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확한 곡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짜릿함
이 남자들 뒤늦게 막걸리에 흠뻑 빠진 까닭은?
푸성귀 안주로도 감칠맛이 난다.
술 평론가면서 막걸리학교 교장인 필자가 이달부터 막걸리의 매력을 글로 전한다.
내가 막걸리학교를 개교했을 때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한 이들은 귀촌을 준비하거나 정년을 앞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고향에 내려가 집과 정자를 지어 술과 벗하고 싶다” “시골 가서 전원생활하면서 친구 불러 함께 막걸리를 즐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 명은 이미 귀촌해 농사를 지으면서, 구체적으로 막걸리 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있었다. 함양에서 태평농법으로 농사짓는 이는 우리 밀 누룩을 만들겠다고 했고, 임실에서 매실농장을 하는 이는 매실 막걸리를 빚겠다고 했다.
막걸리학교를 찾아온 농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는 2기 강좌에 찾아온 황성현(41)씨다. 성현씨는 경북 청도군에서 복숭아 과수원을 운영하는 귀촌한 지 5년 된 농부다. 턱수염을 길러 성격이 깐깐해 보인다. 그는 농사용 물탱크를 실은 트럭을 동대구역 주차장에 세워놓고, 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명륜동 성균관대 앞의 교육장을 찾아왔다. 그는 두 차례 강의를 들은 뒤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목발을 짚고 청도와 서울을 오가야 했다.
그는 막걸리학교 10주 강의를 모두 들은 뒤, 함께 수업을 듣던 사람들을 ‘복숭아꽃 피는 날’ 청도로 초대하겠다고 했다.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시골 마을 얘기를 동창들에게 전하면서 함께 막걸리 들이켤 날을 기약한 것이다. 복숭아꽃 피는 날 실제로 그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와 함께 막걸리학교 수업을 들은 수강생 40명 중 20명가량이 참여한 행사였다.
이서국의 왕궁터
성현씨가 사는 화양읍 백곡리는 지형이 예사롭지 않다. 청도의 옛 중심인 화양읍을 남쪽에 두고, 청도의 진산인 남산과 그 뒤편의 화악산을 바라보면서 들판에 접시처럼 앉아 있는 마을이다. 야트막하게 경사진 언덕을 넘어야 마을 들머리가 나오는데, 마을 바깥 들판에서는 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을은 들판에서 건너오는 적을 기습하기 위해 쌓은 진지처럼 여겨졌다. 그 지형이 독특해 땅에 얽힌 얘기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성현씨는 “이 마을이 이서국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라고 했다. 이서국은 한때 신라를 공격해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던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인데, 이 마을 안에 왕궁이 있었고 마을 둘레의 언덕이 백곡토성으로 불린다고 그는 전했다. 한번은 어떤 학자가 이 마을에 가짜 유물을 묻고, 수년 뒤 발굴 작업을 해 옛 이서국 유물이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증언으로 조작이 들통 나서 웃음거리가 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과 인연을 맺은 인물로 무오사화 때 참화를 입은 김일손(1464~1498)이 있다. 김일손 고택이 마을 안에 있고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다.
성현씨가 막걸리의 참맛을 깨닫게 된 것은 귀촌한 첫해인 2006년이다. 그는 대학 다닐 적부터 술을 즐겼으나 막걸리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선배들이 냉면 사발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원샷’을 강요했고, 그렇게 마신 뒤에 속이 뒤틀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귀촌한 첫해, 농사일을 배우고자 뒷집 아저씨를 따라 모내기에 나섰다. 대학교 농활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뒷집 아저씨가 모는 경운기를 타고 논으로 갔는데, 일꾼은 아저씨와 성현씨 둘뿐이었다. 그늘도 없고 눈에 띄는 사람도 없었다. 밀짚모자를 썼는데도 무논에 반사된 햇볕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뒷집 아저씨가 소주를 한 잔 권했지만, 그는 마다했다. 미지근한 맹물만 마시며 힘겹게 하루 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경운기를 탔는데 마시다 남은 막걸리 반병이 눈에 띄었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니 상하지 않은 것 같아서, 벌컥벌컥 마셨는데 그 맛이 환상적이었다. 그 순간 그는 불현듯 깨달음을 얻은 선승처럼, 막걸리 맛을 알게 됐다. 그 다음부터 그는 일할 때마다 막걸리를 챙겨 마셨다.
막걸리 DOC
성현씨의 집에 들어서자, 우리 일행을 반긴 것은 나폴리 피자였다. 그가 직접 빚은 막걸리로 반죽한 나폴레타나 피자(Napoletana pizza)다. 그는 나폴리 사람들이 나폴리 정통 피자를 다른 패스트푸드 피자와 차별화하고자 피자 DOC(농산품과 식료품 분야에서 법규로 통제하는 원산지 명칭으로 이탈리아에서는 DOC, 프랑스에서는 AOC, 유럽연합은 PDO로 표시한다)를 만든 얘기를 풀어놓았다. DOC에는 피자를 반드시 손으로 반죽할 것, 피자의 두께가 두껍지 않아서 손으로 쉽게 접을 수 있을 것, 반드시 장작 화덕을 사용해 4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바삭하면서 쫄깃하며 부드럽게 만들 것 등이 명시돼 있다. 그의 이야기는 피자와 막걸리를 넘나들었다. 한국에 많은 막걸리가 있지만, 막걸리 품질 등급 표시는 없다. 낯선 동네에서 막걸리를 접하면 어떤 게 좋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영국 위스키, 프랑스 와인, 일본 청주는 △자국산 원료 사용 △엄격한 품질 관리 △제조 공정 표준화 △품질 등급제 △고급화를 위한 연구 개발 △홍보 마케팅 등이 효과적으로 이뤄져 세계적 명품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단다. “막걸리도 그 같은 길을 가야 한다. 나폴리 사람들이 나폴리 피자를 지켰던 것처럼, 막걸리도 DOC를 만들어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성현씨는 묘한 이력을 지녔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지만, 영상 자료와 책을 통해서 요리를 독학했다. 그리고 요리를 잘할 수 있게 되자, 무림의 고수를 찾아다니듯 음식의 고수와 고장을 찾아다니면서 음식을 배웠다.
중국음식은 영화 속에 나오는 음식을 따라 만들면서 배웠다. 서울의 이름난 중국요리 학원을 다니기도 했고, 호텔 조리사들과 베이징(北京) 음식기행, 쓰촨(四川)성 음식기행 등도 다녀왔다.
터키음식은 서울 터키문화원에서 진행하는 터키 음식 강좌를 아내와 함께 수강하면서 배웠다. 문화원에서 만난 터키인이 고향으로 돌아간다기에, “당신 집에 놀러가도 되겠느냐”고 물어 방문 허락을 받았다. 마침 그 터키인의 고향 마을이 터키 대표 음식인 케밥의 본고장인 부르사(Bursa)였다. 그는 가족과 함께 부르사로 날아가, 원조 케밥 식당, 케밥 재료를 파는 상점 등을 둘러보고, 그 터키인의 어머니에게 케밥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는 음식으로 세계와 소통하고자 했다.
유럽음식도 여행을 다니면서 배웠다. 1994년, 1999년, 2000년, 2004년 유럽여행을 떠났는데, 그때마다 친구 혹은 현지인 소개로 가정집을 찾아다니면서 여러 문화권의 음식을 익혔다. 특히 2004년 가족과 함께 떠난 6개월간의 음식기행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동서양의 음식을 혼합한 작은 식당을 유럽에서 열어볼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영국 맨체스터에서 한 한식당 주인을 만나고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 식당 주인은 성현씨의 말을 듣더니 단번에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왜냐고 묻자, 한국음식을 앞세우면 손님이 안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현씨가 “맛있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음식은 유럽인에게 생소해서 호기심 많은 사람만 찾아온다는 것이다. “음식 장사는 문화 장사여서 한국음식을 앞세우려면 10년 넘게 버틸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오래 버티다보면 뭐하는 곳인가 궁금해서라도 손님이 찾아온다. 버틸 힘이 없다면 타이 레스토랑이나 베트남 음식점을 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성현씨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성현씨는 스페인의 음식점에서 3개월 정도 일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음식을 배우고자 중국집과 일식집에서 일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귀촌해 집을 지을 때 주방을 중심으로 한 건물을 지었다. 일자형 2층 건물인데, 1층에 아내와 동시에 일할 수 있는 넓은 조리대와 두 개의 개수대, 두 개의 화덕을 갖춰놓았다. 넓은 주방 공간은 거실을 겸하고 있으며, 2층에 서재와 침실이 있다. 손님이 찾아오면 1층 주방 탁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음식을 함께 해서 먹는다. 막걸리 빚는 법을 배운 뒤로는 막걸리독도 주방에 마련해두었다.
“왜 막걸리 빚기를 배웠느냐”고 성현씨에게 물어보았다. “이웃과 나눠 먹을 수 있는 막걸리 한 독만 있어도 사람들을 부를 수 있습니다. 시골에 푸성귀가 많이 있으니 안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고향 들판의 곡식으로 술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입니다. 내가 수확한 곡물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 자체가 감격스러운 일이죠”라고 그는 답했다.
막걸리는 마지막 술
막걸리를 좋아하는 이들을 살펴보면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을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 경기 고양시 일산의 한 의사는 암에 걸려 술을 끊었다가 완치돼 다시 술을 마시려고 막걸리학교를 찾아왔다고 했다. 성현씨의 집을 방문한 막걸리학교 학생 중에서도 심장 수술을 해서 술을 많이 마실 수 없고, 신장이 좋지 않아 금세 피곤해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술을 끊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술을 곁들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분위기에 취해 노래 한 곡조 멋지게 부를 줄 아는 사람들이다. 사람과 어울리고자 술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건강을 생각해서 그들이 타협한 마지막 지점이 막걸리다. 막걸리는 몸에 충격을 주지 않아서 즐길 만하다는 것이다.
성현씨가 음식에 관심을 갖고 막걸리를 마시게 된 것도 건강 때문이다. 성현씨는 스물일곱 살 때 위암 판정을 받고 위 절제 수술을 받았다. 흡연과 나쁜 식습관 탓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위를 절제하고 나자 물 한 숟가락만으로도 과식한 듯 어지럽고 포만감이 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아내에게 요리하는 일을 모두 맡길 수 없었기에 음식을 스스로 해먹으면서 차츰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기왕 먹을 바에야 제대로 알고 먹고 다양하게 먹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성현씨가 요리를 배우고 음식 여행을 떠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청도로 귀향해 살면서 농가맛집 ‘냠냠’이라는 음식공간을 마련했다. 농촌진흥청의 지원을 받아 살림집과 잇대어서 음식 스튜디오를 꾸렸다. 농가맛집은 농가에서 직접 생산한 농산물과 지역의 농축산물을 식재료로 사용한다. 음식 체험, 맛 체험을 하는 공간인데, 외국요리와 제철음식을 맛보면서, 음식 얘기를 함께 나누려는 이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성현씨는 막걸리 빚기를 배우기 전까지 집을 찾아오는 손님에게 술을 사서 제공했다. 와인이나 마트에서 사온 술이었다. 하지만 술을 빚으면서 “저 집에 가면 술이 있더라, 풋고추, 오이, 날된장으로 안주를 삼으면 되니 가보자”며 부담 없이 찾아오는 사람이 늘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게 우리 농촌 문화가 아닌가. 막걸리가 있어 재미가 배가됐다. 정구지전(부추전)이나 배추전을 부쳐서 술을 나눠 먹는 분위기를 그 자신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이웃도 즐겼다. 그는 막걸리 덕분에 사람들과 소통이 쉬워지고 친근해졌다고 했다.
성현씨는 막걸리를 농촌 생활의 필수품으로 여긴다. 막걸리를 맛본 친구가 함께 온 아내더러 막걸리 빚는 법을 배우라고 종용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네가 직접 빚어라!”고 말한다. 지금 농촌에는 부부만 사는 집이 많다. 부부가 밥을 각자 챙겨 먹는 게 문화처럼 자리 잡았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 안주를 만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현씨는 주방을 여자들의 전용공간으로 남겨두지 않고, 남녀가 공유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데 막걸리가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했다.
음식번역가 많아져야
성현씨는 ‘음식번역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는 외국문학을 번역하는 이나 외국음악을 소개하는 이는 있지만 외국음식을 해석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여긴다. 사실 한국은 외국 문화를 소개하는 데 게으르면서도 지나치게 편의적이다. 한국은 외국 문학의 번역에 가치와 무게를 크게 두지 않는데, 외국 음식을 ‘번역’하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했다.
성현씨는 한국의 커피문화, 피자문화, 패밀리레스토랑 문화를 살펴보면 우스꽝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커피는 냉동건조커피가 장악하고 있다. 신선한 커피콩을 볶아서 그 맛과 향을 우려내는 게 커피인데, 한국에서는 군용물자 같은 즉석커피가 주류가 되었다. 커피에서 단맛은 부수적인데, 단맛이 아니면 커피가 아닌 것으로 여기고, 팜유로 만든 유지를 커피에 섞어 마신다. 달고 기름진 커피가 판을 치다보니, 진짜 커피 맛은 온데간데없다. 이는 2박3일 한국에 머물면서 김치를 맛본 미국인이, 미국에 돌아가 칠리소스로 배추를 버무린 뒤 코리안 김치라고 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했다.
성현씨는 피자의 보편성을 잃어버린 한국 피자에도 아쉬움을 토로한다. 피자의 반죽은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움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강력분 밀가루만으로 딱딱한 피자를 패스트푸드화해서 내는 현실이 아쉽다고 했다. 반죽을 공장에서 만들어 유통시키다보니, 피자를 구울 때 기름을 많이 쓴다. 피자 위에 얻는 토핑도 그 성격이 변질돼 있다. 피자가 햄버거처럼 비만을 부르는 좋지 않은 음식으로 취급되는 것도 성현씨가 안타까워하는 대목이다. 이는 외래 음식을 받아들이는 제대로 된 음식번역가가 부재해 비롯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성현씨가 막걸리 빚기를 배운 또 다른 이유는, 현재 짓고 있는 복숭아농사, 쌀농사와 막걸리를 서로 연계하고 싶어서다. 김치나 된장 담그듯이 쌀복숭아술을 빚고 싶단다. 그리고 ‘마심’이라는 행위를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다고도 했다.
복숭아꽃 핀 날에, 막걸리학교 동문들이 그의 집을 찾아 ‘막걸리학교 제1호 동문의 집’이라는 현판을 걸어두고 갔다. 이것을 본 이웃집 할머니나 우체부가 그 간판을 바라보며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면 그는 막걸리 한잔 건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며칠 전 막걸리학교 카페에 성현씨는 이런 글을 올렸다.
“오늘은 막걸리를 사용해 아주 프랑스다운 빵을 만들어보았습니다. 반죽에서부터 발효, 성형, 굽기까지 재미있는 실험이었습니다. 막걸리의 느낌은 깊고 진합니다. 이른바 술빵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네요. 막걸리를 재료 삼아 이러저런 시도를 해보면 머리와 손, 입에 그 무엇이 다가오겠지요. 아무튼 좋습니다. 내일 아침 식사가 준비돼 있으니”.
전설로 남은 ‘특별한 술’
막걸리학교를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양조장을 직접 경영하거나 혹은 집안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경남 하동 화개에서 양조업을 하는 이근왕씨도 그런 경우다. 나는 그분께 “매일같이 술을 빚으시는 분이 뭐 배울 게 있다고 그 먼 곳에서 막걸리학교를 찾아오셨습니까?”라고 물은 일이 있다. 그분 대답이 이랬다.
“어디 가서 막걸리 얘기를 들을 데도 없고, 함께 얘기할 데도 없어서 왔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은 보통 막걸리를 마시며 인생사나 일 이야기를 하지 막걸리 자체에 대해서 얘기하지는 않는다. 막걸리 만드는 사람들도 막걸리 제조 비법이 흘러나갈까봐서인지 막걸리 얘기를 되도록 아낀다. 그러다보니 막걸리라는 술 자체에 대해 논하고 까부는 자리란 사실 만나기 어렵다.
이근왕씨가 궁금했던 것은 막걸리 자체이기도 했지만, 막걸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의 면면이었을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편하게 친구가 되어, 막걸리가 왜 좋은데? 뭐가 부족한데?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막걸리가 될까? 하고 말을 섞을 수 있는 자리로 그는 막걸리학교의 문을 두드린 것 같다.
“대를 이을 수 있다면 하십시오”
양조업자나 양조장 가족들은 이와 비슷한 이유로 막걸리학교를 꽤 찾아온다. 막걸리학교는 5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200명이 수료했는데, 그중 양조장에 관련된 사람이 15명쯤 된다. 양조장 손자도 있고, 예비 며느리도 있었다.
그중 중대한 출발점에 선 인물이 있다. 김포금쌀 양조장을 운영하는 권이준씨다. 그이는 3기 수강생으로 막걸리학교를 들어오던 당시 막걸리 양조장을 짓는 중이라고 했다. 그 규모를 몰라 “양조장 짓는 데 돈이 얼마나 들어갑니까?” 물었더니 10억이 조금 넘는단다. 10억 넘는 돈을 들여 막걸리 공장을 짓고 있는 분이 수강료가 40만원이 안 되는 막걸리학교 강좌를 찾아와 뭘 들으려 할까, 좀 걸맞지 않은 것도 같았다.
처음 막걸리학교를 열던 내 마음은 좀 재미나고 흥겹게, 문화의 한 가지로서 우리의 술 이야기를 나눠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권이준씨처럼 인생의 중요한 출발점이나 전환점에 선 분이 많았다. 강의를 하는 내 처지에서는 조심스럽고 어깨가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학교 수강생뿐 아니라 더러 양조장을 하겠다고 내게 자문하러 오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 내가 하는 첫 번째 말은 이것이다.
“대를 이어갈 수 있으면 하십시오. 그냥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목 좋은 곳에서 다른 장사를 하시면 될 겁니다. 양조업은 세월의 힘을 견뎌내야 터를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권이준씨에게는 굳이 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나름대로 파란 많은 세월의 힘을 견뎌온 술도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권씨는 8년 전 아버지에게서 김포탁주합동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4년 전 그 양조장을 폐업하면서 막걸리 양조업을 중단했다. 폐업 당시 김포탁주합동은 매달 100만원씩 적자를 보는 형편이었다. 5명의 주주가 매달 20만원씩을 보태야 양조장이 운영될 수 있었다. 권씨는 적자를 볼 거라면 자신에게 2년 동안 경영권을 맡겨달라고 다른 주주들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양조장은 매각 결정이 났고 지분을 나눠 갖는 방식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권씨는 어떻게 하면 다시 막걸리 양조장을 할까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던 차에 막걸리 바람이 불면서, 양조장을 다시 시작하려던 그의 각오가 실행에 옮겨지게 됐다. 그는 막걸리 양조를 다시 시작하면서 좀 더 차별화된 막걸리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하여 브랜드화한 김포금쌀을 가지고 막걸리를 빚기로 하고, 술도가 이름도 ‘김포금쌀탁주’라고 짓게 됐다.
권씨가 다시 술을 빚게 된 것은 막걸리 바람 덕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업인 막걸리 양조업을 잇겠다는 집념 때문이다. 그의 집안이 견뎌온 힘은 무엇일까. 김포탁주합동을 운영했던 권씨의 부친 권종옥(83)씨를 만났다. 권종옥씨를 통해 지금은 소문으로만 남은 김포특주의 옛 명성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싸라기 술도 귀하던 시절의 찹쌀 술
김포는 경북 선산과 더불어 일찍이 약주로 명성을 얻었던 동네다. 그런데 김포에서는 약주를 더 특화시켜 특주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누가 꼽았는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팔도 명주로 김포특주, 안동 제비원소주, 한산 소곡주, 부산산성 약주, 경주법주, 마산과 목포의 정종, 개성소주, 해주 방문주, 동래 동동주가 꼽혔다. 이 중 김포특주가 곧 김포약주다.
권종옥씨의 부친인 권성규씨가 양조업을 시작한 것은 광복이 되던 1945년이다. 권성규씨는 당시 김포의 금성양조장에서 사무 일을 보다가 양조장을 인수하게 됐다. 금성양조장은 1925년에 설립됐는데, 원래 주인은 김춘원씨로 권성규씨의 처남이다. 권성규씨는 양조장을 인수하면서 양조장 이름을 하성양조장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양조업을 시작하게 됐다.
권종옥씨는 19세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양조장 일을 했다. 그는 1947년 누룩에 쓸 밀을 구매하러 개성 장에 갔던 적이 있다. 지금은 군사분계선이 지나가 김포 나루들을 이용할 수 없게 됐지만, 그 시절 그가 살던 김포군 하성면 일대에는 한강 하구의 이름난 포구가 있었고 주로 배를 타고 마포를 오갔다. 임진강과 만나는 애기봉 아래쪽 김포시 하성면 신리 마근포에서는 배를 타고 개풍군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는 일꾼들과 함께 밀 50가마를 배에 싣고 와서 그해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었다.
하성양조장에서 만든 술은 탁배기인 막걸리, 합주, 김포특주 등이었다. 1957년에는 서울 마포의 조양양조장을 인수해 보리와 밀로 소주도 만들어봤고, 그 뒤에는 주정을 사다가 희석식 소주도 만들어봤다. 이 중 김포특주는 찹쌀로 빚은 고급 약주였다.
광복이 될 무렵에 김포의 양조장에선 막걸리는 주로 싸라기 쌀로 빚었다. 막걸리라는 표현보다도 탁배기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일제 말기에 일본인들이 쌀을 공출해가는 바람에 좋은 쌀로는 탁배기를 빚을 수 없었다. 그때는 소작농이 많았고, 소작인이 수확량의 30%를, 지주가 70%를 가져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쌀이 귀했고 쌀로 빚는 술도 귀했다. 그런데 비록 “뜨물같이 멀겋고 밍밍한” 맛이지만 싸라기로 빚은 탁배기를 사람들은 “좋다며 먹었다”고 권종옥씨는 회고한다. 싸라기로 빚은 탁배기마저 맛있게 먹던 시절 찹쌀로 빚은 김포특주는 보통 술이 아니었다. 가히 특주라는 이름을 달 만했다.
탁배기는 멀겋고 탁하고 걸쭉했다. 체로 거르기 때문에 술지게미도 별로 나오지 않았다. 알코올 도수는 6도 정도 됐다. 반면 약주는 자루에 담아서 두부 짜듯이 짜는데 도수 11도로 술빛이 아주 맑고 지게미도 많이 남았다. 약주 지게미는 양조장 이웃 사람들에게 그냥 나눠줬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이 지게미를 가져다가 끓여서 먹었다.
권종옥씨는 한때 합주(合酒)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합주는 20세기 초반에 경성지방의 상류층에서 마시던 술로 막걸리와 약주의 중간 형태 술이다. 1935년에 작성된 ‘조선주조사’는 이것이 막걸리보다 희고 신맛이 덜하고 단맛과 매운맛이 강하다고 평가한다. 권씨가 합주를 만들던 방식도 약주처럼 자루에 넣고 거르는 식이었는데, 물을 좀 더 타고 걸러 도수가 약주보다는 낮고 탁배기보다는 높았다. 술빛도 탁배기보다 더 맑게 짰다. 공식적으로 합주라는 상표를 달진 않았지만 합주라는 이름으로 유통됐다.
전쟁과 경쟁에 시들어간 명성
권종옥씨가 사는 김포시 하성면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파주시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와 개풍군 정곳리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장어가 많이 잡혔다. 한겨울에 가마니에 소똥을 집어넣어 강에 빠뜨려놓았다가 끌어올려보면, 가마니에 장어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서 장어를 잡다가 물에 빠져 죽는 사고도 많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이 장어를 무척 좋아해 많이 찾았다. 광복 뒤에도 이 장어를 맛보러 서울 사람들이 마포에서 배를 타고 하성면을 많이 찾아왔다. 장어를 맛보러 오는 사람들이 술을 찾아 하성양조장의 술도 이때 많이 나갔다고 한다.
광복 뒤 권씨 집안은 하성면의 전류리 포구에서 마포까지 오가는 배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건국환과 한양환이라는 이름의 철선 2척으로, 이 배로 마포까지 술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하지만 6·25전쟁 때 철선이 폭격을 맞고 말았다. 휴전선이 생기면서는 김포 전류리 포구는 간혹 간첩이 출몰했다는 소식, 간첩으로 오인받아 죽었다는 주민들 얘기만 떠도는 곳이 됐다.
김포약주인 김포특주가 인기를 끌면서, 김포의 양조장들이 다투어 약주를 만들어 서울로 내다 팔았다. 김포약주 경쟁이 치열해지자 가격을 낮추기 위해 질 낮은 약주도 나왔다. 그러던 1970년대 초반엔가 김포약주를 유통하는 중간업자가 약주의 양을 늘리기 위해 공업용 알코올을 섞으면서 술을 맛보다가 두 명이 함께 죽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과 함께, 더 이상 쌀로 약주를 빚을 수 없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지속되면서 김포약주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하성양조장에서는 1957년에 마포의 조양양조장을 인수해 보리와 밀과 흑국으로 증류식 소주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두어 해 팔았지만 손해만 봤고, 주정을 사다가 희석식 소주를 만들어 팔기도 했지만 이것도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외상술값이 걷히지 않아 양조장이 부도가 나는 일이 벌어졌다. 어떻게든 아버지가 대표로 있는 양조장이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지 않게 해야 했다. 권종옥씨는 처남과 함께 공동출자 형식으로 아버지의 양조장을 인수해 양조장 사업을 이어가게 됐다.
그 후 1972년에 정부 시책에 따라 김포시에 있던 다섯 개 양조장, 즉 하성양조장, 백로양조장, 통진양조장, 양곡양조장, 대곶양조장이 김포탁주통합으로 통폐합됐다. 그 뒤로 1990년 초반까지 막걸리 사업은 잘 운영됐으나 2000년대 들어 적자 신세가 되면서 문을 닫게 됐다.
1925년에 지어졌다던 80평(264m2) 규모의 금성양조장 목조건물은 6·25 때 불타버리고 없다. 인민군들이 근거지가 된다고 여겨 양조장을 포함한 주변 건물들이 모두 불태워졌다. 그 뒤 새로 지어진 하성양조장 건물도 도시계획으로 지금은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1972년 김포시의 5개 양조장이 합쳐져 세워진 김포탁주통합 양조장은 새로 하성면 양택리에 자리 잡게 됐다. 그곳에 지금 김포금쌀탁조 양조장이 새 건물을 짓고 들어서 있다.
권이준씨는 할아버지 권성규씨와 아버지 권종옥씨가 하던 양조장을 가업으로 다시 살리려는 노력의 하나로 김포금쌀탁주 양조장 이름 뒤에 (구)김포탁주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권이준씨는 막걸리학교를 다니면서 두 가지에 대해서 좀 더 확고한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대기업 탁주와 맞서려면 지역 명품쌀로 빚어야
첫째는 막걸리의 차별성을 얻기 위해서 지역의 명품쌀로 막걸리를 빚어야 한다는 점이다. 서울탁주나 대기업 탁주 등과 경쟁해서 살아남는 길은 차별화인데, 그것을 위해 지역 명품쌀로 빚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단다. 물론 지금도 일반 쌀로 빚어 서울탁주나 대기업 막걸리와 가격경쟁을 벌여야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거듭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좋은 쌀로 빚은 명품 막걸리를 언젠가는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 믿고 있다.
둘째는 공장의 2층에 막걸리 빚기 체험장을 마련한 것이다. 건물 설계도에는 없었지만, 막걸리학교를 다니면서 막걸리학교 학생들이 찾아와 시음도 하고 실습도 하는 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부분을 보충했다고 한다.
권이준씨는 합동으로 하던 양조장을 폐업한 지 4년 만에 다시 김포 땅에 막걸리 양조장을 차려 술을 빚게 되면서, 아버지로부터 “술맛 좋다”는 칭찬을 들을 때 정말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고 했다. 김포금쌀 막걸리가 안정된 유통구조를 확보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빚던 김포특주와 합주도 되살려내고 싶다고 한다. 소문으로만 남았던 김포특주를 맛볼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직업별로 본 술문화
그러나 샌님 같아 보이는 금융권 사람들 앞에선 족탈불급이다.
같은 금융권 주당(酒黨)이라도 증권맨이 은행원을 압도한다.
왜 그럴까?
시인과 소설가 중에 누가 술을 더 잘 마실까. 소설가 김종광씨에게 물어보았다. 단연 시인이라고 답한다. 술을 마시면 영감을 얻을 수 있고, 그 영감이 글 쓰는 데 힘이 되기도 하는 건 시나 소설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소설가는 영감만으로 달리기에는 분량이 장거리여서 술을 많이 마시면 작업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시를 쓰고 나면 마음이 고단하고, 소설을 쓰고 나면 몸이 고단해서 술을 마시는 건 아닐까.
목수와 은행원을 견주면 누가 술을 더 잘 마실까. 왜 뜬금없이 목수와 은행원을 비교하느냐고? 내가 막걸리학교를 운영하면서 가장 눈에 띄는 직업군이 건축업과 금융권 종사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두 부류의 직업군 종사자들은 막걸리학교 6기가 진행되도록 기수마다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건축업 종사자들은 육체노동을 주로 해서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술을 가까이 두고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 곁들이는 술은 작업에 방해되지 않는 도수 낮은 술이다. 이른바 농부들이 새참으로 마시던 술과 닮았다.
물론 건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전문분야에 따라 술 마시는 양상이 또 다르다. 힘을 많이 쓰는 철근공은 소주를 선호하는 편인데, 작업할 때는 맥주를 좋아한다. 철근공은 기둥을 세우거나 바닥의 철근 구조물을 설치하는 일을 하는데, 대개 그늘 없는 뙤약볕 아래에서 작업을 한다. 자연 땀을 많이 흘린다. 그래서 일하는 중에는 갈증을 푸는 맥주를 찾는다.
반면 실내 작업이 많은 목수들은 막걸리를 좋아한다. 아침 일찍 출근길에 막걸리 두 통을 가방에 담아 와서 오전 오후 한 통씩 비우면 피로도 풀리고 힘도 솟는단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인테리어 종사자, 바이올린 만드는 악기장, 무대 설치 디자이너, 건축회사 비서 등 건축계 사람들이 막걸리학교를 찾아오는 것이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금융권이 ‘말술’인 까닭
그런데 내가 보기에 건축계 사람들을 능가하는 술꾼 집단이 은행원이다. 이들은 마치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술 앞에서 호전성을 발휘한다. 일전에 한 투자증권회사 연수원에서 강연을 하다가 설문조사를 해봤다. 지점장급 130명 정도가 모인 자리였는데, 그들 중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2명만이 손을 들었다. 폭탄주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가 ‘말’ 줄 안다고 했다. 이곳에는 금주하는 종교인도 없고, 한 잔 술에 얼굴이 발개지고 숨이 가빠지는 사람도 없단 말인가. 나로서는 신통할 따름이었다.
오히려 궁금한 것은 술을 안 마신다는 두 사람이었다. 그 둘에게 술을 마시지 않고도 지점장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어봤다. 한 사람은 그 전 해에 심장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일찍이 시인 조지훈이 주도 18단을 나누면서 최상급으로 분류한 주도 8단, 다시 말해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마실 수 없는 관주(觀酒)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로 다른 이에게 멘토 노릇을 잘하는, 언변이 좋은 인물이었다. 연수원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여직원에 따르면 뭇사람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분이었는데, 아주 잠깐 만났는데도 자신에게 기분 좋은 말 한 마디를 건네더라는 것이다. 굳이 술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풀어나갈 줄 아는, 나름의 탁월한 처세술을 지닌 사람이었다.
건설업종과 금융업종을 모두 거느린 L그룹의 연수원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연수원 관계자들도 처음에는 당연히 건설업종 사람들이 금융업종 사람들보다 술을 더 잘 마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란다. 금융업종 간부 100명이 연수원에 들어온 적이 있는데, 하룻밤에 폭탄주로 비워낸 양주병이 1인당 각 1병씩-이들은 술병을 헤아릴 때 ‘각 1병’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모두 100병이나 되더란다. 모두가 기겁할 이 전적에 건설업종 분야 사람들도 혀를 내두르더라는 것이다.
금융권 사람들은 왜 술을 잘 마실까. 막걸리학교를 다닌 40대 중반의 여자 은행원 출신 K씨와 얘기를 나눠봤다. K씨는 “세상에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없고, 마시다보면 모두가 술이 늘더라”고 했다. 그가 은행에서 일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1980년대 후반에 투자금융회사에 들어갔다가 우루과이 라운드 여파로 1992년 회사가 증권사, 은행, 종금사 등으로 분산될 때 은행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후 은행권이 통폐합되면서 투자금융사와 은행권에서 일하다 2000년대 초 퇴직했다. K씨는 직장을 옮길 때마다, 신입사원이 들어올 때마다 사발주 의식을 치렀단다. 대학생들이 신입생 환영회 때 한다는, 냉면그릇이나 밥그릇에 소주를 따라 마시게 하는 악명 높은 행사다.
은행은 창구에서 받은 돈을 1원 단위까지 똑떨어지게 정산한 뒤에야 하루 일과를 마칠 수 있다. 대리, 과장, 차장 라인을 거쳐 올라오는 결산이 맞지 않으면 틀린 부분을 찾아낼 때까지는 퇴근도 못 한다. 동그라미 하나를 잘못 찍어서 900만원이 9000만원이 되고, 현금 입출납한 돈이 어긋나는데 추적할 근거도 못 찾으면 연대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런 경우엔 실수한 창구 직원이 배상하는 돈보다 책임자급이 배상하는 돈이 더 크다. 수신이고 여신이고 잠깐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치면 실수가 생겨나고 작은 실수가 큰 손실로 이어진다.
이렇다 보니 부서장은 직원들을 언제나 잘 통솔하고 점검해야 한다. 직원들을 통솔하는 일은 업무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퇴근 후 술자리에서 긴장도 풀어주고 결속도 다져둬야 한다.
술자리에선 좌장만 쳐다보라
K씨가 언젠가는 술을 전혀 못 마시는 남자직원을 본 적이 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곤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자 그 직원은 소주 1병을 거뜬히 마시고, 후배 신입사원에게 “나도 1년 전에는 그랬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라며 술을 권하더라고 했다.
더욱이 수신은 7시, 여신은 10시에 업무가 끝나는 일이 허다해 술을 마실 일이 잦다고 했다. 회식도 많은 편인데, 목표달성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거나 캠페인으로 상금을 받을 때, 전출입과 승진 인사가 있으면 전체 회식을 하곤 한다. 전체 회식은 한 달에 보통 한두 차례 있는데, 술을 안 마실 수가 없다고 한다. 술을 거부하면 분위기를 깨기 때문이다. ‘성격이 독특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상사의 눈 밖에 나기 십상이라는 것. 물론 2차에도 데려가지 않는데 이것이 업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업무에서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도 회식 때 우정을 다진 사이에선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하고 넘어가지만, ‘회식 충성도’가 낮은 사람은 꼬투리가 잡히거나 인간적으로 무시하는 말을 듣기도 한단다. 그런 후환을 없애려면 고꾸라지고 토하더라도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회식 비용은 모두 회사의 공금으로 댄다. 은행권에서는 캠페인과 행사 실적에 따른 포상이 돈으로 내려와 부서마다 적립된 돈이 얼마씩 있다. 또 부서별로 책정된 야식비, 회의비, 문구비 등을 다 쓸 수 없어서 영수증 처리해 털어내고 비자금으로 200만~300만원씩은 여퉈둔다. 작은 금융 사고는 이 돈으로 메우기도 하지만, 대체로 부서 회식비로 사용된다. 술 마실 여비가 든든한 편이다.
같은 금융권이라 해도 업무의 성격에 따라 술을 마시는 정도가 다르다고 한다. 투자금융권 부서장 P씨에 따르면 증권사와 은행권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했다. P씨는 “가령 여름휴가 전에 사둔 주식이 휴가 갔다 오니 20%가 날아갔다면 술을 안 마실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또한 증권사는 영원한 ‘을’로 접대를 해야 하지만, 대출권을 쥔 은행권은 갑의 처지라 대접받을 일이 더 많다고 한다. 증권사는 돈을 유치하기 위해 아쉬운 소리를 하는 집단이지만, 은행권은 아쉬운 소리를 듣는 집단이라는 얘기다. 이 때문에 증권사 직원들이 훨씬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술 접대도 많이 한다는 것.
그러면서 P씨는 “은행이든 증권사든 금융권의 술문화는 극히 가부장적”이라고 했다. 술 마시러 갈 때는 언제, 어디서, 무슨 술을 마실 것인지를 모두 좌장에게 의존한다. 좌장인 행장 또는 부장이 회를 안 좋아하면 1년 내내 회를 못 먹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술자리에서는 누구보다 좌장이 즐거워야 한다. 친구들끼리 10명쯤 회식을 하면 가까이 앉은 사람끼리 삼삼오오 짝지어 대화를 나누겠지만, 금융권의 술자리에선 줄곧 좌장을 쳐다봐야 한다. 제3자가 보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비민주적이겠지만, 금융권은 손실(리스크)을 막아야 하는 조직이기에 습관적으로 몸조심을 한다. 10원 하나 안 틀리게 톱니바퀴처럼 조직이 돌아가야 하니 좌장이 만든 폭탄주는 고량주에 맥주를 섞은 것이든, 소주에 고량주를 섞은 것이든 사양 말고 받아 마셔야 한다. 술자리는 한 배를 탄 운명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자리다. 술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좌장의 기분이 좋으면 좋은 술자리였다고 여긴다.
몸이 안 받으면 가슴으로 받는다
그래도 요즘에는 금융권 술문화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외환위기 무렵엔 구조조정으로 바짝 긴장하고 조직의 위계를 잘 따라 술 못 마시는 사람도 죽기 살기로 마셨다면, 2002년 월드컵 이후엔 변화의 조짐이 생겼다는 것. 길거리 응원이라는 형태로 광장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맘껏 발산하는 경험을 갖게 된 젊은층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스포츠나 공연, 축제 관람 문화를 통해 서로 단결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따라 경기나 영화 관람으로 회식 술자리를 대신하자는 건의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부서장들도 재량권을 유연하게 행사했다. 40대 중반인 P씨는 30대 중반 시절과 비교하면 요즘은 2차 술자리가 많이 줄었고, 새벽 2~3시까지 이어지기 일쑤이던 회식도 12시 이전에 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지만 점심에 밥을 먹자고 하면 진짜 밥이지만, 저녁에 밥을 먹자고 하면 술 마시자는 뜻이라는 건 여전하단다. 점심 때 간 음식점을 저녁에 다시 가도 식단이 다르다. 요즘은 안주가 나오기 전에 소주 한두 잔씩을 비운다. 속도전을 내려 할 때-자리를 빨리 털고 일어나기 위해, 회식비를 줄이기 위해, 빨리 취하기 위해…등 이유는 각각 다르다-는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맥 폭탄주를 돌린다. 좌장이 술잔을 돌리면 “아, 제가 먼저 돌렸어야 하는데…”라며 줄줄이 술잔을 받고, 술잔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술잔을 돌린다. 10명이 모이면 소주가 됐든 소맥이 됐든 기본이 10잔, 20명이 모이면 20잔을 마시는 일이 보통이다. 빈속에 술을 마시기 불편한 사람들은 눈치껏 음식점 주인에게 밥 한 공기를 달라고 해서 먹기도 한다.
금융권 종사자와 건축업 종사자가 다들 술을 잘 마신다고 하지만 그 분위기는 판이하다. 금융권 종사자는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도 술을 마시지만 인간관계와 접대 때문에 술을 마시는 빈도가 높다. 이에 비해 회사 대표가 아니고서야 목수들은 누군가를 접대할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대개 동료들끼리 술을 마시는데, 그 술 충동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 자기 내부에 있다. 목수는 땀 흘린 자기 몸의 긴장을 풀기 위해 마시지만, 은행원은 조직이나 거래를 위해 마시는 셈이다.
금융권 사람들이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어쩌면 술 잘 마시는 사람들만이 살아남다 보니 빚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어느 보험회사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사장이 참여하는 최종면접 날 새벽에 등산을 하고 내려와 체육대회(축구, 달리기)를 하고, 조를 짜서 정해진 시간 안에 텐트를 치고 걷게 하고, 저녁을 먹으면서 반드시 폭탄주를 마시며 발표를 시켜 면접을 치른다. 반드시 폭탄주를 마시게 하는 것은 ‘유능한 영업사원이 되려면 그 정도 관문은 통과해야 한다’고 믿는 사장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굳이 폭탄주까지 마시게 한 뒤 면접을 치르는 이유를 인사담당자에게 물었다. 취한 상태에서 자기 의사를 표현할 줄 아는지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술 한잔했다고 객기를 부리거나 흐트러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취해도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한번은 술을 전혀 못하는 지원자가 폭탄주를 받더니 “몸이 받을 수 없어서 대신 가슴으로 받겠습니다”라더니 술을 셔츠 속에 부어버리더란다. 그는 당연히 합격했단다.
잔 못 돌리는 게 막걸리 매력
이쯤 되면 한국 사회에서 영업을 주로 하는 업종 종사자들에게 술 실력은 토익 점수보다 더 중요한 필수항목이 아닌가 싶다. 막걸리학교를 다닌 증권사의 P씨에게 왜 막걸리에 관심을 갖게 됐느냐고 물으니 “술문화를 좀 바꿔보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회식을 할 때면 늘 “오늘은 소주를 각 1병씩만 하자”고 맹세를 하지만, 조금만 취하면 발동이 걸려 거푸 잔을 돌리게 된다는 것.
그런데 막걸리는 잔이 커서 쉽게 돌릴 수가 없더란다. 또 소주는 잔을 돌리다 보면 곧 취기가 올라 진지한 얘기가 잘 안 되고 술이 술자리를 끌고 가는 데 비해 막걸리는 잔 돌리기에 집착하지 않다 보니 대화가 잘 이어지더라고 한다. 와인처럼 비싸지도 않고, 취하기 전에 배가 불러서 그만 마시게 되고, 그러다 보니 2차 가자는 소리도 나오지 않는단다. 이런 이유로 부서장인 P씨는 직원들과 막걸리 회식을 하고 싶지만, 그가 근무하는 여의도에선 갈 만한 막걸리주점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술도 그렇고 세상일도 그렇고, 극히 개인적인 성향이나 기질 같아 보이는 것 중에는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직에 의해, 물질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이 적지 않다. 나는, 또 당신은 왜 술을 마시는가. 무엇엔가 조종당하는 건 아닐까. 즐거워하며 마시는 술이 아니라면, 그때 마시는 술은 대체 무엇일까.
막걸리 원정대의 운악산 기슭 양조장 답사기
막걸리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이 밟는 절차가 있다. 우선 맛을 보고 싶어하고, 그 다음엔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하고, 그러고 나면 직접 빚어보고 싶어한다. 그 세 가지를 다 할 수 있어서 막걸리학교 문을 두드리는 것 같다. 오늘은 막걸리 원정대 6차 답사를 떠나는 날이다. 궁금증의 두 번째 단계, 즉 만드는 과정을 보기 위한 여행이다.
막걸리 양조장들은 좀 폐쇄적이어서 양조장 탐방이 쉽지 않다. 술이란 어두운 곳에서 혼자 익어가는 것이라 보호가 필요하므로 뭇사람으로부터 격리된 채로 지낸다. 발효되고 있는 술은 양조업자에겐 강보에 싸인 아이와 같다. 누가 보면 탈날까 조바심을 친다. 또한 비법이 새나갈까봐, 세무서나 식약청의 지적사항이 나올까봐 일반인에게 공개하기를 꺼린다.
이번에 막걸리 답사를 준비하면서 섭외 대상으로 삼은 한 양조장에서도 퇴짜를 맞았다. 한두 사람이 오는 것은 환영하지만 40명이 찾아오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그 이유도 딱히 달지 않고 그저 “사장님이 안 된다고 한다”는 통지뿐이었다. 양조장 자체가 관광지나 공개된 공간이 아니니 주인이 못 들어온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 술 기행이 활성화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저간의 사정 때문이다.
다행히 막걸리 바람이 불면서 몇몇 선구적인 양조장이 전시장과 시음장, 체험공간 등을 갖춰가고 있다. 1차 답사를 한 충북 진천의 세왕주조, 2차 답사를 한 경기 포천의 배상면주가, 3차 답사를 한 경기 안성의 정헌배인삼주가, 예산사과와인이 시음장 또는 강의장을 갖췄다. 시음장을 갖췄다는 것은 손님맞이할 준비가 돼 있다는 표시다. 2차 답사를 한 ㈜포천막걸리·포천이동막걸리·상신주가, 3차 답사를 한 충남 당진의 신평양조장, 4차 답사를 한 충남 천안의 입장탁주는 개방할 형편은 못 되지만 막걸리학교와 인연이 있어서 양조장을 개방한 경우다.
오늘 6차 답사의 일정은 탐방객을 위한 시음장과 전시장 오픈을 앞둔 경기 가평의 ㈜우리술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조장을 한 군데만 들르는 것으로는 하루 일정을 풍성하게 하기 어려워서 그 주변 양조장을 함께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술이 위치한 가평은 ‘경기 5악(운악산 화악산 관악산 감악산 송악산)’의 하나인 운악산을 사이에 두고 포천과 접해 있다. 운악산은 ‘경기도의 소금강’이라 불리는데, 가을 단풍이 좋아 10월말이면 단풍객이 줄지어 오르는 산이다. 이렇듯 산수가 좋으니 그 주변 동네들은 좋은 술을 잉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셈이다.
양조문화 새 장 여는 배상면주가
막걸리 원정의 동선(動線)은 이 운악산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잡았다. 첫 번째 방문지는 운악산 서쪽에 자리 잡은 배상면주가(경기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511)다. 1996년 설립된 배상면주가는 2002년 갤러리 산사원의 문을 열었고 최근에는 서울 시내에 연달아 5개의 미니 양조장을 만들어 새로운 막걸리 문화를 이끌고 있다. 산사원은 양조장이 단순히 술을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어내는 공간임을 보여주는 곳이다. 야외에는 소주 항아리 숙성실과 체험관을 마련해 술 테마파크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배상면주가의 배영호 대표는 1988년 강원 강릉시 남항진의 작은 약주 양조장에서 일을 시작할 무렵, 강릉의 자그마한 골동품 가게에서 새끼가 촘촘히 감겨 있는 누룩틀을 사면서 주기(酒器)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산사원 갤러리의 1층에는 양조 도구들이 전시돼 있는데, 배영호 대표가 쌈짓돈을 털어 모은 물품들이다. 갤러리에는 술 빚는 법이 적힌 고문헌들과 소주를 내리는 고리 등이 있다.
지하 1층은 술 저장고와 시음장이다. 술 시음장으로 내려서는 계단 옆에는 술빵, 술과자, 술엿, 술약과, 술장아찌 등 술지게미로 만든 가공식품들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시음대에는 다양한 술이 놓여 있다.
이 회사 연구소장 정창민씨는 다품종 소량 생산을 추구하는 것이 배상면주가의 경영철학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배상면주가는 한국에서 가장 다양한 종류의 술을 만들어내는 회사다. 정 소장이 3년 전에 헤아려본 바로는 이 회사가 만드는 술의 종류가 33개였는데, 그 뒤로는 헤아려보지 않았다고 했다. 막걸리 바람이 분 뒤로 8종류의 팔도 막걸리를 내고, 우리쌀로 빚어 술값을 150원 올렸다고 광고한 생막걸리와 살균막걸리도 출시했다. 이 술, 저 술을 시음하느라 막걸리학교 학생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배상면주가의 야외전시장에는 용량 650ℓ의 큰 항아리 390개로 미로(迷路)를 만들어놓았다. 연못 위에는 정자가 있고, 물길 위에 술잔을 띄울 수 있는 유상곡수도 설치했다. 운악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에는 누마루가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니 산사원 갤러리 뒤편으로 새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배상면주가를 있게 한 배상면(배영호 대표의 부친으로 국순당 백세주를 만들었고, 현재 배상면 주류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씨가 구상하는 양조학교 건물이라고 했다.
양조학교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 규모가 양조장 건물과 맞먹을 정도인 것도 놀라웠다. 사실 우리 양조교육은 대학에서 손놓은 지 오래된 분야다. 대학에서 발효공학을 가르치긴 하지만, 치즈나 유산균 발효, 김치나 된장 발효를 가르칠 뿐 양조발효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양조발효를 가르쳐놓아도 양조장에서 그런 사람을 뽑지 않으니 가르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걸리 바람이 불면서 양조교육 분야도 많이 달라졌다. 사회교육과정으로 대학과 공공기관이 연계된 양조과정이 생기고, 와인아카데미에서도 전통술 강좌를 접목하며, 구청에서 운영하는 여성대학이나 요리학원에서도 술 빚기 강좌를 개설하는 상황이 됐다. 당장 양조장에 취업할 만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해도 자가 양조를 하려거나 소규모 양조업을 구상하는 이들에겐 의미 있는 강좌들이다.
그런데 배상면씨가 구상하는 양조학교가 설립되어 운영된다면 양조교육은 지금과는 또 달라질 것이다. 취미로 술 빚기를 배우던 차원에서 벗어나 취업이나 창업으로 양조업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인이 가장 많이 맛본 막걸리 상신주가
배상면주가를 벗어나 운악산 북쪽에 위치한 상신주가(경기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28-5)로 향했다. 상신주가에 들어서기 전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차림은 두툼한 생삼겹살과 된장찌개, 그리고 비빔밥. 물론 막걸리와 함께였다.
음식점에서 맛본 막걸리는 포천막걸리의 이미지를 대변할 만했다. 포천에는 9개의 막걸리 양조장이 있는데, 포천막걸리의 이미지란 무엇일까. 포천막걸리는 1960년대부터 군부대에 활발하게 납품되고, 1980년대에 백운계곡이 관광지화하면서 이동갈비와 함께 인기를 얻어 그 명성을 갖게 됐다. 그 시절의 막걸리는 100% 밀가루 막걸리였다. 밀가루를 원료로 사용하기에 술이 뻑뻑하고 텁텁했다. 우리가 이날 음식점에서 맛본 막걸리도 밀가루 60%에 쌀 30% 올리고당 10% 비율로, 밀가루가 주재료였다. 밀가루 100% 막걸리보다는 깔끔하지만, 쌀 100% 막걸리보다는 묵직한 맛이었다.
상신주가는 포천내촌주조와 더불어 포천에서 뿌리가 가장 깊은 술 회사다. 1932년에 건립된 장천양조장이 1994년에 일동주조 주식회사로 바뀌고 2006년에 ㈜이가로 바뀌었다가 2008년에 상신주가가 됐다. 장천양조장을 운영했던 이진철씨의 사위가 상신주가를 운영하고 있다.
상신주가는 올 들어 진로와 손잡고 주문자상표 부착 형태로 일본 수출용 진로막걸리를 만들고 있다. 올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맛본 막걸리가 상신주가의 막걸리라고 할 만큼 많은 술을 수출했다. 우리가 양조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에도 컨테이너 트럭이 거대한 몸을 구부리며 양조장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배상면주가에선 양조장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상신주가에서는 양조장 내부를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누룩방에서는 밀가루 누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완성된 밀가루 누룩은 건조되지 않도록 흰 비닐봉지에 담겨 있었다. 전통 누룩은 단단하게 디딘 떡누룩이지만, 현재 막걸리 양조장에서 사용하는 누룩은 대부분 밀가루로 된 흩임누룩이다.
발효실에서는 술이 한창 끓고 있었다. ‘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 술의 발효과정에선 마치 불을 지펴 액체가 끓는 것처럼 기포가 올라오기 때문이다. 기포 터지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거칠게 쏟아지는 빗소리 같았다. 기포가 터질 때마다 탄산가스가 나와 발효실 안은 숨이 막힐 듯 후텁지근해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살균시설과 병입시설을 본 후 양조장 내부를 빠져나왔다. 상신주가의 잔디마당으로 나오자 시음할 술들이 두부김치와 순대, 도토리묵 등과 함께 놓여 있었다. 가든파티와 같았다. 술은 두 종류였다. 햅쌀로 빚은 막걸리와 밀가루가 주재료인 막걸리였다. 햅쌀 막걸리는 밀가루 막걸리보다 훨씬 가볍고 깔끔했다. 중년의 애주가들은 역시나 묵직한 밀가루 막걸리가 더 편하고 좋다고 했다.
막걸리학교 학생들-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20대에서 한평생 술을 친구로 삼은 60대까지-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수업시간에 술을 마셔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일 게다. 술을 가장 잘 맛본 사람이나 술을 가장 잘 마신 사람이 우등생이 되는 곳, 그곳이 바로 막걸리학교만의 묘미라고 한다. 막걸리 한 잔에 가슴 졸이며 금기의 벽을 넘던 학창시절 추억에 미소 짓기도 한다.
옛사람들도 자연 속에서 마시는 술을 높이 쳤다. 그 이유는 마셔보면 알 만하다. 상신주가 잔디마당에서 술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는데, 소리가 허공으로 퍼져나가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다. 술이 이끌어내는 얘기들이 따뜻하게 우리를 감싸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양조장 마당에서 술을 마시니 술이 떨어질 리 없었다. 누군가 산 너머로 흰 구름이 연꽃처럼 피어나는 것을 가리켰다. 구름이 좋아 운악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하루에 세 군데 양조장을 찾아가는 것은 좀 빡빡한 일정이었다. 우리는 이미 배상면주가에서 1차, 생삼겹살 음식점에서 2차, 상신주가에서 3차를 하고, 이제 낮술만으로 4차 술자리가 될 ㈜우리술을 향해 가고 있었다. 도수 약한 막걸리 원정이라서 가능한 일이지, 소주 여행이라면 이쯤에서 중단됐을 것이다.
살균탁주 지평 넓혀온 ㈜우리술
㈜우리술(경기 가평군 하면 대보리 427-3)은 운악산의 동남쪽에 있다. 운악산 주변의 물이 좋다는 것은, 주변에 생수 회사가 많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운악산 북쪽의 포천시 이동면에 4개, 가평군 하면에 2개의 생수회사가 있다. 이웃한 가평군 설악면에도 생수회사가 있다. 우리술의 경쟁력은 바로 이 물에서 나온다.
우리술은 1994년에 농주주식회사로 출범해 2000년 운악산술도가를 거쳐 2003년에 ㈜우리술로 이름이 바뀌었다. 출범 첫해인 1994년부터 살균탁주를 만들고, 2001년에는 살균탁주에 탄산을 주입하기 시작한 살균탁주 분야의 선도적인 회사다.
우리술의 박성기 대표가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줬다. 사실 상신주가와 우리술 모두 막걸리학교 동문이 운영하는 양조장이다. 상신주가 김도현 전무는 막걸리학교 3기를 수료했고, 우리술 박성기 대표는 막걸리학교 1기로 접수했던 동문이다. 하지만 박 대표는 첫날 강의만 들어오고 해외 출장을 다니느라 막걸리학교를 수료하지 못했다. 전체 수강 일정 중 3회 이상 결석하면 수료증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막걸리 양조장들이 개방적이지 않은 현실에서 동문이 양조장을 운영한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양조장 문을 열어주고 상세한 설명까지 곁들여주니 양조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우리술은 새 작업장 개장을 1주일 앞둬 분주한데도 ‘막걸리학교의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까지 입구에 붙여놓고 우리를 반겼다.
우리술은 가장 다양한 종류의 막걸리를 생산하는 업체다. 과일 막걸리와 기능성 막걸리 등 50가지가 넘는다. 15개국에 수출하고 있는데, 각 나라의 입맛에 맞는 맞춤 막걸리 생산을 꾀하고 있다. 예컨대 달콤한 맛의 과일 막걸리를 선호하는 일본 시장을 겨냥해 과일 막걸리 전용 브랜드인 ‘쥬시(Juicy)락’을 출시했다. 중국은 쌉싸래하고 진한 맛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 인삼이나 더덕 막걸리 위주로 수출한다. 우리술은 지난해 50만달러어치를 수출했고, 올해 수출액은 200만달러를 훨씬 넘을 전망.
우리술은 막걸리 시장의 유통 강자이기도 하다. 일본 내 최대 할인마트인 까르푸와 편의점 1위인 세븐일레븐에서 막걸리를 판매하고 있으며, 지난 6월엔 일본 최대 규모의 약국 유통망을 통해 일본 전역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박 대표는 우리 일행에게 쥬시락을 시음주로 내놓았다. 쥬시락은 주스와 막걸리의 만남이었고, 병과 포장도 과일음료 같았다. 박 대표는 쥬시락이 일본에서 인기를 모았던 배 막걸리의 흐름을 이어갈 신상품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1주일 뒤에 열리는 가평 자라섬 재즈페스티벌 행사용으로 재즈 막걸리를 1만병 한정 출시할 예정이라고 했다. 재즈 막걸리는 재즈를 들려주며 지금 한창 발효시키고 있다. 11월부터는 김포금쌀연구회와 계약재배를 통해 막걸리 전용 쌀 안다벼 100t을 공급받아 막걸리를 제조할 예정이란다. 안다벼는 다수확 품종인데 일반 벼보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술맛이 좋은 품종이라고 한다.
쥬시락을 맛보면서 막걸리학교의 40~50대 장년층과 20~30대 젊은 층은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막걸리에 대해 고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장년층은 “이게 어찌 막걸리냐, 주스지” 하는 반응을 보였고, 쥬시락이 한국 막걸리를 대변할까봐 우려했다. 하지만 젊은층과 여성층은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쥬시락뿐 아니라 막걸리를 처음 접하는 많은 외국인이 쥬시락 막걸리를 맛보면서 달콤하고 경쾌하고 산뜻한 저알코올 음료로 여기게 될 거라고 했다. 막걸리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 술에 대한 세대 간, 혹은 남녀 간의 의견이나 취향이 굳이 하나로 통일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호식품인 술의 세계는 다양성 그 자체를 기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술 양조장의 자동 증미기와 자동 누룩제조기를 보고 나자 하루 일정의 양조장 견학이 끝났다. 돌아오는 차 안은 아주 평화롭고 고요했다. 4차에 걸친 낮술로, 낮잠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웬걸, 서울에 도달할 무렵 잠에서 깨어난 학생들은 다시 5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함께 답사한 학생 가운데 북촌 한옥마을에서 운치 있는 막걸리 주점을 운영하는 이가 있어 절반 이상이 그 주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걸리도 술이다. 어떤 술이든 석 잔까지는 맛이 달라지니 마셔도 좋지만, 석 잔 술을 넘기면 새로운 맛을 느끼기 어려우니 술맛도 모르는 경지로 들어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한 잔 술이란 있을 수 없고, 석 잔 술은 좀 적은 듯하고, 다섯 잔은 적당하며, 일곱 잔은 지나치고, 아홉 잔에는 취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적당해야 한다.
해질 무렵 서울에 도착해 양조장에서 구입하거나 선물로 받은 술들을 양손에 들고 5차로 향하는 한 무리의 막걸리학교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술이 좋아서라기보다 사람들이 좋아서 함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술, 사람들을 순식간에 좋아하게 만드는 술 막걸리,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한지 좀 더 궁리해봐야겠다.
전주 막걸리집 순례기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꽃
막걸리 막걸리 우리나라 술 /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술
언젯적 노래인지 알 수 없으나 술자리에서 더러 듣는 노래다.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술 막걸리가 있다는 건 얼추 맞는 얘기다. 1980년 전국에 양조장이 1564개 있을 때 그중 막걸리 제조장이 1461개였다. 1990년대 들어 막걸리 양조장이 줄어들어 2007년 총 양조장 수 1425개일 때도 막걸리 양조장이 778개였다.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양조장의 절반 이상이 막걸리 양조장이고, 전국에 가장 골고루 분포한 식품회사 또한 막걸리 양조장이다.
그 막걸리 중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곳이 두 곳이다. 포천 막걸리와 전주 막걸리다. 그런데 포천 막걸리는 양조장의 이름이 높아서 유명하지만, 전주 막걸리는 막걸리 주점이 많아서 유명하다. 전주 시내에 막걸리집들이 즐비하게 모여 있는 곳으로 삼천동 골목이 있다. 삼천동 막걸리 지도에는 33곳의 막걸리집이 등장한다. 풍남중 건너편에 10곳, 삼천2동 우체국 골목에 20곳, 그리고 모퉁이공원 쪽에 3곳이 있다. 이 집들은 모두 간판에 막걸리를 크게 내세웠다. 그리고 다른 지방의 막걸리집에서는 엄두를 못낼 만큼 푸짐한 안주를 내놓는다.
전주 막걸리집은 애주가들의 순례지다. 전주 사람들도 자주 찾지만 외지 사람들도 많이 찾아온다. 막걸리집이 밀집한 삼천동 골목길에 서 있자니, 차를 세운 운전자가 다가와서 우리 일행에게 묻는다.
“어느 집이 맛있어요?”
“저 건넛집에 생선요리가 푸짐하게 나온다는데요.”
그 집에 가보라고 넌지시 훈수한다. 실은 우리도 어디로 들어갈까 망설이던 차에 먼저 들어가보라는 심사로 추천한 것이다. 막걸리학교 동문들이 버스 2대에 나눠 타고 온 전주 막걸리 여행길이었다. 막걸리학교 개교 1주년 행사차 전주 관광음식축제장에서 양조미로 술 빚기 체험 행사를 한 뒤 전주 막걸리를 맛보기 위해 삼천동 골목으로 몰려온 참이었다.
나는 여러 차례 전주 막걸리집을 들렀지만 최후까지 ‘달리지’ 못했다. 그 집에서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안주까지 맛보질 못했다는 얘기다. 전주 막걸리집의 특징은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키면 안주가 그냥 따라 나온다는 것. 그런데 어느 집은 세 주전자, 어느 집은 네 주전자까지 추가될 때마다 새로운 안주가 나온다. 그 새로운 안주의 면면을 확인하기 위해 끝까지 달려보려는 게 주당들의 목표이기도 하다.
주모가 바쁠 때 가라
자, 어느 집에 들어갈 것인가. 막상 막걸리집들 앞에 서니 망설여졌다. 간판을 봐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전체가 한 집에 들어갈까도 싶었지만, 이름난 Y막걸리집에서는 “좌석이 48석밖에 안되고, 단골손님을 받아야 한다”면서 단체손님 받기를 거절했다. 주모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번 왔다 가는 손님들을 받기 위해 단골손님의 편안한 술자리를 빼앗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주 막걸리집은 단골집을 만들어서 가면 좋겠지만, 전주에 살지 않는 한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세 주전자까지 마시려면 술 잘 마시는 ‘선수’를 한두 명 대동하고 가야 한다. 그래야 2ℓ들이 주전자 3개를 비울 수 있다. 그런데 세 주전자를 비우려면 사실 4명도 적다. 8명이 1조로 묶여야 도전해볼 만하다. 여럿이 무리를 지어야 수다도 떨고 악도 써가면서 그 많은 막걸리와 안주를 소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10명 안팎으로 무리를 지어 술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무리를 지을 때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역시 술 잘 마시는 사람이다.
첫 번째 조 15명이 들어간 음식점은 S막걸리집. 삼천동 골목에서 목도 좋고 공간도 넓어 소문난 집이었다. 그런데 S집으로 들어서니 좀 썰렁한 느낌이었다. 일반음식점처럼 식탁이 정연하거나 짜임새 있는 인테리어가 아니었다. 식탁을 이었다 붙였다 마음대로 끌고 다녀도 괜찮을 만큼 헐렁한 배치였다. 벽면엔 손님들이 휘갈긴 낙서가 가득했다. 우리는 1층 안쪽에 자리 잡고 막걸리를 시켰다.
2ℓ들이 한 주전자에 1만5000원 했다. 나는 한 주전자에 1만원하던 시절부터 출입했는데, 1만2000원을 거쳐 이제 1만5000원으로 오른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주전자만 1만5000원이고, 두 번째 주전자부터는 1만2000원이라고 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서 그런지, 손님이 들어오자 바빠진 주모는 탁자 한쪽에 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돌아섰다. 알아서 잔을 돌리라는 주문이었다. 막걸리집에 오면 주모가 좀 거칠어도 당연한 듯 받아들여야 하고, 까다롭게 격식을 따질 것도 아니라는 전주 친구의 충고가 떠올랐다. 그래도 주모가 바쁜 저녁시간에 막걸리집엘 가야 전주 사람들과 어우러져 전주의 풍류를 맛볼 수 있다고 했다.
막걸리 달라는 주문에 가장 먼저 나온 것은 큰 접시에 담긴 채소류였다. 고구마, 오이, 당근, 마늘종, 고추, 옥수수. 주모가 오전에 나와서 미리 준비하기 좋은 간식 겸 안주였다.
그런데 S집의 문제는 손님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주모와 말 한마디 건넬 사이도 없고, 술주전자만 앞에 두고 안주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고, 소문난 집이라 좀 홀대받는 느낌이 들었다.
안주는 어획량이 결정?
두 번째 조는 술을 잘 못 마시는 여성 6명으로, 작은 규모의 C막걸리집에 들어갔다. 중년 아주머니 셋이서 막걸리집을 운영하는 모양이었다. 오후 5시쯤인데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한 주전자의 막걸리가 나오고 안주는 금세 바닥을 보였지만 술주전자는 여전히 묵직했다. 애초에 전주 막걸리집의 안주를 맛보기 위해서 들어왔으므로 주모에게 술 세 주전자의 값을 치를 테니 안주를 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온 안주의 구성이 이랬다.
1차 안주로 곤이, 닭모래집, 쪽파김치, 꼬막, 마늘종, 우렁무침, 꽁치조림, 삼합, 닭고기 미역국, 번데기, 고둥. 2차 안주로 꽃게찜, 옥수수, 데친 오징어, 꽃게무침, 생굴, 골뱅이, 나물. 3차 안주로는 조기구이, 오이, 포도, 밤, 방울토마토, 두릅, 참나물무침, 홍합탕, 산낙지, 마, 참소라가 나왔다.
가만히 보니 이 집 안주들에 특징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밤, 방울토마토, 포도, 오이, 옥수수, 마, 꼬막, 고둥, 골뱅이, 다슬기, 참소라 등 겉껍질이 있어서 잘 마르지 않는 안주가 나온다는 점이었다. 보관성도 좋고, 별 요리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상차림의 종류를 늘리기에 손쉬운 것들이다. 두 번째 특징은 저렴하게 많은 분량을 구매할 수 있는 해산물이 많다는 것. 해산물은 어획량에 따라 값의 편차가 크다. 세 번째는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마늘종, 쪽파김치, 나물 등 채소류나 과일류. 안주로서의 비중은 좀 떨어지지만 구색을 맞추기 위한 배치로 여겨졌다. 네 번째 특징은 일정한 가격으로 거래되어 박리다매하기 어려운 육류는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고작 삼합 속 돼지고기, 미역국 속 닭고기, 닭모래집이 C막걸리 주점에서 나온 육류였다.
이는 경남 통영의 통술집인 일명 다찌집의 속성과 비슷하다. 통영에 가면 소주건 맥주건 1병에 1만원을 받는데, 손님은 오로지 술을 시킬 수 있을 뿐이다. 주인이 내놓는 안주는 그날 가까운 포구에서 산 싱싱한 해산물로 구성되는데, 많이 잡혀 가격이 저렴한 안주들이 오른다. 안주의 격조가 어부들의 어획량에 따라 달라지는 셈. 서해가 멀지 않은 전주도 해산물의 유통이 원활한 편이라 술안주로 해산물이 많이 오른다고 볼 수 있다.
어른, 아이가 함께 즐긴다
세 번째 조가 찾아간 D막걸리집은 첫 번째 주문한 술 한 주전자에 딸려 나온 안주가 동태찌개였다. 다른 곳에서는 두 번째나 세 번째에 나오는 중심 안주인데, 손님을 압도하려는 의도였는지 찌개가 먼저 나왔다. 그런데 이렇게 처음부터 비중 있는 요리가 나오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처음 맛본 음식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뒤따라 나오는 음식이 초라해 보일 수 있고, 자칫 중심 안주가 별것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바탕 안주로는 다슬기, 피문어조림, 소라숙회, 고구마와 옥수수, 맛보기로 주는 것 같은 홍어삼합이 나왔다. 그런데 불판을 놓고 끓인 D집의 동태찌개는 안타깝게도 인상적이지 못했다. 우선 생태찌개가 아니라 동태찌개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웠다. 맵고 짠 데다, 건져 먹을 살점도 별로 없었다. 사실 막걸리에 찌개 안주라는 점이 조금은 위험스러운 조합일 수 있다. 통상 김치찌개나 매운탕 종류를 먹을 때는 막걸리보다 소주를 더 찾는다. 짜고 매운맛과 쓴 소주가 입맛에 어울리는가보다. 그리고 술에 국물 안주라는 게 여간해서 궁합을 맞추기 어려운 조합일 것이다.
D막걸리집은 달걀 프라이를 언제든지 셀프로 해먹을 수 있다는 점이 특별했다. 그리고 두 주전자째를 시켰을 때, 다른 막걸리집에선 피날레로 나오는 간장게장비빔밥이 나왔다. 넓적한 접시에 밥을 담고 그 위에 간장게장을 얹어 내놓는데, 주모가 직접 게를 쭉쭉 찢어 밥에 비벼줬다. 짭쪼름하지만 막걸리 한 잔이면 짠맛이 금세 입안에서 사라졌다. 원래 간장게장비빔밥이 맨 나중에 나오는 이유가 있다. 술을 많이 마시다보면 묘하게도 ‘술배’가 고파온다. 그때에 먹으라고 내놓은 안주 겸 요깃거리다.
이쯤 되니 생선이나 해산물 안주가 막걸리와 궁합이 맞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적어도 전주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부둣가에 가보면 막걸리보다는 소주를 더 많이 마신다. 생선회나 탕 안주에는 소주나 청주가 어울린다고들 한다. 부둣가에는 힘깨나 쓰는 육체노동자가 많아 소주를 선호한다. 사람의 노동량과 선호하는 술의 도수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같은 해산물이라도 날것보다는 조리된 것이 막걸리와 어울리는 것은 또 뭘까. 막걸리가 소주보다는 실내용이라는 것일까.
어쨌든 D집에 들어간 세 번째 조 사람들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동태찌개에서 만족하지 못한 마음이 계속 이어졌달까. 특히 전주 막걸리집을 한두 차례 와본 사람들은 지난번에 들른 집과 안주의 내용을 자꾸만 비교하고 있었다. 그래서 D막걸리집에 들어간 사람들은 L막걸리집으로 옮기게 됐다.
L막걸리집은 해산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었다. 온 가족이 운영하는데, 가게 일을 보는 딸은 아버지가 잘 아는 선주(船主)가 있어서 그쪽을 통해 해산물을 저렴하게 공급받기에 안주가 푸짐하다고 했다. 게다가 그 딸이 내세우는 마케팅 전략은 ‘개업한 지 1년밖에 안 됐기 때문에 단골을 잡기 위해 극진한 서비스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소문난 막걸리집이나 오래된 막걸리집은 노회해서 ‘당신 같은 뜨내기손님은 제대로 대우받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L집으로 2차를 간 이들은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막걸리 두 주전자를 마시는 잠깐 사이에 청어구이, 전어구이, 생선전, 부침개, 양미리, 가오리찜, 홍합탕, 새우튀김, 병어회, 백합회, 카레가루를 쓴 삼치전, 족발, 부침개, 지진 김치가 나왔다. 전주 막걸리집을 장악한 해산물의 승리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전주 막걸리집에선 온 가족이 찾아오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L집에선 조카들을 데리고 온 이모, 그리고 외삼촌쯤 되는지 아이 셋에 어른 넷이 함께 앉아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전주 막걸리집의 안주는 막걸리잔이 놓이는 자리에 공깃밥이 놓이면 그대로 한 끼 식사가 된다. 고구마나 옥수수, 포도, 밤 따위는 디저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빠의 술안주는 아이들의 간식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자리기도 하다.
이제 네 번째 조가 들어간 막걸리집을 찾아가봤다. 이곳은 가장 성공적으로 술집을 찾아들어간 경우였다. 이미 술집의 속성을 파악한 주당파 한 분이, 미리 전주의 지인을 통해서 적합한 막걸리집을 섭외해둔 것이다. 삼천동 우체국 골목에 있는 집이 아니라 풍남중 맞은편에 있는 막걸리집이라 택시를 잡기도 애매해 10분 이상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모두 13명이 이동하는지라 가던 길에 좀 투덜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얼마나 맛있는 것을 먹는다고 다리 아프게 끌고 다니냐”는 푸념을 들어야 했다.
단골이 이끌어내는 신바람
그렇게 해서 도착한 또 다른 S막걸리집에는 전주 지인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고, 손님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주모는 부지런히 안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술집의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 13명이 들어가니 술집의 절반을 차지했고, 이들이 부어라 마셔라 소리치니 감히 다른 손님들이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들이 마셔댄 3시간 동안 다른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S막걸리집을 찾아간 사람들은 술집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을 터득했다. 그건 안주도 아니고, 술집의 유명세도 아니더라는 것이다. 답은 단골이냐 아니냐는 것, 즉 주모와 얼마나 친하냐는 것이었다. 전주 지인은 S막걸리집의 단골이었고, 그가 안내한 13명은 자연스럽게 그 집의 단골 대접을 받게 됐다. 주인이 내놓은 안주는 어느 집보다 따뜻하고 푸짐하고 정성스러워 보였다. 안주 접시를 내놓는 주인의 손길에서 신바람이 났다. 물론 주모의 활달한 성격 때문이지만, 그 활달함을 쉽게 이끌어내는 것은 단골인 전주 지인이었다.
술값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모를 신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술을 마시는 속도도 빨라지고, 주모를 수시로 불러다 술을 건네며 함께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됐다. 안주는 칼질하지 않고 찢어서 나오는, 깨를 잔뜩 얹은 김치와 두부, 묵은지 고등어찜, 밀가루를 묻혀서 찌고 양념장한 애고추, 미나리무침, 소라, 생굴, 양념 꽃게장, 삶은 달걀, 껍질째 나오는 작두콩, 밤, 찐 새우, 주꾸미, 다슬기, 해물파전, 더덕, 강게, 조개구이, 무순과 날치알, 참기름을 찍어 김에 싸먹을 수 있게 준비한 마, 미니 족발구이, 소라무침, 된장찌개, 산낙지, 게장백반비빔밥으로 이어졌다.
안주가 나올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했고, 그 환호성으로 주모를 헹가래라도 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도달한 결론은 역시 음식맛은 정성이라는 것. 그런데 단골이 될 수 없는 순례꾼의 처지에서 어떻게 주모의 정성을 끌어낼 것인가, 그게 고민거리로 남았다.
정작 전주 막걸리집에 와서 막걸리 얘기는 못했다. 몇 군데의 전주 막걸리집에서 우리가 발견한 막걸리는 전주 주조 막걸리와 임실군에서 만든 사선막걸리였다. 한 가지 추가한다면 국내산 100% 쌀막걸리와 수입산 밀막걸리를 구분해 파는 정도였다. 막걸리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기에 막걸리에 대한 평가는 하기 어려웠다. 막걸리집이 여럿이니 막걸리로 차별화를 시도하는 전주 막걸리집이 생겨도 좋을 것 같다. 전주 막걸리집의 음식만 논할 게 아니라 전주 막걸리를 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막걸리도 더 좋아질 것이다.
또 하나 배부른 푸념을 하자면, 전주 막걸리집에서는 너무 많은 안주가 나온다. 술 마신 사람들의 뱃속에서 술 한 주전자에다 안주도 그만큼이나 출렁대는 것 같아 그 양을 생각하면 겁이 난다. 하지만 맛있고 푸짐한 음식상 앞에서 신기하고 신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가장 신나는 안주는 움직이는 안주, 즉 산낙지였다. 큰 접시에 게장백반을 내와 직접 비벼주는 대목에서 주모의 손길은 고향집 어머니의 손길로 변해 있었다.
전주 막걸리집은 전주의 넉넉한 인심과 풍족한 물산을 볼 수 있는 전주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다. 전주에 가면 고향 같은 막걸리집이 많아서 행복하다.
발효과학 속 문화인류학
청소년들의 술에 대한 인상도 달라질 것이다.
2010년 10월 대학생들이 전주관광음식축제 체험장에서 직접 빚은 술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음주교육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아니, 있었을지도 모른다.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아버지로부터 조금씩 전해 들었던 것도 같다. 어른이 따라주는 술을 두 손으로 받는다, 어른과 마주 보고 마시는 게 아니라 고개를 돌리고 마셔야 한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 마시는 술은 음복주라고 해서 부담없이 마셔도 된다…. 그 정도가 음주교육의 전부였다.
대학에 들어가 신입생 환영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할 때도 술을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그 무렵 술은 관계 때문에 마시는 것이지, 맛 때문에 마시는 게 아니었다. 그 후로 더러 삶이 고달플 때, 취하지 않고서는 그 상황을 모면하기 어려울 때 술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렇게 내 몸의 일부가 됐을 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재료가 무엇인지, 하물며 막걸리와 소주의 도수가 몇 도인지조차 모르면서 그 오랜 세월 술을 마셨다.
술을 조금 알게 된 지금에 이르자 젊은 날에 진작 술에 대해 좀 배워뒀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술로 몸을 망가뜨린 사람이라면 그런 후회가 더 깊을 것이다. 성교육이나 금연교육은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다. 그에 견주어 술교육은 약물중독 차원에서 약간 언급될 뿐이다. 술이 무엇인지, 술을 어떻게 마셔야 되는지에 대한 교육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현장에선 ‘학생들이 술을 마실 수 있는 처지도 아닌데 괜히 학교가 나서서 술 얘기를 하면 호기심만 자극할 뿐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금주교육이라 해도 ‘금주교육에 공을 들이다간 자칫 우리 학교 학생들이 술을 많이 마신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 그렇다고 신발에까지 술을 부어 마신다는 대학생들을 위해 대학에서 음주 관련 교육을 하는 것도 아니다. ‘성인들인데 자기들이 알아서 해야지, 그런 것까지 학교에서 가르칠 형편이 못 된다’는 생각일 것이다.
국가 차원의 음주문화교육
술은 사회생활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물질이다. 술을 잘 못 마시면 직장생활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술자리에 한 번도 안 나가고서 사람과 사람끼리의 관계를 술술 풀어내기는 어렵다. 술에 바치는 시간과 돈, 그리고 체력 손실을 따져보면 엄청나다. 그런데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한국인의 대다수는 한두 시간짜리 음주교육도 받은 적이 없다. 고작해야 주류회사의 일방적인 광고에만 노출돼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음주교육은 언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현행 법률로는 만 19세가 넘어야 술을 마실 수 있다. 8세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대학교 1학년이 된 해의 생일이 지난 뒤에 술을 마실 수 있다.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면 1회당 100만원의 벌금을 내야 하고, 식품위생법상 미성년자에게 술을 제공하면 2개월 영업정지, 3번 위반하면 영업취소처분을 받는다. 그러니 미성년자에게는 금주교육이, 만 19세가 넘은 성년에겐 음주교육이 적절할 것이다.
음주교육은 술맛을 보면서 하는 게 효율적이다. 옛날에는 술을 마시면서 하는 음주교육이 있었다. ‘향음주례(鄕飮酒禮)’다. 중국에선 주나라 때부터, 우리는 고려시대에 행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이 집현전에 지시해 1474년 성종 5년에 완성된 ‘국조오례의’에 편재되면서 일반화했다. 음력 10월에 고을의 유지와 유생들이 향교나 서원에 모여 주연을 함께 즐기던 의례다. 주인과 손님 사이에 예절 바르게 술을 권하고, 어른을 존중하고 덕망 있는 인물을 높이며 예법과 겸양의 풍속을 북돋게 했다.
근·현대에 이르러 예법을 전달하는 음주교육은 사라졌다. 주세(酒稅)가 생기고 밀주·음주 단속이 강화되면서 대신 금주교육이나 절주교육이 생겨났다. 현재 공익 차원에서 시행되는 음주교육은 주로 알코올 중독의 폐해를 알리고 있다.
그런데 2010년 변화의 싹이 돋았다.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 마련된 것. 이 법률 제18조는 ‘국가, 지방자치단체와 제17조에 따라 설립된 단체는 건전하고 품위 있는 술 문화 조성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이에 따라 농림수산식품부는 ‘건전한 술문화교육단’을 꾸려 2010년 수능시험을 마친 고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전국 10개 지역에서 음주문화교육을 실시했다. 국가 차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것도 금주교육이 아니라 음주문화교육을 한 것은 건국 이래 처음 아닐까.
이 아이들을 어찌할꼬!
건전한 술문화교육단의 단장은 중앙대 정헌배 교수가 맡았다. 또한 음주예방교육을 담당해온 한국주류연구원,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한국대학생알코올문제예방협회가 동참했고, 한경대 우리술연구소 이종기 소장,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 정철 교수,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이문주 박사, 디아지오코리아 전 대표인 김정식 교수, 인터솔류션 김갑식 대표 등 술 관련 전문가들이 함께했다. 필자는 막걸리학교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교육단에 참여했다. 참여자들끼리 의견을 모아 ‘아름다운 삶, 책임 있는 음주문화’라는 소책자를 만들었고, 농수산물유통공사와 전국 시도교육청의 도움을 받아 고교 3년생을 대상으로 음주교육을 하게 됐다.
강연을 하러 찾아간 곳은 인천의 부평고와 대구시교육청. 2시간 강의의 첫 시간은 ‘우리 술과 우리 문화’, 둘째 시간은 ‘나를 지키는 책임 있는 음주’가 주제였다. 첫 시간은 필자가, 두 번째 시간은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나장원 연구원이 진행했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은 필자로서는 처음이었다. 성인이 아닌 학생들이라 술을 마시며 교육을 할 수도 없었다. 학생들 또한 무슨 교육을 받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나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개중에는 술에 관심이 있는 학생도 있지만, 스스로 선택한 강좌가 아니다 보니 강의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졌다.
머리를 짜낸 끝에 강사들은 최대한 그 학교의 실정에 맞는 강의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필자가 부평고에서 주목한 것은 축구부로 유명한 이 학교가 국가대표 A매치 출전 선수 최다 배출 고교라는 점이었다. 김남일, 이천수, 최태욱, 이근호, 조용형, 김정우, 김형일, 김영철, 박용호 선수 등이 모두 부평고 출신이다.
그래서 축구 얘기로 강의를 풀어나갔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 앞서 16강 진출을 기원하는 ‘대한민국 대표 막걸리 16강’ 선발대회를 치렀다는 얘기를 했다. 미국 맥주회사 버드와이저는 월드컵 공식 스폰서 회사이고, 일본 술 회사들은 월드컵 공식 후원사로 홍보활동을 폈다면서 월드컵과 술의 관계를 들려줬다. 우리 막걸리는 아직 공식후원사가 될 만큼 성장하지 않았지만, 조기 축구나 등산 뒤에 갈증 해소를 위해 마시기 좋은 ‘음료’라고도 했다. 이 대목까지는 학생들이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그런데 축구와 술의 함수관계 이야기를 지나 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술을 왜 마시는지, 술을 마실 때 왜 예절이 필요한지 따위를 얘기하는 대목에 이르자 학생들은 절반 이상 책상에 엎드리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 달성고 학생 500명가량이 모인 대구시교육청에서의 강연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동원 예비군들처럼 그저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임무를 다하고 있다는 듯했다. 이교도 앞에서 다른 종교에 대해 설교하는 하는 것 같았고, 포로들을 모아놓고 승전국의 위대함을 외치는 것과 같았다.
필자는 기업 임원, 고위공직자, 양조기술을 배우려는 사람,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 위주로 강연을 해왔다. 강의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고교생 음주교육은 이것과 차원이 다르다. 강의를 듣겠다는 의욕이 전혀 없거나 이미 주량에서 진도가 꽤 많이 나가 있는 ‘어린 고수’들이 대상이다.
연전에 개그맨 J씨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음주교육을 하려고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한 적이 있다. 그가 음주교육을 한다면 술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해도 학생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을 것이다. 학생들과 그 사이에는 이미 라포(Rapport·신뢰와 친근감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 상담이나 교육을 위한 전제가 된다)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민속학자가 현지조사를 할 때에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것도 라포 형성이다. 상대가 내 질문에 잘 대답해줄 수 있는 인간관계를 형성한 뒤라야 조사가 원활하게 이뤄진다. 강연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태를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야 한다.
‘라포’ 만들기
부평고에서 축구 얘기를 한 것도 라포를 형성하기 위해서였다. 라포가 형성됐는지는 상대의 웃음이나 눈빛 같은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필자로선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짧은 시간에 라포를 형성하기란 쉽지 않다. 이미 라포가 형성된 연예인이나 방송인에게 음주교육을 맡기면 좋겠지만 이는 1회적으로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학생들과 지속적으로 라포를 형성하기가 비교적 쉬운 사람은 누굴까. 보건교사, 동문회 선배, 지역 명사 등일 것이다. 하지만 음주교육은 친근한 공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번에 건전한 술문화교육단이 지향한 교육은 술의 유해성을 강조하려는 예방교육이 아니었다. 술의 문화와 역사, 술 제조 방법, 술이 농업과 산업에 미치는 영향, 우리 술의 정체성 등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요즘 청소년들에게 물어보면 최초의 음주 시기는 중학생 때라는 응답이 많이 나온다. 수학여행 때 과자 밑에 술병을 숨겨오고, 생수통에 소주를 담아서 선생님 몰래 마셨다는 얘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다. 부평고 학생들에게 처음 술을 마신 게 언제였냐고 물어보니 “중학교 1학년 때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마시는 걸 보고 따라 마셨다” “15살 때 형과 형 친구들하고 마셨다” “중3 생일에 친구가 권해서” “중학교 2학년 때 월드컵 축구를 보면서” 마셨다는 답이 많이 나왔다. 이처럼 청소년들은 음주를 법률로 금하는 나이부터 술에 노출돼 있다. 그런데도 청소년들이 술에 대해 가진 정보는 편협할 뿐 아니라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술에 대해 가장 궁금한 점을 적어보라고 했다. “밥처럼 먹을 수 있는 술은 없나요?” “술을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는 방법은?” “술은 왜 이렇게 맛있는가요?” 같은 좀 장난스러운 질문도 있었지만, 술의 제조방법과 기원, 종류, 효능에 대해 궁금하다는 질문이 많았다. “홍조증을 해결할 방법이 없나요?” “술을 10잔 먹으면 구토를 해요. 왜 그러죠?” “술을 많이 마시면 왜 집중력이 떨어지나요?” “술을 마시면 왜 기분이 좋아지거나 나빠지는지요?” “왜 개인에 따라 취하는 정도가 다른가요?” 등 과학적인 질문들도 해왔다.
술 문화에 대해서는 “왜 회식 때 막걸리보다는 소주를 더 마시나요?” “어머니께서 저더러 술 마실 줄 아느냐고 물으시면서 ‘술 마실 줄 모르면 사회 나가서 어쩌려고?’ 하셨는데요, 술 마시는 데도 방법이 있나요? 그냥 마시면 되는 것 아닌가요?” “올바르지 않은 술 문화가 정착된 배경은?” “소주 광고에 왜 여자 연예인이 나오나요?”라고 물었다.
술을 아끼게 하라
청소년에게 단지 술 지식을 전달하려 하면 술 강의는 실패로 끝날 공산이 크다. 건전한 술문화교육단을 꾸릴 때 ‘가장 효율적인 음주교육은 술 빚기 체험’이라는 의견이 나왔는데, 필자도 동의한다. 강당에 몇 백 명을 몰아넣고 음주교육을 한다는 게 자칫 실적 위주의 교육으로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음주교육이 이뤄지려면 20~3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일방적인 지식 전달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서너 차례의 반복교육을 해야 한다.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가 중학생을 대상으로 5차례의 음주교육 프로그램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비록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막걸리학교에서 수업을 할 때 가장 집중력이 높은 시간은 술 빚기 실습이다. 사람들은 술이 익어가면서 맛이 변하고 마침내 완성되는 것을 보고 신기해한다. 자신이 술을 만들었다는 것은 자신이 술을 창조했다는 성취감으로 이어져 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술을 아낄 줄 아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충 답이 좁혀진 걸까. 마구 술을 들이붓기 시작하는 만 19세 무렵의 청소년들에게 음주교육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 교육은 술 문화에 대한 고상한 정보와 술 빚기 체험을 통해서 이뤄진다면 더욱 효율적인 것이라고. 그리고 강사는 청소년과 친근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이제 수능을 막 치른 고3 학생들에게 술빚기 실습을 하면 어떨까. 술은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몸으로 기억하게 해주는 게 좋다. 술 빚기는 알코올을 생성하는 발효과학의 하나다. 체험을 통해 발효과학을 이해하다 보면 술의 본체를 쉽게 이해하게 된다.
또한 술은 우리 농산물로 만드는 음식이다. 논에서 거두는 쌀로, 밭에서 나는 밀과 보리로 만드는 기호식품이다. 술은 복잡한 기계가 만드는 전자제품이나 기발한 상품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밥을 짓고 누룩을 섞어 적당한 온도에 일주일쯤 놓아두면 완성되는 발효식품이라는 것을 청소년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우리 할머니들이 김치처럼 부엌에서 담그던 귀한 음식이 술이라는 것을 알리면 술에 대한 인상도 달라질 것이다. 술이 인류와 동행해온 의·식·주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술을 보는 청소년들의 시선도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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