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여 년 전 낙동강 하류 일대에서 연맹국가를 이루고 있던 강성했던 고대왕국 ‘가야’. 그 땅이 뿜어내는 기운의 중심에 섰습니다. 경북 성주의 가야산. 가야산은 해인사와 홍류동이 있는 경남 합천 쪽으로, 또 경북 성주 쪽으로도 능선을 뻗고 있지만 그 기운을 제대로 느끼자면 성주 쪽에서 올라서 ‘만물상’을 딛고 서야 합니다. 바위들이 이름 그대로 ‘만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곳. 검붉게 치솟은 거친 암봉들이 마치 아우성처럼 힘차게 달리는 자리에 서니 심장의 박동까지도 빨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백운동 쪽에서 오르자면 두루마리 그림을 펼친 듯 이어지는 가야산 암봉의 끝자락쯤에는 ‘상아덤’이 있습니다. 가야산의 여신(女神)과 하늘의 천신(天神)이 만났다는 성스러운 전설이 전해지는 암봉의 무리입니다. 가야산 여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 그 이름마저 반듯합니다. 그가 상아덤에서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닦고자 밤낮없이 하늘에 소원을 빌었답니다. 이런 정성을 갸륵하게 여긴 하늘신 이비하(夷毗訶)가 오색구름을 타고 이곳 상아덤으로 내려옵니다. 산신과 천신은 이 자리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대가야의 이진아시왕과 금관가야의 수로왕을 낳았답니다. 신라말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화려했던 단풍이 다 물러간 이즈음의 산하(山河)는 황량합니다. 이런 때 가야산을 찾아 오른 것은 나뭇잎이 다 떨어진 뒤에야 더 위용이 당당해지는 거친 암봉을 두르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만물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겨울의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이즈음이라면 신화처럼 전해지는 가야왕국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여정이 맞춤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가야산 아래 성주 땅의 성산가야의 고분에도, 이웃한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 유적에도 한때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가 신라군의 기습으로 패망했던 가야왕국 시대의 이야기들이 서려 있었습니다. 어디 이뿐일까요. 성주에서 고령으로 흘러내리는 대가천 물길 곁에 무심한 듯 서있는 회연서원은 초겨울 낙엽으로 뒤덮여 적막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고, 조선시대 영남 사림파의 뿌리로 꼽히는 점필재 김종직 종택이 있는 고령의 개실마을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만이었습니다. 가야산의 만물상에서 시작한 발걸음을 성주와 고령까지 이으며, 이제는 다 스러지고 만 고대국가 전설의 흔적과 초겨울의 매혹적인 풍경을 길잡이 삼아 따라가봤습니다.
# 근육의 힘이 아닌, 풍광의 힘으로 오르는 길 자칫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는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가야산을 오르는 만물상 코스. 초입부터 만만찮다. 가파른 사면을 따라 한참을 올라 몇 번이고 숨이 턱에 차 멈춰선 뒤에야 겨우 암봉의 능선으로 올라서게 된다. 과거 가야산을 오르는 코스는 합천의 해인사 쪽이 유일했다. 그때 가야산을 올라봤다면 그다지 거칠지 않은 유순한 산으로 기억할 법하다. 그러나 국립공원 지정 후 무려 37년 만인 지난해 10월부터 ‘만물상 코스’가 개방되고부터는 사정은 달라졌다.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올라선 뒤 암봉을 타고 넘는 코스가 여간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공원 내 탐방코스를 난이도에 따라 상, 중, 하로 구분하고 있다. 공단 직원들이 실제 산에 올라가 본 등산객들의 반응을 모아 점수를 매겨 난이도를 정한다. 전국의 국립공원 탐방코스 중 5㎞ 미만의 코스에서 난이도 ‘상’으로 분류된 곳은 모두 5곳. 그 중에서도 3㎞로 가장 짧으면서도 난이도 ‘상’으로 꼽힌 곳이 가야산 만물상 코스라니 이 정도면 말 다했다. 암봉의 능선에 올랐다고 해서 힘든 구간이 끝났다 생각하면 그거야말로 오산이다. 바위 틈을 통과하거나 거대한 암봉을 비켜 돌아가면서 오르내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하지만 가야산 만물상 코스는 주말이나 휴일이면 탐방객들이 전국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든다. 국립공원관리공단 백운동탐방지원센터 직원은 “한창 단풍이 물들던 지난 가을에는 한꺼번에 몰려든 산행객들로 정체가 빚어졌을 정도”라고 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만물상’이란 이름답게 기기묘묘하게 솟은 우람한 암봉의 빼어난 풍광이 팍팍해진 허벅지나 몰아쉬는 가쁜 숨쯤은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슬아슬 솟아있는 암봉을 하나씩 타고 넘을 때마다 탐방객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오름길의 끄트머리에서 다리 쉼을 하노라면 주변에서 “거참, 명산이네…명산이야”하는 찬탄쯤은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러니 가야산에서 산행객의 발길을 이끌고 가는 것은 근육의 힘이 아니라 ‘장대한 풍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물상 암봉 끝자락의 상아덤을 지나 탐방코스의 갈림목인 서성대까지 당도하면 잠깐 망설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멀리 올려다보이는 칠불봉과 우두봉의 정상을 밟고 가느냐, 아니면 이쯤에서 유순한 낙엽으로 뒤덮인 계곡길을 따라 나무덱을 딛고 내려가느냐…. 하지만 제가 올라섰던 만물상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풍광이 기다리고 있는 정상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성대에서 칠불봉까지는 1시간쯤이면 넉넉하고, 여기서 우두봉까지는 15분이면 된다.
# 신화의 공간에 오르다 가야산은 암봉의 풍모 못지않게 거기 깃든 이야기도 깊다. 1700여 년 전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연맹국가를 이뤘던 가야 땅을 굽어보는 한복판에 솟은 우람한 산에 어찌 이야기 몇 자락 없을까. 온갖 형상을 한 바위들이 다 제 나름의 전설을 갖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야산 만물상에서 서성대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나는 ‘상아덤’은 가야의 건국신화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먼저 ‘상아덤’이란 이름의 뜻부터 새기자. ‘상아’는 여신을 일컫는 고어(古語). ‘덤’은 바위를 말한다. 그러니 상아덤이란 곧 ‘여신이 사는 바위’란 뜻이다. 그 여신이 바로 가야산 산신(山神)인 ‘정견모주(正見母主)’다. 신라말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에 등장한다는 신화 한 토막. 가야 땅의 백성들이 우러러 받들었다는 산신 정견모주가 상아덤에서 밤낮없이 하늘을 향해 소원을 빌었단다. ‘백성들을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기원이었다. 그의 기도에 감복한 천신(天神) 이비하(夷毗訶)가 어느 날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상아덤으로 내려왔다. 산신과 천신의 만남. 머지않아 둘 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났다. 아버지 천신을 닮아 해와 같이 얼굴이 둥글고 불그레했다는 큰아들은 대야가의 첫 번째 왕인 ‘이진아시왕’이고, 어머니 여신을 닮아 흰 얼굴을 한 둘째아들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다. 그러나 지금 상아덤에는 작은 안내판 말고는 가야의 신화를 가늠해 볼만한 아무런 징표도 없다. 상아덤의 암봉들도 지금까지 지나왔던 만물상의 다른 암봉에다 대면 그다지 특별하다고 할 것도 없다. 하지만 1700년이란 시간 저편의 가야 땅 백성들이 여기서 바라보면서 머리를 조아렸을 터. 그리고 가야가 멸망하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가야왕들의 무덤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었다. 가야산의 힘찬 정기가 상아덤, 거기 서려 있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그 앞에서 온몸으로 그 기운을 느껴본다면 가야산을 오르는 길이 좀 더 특별해지리라. # 비장했던 역사, 운치 있게 걷다 ‘가야의 땅’이라면 단연 경북 고령이다. 가야산이 솟은 성주에서 고령까지는 대가천의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33번 국도를 타고 차로 30분 남짓이면 당도한다. 지금이야 행정구역으로 경계가 뚜렷하지만 예부터 가야산 아래 성주, 고령 일대는 한데 묶어 취급했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도 고령과 성주를 함께 말하면서 “씨 한 말을 뿌리면 120∼130말이 나오며 적더라도 80말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적었다. 정견모주의 큰아들 ‘이진아시왕’이 다스렸던 고령 땅의 대가야는 400년대부터 150여 년간 가야제국의 맹주로 군림했다. 그럼에도 고구려와 백제보다 일찍 신라에 병합된 데다 패배의 기록조차 전해지지 않는 탓에 그동안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대가야의 화려했던 영화는 역설적으로 가야의 왕들이 흙으로 되돌아간 무덤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1977년부터 고령군청 인근 지산동에서 순장의 흔적이 뚜렷한 44, 45호 고분이 발굴되면서 비로소 역사의 어둠에 묻혀 있던 대가야에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그러니 고령을 찾았다면 맨처음 찾아가야 할 곳이 지산동 고분군이다. 봉긋봉긋한 고분이 나란히 늘어선 사이로 부드럽게 이어진 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운치가 넘친다. 여기다 아직도 대부분의 역사가 어둠에 잠겨 있는 고분의 깊은 시간까지 더해진다. 562년 가을 신라의 기습공격에 필사적으로 맞섰다가 멸망해 결국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만 가야. 그 긴 시간이 잠겨 있는 무덤 사이를 걷다 보면 문득 세상사가 덧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지막 결전의 현장이 떠올라 비장한 느낌이 들게 된다. 지산동 고분 외에도 고령에는 대가야 시대의 유물을 살펴볼 수 있는 왕릉전시관과 대가야박물관이 있다. 왕릉전시관에서는 발굴 고분의 순장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기도 했고, 박물관에는 고분에서 쏟아져 나온 갖가지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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