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겨울은 밤이 빠릅니다. 오후 3시에 벌써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고, 오후 4시쯤이면 차갑고 축축한 밤이 됩니다. 해는 하늘의 중간까지만 떠서 볕이 있을 때도 그림자가 길게 늘어집니다. 독일의 크리스마스가 유독 화려한 것은 이렇게 겨울의 어둠이 길고 또 짙기 때문인 듯했습니다. 독일 작센주의 주도(州都)인 드레스덴. 그곳에 독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 마켓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11월 말부터 딱 4주 동안 영업하는, 자그마치 581년의 역사를 가진 시장입니다. 회전목마와 소박한 관람차가 돌아가는 시장은 크리스마스 장식과 목각인형, 손뜨개에 이르기까지 손수 만든 공예품들로 풍성합니다. 뜨겁게 데운 와인인 ‘글뤼바인’과 크리스마스 전통 빵인 ‘슈톨렌’도 좌판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팔고 사는 사람들의 따스한 미소는 덤입니다. 독일 작센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 그곳에서 동화책 혹은 마술쇼의 공간과도 같은 크리스마스 마켓을 보고 왔습니다. # 작센,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이름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두 도시가 속한 독일의 작센주에 대한 설명부터.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에 속하기 전까지만 해도 작센은 독일에서 가장 부유했던 곳이다. 작센은 1000년의 역사 가운데 829년 동안 ‘베틴’이란 한 가문에 의해 통치됐다. 베틴 가문은 광산 채굴로 쌓은 재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건물을 짓고 어마어마한 보물을 모았으며, 음악가들을 후원했다. 작센지역은 화려한 건축과 풍성한 문화적 전통, 매혹적인 음악이 흘러넘치던 곳이었다. 작센주의 주도는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다. ‘주도’란 우리로 치자면 ‘도청 소재지’쯤 되겠다. 옛 동독지역을 대표하는 두 도시는 중세 시대에 문화 예술에 두각을 드러내던 낭만적인 도시였다. 드레스덴은 산업과 예술의 중심이었고, 라이프치히는 상업과 음악의 도시였다. 작센지방이 그다지 넓지 않은데도 도청 소재지를 두 개나 두고 있다는 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지 못한다는 뜻이자, 두 도시 모두 나름의 경쟁력과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다. 거기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도시를 여행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드레스덴이 더 매력적이다. 음악적 전통만큼은 라이프치히가 압도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드레스덴은 입체적이다. 도시를 끼고 엘베강이 흐르고, 강변을 끼고 개성적인 중세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 게다가 이즈음 독일 전역에 들어선 크리스마스 마켓의 규모도 드레스덴 쪽이 훨씬 더 크다. 드레스덴이 더 흥미로운 도시라는 뜻은, 두 도시를 여행한다면 드레스덴을 나중에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무릇 여행에서는 더 자극적이고 화려한 경관을 뒤쪽으로 미뤄 두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 폐허에서 되살아난 ‘엘베강의 피렌체’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189㎞. 드레스덴은 중세 시대에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줄지어 들어섰던 도시다. ‘엘베강의 피렌체’. 200년 독일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반 헤르더의 표현만큼 드레스덴을 적확하게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피렌체에 빗댈 만큼 드레스덴은 예술적인 도시였다. 드레스덴의 예술적 분위기는 작센공국의 전성기를 이끈 강성왕 아우구스트 1세의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 도시를 베를린보다 더 크고 베르사유 궁전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하고자 했다. 도시 외곽의 화재를 계기로 유명 건축가들을 동원해 바로크 양식으로 도시를 디자인했다. 그 결과 품위 있는 바로크 양식의 중세 건축물들이 엘베강을 끼고 들어섰다. 금속광산으로 일군 부를 바탕으로 융성했던 예술적 전통은 화려했다. 오페라극장에서는 날마다 다양한 공연이 무대에 올랐고, 수많은 작곡가와 음악가들이 후원자를 찾아 이 도시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렇듯 화려했던 작센공국의 도시는 2차 세계대전으로 잿더미가 돼버렸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13일부터 사흘 동안 연합군은 드레스덴을 대대적으로 공습했다. 영국 공군 소속 폭격기 722대와 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 폭격기 527대가 드레스덴에 무려 3900t이 넘는 폭탄을 떨어뜨렸다. 폭격으로 성한 건물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정도로 도시 전체가 파괴됐고 2만6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잿더미가 된 작센지역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동독으로 편입됐다. 화려했던 문화의 도시가 변방의 가난한 도시로 전락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무너진 도시는 재건이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동독 정부가 문화유산이 무너진 자리 위에 현대식 건물을 지으면서 도시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렸다. 이대로라면 작센공국의 영광은 한낱 기억에나 남아 있을 것이었다. 분단 후부터 독일 통일 이전까지 드레스덴이 그랬다. # 현대를 무너뜨리고 과거를 다시 세우다
시내 전체가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했다. 이른 어둠이 내린 뒤에 엘베강의 수면에 비친 도심의 모습은, 그 장면을 찍은 사진 한 장만으로 전 세계 여행자들을 매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따스한 간접조명을 받은 청동색 돔의 중세 시대 건축물이 밤이 깊을수록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도시의 건물들이 어떻게 이렇게 고색창연하게 되살아난 것일까. 그건 바로 문화유산 위에 우악스럽게 세워진 현대를 무너뜨리고 부서져 땅에 묻힌 과거를 되살려낸 결과다. 통일 이후 독일은 옛 동독 도시의 재건 과정에서 버려진 옛 건축유산 복원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인구 계측을 통해 필요없는 집은 헐어버리고, 그 땅 아래 있었던 과거의 건물을 되살려냈다. 폭격과 화재로 불타 버린 건물들이 검게 그을린 돌로 다시 일어선 것이다. 전쟁과 참혹한 폭격에도 역사는 무너지지 않는 법. 이런 과정을 통해 되살려진 건 건축물의 외양이 아니라 1000년 동안 도시를 지탱해 왔던 정신이었다. 건축이 복원되면서 꺼진 줄 알았던 예술의 불씨도 살아났다. 놀라지 마시라. 대전 면적의 3분의 2 정도에, 인구는 3분 1 수준임에도 드레스덴에는 박물관만 52개, 미술관 40여 개, 오페라하우스 37개, 도서관 80개가 들어서 있다. 도시 전체의 낭만적이고 예술적인 분위기는 바로 이런 문화 예술의 토대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이렇듯 빼어난 건축 경관과 예술적인 도시에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건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드레스덴에서 봐야 할 것들은 엘베강을 끼고 있는 구시가에 다 몰려 있다. 프라우엔 교회의 섬세한 아름다움이며 드레스덴성의 웅장함, 츠빙거 궁전의 화려함을 다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 거기에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양식, 화가 렘브란트와 뒤러, 루벤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왕의 심장도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이 드레스덴성의 보석박물관이었다. 작센공국의 화려했던 영화가 여기 있었다. 한 아름쯤 되는 거대한 크기의 무굴제국 왕의 생일잔치 장면을 재현한 보석장식물. 순금 바탕 위에 자그마치 5000개의 다이아몬드와 500개씩의 루비·에메랄드를 박아 놓았는데, 생일잔치에 참석한 인물 표정 하나하나가 믿기지 않을 만큼 세밀했다. 이 화려한 보석 앞에서 작센공국이 번성했던 황금의 시기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 드레스덴의 빛나는 보석, 크리스마스 마켓
크리스마스 마켓은 마르틴 루터로 대표되는 작센지역의 엄숙한 종교적 전통 분위기와 크리스마스 빵 시장, 그리고 목각장식의 전통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시작된 것이다. 500년 넘게 크리스마스 마켓이 명맥을 이어온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낱 상술로 기획되거나 만들어진 다른 크리스마스 마켓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드레스덴 크리스마스 마켓의 규모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저마다 성탄 분위기로 치장한 250여 개의 이동식 상점들이 시장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시장을 온통 휘감은 전등과 장식의 휘황함은 가히 장관이라 할 만했다. 시장 한쪽에서는 회전목마와 관람차가 돌아가고 있었고, 상점들은 성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수제상품들을 내놓고 팔았다. 다양한 먹거리를 즉석에서 만들어 파는 상점들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포도주에다 계피와 레몬을 넣고 뜨끈하게 데운 ‘글뤼바인’과 전통 빵 ‘슈톨렌’, 생강으로 향을 내고 설탕 대신 꿀·당밀 등으로 단맛을 낸 과자인 ‘렙쿠헨’이 단연 인기였다. 드레스덴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화려함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물건을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 환한 미소와 선의로 가득 차 보인다는 점이었다. 다들 누군가의 선물을 고르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전통음식을 맛봤다. ‘거래’가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건 크리스마스가 가져다준 마법이리라. 시장의 전경을 사진에 담고자 고풍스러운 건물 앞을 서성거리는데, 중년의 독일인이 카메라를 든 이방인을 기꺼이 제집으로 들여 크리스마스 마켓이 내려다보이는 방문의 창을 열어준 친절도 가슴에 깊게 남았다. # 라이프치히에서 만난 슈만과 클라라 이제 드레스덴과 함께 작센주의 또 하나의 주도인 라이프치히로 간다. 라이프치히는 드레스덴에서 차로 1시간 30분 남짓 거리에 있다. 드레스덴은 구시가 일대의 중세 건축물이 다른 도시의 풍경을 압도한다면, 라이프치히는 파스텔 톤의 독일 전통 건축물과 세련된 현대 건축의 미감이 조화를 이룬 도시다. 라이프치히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음악과 문학의 전통이다. 라이프치히에는 단연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가 있다. 슈만을 사랑한 클라라, 스승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음악도 음악이지만,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세 음악가의 드라마틱한 삼각관계가 이 도시의 음악적 향기에 풍성한 이야기를 불어넣는다. 라이프치히 법대를 다니다 음악의 길을 택한 슈만은 이름났던 피아노 교육자의 문하로 들어갔다. 스승의 집에서 하숙하며 레슨을 받던 슈만은 스승의 9세짜리 어린 딸을 만나게 된다. 훗날 슈만의 아내가 되는 클라라였다. 훗날 사랑에 빠져 결혼한 둘 사이에 슈만의 제자 브람스가 끼어든다. 브람스가 스승 슈만의 아내 클라라에게 깊은 연정을 품게 된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슈만이 자살 시도 끝에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는 14세 연상의 클라라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 무렵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 “사랑이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을 불러 보고 싶습니다.” 브람스의 사랑은 간절했으나 ‘슈만의 아내’이기를 원했던 클라라의 거절로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라이프치히에는 슈만과 클라라가 결혼 직후인 1840년부터 4년 동안 살았던 아파트를 개조한 ‘슈만 하우스’가 있다. 집 한쪽은 초등학교 건물로 쓰는데 생전에 살던 집을 사진과 악보, 피아노 등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꾸미고 자그마한 콘서트홀을 들여놓은 곳이다. 슈만은 이 집에서 교향곡 1번 ‘봄’과 오라토리오 ‘파라다이스와 페리’ 등을 작곡했고, 두 딸을 얻었다. 박물관을 다 돌아본 뒤 음악도이자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본인 청년이 피아노 앞에 앉아 눈을 감은 채 격정적으로 슈만의 곡을 연주했다. 음표와 음표 사이로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의 불같았던 사랑 이야기가 자꾸 끼어들었다. # 바흐와 괴테, 그리고 자유에 대한 열망 예술적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러브스토리는 슈만과 클라라가 더 풍성하지만, 라이프치히를 대표하는 음악가는 단연 요한 세바스찬 바흐다. 바흐는 라이프치히 시내의 웅장한 성 토마스 교회에서 성가대를 이끌며 오르간 연주자로 오래 활약했다. 마태수난곡 등 300여 곡에 이르는 음악을 작곡하며 최고의 창작열을 불태웠던 시기였다. 바흐는 죽어서 교회 제단 앞의 바닥에 새겨진 명판 아래 묻혀 있다. 파이프오르간을 조율하는지 예배당 안은 장중한 오르간 소리로 가득했다. 라이프치히를 찾은 한 무리의 일본인 관광객이 교회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라이프치히에는 음악가 외에도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독일의 문호 괴테. 그의 자취는 프랑크푸르트에 가장 많이 남아 있지만,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대학을 다녔다. 이 도시에서 괴테는 ‘파우스트’를 구상했다. 구도시 중심가에 파우스트의 무대가 된 레스토랑이 500년 가까이 문을 열고 있다. 괴테가 드나들던 당시의 분위기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선술집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가 쌉싸름한 맥주의 훌륭한 안주가 된다. 시내의 성 니콜라이 교회 앞에서 바닥에 크고 작은 발자국을 떠서 새긴 동판을 발견했다. 발자국 위에는 ‘1989년 10월 9일’이란 날짜가 적혀 있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을 허무는 도화선이 됐던 평화혁명이 시작된 현장이다. 동독지역이었던 라이프치히에서는 1980년대 초부터 월요일만 되면 교회 앞에서 공산 정권에 대항하는 작은 기도회가 열렸다. 라이프치히의 기도회는 독일 전역으로 번져 나갔고 이내 독일통일운동으로 변모했다. 그러다 동판에 새겨진 날짜인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7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동판은 그때의 발자국을 새겨 놓은 것이다. 남자 구두부터 굽 높은 여자 구두, 그리고 아이 것임이 분명한 작은 발자국이 자유에 대한 갈망을 웅변하듯 동판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중세 작센공국의 화려한 영광, 위대한 예술가들의 발자취, 2차 세계대전의 비극과 파괴된 도시, 공산주의의 압제와 자유에 대한 갈망, 폐허 속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옛 중세 건축물, 그리고 일찍 찾아온 긴 어둠과 그 반대편에서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 미소와 환대로 따스한 크리스마스 마켓…. 독일 작센지방의 두 도시,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로 떠나는 겨울 여정은 이런 것들의 섬세한 교직을 만나러 가는 일에 다름아니다. 여행 정보 = 독일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독일관광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것만 무려 150개에 이른다. 자그마한 시장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다. 독일관광청 홈페이지(www.germany.travel/kr/specials/christmas/christmas.html)에서 대표적인 150곳의 크리스마스 마켓의 운영 시간과 링크 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 드레스덴에서는 엘베강을 따라 운항하는 유람선 탑승을 권한다. 드레스덴의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넉넉한 주변 풍경을 2시간에 걸쳐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매일 오전 11시, 오후 1·3시에 아우구스트 다리 옆 선착장에서 출발하는데, 돌아오는 길에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오후 1시 유람선이 가장 좋다. 어른 16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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