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김경한_불편한 삼국지_04

醉月 2014. 1. 22. 01:30

원소 ‘서자 콤플렉스’ 한나라 멸망 불렀다 난세의 시작



천하대란의 원흉은 원소였다. 원소가 *십상시의 난을 유발하지 않았다면, 동탁의 쿠데타도 없었을 것이다. 원소가 산동으로 도주하지 않았다면 그의 일족도 멸족되지 않았을 것이고, 천하대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대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한나라도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나라는 황건적의 난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다. 소위 18로의 제후군이 반기를 들자, 기회만 노리던 천하의 야심가들이 일제히 원씨 일가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무장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해 천하대란이 일어난 것이다. 천하대란은 한 시대를 치세에서 난세로 전환시켰고, 한나라의 멸망을 가져왔다.

원소는 4대에 걸쳐 *삼공의 벼슬을 지낸 후한말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원소의 고조부 원안은 후한 장제 시절에 사도를 지냈고, 종증조부 원창은 사공을 역임했으며, 조부 원탕은 태위를 지냈다. 원탕은 원평·원성·원봉·원외 등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원평과 원성은 일찍 죽었으나 원봉과 원외는 다 삼공 벼슬을 지냈다. 삼공을 지내게 되면 당시 관직임용제도인 천거제에 의해 천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따라서 집안사람들이나 문객들을 관직에 진출시킬 기회도 많았다. 이렇게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은 스스로 천거해 준 문벌의 *문생고리를 자임하면서 서로 후견·피후견인의 관계를 맺었다. 당시 조정관료들은 물론 전국의 지방관들이 원씨 집안의 문생고리들로 가득 찼다.

원소는 이 대단한 가문의 종손으로서 뭇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다른 콤플렉스가 있었다. 기실 그는 첩실의 자식으로 한 집안의 후사를 이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원소는 원래 원봉의 서자로 태어났다. 원봉의 적자인 원술에게는 배다른 형이 됐으나, 원술은 늘 원소를 종년의 자식이라 깔보고 무시했다. 원봉의 형인 원성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원소는 원성의 아들로 입양됐다. 종년의 자식에서 원씨 집안의 적장자로 신분이 세탁된 셈이었다.

원소는 태생적 열등감으로 인해 원씨집안을 중심으로 하는 사족계급의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어 했다. 당시 사족사람들이 가장 바라고 원하는 것은 환관세력을 척결하고 조정의 대권을 다시 사족계급의 수중으로 되찾아오는 것이었다. 원소는 이 일이야말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자임했다. 사족을 대표해서 집권세력인 환관을 주멸하고자 한 원소의 야심찬 계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 그러나 원소의 시도는 제대로 성공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원소가 작당과 모의를 좋아했으나 주도면밀함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원소는 겉만 그럴 듯 했지 과단성이 없었다. 꾀를 내기는 좋아하나 실행력이 없었으며, 혼자 잘났으므로 남들의 좋은 의견을 진심으로 경청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원소는 사세오공을 배출한 가문의 후광에 힘입어 산동반군의 맹주가 될 수 있었다. 맹주가 된 후에도 원소는 오로지 패권주의로 일관했다. 일찍이 함께 기병했을 때 원소가 조조에게 자신의 포부를 말했다.

“나는 남쪽으로 황하에 거하면서 북쪽으로 연과 대의 땅에 근거하여 융적의 병력을 겸병하고 난 후, 남쪽을 향해 천하의 패권을 다툴 것이오. 아마도 성공을 거둘 수 있지 않겠소?”

조조가 응대했다.

“나는 천하의 지혜로운 사람의 능력을 활용하고 도리로서 다스리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오.”

원소는 자신의 뜻대로 공손찬을 격파하고 북방의 패권을 쥐었다. 그러나 결국 관도대전에서 열 배의 우세한 전력을 지니고도 조조에게 패하여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오로지 힘에 의존해 패권을 추구함으로써 천하의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조조가 천자를 허도에 영접해 천하 사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 것과 대조적이었다. 원소는 야망을 위해 천하대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그 난에 의해 패망했다.


[영웅의 이면] 원소의 부인 유씨

원소는 정실부인 유씨와의 사이에서 원담·원희·원상 3형제를 낳았다. 유씨는 세 명의 아들 모두 자신이 낳았으나 유독 원상을 예뻐했다. 아마도 원상이 원소를 닮아 풍채도 좋고 인물이 훤칠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것이 원씨 집안을 패망으로 이끄는 원인이 됐다. 원소와 유씨는 장자인 원담을 내치고 셋째인 원상을 후계자로 삼기로 했다. 장남과 차남인 원담과 원희를 각기 청주와 유주로 내려 보낸 것은 다 이런 계획의 일환이었다. 원소가 죽은 후 유씨는 심배, 봉기와 손잡고 원상에게 원소의 지위를 계승하게 했다. 이로 인해 내분이 일어났다.

원소의 처 유씨는 성격이 독하고 질투심이 강했다. 원소가 죽고 아들 원상이 권력을 이어받자마자 유씨는 원소가 생전에 총애하던 다섯 명의 첩을 다 죽여 버렸다. 원소의 시신이 안장되기도 전이었다. 유씨는 그것도 모자라 원소가 저 세상에서 그의 애첩들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머리카락을 자르고 얼굴에는 *입묵을 해 시신을 훼손했다. 원상은 복수를 사전에 예방한다는 구실로 애첩들의 집안사람들을 다 멸족시켰다. 유씨의 행태는 한고조의 부인 여후가 유방의 총희였던 척부인을 *인체를 만든 것 못지않게 잔인했다.

원소의 세력이 멸망한 것에 원상을 편애한 유씨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원씨 집안이 멸족을 면케 된 것도 동물적인 유씨의 본능 덕이었다. 업성이 함락되었을 때, 유씨는 재빨리 원희의 처 견씨를 조조의 장남 조비에게 바쳤다. 원소의 저택에 난입한 조비가 견씨의 미모를 보고 한눈에 반하자 유씨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조비는 조조에게 간청해 원희의 처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이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조는 원소의 일족을 후하게 대접했다. 조조가 업성에서 뒷수습을 마쳤을 때 공융이 편지를 한 통 보냈다. 원씨 집안에 대한 조조의 관대한 처분을 칭송하는 내용이었지만, 그 말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한 후, 달기를 주공에게 하사했습니다.” 조조가 후일 공융에게 이 구절의 출전을 물어보았다. 공융이 대답했다.

“지금 이루어진 일로 볼 때, 아마 그랬을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소이다!” 조비가 원희의 부인을 빼앗았음에도 조조가 이를 추인한 것을 비꼰 것이었다.

[거짓말 벗겨보기] 원소가 산동반군의 구심점이었다고?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18로의 제후군이 의병을 일으켰고, 이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원소의 지휘 하에 동탁군을 무찌르고 낙양까지 입성했다고 한다. 사실이 아니다. 정사에 의하면, 10여명의 주목과 자사, 태수들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나 이들이 모두 원소를 맹주로 삼아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된 것은 아니었다. 반군은 황하를 경계로 하북의 원소, 하남의 원술 2개 진영으로 나누어졌다. 이들은 각자 다른 곳에 주둔했으며, 낙양에 입성한 것도 손견군 뿐이었다.


 

여포, 명분 없는 배신을 밥 먹듯 여포 ‘원조 철새정치인’



여포(?~198)는 거대한 욕망 덩어리였다. 변방에서 비천하게 자란 그는 입신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준비가 돼있었다. 여포의 고향은 변방인 병주에서도 오지인 오원군 구원현이었다. 오원군은 초원지대로서 본시 유목민들의 거주지였고, 장성이 쌓인 이후에도 한족과 호족이 잡거했다. 한족은 주로 변방에 수자리하는 병사들이나 호족을 상대로 교역하는 상인들, 일부 개척민들, 심지어는 강제노역에 끌려온 죄수들로 대부분 빈천했다. 여포는 이 삭막한 변방에서도 한미한 가문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어 몸뚱이 하나가 전 재산이었다.

그러나 여포는 야망이 컸다. 워낙 출중한 용모와 무용으로 어린 시절부터 늘 주변사람들로부터 최고라는 칭송을 받아왔다. 여포의 허영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이런 환경은 그의 열등감과 결합해 출세와 영달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무한 욕망의 덩어리로 여포를 키워냈다.

여포는 잘생긴 남자였다. 게다가 온몸이 근육질인 우람한 몸집에 몸이 번개같이 빨랐다. 그가 말을 달리며 화극을 휘두르면 마치 하늘에서 신장이 내려온 듯했다. 변방의 거친 사내들조차 여포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사람 중에서는 여포가 제일이고, 말 중에서는 적토마가 최고다’라는 명성은 먼 훗날 흑산에서 장연의 무리들과 격투를 벌이면서 얻게 된 것이었지만, 여포는 젊은 시절부터 이미 '신장'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 잘난 몸뚱이 하나가 여포의 밑천이었다. 병주에서는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무용이 뛰어난 무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병주자사 정원이나 하내태수 장양처럼 아무 배경도 없이 무용으로 입신출세한 자들이 제법 많았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무용이 뛰어났던 여포로서도 당연히 큰 야망을 품었음직도 했다.

여포는 병주자사 정원에게 부름을 받아 그의 주부로서 처음 출사했다. 정원은 그에게는 필생의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여포는 더 큰 출세를 위해 그에게는 아버지와도 같은 정원을 배신하고 그의 목을 따 동탁에게 투신했다. 동탁에게서 귀한 대접을 받았으나, 동탁의 시비와의 사통을 계기로 서로 사이가 틀어진 후 사도 왕윤의 꾐을 받아 동탁을 척살했다. 이를 통해 높은 지위뿐만 아니라 한실 중흥의 영웅으로 변신하기까지 했으니 그의 허영심은 충족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허나 동탁의 부장들인 이각·곽사에게 패퇴해 관동으로 나온 후에는 원술·원소·장막·유비 등 여러 군벌의 진영을 전전하면서 배신의 대명사로 낙인찍히게 됐다. 요즘으로 치면 전형적인 철새정치인의 행태였다. 그러나 이 당시 주군을 배신하거나 동맹을 번복하는 행위를 반복한 것은 여포뿐만이 아니었다. 전국에 널린 무수한 대소군벌들의 행태도 모두 이와 비슷했다. 예를 들면 늘 정의의 편으로 인정받아온 유비의 경우에도 *반복무상함이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유비는 공손찬의 부장으로 시작해 서주의 도겸으로 주인을 바꿨고, 한때 여포에게 의탁했다가 다시 조조와 손을 잡고 여포를 쳤다. 다시 조조를 배신하고 원소에게 달아났다가 유표를 거쳐 손권에게 의지했으며, 최후에는 유장의 신뢰를 배신하고 그의 기업을 빼앗았다. 변절의 횟수로만 본다면 여포나 유비나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유비는 충절의 표상, 정의의 화신으로 추앙되고, 여포는 배반과 변절의 상징으로 매도되게 되었는가? 유비는 늘 한실중흥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주인을 배신할 때 뚜렷한 명분이 없었던 여포는 남들의 평가를 무시하고 그저 본능적으로 자신의 세력에 이롭다면 무슨 짓이든 했다. 결국 여포는 측근들에게마저 배신당해 패망했다.

[미화된 영웅] 초선, 중국 4대 미녀 중 유일한 가짜

여포(?~198)는 출중한 용모에 최강의 무사였으므로 뭇 여성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이런 여포도 의외로 여성들에게는 여린 면을 보였다. 딸을 원술에게 시집보낼 때, 여포는 어린 딸이 행여 다칠까봐 비단으로 제 몸과 한 몸이 되게 칭칭 감은 후 직접 호송에 나섰다. 딸을 끔찍이 아꼈던 것이 분명하다. 또 여포가 하비성에서 성을 나가 조조와 결전을 치르려 했다가 처첩들의 반대에 계획을 포기하기도 했다. 처첩들의 안위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여포가 의부였던 동탁과 갈라선 결정적 계기는 한 여성과 관련된 갈등 때문이었다. 정사에 따르면 여포가 동탁의 시비와 사통을 하자 동탁이 이를 의심해 서로 틈이 생겼고, 왕윤이 이를 이용해 여포를 동탁 제거에 끌어들였다고 한다. 후세의 작가들은 여포의 순정적인 태도와 이 짤막한 기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많은 연애 이야기를 창작해 내었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이 시비의 이름은 초선으로 왕윤의 가기였으며, 달도 부끄러워 얼굴을 가릴 정도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왕윤이 초선을 동탁과 여포에게 동시에 바쳐 두 사람 사이의 불화를 야기했다는 이야기이다. 원래 이 이야기의 원형은 원나라 시대의 '연환계'라는 원곡에서 시작되었다. '연환계'에서는 초선의 원 이름이 임홍창이었고, 원래 여포와 혼인했으나 전란 통에 헤어져 서로 애타게 그리던 사이로 나온다.

흔히 중국 역사상 4대 미녀로 *서시·*왕소군·*양귀비·초선 네 사람을 꼽지만, 초선만은 실재했던 사람이 아니라 '삼국지연의'가 창조해 낸 인물이다. 원래 '초선'이란 명칭은 고유명사도 아니다. 한나라 시대 고관들은 담비꼬리와 매미날개로 장식된 관모를 썼는데, 이 모자를 초선관이라 했다. 초선이란 궁중의 궁녀로서 이 초선관을 관리하는 직책을 의미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동탁의 제거 후, 초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창작됐다. 그 중 하나가 ‘관공월하참초선’이라는 원곡의 줄거리이다. 여포의 첩이 된 초선은 여포가 하비성에서 붙잡혔을 때 함께 포로가 됐다. 그런데 초선이 얼마나 미인이었던지 철썩 같이 결의를 맺었던 유비·관우·장비 삼형제조차도 서로 초선을 차지하려고 은밀히 경쟁을 했다. 조조가 이를 이용해 유비·관우·장비 삼형제를 이간시키려 하자, 의리의 화신인 관우가 사모하던 초선을 달빛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며 참수했다는 이야기이다.

[거짓말 벗겨보기]

삼국지연의에는 관우가 동탁의 도독 화웅을 벤 후 유비·관우·장비가 호뢰관에서 여포와 삼대일 격투를 벌이는 것으로 나온다. 지금 중국에 가면 호뢰관을 재현해 놓고 관광상품화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호뢰관 싸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화웅을 벤 것과 여포와 동탁을 패주시킨 것은 다 손견이 한 일이었다. 유비·관우·장비 삼형제는 산동의군에 가담조차 하지 않았다.
 

'軍史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경한_불편한 삼국지_05  (0) 2014.02.16
제2의 한국전쟁 기상도  (0) 2014.02.03
김경한_불편한 삼국지_03  (0) 2013.12.23
김경한_불편한 삼국지_02  (0) 2013.12.06
북한 급변사태 최신 시나리오  (0) 2013.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