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_02

醉月 2011. 1. 1. 10:12

여기가 산이야 바다야? 도무지 구분이 안 가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11] 대산읍에서 태안읍까지

9월 24일(금)

 

서산시 대산읍을 벗어나 다시 바닷가 길을 찾아간다. 29번 국도를 타고 대산읍을 관통하는데 상당히 조심스럽다. 차량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갓길이 거의 없는 데다 화물차들도 많이 지나다녀 다소 위험하다. 이런 길에서는 운전자들도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스스로 방어 운전을 하는 게 최선이다.

 

국도로 들어서기 전에 수퍼에 들러 길 위에서 먹을 간식을 보충한다. 오늘 내가 가야 할 길 위에서는 수퍼를 만나기 힘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를 괌에서 보내고 돌아와 오늘 아침 막 문을 연 수퍼 주인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 차림에 관심을 보인다. 서해안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더니 '젊은' 사람이 기백이 넘친다고 칭찬을 한다. 그러면서 추석 전에도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왔다가 무릎 통증이 심해 바로 이 앞에서 버스를 타고 되돌아갔다며, 나보고는 무사히 완주를 하라고 당부한다. 젊다는 말에 괜히 우쭐해져서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기백이 넘치게 출발을 하기는 했는데, 바닷가 길을 찾아가는 게 쉽지 않다. 환성리(지곡면)에서 도성리로 방향을 트는데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길 한 번 잘못 들면, 되돌아 나오는 일도 쉽지 않다. 힘들여 넘어간 언덕을 다시 되돌아 넘어오는 것처럼 사람 맥 빠지게 하는 일도 없다. 이 지역 역시 어제 독곶리와 벌천포를 다녀왔던 길과 마찬가지로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29번 국도에서 벗어나 도성리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서부터 길이 헷갈린다. 언덕 위로 올라서 더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인다. 그때 마침 길 한쪽 깻단을 쌓아놓은 밭에서 땅콩을 수확하고 있는 아주머니 두 분이 보인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방금 지나쳐온 길 옆에 있었다. 길을 잘못 들기는 했지만 다행히 언덕을 다시 되돌아 내려가지는 않아도 된다.

 

얼마 안 가 진충사가 나온다. 지도상에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 중에 하나다. 그분들 말씀대로 제대로 길을 찾긴 찾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또 다시 길을 잃고 헤맬지 모른다. 오늘 여행도 결코 만만치 않다. 도성리에서 중왕리포구를 찾아가는 길은 사실상 산길이다.

 

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도성리포구. 갯벌이 땅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 성낙선
도성리포구

 

숲 사이로 좁은 시멘트 길이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러다 갑자기 숲이 사라지면서 시야에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 가는 논이 나타난다. 그 논 건너편에 수평으로 쌓은 제방이 보인다. 하지만 그 너머가 저수지인지 바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자전거를 타고 산 속 깊은 숲을 헤쳐 나오느라, 그때쯤에는 그만 내가 가고 있는 곳의 위치를 잃어 버렸다. 아무리 큰 지도라 하더라도 이런 산길까지 세밀하게 표시가 되어 있지는 않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제방 위에 올라선다. 눈앞에 갑자기 광활한 '땅'이 펼쳐진다.

 

얼핏 보기에 그 땅이 갯벌인지, 밭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 넓은 땅 어디에도 바닷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먼발치 낮은 땅을 향해 한 줄기 불쑥 튀어 나온 산자락이 보이고, 그 끝에 배 몇 척이 땅바닥에 기우뚱한 모습으로 엎드려 있는 것이 보인다. 지도에 '도성리포구'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애초 목적지로 삼았던 중왕리포구는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쯤인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오늘의 고난은 도성리포구를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도성리포구까지 가는 길은 일종의 맛보기였던 셈이다. 도성리포구를 지나쳐 다시 산길을 오른다. 웬만하면 여기서부터는 다시 바닷가로 내려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가도 가도 산이다. 고개인지 언덕인지 모를 오르막길들이 끝없이 나타난다.

  
중왕리포구를 찾아가는 길. 산을 하나 넘고 있다.
ⓒ 성낙선
중왕리포구

 

앞서 '젊은 사람' 소리만 듣지 않아서도 바닷가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바로 내륙을 관통하는 국도를 잡아탔을지도 모른다. 이래서야 어디 바닷가 여행이라고 할 수 있나? 산길을 모두 에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도성리포구에서 중왕리포구를 향해 가는 길 역시 산길의 연속이다. 도저히 산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어쩌다 만난 평지는 농로로 길은 낸 곳이어서, 지도로는 도무지 방향을 잡을 방법이 없다. 중왕리포구까지 사실상 안개 속이었다. 내 발로 자전거를 타고 가긴 갔지만, 어떻게 해서 그곳까지 갈 수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농로를 벗어나 할 수 없이 지방도로로 올라탔는데 그 길이 운 좋게 나를 중왕리포구까지 이끌었다.

 

  
중왕리포구.
ⓒ 성낙선
중왕리포구

 

피로 씻어 준 박속낙지탕


중왕리포구도 그렇고 이웃해 있는 왕산리포구까지, 이 지역에는 낙지를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음식점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박속낙지탕이 유명하다. 순전히 낙지를 맛보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처럼 여행 삼아 찾아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박속낙지탕은 맑은 국물에 박속과 감자 등속을 함께 넣어 끓인다. 어느 정도 국물이 끓기 시작했을 때, 산 낙지를 넣고 조금 더 끓인다. 깔끔하고 시원한 국물 맛에 단 맛이 감도는 낙지가 일품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쌓인 피로가 일시에 말끔히 가시는 기분이다. 낙지를 건져서 간장이나 초장에 찍어 먹고 나면, 국물에 칼국수나 수제비를 넣어서 한 번 더 끓여 먹는다. 나는 허전한 뱃속을 달래기 위해 밀가루 음식 대신 공기밥을 시켜 먹었다.

 

박속낙지탕을 먹고 나서 한가하게 포구를 서성인다. 그러는 사이 배 여러 척이 포구로 들어온다. 모두 낙지를 잡으러 멀리 나갔다 돌아오는 배들이다. 배에서 어구를 내리는 어부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낙지를 많이 잡았냐는 말에 '어디 낙지가 있간?'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말투가 퉁명스럽다. 

 

얼마 전, 계속되는 비로 낙지들이 뻘 깊이 내려가 숨는 바람에 낙지가 잡히지 않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낙지 머리와 내장에서 카드뮴이 기준치 이상으로 검출됐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돼 낙지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곤란을 겪어야 했다. 카드뮴 공포는 곧 사그러들었지만, 낙지를 잡아들이는 일이 예전만 못한 건 여전하다. 그나마 낙지 맛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계속 포구를 찾아오고 있는 게 다행이다.

 

중왕리포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왕산리포구까지, 다시 다리가 부러져라 산을 넘는다. 산길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왕산리포구에서 호리까지 가려면 농로인지 산길인지 알 수 없는 소로를 타야 한다. 하지만 그 길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나같은 길치는 그 길에서 미아가 될 가능성이 90%다.

 

  
팔봉면의 도로 확장공사 현장. 언덕을 낮춘 결과, 버스정류장이 높이 올라가 있다.
ⓒ 성낙선
버스정류장


결국 그 길을 포기하고 지방도로로 올라탄다. 이 도로를 타고 장현리(팔봉면)에서 구도항을 지나 호리까지 달린다. 호리는 서산시에서 태안군으로 넘어가기 직전 북쪽 바다 위로 살짝 고개를 쳐든 형태를 하고 있는 좁은 땅이다. 지형이 호랑이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름이 그래서 그런지 호리 깊숙이 들어가는 길이 마치 호랑이가 사는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좁고 험하다. 호리 역시 구불텅구불텅 이어지는 길이다. 좌우로 휘었다가 돌았다가, 위로 솟구쳤다가는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길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이 흥미롭다.

 

  
호리 땅끝. 가로림만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와 있다.
ⓒ 성낙선
호리 땅끝


호리 끝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만조가 되어 바닷물로 가득 찬 가로림만과 마주친다. 넘실대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와 있다. 여기가 땅끝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우뚝 선 해안 절벽이 바다 한가운데로 툭 튀어나와 있다. 그 절벽 위로 펜션 여러 채가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호리 땅끝을 찍고 돌아 나오는 길,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서둘러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다리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남은 힘을 다해 페달을 밟는다.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근육의 피로가 가시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언덕 하나를 넘는데 이전보다 2배 가까이 더 긴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호리 땅끝
ⓒ 성낙선
호리 땅끝

만약 텐트를 그대로 가지고 다녔다면...

 

잠시 섰다가 다시 출발할 때마다 다리가 시큰거린다. 휴식이 필요할 때다. 하지만 어디서 얼마나 쉬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계획했던 것과 달리 전체 여행 일정이 계속 늦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애초 계획에서 약 3일 정도 더 늦고 있다.

 

태안읍 도내리로 들어서 읍내까지 들어가는 길이 대산읍으로 들어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갓길을 찾아보기 어렵다. 뒤따라오는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조금만 천천히 가주면 좋겠는데, 그걸 못 참고 화를 낸다.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이 조금만 더 여유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바닷가길 여행의 본분을 잊고, 산길과 논길을 신나게 헤매고 돌아다닌 날이다. 어떻게 보면, 이 길은 강원도 산길과 매우 유사한 데가 있다. 고개 너머 또 고개다. 진땀이 흐른다. 하도 고개를 넘어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고개를 내려가는 일은 물론이고 고개 아래로 평지가 나타나도 하나도 반갑지 않다.

 

오늘 아침 숙소를 나오자마자 우체국을 찾아가 텐트 일체를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 나중에 아쉬운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계속 가지고 다니기에는 너무 부담스런 짐이다. 그나마 텐트를 없앴기 망정이지, 오늘까지도 그 짐을 그대로 가지고 다녔다면 어떻게 됐을까? 길 위에 그냥 주저앉아 버릴 뻔하지 않았나?

 

내일은 태안군의 최북단에 있는 만대땅끝마을까지 올라가야 한다. 태안군은 해안선이 톱니를 연상시킨다. 태안군은 양날 톱니를 가진 톱이다. 지형상 서산시 서쪽 해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태안반도 안에서도 태안군이 전체적으로 가장 복잡한 지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편안한 여행 같은 건 아예 기대도 하지 않는다. 만대땅끝마을까지 가는 길 역시 험난한 길이 될 것이 뻔하다.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 낯빛이 거의 납빛이 되어 있다. 오늘 달린 거리는 70km, 총 누적거리는 718km이다.

 

덧붙이는 글 | 기록 정리 (그동안 빠트린 것들)

날짜 주행거리 누적거리

15일 80km
16일 87km 167km
17일 77km 244km
18일 64km 308km
19일 58km 366km
20일 57km 423km

 

불혹도 한참 지났건만...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12] 태안읍에서 만대땅끝마을까지

9월 24일(토)

 

 

  
전봇대에 기대 선 자전거. 짐받이에 매달린 두루말이 휴지
ⓒ 성낙선
자전거

날이 선선하다. 아침나절엔 약간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완연한 가을 날씨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한낮엔 햇살이 무척 따갑다. 강화도에서 남쪽 방향으로 내려올 때는 오른쪽 장단지가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태안반도 동쪽 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라 왼쪽 장단지가 연탄불 위에 올려놓은 삼겹살처럼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다. 어떻게 좀 양쪽을 골고루 익힐 수 없을까 고민인데 현재로선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이틀째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고생하고 있다. 환절기 찬 공기 탓이다. 정도가 좀 심하다. 자전거에 올라타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콧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러면 그 자리에 멈춰서 코를 풀어야 한다. 보통 성가신 게 아니다. 나중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는 것도 귀찮아, 두루마리 휴지를 아예 짐받이에 매달고 다녔다. 이거 완전 자전거여행자의 굴욕이다.


하다하다 별짓을 다한다. 나도 남들처럼 좀 세련되고 멋진 여행자로 보이고 싶은데, 뭐 하나 제대로 도와주는 게 없다. 그래도 페달은 우아하게 밟아야지 하고 자세를 가다듬지만, 그 자세라는 것도 언덕 앞에만 서면 왜 그렇게 자꾸 찌그러드는지 남들 보기 민망할 지경이다. 근처에 사람이라도 지나갈라치면 힘이 남아도는 척 페달을 밟다가, 그 사람이 지나쳐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되면 이내 꼬부랑 할아버지로 돌아가 자전거 위에서 낑낑대기를 반복하고 있다.

 

페달은 멋지게 밟는데, 콧물은 줄줄줄... 영 폼 안나네


  
청산리포구 가는 길, 한 곳의 농장 풍경
ⓒ 성낙선
청산리포구

 

태안읍에서 603번 지방도로를 타고, 청산리포구를 향해 간다. 이 지방도로는 그래도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바닷가 쪽 길에 비하면, 거의 평지나 다름이 없다. 오래간만에 속도를 내면서 시원하게 달린다. 세상의 모든 길이 이 길만 같다면, 끙끙 앓는 소리를 낼 이유도 없다. 이 길로 내처 반도를 형성하고 있는 태안군의 북쪽 땅끝인 만대땅끝마을까지 갔으면 하는 바람이 스르르 고개를 쳐든다. 그렇지만 안 될 말이다.


평탄한 길의 유혹에 빠지기 전에, 청산리포구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길이 좀 불편하고 복잡하기는 해도 역시 경치는 바닷가 길이 최고다. 청산리포구 쪽 길로 들어서 얼마 안 가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눈앞에 나타나는 풍경 하나 하나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육지에서는 뭐 하나 눈여겨 볼 것이 없는 농장 마당조차 잘 꾸며진 정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농장 한가운데를 일직선으로 지나가는 길 끝에 검은 갯벌과 푸른 바다가 가로놓여 있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은 일부러 애써 꾸미려 해도 꾸밀 수 없는 풍경이다. 어쩌면 그 자체 그냥 '날것'이라서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농장을 지나서는, 망둥어들이 내장을 몽땅 발린 채 파란 망사에 싸여 전봇대에 걸려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물고기 건조도 이 정도가 되면 가히 예술이라고 할 만하다.


  
꼬챙이에 꿰여 전봇대에 매달려 있는 망둥어들
ⓒ 성낙선
망둥어

 

어느새 청산리포구다. 바닷가 언덕 아래 선착장에서 한 가족이 한가롭게 망둥어 낚시를 즐기고 있다. 포구를 내려다보는 식당 앞 평상에 앉아 한참을 쉬어 간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포구 끝에서부터 임도로 산봉우리 하나는 타고 넘어가 새섬리조트라는 곳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요 며칠 산길과 논길을 헤매며 진땀깨나 흘렸다. 오늘 또 그런 일을 반복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약간 긴장이 되는 게 사실이다.

 

평탄한 길, 네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했다


  
만대땅끝마을 가는 길에 나타난 오르막길
ⓒ 성낙선
오르막길

 

포구를 떠나 본격적으로 산길로 오른다. 생각했던 것보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다. 기어를 낮추면 중간에 멈춰서는 일 없이 꾸준히 페달을 밟고 올라갈 수 있다. 정상 부근에서부터는 비포장길이다. 그런데 그 위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두 길 중 한 쪽이 상대적으로 더 넓어 보인다. 그리고 시멘트 포장까지 되어 있다. 고민할 게 무언가. 바로 그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 길로 거의 15도 각도의 급경사를 내려간다. 도로가 10도 경사면 무척 가파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 15도면 보통 경사가 급한 게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면서 다시 되돌아 올라갈 일은 없겠지 했는데, 웬 걸 그 길 100여 미터 앞이 제방으로 가로막혀 있다.


뭔가 낌새가 좋지 않다. 의구심을 잔뜩 품은 채 제방 위로 올라선다. 아뿔싸, 제방 아래가 바위투성이 해변이 있는 푸른 바다다. 그 바다 위에 낚싯배 한 척이 한가롭게 떠 있다. 해변 양쪽으로는 바위 절벽이다. 앞뒤 좌우가 꽉 막힌 지형이다. 막다른 길로 내려온 것이다. 비로소 길을 잘못 선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길을 되돌아서서 다시 급경사 길을 올라가는데, 속에서 열불이 올라온다. 경사가 너무 급해 중간에 어디 자전거를 세워놓고 쉴 데도 없다. 그렇게 산봉우리 끝까지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데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그러는 사이 더 이상 이 길을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운다. 결국 산봉우리에서 다시 포구로 되돌아 내려왔다.


숨을 고르면서 차분히 생각했다. 씩씩대 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다. 조용히 분을 삭이며 포구로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 나온다. 그 길 중간에 산봉우리를 우회해서 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을 안쪽 길이 여러 개 보이지만, 그 길들마저 싸그리 무시하고 달린다. 마을 안 길이라고 안심할 게 아니다.

 

자전거 여행의 절반은 모험


603번 지방도로를 달리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만 새섬리조트 표지판을 발견하고 만다. 바로 청산리포구에서 산봉우리를 넘어 찾아가려고 했던 그곳이다. 멀리 리조트 건물 옆으로 자동차들이 다니는 길이 하나 보인다. 저 길이라면, 자전거로 지나가도 크게 힘들지 않겠다 싶어 보인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눈 딱 감고 들어간다. 어차피 자전거여행의 절반은 모험이다. 고생을 감수하려 하지 않을 바에 굳이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떠날 이유가 없다.


  
'안부섬' 정류장
ⓒ 성낙선
안부섬

 

리조트 앞 도로는 1차선 아스팔트길이다. 길이 좁긴 하지만 자전거를 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길을 올라탄 지 얼마 안 돼 또 다시 가파른 언덕과 마주친다. 해안도로의 특성상 언덕을 피해갈 방법이 없다. 언덕 위로 올라서면 길 왼편에 버스정류장 표지판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버스정류장 이름이 '안부섬'이다.


육지에서 가까운 서해안의 섬들이 대체로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태안반도에도 간척사업이 진행되면서 졸지에 육지로 변한 섬들이 꽤 있다. 육지와 섬 사이, 섬과 섬 사이에 제방을 쌓고 그 안쪽으로 논과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 바람에 해안선은 일부 곧게 펴졌지만, 대신 섬 위로 도로가 닦이면서 해안 도처에 전에 없던 언덕이 생겨났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앞으로의 내 안부를 묻고 있는 이 안부섬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오늘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의 대부분은 사실상 산과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산봉우리가 아니면 산자락을 타고 넘는 길이라고 보면 된다. 그만큼 경사가 심하고 높은 편에 속한다. 자동차야 언덕이든 평지든 별 문제가 없겠지만, 오늘 하루 종일 태안반도 속 또 하나의 작은 반도인 이원반도의 해안선을 한 바퀴 돌아서 나와야 하는 나로선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여행 열하루 째, 고개드는 '귀차니즘'


  
이원반도 마을 풍경
ⓒ 성낙선
이원반도

 

오늘 하루를 드디어 만대땅끝마을, 만대항에서 마무리한다. 이원반도는 태안반도에 마치 깃대를 세워 놓은 것처럼 높이 솟아 있는 땅이다. 그 깃대 끝에 만대항이 있다. 만대항 위로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이상 있다 하더라도 산길을 얼마 못가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만대땅끝마을에서 바라다보는 바닷가 풍경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배 몇 척이 살짝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해변 너머로 고깔 모양의 작은 바위들이 수면 위에 잔잔하게 떠 있는 모습이 80년대의 바닷가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거기에 요즘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낡은 목선 한 척이 바다 위에 떠서 저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딱 3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풍경이다.

 

  
만대땅끝마을(삼동어촌체험마을) 근처 바닷가 목선
ⓒ 성낙선
목선

 

만대항에서 가로림만 너머 코앞에 건너다보이는 땅이 바로 벌천포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를 무려 이틀이나 걸려서 달려왔다. 지난 23일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지나쳐온 대산산업단지 역시 여전히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벌써 며칠째, 제자리를 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더니, 내가 딱 그 짝이다. 달려봐야 태안반도 안이다.


  
만대항
ⓒ 성낙선
만대항

 

만대땅끝마을과 벌천포 사이의 바다는 가로림만의 벌어진 입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의 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다. 게다가 유속도 빠른 편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곳에 조력발전소가 들어설 예정이다. 조력발전소가 들어서기 좋은 입지를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아직은 조력발전소가 이쪽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갈등은 이미 시작됐다. 조력발전소를 대하는 이곳 주민들의 반응은 벌천포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태안반도만 해도 해안선 길이가 530여㎞가 넘는다.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길은 그보다는 짧겠지만, 그래도 최소 5일 이상은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태안반도에 들어온 지 벌써 3일째다. 그런데도 아직 갈 길이 멀다. 크게 편안한 반도, 태안반도에서 좀 더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여행 열하루 째, 그새 '귀차니즘'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이다. 오늘 달린 거리는 62㎞, 총 누적거리는 780㎞이다.

 

내 글을 교회 주보에까지...황송했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13] 만대땅끝마을에서 만리포해수욕장까지

  
이원면의 농촌 풍경. 가을 냄새가 물씬 난다.
ⓒ 성낙선
가을

9월 26일(일)

 

꾸지나무골해수욕장에서 맞은 아침, 몸을 씻어야 하는데 민박집 화장실에 샴푸가 없다. 이러면 곤란한데. 성수기 때도 없었는지 궁금하다. 비누가 있기는 한데, 이놈의 비누가 물 먹은 건빵처럼 거무튀튀하다. 몸뚱이 중간 부분에 두 개 구멍이 뚫려 있는 것까지 똑같다. 때를 씻으라는 건지, 때를 묻히라는 건지 알 수 없다. 대체 무슨 용도로 쓰던 물건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세제 없이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한다. 씻는 둥 마는 둥 한다.

 

아침부터 무릎이 뻐근하다. 관절이 부드럽게 구부러지지 않고, 뚝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자전거 타는 자세가 잘못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요 며칠 계속 언덕을 오르내리느라 과한 운동을 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다. 이유야 어떻든 몸에 무리가 오고 있는 건 분명하다. 언덕을 피해 다니든지, 그게 불가능하면 어디서든 쉬어가든지 해야 한다.

 

그런데 어디선가 쉬어간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아직은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그땐 또 몸이야 어떻든 자전거부터 타고 보자는 생각이 더 강하다. 어느새 내 몸뚱이마저 자전거 구르듯이 굴러가지 않으면 몇 발자국 못 가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그런 관성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움직이자, 일단 움직이면서 생각해 보자고 하지만, 결론은 늘 끝까지 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다. 도대체 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나도 내 속을 모른다.

 

4만여 개의 손도장, 국보급

 

만대땅끝마을을 벗어나는 일은 덜 고생스럽다. 하루 저녁 자고 일어나면서 원기가 되살아난 까닭도 있고, 처음부터 과한 힘을 써서 언덕을 오르려 하지 않는 까닭도 있다. 만대땅끝마을을 벗어나서 이원방조제를 넘으면서부터는 대체로 곧고 평탄한 길이다. 한동안 꽉 막혔던 가슴이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다.

 

앞선 길들이 시큼털털한 탁배기를 마시며 달려온 길이라면,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길은 시원하고 달콤한 청량 음료수를 마시며 달리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묵은 피로가 가신다. 여행을 떠난 이후로 참으로 가지각색의 길을 맛보고 있다. 이런 즐거움마저 없다면, 더 이상 이 여행을 지속하기도 힘들다.

 

이원방조제에 세계 최대 벽화가 있다고 해서 가던 길을 멈췄다. 무엇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솔직히 말해서 그림은 기대 이하다. 조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벽화 위에 찍힌 4만여 개의 손도장만큼은 가히 국보급이다. 한 번 보고 말 예술이 아니다. 오래도록 보존해, 수만 명이 이 방조제에 손도장을 찍은 의미를 알게 해야 한다.

 

2007년 겨울 태안반도 앞바다에서 전례 없이 큰 기름유출사고가 발생했다. 검은 기름이 해안을 덮었다. 해수면은 물론, 파도를 타고 온 기름덩어리가 해변까지 오염시켰다. 앞서 몸으로 익혀 알고 있듯이 태안반도처럼 복잡한 해안이 없다. 해안 구석구석 스며든 기름을 제거하는 데 연 인원 120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했다. 이 역시 전례 없이 큰 규모의 자원봉사였다. 그들 덕에, 기름때로 절망 상태에 놓여 있던 해안이 되살아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원방조제에 손도장을 찍기 시작한 건 그때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온몸에 기름때를 묻혀가며 자원봉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정신과 의지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벽화에 지금까지 약 4만여 개의 손도장이 찍혔다. 손도장 찍는 행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장에 가면, 물감과 손 씻을 물 등을 준비해 놓고 손도장 찍는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주말이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간다. 사실 벽화는 미완성 상태다. 그러니 '벽화가 조악하다'는 말은 사물을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만 말하는 섣부른 평가에 불과하다.

 

  
이원방조제, 손도장과 낙서.
ⓒ 성낙선
이원방조제

  
이원방조제 손도장들. 빈 칸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성낙선
이원방조제

괜찮은 해수욕장들, 꽤 많네  

 

이원방조제를 지나면 태안발전소 외곽을 빙 돌아가는 길이 나온다. 태안발전소 앞길을 벗어날 즈음해서 오른쪽 방향으로 학암포길 표지판이 보인다. 그 표지판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중간에 해안사구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치면 학암포해수욕장 입구 오토캠핑장이 나온다.

 

일요일 한낮, 오토캠핑장이 자동차와 대형 텐트로 가득 차 있다. 철 지난 해수욕장이 사람들로 붐비는 현상이 조금은 낯설다. 해수욕장을 사철 휴양지로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해수욕장이 전체적으로 성수기 때 못지않게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

 

학암포해수욕장은 그 자체 매우 아름다운 해수욕장이다. 일단 시야에 콘도니 리조트니 하는 이질적인 인공 건축물들이 거치적거리지 않아서 좋다. 백사장은 국내 3대 해수욕장이니 4대 해수욕장이니 하는 것들 못지않게 넓고 깨끗하다. 물빛은 동해안의 바다 빛이 무색할 만큼 맑고 푸르다. 학암포해수욕장이 이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으면 하는 마음인데,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의 욕망이라는 게 현상을 유지하는 데 그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학암포해수욕장 바로 옆에 '석갱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해변이 있다. 이 해변은 관리를 덜 받고 있는 까닭인지 무척 자유스러워 보이는 특징이 있다. 사람들이 높고 짙은 소나무 그늘 아래 아무 데나 텐트를 치고 앉아 가스버너에 고기를 굽고 있다. 정돈된 분위기에 관리가 잘되고 있는 깔끔한 환경을 좋아한다면 학암포해수욕장으로, 그렇지 않고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분방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석갱이 해변으로 가면 된다.

 

  
학암포해수욕장. 범생이 이미지.
ⓒ 성낙선
학암포해수욕장

  
석갱이 해변, 앞은 학암포 못지않게 드넓은 모래사장. 자유분방한 분위기.
ⓒ 성낙선
석갱이

꾸지나무골해수욕장도 그렇고, 태안반도의 서쪽에 있는 해변은 대체로 고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로림만을 에워싸고 있는 동쪽 해변이 검은 갯벌로 덮여 있는 것과 사뭇 다르다.

 

그곳이 어디든, 넓은 백사장에 모래가 많기로는 신두리해수욕장을 따라갈 수 없다. 신두리해수욕장은 모래로 다져진 해변으로 자동차가 들어갈 수도 있다. 모래사장이 그만큼 단단하다. 신두리해수욕장을 유명하게 만든 건, 모래사장 북쪽 언덕 위에 형성되어 있는 신두사구 덕이다. 한국 최대의 해안사구인 신두사구는 한때 사막을 연상시킬 정도로 넓은 모래 언덕이었다. 길이는 약 3㎞이고, 폭은 좁게는 0.2km에서 넓게는 1.3㎞까지다.

 

풍부한 모래가 바람에 날려 언덕을 만들고, 그 모래 언덕 위로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고 노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신두사구는 더 이상 '사막'이 아니다. 모래 언덕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놀던 아이들은 환영처럼 아스라한 기억으로만 남았다. 인위적인 힘이 가해지면서 더 이상 모래 언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이런 신두리사구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보전하자는 운동이 2000년대 초부터 펼쳐졌다. 신두리사구에 희귀한 동식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현재 지역에서는 이 신두사구를 '국내 최고'의 생태관광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신두사구는 지금 넓은 초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 초지에 멸종위기종인 갯방풍과 초종용 등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신두리해수욕장. 승용차 한 대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 성낙선
신두리해수욕장

  
아프리카 초원을 연상시키는 신두리 해안사구
ⓒ 성낙선
신두리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결국 일을 만들었다

 

신두리사구를 나와서는 의항리 좁은 땅으로 들어선다. 이 지역 역시 앞서 거쳐 온 '호리'나 '이원반도'와 마찬가지로 육지에서 바다로 불쑥 튀어나온 형태를 하고 있다. 바다를 향해 마치 뿔난 송아지 모양으로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참 다루기 힘들겠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의항리의 반도 끝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곳에서는 비포장 길로 들어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다. 언제나 철이 들는지. 기왕이면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자꾸 나를 충동질한다. 결과는 녹다운 직전까지 가고 만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산책로라는데, 내가 보기엔 완전한 등산로다. 자전거에 올라타는 건 일찌감치 포기한다.

 

그 길로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걸 보면, 자전거가 가지 못할 길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돌투성이에 한쪽 사면이 절벽에 가까운 산길을 능수능란하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다. 길이라고 다 같은 길이 아니다. 사람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나'라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데 더욱더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을 백 번도 더하고 내려온다.

 

만리포해수욕장까지 가는 길에 구름포해수욕장과 의항리포해수욕장 등을 거쳐 간다. 예전엔 모두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해수욕장들이다. 이들 말고도 그냥 지나친 해수욕장이 여러 군데다. 서해안에 해수욕장이 이렇게까지 많은 줄은 미처 몰랐다. 하긴 그게 어디 해수욕장뿐이랴. 포구, 항구는 왜 또 그렇게 많던지 벌써부터 이름과 위치를 헷갈리기 시작해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만리포해수욕장에 가기 전에 '야산'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독자와 통화를 했다. 서산에 계신 분인데, 내가 자전거를 타고 서산을 지나쳐 가고 있는 것을 알고는 그냥 보낼 수 없다면서 꼭 한 번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내가 이미 서산을 지나쳐 태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고도, 서산과 태안이 멀지 않으니 별 문제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분을 만리포해수욕장 근처 식당에서 만났다. 태안에 사시는 지 선생님과 함께다. 처음 만나는 분인데 낯설지가 않다. 그분이 자신이 만든 교회 주보에 실린 내 글을 보여준다. 나보다도 더 내 글을 아끼는 분 같아 황송하고 또 감사했다. 즐거운 저녁이었다. 오래간만에 겸상을 했고, 배불리 맛있는 식사를 했다. 몸조심하라는 당부 말씀, 잊지 않겠다. 오늘 달린 거리는 53km, 총 누적거리는 833km이다.

 

  
소원면 의항리 땅 끝. 신너루백사장.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
ⓒ 성낙선
신너루백사장

  
의항리 땅 끝에 있는 항구. 의항항.
ⓒ 성낙선
의항항

 

 동네 개똥보다 못한 대접 받는 꽃게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14] 만리포해수욕장에서 신진도항까지

  
만리포해수욕장
ⓒ 성낙선
만리포해수욕장

9월 27일(월)

 

파도 소리에 잠을 깼다. 쏴아 쏴아 쉼 없이 밀려오는 소리가 귓가를 살며시 적시고 지나간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깬 게 얼마만인가. 어린 시절, 바닷가 내 외갓집에서는 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다. 여름방학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시작했다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끝냈다. 서울 집에 돌아오면 한밤중에는 흰 눈자위만 보일 정도로 온몸이 새카맣게 타 있었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마치 바닷가 외갓집에서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듯 상쾌하다. 서울에서는 비가 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만리포해수욕장은 아직 해가 맑다. 오늘 하루 적어도 비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요즘처럼 일기가 불순할 때는 한 시간 뒤를 예측하기 어렵다. 짐을 싸면서 우비와 방수포를 살핀다. 우비 한 벌과 방수포 석 장, 그중에 하나만 없어도 낭패다.

 

천리포수목원을 찾아나선 길

 

숙소를 나와 천리포수목원을 찾아간다. 천리포수목원은 만리포해수욕장에서 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어제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내려오면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천리포수목원을 그냥 지나쳤다. 평상시 보기 힘든 수목원이다. 천리포까지 왔으면, 시간을 쥐어짜서라도 꼭 한 번 들러봐야 한다.

 

천리포수목원은 한국의 수목원 중에서 가장 많은 식물 종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외 수종이 1만2천여 종에 달한다. 바닷가에 보기 드물게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수목원에서 해안가 언덕에 올라서면 그 아래로 천리포해수욕장과 천리포항이 건너다보인다. 나무그늘 아래에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나무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구성이 좀 산만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나름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수목의 자연스러운 생육을 크게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수목원에서는 나무 앞 푯말에 나무 이름만 적어 놓은 게 아니라, 그 나무에 얽힌 이야기나 전설을 함께 적어 놓았다.

 

'귀신나무 왕버들', '꽝꽝소리로 나라를 지킨 꽝꽝나무', '당신께 부(부)를 드려요, 삼지닥나무' 등 흥미를 끄는 이야기들이 제법 많다. 나무이름을 확인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천리포수목원 전경
ⓒ 성낙선
천리포수목원
  
천리포수목원에서 내려다본 천리포해수욕장과 천리포 항구
ⓒ 성낙선
천리포수목원

 

  
천리포수목원 내 오구나무. 그 앞에 나무 이름의 유래를 적은 푯말.
ⓒ 성낙선
오구나무

겉보기에 수목원의 규모가 조금 작아 보인다. 수목원 부지는 전체 18만7천여 평, 그중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공간은 수목원이 보유한 전체 부지의 일부에 불과하다. 천리포해수욕장 앞에 있는 닭섬 역시 수목원 소유다.

 

천리포수목원을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가꾼 고 민병갈 원장의 "나는 300년 뒤를 보고 수목원 사업을 시작했다"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300년 뒤의 일까지 염두에 두고 수목원을 가꾸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300년 후에는 수목원이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300년 앞을 내다보고 산 사람의 포부와 인생이 부럽다.

 

이 수목원을 만든 민병갈씨는 미군으로 한국에 들어와 살다가 한국인으로 귀화한 인물이다. 미국 이름은 밀러다. 수목원에서는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수목원 일부를 '밀러가든'이라고 이름 붙여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멸치 말리는 장면. 천리포해수욕장 가는 길, 고소한 냄새가 입맛을 자극한다.
ⓒ 성낙선
멸치

  
천리포해수욕장 앞 닭섬.
ⓒ 성낙선
천리포해수욕장

수목원에서 생각 외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오늘도 가야 할 길이 참 멀고 복잡하다. 이렇게 유유자적할 때가 아닌데, 너무 긴장이 풀어져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모항까지 가는 길에 바짝 고삐를 당긴다. 다행히 언덕이라고 할 만한 게 그렇게 많지 않다. 어제와 비교하면, 길들이 꽤 점잖은 편이다.

 

꽃게를 나르던 외국인 노동자들

 

모항으로 넘어가는 높은 언덕을 내려가면, 산으로 둘러싸여 땅 밑으로 움푹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항구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 낯선 풍경이다. 부두에 접안해 있는 배들 역시 지금까지 봐온 배들과는 많이 다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항구와 포구를 지나쳐 왔지만, 모항에서 보는 배들처럼 낡지는 않았다. 멀리서 보기에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낡았다. 배 전체가 온통 녹이 슨 철선은 물론이고, 최근에 페인트칠을 다시 한 것 같은 배들조차 곳곳에 녹슨 철판이 들떠 부스러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모항
ⓒ 성낙선
모항

꽃게를 부리고 있는 배의 일부 선원들이 외국인들이다. 한국인과 외국인, 이렇게 둘이서 꽃게를 담은 플라스틱 상자를 나르는데 서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애를 먹는다. 힘든 노동을 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 데서 오는 고충이 얼마나 심할까? 검게 탄 얼굴, 축 늘어진 머리카락, 그들의 얼굴에 고된 노동을 하고 돌아온 흔적이 역력하다. 낡은 배 위에서 거친 파도와 싸우며 잡아온 꽃게에 그들의 한과 희망이 서려 있다.

 

모항에서 나와 계속 바닷가 길을 더듬어 간다. 여전히 길찾기가 쉽지 않다.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갈등이다. 지도를 뚫어져라 들여다보지만, 뭐가 뭔지 모를 때가 많다.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다시 제대로 된 길을 찾기까지 꽤 오랜 시간 애를 먹어야 한다. 이제는 길을 잃고 헤매는 것마저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모항을 나와 계속 남쪽을 향해 달렸다. 남쪽 끝에 파도리가 있다. 이 지역 역시 태안반도에서 날카롭고 길게 튀어나온 형상을 하고 있다. 반도에서 돌출한 지형이라서 처음에는 또 얼마나 많은 언덕을 오르내려야 하나 긴장했다. 그런데 그런 긴장이 무색하게,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그동안 언덕 위를 달리는 도로에 얼마나 많이 시달렸던지, 논과 논 사이로 벼이삭과 키를 맞춘 낮은 도로 위를 달리는 게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곳에 이름도 아름다운 파도리해수욕장이 있다.

 

  
법산리 앞, 어느 집 앞을 지나가는 바닷가길.
ⓒ 성낙선
바닷가

 

  
새로 소금막을 짓고 있는 염전 풍경.
ⓒ 성낙선
염전

파도리에서 신진도까지, 해안 길과 내륙 길을 수시로 넘나든다. 이 지역에서는 해안길 찾기가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지형이 다소 단순한 까닭이다. 길찾기가 어렵거나 조금 헛갈린다 싶으면 바로 내륙으로 올라선다. 길이 분명해야 마음도 편하고, 마음이 편해야 여행도 즐겁다.

 

신진도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달린다. 단순히 해안길이라고 해서 무작정 방향을 틀지 않는다. 들어가 봐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없을 땐 과감히 지나친다. 사실 내가 한국 땅에서 찾아야 할 보물이 꼭 해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태안반도 같이 사방에 뿔이 돋아나 있는 지형에서는 뿔 위로 올라선 것만으로도 해안을 달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데서 해안과 내륙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한 일 아닌가?

 

  
파도리해수욕장
ⓒ 성낙선
파도리해수욕장

신진대교 위로 올라서면 대교 아래에 안흥항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신진도항은 섬의 반대편에 있다. 신진도항은 지금 꽃게잡이로 정신없이 바쁘다. 어선들이 잡아들이는 꽃게를 처리하느라,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한철을 보내고 있다.

 

동네 개똥보다 못한 대접 받는 꽃게

 

 

올해 꽃게잡이는 예년에 없는 풍년을 맞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힌다. 그 바람에 꽃게들이 동네 개똥보다 못한 천한 대접을 받고 있다. 버려진 꽃게들이 어판장 구석구석 쓰레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리 밟히고 저리 차이고,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다리들이 양계장 닭털처럼 너저분하게 바닥을 덮고 있다.

 

아무도 그 쓰레기더미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놈들이 자꾸 내 눈에 밟힌다. 그 꽃게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운명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두 '귀찮게 왜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들이다. 그들에게서 "낸들 어떻게 알겠습니까"와 "버린다"는 두 가지 대답을 들었다.

 

  
꽃게 압살사건 현장. 모항 가는 길.
ⓒ 성낙선
꽃게

도무지 알 수 없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게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운명인지도 모른 채 무더기로 버려지고 있다니. 꽃게를 선별하는 곳에서는 사지가 온전하지 못한 꽃게들을 골라내 마대자루에 쓸어 담고 있다. 그 마대들을 도로 한쪽에 첩첩 쌓아올리고 있다. "버린다"는 꽃게들이다.

 

사지가 온전해 상품으로 팔려나가는 꽃게와 그렇지 못한 꽃게가 거의 반반이다. 반은 쓰고, 반은 버리는 셈이다. 모항에서 꽃게를 잡아와 힘들여 육지로 올리던 선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이 수고한 보람은 어디에 있는 건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발에 밟히고 차에 깔리고, 꽃게들이 때 아닌 수난시대를 맞고 있다. 신진도항에서 오늘 하루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꽃게들의 죽음에 관해 참 많은 의문에 휩싸인다. 300년 뒤를 보고 꽃게를 잡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지금 항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고 꽃게를 잡을 수는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어느새 하늘이 꾸물꾸물해지고 있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모양이다. 오늘 달린 거리는 66km, 총 누적거리는 899km이다.

 
  
안흥항
ⓒ 성낙선
안흥항
  
신진도항에서 바라본 일몰.
ⓒ 성낙선
일몰

지도, 너에게 길을 묻는다

여행을 다니면서 지도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보긴 처음이다. 내가 지금 가지고 다니는 지도는 농림수산식품부와 한국어촌어항협회가 함께 펴낸 <우리나라 해안여행>이라는 책자에 들어 있는 것이다.

 

자전거로 갈 수 있는 해안여행 길을 소개하고 있는데, 비포장도로는 물론 산을 넘어가는 길까지 꼼꼼하게 표시해 놓았다. 이 지도만 보면, 해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염려는 없겠다 싶어, 소중히 챙겨왔다.

 

그런데 지도가 겉보기와는 다르다. 지도만으로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이 지도는 농로나 마을 안길, 그리고 산길로 들어서서는 무용지물이 될 때가 많다. 근처에 갈래 길이 여러 개인데 그중 지도가 가리키는 길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 곳에선 순전히 감으로 길을 찾아야 한다. 당연히 실패할 확률이 높다. 나 같은 길치는 매순간 엄청난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자전거에 많은 짐을 실은 상태에서, 거의 매일 혼자서 산길을 헤매는 건 위험한 일이다.

 

비가 올 때나 비가 온 뒤의 비포장도로는 길로서 구실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 지도로는 그런 때 어디를 어떻게 우회하는 게 좋을지 판단하기 어렵다. 산악자전거가 아니면 가기 힘든 길도 많은데 그런 길에 대한 주의사항이 없는 것도 흠이다.

 

방향을 지시하는 표시가 너무 많아 수시로 지도를 들여다봐야 하는 것도 꽤 피곤하다. 길을 확인하기 위해 중간에 멈춰서야 하는 일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빈번하다.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지도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 너무 많은 신경을 쏟아 붓고 있다.

 

차라리 전국의 도로를 세밀하게 그려 놓은 정밀교통지도를 가지고 다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 지도를 가지고 나만의 여행 지도를 새로 그리는 게 더 뜻 깊은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안선을 여행하는 좀 더 단순하고 명쾌한 길은 없을까? 지금 내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생각이다.

 

<우리나라 해안여행>은 단기 여행에 적합한 책이다. 여러 명이서 하루나 이틀에 거쳐 짧은 거리를 세밀하게 밟아보고 싶은 사람들,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꽤 유용한 책이 될 수 있다.

바보 같은 나, '연포'에서 진짜 바보와 마주치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15] 신진도에서 안면도 백사장항까지

 

  
연포해수욕장. 고운 모래, 넓은 백사장.
ⓒ 성낙선
연포해수욕장

 

9월 28일(화)

 

게으름이 극치를 달리고 있다. 연 이틀 씻지도 않은 상태에서 곯아떨어졌다.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어 편하긴 한데 영 찝찝하다. 그래도 그저께 밤엔 빨래라도 해 놓고 잤는데, 어젯밤엔 빨래조차 하지 않았다. 뭐 이렇게 살아보니 빨래 같은 건 하루 이틀 대충 건너뛰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터득한 거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 나중엔 물을 절약해서 좋지 않느냐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부랴부랴 샤워부터 한다. 여행 다니면서 참, 아침저녁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몸을 씻고 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그날의 여행 코스를 숙지하는 일이다. 가능하면 지명이나 갈림길, 주요 방문지 같은 것들은 반드시 외우려고 하는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명사를 암기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극단적으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지도를 들여다본다. 그런데도 지도를 접어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나면, 방금 기억하려고 했던 게 뭔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그렇게 해서 주요 이정표를 지나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처구니가 없을 때가 많다. 지도가 복잡한 탓이려니, 남 탓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영 마음이 편치가 않다. 이러다 집에 돌아가는 길조차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날그날 해야 할 일을 해놓지 않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은 수시로 잊어버리고,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점점 더 바보가 돼 가고 있는 느낌이다.

 

나 홀로 길 위에 서 있는 날이 점점 더 많아지다 보니, 내가 누군지 되돌아볼 때가 많다. 집에서나 회사에서 평소 어떻게 지냈는지 되돌아볼 때도 있다. 단순히 씻고 안 씻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평소 해야 할 일을 잊고 산 게 너무 많았던 게 아닌가 하는 자각이다. 매일 밤 빨래를 해야 하듯이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들, 길 위의 이정표를 기억해야 하듯이 했어야 하는데 새카맣게 잊고 산 게 무엇인지 되짚어보고 있다.

 

밤새 비가 내렸다. 혹시 아침까지 비가 내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창문을 열어보니 비는 내리지 않는다. 대신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분다. 풀들이 몸을 누이는 정도로 봐서 강풍임이 틀림없다. 바닷가라서 그런지 평상시에도 바람이 몹시 거칠다. 이런 날씨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살짝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아침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이제 드디어 여름이 가고, 겨울이 한 발 더 바짝 다가온 느낌이다. 지난여름에 사람 몸살 나게 더웠던 것에 비하면 추위가 지나치게 일찍 찾아온 셈이다. 서서히 추위에 대비해야 할 때다.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자전거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바퀴가 저절로 굴러간다. 지금은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나중에 옆이나 앞에서 불어올 때는 자전거 타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 바람이 부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바람의 세기인데, 오늘 부는 바람은 무시할 만한 수준을 벗어났다.

 

걷기 열풍의 흔적을 만나다

 

신진도를 다시 되돌아 나와 황골항을 향해 달린다. 황골항은 태안읍에서 서남쪽으로 튀어나온 작은 반도 남쪽에 위치해 있는 조그마한 항구다. 황골항에서는 주민들이 그물 손질에 여념이 없다. 마을길이며 부둣가가 온통 꽃게 그물이다.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불어 바닷물에 전 그물을 널어 말리고 손질하는 데 좋은 날씨다.

 

  
황골포. 꽃게 그물을 손질하는 사람들. 이 작은 어촌에도 노동은 끝이 없다.
ⓒ 성낙선
황골포

황골항 가는 길가에 걷기 코스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표지판 안에 '총 왕복 길이', '남녀 열량 소비량' 같은 것들이 적혀 있다. 대단한 일이다. 걷기 열풍의 흔적을 이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이정표들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도 꽤 유용하다. 이런 곳에서 이처럼 자세한 길 안내를 받을 수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마운 일이다. 이 산책로가 연포해수욕장까지 이어진다.

 

시골길을 한참 달린다. 이런 길 끝에 나타나는 해수욕장이라면 별 볼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멀리 다채로운 빛깔을 띤 방갈로들이 보인다. 꽤 규모가 크다. 무슨 리조트처럼 보인다. 처음엔 뭐하는 곳인가 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이 연포해수욕장이다.

 

의외로 규모가 크고 번화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철 지난 해수욕장 같지 않게 여전히 활기가 남아 있다. 이 해수욕장에는 낚시꾼들이 많이 찾아온다. 우럭, 학꽁치, 망둥어 등 잡히지 않는 게 없다고 한다. 그래서 피서철이 아닌 때에도 관광객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

 

 

  
연포해수욕장. <바보선언> 촬영 기념 표지석.
ⓒ 성낙선
연포해수욕장

그 해수욕장에서 뜻하지 않은 물건과 마주쳤다. 백사장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영화 <바보선언> 촬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지금은 영화 줄거리 같은 건 그냥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영화다. 하지만 그 영화 속 남녀 주인공들이 뛰어다니던 백사장만은 비교적 생생하다.

 

그때는 그곳이 막연히 동해안의 어느 유명한 해수욕장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백사장이 연포해수욕장이었다니, 갑자기 젊은 날의 향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도 한때는 그들처럼, '바보' 같이 살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한 번쯤 꼭 찾아가 보고 싶었던 해변이었다. 그런데 나이 50이 다 돼서 찾아오다니, 진짜 바보가 따로 없다. 이곳까지 오는데 그동안 참 길고도 먼 여행이었다.

 

백사장 한가운데 서 있는데 분위기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옛날에 꼭 한 번 와본 적이 있었던 곳 같다. 기시감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그곳에서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고 배회했다. 그러다 근처 한 슈퍼 앞에서 내게 관심을 보이는 일단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아저씨의 큰 소리 외침, 힘이 됐다

 

  
용신리 앞 바닷가. 무너진 제방 안쪽으로 망둥어 잡이를 가는 사람들.
ⓒ 성낙선
제방

  
연포해수욕장. 왠지 예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듯, 기시감이 드는 곳.
ⓒ 성낙선
연포해수욕장

강화도가 고향이라는 슈퍼 주인이 내가 강화도를 거쳐 왔다는 사실에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또 줄줄이 설명을 드렸다. 언제 어디를 출발해서 지금 며칠째 여행 중인데 앞으로 어디를 어떻게 갈 건지 말씀을 드렸더니, '하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혀를 내두른다. 눈이 큰 두 명의 청년은 말없이 내 자전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마도 꽤 탐이 나는 물건이었을 거다.

 

슈퍼 아주머니는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아저씨 말이 아주머니 역시 열심히 자전거를 타던 사람이라고 했다.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 쉬고 있단다. 아주머니의 미소가 뭘 말하는지 감이 잡힌다. 이래저래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그들과 헤어져 돌아서는데, 아저씨가 뒤에서 꼭 완주를 하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그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진심이 어려 있다. 그분의 응원에 몸이 조금은 더 가벼워진 느낌이다. 가는 길에 채석포해수욕장을 마저 들렀다. 채석포 역시 매우 아름답고 넓은 해수욕장이다.

 

반도를 벗어나서는 다시 태안읍까지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77번 국도로 올라섰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중간에 바닷가로 내려갈 수 있는 이정표를 놓쳤다. 먼 길을 돌기는 했지만 덕분에 도로 위를 마음껏 달렸다. 도로 위를 달리다 옆에서 부는 강한 바람에 자전거가 몇 차례 휘청였다. 중심을 잡는 게 쉽지 않다. 77번 국도를 달리다 중간에 다시 진산리 바닷가로 내려갔다.

 

진산리 바닷가에 꽤 많은 펜션들이 밀집해 있다. 한국의 해안 어디든 펜션이 들어가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사실 새로울 것이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땀 흘려 달려온 길에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펜션 마을이 색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산 아래 바닷가, 평화로운 마을이다.

 

  
진산리의 한 바닷가 펜션마을.
ⓒ 성낙선
진산리

인적이 드문 바닷가 길을 따라 몽산포항을 향해 가는 길에 거대한 공사 현장 앞을 지나간다. 대규모 리조트 건설 현장이다. 자본가들의 생각은 어딘가 모르게 비상식적인 데가 있다. 어떻게 이렇게 후미진 곳에 이렇게까지 거대한 건물을 지어 올릴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그들의 그런 생각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조만간 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해안이 자동차들이 실어 나르는 사람들로 불야성을 이룰 게 틀림없다.

 

  
몽산포항 가는 길, 바닷가 리조트 건설 현장.
ⓒ 성낙선
몽산포

 

흉물스러운 드라마 <장길산> 세트장

 

공사장 옆에 다 허물어져 가는 드라마 세트장이 있다. 반파가 다 된 모습이다. 드라마 <장길산> 촬영장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세트장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과 기와집들이 흉물스럽다. 한때는 세트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줄을 이었다는데, 지금은 그게 다 거짓말 같다. 세트장 뒤에 서 있는 거대한 시멘트 건물이 위압적이다. 한창 잘나가던 때의 영화가 채 6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다.

 

  
다 무너져 가는 드라마 <장길산> 세트장.
ⓒ 성낙선
장길산

몽산포해수욕장은 꽤 넓고 쾌적하다. 백사장 넓이가 동양 최대를 자랑한단다. 하지만 피서철이 지난 지금은 여타의 다른 해수욕장과 다를 것 없이 썰렁한 분위기다. 근처에 거대한 서양식 리조트가 들어서고 있으니, 나중엔 영 몰라보게 달라질 수도 있다. 몽산포에서는 해송 관찰로를 달려 볼 만하다. 송림 사이로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길이 열려 있다. 솔향이 진하다. 가슴이 상쾌하다.

 

  
몽산포해수욕장
ⓒ 성낙선
몽산포해수욕장

청포대해수욕장을 지나, 드르니항까지 속도를 높인다. 태안비행장 앞을 지나서는 풀이 우거진 제방을 건넌다.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긴 한데, 자전거도 지나갈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달리 돌아갈 길이 없어 그대로 진입한다. 제방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해가 질 무렵이라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드르니항에서는 안면도가 지척이다. 마음 같아선 바로 건너뛰면 좋겠다. 안면도로 들어서려면 할 수 없이 한참 북쪽에 있는 연륙교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야 한다.

 

  
제방 위 풀이 우거진 길.
ⓒ 성낙선
제방

  
드르니항. 뒤쪽으로 안면도 백사장항이 보인다.
ⓒ 성낙선
드르니항

오늘은 안면도 백사장항에서 예산에 사는 이 선생과 만나기로 되어 있다. 며칠 전 내가 쓰고 있는 기사를 본 이 선생이 '내 나와바리에 들어왔는데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안면도 근처에 다다르면 꼭 연락을 하라고 말했다. 연락을 안 하면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다.

 

후환이 두려워 안면도 들어서기 전부터 일찌감치 전화를 드렸다. 덕분에 저녁 한 끼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내 지친 육신이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숙박 장소까지 알아봐 주셨다. 이 선생 덕에 큰 힘을 얻었다. 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이다. 오늘 달린 거리는 81km, 총 누적거리는 980km이다.

 

  
안면도 백사장항. 대하축제 현장.
ⓒ 성낙선
백사장항

지나치게 썰렁한 해수욕장에, 화끈한 그것은....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16] 안면도 백사장항에서 안면읍까지

9월 29일(수)


  
기지포해수욕장의 해안사구 관찰로
ⓒ 성낙선
기지포해수욕장

 

안면도는 두 얼굴을 가진 섬이다. 태안반도 남쪽에 커다란 가지 모양으로 매달려 있는 이 섬은 400여 년 전만 해도 현재의 태안군 남면과 붙어 있던 육지였다. 그랬던 곳이 조선 인조 때 지금의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 신온리 사이의 땅을 파내고 천수만과 서해를 연결하면서 현재와 같은 섬이 되었다. 전라도 지역에서 올라오는 세곡미를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안면도는 순수하게 말해서 육지이면서도 육지가 아닌, 또 섬이면서도 온전한 섬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이중의 성격을 가진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안면도는 또한 서쪽과 동쪽이 완전히 판이한 형태의 해안선을 형성하고 있어, 양쪽이 모두 같은 섬 안에 있는 해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서쪽은 줄잡아 13개 정도의 해수욕장이 있다.

 

가장 북쪽의 백사장해수욕장에서부터 가장 남쪽의 바람아래해수욕장까지 해안선을 온통 해수욕장이 차지하고 있다. 해안선 전체가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반해 동쪽에는 해수욕장이라고 이름이 붙은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어떻게 보면 매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는 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안면도는 상당히 친숙한 섬이다. 그러니까 대체로 안면도는 이제 더 이상 보고 들을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면도는 두 가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섬이다.

 

서해안을 줄줄이 사탕처럼 잇고 있는 13개의 해수욕장도 대부분 한두 가지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백사장해수욕장을 다녀왔다고 해서, 그리고 꽃지해수욕장을 다녀왔다고 해서 안면도의 해수욕장을 다녀왔다고 말할 수 없다는 얘기다.

 

육지면서 육지가 아니고, 섬이면서 섬이 아닌 안면도


  
삼봉해수욕장' 소나무가 우거진 해변 자전거길
ⓒ 성낙선
삼봉해수욕장

삼봉해수욕장에는 해변에 우아한 자전거 길이 있다. 소나무 숲 사이를 지나가는 넓은 길 위에 굵은 자갈을 깔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기 약간 불편한 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길 위로 시도 때도 없이 모래가 날아드는 걸 감안하면 자갈 이외에 다른 선택을 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솔향기가 그윽하다. 길 위에 방금 떨어진 듯한 솔가지와 솔방울들이 덮여 있다. 자전거가 하늘을 가린 울창한 소나무 아래 자갈길을 달리다가 2/3 지점에서부터는 나무 데크를 깐 모래 둔덕 위를 달리기도 한다. 모래 둔덕 위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수 있게 배려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길은 바로 옆에 있는 기지포해수욕장까지 연결이 되어 있다.

 

이런 걸 보면, 해수욕장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고 있는 걸 읽을 수 있다. 다양한 시설, 한두 가지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서는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다. 이제는 사람들이 단순히 해수욕만 즐기기 위해 해수욕장을 찾는 시대는 지났다.


  
밧개해수욕장. 검은 돌로 둘러친 곳이 독살.
ⓒ 성낙선
밧개해수욕장

밧개해수욕장은 백사장 일부가 검은 바위로 뒤덮여 있다. 검은 돌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는 게 너무 거칠어 보여 이런 곳에서 어떻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해변으로 내려가 검은 바위 언저리 가까이 다가가면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다른 세상, 외계에 있는 다른 땅 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검은 바위 위로 올라서자 독살체험을 하기 위해 쌓아 놓은 돌담이 눈에 들어온다. 독살은 해변 가까이 올라왔던 물고기들을 물이 빠질 때 가두어 잡기 위해 쌓아둔 돌담을 말한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곳에서 주로 이용한다.

 

  
밧개해수욕장의 이색적인 풍경.
ⓒ 성낙선
밧개해수욕장

지금은 물이 거의 다 빠진 상태다. 혹시나 돌담에 갇힌 고기가 있나 해서 가까이 다가가 본다. 운이 좋으면 한두 마리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물고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모두 잡아갔으려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바닷가 쪽 돌담에 둥근 시멘트 파이프를 연결해 물고기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곳으로 바닷물이 줄줄 새고 있다.


파이프를 막으면 물고기가 갇히고, 파이프를 열어놓으면 물고기들이 얼마든지 달아날 수 있는 구조다. 물고기 하나 애꿎은 죽음을 맞이하지 않게 하려는 바닷가 사람들의 착한 심성을 읽을 수 있다. 이곳에는 뾰족하게 모가 나 있는 돌들이 많아 밟고 지나갈 때 주의해야 한다.


바닷가 해수욕장이라고 꼭 모래사장만 있으라는 법도 없다. 밧개해수욕장에 가면 모래사장밖에 없는 해수욕장이 조금 밋밋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다른 해수욕장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은근한 매력을 가진 해수욕장이 밧개해수욕장이다.

 

'때'묻지 않은 건 좋은데, 너무 썰렁하네


  
바람아래해수욕장.
ⓒ 성낙선
바람아래해수욕장

바람아래해수욕장은 안면도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너무 많은 해수욕장을 거쳐 내려오는 탓에 위에서 방문객들을 모두 다 뺏긴 탓인지 지나치게 한적한 모습을 하고 있다. 썰렁하다. 심하게 표현해서 버려진 듯한 인상마저 든다.


그렇지만 이 해수욕장 역시 다른 해수욕장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보았던 해수욕장들이 대체로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양 옆에 바다로 돌출한 산줄기들로 에워싸여 있는 데 반해, 이 해수욕장은 그런 것 없이 사방이 확 트여 있는 형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그대로 다 보여주고 말겠다는 듯 화끈한 모습이다. 바람아래라는 이름만큼이나 시원한 풍경을 보여준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해변이 심하게 어질러져 있다. 쓰레기들마저 나 좀 보란 듯 여기저기 화끈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조금만 가꾸고 돌보면 둘도 없이 훌륭한 해변으로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은 그런 '때'를 만나지 못한 게 분명하다. 겉모습이 아무리 더러워도 그 속에 감춰진 아름다움까지는 아직 때가 묻지 않은, 내가 보기에 안면도에서 가장 순수해 보였던 해수욕장이 바로 바람아래해수욕장이다.


13개 해수욕장을 모두 다 돌아보지 않았다. 더러 이정표를 놓치기도 했고, 더러는 시간상 그냥 건너뛴 곳도 있다. 꽃지해수욕장 같은 경우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 많아 알려진 곳이라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고 있었다.


해수욕장 말고 방포항 같은 곳 역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곳이다. 방포항에서 빨간 꽃다리를 건너 꽃지해수욕장으로 넘어가면서 상당히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만큼 그림이 나오는 곳이라는 얘긴데, 너무 자주 봐 식상한 감도 없지 않다.

 

경찰이 자전거도 지켜주겠다, 두 다리 뻗고 잠들다


  
꽃지해수욕장. 할배, 할매 바위.
ⓒ 성낙선
꽃지해수욕장

샛별해수욕장에서는 해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노는 한 쌍의 다정한 연인을 보았다. 그 모습이 내가 본 연인들 중에 가장 아름다워 보였다. 그 자리에서 세상에 모든 연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광경을 그려봤다. 정말 환상적이다.

 

꽃지해수욕장에 가면 수많은 연인들이 손을 잡고 할배바위와 할매바위가 있는 곳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샛별해수욕장에서 자전거를 타던 연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샛별해수욕장까지 가는 길도 그렇지만, 자전거를 타고 샛별해수욕장에서 장삼포해수욕장으로 넘어가는 길이 무척 복잡하다. 뭐에 홀린 듯 산길로 들어섰는데, 지도에 표시가 되어 있는 방향을 찾을 수가 없다. 산 위에 삼지창 모양으로 갈라진 길에서 가장 오른쪽 길은 해안 초소가 있는 절벽길이고, 그 다음 길은 해안까지 내려가는 막다른 길이다.


모두 되돌아 나오는데 애를 먹었다. 마지막 세 번째 길은 가도 가도 마을이 나타나지 않아 이 길마저 나를 속였나 해서 속을 끓였다. 다행히 가는 길에 마을 사람들을 만나 온전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바람아래해수욕장에서 안면도 최남단에 있는 영목항까지는 77번 국도를 이용한다. 원래는 영목항에서 하루를 묵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숙박요금이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 비싼 편이어서 마음을 접었다.


  
영목항에서 바라본 낙조
ⓒ 성낙선
영목항

그때가 저녁 6시 무렵, 아직 해가 지려면 1시간가량 더 여유가 있어 내친 김에 바로 안면읍까지 치고 올라간다. 대천에 숙박 시설을 예약해 놓은 상태에서 일정과 거리를 고려한 결과, 적어도 오늘 안으로 안면읍내까지는 가 있어야 한다는 계산도 나왔다.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안면읍에서는 친절한 여관 주인의 도움을 받아, 낯짝도 두껍게 경찰서 현관 앞에 떡하니 자전거를 묶어두었다. 그리고 정말 아무 걱정 없이 맘 편히 잘 쉬었다. 당직 경찰관이 우리가 잘 보관할 테니 편히 쉬라며 웃었다. 자전거여행을 하다 보면 평소와는 다르게 친절한 경찰관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게 또 자전거여행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오늘 달린 거리는 78km, 총 누적거리는 1058km다. 오늘 드디어 1000km를 돌파했다. 꽃지해수욕장을 지난 뒤였다.

 

  
속도계. 지금까지 달려온 거리가 1000km.
ⓒ 성낙선
속도계

자전거여행자 잡는 시골인심 "이것 좀 먹고 가"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17] 안면읍에서 대천항까지

9월 30일(목)

 

읍내를 떠나 안면도를 벗어나기 직전에 황도로 핸들을 돌린다. 77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창기삼거리에서 황도로 들어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황도는 안면도에 딸린 섬으로 안면도와는 연도교로 연결이 되어 있다. 오늘 가야 할 길이 제법 멀다. 그런데도 황도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은 안면도 유일의 부속섬은 어떻게 생겼는지, 그곳에서 바라다보는 천수만의 풍경은 또 어떨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허름한 1차로 다리로 연결된 안면도 유일의 부속섬

 

황도는 이름 있는 관광지는 아니다. 황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다 허물어져 가는 초라한 다리가 하나 놓여 있다. 게다가 1차로다. 한꺼번에 2대의 차량이 지나갈 수 없다.

 

다리가 거의 무용지물이 돼 가는 시점에서야 겨우 새 다리를 놓기 시작한 모양이다. 1차로 낡은 다리 바로 옆에 하늘 높이 날아갈 듯 산뜻한 새 다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새천년을 넘어 다시 10년의 세월을 더할 때까지 1차선 시멘트 다리 하나로 견딘 황도 주민들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황도로 들어가는 새 다리 건설 현장. 아래가 옛날 다리.
ⓒ 성낙선
황도

  
황도 풍경
ⓒ 성낙선
황도

황도 동쪽에 짧은 해안도로가 있고, 작지만 정갈한 모습의 포구가 있다. 북쪽 포구에서는 방금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한 부부가 그물에서 꽃게와 잡고기 등속을 떼어내느라 바쁘다. 새우를 잡으러 나갔다가 별 소득이 없어 그냥 돌아왔단다. 새우가 걸려야 할 그물에 대신 꽃게 몇 마리와 이름도 기억하기 힘든 잡고기들이 걸려든 셈이다. 어쩐지 처음 보았을 때부터 신명을 잃은 듯 조금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포구에서 눈을 들어보면 멀리 서산으로 넘어가는 AB지구방조제가 보인다. 한동안 끊임없이 굽어 도는 길만 보다가 바다 위로 곧게 뻗은 길을 바라보는 감회가 남다르다. 비로소 좀처럼 헤어날 길이 없어 보이던 태안반도를 벗어나게 됐다고 생각하니까 시원섭섭한 면도 없지 않다.

 

마을 안쪽에 이제는 폐교가 된 황도초교가 있다. 정말이지 옛날 학교 분위기가 물씬 난다. 아직도 이런 학교가 불도저에 밀려 나가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이런 폐교는 그냥 이렇게 방치할 게 아니라, 옛날 학교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황도초교 담벼락.
ⓒ 성낙선
황도

폐교를 지나 황도 북쪽의 언덕을 오른다. 순전히 그곳에는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다. 그 언덕에서 마늘을 심다가 잠시 쉬면서 새참을 들고 있는 섬 주민들을 만났다. 그냥 조용히 지나칠 생각이었는데, 길 위에 상을 차린 격이라 그 길을 지나가면서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긴 뭐 하러 가게? 계란이나 먹고 가

 

누구여? 다들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다. 갑자기 낯선 복장에 짐가방을 매단 자전거를 가지고 나타난 이방인이 이상했을 법하다. 그러다 내가 손가락까지 들어 보이며 저 건너 편 언덕 위로 올라가려 한다고 했더니, 이구동성으로 거긴 뭐 하러 가냐고 야단이다. 더 이상 가봐야 길이 없다고 그냥 돌아가라고 손을 휘휘 내젓는다. '그래도 뭐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냥 한 번 올라갔다 내려오겠다'고 하자 비로소 길을 열어준다.

 

그렇게 길을 열어주고 그냥 보내주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그냥 가면 안 된다고 계란 좀 먹고 가라고 야단이다. 뭐 좀 먹고 가라는데 그냥 가는 자전거여행자는 없다. 그렇게 해서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순식간에 계란 4개를 먹어치웠다. 마침 시장기가 돌던 때라, 계란 같은 건 백 개도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계란만 먹으면 목이 막히니까 열무김치를 곁들여 먹으라고 하면서 젓가락까지 건네줘서 열무김치를 또 무진장 먹었다. 나중에는 밭주인이 와서 술 한 잔 안 줄 수 없다며 소주를 종이컵으로 가득 따라주는 바람에 그것까지 받아 마셨다. 참 알딸딸한 분위기다.

 

정말 잘 먹었다. 오늘 길에서 이런 대접을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배불리 잘 먹었다고 하면서 배를 두드리니까, 이번에는 또 잘했다고 웃으면서 박수까지 쳐준다. 참 신통방통하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이렇게들 까지 좋아하시다니. 나도 나이가 적지 않은데, 어르신들 앞에서 마치 내가 재롱을 피우는 어린아이라도 된 기분이다. 칭찬을 해주니까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마늘 농사를 짓는 섬 주민들.
ⓒ 성낙선
황도

달걀 먹은 힘으로 순식간에 달려간 언덕 위

 

밭주인이 집에서 직접 기른 닭이 낳은 달걀이라고 했으니 건강식이 틀림없다. 갑자기 없던 힘이 솟아나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언덕 끝까지 올라갔다. 그 힘이 달걀 때문인지, 아니면 그 달걀을 건네준 인심 때문인지는 분간하기 어렵다. 시골 인심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해안 풍경이 시원하다. 천수만과 방조제, 그리고 간월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면도 근처에 아직 이런 곳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여느 섬 같았으면 벌써 펜션 2,3개는 들어섰을 자리다. 하지만 주변으로 온통 잡풀과 잡목이 우거졌다.

 

새 다리가 놓여서 앞으로 황도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폐교와 잡풀로 우거진 언덕이 그대로 남아 있을지는 의문이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아까 달걀을 함께 먹던 주민들이 모두 마늘을 심느라 여념이 없다. 큰 소리로 인사를 드렸다. 다음에 또 들르겠다고.

 

안면도를 나와서는 B지구방조제를 바람처럼 달린다. 간월도까지 거침이 없다. 간월도에서 잠시 머문 뒤, 다시 A방조제를 건넌다. 이 방조제들은 순전히 산업용으로 만들어졌는지 자전거로 달릴 만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차량이 적지 않은 편이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간월도 간월암
ⓒ 성낙선
간월암

굴밥? 대하? 석화구이? 키조개? 먹을거리 넘치는 서산 해안가

 

A지구방조제를 넘으면서부터 대천제방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언덕이 파도를 치듯이 나타난다. 언덕이 높은 건 아니지만, 인내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미리 각오를 하는 게 좋다. 그래도 대천항까지 가는 길이 꽤 아름답다. 그걸 위안으로 삼을 만하다. 그곳의 일부 해안도로에는 자전거도로까지 만들어져 있다. 쾌적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해안가 자전거도로
ⓒ 성낙선
자전거도로

  
바닷가의 한 어촌체험마을 풍경. 멀리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 성낙선
어촌체험마을

  
남당항 대하축제 현장. 노래자랑 무대.
ⓒ 성낙선
남당항

남당항에서는 지금 한창 대하축제가 진행 중이다. 앞서 안면도의 백사장항에서도 대하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축제가 동시에 남당항과 백사장항에서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 두 곳에서 잡아들이는 대하가 전국에서 잡아들이는 대하의 상당량을 차지한다고 한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백사장항의 축제 장소도 그렇고 남당항 역시 다소 썰렁한 분위기다. 그래도 주말엔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하니까 그때쯤이면 축제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이 붐비는 걸 싫어하면 평일에 찾아가는 게 좋다.

 

B지구방조제를 지나면서 거쳐 가게 되는 서산의 해안가 도로에는 먹을거리가 넘쳐난다. 가히 '음식거리'라고 붙일 만하다. 간월도에서는 굴밥을, 남당항에서는 대하를, 천북굴마을에서는 석화구이를, 그리고 오천항에서는 키조개를 맛볼 수 있다. 계절에 따라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따로 있다. 가을엔 대하를, 겨울엔 굴과 석화를 맛볼 수 있다.

 

대천제방에서 심한 악취가 코를 비튼다. 화학공장 옆을 지나갈 때 맡았던 냄새보다 더 독하다. 생선 썩는 냄새도 이 정도로 고약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도무지 무슨 냄샌지 판단하기 어렵다. 농사를 짓는 지역에서 풍기곤 하는 분뇨 냄새와도 또 다르다. 그 구간을 벗어나는 동안, 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이 정도면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

 

이제 남대천만 넘으면 대천항까지 가는 길은 별 어려움이 없다. 남대천교 가기 전에 서해안고속도로 밑으로 잠수교가 있다. 썰물 때 건너다닐 수 있는 다리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제 막 바닷물이 들어차고 있었다. 다리 가운데에 이미 바닷물이 올라와 있다. 찰랑거리는 수준이라 무사히 건넌다.

 

잠수교를 건너서는 해안을 따라 널찍한 자전거도로 위를 달린다. 이 도로는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아직도 공사가 다 끝나지 않아, 지금도 인부들이 도로에 칠을 하거나 바닷가 쪽으로 난간을 세우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도로가 완성이 되면 대천역과 버스터미널에서 대천항이나 대천해수욕장까지 곧장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다.

 

  
해안가 도로
ⓒ 성낙선
해결사

  
남대천 잠수교 위에서 바라본 낙조.
ⓒ 성낙선
낙조

숙소 근처 식당에서 접한 '배춧값 폭등'

 

숙소 근처에서 저녁을 먹다가 뉴스에서 최근 배추 값이 9천원에 달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식당 주인에게 앞으로 식당에서 배추김치 먹기 힘들겠다고 했더니 한숨을 폭 내쉰다. 배추 값만 그런 게 아니란다. 호박도 그렇고, 요즘 음식 가격 맞추기가 너무 어렵단다. 그러더니 요 사이 며칠 동안 손님이 들지 않는다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고, IMF때보다도 더 심하다고 걱정이 한참 길게 이어진다.

 

정부는 또 중국에서 값싼 배추를 수입하는 단기 처방을 내린다. 돈 있는 사람은 국산 먹고, 돈 없는 사람은 중국산 먹으라는 얘긴데, 생각할수록 한심한 노릇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중국산 배추 가격도 결코 낮은 편이 아니다. 결국 배추니 뭐니 하는 것들의 물가폭등으로 몸살을 앓는 건 서민들뿐이다. 오늘 달린 거리는 95km, 총 누적거리는 1153km다.

 

바다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저 사람 뭐지?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18] 대천항에서 장항항까지

  
대천해수욕장.
ⓒ 성낙선
대천해수욕장

10월 1일(금)

 

10월 1일은 대천항 근처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온몸에 피로가 누적된 데다 자전거도 손봐야 하고, 하루 동안 이것저것 재정비를 할 필요가 생겼다. 몸은 무릎과 엉덩이 통증, 그리고 어깨 결림 같은 것이 가장 걱정이 되었는데, 의외의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며칠 전부터 등 오른쪽이  결리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아침저녁 웅크린 자세로 기사를 작성하느라 몸에 무리가 온 게 아닌가 싶은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루 쉬고 나면 좀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자전거는 기어 변속 케이블이 늘어나 기어와 체인이 정확하게 맞물리지 않고 있다. 기어에서 계속 쇠를 깎아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1000km를 넘어서면서 사람 몸뿐만 아니라, 기계에도 서서히 무리가 나타나고 있다.

 

케이블을 당겨서 기어 위치를 조정하며 되는데 나는 그 일에 자신이 없다. 오히려 조정이 잘못돼 더 큰 화를 불러온 적이 여러 차례라 이번에는 아예 전문가에게 내맡기기로 했다. 대천항 근처에는 자전거 수리점이 없어, 자전거를 타고 보령시까지 나갔다 왔다.

 

회사에 있을 때는 그렇게 시간이 안 가더니...

 

 

나갔다 오는 길에 도로지도 책자를 구입했다. <우리나라 해안여행> 책자에 있는 지도를 보완해서 사용할 요량이다. 앞으로는 산길이나 비포장도로 들어가는 일을 자제하고, 그런 길을 만나게 되면 가급적 해안선에서 조금 떨어진 우회 도로를 이용할 생각이다.

 

하루가 금방 가 버렸다. 회사에 있을 때는 그렇게 시간이 안 가더니, 요즘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하루 쉬어가는 걸로 모든 게 여행을 떠나기 전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올 리 없다. 이제부터는 길 위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 아프면 견디고, 무언가 부족한 물건이 발생하면 당장 몸에 지니고 있는 걸로 대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용두해수욕장. 오른쪽에 삼각형 그물을 들어올려 잡은 새우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 성낙선
용두해수욕장

10월 2일(토)

 

전국에 비가 온다고 했다. 충청도 지역에는 10mm에서 40mm 가량의 비가 올 모양이다. 오늘 아침, 하늘이 조금 흐린 것 말고는 비가 올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니 해가 떠 있을 때 서두르는 게 좋겠다.

 

대천해수욕장 앞을 지난다. 올 봄에도 공사 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공사가 여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다. 규모가 큰 해수욕장일수록 피서 철이 끝난 뒤에 찾아오는 황량함이 더 크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구조물들이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든다.

 

 

대천해수욕장에서 얼마 안 가 용두해수욕장이 나온다. 처음에는 대천이나 용두나 뭐가 다를까 싶어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다. 용두를 특별히 기억할만한 요소도 없었다. 그런데도 핸들을 꺾었다.

 

무엇이 다른지는 가봐야 한다. 그리고 꼭 무언가 다른 것이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쉬엄쉬엄 쉬어가는 데 굳이 장소를 따질 이유도 없다. 일부러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찾아가는 여행이 아니라, 발길이 닿는 대로 가는 여행인데 너무 까탈을 부릴 이유도 없었다.

 

카메라를 꺼내들고 해변으로 내려서는데 멀리 바닷가 수심이 옅은 곳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몸에 물속에 반쯤 잠겨 있다. 해수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물장난을 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파란 그물을 끌거나 밀고 있다.

 

그물은 두 가지다. 뒤에서 끄는 넓적한 그물과 앞에서 미는 삼각형 모양의 그물이 있다.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들이 끌고 다니는 것은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넓적한 아가리를 가진 그물이다. 그물 역시 반쯤 물속에 잠겨 있다. 그 놈을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면서 무언가 바닷물 속에 있는 걸 잡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물고기인지 조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물을 끄는 속도가 너무 느려 물고기를 잡는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이 해변으로 나오면 물어봐야지 하고 기다리는데 좀처럼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물을 이쪽으로 끌고 갔다 다시 저쪽으로 끌고 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도대체 뭘 잡기에 저렇게 열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 촌놈은 입맛을 다셨다

 

  
자젓을 담그는 돗대기새우를 잡는 모습
ⓒ 성낙선
자젓

할 수 없이 물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한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새우를 잡는단다. 새우를 허리밖에 안 차는 물속에서 잡는다는 게 좀 이상하다. 자젓을 담그는 새우란다. 새우가 바구니에 담겨 있다. 그 안을 들여다 보니, 실치보다 더 하얗고 작은 새우들이 바구니 속 그물 여기저기에 설거지를 하다 남은 밥알처럼 붙어 있다.

 

오늘은 얼마 잡지 못했단다. 원래는 바구니 하나 가득 잡히곤 했는데 오늘은 영 잡히는 게 없다며 나중에 사리 때 밤에나 잡힐는지 모르겠단다. 자젓은 잡히는 양이 워낙 적어 집에서 반찬으로 먹고 자식들에게 조금씩 나눠줄 뿐이다. 자젓이 맛있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데, 나 같은 서울 촌놈마저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마을 주민들이 바닷가에서 새우를 잡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이 해변이 원래는 이곳 마을 사람들의 것이고, 생활의 터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들에겐 그냥 잠깐 머물다 가는 놀이터에 불과하지만, 그들에게는 생활과 삶의 일부인 셈이다. 그런 해변을 사람들이 없어 썰렁하다고 말하곤 했으니, 내가 평소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사는지 알 수 있다.

 

  
무창포해수욕장. 대하 전어 축제 현장.
ⓒ 성낙선
무창포해수욕장

무창포해수욕장에서는 대하와 전어축제가 한창이다. 마침 토요일 점심 무렵이라 그런지 무창포 해변에 전어를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요즘 서해 지역에서는 해산물 축제가 한창이다. 백사장항과 남당항에서는 대하축제를 벌이고 있고, 오늘 잠시 후에 들르게 되는 홍원항에서는 전어 축제가 한창이다.

 

 

  
춘장대해수욕장
ⓒ 성낙선
춘장대해수욕장

그런 면에서 춘장대해수욕장은 지조가 있는 편이라고 해야 하나? 해수욕장 본래의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대자가 붙는 해수욕장들이 대개 그렇듯이, 춘장대 역시 대차게 큰 해수욕장이다. 백사장도 그렇고, 백사장 뒤의 소나무 숲 역시 규모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넓다. 소나무들은 또 어찌나 큰지 마치 기골이 장대한 청년들이 뒤에서 든든히 버티고 서 있는 느낌이다.

 

춘장대를 떠날 무렵,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을 쓰고 백사장을 거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아직 몸이 젖을 정도는 아니어서 크게 염려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홍원항에 도착하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몸이 젖는다. 그새 바지가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홍원항 전어 축제. 간이 횟집에서 전어를 즐기는 사람들.
ⓒ 성낙선
홍원항

홍원항에서는 트로트 음악에 맞춰 밸리댄스 복장을 한 댄서들이 온몸에 비를 맞으며 정체불명의 춤을 추고 있다. 노래자랑 시간 막간에 춤을 선보이는 모양인데, 아무리 토속적인 행사라 해도 비오는 날 트로트에 밸리댄스는 너무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축제 장소 어디를 가나 노래자랑이 빠지질 않는다. 사람들이 축제에 관심이 있어 온 건지 아니면 노래자랑에 흥미가 있어 온 건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둘 다인 경우일 수도 있다.

 

비가 퍼붓는 가운데, 노래자랑 무대 앞에 설치한 텐트 안으로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찼다. 토요일 오후라서 그나마 홍원항은 축제 분위기가 좀 나는 편이다. 노래자랑 텐트뿐만이 아니라, 주차장 역시 자동차들로 빈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다.

 

  
마량동백나무숲 풍어제사당 곁에서 내려다 본 바다.
ⓒ 성낙선
마량동백나무숲

 

 

쏟아지는 빗속을 달렸다

 

오후 3시 무렵,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지고 있다. 마량동백나무숲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빗속에 서 있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몸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런 상태로 여행을 계속해야 할지 의문이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동백나무숲을 나와, 해돋이와 해넘이를 모두 감상할 수 있는 마량포구를 흘깃 엿보고 나서는, 오로지 달리는 데 열중한다. 어떻게든 해가 지기 전에 장항항까지는 가볼 생각이다.

 

비인면의 해안도로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갯벌이 온통 잿빛이다. 거기에 찬바람까지 불어 스산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다. 몸이 약간 으슬으슬하다. 토요일인데도 도로 위에서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분위기가 공포 영화에 가깝다. 그래도 중간 중간 자전거를 멈추고 쉬어가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무서워도 몸이 고되긴 마찬가지다.

 

가는 길에 어촌체험마을 여러 개를 지나친다. 체험마을 앞으로 산책로도 잘 닦여 있고, 체험 시설도 잘 갖춰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비가 오는데도 우비를 쓰고 체험을 하러 나온 가족이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비 때문에 서둘러 갯벌을 빠져 나오고 있다.

 

옥산리 부근을 지나치면서부터는, 빗물에 섞여 이마로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눈을 뜰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 눈이 몹시 쓰라리다. 낭패다. 눈을 아무리 닦아내도 소용이 없다. 할 수 없이 두건을 꺼내 이마까지 내려 쓴다. 두건이 얼마나 버텨줄지 모르겠다. 가는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해가 떨어져서야 장항항에 도착했다. 숙소에 들어가서 살펴보니, 가방 안까지 젖어 있다. 이런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올해 들어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요즘 비가 와도 너무 심하게 온다. 카메라와 노트북을 꺼내 겉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드라이어기로 말린다. 비에 젖은 옷가지를 죄 빨아 널었다. 이것들이 밤새 마를 가능성은 제로다. 내일도 비가 계속 온다면, 장항항에서 발이 묶일 수밖에 없다. 오늘 달린 거리는 82km, 총 누적거리는 1235km다.

 

"주객은 술과 싸우지 않는다" 했거늘...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19] 장항항에서 격포항까지

  
장항항 근처 산책로
ⓒ 성낙선
장항항

10월 3일(일)

 

비가 올 거라는 예보와는 달리 하늘이 맑다. 구름이 좀 껴 있지만, 비가 올 거 같지는 않다. 비를 핑계로 하루 쉬어갈 생각이었는데, 하늘이 허락지 않는다. 어쩔 수 있나? 다시 짐을 싸야지.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옷가지들을 둘둘 말아 그냥 가방에 집어넣는다. 이젠 이런 행동들도 별로 꺼림칙하지 않다.

 

  
장항항 근처 갯벌. 앞에 보이는 도시가 군산.
ⓒ 성낙선
장항항

바람이 조금 강하게 분다. 앞에서 불지, 뒤에서 불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일단 자전거를 타봐야 알 것 같다. 장항항에서 금강하굿둑까지 해안도로를 타고 간다. 장항항에서 바라보면, 바다 너머로 군산항이 지척이다. 육지라면 30분 안에도 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장항항에서 군산항까지 가려면, 금강하굿둑을 넘어 상당히 멀리 돌아가야 한다. 바람은 다행히 뒤에서 불고 있다.

 

금강하굿둑까지 가는 길에 산업단지가 있어 길이 꽤 위험할 거라고 짐작했는데 다행히 도로 옆으로 자전거도로가 놓여 있다. 바람은 뒤에서 불고 위험한 일마저 없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한없이 느긋해진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금강하굿둑까지 가는 데 제법 긴 시간이 걸린다.

 

드디어 도 경계를 또 하나 넘다

 

 

  
전라북도 표지판. 금강하굿둑
ⓒ 성낙선
전라북도

  
금강하굿둑
ⓒ 성낙선
금강하굿둑

 

금강하굿둑을 건너면 거기서부터 전라북도 군산시다. 드디어 도 경계를 또 하나 넘었다. 하굿둑을 넘자마자 오른쪽으로 진포대첩비와 생태체험장 이정표가 보인다. 진포대첩비는 1380년(고려 우왕 6년) 왜구와의 해상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당시 왜구가 500여 척의 배를 타고 지금의 군산 내항으로 침투하자, 고려군은 최무선이 제작한 화포로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0여 년 전이다. 진포대첩비는 큰 구경거리가 되지 못하지만, 대첩비가 갖는 의미는 한 번쯤 되새겨 볼만하다. 진포는 군산의 옛 이름이다.

 

  
금강변 산책로, 자전거도로
ⓒ 성낙선
금강

  
금강, 망둥어 잡는 장면. 그물을 물에 담갔다 잠시 후 들어올리면 망둥어나 잡고기가 걸려 올라온다.
ⓒ 성낙선
망둥어

진포대첩비를 지나 금강 강변 쪽으로 다가가면 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아스팔트 도로가 나온다. 자전거도로 표시는 없지만, 자동차들이 다니지 않는 걸로 봐서 평소에는 자전거도로로 이용할 만하다. 이 길이 군산 내항 근처까지 이어진다.

 

 

  
진포해양테마공원
ⓒ 성낙선
진포해양테마공원

군산 내항 한쪽에 진포해양테마공원이 있다. '진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진포대첩과 연관이 있는 공원이다. 공원에 각종 군사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전차, 장갑차, 구축함, 해양 순시선과 각종 비행기들이다. 이곳에 전시된 무기들은 모형이 아닌 실물이다. 퇴역장비로, 모두 현장에서 사용되던 것들이다.

 

군사 무기들이 항구에 전시되어 있는 게 조금 생뚱맞을 수 있다. 하지만 진포해양테마공원이 일종의 안보공원이고, 군산시가 과거 진포대첩을 치른 격전지였다는 사실을 알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 공원은 어린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이 자주 찾는다.

 

어린 아이들이 전차 위에 올라가거나 장갑차나 군수송기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은데, 이곳에서는 그런 것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전차와 전투기 사이를 아이들이 마구 뛰어다닌다. 이 아이들의 눈에 이곳의 대형 군사 무기들이 그저 조금 커다란 장난감으로 비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군산항
ⓒ 성낙선
군산항

군산항에서 다시 장항항을 바라다 본다. 정말 코앞이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려고 그 먼 길을 돌아서 왔나 생각하니 조금 맥이 빠진다. 사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다. 단지 직선 거리와 우회하는 거리가 상대적으로 차이가 심하게 나는 편이라, 그런 기분이 들 뿐이다.

 

군산항에서 새만금 방조제 진입로까지는 산업단지를 지나가야 한다. 무척 긴 거리다. 공기가 좋지 않은 데다 뭐 하나 눈여겨 볼만한 것이 없고, 쉬어갈 만한 곳도 마땅하지 않아, 장시간 참을성을 발휘해야 한다. 이럴 바엔 차라리 군산 시내로 들어가 시내 구경을 하면서 지나가는 게 더 나을 뻔했다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산업단지를 지나는 동안 심한 역풍에 시달린다. 정면에서 부는 바람이라,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속도가 붙지 않는다. 방조제가 있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도로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단조로움이 극에 달한다. 욕지기가 날 지경이다. 짜증이 난다.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좀 나아질까?

 

자전거여행자는 바람과 싸우지 않는다

 

 

언젠가 길을 가다가 한 술집 앞에서 '물고기는 물과 싸우지 않고, 주객은 술과 싸우지 않는다'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꽤 공감이 가는 문구였다. 특히 '주객은 술과 싸우지 않는다'는 문구를 보고, 내 과거를 참 많이 반성했다.

 

그 말과 마찬가지로 자전거여행자는 바람과 싸우지 않는다. 바람은 자전거여행자가 싸워서 이길 상대도 아니고, 싸워서 뭐 하나 얻을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아무런 소득도 없다. 그렇다고 뿌리칠 수도 없고, 피해 갈 수도 없다. 이럴 땐 그저 마음 편하게 받아 안는 게 최고다.

 

바람이 마주불고 있는 상태에서 내가 자전거로 움직일 수 있는 최상의 속도라는 게 있다. 내 몸을 거기에 맞추면 된다. 그러면 마음이 편하다. 그러면 바람에 맞서 싸우지 않고도 바람을 이길 수 있다.

 

  
비응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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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응항

새만금방조제로 올라서기 전에 먼저 비응항에 들른다. 비응항은 익숙지 않은 항구 이름이다. 기록을 살펴보니, 방조제 공사를 하면서, 2007년에 완공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항구 규모가 작지 않다. 항구뿐만이 아니라, 그 항구를 중심으로, 낯선 건물들이 잔뜩 들어서 있다.

 

커다란 어시장이 있고, 그 근처로 횟집들이 몰려 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어시장과 횟집 주변으로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다. 분위기로 봐서 서울의 노량진수산시장을 옮겨다 놓은 것 같다. 2010년 4월에 새만금방조제가 준공됐다. 이제 겨우 6개월, 그 사이 방조제 주변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상전벽해가 아니라, 벽해가 상전이 된 꼴이라고나 할까?

 

  
새만금방조제 제방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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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방조제

새만금방조제가 준공이 되면서 해안선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해안선 길이가 대폭 단축됐다. 만약에 방조제가 없었다면, 나는 오늘 군산시와 김제시, 그리고 부안군의 해안선을 죄 돌아서 나와야 하는 고난의 길을 갔어야 한다. 물론 오늘 안으로 그 지역을 모두 다 돌아보라는 보장도 없다.

 

변화는 계속 된다. 방조제가 지나가면서 야미도와 신시도 같은 섬이 더 이상 배를 타고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됐다. 그리고 앞으로는 야미도와 신시도와 같이 고군산군도에 속해 있는 일부 섬이 연도교로 연결이 될 계획이다. 새만금방조제 주변은 아직도 공사가 계속 되고 있다. 조감도에 나온 사업들이 모두 마무리되려면 10여 년은 더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앞으로 새만금방조제 주변에 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은 불문가지다.

 

집 떠난 20일 만에 생긴 동행... 이보다 더 반가운 친구도 없다

 

  
새만금방조제. 해넘이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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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방조제

  
새만금방조제. 자전거 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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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방조제

 

새만금방조제 위에서 이씨 성을 가진 한 자전거여행자를 만났다. 서로 처음 보자마자, 우리 모두의 입에서 '어'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여기서 당신을 만나다니, 뜻밖이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사실 이보다 더 반가운 친구도 없다.

 

집을 떠나 20일 만에 처음으로 동행이 생겼다. 그는 어제 대전을 출발해 군산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내가 비를 맞은 것처럼 똑같이 비를 맞았고, 그로 인해 나와 마찬가지로 비에 젖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어제 온종일 비를 맞으며 자전거여행을 한 게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오늘은 변산반도의 해안선을 돌아본 다음 김제를 거쳐 다시 대전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내일 새벽 2, 3시쯤 집에 도착할 수 있단다. 애초 새벽에 집에 돌아갈 각오로 자전거여행을 떠났다니, 같은 여행을 하고 있는 내가 보기에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이틀 동안 300km 가까이 달리는 셈이다. 그것도 상당 구간 가로등이 없는 시골길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새만금방조제 배수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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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방조제

길이가 33.479km나 되는 방조제를 건너는 데만 2시간 30분이 걸렸다. 시화방조제에 비해 2배 정도 긴 거리와 시간이다. 그 중, 그와 함께 달린 시간이 1시간 30분 가까이 된다. 덕분에 그 긴 방조제 길을 지루해 할 틈 없이 건너왔다. 주변에 온통 잿빛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행을 만나게 된 것도 내게는 더없이 큰 행운이다.

 

 

마지막 방조제 구간에서는 공사가 덜 끝난 현장을 흙먼지를 마시며 달렸다. 방조제를 다 건넌 뒤에는 그와 저녁식사라도 하고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서야 했다. 섭섭하고 아쉬웠다. 길에서 만난 여행자는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는 방조제 끝에서 바로 김제시 쪽으로 직행했고, 나는 해안선을 따라 부안 격포로 이동했다. 오늘 달린 거리는 86km, 총 누적거리는 1321km이다.

 

자동차가 못 보고 가는 거 자전거는 보고 간다
[우리나라 해안선 1만리 자전거여행 20] 부안 격포에서 곰소까지

 

10월 4일(월)

 

어제 저녁 해가 진 뒤로 1시간 가량 어둠 속을 달렸다. 새만금방조제에서 채석강이 있는 격포까지 약 15km. 중간에 변산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 세상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변산반도의 해안도로는 가로등이 없었다. 그런데다 차량이 드문 편이 아니어서 이대로 계속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한동안 어둠이 깔린 거리에 서 있으려니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래서 다시 자전거 안장 위에 올라탔다. 격포까지 약 10km. 천천히 간다 해도 1시간이면 충분히 가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변산해수욕장을 벗어나자 그나마 길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별 하나 뜨지 않은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중간 중간에 나타나는 이정표를 꼼꼼히 살폈다. 이정표를 놓치면, 길을 잃을 게 뻔했다. 무심결에 격포를 지나칠 수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부라리고 머리 위로 지나가는 녹색 이정표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변산해수욕장
ⓒ 성낙선
변산해수욕장

그러다 어느 한 순간, 1km 정도 떨어져 보이는 거리의 짙은 어둠 속에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번쩍이는 '도시'가 보였다. 그 도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게 대규모 리조트였다. 그 리조트가 어둠 속에서 마치 중세 유럽의 성곽처럼 보였다.

 

그 순간에는 왜 이런 곳에 저처럼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네온사인은 사막에 건설했다는 환락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연상시켰다. 그 이국적인 도시가 바로 격포항과 채석강을 지역의 대표 명소로 내세운 관광지, 격포였다.

 

농촌인지 어촌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한 시간 넘게 어둠 속을 헤매다가 느닷없이 높은 건물 아래 불빛으로 번쩍이는 거리로 들어서는 게 상당히 어색했다. 나 또한 도시인임이 분명한데 격포가 그렇게 어색하게 느껴졌던 건 빛에 적응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던 데다, 격포가 단지 도시의 유흥지를 본 따 옮겨 놓은 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빛이 사라진 격포, 비로소 격포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오늘 아침, 불빛이 사라진 관광지 격포에서 눈을 떴다. 비로소 격포가 좀 더 격포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내 눈엔 그나마 화장기를 지운 격포가 더 편하고 익숙해 보이는 까닭이다. 소박한 마을이었던 격포는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그러니 이제는 그저 이 정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오늘 하루, 날이 맑을 줄 알았다. 단지 바람이 좀 거세게 부는 게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숙소 밖을 나서서 채 100미터를 가지 못해 또 비를 맞는다.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맘 놓고 숙소를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오다니. 비가 오니까 바람도 더 거칠게 부는 기분이다. 하늘을 보니, 금방 그치고 말 비 같아 보이지 않는다.

 

숙소를 나선 지 10분도 안 돼 다시 숙소로 기어들어갈 수도 없고, 다시 거리로 올라선다.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하늘을 가만히 서서 올려다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박복한 내 인생, 이게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려니 체념하고 만다.

 

격포해수욕장 앞, 파도가 뜻밖에 높다. 해변으로 달려드는 파도소리가 으르렁거리는 짐승 소리를 닮았다. 바다가 무슨 이유인가로 잔뜩 성이 나 있다. 가까이 다가서기 두렵다. 2, 3십 미터 밖에서 셔터를 누른다. 그런데도 바닷물이 바람에 묻어 날아오는 걸 피할 수 없다. 해변을 걸어서 채석강으로 가는 길이 매우 위험해 보인다.

 

  
채석강. 성난 파도. 산책로 위에서 내려다 본 광경.
ⓒ 성낙선
채석강

할 수 없이 채석강 위를 오르는 산책로로 발을 옮긴다. 그 산책로 중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장관이다. 바다가 온통 일어섰다 앉았다, 위로 솟구쳤다가는 아래로 푹 꺼졌다 하면서, 인간이 사는 땅을 뒤엎어 버리지 못해 악다구니를 치는 형국이다. 그 몸짓이 매우 격렬하다. 아무래도 지난 밤 용이 되려다 만 이무기 한 마리가 바다 속 어디에선가 격한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울분이 느껴진다.

 

궂은 날도 개의치 않고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광경을 다 보게 된다. 이 시간 비가 온다고 계속 여관방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면, 하루 종일 바보상자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바람에 바위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 같다는 채석강을 가까이 내려가 자세히 올려다보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는다. 오늘 내가 본 채석강은 내 생애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했다. 어쩌면 이것도 복이다. 인간사 모두 다 새옹지마다. 좋지 않은 일이 꼭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만은 아니다.

 

  
격포항
ⓒ 성낙선
격포항

채석강을 떠나 격포항으로 간다. 격포항은 채석강에서 언덕을 하나 넘으면 되는 거리에 있다. 격포항은 지금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다. '다기능어항'으로 탈바꿈하는 공사'를 벌이고 있다. 그 내용 중에 '해양테마파크'를 조성하는 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곳곳에 땅바닥을 뒤집어 놓은 탓에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다. 이곳 역시 새만금방조제 북쪽 진입로 곁에 있는 비응항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다.

 

변산반도 해안가는 자동차 타고 휙 지나갔으면 놓쳤을 절경

 

  
이순신 세트장
ⓒ 성낙선
이순신 세트장

격포항에서 궁항을 향해 가는 길에 잠시 '이순신 세트장'에 들른다. 이순신 세트장이 서 있던 바닷가가 꽤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된다. 몽산포에서 장길산 세트장이 흉물이 되어 가고 있는 걸 보고 온 터라, 그새 이순신 세트장은 또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폐허는 아니어도, 흉물이 되어가고 있는 건 피할 수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언덕 하나를 넘어갔는데 의외다.

 

상당히 관리가 잘 되어 있다. 드라마 촬영 초기의 상태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바닷가에 서서 장시간 모진 비바람을 견딘 드라마 세트장치고는 의외로 온전하고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세트장 앞 바닷가 풍경도 여전하다. 바람에 군기가 나부끼고, 망루 앞 바다에 거친 파도가 일고 있는 게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세트장 분위기와도 잘 어울린다.

 

  
이순신 세트장
ⓒ 성낙선
이순신 세트장

  
이순신 세트장
ⓒ 성낙선
이순신 세트장

금방이라도 어디에선가 조선군 병사들이 나타나 왜적을 향해 성난 목소리로 진격을 외칠 것 같다. 세트장 앞 가까운 바다에 떠 있는 바위섬이 거북선을 닮은 것 또한 심상치 않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촬영 장소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근처에 전라좌수영 터가 있다.

 

  
이순신 세트장 앞 거북선 모양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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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세트장

  
변산반도 해안도로 풍경
ⓒ 성낙선
변산반도

이순신 세트장뿐만이 아니라, 변산반도를 돌아가는 해안가 도로는 절경 아닌 곳이 없다. 어제 고사포해수욕장에서 격포까지, 밤새 어둠 속을 달리느라 아무 것도 보지 못했던 해안도로는 변산반도 안에서도 절경 중에 절경이라는 소문이다. 어두운 도로 위를 달리느라 그만 그 절경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해안도로를 마저 돌면서 변산반도에는 그곳 말고도. 절경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변산반도 수려한 산세
ⓒ 성낙선
태안반도

이런 곳을 자동차를 타고 휙 지나가는 건 변산반도를 그냥 눈감고 지나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영화를 감상하는데 중요한 장면마다 꾸벅꾸벅 졸면서 보는 것과도 같다. 변산반도는 해안뿐만이 아니라 산세도 매우 수려하다. 산과 바다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풍경이 제주도의 맑은 바다와 강원도의 해안 절벽을 적절히 합쳐 놓은 것 같다.

 

변덕스러운 날씨, 이무기인들 맘이 편할까

 

  
모항 포구
ⓒ 성낙선
모항 포구

모항에 도착했을 땐, 파도가 무척 잔잔해져 있었다. 예측하기 힘든 날씨다. 그때 이제는 날씨가 개려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곰소에 도착했을 무렵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가 오면서 날씨도 점점 더 추워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몸이 더 으슬으슬한 느낌이다. 이런 상태로 더 이상 비를 맞는 게 무리다. 여행을 떠난 이후로 비 맞은 날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헤아리는 게 쉽지 않다.

 

  
곰소 젓갈단지
ⓒ 성낙선
곰소

오늘은 일찌감치 여행을 접고 곰소 젓갈단지 근처의 한 모텔로 철수한다. 빗물과 땀에 전 몸이 그야말로 젓갈이 되기 직전이다. 그 후로도 계속 비가 내린다. 저녁을 먹을 무렵엔 창 밖에서 장구를 두들기는 것 같이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도로 위에서 아직도 저 비를 맞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찔한 순간이다.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내리고 있다. 이 정도 되면 이무기도 적응하기 힘든 날씨라고 해야겠다. 날씨가 이렇게 변덕이 심한데 이무기인들 맘이 편할까?  바다가 화난 기운을 띠고 있는 데도 다 이유가 있다. 오늘 달린 거리는 31km, 총 누적거리는 1352km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