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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도 떨어뜨린 ‘유신의 떡고물권력’ 이후락

醉月 2009. 12. 3. 09:02
그는 美CIA 스파이로 박정희 ‘좌익성향’ 감시했다
일본 첩보원학교(나카노학교) 출신으로 영어·일어 능란한 구사, 정치비사 - 나는 새도 떨어뜨린 ‘유신의 떡고물권력’ 이후락
글 강준식 작가 [arumdhaun@hanmail.net]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회의차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남측위원장(왼쪽)이 1973년 11월3일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나카노학교 출신설
“그 양반이 아직 살아 있었나?”

10월31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하다. 왜냐하면 1980년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를 떠난 뒤 그는 30년 가까이 거의 뉴스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칩거생활을 시작할 무렵, 그러니까 아직 신군부의 정치활동규제에 묶여 있던 1984년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여의도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여류 수필가를 만나러 갔다 그곳에 들른 이후락 씨와 합석하게 되었던 일이 있다. 여류 수필가는 그에게 술을 따르며 평양 방문 때 여차하면 자살하려고 독약까지 갖고 갔던 일을 찬탄하면서 “대체 그 독약을 어디에 숨기신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후락 씨는 자신의 어금니 가운데 의치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청산가리를 숨겼다고 했다.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있다 여차하면 입에 넣으려고 했다는 기사도 있으나, 내가 그날 들은 이야기는 분명 의치 속에 숨겼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저 양반이 김종필 씨나 누구처럼 보직의 하나로 그냥 정보부장을 했던 사람이 아니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09년 11월1일, 미국 에 실린 그의 사망 기사를 보니 이름 앞에 ‘전 남한 스파이 총책(Former South Korean spy chief)’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물론 그 표현은 ‘중앙정보부장’을 풀어 쓴 것이겠지만, 나는 이 미국 신문이 이후락 씨의 실체를 제대로 꿰뚫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 이후락 씨는 원래부터 첩보원과 무관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공식 기록을 보면 이후락 씨는 1924년생이다. 그리고 만 21세 되던 1945년 12월5일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미 군정이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자리에 문을 열었던 군사영어학교는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 장교들에게 영어와 미국식 군사훈련을 반년 정도 이수하게 해서 한국 육군 장교로 임관시키던 일종의 세탁용 단기코스 같은 것이었다. 1기 정원은 모두 60명으로, 전원이 해방 전 일본 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장교들로 적어도 23∼24세가 넘은 나이들이었다.

그런데 이후락 씨는 21세의 나이에 일정 코스를 거치고 임관까지 되어 해방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 점이 미스터리다. 그래서 군사영어학교 1기로 뒤에 국방부 장관을 지낸 김정렬 씨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 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 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던 것이겠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한 대목이다. 그가 미군과 거래하려면 첫째는 영어를 구사해야 했을 것이고, 둘째는 미군과 거래할 만한 무슨 내용을 갖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실제 울산공립농업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그가 갑자기 영어를 구사했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래서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1980년대 초 한국의 군사관계 기사를 많이 쓰던 한 일본인 기자가 내게 이후락 씨가 일본에서 ‘나카노(中野)학교’를 다녔다는 설을 들려준 일이 있다. 진짜 나카노학교 출신들은 자신이 그곳 출신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니 이 설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사실이라면 이후락 씨의 미스터리에 대한 의문점이 대번에 풀린다. 나카노학교란 일본 육군성이 1938년 문을 연 첩보원 양성학교로 외국어는 첩보원이 활동할 지역에 따라 영어·러시아어·중국어 중 하나를 집중 공부했는데, 72시간 잠을 안 재우는 논스톱 방식의 강훈련으로 반 년 정도면 회화가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5년제 농업학교 출신의 이후락 씨가 해방되던 해부터 영어를 구사했던 배경이 설명되는 부분이다. 1970년 2월20일 작성된 미 국무부의 ‘이후락 파일’에는 “영어와 일본어가 유창함”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가 어떻게 나카노학교에 들어갔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나카노학교는 일본 육사나 예비사관학교가 중심이고 그 밖에 교도(敎導)학교 등 일본 육군이 관리하던 각종학교 재학생들 가운데 머리가 뛰어난 자를 선발했다고 한다. 그를 접해본 사람들은 그것이 기자든 정치인이든 미국대사든 이구동성으로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영민한 인물이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8년 동안 나카노학교의 졸업생은 모두 2131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후락 씨의 경우는 일본 사이타마(埼玉)현 도코로자와(所澤)에 있던 육군항공정비학교에 진학했던 기록이 있다. 그곳에 다니다 학교장의 추천을 얻어 나카노학교에 선발된 것 아닌가 추측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CIA 연락책
해방되기 전 나카노학교 출신들이 해방 후 조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조선군사령부에 투입된 것은 마루사키 요시오(丸岐義男) 소좌를 우두머리로 한 육군 소위 3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총독부 경찰의 경부나 경부보 또는 순사부장 등으로 위장해 지금의 중부경찰서인 본정서(本町署)와 일본 군속이 많이 살던 용산의 용산서(龍山署)에 집중배치됐다.

이후락 씨가 그들과 행동을 같이한 흔적이 발견됐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12월 초 이들 나카노 출신 일본군 첩보장교들이 모두 귀국길에 오르는 바로 그 시점에 이후락 씨는 미 군정청이 문을 연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진주미군의 G-2나 방첩대(CIC) 등의 정보기관은 방공망 구축과 조선 통치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총독부 경찰이나 일본군 헌병대 등과 밀착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락 씨의 학력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정보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그를 반겼다.

군사영어학교 입학 5개월 만인 1946년 3월23일 그는 22세의 나이에 대위로 임관된다. 당시 미군이 그에게 대위 계급장을 달아준 것은 김정렬 씨의 증언처럼 그가 대위라고 우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에게 정보 일을 맡기기 위해 그런 계급장을 달아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김정렬 씨가 언급한 ‘미군 측과의 거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미군이 그를 밀어주는 대신 그는 미군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그의 보직은 때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지만 대체로 정보계통에 머무른다. 임관 2년 만인 1948년 육본 정보국 차장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고, 1949년 육본 정보국 정보과장, 1950년에는 육군참모총장 정보보좌관, 1951년 육본 정보부 차장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이든 그는 계속 정보계통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취득한 정보를 처음에는 미 제24군단 G-2에,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CIA에 제공했다. 그 후 주미한국대사관 무관으로 미국에 건너갔는데, 이때 미국 CIA의 정식 교육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귀국 후 국방부에 근무하면서 CIA 연락책이 되었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배경이 CIA였기 때문에 그는 4·19혁명이 나고 정권이 바뀌어도 좌천되지 않았다. 4·19혁명 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면서 그는 장면 총리의 중앙정보위원회 연구실장이 되었다는 사람도 있고, 국무총리 안보비서관이 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런 자리에 있다 정보조사국 책임자로 추천되었는데, 이 일에 대해 당시 장면 총리의 비서였던 선우종원(鮮于宗源)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민주당 정권 때 이후락이가 중앙정보부의 전신이라고 할 ‘정보조사국’을 만들었다. 당초 정보조사국 책임자로 이후락이가 추천됐을 때 여러 사람이 안 된다고 했는데 결국 이후락이가 맡게 된 것을 보니 CIA에서 그를 민 것 같다.”

그 무렵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락 씨는 부패혐의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그의 옆방에 수감되었던 훗날의 국회의장 박준규 씨는 이런 말을 했다.“5·16 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나가데.”

처신이 약삭빨라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국 CIA의 중재가 있었던 것이다. 가령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18일 미국 CIA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에 보면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한국전쟁 때 복직되었고…”라고 되어 있는데, 미국으로서는 좌익 전력을 지닌 박정희 의장을 감시할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CIA는 그 적격자로 이후락 씨를 지목했다. 이에 당시 군사정권의 제2인자였던 김종필 씨가 그를 출옥시켜 <대한공론사> 사장 자리에 앉혔고,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에 앉힌다. CIA의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박정희 의장의 입장에서는 CIA의 백업을 받는 이후락 씨를 이용해 미국의 지원을 얻어낸다는 계산이 있었다. 이후락 공보실장은 이 일을 해내는 데 매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쿠데타의 주역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점차 박정희 의장의 신임을 얻는 실세 중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다.


 

박정희 신도


1971년 대선 당시 박정희 대통령 후보(가운데)에게 이후락 비서실장이 귀엣말을 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육영수 여사.

민주당 정권 시대에 이후락 씨가 만든 정보조사국을 이름만 중앙정보부로 바꿔 초대 부장에 취임한 김종필 씨는 군사정권의 권력기반을 굳히기 위해 같이 거사했던 쿠데타 세력들 가운데 육사 5기를 중심으로 한 이북 출신 장교들을 숙청하는 이른바 ‘알래스카 토벌작전’을 수행하는데, 이 작전에 이후락 씨가 개입했다.

해방 직후 군부를 중심으로 떠돌던 ‘알래스카(함경도)’니 ‘하와이(전라도)’니 ‘텍사스(평안도)’니 하는 별칭은 해방 직후 미 제 24군단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붙인 각 도(道)의 작전코드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나는 이 ‘알래스카 토벌작전’이 박정희 의장의 지시 하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공보실장이 모의해 만든 작품이었다고 들었다. 전면에 나선 것은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의 정보참모 등을 역임한 짐 하우스맨 대령이었다.

나는 그가 미 국방부 정보국(DIA) 소속이었던 것으로 보지만, 당시 증언자들 가운데는 한국에서 오래 활동했던 그를 CIA 한국지부 책임자로 파악하는 사람이 많다. 어쨌거나 이북 출신의 군 장교들이 믿을 만한 미국인을 전면에 나서도록 주선한 것은 나카노학교에서 ‘모략공작’ 과목을 정식으로 이수했을 이후락 실장이었다.

그 시나리오에 따라 하우스맨은 함경도 출신의 박창암 혁명검찰부장을 불러 “미국으로서는 박정희와 김종필을 믿을 수 없다. 특히 사상 면에서 그렇다. 우리는 이북에서 월남한 당신을 믿으니 박정희와 김종필을 제거하라”는 미끼를 던졌다. 박정희 의장의 형(박상희)은 남로당 간부였고, 형의 딸(박영옥)은 김종필 부장의 아내였던 것이다.

박창암 검찰부장이 이 말을 흘리자 육사 5기를 중심으로 한 함경도 출신 장교들은 5·16 거사 후 경상도 출신만 요직에 기용하는 박정희 의장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터여서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우스맨은 박창암 검찰부장 등 함경도 출신 장교들에게 누구를 포섭하고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매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말을 미국의 의중이라고 믿은 함경도 출신 장교들은 일일 보고서를 제출했다. 바로 이 보고서가 김종필 부장의 뒤를 이은 김재춘 정보부장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던 것이다. 김재춘 부장은 하우스맨에게서 건네 받은 명단에 따라 김동하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 박임항 건설부 장관, 박창암 혁명검찰부장을 위시한 관련자 32명을 구속하고 1963년 3월11일 ‘군부쿠테타음모사건’을 언론에 발표했다.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은 경북 출신이면서도 함경도 출신들과 어울렸던 이규광(전두환 처삼촌) 당시 국토건설단장 보좌관은 뒤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 사건은 엄청나게 과장된 깁니더. 내가 민정에 참여하려는 박정희 의장에게 불평을 품은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조직을 구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병력을 동원할 수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우예 쿠데타를 합니꺼?”

결국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란 5·16에 가담했던 함경도 출신 및 그들과 가까웠던 기타 지역 출신의 장교들을 토사구팽한 사건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마음이 급해지면 “가가각하…!” 하고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던 이후락 씨에 대한 박정희 의장의 신뢰도 한층 굳어졌다.

그해 10월15일 대선이 치러졌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후보는 그를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에 발탁했다. 이후락 씨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이후 6년 동안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세인들로부터 “정치는 이후락, 경제는 김학렬”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박 대통령을 측근에서 유능하게 보좌한다.

1969년에는 3선개헌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끝난 지 나흘 뒤인 1969년 10월21일 비서실장에서 해임된다. 3선개헌의 1등공신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박 대통령이 김형욱 정보부장과 함께 물리친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며 박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 김형욱 부장과는 달랐다.

3선개헌 파동에 대한 국면전환용으로 자신이 해임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해임된 지 석 달도 안 된 1970년 1월, 박 대통령은 그를 주일대사에 임명했다. 주일대사 시절 그는 항공편으로 청와대 오찬시간에 맞춰 대통령이 좋아했던 스시를 보낼 만큼 비위를 잘 맞추기도 했다.

1970년 2월20일, 주한 미 대사는 미 국무부에 이렇게 타전했다.

“3선개헌에 앞장서서 박 대통령을 도왔으나 박 대통령은 마침내 이후락을 물리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락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이 사라졌다는 증거는 포착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 정치 옵서버들은 이후락이 곧 주일대사 자리를 떠나 내년(1971년) 봄에 있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주요 직책을 맡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사가 예측한 대로 이후락 씨는 10개월 후인 1970년 12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박 대통령이 그를 불러들인 것은 제7대 대선을 진두지휘하라는 의미였는데, 이에 대해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이 1970년 12월28일 작성한 ‘정보노트’에는 다음과 같이 분석돼 있다.

“부패에 연루돼 한때 일본으로 보내졌으나 그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은 여전히 두텁고, 전쟁을 방불케 할 내년 봄 선거에 대비해 이미 갑옷을 입고 무장을 끝낸 박 대통령이 내년 선거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적임자로 이후락을 지목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한 것으로 평가된다.”

1971년의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는 90만 표 차로 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눌렀다. 선거가 끝난 뒤 김대중 후보는 “나는 박정희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이후락에게 졌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관권·금권선거의 책임자였던 이후락 부장을 비꼰 말이기도 했다.

나카노 시대의 꿈이었을지도 모를 정보의 최고책임자 자리에서 이후락 부장이 행한 일은 여러 가지였으나, 그 가운데서 손꼽을 만한 일은 역시 10월 유신과 7·4남북공동성명일 것이다.

5·16 직후 “남에는 박정희요, 북에는 김일성”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면서 10여 년 뒤의 영구집권 청사진까지 박정희 장군에게 제시했던 사람은 뒤에 내무장관을 지내다 의문사한 엄민영 씨였다고 들었는데, 정작 이 시나리오를 10월 유신의 이름으로 진두지휘한 것은 이후락 부장이었다.

이 무렵의 미 국무부 문서에는 이후락 부장이 ‘박정희 신도’라고 표기돼 있는데, 그만큼 충성을 바쳐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하비브 주한 미 대사가 당시 선포된 비상사태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물으니 이후락 부장은 “무한정”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국무부 문서에 기록돼 있다. 영구집권 의도가 분명했던 것이다.


 

판도라 상자의 열쇠
1972년 이후락 부장은 평양에 다녀온 뒤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본질에 대해 하비브 주한 미 대사는 이후락 부장을 만나본 뒤인 1972년 11월22일 이렇게 타전했다.

“이후락은 자유사회와 공산사회가 합쳐지기를 바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거듭 말하면서 그러나 남북한은 똑같은 목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 벌기(buy time)라고 했다…. 이후락은 박정희와 김일성의 정상회담은 가까운 장래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박 대통령은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통일문제를 이용했던 것이고, 이후락 부장은 그 뜻을 충실히 이행했을 따름이었다. 그 무렵 이후락의 이름 석 자는 하늘을 찔렀고, 그의 이름 앞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수식어가 붙고는 했다. 올라가면 내려오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던가?

1973년 4월 이른바 ‘윤필용사건’이 터진다. 그것은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 박 대통령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사건이다.

주한 미 대사가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는 “윤필용은 체포되기 전이나 후에도, 그리고 여타 군부 주류세력 모두에게서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이외의 다른 징후는 발견된 것이 없다. 대통령은 윤필용 경우를 차후 같은 종류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본보기로 삼으려는 의도가 분명하다”고 기록돼 있다.

이로 보면 사건 자체는 입을 잘못 놀린 것 빼놓고는 별것도 아닌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추종세력에게 본보기용 철퇴를 가했던 것이다. 그리고 반대세력에 대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대처했는데, 그 중 하나가 1973년 8월 발생한 ‘김대중(DJ) 납치사건’이다.

이에 대해 윤필용사건으로 초조해진 이후락 부장이 단독으로 벌인 과잉충성 해프닝이었다고 해설한 언론도 있고, “박 대통령이 지시를 내린 적도 없었고, 박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하고 이후락 씨 자신이 해명한 기사도 있다.

그러나 2007년 과거사위원회는 박 대통령이 DJ 납치사건을 묵시적으로 승인했다는 결론을 내렸고, 당사자인 DJ는 그 결론이 미흡하다면서 “납치의 주동자였던 이후락 부장이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최영근 전 의원을 통해 사실을 고백했다”고 주장했다. 경북 월성 출신의 최영근 의원은 DJ와 가까웠으나 이후락 씨와도 맥이 닿았던 인물이다.

내 생각에 이후락 씨는 그런 일을 단독으로 결정해 주군에게 누를 끼칠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이었든 그는 결국 김대중납치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73년 12월 중앙정보부 자리에서 물러난다. 권부에서 축출된 그는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을 맡아 종교활동에 전념하다 1978년 제10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고, 공화당에 입당해 재기를 노렸다.

그리고 10·26이 있기 사흘 전인 10월23일에는 국무총리 내정 사실을 통보받고 지인들을 불러 잔치까지 열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 국무부 자료에 따르면 ‘난 기르기와 골프’가 취미였던 그의 운세는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사흘 뒤 박 대통령이 암살됨으로써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그는 “194억원을 빼돌린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그러자 그는 “떡을 주무르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고 항변해 ‘떡고물’이라는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지만 이후로 그는 조용히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정세가 바뀌면 이것저것 까발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기자나 학자들 가운데는 3공이라는 판도라의 상자의 열쇠를 갖고 있던 그를 꼭 만나보려고 했고, 지금도 <이후락 비망록> 같은 것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마 그런 것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치가이기 이전에 임무 중에 인지한 사실은 무덤까지 갖고 간다는 ‘진짜 정보원’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카노학교의 표어는 “공(功)은 말해도 말해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는 정말 끔찍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판도라 상자의 열쇠를 가슴에 묻은 채 무덤으로 들어갔다. 누린 해는 85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