통 붉게 변한다.

한편 백련사에서는 4월 10일(토) 다례제가 예정돼 있다. 오후 2시 백련사 명부전에서 다례제를 지내고, 3시엔 동백림에서 들차회가 있다. 이어 도암만이 눈에 들어오는 붉은 동백숲에 소박한 무대를 꾸미고 4시부터 6시까지 2시간 동안 음악회를 연다. 풀피리, 해금, 판소리 등의 공연이 준비돼 있으니 참고하자. 다산기념관 061-430-3780, 백련사 061-432-0837

숙식>> 다산초당 산책 출발 지점인 다산수련원(061-430-3786)에서 숙박할 수 있다. 2인 1실 기준 1만8,000원, 추가 1명당 5,000원. 방 1칸에서 5명까지 숙박 가능. 단체손님은 식사 예약이 가능하다. 1인분 5,000원. 밥상에 7~8가지 정도의 반찬이 올라온다. 주변에 들꽃민박(061-432-9080), 알뜰수퍼민박(061-434-8487), 다향소축(061-432-0360), 다산촌명가(061-433-5555) 등이 있다.

해남 녹우단

‘푸른 비’ 쏟아지는 고산 윤선도 고택

다산초당을 벗어난다. 이어 18번 국도를 타면 해남읍의 녹우단(綠雨壇·사적 제167호)이 소매를 붙든다. 가사문학의 대가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가 기거하던 사랑채가 녹우당(綠雨堂)이고, 녹우당을 포함한 해남 윤씨 종택 전체를 녹우단이라 한다. 해남 현지에서도 이정표에 녹우단과 녹우당을 섞어 쓰고 있지만, 모두 같은 곳을 뜻하니 헷갈리지 말자.

그런데 당호가 녹우(綠雨)? 무슨 뜻일까. 여러 가지다. 흔히 가을에 녹우단 은행나무에서 노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면 마치 빗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에 그리 지은 것이라 한다. 집 뒤편의 대숲에 부는 바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 녹우단 뒷산엔 비자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바람 부는 날이면 마치 빗줄기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 해남 윤씨 종택인 녹우단 전경. 오른쪽은 고산유물전시관이다.

그렇지만 녹우는 사전적 의미로 ‘늦봄에서 여름 사이에 풀과 나무가 푸를 때 내리는 비’를 말한다. 자연의 성장에 큰 보탬이 되는 생명수인 셈이다. 녹우당이란 당호를 지은 이는 공재(恭齋)와 절친한 사이였던 옥동(玉洞) 이서(李敍·1662∼1723). 그러니 공재의 재능을 잘 알고 있던 이서가 공재를 녹우에 견주어 당호를 붙인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은행나무, 대숲, 비자림 모두 녹우단의 소중한 보물이다.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고산이 시심을 가다듬는 것을 지켜보았을 테고, 대숲은 국난이 닥쳤을 때마다 대대로 전해오는 소중한 보물을 항아리에 넣어 묻어두던 곳이다. 비자림은 해남 윤씨가 대대로 가꿔온 숲이다. 녹우단에 처음 터를 잡아 해남 윤씨가 번창하게 되는 기틀을 마련한 어초은 윤효정이 “뒷산의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유훈을 남기자 후손들이 비자나무를 심어 가꾼 것이다. 현재 비자림엔 500여 년 된 비자나무 400여 그루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 1 고산사당과 어초은사당이 있는 호젓한 돌담길. 제법 운치가 넘치는 고풍스런 길이다. 2 고산 윤선도 집안에 전해오는 유물이 전시된 고산유물전시관. 현재 새로운 유물관을 짓고 있다. 3 고산 윤선도 증손인 공재 윤두서가 자신을 그린 자화상. 국보로 지정돼 있다.

누가 뭐라 해도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문적(文籍), 문서 및 고화(古畵) 등이 고루 갖추어진 유물전시관을 둘러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이곳엔 보물로 지정된 산중신곡(보물 제482호), 노비문권(보물 제483호)를 비롯해 고산의 육필과 집안 문서, 고산의 증손인 윤두서가 그린 걸작 공재자화상(국보 제240호), 그리고 동국여지도·일본여도와 ‘나물 캐는 두 여인’ 등이 수록된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 등이 전시돼 있다.

현재 새로 짓고 있는 유물관은 오는 5월 18일 완공 예정이다. 따라서 그 이후엔 유물을 새로운 전시관으로 옮겨 전시하게 된다. 문화유산해설사는 “새 전시관엔 그동안 비좁아 전시하지 못했던 귀한 유물들도 나올 것”이라고 귀띔한다.

이런 소중한 유물을 관람하고 비자림에서 삼림욕을 하고 나면 입장료(일반 1,000원, 어린이 700원)가 전혀 아깝지 않다. 1시간 정도면 비자림 산책까지 포함해 녹우단 일대를 꼼꼼히 둘러볼 수 있다. 녹우단 061-530-5548


두륜산 대흥사&일지암

봄 깊은 산중 암자엔 차향 그윽하고

백두에서 길게 뻗어 내려와 땅끝에 사자봉을 세우기 전에 아쉬움처럼 빚은 명품이 두륜산(703m)과 달마산(489m)이다. 두 산 모두 이 땅에서 빠지지 않는 경관을 지니고 있다. 그 산자락 곳곳엔 초록빛을 띤 늘푸른나무 동백나무가 겨울에도 봄꿈을 키우고 있다.

서산대사가 일찍이 “천년병화가 미치지 않는 곳”이라 말한 대흥사(大興寺) 가는 길. 봄이 긴 계곡 장춘동(長春洞)은 녹색 물감이 뚝뚝 떨어질 듯한 싱싱한 숲길이다. 아홉 굽이 숲길이라고 해서 구림구곡(九林九曲)이라고도 하는 이 길 양쪽엔 측백나무와 편백나무가 가득하다. 그 너머 숲엔 수백 년 수령의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하여 4월이면 이 길엔 봄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녹색의 생명 덩어리가 숲을 떠돈다. 숨을 깊이 들이쉬면 푸른 기운이 몸 안에 가득 들어찰 것만 같은 생명의 길이다.


▲ 1 신록으로 물든 두륜산 아래 천년 고찰 대흥사가 포근하게 자리하고 있다. 봄이 깊어지는 4월 하순의 풍경이다. 2 일지암과 동백나무. 떨어진 동백꽃들이 땅을 붉게 물들였다.

영화 ‘서편제’ ‘장군의 아들’을 촬영했던 고택인 유선여관을 지나 일주문을 통과하면, 푸른 숲 그늘에 수십 기의 부도가 모여 있는 부도밭이다. 대흥사가 배출한 13대 종사와 13대 강사의 부도와 비를 모시고 있다. 당연히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의 부도도 있다.

두륜산의 두륜(頭崙)은 백두산의 ‘두’자와 곤륜산의 ‘륜’자에서 따온 이름으로 중간에 ‘산이름 륜’자가 ‘바퀴 륜’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원래 ‘두른산’을 한자어로 붙인 이름이다. 가련봉, 고계봉, 능허대, 두륜봉, 도솔봉 등 서산대사가 천년병화가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 이 산줄기가 ‘봄이 긴 골’을 용틀임하듯 감싸고 있는 것을 보면 ‘두른산’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가련봉과 능허대, 두륜봉이 수호신처럼 굽어보고 있는 대흥사 경내로 들어가 해탈문 우측으로 걷다 보면 맑은 무염지가 반기고 은은한 차향이 느껴지는 동다실이다. 어느 때 문을 열고 들어가도 좋은 찻집인데 기왕이면 일지암에 다녀온 뒤 여유 있게 차를 들고 싶다. 바로 옆엔 성보박물관도 보인다. 이곳은 서산대사의 금란가사, 옥발, 수저, 신발, 염주, 교지, 승군다표지물 등 많은 유물이 갖춰져 있는 서산관, 초의선사의 차 일생을 살펴볼 수 있는 초의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 1 다성으로 일컬어지던 초의선사가 물맛을 자랑하던 일지암 유천. 2 기묘하게 이루어진 두륜산 구름다리. 두륜봉 정상 근처에 있어 본격 산행을 해야 구경할 수 있다. 3 대흥사 입구의 부도밭. 대흥사가 배출한 13대 종사와 13대 강사의 부도를 모시고 있다.

신라 말기에 세워진 대흥사는 당시엔 한반도 남서쪽 해안의 자그마한 절집이었지만 조선시대에 서산대사로 인해 당대 최고 가람으로 거듭났다. 임진왜란 때 73세의 노구로 1500명의 승병을 이끌고 위태로운 나라를 구한 승병장 서산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기 전 제자인 사명당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유언했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 제자들은 유언을 따랐고, 구국의 영웅을 모신 이 가람은 그후 크게 일어나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했다.

표충사(表忠祠)는 서산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여 제자들이 1669년에 건립했다. 정조가 표충사라 사액하였으며, 나라에서는 매년 예관과 헌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참고로 대흥사 경내엔 유심히 살필 편액이 여럿이다.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고, ‘대웅보전’은 이광사의 글씨, ‘가허루’는 이삼만의 작품이다.

표충사 앞엔 편안한 표정으로 단지를 들고 앉아 있는 노스님의 동상이 있으니 바로 초의선사다. 무안에서 태어나 16세에 출가한 후 40여 년간 두륜산 일지암에서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었던 선사는 시와 글과 그림에 능통한 명인이었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를 정립한 다성(茶聖)이었다.

따사로운 봄볕을 받으며 발길을 일지암으로 향한다. 길섶엔 동백꽃 피고 지는데,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숲길을 얼마쯤 걸으면 어느새 차향 그윽하게 풍겨오는 일지암(一枝菴)이다. 한 개의 나뭇가지로 지은 암자라! 이름은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 가지에만 살아도 마음이 편하다(安身在一枝)’는 한산시(寒山詩)의 일지(一枝)를 따온 것이다. 결국 ‘일지’는 허름한 초가에서 차와 더불어 평생을 지내면서 마음을 맑게 닦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스님의 ‘초의(草衣)’라는 법호와 의미가 맞닿는다.

초의선사가 40여 년 머물던 일지암

39세인 1824년 이곳에 띳집을 지어 머물던 조선 후기의 선승 초의선사는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 당대 거유들과 사귀며 다도와 선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나라 차향과 맛이 우수하다는 내용 등을 담은 <동다송>과 <다신전>은 ‘차의 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저술로 평가된다.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찻잎을 따는 데 그 묘(妙)를 다하고, 만드는 데 그 정(精)을 다하고, 물은 진수(眞水)를 얻고, 끓일 때 중정(中正)을 얻으면 체(體)와 신(神)이 서로 어울려 건실함과 신령함이 어우러진다. 이에 이르면 다도는 다하였다고 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일지암 뒤꼍 동백나무 우거진 산등성이에서 흘러나오는 유천(乳泉)은 ‘물은 차의 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던 초의선사가 좋은 물이라 칭찬하던 샘물이다. 선사가 자랑해 마지않았던 맑은 유천 한 모금을 들이켜고 돌아보면 아름드리 동백나무 몇 그루와 푸른 차밭 풍경이 싱그럽다. 초의선사도 이 풍경을 사랑했을 것이니 비록 차 한 잔 권하는 스님 없어도 마음은 더 없이 한가롭다.

대흥사를 찾고서도 두륜산 산행을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두륜산 산정에서 감상하는 서남해안의 아름다운 풍광은 정말 일품이다. 여기에 서면 ‘섬들의 천국’이라는 다도해의 섬들을 가장 많이 멀리 볼 수 있다. 한반도 땅끝까지 이어진 산줄기와 남해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 보길도 너머로 추자도, 그리고 날씨가 맑으면 제주의 한라산도 눈에 담을 수 있다.

부챗살처럼 뻗은 산길을 여러 코스로 조합할 수 있지만, 대흥사부터 산행을 시작한다면 대흥사~오심재~능허대~가련봉~두륜봉~구름다리~일지암~대흥사 회귀 코스가 가장 뿌듯하다. 3시간30분에서 4시간 정도 걸린다. 대흥사 입장료 성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대흥사 종무소 061-534-5502

두륜산은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주릉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대흥사 집단시설지구에서 출발해 고계봉(636m) 정상 아래 해발 570m 지점까지 이어진다. 케이블카~고계봉~오심재~노승봉~가련봉~두륜봉~구름다리~일지암~대흥사 코스는 대략 2시간30분에서 3시간 정도 걸린다. 케이블카 운행 시각은 08:00~18:00. 요금 어른 8,000원, 어린이 5,000원. 두륜산케이블카 061-534-8992, www.haenamcablecar.com

숙식>> 두륜산 집단시설지구에 여관과 민박집 같은 숙박시설이 많고, 산채비빔밥·산채정식 등을 차려 내는 식당도 여럿이다. 대흥사 입구의 유선여관(061-534-2959)은 영화 ‘서편제’를 촬영하기도 한 전통 한옥. 남도의 온갖 반찬이 올라오는 특별한정식이 4인 기준 한 상(8만 원)으로 나온다. 숙박 손님에게 아침식사 7,000원, 저녁식사가 1만 원. 숙박비는 2인 1실 기준 3만 원.

이외에도 두륜산 집단시설지구엔 두륜각(061-535-0080), 영빈장(016-534-0076), 대성각(061-535-4700), 대흥각(016-535-1551), 남국장(016-535-3955), 그린장(061-533-3344), 낙원각(061-535-4302), 동일각(061-534-2223) 등 숙박업소가 많다. 전주식당(061-532-7696) 등 산채정식을 차리는 식당이 여럿이다.


달마산 미황사&도솔암

눈을 놀라게 하는 바위 병풍에 안긴 천년 고찰

대흥사에서 승용차로 30~40분 거리엔 한반도 육지 최남단에 자리한 절집인 미황사(美黃寺)가 있다. 달마산의 거친 암봉들이 창과 검을 세운 것처럼 불쑥불쑥 솟은 바위 병풍과 대웅보전 용마루의 부드러운 곡선이 이뤄낸,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는 제법 아름답다는 평이다.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온 검은 소가 점지한 절집인 천년 고찰 미황사는 한때 도솔암, 문수암 등 열두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다. 대웅보전 기둥을 받치는 연꽃 모양의 주춧돌엔 게·거북·물고기 같은 바다 생물이 새겨져 있어 바닷길을 통해 달마산에 불법이 도착했다는 창건 설화의 암시로 풀이된다.

그러나 150년쯤 전에 중창불사를 위해 ‘궁고’라는 전문 공연놀이패를 꾸려 해안지방 순회공연을 하다가 청산도로 공연을 하러 가던 중 폭풍을 만나 설장고 스님만 남고 떼죽음을 당했다. 그 뒤 미황사는 쇠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대웅보전(보물 제947호)과 응진당(보물 제1183호) 등 몇몇 당우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불사 덕분에 제법 규모가 커졌다.

부도밭 가는 동백 오솔길도 놓치기 아깝다. 동백꽃 내음에 파묻혀 산새 지저귀는 소리에 호흡 맞춰 걷는 맛이 좋다. 비와 바람에 마모되어 옛 향기 그윽한 부도들은 미황사의 위상을 짚어볼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이곳 부도 기단 하부에도 용·학·연꽃 등과 더불어 역시 거북·물고기·게 같은 바다 생물이 새겨져 있다.


▲ 달마산 도솔봉 바위틈에 제비집처럼 터를 잡은 도솔암. 주변 조망이 아주 빼어나 최근 명소로 떠올랐다.<사진 해남군청>

바위 벼랑에 제비집처럼 자리 잡은 도솔암

달마산의 암봉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봉우리는 달마산 남쪽의 도솔봉이다. 도솔봉 정상 근처에 터를 잡은 도솔암(兜率庵)은 최근 인기를 크게 끌고 있는 명소. 미황사에서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가는 데만 1시간30분 넘게 걸리는 먼 거리다.

달마산 통신탑까지 이어진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르면 도솔봉 턱밑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 미황사를 빠져나와 송지면 마봉리에서 도솔암 이정표를 따른다. 마련마을을 지나 통신탑 아래 차를 세워두고 짙은 숲길로 20~30분 걸어가면 도솔천이 열리듯 문득 도솔암이 바위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암자는 암봉 사이에 돌을 차곡차곡 쌓아 평평하게 만든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아슬아슬한 벼랑에 세워진 암자라 마당은 손바닥만 하지만 조망은 더 없이 좋다. 남쪽 정면으로 땅끝, 서쪽으로는 진도, 동쪽 완도다. 고개를 돌리면 해남 아래 바다 경관이 연이어 펼쳐진다.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이 이곳에서 도를 닦으며 낙조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주변 풍광이 너무 빼어나 내공이 강하지 않은 수행자라면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될 듯하다. 최근 인기 드라마인 ‘추노’를 여기서 촬영하기도 했다. 극 초반에 추노꾼 대길(장혁 분) 일행이 암자로 송태하(오지호 분)를 추격해가는 장면이다.

도솔암은 정유재란 때 패퇴하던 왜군들이 해상 퇴로가 막히자 달마산으로 달아나다 불태워버렸다. 400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버려진 채 있었는데, 얼마 전 이곳에 암자를 앉힌 이는 월정사에 있던 법조 스님이다. 2002년 법조 스님은 불자들과 기와·자재 등을 져 날라 한 달 만에 법당을 완성했던 것이다.


▲ 1 바위 병풍을 이룬 달마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미황사. 2 미황사 대웅보전의 주춧돌엔 게·거북·물고기 등 바다 생물이 새겨져 있다.

숙식>> 미황사 주변엔 숙식할 곳이 없다. 미황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사찰예절, 참선, 차 마시기, 울력, 산행 등으로 짜여 있다. 1박2일 5만 원. 미황사 061-533-3521, www.mihwangsa.com


땅끝마을

한반도 남단에 서서 만끽하는 봄 풍경


해남 땅끝은 백두산의 맑은 정기가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을 거쳐 ‘땅끝기맥’으로 내려와 바다로 잦아드는 극적인 장면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 끝에 서서 재기의 의지를 다지고,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많이들 찾는다.

갈두산(156m) 정상에 서 있는 39.5m 높이의 땅끝전망대(입장료 어른 1,000원, 어린이 500원)에 오르면 푸른 바다와 섬들이 두 눈에 가득 들어온다. 겨울 해풍 한 올에 봄 냄새가 묻어 있는 땅끝. 백두대간에서 호남정맥으로 뻗어내려 길게 길게 이어져 오던 산줄기가 함몰하고 바다가 시작되는 거기에서 눈을 들어 수평선을 바라보면 흑일·백일·어룡·장구·노화·소안도, 그리고 고산 윤선도의 풍류가 숨쉬는 보길도…. 날씨가 맑고 해무가 없는 날엔 저 멀리 추자도와 제주도도 볼 수 있다.

갈두봉 아랫도리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의 갯바위엔 땅끝기념비가 있다. 땅끝전망대에서 조금 가파른 산길로 내려갔다 올라올 수도 있지만, 만약 일행 중에 노약자가 있다면 땅끝마을 갈두리 선착장에서 땅끝기념탑까지 이어진 해안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아니면 땅끝마을에서 모노레일(왕복입장료 성인 4,000원, 청소년 3,000원, 어린이 2,000원)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 1 땅끝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땅끝마을 전경. 2 일출 명소로 유명한 땅끝마을 갈두선착장 앞의 맴섬. 매년 2월과 10월에 각각 5~6일 정도만 바위 사이로 솟는 일출을 볼 수 있다. 3 육지의 남쪽 끝에서 다도해를 조망할 수 있는 땅끝전망대.

땅끝 해안산책로는 제법 운치 있는 길이다. 예전에 해안경비병들이 순찰을 다니면서 생긴 오솔길을 넓혔는데, 경사가 거의 없는 편이라 노인은 물론 아이들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특히 땅끝마을에서 하룻밤 묵었을 경우, 아침에 산책 삼아 땅끝기념탑까지 다녀오면 좋다.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걷는 맛이 최고다. 땅끝마을에서 땅끝기념탑까지는 왕복 30~40분쯤 걸린다. 전망대까지 한 바퀴 도는 땅끝마을~땅끝탑~땅끝전망대~사거리갈림길~자갈밭삼거리~땅끝탑~땅끝마을 코스는 1시간 소요.

한 쌍의 매미를 닮았다는 맴섬 구경도 빼놓을 수 없다. 땅끝마을 선착장 앞바다에 떠 있는 맴섬은 유명한 일출 명소. 그렇지만 폭 5m 남짓한 두 개의 갯바위 사이로 해가 뜨는 광경은 1년에 딱 두 번만 볼 수 있는 진귀한 장면이다. 2월(13~18일)과 10월(23~28일)에 각각 5~6일 정도만 볼 수 있다. 지구의 공전 때문에 해 뜨는 위치가 조금씩 바뀌기 때문이다. 땅끝마을 홈페이지 www.openland.or.kr

시간이 허락한다면 바다 건너 보길도에 다녀오지 않을 수 없다. 땅끝마을 갈두선착장에서 파도를 헤치고 1시간쯤 가면 고산 윤선도가 말년을 보낸 보길도다. 고산은 이 섬에서 자연과 한몸이 된 어부의 생활을 아름답게 풀어낸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고산이 풍류를 즐겼던 세연정 앞 연못에서 ‘어부사시사’ 시상을 다듬었던 부용동까지 이어지는 3km쯤의 동백길도 좋다. 보길도로 직접 가는 배편은 하루 3회(08:20, 12:30, 14:30). 요금은 어른 8,200원. 여객선터미널 061-535-4268

땅끝마을에서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4km쯤 달리면 땅끝해양사박물관(061-535-2110)을 만날 수 있다. 2002년 폐교된 송호초등학교 통호분교 자리에 건립된 이 박물관엔 각종 어패류와 박제된 바닷고기와 화석 그리고 곤충류, 파충류, 척추동물 등 모두 2만5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입장료는 어른 3,0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 061-535-2110


숙식>> 땅끝마을에 갯마을민박(061-533-9153), 솔밭민박(061-535-4937), 땅끝민박(061-533-6389), 하얀집 모텔(061-534-3223), 땅끝푸른모텔(061-534-6677), 전망대민박(061-534-0049), 비치모텔(061-534-1002) 등 숙박업소가 많다. 숙박비는 2인 1실 기준 3만 원 내외. 땅끝마을에서 승용차로 5분 정도 거리의 송호해수욕장에도 땅끝관광호텔(061-535-1000) 등 숙박업소가 여럿 있다.

땅끝동산회관(061-532-3004), 갈매기둥지(061-534-9192), 땅끝바다횟집(061-534-6422) 등 싱싱한 활어회를 맛볼 수 있는 횟집을 비롯해 일반 가정식 백반을 차리는 식당 30여 개가 성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