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송철규 교수의 중국 고전문학_17

醉月 2010. 12. 23. 08:44

조강지처의 눈물 중국판 ‘여자의 일생’ 비파기

▲ 일러스트 이철원
사랑은 문학과 예술의 영원한 주제이다. 중국의 희곡도 전통적으로 속문학(俗文學), 즉 대중문학이었기 때문에 다루는 주제 역시 사랑 이야기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주인공은 대부분 재자가인(才子佳人), 즉 선비와 미녀이고 결말은 언제나 대단원(大團圓), 즉 해피엔딩으로 처리한다. 이처럼 도식적인 설정 때문에 중국의 고전 문학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봉건시대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그다지 흠잡을 일도 아니다. 그중에서도 조강지처를 저버린 매정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 고전희곡과 소설의 단골 주제이다. 이 분야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비파기(琵琶記)’이다.
   
   ‘비파기’는 원 말의 남희 작품이다. 중국의 남방계 희곡을 뜻하는 남희(南戱)라는 희극 형식은 처음에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에서만 성행하다가 점차 강서성과 안휘성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었고 이에 영향을 받아 여러 새로운 가락(腔調)이 생겨났다. 해염강(海鹽腔), 여요강(餘姚腔), 익양강(?陽腔), 곤산강(崑山腔) 등이 바로 그것이다. 명대에 이르면 남희는 새로운 발전을 이룬다. 즉 전국을 무대로 한 희극 형식인 ‘전기(傳奇·소설에 속하는 당 전기와는 다름)’로 발돋움한 것이다. 결국 ‘명 전기’는 남희의 기초 위에서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원작은 ‘조정녀채이랑’
   
   ‘비파기’의 작가는 원 말의 고명이다. 고명(高明·1305~1359?)의 자는 측성(則成)이고 호는 채근도인(菜根道人)이며 온주(溫州·지금의 절강성 서안瑞安) 사람이었다. 마흔이 넘어 진사에 합격한 후 항주 등지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노년에 절강성 영파(寧波) 부근에 은거하면서 희극 창작에 전념하였다. ‘비파기’는 그때 쓴 작품이다. ‘비파기’의 내용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로서 오랫동안 민간에서 전해지던 희문(戱文·남희의 다른 용어) ‘조정녀채이랑(趙貞女蔡二郞)’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동한(東漢·25~220) 말년의 문인으로서 동탁을 위해 눈물을 보였다가 모함을 받아 죽었던 채옹(蔡邕)의 일생을 다루었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을 뿐 줄거리는 그의 생애와 무관하다. ‘조정녀채이랑’에서 조정녀는 과거를 위해 집을 떠난 남편 채이랑, 즉 채백개(蔡伯口皆)를 대신하여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다가 가뭄으로 돌아가시자 비파를 연주하여 구걸을 하면서 남편을 찾아 서울로 올라온다. 채백개는 자신을 찾아온 조정녀를 외면하며 오히려 말발굽으로 짓밟아 조정녀를 죽인다. 그러자 하늘이 노하여 번개를 쳐서 채백개를 죽임으로써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해피엔딩으로 뒤바뀐 결말
   
   그런데 ‘비파기’에서는 이런 비극적 결말이 사라지고 대단원의 결말로 바뀐다. 진류(陳留) 지방에 살던 채백개는 신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분부를 받들어 서울에 가 과거에 응시하여 단번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조정의 승상이던 우씨(牛氏)는 그런 그를 사위 삼으려 하였다. 채백개는 처음에 강경하게 반대하였으나 황제와 우씨의 적극적인 권유로 결국 우씨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마음은 늘 고향에 가 있었다. 한편 그즈음 고향에서는 대기근이 밀어닥쳤다. 채백개의 처 조오낭(趙五娘)은 자신은 술찌꺼기(糟糠)나 들풀을 뜯어먹으면서도, 시부모에게는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을 모두 팔아 음식을 마련해 공양하였다. 이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시부모는 모두 굶어죽고 말았다. 조오낭은 명주치마에 흙을 담아 날라서 시부모를 매장한 후, 여도사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서울로 남편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녀는 시부모의 영정을 직접 그려 몸에 지니고 여정 내내 비파를 타며 구걸을 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미타사(彌陀寺) 법회에 참가하였다가 시부모의 영정을 불전에 바친다. 때마침 미타사를 찾았던 채백개가 부모의 영정을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가 서재에 걸어놓는다. 거리를 헤매던 조오낭은 우연히 우승상의 집에 들어가 비파를 타다가 우씨 부인(즉 채백개의 둘째부인)의 현숙함을 보고 그녀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한다. 우씨 부인은 채백개와 조오낭의 만남을 위해 신중한 계획을 세운다. 혹 채백개가 조오낭을 몰라볼까 염려하여 조오낭으로 하여금 서재의 영정 위에 시를 적도록 한다. 집으로 돌아온 채백개는 영정 위의 시를 보게 되고 결국 둘은 재회한다. 조오낭에게 사정을 들은 채백개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고 우승상의 동의를 얻는다. 그는 조오낭과 우씨 부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의 묘소 곁을 지킨다. 후에 황제가 채씨 가문을 표창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위상 추락한 선비들 작가 전업
   
   두말할 나위 없이 작품 속에서 제일 감동을 주는 사람은 조오낭이다. 말 그대로 ‘조강지처’였다. 그녀는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시부모를 공경하며 사랑에 충실하였다. 먹을 것 없고 가진 것 없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음식을 구해 시부모에게 드리기도 하였다. 한편 채백개의 형상은 원작인 ‘조정녀채이랑’에 비해 크게 변화되었다. 그가 우씨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상황이 불가피하였다는 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서울에서 우씨 부인을 맞이한 뒤에도 언제나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고 조강지처를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본부인인 조오낭을 위해 깊이 배려하고 순순히 둘째부인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는 우씨 부인의 모습 또한 이채롭다. 이처럼 원작과 크게 변화된 모습은 작가층과 시대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조정녀채이랑’이 나온 송대는 중국 봉건시대를 통틀어 선비의 사회적 지위가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후 조강지처를 버리고 변심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조정녀채이랑’에서는 이처럼 변심한 선비들을 비판하는 민간의 의지가 반영되었던 것이다. 작가 미상이지만 ‘조정녀채이랑’의 작가도 선비가 아닌 민간의 ‘생계형 작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몽골족이 통치했던 원대로 넘어오면 한동안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선비들의 위상이 급격히 낮아졌고 여기에 민족적 차별까지 더해져 선비들이 더 이상 사회적 강자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속문학을 하대하던 선비들이 직접 속문학의 창작자로 나서게 되었고 ‘비파기’ 역시 선비인 고명이 쓴 작품인 것이다. 그 결과 작품 속 채백개의 형상이 크게 변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봉건시대에는 시기와 질투 없이 일부종사(一夫從事)하는 것이 여성의 미덕이었기 때문에 조오낭과 우씨 부인과 같은 형상이 창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고 힘든 삶을 이겨내고자 애쓰는 조오낭의 모습은 매우 인상 깊다. 특별히 ‘조강자염(糟糠自厭)’이란 이름의 제21출(出·장場)이 감동적이다. 조오낭은 자신을 쌀겨에, 그리고 채백개를 쌀에 비유하였다. 그녀의 노래를 한 번 들어보자.
   
   
   쌀겨와 쌀은, 본래 서로 의지하였으나, 그 누가 키로 까불러 두 길 가게 하였는가? 하나는 천해지고 하나는 귀해짐이, 마치 나와 그대 같아서, 영원토록 다시 볼 날 없으리라. 지아비여, 당신은 쌀이라, 쌀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구려. 이내 몸은 쌀겨라, 어떻게 쌀겨로 배고픔을 채울 수 있단 말인가? 그대 집을 나갔으니, 나 혼자 부모님을 어찌 모시란 말인가?
   
   
   쌀과 쌀겨는 원래 한 몸이지만 후에는 각각이 나뉘어 하나는 귀하게 하나는 천하게 쓰임으로써 전혀 다른 운명을 맞게 된다. 이처럼 작자는 의도적으로 조오낭과 채백개의 생활을 대비함으로써 운명의 장난과 사회의 불공평을 부각시켰다.
   
   
   19세기 외국어로도 번역 
   
▲ 비파기의 저자 고명의 초상화
‘비파기’는 예술적으로도 당시의 모든 남희와 대적할 만큼 뛰어났다. 그래서 당시의 관중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세기부터는 외국어로도 번역되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 일어, 라틴어 등 번역본이 20여종에 이른다.
   
   ‘원대 4대 전기(傳奇)’의 하나인 ‘형차기(荊釵記·가시나무 비녀)’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작품이다. 여주인공인 전옥련(錢玉蓮)은 지역의 갑부인 손여권(孫汝權)의 구혼을 거절하고 온주 지방의 가난한 선비 왕십붕(王十朋)과 결혼하였다. 결혼 예물이라곤 가시나무로 만든 비녀가 고작이었다. 후에 왕십붕은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재상인 만사(萬俟)가 그를 불러 사위로 삼으려 하자 왕십붕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 일로 그는 관직에서 강등되었고 오지로 발령을 받았다. 손여권은 우연히 얻은 왕십붕의 편지를 전옥련과의 결혼 포기각서로 조작하여 전옥련을 압박한다. 재물에 눈이 먼 전옥련의 계모도 손여권과의 재가를 강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옥련은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강물에 투신하지만 다행히 구출된다. 그 후 몇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왕십붕은 결국 옥련과 재회하여 대단원을 이룬다. 이전의 희곡에서는 변심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단골로 삼았다. 그런데 ‘형차기’에서는 부귀영화를 얻은 후에도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은 선비의 형상을 창조함으로써 독자와 관객의 이목을 새롭게 하였다.
   
   중국에서는 변심하여 조강지처를 저버린 남자를 일컬어 ‘진세미(陳世美)’라고 부른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세미는 ‘찰미안(金則美案)’이라는 희곡의 주인공이다. 진세미는 가난 속에서도 아내인 진향련(秦香蓮)과 행복하게 생활한다. 그런데 10년 동안 시험 준비에 매달린 끝에 서울로 올라가 장원급제하고는 인종(仁宗)에 의해 부마(駙馬)로 책봉된다. 진향련은 진세미로부터 소식이 없자 서울로 향한다. 권력의 맛을 본 진세미는 진향련을 보자 그녀를 외면하고 한밤중에 한기(韓琪)를 보내 그녀를 없애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한기는 차마 그녀를 해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일로 진향련은 살해범으로 오인되어 감옥에 갇힌다. 진세미는 진향련을 국경으로 보내도록 꾸민 뒤 도중에 사람을 보내 그녀를 없애려 한다. 그러나 다행히 전소(展昭)에게 구출된다. 이 사건을 맡게된 포청천, 즉 포증(包拯)은 진세미의 소행임을 알면서도 물증이 없어 고민한다. 한편 진세미는 일부러 진향련을 집으로 불러 두 아들을 통해 결혼 포기각서에 도장을 찍을 것을 강요한다. 전소는 진세미의 고향에 가 진세미와 진향련이 부부임을 증언해 줄 기씨(祺氏) 부부를 데려오던 중 진세미가 보낸 자객이 이들 부부를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포증은 여기서 물증을 확보하여 진세미를 처단하려 한다. 결국 포증은 공주와 태후(太后)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진세미를 단두대에 올린다.
   
   
   명작 ‘새비파’로 이어져
   
   그런데 최근에 통더룬(童德倫)이라는 사람이 10년 동안 각종 자료를 조사하여 ‘진년곡비사(陳年谷秘史)’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청 강희(康熙) 연간(1662~1722)에 진년곡이라는 사람이 귀주(貴州)의 포정사(布政使·지금의 성장省長에 해당)가 되었다. 그러자 동향의 선비인 구몽린(仇夢麟) 등이 관직을 부탁하러 진년곡을 찾아갔다. 그러나 청렴한 진년곡은 그들의 의도를 알고 정중히 거절하였다. 예전에 자신의 도움을 받았던 진년곡에게 거절을 당하자 구몽린은 크게 실망하고 불만을 품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비파기’ 공연을 보고 영감을 받아 ‘새비파(賽琵琶)’란 희곡을 지어 남녀 주인공을 진세미(진년곡의 호가 세미 또는 숙미熟美였다고 함)와 진향련(진년곡의 아내·원래는 형련馨蓮이었다고 함)으로 하였다. 작품을 통해서 진년곡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구몽린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진년곡이 이미 돈을 보내 그의 집을 새롭게 지어주고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으로 많은 책을 보냈음을 알게 된다. 이로써 구몽린은 자신의 속좁음을 후회했지만 ‘새비파’는 이후 크게 유행하였고, 가경(嘉慶) 연간(1796~1820)에 ‘찰미안’으로 새롭게 개편되었다. 결국 구몽린의 뒤늦은 후회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영원히 남아 진세미를 영원한 비판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현실 속에서 진년곡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귀주 지방을 잘 다스려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귀주 지방에서는 ‘찰미안’의 공연을 금지하였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진년곡은 둘째부인인 진형련과 백년해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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