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 그의 고향은 한 권의 시집이 되었다
▲ 정지용의 시 ‘향수’를 연상케 하는 충북 옥천군 청산면의 너른 들과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물길 보청천. 보로 가둔 물 가운데 솟아 있는 독산 위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자에는 이곳의 풍광이 늘 봄과 같다 해서 상춘정(常春亭)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
▲ 옥천 구읍에서 만난 상점의 간판들. 낡고 쇠락한 자그마한 동네지만, 우편취급국과 잡화점, 방앗간과 미용실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정지용의 시 한 구절을 걸어 놓았다. 간판의 시구절을 읽는 맛이 각별하다. 오른쪽 위는 구읍 한복판에 ㅁ자형의 고택을 민박으로 내주고 있는 춘추민속관.
나른한 봄날에 시(詩)와 함께 떠나는 감성여행. 충북 옥천으로 가는 여정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 길에는 시가 있고, 개천이 휘돌아가는 고향을 닮은 마을이 있고, 외딴 마을의 고즈넉한 정취가 있고, 황홀하게 불붙은 최고의 매화꽃이 있습니다. 마치 봄날 꿈결 같은, 아지랑이 같은 그런 여정입니다. 그 여정이 얼마나 낭만적이던지 어쩌면 어찔어찔 멀미가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쇠락할 대로 쇠락한 옥천 구읍. 거기서부터 길은 시작됩니다. 한 세기 전쯤 옥천 구읍에서 시인 정지용이 태어났습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으로 시작하는 시 ‘향수’의 시인 정지용. 한동안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사라진 이름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거론할 수밖에 없을 때도 ‘정O용’으로 등장했을 만큼 그의 이름 석자는 불온이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6·25전쟁 당시 실종돼 월북설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1988년 그의 시편은 우리에게 돌아왔고,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가 태어난 옥천 구읍의 작은 마을은 ‘한 권의 시집’이 돼 가고 있습니다. 그 마을 상점들이 근래 상호를 서정적인 간판으로 바꿔 달았습니다. 간판에는 너나없이 정지용의 시 한 구절을 얹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가정식 백반을 내는 정지뜰식당 간판에는 ‘불 피어오르듯 하는 술 한숨에 키여도 아아 배고파라’로 시작하는 정지용의 시 ‘저녁해ㅅ살’의 한 구절을 걸었습니다. 정미소에는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듯이 우(위)로!’란 시 ‘나무’의 구절이 나붙었습니다.
구읍에는 동네 노인들의 사랑방이 된 우편취급국에도, 안 팔리는 물건들이 먼지를 얹고 있는 작은 점방에도, 복지회관의 오래된 이발소에도, 마을에서 하나밖에 없는 노래방에도 하나같이 정지용의 시가 걸려 있었습니다. 구읍에서 ‘옛이야기 지줄대던’ 개울을 건너고 고색창연한 한옥과 낡은 블록담 사이를 기웃거리며 간판을 읽는 재미가 제법 각별하답니다.
여기다가 금강에 물길을 보태는 보청천을 따라가는 여정과 호숫가 외딴 마을인 진걸마을로 가는 여정까지 보탭니다. 이 두 곳으로 말하자면 ‘풍경이 다 시가 되는 곳’입니다. 보청천은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 그려낸 고향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곳이고, 진걸마을은 가는 길도 그렇지만,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을의 정취가 그야말로 서정적인 곳입니다.
감성여행의 마침표는 옥천군 이원면의 오래된 농원에서 찍습니다. 그곳에는 평생 매화만을 키워 오며 타지의 시인들에게 늙은 매화를 건네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그가 칠십평생 키웠던 매화 중에서 첫손으로 꼽는 매화나무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그가 자랑스럽게 보여준 청매화의 향이 어찌나 짙고 아름답던지요. 그 자신도 “이렇게 아름답게 꽃을 피운 모습은 처음”이라고 했으니 이쯤이면 말 다한 것 아니겠습니까.
쇠락할 대로 쇠락한 옥천 구읍. 거기서부터 길은 시작됩니다. 한 세기 전쯤 옥천 구읍에서 시인 정지용이 태어났습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으로 시작하는 시 ‘향수’의 시인 정지용. 한동안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사라진 이름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거론할 수밖에 없을 때도 ‘정O용’으로 등장했을 만큼 그의 이름 석자는 불온이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6·25전쟁 당시 실종돼 월북설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1988년 그의 시편은 우리에게 돌아왔고,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가 태어난 옥천 구읍의 작은 마을은 ‘한 권의 시집’이 돼 가고 있습니다. 그 마을 상점들이 근래 상호를 서정적인 간판으로 바꿔 달았습니다. 간판에는 너나없이 정지용의 시 한 구절을 얹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가정식 백반을 내는 정지뜰식당 간판에는 ‘불 피어오르듯 하는 술 한숨에 키여도 아아 배고파라’로 시작하는 정지용의 시 ‘저녁해ㅅ살’의 한 구절을 걸었습니다. 정미소에는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듯이 우(위)로!’란 시 ‘나무’의 구절이 나붙었습니다.
구읍에는 동네 노인들의 사랑방이 된 우편취급국에도, 안 팔리는 물건들이 먼지를 얹고 있는 작은 점방에도, 복지회관의 오래된 이발소에도, 마을에서 하나밖에 없는 노래방에도 하나같이 정지용의 시가 걸려 있었습니다. 구읍에서 ‘옛이야기 지줄대던’ 개울을 건너고 고색창연한 한옥과 낡은 블록담 사이를 기웃거리며 간판을 읽는 재미가 제법 각별하답니다.
여기다가 금강에 물길을 보태는 보청천을 따라가는 여정과 호숫가 외딴 마을인 진걸마을로 가는 여정까지 보탭니다. 이 두 곳으로 말하자면 ‘풍경이 다 시가 되는 곳’입니다. 보청천은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 그려낸 고향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곳이고, 진걸마을은 가는 길도 그렇지만,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을의 정취가 그야말로 서정적인 곳입니다.
감성여행의 마침표는 옥천군 이원면의 오래된 농원에서 찍습니다. 그곳에는 평생 매화만을 키워 오며 타지의 시인들에게 늙은 매화를 건네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그가 칠십평생 키웠던 매화 중에서 첫손으로 꼽는 매화나무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그가 자랑스럽게 보여준 청매화의 향이 어찌나 짙고 아름답던지요. 그 자신도 “이렇게 아름답게 꽃을 피운 모습은 처음”이라고 했으니 이쯤이면 말 다한 것 아니겠습니까.
▲ 대청호 호반의 서정적인 풍광을 따라 진걸마을로 가는 길에서 만난 풍경. 호수와 숲길, 그리고 양지바른 쪽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들이 모두 한 편의 시가 되는 곳이다. |
▲ 평생 ‘옥매원’을 운영하며 매화를 길러온 곽종옥씨가 ‘지금까지 기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매화’라며 꺼내 보여준 분재 청매화.
# 봄날, 오래된 거리를 걸으며 시를 만난다
옥천의 구읍에 당도한 것은 마침 점심 나절이었다. 구읍사거리에 서서 한참을 망설인다. ‘불 피어오르듯 하는 술 한숨에 키여도 아아 배고파라’란 정지용의 시 ‘저녁해ㅅ살’의 한 구절이 간판에 적혀 있는 정지뜰식당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더딘 봄날 반은 기울어 물방아 시름 없이 돌아간다’는 시 ‘홍춘’을 걸어 놓은 문정식당으로 갈 것인가. 그도 아니면 간판에 ‘산모루 돌아가는 차, 목이 쉬여 이밤사 말고 비가 오시랴나’란 시를 써넣은 산모루식당으로 가 볼까나.
충북 옥천의 낡고 오래된 마을 이름은 그대로 ‘구읍(舊邑)’이다. 죽향리와 상·하계리, 문정리와 교동리 이렇게 다섯 마을을 모아서 구읍이라 이른다. 조선시대 600년 동안 관아가 있던 중심지. 경부선 철로가 놓이면서 남쪽에 옥천역이 생기자 급속도로 쇠락하고 만 곳. 그러나 그 덕에 고스란히 옛 읍내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구읍에는 한때 고래등 같은 한옥들이 즐비했고, 소달구지가 몰려들던 옥천 최대의 정미소가 있었다. 식민지시대 초대 주재소장의 집이 여기 있었고, 중국인 왕서방이 하던 비단가게도 그곳에 있었다. 쇠락한 읍에는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구읍을 대표하는 것은 단연 시인 정지용이다. 그는 구읍 실개천변의 청석다리 너머 초가집에서 나고 자랐다. 구읍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부심에 가득차 정지용을 말했다. 그런 이유 때문일 터다. 공공예술프로젝트 사업이 진행되면서 정지용 생가 주변의 구읍 상점들이 너나없이 정지용의 시를 적은 간판으로 바꿔 달겠다고 나섰던 것은. 더러는 아예 시구절에 맞춰 가게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그러니 구읍사거리에 서 보면 도처가 시(詩)다. 간판만 읽으며 다닌대도 봄날의 서정에 흠뻑 빠질 듯하다.
이를테면 구읍우편취급국 간판에 걸린 ‘모초롬 만에 날러 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여 가여운 글자마다 먼 황해가 님설거리나니…’란 ‘오월 소식’의 시구절을 읽다 보면 문득 그곳에 들어 편지를 부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우편취급국은 100여년 전부터 약방과 담배가게를 하면서 우표를 팔던 곳. 지금도 우편물을 접수하는데 하루 10통 남짓의 손글씨 편지가 이곳 취급국에서 부쳐진단다.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는 시 ‘그의 반’이 적혀 있는 사랑노래연습장에서는 상호 그대로 사랑노래 한 곡조쯤 뽑아 보고 싶기도 하다. 황태바다식당은 ‘내음새 조흔 바람 하나 찾소’라며 되레 길을 묻는다. 구읍정미소 벽에 걸린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듯이 우로!’란 구호 같은 시나, 잡화점인 혜선상회 벽에 적힌 ‘어리둥절 어리석은 척 옛 사람처럼 사람 좋게 웃어 좀 보시오’란 시구절 앞에서는 가슴이 훈훈해진다.
시를 따라가는 여정은 구읍에서 옛 37번 국도를 따라 장계관광지까지 이어진다. 장계관광지는 20년 전쯤 대청랜드란 이름으로 들어선 놀이시설이지만, 놀이시설은 철거 중이고 대신 정지용을 테마로 한 공원 ‘멋진 신세계’가 들어섰다. 모더니스트였던 정지용에서 착안해 ‘모단(모던)’이란 이름을 쓰는 광장과 가게, 갤러리를 비롯해 통창으로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프란츠카페 등이 들어서 있다.
# 고향의 정취 따라 그윽하게 흐르는 물길
정지용이라면 대번에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으로 시작되는 ‘향수’를 떠올리게 된다. 가곡으로 널리 불려서도 그렇지만, 시가 섬세하게 되살리는 아련한 고향의 정취 때문이리라. 시인이 살던 때는 그랬을지 몰라도 사실 쇠락한 구읍에서는 그런 풍경을 찾기 힘들다. 청석교 아래 실개천은 있지만 고향의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너른 들과 굽어 흐르는 물길이 있는, 시 ‘향수’ 속의 고향의 모습을 보려 한다면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을 따라가는 여정을 권한다. 보청천이란 이름은 충북 보은의 속리산 자락에서 발원해 옥천군 청산면으로 흘러내린다 해서 보은에서 ‘보(保)’자를, 청산에서 ‘청(靑)’자를 따서 지은 것. 보청천을 이곳 주민들은 ‘칠보단장’이라 부른다. ‘칠보단장(七寶丹粧)’의 본뜻은 갖가지 보석으로 몸을 치장한다는 의미이지만, 주민들이 말하는 칠보단장은 ‘일곱개 보(칠보·七洑)’와 ‘한 곳의 장(單場)’이다. 물길을 따라 애실보, 범딩이보, 새들보 등 7개의 보가 있고, 청산에 유일한 5일장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보청천의 길은 부드럽고 푸근하며, 그 언저리의 마을들은 고향의 정취로 가득하다. 천변 어디서나 봄볕 환한 마을로 들어서면 함석지붕과 슬레이트를 덧대 지은 농가 돌담을 두르고 있는 풍경을 만나게 된다.
보청천을 가장 아름답게 지켜볼 수 있는 곳은 바로 청성면사무소 부근이다. 산계리보가 물을 가둬 제법 큰 강처럼 몸을 불린 보청천에 독산이 솟아 있다. 높이 20m에 불과함에도 ‘산’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그 자태의 범상함 때문이리라. 그 정상에는 정자 ‘상춘정(常春亭)’이 세워져 있다. 근대에 지어진 것이라 내력은 짧지만 정자에 얹은 이름이 ‘언제나 봄 풍경’이니 요즘 같은 봄 여행에 운치를 더해 준다.
옥천에는 또 ‘한 편의 시’와 같은 호반의 풍경이 숨어 있는 오지마을도 있다. 군북면 석호리 진걸마을. 대청호 깊숙한 산 깊고 물 깊은 마을이다. 대청호 담수로 수몰되기 전에는 50호 남짓의 제법 번듯한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12가구의 주민들이 고기를 잡거나 호반의 텃밭을 가꿔 먹고 산다.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과 명월의 사랑이야기가 잠겨 있는 청풍정과 명월암을 지나 호수를 끼고 진걸마을로 드는 길은 굽이치며 눈부신 풍광을 선사한다.
# 칠순 농부가 평생 가꾼 매화에서 文香을 맡다
먼저 시 한 편. “충청도 강청산골 / 옥매원이란 매화밭에 가서 / 조선종 단엽 설백매를 / 서울 시인 몇이 만지다가 / 마음이 가려워 와서 / 몇 마리씩 다투어 낚아 왔다 / 나도 / 주인 곽(郭)씨가 마당 한 귀퉁이 흙 속에 / 깊이 묻어 감춰 둔 못생긴 한 늙은 놈 골라 / 등에 지고 돌아오는데 / 주인이 그렇게 애석해하는 꼴을 보면 /묵을수록 귀한 것도 세상엔 더러 있기는 있는 모양…”(임보의 시 ‘매화를 등에 지고’ 중에서)
시인이 말한 매화농원인 ‘옥매원(玉梅園)’이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에 있다. 봄이면 문인이나 화가들이 꽃을 보러 찾아가는 곳이다. 시에 등장하는 곽종옥(70)씨도 여전히 농원에서 매화를 가꾸고 있다. 곽씨의 부친이 매화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1942년부터. 그 대를 이었으니 평생 매화를 길러온 셈이다.
옥매원은 이달 말쯤이 되면 8200㎡(2500여평)에 심어진 5000여주의 매화나무가 일제히 꽃을 틔워내 암향(暗香) 그득한 꽃밭이 된다. 하지만 옥매원에서 섬진강변의 매화농원과 같은 정취를 기대했다면 필시 실망하게 된다. 옥매원의 매화는 ‘보기 좋게’ 심어진 것이 아닌 탓이다. 이랑에는 농기구가 뒹굴고, 비닐하우스로 어지러운 농원은 황량한 느낌마저 든다.
그럼에도 옥매원을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매화 때문이다. 농원에는 수많은 매화들이 있다. 섬진강변의 매화는 매실 수확을 위해 복숭아나무나 살구나무에 접을 붙여 기르지만, 옥매원에는 토종매화의 씨앗을 심어 가꾼 ‘야매(野梅)’가 있다. 성글게 꽃을 피워 화려함은 덜할지언정, 한 송이 한 송이 꽃의 고결한 맛은 더하다. 온통 가지를 뒤틀며 자라는 용매(龍梅)의 어린 묘목도 길러내고 있다. 농원에는 매화의 종류가 많기도 하다. 백매, 홍매, 청매, 만첩매, 비매…. 한 나무에 두 가지 색깔의 꽃을 피우는 매화도 있다.
그곳에서 시인처럼 매화나무 한 그루를 사가지고 돌아와도 좋겠다. 어른 키만 한 매화나무 한 그루를 3만원이면 살 수 있다.
옥매원의 곽씨가 한평생 길러낸 매화 중에서 첫손으로 꼽는 백매화가 있다. 농원 마당에 심어진 60년생 매화와 함께 길러낸 것이라는데, 꽃받침이 초록색인 분재 청매화다. 그 꽃이 지금 만개했다. 가지를 뒤튼 품새하며, 고혹적인 꽃을 보노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곽씨도 “평생을 기른 매화지만, 올해만큼 아름답게 꽃을 피운 것은 처음”이라고 했으니 말 다했다. 분재매화는 곽씨가 농원 인근에 문을 연 음식점 ‘논두렁밭두렁’에 보관해 놓고 있다. 곽씨가 “혼자 보기 아깝다”고 애석해했으니 언제든 청하면 반갑게 보여줄 터다.
청매화는 곧 지고 말 것이라 아쉽지만 대신 소나무로 꾸며 놓은 식당의 너른 정원에는 곽씨가 두 번째로 꼽은 홍매화 두 그루가 있다. 튼실하게 항아리형으로 자란 매화나무 중 하나는 단엽홍매, 다른 하나는 만첩홍매다. 이달 말쯤 두 꽃이 한꺼번에 피어날 때 그곳을 찾는다면 그윽한 향기와 함께 정원이 온통 선홍빛으로 물든 풍경을 볼 수 있겠다.
가는 길
옥천을 찾아가는 것은 간명하다. 경부고속도로 옥천나들목을 내려서자마자 바로 군청이 있는 중심가다. 군청 앞에서 문정삼거리까지 가서 좌회전, 곧이어 나오는 문정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구읍이다. 구읍을 돌아본 뒤 37번 국도 옆으로 나란히 나 있는 옛 37번 국도를 따라가면 ‘멋진 신세계’가 있는 장계관광지에 가닿는다. 장계관광지까지 가다가 국원리쯤에서 석호리 방면으로 좌회전해 그림 같은 호반길을 따라가면 오지인 진걸마을에 당도하게 된다. 이원면의 옥매원(043-732-2271)은 먼저 이원역을 찾은 뒤 소방서를 물어 소방서 옆으로 이어진 소로를 따라 끝까지 들어가면 된다.
묵을 곳·먹을거리
구읍의 한복판에 오래된 고택 두 채를 사들여 식당 겸 민박을 치는 ‘춘추민속관’(043-733-4007)을 추천한다. 한 채는 독립운동가 김규흥이 살던 집으로 1760년에 지어진 고택이고, 다른 한 채는 구한말의 문신 오상규가 살던 곳이다. 숙박요금은 6만원부터. 군북면 대청호 주변과 금강변인 청성면 합금리 일대에 민박집들이 모여 있다. 읍내에는 ‘옥천관광호텔’(043-731-2435)이 있다. 평일 숙박요금이 4만원이다. 구읍에는 으리으리한 고택을 개조해 음식점으로 차린 집들이 여럿 있다. 한정식을 내오는 ‘아리랑’(043-731-4430)이 대표적이다. 한정식 1인 2만원. ‘마당 넓은 집’(043-733-6350)도 한옥을 식당으로 이용하는 곳이다. 비빔밥을 낸다. 40여년 내력의 ‘할매묵집’(043-732-1853)을 빼놓을 수 없다. 잘게 채 썬 묵에 갖은 양념을 넣어 내놓고 멸치육수와 동치미를 따로 낸다.
옥천의 구읍에 당도한 것은 마침 점심 나절이었다. 구읍사거리에 서서 한참을 망설인다. ‘불 피어오르듯 하는 술 한숨에 키여도 아아 배고파라’란 정지용의 시 ‘저녁해ㅅ살’의 한 구절이 간판에 적혀 있는 정지뜰식당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더딘 봄날 반은 기울어 물방아 시름 없이 돌아간다’는 시 ‘홍춘’을 걸어 놓은 문정식당으로 갈 것인가. 그도 아니면 간판에 ‘산모루 돌아가는 차, 목이 쉬여 이밤사 말고 비가 오시랴나’란 시를 써넣은 산모루식당으로 가 볼까나.
충북 옥천의 낡고 오래된 마을 이름은 그대로 ‘구읍(舊邑)’이다. 죽향리와 상·하계리, 문정리와 교동리 이렇게 다섯 마을을 모아서 구읍이라 이른다. 조선시대 600년 동안 관아가 있던 중심지. 경부선 철로가 놓이면서 남쪽에 옥천역이 생기자 급속도로 쇠락하고 만 곳. 그러나 그 덕에 고스란히 옛 읍내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구읍에는 한때 고래등 같은 한옥들이 즐비했고, 소달구지가 몰려들던 옥천 최대의 정미소가 있었다. 식민지시대 초대 주재소장의 집이 여기 있었고, 중국인 왕서방이 하던 비단가게도 그곳에 있었다. 쇠락한 읍에는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구읍을 대표하는 것은 단연 시인 정지용이다. 그는 구읍 실개천변의 청석다리 너머 초가집에서 나고 자랐다. 구읍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부심에 가득차 정지용을 말했다. 그런 이유 때문일 터다. 공공예술프로젝트 사업이 진행되면서 정지용 생가 주변의 구읍 상점들이 너나없이 정지용의 시를 적은 간판으로 바꿔 달겠다고 나섰던 것은. 더러는 아예 시구절에 맞춰 가게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그러니 구읍사거리에 서 보면 도처가 시(詩)다. 간판만 읽으며 다닌대도 봄날의 서정에 흠뻑 빠질 듯하다.
이를테면 구읍우편취급국 간판에 걸린 ‘모초롬 만에 날러 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여 가여운 글자마다 먼 황해가 님설거리나니…’란 ‘오월 소식’의 시구절을 읽다 보면 문득 그곳에 들어 편지를 부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우편취급국은 100여년 전부터 약방과 담배가게를 하면서 우표를 팔던 곳. 지금도 우편물을 접수하는데 하루 10통 남짓의 손글씨 편지가 이곳 취급국에서 부쳐진단다.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는 시 ‘그의 반’이 적혀 있는 사랑노래연습장에서는 상호 그대로 사랑노래 한 곡조쯤 뽑아 보고 싶기도 하다. 황태바다식당은 ‘내음새 조흔 바람 하나 찾소’라며 되레 길을 묻는다. 구읍정미소 벽에 걸린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듯이 우로!’란 구호 같은 시나, 잡화점인 혜선상회 벽에 적힌 ‘어리둥절 어리석은 척 옛 사람처럼 사람 좋게 웃어 좀 보시오’란 시구절 앞에서는 가슴이 훈훈해진다.
시를 따라가는 여정은 구읍에서 옛 37번 국도를 따라 장계관광지까지 이어진다. 장계관광지는 20년 전쯤 대청랜드란 이름으로 들어선 놀이시설이지만, 놀이시설은 철거 중이고 대신 정지용을 테마로 한 공원 ‘멋진 신세계’가 들어섰다. 모더니스트였던 정지용에서 착안해 ‘모단(모던)’이란 이름을 쓰는 광장과 가게, 갤러리를 비롯해 통창으로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프란츠카페 등이 들어서 있다.
# 고향의 정취 따라 그윽하게 흐르는 물길
정지용이라면 대번에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으로 시작되는 ‘향수’를 떠올리게 된다. 가곡으로 널리 불려서도 그렇지만, 시가 섬세하게 되살리는 아련한 고향의 정취 때문이리라. 시인이 살던 때는 그랬을지 몰라도 사실 쇠락한 구읍에서는 그런 풍경을 찾기 힘들다. 청석교 아래 실개천은 있지만 고향의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너른 들과 굽어 흐르는 물길이 있는, 시 ‘향수’ 속의 고향의 모습을 보려 한다면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을 따라가는 여정을 권한다. 보청천이란 이름은 충북 보은의 속리산 자락에서 발원해 옥천군 청산면으로 흘러내린다 해서 보은에서 ‘보(保)’자를, 청산에서 ‘청(靑)’자를 따서 지은 것. 보청천을 이곳 주민들은 ‘칠보단장’이라 부른다. ‘칠보단장(七寶丹粧)’의 본뜻은 갖가지 보석으로 몸을 치장한다는 의미이지만, 주민들이 말하는 칠보단장은 ‘일곱개 보(칠보·七洑)’와 ‘한 곳의 장(單場)’이다. 물길을 따라 애실보, 범딩이보, 새들보 등 7개의 보가 있고, 청산에 유일한 5일장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보청천의 길은 부드럽고 푸근하며, 그 언저리의 마을들은 고향의 정취로 가득하다. 천변 어디서나 봄볕 환한 마을로 들어서면 함석지붕과 슬레이트를 덧대 지은 농가 돌담을 두르고 있는 풍경을 만나게 된다.
보청천을 가장 아름답게 지켜볼 수 있는 곳은 바로 청성면사무소 부근이다. 산계리보가 물을 가둬 제법 큰 강처럼 몸을 불린 보청천에 독산이 솟아 있다. 높이 20m에 불과함에도 ‘산’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그 자태의 범상함 때문이리라. 그 정상에는 정자 ‘상춘정(常春亭)’이 세워져 있다. 근대에 지어진 것이라 내력은 짧지만 정자에 얹은 이름이 ‘언제나 봄 풍경’이니 요즘 같은 봄 여행에 운치를 더해 준다.
옥천에는 또 ‘한 편의 시’와 같은 호반의 풍경이 숨어 있는 오지마을도 있다. 군북면 석호리 진걸마을. 대청호 깊숙한 산 깊고 물 깊은 마을이다. 대청호 담수로 수몰되기 전에는 50호 남짓의 제법 번듯한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12가구의 주민들이 고기를 잡거나 호반의 텃밭을 가꿔 먹고 산다.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과 명월의 사랑이야기가 잠겨 있는 청풍정과 명월암을 지나 호수를 끼고 진걸마을로 드는 길은 굽이치며 눈부신 풍광을 선사한다.
# 칠순 농부가 평생 가꾼 매화에서 文香을 맡다
먼저 시 한 편. “충청도 강청산골 / 옥매원이란 매화밭에 가서 / 조선종 단엽 설백매를 / 서울 시인 몇이 만지다가 / 마음이 가려워 와서 / 몇 마리씩 다투어 낚아 왔다 / 나도 / 주인 곽(郭)씨가 마당 한 귀퉁이 흙 속에 / 깊이 묻어 감춰 둔 못생긴 한 늙은 놈 골라 / 등에 지고 돌아오는데 / 주인이 그렇게 애석해하는 꼴을 보면 /묵을수록 귀한 것도 세상엔 더러 있기는 있는 모양…”(임보의 시 ‘매화를 등에 지고’ 중에서)
시인이 말한 매화농원인 ‘옥매원(玉梅園)’이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에 있다. 봄이면 문인이나 화가들이 꽃을 보러 찾아가는 곳이다. 시에 등장하는 곽종옥(70)씨도 여전히 농원에서 매화를 가꾸고 있다. 곽씨의 부친이 매화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1942년부터. 그 대를 이었으니 평생 매화를 길러온 셈이다.
옥매원은 이달 말쯤이 되면 8200㎡(2500여평)에 심어진 5000여주의 매화나무가 일제히 꽃을 틔워내 암향(暗香) 그득한 꽃밭이 된다. 하지만 옥매원에서 섬진강변의 매화농원과 같은 정취를 기대했다면 필시 실망하게 된다. 옥매원의 매화는 ‘보기 좋게’ 심어진 것이 아닌 탓이다. 이랑에는 농기구가 뒹굴고, 비닐하우스로 어지러운 농원은 황량한 느낌마저 든다.
그럼에도 옥매원을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매화 때문이다. 농원에는 수많은 매화들이 있다. 섬진강변의 매화는 매실 수확을 위해 복숭아나무나 살구나무에 접을 붙여 기르지만, 옥매원에는 토종매화의 씨앗을 심어 가꾼 ‘야매(野梅)’가 있다. 성글게 꽃을 피워 화려함은 덜할지언정, 한 송이 한 송이 꽃의 고결한 맛은 더하다. 온통 가지를 뒤틀며 자라는 용매(龍梅)의 어린 묘목도 길러내고 있다. 농원에는 매화의 종류가 많기도 하다. 백매, 홍매, 청매, 만첩매, 비매…. 한 나무에 두 가지 색깔의 꽃을 피우는 매화도 있다.
그곳에서 시인처럼 매화나무 한 그루를 사가지고 돌아와도 좋겠다. 어른 키만 한 매화나무 한 그루를 3만원이면 살 수 있다.
옥매원의 곽씨가 한평생 길러낸 매화 중에서 첫손으로 꼽는 백매화가 있다. 농원 마당에 심어진 60년생 매화와 함께 길러낸 것이라는데, 꽃받침이 초록색인 분재 청매화다. 그 꽃이 지금 만개했다. 가지를 뒤튼 품새하며, 고혹적인 꽃을 보노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곽씨도 “평생을 기른 매화지만, 올해만큼 아름답게 꽃을 피운 것은 처음”이라고 했으니 말 다했다. 분재매화는 곽씨가 농원 인근에 문을 연 음식점 ‘논두렁밭두렁’에 보관해 놓고 있다. 곽씨가 “혼자 보기 아깝다”고 애석해했으니 언제든 청하면 반갑게 보여줄 터다.
청매화는 곧 지고 말 것이라 아쉽지만 대신 소나무로 꾸며 놓은 식당의 너른 정원에는 곽씨가 두 번째로 꼽은 홍매화 두 그루가 있다. 튼실하게 항아리형으로 자란 매화나무 중 하나는 단엽홍매, 다른 하나는 만첩홍매다. 이달 말쯤 두 꽃이 한꺼번에 피어날 때 그곳을 찾는다면 그윽한 향기와 함께 정원이 온통 선홍빛으로 물든 풍경을 볼 수 있겠다.
가는 길
옥천을 찾아가는 것은 간명하다. 경부고속도로 옥천나들목을 내려서자마자 바로 군청이 있는 중심가다. 군청 앞에서 문정삼거리까지 가서 좌회전, 곧이어 나오는 문정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구읍이다. 구읍을 돌아본 뒤 37번 국도 옆으로 나란히 나 있는 옛 37번 국도를 따라가면 ‘멋진 신세계’가 있는 장계관광지에 가닿는다. 장계관광지까지 가다가 국원리쯤에서 석호리 방면으로 좌회전해 그림 같은 호반길을 따라가면 오지인 진걸마을에 당도하게 된다. 이원면의 옥매원(043-732-2271)은 먼저 이원역을 찾은 뒤 소방서를 물어 소방서 옆으로 이어진 소로를 따라 끝까지 들어가면 된다.
묵을 곳·먹을거리
구읍의 한복판에 오래된 고택 두 채를 사들여 식당 겸 민박을 치는 ‘춘추민속관’(043-733-4007)을 추천한다. 한 채는 독립운동가 김규흥이 살던 집으로 1760년에 지어진 고택이고, 다른 한 채는 구한말의 문신 오상규가 살던 곳이다. 숙박요금은 6만원부터. 군북면 대청호 주변과 금강변인 청성면 합금리 일대에 민박집들이 모여 있다. 읍내에는 ‘옥천관광호텔’(043-731-2435)이 있다. 평일 숙박요금이 4만원이다. 구읍에는 으리으리한 고택을 개조해 음식점으로 차린 집들이 여럿 있다. 한정식을 내오는 ‘아리랑’(043-731-4430)이 대표적이다. 한정식 1인 2만원. ‘마당 넓은 집’(043-733-6350)도 한옥을 식당으로 이용하는 곳이다. 비빔밥을 낸다. 40여년 내력의 ‘할매묵집’(043-732-1853)을 빼놓을 수 없다. 잘게 채 썬 묵에 갖은 양념을 넣어 내놓고 멸치육수와 동치미를 따로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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