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이철원 |
‘비파기’는 원 말의 남희 작품이다. 중국의 남방계 희곡을 뜻하는 남희(南戱)라는 희극 형식은 처음에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에서만 성행하다가 점차 강서성과 안휘성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었고 이에 영향을 받아 여러 새로운 가락(腔調)이 생겨났다. 해염강(海鹽腔), 여요강(餘姚腔), 익양강(?陽腔), 곤산강(崑山腔) 등이 바로 그것이다. 명대에 이르면 남희는 새로운 발전을 이룬다. 즉 전국을 무대로 한 희극 형식인 ‘전기(傳奇·소설에 속하는 당 전기와는 다름)’로 발돋움한 것이다. 결국 ‘명 전기’는 남희의 기초 위에서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원작은 ‘조정녀채이랑’
‘비파기’의 작가는 원 말의 고명이다. 고명(高明·1305~1359?)의 자는 측성(則成)이고 호는 채근도인(菜根道人)이며 온주(溫州·지금의 절강성 서안瑞安) 사람이었다. 마흔이 넘어 진사에 합격한 후 항주 등지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노년에 절강성 영파(寧波) 부근에 은거하면서 희극 창작에 전념하였다. ‘비파기’는 그때 쓴 작품이다. ‘비파기’의 내용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로서 오랫동안 민간에서 전해지던 희문(戱文·남희의 다른 용어) ‘조정녀채이랑(趙貞女蔡二郞)’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동한(東漢·25~220) 말년의 문인으로서 동탁을 위해 눈물을 보였다가 모함을 받아 죽었던 채옹(蔡邕)의 일생을 다루었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을 뿐 줄거리는 그의 생애와 무관하다. ‘조정녀채이랑’에서 조정녀는 과거를 위해 집을 떠난 남편 채이랑, 즉 채백개(蔡伯口皆)를 대신하여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다가 가뭄으로 돌아가시자 비파를 연주하여 구걸을 하면서 남편을 찾아 서울로 올라온다. 채백개는 자신을 찾아온 조정녀를 외면하며 오히려 말발굽으로 짓밟아 조정녀를 죽인다. 그러자 하늘이 노하여 번개를 쳐서 채백개를 죽임으로써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해피엔딩으로 뒤바뀐 결말
그런데 ‘비파기’에서는 이런 비극적 결말이 사라지고 대단원의 결말로 바뀐다. 진류(陳留) 지방에 살던 채백개는 신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분부를 받들어 서울에 가 과거에 응시하여 단번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조정의 승상이던 우씨(牛氏)는 그런 그를 사위 삼으려 하였다. 채백개는 처음에 강경하게 반대하였으나 황제와 우씨의 적극적인 권유로 결국 우씨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마음은 늘 고향에 가 있었다. 한편 그즈음 고향에서는 대기근이 밀어닥쳤다. 채백개의 처 조오낭(趙五娘)은 자신은 술찌꺼기(糟糠)나 들풀을 뜯어먹으면서도, 시부모에게는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을 모두 팔아 음식을 마련해 공양하였다. 이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시부모는 모두 굶어죽고 말았다. 조오낭은 명주치마에 흙을 담아 날라서 시부모를 매장한 후, 여도사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서울로 남편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녀는 시부모의 영정을 직접 그려 몸에 지니고 여정 내내 비파를 타며 구걸을 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미타사(彌陀寺) 법회에 참가하였다가 시부모의 영정을 불전에 바친다. 때마침 미타사를 찾았던 채백개가 부모의 영정을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가 서재에 걸어놓는다. 거리를 헤매던 조오낭은 우연히 우승상의 집에 들어가 비파를 타다가 우씨 부인(즉 채백개의 둘째부인)의 현숙함을 보고 그녀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한다. 우씨 부인은 채백개와 조오낭의 만남을 위해 신중한 계획을 세운다. 혹 채백개가 조오낭을 몰라볼까 염려하여 조오낭으로 하여금 서재의 영정 위에 시를 적도록 한다. 집으로 돌아온 채백개는 영정 위의 시를 보게 되고 결국 둘은 재회한다. 조오낭에게 사정을 들은 채백개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고 우승상의 동의를 얻는다. 그는 조오낭과 우씨 부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의 묘소 곁을 지킨다. 후에 황제가 채씨 가문을 표창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위상 추락한 선비들 작가 전업
두말할 나위 없이 작품 속에서 제일 감동을 주는 사람은 조오낭이다. 말 그대로 ‘조강지처’였다. 그녀는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시부모를 공경하며 사랑에 충실하였다. 먹을 것 없고 가진 것 없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음식을 구해 시부모에게 드리기도 하였다. 한편 채백개의 형상은 원작인 ‘조정녀채이랑’에 비해 크게 변화되었다. 그가 우씨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상황이 불가피하였다는 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서울에서 우씨 부인을 맞이한 뒤에도 언제나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고 조강지처를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본부인인 조오낭을 위해 깊이 배려하고 순순히 둘째부인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는 우씨 부인의 모습 또한 이채롭다. 이처럼 원작과 크게 변화된 모습은 작가층과 시대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조정녀채이랑’이 나온 송대는 중국 봉건시대를 통틀어 선비의 사회적 지위가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후 조강지처를 버리고 변심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조정녀채이랑’에서는 이처럼 변심한 선비들을 비판하는 민간의 의지가 반영되었던 것이다. 작가 미상이지만 ‘조정녀채이랑’의 작가도 선비가 아닌 민간의 ‘생계형 작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몽골족이 통치했던 원대로 넘어오면 한동안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선비들의 위상이 급격히 낮아졌고 여기에 민족적 차별까지 더해져 선비들이 더 이상 사회적 강자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속문학을 하대하던 선비들이 직접 속문학의 창작자로 나서게 되었고 ‘비파기’ 역시 선비인 고명이 쓴 작품인 것이다. 그 결과 작품 속 채백개의 형상이 크게 변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봉건시대에는 시기와 질투 없이 일부종사(一夫從事)하는 것이 여성의 미덕이었기 때문에 조오낭과 우씨 부인과 같은 형상이 창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고 힘든 삶을 이겨내고자 애쓰는 조오낭의 모습은 매우 인상 깊다. 특별히 ‘조강자염(糟糠自厭)’이란 이름의 제21출(出·장場)이 감동적이다. 조오낭은 자신을 쌀겨에, 그리고 채백개를 쌀에 비유하였다. 그녀의 노래를 한 번 들어보자.
쌀겨와 쌀은, 본래 서로 의지하였으나, 그 누가 키로 까불러 두 길 가게 하였는가? 하나는 천해지고 하나는 귀해짐이, 마치 나와 그대 같아서, 영원토록 다시 볼 날 없으리라. 지아비여, 당신은 쌀이라, 쌀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구려. 이내 몸은 쌀겨라, 어떻게 쌀겨로 배고픔을 채울 수 있단 말인가? 그대 집을 나갔으니, 나 혼자 부모님을 어찌 모시란 말인가?
쌀과 쌀겨는 원래 한 몸이지만 후에는 각각이 나뉘어 하나는 귀하게 하나는 천하게 쓰임으로써 전혀 다른 운명을 맞게 된다. 이처럼 작자는 의도적으로 조오낭과 채백개의 생활을 대비함으로써 운명의 장난과 사회의 불공평을 부각시켰다.
19세기 외국어로도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