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송철규 교수의 중국 고전문학_18

醉月 2010. 12. 29. 08:37
▲ 장생과 앵앵의 첫 만남을 묘사한 그림.
‘방자전’이란 영화가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원작인 ‘춘향전’의 스토리를 바탕으로 하되 발칙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의 많은 사랑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춘향전’과 비교될 수 있는 작품이 있어 소개한다. 원 잡극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왕실보의 ‘서상기(西廂記)’이다. 대략 원대 원정(元貞) 대덕(大德) 연간(1295~1307)에 쓰인 ‘서상기’는 작품의 규모만 보더라도 5본(本) 21마디(折·장場)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왕실보(王實甫·나고 죽은 해를 알 수 없음)는 대도(大都·오늘날의 베이징) 사람으로 관한경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작가였다. 일설에 의하면 이름은 덕신(德信)이고 실보는 자(字)였다고 한다. 관직 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후 전적으로 극본 창작에 매달렸다. 쓰는 극본마다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동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14종의 잡극을 썼으나 현재는 ‘파요기(破窯記)’ ‘여춘당(麗春堂)’ ‘서상기’ 등 3종만이 전한다.
   
   
   당대 시인의 전기소설 ‘앵앵전’이 원작
   
   ‘서상기’의 이야기는 당대의 유명 시인이었던 원진(元)의 전기(傳奇)소설 ‘앵앵전(鶯鶯傳)’(‘회진기會眞記’라고도 함)에서 비롯되었다. 이 단편은 원진의 자전적 연애소설로 알려져 있다. 원진은 낙양 조후촌(趙後村)에서 태어났고 이웃마을인 최장촌(崔莊村)에 최소영(崔小迎)이란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둘은 어려서부터 소꿉친구로 지냈다. 원진이 8살에 아버지를 여의자 최씨 집안에서는 원진을 가족의 일원으로 대하였다. 원진은 소영 부친을 따라 낙양 시내로 옮겨 살면서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고 어여쁜 처녀로 자란 소영과 장래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원진은 과거에 급제한 뒤 당시 태자였던 위하경(韋夏卿)의 관심을 받으면서 그의 딸 위총(韋叢)과 결혼하였다. 일찍 아내를 잃고 백방으로 소영을 찾았지만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앵앵전’을 지어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이 ‘앵앵전’을 금대(金代)에 동량(董良)이 제궁조(諸宮調)로 된 ‘서상기’로 개편하였다. 제궁조는 비파나 아쟁 등의 연주에 맞춰 노래와 이야기를 섞어 진행하는 설창(說唱) 예술의 일종이다. 동량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동량은 분량도 크게 늘리고 내용도 많이 수정하였다. 즉 장생이 앵앵을 농락한 뒤 버리고 떠나는 설정을 버리고, 그녀와 더불어 행복한 미래를 위해 봉건도덕에 맞서는 사람으로 바뀌고, 결국 부부로 맺어지는 결말을 채택하였다. 이는 이민족의 유입과 봉건도덕의 풍조가 점차 옅어지는 금원대의 시대 상황과 연관이 있다.
   
   제궁조로 된 동량의 ‘서상기’의 맥을 잇는 작품은 왕실보의 ‘서상기’다. 그래서 두 작품을 구별하기 위해 ‘동서상’과 ‘왕서상’이라고 부른다. 왕서상은 동서상의 기초 위에 쓰였기 때문에 대체적인 줄거리에는 변함이 없다. 같은 내용과 줄거리를 가졌지만 원작을 바탕으로 한 재창작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왕서상은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수준 면에서 동서상을 월등히 뛰어넘고 있다. 인물의 형상 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당대 원진의 ‘앵앵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동서상과 왕서상으로 이어졌고, 명대에 가면 다시 남곡(南曲)으로 개편되었다.
   
   
   절세미인 최앵앵과 선비 장생의 만남
   
▲ 서상기 고서
‘서상기’의 온전한 이름은 ‘최앵앵대월서상기(崔鶯鶯待月西廂記)’이다. 이미 고인이 된 최상국(崔相國)의 딸 최앵앵이 어머니 정씨(鄭氏)와 함께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길이 좋지 않아 잠시 하중부(河中府·오늘날의 산서성 영제永濟현)에 있는 보구사(普救寺)에 머물렀는데 그때 그들의 거처가 서쪽 별채(西廂)여서 극본의 제목이 ‘서상기’가 되었다.
   
   한편 과거시험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선비 장생(張生)도 우연히 보구사에 들러 유람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장공은 시녀 홍낭(紅娘)과 함께 뜰에서 꽃구경을 하던 앵앵을 보게 되었다. 둘은 서로 눈길을 주며 호감을 보였다. 장생은 내친김에 주지스님께 부탁하여 방 하나를 얻었다. ‘아침저녁으로 경전과 역사서를 탐구한다(朝晩溫習經史)’는 것이 이유였지만, 실은 기회를 보아 앵앵에게 접근하기 위함이었다. 정 부인은 남편 최상국을 위해 대규모의 시주를 계획하였고, 장생도 이 일을 거들면서 홍낭을 붙잡고 앵앵에 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홍낭에게 호되게 당하였다. 그 후 장생은 상사병을 앓게 되었다. 시주 예식이 벌어지던 날, 장생과 앵앵은 법당에서 만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높은 산과 넓은 강에 가로막혀 있는 듯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한 채 얼굴만 서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반란군의 두목 손비호(孫飛虎)가 최상국의 딸 최앵앵이 ‘온 나라와 도시를 뒤흔들 만한(傾國傾城)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군대를 보내 보구사를 포위한 다음, 사흘 안에 앵앵을 내놓지 않으면 사람들을 해치고 절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다급해진 정 부인은 누구든지 해결책을 내는 사람에게 앵앵을 시집보내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렇게 되자 장생은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장생에게는 두확(杜確)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포관(蒲關)의 수비대장으로서 백마(白馬)장군이라는 호칭을 얻고 있었다. 장생은 재빨리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스님 한 분에게 그 편지를 주어 포위를 뚫고 백마장군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결국 백마장군의 군대가 들이닥쳤고, 손비호의 무리는 포위를 풀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일이 잘 해결되자 장생은 희희낙락하면서 앵앵과 맺어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정 부인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둘을 불러 놓고 오빠 동생하며 지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되자 두 사람 모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앵앵은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어머니가 미웠고, 장생은 너무 충격을 받아 견디지 못하고 나무에 목을 맬 생각까지 하였다. 이때 홍낭이 나섰다. 그녀는 장생에게 가야금으로 아가씨의 마음을 떠보도록 시켰다. 이윽고 밤이 되자 장생은 자신의 방에서 사랑가인 ‘봉구황(鳳求凰)’ 곡조를 탔다. 이 소리를 들은 앵앵은 밀려오는 감동을 참지 못하였다.
   
   한편, 장생은 그 일로 충격을 받아서인지 몸져눕고 말았다. 앵앵은 홍낭을 보내 장생의 병을 돌보게 하였다. 장생은 기회를 보아 앵앵에게 편지를 써서 홍낭 편에 보냈다. 답장으로 온 앵앵의 편지에는 달밤에 서쪽 별채에서 만나자는 내용의 시가 적혀 있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날 밤 장생은 담을 넘어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앵앵은 사색이 되어 홍낭과 함께 장생의 경박한 행동을 조롱하는 게 아닌가?
   
   
   ‘향단’역의 홍낭이 사랑의 메신저
   
   병중에 있던 장생은 이 일을 겪은 후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사실 앵앵은 처음부터 장생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장생을 대했을 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장생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말에 앵앵은 홍낭을 시켜 처방전을 보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지난번의 시 한 수였다. 그리고는 밤을 이용하여 홍낭과 함께 직접 장생의 숙소로 찾아갔다. 두 사람은 마침내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부부의 언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소문은 꼬리를 물어 정 부인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이에 정 부인은 홍낭을 심문하여 진상을 알아내려 하였다. 그런데 홍낭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정 부인에게 말할 자격이 없다고 밀어붙였다. 그러면서 집안의 허물을 밖으로 드러내면 최상국의 가문에 먹칠을 하게 될 뿐이라고 강변하였다. 정 부인은 홍낭이 자신의 속내를 훤히 꿰뚫는 말을 하자 어쩔 수 없이 장생과 앵앵의 관계를 묵인하였다. 그러면서도 과거시험에 합격해야만 혼인을 승낙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앵앵은 10리 밖 역사(驛舍)까지 따라가 장생을 전송하였다. 두 사람은 할 말을 잊고 헤어짐을 안타까워하였다.
   
   장생은 앵앵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단 한번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앵앵은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인편에 급히 약혼예물을 보낸 후 하루 속히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였다. 그런데 ‘다 된 밥에 재 뿌린다’고 앵앵의 사촌오빠 정항(鄭恒)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원래 앵앵과 어려서 정혼한 사이였다. 그가 하필 중요한 시기에 나타나 그녀와의 결혼을 요구하였다. 정항은 앵앵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장생이 서울에서 이미 위(衛) 상서(尙書)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정 부인은 이를 그대로 믿고 장생을 욕하며 앵앵과 정항의 혼사를 서둘렀다. 이때 마침 장생이 돌아왔다. 그의 친구 백마장군도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함께 왔다. 거짓말이 탄로 나자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정항은 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하였다. 장생과 앵앵은 수없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백년가약을 맺었다.
   
   
   조선 최초 고전희곡 ‘동상기’에 영향 미쳐
   
   연극의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가 울려 퍼진다. ‘바라건대 세상 모든 연인들이 다 부부로 맺어지기를(願普天之下有情的都成了眷屬)!’ 이것이 바로 이 작품 전체의 주제였다. 앵앵과 장생이 그토록 갈구했던 행복이 가득한 사랑과 혼인은 결국 결실을 맺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압하던 봉건 도덕도 그들의 결합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앵앵과 장생처럼 세상 모든 연인들이 봉건 도덕의 여러 장애물을 넘어 행복한 부부로 맺어지는 것이 작가의 소망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당돌하고 파격적인 견해였다.
   
   ‘서상기’의 가치는 일찍부터 알려졌다. 명대의 한 평론가는 “요즈음의 잡극과 옛날 전기를 통틀어, ‘서상기’가 천하제일이다(新雜劇·舊傳奇, 西廂記天下奪魁)”라고 말하였다. 현대의 어느 학자도 “서상기는 생명력 넘치는 인성이 생명력 없는 봉건 예교와 싸워 이긴 개선가이자 기념탑”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홍낭이란 인물 형상은 이후 중국인들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쌍방의 사이에 줄을 놓는 사람이나 남녀 사이의 중매자를 가리킬 때 ‘홍낭’이라고 하였다.
   
   특별히 현대에 들어와 월극(越劇) ‘서상기’가 중국과 북한 간의 우호협정 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시로 새롭게 창작되었다. 그래서 1953년 11월 23일 밤, 김일성과 저우언라이가 배석한 가운데 베이징 자금성 내의 화이런탕(懷仁堂)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1954년 10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주년을 기념하여 인도 총리 네루와 그의 딸 인디라 간디, 저우언라이가 참석한 가운데 역시 화이런탕에서 공연되었다. 1955년 여름에는 동독과 소련에 가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965년에는 홍콩에서 웨펑(岳楓) 감독이 동명의 영화(영어명은 ‘The West Chember’)로 제작 상영하였다. 당시 유명 배우였던 링보(凌波), 팡잉(方盈), 리징(李菁), 천옌옌(陳燕燕) 등이 주연을 맡아 열연하였다.
   
   ‘서상기’는 조선에도 영향을 끼쳐 ‘동상기’라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동상기(東廂記)’는 조선 정조 때인 1791년에 한문으로 창작된 희곡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 희곡으로 알려져 있다. 작가가 문양산인(汶陽散人)이라고 적혀 있는데, 실제 작가가 이덕무(李德懋)인지 이옥(李鈺)인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혼기(賜婚記)’라고도 하며, 왕명으로 성혼하지 못한 서울 장안의 50쌍을 맺어줄 때, 고아인 김 도령과 신 처녀가 빠져 호조판서 조정진과 선혜당상 이병모가 양쪽 부모 역을 맡아 성대한 혼사를 치러준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