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견, 여포 뛰어넘는 최강의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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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을 쳐부수어 장안으로 도주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손견의 공로였다. 산동에서 일어난 반동탁군 중에서 처음으로 동탁의 군대와 교전한 것은 조조였다. 조조는 의기 하나에 의지해 변수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서영이 이끄는 동탁의 주력부대에 의해 처절하게 패배했다. 그 다음 원소의 선봉 대장인 왕광은 하양진에서 동탁의 양동작전에 걸려 참패했다. 전황은 급격히 동탁군의 우세로 돌아갔고, 산조에 모인 여러 제후군들은 감히 진격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때 장사에서 출발한 손견이 도착하자 전세가 일거에 역전됐다. 양현의 싸움에서 손견은 전승의 기세로 진격해 온 동탁군에게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 그러나 곧이어 손견의 반격이 시작됐다. 손견은 양인에서 여포·호진·화웅의 부대를 대파해 전세를 역전시키고, 대곡에서 동탁을 패주시켰다. 낙양 인근까지 진출해 다시 여포를 격퇴시킨 후, 손견은 낙양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손견이 이처럼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담력이 있고 용맹한 무장이었기도 하지만, 대부분 *백면서생이었던 다른 산동의 의군 장수들과 달리 풍부한 전투경험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손견은 젊은 나이에 출사한 이래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 소년배 우두머리였던 손견은 이들로 구성된 의용병을 이끌고 다니며 허창의 난과 황건적의 난을 토벌했고, 서량 반군과의 싸움에도 참전했다. 산동기의가 일어나기 직전에도 그는 장사태수가 돼 구성의 난을 진압하러 강남의 3개 군을 누비고 다녔다. 손견은 전투경험이 풍부했고 게다가 소년배들로 구성된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한 군대를 지휘했다. 상승의 비결이었다.
손견이 산동반군에 가담한 이유는 순전히 동탁과의 개인적 사감 때문이었다. 손견은 장온의 참군사가 되어 서량의 반란 진압에 종군한 적이 있었다. 당시 장온이 진격을 명했으나 동탁이 이를 무시했다. 장온이 여러 차례 소환하자 동탁이 마지못해 찾아왔다. 동탁의 응대가 심히 불손했으므로, 손견이 나서 동탁을 군법에 따라 참수할 것을 주장했다.
“동탁은 죄를 짓고도 참회하기는커녕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소환을 받고도 제 때에 도착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군법에 따라 참해야 합니다.”
장온은 동탁의 위명을 의식해 감히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로 인해 동탁과 손견은 철천지원수가 됐다. 이런 동탁이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으니 손견에게는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활의 문제였을 것이다. 동탁의 정권이 그대로 안정된다면 손견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때마침 동탁이 원외와 원봉 등 원씨 일가를 몰살시키자 전국적으로 원씨의 문생고리들이 원씨를 위해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손견은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를 일으켜 원술과 합류했다.
손견은 삼국지 초기의 인물들 중 최강의 무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용맹만 믿고 설치다가 이른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가 조금만 자신의 몸을 아꼈더라면 '삼국지'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손견은 유표를 공격하다가 일개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일군의 대장이 되었으면서도 용력만 믿고 선봉에 서서 설친 결과였다. 손견의 이러한 대담무쌍하고 자신을 과신하는 태도는 그의 아들 손책에게도 이어졌다. 손책 역시 그 담력과 무용으로 '소패왕'이라는 칭송마저 들을 정도로 뛰어난 무장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경호도 안 붙이고 혼자 산야를 달리다가 일개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부자 모두 빼어난 용장이었으나 한 나라를 건국할 창업군주로서의 자질은 부족했다. 손견의 둘째 아들 손권은 비교적 신중한 성격이었기에 손견 부자의 세력을 이어받아 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영웅의 이면] 손견의 오부인, 손씨 남자들 '꼼짝마'
손견(A.D 156~192)은 조폭 두목 출신답게 결혼도 힘을 동원해 뜻을 이뤘다. 손견은 젊은 시절 고향인 오군에서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난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오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당시 오부인은 조실부모해 동생 오경과 함께 살고 있었다. 손견이 혼담을 넣자 오부인의 후견 역할을 하고 있던 오씨의 친척들이 반대했다. 손견이 사람됨이 경박하고 사납다는 이유였다. 손견이 몹시 불쾌해 오씨 가문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손견은 이미 그 지역의 소년배 우두머리로 행세했을 뿐더러 성격이 거칠었으므로 오씨 집안의 사람들에게 큰 근심거리가 됐다. 오씨가 친척들을 찾아가 말했다.
“어찌 여자 하나를 아껴 화를 부르시려 하십니까?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운명인가 합니다.” 이윽고 집안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낸 오씨는 손견과 인연을 맺게 됐다. 모두 사남 일녀를 낳았는데, 손책이 첫째이고 손권이 둘째였다.
손견과의 결혼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오부인은 매우 굳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소패왕이라 불릴 정도로 기세가 맹렬했던 손책조차도 그녀에게만은 꼼짝을 못했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한 후 어떤 일로 의견이 대립되어 공조 위등을 죽이려 한 일이 있었다. 아무도 손책을 말릴 수 없었다. 그 때 오부인이 손책을 *후정으로 불렀다. 오부인은 후정의 큰 우물을 붙잡은 채 손책을 꾸짖었다.
“너는 이제 막 강동으로 와 아직 큰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마땅히 어진 선비를 잘 대접하고 과거의 허물은 묻지 말고 공만 포상해야 한다. 위공조는 너를 위해 자신의 직무를 다한 사람인데 오늘 네가 그를 죽이면 사람들이 다 너를 버리고 떠날 것이 아니냐. 나는 화가 집안에 미치는 것을 볼 수 없으니 지금 당장 이 우물에 뛰어들고 말겠다.”
손책이 깜짝 놀라 사과하고 바로 위등을 풀어주었다. 오부인의 영향력이 이와 같으니 강동의 여러 장수와 관리들은 평소에 부인을 어려워하고 크게 의지했다. 오부인은 손권이 소년의 나이에 강동정권을 계승하자 정권이 안정될 수 있게 중심을 잡는 역할을 했다. 직접 장소 등 신료들을 불러 모아 강동정권을 안전하게 보전하는 방안에 대한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손권의 집권 초기에 정권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정권 안정에 기여했던 오부인은 손권의 위치가 공고해진 건안7년(202)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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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벗겨보기] 손견, 전국옥새 훔치지 않았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손견은 낙양의 궁전 우물에서 전국옥새를 찾아낸 후 황제가 되고자 하는 흑심을 품었다. 본거지인 장사로 돌아가려다가 원술의 사주를 받은 유표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비슷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손견이 낙양에서 전국옥새를 되찾은 것은 사실이나 손견이 회군한 것은 산동반군의 내분 때문이었다. 산동반군은 곧 하북의 원소·하남의 원술로 대표되는 양대 진영으로 갈려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하북군의 맹주인 원소가 예주자사로 임명한 주옹이 손견의 근거지인 양성을 점령해 군량 공급을 끊었으므로 손견은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손견의 오부인, 손씨 남자들 ‘꼼짝마’
손견(A.D 156~192)은 조폭 두목 출신답게 결혼도 힘을 동원해 뜻을 이뤘다. 손견은 젊은 시절 고향인 오군에서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난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오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당시 오부인은 조실부모해 동생 오경과 함께 살고 있었다. 손견이 혼담을 넣자 오부인의 후견 역할을 하고 있던 오씨의 친척들이 반대했다. 손견이 사람됨이 경박하고 사납다는 이유였다. 손견이 몹시 불쾌해 오씨 가문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손견은 이미 그 지역의 소년배 우두머리로 행세했을 뿐더러 성격이 거칠었으므로 오씨 집안의 사람들에게 큰 근심거리가 됐다. 오씨가 친척들을 찾아가 말했다.
“어찌 여자 하나를 아껴 화를 부르시려 하십니까?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운명인가 합니다>이윽고 집안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낸 오씨는 손견과 인연을 맺게 됐다. 모두 사남 일녀를 낳았는데, 손책이 첫째이고 손권이 둘째였다.
손견과의 결혼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오부인은 매우 굳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소패왕이라 불릴 정도로 기세가 맹렬했던 손책조차도 그녀에게만은 꼼짝을 못했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한 후 어떤 일로 의견이 대립되어 공조 위등을 죽이려 한 일이 있었다. 아무도 손책을 말릴 수 없었다. 그 때 오부인이 손책을 *후정으로 불렀다. 오부인은 후정의 큰 우물을 붙잡은 채 손책을 꾸짖었다.
“너는 이제 막 강동으로 와 아직 큰 공을 이루지못했으니 마땅히 어진 선비를 잘 대접하고 과거의 허물은 묻지 말고 공만 포상해야 한다. 위공조는 너를 위해 자신의 직무를 다한 사람인데 오늘 네가 그를 죽이면 사람들이 다 너를 버리고 떠날 것이 아니냐. 나는 화가 집안에 미치는 것을 볼 수 없으니 지금 당장 이 우물에 뛰어들고 말겠다.”
손책이 깜짝 놀라 사과하고 바로 위등을 풀어주었다. 오부인의 영향력이 이와 같으니 강동의 여러 장수와 관리들은 평소에 부인을 어려워하고 크게 의지했다. 오부인은 손권이 소년의 나이에 강동정권을 계승하자 정권이 안정될 수 있게 중심을 잡는 역할을 했다. 직접 장소 등 신료들을 불러 모아 강동정권을 안전하게 보전하는 방안에 대한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손권의 집권 초기에 정권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정권 안정에 기여했던 오부인은 손권의 위치가 공고해진 건안7년(202)년 세상을 떠났다
“어찌 여자 하나를 아껴 화를 부르시려 하십니까?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운명인가 합니다>이윽고 집안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낸 오씨는 손견과 인연을 맺게 됐다. 모두 사남 일녀를 낳았는데, 손책이 첫째이고 손권이 둘째였다.
손견과의 결혼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오부인은 매우 굳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소패왕이라 불릴 정도로 기세가 맹렬했던 손책조차도 그녀에게만은 꼼짝을 못했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한 후 어떤 일로 의견이 대립되어 공조 위등을 죽이려 한 일이 있었다. 아무도 손책을 말릴 수 없었다. 그 때 오부인이 손책을 *후정으로 불렀다. 오부인은 후정의 큰 우물을 붙잡은 채 손책을 꾸짖었다.
“너는 이제 막 강동으로 와 아직 큰 공을 이루지못했으니 마땅히 어진 선비를 잘 대접하고 과거의 허물은 묻지 말고 공만 포상해야 한다. 위공조는 너를 위해 자신의 직무를 다한 사람인데 오늘 네가 그를 죽이면 사람들이 다 너를 버리고 떠날 것이 아니냐. 나는 화가 집안에 미치는 것을 볼 수 없으니 지금 당장 이 우물에 뛰어들고 말겠다.”
손책이 깜짝 놀라 사과하고 바로 위등을 풀어주었다. 오부인의 영향력이 이와 같으니 강동의 여러 장수와 관리들은 평소에 부인을 어려워하고 크게 의지했다. 오부인은 손권이 소년의 나이에 강동정권을 계승하자 정권이 안정될 수 있게 중심을 잡는 역할을 했다. 직접 장소 등 신료들을 불러 모아 강동정권을 안전하게 보전하는 방안에 대한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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