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 걸다_11

醉月 2012. 12. 8. 09:19

인생길의 험난함을 어찌 산에 오르는 것에 비할까

이백 촉도난

 
촉으로 가는 길의 험난함이여 (蜀道難)
아!아! (噫吁戱)
험하고도 높구나 (危乎高哉)
촉으로 가는 길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 오르는 것보다 어렵네 (蜀道之難難於上靑天)
잠총과 어부 촉나라 연 것 어찌 그리 아득한가 (蠶叢及魚鳧開國何茫然)
그로부터 사만 팔천 년을 진나라 변방 인가와 통하지 않았네 (爾來四萬八千歲不與秦塞通人煙)
서쪽 태백산으로 새나 다닐 만한 길 있어 (西當太白有鳥道)
아미산 꼭대기 가로지를 수 있네 (可以橫絶峨眉巓)
땅 무너지고 산 꺾여 장사들 죽으니 (地崩山摧壯士死)
구름다리와 돌길 잔도가 고리처럼 놓였다네 (然后天梯石棧相鉤連)
위로는 여섯 마리 용이 해 둘러싼 꼭대기 표시되고 (上有六龍回日之高標)
아래로는 부딪치는 물결 거꾸로 꺾여 냇물을 감도네 (下有沖波逆折之回川)
누런 학이 날아도 이르지 못하고 (黃鶴之飛尙不能過)
원숭이조차 건너려면 기어올라 매달릴 것 걱정하네 (猿猱欲度愁攀緣)
청니령 얼마나 구불구불한지 백 걸음에 아홉 번 꺾여 바위 봉우리를 감싸네 (靑泥何盤盤百步九折縈岩巒)
삼성을 만지고 정성을 거쳐 우러러 숨죽이며 (捫參歷井仰脅息)
손으로 가슴 쓸어내리며 길게 탄식하네 (以手拊膺坐長嘆)
그대에게 묻노니 서방으로 떠나면 언제 돌아오나 (問君西游何時還)
위태로운 길 험한 바위라 오를 수 없네 (畏途巉岩不可攀)
다만 보이느니 슬픈 새 고목에서 울고 (但見悲鳥號古木)
수컷 날면 암컷 따라다니며 숲 사이를 맴도네 (雄飛雌從繞林間)
또 두견새 달밤에 우는 소리 들려 빈 산에서 시름에 잠기네 (又聞子規啼夜月愁空山)
촉으로 가는 길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 오르는 것보다 어렵네 (蜀道之難難於上靑天)

 

▲ 심사정 ‘촉잔도권(蜀棧圖卷)’(부분) 종이에 연한 색, 818×58㎝, 간송미술관, 1768년

 

‘촉도(蜀道)’는 쓰촨성(西川省)으로 가는 험한 길을 일컫는다. 쓰촨성은 2008년 5월 12일 강진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한 곳이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했던지 이백은 ‘푸른 하늘 오르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이백의 시 ‘촉으로 가는 길의 험난함이여(蜀道難)’를 조선 후기의 남종화풍의 대가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 그렸다. 제목은 ‘촉으로 가는 잔도(蜀棧)’다. 잔도(棧道)는 벼랑이나 낭떠러지처럼 사람이 다니기 힘든 곳에 나무로 선반을 엮듯이 매달아서 만든 길을 뜻한다.
   
   이 그림은 길이가 8m가 넘는 대작으로 두루마리다. 두루마리를 펼칠 때마다 우뚝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들이 파노라마처럼 끝없이 펼쳐져 장관을 연출한다. 심사정은 산의 형태를 선으로 그린 다음 그 안에 메마른 붓질을 반복해서 면을 채우는 화법을 즐겨 구사했는데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다. 바위산의 단면을 도끼자국 같은 부벽준(斧劈皴)으로 그린 기법과 산 정상을 너럭바위처럼 깎아놓은 것도 심사정의 특기다. 산세가 험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 기우뚱하게 배치된 산들이 밑둥이 잘린 듯 구름 속에 잠겨 있고 갈색조의 산등성이는 꿈틀거리듯 불안정하다. 이런 험한 길을 오로지 두 발이나 나귀에 의지해서 넘어가야 하는 나그네의 고단함. 이곳은 누런 학이 날아도 이르지 못하고 원숭이조차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촉으로 가는 길이다.
      
   휘모리장단 같은 붓질
   
   심사정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아찔하고 험준한 강산이 굽이굽이 펼쳐진 가운데 개미처럼 작은 사람들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졌다는 점에서는 이인문(李寅文·1745~1821)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가 떠오른다. 야트막한 집은 기괴한 암산 사이에 버섯처럼 들러붙어 있다. 벼랑 끝에 매달린 듯 위태로운 잔도에는 어김없이 길 떠나는 사람들과 수레가 등장한다. 잔도를 내기에도 마뜩잖은 절벽 위에서는 사람들이 도르래를 타고 아랫마을로 내려간다. 심사정의 작품에서 보이는 인물들과 가축과 건축물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에서 메아리처럼 되풀이된다. 이인문이 얼마나 깊이 심사정의 화풍에 매료됐는지를 증명하는 자료다.
   
   다른 점이 있다면 후배 이인문은 무궁무진한 강산에 첫발을 들여놓는 발걸음을 천천히 여운 있게 시작했고, 선배 심사정은 도입부부터 압도될 만큼 험악한 촉도의 관문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이인문의 붓질이 느린 장단의 진양조라면 심사정의 충격요법은 빠른 장단의 휘모리다. 이런 차이는 두 사람의 기질이나 그림을 풀어나가는 방법론의 차이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그 사람이 걸어 온 인생길의 차이에 기인할 수도 있다. 심사정의 화풍은 이인문을 비롯해 최북(崔北·1712~1786), 김유성(金有聲·1725~?), 이방운(李昉運·1761~?) 등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넘어야 할 깔딱고개
   
   심사정이 이 작품에 붓을 댄 것은 62세 때인 1768년 8월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에 완성한 절필(絶筆)로 그의 작가적 역량을 온전히 쏟아부었다. 그의 신산스러운 생애를 되짚어볼 때 마지막 작품으로 ‘푸른 하늘 오르는 것보다 어렵다’는 촉도(蜀道)를 선택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물론 이 작품은 그의 7촌 조카 심유진(沈有鎭·1723~1787)의 부탁을 받아 붓을 들었고, 제작 당시 그는 몇 달 후에 찾아올 죽음을 예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작품 속에서 그가 살아온 생애를 떠올리는 것은 그의 삶이야말로 촉도를 넘어가는 것만큼 험난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의정을 배출한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과거부정시험에 연루되자 ‘파렴치범’의 후손으로 낙인찍히게 됐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왕세자(나중에 영조) 시해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대역죄인의 자손으로 낙인찍혔다. 심사정과 그의 아버지는 목숨은 건졌으나 평생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다. 다행히 심사정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려 장안의 종잇값을 올릴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와의 친분을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큼 마음을 터놓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넘는 고갯길에는 언제나 혼자였고,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 걷는 먼 길은 매순간 주저앉고 싶을 만큼 힘든 깔딱고개였다. ‘촉잔도권’에서 위험스러운 잔도 곳곳에 등장하는 인물은 실제로 그 고개를 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심사정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고갯길을 넘었다. 
      
   욕심을 덜어낸 자리에 이해의 우물이
   
   상처가 많다는 것이 꼭 인간으로서 결격사유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매순간 뜨겁게 살다가 데었거나 진실 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까닭에 베인 자국일 뿐이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안다. 과적된 욕심을 덜어낸 자리에 깊은 이해의 우물이 고여 있다는 것을. 심사정이 한번도 디뎌보지 못한 촉도를 실감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생애에서 수없이 많은 촉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삶으로 촉도를 이해했다.
   
   류시화 시인은 상처를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이라고 노래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할 깔딱고개 앞에 설 때가 있다. 남들이 보면 우스워 보이는 고갯길이 내게는 숨이 깔딱 넘어갈 만큼 힘들게 느껴질 것이다. 험한 고개를 넘어가면서 손발에 생채기가 생겨 그 아픔에 주저앉게 되거든 되새겨볼 일이다. 내 생의 어느 지점에서 험한 산을 넘으면서 입은 상처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 받게 되는 선물이라는 것을.

 

유배지서 보내온 편지휘영청 달 밝은 밤소식

적벽부


적벽부 (赤壁賦)
임술년 가을, 7월 16일. 소식이 손님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적벽 아래를 노닐었다. 맑은 바람은 나직이 불고 물결은 잔잔하니 술을 손님에게 권하며 명월의 시를 암송하고 요조의 장을 노래한다. 달이 동산 위에 떠올라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를 서성이자 흰이슬이 강물에 끼고 물빛은 하늘에 닿았다. 한 잎 갈대 같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두고 일만 이랑 망망한 곳으로 나아가니 넓어서 허공을 타고 바람을 탄 것 같아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정처 없이 세상을 잊고 홀로 날개가 생겨 신선이 되어 오르는 것 같다. 이때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 뱃바닥을 두드리며 노래하길 ‘계수나무 삿대와 목란나무 돛대는 맑은 물을 치고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올라라. 내 마음은 아득히 저쪽 하늘에서 아름다운 그대를 바라보리라.’손님 가운데 피리를 부는 이가 있어 노래를 따라 가락을 맞추니 그 소리가 원망하는 듯, 그리워하는 듯, 흐느끼는 듯, 호소하는 듯 남은 음이 실처럼 가늘게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잠긴 용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배의 홀어미를 울린다.

소식 (蘇軾)
壬戌之秋,七月旣望, 蘇子與客,泛舟遊於赤壁之下,淸風徐來,水波不興,擧酒屬客,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少焉,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白露橫江,水光接天,縱一葦之所如,凌萬頃之茫然, 浩浩乎,如憑虛御風,而不知其所止,飄飄乎,如遺世獨立,羽化而登仙,於是飮酒樂甚,扣舷而歌之,歌曰,桂棹兮蘭槳,擊空明兮泝流光,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方,客有吹洞簫者,倚歌而和之,其聲鳴鳴然,如怨如慕, 如泣如訴,餘音嫋嫋,不絶如縷,舞幽壑之潛蛟,泣孤舟之婦

 

▲ 안견 ‘적벽부도’ 비단에 연한 색, 161.3×102.3㎝, 국립중앙박물관

 

추석이다. 모두들 평화로웠던 고향을 떠올리는 시간이다. 세상이 온통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로 보였던 그 옛날. 기억 속의 고향은 땟국물 줄줄 흐르는 옷을 입고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아래 누워도 인생이 지금보다 훨씬 풍요롭고 넉넉했다. 눈을 감으면 금세라도 어머니가 사립문을 밀치고 나와 멀리서 온 나를 반겨줄 것 같은데 이제는 더 이상 그 집도 어머니도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고향집에 피붙이가 살고 있다 한들 옛날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고향으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직장 때문에 혹은 몸에 병이 들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경제적 형편 때문에 고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귀향하는 사람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배지나 다름없는 타향에서 오로지 마음속의 고향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인 소식이 위로의 시를 건넸다.
   
   
   유배지에서 찾은 자연과의 합일
   
   소식(蘇軾·1037~1101)이 ‘적벽부(赤壁賦)’를 지은 것은 유배지에서였다. 북송 때의 시인인 소식은 호가 동파거사(東坡居士)여서 흔히 소동파(蘇東坡)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다방면에 능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데 왕안석(王安石·1021~1086)의 개혁안에 반대하다 투옥된 후 호북성 황주(黃州)로 유배되었다. 그의 나이 40대 중반의 일이었다. 유배지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마음도 달랠 겸 해서 친구들과 함께 7월 16일에 적벽을 찾아 뱃놀이를 한 후 ‘적벽부’를 지었다. ‘적벽’은 조조(曹操)와 주유(周瑜)가 ‘적벽대전’을 치른 곳으로 유명한 장소인데 소식은 이곳을 주유(舟遊)하며 영웅들의 과거 모습을 회상하면서 인생무상을 노래한다. 그는 3개월 뒤인 10월에 다시 한 번 적벽을 찾아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었는데 이번주에 소개한 시는 ‘전적벽부(前赤壁賦)’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소식은 조선 문사들이 존경하는 시인이었으며 안견(安堅)·정선(鄭敾)·김홍도(金弘道)를 비롯한 화가가 이 소식의 ‘적벽부’를 소재로 붓을 들었다. 안견의 작품으로 전칭되는 ‘적벽부도’ 역시 그런 조선 선비들의 소식에 대한 흠모를 읽을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조선 초기의 대표 작가 안견은 ‘적벽부도’에서 화면의 대부분을 거대한 자연을 그려내는 데 할애하고 소식 일행이 탄 배는 화면 하단에 작게 묘사했다. 웅장한 자연 앞에 선 배는 그야말로 ‘일엽편주(一葉片舟)’가 따로 없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하루살이같은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은 작게 그린 반면 화면은 온통 산과 강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배의 오른쪽에는 흔히 ‘동파건(東坡巾)’이라 불리는 검은 관을 쓴 소식이 앉아 있고,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는 그날 밤의 유람에 참여한 친구들이 앉아 있다. 뒤로는 열심히 술을 따르는 동자와 노를 젓는 사공이 보인다. 그들은 한창 술을 마시며 뱃전을 두드리고 대화를 하면서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중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들도 때가 되면 먼지처럼 사라진다. 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한 사람이 쓸쓸한 목소리로 탄식하자 또 한 사람이 술잔을 들고 말을 받는다. ‘변하지 않는 데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거늘 무엇을 부러워하리오.’ 그렇게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취흥이 올라 서로를 베개 삼아 배 안에 누우니 동녘이 밝아오고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유배하지 않았다면 적벽부도 없었다
   
   유배를 당한 것은 소식에게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만약 소식에게 유배라는 소외와 격절이 없었다면 ‘적벽부’ 같은 명문장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왕의 곁에서 신임받으며 잘나가는 관직에 앉아있었더라면 바쁜 와중에 적벽으로의 유람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적벽부’는 유배라는 ‘강제 휴가’ 덕분에 지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불행하다고 느낀 사건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축복이었음을 아는 경우가 어찌 소식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문제였겠는가. 우리도 때론 다니던 직장에서 강제로 밀려나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 동안 실직 상태에 놓일 때가 있다. 그럴 때 소식처럼 적벽 유람을 계획할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유배지 같은 삶 속에 빠져 있다 해서 웅크리고만 있지 말고 가볍게 일어나 동네라도 한 바퀴 둘러볼 일이다. 아니면 큰 맘 먹고 가까운 산에라도 올라가면 어떨까. 김밥과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 물도 배낭에 넣어 산에 가서 식후 커피라도 타서 마시면 이 또한 색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어느 곳으로도 떠나지 못하고 외롭게 명절을 보내는 내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지거든 산 중턱에 서 있는 나무를 보자. 그 나무는 100여년 세월을 한곳에 뿌리박은 채 한 번도 움직이지 못하고 생로병사를 되풀이하는 생명체를 지켜봐야 했다. 다리가 붙들린 삶이 나보다 더 고독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답답하다고 비명 한번 지르지 않은 채 한 세월을 묵묵히 살고 있다. 아무리 낯선 곳이라도 그곳에 터전을 삼고 짐을 풀면 새로운 인연이 생기는 법이다. 나무가 움직이지 않아도 새들이 날아오고 바람이 불고 철 따라 뿌리 곁에서 버섯이 피었다가 진다. 그런 나무를 바라보면서 소식 같은 글이라도 기록해 보자. 이번 추석에는 비록 편안한 마음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호사는 누리지 못하더라도 그저 가족이란 이름으로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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