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강영환 시인의 "시가 있는 산"_03

醉月 2011. 3. 14. 06:13
<11> 구봉산에서 내 나무를 만나다
소나무·철쭉 등을 뿌리째 뽑아가는 것은 일그러진 소유욕

    구봉산 중턱에 외로이 서 있는 벚나무. 바로 내가 아껴가며 두고두고 만나고 있는 '내 나무'다.

 

산에 가는 사람들은 나만의 자리를 정해 두고 언제나 이용하는 분들이 많다. 정했다기보다는 산에 가서 앉아 있으면 편안하다든가 꼭 그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든가 하는 자리다.

나는 자리에 대한 욕심은 없다. 내게 산은 아무 곳에나 앉으면 편해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온 산이 내 것이어서 그렇다. 그런데 산에 가면 내 것이라고 소유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길이나 숲 너덜 능선 구릉 등 그래서 산에는 내 것들이 참 많다.

아침 산행을 가는 구봉산에는 내 나무가 있다. 8부 능선에 큰 바위 하나가 있고 그 바위틈에 어렵게 뿌리내린 벚나무가 있다. 산에 오르면 나무에게 다가가 허리에 손을 대고 입 안에 있는 말을 건넨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내 나무에게 답을 하지 않아도 물은 어떻게 마시는지 꽃은 언제 피우며 지는 것인지 버찌는 언제 열리는지 묻기만 한다.

바스콘셀로스의 성장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어린 제제는 라임오렌지 나무에게 밍기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대화를 서로 나눈다. 그러나 내 나무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냥 벚나무일 뿐이다. 동심에서 멀어진 나는 제제와는 달리 일방적인 사랑을 보낸다. 그 나무는 나보다 더 오래 살아 내가 가고 난 뒤에는 내 소유가 아니게 된다. 새들의 것이며 햇빛과 구름 또한 바람의 소유이기도 하다. 그 산에 갈 수 있는 동안만 내 나무일뿐이다.


누구도 걸어간 흔적이 없는 숲에서
언덕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다가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물푸레나무 허리를 짚었다
그때 손을 통해 전해오는 나무의 생기
순간 나도 모르게 뜨거워졌다
떨리는 내 손이 가닿은 성감대
나무도 움찔 몸을 움츠리는 것이다

산에 있는 숱한 나무들 중에서 내 나무는 나와 한 번쯤 인연을 맺은 것으로 구봉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리산에도 있고 금정산 천성산 천태산 가지산 고헌산 문복산 옹강산 등 내가 가는 산마다 마음에 정해 둔 나무가 있다. 수종도 벚나무만이 아니다. 소나무 물푸레나무 대팻집나무 합다리나무 주목 구상나무 산목련 싸리나무 등등 크고 작은 나무들이 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뜸한 순간 사라져버린 나무도 있지만 몇 년 만에 만나는 나무는 훌쩍 커버려서 몰라보는 경우도 있다.

내 것이라고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은 나무뿐이 아니다. 내내 무거운 침묵으로 앉아 있는 바위도 있고 해마다 피는 풀꽃도 있다. 나무나 바위는 이사를 가지 않아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풀꽃들은 해마다 피는 것들이 달라 딱히 한 포기에 국한하지 않고 일정 지역에 피는 꽃들을 마음에 담아 둔다.

금낭화가 무리지어 피는 골짜기, 얼레지가 군락을 이루는 능선, 원추리가 떼를 이루는 평원, 참나리가 자태를 뽐내고 있는 안부, 허리 굽은 할미꽃이 군락으로 피어있는 기슭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들은 어떤 이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서슴없이 양보하고 말 것이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정자나무는 마을 사람들 공동 소유다. 현재는 살고 있는 사람들 것이지만 그 전에는 그 마을에 살았던 조상들 것이었고, 미래에는 마을에 들어가 살 사람들 것이다. 진정 내 소유란 없다.

누구에게나 갖고 싶은 욕망은 있다. 소유욕 때문에 멸종 위기를 맞는 풍란이나 몸에 좋다는 소문 때문에 수난을 겪는 겨우살이를 보면 안타깝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뿌리째 뽑아 가는 소나무나 진달래, 철쭉을 꺾어가는 행위는 집착에 빠진 일그러진 소유욕이다.

어떤 것이라도 일시적으로 가질 수 있지만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다. 자기만족에서 얻는 행복이야말로 자신이 소유할 수 있을 뿐이라고 내 나무는 말해 준다.

 

 

<12> 억산에서 소리를 줍다
산꾼들, 동물들 수태 방해 않으려 '야호' 소리 자제

    억산에 오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필자. 자연의 소리가 몸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석골사 계곡은 초입부터 물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골짜기를 따라 억산을 향해 간다. 활엽수 연초록 새 잎이 제법 넓어진 한적한 산길, 신록에 푹 빠져 걷고 있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난해 진 낙엽들을 밟고 다람쥐 한 마리가 잽싸게 나무 뒤로 숨는다. 인기척에 놀란 모양이다. 몸에 줄무늬가 있는 다람쥐는 맛있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주인을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다람쥐는 이곳에 살고 나는 이 산을 잠시 다녀가는 손님일 뿐이다. 다람쥐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려야 하기에 숨 죽여 걸었다.

산을 오염시키는 것은 비단 등산객들이 버린 쓰레기뿐이 아니다. 등산객들이 내지르는 소리도 산을 오염 시키는 것 중에 하나다. 서로를 불러대는 소리가 적을수록 산의 평화를 지켜 줄 수 있다. 산꾼들은 '야호'라고 외치는 걸 자제한다. 산에 사는 짐승들이 놀라서 수태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자연은 보호 대상이 아니라 상호 존중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지배하지 않고 함께하는 자연으로 인식되어 이젠 산 문화도 많이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산에 들면 많은 소리들이 있다. 의식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다. 자연 속에 몰입하면 들려오는 소리들. 물소리, 새소리, 나뭇잎에 바람 지나는 소리, 벌레 기어가는 소리, 그 숱한 소리들이 있다. 산에 들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도 고향같은 자연의 소리 때문일 것이다. 산을 찾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자동차 소음이나 도시의 온갖 소음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가.


꼭 이유가 있어야만 산에 들까
물소리에 지워지는 돌아갈 길
이 산 저 산 빛이 꿈틀거렸다
숨어살기 좋은 산그늘에 들어
물소리 따라 귀를 세운 선바위도
눈 들어 지켜 선 계곡에서
젖은 몸을 이유도 없이 말리고 있었다

수술 후 회복기에 있는 환자들에게 새 소리를 이용한 자연의 소리를 들려줌으로써 회복을 촉진시키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들었다. 꾀꼬리소리, 뻐꾸기 소리, 학과 오리의 소리, 개구리 소리, 소 울음 등을 조합하여 환자나 치료받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어 심리적 안정을 꾀함으로써 통증을 완화하고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프로그램이다.

산에는 듣고 싶은 소리만 있는 건 아니다. 산에서 듣는 라디오 소리는 소음이다. 라디오를 켜들고 다니는 사람에 쫓겨서 산을 내려 온 적이 있다. 무슨 토론 프로그램이었는지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소리가 높은 볼륨을 타고 들려왔다. 평소 익히 듣던 소리인데도 산에서 듣는 그 소리는 전혀 딴판으로 청각을 자극했다. 산의 소리를 듣기 위해 산에 들었는데 속세의 소음이 들려온다면 그것은 오죽 스트레스를 가져올까.

이런 일은 비단 근교 산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정 산행 때도 단체 산행 때도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라디오나 녹음기를 든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이어폰을 이용하여 혼자서 듣는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을 텐데 자신이 듣는 프로그램을 타인이 알 수 있도록 크게 틀고 다니는 것이 문제다.

나도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은 못 한다. 나이 들면 친구도 떠나고 가족들이 멀어지면 라디오를 벗하여 산을 오르게 될 것이 아닌가. 외로움은 결국 눈치 보지않고 내 듣기 좋은 유행가를 틀고 내 즐거우니까 듣는 모두가 즐거울 것이라고 단정할 것 아닌가. 제발 그러기 전에 산에 들어 마음으로 듣는 자연의 소리를 듬뿍 주워 담아 가야겠다. 몸 가득히 욕심이 하늘을 찌른다.

 

 

<13> 운제산에서 냄새를 피우다
인간의 욕심과 위선으로 산의 향기 빼앗지 말아야

    운제산 가는 등산로 입구에 있는 오어사 앞마당 호수. 맑고 푸른 물빛에서 청정한 마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래전 일이었다. 겨울 눈 쌓인 노고단을 오르는데 독한 구린내가 났다. 앞 서 가는 일행 중에서 한 분이 방귀를 뀐 모양이다. 냄새는 방한복에 갇혀 있다가 조금씩 유출 되었다. 비켜갈 수도 없는 외길에서 그 보이지 않는 독한 냄새는 한동안 길을 따라 앞서 갔고 뒤따르는 이에게는 고통이었다.

글이 되지 않을 때 나는 배낭을 꾸려 훌쩍 산에 든다. 산에 들면 포근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산이 가진 향기 때문이다. 산에는 산 특유의 냄새가 있다. 풋풋한 초록 냄새에 묻혀 오는 꽃향기도 있고 새순을 막 펼치고 있는 나무 냄새도 있다. 지열과 함께 솟아오르는 흙냄새도 빼놓을 수 없는 향기다. 그것들이 화엄을 이루는 산은 엄마처럼 포근함을 준다.

그러나 산에는 아름다운 냄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으슥한 큰 바위 곁이나 낮은 수풀 우거진 모퉁이를 돌 때쯤이면 물씬 악취가 풍겨져 나온다. 휴지가 흩어져 있고 나동그라진 배설물에서 파리가 끓고 냄새가 난다. 오어사가 지닌 전설처럼 물고기를 잡아먹고 난 뒤에 배설한 변이 물고기로 되살아온다면 모를까 속인이 배설한 그것은 구린내를 풍길 수밖에 없다. 산에서 야영을 할 때 필수 장비 중 하나가 야전삽이다. 천막을 치고 배수를 위해 골을 파는 작업을 할 때도 필요하지만 용변 후 뒤처리를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국립공원 내에서 야영을 금지하는 것도 그런 훼손과 오염에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비박을 하는 경우인데 대피소가 없는 곳에서의 비박은 산을 오염 시키는 주범중 하나다.

사람에게서도 악취가 날 때가 있다. 먼 길 걸어온 산꾼에게서 나는 땀내는 악취가 아니다. 시큼한 땀내는 험한 역정을 이겨 온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아름다운 향기다. 사람이 풍기고 다니는 악취는 욕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지워지지 않는 악성 종양과 같다. 선거 때만 되면 정치인들이 산에 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마음을 비우기 위해 산으로 든다지만 실은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서다. 산에 드는 행위를 자신이 산처럼 맑고 아름답다는 것으로 보여 주기 위해 벌이는 허위 행각이기에 얼굴 찡그리게 하는 역한 냄새가 난다. 그에 비하면 배설물에서 풍기는 냄새는 악취에 들지 않는다.


남들은 마음 비우러 산에 든다고들 하지만
나는 조금씩 써버려 닳아 못쓰게 된
야성을 채우러 간다
날카롭게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마음 속 찌꺼기를 내어 산을 오염 시키고
더 채울 것이 없을 때까지
욕심 덩어리를 눌러 다지고 다져서


산에 들면 비우라고들 한다. 속세에서 가득 채운 욕망을 훌훌 털어버리고 욕심 없이 자연에 순응하라는 의미다. 산에 들면 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거기에서 욕심 부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려 드는 정치인의 산행에서 땀 냄새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산행이 솔향, 낙엽향, 풀꽃향에 취해 온갖 시름을 잊고자하는 이들에게서 산의 향기를 빼앗아 가는 일은 없어야겠다.

산은 피난처이기도 하고 도피처 또는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 불순한 목적을 지니고 산에 들어도 산은 거부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소에는 산을 멀리하던 사람들로 어느 날 갑자기 산을 들먹이며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내가 글이 되지 않을 때 산에 드는 내 몸에서 악취가 나는 것처럼 욕심을 버리지 못한 이들이 묻혀온 청정하지 못한 냄새가 산을 오염 시킨다. 산에서 뀌는 방귀는 차라리 신선한 유머에 속한다. 맑고 맑은 산에서 욕심은 부질없는 것이다.

 

<14> 관룡산에서 등불을 켜다
구석진 곳 어둠 밝히는 등불 하나 걸고 싶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 창녕 관룡산에 갔다.

 

초입의 관룡사에는 등이 걸려 있어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산에서 하산은 오후 네 시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 그때부터 하산을 시작하라는 뜻이다.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지기 때문이다. 특히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 큰 산이라면 그 시점을 더 빨리 잡아야 한다. 산에서 해는 갑자기 떨어지고 어둠은 번개처럼 발 앞에 찾아와 길을 막아선다. 별빛이나 달빛을 믿지 마라. 그것들이 밝은 밤이라도 계곡에 들면 숲에 가려 도무지 길을 분간할 수가 없게 된다. 산행 준비물에는 반드시 랜턴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든가 산속에서 하룻밤을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일몰 후 산속 어둠에는 변화가 전혀 없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옛 일이다. 지리산 세석에서 한신골로 하산길을 잡고 오후 네 시 조금 넘어 출발했다. 평소 하산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출발하였는데 아차, 일행 중 한 분이 무릎이 고장 나 버렸다. 겨우 한신폭포 입구를 지났을 뿐인데 갑자기 어둠이 밀려와 발등을 덮어 버렸고 눈에 불을 켜고 걸어도 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시 불빛에 길들여진 눈에는 어둠이 너무 깊었다. 이런 속도로는 백무동까지 세 시간 이상 걸릴 터인데 세 사람에게 랜턴은 하나밖에 없었다. 좁은 길이었고 그리고 한 사람은 부상이었다. 아랫도리를 더듬거리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혼자 헤드 랜턴을 켜고 하산하는 분이 있었다. 아이고 부처님, 그분이 비쳐 주는 불빛을 밟고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분은 어두운 길을 밝혀 준 부처님 같은 존재였다.

길은 어둠을 만들지 않는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혀
저물녘에 가슴앓이를 하지만
해마다 쌓인 깊이가 두터워져도
누구도 장막을 걷어내지 않는다
어두워져도 길은 불을 켜지 않는다
걷는 사람의 눈이 더 익숙해지게

부처님 오신 날에 창녕에 있는 관룡산에 갔다. 산을 오르는 초입은 관룡사 앞을 지난다. 명산에는 늘 절집이 있고 절집이 있는 곳은 꼭 명산이게 마련이다. 절집은 산 기운이 가장 많이 모이는 터에 들어서 주변 풍경과도 잘 어울린다. 산이 있기에 절집이 대접 받을 수 있고 절집이 있기에 명산이 더욱 빛이 난다. 산행 기점인 절에서 행장도 챙기고 물도 준비하고 최초의 쉼터로서 절 마당은 산객에게 고맙기 이를 데 없다.

관룡사 절 마당 가득히 걸린 등을 바람이 흔들었다. 등은 흔들려도 세상을 밝히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세상 어두운 곳을 밝히고자 등불을 켠다. 종교가 다른 이 나라 대통령 이름으로도 하나 걸려 있었다. 그 분이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아니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자신의 등불 하나가 세상을 밝히는 일에 쓰인다면 그다지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도 가져본다. 등불에 값하는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걸지는 않았겠지만 약한 자를 위해 구석진 곳에서 어둠을 밝히는 그런 등불이기를 희망하면서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이 등불이다. 밝은 곳에 거는 등불은 별 소용이 없다. 그런데 크고 우아한 연등일수록 죄다 부처님 가까이에 걸려있었다. 대통령 등도 그랬다. 밝은 대웅전 정중앙 처마 끝에 걸려 등불 역할 대신 장식품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등들은 외진 곳이나 구석진 곳에 걸려 있었다. 빈자일등이라 했던가. 소중한 가족의 이름을 달고 걸려있는 등은 만리 밖으로 어둠을 쫓아낼 것이다. 거리에 나 앉은 수많은 촛불처럼 미명의 거리를 밝힐 것이다. 누가 감히 이름 없는 등이라 부르는가. 소중한 기원으로 더욱 아름다운 등은 어둠이 깊어갈수록 더 밝은 등불이 될 것이다. 나도 구석진 자리에 등 하나 걸고 싶다. 그곳이 비록 어두운 산길이거나 내 마음 속이 될지라도.

 

 

<15> 노고단에서 종주를 버리다
정비된 산길·가벼워진 장비…지리산 종주 품위가 떨어졌다

    노고단이 품은 시원한 수해(樹海)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필자. 지리산이 열렸다.

 

산군이라면 제일 반가운 소식이다. 우리나라에 여러 산이 있지만 매력적인 산 중의 하나가 바로 지리산이다. 가도 가도 다하지 못한 마음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늘 아쉽고 목이 마른 것을 그나마 충족시켜 주는 산행이라면 지리산 주능을 종주하는 일일게다. 지리산 종주는 산행하는 이들에게는 벼슬하는 일이었고 가슴에 달고 다니는 훈장 같은 것이었다. "너 지리산 종주 몇 번 해봤어?" 산군들 사이에는 이런 질문은 흔하게 이뤄진다.

최근에 지리산 종주산행을 한 것은 2년 전이다. 대피소에서 잠을 자면서 비교적 편하게 산행을 했지만 썩 그렇게 흡족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너무 쉽고 편했기 때문에도 그럴 것이다. 산은 편하기 위해서 들지는 않는다. 험로를 지나왔을 때의 그 성취감이 편한 육신에서 오는 안락한 기분이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편하려면 집에나 있지 왜 산을 오르는가.

국립공원에는 쓸데없는 시설을 많이 해 놓아 도리어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등산로에 설치해 놓은 나무 계단들이 그것이다. 자연 훼손을 방지하고 복원하며 산행의 안전을 위해서라지만 계단이 설치된 아래쪽에는 햇빛이 들지 않기 때문에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 걷는데도 엄청스럽게 불편하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설비면 족하지 않을까. 특히 화개재에서 삼도봉 올라가는 곳이나 칠선봉 쪽에서 영신봉 오르막은 계단으로 산길을 도배해 놓았다. 계단 수를 헤아리며 오르는 재미도 있다지만 그래서 시간은 많이 단축되고 있지만 산행의 묘미는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용두산 공원 오르는 계단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체력도 떨어지고 용기도 없어서 섣불리 종주계획을 세우는 일은 못하지만 종주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은 옛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나이 들면 입만 살아서 과거를 파먹고 산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이젠 지나온 길이 그리워진다
발끝을 가로막던 못생긴 돌부리도 그립고
살갗 긁히던 삭정이도 새 느낌으로 온다
수없이 갈라져 숲으로 숨어가던 길들도
내 걸어온 길을 빛나게 했다

종주 2박 3일 배낭을 꾸리다보면 부피도 크거니와 무게도 장난이 아니다. 25~30kg은 쉽게 나간다. 예전에 입었던 옷은 기능성이 없어서 부피와 무게가 더 나갔다. 장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코펠이나 버너도 그렇고 텐트등이나 건전지, 침낭이나 깔개는 부피도 크고 무거웠다. 종주를 할 때는 3인 또는 5인이 가장 경제적이다. 그것은 짐을 분산시키기에 적합한 인원이라는 거다.

요즘은 종주하기가 쉬워져서 시간 단축도 많이 되었다. 등산로가 잘 정비된 측면도 없지 않지만 장비면에서 훨씬 진보되었기 때문이다. 무게와 부피가 많이 줄었고 싸들고 다니는 부식도 많이 줄어 이동이 편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지리산 종주는 품위가 많이 떨어졌다. 부피와 무게와 거리가 줄었고 난코스가 많이 사라져 주능선 대부분이 편안한 산보 코스로 변했다. 산길은 산길다워야 하는데 점차 도시의 길을 닮아간다는데 문제가 있다. 편한 것을 찾고 쉬운 것을 추구하다보니 간혹 무박 종주의 이야기가 들려 올 때면 서글픈 마음도 든다. 산행이 아니라 산보가 된 것이다. 그럴 양이면 운동장 트랙을 천 번쯤 돌고 말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