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남도 가을의 절정 "장흥"

醉月 2015. 11. 25. 17:48

전남 장흥의 절집 보림사에 당도한 가을 풍경이 이렇게 찬란하다. 신라 헌안왕 때인 859년에 지금의 자리에 세워진 보림사에 올해로 1156번째의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마침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려 가지산 자락에 운무가 걸렸다.



찬비와 눈 소식에 밀려간 가을이 남도 쪽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지금 가장 찬란한 가을은 전남 장흥의 절집 보림사 마당쯤에 당도해 있습니다. 발갛게 익은 감나무와 단풍 너머로 가을비가 피워올린 안개가 그림처럼 걸렸습니다. 올해의 가을이 남도 땅에서 눈부신 절정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천관산의 암봉 사이에서도, 하루하루 차고 푸른 빛이 짙어지는 남도의 바다에도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의 심지가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 보림사, 1156번째의 가을이 와서 찬란하게 머물다

▲ 장흥 천관산의 암봉. 단풍으로 붉어진 능선을 따라 창검처럼 꽂힌 바위들이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남도에서 가을의 절정을 만나보려면 전남 장흥의 보림사를 찾아가 볼 일이다. 탐진강 지류가 화순에서 장흥으로 경계를 넘는 지점쯤에 절집 보림사가 있다. 보림사는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다. 구산선문이란 이른바 ‘선종(禪宗)’을 대표하는 큰 절 아홉 곳을 말한다. 선종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행을 잘하고 선행을 쌓는다면 마음속의 부처를 꺼낼 수 있었다고 믿었던 불교의 종파. ‘학문과 배움’으로 믿음과 깨달음을 구할 수 있다는 교종에 맞서, 선종은 수행자의 ‘마음과 실천’에 불법의 완성이 있다고 믿었다. 불경의 경전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불법의 완성이 있다고 갈파함으로써 불교를 낮은 자리까지 가지고 내려왔던 것이었다.

보림사는 구산선문의 아홉 개 문파 중에서 가장 먼저 선종의 깃발을 세웠던 ‘가지산문(迦智山門)’에 속한다. 당나라에서 선법을 전해 받고 돌아온 도의 선사로부터 설악산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 체징(보조선사). 그가 다시 당나라 유학을 다녀와 이곳 장흥 보림사에 머물며 일대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보조선사의 설법을 듣고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이로써 보림사는 가지산 문파의 중심사찰이 됐다. 지금이야 잘 알려지지 않은 사찰이지만, 신라 말의 보림사는 당대 최고의 대찰이었다. 보림사는 부드러운 언덕을 낀 분지에 들어서 있다. 산속에 숨지 않고 평지에 들어서 있기 때문일까. 너른 마당을 거느린 절집의 느낌은 푸근하고 여유롭다. 보림사는 759년 지금의 장소에서 2㎞ 떨어진 자리에 초가 암자로 창건했다. 그리고 딱 100년 뒤인 859년에 보조국사 체증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대적광전을 세웠다. 보림사가 지금의 자리에 있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지금 절집에 당도해 머물고 있는 건 1156번째의 가을인 셈이다.

보림사는 내력은 깊지만, 사찰 건물은 모두 6·25전쟁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전쟁의 와중에 절집 건물은 모조리 불태워졌고, 일주문과 사천왕문만 겨우 화마를 피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일주문과 사천왕문은 공사 중이다. 절집 마당도 모두 공사로 파헤쳐졌다. 대대적인 공사를 하려는지 마당 한쪽에는 배관이 가득 쌓여있어 발 디딜 자리도 마땅치 않을 정도다. 그러나 어수선한 절집 분위기에도 단풍 불붙은 절집의 풍경은 가장 화려하다. 특히 대적광전 뒤쪽의 절집건물과 부도군 일대가 가을과 어우러진 모습은 절정의 가을 모습을 그린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가을비로 운무가 드리워지면서 단풍 색은 한층 더 선명해지는데, 빗소리에 간간이 맑은 풍경소리가 끼어들었다.

보림사 동부도 탑 입구에는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의 시 ‘보림사를 지나며’가 새겨져 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화순에 머물렀던 말년의 김병연이 여기를 다녀간 모양이었다. 그가 남긴 시의 한 구절이 이렇다. “술잔을 비 삼아 쌓인 시름 쓸어버리고, 달을 낚시 삼아 시를 건져 올리네….” 지금 보림사는 달을 낚시 삼지 않더라도 시 몇 편쯤은 저절로 나올만한 풍경 속에 있다.

# 창검처럼 능선에 꽂힌 바위가 늘어선 풍경…천관산

▲ 장흥 상선약수 마을 김영완 고택의 들머리. 온통 낙엽이 깔린 이 길은 대숲의 초록으로 어둑하다.

장흥에서 보림사의 가을 풍경에 견줄만한 곳이 바로 천관산이다. 천관산이야말로 장흥에서 보림사보다 더 몇 배 더 이름난 곳이다. 가을 천관산의 본래 주인은 억새다. 하지만 억새꽃은 가을의 초입에 이미 끝나버렸다. 억새꽃의 보송보송한 흰 솜털이 은빛으로 반짝이며 물결치는 때는 10월 중순까지. 아직 지지 않은 억새 군락이 군데군데 남아있긴 하지만 10월 중순 무렵의 탐스러운 억새꽃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천관산에 억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즈음이면 능선의 활엽수며 관목들이 낙엽의 옷을 다 벗어버려 산의 뼈대가 훤히 드러난다. 초록을 걷어내면서 면류관이나 왕관처럼 우뚝 솟은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더욱 또렷해지는 것이다. 천관산 암봉은 하나의 거대한 바위가 아니라 창검처럼 꽂힌 수많은 바위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다. 그래서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다르다. 평탄한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닭의 형상을 했다가 죽순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하고, 뭉툭했던 바위가 몇 걸음 만에 날 선 칼날처럼 보이기도 한다. 활짝 편 물고기 등지느러미 같은 바위가 있는가 하면 거대한 주사위를 쌓아놓은 형상의 바위도 있다. 마치 기묘한 형상의 수석을 놓고 보듯이 자리를 바꿔가며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여기다가 능선과 능선 사이에 바다처럼 펼쳐진 숲의 풍경도 색다르다. 낙엽을 다 떨구고 펜화처럼 시리게 서 있는 관목에다 늘 푸른 소나무, 상록 활엽수 등이 뒤섞여서 추상화처럼 반짝인다.

천관산은 여러 곳에서 오를 수 있다. 장흥 위씨 집안의 제각인 장천재 쪽에서 오르는 게 보통인데, 쉽게 오르겠다면 천관산 문학공원에서 탑산사로 이어지는 산행코스를 택하는 게 좋겠다. 천관산의 허벅지까지 차로 오를 수 있어 산행 거리도 가깝거니와, 처음에는 탑산사를 목적지로 삼았다가 절집에서 한숨 돌리고, 다음 목적지로 천관산 정상 능선의 구룡봉을 향하는 셈이니 한결 힘이 덜 든다. 산행 들머리에서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동백 숲 터널을 지나서 1시간쯤이면 천관산 능선에 가닿는다. 쉬엄쉬엄 여유 있게 올라도 1시간 30분이면 넉넉하다. 바닷가에서 치솟은 해발 732m란 높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길은 수월하다.

천관산을 오르는 길에 들르는 절집 천관사는 한때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1000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전한다. 산 전체가 불국토였을 당시에는 천관산의 이름마저 ‘불두산(佛頭山)’으로 불렸단다.

지금의 이름인 ‘천관’도 불교의 천관보살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천관보살은 더불어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이타행의 수행을 겸하는 보살이다. 암자를 거느리며 당당했다던 절집은 이제 쇠락해 법당 하나와 요사채 하나, 그리고 자그마한 텃밭이 고작이지만, 이런 소박한 절집 살림이 오히려 푸근하다.

장흥의 바다는 차가워질수록 맑은 푸른색으로 빛난다.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대기와 안개마저 푸른 빛을 띤다.




# 겨울이 다가올수록 푸르게 빛나는 장흥의 바다

전남 장흥을 다녀가면서 바다를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장흥의 겨울 바다는 겨울이 다가오면서 하루하루 더 푸른 빛이 더해진다. 바다도 청록빛으로 짙어지고, 공기마저도 푸르게 물든다. 장흥의 바다에서 차갑다는 건 곧 푸르다는 것이다. 차가워진 장흥의 바다는 득량만의 갯것들을 탱글탱글하게 키워낸다.

핏빛 낭자한 일출 풍경으로 이름난 소등섬이 떠 있는 남포 일대에서는 열흘쯤 뒤부터 향긋한 자연산 굴을 맛볼 수 있다. 회진면 옹암리 내저마을 일대의 맑은 바다에서는 겨우내 부드러운 매생이가 난다. 내저마을에서는 이제 막 매생이 양식이 시작됐다. 지금부터 음력 정월 보름까지 서너 시간에 한 번씩 바다로 나가서 매생이 발을 뒤집는 고단한 노동이 시작된 것이다. 앞으로 한 달쯤 뒤면 고단한 노동은 갓 건져낸 뜨끈한 한 그릇 매생이 국이 돼서 누군가의 속을 훈훈하게 덥히리라.

자연산 굴도, 매생이도 아직 때가 이르지만, 옹암리 일대의 바다를 찾아가는 까닭은 ‘거기까지 가는 길’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이쪽의 해안도로는 말끔하게 다듬어진 관광지의 길과는 다르다. 바다가 보이는 세련된 커피숍도, 전망대도 없다. 대신 남루한 어촌마을을 끼고 길은 이어진다. 이런 남루함이 보여주는 건 날 것 같은 바다다. 바다를 끼고 옹암리로 이어지는 길은 가드레일도, 경계석도 없이 바다와 수평으로 이어진다. 마치 배를 타고 항해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이진목에서 삭금마을을 지나 회진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야트막한 구릉을 오르내리면서 양식장의 대나무가 끝간데 없이 꽂혀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달린다. 회진면에서 죽도를 넘어 장흥 관내의 유일한 섬인 노력도로 이어지는 길도 훌륭하다.

지난 2006년 연륙교가 놓이면서 육지가 된 노력도에서는 제주를 오가는 여객선이 취항한다. 육지와 다리가 놓이고 난 뒤 한동안 노력도의 아낙네들은 마을 뒤편 언덕에 삼삼오오 모여 하루 종일 섬으로 들어오는 차량의 숫자를 셌다고 했다. 평생 고립된 작은 섬에서 살아온 이들에게는 다리를 건너 섬으로 차가 들어오는 게 마냥 즐겁고 좋았던 모양이었다. 노력도에서 만난 한 주민은 “언덕에서 섬으로 들어오는 차들을 세며 구경하다가, 간혹 ‘어떤 차가 더 비싼 차인가’를 놓고 시비가 붙곤 했다”며 웃었다.

# 아름다운 마을 골목과 따스한 시장도 있다

장흥의 내륙 쪽에는 ‘우드랜드’라고 이름 붙인 편백숲이 있다. 장흥이 대표 관광지로 내세우는 곳인데, 장흥읍 부근의 억불산 자락의 사철 푸른 편백나무 숲에다가 찜질방과 숙소 등 다양한 시설을 들인 곳이다. 편백 향과 청량한 숲의 기운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여름이라면 모를까, 이즈음 같은 늦가을에는 우드랜드보다는 인근의 평화리 상선약수 마을이다. 마을에는 ‘상선약수’란 오래된 우물이 있는데, 마을 이름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본래 ‘상선(上善)’이란 노자 도덕경에 나온다. 노자는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으며, 몸을 낮춰서 아래로 흐르는 물은 도(道)에 가깝다’고 했다. 자연의 이치에서 무릇 삶의 방향을 발견한 것이었다.

평화리 마을은 그냥 둘러보자면 30분도 길게 느껴질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단풍과 낙엽, 그리고 푸른 대나무와 난대림의 숲으로 가득 한 어둑한 마을 여기저기를 걷다 보면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해진다. 마을 앞에는 잎을 다 떨군 채 반들반들한 수피의 알몸으로 선 아름드리 배롱나무와 소나무로 둘러친 연못이 있다. 소나무(松)와 백일홍(百)이 있는 연못(井)이라 해서 ‘송백정(松百井)’이란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연못은 독립운동가이자 장흥군수, 국회의원을 지낸 이 마을 출신 고영완 씨의 고조부가 조성했는데 눈썰미가 보통은 아니었던 듯싶다.

연못가에는 250년 된 고영완 가옥이 있다. 담 안쪽에는 양옥집이 들어서 흐트러졌지만, 돌담장 솟을 대문으로 이어지는 부드럽게 휘어진 들머리의 돌계단 경관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 양쪽으로 느티나무 거목 둥치의 초록 이끼와 청량한 대숲의 푸르름이 만들어낸 진초록의 어둑한 느낌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오래된 집의 돌담과 대문이 자연과 함께 녹아있는 듯하다. 이 돌담에서 대문으로 이어지는 공간을 감히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샅길’이라고 부른다 해도 모자람이 없다. 상선약수 마을은 대숲 우거진 우물도, 느티나무 낙엽 서걱거리는 마을의 골목도 가을의 정취를 그윽하게 뿜어낸다.

장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한 군데 더. 장흥읍에는 토요시장이 열린다. 2일과 7일에 서는 오일장과는 별도로 매주 토요일에 여는 주말 관광시장이다. 토요시장은 키조개와 한우, 표고버섯을 함께 먹는 삼합으로 이름났다. 토요시장을 찾은 관광객들은 대부분 정육점과 좌판에서 재료를 구입해 식당에 상차림 비용을 내고 먹는다. 토요일이면 시장 전체가 거대한 음식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토요시장에 정육점과 식당만 있는 건 아니다. 한국으로 시집온 장흥의 다문화 주부들이 천막을 치고 제 고향 음식을 내놓는 공간도 있고, 지역 할머니들이 제가 기르고 거둔 것들을 가져다 파는 장터도 있다. 토요시장이란 시도가 성공을 거두면서 시장 내 공간을 상인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내어주고 있는 것이다. 시장에서 가장 눈길을 끈 곳이 ‘다우리 음식거리’. 시장 한쪽 길에 천막을 치고 아시아 각국에서 온 다문화 주부들이 고향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파는 곳이다. 일본 다코야키와 베트남 쌈 등 익숙한 음식도 있지만, 태국 음식 덕쩍, 필리핀 음식 롬피아, 보또, 중국 주차이허즈 등 서울에서도 보기 어려운 낯선 이름의 음식들도 좌판에 가득 차려진다. 고향 할머니 장터에는 저마다 명찰을 단 지역 할머니들이 직접 재배한 채소며 과일 따위를 놓고 좌판을 펼친다. 지역 주민들이 제 것을 들고 나온다는 믿음과 시골 할머니의 정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 보림사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광산 나들목으로 나가 13번 국도를 타고 나주까지 간다. 나주에서 장흥 이정표를 따라 23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820번 지방도로를 만나면 좌회전한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림사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조금만 들어가면 보림사다. 주차장 바로 앞에 보림사가 있다. 장흥군은 남북으로 길어 여정을 짤 때는 이동시간을 여유 있게 두고 움직여야 한다. 장흥 북쪽의 보림사에서 남쪽 끝의 옹암리까지 가려면 1시간 30분이 족히 걸린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수문해수욕장에 장흥에서 유일한 리조트 안단테(061-862-2100∼3)가 있다. 장흥읍에서는 크라운 모텔(061-863-0778), 피아노모텔(061-864-8800) 등이 깔끔한 편이다. 유치자연휴양림(061-863-6350)과 천관산자연휴양림(061-867-6974)도 조용하다. 다만 천관산자연휴양림은 산길을 8㎞ 정도 들어가야 하니 먹을 것 등을 미리 준비해가야 한다. 휴양림으로 드는 길가에 전국 최대규모의 동백군락지가 있다. 장흥은 동백이 늦는 편이라 이쪽의 동백은 3월은 돼야 꽃망울이 터진다.

장흥의 먹거리로는 한우와 키조개, 표고버섯을 함께 먹는 이른바 ‘장흥삼합’이 손꼽힌다. 정남진만나숯불갈비(061-864-1818)가 이름난 곳이다. 키조개와 굴찜은 안양면의 여다지회마을(061-862-1041)이 실하게 내준다. 키조개 등심구이를 내는 취락식당(061-863-2584), 낙지국밥, 매생이탕으로 이름난 토정황손두꺼비국밥(061-863-7818)도 알아주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