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김경한_불편한 삼국지_02

醉月 2013. 12. 6. 09:04

 

조조,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쓰다



조조는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 써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출신성분도 가리지 않았다. 후일 조비를 낳아 황후가 된 변부인은 창기 출신이었으며, 두부인은 멀쩡히 두 눈 뜨고 살아있는 다른 사람의 부인이었다. 덕분에 조조는 무려 25명이나 되는 아들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평생의 원한을 사기도 하고,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진의록의 처 두부인을 장난삼아 빼앗았다가 관우에게 한을 품게 했고, 미망인이 된 장수의 숙모를 슬쩍 취했다가 거의 죽을 뻔했던 적도 있었다.

육수 가에서 *장수의 습격을 받았을 때, 조조는 장남 조앙과 조카 조안민의 희생 덕분에 간신히 묵숨을 건질 수 있었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은 첫딸 청하공주와 함께 유부인의 소생이었으나, 유부인이 일찍 죽었으므로 정실부인인 정부인이 맡아 키웠다. 자식이 없었던 정부인은 조앙을 친자식처럼 정성껏 키웠다. 정부인은 조조가 장수의 숙모와 염문을 뿌렸다가 조앙을 죽게 하고 홀로 살아 돌아온 것에 몹시 분개했다. 그녀는 조조를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바가지를 긁곤 했다.

“내 아들을 데려가 죽이고는 혼자 살아 돌아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조조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견딜 수 없었던 조조는 정부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정부인이 기가 좀 꺾이면 다시 데려올 생각이었다. 정부인은 조조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조조가 직접 정부인의 친정집으로 찾아갔을 때, 정부인은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었다. 조조가 정부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달랬다.

“나를 좀 보아서 함께 집에 돌아갑시다!” 정부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조조는 발길을 돌려 나가다가 문지방에 서서 다시 말을 걸었다. “정말로 헤어지자는 것이오?”

아무 대답이 없자 조조는 하는 수 없이 관계를 끊었다. 정부인은 평생을 길쌈을 해 자급했다. 조조는 정부인을 쫓은 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조조가 병이 깊어져 스스로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되었을 때 깊이 탄식했다 한다.

“내가 평생에 뜻대로 살았지만 크게 마음에 빚진 일이 없었다. 다만 내가 죽어서 저 세상에 가 맞아들 조앙을 만났을 때 그 애가 ‘저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내가 장차 뭐라 답해야 할까!”


[영웅의 이면] 조조, 한나라의 충신으로 남고자 했다

조조(A.D 155~220)는 처음부터 반역을 꿈꾸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한나라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던 남자였다. 그의 꿈은 자신이 죽었을 때 묘비명에 ‘한나라 고(故) 정서장군(征西將軍) 조후지묘(曹侯之墓)’라고 쓰이기를 소망했다. 단지 시대가 그를 한나라를 빼앗은 역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새로운 여론이 일어났다. 조조는 이미 큰 공을 이뤘으니 이제 2선으로 후퇴해야 한다고…. 그 동안 조조의 위력과 업적에 눌려 잠잠하던 한나라 황실과 사족 계급의 합작품이었다. 헌제는 조조의 공적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3개의 현을 식읍으로 내려주었고, 사족들은 패전으로 한 날개가 꺾인 조조에게 이제 할 만큼 했으니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가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건안15년(210년) 12월에 발표한 ‘양현자명본지령(讓縣自明本志令)’을 통해 자신의 뜻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밝혔다.

“만약 국가에 내가 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칭제를 할지, 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칭왕을 할지 모른다. ~ 제군들은 내가 곧 병권을 넘겨주고 국사를 맡아 다스리는 일에서 물러나 무평후국(武平侯國)으로 귀향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째서인가? 진실로 내가 병권을 놓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당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손을 위한 계책을 위해서, 또 내 몸이 패망하는 즉시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것이므로, *허명을 사모하여 실질적인 화를 부르는 것을 옳다고 할 수 없으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

이 글에는 ‘차라리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지 못하게 하겠다!’라는 조조의 입장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인간적이지 않은가? 조조가 주공과 같은 성현처럼 후세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기를 원했었더라면 이때 조정의 의론에 따라 군국의 대권을 반납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조가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그 자신과 일족의 생명과 안전을 결코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조조가 아니더라도 다른 실력자가 결국은 한나라를 패망시키고 황제의 지위를 빼앗았을 것이다. 한나라는 이미 스스로 멸망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한나라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국가안보와 질서유지에 철저히 실패함으로써 백성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에 빠뜨렸다. 조조에게 국가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 것은 이러한 혼란상황을 극복하고자 동분서주한 결과였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조가 어떻게 권력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이유로 조조는 희대의 악당이요 역적이 되었다. 그러나 인민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한실을 중흥하겠다고 해야만 정의의 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궤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역사적 결단의 순간에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가볍게 비난하거나 폄훼할 수는 없는 법이다.

[거짓말 벗겨보기] 조조가 여백사를 죽였다고?

조조는 동탁을 피해 달아나던 도중에 부친의 친구인 여백사의 집에 유숙했다. 조조는 돼지를 잡기 위해 준비하는 소리를 자신을 습격하려는 것으로 오해해 여백사의 가족들을 몰살시켰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조조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길에서 만난 여백사마저도 죽여 버렸다고 한다. 조조의 사악함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거짓말이다. 조조는 여백사를 죽인 일이 없으며, 이 사건도 수배령이 내려져 극도로 예민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풀이

*장수=자신의 숙모를 건드린 조조에게 치욕을 느끼고 대항했으나 가후의 중재로 조조에게 귀순했다. 후에 그의 딸이 조조의 아들 조균과 결혼했다.

 

조조, 인재라면 도덕성은 묻지 마!

군용 소 빼돌린 정비 끝까지 감싸



조조는 사람을 쓸 때, 도덕성은 고려하지 않고 재능만을 보았다. 조조가 건안15년(210년) 봄 발표한 '구현령(求賢令)'에서 ‘형수와 사통하고 뇌물을 받은’ 진평과 같은 인물이라도 재능이 있다면 적극 천거하라고 지시했다. 오직 재능에 의거해 인재를 등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정비(丁斐)라는 사람이다.

정비는 자가 '문후(文侯)'로 원래 조조와 동향 출신이었으며, 일찍부터 그를 따라 종군했다. 조조는 정비가 같은 고향 출신이었고 초창기에 함께 거병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으므로 그에게만은 특별히 너그럽고 친밀하게 대했다. 정비는 재물을 탐해 재산을 늘리는 일에 열심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법을 어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조조는 그때마다 다 용서를 해 주었다. 법령 시행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조조로서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건안 말기의 일이었다. 정비는 동오를 정벌하러 나선 조조를 따라가게 되었다. 이때 정비는 군용 소와 비루먹은 자기 집의 소를 슬쩍 바꿔치기 했다. 이 일로 정비는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이번에도 조조는 정비를 풀어주고 관직을 삭탈하는 것으로 그쳤다. 정비는 백의종군하게 되었는데, 조조가 정비를 보자 물었다.

“문후, 인수는 어데 뒀소?” 정비 역시 조조가 희롱하는 것을 알고 농담으로 대꾸했다.

“떡과 바꿔 먹었습니다.” 조조가 웃으면서 좌우를 돌아보고 말했다.

“동조연 모개가 여러 차례 이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무겁게 죄를 다스리기를 주청했으므로 내가 이 사람이 맑고 어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소. 내가 정비를 쓰는 이유는 비유하자면 인가에 쥐를 잘 잡는 도둑고양이가 있는 것과 같소. 도둑질을 해 비록 약간의 손해가 나더라도 그 덕에 내가 쌓아놓은 곡식자루가 완전히 보전되기 때문이오.”

후일 정비는 조조가 동관에서 마초와 대결할 때, 조조의 목숨을 구해줌으로써 빚을 갚았다. 조조의 군대가 황하 북쪽으로 도하를 시도할 때, 마초가 일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기습에 나섰다. 조조는 후방에서 불과 수백명의 병사만을 거느리고 지휘를 하고 있었으므로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때 조조의 막하에서 전군교위로 있던 정비가 일제히 군용 말과 소를 풀어놓았다. 마초의 병사들이 소와 말을 노획하기 위해 흩어지는 바람에 조조는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영웅의 이면] 조조,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조(A.D 155~220)는 다재다능한 천재였다. 그가 약관의 나이에 인물 감상가로 이름이 높았던 허소로부터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과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조조는 매우 뛰어난 병법가였다. 그가 군대를 운용하는 능력은 *손무와 *오기에 필적했다. 군사 작전에 임했을 때 그는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기가 귀신과 같았고, 늘 기이한 계책으로 적을 기만해 승리를 거두었다. 직접 병서 십만여 자를 지었는데 여러 장수들은 정벌 시 다 이 신서(新書)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조조의 명령을 따른 자는 다 승리를 거두었고 지시에 위반한 자는 패배를 맞보았다. 조조는 나는 새도 활로 쏘아 떨어뜨릴 정도로 무용이 뛰어났다. 한번은 *남피(南皮)에서 사냥을 했는데 하루에 꿩을 63마리나 잡았다. 조조는 거병 초기 양주에서 병력을 얻어 돌아올 때 반란을 일으킨 병사 수십 명을 혼자서 해치운 적도 있었다.

조조는 시문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먼저 그의 시구 하나를 감상해 보자. 악부 형식의 시 ‘호리행(蒿里行, 쑥대밭이 된 마을을 지나다)'의 마지막 구절이다.

백골이 들판에 널려 있고, 천리 안에 닭울음소리 들리지 않는구나(白骨露於野, 千里無?鳴). 살아남은 사람은 백에 하나뿐. 이를 생각하면 단장이 끊어지는 듯하다(生民百遺一, 念之斷人腸).

전란의 상흔이 절절이 느껴지지 않는가. 조조는 한대의 오언고시를 완성한 최고의 시인 중의 하나였다. 그와 조비, 조식 부자를 중심으로 *건안문학(建安文學)이 꽃을 피우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조조는 삼십여 년 간 군대를 지휘하면서도 손수 글쓰기를 그치지 않았다. 낮에는 군사작전을 궁리하고 밤에는 경전을 사색했다. 또한 조조는 음악에도 정통해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시(詩)와 부(賦)를 지었고 이것을 다 관악기와 현악기의 운률로 옮겨 악장으로 만들었다. 이 당시 환담과 채옹이 음악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조조 또한 그들에 못지않았다.

조조는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한나라 후반에 초서가 유행했는데, 안평 사람 최원, 최원의 아들 최식, 홍농 사람 장지, 장지의 동생 장창 등과 더불어 조조는 가장 뛰어난 서예가의 한 사람이었다. 조조는 토목기술에도 일가를 이루어 업성에 궁전을 지을 때 자신의 뜻대로 설계했으며, 정밀하게 참호와 보루를 축조해 그에게 한 번 포위되면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이를 보면 조조는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능력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할지라도 각고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처럼 다방면에서 높은 성취를 이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조는 젊은 시절 학업에는 관심이 없고 임협방탕하게 놀기를 좋아했다. 그랬던 그가 언제 이토록 다양한 능력을 키울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조조의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였다. 초현 시절 조조는 난세의 예감에 몸을 떨며, 시대의 변화와 자신의 행로를 깊이 고민했다. 조조는 세상을 바로잡을 실력을 축적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사색했다.

[거짓말 벗겨보기]

조조의 대표적인 악행 중의 하나가 서주의 도륙이다. 이 사건은 서주목 도겸의 부장 장개가 조조의 부친 조숭 일가를 살해한 데서 시작됐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도겸의 의도는 조숭일가를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도겸은 처음부터 조숭 일가를 납치해 인질로 삼으려 했다. 원술·공손찬 진영에 속했던 도겸은 이미 그전에도 몇 차례 조조의 영역을 침범했던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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