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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마초 성향의 영웅호걸이었다. 그에게는 여자나 가족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큰 야망을 성취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렇다 보니 유비는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만 해도 네 번이나 처자식을 잃어 버렸다. 첫 번째는 유비가 원술과 싸우던 틈을 타 여포가 서주를 빼앗았을 때였다. 이때 여포는 유비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 후일 유비가 여포와 화해하고 돌아오자 여포가 유비의 가족들을 돌려주었다. 두 번째는 다시 소패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를 여포가 고순과 장요를 시켜 무찔렀을 때였다.
유비는 하후돈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대패해 단신으로 달아났고 유비의 가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여포에게 보내졌다. 유비가 처자식을 다시 되찾은 것은 조조와 함께 하비성에서 여포를 사로잡은 후의 일이었다. 세번째는 조조에게 귀순했던 유비가 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차지하자 조조가 유비를 급습했을 때의 일이었다. 이때 유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신으로 도주했다. 유비의 가족들은 하비성에서 관우가 항복할 때 다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관우의 보호 하에 무사히 유비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유비는 당양장판의 싸움에서 다시 가족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조운의 활약으로 감부인과 아두는 구조되었으나 미부인은 진중에서 죽었다.
네 번이나 빼앗기고 되찾고 했던 부인들 중에 감부인과 미부인이 포함됐던 것이 확실하다. 감부인이 유비가 예주목이 되어 소패에 둔병하던 시절에 얻은 첩이었고, 미부인은 유비가 서주목이 되고 나서 미축의 누이동생을 첩실로 맞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도 유비는 여러 차례 가족들을 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감부인전'에 보면 유비가 여러 차례 정실부인들을 잃었다고 기록돼 있다. 아마도 탁현 시절에 결혼했거나 안희현위나 고당현령을 지낼 때 맞이했던 부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녀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유비는 위기상황을 맞이하면 가족들의 안위는 생각지도 않고 늘 혼자서 몸을 빼내어 도망쳤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했을 때 다시 정실부인으로 맞이한 여인이 장군 오일의 여동생 오부인이었다. 오부인은 당시 과부였다. 유언의 아들 유모와 결혼했었으나 유모가 일찍 죽었다. 유비가 허다한 미인과 명문가의 여식들을 두고 굳이 집안의 과부를 맞이한 까닭은 그녀의 관상이 황후가 될 상이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되고픈 시커먼 마음에 유비는 그녀와 결혼했던 것이다.
“국 다 끓이면 내게도 한 그릇 보내줘라.” 호걸답다고? 거의 사이코패스 아니면 보더패스 수준이다. 지극히 에고중심적 인간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유비의 행태도 이에 못지않았다.
이처럼 여자를 하나의 물건쯤으로 여기는 마초적 유비도 쩔쩔매게 만든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손상향이었다. 손상향은 손권의 여동생으로 손견이나 손책을 닮아 성격이 강맹했다. 유비와 정략결혼을 했는데 늘 백여명의 시녀들에게 칼을 차고 시중들게 했다. 유비가 내심 겁이나 늘 조운의 경호 없이는 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유비가 서천 정복을 떠나자 손권은 동맹을 파기할 맘으로 큰 배를 보내 손부인을 돌아오게 했다. 손부인은 유비의 아들 아두를 인질삼아 데려가려고 했다. 제갈량이 조운을 시켜 강을 차단하고 무력으로 되찾아오게 했다. 연의에서는 유비가 이릉대전에 패하자 손상향이 장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영웅 째려보기] 황제가 되고 싶었던 조폭 출신 야심가, 유비
유비(161~223)는 조폭 출신이었다. 그것도 *찬역을 꿈꾸어 온 야심가였다. 그에겐 소싯적부터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어렸을 적 동네 어린아이들과 놀면서 "나는 커서 황제가 타는 수레를 타고야 말겠다"라고 말했다가 숙부로부터 "이 놈이 집안을 망칠 놈이로구나!" 하는 질책을 들은 적도 있었다. 왕조 체제하에서 황제의 친아들이 아닌 자가 황제를 꿈꾸었다면 이는 곧 역심을 품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촉한정통론에 입각한 '삼국지연의'가 유비를 미화했던 까닭에 많은 사람은 유비가 젊은 시절에 돗자리와 짚신을 삼아 생계를 유지하며 모친을 봉양한 효성스런 소년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돗자리와 짚신을 삼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것은 유비의 모친이었지, 그가 아니었다. 유비는 그저 어렸을 적 몇 번 일을 거들었을 정도였다. 유비는 열 다섯 살에 집안사람의 도움으로 노식의 문하로 유학을 떠났다. 소년 가장 노릇할 시간이 없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도 유비는 동네의 건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지 생업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유비는 공손찬의 배경을 업고 탁현 일대의 조폭 두목이 됐다. 그의 주수입원은 군납업자의 뒤를 봐주는 일이었다. 유주 지방의 가장 큰 이권은 선비·오환 등 북방민족에게서 말을 사서 군대와 관청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이권이 크다 보니 상인들 간에 경쟁이 극심했다. 유비가 나서 탁현의 이권사업을 그 지역의 대상인들인 장세평과 소쌍이 독점할 수 있도록 양분해 주었다. 유비는 이들로부터 상납을 받아 조직을 유지했다. 그 시절 가장 두드러진 조직원들이 관우와 장비·간옹 등이었다.
유비는 야망이 컸다. 유비를 일컬어 '효웅(梟雄)'이라 한다. 이는 매우 사납다는 뜻도 있지만 결코 남에게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후발주자였던 유비는 장수나 유훈 등 그보다 더 유력한 군벌들조차 원소나 원술·조조 등 대군벌들에게 무릎 꿇고 들어가는 것이 대세인 상황에서도 끝내 남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다른 군소군벌들과 달리 유비가 끝내 남의 부하가 되지 않았던 까닭도 그의 가슴속에 언젠가 황제가 되고야 말겠다는 원대한 야망이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비가 끝까지 살아남아 비록 한 구석 땅덩이라도 차지해 황제가 된 것은 야망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상당한 수완이 있었다. 첫째 유비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아무 세력이 없었던 그를 관우·장비·조운 등이 끝까지 따라다닌 이유이다. 둘째 유비는 무한수탈을 반복하는 당시의 다른 군벌들과는 달리 관할 구역 내에서 비교적 선정을 펼쳤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민심의 중요성을 알았다. 셋째 유비는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는 초야에 묻혀있던 제갈량을 영입했을 뿐더러 위연·마충·이회·등지 등 실무형 인재들을 발굴해 내었다. 무엇보다도 유비는 스스로를 잘 포장할 줄 아는 홍보의 귀재였다. 조조가 난폭한 행동을 민심을 잃게 되자 유비는 그와 반대로 행동하는 전략을 취한다.
“지금 나에게 물과 불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자는 조조요. 조조가 급하면 나는 느슨해야 하고, 조조가 난폭하면 나는 어질어야 하며, 조조가 속이고 기만하면 나는 충성스럽게 행동해야 하오. 매번 조조와 반대로 처신하였기에 마침내 일을 이룰 수 있었소.”
마지막으로 유비는 지피지기 능력이 탁월했다. 유비는 자신이 재능이 조조에 미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조의 깃발만 보고도 놀란 토끼처럼 달아났다. 조조와 정면대결을 피하고 틈새 전략을 취했기에 그나마 살아남아 한나라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비웃음거리 된 제갈량 결혼
시커먼 추녀면 어때, 집안이 짱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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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공자 다음으로 존경한다는 제갈량은 어떤 결혼을 했을까? 정략결혼이었다. 제갈량은 형주에서 이름난 명사였던 황승언의 딸과 결혼했다.
원래 제갈량과 황승언은 사제지간으로 만났다. 제갈량은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로 이주한 후 형주 지방의 저명한 학자들인 방덕공·사마휘·황승언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연마했다.
황승언에게는 과년한 딸이 하나 있었다. 재능과 학문이 뛰어났지만 인물이 형편없었다. 머리카락은 노랗고 얼굴은 시커먼 추녀였다. 반면에 제갈량은 일등 신랑감이었다. 제갈량은 신장이 팔척에 얼굴이 백옥같이 희었다. 한마디로 말해 키크고 잘생긴 '훈남'이었다. 게다가 집안 좋겠다, 수재로 이름 났겠다, 무엇 하나 빠진 구석이 없었다. 황승언은 일찌감치 제갈량을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다. 황승언은 제갈량과의 친분이 깊어지자 슬며시 의중을 떠보았다.
"남자는 장성하면 결혼을 해야 하고 여자도 다 컸으면 시집을 가야 하는 법이라네. 듣기로는 자네가 배필감을 찾는다 하던데 나에게는 못난 딸이 하나 있네. 얼굴은 검고 머리카락은 노랗지만 재주만은 가히 자네와 어울릴 만하다네."
제갈량은 신부감의 얼굴도 보지 않고 즉석에서 혼인을 승낙했다. 그는 황승언의 사위가 됨으로써 형주정권의 핵심세력과 친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황승언은 형주 지방 최고의 명문가인 채풍의 사위였으며, 형주목 유표와는 동서지간이었다. 당시 형주의 군권을 쥐고 있던 채풍의 아들 채모와도 처남매부지간인 셈이었다. 제갈량은 황승언의 못생긴 딸과 결혼함으로써 형주정권의 핵심 인맥에 편입될 수 있었다.
제갈량이 계속해서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결혼 덕분이었다. 유표에 의해 예장 태수로 임명됐던 숙부 제갈현이 죽고 나자 제갈량은 몸소 밭을 갈고 농사를 지으며 가족들을 부양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말이 주경야독이었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생계조차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제갈량은 결혼을 통해 형주의 명문가들과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의 후원을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세상사람들은 제갈량과 황씨 부인의 결혼을 비웃었다. 사람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회자됐다고 한다.
"아내를 취하려거든 공명처럼만 하지 말게나. 기껏해야 황씨 영감 추녀 딸이나 얻게 될 터이니."
제갈량은 이 결혼으로 '실속'을 챙길 수 있었다. 기록은 없지만 제갈량과 황씨 부인 사이의 소생이 제갈첨 한 명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속궁합이 잘 맞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두 사람의 사이는 동지적 관계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황씨 부인은 지혜롭고 학문적 실력이 출중해 제갈량에게 훌륭한 조언자가 됐다. 제갈량이 집안 살림 걱정 없이 청렴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황씨 부인의 내조 덕이다.
[미화된 영웅] 제갈량, 라이벌 숙청의 칼 휘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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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는 갈씨(葛氏)보고 하라 하고, 과인은 제사나 지내겠소."
유선 역시 이러한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제갈량의 사후 사당을 설치하는 문제에서 유독 인색을 떨었던 까닭이다. 유선은 어쩔 수 없어 제갈량의 권력독점을 방관했을 뿐이었다. 제갈량이 국가의 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은 단순히 재능이 부족했던 유선이 국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갈량이 치열한 권력투쟁을 통해 경쟁자들을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은 권력욕이 매우 강했다. 그는 함께 *탁고를 받았던 이엄을 숙청했고, 팽양과 요립 등 잠재적인 경쟁상대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집요한 공작의 산물이었다. 자신이 제어하기 어려웠던 관우나 유봉이 죽도록 내버려 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권력에 대한 독점욕이 강했던 제갈량이 군대와 국가의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그 결과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비 역시 이러한 상황을 심히 걱정했다.
사실은 저 유명한 탁고(託孤) 사건도 이러한 유비의 걱정과 염려 속에서 발생했다.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를 포함해 후세의 학자들은 탁고 사건을 ‘진실로 가장 모범적인 군신간의 관계를 보여준 것’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탁고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면 전혀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이 임박한 유비가 제갈량을 백제성으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재능은 조비보다 열배나 나으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고, 종국에는 천하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후사를 이을 자식이 도울만하다면 도와주시오, 만약 그가 재능이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내 자리를 취해도 좋소!"
이 말을 들은 제갈량은 온몸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이마를 땅에 찧어 피를 흘려가며 유선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것이 서로 두 마음을 품지 않고 국가와 자손의 장래를 전적으로 맡긴 장면으로 이해되는가?
애당초 유비는 자신의 사후 제갈량에게 권력을 독점시킬 생각이 없었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필적한 만한 재능을 지닌 인물인 유파에게 권력을 분점시켜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하고자 했다. 불행히도 유파는 유비의 사망 직전에 죽었다. 유비는 어쩔 수 없이 이엄에게 그 역할을 맡겼으나 그는 재능이 부족했다. 이 상황에서 유비는 제갈량에게 마지막으로 어린 군주에 대한 충성의 다짐을 받아둘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탁고의 본질이다.
이엄은 역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고 결국은 책을 잡혀 제갈량에게 숙청당했다. 이로써 촉나라 조정에서는 아무도 제갈량의 권력독점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게 되었다. 유비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결과였다.
제갈량이 유선을 내치고 황위를 빼앗지 않은 것은 그의 충성심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제갈량이 정권을 찬탈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당시의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삼국시대에 촉의 위치는 매우 취약했다. 위와 오와 같은 강대한 적국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함부로 찬탈을 시도했다간 내우외환이 겹쳐 조기에 패망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만약 제갈량이 북벌에 성공해 천하를 제패했다면 어찌 됐을까? 그가 끝까지 한나라의 충실한 신하로 남을 수 있었을까? 모든 권력과 신망이 제갈량에게 집중되게 된 상황에서 모든 권력을 황실에 되돌려주고 물러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세 사람들에게 만고의 충신으로 칭송되고 있는 그가 '삼국지연의'에서 간교한 역적이요 찬탈자로 묘사되고 있는 조조나 사마의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거짓말 벗겨보기]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동남풍을 빌었기에 주유와 황충이 화공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호풍환우할 수 있는 신적 인물로 묘사되기까지 한다. 전혀 사실과 다르다. 적벽대전의 승리는 전적으로 주유의 공이었다. 제갈량은 유비와 손권의 동맹을 체결하는 외교적 역할 이외에는 한 일이 없었다. 이때까지도 제갈량은 군사적인 일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풀이]
*탁고=고아의 장래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함.
*호풍환우=요술로 바람과 비를 불러일으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