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리에 대한 욕심은 없다. 내게 산은 아무 곳에나 앉으면 편해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온 산이 내 것이어서 그렇다. 그런데 산에 가면 내 것이라고 소유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길이나 숲 너덜 능선 구릉 등 그래서 산에는 내 것들이 참 많다.
아침 산행을 가는 구봉산에는 내 나무가 있다. 8부 능선에 큰 바위 하나가 있고 그 바위틈에 어렵게 뿌리내린 벚나무가 있다. 산에 오르면 나무에게 다가가 허리에 손을 대고 입 안에 있는 말을 건넨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내 나무에게 답을 하지 않아도 물은 어떻게 마시는지 꽃은 언제 피우며 지는 것인지 버찌는 언제 열리는지 묻기만 한다.
바스콘셀로스의 성장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어린 제제는 라임오렌지 나무에게 밍기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대화를 서로 나눈다. 그러나 내 나무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냥 벚나무일 뿐이다. 동심에서 멀어진 나는 제제와는 달리 일방적인 사랑을 보낸다. 그 나무는 나보다 더 오래 살아 내가 가고 난 뒤에는 내 소유가 아니게 된다. 새들의 것이며 햇빛과 구름 또한 바람의 소유이기도 하다. 그 산에 갈 수 있는 동안만 내 나무일뿐이다.
누구도 걸어간 흔적이 없는 숲에서
언덕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다가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물푸레나무 허리를 짚었다
그때 손을 통해 전해오는 나무의 생기
순간 나도 모르게 뜨거워졌다
떨리는 내 손이 가닿은 성감대
나무도 움찔 몸을 움츠리는 것이다
산에 있는 숱한 나무들 중에서 내 나무는 나와 한 번쯤 인연을 맺은 것으로 구봉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리산에도 있고 금정산 천성산 천태산 가지산 고헌산 문복산 옹강산 등 내가 가는 산마다 마음에 정해 둔 나무가 있다. 수종도 벚나무만이 아니다. 소나무 물푸레나무 대팻집나무 합다리나무 주목 구상나무 산목련 싸리나무 등등 크고 작은 나무들이 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뜸한 순간 사라져버린 나무도 있지만 몇 년 만에 만나는 나무는 훌쩍 커버려서 몰라보는 경우도 있다.
내 것이라고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은 나무뿐이 아니다. 내내 무거운 침묵으로 앉아 있는 바위도 있고 해마다 피는 풀꽃도 있다. 나무나 바위는 이사를 가지 않아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풀꽃들은 해마다 피는 것들이 달라 딱히 한 포기에 국한하지 않고 일정 지역에 피는 꽃들을 마음에 담아 둔다.
금낭화가 무리지어 피는 골짜기, 얼레지가 군락을 이루는 능선, 원추리가 떼를 이루는 평원, 참나리가 자태를 뽐내고 있는 안부, 허리 굽은 할미꽃이 군락으로 피어있는 기슭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들은 어떤 이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서슴없이 양보하고 말 것이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정자나무는 마을 사람들 공동 소유다. 현재는 살고 있는 사람들 것이지만 그 전에는 그 마을에 살았던 조상들 것이었고, 미래에는 마을에 들어가 살 사람들 것이다. 진정 내 소유란 없다.
누구에게나 갖고 싶은 욕망은 있다. 소유욕 때문에 멸종 위기를 맞는 풍란이나 몸에 좋다는 소문 때문에 수난을 겪는 겨우살이를 보면 안타깝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뿌리째 뽑아 가는 소나무나 진달래, 철쭉을 꺾어가는 행위는 집착에 빠진 일그러진 소유욕이다.
어떤 것이라도 일시적으로 가질 수 있지만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다. 자기만족에서 얻는 행복이야말로 자신이 소유할 수 있을 뿐이라고 내 나무는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