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생과 앵앵의 첫 만남을 묘사한 그림. |
지금까지 중국의 많은 사랑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춘향전’과 비교될 수 있는 작품이 있어 소개한다. 원 잡극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왕실보의 ‘서상기(西廂記)’이다. 대략 원대 원정(元貞) 대덕(大德) 연간(1295~1307)에 쓰인 ‘서상기’는 작품의 규모만 보더라도 5본(本) 21마디(折·장場)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왕실보(王實甫·나고 죽은 해를 알 수 없음)는 대도(大都·오늘날의 베이징) 사람으로 관한경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작가였다. 일설에 의하면 이름은 덕신(德信)이고 실보는 자(字)였다고 한다. 관직 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후 전적으로 극본 창작에 매달렸다. 쓰는 극본마다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동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14종의 잡극을 썼으나 현재는 ‘파요기(破窯記)’ ‘여춘당(麗春堂)’ ‘서상기’ 등 3종만이 전한다.
당대 시인의 전기소설 ‘앵앵전’이 원작
‘서상기’의 이야기는 당대의 유명 시인이었던 원진(元)의 전기(傳奇)소설 ‘앵앵전(鶯鶯傳)’(‘회진기會眞記’라고도 함)에서 비롯되었다. 이 단편은 원진의 자전적 연애소설로 알려져 있다. 원진은 낙양 조후촌(趙後村)에서 태어났고 이웃마을인 최장촌(崔莊村)에 최소영(崔小迎)이란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둘은 어려서부터 소꿉친구로 지냈다. 원진이 8살에 아버지를 여의자 최씨 집안에서는 원진을 가족의 일원으로 대하였다. 원진은 소영 부친을 따라 낙양 시내로 옮겨 살면서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고 어여쁜 처녀로 자란 소영과 장래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원진은 과거에 급제한 뒤 당시 태자였던 위하경(韋夏卿)의 관심을 받으면서 그의 딸 위총(韋叢)과 결혼하였다. 일찍 아내를 잃고 백방으로 소영을 찾았지만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앵앵전’을 지어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이 ‘앵앵전’을 금대(金代)에 동량(董良)이 제궁조(諸宮調)로 된 ‘서상기’로 개편하였다. 제궁조는 비파나 아쟁 등의 연주에 맞춰 노래와 이야기를 섞어 진행하는 설창(說唱) 예술의 일종이다. 동량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동량은 분량도 크게 늘리고 내용도 많이 수정하였다. 즉 장생이 앵앵을 농락한 뒤 버리고 떠나는 설정을 버리고, 그녀와 더불어 행복한 미래를 위해 봉건도덕에 맞서는 사람으로 바뀌고, 결국 부부로 맺어지는 결말을 채택하였다. 이는 이민족의 유입과 봉건도덕의 풍조가 점차 옅어지는 금원대의 시대 상황과 연관이 있다.
제궁조로 된 동량의 ‘서상기’의 맥을 잇는 작품은 왕실보의 ‘서상기’다. 그래서 두 작품을 구별하기 위해 ‘동서상’과 ‘왕서상’이라고 부른다. 왕서상은 동서상의 기초 위에 쓰였기 때문에 대체적인 줄거리에는 변함이 없다. 같은 내용과 줄거리를 가졌지만 원작을 바탕으로 한 재창작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왕서상은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수준 면에서 동서상을 월등히 뛰어넘고 있다. 인물의 형상 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당대 원진의 ‘앵앵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동서상과 왕서상으로 이어졌고, 명대에 가면 다시 남곡(南曲)으로 개편되었다.
절세미인 최앵앵과 선비 장생의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