鈍銘千字

고사성어_22

醉月 2009. 10. 9. 08:45

  諱疾忌醫(휘질기의)
  諱(꺼릴 휘) 疾(병 질) 忌(꺼릴 기) 醫(치료할 의)


  송나라 주돈이(周敦 )의 주자통서(周子通書)에 나오는 이야기. 춘추시대, 채(蔡)나라에 편작(扁鵲)이라는 유명한 의원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채나라 환공(桓公)에게  대왕께서는 병이 나셨는데, 그 병은 피부에 있습니다. 지금 치료하시지 않으면 심해질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채환공은 병이 없다면서 치료를 거절했다. 열흘 후, 편작은 채환공을 알현하고 그에게 병이 살 속까지 퍼져서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심각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환공이 이를 무시하며 몹시 불쾌해했다.
  다시 열흘이 지나자, 편작은 채환공을 찾아가  병이 이미 내장에 이르렀으니,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게 됩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환공은 여전히 이를 무시하며 화를 냈다. 열흘 후, 편작은 환공을 찾아가 병이 이미 골수에 이르러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닷새 후, 채환공은 온몸에 고통을 느끼며 결국 죽고 말았다.    諱疾忌醫 란  자신의 결점을 감추고 고치려 하지 않음 을 비유한 말이다.  


  任人唯賢(임인유현)
  任(맡길 임) 人(사람 인) 唯(오직 유) 賢(어질 현)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하(外儲說左下)편의 이야기. 춘추시기, 제(齊)나라에 내란이 발생하여 양공(襄公)이 피살되었다. 이듬해 양공의 두 동생인 공자(公子) 규(糾)와 공자 소백(小白)은 서둘러 제나라로 돌아와 왕위를 다퉜다. 제나라 환공(桓公)으로 즉위한 소백은 공자 규를 죽이고, 그의 측근인 관중을 잡아 보내도록 하였다.
  압송되던 관중은 제나라의 변방에 이르자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변방을 지키는 관원에게 음식을 좀 부탁했다. 이 관원은 제나라 환공이 관중을 중용할 것으로 생각하여, 매우 정중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그는 관중에게  만약 제나라에 도착하여 중용되면, 저에게 어떤 보답을 하시겠오? 라고 물었다. 관중의 대답은 이러했다.  만약 당신의 말대로 된다면, 나는 현명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임용할 것이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에게 어떠한 보답을 할 것 같소?  그 관원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의 어려운 상황은 잘못 고른 인물들 때문이다.  任人唯賢 이란  오직 재능과 인품만을 보고 사람을 임용함 을 뜻한다.
  
  挺身而出(정신이출)
  挺(빼어날 정) 身(몸 신) 而(말 이을 이) 出(날 출)
 
  당(唐)나라의 개국황제인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에게는 건성(建成), 세민(世民), 원길(元吉) 등 세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인 건성은 태자(太子)에 옹립되고 세민은 진왕(秦王)에, 원길은 제왕(齊王)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세민은 부친을 도와 당나라 건국에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의 위엄과 명망은 세 아들들 가운데에서 가장 높았다.
  태자 건성은 제위계승을 세민에게 빼앗기게 될까 두려워 원길과 연합하여 그을 죽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음모를 알아차린 세민은 먼저 공격에 나서 건성과 원길을 죽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건성과 이원길의 부하들이 이세민을 공격하여, 현무문을 지키고 있던 경군홍(敬君弘)의 병력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경군홍은 놀라운 용맹성을 발휘하여, 빗발같은 화살 속을 뚫고 반격에 나서 결국 국면을 진정시켰다. 훗날, 당태종으로 즉위한 이세민은 경군홍의 임전무퇴 정신을 치하하였다.
  지금의 상황을 걱정하면서도, 일부에서는 생필품 사재기에 열심이다. 하지만 난국을 돌파하는 길은 국민적 협조와 공직자들의 책임 완수뿐이다.  挺身而出 이란  위급할 때 과감히 나서 모든 책임을 다함 을 뜻한다.
  
  大器晩成(대기만성)
  大(큰 대) 器(그릇 기) 晩(늦을 만) 成(이룰 성)
 
  삼국지 위서(魏書) 최염(崔琰)전의 이야기. 동한(東漢) 말년, 원소(袁紹)의 측근에 최염이라는 식객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술을 좋아하여, 23세에야 논어 등을 공부하였다. 그는 처음 원소의 부하로 일했으나, 후에는 조조(曹操)의 휘하에서 상서(尙書)를 지내며 태자 옹립문제를 해결하여 공정한 관리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최염에게는 최림(崔林)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그는 젊었을 적에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명망도 없었으므로,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그를 경시하였다. 그러나 최염은 항상 그를 존중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는 큰 그릇은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此所謂大器晩成者也). 그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과연 최림은 훗날 위(魏) 문제(文帝)의 휘하에서 사공(司空)을 지냈다.
 

 

  城下之盟(성하지맹)
  城(성 성) 下(아래 하) 之(-의 지) 盟(맹세할 맹)
 
  춘추좌전(春秋左傳) 환공(桓公) 12년조의 이야기. 춘추시기, 초(楚)나라 군대가 교(絞)나라를 침공하여 교나라 도읍의 남대문에 이르렀다. 교나라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초나라 군대는 몇 차례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초나라의 장군 굴하(屈瑕)는 무왕(武王)에게 한 가지 계책을 제시하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이튿날, 초나라는 수십명의 병사들을 나뭇꾼으로 변장시켜 성곽 주변의 산에서 나무를 하는 척하게 하였다. 교나라의 군인들은 그들을 즉시 잡아와, 득의만만해 하였다. 이튿날, 초나라의 같은 작전에 속아 넘어간 교나라 군사들이 그들을 잡으러 성문을 열고 나오자, 미리 매복해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교나라 도성을 포위하며, 총공격을 해들어왔다. 교나라는 순식간에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도성 아래에서 굴욕적인 맹약을 맺고 초나라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城下之盟 이란  압력에 의한 굴욕적인 조약이나 협약 을 비유한 말이다. 
  
  一飯千金(일반천금)
  一(한 일) 飯(밥 반) 千(일천 천) 金(쇠 금)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열전의 이야기. 한신(韓新)이 무명의 서민이었을 때, 집안이 가난한데다가 별 재간도 없어서 항상 남에게 얹혀 먹고 사는 신세였다. 이렇다보니 그를 싫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일찍이 남창(南昌)의 한 마을의 촌장 집에서 자주 밥을 얻어 먹었는데, 여러 달씩이나 신세를 진적도 있었다. 한신을 귀찮게 여기던 촌장의 아내는 아침 밥을 지어 몰래 먹어 치우곤 하였다.
  어느 날, 한신은 회수(淮水)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마침 물가에서 무명을 표백하고 있던 노파들을 보았다. 그들 중 한 노파가 굶주린 한신의 모습을 보고 수십 일동안 그에게 밥을 먹여 주었다. 이에 한신은 크게 감동하여  언젠가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한신은 초왕(楚王)에 봉하여진 뒤, 고향 회음에 와서 자신에게 밥을 주었던 노파를 찾아 천금을 주고, 촌장에게는 일백전의 돈을 주었다.
  작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만이 큰 보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한다.  一飯千金 이란 한 끼니 밥에 천금이라는 뜻으로  은혜에 후하게 보답함 을 비유한 말이다.
  
  一鳴驚人(일명경인)
  一(한 일) 鳴(울 명) 驚(놀랄 경) 人(사람 인)
 
  사기 골계(滑稽)열전의 이야기. 전국시대,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국정에 무관심하게 되자, 나라는 혼란하게 되고 제후들의 침략 또한 빈번하여졌다. 하지만 이를 간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순우곤(淳于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익살이 좋았다. 그는 위왕이 수수께끼를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 나라에 큰 새가 있는데, 그 새는 왕궁에 살면서 3년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대왕께서는 이 새가 무슨 새인지를 알고 계시는지요? 
  위왕은  그 새는 날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한 번 날았다하면 하늘 끝까지 날아 오를 것이다. 또 울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한번 울었다 하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위왕은 깨달은 바가 있어, 생활 태도를 바꾸고 국정을 챙기고 나섰다. 그는 외치(外治)에도 적극적으로 임하여 침략당한 영토를 되찾았다. 이후, 위왕은 36년 동안 제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一鳴驚人 이란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한번 시작하면 큰 일을 하여 사람을 놀램 을 비유한 말이다. 
  
  一髮千鈞(일발천균)
  一(한 일) 髮(터럭 발) 千(일천 천) 鈞(서른 근 균)
 
  한서(漢書) 매승(枚乘)전의 이야기. 서한(西漢) 시기, 매승이라는 유명한 문인이 있었는데, 그는 사부(辭賦)에 능했다. 그는 오왕(吳王) 유비(劉 )의 휘하에서 낭중(朗中)을 지내며, 오왕이 모반하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하나의 비유를 들어 오왕에게 모반을 포기하도록 권고하였다.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삼만근 무게의 물건이 위는 그 끝을 모를 높은 곳에 매달려 있고, 아랫부분은 바닥이 없는 깊은 못에 드리워져 있다고 합시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상황이 극히 위태롭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만약 윗부분이 끊긴다면 다시 이을 수 없으며, 아랫부분이 깊은 못으로 떨어진다면 다시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왕께서 모반하시려는 것은 바로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매다린 것처럼 위험한 일입니다.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자, 매승은 오나라를 떠나 양(梁)나라로 가서 양효왕의 문객이 되었다. 그후 오왕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치솟는 환율과 곤두박질 치는 주가. 무너지는 기업과 금융기관. 이는 한 올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우리 경제의 실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들이다.  一髮千鈞 이란  극도의 위험에 처해 있음 을 비유한 말이다.
  
  開源節流(개원절류)
  開(열 개) 源(근원 원) 節(절제할 절) 流(흐를 류)
 
  춘추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학자 순황(荀 )은 순자(荀子)를 저술하였다. 그는 부국(富國)편에서 국가의 강약과 빈부에 대해 설명하였다. 국가가 부강해지고자 한다면, 조정은 백성들을 사랑해야 하며,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백성들은 적극적으로 생산에 임하며, 그 축적된 것이 증가함에 따라 국고(國庫)가 충실해지고, 국가는 곧 부강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조정에서 생산은 돌보지 않고 무거운 세금만 부과하며 물자를 아끼지 않는다면, 백성들과 나라가 빈곤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특히 그는 이에 대한 군주의 의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온 백성이 천시(天時)의 화기(和氣)를 얻고 사업에 차서를 얻으니 이는 재화의 본원이요, 차등을 두어 거둬들인 국고의 저장물은 재화의 지류(支流)이다. 그러므로 명철한 군주는 반드시 신중하게 화기를 기르고 그 지류를 절제하며, 재화의 원천을 더욱 개발하여야 한다(節其流, 開其源).   가계(家計)도 나라도 모두 힘들다. 가라앉은 분위기다. 더 일하고 덜 쓰는 수밖에 없다.  開源節流 란  재원을 늘리고 지출을 줄임 을 뜻한다.
  
  日暮途遠(일모도원)
  日(해 일) 暮(저물 모) 途(길 도) 遠(멀 원)
 
  사기 오자서(伍子胥) 열전의 이야기. 전국시기, 오사(伍奢)와 비무기(費無忌)는 모두 초평왕(楚平王)의 태자 건(建)의 스승이었는데, 비무기는 계략에 능하고 음흉한 사람이었다. 그는 태자 건의 혼인문제로 태자가 자기에게 보복할까 두려워, 태자에게 충성하는 오사와 오상 등을 죽였다.  오사의 아들인 오자서는 오(吳)나라로 도망하여 복수를 결심했다. 그는 오왕 합려(闔閭)에게 제의하여 초나라의 도성인 영( )을 공략했다. 이때, 초나라는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이 왕위에 있었는데, 그는 공격을 피해 도망해 버렸다. 소왕을 놓친 오자서는 대신 초평왕의 무덤에서 그의 시체를 끌어내어 3백번이나 매질을 하였다.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는 이를 너무 가혹한 짓이라고 그를 꾸짖었다.

오자서는 그에게 말했다.  해는 저물고 갈길은 아직 멀고, 나는 초조한 나머지 도리에 따를 수만은 없었서 그만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였다네.    日暮途遠 이란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할 일은 아직 많음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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