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소리에 붙이는 글 (鳴蟬賦)
여기에 한 물건 있어 나무 끝에서 우는데 (爰有一物鳴于樹顚)
맑은 바람 끌어들여 긴 휘파람 불기도 하고 (引淸風以長嘯)
가는 가지 끌어안고 긴 한숨 짓기도 하네 (抱纖柯而永歎)
맴맴 우는 소리는 피리 소리와 다르고 (嘒嘒非管)
맑은 소리는 현악기 소리와 같네 (泠泠若絃)
찢어지는 소리로 부르다 다시 흐느끼고 (裂方號而復咽)
처량하게 끊어질 듯하다 다시 이어지네 (凄欲斷而還連)
외로운 운율 토하고 있어 음률 가늠하기 힘들지만 (吐孤韻以難律)
오음의 자연스러움 품고 있네 (含五音之自然)
나는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알지 못하거니 (吾不知其何物)
그 이름이 매미라네 (其名曰蟬)
여기에 한 물건 있어 나무 끝에서 우는데 (爰有一物鳴于樹顚)
맑은 바람 끌어들여 긴 휘파람 불기도 하고 (引淸風以長嘯)
가는 가지 끌어안고 긴 한숨 짓기도 하네 (抱纖柯而永歎)
맴맴 우는 소리는 피리 소리와 다르고 (嘒嘒非管)
맑은 소리는 현악기 소리와 같네 (泠泠若絃)
찢어지는 소리로 부르다 다시 흐느끼고 (裂方號而復咽)
처량하게 끊어질 듯하다 다시 이어지네 (凄欲斷而還連)
외로운 운율 토하고 있어 음률 가늠하기 힘들지만 (吐孤韻以難律)
오음의 자연스러움 품고 있네 (含五音之自然)
나는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알지 못하거니 (吾不知其何物)
그 이름이 매미라네 (其名曰蟬)
▲ 정선 ‘송림한선’ 종이에 연한 색, 45×23.1㎝, 간송미술관 |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막무가내로 쏟아지던 아침비가 갑자기 멎었다. 바람마저 멈추더니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멀리서 간간이 우레 소리의 여운만이 들릴 뿐 맑은 대기 속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할 일을 마친 구양수는 편안하게 풀밭에 앉았다. 무심한 눈길로 빈 뜰을 바라보니 풀밭 사이에 고목 몇 그루가 서 있었다. 그때 발견했다. 나무 끝에서 울어대는 매미 한 마리를. 오랫동안 풀밭에 앉아 매미 울음소리를 듣던 구양수는 느낀 바가 있어 부(賦)를 지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매미 소리에 붙이는 글’, ‘명선부(鳴蟬賦)’다. 가우(嘉祐) 원년(1056), 중국 송나라 인종(仁宗) 때의 일이었다.
문자를 아는 선비의 상징 매미
구양수의 ‘명선부’는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려 있는 보배로운 문장이다. 그는 이 글에서 매미 울음소리의 특징을 묘사하는 데서 시작해 만물의 갖가지 다양한 소리를 거쳐 사람들의 울음소리인 문장론에 도달한다. 사계절마다 여러 새가 울고 벌레들이 울고 심지어 연못 속의 맹꽁이와 흙 속의 지렁이도 운다. 제각기 자기 몸 안에서 울음을 토해내는 점에서는 만물이 모두 똑같지만 그중에서 사람이 가장 귀중한 까닭은 자기의 말을 글로 전해 백 세대에 걸쳐 장구히 울기 때문이다. 생명은 짧지만 문장은 길다. 구양수의 ‘명선부’는 매미 한 마리의 울음소리를 통해 심원한 예술론으로 확장해 나가는 시인의 집중력이 놀라운 작품이다. 그는 ‘취옹정기(醉翁亭記)’와 ‘추성부(秋聲賦)’처럼 자연과 인생에 대해 통찰력 있는 글을 쓴 작가로 유명하지만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곤충을 소재로 쓴 글도 그의 대표작이다. 심지어 쉬파리를 소재로 부(賦)를 지을 정도였다. 소재는 하찮은 미물이지만 그 속에 사람살이의 다양함과 교훈이 담겨 있어 많은 선비들이 읽고 외우기를 반복했다.
‘명선부’에 취한 화가들은 너도나도 붓을 들어 매미를 그렸다. 조선의 화가 정선(鄭敾·1676~1759)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그린 ‘송림한선(松林寒蟬·소나무 숲의 가을 매미)’은 구양수의 ‘명선부’를 잘 살린 수작이다. 그림은 매우 단순하다. 왼쪽 상단에서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소나무 가지에 매미가 붙어 있다. 매미는 하늘 쪽을 향해 있는데 나뭇가지는 땅 쪽으로 뻗어 있어 그림 속에 긴장감이 감돈다. 만약 매미가 나뭇가지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면 그림의 기운이 흘러내린 듯 맥이 빠졌을 것이다. 이 그림의 매력은 또 있다. 대부분의 화가가 나무의 몸통을 넓게 그리고 넓은 몸통에 작은 매미가 붙어있는 형식으로 구도를 잡는다. 실제로 우리가 길을 가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좇아 나무를 쳐다봐도 매미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매미가 보호색을 띠고 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만큼 매미가 나무에 비해 몸이 작아 존재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선은 소나무 가지의 연장선처럼 매미를 그렸다. 매미와 나뭇가지가 만나는 부분에서는 붓질이 끊겼다. 마치 두 개의 나뭇가지가 매미를 매개로 해서 이어진 것 같다. 큰 나무의 몸통에 붙은 매미는 매미가 날아가 버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이 그림 속에서는 매미가 자리를 뜨면 두 개의 나뭇가지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되어 있다. 매미를 보며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이런 형식은 심사정의 ‘화훼초충’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점인데 정선의 작품에서 정점을 이룬다. 소나무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텅 빈 공간으로 남겨둔 것도 비가 그친 뒤 청아한 기운을 전해준다.
다섯 가지 덕목을 가진 매미
그림 속의 매미는 단순히 감상을 위한 매미가 아니다. 매미가 지닌 ‘오덕(五德)’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다짐이자 맹세였다. 진(晉)나라 때의 시인 육운(陸雲)이 매미를 일컬어 ‘문(文)·청(淸)·염(廉)·검(儉)·신(信)’을 지닌 곤충이라 칭송하였는데 오덕은 군자가 갖추어야 할 도리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옛 그림은 자연을 그대로 옮겨 그린 풍경화가 아니라 자연에 빗대어 삶의 철학을 담은 철학책이자 사상서이다. 미미한 곤충 한 마리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뜻을 되새겨 보려 했던 옛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얼마나 숭고하고 겸허한지를 매미 그림 한 장이 알려 준다.
구양수를 비롯한 옛 선비들은 매미를 오덕을 갖춘 군자로 생각하며 그 미덕을 배우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밤낮 없이 울어대는 매미 소리로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에게 매미는 어느덧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되어 버렸다. 밤이 되어도 대낮처럼 환한 불빛 때문에 밤을 낮이라 착각한 매미들이 한밤중에도 극성스럽게 울어대는 것이다. 귀청을 찢는 듯한 매미 소리 때문에 오덕을 생각하기는커녕 그나마 간신히 남은 덕의 흔적마저 버려야 할 판이다. 매미는 옛날 그대로인데 어찌 매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을까. 사람들은 매미를 재워야 할 시간에 환한 불을 켜놓으면서 다만 매미의 울음소리만 타박한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 빌미를 제공해 놓고서 정작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모두 그 사람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은 쓸쓸해야 시가 나오지
왕유 죽리관
죽리관에서 (竹里館)
홀로 깊은 대숲 속에 앉아 (獨坐幽篁裏)
거문고 타고 긴 휘파람 분다 (彈琴復長嘯)
깊은 숲을 아무도 모르는데 (深林人不知)
밝은 달만 와서 비춘다 (明月來相照)
▲ 김홍도 ‘죽리탄금도’ 종이에 먹, 22.4×54.6㎝, 고려대학교박물관 |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협박에 못 이겨 관직을 맡았다. 난이 진압되자 그는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다. 다행히 아우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불교에 더욱 심취해 평생 향을 피우며 불교 경전을 읽었다. 31살에 부인과 사별한 후 평생 홀로 산 그는 병약한 어머니를 위해 장안(長安)에서 멀지 않은 종남산(終南山)에 망천(輞川) 별장을 사들였다. 제법 운치 있는 은거생활을 할 수 있는 호화스러운 별장이었다. ‘죽리관에서’는 망천 별장에서 지은 시로 별장 근처의 20여가지 경물을 노래한 ‘망천집(輞川集)’에 실려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망천장은 절에 희사했다. 시불(詩佛)다운 행동이었다.
외로움을 친구 삼아 대숲에 앉으니
이곳에 들어온 지 몇 해던가. 번화한 도시에서 먼 곳이다 보니 매사가 한가롭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얽매인 일도 없으니 새소리가 들리면 느지막이 일어나 게으른 아침을 먹고, 가끔씩 책을 보다 지치면 호수를 건너 언덕에 오른다. 정오의 해가 푸른 이끼 위에 노을빛으로 물들도록 숲 속은 고요해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도 말소리만 들릴 뿐 사람의 자취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나는 오늘도 홀로 깊은 대숲 속에 앉아 거문고를 뜯는다. 잔잔하던 바람도 적막해서 댓잎을 건드릴 때쯤이면 나도 덩달아 휘파람을 불며 고요함을 즐긴다. 이도저도 지쳐 무료해질 즈음 보름달이 찾아와 친구처럼 어두운 마음을 비춰준다. 얼마나 오랫동안 누리고 싶었던 생활인가.
왕유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가 붓을 들어 그의 생활을 상상해서 그렸다. ‘죽리탄금도(竹裡彈琴圖)’는 왕유가 망천장에서 누린 유현하고 탈속한 경지를 시적으로 표현했다. 시인은 대나무 숲에 앉아 둥근 달빛을 받으며 거문고를 타고 있고 뒤쪽에서는 동자가 등을 돌리고 앉아 차를 끓이고 있다. 앞쪽에는 큼지막한 바위가 놓여 있어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시인의 삶을 지켜주는 듯하다. 거문고 소리, 휘파람 소리, 차 끓이는 소리, 보름달이 무거워 댓잎 기우뚱하는 소리…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그림을 그림으로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될까봐 김홍도는 오른쪽 위 공간을 시원하게 비워놓았다. 빈 공간을 통해 사람의 심성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자연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홀로 지내는 시인의 즐거움을 빈 공간의 끝에 적어두었다. 제시에 적힌 마음은 왕유의 것이자 김홍도의 것이다. 김홍도 또한 왕유가 ‘망천집’을 지을 때와 비슷한 나이인 50대 초반에 연풍현감을 그만두고 그림 속 시인처럼 풍류적 생활을 즐겼다. 차이가 있다면 여유로운 시인이 자신의 별장으로 내려가 넉넉한 고독을 즐겼다면, 궁핍했던 화가는 옛 삶터로 돌아가 시끄러움 속의 고요를 즐겼다는 것이다.
시 속의 그림, 그림 속의 시
북송대 소식(蘇軾·1036~1101)은 왕유의 ‘남전연우도(藍田煙雨圖)’를 보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칭찬했다. 그만큼 왕유의 시는 회화성이 뛰어나다.
조선 후기에는 송시(宋詩)보다 당시(唐詩)를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사람들은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송시보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듯 회화적인 당시를 선호했다. 그중에서도 왕유와 두보의 시는 가장 시인과 화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화가들은 시의도(詩意圖)를 그릴 때 시구의 한두 구절만을 적는 경우가 많은데, 김홍도는 ‘죽리탄금도’에서 시 전문을 적어 넣었다. 그림을 부채에 그린 선면화(扇面畵)인 까닭에 부채질하듯 서늘한 바람이 성성한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것 같다. 그 바람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초가을 처서(處暑)의 기분 좋은 바람이다. 딱 이맘때쯤인 것 같다. 한여름 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처서가 돼서야 하늘의 달도 쳐다보고 거문고 가락에 마음을 튕겨볼 여유가 생기지 않겠는가.
이쯤 되면 아무리 마음이 각박한 사람도 세상을 보는 눈이 너그러워진다. 가지 끝에 달린 목련꽃이 산 속에서 어지러이 붉은 봉오리를 터뜨릴 때, 배꽃이 나부껴 섬돌가 풀밭에서 바람 따라 가볍게 휘날릴 때, 가을비에 생긴 여울이 돌에 부딪혀 튀어 오를 때 그 행복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는 계절을 세 해 정도 보내고 나면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그리워진다. 그리움이 목까지 차올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때쯤 붓을 들어 시를 쓴다. ‘죽리관에서’라는 시가, ‘죽리탄금도’라는 그림은 그렇게 탄생했다.
왕유는 병이 위중한 어머니를 위해 망천장을 구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는 3년 동안 망천장에 칩거하며 시를 썼다. 마치 어머니가 시인인 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시가 탄생할 수 있는 장소로 손을 이끌어준 것 같다. 이백과 왕유의 생몰 연대를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죽었다. 두보는 이들보다 11년 후에 태어났다. 한 시대에 한 명의 거장도 얻기 힘들거늘 ‘시의 신선(詩仙)’과 ‘시의 부처님(詩佛)’과 ‘시의 성인(詩聖)’이 같은 시대, 같은 땅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경이롭다. 이런 대가들을 한 시대에 불러 모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홀로 있는 즐거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넉넉함에서 나온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