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강 백리 길 - 봄 물결 타고 일렁이는 황포돛배엔 옛 사연 한가득
- 파사성|고달사지|영릉&녕릉|명성황후 생가|신륵사|여주도자기축제|목아불교박물관|여강길|
- 꽃샘추위는 지독했지만 봄은 왔다. 남한강 부드러운 한 허리 여강에도 산수유, 진달래 피고 지는 봄이 왔다. 명주실처럼 말간 봄볕 쏟아지는 계절, 황포돛배에 올라 여강이 속삭이는 옛 사연을 들으며 점점 깊어가는 강마을의 봄 정취에 흠뻑 젖어보자.
- ▲ 황포돛배를 타면 여강 주변의 풍광이 새롭게 다가온다. 신륵사 앞 나루터에서 황포돛배가 출항한다. <사진 여주군청>
강원도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영월을 지나 충청도 단양·충주 땅을 적신 뒤 경기도 여주를 휘감고 양평 두물머리에서 북한강을 만나 한강이란 이름으로 서해로 흘러든다. 이런 고을들을 지날 때마다 조양강·동강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여주에선 여강(麗江)이라는 수려한 이름을 얻었다.
경기 동부 지역인 여주는 서울에서 접근하는 데 1시간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일정을 잡기 수월하고 큰 부담도 없다. 1박2일 정도면 여강 주변을 두루 둘러볼 수 있고, 조금 서두르면 당일로도 주요 포인트 답사가 가능하다.
첫날엔 ‘여강지킴이’ 파사성에 올라 여강을 굽어본다. 조망이 좋아 여강 여행의 서막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답사는 1시간 정도 걸린다. 파사성 아래의 천서리는 막국수로 유명한 마을. 식사 때라면 당연히 여기에서 요기를 한다. 바로 앞의 이포나루는 남한강 4대 나루 중 하나였던 상징이 있는 나루다.
고달사지 산책도 제법 의미가 깊다. 화창한 봄날에 둘러보는 폐사지는 여느 계절의 그것과는 또 다른 묘한 울림이 있다. 역시 천천히 산책하는 데 1시간이면 충분하다.
이어 37번 국도를 타고 세종대교를 건너면 세종대왕이 잠들어 계신 영릉. 천천히 산책하며 조선 최고의 성왕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여러 업적을 되새겨보자. 북벌을 추진했던 효종대왕이 묻힌 녕릉도 가까이에 있다. 두 군데 모두를 둘러보는 데 1~2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신륵사는 여강만 아니라 한강변의 대표적인 절집이다. 봄볕 쏟아지는 강월헌에서의 여강 감상도 빼놓을 수 없다. 강물과 어우러진 풍치가 제법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4대 강 사업의 일환으로 공사 중이라 예전만큼 운치 있는 강변 풍광을 보긴 어렵다. 신륵사 앞 나루터에서 황포돛배도 타보자. 배 타고 감상하는 신륵사 주변 풍광이 색다르다.
신륵사 주차장 주변엔 여주세계생활도자관을 비롯해 온갖 도자기상점이 있다. 4월 24일부터 5월 9일까지 이곳에서 도자기축제가 열린다. 도자기와 관련해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다. 이 주변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게 무난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다시 한 번 신륵사까지 강변을 산책한 다음, 목아불교박물관과 명성황후 생가에 들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강길을 걷는다. 이정표가 충분하지 않고 군데군데 공사 중이라 조금 헷갈린다. 여주의 여강사랑 단체인 ‘여강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매월 둘째, 넷째 주 토요일에 정기적인 걷기행사가 있다. 여주도자기축제 기간 중인 5월 2일엔 제1회 여주 여강길 걷기행사를 진행한다.
- ▲ 신륵사 다층전탑 앞에서 내려다본 여강 풍경. 삼층석탑과 정자 너머로 펼쳐진 강변 풍광이 예쁘다.
한반도의 젖줄인 한강을 이루는 남한강·북한강 두 줄기 중에서 특히 남한강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아주 중요한 물길로 꼽혔다. 강원·충청은 물론 영남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실어 나르고, 한양을 오가는 길손들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해 양평 두물머리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남한강 물길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구간이 바로 여주 일대, 즉 여강(麗江)이었다.
여강엔 한양을 오가는 길손들이 드나들던 조선 4대 나루에 속하는 이포나루와 조포나루를 비롯해 모두 12개의 나루터가 있었다. 또 강변엔 정자도 10여 동이나 자리했을 정도로 경관도 예쁘다. 고려시대부터 이규보·이색을 비롯한 많은 시인묵객이 머물렀고, 당대 내로라하는 문사 중 이곳을 그냥 지나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여주 사람들은 대대로 점동면 삼합리에서 금사면 전북리에 이르는 남한강 물줄기를 자랑스레 ‘여강 백리 길’이라 불렀다.
파사성
2000년 역사 지닌 ‘여강 전망대’
- ▲ 파사성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여강 지킴이’로서 부족함이 없는 전망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여강 주변엔 귀중한 유적을 비롯해 사연 넘치는 명소도 많다. 그 중에서도 여강 나들이 첫 여정은 바로 파사성(婆娑城·사적 제251호)이다. 대부분의 여행객은 이 파사성을 그냥 지나친다. 그렇지만 여강 여행 중 파사성에 오르지 않으면 삼짇날에 ‘진달래꽃 없는 화전’을 먹는 것과 같다.
37번 국도를 타고 양평에서 여주로 접근하다 이포대교 사거리 직전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제법 널찍한 주차장이 보인다. 파사성 남문 주차장이다. 이곳에 주차하고 오르면 된다. 주차장에서 산성 정상까지의 거리는 750m. 남문지까지 승용차도 지날 수 있는 넓은 길이 뚫려 있어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충분히 올라설 수 있다.
파사성은 해발 200m 조금 넘는 파사산(231m)에 쌓은 삼국시대의 성이다. 신라의 파사왕 때 처음 쌓은 성이라 그렇게 불리는 것이라 한다. 신라 5대 임금인 파사왕의 재위 기간은 서기 80년에서 112년까지다. 그 무렵이라면 낙동강 주변에 머물러 있었을 신라가 백두대간을 넘어 이곳 한강 유역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과장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발굴된 여러 유물로 미루어 백제 초기에 처음 쌓았고, 6세기 진흥왕 때 한강 유역으로 팽창하던 신라가 적극적으로 사용한 산성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남문지를 지나고부터는 성벽이 일부 보수돼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짧은 발품에 비해 송구스러울 정도다. 서쪽을 보면 이포대교 뒤편으로 앵자봉(670m)·천덕봉(635m)이 우뚝하다. 강 주변의 고을들도 한눈에 들어온다. 과연 요새답다.
지금 이포대교 자리는 옛 이포나루터다. 옛날엔 소금을 싣고 강원도로 가던 배나 정선과 영월에서 나무를 싣고 내려오던 남한강 뗏목이 이포나루에서 머물다 갔다.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1456년(세조 2년) 6월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유배 갈 때 한양 광나루에서 출발한 배가 저 아래 이포나루터에서 내린 뒤 영월로 방향을 잡았다.
강에서 눈길을 거두고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추읍산(583m) 너머로 봄 안개에 가려진 용문산(1,157m)의 얼굴이 꿈결처럼 아득하다. 동쪽으로는 고달사지 품은 우두산(473m)·고래산(540m) 연봉이 가깝고, 남동쪽으로는 저 멀리에서 흘러내려오는 여강 물줄기 주변으로 자리 잡은 강마을들이 아늑하다.
파사성 성벽의 높이는 4~5m, 둘레는 1,800m 정도. 지금의 규모로 쌓은 건 조선시대다. 이순신·권율 등 명장들을 등용하기도 했던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은 임진왜란 때 파사성 수축을 건의했고, 1595년(선조 28년) 승장 의엄은 승려들을 동원해 2년 만에 성을 쌓았다. 서애는 성이 완성될 무렵 성 안의 금강루(襟江樓)에 올라 시를 남겼다. 아마 지금 같은 봄이었던가 보다.
‘파사성 위엔 풀이 무성하고 / 파사성 아래엔 물이 둥글게 굽어 도네 / 봄바람은 날마다 끊임없이 불어오고 / 지는 꽃잎은 무수히 성모퉁이에 날리네(중략)’
-서애 류성룡의 ‘파사성에서’
- ▲ (좌)파사성 남문지 근처의 성벽. 파사성은 백제 때 처음 쌓고 신라가 적극 사용한 산성이다. (우)산성 북서쪽의 장군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입상.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큰 위안을 줬을 것이다.
산성 정상에서 둥글게 굽어 돌아가는 물줄기를 봤다고 파사성 구경이 끝난 게 아니다. 뵈어야 할 부처님이 한 분 계시다. 바로 산성 북서쪽 아래에 계신 마애여래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1호)이다. “봄바람은 날마다 끊임없이 불어오고~” 하는 서애의 시구를 읊조리며 진달래 미소 짓는 능선길을 따라 부처님을 뵈러 간다. 호젓한 오솔길 한쪽에선 옛 병사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산성 정상에서 마애불까지는 340m. 경사가 완만해 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거리다. 마애불은 키가 5.5m에 달하는 거불이다. 전문가들은 고려 중기 이후에 제작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주 빼어나게 잘생긴 부처님은 아니지만,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에겐 큰 위안이 됐을 것이다. 주민들은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를 장군바위라 부르는데, 마애불의 주인공이 산성을 쌓은 장군이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곳까지 온 중생을 위해 마애불이 준비한 선물이 있다. 바로 마애불 왼쪽 발끝에서 흐르는 시원한 석간수. 한 모금 들이켠다. 시원하다.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이의 목을 적셔 주었을까. 올려다보면 마애불은 아무런 말씀 없이 멀리 앞만 바라보고 계신다. 고개를 돌려 마애불의 시선을 좇는다. 두 눈망울엔 여강이 맺힌다. 북한강을 만나 하나가 되기 위해 하류의 두물머리를 향해 흐르는 물줄기가 장하다. 이곳은 한적하고 한갓져 한참을 머물고 싶은 욕심이 드는 명당이다. 가끔 엉뚱한 판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는지 음주·취사·가무 등을 하지 말아 달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다시 산성 정상으로 되돌아와 시계방향으로 성벽을 한 바퀴 빙 돌아간다. 동문지를 지나 여강 상류를 눈에 담으며 내려서자 아까 지나왔던 남문지. 성 둘레가 1,800m라는데 직접 걸어보니 이에도 못 미칠 것 같은 아담한 산성이다.
파사성에 오르는 길은 두 군데다. 양평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여주 방면으로 가다가 만나는 천서사거리 500m 전에 왼쪽으로 파사산성으로 오르는 주차장이 보인다. 이곳은 남문지로 오르는 주차장이다. 정상까지의 거리는 750m. 20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동문지로 올라가려면 천서사거리에서 좌회전해 70번 국도를 타고 지평 방면으로 1.5km쯤 가다 현대주유소 바로 못 미친 지점에서 수호사가 있는 왼쪽 마을길로 들어선다. 여기에서 정상까지의 거리는 700m. 15분 정도 걸린다.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남문주차장~산성 정상~마애불~동문~남문주차장 원점회귀 코스는 여유롭게 걸어도 1시간 정도면 충분한 산책길이다.
- ▲ 천서리 막국수촌.
- 숙식>> 파사성 아래의 천서리는 막국수로 유명한 마을이다. 주민들은 “세종대왕이 대궐까지 가져다 먹었다”며 자랑한다. 원조로 꼽히는 30여 년 역사의 강계봉진막국수(031-882-8300), 천서리막국수(031-883-9799) 등 막국수를 차리는 식당이 여럿 있다. 대부분 널따란 주차장을 갖추고 있다. 막국수 6,000원. 흔히 막국수가 나오기 전에 맛보는 편육은 1접시(3~4인) 1만2,000원.
천서리에 파사장여관(031-883-5350), 천남리에 청조원펜션(011-9146-4840) 등이 있다. 이포대교 건너 금사면 이포리에 스위트펜션(031-883-5034), 주록리에 귀담재(031-881-4341), 금사리에 두견새펜션(031-885-6292), 상호리에 녹색농촌체험마을(031-886-4900), 빛고을(031-886-1129), 별자리펜션(031-886-9478) 등 펜션형 민박집이 있다.
- 고달사지
고려 선종의 호방한 숨결 가득한 절터
- ▲ (좌)산수유 그늘에서 바라본 고달사지. 고려 초기엔 3대 선원의 하나로서 전국 제일의 선찰이 됐지만 언제 폐사가 됐는지는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우)국보로 지정된 고달사지 부도.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도로 꼽힌다.
이포나루를 지나 여강 물줄기를 거슬러 여주로 달리다 대신면에서 북내면 방향으로 들어선다. 진달래가 화사하게 핀 시골 봄 풍경을 감상하며 고개를 넘으면 옛 이름이 혜목산인 우두산(473m)을 비롯해 고래산(543m), 옥녀봉(419m) 등 해발 400~500m 높이의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인 아담한 분지가 반긴다. 혜목산 고달사(慧目山 高達寺)가 있던 자리다.
764년(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된 고달사는 신라 선종 구산의 하나인 봉림산파의 선찰로서 고달선원으로도 불렸다. 고려 태조 이후 4대 광종 때까지 왕실의 각별한 보호를 받은 원종대사(元宗大師·868~958년)가 주지로 머물면서 나라가 관장하는 3대 선원의 하나로서 전국 제일의 선찰(禪刹)이 됐다. 그렇지만 언제 폐사가 됐는지는 아직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다만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달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엔 폐사된 것으로 나타난다. 전성기엔 지금의 주변 상교리 일대 사방 30리가 전부 절 땅이었다고 하니 그 권세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달사지의 석조물들은 대부분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절터 위쪽에선 산수유꽃이 살랑살랑 봄바람에 흔들리는데, 절터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유물은 석불대좌(보물 제8호). 불상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높이 1.57m) 잘생긴 석불대좌로서의 품격을 인정받고 있다. 상·중·하대와 지대석을 모두 갖춘 사각대좌로 연꽃 조각이 장엄하다. 특히 불상이 안치돼 있던 상대의 윗면은 아주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어 짝을 이루던 불상의 아름다움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위쪽엔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6호)가 천년의 세월을 증언하고 있다. 신라의 부도비 형식을 잘 계승한 이 유적에선 고려 초기의 진취적인 기상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거북의 네 발과 발톱 끝은 사실적이어서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나갈 듯하며, 용머리를 닮은 귀두는 크고 기이해 몸을 얼어붙게 만든다. 마치 고달사지 수호신 같다. 비신은 경복궁 근정전의 회랑에 진열돼 있다.
고달사지 부도 등 국보급 문화재 많아
- ▲ 고달사의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사실적인 모습이 마치 고달사지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 같다.
고달사지 석조물 중 비교적 온전한 유물은 두 개의 부도. 원종대사혜진탑비를 벗어나 절터 뒤쪽의 산길로 100~200m 정도 오르면 원종대사혜진탑과 고달사지 부도를 볼 수 있다. 다행히 산속에 있는 석조물들은 큰 상처를 입지 않아 호방했던 기상을 세밀히 살펴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고려 초기에 제작된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은 원종대사의 부도다. 역시 중대석에 새겨진 구름과 용들의 생동감이 돋보여 아름다운 부도로 꼽힌다. 하지만 위쪽의 고달사지 부도(국보 제4호)의 조각 수법보다는 한 수 아래란 평이다. 고달사지 맨 위쪽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 부도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부도 중 가장 크면서도 조각수법이 매우 세련되고 균형이 완벽하게 잡혀 있어 제일 아름다운 부도로 평가받는다. 이 부도 앞에 있던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채 오늘도 절터를 지키고 있는 고달사 석조물은 모두 고달(高達)이란 석공이 조성했다고 한다. 가족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는 장인. 그는 불사를 끝낸 뒤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 스스로 머리를 깎았고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됐다고 전한다. 고달사라는 절집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답사하는 데는 큰 불편함이 없다. 관람 동선을 따라 나무 데크와 안내판을 설치해놓았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면 여유로운 봄날의 산책을 즐길 수 있다. 2014년엔 전시실도 갖출 예정이라고 한다. 고달사 절터 맨 위쪽엔 ‘고달사’란 현판을 단 작은 현대식 암자가 있다.
영릉&녕릉
세종대왕 잠들어 있는 천하의 대명당
- ▲ 세종대왕이 잠든 영릉을 지키고 있는 무인석. 굳센 무사 형상이 잘 드러나 있다.
- 고달사지를 벗어나 37번 국도를 타고 세종대교를 건너면 곧 영릉(英陵)이다. 이곳엔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재위 1418~1450년)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가 잠들어 있다. 21세에 즉위해 53세로 승하할 때까지 32년간 재위하면서 이루어놓은 세종의 업적은 정말 찬란하다. 정치적으론 젊은 학자들을 등용해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했으며, 조선의 자주와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측우기·해시계·물시계 등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과학 기구를 제작하게 했다. 또 군사적으로는 북쪽의 6진을 개척해 국토를 넓혔고, 남쪽의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세종은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 모든 면에서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
영릉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의 무게에 어울리게 교육적인 볼거리가 많다. 영릉 입구엔 세종의 치적을 살필 수 있는 유물전시관인 세종전이 있고, 그 앞 잔디밭엔 측우기·해시계·혼천의 등 세종의 노력으로 탄생한 과학 기구들을 재현해 놓아 아이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답사 나온 어린이들로 항상 북적거린다.
영릉에서 어찌 호사가들의 풍수 얘기를 빼놓을 수 있을까. 세종의 무덤은 처음엔 경기도 광주 대모산(大母山,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다. 원래 이곳은 터가 좋지 않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세종은 세상을 떠날 때 “죽어서도 혼백이나마 부모님께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올리겠다”며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신하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종은 이곳에 묻혔다. 이후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 세종에겐 자식이 많았다.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8대군, 2공주를 비롯해 후궁과 궁인들에게서 10군, 2옹주를 뒀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례 없는 왕실의 번창이었다. 그렇지만 세종의 왕위를 이어받은 문종이 2년 만에 세상을 뜨고, 그 아들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로 유배됐다가 목숨을 잃었다. 결국 이 사건 전후로 세종의 22명이나 되는 자식 가운데 단 한 명, 수양대군(세조)만 남고 모조리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처럼 변고가 잇따르자 조정의 일부 대신은 헌인릉과 함께 있는 영릉의 터가 부실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조 때는 여러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년)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세종대왕이 새로 자리 잡은 여주의 이곳 땅은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가 이미 들어와 있었는데, 왕릉으로 선택되면서 이를 옮기게 하고 세종이 들어온 일은 두고두고 민간에 화젯거리가 됐다.
이번엔 가히 명당이었던 모양이다. 풍수가들은 영릉의 형국을 산세가 봉황이 알을 품듯 영릉을 감싸고 있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산봉우리들이 반쯤 핀 모란 꽃송이처럼 영릉을 둘러싸고 있다는 모란반개형(牡丹半開形), 용이 돌아서 영릉을 쳐다본다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고 칭송했다.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영릉을 “왕릉 중에서 제일”이라고 평했다. 또한 후세의 풍수가들 역시 조선 왕조가 100년 더 연장됐을 정도로 명당이라며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고 했다. 가히 조선 최고의 명당이었던 것이다.
- ▲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이 잠들어 있는 영릉. 조선의 운명을 100년이나 더 연장시킨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북벌정책 추진했던 효종대왕 잠든 녕릉
영릉과 이웃한 녕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재위 1649∼1659년)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은 1626년(인조 4년)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와 강화를 맺으면서 이듬해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된다.
그리고 9년 뒤인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는데, 청나라 문물에 호의적이었던 소현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다가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갑자기 병을 얻어 사망하자 곧바로 세자에 책봉됐다. 이러한 전후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 역시 죽음을 당했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제주도에 유배됐다가 죽었다.
이 이야기는 최근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추노’의 한 축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정치적 배경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은 김상헌·송시열 등을 중용해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릉과 녕릉 사이엔 700m 정도의 오솔길이 나 있다. 한 번에 두 분의 왕을 만날 수 있는 10분 거리의 좋은 산책길이지만 아쉽게도 산불경방기간(11월 1일~5월 31일)엔 이 길을 통행할 수 없다. 걷고 싶다면 영릉을 빠져나와 주차장에서 아스팔트로 포장된 고갯길을 1km 걸어서 녕릉 입구까지 넘어가야 한다. 이 아스팔트 길은 양쪽으로 소나무숲이 좋지만 걸어서 가는 이들은 드물다. 녕릉 입구에도 따로 주차장이 있으니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
둘러보는 데 세종 영릉은 30분, 효종 녕릉은 20~30분 정도 걸린다. 따라서 영릉과 녕릉을 모두 둘러보려면 1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물론 여기에 영릉에서 세종의 업적과 과학기기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려면 1시간 정도 더 잡아야 한다.
문화유산해설을 들으려면 예약(031-887-2868)해야 한다. 입장시각은 하절기(3~10월) 09:00~18:30(매표 18:00), 동절기(11~2월) 09:00~17:30(매표 17:00). 요금은 대인(19~64세) 500원, 소인(7~18세) 300원. 표 한 장으로 영릉과 녕릉 두 군데 모두 입장 가능하다. 매주 둘째, 넷째 주 토요일엔 청소년 무료입장. 주차비는 무료. 매주 월요일은 정기휴일. 관리사무소 031-885-3123~4, http://sejong.cha.go.kr
- ▲ 1 세종대왕 때 만든 해시계인 앙부일구 주변에 모여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어린이들. 2 휴일이 되면 영릉은 세종대왕의 업적을 공부하러 나온 어린이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3 조선시대 천문대에 설치됐던 중요한 천문관측기기 가운데 하나인 간의. 오늘날 각도기와 비슷하다. 4 효종대왕이 묻힌 녕릉을 찾은 여성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효종은 북벌계획을 추진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임금이다.
숙식>> 영릉·녕릉 바로 앞엔 숙식할 곳이 마땅치 않다. 왕릉이 있는 능서면 왕대리에 산장여관(031-884-5075)을 비롯해 번도리에 갤럭시모텔(031-881-4206), 신지리에 스톤모텔(031-884-7152) 등이 있다.
- 명성왕후 생가
엄숙함에서 벗어나 친근한 관광지로 변신
- ▲ 고종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생가. 명성황후 민씨는 이곳에서 태어나 8세까지 살았다.
37번 국도는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의 생가로 이어진다. 고종황제의 부인인 명성황후 민씨(1851~1895년)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고택이다. 1687년 지은 집인데 10여 년 전까지 실제로 사람이 거주했던 만큼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조선 중기 중부지방의 살림집 양식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입구에 위치한 감고당(感古堂)은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돼 입궐할 때까지 살던 집. 원래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다가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진 뒤 철거 위기에 놓이자 2006년 명성황후 고향인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명성황후가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일제에 의해 왜곡됐던 탓에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지만 고종의 황후로 개화기에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시해당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인물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명성황후기념관은 이러한 명성황후의 일생에 대해 꼼꼼히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최근 생가 바로 옆에 초가집 5동으로 조성한 민속마을(능골주막)은 명성황후 생가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널찍한 마당에선 널뛰기, 투호놀이, 고리던지기, 윷놀이, 자치기, 굴렁쇠굴리기 등 전통놀이를 즐길 수 있다. 일행과 주전부리나 식사 등을 하면서 전통놀이를 즐기다 보면 1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 ▲ 1 명성황후 생가 바로 옆에 조성한 민속마을. 널뛰기, 투호놀이, 고리던지기, 윷놀이 등 전통놀이를 즐길 수 있어 생가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2 개화기에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다 일본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명성황후. 3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돼 입궐할 때까지 살았던 감고당. 원래 서울에 있었는데 2006년 명성황후 고향인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숙식>> 명성황후 생가 민속마을(능골주막 031-885-4616)에선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다. 잔치국수 3,000원, 떡만둣국 5,000원, 도토리묵무침 4,000원, 파전 1만 원, 김치전 5,000원. 이외에도 파전·두부김치·묵무침 등이 한상에 올라오는 모듬상(3~4인) 1만5,000원. 숙박은 하지 않는다. 가까운 여주읍 점봉리에 톨게이트파크(031-884-2525), 부성장여관(031-883-7182) 등의 모텔급 여관이 있다.
여주도자기축제
5월 9일까지 신륵사 관광지 일원에서 펼쳐져
- ▲ 여주도자기축제를 찾은 외국인들이 다도 체험을 하고 있다.
여주는 예로부터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와 백토가 출토돼 일찍부터 도자기산업이 발달한 고을이다. 조선시대엔 여주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원료인 고령토를 뱃길로 광주분원까지 운반해 사용했다. 1884년 광주분원이 없어지자 김현채를 비롯한 도공 5명이 북내면 오금리로 이주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일제강점기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도자기의 전통은 꾸준히 이어졌고, 현재 북내면 오학리와 현암리 일대에만 해도 200여 개의 도요가 밀집해 있다.
이런 전통과 자원을 기반으로 여주군은 매년 4~5월에 도자기축제를 여는데, 2010년 축제는 4월 24일(토)부터 5월 9일(일)까지 16일간 신륵사 국민관광지의 여주세계생활도자관 일원에서 ‘천년도자의 맥’이라는 주제로 펼쳐진다.
전시행사로는 도자 디자이너 22인의 작품 ‘리빙 도자 오브제’ 5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는 ‘리빙 오브제(Living Objects)전’이 준비돼 있다. 고성 조병호, 청룡 김영길, 단아 박광천 씨를 비롯해 사기장 한상구, 옹기장 김일만, 경기으뜸이 전성근씨 등 지역 명장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여주군 명인관’도 관심을 끈다. 지난해 유명인들이 참여해 큰 인기를 끌었던 ‘명사와 도자기관’은 올해도 기대된다.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도자 관련 체험행사는 타래성형·물레성형 체험코너 등 관람객이 직접 체험하는 ‘내가 만든 도자기’ 등이 준비돼 있다. 석고틀 제작과 석고로 만들어진 12가지 인형과 신랑탈·각시탈 등에 색을 칠하거나 만드는 ‘나만의 도자기 인형 만들기 체험’은 여성과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각종 이벤트도 다양하다. 근로자의 날(5월 1일)과 도자기축제 폐막일(5월 9일) 두 차례에 걸쳐 도자 경매 및 깜짝 세일을 하는 ‘도자기 특별할인판매’ 이벤트도 벌어진다. 또 5월 5일 어린이날엔 비행기에서 ‘사랑의 사탕’ 1000개를 낙하하는데, 그 중 10%에 해당하는 100개의 사탕에 시가 30만 원 상당의 도자기를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상품권이 들어 있다. 문의 여주군청 도예팀 031-887-2282~4, www.ceramicexpo.org
- ▲ 1 도자기를 만드는 어린이. 도자기 빚기 체험은 어린이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다. 2 도자기축제에 참가한 가족이 진흙 높이 쌓기에 몰두하고 있다. 3 도공의 숨결이 느껴지는 도자기. 여주는 예로부터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와 백토가 출토돼 일찍부터 도자기산업이 발달한 고을이다.
신륵사
풍광 좋은 강변에 위치한 천년 고찰
- ▲ 신륵사 강변 풍광. 4대강 개발사업 전에 찍은 사진이라 건너편 백사장이 자연스럽다.
- 여강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자리에 위치한 신륵사(神勒寺)는 언제나 방문객으로 넘친다. 고려 때 나옹선사가 병이 깊었음에도 왕명을 받들고 밀양 땅으로 가던 중 이곳에서 입적하게 되는데, 이때 나옹선사가 보인 이적 때문에 신륵사는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의 능을 여주로 이장할 때 세종대왕의 원찰(願刹, 죽은 이의 명복을 빌던 법당)이 되면서 크게 중흥했다.
현재 극락보전 보수공사 중이라 절집 전체를 한눈에 살펴볼 순 없다. 조사당(祖師堂·보물 제180호)은 신륵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이곳엔 여말선초에 선종을 이끌었던 고승인 지공·나옹·무학의 영정이 있다. 정면을 한 칸으로 한 이유는 앞문을 열어젖히면 세 분의 영정을 모두 볼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600년 된 향나무와 조사당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향나무는 무학대사가 스승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심었다고도 하고, 이성계가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신륵사의 탑들은 특이하다. 우선 극락보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 재질이 아니라 대리석으로 우아하게 다듬은 조선 전기의 작품이다. 대리석은 화강암보다 무른 편인 데다 파손도 심해 원래 몇 층이었는지 알 수 없어 그냥 다층석탑이라 불린다. 무엇보다 조각기법이 돋보인다. 몸돌엔 용을 새겼는데, 눈과 비늘·발톱까지 아주 섬세하다.
또 하나는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기단은 화강암인데, 탑신부는 벽돌로 쌓은 고려시대 탑이다. 신륵사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조선시대엔 이 절을 ‘벽절’이라고 했지요. 벽돌탑이 있는 절이란 뜻인데, 그건 바로 고려시대에 벽돌을 쌓아 세운 이 다층전탑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전탑은 등대 역할도 했어요. 남한강을 따라 내려오던 뱃사공들이 이 전탑을 보고선 여주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죠.”
전탑 아래쪽 강가 바위엔 아담한 삼층석탑과 강월헌(江月軒)이라는 정자가 있다. 삼층석탑은 자연석 바위를 기단으로 삼았는데, 바로 이 자리에서 나옹선사를 화장했다고 한다. 정자는 여강 풍광을 즐기기 위해 지은 것인데, 얼마 전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추노’에도 등장했다.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추노꾼 대길(장혁 분)이 좌의정 대감과 흥정하던 바로 그 정자다. 신륵사를 찾았다면 강월헌에 올라 강변을 바라보며 강바람을 쐬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삼층석탑과 아담한 정자 너머로 내려다보는 여강의 풍치는 한 폭의 병풍이다. 삼층석탑도, 정자도 모두 지정된 보물은 아니지만 여강과 어우러진 풍경 그 자체가 보물급인 셈이다. 이 풍치는 다층전탑 앞에서 바라볼 때 가장 구도도 좋고 운치도 있다. 이쯤에서 나옹선사의 시를 떠올려도 좋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그렇지만 아쉽게도 예전만큼 시흥(詩興)이 일지 않는다. 강 너머로 4대 강 공사가 한창이라 시각·청각적으로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신륵사 문화재 관람료 어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주차비는 무료. 종무소 031-885-2505 www.silleuksa.org
- ▲ 1 신륵사 강변 바위에 세워져 있는 다층전탑. 남한강을 오르내리는 뱃사공들의 등대 역할을 했다고 한다. 2 무학대사가 스승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심었다고 전하는 향나무 너머로 조사당이 보인다. 조사당엔 여말선초에 선종을 이끌었던 고승인 지공·나옹·무학의 영정이 있다. 3 신륵사 입구엔 이곳이 조포나루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은 1963년 나룻배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어린이들을 위로하는 위령비다. 3 다층전탑 앞에서 내려다본 강변 풍광. 강 너머로는 4대강 개발사업을 위해 백사장을 파헤치고 있는 중장비들이 보인다.
여강에서의 황포돛배 뱃놀이
황포돛배 유람선은 여강의 명물. 여강에서 황포돛배를 탈 수 있는 곳은 두 군데다. 그렇지만 여주군청에서 운영하던 여강 남쪽 강변선착장의 황포돛배는 군청 사정으로 운항하지 않는다. 개인이 운항하는 황포돛배는 신륵사 입구의 나루터에서 탈 수 있다. 20인승과 30인승 두 척을 운항한다. 멋진 황포가 달려 있긴 하지만 풍력이 아니라 기름을 쓰는 엔진의 힘으로 운항하는 게 아쉽다.
운항시각은 10:00~18:00. 최소 인원(대인 4명, 기본요금 2만 원)만 충원되면 언제든지 출항한다. 나루터~강월헌~영월루~여주대교~나루터 왕복 코스 30분 소요. 요금 대인 5,000원, 소인 3,000원. 문의 011-342-2139
- ▲ 황포돛배가 신륵사 앞을 지나고 있다.
숙식>> 신륵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운영한다. 1박2일 체험 중 첫날은 다층석탑 등 신륵사 경내 불교문화유산을 답사한 뒤 발우공양, 저녁예불, 탑돌이 순으로 진행된다. 둘째 날은 새벽예불, 108배, 좌선명상, 다도, 강변길 산책 등으로 일정을 마무리한다. 1박2일 체험비는 성인 5만 원, 청소년 3만 원. 4인 가족 15만 원. 당일(10:00~16:00) 템플라이프도 진행한다. 2만 원.
여주쌀은 조선시대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던 명품이다. 그래서 브랜드 명칭이 ‘대왕님표 여주쌀’이다. 당연히 여주 쌀밥집이 유명하다. 신륵사 관광지에 명성회관(031-885-3234), 승용차로 5분 거리의 북내면 당우리의 예닮골(031-883-5979), 강 건너 여주읍 상리의 여주쌀밥집(031-885-9544) 등이 있다. 쌀밥 한정식 1인분 1만~1만4,000원.
신륵사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의 여주읍 오금리에 있는 보배네만두(031-884-4243)는 주민은 물론 외지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별미집. 손만둣국과 손두부를 비롯해 도토리묵·보리밥 등을 차린다. 5월부터 시작하는 열무국수는 유명한 여름 별미다. 보리밥 1인분에 5,000원, 손만둣국 7,000원, 손두부 5,000원, 열무국수 5,000원.
신륵사 관광지 입구의 천송리에 남강호텔(031-886-0303), 일성남한강콘도(031-883-1199, www.ilsungcondo.co.kr), 가까운 오학리에 수정파크여관(031-886-0301), 조이텔여관(031-885-6500) 등이 있다. 신륵사 맞은편인 연양리에 엠투엠모텔(031-885-1818), 코리아나모텔(031-882-2671), 상리에 드라마모텔(031-885-1171) 등이 있다.
- 목아불교박물관
나뭇결마다 佛心이 넘치네
- ▲ 목아불교박물관 야외전시실. 쉬엄쉬엄 걸으며 즐길 수 있다.
뎅그렁, 뎅그렁…. 여강의 물살처럼 해맑은 풍경 소리에 봄에 취한 마음이 운다. 풍경 소리는 게으름 피우지 말고 항상 깨어 있으라는 의미라지만, 봄볕에 들뜬 마음도 가라앉히라는 듯 정갈하다.
처마 끝 풍경 소리 맑고, 목불(木佛)의 나무 향기 그윽한 이곳은 깊은 산중의 절집이 아닌 여강 기슭의 목아불교박물관.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박찬수 관장이 지난 1993년 우리나라 전통 목공예와 불교미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세운 전문박물관이다. 묘법연화경(보물 제1145호) 등 3점의 보물과 박 관장의 조각품 등 6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어 불교 관련 문화유산과 현대 불교조각 작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귀한 장소다.
어릴 적 암벽에 조각돼 있는 마애불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이후 조각 공부를 시작한 박 관장은 1967년 조각가로 입문했고, 1972년부터는 불교 목조각에만 몰두해온 이 시대의 장인이다. ‘나무에 싹이 튼다’는 뜻의 목아(木芽)는 목조각 장인인 박 관장의 호. 마른 나무에서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는 봄날이라 그런지 의미가 더욱 새롭다.
일주문 역할을 하는 ‘맞이문’이라 쓰인 박물관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야외 조각공원이다. 장승과 불상을 접목한 현대적 작품인 미륵삼존대불을 비롯해 비로자나불상, 삼층석탑, 백의관음상, 동자상 등이 전시돼 있다. 장승·솟대·옹기로 전통 문화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적색 벽돌로 첨성대를 본떠 세운 ‘하늘교회’ 안쪽엔 박찬수 관장이 조성한 예수상이 모셔져 있다. 이 예수상은 종교 때문에 생겨나는 갈등·분열·미움 등을 버리고 서로 포용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 ▲ (위)야외전시실의 돌다리. 조각이 수려하고 사실적이다. (아래)목아불교박물관은 박찬수 관장의 조각품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장소다.
조각공원 안쪽에 자리한 ‘큰 말씀의 집’은 석가모니 부처를 중심으로 50나한이 모신 공간. 예천 용문사(보물 제684호)의 윤장대도 실측으로 조각해 재현했다. ‘한얼울늘집’은 환인과 환웅,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조인 단군을 모신 공간이다. 한얼(人), 한울(地), 하늘(天)을 담은 이름이다.
야외 조각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불교 유물 및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서울 동숭동에서 서울대 문리대 건물을 해체할 때 나온 벽돌로 지은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전시관의 전체 조형은 인도의 석굴사원을 본떴다. 전통 한옥의 창문과 틀을 응용한 내부는 전통과의 조화를 꾀했고, 중앙 앞쪽과 좌우로 원추형의 계단을 두어 불교의 불·법·승 삼보(三寶)를 형상화했다.
박물관 관람 동선은 맨 꼭대기 3층부터 잡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된다. 즉 3층, 2층, 지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1층을 관람한다.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오른다. 3층은 박 관장의 목조각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불교 목조각 전시실. 팔상도목각탱, 아미타삼존불좌상, 국보 제73호와 제83호 금동미륵보살상 모작, 목조약사 12신장상 등 박 관장이 40여 년간 조각한 작품 1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2층은 불교 유물실. 우리나라는 물론 인도나 동남아 등 불교문화권의 불교 관련 유물이 500여 점이나 전시돼 있다. 불상의 전파 과정, 다양한 재료로 조성된 불교 조각상, 불상의 종류와 배치, 복장유물, 불교의식구 등 불교미술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전통적으로 목공예에 사용하던 다양한 공구류도 눈길을 끈다.
지하는 기획전시실. 이곳엔 조선시대에 쓰이던 민속유물이 전시돼 있다. 영상실에선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부처가 되고 싶은 나무’와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목조각장’ 영상물을 상영한다. 목아박물관이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라 부처가 되고 싶어 하는 모든 나무에 부처의 생명을 부여하는 성스러운 곳임을 알게 된다. 죽어서 가장 아름답게 살아난 나무를 만나는 인연의 공간인 것이다.
1층은 불교회화실. 기획전·특별전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하는 공간이다. 방문객에게 인기 있는 기념품 매장에선 목아공방의 작품과 다양한 불교생활용품 등을 구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전통 찻집인 무애산방에서 솔잎차·대추차 등 우리 전통 차를 음미할 수 있다.
목아불교박물관 관람시각은 하계(3~10월)는 09:00~18:00, 동계(11~2월)는 09:30~17:00. 입장은 마감 30분 전까지. 연중무휴. 요금은 어른 5,000원, 청소년 4,000원, 어린이 3,000원. 주차 무료. 문의 031-885-9952, www.moka.or.kr
- ▲ (좌)목아불교박물관의 야외전시실은 예쁜 정원처럼 꾸며져 있어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다. (우)야외전시실의 장승.
숙식>> 박물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걸구쟁이네(031-885-9875)는 전통 사찰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 사찰정식 맛이 일품. 요즈음엔 봄 향기 물씬 풍기는 나물을 실컷 맛볼 수 있다. 사찰정식(1인) 1만5,000원. 이외에 도토리수제비(6,000원), 도토리묵밥(5,000원), 도토리묵(1만원) 등 도토리 요리도 맛볼 수 있다. 곤드레돌솥밥, 취나물돌솥밥, 산나물돌솥밥 등도 있다. 각각 8,000원.
여강길
강 따라 길 따라 흐르는 수많은 사연
- ▲ 섬강이 여강으로 합류하는 부분의 여강길. 현재 여강길은 총 55km이지만 4대강 개발사업 탓에 곳곳이 파헤쳐져 있다.
남한강의 한 허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강은 강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물굽이마다 전해오는 사연도 넘치는 물줄기다. 세월이 흐르면서 도로와 교통수단의 발달로 나루터가 없어지고, 각종 개발로 강변의 풍경이 상처를 입자 이를 안타까워하던 여주의 뜻있는 주민들이 뭉쳐 옛 여강길 답사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여강길 코스는 3코스로 모두 55km. 이 여강길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전국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7곳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1코스 ‘옛나루터길’은 여주버스터미널~영월루~은모래금모래(강변유원지)~부라우나루터~우만리나루터~흔암리선사유적지~흔암리나루터~아홉사리과거길~도리마을회관으로 이어진다. 15.4km로 걷는 데 5~6시간이 걸린다. 2코스(세물머리길)는 도리마을회관~청미천~대우마을~창남나루터~삼합저수지~개치나루터~법천사지~흥원창(17.4km, 6~7시간 소요), 3코스(바위늪구비길)는 흥원창~섬강교~닷둔리해돋이산길~바위늪구비~오감도토리마을~목마불교박물관~신륵사(22.2km, 7~8시간 소요)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최근 4대 강 정비사업 탓에 공사가 진행되는 곳이 많아 2코스와 3코스는 군데군데 끊긴다.
현재 여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여강길’이란 문화단체가 매주 둘째·넷째 주 ‘놀토’마다 여강길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단체탐방객은 놀토 외에도 미리 예약하면 박희진 사무국장의 안내로 여강길을 답사할 수 있다. 현재는 1코스를 중점적으로 진행한다.
여강길 코스를 혼자 찾아 나서기는 조금 어렵다. 중요 포인트마다 이정표가 있긴 하지만 제주 올레길만큼 갖춰진 게 아니라 헷갈리는 곳이 많다. 그렇지만 경험 많은 여행자라면 지도 하나 들고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비록 헤매더라도 그 자체가 좋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만약 시간이 없다면 여강길의 핵심 구간인 ‘여강변 갈대길’만이라도 걸어보자. 우만리나루~남한강교~바위늪구비에 이르는 약 5km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 간직돼 있어 여강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꼽힌다.
한편 도자기축제 기간인 5월 2일(일)엔 제1회 여강길 걷기행사를 진행한다. 이날 코스는 여강길 3코스의 일부 구간인 도자기축제장~신륵사~소지개고개~연인교~영월루~강변모래길~도자기축제장을 왕복한다. 3~4시간 소요. 오전 9시에 출발한다. 참가비 성인 3,000원, 학생 1,000원. 참가자 모두에겐 5,000원 상당의 간식과 기념품을 제공한다. 여강길 걷기행사 참가자는 신륵사 입장(2,000원)이 무료다. 신청은 여강길 홈페이지(www.rivertrail.net)나 이메일(rivertrail3@naver.com)로 하면 된다. 여강길 사무소 031-884-9089, 박희진 사무국장 016-744-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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