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출신
△서예가
△중국여행 전문가
△서울 동방서법 참원회 졸업
△전국 휘호대회 초대작가
△부산청년서예인협회 회원
△국제서법연맹 한국회원
당ㆍ인도서 불교 유입…전국민 70%가 신자
세계 최고봉 초모랑마ㆍ3000㎞ 강 알룽창포
베이징∼라싸 칭창열차로 46시간
티베트. 해발 4000m가 넘는 고원에 자리잡은 땅.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자라기 힘든 척박한 곳이지만 삶의 여유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곳이다. 하지만 티베트는 돈과 시간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고산병과 복잡한 수속, 열악한 교통과 편의시설이 관광객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 지난해 7월 칭짱열차를 타고 티베트를 다녀온 중국 오지 여행가인 박태만 씨의 여행기를 매주 한 차례씩 싣는다.
편집자 주
중국 서부지역에서도 남쪽, 히말라야를 경계로 인도와 맞닿은 티베트가 이번 여행의 목적지다. 최근 실크로드나 차마고도(茶馬古道) 혹은 당번고도(唐蕃古道)등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모두 1000년 이상에서 위로는 2000년도 더 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길이 열리기 시작한 곳이다.
이번 여행의 주 대상지를 티베트로 택한 것은 그나마 남아 있는 본래 모습들이 더 이상 망가지기 전에 하나라도 더 보고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철로가 열리면서 사람들의 접근이 그만큼 쉬워진 티베트 고원에 올해부터 다시 새로운 통로가 생긴다는 소문이 있다. 라싸에서 구게(古格)왕국이 있던 아리(阿里)까지 구간이 새롭게 열린다고 한다. 라싸나 제2의 도시인 시가체(르카즈-日喀則)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화(漢化)가 시작되어 고유의 문화와 전통이 변질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은 서부 오지에 해당하지만 새로운 항로나 철로가 열린다면 아리도 어찌될 지 모를 일이다.
당(唐)으로부터 또는 인도에서부터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는 만물유령(萬物有靈)의 사상을 토대로 한 뵌교(本敎)가 티베트 신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당(唐)의 문성공주가 정략결혼으로 티베트로 오면서, 모시고 온 불상과 불경 등으로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지고, 또 파드마삼바바(리엔화성 대사ㆍ蓮華生)가 인도로부터 티베트 왕조의 초청을 받아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불교가 티베트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 인구의 70% 이상이 불교도라고 하니 불교를 빼 놓고는 티베트를 이야기하기조차 어렵다. 이번 티베트 여행이 마치 불교 관련 유적지를 순례한 것처럼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탐험가들이 지구상의 남ㆍ북극과 함께 '제3극'으로 부르는 티베트.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기록을 가진 여러 가지의 자연물이 있다. 8844.43m의 세계 최고봉(最高峰) 초모랑마(珠穆朗瑪). 평균해발 3000m, 전장 3000㎞로 세상에서 가장 높은 땅위를 흐르는 어머니의 강 알룽창포(雅魯藏布).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호수 남쵸(納木錯湖)…. 티베트의 중심 라싸 역시 해발 3600m가 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중의 하나이다. 이번 여행의 일정을 티베트 여행의 극성수기인 여름철로 잡은 것은 드레퐁(즈벙스 哲蚌寺)사원에서 거행되는 쉬에둔지에(雪頓節)를 보기 위해서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드레퐁사원으로 택시를 달리며 교통통제가 시작되기 전에 사원에 도착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지만 결국은 비탈길 2시간을 걸어서 올랐다. 아직 태양도 올라오지 않은 어두운 산자락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다시 2시간 가까이를 선 채로 기다렸다. 힘들게 칭짱열차의 표를 구하고 현지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에 머물면서 현지 여행 정보를 얻고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현지인들과 말을 섞기를 원했고 그들이 먹는 것을 같이 먹으려 애썼다. 짧지 않은 시간, 13∼14일간 고원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티베트 사람들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무슨 단어가 어울릴까. 당연히 오체투지다. 오체투지란 몸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게 하는 인사법이다. 한없이 자신을 낮춤으로서 상대방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예법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는 교만과 거만을 떨쳐 버리고 하심(下心)의 의미를 되새기는 인사법이다. 몸의 다섯 부분, 즉 오체(五體)란 이마, 왼쪽 팔꿈치, 오른쪽 팔꿈치, 왼쪽 무릎, 오른쪽 무릎을 말한다. 오체를 땅에 닿게 하고 최대한 몸을 낮추어 엉덩이 부분을 발꿈치와 닿게 하면 사람의 몸은 한없이 낮아지게 된다.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신의 몸을 지저분한 땅에 닿게 함으로써, 몸과 땅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라싸에서 수백㎞, 멀면 수천㎞ 떨어진 곳에서부터 온몸을 던지며 오체투지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티베트인의 정신은 한마디로 불가사의다. 하지만 그들은 오체투지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티베트는 신심의 땅이기 때문이다.
해발 4000~5000m를 오르내리는 티베트 땅은 또 얼음 덩어리나 마찬가지다. 수많은 관광객들은 티베트의 이런 척박함을 보기위해 찾는지도 모른다.
티베트의 또 다른 특징은 사원. 수많은 사원에는 촛불 대신 사원을 밝히고 마음을 밝혀주는 버터등잔이 곳곳에 켜져있다. 많은 사람들은 비닐봉투에 들어 있는 버터를 들고 작은 수저를 지닌 채 사원의 많은 전각을 돌면서 등잔마다 한 숟갈씩 버터를 떠 놓는다.
이번 여행의 일정은 13~14일로 잡았다. 베이징(北京)에서 라싸(拉薩)까지는 칭짱열차(靑藏列車)를 이용하고 라싸에서 산난(山南)과 시가체(日喀則), 닝트리(林芝)는 버스나 화물차, 배를 빌려 타야 한다. 거치는 도시마다 하루나 이틀을 묵으며 가까운 사원을 찾고 숨은 마을을 만나기 위해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가장 오래 탄 교통수단은 열차였고 강을 건너는 배와 트럭, 심지어 경운기까지 세워 보았다. 시간에 쫓기거나 너무 늦은 경우에는 영업용 승용차를 이용하기도 했다.
민박과 싸구려 여인숙 비슷한 시설을 이용하고 아주 힘들어 휴식이 필요할 때만 호텔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 들었다. 첫날 베이징(北京)을 출발한 칭짱열차는 시안(西安)과 란조우(蘭州), 시닝(西寧), 거얼무(格爾木), 탕구라(唐古拉), 나취(拉曲) 등 몇 개의 역을 거쳐 46시간 30분만에 라싸에 도착한다. 하지만 진짜 칭짱열차는 말 그대로 칭하이성(靑海省)과 시짱(西藏-티베트)을 이어주는 철로로 거얼무에서 라싸까지가 진짜다. 열차가 거얼무 역을 떠나면 차내 방송으로도 칭짱고원이 시작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티베트는 나취(那曲)와 아리(阿里), 산난, 시가체, 닝트리, 참도(昌都) 등 크게 6개 지역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서부 티베트인 아리와 동부 티베트인 참도는 나중을 위해 남겨두기도 했지만 이번에 찾기에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또 하나,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 할 즈음 들려오는 슬픈 티베트 소식에 그들 만큼은 아니겠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중국에 강제 병합된 뒤 60여 년 만에 또 다시 독립을 외치는 티베트인들. 그들의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편한 글을 올려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한 곳 티베트의 아픔이 하루빨리 치유되기를 기대한다.
꼬박 이틀 달려 하늘과 땅 경계에 서다
암갈색 '척박한 땅' 자연 그대로
나무 한그루 없는 '中 무인지대'
베이징 서역에서 오후 9시30분에 출발한 열차는 꼬박 이틀을 달려 티베트 땅 라싸에 닿았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푹신한 침대(軟臥 4인 1실)표는 구할 엄두도 못 내고 6인 1실의 잉우어(硬臥)표를 겨우 구했다.
그 것도 판매가의 두 배 정도 가격으로.
나중에 기차 안에서 안 사실이지만 그 것도 감지덕지였다. 차 안을 다니다 보면 간혹 눈에 띄는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그냥 의자에 앉은 채로 48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서역의 대합실은 정신이 없을 만큼 사람들로 북적였다. 티베트 여행 허가증도 없이 기차표만 달랑 들고 줄을 섰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라도 둘러대볼 요량으로 그대로 버티기로 한 것이다.
열차에 올라 자리를 찾고 짐을 정리하고는 옆 사람과 인사할 틈도 없이 눈을 붙였다. 이튿날 눈을 떴을 때 도착한 곳은 시안(西安). 같은 칸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내리고 새로운 여행객 5명이 각자 올라왔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듯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가 말을 꺼낸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행선지를 물어왔다. 시닝(西寧)에서, 거얼무(格爾木)에서 각각 1명씩. 나머지는 라싸까지다.
처음 사람을 만나면 습관적으로 먼저 묻는 말이 출신지다. 넓은 땅이라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 온다. 세 사람은 내리는 곳이 살고 있는 지역이며 두 명의 아가씨만 외지인이다. 한 사람은 전문 여행 가이드. 또 한 명은 티베트 지역에 건설되는 수력발전소 직원이다. 출장 나왔다가 회사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가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는 모두 재미있어 한다. 언제 연락할지도 모르지만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한국어로 티베트어로, 혹은 중국어로 인사말을 각자의 문자로 메모지에 기록한다.
이 열차에서 내리면 헤어져 평생 다시 못 볼지도 모르지만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이렇게 짧은 시간에도 금방 친구가 된다.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서쪽으로 달리는 열차가 깐수성(甘肅省) 경내로 들어서자 날씨는 쾌청하게 변한다. 물은 흙을 마다하지 않고 대지는 또한 제 살을 깎아내는 물을 내치지 않는다. 물빛은 흙색이다 못해 암갈색에 가깝다.
그래서 황하(黃河)인가. 전부터 있던 좁은 길 위에는 큰 화물차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수많은 다리와 끝없이 놓이는 도로가 서부 대개발의 현장을 눈앞에서 보여준다.
오후 2시가 지나자 란조우(蘭州)에 들어왔다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고 곧 라면으로 유명한 란조우역에 도착한다. 나무가 없는 산은 그냥 형태만 산일 뿐이다. 강우량이 적고 흙이 모자란 탓이리라. 나무 한 그루 없는 산이 황량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다시 날이 바뀌고 새벽 4시가 좀 지나서 잠이 깼다. 서안에서부터 동행했던 노인이 거얼무에서 내릴 것이다. 짐을 챙기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덩달아 일어나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어둡고 쌀쌀한 공기를 가르며 열차가 거얼무 역 플랫폼으로 들어서고 나는 노인과 함께 내렸다. 노인은 내가 라싸에서 베이징으로 돌아갈 때 반드시 거얼무에 내려 전화를 달라고 몇 번을 당부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기 싫어 대답을 못하고 어물쩡거리며 어두운 하늘만 바라보는데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의 머리위로 음력 6월 그믐달이 별무리를 이끌고 나타난다.
다시 열차에 올랐을 때 안내 방송이 나온다. 본격적인 칭짱(靑藏)고원이 시작된다고 한다. 거대한 무인지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커커시리(可可西里)고원과 이어지는 중국 최대의 무인지대이다. 해발이 너무 높아 어떠한 작물도 재배할 수 없는 땅이다. 그래서 사람조차도 살 수 없는 땅. 간혹 목축을 위해 머무는 몇몇 사람들과 역 근처에 동네를 만들어 사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
어쩌다 나타나는 티베트 영양만이 자유로운 곳이다. 나무 한 그루 없이 마른 풀만 키를 한껏 낮추어 힘겹게 제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내게는 너무나 이채롭다. 맨손으로도 하늘을 움켜 쥘 수 있다는 해발 5000 미터가 넘는 탕구라역(唐古拉)을 지나면서 열차는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선 탕구라산이 멀리 보이고, 나취(那曲)임을 알려주는 호수가 바다처럼 넓고 푸르게 펼쳐진다.
티베트 여섯 개 구역 중 나취지역을 지나면 바로 라싸. 이제 길었던 기차 여행은 하늘 끝에 걸린 땅에 이르면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린다.
배낭여행의 천국 '라싸' - 천년의 문화 살아있는 종교성지
티베트 여행은 라싸에서 시작된다.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ㆍ티베트)의 수도인 라싸는 해발 3558m로 사방이 설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일조시간이 아주 길어 일광성(日光城)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라싸는 또 13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티베트 최초의 왕인 송첸 감포(松贊干布)가 당시 토번(吐蕃)왕조의 수도로 건설했다. 역사 이래 줄곧 티베트인들의 순례 성역으로, 도시에는 포탈라궁과 조캉사원, 라모체, 드레풍 사원 등 수많은 사찰과 궁전이 즐비하다.
하지만 이곳 라싸도 최근들어 빠른 속도로 현대화의 길을 걷고 있다. 시내에는 이미 체육관과 극장, 태양광 발전소, 위성중계소 등이 건설됐고 이런 현대식 건축물 때문에 천년고도의 아름다움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교통이 발달해 사천성의 청뚜에서 출발해서 청해성의 거얼무를 경유해서 들어오는 버스가 많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티베트로 들어갈 수 있다. 티베트 식으로 지어진 야뤼관과 지르뤼써 등 숙박시설도 완비돼 전 세계 배낭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배낭여행이라면 저렴한 가격에 사찰을 이용할 수도 있다.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민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라싸(拉薩)의 '拉'은 티베트어로 신(神)이라는 뜻이며 '薩'은 땅이라는 말이니 성지(聖地) 혹은 신의 땅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라싸는 신의 땅이며 성지다. 신의 땅 라싸에서 포탈라궁(布達拉宮)이 얼굴이라면 조캉(따자오스 大昭寺)사원은 그 얼굴에서도 눈을 나타낸다.
멀고도 먼 곳으로부터 오체투지로 성지 라싸에 도착한 순례자들의 마지막 귀의처가 바로 조캉사원이다. 조캉에 티베트의 영혼이 서려있다는 말이 나옴직도 하다.
7세기 송첸칸포(松贊干布)가 건축한 조캉사원은 중국어 따자오스(大昭寺)로도 불린다. '昭'자의 음을 티베트어로 옮기면 '佛'의 뜻을 가진다고 한다. 그러니 따자오스라고 하면 '큰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신전'이라는 뜻이 되겠다.
티베트 땅이지만 조캉으로 보다는 따자오스로 더 잘 통하는 서글픈 현실이다. 이곳은 또 당(唐)의 문성공주(文成公主)가 멀리 장안으로부터 모시고 온 석가모니 부처의 12세 때 모습을 담은 불상이 모셔짐으로 더욱 유명해진 사원이다.
원래 조캉이 서 있는 땅은 연꽃모양을 한 형상인데 마치 연꽃의 한가운데에 마녀가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형국이었다고 한다. 이에 문성공주가 점괘를 본 후 사원을 건립해 마녀를 제압하기 위해 마녀의 사지에 12개의 못을 박아 그 힘을 누르고자 했다. 지금의 조캉사원 주전 12기둥이 바로 마녀를 누르고 있는 12개의 못이라는 전설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티베트 여행관리국으로 향했다. 아직 확실한 일정을 잡지 못한 터라 여행허가증을 받기 위해서였다. 창구직원은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외국인 단독 허가증은 발급할 수 없으니 여행사를 통해서 받으라고 한다. 허가증이 없어도 별다른 제재가 없는 듯 하여 나는 스스로를 합법적인 여행자로 규정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관리국을 나섰다.
내가 서 있는 곳을 포탈라궁을 중심으로 본다면 서쪽 뒷골목쯤이겠다. 어차피 오늘 내일은 라싸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특별히 찾아가겠다고 정해 놓은 곳도 없다. 아침도 해결할 겸 좁은 골목을 기웃거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연탄가스 냄새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지만 이 근처에서는 그 냄새를 벗어날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냥 가까운 식당으로 들었다. 간단한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하고 조캉사원 가는 길을 물었다. 알려주는 대로라면 20~30분쯤이나 걸어야겠다.
보기에도 기름기가 넘쳐나는 국수는 국물보다 오히려 기름이 더 많아 보인다. 포탈라궁 앞 광장을 지나 천천히 조캉사원으로 향하는데 삼륜차 한 대가 다가와 선다. 깡마른 체구의 사내는 한눈에도 이 곳 사람이 아니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닌지라 걸어도 그만, 삼륜차를 타도 그만이다. 조캉이라고 말했더니 못 알아듣는다. 자신들의 터전에서조차 소수민족이 되어버린 현실이 눈앞에서 확인되는 순간이다. 마음이 아려오면서 더 이상 말을 섞기가 싫어진다.
큰 길을 버리고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보행가로 들어섰다.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에서 시끄럽게 들려오는 호객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 속에 뒤섞여 걷고 있는데, 오히려 이 혼잡함 속에서 나는 오롯이 혼자다.
사원이 저만치 눈에 들어오면서 매캐한 향냄새와 야크버터 등잔에서 날아오는 특이한 향이 코끝에 와 닿는다. 사원의 앞마당에서부터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낡아 너덜거리는 앞치마와 닳아서 헤진 신발을 보면서 얼마나 먼 거리를 한결 같이 걷고 절을 했을까 생각하니 내 등줄기가 욱신거리는 듯하다.
이들이 걸친 옷은 남루하지만 이미 남루를 넘어서 더 이상의 남루가 아니다. 먼 길을 걸어 지친 육신 또한 더 이상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성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조캉에는 티베트의 영혼이 깃들여 있다는 것인가.
사원 안으로 들어섰을 때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앞사람에게 물었더니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둔 감실 문을 열어 공개한다는 것이다. 귀한 기회이니 반드시 참배를 하라고 귀띔까지 해준다. 하지만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줄을 섰지만 불과 서너 명을 남겨두고 문은 닫히고 참배는 끝이 났다.
사원의 안팎에서 수많은 티베트의 영혼을 만났기에 큰 아쉬움도 없이 넉넉한 마음으로 사원을 돌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매년 여름 열리는 불교 최대 축제
하안거 끝나는 날 바로 행사 시작
어제 밤늦게까지 비가 내렸는데 아침까지 이어지면 어떡하냐며 걱정을 했더니 아이는 웃으며 이제까지 들은 애기로 행사 당일 비가 내린 적이 없었다며 조금도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한다.
쉬에둔지에는 티베트력(藏曆)으로 매년 7월 1일 시작해 일주일간 열리는 불교 최대의 행사다. 하안거(夏安居)가 끝나는 날이 바로 행사가 시작되는 날인 것이다. 여름 안거는 수행을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여름에는 작은 곤충이나 벌레들이 많기 때문에 발걸음을 줄여 살생을 피하고자 하는 자비심에서 나온 의미가 더 크겠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날 요구르트를 준비해 하산하는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리는데 이것이 바로 쉬에둔(雪頓)의 뜻이다.
행사는 동이 틀 무렵 거대한 탕카(탱화)를 산의 경사면에 설치된 거치대에 걸면서 시작된다. 일 년 내내 실내에 보관되어 있던 탱화가 산기슭에 걸려 따스한 볕을 넉넉하게 쬐게 된다. 그래서 사이포지에라고도 한다. 교통 통제를 하기 전에 사원에 도착하기 위해 택시는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하지만 사원 근처에도 가기 전에 이미 통제가 되고 있어 자동차는 더 이상 들어 갈 수가 없다. 삼륜자전거를 흥정해 갈 수 있는 만큼 가서 내린 후 다시 비탈길을 1시간 30분 가량 걸어서 올라야 한다. 해발고도가 높아 앉았다 일어서기만 해도 숨이 차는데 비탈길을 오르는 것은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다.
평소라면 아직 일어 날 시간이 아니겠지만 사원 아래 가게들은 이미 문을 열었다. 식당에서는 물을 끓이고 그릇을 챙긴다. 길 양쪽으로는 향과 타르쵸를 파는 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연중 몇 번 만날 수 없는 대목이겠다.
사원으로 올라가는 길 양쪽은 마치 시장이 선 것 같다. 상인들이 경전을 찍은 타르쵸, 향, 각종 약재 등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있다.
사원입구 매표소 앞에 이르자 마치 한낮처럼 사람들이 많이 서 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도 표를 사야하느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표를 사지 않고 그냥 들여보내 줄리가 만무하다.
어둠속에서 땅만 보면서 차오르는 숨을 누르며 얼마를 걸었을까. 앞을 가로막는 손이 나타난다. 고개를 들자 사복을 한 공안들인지 사원 관리인인지 구역을 통제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두운 산자락 곳곳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동이 트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마치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다. 심지어 좋은 자리 확보를 위해서 지난 밤을 새운 것 같은 이들도 보인다.
탕카가 걸리는 거치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시계를 보니 동이 트기까지는 아직도 두시간 가량 남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산은 사람들로 덮여갔다. 맞은편 산자락, 특히 거치대 근처에는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인다. 오전 8시가 지나면서 동쪽 하늘이 환해지고 아래쪽으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환호성으로 변한다.
탕카가 한 마리의 거대한 흰 옥룡처럼 승속 100여 명 사람들의 어깨에 얹혀 스님들을 필두로 천천히 나타났다.
아래로 보이는 사원의 부속 건물 옥상에는 어린 라마승려들이 모습을 나타내고 곳곳에 향 피우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탕카가 거치대에 걸리고 위로 펼쳐지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른다. 탕카가 다 펼쳐졌을 때는 이미 사방이 완전히 밝아지고, 수많은 하다(哈達)가 마치 하얀 꽃처럼 탕카 위로 천천히 날아와 내려앉는다. 사원은 온통 축제 분위기이다. 사람들이 여럿 에워싸고 있는 무리로 다가서자 3~4명의 남정네가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흥에 겨운 사람들은 손장단을 맞추며 어깨를 들썩이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홀로 앉은 여인네가 악기를 만지고 있다. 아마도 다음 순서를 기다리나 보다.
드레퐁 사원은 수천 칸의 방을 가지고 한 때 1만명에 가까운 승려들이 머물면서 수행을 하던 거대한 사원이다. 대충 돌아본다고 해도 한나절은 걸릴 터. 사원을 둘러 볼 요량으로 무리를 떠나 하얀 벽으로 은가루 같은 고운 햇살이 부서지는 골목 안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 '쉬엔둔지에'는
쉬에둔지에는 티베트력(藏曆)으로 7월1일부터 7월5일까지(양력으로는 8월중순 쯤) 열리는 티베트의 명절이면서 축제이다.
티베트의 사찰들은 여름 한달간 라마승들의 문밖 출입을 금한다. 여름은 티베트고원의 유충이 알에서 깨어나 한창 성장을 계속할 무렵이다. 이때 문밖을 나섰다가 땅을 밟아 지하의 생명을 상하게 함으로써 불살생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아예 면벽 수도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동안 절 밖에서는 소나 양젖으로 요구르트를 만들었다가 라마승들이 수도를 끝내고 나올 때 승(僧)과 속(俗)이 함께 마시며 연회와 가무를 즐겼다는 데서 쉬에둔지가 기원됐다.
특히 라마승과 함께 하는 이 축제는 불교를 믿는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설 만큼이나 중요한 명절이다. 축제 기간에는 전통 장극(藏劇ㆍ티베트연극)이 공연되고 각지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대회를 벌이기도 한다. 동시에 즈벙스(哲蚌寺)에서는 1년에 한 번뿐인 전불의식(展佛儀式)이 거행돼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멀리서 탕카를 바라보고 있어도 전혀 거리감을 느낄 수가 없다. 벌써 몇 시간을 한자리에 서 있었는데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겠다. 자리를 뜨기가 아쉽지만 대불과의 작별을 고하고 사원을 둘러보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 푸른 하늘과 회색빛 산 그리고 하얀 벽을 가진 사원은 마치 태고 적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잘 어울린다. 축제가 벌어진 마당을 떠나자 사람들이 적어지고 그만큼 조용하다.
컴컴한 실내를 기웃거리며 어느 문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라마승 한 분이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들어 선 곳은 수유차(야크 버터차)를 만드는 주방.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는 아궁이에 큰 솥 두 개가 걸려있고 그 속에서는 차가 끓고 있다. 양이 너무 많아서일까. 잎차를 우려 낸 물에 가루우유와 야크버터를 넣어 한 번에 많은 양의 수유차를 만들고 있다. 전통적인 제조 방식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공급하기 힘들기 때문인가 보다.
주위사람에게 일손을 넘긴 스님이 차를 내온다. 아침도 먹지 못한 나는 염치를 차릴 틈도 없이 주는 대로 차를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처음 보는 이방인과 무슨 깊은 얘기를 나누랴마는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온다.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양해를 얻고 카메라를 들었다. 주방 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풍경이 이채롭다.
산이며 사원 건물이며 마당을 거니는 사람들조차 정물처럼 조용조용 눈에 들어온다. 밖에서 보는 풍경과는 그 느낌이 또 다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편안한 시간을 주방에서 보내고 눈부신 마당으로 나섰다. 마냥 퍼질러 앉아 있기도 마음이 왠지 불편해 아쉬움을 남겨두고 한적한 골목을 찾았다. 사원의 골목은 마치 미로처럼 얽혀 있다. 주 법당 건물과 부속 건물, 그리고 숙소까지.
하나의 마을처럼 수행자들과 사원에 적을 두고 일을 하는 사람들의 가족들까지 한 공간에서 살고 있어 더욱 정겹다. 사진동호회에서 나왔는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크고 시커먼 카메라를 목에 걸고 시끄럽게 골목을 누빈다.
그들은 함부로 닫힌 문을 열어보고 잠긴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눈살이 찌푸려지고 한마디 하고 싶지만 말이 먹힐 것 같지도 않아 그만두고 만다.
나는 도망치듯 몸을 돌려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마치 반 지하로 내려가듯 작은 마당으로 이어지는 짧은 계단이다. 마당은 정사각형이고 둘레로 숙소인 듯 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층 난간에는 이불이 널려있고 입던 옷가지를 세탁은 하지 않고 그대로 일광욕을 시키는 듯 나란히 걸어두었다. 이불과 널린 옷가지 사이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꼬마 두어 놈이 이방인의 출현이 신기한 듯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카메라를 보더니 숨바꼭질 하듯 숨었다 나오기를 여러 번 하다가 아예 카메라 앞으로 나서는 아이가 있다.
아이는 제법 카메라 앞에 여러 번 서 보았던지 포즈도 취할 줄 알고 여간 귀여운게 아니다. 사진 몇 장을 찍어 보여줬더니 함박웃음을 짓는다. 사진을 인화해서 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숙소 지역을 벗어나 중마당쯤이나 되는 곳에 서서 멀리 첩첩 이어진 산들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너무 좋다. 안개가 끼어도 못 볼 것이요, 구름이 없어도 너무 쓸쓸해 보일 터.
8월 중순 한여름이지만 긴소매 옷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파란 하늘에 적당히 흐르는 구름이 있어 무정물이 마치 유정물인 듯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그렇게 서 있기를 또 한나절. 허기가 느껴져 시계를 보니 이미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 사원을 빠져나가기 위해 올라 왔던 비탈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산 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아직도 내려가는 사람보다는 올라오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주차장이 보일 때 쯤 안에서 향이 타 오르는 하얀 탑이 나타난다. 참배 행렬 끝에 줄을 서 길게 늘어 선 경통(經筒)을 다 돌리고, 향을 한 묶음 사서 탑 속으로 밀어 넣었다.
녹아내리는 번뇌처럼 향은 불 속에서 활활 타올라 연기로 날아간다.
'때묻은 마음' 불심 가득찬 햇살이 어루만지고
드레퐁이 새벽의 사원이라면 세라는 오후의 사원이다. 동이 틀 때 거행되는 사이포 행사를 시작으로 쉬에둔지에가 드레퐁에서 열린다면, 오후의 사이포행사는 단연 세라사원이다. 14세기 후반 권력과 결탁하여 타락한 밀교의 종풍을 쇄신하여 라마불교를 정립한 총카파가 제자들을 데리고 산중 동굴에서 수행 할 때 산 아래 아름다운 장미 숲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중국어 음을 빌려 오면 색(色)이요, 납(拉)은 신이라는 뜻이니 장미사원 세라라는 명칭의 유래가 여기에 있다.
총카파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산책을 하는데 큰 나무 아래서 말 울음 소리가 들려와서 땅을 파 보니 마두금강불상(馬頭金剛佛像)이 나왔다고 한다. 이에 그 불상을 모시고 사원을 세웠으니 바로 세라사원의 건립 설화이다.
드레퐁에서 내려와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택시를 탔다. 오늘은 택시기사들이 아예 행선지를 물은 후 요금을 미리 얘기한다. 평소의 두세 배는 될 듯하다. 몇 마디 불만을 늘어놓았더니 한마디로 가볍게 응수해 온다. "꾸오지에(過節)".
명절을 지낸다는 데야 할 말이 없다. 일 년 가운데 몇 번 없는 대목이겠거니 싶어 그냥 그러자고 대답을 했다.
큰 길에서 갈라져 사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통제되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 아래 아무런 방비도 없이 걷는 것이 고역일 수도 있는데, 별로 힘들다는 생각이 안든다. 길 양쪽으로 죽 늘어서 과일과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들이 흥청거리며 축제 분위기를 북돋운다.
입구 매표소에 이르렀는데 아무도 표를 사는 사람이 없다. 어찌되나 싶어 한참을 서서 지켜보았더니 티베트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용케도 골라내 표를 사도록 한다.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 관리인이 있는 것도 모르고 나도 그냥 들어가려고 했었다. 표를 검사하는 사람이 표시 나게 있는 것도 아니고 입구가 표시된 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하마터면 참배객이 몰염치한 관광객이 될 뻔한 순간이었다.
세라사원은 입구부터 향 피우는 연기로 자욱하고, 향 연기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사원으로 밀려든다. 나는 법당은 뒤로한 채 줄을 선 사람들 뒤를 따라 바로 전불대(展佛臺)라고 부르는 괘불(掛佛) 거치대로 향한다.
하늘은 푸르러 더 높고 바람은 미동도 않는다. 신도들은 손에 하얀 하다(哈達)를 받쳐 들고 흙먼지 속에서도 묵묵히 차례를 기다린다. 차례가 이르러 고개를 들자 거대한 괘불 옆 바위 불상 위로 수많은 하다가 걸려있다. 신성 가득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꼭 이루고 싶은 바람이 그렇게 많은가 보다.
대불 앞으로, 혹은 계속해서 산위로 코라를 도는 사람들에게 밀려서 전불대 앞을 지나 낮은 산을 내려오니 저절로 법당 앞에 이른다. 어두운 실내를 향해 잠시 참배를 드리고 마당 한쪽 시원한 그늘이 드리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옆에는 한 가족인 듯 어린 아이부터 환갑이 지났을 것 같은 어른까지 예닐곱 사람이 따가운 햇살을 피해 앉아 있다. 젊은 친구를 향해 눈인사를 보내자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뜸 담배부터 권해온다.
행색이 달라서인지 고향을 물었다. 한국이라고 설명해도 모르는 것 같아 그냥 베이징에서도 비행기로 동쪽으로 좀 더 가는 곳이라고만 일러준다. 아는지 모르는지 또 고개만 끄덕거린다.
원래 세라사원은 매일 오후에 벌어지는 비엔징(辨經)으로 유명하지만 쉬에둔지에 행사 기간 중에는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아쉽다. 비엔징이란 글자 그대로 불경의 내용을 토론한다는 뜻이다. 평소 공부한 내용을 들고 바람 서늘하고 나무 그늘 짙은 곳에서 허심탄회하게 불경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온 몸으로 말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 아주 격렬하게 보인다. 손바닥을 마주치고 때로는 다리를 높이 들었다가 땅에 찧듯이 내려놓고….
깨달음의 곳에 이르는 것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까. 공부를 나누는 스님들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환청으로 귀에 담아 사원을 빠져 나온다. 다리도 아프고 갈증도 심하다. 사원 앞길은 시장통이 되어있지만 딱히 갈증을 풀어줄 만한 마실거리도 보이지 않는다.
해가 지려면 아직도 여러 시간이 남았지만 무작정 시원한 곳을 찾아 쉬고 싶은 생각에 시내로 나가는 버스에 올랐다.
고원의 투명한 대기 때문일까. 몸은 힘들지만 희한하게도 정신은 조금씩 맑아지는 느낌이다.
8세기 후반 숭불정책 결과물
'불ㆍ법ㆍ승' 갖춘 첫 삼보사찰
아침부터 티벳탄 참배 '발길'
아침 일찍 조캉사원 앞 광장으로 나갔다. 삼예사원(상에스ㆍ桑耶寺)과 라싸 근교 몇 군데 사원으로 가는 버스가 조캉광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새벽에 잠시 정류소 역할을 할 뿐, 오전부터는 사람들이 들끓는 광장으로, 상가로 그 모습을 바꾼다. 여기서 삼예사원으로 출발하는 버스는 단 2대로 그 나마 자리가 차면 시간과 무관하게 떠나고 만다. 쉬에둔지에 기간이라 이름난 사원을 참배하려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오전 7시 전에 도착했지만 이미 한 대는 출발하고 나머지 한 대도 좌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말끔하게 차려입은 청년 하나가 내게 목적지를 물었다. 그도 나도 가는 곳은 삼예사원이다. 달랑 두 사람만이 외지인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티벳탄들이다.
7시가 좀 지나자 버스는 라싸 외곽지역에 닿았고 동쪽 하늘이 황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공항이 있는 꽁가에 들어서자 사방이 완전히 밝아진다. 나무도 없는 지역에 어찌 이리도 물은 많은지.
얄룽창포강과 라싸강이 만드는 작은 소와 지류가 곳곳에 널려있다. 두 강이 만나는 지점을 지나면서 티베트 고대문화의 발상지 산난(山南)지역으로 들어선다.
버스는 출발한 지 3시간이 좀 지나서 목적지 삼예사원에 도착했다. 같이 앉아 왔던 중국 친구와 방을 함께 쓰기로 하고 먼저 숙소 예약부터 하기로 했다. 사원에 소속 된 여관인데 'ㅁ'자 형태의 마당이 있고 둘레로 방들이 들어서 있다. 마당 한가운데 수동식 펌프가 설치된 공동 세면장을 바라보니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돈다.
8세기 후반 숭불정책을 펼친 5대 치송데찬(赤松德贊)왕이 세운 삼예는 아주 규모가 큰 사원이었으나, 지금은 주전 건물과 불탑 두어 기만 겨우 남아 시골의 작은 사원처럼 보인다. 주전은 우주의 중심 수미산(須彌山)을 나타내고, 태양전과 월량전은 각각 해와 달을, 주전의 사방에 서 있는 4좌의 불탑은 사대천왕을 표현한다. 주전 둘레에 서 있는 4동의 큰 전각과 8동의 작은 전각은 또한 각각 4대부주(大部洲)와 8소부주를 나타내고 사원 전체를 둘러싼 담장은 세계의 외곽을 감싸고 있는 철위산(鐵圍山)이다.
만다라 형식을 그대로 재현하여 온 우주가 삼예사원에 다 들어있는 것이다. 파드마삼바바(蓮華生)대사가 손바닥에 사원의 설계도를 환영으로 보여주자 이것을 본 왕이 감탄하여 '사미예(桑耶)'라고 소리를 질러 사원 이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원 건립 후 왕은 귀족 자제 7명을 이곳으로 출가시켜 명실공히 불ㆍ법ㆍ승(佛ㆍ法ㆍ僧) 삼보를 두루 갖춘 티베트 최초의 삼보사찰이 탄생하게 되었다.
사원 주위는 작은 시골 마을이라 크게 볼거리는 없겠지만, 칭푸(靑樸)에 다녀오기 전 자투리 시간을 아낄 요량으로 숙소를 나섰다. 숙소 입구 양옆으로는 구멍가게가 있고, 칭푸로 올라가는 화물트럭은 알록달록하게 단장하고 손님을 기다린다.
때 국물이 줄줄 흐르는 양 한 마리가 마당 안을 함부로 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을 좇아 다닌다. 여행객들이 던져주는 음식물에 습관이 된 듯 먹을거리를 구하는가 보다.
거의가 참배를 위해 이곳까지 찾은 티벳탄들 뿐 외지에서 온 관광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나와 함께 온 중국 청년 하나와 서너 명의 서양인 뿐이다.
매캐한 연기를 피워내는 향탑과 움직이는 듯 마는 듯 나부끼는 타르쵸를 매달고 있는 징판간(經幡杆)을 지나 조용한 경내로 들어선다. 담장 안을 에워 도는 회랑을 따라 경통(經筒)을 돌리며 나는 나와 인연 맺어진 모든 존재들의 평안을 마음으로 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자 해가 완전히 넘어갔다. 촉수 낮은 백열등만 흔들리는 방 안에서 할 일이란 중문(中文)으로 된 티베트 여행기를 더듬거리며 읽는 것밖에 없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데 바깥이 떠들썩하다. 나가보니 숙소 앞마당에서는 이미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흰색과 검은색 옷으로 한껏 멋을 부린 남녀의 원무가 출렁거리고 동네 꼬마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한 시간 가량 그 속에서 어울려 놀다가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음악소리 때문에 쉬 잠이 들지 않는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음악소리를 꿈인 듯 생시인 듯 귓가로 흘리며 잠속으로 빠져든다.
<박태만의 티베트 기행>● 신성한 수행자의 계곡 '칭푸'
'상예스'서 산길 따라 차로 1시간
화려한 '오색 타르쵸' 물결 장관
삼예 사원 숙소 앞마당에는 오전에 칭푸(靑朴)로 떠나는 화물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적재함에 나무판자를 두 줄로 길게 붙여 의자로 이용하고 바닥은 비워 둔 그런 차다. 칭푸까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차도 나쁘고 길도 워낙 형편이 없는지라 족히 한 시간은 더 걸린다고 한다. 실제로 차가 동네를 빠져나가자 길은 아예 형체가 없어진다. 그냥 반사막 같은 땅에 흔적만 살짝 남았을 뿐이다. 그나마 평지는 나은 편이고 산으로 접어드니 차는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어렵게 도착한 곳에서 산으로 조금 올라가면 칭푸사가 있고 그 너머로는 화려한 오색의 타르쵸만 빼곡하게 걸려 있을 뿐 동네는 없다. 주차장 근처에 있는 구멍가게 겸 작은 숙소로 쓰이는 가건물 하나가 전부다.
사원은 비구니 스님들이 꾸려나가는 것 같다. 마당을 서성이는 스님들은 모두가 니승(尼僧)들이다. 절문을 들어서자 두어 명의 청년이 웃음으로 반겨준다. 이곳에서 석공으로 일을 하는 아랫마을 친구들인데 얼떨결에 그들이 머무는 숙소로 초대받았다. 수유차 몇 잔을 나누며 한 시간 넘게 앉아서 노닥거렸다. 점심시간이라 짠빠가 나오고 감자 국이 나왔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그릇을 닦지도 않고 칭커가루를 넣고 수유차를 부었다.
손으로 주물러 반죽덩어리를 만들면 밥 대신 이네들이 먹는 주식 '짠빠'가 된다. 내가 슬며시 손을 뻗자 그 중 한 명이 전에 먹어봤냐고 물어온다. 처음이면 거의가 배탈이 나니 먹지 말라는 얘기다.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이네들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이곳 칭푸에만 108곳의 수행처가 있다고 했다. 맨 위에 있는 파드마삼바바(蓮華生大師)의 수행처를 시작으로 계곡을 가운데 두고 온 골짜기가 토굴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마침 아직 점심시간이 좀 남았다며 칭푸로 올라가는 길을 안내하겠다고 자처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길이 나뉘는 곳에서 청년은 방향을 일러주고는 내려가야 한단다. 한마디 덧붙인 것이 있다면 길이 갈라지거나, 길 가운데 마니태(瑪尼堆-경전을 올려 둔 돌탑)가 있으면 꼭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티베트불교(藏傳佛敎)도들이 반드시 지키는 방향이다. 토속신앙인 뵌교도들은 반대로 움직인다.
가운데 골짜기를 두고 보이는 모습은 마치 작은 마을 하나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곳곳에 작은 집이 있거나 바위벽에 돌담만 쌓고 얼기설기 지붕을 이어 수행처를 만들어 두었다. 겨우 비바람만 피하는 정도다. 만나는 수행자들도 세속의 남녀를 따지지 않는 듯 서로 이웃하여 토굴이 있기도 하다.
가끔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중국어가 되는 수행자들과는 말도 섞어 보았다. 대개가 10년 이상을 이 산중에서 보내고 있었고 만나는 수행자들은 모두가 친절하다. 하나같이 권하는 말씀은 맨 위에 자리한 리엔화성대사(蓮華生大師)의 수행처를 반드시 참배하라는 것이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이 한마디는 새로운 에너지가 되어 결국 나를 꼭대기까지 올려놓았다. 대사께서 수행하던 바위굴 앞에 작은 법당이 지어져 있고 야윈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차가운 돌바닥에서 오체투지로 절을 올리고 있다.
곁에 사람이 다가오든지 말든지 절은 변함없이 이어진다. 이렇게 척박한 땅 가운데 이만한 조건을 가진 곳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거목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숲이 우거지고 새소리가 들리며 물이 흐르니 공부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듯 싶다. 파드마삼바바를 비롯해서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이곳을 수행처로 삼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래서 기다리는 트럭은 오후 5시가 지나면 떠날 것이다. 마음이 가는 곳에 설 때마다 느끼는 것은 시간이 늘 모자란다는 것이다. 지금이 오후 4시. 서둘지 않으면 차를 놓칠 수도 있다. 어느 토굴에라도 부탁하면 하루정도는 재워 줄 것 같지만 나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어쩔 수 없는 속인인 것이다. 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빠르긴 하지만 몹시도 무겁다.
잔잔한 물결에 시간도 잠시 넋 잃고…
3000㎞ 도도히 흐르는 티베트 젖줄기
낡은 목선 타고 강 건너는 재미 '만끽'
삼예사원 앞마당에 땅거미가 내리자 외등이 켜지고 동네 사람들이 성장(盛裝)을 하고 모여들었다.
이윽고 밤이 이슥해지니 검은 옷으로 치장한 여인들과 검은 하의에 하얀 상의를 입은 남정네들이 서로 손을 잡고 원무를 추기 시작했다. 쉬에둔지에(雪頓節) 기간 중에 매일 벌어지는 축제라고 한다.
고음의 노래와 함께 맥주잔이 돌고, 하얀 하다(哈達)가 춤추는 남녀의 목에 겹겹이 걸린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고 옆에 앉은 이가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웃음으로 인사를 나눈다.
둘레에 앉고 서서 구경하는 무리들은 라마승려들과 여행객까지 섞여 승속의 구분조차 없는 듯하다. 밤늦게까지 어울리다가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지만 새벽까지 이어진 노래 소리 때문에 비몽사몽간에 아침을 맞이했다.
전날 저녁 숙소 관리인에게 길을 물어 본 것을 기억해 두었던지 바쁜 목소리로 소리쳐 부른다. 동숙했던 중국친구와 함께 부리나케 배낭을 챙겨 메고 내려가 보니 강나루까지 가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멋쩍은 인사를 하며 차에 올랐지만 기사나 승객이나 시간에는 별로 관심이 없나보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표정들이다.
티베트에서는 따로 정해진 버스 시간이 없는 듯하다. 나루로 가는 길에 만난 양떼로 인해 시간은 또 지체되었지만 조바심을 내는 사람은 없다.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운전사나 손님이나 무심하게 차창 밖으로 양떼를 바라 볼 뿐이다.
나루에 닿으니 이곳도 마찬가지다. 배는 일찍이 출발 준비가 다 되었던 듯 버스에서 내린 일행이 타자마자 떠난다. 막히면 쉬어가고, 그래도 막히면 돌아가는 모습이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배 위에 있는 이방인은 우리 둘 뿐이다. 버스 요금도, 배 삯도 현지인과 이방인이 다르다. 돈을 좀 더 주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진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움직일 수도 있었지만 강을 건네주는 배가 있다고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나선 길이다. 의외의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라 그런가 모든 일이 감사하게만 느껴진다.
차비든 배 삯이든 문제 될게 없다. 그저 신나고 즐겁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지역을 흐르는 강 얄룽창포(雅魯藏布)는 너무도 조용하다. 동쪽으로 더 가면 세계에서 가장 큰 협곡을 만들고, 가장 세차게 흐르는 물살로 변하지만 이곳에서는 말 그대로 포근하고 잔잔한 어머니의 강이다.
얄룽창포강은 구게(古格)왕국이 있던 아리(阿里)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흘러 동티베트 쪽에 있는 세계 제15좌 남체바르와봉(南迦巴瓦峯)을 한 바퀴 감돌고 인도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서쪽 끝에서 발원해 3000킬로미터를 동진하면서 명실공히 티베트 사람들에게 젖줄기로서 어머니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양 가죽에 공기를 불어 넣어 서로 엮어서 강을 건넜다지만 지금은 낡은 목선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사공의 표정이 재미있어 카메라를 들었더니 손사래를 친다.
혼자 머쓱해 하며 대신에 시야 가득 들어오는 강 양안의 경치 잡기에 몰두해 본다. 여남은 명의 티벳탄들은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는 내가 재미있어 보이는지 연신 쳐다본다.
마치 세상의 모든 시간이 다 멈추고 내가 탄 배만 움직이는 것 같은데 맞은편에서 배 한 척이 나타났다.
서로 손을 흔들며 지나치는데 저쪽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가 서양인들이다. 아마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용부라캉(雍布拉康)에서 오는 길이리라. 뭐가 그리 즐거운지 손만 흔드는 것이 아니라 고함을 지르고 상반신을 흔들며 춤을 추고 난리도 아니다.
이제 시간이 더 지나면 목선은 철선으로 바뀌고 더 거대하게 변할 것이다. 혹은 강 위로 시멘트 다리라도 놓이면 배는 사라지고 강을 건너는 아름다운 한 시간 동안의 여유도 사라지리라.
'어미사슴의 뒷다리 위에 지어진 궁전'이라는 뜻의 융부라캉(雍布拉康)은 티베트 최고(最古)의 궁전이다. 융부(雍布)의 뜻이 '모자(母子)'라고 하니 궁의 이름은 지형에서 나온 것이다. 궁이 앉은 자리가 마치 어미사슴의 뒷다리 같다고 한다.
천혜의 요새-어미 사슴 뒷다리에 지어진 최초의 궁전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께 어느 날 유목민 한 사람이 방목을 하다가 용모가 수려한 청년 한 명을 발견했다고 한다. 언행과 행색이 현지인과 달라 장자(長者)에게 보고하고, 장자는 무사(巫師) 몇 명으로 하여금 이 청년에 대해 알아보게 했다. 어디에서 왔느냐는 물음에 그 청년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켜 스스로 천신의 아들임을 나타냈다. 이에 장자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공손히 청년을 모시고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첫 번째 토번왕(吐藩ㆍ티베트왕)인 네츠찬포가 된다.
융부라캉은 그가 세웠고 티베트 최초의 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 사이에서 '마을은 야롱이요, 궁은 융부라캉이며, 왕은 네츠찬포가 가장 오래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실제 7세기 송첸칸포가 수도를 라싸로 옮길 때까지 도읍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융부라캉이다.
규모는 작지만 한 쪽만 길이 열려 있고 다른 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라 천연의 요새요, 주변에는 티베트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넓은 농지가 있어 물자 또한 풍부하다. 수령이라면 가히 탐내 볼만한 땅인 셈이다.
관광의 명소-마을은 마을대로 농지는 농지대로 '포근'
체탕에서 융부라캉까지 가는 차편을 알아본다고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20명 가량 탈 수 있는 작은 버스가 수시로 다니고 있다. 버스 앞 유리에 적힌 행선지를 살피는데 택시 한 대가 다가와 선다. 차 안에는 이미 3명이 타고 있다. 합승이다. 제법 시간이 걸리는 거리지만 가는 길이라 그런지 요금은 생각보다 싸다.
따가운 햇살도 피할 겸 얼른 차에 올랐다. 조용한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려 택시는 융부라캉 아래 흙먼지 풀풀 날리는 주차장에 내려준다. 주차장 앞에서는 말을 타라고 호객을 한다. 작은 산 위에 있는 궁 입구까지는 10위엔(元).
긴 거리는 아니지만 제법 가파르고 흙먼지가 날리는 좁은 길이 부담스러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내 발로 올라보기로 했다. 입구에 이르니 또 타르쵸를 파는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 여느 관광지와 다를 바가 없다. 펜을 준비해 두고 불경과 불상이 인쇄된 타르쵸에 이름을 쓰고 소원을 빌며 바람 속에서 나부끼게 하는가 보다.
궁 앞에 서서 농토와 마을을 바라보니 논밭 너머로 산들이 둘러싸고 그 위로는 하늘만 푸르다. 마을은 마을대로 농지는 농지대로 정리가 잘 되어있어 넉넉하고 포근하다.
불심의 사원-끝없는 향연기 뒤로 피어오르는 '서글픔'
융부라캉은 몇 번의 보수와 확장을 거치면서 사원으로 그 용도가 변해 왔다. 사원인 만큼 향을 사르는 하얀 탑이 있고, 모자 쓴 남정네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향을 파는 노인이다. 지나간 영화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향을 팔아 받은 돈을 세기에만 바쁘다. 왕조의 멸망으로 인해 버려진 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서글픔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의연하려해도 배어있는 어떤 쓸쓸함만이 전해져 온다.
사원의 입구 정면에서 시작하여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코라를 돌아보기로 한다. 날씨가 너무 좋아 땀이 날만도 하지만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이 딱 기분 좋을 만큼이다.
궁의 뒤쪽 산은 순례자들이 걸어 둔 타르쵸들로 온통 뒤덮여 있다. 향을 사르는 작은 탑이 마련되어 있고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오른다. 코라를 한 바퀴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마을과 밭들과 멀리 산이 보이고 체탕(즈당)지역으로 나가는 길이 아스라이 보인다. 방금 내가 지나 온 길이고 조금 전에도 보았을 터인데 낯설게만 느껴진다. 아주 낮은 높이의 구릉에 가려 길은 마치 가운데가 잘려나간 것처럼 보인다. 그 길 위로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고 해도 영원히 문명세계로 나가지 못할 것 같은….
용의 포효 같은 매 울음소리 뜻
수백년 된 2m 진주 탕카 '장관'
사원 곳곳 고풍스런 氣 감돌아
융부라캉에서 내려올 때는 거의 뒷걸음질 치다시피 해야 했다. 아쉬움에 발걸음을 조금 옮기고 올려다 보고 또 올려다보고….
희한하게도 작고 오래된 궁궐은 정말 오랫동안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몇 조각의 구름을 펼쳐 놓은 푸른 하늘은 흰 벽의 배경으로 더욱 눈이 부시다. 아래로 내려서자 갑자기 참을 수 없을 만큼 햇살이 따갑다. 햇살이야 매양 그 햇살이겠지만 이제야 몸이 느끼나보다. 체탕으로 나가는 차는 아직 오지 않고 바늘 끝 같은 햇살을 견딜 수 없어 그늘을 찾아들었다.
끼니때가 지났건만 고원이어서인지 허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티베트를 찾았던 며칠 동안 작은 생수 한 병으로 온종일을 보내기도 했고 한 끼 가벼운 식사로 하루를 견디기도 했다. 하지만 배고픔을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니 몸은 절로 가벼워졌고 속을 비우는 만큼 기분도 좋아진다. 그러니 눈에 들어오는 경치도 좋게 보일 수밖에.
창주스(昌珠寺)까지는 겨우 몇 킬로미터의 거리라 걸어갈 엄두를 내 보기도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다리가 뜻에 따르지 않는다. 그렇게 혼자 고민을 하고 있는데 텅 빈 버스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승객도 없다. 대개가 여행사 버스를 타고 온 단체 관광객이라 나와 함께 버스에 오른 이는 중국인 서너 명 정도.
그나마도 모두 체탕으로 바로 가버리고 창주사 앞에 내린 사람은 나 혼자다. 사원은 시골마을 신작로가에 천년을 넘게 서 있다.
어느 곳이나 오랜 사원에 얽혀 있는 전설이 이 곳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가보다. 조캉사원과 건립 시기가 비슷한 이 사원도 문성공주(文成公主)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얻은 점괘에서 '요괴나 찰녀의 어깨가 지금의 창주사 터까지 이른 것'을 본 공주는 사원을 지어 삿된 기운을 누르고자 했다. 당시 이 땅은 연못이었고 그 속에는 머리가 다섯 달린 괴룡(怪龍)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때마침 수행 중이던 송첸칸포가 대붕(大鵬)으로 변해 그 다섯 개의 머리 가운데 하나를 쪼았다. 괴룡이 포효하며 대붕과 싸웠으나 대붕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나머지 4개의 머리를 쪼아 용을 제압했다고 전해진다.
'창주(昌珠)'를 뜻으로 풀어보면 '용의 포효 같은 매의 울음소리'다. 줄여서 중국어로 옮겨보면 '트란드룩'이니 '트란'은 매이고 '드룩'은 용이다.
티베트 최초의 법전으로 알려진 창주사는 그 역사가 오랜 만큼 송첸칸포와 문성공주, 브리쿠디 공주(네팔의 적존공주) 등 많은 조상(造像)들이 모셔져 있다.
이 밖에 창주사를 더욱 유명하게 해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진주탕카(珍珠唐畵)다. 연화수보살(蓮花手菩薩)을 묘사한 이 탕카(탱화)는 길이가 2미터에 달하고 사용된 진주도 거의 3만개에 이르는 진귀한 보물이다.
버스 안에서 시원한 바람의 상쾌하고도 편안함에 젖어 있다 하마터면 사원을 지나칠 뻔 했다. 사원의 입구를 알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장이 외치는 '창주사'라는 소리를 못 들었다면 아마 체탕까지 갔다가 되돌아 왔을 것이다.
차에서 내려 사원 앞으로 다가 갔을 때 처음 느낀 것은 너무 초라하다는 것이다. 가까이 가서도 규모가 너무 작다는 느낌 뿐, 장엄함이나 엄숙함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매표소조차 입구의 문을 들어서서 안쪽에 있어 외국에서 어렵사리 찾아간 관광객들은 사원이 아닌 줄로 착각하기 쉽겠다.
그러나 둘러보면 볼수록 이곳 창주사는 오래된 사원답게 고풍스러움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한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은 것과 마찬가지의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 마니차에는 어렵게 이곳까지 올라온 티벳탄들이 둘러앉아 마니차를 돌리고 있었고 '옴마니 반메 훔'을 반복하는 그들의 순수함도 여기저기서 읽혀진다.
이들에게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활이다. 풀 한포기 마음대로 자랄 수 없는 척박한 이곳에서 이들이 올리는 기도는 그래서 종교의식이라기보다는 삶 그 자체로 느껴진다. 특히 사원이나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승려들도 특별하다기보다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이웃의 모습이다.
입구 왼쪽에 몇 가지 식품들을 땅바닥에 놓고 파는 티베트 여인이 실을 잣고 있다. 다가가서 사진을 찍으려 하니 고개를 돌려버린다. 무작정 그 곁에 쪼그리고 앉아 같이 새살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곁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다시 카메라를 들자 천진한 웃음으로 응해 온다.
겉보기는 비록 남루하고 가난했지만 표정은 전혀 어둡지 않고 순박한 모습이다.
길을 걷다가 손을 들면 지나는 버스는 천천히 다가와서 세워준다.
창주사에서 체탕(즈당ㆍ澤當)까지는 채 5리(2㎞)도 안되는 짧은 거리. 시내 구경도 할 겸 걷는 둥 마는 둥 느리게 걷는데 따가운 햇살이 부담스럽다. 때 맞춰 버스 한대가 다가오자 옆에서 걷던 중국 친구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든다.
체탕은 티베트 문화의 발상지인 산난(山南)의 중심 지역으로 최초의 삼보사찰인 삼예사원과 최초의 법전인 트란드룩, 그리고 또 하나의 최초를 기록하는 융부라캉 궁이 있는 곳이다. 지금은 큰 도시로 변하여 티베트의 오랜 도시라기보다는 차라리 중국의 여느 신흥도시로 보인다.
체탕 삼예사원ㆍ트란드룩ㆍ융부라캉 '한곳에'
라싸로 나가기 위해 버스 정류소에 내렸다. 당장 외지인임을 알아 본 기사들은 서로 자기 차를 타라고 불러댄다. 버스가 일정시간을 두고 발차하는 것도 아니고 그 수가 적어 승용차들도 허가를 받아 영업을 하는 모양이다.
점심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아침도 먹지 못한 상태다. 부르는 소리를 못들은 체하고 정류소 근처의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면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오는데 아까부터 따라왔던 기사가 아직 식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탈 것이라고 확신을 가진 모양이다. 미안해서라도 더 이상 승차를 미룰 수가 없다. 나와 2~3일 길을 함께 한 중국인 청년과 또 다른 낯선 관광객 두 명이 좌석을 채웠다.
라싸 얄룽창포 강 따라가며 설산과 벗삼다
요즘 티베트에서는 과속 단속을 하고 있다. '90일간 과속사고 없애기'란 내용의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고 속도위반 단속도 무척 심하다.
단속방법도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무인카메라를 설치하거나 길가에 경찰을 배치해 직접 단속하지 않고 일정구간 시점과 종점에 작은 검문소를 세우고 지나는 자동차가 통과하는 시각을 기록한 뒤 다음 검문소에서 이를 확인한 다음 과속여부를 가늠한다.
간단하고도 합리적인 방법인 것 같지만 여기서 중국인들의 여유 혹은 잔꾀를 볼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위에 '정책'이 있다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이들은 검문소와 검문소 사이 구간에서는 규정 속도를 훨씬 넘겨서 달리고 검문소 못 미쳐서 차를 세우고는 모자란 시간을 메운다. 과속하는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4시가 지나서 라싸에 도착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해가 늦게 진다는 생각에 그대로 시가체(르카즈-日喀則)로 가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도 역시 승용차를 선택했다. 거리는 약 230㎞. 평소라면 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다.
하지만 경찰이 철저하게 과속을 단속하면서 지금은 4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시가체 잔뜩 흐린 하늘도 환상처럼 푸른 땅
어차피 급할 것도 없다. 이것저것 많이 보자고 떠나 온 길이 아닌가. 느리면 느린 만큼 많이 볼 것이다. 라싸 교외에 이르렀을 때 길가에서 수박을 파는 것을 보고 차를 세웠다. 다섯 명이 두 통을 먹어 치울 만큼 작지만 달고 시원하며 가격까지 싸다.
도로는 모든 구간이 깨끗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좁긴 하지만 막 포장이 끝난 듯 아직 선명한 검은 색이 그대로다. 마지막 검문소에 이르기까지 3번을 세웠다. 멀리 설산 구경도 하고 지나는 자전거 여행객들과 인사도 나눈다.
얄룽창포 강과 나란히 달리는데 멀리 하늘색이 너무 곱다. 짙은 푸른색이다. 그 아래가 시가체라고 한다. 기사는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를 툭 던진다. "비가 내리는군…." 신기하게 여기며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듯 하늘색을 보라는 답이 돌아온다. 삶에서 배운 것일 게다. 비에 젖은 하늘색을 멀리서도 가늠해 내는 것이다.
그 기사가 말했던 대로 밤의 시가체는 비에 젖고 있었다. 비도 내리고 늦기도 하여 허름하지만 싼 맛에 대충 방을 정하고 근처 식당으로 나갔다. 둘이서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하고 밥 대신에 독주 한 병을 시켰다.
이심전심이었을까. 거의 동시에 튀어 나온 말이 같았다. 통하는 마음에서 나온 웃음은 온기를 띠고 있다. 내일이면 이 친구는 야동(亞東)으로, 나는 간체(江澤)로 간다. 날이 밝기 전에 이곳에서 헤어질 터. 미리 작별을 나누려는 생각에 뜻을 같이해 밥 대신에 술을 시킨 것이다.
밤은 비에 젖어가고 정은 백주(白酒)에 젖어간다.
벽은 막혀 있어도 생각이 열리는 場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든 시가체가 가까워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이 있다. 바로 타쉬룬포 사원에 있는 전불대(展佛臺)다. 나는 어젯밤 갑작스런 바람과 폭우를 뚫고 왔지만 맑은 날 시가체를 찾는다면 틀림없이 그대는 형형하게 빛나는 타쉬룬포 사원의 거대한 이 건축물에 눈길을 빼앗길 것이다.
타쉬룬포는 중국어로 '자스룬부스', 혹은 길상수미사(吉祥須彌寺)로도 불린다. 겔룩파(格魯派)의 6대 사원 가운데 한 곳이며 시가체 지역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사원으로 이름나 있다. 실제 50여 곳의 부속사원과 장원이나 목장도 30곳이 넘는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가 짐작된다.
특히 드레퐁 사원보다 오히려 타쉬룬포의 잔포지에(展佛節)가 더 유명하다고 한다. 장력(藏曆)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열리는 쇄불행사인데, 무량광불(無量光佛)과 석가모니불, 미륵불의 순으로 하루에 한 폭씩 햇살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은 엄숙하면서도 장엄하다.
간체(지앙즈ㆍ江孜)로의 일정을 하루 미루고 우선 숙소를 옮겼다. 어제 묵었던 숙소는 낡고 곰팡이 냄새가 심해서 도저히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더욱이 상수도 시설이 낡아 빨래를 할 정도의 물도 나오지 않는다. 마침 한동안 동행했던 중국 친구는 아침 일찍 야동(亞東)으로 떠나고 혼자가 된 나는 밀린 빨래를 위해서라도 수도시설이 잘 된 곳을 찾았다. 그냥 눈에 띄는 대로 외관이 깨끗한 곳을 골라 방을 정하고는 곧바로 거리로 나섰다.
타쉬룬포는 티베트 제2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인구 수가 겨우 8만이 넘는 작은 도시다. 어지간한 곳은 걸어 다니거나 삼륜차를 타도 괜찮은 곳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멀리 하얗게 반짝이는 타쉬룬포의 전불대를 등대삼아 천천히 걸었다.
이곳 또한 다른 사원과 마찬가지로 현지인과 이방인의 구분만 있을 뿐 승과 속의 구분이 없다. 마을 가운데 사원이 있고 사원 가운데 마을이 자리잡은 모습도 여느 티베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일상화된 풍경이다.
이곳 또한 작은 광장 안쪽에 매표소가 있고 길을 따라 문을 들어서면 마치 마을 입구에 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시장을 보고 오시는 길인가, 마실을 다녀오시는가. 등에 짐을 멘 어린 라마승려 두 분을 따라 좁은 골목을 지나가면 산 아래로 금빛 지붕과 작은 불탑이 눈에 들어온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그저 사원을 둘러본다는 기분으로 느리게 움직이는데 어디선가 격렬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말로만 듣던 비엔징(辨經)이다.
세라사원에서 못 본 비엔징을 타쉬룬포에서 만나다니. 급한 마음에 소리를 쫓아 골목을 돌아 들어가니 마당 한 구석 나무 아래 둘러선 스님들이 보인다.
평소 공부한 내용을 들고 바람 서늘하고 나무그늘 짙은 곳에서 허심탄회하게 불경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승려들의 모습은 부드러웠지만 가운데 선 어린 승려는 꽤나 다부지게 열변을 토해 내는 중이다.
세라사원에서 행사 때문에 보지 못한 비엔징(辨經)을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만나다니, 마음에 두고 있는 일은 시절이 닿지 않아 만나지 못할 뿐 인연이 없진 않은가 보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이지만 바라보는 내가 흐뭇해진다. 넓은 잎사귀는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고 바람은 적당히 시원하다.
잠겨 있는 법당 문 앞에서 어찌할까 망설이는데 지나던 스님 한 분이 도로 돌아와서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따라 들어간 곳은 2층에 있는 주방. 이번 여행이 주방과 인연이 많은지 벌써 세 번째다.
일상처럼 수유차가 나오고 스님은 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뉘며 자리를 잡았다. 서로 카메라를 보여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동안 시간을 보낸 후 따라오라며 몸을 일으킨다.
다시 따라 간 곳은 승려들의 공부방이다. 빛이 들어오는 창을 등지고 가운데 앉은 분이 스푸(師傅)이며 양쪽으로 뭇 승려들이 늘어 앉아있다. 신을 벗고 머리를 숙여 인사드리고 조용히 무릎걸음으로 방으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신을 벗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최대한의 예의를 표한 것이다. 카메라를 들어 정중히 허락을 받은 후 몇 컷을 찍었다. 분위기가 너무 엄숙한 때문인지, 스스로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어서인지 많이 찍지도 못하겠다. 무릎을 꿇고 다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다음 들어설 때처럼 조용히 방을 빠져 나온다.
경사가 별로 없는 경내의 골목길은 사방이 돌과 흙으로 만든 벽으로 막혀 있어도 생각은 열리는 것 같다. 방향 없이 느리게 걷는 발걸음은 저절로 깊은 내면으로 나를 인도한다.
에베레스트 '트레킹' 위한 길목
타쉬룬포 사원 앞 노점상 즐비
타쉬룬포 사원 문을 나서면 작은 광장을 지나 바로 큰 길과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사원 앞 일부 구간에 기념품과 쓰던 물건, 생필품 등을 내 놓고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다. 식료품이나 기념품을 파는 모습이야 어느 곳에서나 비슷하지만 두어 군데 좌판에서는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 보인다
그 물건을 따라 무작정 모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지키는 가게로 들어갔다. 굵은 실을 꼬아 만든 줄이 반지르르한 검은 기름때로 알맞게 오른 돌로 만든 목걸이다. 집어 들고 물었더니 해초석(海草石)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크고 작고 알록달록한 돌이 가장자리 모서리가 닳아 세월을 담은 느낌이 있는 그런 물건이다. 꼭 사자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격이나 알아보려고 물었더니 엄마를 제쳐두고 어린 딸이 나서서 다부지게 흥정을 하는 것이 재미있다.
몇 년 전 사천성 야딩(亞丁)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곳에서 말을 타고 트레킹을 할 때 엄마 대신 마부로 나선 어린 여자아이가 생각난다. 둘 다 열댓 살이 못 되는 나이인데 하나는 수줍은 미소를 얼굴에 띠운 채 말도 제대로 못 잇는 초원의 들꽃 같았고, 또 하나는 마치 자동차가 질주하는 길가에서 자라는 생명력 강한 질경이를 보는 듯하다.
얼마를 불렀는지도 기억에 없고 얼마를 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해초석 목걸이는 지금도 내 방 벽에 걸려있다.
시가체(르카즈ㆍ日喀則)는 구게왕국이 있있던 아리(阿里)지역과 초모랑마(珠穆朗瑪ㆍ에베레스트) 트레킹을 하기 위해 찾는 팅그리(딩르ㆍ定日)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길목이다. 나의 원래 일정도 초모랑마 트레킹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주의 어머니 신' 초모랑마는 안개와 구름에 가장 짙게 감싸여 있는 계절. 게다가 이 길과는 관계없지만 남쵸 호수 가는 길에서 버스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생겨 위험한 도로는 모두 통제한다고 한다.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마음은 내내 서운했지만 갑자기 줄어든 일정으로 하루하루가 느긋해진다. 어차피 2~3일 안에는 길이 뚫리진 않을 터, 오늘과 내일은 시가체에서 묵기로 결정한다.
2~3일 동안 부족했던 잠을 채우고 냄새 나는 옷가지와 양말을 빨아서 볕 좋은 창가에 말려 놓으니 기분이 훨씬 개운해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 멀다싶지만 타쉬룬포 앞의 노점상이 즐비한 곳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시가체의 거리는 라싸나 체탕보다 훨씬 조용하고 한적하다. 관광객들의 모습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버스 정류소에서 장체(지앙즈ㆍ江孜)까지 가는 교통편을 확인하고 거리에서 쌀로 빚은 술 '창'을 마시는 티벳탄들과 얘기도 나눈다. '창'은 티베트 막걸리 정도 되는 술로 보리의 일종인 칭커로 만든다. 우리 막걸리보다는 맛이 순해서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타쉬룬포 사원이 가까워지자 타르쵸와 불구(佛具)점, 목기 가게들이 나타난다. 주변에 있는 식당을 찾아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점심을 먹었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이 서너 시간 늦으니 식사 때도 그만큼 늦어진다. 도대체 바쁠 게 없다.
식사를 마치고도 청해성이 고향이라는 주인과 해바라기 씨앗을 까먹으면서 또 30여 분을 노닥거렸다. 식당 문을 나서자 이번에는 서점이다. 마침 티베트 여행지침서가 필요했고 시간을 보낼 장소도 필요하니 안성맞춤이다.
서점에는 티베트어와 중국어로 된 두 가지의 같은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대여섯 권의 책을 고르고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젊은 주인은 사천성이 고향이라고 한다. 어찌 이리 멀고도 조용한 곳에 서점을 열었는지 물어 보았다. 엷은 미소와 함께 별일 아니라는 듯 몇 마디를 던진다.
동쪽 참도(창두ㆍ昌都) 지역에 집 짓는 일을 하러 왔다가 조금씩 서쪽으로 온 것이 시가체까지 왔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이 먼 땅에 정이 들어 그냥 자리를 잡고 눌러 앉았단다.
드나드는 손님도 없고 주인도 따로 할 일이 없어 보이는지라 마음 편히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라싸의 민박집에서 읽은 책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고른 책 가운데서 다시 세 권을 골라들고 배낭을 멨다.
배낭을 둘러 멘 내 모습이 길 떠난 이방인이라 씌여 있는 걸까. 아니면 오랫만에 손님을 만날 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일까. 먼발치에서 나를 지켜보던 삼륜차가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 드종요새 19세기 말 영국군과 혈투 흔적 남아
# 십만불탑 10만존의 불상 벽화 있는 최고의 탑
해발 3980m 간체 명물…최대 불탑 '쿰붐' 유명
아침 일찍 삼륜차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나갔다. 여행 지침서에는 1시간에 한 번씩 간체(江孜)로 가는 교통편이 있다고 했지만 어제 알아 본 대로 버스는 터미널 앞에서 사람이 다 차기를 기다린 뒤 출발했다.
버스에 올라 타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일찌감치 잡고 앉았지만 차장이 다가와서 멀미를 하는 티베트인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 달란다. 기꺼이 자리를 내주었는데 한참을 달리다보니 아무래도 내가 늦게 온 얌체들에게 뒷자리로 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한 그들이 뒷자리가 좁고 많이 흔들려 멀미를 핑계로 앞의 좋은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멀미는 커녕 웃고 떠들며 너무나 즐겁게 버스여행을 즐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정말 얄밉다.
좁지만 잘 포장된 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갑자기 방향을 돌려 보리밭 사이 흙길로 달린다. 장체 조금 못 미쳐 마을 입구의 작은 다리를 보수 중이라서 어쩔 수가 없단다.
오히려 잘 된 일이다. 강과 나란히 달리며 바라보는 드종요새(종산성보ㆍ宗山城堡)의 모습이 마치 한 장의 엽서 같다. 회색빛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요새, 파스텔톤으로 홀로 가라앉아 한 세기 전의 슬픈 역사를 그대로 품은 듯하다.
19세기 말 남쪽 야동(亞東)을 통해서 침략해 온 대포로 무장한 영국군과 칼을 든 이 곳 주민들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여기다. 1만6000여 군민(軍民) 중 마지막 한 사람의 피까지 이 땅위에 뿌리고 계곡은 붉게 물들었다.
그래서 '붉은 강(紅河)'이던가. '마지막 탄환과 양식이 떨어질 때(彈盡糧絶)'까지 사투를 벌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은 종산성보를 '영웅성'이라 부른다.
버스는 요새를 중심으로 마치 코라를 돌 듯 마을로 접어든다. 승객 대부분이 참배객인지라 종점을 지나 사원의 입구까지 데려다 준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사원이 있고 뒤편으로 산이 병풍처럼 사원을 둘러싸고 있다.
산에서 보면 팔을 벌려 사원을 가운데로 안고 그 앞으로 마을을 거느린 형상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바로 대법당이 있다. 각 교파가 일정시기를 점용했었기 때문에 지금은 모든 교파를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거리에 버려진 개들조차 다 거둔 것 같다. 넓은 마당에는 크고 작은 각색의 개들이 가득하여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다.
법당 왼쪽으로 거대한 탑 쿰붐 스투파가 자리한다. 십만불탑(十萬佛塔)으로도 불리는 이 탑은 규모로나 건축 기교로나 티베트 최고의 탑이라 하겠다.
'탑중유탑(塔中有塔)'이라고 했던가. 전체 아홉 층 각 층 마다 불당과 불감이 있어 약 10만존 가까운 불상과 벽화가 있기에 십만불탑이라고 한다. 탑에 존재하는 108곳의 불당 문을 모두 지나면 또한 모든 부처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상부의 연꽃을 떠받친 13개의 금륜은 수행성과의 13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최상부에는 금빛 법륜이 있고 아래로는 불안(佛眼)을 그려 넣었다. 세속에서 스스로 지은 죄가 많아서일까. 눈빛을 보면서 느끼는 따스함 보다는 가슴에 흐르는 서늘함이 먼저다.
돌산을 내려가 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었는데 관리인이 앞을 가로 막으며 팻말 하나를 가리킨다. 카메라를 메고 들어가면 돈을 내야하고 아니면 카메라를 맡겨두고 들어가라는 말이다.
일종의 촬영비를 받는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나는 한사코 카메라를 풀어 내밀고 그들은 또한 한사코 카메라를 돌려주며 돈을 요구한다. 재미있다. 장난으로 내 밀었던 카메라를 돌려받고 대신 돈을 건넸다. 탑 속은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각 층이 연결되고 또 매 층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다.
탑의 중간쯤에 올라서면 간체가 다 보이는 것 같다. 네모반듯한 집들과 밭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구름이 많이 떠 있지만 하늘이 어둡진 않고 기분 좋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까 버스를 타고 지나온 거리를 걸어보기로 하고 사원을 나선다.
야동ㆍ라싸ㆍ시가체 잇는 교통 요지
무장한 영국군에 굴복한 역사 간직
"수백 년간 반복된 네팔의 침략을 지켜주던 드종요새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영국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만다. 이 비극은 결국 '라싸조약'으로 이어져 반세기에 이르는 긴 세월을 영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토번왕조가 무너지고 티베트가 분열되자 이 지방 토호였던 팍파 팔 상포(白闊贊普)가 궁을 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600년도 더 지난 옛 이야기다.
갼체(지앙즈 江孜)는 이렇게 깊은 역사를 가진 도시다. 야동(亞東)과 라싸, 시가체를 잇는 주요한 교통의 요지이며 남부 티베트의 중심 도시이기도 한 곳이다.
수백 년간 반복된 네팔의 침략을 지켜주던 드종요새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영국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만다. 이 비극은 결국 '라싸조약'으로 이어져 반세기에 이르는 긴 세월을 영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다른 도시와는 상대적으로 한화(漢化)가 덜 된 곳이긴 하지만 큰 길에서는 옛날을 보기 힘든 곳이다. 한 걸음만 뒷길로 접어든다면 과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하는 곳이 바로 갼체다.
사원을 빠져 나오면 어김없이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늘어 서 있고 도로 양쪽으로는 새로 지은 집들인지 멋없는 집들이 똑 같은 모양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사원 안에서 바라보았던 오랜 집들은 길가의 집 뒤로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언제나 이렇다. 오랜 것들은 뒤로 밀리고 새로운 것들이 앞으로 나선다.
사원으로 들어갈 때 봐두었던 돌에 새긴 육자진언(六字眞言ㆍ옴마니반메훔)을 집어 들었다. 그냥 산자락에 굴러다니는 허드레 돌을 주워 대충 다듬고 진언을 새기고 조잡하게 칠을 한 것이다. 그나마 깔끔해 보이는 것으로 세 개를 샀다.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 구경하다가 나올 때 사겠다고 지나치는 말로 약속을 했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하나쯤은 티베트만의 기념품을 가지고도 싶었다.
아직 시간은 많다. 해가 늦게 지는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이다. 시가체로 돌아가기 전 사로사원(夏魯寺) 한 곳을 더 들르고 나면 다른 계획은 없다. 오후를 갼체 거리에서 보내기로 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뗀다.
거리에는 온갖 것이 다 있다. 소의 코뚜레부터 함석으로 만든 갖가지 일상용품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다. 길을 걷는데 눈이 번쩍 띈다. 차를 좋아하니 차를 담은 대나무 포장이 눈에 보이자 그만 반가움이 왈칵 밀려 든 것이다.
스추안 야안(四川 雅安)지방에서 만들어 운반해 온 변전차다. 보이차와는 구별되는 흑차(黑茶) 계열로 고급차는 아니지만 야크 버터와 함께 수요우차를 만드는데 쓰이는 것이다.
고원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소금과 함께 생명수와 같은 소중한 차다. 마음 같아서는 몇 꾸러미 사고 싶지만 들고 다닐 생각을 하니 끔찍스럽다. 눈으로만 실컷 마시고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영웅성 아래 광장의 한 쪽은 상가와 노점상들로 즐비하다. 그런 만큼 활기도 넘친다. 우리나라 시골 5일장을 보는 듯하다. 곱게 차려입은 두 노파가 웃음을 나누며 나란히 걷는 모습에는 나이가 사라지고 없다. 맑고 천진한 모습이 소녀에 다름 아니다.
자동차는 외지인들이나 이용하는 것인가. 마차가 흔하게 눈에 띈다. 근처 작은 마을에서 읍내마실 이라도 나온 것인지 노부부는 느리게 마차를 몰고 있다.
천천히 걷는다고 했지만 워낙 짧은 거리라 금방 정류소에 닿았다. 아침에 타고 온 버스는 채우지 못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사로사원 가는 길을 물었더니 친절하게 가르쳐주며 자신의 버스를 손으로 가리킨다. 어차피 시가체 나가는 길가에서 내려야 한다. 검은 구름은 점점 흰색으로 바뀌고 하늘색도 푸른빛이 나타난다. 갼체를 떠나면서 다시 보는 드종요새는 푸른 하늘 아래서도 변함없이 파스텔톤으로 가라앉아 있다.
너는 여행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어 가진 만큼
생각해야 할 일이 많겠지만 우린 단지 이것 뿐이다
좋은 일로 창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창을 마셔서 즐겁다
버스를 타고 시가체 지척까지 왔을까. 갑자기 기사가 내게 버스에서 내리라고 했다. 작은 마을 초입에서 나는 어리둥절한 채 내리 비치는 햇살을 고스란히 받고 섰다.
눈길을 이리저리 돌리자 사원을 알리는 간판이 보인다. 나를 태워준 기사가 말한 대로라면 시가체에서 사로사원까지 다니는 버스가 있다. 하지만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느니 차라리 나는 걷기로 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원에 내리쬐는 햇살은 살갗을 찌르는 것 같다. 인적하나 없는 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경적이 울린다. 반가운 마음에 훌쩍 올라 탔다.
버스는 흔적만 있는 길을 따라 개울도 건너고 돌길도 지나 잘도 달린다. 도로가 좁아져 더 이상 자동차가 다닐 수 없을 만큼 될 즈음 차가 멈추어 섰다.
지금까지 다닌 사원 가운데 가장 수수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 개울과 나란히 난 좁은 길을 꺾어 들면 작은 구멍가게 하나, 그리고 매표소도 없이 바로 사원 마당이다. 엄숙한 사원이라기보다는 마을 사람들이 편하게 모여 이야기도 하고 놀기도 하는 사랑방 같은 느낌이다. 가게 앞에서는 승려들과 마을 주민들이 음료수를 나누며 웃음 섞인 대화가 오고 간다.
사원이 있는 곳은 총퇴(叢堆)산 골짜기다. 총퇴라는 지명은 '상업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산골에 있는 궁핍한 작은 마을이지만 토번시기에는 10대 상업도시 중의 하나였으며, 원나라 때에는 티베트 13개 만호(萬戶)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당시의 번영은 꿈처럼 흘러가고 지금은 쓸쓸한 성벽 일부만 남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사원의 창건자 시라오지옹나이(西繞炯乃)가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 사상(師像)께 절터를 정해 주기를 간청했다. 사상은 '지팡이를 화살처럼 던져 떨어지는 곳이 곧 절터라고 했고, 지팡이는 연초록 풀밭에 떨어졌다' 해서 생긴 이름이 시아루(夏魯)이니 곧 어린잎, 혹은 새싹이라는 뜻이다.
이곳 사로사원에는 네 가지 보물이 있다고 한다. 108조각의 단향목(檀香木)으로 만든 경판과 동탑 안에 봉안된 성수, 그리고 창건자가 사용하던 세숫대야. 마지막 하나는 자연석에 천연적으로 새겨진 6자 진언이다.
성수는 12년마다 한 번씩 물을 더한다는데 그 물은 가히 108가지 온갖 더러움을 씻어 줄 수 있단다. 속세에 찌든 때가 많아서일까. 1000리가 넘는 먼 길을 날아온 관광객이지만 동탑을 덮은 붉은 천을 벗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사원 문 앞의 공터는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다. 짓궂게 생긴 몇 녀석이 내게로 다가와서 장난을 건다. 영어로 인사를 건네는 녀석이며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카메라를 응시하는 녀석들…. 옷이고 얼굴이고 씻지를 않아 꼬질꼬질하지만 그 모습에서 천진함이 묻어난다. 한 무리의 서양 관광객들과 어울려 디지털 카메라 창을 보며 웃는 모습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한 녀석이 내 카메라를 가리키며 사진을 찍어 달랜다. 사진은 당연히 전해 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LCD창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잠시라도 보고 싶은 마음일 게다.
사원 앞을 흐르는 개울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있던 한 무리의 티벳탄들이 노래를 부르며 흥에 겨워했다. 궁금증에 다가가보니 남녀가 옷을 곱게 차려 입은 채 어울려 '창'을 마시고 있었다.
어떤 좋은 일이 있어 술을 마시며 이렇게 즐거워하느냐는 물음에 돌아 온 대답은 또 한번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너는 여행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어 가진 만큼 생각해야 할 일이 많겠지만 우린 단지 이 것뿐이다. 좋은 일이 있어 창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창을 마셔서 즐겁다."
내게로 건네 오는 술잔을 받을 엄두도 못 내고 나는 비실비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치 뭔가에 가슴을 한 대 맞은 것처럼 먹먹해진다. 좀 전에 도착한 버스는 시가체로 나가자고 보채지만 계속 걷고 싶을 뿐 차를 탈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다.
티베트의 강남 닝트리
택시 타려고 목적지 말해도
"지금 가기엔 너무 멀어요"
라싸에서 동쪽으로 400㎞. 티베트의 강남이라는 닝트리가 있는 곳이다. 얄룽창포 대협곡을 만나러 가는 길 중간쯤에 있는 이곳은 해발 4730미터의 스지라산(色季拉山) 자락을 통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길을 넘어야 한다. 스지라산 정상에 오르면 계속되는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울창한 숲과 계곡을 지나 닝트리에 도착한다.
닝트리 가는 길 군데군데 천막집이 보이고 차를 끓이거나 난방을 하는 듯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이렇게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아무리 초원이 넓어도 사람이 살 수가 없다.
얼음 덩어리 위에 풀이 덮여 있는 형국이니 아무런 채소도 곡식도 자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원이 아닌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오체투지를 처음 본 것은 닝트리 가는 길에서였다. 대개 두 사람이 생필품을 실은 수레를 끌고 밀고, 또 두세 명의 신도가 절을 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이들의 공덕은 절을 하는 사람이나 수레를 끄는 사람이나 모두 똑 같다고 여긴다.
적어도 이들은 그렇다고 믿고 있다. 길을 나설 때는 한 통의 수요우차와 한 포대의 짠바, 그리고 한 덩이의 차와 냄비 하나면 된다. 오체투지를 하며 가다 길가에서 잘 마른 야크 배설물을 주워다가 돌을 둘러쌓고 냄비에 물을 끓이면 차와 식사가 한 번에 해결되는 것이다.
이 길은 사천과 티베트를 이어주는 주요한 도로이며 그만큼 큰 차들이 많이 다니기도 한다. 위험천만해 보이는 이 길에서도 절은 계속된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라싸로, 조캉으로 모여들게 하는가. 자동차로 몇 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왜 수십 일 동안을 길 위에서 보내는가. 티베트에 도착해 생긴 의문이지만 한참을 둘러보고 많은 티벳탄들을 만난 지금도 풀리지 않는다.
오후 늦게 빠이(八一)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규정 속도를 지키느라 평소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숙소를 정하고 거리로 나와 지나는 택시를 세웠다. 오후에 갈려고 생각해 놓은 곳을 말하고 차비 흥정을 위해 거리를 물어보았다.
택시 기사는 너무 늦게 왔다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한 두 곳 모두 지금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아쉽지만 그냥 시멘트로 만들어진 동네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두 곳의 사원과 몇십 가구로 이루어진 작은 산골 마을에 불과했던 빠이는 50년대 이후 급속한 발전을 했다고 한다. 북쪽을 제외한 세 방면으로 교통의 요지이며 또한 산과 물이 가까워 각종 약재와 송이, 동충하초 등이 나온다. 새 건물들이 즐비한 빠이는 닝트리의 중심지라고는 해도 걸어서 한 시간이면 구석구석을 다 돌아 볼 수가 있을 만큼 작은 동네다.
음반을 사려고 돌아다니는데 정작 음반가게는 보이지 않고 녹송석(綠松石)을 파는 가게가 몇 군데 보인다. 시간도 보낼 겸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터키석으로도 불리는 이 돌은 여인들의 장식용으로 많이 쓰이는 데 풍습에 의한 관절염 예방도 된다고 하여 제법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된다.
중국의 4대 명옥 중 하나인 만큼 귀하기도 하여 판매도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처럼 그램 단위로 한다. 가족여행을 온 듯, 중년 남자가 아내와 딸을 데리고 여러 개의 녹송석을 놓고 흥정 중이다.
이 돌 저 돌 고르며 서로 생각을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나는 지켜만 보면서 괜히 혼자서 즐거워한다. 볼수록 만질수록 돌이 예쁘다. 원하는 음반은 결국 못 찾아서 못 사고 녹송석으로 만든 팔찌와 목걸이만 두어 개 사고 말았다.
하루 종일 버스에 시달려서인지 점심을 든든히 먹었는데도 해가 넘어가자 시장기가 밀려온다. 혼자 이것저것 시켜먹기도 머쓱하다. 돼지고기로 만든 간단한 요리 한가지와 쌀밥 한 공기, 작은 백주(白酒) 한 병을 주문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차편을 알아보았더니 얄룽창포로 가는 버스는 없다. 닝트리 라오시엔청(老縣城)까지 가는 차는 있지만 그 곳에서도 강까지는 멀다.
하는 수 없이 여행사에 차를 예약 했으나 반드시 간다는 보장도 못 받았다. 네 명 이상이라야 차가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제 얄룽창포 대협곡을 보고 못 보고는 인연에 맡겨야 한다.
강물 만나는 지역마다 마을
자동차 도로가 통하지 않는
숨어있는 '성스런 연꽃의 땅'
새벽 6시. 전화벨이 울린다. 한국에서라면 여름 새벽이라 벌써 동이 훤히 밝아왔겠지만 이곳은 아직 어둠에 싸인 한밤중 같은 느낌이다. 얄룽창포와 남차바르와봉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으로 기분 좋은 새벽이다.
빠이(八一)를 벗어나 1시간쯤 달리자 오래된 동네 린즈 라오시엔청(林芝 老縣城)이 나타난다. 마을 앞에서 쓰촨(四川)성으로 이어지는 천장공로(川藏公路-사천성 청두에서 티베트의 라싸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버리고 마을로 접어든다. 마을을 벗어나면 다시 비포장도로로 1시간. 이제 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구름이 산허리를 감고 푸른 초원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말과 야크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은 말로 형언하기가 힘들다. 세외도원이 이럴까.
협곡을 보기 위해서는 모터보트를 타고 1시간 가량 강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강은 서쪽 산남(山南)지역이나 라싸 근처와는 수량부터가 다르다. 강에서 멀리 보이던 산들은 물가로 바짝 다가서서 깎아지른 절벽을 만들고, 유유히 흐르는 푸른 물은 경외감을 불러 일으킨다.
노란 보트는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살처럼 강을 가른다. 한 시간 가량을 달려 저쪽 언덕에 닿자 다시 나타나는 작은 마을. 어머니의 강 '얄룽창포'는 이렇게 티베트 땅 서쪽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흐르며 만나는 지역마다 마을을 이루게 하고 있었다.
배에서 내린 곳은 근처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집들이 모여서 생긴 작은 마을인 듯 새집들로 깔끔한 모습이다. 한적한 마을 안길을 마치 제집인양 돼지가 돌아다니고 마을 사람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리자 작은 버스 한 대가 산에서 내려왔다. 대협곡 초입까지 우리를 태워 줄 버스라고 한다.
구불구불하고 고르지 못한 길을 20여분 올라가자 바로 세계 제 15좌 남차바르와 앞에 내려주었다. 얄룽창포는 눈 아래서 거대한 굽이를 만들며 남차바르와봉을 휘감아 돌고 있다. 이곳에서 강은 크게 방향을 바꾸어 인도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얄룽창포라는 이름도 여기까지다. 인도로 들어서면 '브라마 푸트라 강'으로 그 이름이 바뀌는 것이다. 아까부터 흐린 날씨는 결국 빗방울을 날린다. '푸른 하늘을 찌르는 창' 남차바르와는 구름 속에서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상반신은 완전히 구름 속에 있고 발등만 살짝 내놓은 상태다.
가는 빗줄기 속에서 한 시간 가량을 기다렸지만 남차바르와를 보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밀링(미린ㆍ米林)에서 메톡(모투오ㆍ墨脫)으로 들어가는 길이 가슴에 맺히도록 마음을 끌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음으로 미룬다.
티베트에서 뿐만 아니라 전 중국에서 유일하게 자동차도로가 통하지 않는 현(縣)급 동네가 바로 메톡이다. 불교도들은 메톡을 '白隅白馬崗'이라 말한다. 번역하면 '佛之淨土白馬崗 聖地之中最殊勝' 혹은 '隱秘的蓮花聖地'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숨어 있는 불교 최고의 성지, 성스런 연꽃의 땅이란 말이 되겠다.
밀링에서 메톡으로 해서 포메(뽀미ㆍ波密)까지 걸어 나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열흘, 길게는 스무날 가까이 필요하다. 너무 쉽게 생각하고 정보도, 준비도 없이 이곳까지 들어온 나는 얄룽창포 대협곡을 천만분의 일 정도만, 그것도 눈으로만 보고 돌아나가야 한다. 남차바르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기상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교만하게 함부로 움직인 대가가 아닐까. 현지 주민들이 일러주는 남차바르와 안쪽 계곡을 가리키며 폭포 어쩌고 하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메톡으로 갈 수 없음에 마음만 아프다.
즐거운 추억속으로
낙안읍성ㆍ지리산 청학동 같은
중국 각지 '작은 마을' 이야기
티베트를 여행하면서 마음속으로 여행기를 두 부분으로 그리고 있 었다. 처음은 현재의 티베트 땅. 뒤는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티베트가 아닌 땅. 그래서 하나는 '하늘 끝에 걸린 땅'이었고 또 하나는 '티베트 밖의 티베트'였다. 그런데 두 가지의 큰 사건과 사고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티베트의 독립시위가 하나고, 사천지역의 대지진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어쩔 수 없이 게재 횟수를 절반 정도로 줄이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오래된 마을'이란 이름으로, 중국 각 지역의 크고 작은 고촌(古村)이야기가 되겠다. 고촌이라 하면 우리나라로 치면 크게는 안동의 하회(河回)마을이나 전남의 낙안읍성, 작게는 지리산의 청학동 정도가 되겠다.
관광지로 개발돼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대형 주차장이 아스팔트로 뒤덮인 곳에서부터 아직 찾는 이가 몇 되지 않는 골짜기의 조용한 작은 마을까지 300곳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수년 전부터 엊그제까지 짬짬이 찾았던 여남은 곳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엮어 보려고 한다.
한중관계가 정상화된 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중국 여행이 종내에는 나를 그 땅에서 한 동안 살도록 만들었다. 산동성(山東省)의 공자 고리(故里) 곡부(曲阜)와 태산(泰山)을 시작으로 매년 한 두 차례 정도 여행을 다녔다. 그러다 99년 말부터 3년가량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서 살았다.
그 때 이름난 몇 곳의 고촌을 여행한 뒤에 친구를 따라 항주에서 자동차로 두세 시간 떨어진 시골 마을로 여행을 갔다. 같이 간 친구의 고향마을이다. 중국 사대미인 중의 하나인 서시(西施)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밤늦은 시간에 도착해서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 일찍 눈에 들어온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기와지붕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기다란 지붕아래 여러 세대가 들어 살고 있는 2층 기와집은 마치 연립주택 같았다. 손바닥 보다 조금 커 보이는 기와를 촘촘히 올린 지붕은 오래 되어 그런지 줄도 맞지 않는다. 나무로 엮은 골조를 세월이 비틀어 버린 것이다. 연필로 대충대충 스케치를 마친 그림 한 장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름난 관광지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아침 느지막하게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흔한 구멍가게 하나 보이질 않는다. 강아지만 두어 마리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뿐 인적도 드물다. 겨우 찾은 국수집은 막 파장 무렵인지 그릇들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친구와는 잘 아는 사이인 듯 늦게 간 우리에게 웃으면서 국수를 내온다.
시골인심은 어디나 같은가 보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먹은 국수 값을 어찌 받겠냐며 손사래를 치고, 기어이 돈을 치러야한다고 밀고 당긴다. 두 그릇 국수 값이래야 우리 돈 500원도 안 되는 돈이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도 진한 인정을 보인다. 씰룩거리는 입술 사이로 잔잔한 웃음이 배어 나오게 만든다.
되려면 인연은 이렇게도 쉽게 찾아온다. 별 생각 없이 찾은 항주근교의 시골여행이 긴 시간을 두고도 잊지 않고 숨은 마을들을 찾게 된 여행의 시작이 되었다.
북으로는 북경보다 위쪽인 하북성(河北省)에서부터 남으로는 베트남과의 국경지대인 운남(雲南)까지 남북으로 동서로 수천 킬로미터를 오가며 힘들지만 즐겁게 찾아다닌 마을들이다. 우리와는 다른 정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와 같은 훈훈한 인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념이나 정치와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간혹 멍하게 앉아 지난 여행을 생각해보면 슬며시 떠오르는 미소가 있다.
강소성(江蘇省) 어느 시골마을에서 만난 촌로께서 어디서 왔냐고 물어 한국이라고 대답했다. 잠시 생각을 하시더니 되물으셨다. "삼국시대 때 한국?" 아마도 그 때 방영되던 시대극이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했을 것이다. 정말 즐거운 기억들이다. 문방사우 가운데 붓으로 유명한 후조우(湖州) 근처에서의 일이다.
일 년에 두어 번 붓을 매어 생계를 꾸려 나가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그 때 만난 노인의 이야기다.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시대와 현실을 한시대로 같이 사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며 경제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이렇게 순박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떤 내용인들 즐겁지 않겠는가.
이런 즐거운 추억들과 여행지에서 만난 순박한 사람들과의 인연이 아직까지 시골여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매력인지 모르겠다. 혼자만의 욕심이겠지만 이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고 아름다운 마을들이, 또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이 영원히 변치 않아 반짝이는 보석처럼 빛나기를 빈다. 사는 것이 좀 불편하고 먹는 것이 조금은 부실해도 순수가 고스란히 남아있기를 간절히 빈다.
이 여행기가 언제까지, 어느 동네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여행이 단순한 여행으로 끝나지 않고 내가, 혹은 우리가 살고자하는 삶으로 이어지기를.
소금무역상들 모여살던 곳
처첩 아편값 감당못해 몰락
관광지로 지정됐지만 한산
그 가운데서도 허촌은 황산 근처의 몇몇 마을 중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가장 최근에 개방된 마을이다. 절강성과 안휘성의 경계에 있는 벼루의 산지로 아주 이름난 흡현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작년 겨울 안휘성에 살고 있는 중국 친구와 황산설경을 보기위해 추위를 마다않고 산엘 올랐다. 2~3일을 함께 보내고 헤어질 무렵 내 취향을 잘 아는 그 친구가 일러준 동네가 바로 허촌이다. 관광지로 지정되어 막 개방된 곳이라 아직은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개발되어 더 이상 망가지기 전에 찾아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다가 올해 초 여건이 허락되어 어렵게 찾아 간 곳이다.
황산시에서 허촌으로 가는 길을 몰라 애를 태우다가 하는 수 없이 그곳 친구들의 도움을 구해 현지 여행사와 연결이 되었다. 하지만 여행사에도 모르긴 매한가지다. 허촌으로 전화를 걸어 길을 묻고, 길을 아는 기사를 찾느라 법석을 떨었다. 그렇게 한나절이나 보내고 나서야 겨우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작은 버스 한 대가 힘겹게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의 도로가 마을 한가운데로 지나고 길 가장자리는 그대로 시장이며 여염집마당이다.
동행한 기사에게 이 길이 맞느냐며 열 번은 더 물어 본 것 같다. 아무리 봐도 그냥 산골짜기로 들어가는 길이다. 가봐야 볼거리가 있는 마을이 나타 날 것 같지가 않다. 그렇게 좁고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을 구불구불 한 시간 쯤 달리자 제법 번듯한 마을 하나가 나타나고 저 앞에서 중년의 남자 하나가 달려 나온다. 여행사의 전화를 받고는 탐방객을 많이 기다린듯하다. 얼마나 반갑게 대해 주는지 송구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널리 알려지지도 않은 곳인데다 겨울이라 찾는 이가 그만큼 적다는 말이겠다. 이곳저곳에 볼거리가 흩어져 있어 제대로 돌아보려면 2~3일도 부족하단다.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 많이 모여 있고 골목이 그런대로 잘 보존된 곳으로 안내를 해준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다. 입장료 수입이 부족한지 마을 입구에 있는 매표소에 안에는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보아하니 이 남자 혼자서 매표와 안내 등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듯하다.
소금 무역으로 막대한 재력을 쌓은 휘상(徽商)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시골의 궁벽한 마을로 변했다. 부유한 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주색의 길로 접어들어 늘어난 처첩들의 아편 값을 감당 못해서 서서히 망해버린 것이다.
집들은 크고 화려하지만 이미 몰락한 살림살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궁색한 빛이 역력하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작은 가게 하나 보이지 않는다. 찾는 이도 드물겠지만 돈이 그만큼 귀한 동네라는 말이다. 화려한 휘상의 명성은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고 거부의 화려함은 후손들에게 전설처럼 남았다.
밥그릇을 들고 골목으로 나선 노파와 눈인사를 나누고 한 굽이를 돌아들자 소학교 앞이다. 두어 시간 주어지는 점심시간에는 집에서 밥을 먹고 할아버지가 태워 주는 자전거를 타고 다시 학교로 온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라 잠시 교실에 들어가 봤다. 아직 저학년인 듯 키 작은 아이들이 콧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환한 웃음을 보내온다. 어디서 왔느냐, 뭐하는 사람이냐? 여남은 녀석들이 한꺼번에 터뜨리는 질문으로 정신이 없다. 아이들을 위해서 준비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미안한 마음으로 사진 몇 장을 찍어 보여주었다. 카메라를 통해서 자신들의 모습을 본 아이들은 이제 서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난리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뭐하는 사람인지는 관심도 없다. 질문은 질문으로 그만이다.
허촌은 아직 이렇다. 아무런 꾸밈도 없이 사람이 사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곳이다.
황산시에서 출발하여 스시엔을 거쳐 허촌으로 가는 한 시간여의 노정에는 안내판 한 개 보이지 않는다. 길이 두 갈래로 나뉘면 차를 세워 길을 묻고 행여나 지나칠세라 저 멀리 작은 동네라도 보이면 고개를 빼고 바라보았다. 작은 개울에 걸린 좁은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고, 논가로 밭 옆으로 길은 있는 듯 없는 듯 계속 되고 있다. 마치 몸을 숨기고 사는 은자처럼 허촌은 그렇게 말없이 찾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봉황 8경' 진수 외지인 탄성
손재주 뛰어난 묘족들의 터전
고풍스런 분위기 신비감 더해
봉황 타강가에서 만나는 아침.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옅은 운무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방문한 이야기를 듣고 안견(安堅)이 그렸다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말 그대로 상상속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상상속의 풍경이 호수(동정호)의 남쪽, 호남성(湖南省)에 가면 실제로 있다. 아득한 옛날 바다 속에 잠겨 있다가 솟아오른 약 3000개의 기암괴석들이 하나하나의 봉우리로 총립한 장가계(張家界)의 절경이 바로 그 곳이다.
이 장가계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 수백 채의 기와집과 고풍스런 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옛 마을이 있으니 봉황진이다. 묘족(苗族)들이 천년도 더 이전부터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 곳이다. 마을 가운데로 강이 흐르고 있어 배를 띄워 분위기에 젖어들면 봉황 8경 가운데 하나인 '타강범주'가 된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상을 가진 마을이라 배를 타고 보는 것이 제대로다. 괜히 8경 가운데 하나로 든 것이 아니다. 사공의 노를 젓는 몸짓을 따라 맑은 물속에서는 수초가 함께 흔들리고 아스라이 들리는 묘족의 노래 소리가 몽환적이다. 강가의 붉은 사암과 푸른 물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색과 그 뒤로 둘러선 푸른 산색은 말하지 않아도 8경중의 또 한 가지가 된다. 고요한 강물과 그 물가에서 욕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탑은 말없이 그 긴 세월동안 마치 나를 기다려 온 것 같다. 새벽을 알리는 '산사신종(山寺晨鐘)'의 맑고 고요한 종소리를 대신해서, 혼자서 들었을 그 종소리를 탑은 온몸으로 전해 준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 만해도 강위로 뗏목을 타고 나무를 하러 다니는 주민들이 일상이었을 정도로 봉황은 숨겨진 옛 고을이었다. 80년대에 들어와 외부세계로 알려지면서 '상서(湘西)의 세외도원(世外桃源)'으로 이름이 났다. 湘西라하면 湘이 호남성의 옛 이름이니 토가족(土家族)과 묘족(苗族)들이 많이 살고 있는 호남성 서부 지역을 이름이다. 묘족은 일찍이 독(毒)을 잘 다루는 신비한 민족으로 알려져 다른 소수민족들은 묘족의 집에서 식사하기를 꺼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빵 한조각과 차 한 잔으로 점심으로 때우는데 외부인임을 알아 본 주인장이 묘족에 관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봉황진은 워낙 시골이라서 묘족 남자들은 외부로 나가서 장사를 많이 했다고 한다. 골짜기에서 길을 나서다보니 일정은 길어지게 마련이고 그러니 이런저런 일이 생기는 것은 다반사였을 게다. 남편이 외도한 사실을 알게 되면 아내는 내색도 하지 않고 밥에다 독을 탄다고 한다.
그 사실을 모르고 맛있게 식사를 마친 남편은 다시 아내와 이별을 하고 장삿길로 나선다. 문제는 독이 든 밥을 먹어도 당장은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달 정도 장사를 다니다가 서서히 증상이 나타나면서 죽는다고 하니 참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이야기다.
타강을 따라 구경을 하며 길을 걷다보면 무지개다리인 홍교(虹橋)가 나타난다. 다리는 마치 마을의 상징인양 봉황진의 가운데쯤에 자리하면서 강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 주며 60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리의 양쪽과 강 건너편으로는 길을 따라 장사꾼들이 앉아 별의별 물건을 다 내놓았다. 여느 관광지에서도 볼 수 있는 기념품에서부터 손으로 직접 만든 수공예품과 심지어는 채소를 바구니에 담아 어깨에 메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묘족들의 손재주가 뛰어난지 여러 가지 공예품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은으로 만든 세공품이 유명하다고 한다. 목걸이 두어 개를 들었다 놓았다 망설이다가 도저히 잘 고를 자신이 없어 슬며시 놓고 문을 나선다.
땅거미가 내릴 즈음 객잔을 잡아 짐을 풀고 강가에 앉으니 낡은 기와집 지붕의 수수한 곡선을 따라 꼬마전등이 켜진다.
강을 마주하고 눈을 감으면 세월의 흔적으로 채색된 물가의 집들과 비에 젖어 반짝거리는 돌길이 눈에 선하다. 나는 마치 예전부터 이 동네에서 살아 온 듯 한 착각에 빠져 혼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상념에 젖어간다.
성문 닫아걸면 외부와 차단
구식은행 등 옛모습 그대로
북경서역에서 서쪽으로 가는 열차를 타면 철로는 두 갈래로 나뉘어 달린다. 하나는 운강석굴이 있는 따통(大同)방향이고, 또 하나는 산서성의 성도인 타이위엔(太原)과 시안(西安)을 지나 티베트와 실크로드 가는 길로 다시 갈라진다. 이번에는 황토고원과 크고 오래 된 고가(古家)와 아직 주민들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고성을 만나기 위해 산서성(山西省) 태원으로 간다.
시간과 경비를 줄이기 위해 북경에서 밤에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밤 10시를 넘겨 출발한 열차는 이튿날 아침 일찍 태원에 내려준다. 시간이 좋다. 잠도 잘 잤고 아침 이른 시간이라 온 하루를 시작하는데도 무리가 없다. 역 광장을 건너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하는데 광장 한쪽으로 버스가 여러 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평요고성 가는 버스도 있다. 터미널까지 가는 발품을 줄이고 남는 시간에 간단한 요기까지 할 수 있다. 순조로운 출발에 기분도 좋아진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정말로 없나보다. 평요고성을 지나서 남쪽의 작은 도시로 가는 이 버스는 고속도로 출구에 나를 내려주고는 제 갈 길로 간다. 터미널로 가는 발걸음을 줄인 대신 고성까지 꼬박 십리나 되는 길을 걸어가야 할 판이다.
우선은 고속도로에서 벗어나야하지만 차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데 고속도로 위 육교 위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나 혼자만 황당해 할 뿐, 고속도로에 내려 길을 찾는 일은 여기서는 일상사인가보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는 길을 일러주고는 자신의 승용차로 안내한다.
잠깐 함께 걷는 동안 고성에 관한 설명을 해 줬고 거리가 얼마나 멀며 걸어가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강조한다. 자가용 영업을 하는 자의 호객행위다. 너무나 중국다운 상황에 헛웃음이 나온다.
핑야오 고성은 전체 성벽이 6킬로미터에 이르며 한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가장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성곽도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을 만큼 성곽도시가 가지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방의 성문을 닫아걸면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되는 고성은 가운데 자리한 시루(市樓)를 중심으로 바둑판처럼 길이 잘 만들어져 있다. 시루는 위로 올라가면 사방으로 평요고성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누각이다.
고성의 좁고 넓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다니면 크고 작은 사원과 오래 된 점포, 구식은행과 여관 등 모든 것이 볼거리가 된다. 그 가운데서도 은행의 전신으로 알려진 일승창표호(日升昌?號)는 '청나라 금융일번지(大淸金融第一街)'라 일컬어지는 평요고성을 대표할 만큼 유명하다. 먼 땅에서 장사로 번 돈을 안전하게 고향으로 가져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에는 말할 나위가 없겠다. 길 곳곳에서 도적이 출몰하던 이 시기에 안전한 귀향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일승창이다.
현지에서 금액만큼 어음을 발행해주고 현금 수송을 맡았다. 상인은 가벼운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어음을 내밀면 그 만큼의 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일승창을 비롯해서 몇몇 구식은행들이 은행 박물관으로 변해 있다. 이 밖에도 고성 이곳저곳에는 우리의 칼국수 비슷한 산서성의 특미인 도삭면(刀削麵) 가게도 여럿 있고 분위기가 꽤 괜찮은 여관도 여러 곳이다.
큰 길에서 한 블록만 들어가면 실제로 주민들이 거주를 하고 있어 기념품보다는 생필품을 파는 가게들이 대부분이다. 아침 일찍 거리에 나서면 전날 저녁까지 관광객들로 붐비던 골목골목이 야채며 육류나 빵을 파는 시장으로 변해 있다. 한참동안 골목을 누비다가 아까부터 따라다니던 삼륜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어차피 걸어서는 구석구석 다 보기는 어려울 터, 이 곳 사정을 잘 아는 이의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경비도 크게 비싸지 않은 것 같아 한 푼도 깎지 않았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도 별로 없는데다가 삯까지 후하게 받아서 그런지 자전거를 모는 아저씨는 아주 신이 났다. 묻지도 않은 말을 해가며 이런저런 설명을 곁들인다.
한 시간여에 걸친 고성 자전거 투어는 그렇게 기분 좋게 지나갔다. 여행을 하면서 간혹 기대 이상으로 멋진 결과가 생기는데 이번에도 덤을 듬뿍 받은 기분이다. 속으로 횡재를 했다는 느낌은 아마 나나 그도 같지 않았을까
'차마고도' 역참 중 한곳
96년 대지진 후 알려져
조용한 휴양여행 '적격'
속하고성(束河古城)이라고 널리 알려진 이 고촌은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선 속하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물과는 뗄 수가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겠다. 마을의 형상을 살펴보면 뒤로 세 개의 산에 의지하고 있고, 앞으로는 세 줄기의 하천이 흐르고 있다. 이렇게 '삼 좌의 산과 세 줄기
물이 함께 하는' 형상(三山共三河)을 하고 있다. 속하촌은 물로 골격을 삼고 물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또 물을 곁 하여 길을 내었다.
물과 길과 다리와 집들이 하나로 녹아 일체를 이룬 것이다.
그래서 속하촌 혹은 용천촌(龍泉村)이다.
지형에서 나온 이름이 '속하(束河)'라면 이 마을 특산품인 가죽제품에 얽힌 전설에서 온 이름이 '피장촌(皮匠村)'이다.
명나라 초의 어느 대보름날 난징(南京)의 이름난 피혁장이 동심이 발동하여 신발을 닮은 큰 등(燈) 하나를 만들었다. 재미있는 등 모양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관심을 받지 못한 등을 만든 어떤 사람의 시기를 받게 되었다.
시기와 질투에 속을 끓이던 이 사람은 곧 바로 관부로 가서 고해바친다. 새로운 황제인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아내인 마황후의 큰 발을 빗대어 등을 신발 모양으로 만들고, 그 그림자로 황후의 큰 발을 비웃은 것이라는 말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 피혁장은 영문도 모른 채 운남성의 여강(麗江)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속하마을까지 이르게 되었다.
빈 몸으로 낯선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진 재주밖에 또 뭐가 있으랴. 대도시 남경에서도 이름난 솜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의 물건은 이 근방에서 유명해졌다. 마을을 떠나 장삿길로 마방들이
길 위서 사용하는 가죽제품들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온 물건들로 속속 채워졌다.
속하마을에서 만든 가죽제품들은 날이 갈수록 널리 알려져 티베트를 지나 인도나 네팔까지도 팔려 나가게 되었다. 모자란 손은 제자들과 또 그 제자들의 제자들이 채우고 모여든 제자들이 만든 물건을 파는 전용공간까지 생기게 된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마무리가 깔끔하게 잘 된 가죽제품을 파는 가게가 여럿이다.
"속하의 피혁장! 한 자루 송곳으로 천하를 주유하다(束河皮匠 一根錐子走天下)"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수많은 분점을 가지고 있으니 수백 년 전부터 천하를 주유하던 솜씨는 아직까지 세인들의 관심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속하촌은 차마고도의 주요한 역참 중의 한 곳이며 납서족(納西族)들의 나라 동파(東巴)왕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동파라 하면 납서족들의 문화와 역사, 그들만의 종교까지 말 그대로 납서족의 모든 것을 뜻한다. 여강(麗江)고성과 함께 납서족들이 주류를 이루어 사는 지방이다. 아직까지 한국에는 그리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니어서 이곳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은 많지 않은 편이다. 여강고성만 해도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부상하였지만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운남성의 한 벽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96년 겨울에 이 지역을 덮친 대지진이 새옹지마가 되어 세인의 관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여강고성과는 달리 아직까지 인파로 북적이는 번잡함은 훨씬 덜해서 조용한 휴양여행이라면 적격인 곳이 바로 속하촌이다.
건물의 재료만 해도 참으로 소박하여 자연스런 맛이 그대로 살아있다.
마을 근처의 산야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모아 담을 쌓고, 구불구불한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세웠다.
용천하에 걸린 돌다리 청룡교를 중심으로 관광지로 개발된 지구와 옛 마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구역의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르다.
물론 옛 마을에도 카페가 있고 게스트하우스가 있지만 그 분위기는 여타의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차분한 것이 마치 우리 시골마을에서 지내는 느낌이다. 마을 골목을 걷다보면 곱게 늙으신 할머니가 파는 해바라기 씨앗과 삶은 옥수수가 부담 없는 가격으로 입맛을 당긴다.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개울가의 호젓한 카페에 앉아 마시는 한 잔의 맥주도 여행의 흥을 조용히 돋우어 준다. 오랜 세월 비와 바람에 결이 다 드러난 따스한 나무 벽이 삐뚜름하게 기울어진 집은 그대로 한 장의 파스텔화가 되어 나는 그림 속에서 노니는 이름 없는 촌부가 된다.
자동차 경적소리도 다른 나라 이야기가 되고 시끌벅적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멀리서 들려오는 아련한 노래처럼 들린다. 맑은 물위에 비치는 붉은 등을 베개 삼아 잠이 들고 산뜻한 아침안개에 잠이 깨면 그대는 어둠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오래된 마을 속하촌을 새롭게 만날 것이다.
오래된 마을(古村)을 찾아서_수천소학교(水泉小學校)
버스도 없는 오지마을
"날 저문데 자고가시라"
끼니ㆍ잠자리 걱정까지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베이징 북쪽의 어느 작은 마을. 단 한 분의 교사인 까오(高)선생님과 서른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전교생을 가진 희망소학교가 있다.
병든 어머니 간병 때문에 한 달간 학교를 비워야 하는 까오선생님 대신에 임시 교사로 온 웨이(魏)선생님은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소녀다. 워낙 시골인지라 선택의 여지조차 없다.
까오선생님은 26개의 분필을 주고 하루에 한 개씩만 사용하라고 부탁한다. 분필 하나까지 소중한 가난한 학교다. 그러면서도 웨이선생님은 한 달 뒤에 학생 수가 한 명도 줄지 않도록 보살펴 준다면 약속한 보수 외에 10위엔(元)을 더 받기로 약속 받는다.
하지만 며칠도 지나지 않아 여자아이 하나는 육상선수로 뽑혀 읍내 학교로 옮겨 가고, 말썽장이 장후이거는 어려운 집안을 돕겠다며 돈을 벌기위해 도회로 떠나버린다.
고심하던 웨이선생님은 어렵게 얼마간의 돈을 만들어 장후이거를 찾기 위해 도회로 나간다. 어떻게 사람을 찾아야 하는 지도 모르는 웨이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생만 하다가 방송국을 찾아가서 막무가내로 방송을 부탁한다.
갈 때마다 문전박대를 당하다가 방송국장의 눈에 띄어 드디어 출연이 성사된다. 장후이거 역시 끼니를 구걸하다시피 어느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다. 식당 주인이 우연히 방송을 보게 되고 두 사람은 눈물의 상봉을 한다. 방송국의 도움으로 많은 학용품까지 싣고 웃으면서 학교로 돌아가게 되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을 총지휘했던 거장 장예모 감독이 98년도에 만든 그의 대표작 '책상서랍 속의 동화(원제:一介都不能少)'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영화를 촬영한 곳이 바로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좀 넘게 떨어진 적성현(赤城縣) 닝바오(寧堡) 수천소학교이다. 아침부터 잔뜩 흐린 하늘은 버스가 적성으로 들어갈 즈음 기어코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적성에서 영보마을로 가는 버스는 없다. 택시 역할을 하고 있는 작은 승합차를 대절해야 했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지만 적성으로 오는 버스 타는 것부터 예삿일이 아니었다. 베이징의 북쪽에 있는 아주 작은 터미널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수천 희망소학교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쯤이었고 가랑비에 젖고 있는 마을은 마치 잠이 든 듯 조용했다. 자물쇠가 걸린 교문 앞에서 서성거리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마을 조무래기 서너 명이 꾀죄죄한 모습으로 나를 흘끔거린다.
영화를 만들 때 이 아이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젖먹이 아기였을 터. 영화 이야기는 전설이다.
내가 말렸는데도 아이들은 이 마을에 살고 계시다는 선생님을 모시러 뛰어가 버렸다. 30년 넘도록 이 마을에서 살며 오직 이 학교에서만 근무를 하고 계시다는 선생님이다.
비가 내리는 휴일인데도 이(李)선생님은 교문을 열고 교무실로 안내해 주셨다. 지금 사용하는 새 교사(校舍)는 영화를 다 찍은 다음 제작팀이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원래의 학교 건물은 마치 마구간처럼 변하고 영화 속 아이들이 뛰어놀고 아침 조회를 하던 운동장에는 말발자국만 선명하다. 제법 넓어 보이던 운동장이 지금 보니 시골집 마당만하다. 스무 명이 넘게 공부하던 교실과 교무실이 있던 건물도 지금 보니 세 칸 초가에 불과한 크기다.
선생님은 따뜻한 물과 담배를 번갈아 권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몇 번 집으로 가자는 말씀을 인사치레로 치부하고 귓등으로 흘렸는데 밖으로 나오자 한사코 손을 이끌어 집으로 향한다. 그의 아내에게 나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자 부인이 대뜸 하는 것은 나의 점심걱정이다.
시골은 시골이다. 그저 객의 끼니걱정에 빗길 걱정뿐이다. 따끈한 차가 나오고 앉으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 선생님의 댁은 약간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창밖으로 마을의 돌담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용히 내리는 빗속에 엎드려 있는 마을이 마치 정물처럼 보인다. 한참을 앉아 얘기를 나누어도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급기야는 자고 가라는 말씀까지 나온다. 따스한 마음이 느껴진다.
더 있다가는 정말 폐를 끼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운 이별을 고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날은 어두워간다. 방금까지 문 앞에서 맴돌던 마을 조무래기들은 굵어지는 빗방울이 부담스러웠던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차가 길모퉁이를 돌아 눈에서 벗어 날 때까지 선생님 내외분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육상선수로 선발되어 읍내 학교로 떠나는 제자를 태운 자동차를 붙잡으려고 어린 웨이선생님이 달리던 그 언덕길을 따라서 나는 마을을 떠난다.
15갈래 하천 마을 이어줘
겨울이 가고 새봄에 제비가 박씨를 물고 온다는 강남은 장강(長江)-양자강의 남쪽을 말한다. 이 강남에는 크고 작은 수향(水鄕)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통리다. 내가 통리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거의 10년 전쯤이다. 그 때는 아주 유명한 두어 곳의 수향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었을 뿐 여타의 작은 마을들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북경에서 항주까지 1700여 킬로미터의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를 따라 오후 늦게 항주에서 버스를 타고 소주로 가다보면 해가 저문다. 운하에 떠있는 배들이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서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달고 다니는 작고 붉은 등불만 느리게 움직일 즈음 나는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든다. 어둠 속 저만치 통리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언제 한 번 가봐야지 하던 것이 얼마 전에야 겨우 찾아가 보았다.
통리는 중국 10대 수향 가운데 한 곳이며 강남 수향의 조경건축을 집대성해서 만든 퇴사원(退思園)이 대표 건축물로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열다섯 갈래의 하천이 마을 구석구석을 이어주며 도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니 다리가 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쉰 개 가까이 되는 각양각색의 돌다리에는 물가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과 기쁨이 천년 세월을 내려오면서 겹겹이 쌓였다.
수년간을 가슴만으로 그리워하던 통리는 이미 생각 속의 통리가 아니었다. 마을 초입에 세워진 최근에 만들어진 석방이며 돌다리가 오랜 세월이 만든 흔적을 깎아내고 있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물가마을을 상상한 내가 잘못이겠다. 십년 가까이 혼자 짝사랑을 하다가 불쑥 나타나서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머물러 있기를 바란 것이 바보 같은 짓이었을까. 마을 입구 한쪽 구석에 자리한 허름한 식당을 찾아 만두 한 그릇을 시켰다. 실내에 들어가지도 않고 바깥에 놓인 나무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를 마치고도 마을구경할 생각도 잊은 채 오고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관광객들을 보면서 마을로 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여기까지 찾아온 길이 아까워 몸을 일으킨다. 현대화에 밀리고 개발에 망가져도 수향에는 고향의 그리움 같은 것이 곳곳에 배어있기 마련인가보다. 물길을 따라 난 길가로는 기념품 가게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호객하는 목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한다.
하지만 한걸음만 뒷골목으로 옮기면 훌쩍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곳이 또한 수향만이 가지는 맛깔난 재미이기도 하다. 어느 고촌이나 사정이 비슷하겠지만 빈번한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은 집을 고쳐서라도 가게를 만들고 뒷집은 그냥 수백 년 동안 내내 같은 생활을 하게 마련이다. 관광객의 발길이 뜸한 골목으로 들어서면 뒷짐을 진 노인네들의 쓸쓸한 뒷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겨우 몇 걸음 들어왔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시끌벅적한 소리가 사라진다. 매캐한 연탄 냄새가 스멀스멀 다가오고 장기 알 놓이는 똑딱거리는 소리만 사람이 있다는 기척을 해온다.
얼마간의 돈을 내면 노를 젓는 작은 목선을 타고 큰 물줄기 한곳은 편하게 돌아 볼 수도 있지만 나는 배를 버리고 계속 걸었다. 걷다가 힘들면 돌난간에 걸터앉아 땀을 들이면 그만이다. 물은 흐름이 막혔는지 빛이 탁하다. 그 탁한 물위로 관광객들을 실은 배가 오고가는데 가마우지를 실은 배가 보인다. 아무것도 살 수가 없을 것 같은 이 물 속에서도 물고기가 사는가 보다. 가만히 지켜보는데 관광객 한 사람과 가마우지의 주인인 듯 한 아주머니 사이에 몇 마디의 말이 오가고 얼마간의 돈을 건네니 배는 물 가운데로 나아간다.
주인이 어떤 신호를 보냈는지 횃대에 앉아있던 가마우지 두어 마리가 물속으로 뛰어들고 그 짧은 시간에도 손바닥보다 큰 붕어들이 줄줄이 잡혀 올라온다. 고기잡이가 생계수단이 아니라 가마우지 쇼가 생계수단이다. 가마우지는 목이 실에 매여 있어 큰 물고기는 삼킬 수가 없어 뱉어 내어 사람들의 몫이 된다. 서글픔이 밀려온다. 가마우지는 줄에 목이 매여 서글프고 사람은 가마우지에 매여 있어 서글프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관광객이 아닌 친지와 친구로 찾는 수향을 그려본다. 수백 년 전, 아니 수십 년 전만 해도 낯선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마우지가 더러운 물속으로 들어가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그네 귀에는 들릴 듯 말 듯 울리는 맑은 물가에서 조용조용 나누는 빨래하는 여인네들의 이야기가 그립다.
하루 종일을 걸어 다녀도 다보기 힘들만큼 넓은 마을이지만 반나절도 못 보내고 나는 떠밀리듯이 통리를 떠나고 만다. 통리를 벗어나 다급하게 어디를 가야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마음이 급하다. 이 시각에도 변해가고 있을 어느 산골 고촌을 생각하면 괜스레 마음이 급해진다.
영화 '미션임파서블' 촬영지
이발소ㆍ닳아빠진 라디오 등
흑백사진 같은 풍경에 정감
상해 바로 아래 지아산(嘉善)이란 작은 도시가 있다. 그곳에서 시내버스로 20분 정도면 도착하는 시탕(西塘)은 잘 알려지지 않은 수향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톰 크루저가 주연한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영화에 잠깐 나오는 바람에 갑자기 엄청나게 유명해져 버린 곳이다. 마른 바람이 부는 3월의 어느 날 항주로 찾아 온 친구와 함께 별 계획도 없이 찾아간 곳이기도 하다.
여행정보지에 의하면 버스에서 내리면 지척에 입장권을 파는 곳이 있다고 나와 있다. 먼지와 함께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안은 채 버스에서 내리자 삼륜자전거가 다가왔다. 아저씨는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시탕의 안내지를 보여주며 '60원'이라고 인쇄된 부분을 힘주어 누르면서 비싸다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자신의 삼륜자전거를 타면 30원만 받고 시탕 안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솔깃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속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잠시 망설이는데 그 아저씨는 아예 입장권 파는 곳을 가리키며 못 믿겠으면 가서 확인을 해 보라고 했다.
망설이는 내 마음을 읽었던지 단호하게 자전거를 내 곁으로 바짝 가져다 세운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나는 뒷자리에 올라타고 말았다. 자전거는 매표소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잠시 후 한 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듯한 아주 좁은 골목으로 빠듯하게 들어갔다.
골목을 빠져 나오자 나는 거짓말처럼 시탕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 아저씨에게 속은 것을 안 것은 그러고도 반시간이나 더 지나서였다. 입장권은 가격이 원래 30원이었다. 60원은 통표(通票)라고해서 시탕안의 모든 곳을 한 장의 입장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보고 싶은 곳을 다 보려면 매번 표를 다시 사야하는 것이다. 속고도 또 속는다.
하지만 오늘의 이 해프닝이 불쾌감을 주었다기보다는 지나치는 우스개로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시탕이 기대이상으로 괜찮은 점이 많아서이다. 관광지로 개발된 이후에 생긴 가게가 대부분이지만 아직은 생활 속의 모습 그대로 남은 것도 많다.
어깨에 메고 다니면서 파는 군것질 거리도 그렇거니와 낡은 의자와 소리도 나올 것 같지 않은 라디오가 놓여 있는 닳아빠진 선반이 걸린 이발소가 그렇다. 이발소 입구에 자리 잡고 앉은 구두닦는 아저씨들도 예스런 풍경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 그 곁에서 아주머니가 파는 두부에 양념을 뿌려서 담아내는 간식은 추운 날 먹어 볼만한 음식이다. 맛도 맛이거니와 쌀쌀한 날씨에는 몸도 따스하게 데워준다. 게다가 값도 헐하니 이만한 간식도 드물겠다.이발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해서 동서로 나뉜 마을을 계획 없이 돌아다니다보면 가운데 지역을 여러 번 지나치게 마련이다. 속도 출출하고 다리도 아프다. 두부가게 옆 돌난간에 앉아서 스티로폼 도시락에 담아 파는 두부를 한 그릇 받아 들었다. 아까부터 신발을 닦으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웃음을 던지던 아저씨들이 이제는 아예 대놓고 놀린다. 그도 그럴 것이 가죽으로 만든 신발은 제 색깔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내가 보기에도 조금은 민망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신발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맛있는 두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옆에 있는 이발소에 온통 마음이 쏠려 있다. 조금 전 지나치면서 사진을 찍으며 본 이발소 안의 분위기에 온 마음을 다 빼앗긴 것이다. 오고가는 사람들에게는 한 점의 관심도 두지 않고 카드놀이에만 빠져 있는 동네 아저씨들이며, 몇 십 년은 사용했음직한 가위와 면도칼이 눈에 선하다.
이발소 앞을 한동안 서성이다가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겨우 물어 보았다. 주인인 듯 한 아저씨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툭 던지듯이 '오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없이 손가락으로만 입구 기둥을 가리켰다. 작은 나무판에 서툰 글씨로 '사진 찍는데 5원'이라고 희미하게 적혀 있다. 이제야 이발소 분위기가 감이 잡힌다. 카메라를 목에 건 관광객이 하루에 대여섯만 들락거린다면 큰돈은 아니겠지만 하루벌이가 생긴다. 이발하는 손님 하나 없이 하루 종일 카드놀이만 해도 웬만한 봉급쟁이 벌이가 되는 것이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어지간한 노후보다 낫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이 마을에서 영화를 촬영하지 않았다면 시탕은 아직까지 진흙 속의 진주처럼 그 빛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관광객을 위한 가게가 아니라 주민을 위한 가게가 있었을 것이고 기념품을 사라고 높이 외치는 소리는 감자며 돼지고기 파는 소리가 대신했을 것이다.
공기는 차가워지고 낮부터 불던 바람은 점점 더 세어진다. 해는 넘어가고 나는 항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시탕은 여기 남겨 둔 채
중국문학의 거장 노신의 고향
영웅들이 호탕하게 마셨던 술, 黃酒의 산지
왕희지 절세의 걸작 '난정서' 탄생
지금도 소흥에 가면 시엔헝주점(咸亨酒店)이 있다. 젊은 날 루쉰(魯迅)이 가끔 찾았던 잔술집이다. 소흥을 찾을 때마다 나도 그곳에서 한 사발 그득하게 나오는 황주(黃酒-소흥주)를 앞에 놓고 분위기를 잡아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아주 유명한 숙식업소로 발전했지만 황주를 사발에 담아 잔술로 파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소흥은 20세기 중국문학의 거장 루쉰의 고향이자 소흥주의 산지로도 이름이 높다.
계몽문학가인 루쉰의 작품을 '화변문학(花邊文學)'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신문에 연재되었던 그의 소설을 일컫는 말이다. 연재소설 가장자리를 꽃그림으로 장식한데서 온 이름이다. 어찌 보면 상업소설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매문(賣文)을 꾸짖고 그의 이름을 폄하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가 어릴 적 공부했던 그의 가숙(家塾) '삼매서옥(三昧書屋)'과 시엔헝주점이 지척에 있어 당대의 지성들이 한 잔 술로 교류를 하던 모습이 저절로 눈앞에 그려진다. 그가 나고 자란 생가 곁에는 기념관이 들어서고 수년 전에는 기념관 앞 자동차가 다니던 도로까지 자동차를 못 다니게 하고 보행가로 바꾸었다. 기념관에 보관된 그의 펜글씨를 보면 난필인 글씨가 부끄러워 손을 자꾸만 뒤로 숨기게 되고, 수많은 저작들을 보면 일천한 독서량이 고개조차 들지 못하도록 부끄럽다.
소흥주는 그 역사가 수천 년도 더 되어 중국을 대표하는 여덟 가지 술 가운데 하나다. 찹쌀을 발효시켜 만드는데 여아홍(女兒紅)이라고도 한다. 집안에 딸이 태어나면 새로 담근 이 술을 땅속이나 담장 안에 보관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딸이 시집 갈 때 꺼내어 사용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이렇게 빚어진 술은 딸과 운명을 같이하여 만일 시집가기 전에 딸이 불의의 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 술은 영원히 담장 속에 묻히고 만다.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를 치러 갈 때 마신 술이 소흥주이며, 삼국지나 수호지에 등장하는 영웅호걸들이 호탕 하게 마셔대는 술이 또한 소흥주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도읍지였던 소흥의 원래 이름은 월주(越州)였다. 20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유구한 역사가 흐르고 있는 정말 오래된 도시다. 남송의 소흥원년에 설치한 요양시설로 인해서 작은 구역부터 소흥이란 이름을 사용하다가 점차 지금의 소흥시 전체 이름으로 변해왔다.
강남 수향의 대표적 도시가 바로 소흥이다. 그런 만큼 도시전체가 수로로 이어져 있는 진정한 물의 도시로 일찍이 크고 작은 운하가 발달하였다. 운하를 오르내리는 작은 배를 오봉선(烏蓬船)이라고 부르는데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하여 노를 젓는 소흥만의 전통적이고도 특이한 배를 가리킨다. 지금은 수로들이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로 뒤로 물러나 앉아 마실 다니는 오봉선을 만날 수는 없지만 동호(東湖)라는 작은 호수에 가면 그나마 관광용으로 타 볼 수는 있겠다. 시내를 벗어나면 왕희지가 술에 취한 채 붓을 들어 쓴, 훗날 당 태종이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는 절세의 걸작 난정서(蘭亭序)가 탄생한 난정이 있다. 산동성에서 태어난 왕희지는 40대의 장년이 되어 소흥지방의 내사(內史)에 임명되었다. 어느 따스한 봄날 왕희지는 난정에 있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여한다. 유상곡수라하면 굽이굽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운다는 말이니 경주의 포석정과 비슷한 뜻이겠다.
41명의 지방 문사가 모여 술 한 잔에 시 한수라. 이렇게 모인 시를 책으로 묶고 서문을 쓴 것이 바로 난정서이다. 당나라 태종이 그의 글씨를 지극히 사랑하여 당대의 서예가들로 하여금 난정서를 베껴 쓰게 하고 원문은 황제가 죽어 무덤에 들어 갈 때 가지고 갔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모작들로 그중 유명한 8가지를 난정팔주(八柱)라 일컫는다. 남방의 작은 도시 소흥에서 매년 음력 3월 1일 '서예절'을 개최하는 것도 서성(書聖)의 걸작이 태어난 지방이기 때문일 것이다.
항주에서 버스로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여서 가장 자주 찾은 도시이기도 하며 중국에서 살면서 처음 한 여행지이기도 해서 그런지 마음속에 늘 그리움처럼 남아 있는 곳 이다. 여름에는 녹음 짙은 그늘이 시원해서 좋고 비가 오면 고즈넉한 분위기가 사람을 차분하게 해주어 좋다.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난정까지 갔다가 소흥으로 돌아올 때는 길가에 서서 손을 들어 지나가는 버스를 세워야 한다. 한나절을 난정에서 거니다가 오후 늦게 소흥으로 돌아와 시엔헝 주점에서 받는 한 잔의 황주는 나그네 마음을 느긋하게 풀어준다. 한 잔 술로 빈속을 달래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좀 늦어도 좋겠다.
두부장수로 성공한 巨富
서유기 속 손오공이 활약하던 수미산 인근마을
근대화ㆍ일제 식민지 이후 왕씨 일가 쇠락…관광지로 변모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의 짧은 소매 끝에 카일라스(kailas)라는 알파벳이 조그맣게 보였다.
모자 위로 걸친 선글라스와 손목에 묶은 손수건, 작은 디지털 카메라가 여행객임을 알려준다.
속으로 너무 궁금해진다.
과연 이 아가씨가 입고 있는 옷에 새겨진 글자의 뜻을 알고 있을까?
카일라스는 티베트 서쪽에 있는 설산으로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 그리고 티베트 전통 종교인 뵌교까지 4대 종교의 성산이다.
서유기에도 나오는 우주의 중심 '수미산(須彌山)'을 말하며 중국어로는 강런버치(岡仁波齊)다. 몇 년 전 중국친구들에게 여러 번 물어봤지만 수미산도 카일라스도 몰랐다.
같은 버스의 한 자리 건너 자라에 앉은 그녀에게 불쑥 물었다. 너도 왕가대원을 보러 가느냐고. 참 우스운 일이다. 마음속으로는 카일라스의 뜻을 아느냐고 몇 번을 되뇌이고는 묻는다는 것이 행선지라니. 생뚱스런 질문에 그녀도 우스운지 옅은 웃음을 입가에 베어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핑야오고성의 게스트 하우스를 나서기 전에 친절한 주인에게 근처의 볼거리에 관해서 물어 보았다. 영화 '홍등(紅燈)'의 촬영지로 유명한 교가대원(喬家大院)이 가까이 있지만 주인은 왕가대원을 적극 추천했다. 핑야오고성을 중심으로 보면 교가대원은 북쪽에, 왕가대원은 남쪽에 위치한다. 고성의 북문을 나서서 길을 건너면 조그만 시외버스터미널 하나가 있다.
터미널 마당을 건너 마주오던 제복 입은 여인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더니 친절하게도 승강장 번호와 왕가대원으로 가는 버스를 일러준다. 그렇게 올라 탄 버스에 카일라스 그녀가 앉아 있었다. 잠시 동안의 길동무가 생긴 것이다.
산시(山西)성에는 크고 작은 유명한 고가와 대원이 몇 곳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 왕가대원이다. 이름에서 보듯이 왕 씨 일가가 살던 집이다. 농부였던 이들은 두부장수를 시작으로 상업의 길로 나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약 50년의 공사기간에 걸쳐 어마어마한 규모의 집을 완성한다. 전체구조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은 고가애(高家涯), 서쪽은 홍문보(紅門堡)라고 부른다. 그리고 왕가사당(王家祠堂)까지 하여 세 부분으로 전체를 이루며 각 부분마다 성벽처럼 거대한 담장이 둘러쳐져 있어 각각 독립된 하나의 마을처럼 구조가 이루어져 있다.
남북으로 주축을 이루어 넓은 길이 있고 동서로 각각 세갈래의 작은 길을 만들어 넓게 보면 '왕(王)'자를 만들고 있다. 일천여 칸의 방들이 들어서 있어 한 일가가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마을이고 성채라는 말이 맞겠다. 외벽은 두께가 1미터가 넘어 가장자리로 돌을 쌓고 안에는 흙을 채웠다고 한다. 게다가 지진에 대비해서 벽을 관통하는 기둥을 곳곳에 설치했다고 하니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 없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건축물이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동서로 수루(繡樓)가 있는 것으로 봐서 왕 씨 형제들의 처첩들이 머무는 공간이겠다. 건물의 아래 부분의 벽돌이나 석판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이 눈에 띈다. 의미 있는 내용의 그림을 새기거나 고사를 그림으로 풀어 새긴 것이 재미있다. 건물구조도 그냥 지은 것이 아니라 계단의 개수까지도 부귀와 수명, 혹은 발전에 얽힌 의미를 부여했다고 한다. 부를 축적한 후 학문과 정치에도 뜻을 두어 300여 명의 후손들은 출세도 하고 이름도 세웠다. 하지만 부도 명예도 남가일몽(南柯一夢)이던가. 근대의 격동기와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왕 씨 집안도 서서히 쇠락하여 이 거대한 저택도 매각돼 지금은 관광객을 부르는 볼거리로 변하고 말았다.
건조한 산서성의 6월 한낮은 얼굴이 따끔거릴 만큼 따가운 햇살이 내리쬔다. 개방되지 않은 한 곳을 빼고 두 군데를 돌아보는데 한나절이 후딱 지나버렸다. 목도 마르고 허기도 진다. 물 한 병을 사서 그늘을 찾아 낮은 울타리에 걸터앉자 여러 명의 사내들이 슬금슬금 내게로 다가온다. 작은 자동차를 가지고 영업을 하는 이들이다.
제각기 이곳저곳 내키는 대로 목적지를 말하며 차비를 흥정하자고 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서민들이 살고 있는 흙동굴집이다. 뜻을 알아들은 이네들은 또 제각각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지명을 거론하며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다. 이들의 목적은 간단하다. 자신들이 말한 곳으로 차를 운전해 가서 차비만 받으면 그뿐이다.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요동(窯洞)이 있거나 말거나.
그늘에 앉아 있어도 시원한 줄을 모르겠다. 물을 마셔도 갈증이 풀어지질 않는다. 사내들이 함부로 뱉어내는 소란으로부터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오래된 마을을 찾아서_푸롱쩐 (芙蓉鎭)
인적 끊기고 쓸쓸함만…
열심히 일을 한 대가로 돈을 벌었지만 호옥음은 공작반장에 의해 지주계급으로 몰리고 이에 옥음은 옛 연인에게 모은 돈을 모두 맡기고 친척집으로 몸을 피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남편은 처형당하고 폭풍처럼 몰아닥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의 거센 바람은 옥음을 거리로 내몰았다. 새벽에 길가의 돌담을 청소하는 일이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다.
한편 지식인 진서전도 극우분자로 몰려 옥음과 같은 일을 하게 되고 두 사람사이에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연민의 정이 싹튼다. 이에 두 사람은 동거에까지 이르러 옥음은 아이를 가지지만 각각의 징역으로 인해 헤어지고 옥음은 혼자서 아기를 낳는다.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은 이렇게도 모진 상처를 남긴 채 막을 내린다. 진서전도 명예회복이 되어 부용진으로 돌아오고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옥음과 함께 하기만을 바란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가게를 지키는 상인들. 좁고 가파른 골목과 낡은 기와집 몇 채가 그나마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투지아주(土家族)들이 주로 사는 동네라서 그런지 생강엿을 파는 곳이 눈에 많이 띈다.
얼마 전 타계한 중국 영화의 거봉 시에진(謝晉)감독이 88년도에 만든 영화 '부용진'이다.
봉황고성을 떠나 장가계로 돌아오는 차 안이었다. 길가에 서 있는 이정표를 습관처럼 나직하게 읽어 보는데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이 한마디 거든다. 원래 이 동네의 이름은 '왕춘(王村)'이었는데 지금은 '부용진(芙蓉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부용진이라니…귀가 번쩍 뜨인다. 7~8년 전 처음 본 이 영화에서 받은 감동이 그대로 남아 있어 늘 부용진이라는 지역이 궁금하던 차였다.
적각루(吊脚樓)라고 부르는 낡은 2층 다락집이 서 있는 나루터하며, 길바닥에 깔아놓은 돌이 반질반질하게 닳아빠진 석판가(石板街)가 마치 오랜 필름처럼 항시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특히 여행길에 나서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 같은 부용진의 좁은 골목이 환영처럼 따라 다녔다. 그런데 그 부용진이 바로 지금 내가 지나치고 있는 '왕촌'이라는 말이다. 다음 일정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버스 천정을 두드리며 운전수를 불렀다.
삭힌 붉은 무와 쪽파, 그리고 짠맛을 내는 소스가 전부인 쌀두부. 이렇게 기본적인 준비를 해두고 끓는 물에 넣은 두부가 익으면 국물과 함께 담아낸다. 두부라기보다는 작은 올챙이 모양을 한 떡을 먹는 것 같다.
당연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슬프게도 영화 속에서 보았던 부용진은 찾을 수가 없다. 낡은 적각루가 서 있던 나루터는 시멘트로 뒤덮이고 그 나루에서 옥음이 두부를 팔던 가게까지 이어진 골목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예전에는 가까운 귀주성에서부터 멀리 상해까지 물길을 이어주었다는 나루터는 몇 년 전 다리가 생기면서 주인공의 자리를 내줘 마치 은퇴한 배우 같은 느낌을 준다. 나루에서 바라보는 강은 물이 줄어 그 속살을 다 드러내고 있다. 드러낸 속살은 그대로 햇볕을 다 받고 있어 마치 내 살갗이 오그라드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제 세월은 흐르고 세상도 변하여 사람들은 떠나고 뱃길은 뜸해졌다. 영화 때문에 유명세를 얻어 관광지로 변했다고는 하나 예전의 흥청거림은 볼 수가 없다. 영화 속에서 옥음이 장사를 하던 두부가게 앞은 항구의 파시를 연상케 했지만 지금은 새로 만든 나무의자에 쓸쓸함만 묻어 있다. 가끔 찾는 관광객들의 호기심으로 한 두 그릇을 팔뿐 정말 요깃거리로 찾는 이는 드물겠다. 그래도 옥음의 가게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쌀두부를 팔고 있다. 이곳을 찾았던 영화 관계자들의 사인이 들어있는 하얀 종이가 액자 속에 붙어 있고 이곳을 찾았던 유명인들도 액자 속에서 웃고 있다. 기능을 잃어버린 나루가 쓸쓸하다. 눈에 띄게 줄어버린 수량과 그나마 그 물에 의지하여 떠 있는 배들은 예전의 영화를 알고 있을까. 그나마 이렇게라도 부용진으로 나고 드는 물길을 오래도록 지켜주기를 빌어본다.
니스를 칠하여 번들거리는 나무의자 하나를 당겨 앉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분위기를 찾아보려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골목을 내다보며 쌀두부 한 그릇을 주문했다. 처음 먹는 두부인데도 마치 나는 그 맛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천천히 음미하며 옛맛을 찾으려 해본다. 두부를 삶아 내는 동안 주인에게 영화에 나오던 가게가 맞느냐고 물어보았다. 별다른 대꾸도 없이 요란하게 붙어 있는 사진들을 가리킨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낡은 나무기둥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고 살아있는 소란함도 없다. 호옥음과 진서전이 새벽마다 쓸어내던 돌담도 보이질 않는다. 설사 같은 장소라고해도 이미 지난날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 차라리 버스에서 혼자 중얼거리던 말이 그대로 흘러가는 말이었더라면 부용진은 영원히 변함없는 모습으로 내 안에 남아 있었을 것을. 지나치던 왕촌(王村)이 부용진이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오래된 마을을 찾아서_요동 (窯洞) |
황토동굴 사람들 가난하지만 마음은 순박 어릴 적 초가집 흙벽이 절로 생각나 "과일 익는 가을에 꼭 다시 오라" |
벽돌도 티일도 붙이지 않은 흙과 나무로 만든 동굴집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아주 시원하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 동글 하나에 방 한 간으로 보면 맞겠다. 어른들이 거주하는 공간에는 부업과 겸하여 방을 둔다. |
연안에서 이틀을 묵었다。 연안시내와 보탑、 사원 등을 돌아보면서 동굴집 야오동이 모여 있는 곳을 알아보았다。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여러 번을 물어보았지만 누구하나 시원하게 대답하는 이가 없다。 시내에서 보이는 곳은 대개가 개발에 밀려 사람들이 떠나고 빈집만 남은 곳들이다。
하는 수 없이 알려주는 대로 모두 다녀보기로 했다。
6월의 건조한 더위 속에서 무작정 걷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손짓따라 고개짓따라 한나절을 헤매고 다녔나보다. 허기도 지고 목도 마르다. 시외곽이라 변변한 식당 하나 보이지 않는다. 작은 가게로 들어가 음료수와 과자 몇 가지를 되는대로 집었다. 벌써 서너 곳을 허탕치고 돌아다닌 터라 이제는 알려준다고 해도 선뜻 나서기가 무섭다.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가게 주인에게 다시 물었다.
이곳에 서민들이 살고 있는 동굴집이 있느냐고. 주인은 별걸 다 찾는다는 듯 산 위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을 가운데로 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이리저리 가리키며 한 20분만 걸어 올라가면 몇 곳의 동굴집이 있다고 한다.
회칠한 곳이 오래되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고 흙이 드러나 있어 신문지를 더덕더덕 붙여 놓았다. 10여 년 전에 아내를 여의고 자식들마저 도회로 나가 혼자 살고 있는 노인. 말을 나누면서도 문득문득 쓸쓸함이 얼굴을 지나가는 듯하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속으로는 이럴까 저럴까 마음이 바쁘다. 몇번 허탕을 치고 난 뒤라 더운 날씨에 언덕을 올라 산으로 가는 것이 선뜻 내키지를 않는다. 마음은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는데 발은 이미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곳에서 동굴집을 만나지 못한다면 감숙성까지 멀고 먼 길을 다시 떠나야 하는 것이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좁고 가파른 길은 도무지 사람들이 다니는 것 같지가 않다. 한참을 걸어 오르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방금 지나온 마을들이 다 보인다. 낮지만 가파른 산이다.
햇살은 따갑고 키 작은 나무는 시원한 그늘도 만들지 못한다.
텃밭에는 오이와 감자가 심어져 있고 출입문이 열린 채 커튼만 드리워져 있다. 안에 사람이 있나보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마당을 가로질러 조심조심 인기척을 살피는데 집 안에서 쉰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햇살이 좋다. 햇살에 내다 널어놓은 이불의 까슬까슬함이 느껴진다.
어릴 적 초가집 흙벽이 절로 생각나
날씨도 더운데 밖에서 뭐하냐며 빨리 집으로 들어오란다. 세 자식을 모두 출가시키고 노인은 혼자 살고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속의 마나님은 이미 12년 전에 세상을 달리 하셨다니 그 긴 세월을 혼자 보내고 계신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아궁이가 있어 취사를 할수 있고 안쪽으로 흙을 발라 만든 침상이 있다. 벽면에는 이리저리 신문지를 발라 옷이나 이불에 흙이 묻는 것을 대비했다. 어릴 적 초가집 흙벽이 절로 생각난다. 단출한 살림살이는 길손에게 차 한 잔 내오기도 어렵다.
노인과 작별하고 가리켜 준 길을 따라 계속 산위로 올랐다. 길은 더욱 가파르고 좁아진다. 그래도 나무가 제법 울창해서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내 하나가 윗옷도 입지 않은 채 집 앞에 서 있다가 나를 보더니 대뜸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온다. 잠시 동안의 인사가 오가고 손을 이끌어 집안으로 안내했다.
수도는 당연히 들어오지 않고 변변한 우물도 하나 없다. 사각으로 판우물은 땅바닥과 같은 높이다. 비가 오면 스며들고 흙먼지는 예사로 날아든다. 물에서 반짝이는 햇살이나 남정네의 어깨에서 부서지는 것은 한 햇살이겠지만 어깨에 얹힌 햇살은 삶의 무게인 양 하다.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들과 함께 세 가족이 살아가는 가정이다. 마침 아들도 진학 준비 중이라 집에 와 있다고 한다. 안주인이 살림을 맡아 하고 있는 집이라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아 보인다.
따끈한 차가 나오고 슬며시 집 밖으로 나갔던 아들은 아직 채 익지도 않은 복숭아 서너 개를 따왔다. 따스한 마음이 불그스레하게 덜 익은 복숭아 빛을 닮았다.
내몽골 바로 아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정네가 이곳으로 장가를 왔다고 한다. 그의 아내에게 언제부터 이곳에 살았느냐고 물어보았다. 여자는 웃으면서 안쪽 침상을 가리키며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같은 침상에서 태어났다고.
이렇게 외지고 높은 곳까지 찾아와서 만난 것을 보면 틀림없이 인연이 있다면서 과일이 익는 가을에 꼭 다시 오라며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예견치 못한 만남이라 준비한 아무런 선물도 없었다.
"과일 익는 가을에 꼭 다시 오라"
뭔가를 주고 싶은데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호주머니 속에서 한참을 꼼지락 거리던 손에 지폐 두어 장을 꺼내 들었다.
부부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사양을 했다.
키가 껑충한 아들놈까지 덩달아 말리는 바람에 얼굴만 붉히고 도로 집어넣고 말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들이 필요한 물건이라도 사서 보낼 요량으로 주소를 물어보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참 동안
사투리로 말을 나누더니 아래 소학교 주소를 알려주었다.
아들의 모교인데 학교로 편지를 보내면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산에 있는 동굴집에서는 우편물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다. 하긴 집주소를 알아서 물건을 보낸다고 해도 우편배달부가 주소를 찾기도 힘들겠다.
그네들의 순박한 얼굴은 가끔씩 떠 올리지만 아직까지 보내 준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혼자 속으로 생각한 일이지만 늘 생각으로 그칠 뿐이다. 더 이상 부끄러운 마음이 남지 않도록 올해를 넘기지 말아야겠다
항주에서 남쪽으로 200㎞ 정도 떨어진 곳에 란시(蘭溪)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작은 도시가 있다. 이 작은 도시에서 다시 마을버스를 타면 30분 정도 지나 도착하는 곳이 바로 제갈 팔괘촌의 입구가 되겠다.
시장인 듯 길가에는 온갖 채소며 과일들이 대나무 소쿠리에 담겨있다. 야채와 고기를 넣어 호떡처럼 구운 떡 하나를 집어 들며 팔괘촌 가는 길을 물었다. 오르막을 가리키며 10분 걸음걸이도 채 못 된다며 가깝다고 한다. 다 먹지 못한 떡을 손에 든 채 천천히 오르막길을 걸어 올랐다. 양쪽에 즐비한 집들을 보아서는 전혀 고촌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시골 장터 같은 분위기에 젖어 길 양쪽으로 번갈아 고개를 돌려 보느라고 정신이 없다. 5분이나 걸었을까. 허름한 나무작대기로 길을 막아 자동차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그곳을 경계로 건물이 달라진다. 현대에서 과거로 살짝 넘어 온 것이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였는지 과자를 파는 가게였는지 기억이 분명치 않은데 골목 끝에 자리한 그 가게를 막돌아 나가자 마치 무성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듯 했다. 연못을 중심으로 하얀 벽에 까만 기와를 이고 있거나, 낡은 나무 벽에 기와를 머리에 얹은 건물들이 조용히 나타났다. 그 사이로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다니는데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시끌벅적 할 텐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로 무성영화를 보듯 그 자리에 한참을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서있었다. 첫눈에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반해버린 것이다.
최면에서 깨어나듯 스스로를 툭 치며 습관처럼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한쪽으로만 걷다가 눈에 띄는 대로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때가 지나 배도 고프거니와 이곳 얘기도 듣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눈에 외국인임을 알아 본 젊은 주인은 신이 나서 마을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풀어 놓는다.
동네이름에서 보듯이 이 마을의 주민 대부분은 성씨가 제갈씨라고 한다. 제갈량은 산동에서 태어나고 촉나라인 지금의 사천성에서 재상을 지냈으니 이렇게 먼 절강성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14대손 한 사람이 이 근처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것이 1000 년 전쯤의 이야기다. 그 후 후손들이 팔괘촌으로 이사를 하고 선조인 제갈량의 가르침인 '어진 재상이 아니면 어진 의사가 되라'는 뜻을 받들어 한약재업에 충실하여 축재를 하게 되었다. 27대손 제갈대사는 그가 익힌 풍수학에 의거해 지금의 팔괘촌 형태로 마을을 설계했다고 한다.
제갈량의 구궁팔괘진과 그 모양이 일치한다고 하는데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9궁 8괘의 배치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상하 70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왕조의 교체 때문에 생기는 폭력이나 수많은 전화(戰禍)를 모두 피해갔다고 하니 신기하기도 하다.
더욱이 항일전쟁 시기에는 마을 바로 지척에 있는 큰 도로를 일본군이 지나가면서도 이 마을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니 명청대(明淸代)에 지어진 수백 년 된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이 되고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숨 쉴 틈도 없이 젊은 주인이 내게 들려준 재미있는 얘기다. 어지간하다 싶어 자리를 뜨는데 자신의 식당을 한국 여행객들에게 많이 알려달라며 한마디를 덧붙인다. 서로 싱긋이 웃음을 주고받는데 이 마을에는 도둑이 들어도 길이 미로처럼 복잡해서 쉽게 잡힌다며 자세하게 길을 일러 주었다.
마을이 그리 큰 편은 아닌지라 천천히 걸어도 두어 시간이면 얼추 다 돌아 볼 수 있다. 물론 속 모습을 살피자면 하루 이틀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한 계절쯤 넉넉히 머물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주민들과 어울려 본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지만 나는 그저 스쳐가는 나그네 일 뿐.
말대로 골목은 복잡했다. 마을을 삼분의 이쯤이나 돌아보았다고 여기면서 나가는 길을 물었더니 혼자 왔는지 단체로 왔는지를 되물었다. 무슨 뜻인가 싶어 멀뚱히 바라보았더니 관광버스 주차장과 내가 들어 왔던 길이 반대 방향이라고 한다. 혼자서 오는 길손보다는 단체관광객이 대부분인 듯 마을 밖에 큰 주차장이 있고 시외버스나 마을버스가 다니는 큰길과는 제법 떨어져 있었다.
팔괘촌은 참으로 특별한 마을이다. 마을의 큰길가에 자리한 식당과 몇몇 기념품 가게를 빼고는 모두 농사를 짓거나 근처로 출퇴근을 하는 원주민들이다. 관광객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묵묵히 나락을 털고 아낙은 마당을 쓸어내고 있었다. 시끄럽지가 않고 차분한 마을이다. 시간이 된다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과 어스름이 천천히 내려와 밤을 이루는 모습을 꼭 보고 싶은 그런 마을이다.
키보다 큰 주걱으로 수수 저어 술 제조
근대문학가 마오둔 古家도 볼 수 있어
새로 지은 건물이 낯설다. 전보다는 좀 멀리 왔는지 문을 나서자 삼륜차들이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전에는 개발이 되지 않아 개방하지도 않았던 서책(西柵)까지 개발이 완료되었는지 마을의 동과 서를 물어왔다. 이번에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늦은 가을이다. 우쩐이 나와 갖는 인연은 가을에 있나보다. 나는 동서라는 대답대신 그냥 '라오지에(老街)'라고 돌려서 말했다. 그저 새로 개발된 곳에 눈길을 빼앗기기 싫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옛 기억을 더듬어 고진의 입구와 매표소 앞 돌다리를 찾았다. 간단한 전통극을 공연하는 작은 무대와 그 앞에 작은 광장이 있고 길 건너편으로 우쩐의 입구가 있다. 그런데 반대쪽으로 새로운 상가들이 들어섰다. 오래 된 마을은 그대로인데 규모는 자꾸만 커진다.
수수를 쪄 내는 어마어마하게 큰 솥이며 땅을 파서 만든 아궁이에 석탄으로 물을 끓이고 증기를 올리는 것은 여전하다.
대개의 수향들이 그렇겠지만 우쩐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운데 물길이 있고 양쪽으로 길과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고진(古鎭) 안에서야 커지고 작아지고 할 것이 없겠지만 주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관광지로 개발되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고가지만 마을 안에는 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가게들과 여러 가지 가내 수공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번에 보았던 고량주를 만드는 양조장과 염색 공장을 기억해 냈다. 지금보다 훨씬 한적하여 관광지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분위기와 양조장이며 염색공장 등의 구조를 떠올리느라 괜히 미적거리며 마을로 들어서는 것을 늦추고 있었다.
표를 검사하는 곳을 지나면 좁은 골목 왼쪽으로 중국의 근대문학가로 유명한 마오둔(矛盾)의 고가가 있고 이런저런 볼거리들과 가게들이 즐비하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보고픈 마음에 망설임 없이 돌다리를 건넜다. 물과 골목사이에 집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골목을 사이로 또 집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선 곳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가 없다. 다리를 건너면 물에 닿게 지어진 집들이 수백 년을 견뎌내고 있는 곳이 보인다. 비뚤비뚤하게 줄지어 선 기와며 넘어 갈 듯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진 기둥들이 고스란히 건너다보이는 것이다. 창가에 걸린 빨래며 물위로 천천히 떠다니는 배들이 마음을 한결 느긋하게 풀어준다.
염색 공장 골목이었는지 양조장 골목이었는지 기억이 없다. 쪽빛천으로 예쁜 신을 만드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조심스럽다. 코끝에 걸린 안경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사뭇 진지해 보인다.
다리를 건너 온 이쪽은 또 이쪽대로 식당과 가게들이 좀 더 늘어 난 것 같다. 작은 숲도 가꾸어져 있고 나무판자로 잘 이어놓은 산책로도 제법 멋을 부렸다. 발길이 벽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자연스레 길은 처음 들어 온 골목으로 이어진다.
기억대로라면 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염색공장이 있고 조금만 지나가면 양조장이 나올 것이다. 지난 기억이 선명해 지면서 괜히 기분까지 좋아진다. 제복을 입은 채 인상을 쓰고 있는 질서계도 요원에게 실없는 웃음도 보내보고 문 앞에 나와 앉아 계시는 할머니께 고개 숙여 인사도 건넨다.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아서 염색 공장이 나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쪽빛으로 물을 들인 천을 길게 드리워 말리고 있다. 이렇게 물을 들인 천으로 옷도 만들고 신발도 만든다. 막 물들여 말리는 것은 아니고 전시용으로 늘 이렇게 걸려 있는 천이지만 괜히 다가가서 얼굴을 가져다 대어 보았다. 흰 바탕에 쪽빛 꽃문양이 촘촘하게 박혀 있어 화려하지는 않지만 순간적으로 영화 '국두(菊豆)'가 갑자기 떠올랐다. 두 남녀의 만남을 화려한 붉은 천이 겹쳐지는 것으로 대신 보여줬던 장면이 생각나 혼자서 얼굴을 붉히며 양조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한 번인가 입구를 잘못 찾아 망설인 것 외에는 양조장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좁은 입구며 구석에 쌓아놓은 작은 술 항아리며 심지어 비스듬히 비쳐 드는 햇살마저 예전 그 때의 햇살처럼 보인다. 한아름으로도 다 안지 못할 만큼 큼직한 항아리에 술을 받아 짚을 덮어 보관하는 것이며, 내 키보다도 더 커 보이는 주걱으로 수수를 젓는 것하며 어느 것 하나라도 푸짐함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나무물통을 만들고 파는 가게. 비록 관광지로 변했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는 수백 년을 내려오며 살아오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런 살가운 모습도 만난다.
내어오는 작은 술잔에 담긴 술이나 알싸하게 코끝에 와 닿는 술냄새도 모두 그대로이다.
어느새 다시 마오둔(矛盾)의 고가 앞이다. 들어올 때 골목 끝으로 달려들던 찬바람이 그리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 그리고 변함없는 우쩐의 골목 안에서 나는 이미 충분히 몸을 데워서 나오는 길이다. 시인ㆍ오지여행가
골목을 빠져나와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로 들어섰다. 마침 엿을 늘이고 있었다. 전에 봤을 때는 맨손으로 잡은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나무 막대를 끼워서 엿을 당기고 있다. 색이 벗겨질 정도로 반질반질하게 닳은 나무와 하얗게 반짝거리는 엿이 잘 어울린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내가 항주로 온 이유를 듣더니 자신이 한 곳을 적극 추천하겠다고 한다. 더욱이 그 친구의 고향이기도 하단다. 해서 당장의 계획을 바꾸어 찾아 간 곳이 바로 용문고진이다.
동한(東漢)의 명사 엄자릉(嚴子陵)이 부춘강(富春江)이 감돌아 흐르는 용문산을 보고 '이곳은 산이 푸르고 물이 아름다우니 여량(呂梁)의 용문보다 뛰어나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용문고진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중국 곳곳에 많은 조어대(釣魚臺)가 있는데 절강성 부춘산 조어대는 바로 엄자릉의 조어대로 유명하다. 이태백이 사람을 낚고 고기는 낚지 않았다면 이에 반해 엄자릉은 고기를 낚았지 사람은 낚지 않았다고 하는 고사로도 유명하다.
게다가 삼국시대 동오(東吳)의 통치자 손권의 후예들이 이곳에 자리 잡고 산 지가 어언 천년도 더 되었으니 가히 손권의 고리(故里)라고 여겨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자존심이기도 하겠다. 항주의 남쪽 오십 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깨어진 플라스틱 대야를 때우는 아저씨의 표정이나 손짓이 너무 진지하다. 처음 보는 장면이라 한참을 그 자리에서 있었다.
용문으로 가기위해 거쳐야 하는 부양(富陽)까지는 자동차로 한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거리이지만 항주에서 시내버스가 다니고 있어 아주 편리하다. 다시 작은 버스를 타고 고진 입구에 내렸다. 가을걷이가 끝나 허허로운 벌판에 두어 개의 석방이 쓸쓸하게 푸른 하늘을 바치고 서있다. 평일이라 그런지 주위가 한산하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다. 고진을 알리는 석방 앞 넓은 마당은 추수한 나락을 말리는 곳으로 변해있었다. 나락을 펴 말리는 부부인 듯 한 두 사람 곁으로 나는 버릇처럼 다가갔다. 올해의 농사 작황이며 이런저런 잡다한 질문들을 던졌다. 결국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고진에 관한 것들이지만 엉뚱한 얘기들로 반시간 정도를 함께했다.
관광객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듯 아무렇지도 않게 석방 마당에서 나락을 펴 말리고 있다.
마을 안쪽도 조용했다. 관광객은 거의 없고 빨래하는 아낙이나 마실 나온 노인네들만 느리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돌다리 곁에 사내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열심히 만지작거리고 있다. 다가가 보니 우습게도 깨진 플라스틱 대야를 다른 플라스틱 조각으로 때우고 있었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서 보던 모습과 같다. 함석으로 만든 양동이나 양은 냄비의 구멍을 때워주고 벌이를 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자리를 뜨기가 아까울 만치 재미있는 모습이지만 나는 또 움직인다.
혼자서 헤매다가 정자에 앉은 마을 주민들에게 작은 지도를 보여주며 길을 물었다. 조금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하더니 저만치 혼자서 걸어오시는 말끔한 차림의 노인 한 분을 가리켰다. 이 마을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시란다. 이런 행운도 있는가보다. 노인은 마치 통과의례를 치르는 양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보러 여기까지 왔는지를 물어 오신다. 옛 모습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왔노라고 좀은 어색해 하며 말씀드렸다.
조금이라도 이름이 난 곳에는 어김없이 석방이 지키고 서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노인은 자신을 따라오라시며 자신을 만난 것을 보면 오늘 나의 운이 좋다고 말씀하신다. 대부분의 건물이나 마을 구석구석이 보수 되었지만 옛 모습 그대로인 곳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이다.
건물이나 마을에 얽힌 사소한 몇 가지 이야기를 마치 세상에서 자신만이 아는 것처럼 열심히 들려준다. 게다가 복잡한 골목을 반복해서 다니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하면서 동선을 잘 잡아줬다. 자상한 노인 덕에 발품도 줄이고 시간도 벌었다. 옛집 문짝에 새겨진 조각들인데 얼굴이나 머리 부분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6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간에 걸쳐 일어난 문화혁명이 안겨준 상처들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뭔가 인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내게는 출구를 가리키고 반대쪽을 가리키며 자신의 집이라고 말씀하신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내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노인은 등 뒤로 손을 흔들며 오셨던 것처럼 조용히 멀어져 갔다.
처음 들어갔던 문이 아닌 다른 골목을 통해서 나는 자동차가 다니는 세상으로 나왔다. 올 때 작은 버스에서 내렸던 곳을 어림짐작으로 찾아 큰길가에 섰다. 저만치 소형 버스 한 대가 나타났다. 보나마나 부양으로 돌아가는 버스일 것이다. 따가운 가을 햇살아래서 나는 또 새로운 땅으로 떠나는 기분으로 행선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버스를 향해 손을 든다.
오래된 마을을 찾아서_완남고촌 (琓南古村) - 홍춘(宏村)과 시디(西遞)
다른 지역의 오래 된 마을보다 집들이 화려하고 갖가지 조각으로 치장을 하고 있다.
마을이 자리한 지대가 높고 물이 많아서 운무가 짙어 마치 한 폭의 중국화를 연상케 한다. 오죽하면 '수묵화에 나오는 마을'이라고 할까. 여러 곳에서 도화원(桃花園)으로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홍춘도 그 가운데 한 곳이다. 지금은 오히려 주윤발이 주연했던 영화 '와호장룡'의 촬영지로 더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명나라 때에 지금 형태에 가까운 마을이 만들어졌으니 그 역사는 8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 처음 마을이 생긴 것은 북송시기라고 하니 어쩌면 천년도 더 되었을 수도 있겠다. 처음 이름은 홍촌(弘村)이었는데 황제의 이름 가운데 홍(弘)자가 들어 있어 피휘(避諱)를 하느라고 청나라 건륭제 때 굉촌(宏村)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홍춘으로 들어가는 다리와 양쪽으로 연밭이 펼쳐져 있다. 겨울이라 연뿌리는 캐어내고 마른 대궁만 남았다. 다리 넘어 하얀벽에 까만 기와가 얹힌 집들이 홍춘 옛 마을이다.
마을은 특이하게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 동서로 길게 늘어선 기와집들이 전체적으로 소의 형상을 하고 있고, 골목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작은 물길은 마을 가운데 있는 '달의 연못(月沼)'으로 모여 소의 위장이 된다. 그리고 이 물은 다시 마을을 휘돌아 나가면서 마을 앞 호수로 모이는데 바로 복부가 되겠다. 호수에 걸린 네 개의 다리는 바깥세상과 마을을 이어주는데 바로 소의 다리를 의미한다. 마을의 집들이 모두 이어져 화재라도 발생하면 모든 집이 화마에 휩쓸릴 수가 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물길을 만들어 둔 것이다. 지금은 마치 잘 짜여 진 계획표처럼 물을 사용하는 순서가 있다고 한다. 아침 식사 전에는 식수로만 이 물을 사용하고 다음에는 채소나 식재료를 씻고 다듬는데 사용한다. 오후나 되어야 설거지와 빨래를 하고 몸도 씻는다고 하니 한 길로 이어진 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는 지혜가 보인다.
대나무 조각에 마을 풍경을 새겨 넣어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 몇 곳에서 비슷한 광경을 만났지만 호객을 하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이것도 다른 곳과 다르다면 다른 점이겠다.
뒤로 푸른 산을 두르고 앞으로 맑은 호수가 있어 산은 물이 있어 아름답고 물은 산으로 인해 살아나니 말 그대로 배산임수의 형상이다. 왕씨(汪氏)들의 집성촌으로 소금 장수로 돈을 벌어 화려한 집을 짓고 모여 살아 오늘 날 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고진과 굳이 다른 점을 들자면 이곳에서 지은 집들은 엄청난 재화를 쏟아 부었다는 것이다. 기둥이나 문짝마다 정교하고 뛰어난 조각을 곁들이고 금칠을 예사로 했다. 바로 왕정귀(汪定貴)의 승지당(承志堂)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시디의 마을 안 풍경. 이른 저녁을 먹은 마을 주민들이 골목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가게는 찾는 이가 없어도 오히려 정겹다.
홍춘이 휘상(徽商 - 안휘성 상인집단)들의 마을이라면 이십 리 지척에 있는 시디(西遞)는 관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다. 일설에 의하면 7세기경에 왕자 한 명이 난을 피해 이곳에 이르렀고 성과 이름을 바꾸어 눌러 살았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이름에서 보듯이 예전에 이 곳에 우편물을 전하던 역참이 있었던 곳이다. 그 위에 마을 곁으로 동서로 흐르는 강이 있어 마을 이름이 서체가 되었다. 황산에서 내려와 홍춘을 둘러보고 다시 시디로 온 터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겨울이지만 햇살이 따스한 오후, 아기도 오리도 나들이를 나왔다. 잔잔한 물결만큼이나 평화로운 풍경이다.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에 걸려있다. 아예 입장권도 팔지 않았다. 늦은 시각이라 그냥 들여보내 주는 것이다. 시디 역시 화려한 건물로는 둘째라면 서러워 할 만큼 빼어난 조각으로 장식을 하였다. 해질녘에 보는 시디의 건물들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하얀 벽에 까만 기와와 검은색 대리석으로 문을 치장하여 밖에서 보면 간결하면서도 고급스럽게 색의 대비의 이루고 있다. 99 갈래의 깊은 골목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그 골목을 중심으로 명청대 건물 약 200채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마을로 흐르는 두 줄기 물과 하얗고 검은 색의 집들이 잘 어울려 물에 반영되는 집들이 실재 집인 양 하다.
일종의 난방용품이다. 철사로 만든 망 아래에 숯을 피운 그릇을 놓고 나무 통입구에 걸터앉아 담요를 덮으면 아주 따뜻하다고 한다. 주로 여인네들이 사용한다.
마을을 벗어나자 사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오늘 밤까지 황산의 기차역까지 가자면 바쁘다. 어차피 역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하겠지만 황산역 근처에 있는 명청대의 건물이 모여 상가를 이룬 노가(老街)의 밤거리를 걷고 싶어 길을 서둔다.
"色色비단 넘치는 곳" 마르코 폴로 극찬
茶鄕의 도시…찻집도 가장 먼저 생겨
中 10대 명차 '용정차' 생산지로 유명
오래된 마을 항주는 또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13세기 말 항주를 찾았던 베네치아 출신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항주를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했다. 색색의 비단이 가게마다 넘쳐나는 것을 보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산과 물이 적절하게 어울린 항주는 꼭 비단이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도시임에는 틀림이 없다.
도시의 서쪽에 서호(西湖)와 영은사(靈隱寺)가 자리한 북고봉(北高峰)이 있어 항주를 녹색의 도시, 자연의 도시로 만들어 준다. 뿐만 아니라 남으로 전단강과 유명한 용정차가 자라는 용정마을과 매가오(梅家塢)마을의 푸른빛이 항주를 더욱 빛나게 한다.
호수와 강이 어울리고 산과 숲이 많아 푸르고 아름다운 것 외에도 항주는 차향(茶鄕)으로서도 이름 난 도시다. 중국을 대표하는 10대 명차가 있는데 그 첫머리를 차지하는 용정차(龍井茶)가 바로 항주에서 생산된다. 차를 파는 상인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도 항주요, 찻집(茶館)이 가장 먼저 생긴 곳도 항주다. 산과 물과 도시가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항주는 그 위에 차가 더해져서 더욱 깊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해질녘 녹차 밭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매가오의 길을 지나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그 사이로 난 작은 길을 걸으면 마치 세상 밖에서 노니는 듯하다. 바로 '구름이 머무는 대나무 숲길'이라는 뜻의 운서죽경(雲棲竹徑)이다. 항주의 빼어난 경치를 나타내는 서호 10경외에 근래에 생긴 '新'서호 10경 가운데 하나다. 원래의 서호 10경이 모두 서호에 연해 있거나 서호가 바라보이는 곳들이라면 이에 반해 신 서호 10경은 서호에서 살짝 벗어나 있거나 그 부근의 아름다운 10곳을 이른다.
서호에 가을이 깊었다. 연은 꽃을 떨어뜨린 지 이미 오래고 잎도 시들어 마른 대궁만 겨울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호수 북쪽에서 서령교 들어가는 입구.
이러나저러나 서호는 항주를 말할 때 그를 내어 놓고는 말을 잇기가 어려울 만치 항주를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다. 그 이름도 중국 4대 미녀 가운데 한 사람인 서시(西施)와 견주어 서자호(西子湖)라고 불렀는데 줄여서 서호라고 한다. 서호의 곳곳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과 얽힌 고사가 있다.
송나라 때 서호처사(西湖處士)라고 불렸던 풍류시인 임포(林逋)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서호 곁의 작은 산, 고산(孤山)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그는 평생을 홀로 살며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삼아 살았다고 해서 매처학자(梅妻鶴子)로도 불린다. 홀로 살았기에 머물던 산 이름도 고산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어 더 이상 외로운 산이 아니다. 지금도 고산아래에는 학을 날리던 방학정(放鶴亭)의 흔적이 있다. 그가 집을 비운사이 벗이라도 찾아오면 학을 날려 그를 찾았다니 참으로 그림 같은 이야기다. 우스갯소리 하나만 더하고 서호를 떠나자. 서호의 남쪽에 새로 생긴 공원 하나가 있다. 장교(長橋)공원이다. 돌다리를 지그재그로 만들고 가운데쯤에 정자 하나를 세웠다. 몇 년 전만 해도 없었던 다리다. 아마도 옛 소설에 나오는 장교라는 돌다리를 볼거리로 새로 만든 것 같다. 남녀 주인공들이 헤어지기가 아쉬워 밤새 이 다리위로 오고가며 서로를 바래다주다 날이 샌 것을 빗대어 '길지도 않은 다리가 이다지도 길구나' 라는 데서 장교라는 이름이 생겼나보다.
차향 항주답게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어딜 가더라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차덖는 모습. 전에 항주에 살 때는 봄만 되면 좋은 차를 구한 답시고 무던히도 돌아다녔다. 시골 농가 마당에 솥을 걸고 차를 덖으면 괜히 잔심부름도 하고 차도 옮기며 누가 보든 말든 혼자서 신이 나서 바빴다.
"장교는 길지 않건만 정은 이리도 길어, 단교는 끊어짐이 없는데 애간장만 끊어지네. (長橋不長情意長,斷橋不斷肝腸斷!) " 장교도 단교도 모두 서호에 있는 다리다. 다만 장교는 최근에 만들어졌고 단교는 그 옛날부터 있던 다리라 서호 10경에도 포함되는 유명한 다리다. 서호를 벗어나 조금만 걸어가면 오산(吳山)광장이 있고 곁에 하방가(河坊街)라고 하는 명청대 건물이 늘어선 거리가 있다.
개발되기 전에는 집들이 서로 어깨를 닿을 만치 좁은 골목을 마주하고 있었다. 가끔 자전거로 이곳을 찾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출입을 막고 골목 전체를 고치기 시작했다.
지금은 온갖 기념품을 파는 여행 명소로 바뀌었다. 하방가를 걷다가 옆으로 빠지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보면 그대로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낡은 기와집과 삭아서 금방이라도 부숴 질 것 같은 연탄 화로며 문 앞에 나와 앉아계신 노인들. 그나마 항주의 옛 모습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 곳이다.
오래 된 마을 이야기는 항주에서 시작하여 항주에서 마치고 싶었다. 내가 나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을 제쳐두고 라면 가장 오랜 시간 머문 땅이 항주일 것이다. 그만큼 내게 항주는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오래 된 마을이다. 이제 오래 된 마을 이야기는 여기서 막을 내리지만 아직 찾지 못한 마을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오래 된 마을 찾기는 계속 될 것이다. 또 새로운 오래 된 마을들이 생겨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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