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X사업 로비스트 계약 직전 기무사 수사 터져 ● 맥도널 더글러스사에 F-15K 생산라인 이전 요구 ● 박종규 통하면 만나지 못할 사람 없어 ● 말 많았던 백두사업, 사업과 스캔들 구분해 달라 ● 이양호 국방장관과 짜고 국익 위해 일했다 ● 이양호 장관의 연정(戀情), 일방적인 것 아니었다 ● 권영해 안기부장, 임재문 기무사령관, 이양호 국방장관의 파워게임 ● 2000년 입국하기 전에 검찰과 협의 ● 조주형 대령 주장, 다 옳은 얘기 ● F-X사업 기술이전 평가비율 터무니없어 ● 오랜 친구 김홍업, 기무사 통화 감청에 걸려 ● 김홍업은 김홍일과 조풍언 관계 못마땅하게 여겨 ● 목숨 걸 만한 애절한 사랑 못해본 것이 한(恨) |
먼저 밝혀둬야 할 것은 린다 김은 인터뷰를 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만 “LA에 일 보러 온 김에 한번 만나고 가겠다”는 요청을 뿌리치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에 따르면, 그녀가 기자의 방문을 허락한 데는 과거 인연을 무시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기자는 이른바 ‘린다 김 스캔들’이 불거졌던 2년 전 이맘때 그녀를 두 차례 인터뷰한 바 있다. ‘신동아’ 2000년 6월호에 실린 첫번째 인터뷰는 수십명의 기자가 서울 논현동 그녀의 집을 포위하고 있을 때 밖으로 빼돌려 성사시킨 것이다. 그해 8월호에 실린 두번째 인터뷰는 그녀가 법정구속된 직후 서울구치소에서 이뤄졌다.
같은해 9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미국으로 건너갔던 린다 김이 다시 화제의 대상이 된 것은 지난해 4월. 그녀의 딸 지선양이 LA에서 열린 남가주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미스 한국일보’로 당선된 것. 이 사실을 일제히 보도했던 언론은 그해 7월 그녀가 자서전 ‘코코펠리는 쓸쓸하다’를 펴내자 역시 경쟁하듯 관련기사를 내보냈다. 하지만 “아직 밝히지 못할 이야기가 많다”는 그녀의 말마따나 자서전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당시 기자는 다시 한번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녀는 집행유예 기간(2년)에 대한 부담을 내세워 완곡하게 거절했다.
못다한 인터뷰
이번에 LA에서 만났을 때 린다 김의 집행유예기간은 만료 일주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것을 꼭 의식한 건 아니지만, 그녀가 전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으리라는 예상은 그다지 빗나가지 않았다.
인터뷰는 3일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나중에 시간을 계산해보니 15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린다 김은 지병인 신경통으로 병원에 하루 동안 입원하기도 했다. 첫날은 목장에서, 두번째 인터뷰는 그로부터 나흘 후 LA 시내 한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마지막 날엔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J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오랜 시간 인터뷰를 하다보니 질문과 답변이 일부 겹치기도 했다. 이는 기자가 처음에 운만 떼고 나중에 구체적으로 물어본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녀가 처음엔 입을 다물거나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로만 답변했다가 나중에 같은 질문을 다시 받고 그제서야 구체적인 얘기를 털어놓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무기중개상 조풍언씨와 현 정권과의 관계나 자신에 대한 기무사 및 검찰 수사 배경, 문민정부 당시 군부 실세들의 파워게임 내막이나 이양호 전 국방부장관과의 관계에 대한 고백이 그랬다. 아울러 김홍일 의원과 조풍언씨의 관계, 김홍업씨 관련 얘기는 인터뷰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나왔다.
첫날, 린다 김은 사진 찍는 것도 경계할 정도로 인터뷰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민감하다 싶은 사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거나 암시만 할 뿐 말을 아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비록 숨길 것은 끝까지 숨기는 듯했지만,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울분과 한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엿보이는 공격성과 대담함을 드러냈다.
린다 김의 안내를 받아 목장을 둘러봤다. 14에이커 규모의 이 목장에는 8마리의 말이 있는데 반은 경주용이다. 17년 전 싸게 사들였다는 이 목장은 요즘 이 일대 땅값이 오르는 바람에 시세가 크게 뛰었다고 한다.
구속되기 4일 전인 2000년 7월3일 서울 아미가호텔에서 만났을 때 린다 김은 자신이 F-X사업에 관련됐음을 암시한 바 있다. 당시 그녀는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그것이 1998년 기무사 수사의 한 배경이 됐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기무사 수사는 1998년 9∼10월에 진행된 백두사업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를 일컫는다.
당시 구속된 사람은 모두 7명. 백두사업 주미연락단장 이아무개 대령을 비롯해 현역장교 4명, 육군 준장 출신 군무원 1명, 민간인 2명이었다. 민간인 2명은 린다 김이 회장을 맡고 있던 무기중개업체 IMCL 한국지사의 사장 신아무개씨와 이사 김아무개씨였다. 이들의 혐의는 군사기밀 유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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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소된 F-15 본사 방문
미국에 있던 린다 김은 화는 면했지만, 이 사건으로 회사 문을 닫아야 했고 한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군검찰에서 수사자료를 넘겨받은 서울지검은 그녀를 기소중지했다. 군사기밀유출과 뇌물공여 혐의였다. 2000년 3월 그녀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2년 전 만났을 때 F-X사업에 관여한 것처럼 얘기한 적이 있는데요.
“계약 직전까지 갔었어요. 그러다 기무사 수사가 터지는 바람에….”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보시죠. 1998년 10월경 일인가요.
“그렇죠. 일요일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맥도널 더글러스 본사로 날아갈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하루 전인 토요일에 한국에 있는 회사에 수사요원들이 들이닥쳐 직원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그 바람에 일이 다 틀어져버렸죠. 예정대로라면 세인트루이스에 가서 맥도널 더글러스사와 로비스트 계약을 맺었을 겁니다.”
1998년 10월엔 맥도널 더글러스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회사였다. 1997년 8월에 보잉사에 합병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린다 김에 따르면 1998년만 해도 법적인 합병상태로 이름만 보잉으로 통일됐을 뿐 맥도널 더글러스사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직원들도, 회사의 기능도 그대로였다. 오늘날엔 보잉사 공장으로 인식돼 있지만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F-15 생산공장은 원래 맥도널 더글러스사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F-X사업 로비스트 계약은 이 회사와 진행됐다는 것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계약 직전까지 갔다는 거죠.
“제가 F-X사업에 관심을 가진 건 1996년 백두사업 사업자 선정이 끝난 이후예요. 그때부터 맥도널 더글러스사 관계자들과 접촉했는데 1998년에 본격적으로 얘기가 시작된 거죠. 애초 12명이 회사에 로비스트 지원서를 넣었어요. 회사는 이력서와 실적을 보고 후보를 순차적으로 압축했는데, 최종적으로 제가 선택된 겁니다.”
-조풍언씨도 당시 12명에 포함됐습니까.
“왜 안 나섰겠어요? 나중에 맥도널 더글러스사 관계자로부터 조풍언도 (후보로) 검토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기무사 수사배경 의혹
린다 김은 “F-X사업은 백두·금강사업처럼 복잡한 사업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녀에 따르면 백두·금강사업 로비스트를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최첨단의 컴퓨터 시스템과 비행기를 결합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상당한 전문지식이 요구됐다는 것. 그에 비해 4개 후보기종 전투기의 성능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F-X사업은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일하기 편한 사업이었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어쨌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F-X사업이 린다 김의 손아귀에 들어갈 뻔했다는 것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그녀는 “누군가 나를 경쟁에서 밀어내기 위해 기무사 수사를 배후조종했다”고 주장했다.
린다 김은 “사람들이 ‘다시 한국에서 일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을 때 참 갑갑하다”며 백두사업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불만스러워했다.
“백두는 현재 아무 이상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회사(백두사업 통신장비 제공업체인 E시스템사) 얘기가 ‘한국에서 아주 만족해한다’는 거예요.”
린다 김의 로비 스캔들로 얼룩졌던 백두사업의 목적은 통신감청 장비를 실은 비행기로 대북첩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이 사업에 필요한 기종과 시스템이 최종 선정된 것은 1996년 6월. 백두정찰기가 탄생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다. 미국에서 제작된 백두정찰기는 지난해 시험비행을 거쳐 한국에 도입됐다. 현재 대북첩보 수집이 주임무인 OO부대에서 운용하고 있다. 국방부는 백두정찰기의 운용실태를 묻는 ‘신동아’ 질의서에 대해 “군사기밀이므로 일절 답변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그후 F-X사업에는 더 관여하지 않았습니까. 항간엔 F-X사업 기종 선정에 린다 김이 개입했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저에게 사고가 생기자 회사가 크게 당황했어요. 그걸로 끝났습니다. 그후 더 이상 계약을 시도하지 않았어요. 저 대신 장성 출신들을 로비스트로 고용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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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체가 로비스트를 고용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명중률이 얼마인지를 따져요. 웬만한 방위산업체는 로비스트들의 활동상을 다 파악하고 있어요. 누가 어느 분야에 밝다, 어느 나라에 강하다, 누구를 붙이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저는 일단 계약한 사업에서는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어요. 맥도널 더글러스사도 그걸 알고 계약하려 했던 거죠.”
-커미션은 얼마나 됩니까. 보통 3% 아닌가요.
“사업에 따라 달라요. 규모가 큰 사업은 커미션 비율이 낮고 작은 협상건은 높죠. 10% 넘는 경우도 있고 작게는 3%도 있어요. 또 사람에 따라 비율이 다릅니다. 명성이 높으면 같은 일이라도 다른 사람보다 커미션을 많이 먹죠. 그런데 저 같은 경우 전체 가격에서 얼마를 먹는 게 아니라 회사가 남길 이익에서 몇 퍼센트를 먹는 걸로 계약할 때가 많습니다. 로비스트 고용계약을 맺지만 내용적으로는 회사와 합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사실 그때(1998년 10월) 맥도널 더글러스 본사를 찾아가려 한 것도 이익 비율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미팅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기무사 수사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까.
“정권이 바뀌고 나서 시끄러워지는 것을 눈치채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두·금강은 잘된 작품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어요. 내가 너무 많이 하니까 경쟁자들이 시기하는구나 싶었지요. 당시 중동 관련 협상을 하나 진행하고 있었어요. 미국제 미사일을 중동 모 국가에 파는 일이었는데, 규모가 백두보다 더 큰 사업이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한국에서의 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이미 1996년 초부터 기무사가 내사를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정권이 바뀐 후 정치권과 군 주변에서 백두사업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잖아요.
“문제가 되리라는 예감은 있었어요. 워낙 경쟁이 치열했던 사업이었으니 떨어진 쪽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조사를 하긴 하겠구나 하는 정도였죠.”
-당시 수사가 린다 김이 미국에 있는 동안 진행됐기 때문에 뒷날 말이 많았지요. 린다 김을 봐주기 위한 수사가 아니었느냐고. 로비인맥이 두터운 것으로 아는데, 당시 군이나 정치권에서 보호해주는 사람들이 사전에 어떤 언질을 주지는 않았습니까.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긴 있었지요.”
-기무사가 1996년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정권이 바뀐 후 수사한 것을 두고 문민정부의 실세가 린다 김의 뒤를 봐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요.
잠시 침묵하던 린다 김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때는 건드릴 수 없었겠지요.”
1998년 12월 하순 국방부 검찰부의 K부장이 미국으로 건너가 린다 김을 비공식적으로 조사한 적이 있다.
-군검찰 관계자가 미국에 왔을 때 무엇을 알고 싶어하던가요.
“백두사업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물었어요. 진술서도 썼어요.”
-당시 군검찰 관계자가 린다 김의 통화감청 기록을 내보이자 린다 김이 반발했다는 얘기가 들리던데요.
“나와 통화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왜 이양호 장관하고 통화한 것만 문제 삼느냐고 따진 겁니다. 표적수사 아니냐고. 그 양반이 또 편지는 왜 써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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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호 장관에게 정보 제공
린다 김은 이양호 전장관 얘기가 나오자 “가장 안된 분”이라며 “백두사업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분인데…” 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 양반과 제가 합심해서 값을 많이 깎았어요. 외국에서 무기를 구입할 때 주무장관과 잘 짜면 국익에 큰 도움이 되지요. 저는 한국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더 실력을 인정받아요. 하지만 한국을 위해 일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한국 정부와 협상건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한국 쪽으로 쏠려요. 제가 회사 중역회의에도 참석하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그 정보를 한국 정부에 흘려주면 협상에 큰 도움이 되지요. 당시 저는 이장관에게 많은 정보를 드렸어요. 대형 무기도입사업에 경험 많은 로비스트가 필요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백두사업 당시 저는, 회사측에서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지만, 회사와 한국 정부 중간에서 회사의 이익도 고려하고 한국에도 도움이 되는 쪽으로 협상을 했습니다.”
기무사는 1996년 3월부터 2년 가까이 린다 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통화감청도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군검찰과 검찰 주변에 따르면 1998년 12월 미국 현지 조사 당시 K부장은 린다 김에게 기무사의 통화감청 자료를 들이대며 정치권과의 관계를 추궁했다고 한다. 그러자 린다 김이 “왜 나하고 가장 많이 통화한 사람 기록은 없느냐”고 역공을 취했는데, 그가 바로 김영삼 전대통령의 아들 현철씨라는 이야기가 무성했다. 이에 대해 린다 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F-X사업 기종으로 F-15K가 선정된 데 대해 말이 많습니다. 차세대 전투기로 보기엔 한물 간 기종이 아니냐는 비판이지요. 기술이전도 보장받지 못했고요.
“사실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F-15 생산라인은 1999년에 폐쇄될 운명이었습니다. 한국의 F-X사업 덕분에 다시 살아난 거예요. 그래서 로비스트 계약 얘기가 오갈 때 제가 회사측에 F-15 생산라인을 한국에 넘길 것을 제안했습니다. 폐쇄해서 고철로 만드느니 한국에 넘기면 서로 좋은 것 아니냐고 말이죠. 말하자면 생산라인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직구매 방식을 취하자는 제의였죠.”
-회사측 반응은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어요. 그것이 성사됐다면 기술이전 문제가 지금처럼 논란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린다 김은 F-X사업 기종선정결과에 대해 “회사측과 협상을 잘해 좀더 많은 걸 뺏었어야 했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1998년 기무사 수사가 진행될 즈음 그녀는 F-X사업뿐만 아니라 E-X(공중조기경보통제기)사업에도 손을 뻗치고 있었다. 국방부가 E-X사업을 추진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애초 유력한 후보로 검토됐던 기종은 ‘매의 눈(Hawk Eye)이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 노스롭 그루만사의 E-2C였다. 반면, 린다 김이 관심을 가졌던 기종은 백두사업을 따낸 미국 E시스템사와 이스라엘 엘타사가 합작한 비행기였다.
-공군에서는 E-2C를 검토했다는데요.
“흥미 없었어요, 그 기종엔. 소음이 많은 게 단점이에요.”
-조기경보기사업은 언제 어떻게 알고 뛰어들었습니까.
“백두사업이 마무리되기 전이니까 1990년대 중반일 거예요. 한국 국방부의 중기계획에 올랐다는 걸 알고 계약조건이 맞는 회사를 알아봤지요. 그런데 당시 E-X사업은 계획만 있었을 뿐입니다. 추진할 여건이 안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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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5 생산라인 넘겨달라”
E-X사업은 1999년 천용택 국방부장관 시절 무기도입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무기한 연기됐다. 예산부족이 이유였다. 조기경보기의 대당 가격은 약 5000억원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 조기경보기의 레이더는 기체 윗부분에 동그란 모양으로 달려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계약하려 했던 회사에서는 내장형 레이더를 개발했습니다. 엘타는 레이더에 강한 회사예요.”
첫날 얘기는 여기서 끝났다. 3일 후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린다 김이 갑자기 입원하는 바람에 하루 늦춰졌다. 장소는 LA 시내 한 사무실. 린다 김은 이날 목장에서와는 달리 화장을 하고 나왔다. 의상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단아하고 세련된 느낌을 줬다. 검은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치마, 그리고 어깨에 검은색 숄을 걸쳤다. 장신구도 눈에 띄었다. 목걸이 귀고리 반지가 모두 초록빛 에메랄드였다.
조풍언 뒤에 누가 있나
조풍언씨 얘기부터 시작했다. 조씨는 1999년 7월 김대중 대통령의 일산 저택을 구입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 김홍일 의원은 서교동에 새 집을 샀는데 그 매입자금이 바로 일산 집 매각대금이라는 소문이 있다. 김대통령 일가와 조씨의 인연은 오래된 것이다. 조씨는 김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목포 출신이다. 김대통령은 젊은 시절 조씨 부친이 운영하던 선박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두 집안은 한때 목포에서 아래윗집에 살 정도로 가까웠다.
1973년 기흥물산이라는 회사를 세워 무기중개업에 나선 조씨는 미국의 레이더 생산업체인 ITT사와 거래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엔 미국으로 건너가 한때 주류도매업에 손댔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1996년에 기흥물산 대표직을 그만둔 것으로 돼 있는데, 그 후에도 ITT사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고 국방부에 무기를 판매해왔다.
-조풍언씨는 무기중개업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현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다지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었어요. 조씨가 설립한 기흥물산은 큰 건은 하지 못하고 자질구레한 것들만 맡아왔어요. 저는 한국 외 여러 나라에 무기를 팔아왔지만, 기흥물산의 시장은 100% 한국이에요.”
-전에 1998년 기무사 수사와 2000년에 구속된 사건이 조풍언씨의 음모라고 주장하셨는데요.
“저한테 조풍언의 행적에 대해 얘기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을 통해 알게 된 겁니다. 조풍언은 저를 코너로 몰아넣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어요.”
-조풍언씨 뒤에 누가 있다고 보십니까.
린다 김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기자들이 더 잘 알지 않아요?” 하면서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다. 기자가 고위층 친인척의 이름을 언급하자 자신도 그렇게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에서 꾹꾹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며 말문을 닫았다. 뒤에 다시 듣기로 하고 화제를 돌렸다.
-무기중개업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이 정확히 언제죠? 박종규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면서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건 1980년대 초반이에요. 박종규씨가 많이 도와준 건 사실이에요. 당시 현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정치권과 군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인맥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겉보기엔 차갑지만 인정이 많았던 분이에요.”
-박씨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한마디로 그 분을 통하면 만나지 못할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만큼 기반이 단단한 분이었어요. 예스, 노가 분명해 저하고 성격도 잘 맞았습니다.”
-박씨가 왜 그토록 도와줬지요?
“어린 나이에 당차게 도전하는 자세를 높이 산 것 같아요. 20대 후반의 한창 꽃다운 나이였지요. 그때 제가 재벌2세와 헤어지면서 거액의 위자료를 뿌리친 사실이 주변에 알려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그 돈 받아 편하게 잘살 수도 있었지만 저는 자존심을 지켰어요. 박종규씨는 그런 저를 한편으로는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줏대가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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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14건
린다 김은 박종규씨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사귀던 재벌2세를 따라 권력층· 부유층 인사들의 연회 같은 데에 참석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락씨도 그런 식으로 알게 됐고, 장관은 물론 그 ‘윗선’의 인사들과도 교분을 쌓았다고 한다.
재벌2세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에도 그랬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2년 전 인터뷰에서 밝힌 몇 가지 단서―이를테면 일본 유학, 교통사고, 열 살 차이―를 꼽으며 모 재벌그룹의 회장 이름을 대자 “참 쉽게도 판단하네요” 하면서 웃었다.
“가슴에 묻어둘 얘기예요. 자식들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 한국에서 성사시킨 무기중개는 몇 건이나 됩니까.
“20년 동안 14건을 했어요.”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꼽는다면요?
린다 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백두(신호정보수집 정찰기), 금강(영상정보수집 정찰기), 동부전선 전자전장비, 하피(레이더 공격용 무인항공기), 포파이(공대지미사일) 외 또 뭐가 있지요?
“공군용 헬기도 있고 시스템도 있고 미사일, 비행기도 있어요. 그 이상은 밝히기 곤란해요. 국가안보와 관련된 문제예요.”
사업비 규모를 살펴보면 린다 김이 상당한 수익을 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사업 2400억원, 금강사업 3600억원, 동부전선 전자전장비사업 500억원, 하피사업 600억원, 포파이사업 2000억원 등 알려진 것만 계산해도 9100억원이다. 커미션을 평균 5%만 잡아도 455억원이다.
린다 김은 “협상건 하나 붙으면 사업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밤잠 안 자고 연구한다”고 말머리를 돌렸다.
2000년 구속사건 이후 린다 김이 가장 속상해한 것이 바로 백두사업에 대한 ‘매도’다. 이양호씨의 연서(戀書)에서 빚어진 로비 스캔들이 사람들의 눈을 가려 백두사업을 사업 자체로 평가하지 않고 로비라는 잣대로만 바라보게 했다는 불만이다. 2000년 5월 이후 린다 김은 언론과 여러 차례 인터뷰했지만, 이 문제에 관해 제대로 된 논쟁을 벌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사업 자체보다 로비의 실체였고 스캔들이었기 때문이다.
-애초 국방부가 기종과 장비를 따로따로 선정하기로 했다가, 나중에 ‘탑재장비 회사가 비행기를 선정한다’는 특별규정을 만든 데 대해 말이 많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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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 값에 최고의 장비 요구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걸 해봤는데 한국과는 상황이 달랐어요. 장비를 먼저 사서 나중에 비행기와 결합시키자는 주장은 문제가 많아요. 비행기 무게와 크기가 장비와 안 맞으면 그때 가서 어떻게 할 겁니까. 백두는 체계결합이 관건이에요. 장비를 만들 때부터 비행기와의 통합기능을 생각해야 돼요.”
-비행기를 FMS(미 정부 보증의 대 정부간 구매) 방식에서 상용구매방식으로 바꿔 구입한 데 대해서도 일부 전문가는 비판합니다. 비행기의 안전성이 가장 중요한데 상용구매로 하면 보증을 못 받는다는 거죠.
“둘 다 FMS로 하면 가장 좋겠죠. 안전하니까. 하지만 FMS는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어요. 이양호 장관은 가격 깎는 데 무척 신경을 썼어요. 그래서 비행기까지 굳이 FMS로 할 필요가 있냐는 의견이 자연스럽게 제시된 겁니다. 비행기에 대한 책임은 시스템 회사에 떠맡기자는 거였죠. 시스템 회사가 자기네 시스템과 맞는 비행기를 사서 책임지고 결합시키도록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었어요.”
비행기 선정은 공군이, 감청장비 선정은 대북첩보부대인 OO부대가 맡았다. 경합을 벌였던 기종은 영국제인 호커800, 미국의 사이테이션3 및 프랑스의 팰콘50. 시스템 회사로는 미국의 3개 회사(레이시온·E시스템·TRW)와 이스라엘의 라파엘사, 그리고 뒤늦게 프랑스의 톰슨사가 나섰다.
사업자 선정은 2단계로 진행됐다. 1차 평가대상은 미국의 3개 장비회사였다. 특별규정에 따라 장비회사와 비행기 회사가 짝짓기를 했다. 애초 레이시온은 호커800을, E시스템은 사이테이션3을, TRW는 팰콘50을 골랐다. 하지만 최종 평가 직전 변화가 있었다. E시스템이 비행기를 호커800으로 바꾼 것.
국방부로부터 ‘전권’을 받은 OO부대 백두사업단은 공군과 협의 끝에 TRW+팰콘 조합을 선정했다. 가격은 비쌌지만 체계결합을 고려할 때 가장 우수한 조합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방부 최종 심의과정에서 뒤집어졌다. 호커800을 선택한 E시스템사가 선정된 것. 린다 김은 E시스템사의 로비스트였다. 그후 E시스템사와 프랑스 톰슨사, 이스라엘 라파엘사가 경쟁한 2차 선정결과는 당연히(?) E시스템사의 승리로 끝났다. 톰슨사는 사이테이션3을, 라파엘사는 호커800을 선택했다.
-운용부대인 OO부대가 추천한 TRW+팰콘이 선정되지 않은 것을 두고 린다 김의 로비 탓이라는 얘기가 나왔지요.
“E시스템에서도 한때 팰콘을 검토해 협상까지 벌였어요. 비행기 성능으로는 가장 우수했으니까요. 하지만 비싼 것이 흠이었어요. 또 팰콘측에서도 배짱을 부렸고요. 워낙 공군이 선호한 데다 운용부대에서도 찬성하니 다 결정된 것처럼 행동했지요.”
-공교롭게도 평가과정에 호커800 제작사와 E시스템사가 레이시온사에 합병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국방부의 결정이 기종과 장비 모두를 한 회사에 몰아주기 위한 것 아니었느냐는 의혹이 제기됐지요.
“회사 통합이 먼저 되다보니 그런 오해가 생길 만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연이었어요.”
-어쨌든 운용부대의 추천을 받아들여 팰콘을 선택했다면 뒷날 잡음이 없었을 것 아닙니까.
“한국 국방부는 호커800과 E시스템사를 선택함으로써 몇천만달러를 아꼈습니다. 물론 가격이 높으면 저도 좋지요. 떨어질 이익이 많아지니까요.”
-OO부대 체계관리단장으로 백두사업 진행을 감독했던 권기대씨의 증언에 따르면 백두사업단에서도 장비 측면에서는 E시스템사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행기 성능이 워낙 차이가 나서 팰콘50과 연결된 TRW사를 선정했다는 겁니다.
“경쟁이 붙으면 구매자측에서는 중간 정도의 수준을 원할 때가 많습니다. 어차피 ROC(작전요구성능)는 통과된 것이니 어느 것을 선택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가격을 중시한다면 적정선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지요.”
-호커800이 구형인 데다 좁고 작아 감청장비를 싣고 정찰활동을 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맞는 얘기지만 사업 자체가 잘못됐다 할 만큼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협상이든 완벽할 수는 없어요. 조금씩은 다 문제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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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중시하면 타협해야
린다 김은 사업자가 선정되고 이양호 장관이 수뢰사건으로 구속된 후에도 한국과 미국을 드나들며 백두사업 진행과정에 관여했다. 그것이 뒷날 기무사 수사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나중에 후회했어요. 이기게 해주고 손을 뗐어도 그만이었는데…. 제가 주도한 작품이 성공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한국이니까 더 그랬던 것 같아요.”
-OO부대 백두사업단에서 한때 국방부에 사업중단을 건의하는 등 강하게 제동을 걸지 않았습니까. E시스템사가 제안서대로 장비를 만들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지요?
“필요에 따라 ROC가 바뀌는 경우도 있어요. 백두사업 ROC는 아주 오래 전에 작성된 거예요. 뉴 테크놀로지로 바꿔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무조건 그대로만 만들어 달라고 하니까 회사도 갑갑했지요.”
-좋게 해주겠다는 데도 반대했다는 얘기인가요?
“속을지 모른다는 피해의식도 있었던 것 같아요. 계약이 된 이상 칼자루는 회사에서 쥐고 있으니.”
백두사업단과 제작사인 E시스템사의 의견충돌로 백두사업은 한때 중단 위기까지 맞았다. 하지만 이미 비행기값을 지불하는 등 사업비의 상당액을 건넨 국방부 입장에서는 사업을 중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사업단이 제기한 몇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고 보완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일부 전문가는 시스템을 FMS 방식으로 도입한 것도 잘못됐다고 주장합니다. FMS 방식은 미 정부가 기술이전을 통제하기 때문에, 상용구매를 택해 기술이전의 길을 텄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애초 미국 것을 선택하지 말았어야죠. 미국 장비를 선택한 이상 기술이전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 얘기는, 앞으로도 미국 무기를 사들일 경우 어쩔 수 없다는 뜻인가요?
“그렇진 않을 거예요. 백두사업이 한·미연합 개념이 강조되는 정보 분야 사업인 탓에 더 두드러진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한국군의 협상수준도 점차 향상될 겁니다. 그 점에선 젊은 장교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어요.”
린다 김이 E시스템사의 로비스트로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95년 초. 사업자 선정작업이 한창이던 1996년 3월 이양호 국방부장관은 황명수 국회 국방위원장의 전화를 받고 식사자리에 나갔다가 린다 김을 소개받았다. 그 자리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이자 ‘실세’로 통하던 김윤도 변호사도 있었다. 황명수씨는 금진호 전의원을 통해 린다 김을 알게 됐다.
하지만 이 전장관과 린다 김이 알게 된 시기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도 있다. 한때 린다 김과 함께 일했다는 예비역 공군 중령 문아무개씨는 1996년 6월 국방부 등 관계기관에 보낸 진정서에서 “1995년 2월에 황명수 이양호 린다 김 세 사람이 만났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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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호 장관의 고민
-당시 이양호 국방장관과 ‘특별한 방법’으로 유착했다는 비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장관은 그 사업에 상당히 애착을 갖고 있었어요. 정보 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분으로 누구보다 백두사업을 잘 이해하셨어요. 대화가 잘 됐지요. 이장관은 한정된 예산을 의식해 값은 가장 싸면서도 기술은 세계 최고인 정찰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고민이 많다보니 저와 많은 걸 상의하게 됐습니다. 그 때문에 만나는 횟수도 늘고. 회사측엔 미안한 얘기지만 이장관에게 한국측에 유리한 정보를 많이 제공했어요.”
-왜 호텔에서 만났지요?
“여자가 국방부에 자주 들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잖아요? 한국 사회에서는 더하지요.”
-다른 사업의 경우에도 그런 식으로 장관과 사적으로 만나 논의하곤 했습니까.
“어느 정도 일이 진전되면 합참의장이나 장관 등 책임자를 만나 협상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실무는 에이전트 선에서 진행하는 것이고요.”
-문제는 이장관이 린다 김에게 연서를 쓰는 등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로 발전했다는 데 있어요.
“연서로 보면 연서지만, 다르게 보면 암호이기도 해요.”
-편지 내용을 보니까 분명히 연서이던데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장관은 일에는 아주 냉정했어요. 누구의 압력도 받아들이지 않는, 소신이 뚜렷한 분이었어요.”
린다 김과 이양호 전장관의 스캔들은 백두사업의 본질을 가려버렸다. 사람들은 린다 김이 백두사업, 동부전선 전자전장비사업 등 자신이 로비스트로 나선 몇 건의 무기구매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이 전장관을 이용했다고 본다. ‘몸 로비’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반면 린다 김은 이 전장관과의 관계를 ‘사적인 문제’로 치부한다. 백두사업을 사업 자체로 평가해주지 않는 것이 불만이라면 이 전장관과 그런 관계를 맺은 것을 후회할 법도 한데, 얘기를 들어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저도 그 분을 많이 따랐어요.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보고, 회사나 내가 손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장관도 제 성의나 노력을 인정하고 호감을 표시했습니다. 서운할 때도 많았어요. 요구한 것을 힘들게 성사시켰는데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거예요. ‘우리는 같은 한국인 아니냐. 그 정도 국가관은 가져야 하지 않느냐’며. 그렇지만 사적으로는 아주 따뜻하고 수줍음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사적인 감정을 억제하느라 애를 쓰셨는데….”
-이장관 편지를 보면 연애 감정이 진하게 배어 있는데요?
“편지를 읽고 전혀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이죠. 그 분에게 말벗 상대가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말벗 상대 정도가 아니라, 1996년 4월5일자 편지만 봐도(이 편지는 ‘사랑하는 린다’로 시작해 ‘당신을 사랑하는 L’로 끝난다) 대단한 연정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사적인 감정을 차단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습니까.
“저도 그 분의 따뜻한 감정이 좋았어요. 저를 많이 아껴주고 위로해주셨기 때문에 믿고 따랐어요. 그 양반 요구라면 불길이라도 뛰어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장관의 열정과 의지를 보고 이 프로젝트는 성공하겠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어요.”
-이장관의 감정이 일방적인 것이었나요?
“일방적이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아마도 제가 그때 ‘왜 이런 편지를 보내느냐’고 타박했다면 달라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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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와 사생활 구분
-남녀가 자주 만나다보면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지요.
“맞아요. 있을 수 있는 얘기 아니에요? 가정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황혼이 질 무렵 문득 가슴을 파고드는 애틋한 감정이었어요. 젊은애들보다 더 순수한 감정이었는지 몰라요. 흔히 말하는 불륜과는 달랐어요.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순수함을 가진 건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이장관은 2000년 5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나쁜 여자에게 이용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사정이 급하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겠죠. 시달림이나 피해보자는 생각에서.”
-이장관이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백두사업의 이미지가 더 나빠졌어요.
“그렇죠. 금진호 전의원 같은 경우는 저와 오랫동안 우정을 나눠왔는데 아무 문제 없었어요. 그 분은 편지에서 ‘때로 남자보다 여자와의 우정이 더 강하다’고까지 말했어요. 그렇게 오랜 세월 사귀면서 단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어요.”
-그후 이장관에게 연락한 적 있습니까.
“저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된 것이 죄송스러워 연락할 수가 없었어요.”
-이장관은 그 사건 후 한동안 기도원에 들어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기도원에서 저를 위해 많이 기도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서로 잘해보려 한 일인데 결과적으로 좋은 분한테 누를 끼치게 됐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린다 김은 “당시 언론이 비즈니스와 남녀관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백두사업 자체를 스캔들로 몰아붙였다”며 언론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국방연구원(KIDA) 관계자들에 따르면 린다 김은 1990년대 초반부터 국방부와 국방연구원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린다 김은 “자주 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국방연구원 회의에까지 참석한 이유는요?
“백두사업이 진행될 때였어요. 제가 다른 나라에 비슷한 정보시스템을 팔아본 적이 있으니 국방연구원 쪽에서 제 경험담을 듣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한 거겠죠. 간섭하러 (회의에) 들어간 건 아니에요.”
-1990년대 초반에 국방연구원에 드나들었던 건 KF-16 도입과 관련된 것 아닙니까.
“지금 그런 것 알아서 뭐하시게요? 저보고 또 사건에 휘말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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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회의 참석
-1980년대 후반 한국 정부는 원래 공군의 희망에 따라 차기 전투기로 F-18을 우선협상기종으로 선정했다가 1990년대 초반 F-16으로 바꾸었습니다. 문민정부 초기 율곡감사에서도 드러났듯이 기종변경에 대한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어요.
“회사(F-18 생산회사인 맥도널 더글러스사)에서 한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한국을 얕잡아 본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만했어요. 오죽했으면 기종을 바꿨겠어요.”
-나중에 맥도널 더글러스사가 가격을 올린 게 결정적 이유라는 거죠?
“그렇죠. 한국 정부가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고 생각해요.”
-당시 국방연구원 고위관계자들과 친분이 두터웠다면서요?
“이 계통이야 많이 알면 알수록 좋은 것 아니에요?”
-1990년대 초반 국방연구원 고위간부였던 차영구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과 황동준 국방연구원장과도 친했다는 얘기가 들리던데요.
“친했다는 건 어폐가 있고요. 한두 번 만나면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거지요. 이 업계에 여자가 없다보니 눈에 띌 수밖에 없었겠죠. 가까웠다기보다는 제가 인정하는 사람한테는 상당히 친밀감을 느꼈다고 봐야죠.”
-KF-16은 잘 된 작품이라고 보십니까.
“저를 그렇게까지 전문가로 보지 마세요. 두 기종의 성능 차이를 떠나 당시 한국 정부의 대처가 옳았다고 봐요.”
1996년 6월 백두사업 경쟁에서 승리한 린다 김은 여세를 몰아 동부전선 전자전장비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은 여전히 린다 김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린다 김은 이스라엘 IAI회사의 로비스트로 나섰다. 유력한 후보였던 이스라엘 장비는 그해 10월 이장관이 수뢰혐의로 구속된 후 이듬해 진행된 재입찰과정에서 아예 탈락했다. 그에 따라 독일 다다사와 프랑스 톰슨사가 맞붙었는데, 톰슨사가 이겼다.
이 일과 관련해 린다 김은 “탈락이 아니라 참가도 못한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이스라엘 회사에 미안한 심정이에요. 이스라엘 장비는 우리보다 산악지형이 더 험한 스위스에서도 인정받은 거예요. 이장관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추천했어요. 개발중이었던 독일제나 프랑스제와는 달리 실존장비로 이미 성능이 검증된 것이라는 장점도 있었지요. 이스라엘제를 배제하고 프랑스제를 선정한 데는 당시 군실세였던 권영해 안기부장과 임재문 기무사령관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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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호 구속은 음모
린다 김은 “당시 이양호 장관이 구속된 것은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증거를 요구하자 “정치적인 얘기”라며 입을 다물었다가 “한 가지만 말해주겠다”며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이장관이 구속되기 몇 달 전 중국집에서 둘이 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약주를 하고 조금 취한 상태에서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나는 권병호한테 돈 받은 적이 없는데 그 놈이 내 이름을 팔아 대우에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내고는 튀었다.’ 그때는 관심도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그 사건이더라고요.”
구속 당시 이장관의 혐의는 무기중개상 권병호씨한테 1억5000만원을 받은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권씨가 현재 기소중지자라는 점이다. 당시 권씨는 대우중공업으로부터 3억원을 받아 그 중 절반을 이장관에게 전달했다는 진술서를 제3자를 통해 검찰에 제출하고는 해외로 달아났다.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인데, 이장관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대우 쪽에서 들은 것 같았어요. 그쪽에서 권병호라는 사람과 이장관이 어떤 관계인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는 거예요. 저는 이장관 말에 신빙성이 있다고 봐요. 사건이 난 후라면 자신을 변명하거나 뭔가 숨기기 위해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사건이 터지기 훨씬 전이었거든요. 그 일로 무척 속상해하시더라고요.”
-이장관이 구속된 후 면회는 하셨습니까.
“그때는 굉장한 위기감을 느낄 때였어요. 구속되기 전부터 이장관이나 저나 조여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렇긴 해도 차마 구치소에 안 가볼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제가 면회하고 나오는 모습도 기무사에서 사진을 찍었더라고요.”
-기무사에서 그처럼 감시하는데 이장관과 만나는 게 걱정되지도 않았습니까.
“잘못된 협상이 아니니 떳떳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장관도 마찬가지였고. 우리 관계는 일과는 상관없는 사생활이니 문제될 게 없다고 여긴 겁니다.”
-이장관이 출소한 다음에도 만났습니까.
“나온 다음에 한번 인사드리러 갔었어요.”
린다 김은 줄담배를 피웠다. 담배 한 갑을 다 태우고 새 담배를 꺼냈다. 그녀는 이 전장관과의 관계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추잡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1998년의 기무사 수사 얘기를 더해보죠. 조풍언씨가 어떻게 개입했다는 겁니까.
“제가 조풍언한테 한을 못 푸는 건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 근거 없이 그럴 순 없잖아요.”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시죠.
“많이 듣고 많이 알지만 그 사람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수사를 미리 감지하지 못했습니까.
“호텔 전화나 휴대전화를 감청하는 것을 알고 나서 ‘나를 조여오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수사가 시작될 걸 사전에 알고 미국으로 나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누가 귀띔해주지 않았나요?
린다 김은 잠시 숨을 골랐다.
“제가 다치지 않게 도와주려는 분들이 있긴 했지요. 주변에서 그런 얘기는 들려오데요. 아깝고 똑똑한 여자 하나 죽이려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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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조여오고 있구나’
권기대씨 증언에 따르면 린다 김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일부 대선 캠프와 접촉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묻자 린다 김은 고개를 내저었다.
-권기대씨에게 “모 대선 캠프에서 돈을 요구했다”고 말했다면서요?
“돈 제의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하지는 않았어요.”
-얼마나 기부했습니까.
“기부한 것 없어요.”
린다 김이 웃으며 말했다. 어이가 없다는 뜻인지, 거짓말을 해 미안하다는 뜻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현정권에서는 따낸 사업이 없나요?
“그럴 기회를 주지도 않았잖아요?”
-2000년 3월 국내에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아무 일 없었을 것 아닙니까. 안전에 대한 보장 없이 그냥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고위층의 약속이 있었나요?
또 다시 린다 김이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알아서 판단하세요.”
-한국 관련 사업을 계속하려면 어떻게든 기소중지건을 해결해야 했겠지요? 그래서 들어왔다고 봐야 합니까.
“그렇죠. 그런데 언론이 그런 식으로 편지사건을 터뜨리니….”
-검찰과 사전에 협의했습니까.
“통화를 몇 차례 하긴 했죠. 그쪽에서 ‘들어와 조사를 받아라’고 해서 들어온 거예요.”
린다 김은 입국한 후 서울지검 공안부에 출두해 6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서울지검 공안부는 1998년의 기무사 및 군검찰 수사 이후 린다 김을 군사기밀유출과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중지 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당시 대검 중수부는 그와 별개로 린다 김 사건을 내사하고 있었다. 내사 초점은 문민정부 시절 린다 김이 개입한 대형 무기도입사업과 관련한 의혹이었다. 서울지검 공안부가 군검찰로부터 공식 수사자료를 넘겨받은 반면, 대검 중수부는 기무사의 린다 김 통화감청기록, 군검찰 관계자가 미국에서 받아온 린다 김의 진술서 등 비공식 자료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애초 린다 김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 4월말 서울지검 공안부는 린다 김의 혐의가 대단치 않다고 보고 불구속 기소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린다 김의 군사기밀유출 혐의는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IMCL 한국 지사의 직원들을 시켜 하피사업, 공대지유도탄사업, 항공전자전장비사업 등의 사업계획 자료를 군에서 빼낸 것이다. 아울러 한국과 미국에서 몇몇 백두사업단 관계자에게 술자리, 골프, 라스베이거스 관광 등 향응을 베풀고 두 차례에 걸쳐 1000만원을 건넨 혐의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기소 직후 ‘중앙일보’에 의해 ‘린다 김 스캔들’이 불거졌다. 언론은 한 목소리로 린다 김의 불법로비 의혹에 대한 재수사를 주장했다. 하지만 대검과 서울지검은 ‘재수사 불가’ 방침을 고수했다. 증거 불충분이 이유였다. 이를 두고 린다 김이 현정권에 끈을 댄 것 아니냐는 소문이 설득력 있게 나돌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해 7월 법정구속됐을 때 린다 김이 받았을 충격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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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사업과 조풍언
린다 김은 1998년 12월 미국에서 군검찰 관계자의 조사를 받을 때 자신의 혐의를 대부분 부인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당시 린다 김이 조풍언씨와 정권 고위층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 군검찰 및 검찰 관계자들은 이 진술서를 통해 조씨가 김홍걸씨에게 집을 사줬다는 사실(?)을 그때 벌써 알았다고 한다.
-‘편지 사건’만 없었다면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제가 당하길 바라는 사람들 짓이죠.”
-조풍언씨가 개입했다고 보세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만 단정할 수는 없어요.”
-구속될 때 충격을 많이 받으셨지요?
“너무 억울해 잠도 못 잤어요. 마음을 가라앉히기까지 일주일 걸린 것 같아요.”
조풍언씨 얘기가 나오면서 금강사업이 화제에 올랐다. 금강사업은 백두사업과 나란히 1991년에 시작해 1996년에 사업자 선정이 끝났다. 미국의 로럴사(록히드마틴사의 계열사)와 캐나다의 맥도널드 디트윌러사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린다 김을 로비스트로 내세운 로럴사가 납품권을 따냈다. 금강사업에서 로럴사의 에이전트 노릇을 한 사람이 바로 조풍언씨다. 반면, 백두사업 에이전트는 린다 김이 설립한 IMCL의 부사장 이준영씨였다.
-금강은 전혀 잡음이 없죠?
“묘하죠?”
-가격도 더 센데….
“글쎄 말이에요. 금강 비행기도 백두와 똑같은 호커800이에요. 백두가 비행기 때문에 문제라면 금강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왜 백두만 두들겼을까요?
“그거 참 희한하죠?”
린다 김은 “똑같이 내가 로비해 따낸 사업이고 백두와 같이 시작해 같이 끝났는데 왜 금강은 조용한지 모르겠다”고 강하게 의혹을 제기했다.
린다 김에게 다른 약속이 잡혀 있어서 이 정도에서 인터뷰를 마쳐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F-X사업 얘기를 슬쩍 꺼냈다.
-“기종 평가과정에 외압이 작용했다”고 폭로했다가 구속된 조주형 공군 대령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대령의 증언이 담긴 녹취록을 읽어보니 군인다운 얘기로 가득 차 있더군요. 매우 논리적인 주장이에요. 왜 공군이 평가한 것과 다르게 기종을 선정하느냐는 의혹 제기인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요. 한·미연합 작전체제나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라는 거죠.”
-보잉사는 절충교역 비율을 충족시키지 못했는데도 탈락하지 않았어요.
“미국 것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에요?”
-최동진 국방부 획득실장은 “라팔이 약속한 기술이전 수준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벅차다”고 말했어요. 이러이러한 수준의 기술을 달라고 요구해놓고는 막상 그렇게 해주겠다니까 안 받겠다고 하니 라팔측에서 화가 날 만하지요.
“왜 그런 바보 같은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네요. 기술이전이야 받을수록 좋은 건데. 우리 수준이 그렇게 낮은 것도 아니고.”
오후 7시. 린다 김은 “약속 시간에 늦었다”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물어볼 것이 많이 남았다”고 하자 “내일 더 얘기하자”고 했다.
다음날은 오전 9시 반부터 마주앉았다. 잠시 여담을 하다보니 조풍언씨가 또 화제에 올랐다. 첫날부터 그랬지만 린다 김은 자신보다 열두 살이 더 많은 조씨에 대해 한번도 존칭을 쓰지 않았다.
“조풍언이 1998년 기무사 수사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들었어요. 한번 권세를 잡으면 거기서 나오는 파워는 막강합니다. 하지만 ‘10년 권세 없다’고 권력이란 돌고 도는 거지요. 언제 누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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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풍언에게 사업 연결
린다 김은 과거에 자신이 조풍언씨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음을 강조했다. 그녀에 따르면 로비스트는 회사와 대등하게 계약을 맺어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사람이고, 에이전트는 일단 협상이 시작된 후 회사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공식 심부름꾼이다.
“로비스트는 사업이 처음 시작될 때만 관여하는 경우가 많아요. 또 일이 잘 안 되면 회사에서 뒤늦게 로비스트를 고용하기도 하죠. 조풍언은 그간 주로 에이전트 일을, 저는 로비스트 역할을 해왔어요. 사업의 성사 여부가 로비스트에게 달려 있으므로 로비스트는 때로 에이전트 계약에 관여하기도 해요. 로비스트가 볼 때 능력 없다고 판단되면 회사에 얘기해 에이전트를 바꿀 수도 있어요. ‘저 사람과는 죽어도 같이 일 못하겠다’고 교체를 요구하면 회사에서 들어줄 수밖에 없어요. 그런 점에서 조풍언을 제가 보호해준 적도 있습니다.”
조풍언씨의 업무 스타일을 물어보자 “상당한 과시형”이라며 자신은 그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린다 김은 “가슴에 한이 맺혔다”며 조풍언씨 얘기를 멈추지 않았다.
“현정부가 출범하기 직전 제가 조풍언에게 에이전트 일을 연결해준 게 있어요. 그런데 세월이 좋아지니 나를 아웃시켰어요.”
-어떤 사업인데요.
“대형 무기도입 사업이에요. 나를 아웃시키고 자기가 아예 로비스트로 나서더라고요.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얹고 차지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어떤 사업입니까.
“현정권이 출범한 후 진행됐습니다. 저한테 돌아와야 할 이익이 조풍언 쪽으로 넘어갔어요. 그런 행동은 문제가 있지요.”
린다 김은 조씨를 비난하기만 할 뿐 끝내 사업의 명칭은 밝히지 않았다.
“경쟁이 많다보면 알력이 생기고 각자 힘있는 사람한테 줄을 대요. 그러면 서로 비수를 겨누게 됩니다. 이양호 장관이 압력을 받아들였거나 융통성이 있었다면 권병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이장관은 상당히 꼿꼿했어요. 존경할 만한 점이 많았지요.”
다시 이양호 전장관에 대한 얘기로 돌아갔다.
“자존심 있는 장관은 누가 압력을 넣거나 부탁을 해도 들어주지 않아요. 잘 타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치의 타협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장관이 그랬어요. 동부전선 전자전장비사업을 둘러싸고 권영해 안기부장과 이장관 사이에 알력이 있었어요. 이장관은 권영해씨와 임재문 기무사령관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다고 자존심 상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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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실세들의 알력
-1996년 7월 임재문 기무사령관이 이양호 국방부장관을 찾아가 동부전선 전자전장비사업을 둘러싼 불법로비 의혹과 린다 김과의 관계를 경고했지요?
“이장관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일에 관한 한 떳떳하다고 자부했으니까요. 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주무장관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장관의 요구사항을 맞춰주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주변에서 어떻게 보든 개의치 않았어요. 저를 만나는 것이 실보다 득이 많다고 판단한 겁니다.”
-다른 나라 일을 할 때도 그렇게 장관을 사적으로 만났습니까.
“대개는 공식적으로 만나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게 안 돼요. 장관을 만났다 하면 요상한 관계라는 생각부터 하니까. ‘저 사람을 밀어주는구나’ 생각하지요. 심리적으로 위축되니 남들 눈에 안 띄게 만나게 되고 그러다보니 공식적으로 토의해야 할 것도 밀담이 되는 겁니다. 중동 쪽 일을 할 때는 주무장관과 자주 공식 미팅을 가졌어요. 면담을 신청하면 받아줘요. 그러니 밖에서 몰래 만날 일이 없지요. 일하기도 편하고요.”
린다 김은 이 전장관과 협력해 나름대로 국익을 위해 일했음을 강조했다. 금강사업을 진행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캐나다 회사와 경쟁이 붙었잖아요. 그런데 그 회사는 소프트웨어 생산업체로 하드웨어는 못 만드는 회사였어요. 사업자로 선정돼도 어차피 단독으로는 못 만들고 다른 회사에 하청을 줘야 할 형편이었어요. 또 그 회사의 자산 규모는 금강사업 예산보다도 작았어요. 게다가 미국에 회사를 팔 준비를 한다는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즉 이 회사가 금강사업에 참여한 것은 사업 자체보다 회사 가치를 높이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 정보를 이장관에게 알려줬지요.”
-경쟁사에 불리한 정보를 제공했군요.
“불리하지만 중요한 정보지요.”
린다 김은 이런 예도 들었다.
“백두나 금강이나 비행기 고도가 높지 않아요. 여객기 수준이에요. 그 고도에서는 기상 변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죠. 금강의 경우, 비행기가 흔들리면 사진이 흐트러질 수 있거든요. 저도 그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장관이 딱 그걸 지적하더라고요. 악천후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이장관은 입찰 경쟁을 벌이는 두 회사에 그 답을 요구했어요. 3일 안에 대비책을 마련해 오라고. 저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유사한 장비를 만드는 이스라엘로 날아갔어요. 그 결과, 제가 속한 록히드마틴사가 캐나다 회사보다 더 신속하고 정확한 답변을 했지요. 결국 그 문제는 추가장비를 장착하는 것으로 해결됐어요.”
린다 김의 답변 태도에 점차 여유가 생기는 느낌이었다. 첫날이나 둘째 날과는 달리 답변을 할 때 재거나 머뭇거리는 일이 적어졌다. 기자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해진 탓인지도 모른다.
-로비스트가 무기도입사업을 계획하는 단계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어느 나라에 이러이러한 획기적인 기술이나 무기가 있다고 제의할 수는 있죠. 또 국제 에어쇼에서 공식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정보를 얻어 정부나 국방부 관계자에게 제안하기도 하죠. 한국 정부가 저의 제의를 받아들이면 회사와 접촉해 거래하죠. 큰 사업들은 로비스트가 없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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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정보 얻어
-백두나 금강도 그런 경우인가요?
“사업진행 과정에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했지요. 주로 이스라엘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어요. 유사한 장비가 있거든요.”
-하피사업(레이더 공격용 무인항공기)은 어떻게 시작된 거죠?
“이스라엘 무기인데, 이건 경쟁이 없었어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만 가진 무기니까요.”
-역시 이양호 장관 시절에 도입한 거죠?
“제가 추천하기도 했지만 이장관도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탐냈던 무기예요. 고도의 기술인 데다 기술이전도 보장한다니까 혹할 수밖에 없죠. 미국 외 다른 나라들은 거의 100% 기술이전을 보장합니다.”
-그동안 한국과 관련한 사업을 14건 따냈다고 했는데, 이장관 시절에 성사시킨 게 얼마나 되죠?
“알려진 것 외에 이스라엘 무기가 한두 개 추가됐다고 보면 돼요. 이장관은 공군 출신이니만큼 공군 무기에 대해 욕심이 많았어요. 이해도 빠르고. 그래서 육군 쪽으로부터 견제를 많이 당했죠.”
린다 김은 “로비스트란 미모와 화술로만 되는 게 아니다”며 다시 한번 로비스트의 역할을 강조했다.
“단정하게 꾸미는 것도 죄인가요? 한국에서는 로비스트의 개념이 잘못 인식돼 있어요. 무조건 우리 것 써달라고 조르는 게 로비스트가 아니에요.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쌓아야 하고 연구나 조사도 해야 해요. 또 정보 입수에도 능해야 하고요. 오래 하다보면 출발점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어느 선까지 진행해야 할지 감이 잡혀요. 그에 비하면 조풍언이 주로 해온 에이전트 일은 단순하죠. 양쪽에 왔다갔다하며 서류 심부름이나 하는 거니까.”
-F-X사업에 조풍언씨가 개입했을지 모른다는 소문도 있어요.
“F-X사업 에이전트는 우일통상의 김영일씨예요. 조풍언이 설사 개입했다 해도 자기 이름으로 하겠습니까. 그건 회사와 조풍언밖에 모르는 일이죠. 저는 기무사 수사 이후 한국과 관련된 일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울화병 때문에 피를 토하기도 했습니다.”
-F-X사업에 누가 로비스트로 나섰는지 아세요?
“군 출신들을 고용한 걸로 알고 있어요.”
-최규선씨가 김동신 국방부장관을 만난 일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김동신 장관,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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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보잉의 구세주”
화제가 자연스럽게 F-X사업으로 넘어갔다.
-GE사 엔진을 선정한 데 대해서도 말들이 많습니다.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에 퍼져 있는 F-15 전투기들은 다 프랫 앤 휘트니(P&W)사 엔진을 쓰는데, 유독 우리나라에 도입될 F-15K만 GE 엔진을 달기로 했거든요.
“일관성이 없는 거죠.”
-국방부가 F-15K의 장점으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실전경험이 풍부하다는 점이거든요. 그런데….
질문 중에 린다 김이 끼어들었다.
“실전경험요? 3차세계대전에 참가할 일 있대요? 다 만약을 대비해 구입하는 건데.”
-어쨌든 그 논리로 따지면 GE 엔진은 실전경험이 전혀 없는 셈이죠. 국방부 논리에 모순이 생기는 것 아닌가요?
“조기자, 직업 바꿔요.”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보잉사의 독식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요. 2001년 국방예산안에 따르면 10조원대 무기도입사업이 계획돼 있습니다. 그중 덩치가 가장 큰 게 5조원대의 F-X사업인데, 이건 이미 보잉이 차지했고, 2조원대의 AH-X(차기 공격용 헬기)사업에서도 보잉이 유리한 위치에 있어요. 헬기사업은 당분간 연기되기는 했지만 국방부 주변에서는 보잉의 아파치 헬기를 유력한 후보로 보고 있습니다.
“어느 한 회사가 많이 하는 건 좋지 않죠. 칼자루를 그쪽에서 쥐게 되니. 보잉으로선 한국이 구세주예요. 대형 무기사업인 JSF(Joint Strike Fighter: 합동전투기사업) 경쟁에서 록히드마틴에 깨져 크게 타격을 입은 상태였거든요.”
-F-15K는 차세대 전투기로 볼 수도 없지요?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한국 정부나 국방부 입장도 이해해야죠.”
-F-22는 어떤가요?
“너무 비싸요. 시험비행 단계로 아직 미 공군에도 배치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보잉사는 애초 제시한 것보다 가격을 올려 물의를 빚기도 했어요. 기종 선정이 끝난 후 다시 내려 원래 가격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건 회사의 노하우죠.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죠.”
린다 김은 “JSF는 한국이 검토해볼 만한 괜찮은 프로젝트였다”고 말했다. F-15K보다 값도 싸고 성능도 뛰어난 최신기종이기 때문이란다.
-JSF에 대해서는 반대론도 있어요. 반대론자들은 이른바 ‘하이-로 믹스(High-Low Mix)’ 개념을 내세워 JSF가 현단계에서 한국 공군에 적합한 유형의 전투기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F-15는 F-22처럼 하이급인데 JSF는 F-16과 같은 로급 전투기이므로 전략상 맞지 않다는 거예요.
“3차세계대전 대비해요? 어디까지 날아가 누구를 공격하겠다는 겁니까? F-15K 도입의 명분이죠. 어떤 기종을 들여오든 명분은 다 만들 수 있어요.”
미 공군의 전략이라는 ‘하이-로 믹스’ 개념에 따르면 하이급은 로급에 비해 항속거리가 길고 작전반경이 넓다. 로급의 경우 값이 싼 만큼 같은 값에 더 많은 전투기를 보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미국은 하이와 로 기종을 적절히 섞어 운용하는데, 전투기 생산 능력이 없는 나라들은 미국의 로급 전투기를 사들여 주력 전투기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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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세계대전 대비?”
일부 전문가는 한국 공군이 엔진이 2대인 쌍발기를 원했기 때문에 단발기인 JSF는 부적합다는 논리도 편다. 엔진이 2대인 쌍발기는 단발기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좋고 생존성이 강하며 덩치가 큰 만큼 무장도 화려한 편이다. F-15, F-22, 그리고 한국이 1990년초 도입하려다 포기한 미 해군의 F-18 등이 쌍발기다. 반면 F-16, JSF는 단발기다. F-16과 F-15가 각각 업그레이드된 기종이 JSF, F-22다.
F-X사업에 대한 질문이 계속되자 린다 김이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나를 전문가로 생각해 물어보는 거냐,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냐”고 묻기도 했다.
-구속된 조주형 대령의 혐의 중 중요한 것이 라팔측에 가격을 낮추라고 얘기해준 거예요.
“현역이 그런 말을 한 건 문제죠. 돈만 안 받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은 다 맞는 말이니까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절친한 선배가 용돈으로 쓰라고 주는 걸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원래 F-15K보다 라팔이 더 비쌌는데, 최종 가격입찰에서는 F-15K는 올리고 라팔은 내리는 바람에 오히려 F-15K가 더 비싸졌어요.
“어떻게 돌아간 상황인지 알겠네요. 언론이 제대로 잡아줘야 해요. 잡음이 많으면 다음 정권에 넘기는 것도 한 방법인데….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시한폭탄을 보는 것 같아요.”
-F-X사업 기종 선정을 두고 워낙 시끄러웠던 탓인지, 국방부가 향후 대형 무기도입 사업에서는 수의계약을 검토하겠다는 얘기도 들려요.
“수의계약은 힘들죠. 업체가 가격 장난을 칠 우려가 있어요. 저쪽은 장사꾼인데 군인들이 상대하기 벅차죠. 경험 많은 로비스트를 잘 활용하면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어요. 회사의 약점을 파악해 가격을 후려칠 수 있거든요.”
F-X사업 기종 선정은 2단계 평가를 거쳤다. 1차 평가는 그야말로 기술적 평가이고 2차는 정치적 평가다. 1차 평가 항목은 크게 4가지였다. 수명주기 비용(35%), 임무수행 능력(35%), 군운용 적합성(18%), 기술이전·계약조건(12%)이 그것이다. 린다 김에게 대략의 수치를 불러줬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니, 정말 기술이전 비율이 그것밖에 안 돼요? 잘못 봤겠죠?”
사실이라고 말해줬더니 린다 김은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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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무기는 호환성 갖춰”
-군운용 적합성 항목 중 ‘단계적 전력화’라는 평가요소가 있어요. 쉽게 말해 어느 기종이 가장 빨리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느냐를 따지는 거죠. 그런데 이건 무조건 F-15K에 유리한 게임이라는 게 군사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러시아의 수호이-35는 한·미관계 특수성과 한국 공군의 불신을 고려하면 사실상 경쟁에서 제외된다고 봐야죠. 유로파이터는 개발중인 전투기고요. 라팔은 생산량이 많지 않은 데다 그나마 한국이 요구한 능동형 전자식 레이더를 장착하느라 2005년 이후에야 도입이 가능하답니다.
그에 비해 기계식 레이더가 달린 F-15K는 기존 생산라인을 가동하면 금방이라도 들어올 수 있죠. 문제는 국방부가 처음엔 이런 얘기를 하지 않다가 뒤늦게 2004년부터 매년 전투기를 인도하는 조건을 내걸었다는 겁니다. 이럴 바에야 굳이 국제경쟁입찰을 할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린다 김은 잠시 웃기만 했다.
“한국도 요즘 젊은 장교들의 의식수준이 대단히 높아졌다고 알고 있어요. 저는 그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무기구매 방식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봐요. 그때쯤 나는 할머니가 돼 있겠지만. 미국의 벽을 넘는 건 한국의 영원한 숙제예요. 미국은 한국이 감당하기 어려운 전쟁을 할 때 크게 도움을 준 나라예요. 아직은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국을 이끌어가고 있어요.”
-국방부는 비축해놓은 미국제 탄약이 많으므로 후속군수지원 부문에서도 F-15K가 절대 유리하다는 논리도 폈어요.
“설득력이 없어요.”
-미국 외 다른 나라의 기종이 들어올 경우 무기상호운용체계에 문제가 생긴다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요즘엔 웬만한 무기는 다 호환성을 갖추고 있어요. 역시 설득력이 부족한 논리죠.”
-다시 한국 시장에 진출할 계획을 갖고 있죠?
“합리적 여건이 갖춰진다면요.”
-한국 상황이 이러니 누구든 미국 회사의 로비스트로 나서고 싶겠지요?
“미국과의 협상이 안전하죠. 좋은 기술도 많고요.”
-좋은 기술이 많으면 뭐합니까. 기술이전을 해주지 않는데.
“그건 그래요. 그 벽을 넘지 못하면 자주국방의 꿈은 실현되기 어렵죠.”
-미국 무기를 들여오는 것 자체를 반대할 이유는 없겠죠. 미국제 무기가 우수한 건 사실이니까요. 문제는 어떤 조건으로 들여오느냐는 건데.
“머리를 잘 쓰면 미국 것도 좋은 조건에서 들여올 수 있어요. 제가 F-15 생산라인 이전을 구매조건으로 내세운 것도 그런 차원이지요”
-F-X사업 진행과정을 지켜본 나라라면 한국에서 다시 국제경쟁입찰이 있을 경우 참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듯싶은데요?
“그런 얘기가 나올 만하죠. 들러리 설 일 있냐고. 그런 풍토를 바꿔야 해요. 에이전트들도 미국 것만 잡으면 무조건 유리하다는 생각을 바꿔야 하고요. 경쟁이 치열해야 유리한 조건에서 구매할 수 있죠. 파는 쪽에서 몸 달게 만드는 노하우가 필요해요.”
F-X사업에 대해서는 그밖에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린다 김은 “한국의 젊은 장교들에게 기대한다”는 말을 신조처럼 되뇌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포부를 은연중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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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끝나면 심판 받을 것”
백두사업과 관련한 얘기도 끝이 없었다. 린다 김에게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편지를 썼던 백두사업 주미연락단장 이아무개 대령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당시 이대령은 기무사 조사에서 린다 김과 성관계를 가진 사실을 시인했으나 군검찰 조사에서는 “기무사 강압수사로 허위자백했다”고 부인한 바 있다. 린다 김은 이스라엘 한국 미국 등지에서 그를 만난 사실을 시인했다. 하지만 이대령과 마찬가지로 성관계 부분은 부인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런 논리도 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문제예요. 자기 상관인 국방부장관과 가까운 관계라는 걸 알면 부하가 넘볼 수 있겠어요?”
-별로 설득력이 없는 논리인데요. 사랑에 눈멀면 장관이 문제입니까.
“군인들은 그렇지 않아요.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르는데….”
기자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풀지 않자 린다 김이 역공을 취했다.
“아니, 그럼 지금 조기자와 이렇게 단 둘이 장시간 얘기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네요? 뭐든지 갖다붙이기 나름 아니에요?”
틈을 봐 조풍언씨에 대해 다시 물어봤다. 린다 김은 아직 속내를 완전히 털어놓지 않고 있다.
-다시 물어볼게요. 현정부 출범 직전 린다 김이 따냈는데 조풍언씨에게 넘어갔다는 사업이 뭐예요?
“그 일만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어요. 올해 도입된 무기예요. 완제품으로.”
-공군 것이에요?
“예. 제가 주로 공군 것을 많이 했으니까.”
린다 김은 조심스러워했다. “나, 특별히 말한 것 없어요” 하고 입을 다물더니 힌트를 주듯 한마디 덧붙였다.
“백두나 금강보다는 작지만 단일사업으로는 작은 규모가 아니에요.”
조씨 얘기만 나오면 린다 김의 말투가 격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에 함께 일할 때는 저한테 아주 잘했어요. 그런데 정권이 바뀌자 태도가 돌변하더라고요. 주변에 과시나 하고. 정권이 끝나면 터지지 않겠어요? 제 계산으로는 지금쯤 조풍언은 최소한 4건은 성사시켰어야 해요. 무기중개는 새 정권이 들어선 후 3년 내에 승부를 내야 하거든요. 그런데 겉보기엔 그다지 큰 건을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워낙 예전부터 자잘한 것만 해와서 그런지. 하긴 해도 자기 이름으로 안 하면 잘 드러나지 않겠죠.”
-한나라당과 연결돼 조풍언씨와 한판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던데요.
“한나라당에는 주로 과거에 친분을 맺었던 의원들이 있어요. 조풍언을 벼르는 건 사실이죠. 하지만 지금 한나라당과 접촉한다는 얘기는 근거 없는 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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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업이와는 오랜 친구”
린다 김은 조풍언씨와 현 정권과의 관계에 대해“지금도 많이 알고 있지만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얘기는 할 수 없다”고도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김홍일 의원의 이름이 나왔다.
“조풍언 옆에는 이제 김홍일 의원만 남아 있어요. 조풍언과 한판 싸울 준비를 한다는 것은 김의원과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한다는 것과 똑같아요. 정권이 끝나면 심판을 받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김대통령의 아들들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다. 린다 김은 “홍걸이가 구속된 후 영부인께서 조풍언에게 노발대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현철이도 처음부터 잘못된 사람은 아니었어요. 권영해가 옆에 붙어 붕붕 띄워놓는 바람에 망가진거죠. (감옥에) 들어갈 사람들은 따로 있어요.”
뜻밖에도, 린다 김은 김홍업씨에 대해서는 깊이 동정했다.
“참 안됐어요. 유진걸이니 김성환이니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망친 거예요. 김성환·유진걸이 나쁜 사람들이에요. 홍업이는 참 인품이 괜찮아요. 예의 바르고 반듯하죠. 인간성도 좋고. 홍업이는 김홍일 의원과 조풍언이 가깝게 지내는 것을 싫어했어요.”
-홍업씨와 잘 아세요?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냈어요. 저 때문에 기무사 수사 때 수난을 겪기도 했죠.”
-그게 무슨 얘기죠?
“기무사가 저에 대해 내사를 벌일 때 통화를 다 감청했잖아요? 그때 홍업이와 통화한 것도 걸렸어요. 기무사에서 저와의 관계를 묻기에 ‘친구 사이’라고 대답했대요.”
린다 김은 홍업씨와 친구로 지냈다고 말했다. 20대 초반에 친구를 통해 알게 됐는데 단 둘이 사귄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어울렸다고 한다.
“과묵하고 순수한 편이었어요.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 김성환은 그때부터 친구였어요. 유진걸은 나중에 합류했고.”
-일과 관련해 홍업씨 도움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한번도 부탁한 적이 없어요. 홍업이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어요.”
-20대 이후에도 계속 만나거나 연락했을 것 아니에요.
“그렇죠. 가끔 연락해 서로 안부를 묻거나 만나기도 했죠. 하지만 특별한 목적으로 만난 일은 없어요. 현정권 출범 후에는 오히려 제가 피했어요.”
-다시 한번 물어보죠. 2000년에 입국한 것은 누군가의 보장이 있었기 때문 아닙니까.
“조용히 처리하려고 들어온 거예요. 검찰과 협의했어요.”
린다 김은 “홍업이와 별 볼일 없는 사이에요”라며 웃었다.
-무기중개업자라면 정권이 바뀐 후 권력층에 줄을 대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김홍일 의원과 친분을 쌓을 생각은 안 해 봤습니까.
“그 무렵엔 큰 욕심이 없었어요. 한국 쪽 일은 2∼3년 쉴 계획이었어요. 그동안 너무 많이 했거든요.”
린다 김은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세 끼 먹고사는 데 지장 없다”고 대답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부동산 중개인이 J호텔로 찾아와 린다 김에게 호텔 매각 의사를 물어보는 바람에 기자는 ‘본의 아니게’ 린다 김 재산의 일부를 엿보게 됐다. J호텔의 매매가 시세는 1000만달러를 약간 웃도는 상태. 놀라운 것은 샌타바버라에 있는 린다 김의 집이 호텔보다 더 비싸게 평가된다는 사실이다. 1400만달러!
현재 린다 김 소유의 회사는 모두 4개. 원래 IMCL만 있었는데, PDT라는 계열사를 만들어 IMCL과 마찬가지로 영국과 파나마에 각각 본사와 지사를 설립했다. 한국에 세웠던 IMCL 지사는 1998년 기무사 수사 이후 문을 닫았다.
린다 김은 2000년 9월 출소할 때의 심경을 묻자 한마디만 했다.
“안정은 찾았지만 조풍언에 대한 배신감만큼은 떨칠 수 없었어요.”
린다 김은 조씨를 비난하기만 할뿐 그 근거가 될 만한 ‘증거’를 내놓지 않았다. 조씨에 대한 그녀의 주장은 논리적 비판이라기보다는 감정적 비난에 가까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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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 만한 사랑 그립다
기자는 LA에 머무는 동안 린다 김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조씨 집에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조씨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조씨가 소유하고 있는 가든스위트호텔 관계자는 “회장님 부부는 유럽 출장중이라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요일엔 조씨가 다니는 교회에도 가봤으나 조씨 부부가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 만날 수 없었다.
린다 김은 출소한 후 LA로 돌아와서는 한동안 거의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가까운 친구 외에는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했다.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은 지난해 7월 서울에서 자서전 출간기념회가 열렸을 때다. 그 즈음 기운을 차려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다른 나라 일을 좀 했어요. 전에 하다가 중단된 것도 다시 진행하고, 중동과 남미에서 각각 한 건씩 했어요. 2000년 사건이 내 이미지를 추락시키기는 했지만 다른 나라에서 일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어요.”
기자가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린다 김은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삶의 뒤안길을 돌아본 듯한, 쓸쓸하고 허탈한 표정으로 고백하듯 말을 이었다.
“젊은 시절엔 돈만 보고 뛰었어요. 돈만 있으면 인생에 불행할 게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제는 허망함을 느껴요. 돈을 가지면 얼마나 갖겠어요. 사람이 갖는 건 한계가 있는 건데…. 남들이 보기에 제게 남자가 많은 것 같지만 제 인생에 남자는 몇 없었어요. 남편 복도 없고.”
그녀가 질문했다.
“제 성격을 어떻게 보세요?”
“활달하고 외향적이지 않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저, 내성적인 성격이에요. 외곬이고요.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보지 못했어요. 목숨을 걸 만한 애절한 사랑도 못 해봤고. 제가 삼촌으로 따랐던 정종택 전장관이 제게 한 얘기가 있어요. ‘넌 그 나이에 남자도 모르고 만날 일만 하냐’고.”
헤어지기 전 린다 김이 말했다.
“제 기사 안 쓰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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