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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권의 고향보따리_02

醉月 2011. 1. 22. 09:43

햇살 먹고 자란 지주식 김

해남, 완도, 진도, 땅끝으로 가는 여정은 여전히 감회가 새롭다. 지난 20년간 유기농일을 하면서 수없이 다녀온 길이다. 영암 월출산은 나그네 가는 길을 더디게 한다. 첫 시야에 들어와 "야! 멋지네 사진 찍어야지!" 마음먹는 순간부터 발걸음이 무뎌진다. 여기서 봐도 멋있고 저곳에서 봐도 감탄스러워 월출산을 빽미러에 담기전까지는 카메라를 누르고 또 누르게 된다. 이번 여정에도 대여섯번은 가다 서다 명산을 즐겼다.

강진만 앞바다는 굽이굽이 해안 길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다산 정약용이 보았고 그의 제자 추사 김정희가 걸었던 길이다.

▲ 고금도에서 바라본 고금대교야경. 다리 건너가 마량이다.

고금도(전남 완도군 고금면) 가는 길은 나주 영암을 거쳐 강진 마량에서 2007년도에 완공된 연육교 고금대교를 건너가면 된다. 나는 이번 길에 완도 바다를 보고 싶어서 완도읍을 거쳐서 신지선착장에서 차를 배에 싣고 고금도로 가는 길을 택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이 뱃길마져 다리가 놓여지면 완도군 관내 모든 큰 섬은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게 된다.

완도군 고금면 청학리에서 우직하게 280년 가업을 이어온 집념꾼 윤기제씨를 만났다. 그를 통해서 바다와 사람들이 어떻게 교감하는지 속내를 아주 정확하게 엿볼 수 있었다.

▲청학리 앞산 거북바위
거북이 다리까지 너무나 선명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들게 만든다. 마을에 대대손손 영험한 힘으로 작용할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학은 천년을 살고 거북이는 오백년을 산다지 않는가?

우리나라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은 촬영장소를 선정하는데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곳 청학리가 너무나 맘에 들어 자신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찍었다. 이후 국악인이자 여배우 오정해씨와 임감독과의 인연도 여러 내용을 담으며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고금면 가교리, 교성리, 청학리 3부락을 합치면 300가구가 넘는데 지금은 20가구만 지주식 김농사를 짓는다. 예전에는 90%이상이 김 양식을 했지만 지금은 다 포기한 것이다.

▲윤기제씨는 끝까지 남은 이 사람들을 이끌고 바다에 남은 마지막 먹을거리 '지주식 김'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 대대손손 이곳에서 살아 남았어요. 280여년정도 되었어요"

"몇 년전까지만 해도 '머슴'을 살았어요. 뼈 빠지게 김을 생산해 제값 못 받고 대접 못 받으며 중간 상인들에게 넘겼어요.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물품대금도 1년에 한번 정산 받았거든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요. 그러니 '머슴 사는 것'과 같았어요"

지주식김을 지키기는 해야겠고 판로는 마땅찮고 고육지책으로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다 2004년부터 이것은 아니다 싶어 소비자들과 직접 소통하고 거래하자 마음먹고 홈페이지도 만들고 자신의 생각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햇살 먹고 자란 김

김양식에는 지주식과 부류식 2가지 방식이 있다. '햇살 먹고 자란 김'은 지주식으로 생산한 김이다.

수심이 얕은 바다에 대나무나 소나무로 지주를 만들고 지주에 김발을 설치하여 김을 양식한다.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하므로 김은 하루에 두 번 썰물로 인해 낮 4시간, 밤 4시간 하루 8시간 정도 물위로 노출이 된다. 햇빛에 노출된 김은 자연스럽게 광합성 작용을 하면서 파래를 제거하고 병충해에 강한 건강한 김으로 자라게 된다. 자연광에 의한 살균작용을 하는 것이다. 지주식으로 채취되는 김은 부유식 김보다 윤기가 덜하고 거칠은 편이지만 씹을수록 고소한 맛에 소화도 잘된다.

▲물이 빠지는 썰물에 수면에 노출된 상태

밤에는 얼고 서리 맞고 낮에는 햇볕에 바짝 말라버린다. 왜 한겨울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를 연상하면 된다. "어떨 때는 김이 불쌍해 보여요. 얼마나 고생이 심할까 싶어서요."

하지만 얘네들은 기후에 맞추고 물때에 맞춰가며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부지런히 생명짓을 한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내는 것이다. 모진 풍파를 이겨낸 생명들은 건강하다. 미네랄도 풍부해진다. 스스로 병도 치료 하고 갖가지 장애요인들을 극복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부류식에서 공공연하게 쓰는 공업용 폐염산을 쓸 일이 없다.

그런데 12월부터 3월까지 한 달에 한번씩 4회 밖에 수확이 안 되고 수심이 얕은 곳으로 한정이 되니 양식면적이 좁아 부류식에 비해 수확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부류식

'바다의 목장화'란 슬로건을 표방하며 대량으로 김을 양식 하는 방법이다. 흔히 바닷가에서 하얀색의 스치로풀이 줄줄이 떠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바로 이 부류물질을 바다에 띄운 후 그 밑으로 그물을 걸고 김이 자라게 하는 방법이다. 이런 방식이니 바다가 깊어도 상관없게 되므로 대량의 김양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부류식은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7개월 동안 가능하다. 김은 24시간 내내 바닷물속에 잠겨서 자란다.

▲ 부류식 양식장

지주식처럼 햇볕에 노출이 안되므로 영양상태가 부실하여 맛이 떨어지게 된다. 자연광에 의한 살균처리 기능이 현저히 떨어져 병충해에 취약하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김이 썩어버린다. 해서 공공연하게 공업용 폐염산을 이용하여 산도를 올린다. 바다에 풀어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이 폐염산의 사용으로 바다속 환경이 급속하게 황폐화 된다는 것이다. 염산의 독성으로 김에 붙어있던 규조류 같은 것들이 떨어져 나오는데 이것을 보고 달려든 물고기류에서 기형어(畸形魚)들이 많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인근 바닷가 생태계가 교란되어 토착생물들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예를 들면 바닷가 돌미역, 개불, 낙지, 조개, 굴 등 예전부터 살아왔던 생명체들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부류식이 90%이상을 차지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우리의 아픔이기도 하고 바다의 아픔이기도 하다.

▲ 바다에 대나무 지주를 박고 있다. 10m가 넘는 대나무 수천개를 바다에 박는 일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다. 논 못줄 튕겨서 모내기 하듯이 산의 지형지물과 조류의 저항을 이겨내면서 일렬로 질서 정연하게 대나무 지주를 박는 일은 몸으로 바다를 알지 못하면 안되는 일이다. 양식이 끝나는 3월 이후에는 다시 철거해야 한다. 그 일도 만만치가 않다.

▲ 담양지방에서 실어오는 대나무지주는 보기에도 튼실해 보인다. 예전에는 소나무지주를 많이 썼다. 담양의 대나무 농민들에게는 지주식 김생산자들이 제일 큰 고객이다.

전통 지주식 김은 현대 개량식방법이나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물건처럼 매년 매회 똑 같은 김을 만들 수 없다. 자연이 주는 환경속에서 매일 하루에 두번씩 썰물에 의해 낮에는 4~5시간 빨래줄의 마른 빨래처럼 바싹 마르고 밀물이 차면 원상회복이 된다. 밤에는 4시간 이상 얼고 찬서리 비바람 맞다가 밀물이 들어오면 잠겨서 다시 회복되고 이런 반복이 계속 되다보니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김은 점점 거칠어지고 색깔도 검은색에서 갈색으로 갈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해간다.

이것을 소비자들이 몰라주고 왜 똑 같은 김을 안보내주느냐고 항의 할 때 마음이 많이 아프다. 사람이 자연을 이길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이치를 따르는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소비자들의 바램대로 매년 매회 똑 같은 김을 못해주는 마음은 송구하다고 고백한다.
이 상태로 그냥 가면 머잖아 지주식 김양식이 소멸할 가능성도 있으리라. 윤기제씨의 장탄식이다.

....[표] 김양식 방법

꿈이 현실이 되고 있다.

▲ 멀리 고금대교가 보이는 지주식김양식장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깨끗한 바다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하여 지주식 김양식을 하고 있는 고금면 강진 앞바다 양식장은 20여 농가가 관리하는데 총 넓이가 346만㎡나 된다. 국내에서 제일 큰 지주식 김양식장이다. 평수로 계산하면 100만평이 넘는 면적이다. 고금대교가 보이는 곳이 맨 우측지점 끝이고 청학리 농촌체험장이 있는 바다가 좌측 끝이다. 육지의 민물이 흘러 드는 곳이 김이 잘된다. 영양 부유물질이 풍부해서다. 강진만이 바로 그런 곳이다.

여기서 대를 이어 280년동안 김양식을 해온 것이다.

김은 홍조식물로 보라털과에 속하는 해조(海藻)다. 한자어로는 해의(海衣), 자채(紫菜)라고 한다.
김 양식은 우리나라 수산양식업중에서 제일 역사가 길다. 조선 중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 280여년전에 경남 하동지방의 한 노파가 섬진강어구에서 조개를 잡다가 김이 많이 붙은 나무토막이 내려오는 것을 발견하여 먹어보니 의외로 맛이 너무 좋아 그후 대나무나 소나무로 된 지주를 세워서 양식하기 시작했다.
2. 정문기 박사는 <조선의 수산>이라는 책에서 이백여년전 전남 완도에서 방렴(方廉)이란 어구에 김이 착생한 것을 발견하고는 편발을 만들어 양식한데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 인조때 태인도의 김여익이라는 사람이 해변에 표류되어온 참나무 가지에 김이 붙은 것을 보고 양식을 시작했다.

고금도 주민들과 윤기제씨의 노력으로 고금면 앞바다는 천혜의 자원을 고스란히 남겨 생각지 않은 혜택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있다.

요즘 도시민들의 아침밥상은 안심하고 먹을게 별로 없다. '김 하나만이라도 책임지자'는 모토로 꿈을 키우기 시작하고 고생하며 살아온 나날들... 이제 인정받기 시작하고 있다.

윤기제씨는 고금도 지주식 김농가들이 생산하는 전통 김을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어 전량 다 귀한 값에 다 팔아주려고 노력한다.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지주식 김사업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고금도 주민들 모두 고향을 떠난 자식들을 불러들여 이 사업의 역사가 이어지도록 해주고 싶은 꿈이 하나 둘 이루어 지려고 한다.

▲양식장 물이 빠지면 바닷가는 돌미역을 비롯 자원의 보고가 된다. 돌미역이 붙은 바위 밑에는 개불, 해삼, 조개, 낙지, 바지락등이 서식한다. 보통의 양식미역은 뿌리가 물위에 떠서 물아래로 자라나지만 고금도 돌미역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자라난다.

돌미역의 가치를 몰랐던 예전에는 '썪을 놈의 미역'이라고 투덜댔다. 여간 걸리적 거리는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 돌미역을 먹어본 소비자가 사골국물처럼 뽀얀 국물이 나오고 맛이 기막히다고 이야기했다.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먹고 그 맛에 감동을 받았고 입소문을 탔다.

그렇게 개발되어 작년에는 부분적으로 상품화 작업을 했고 올해는 본격적으로 돌미역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염산을 뿌리지 않는 지주식 김양식 덕택에 물이 빠지면 하늘과 바다가 키워준 12만평의 바닷가 돌미역 밭이 생겨 난 것이다. 아마도 4~5월 무렵에는 이 돌미역 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돌미역 군락 바위아래는 개불, 낙지, 해삼, 바지락 등이 서식하는 바다생물의 보고다.

눈물 나도록 고마운 일

언제 제일 고단했고 기뻤는가?

지주식김은 대나무지주 수천개를 바다에 박는데 꼬박 한달이 걸리고 양식이 끝나면 철수하는데 또 한달이 걸린다. 대단한 노동강도인데 수익성은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지키고 소비자들의 안전하고 맛난 식탁을 늘 염두에 두고 사는데 소비자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부아가 치민다.

어느 해인가 일부 소비자들이 전화를 해서는 다짜고자 "당신네 김은 색도 노랗고 거칠고 어쩌고 저쩌고..." 하더란다. 그럴 때는 미쳐버릴 심정이다. 그냥 다 때려 치고 염산 확 뿌려서 편하게 살고픈 욕망도 들었다. "그럼 그렇게 못미더우면 그냥 반품해라. 하지만 다시는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는 억만금을 줘도 안 판다"고 맞받았다. 그랬더니 바로 입금하더라며 웃는다. 윤기제씨의 진정성을 알아본 그런 분들이 단골고객들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2009년 1월 TV 소비자고발 프로그램에서 부류식 염산김의 폐해와 바닷가의 황폐화에 대하여 방송이 나가고 얼마 안있어 초등학생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이 이렇게 소중한지 몰랐어요. 아저씨가 주시던 노란김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포기하지 마세요.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 화이팅! "

그전에 햇살김을 갖다 먹은 집 아이들이 프로그램을 보고 해준 전화들이다. 그때 그 전화를 받고 지난 날의 모든 고생과 어려움이 눈녹듯 사라졌다. 그 아이들의 마음으로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다.

다른 먹거리들

▲ 무농약 하늘빛 유자

윤기제씨는 무농약 유자농장도 5,500평 가지고 있다. 유자는 바다에서 4km이상 떨어지면 맛이 없고 잘 안 되는 과일이다. 사철 잎이 푸른나무로 아무래도 해풍을 맞아야 하는 모양이다. 이곳 유자는 맛이 깊고 독하지 않은 여유로운 단맛이 돈다.

▲ 햇볕에 말리고 있는 돌미역, 4월중이면 출하가 가능하다.

농촌체험 프로그램

▲ 김말리기 체험, 농촌수확체험, 유자따기, 양식장 바닷가 체험

고금도 청학리는 바다와 하늘과 땅, 산 모든 환경이 오염되거나 황폐화되지 않고 집념 어린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 살맛 나고 사람이 찾고 싶은 곳'으로 현실화 되어가고 있다.

뭍에서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논에서 메뚜기, 미꾸라지, 우렁이 등 자연생태계가 유지보존되는 것과 강진만 바다가 지주식 김양식으로 인해 뭇 생명들이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모습은 이치가 같아 보인다.
사람들이 욕심을 조금만 줄여도 우리의 바다는 후대에 대대손손 물려줄 밑자산이 될 것이다.

세상의 유혹과 싸웠고
스스로 이겨내서
주변사람들과 바다생물들에게
지속 가능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준 윤기제의 '햇살 먹고 자란 김'을 만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고 추억이었다.

돌아 오는 길

돌아오는 날 고금면 덕동 이순신 묘당도에 다녀왔다. 노량에서 전사한 이순신장군의 유해를 아산으로 모셔가기전 83일간 봉안하였던 유서 깊은 곳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유해를 모셨던 자리에는 풀이 나질 않는다. 한겨울인 지금도 흔적이 보이지만 여름가을 사진에도 풀이 나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장군의 노여움때문일까?

영정에 두번 예를 갖추고 방명록에 서명하였다.

▲ 가묘 주위로 목책이 새로 세워져있다.(2010년 2월)

▲ 가운데 부분 장군의 유해가 모셔져 있던 자리에는 풀이 나지 않는다. (2006년 11월)

고금도, 이순신, 햇살, 대나무지주, 바다, 하늘, 땅, 맛있는 김, 오는 사람들, 가는 사람들, 그리고 나.
모두가 다 자연의 품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이고 존재들이다.

다만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은 더 많은 소비자들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으로 지주식 무염산김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일이다.
농어민들에게 최고의 격려는 '햇살 먹고 자란김'을 우리들의 밥상에 올리는 것이다.

Tip. 김비교 사진

▲ 햇빛에 비춰본 햇살 먹고 자란김이다. 노란빛이 자연스럽다. 햇빛 에너지가 고스란히 들어와 앉았다.

▲ 오른쪽이 생김이고 왼쪽이 구운김이다.

▲ 일반 부류식 산처리김(왼쪽 까만색) & 지주식 햇살 먹고 자란김(오른쪽) 색깔이 차이가 두드러진다.

▲ 햇살 먹고 자란 구운김(오른쪽)과 일반 산처리 구운김(왼쪽) 일반조미김은 기름이 줄줄 흐른다. 햇살구운김은 다소 거칠기는 해도 짜지 않으며 기름을 거의 안바른듯 깔끔한 맛을 낸다.



연기 나는 마을에 내 감나무 한 그루 가져볼까?

내 기억 속에 감나무는 철저하게 양면성을 지닌 두 얼굴로 존재한다. '깊은 슬픔'이기도 하고 말간 이슬 같은 '정감 어린 추억'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유년시절에는 살던 집에서도, 이웃집 담장 너머로도 보았고 출장 길엔 방방곡곡에서 만났고 결혼해서는 평택 조개터(합정동) 처갓집 감나무에 매료되곤 했다. 길모퉁이에, 들판에, 뒷마당에, 나즈막한 산속에... 감나무는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김없이 다 있다. 사람의 숨결과 같이 호흡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나지막한 담벼락 바깥으로 뻗은 가지에 달린 빨간 감은 그 자체가 정물화였고 호기심이었고 유혹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난 대전시 태평동에 살았다. 주인집 안마당에 2그루의 큰 감나무가 있었다.
어린 것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땅에 떨어져 납작해진 새벽서리 맞은 홍시의 단맛, 감나무 쐐기에 물렸을 때의 그 독특하고 야물었던 통증, 분(粉)이 뽀얗게 핀 찔깃쫄깃 달디단 곶감의 여운을 잊지 못한다.

▲ 까치밥 [출처] 네이버 블로거 이진화(khgina)

언젠가 아버님이 말씀해주신 '까치밥'이야기에 조무래기는 아주 신기해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로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감나무는 맑은 빛깔로 내 인생의 한 켠을 장식하는 존재다. 성장하면서 나무를 심을거면 꼭 '우리 집에 감나무를 몇 그루 심어야지'라는 꿈을 꾸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꿈이다.

하지만 시와 소설에서 만난 감나무는 아프고 가슴 저미는 일과 관련이 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공격적이지 못하고 늘 당하고 깨지고 빼앗기기만 했던 자기 주인들의 서럽고 고단한 삶을 그대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 감꽃 [출처] 네이버 블로거 이쁘니(naipuniya)

갑오년 상투 튼 우리 할배 죽창 세워 낫 갈아 고개 넘어
영영 못 오실 길 떠나 가신 것을 감꽃 모진꽃아 너는 보았겠지
모진 세월에 우리 어메 식은 밥 말아 묵고 싸리나뭇길
지리산 줄기 따라 떠나 가신 것을 감꽃 모진 꽃아 너는 보았겠지
그래 감꽃아 보았겠지 애비 잃고 땅도 빼앗긴 이내 설움도
울 아배 못 잊어서 불끈 쥔 두 주먹도
감꽃 모진 꽃아 오막살이 삼대째 토백이 꽃
감꽃 모진 꽃아 오막살이 삼대째 토백이 꽃

[민요 '감꽃']


갑오년, 죽창, 식은 밥, 죽음, 설움, 지리산, 빼앗긴 땅, 토백이 모진꽃…

감나무는 명이 길어 사람의 한 세대 30년은 가볍게 받아 넘긴다. 통상 할아버지 또는 증조 할아버지부터라야 이야기가 시작되니 감나무의 역사적, 생물학적 생명살이에 경의를 표한다. 끌려가던 할아버지, 통곡하던 아버지, 남아서 입술을 깨물며 오열했던 어머니… 그 아픈 역사를 온전하게 감당했으니 감꽃에, 감나무에 새겨진 이야기는 슬플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슬픔이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서글프기는 하지만 떨쳐내고 온전하게 잘 살고 말겠다는 삶의 결연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연기 나는 마을과 감나무

지난 1월, 쌀 이야기를 제공해준 충북 옥천 산계뜰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산계리(계하마을)는17가구가 오랜 마을 역사를 지니고 살아왔다. 집집마다 감나무가 한두그루씩은 기본이고 마을 어귀에도 산자락에도 감나무가 지천이다. 여느 시골마을과 다를바 없다.

산계뜰영농조합 이선우 대표농부는 이곳에서 98세 노모를 모시고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대표님! 나무 주인들은 저 감나무들을 어떻게 하나요? 다 먹지는 못할테고..."

지난 가을 상주 박명의씨와 곶감 이야기를 만들면서 좋은 감 구하기가 아주 큰 숙제임을 알고 있던터였다.

"저거 한그루당 꽃필 무렵에15만원~18만원(?) 정도에 외지 상인들에게 나무째 넘겨요. 일종의 밭떼기인데, 상인들은 돈을 주인에게 지불하고 나서 중간중간 약을 치고 관리 하다가 일괄 수확해서 다 가져갑니다. 가져가서는 곶감으로 가공해서 팔지요."

"어! 이렇게 자연부락에 있는 감나무도 약을 치나요?"
그렇단다.

그렇게 이선우대표와 나는 감나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꼬리를 물었고 주제는 '연기 나는 마을' 과 '곶감' 그리고 '추억 만들기'로 이어진다.

▲ 필자가 사는 동네에 굴뚝연기가 피어 오른다(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땅거미가 문지방을 들락거릴 무렵이다. 어둑어둑해지면 마을 굴뚝에서는 집집마다 실오라기 연기가 펴 오르기 시작한다. 저녁밥을 지어야 하고 차가운 구들장 덥혀야 하고 소죽을 끓여야 하고... 더러더러 굵은 연기가 꿀럭거리는 집이면 잔칫상이거나 생일상이거나 뭔가 사연이 있구나 싶었다. 우리네 살아가는 모든 에너지가 아궁이로부터 나왔으니 저녁 무렵의 풍경은 자욱한 연기가 주인공이었다.

지금처럼 화학물질 타는 독성연기도 아니고 그저 나무들이 타서 나오는 아궁이 냄새와 한집 건너 비슷비슷한 음식 냄새가 전부였다. 콧구멍은 근질근질 구수한 매캐함으로 자극이 되지만 그러려니 받아들인 '우리 몸에 붙은 우리네 풍경'이었다.

1년 내내 마을은 연기로 잔잔하게 덮혀 지낸 것이다. 더군다나 바람이 없는 날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순이네 댕그런 굴뚝연기는 이집 저집 드나들기 마련이다. 볏집, 참나무, 소나무, 검불, 상수리나무, 싸리나무 등이 타면서 나오는 연기다

이 연기가 집집마다 울타리 안팎에 심겨져 있던 감나무를 비롯 온 나무들을 병해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지켜준 것이다. 적어도 벌레를 직접 죽이지는 못해도 슬며시 피해가게 하고 기피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무가 스스로 방어하려고 내뿜는 생명물질과 나무 타는 굴뚝 연기가 연합군을 이룬것이다.

연기는 나무의 에너지가 형질을 변경한 것이므로 나무에는 해롭지 아니하고 벌레들에게는 영향을 미친 것이다. 아궁이는 아궁이대로 나무를 태울때 나오는 뜨거운 불기운(자연에너지)을 우리 할머니와 어머님의 몸에 쏘여 주어 건강하게 신체리듬을 가져가도록 도왔다.

지금도 나무를 태워 나온 목초액은 유기농업의 중요한 원부자재로 쓰이고 각종 치료제 등의 원료로도 쓰이는 것을 보면 이선우 대표의 말이 일리가 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시절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 전통부락에 제일 먼저 손댄 것이 아궁이 개량이었다. 연탄을 쓰는 구조로 바꾸고 이어서 석유를 쓰는 보일러 시스템이 접목이 된다. 마을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질적인 에너지원이 외부로부터 강제 진입을 했다. 수백년 수천년 마을 고유의 나무타는 연기를 대신해 석탄과 석유가 타는 매연들이 마을을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언제부터인가 자연부락의 나무에서도 각종 병충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이선우씨는 이야기한다.

감이와 함께하는 한해살이(감살이)

교육관에 나란히 앉아 마을을 쳐다보던 이선우 대표가 말을 꺼낸다.

"우리 마을 저 감나무들이 가진 의미를 되살려볼까요? 외부상인들에게 막무가내로 넘기지 말고 우리가 잘 관리하여 연기도 피우고 약도 치지 않고 퇴비도 넣고... 그렇게 무농약으로 관리하여 내년도 겨울에 황을 피우지 않은 무황처리 곶감을 생산하고 '연기 나는 마을 이야기가 있는 먹거리'로 판매합시다."
"그 일을 도시민들과 함께하는 방안은 어때요?"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필자의 처갓집(경기 평택 합정동) 감나무다. 이 사진을 찍을때 드는 느낌은 '기다림'이었다. 감이 익을 무렵이면 장모님의 전화가 잦아진다. 딸넷 사위넷 제때 제때 다녀가라 보채신다. 핑계는 "어여! 감을 와서 따가라"라고 하시지만속내는 보고 싶은 자식들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으신거 다 안다. 해마다 감이 익을 철이면 어른을 뵈러 둘러둘러 다니고 있다.

이야기인 즉 이 마을 감나무 중 20그루를 올해 1차년도에 도시민 가족에게 한 그루씩 분양을 하고 분양가족에게는 산계뜰에서 절기마다 진행하는 농촌체험프로그램에 참여케 하는것이다. 또 가족 단위로 자기 나무도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도시민 20가족이 상인들이 지급하던 금액을 대신 지불하고 시골에 자신의 감나무 한 그루를 분양 받는다. 시간 나는대로 참여하고 관리(연기 피우고, 적과하고, 퇴비 넣고…등등)한 후 수확하여 가져가는 것이다. 가져가도 되고 일부 필요한 만큼 곶감을 깎아 만들고 나머지는 마을영농법인에 시세가로 판매해도 되고…

감나무를 분양 받은 가족이 감나무 관리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지방자치단체에서 참가가족 1인당 옥천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15,000원~20,000원 정도의 쿠폰 혜택을 주는 방도를 강구하고 있다. 그 외에 온 가족이 개별적으로 마을에서 주최하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의무도 있다. 기본관리(퇴비,목초액소독,연기피우기)는 영농조합법인에서 하지만 감나무 프로그램에 2번 이상 참여하여야 하고 애지중지 감나무를 보살피고 수확하는 일 온전히 참여자의 몫이다.

보통 감나무에서 400~500개 이상은 족히 넘게 달린다. 나무마다 편차는 다소 있겠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5접 이상은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해걸이 등 변수가 있긴 하다.

그래도 참여하는 도시민을 위하여 이선우 대표는 기본적으로 4접(400개)은 따서 가져갈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했다. 만약에 어느 가족이 분양 받은 나무를 정상적으로 관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수가 부족하면 마을 다른 나무에서 얻은 수확으로 벌충해주겠다는 것이다. 더 많이 달리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분양 받은 가족의 몫이다.

이 감살이 프로그램은 도농교류의 의미도 있고, 무황처리 곶감도 생산하고 ,도시가족들에게 다정다감한 고향의 맛도 느낄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직접 참여하는 노동강도를 높여 오랜 추억이 되도록 산계리 마을에서 협조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많은 이야기들이 1년 내내 만들어져 그 가정의 추억으로 아로새겨 질것이다. 또 온 가족이 스스로 만든 곶감으로 내년 명절에는 지인들에게 정성이 가득한 최고의 선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가족만의 선물'이 되겠다.

충북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 가는 길은 경부고속도로에서 청원상주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보은IC에서 빠져 나와 우회전하여 옥천으로 달려 '내수면연구소'라는 입간판을 보고 우회전하여 들어오면 보청천과 상춘정이 눈길을 끈다. 그 동네다. 거기서 몇분 안걸린다.

▲ 산계뜰벌판에서 바라본 마을전경

▲ 계하리 마을회관에 붙어있는 가르침이 옛스럽다. '자녀를 바르게 교육한다''외롭고 약한 자를 도와준다' 참 간결하지만 요즘 우리세태에서 가장 절실한 표어다.

▲ 마을 수호신 느티나무의 같은 나무 다른 모습 마을에서 들판을 바라보고 찍은 가을 느티나무(왼쪽),들판에서 마을을 바라보고 찍은 겨울 느티나무(오른쪽)

▲ 보은에서 청성을 거쳐 흘러가는 보청천의 모습이다. 내 한가운데에는 섬이 있고 그 꼭대기에는 늘 봄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하여'상춘정(常春亭)'이라 붙은 정자가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산계뜰에는 큰 내(보청천)도 있고 뚝방길도 있고 작은 또랑도 있고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벌판이 있다. 겨울에는 보리밭이 지천이다. 나무랄데 없는 아이들의 놀이터고 마음의 안식처다.
계하리 벌판은 50ha가 넘는다. 옥천관내 101농가가 참여하여 경종과 축산을 연계한 자연순환농업을 실시하는 근거지인데 계하리에 대대로 살고 있는 이선우씨가 대표 농부로 일을 끌어가고 있다.

▲ 2010년 1월 겨울 감나무

▲2006년 10월 도농교류한마당 잔치때 찍은 마을 풍경인데 앞사진과 같은 집(지붕에 흰색줄이 두줄 쳐진집) 감나무에 풍성하게 감이 달려있다.

마을 집집마다 감나무가 두세그루씩은 살고 있어 마을 전체로 보면 제법 많은 편이다. 이선우씨가 마을을 설명하다가 감나무를 가리키며 나 어렸을 적에도 감나무 키가 저만했으니 최소 50여년 이상은 다 넘은 것이고 어떤 것은 100년이 훨 넘은 것들도 있다고 설명을 한다.

이 마을 '감이 한해살이'에 참여한 고향보따리 회원들을 위한 '감나무 관리체험프로그램'을 별도로 진행한다. 각 나무마다 분양 받은 가족의 이름표를 부착할 것이다.

감잎차 만들기, 감꽃 목걸이 만들기, 천연염색 감물 들이기, 곶감 만들기, 감 따기를 하고 '자기 나무밑에서 연기 피우기'등을 할 것이다. 감살이 회원들은 산계뜰에서 전체적으로 진행하는 두 번 정도의 공동행사에는 언제든지 참여할 수도 있다. 별도의 감나무 프로그램에는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특히 감의 수확시기에는 온 식구들이 다 내려와서 감을 따는 일을 하고 다음 작업을 의논하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병권의 고향보따리 감살이는

도시는 농촌에게
농촌은 도시에게
서로를 내어주는 일이다

얼굴 마주보고
눈웃음 살짝 윙크하는 일이다

도시는 정감어린 추억이 그립고
농촌은 사람이 그립다

감살이는
그 둘이 사는길이다

▲ 한남대학생들이 그린 담벼락의 표현들이 감나무들과 잘 어울린다. 눈에 보이는 나무들이 다 감나무다

산계뜰 농촌체험

▲ 여러 해 도농교류활동을 준비하고 시행해온 산계뜰은 년중 절기별로 다양한 체험활동이 가능하다. 특별하게 프로그램을 준비한다기보다 주어진 자연환경과 농사여건에서 일상으로 행할 수 있는 추억 어린 행동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예전에 농촌에서 살아가는거 자체가 놀이였고 즐거움이었고 추억이었던 거다.

1월 민속놀이와 썰매타기
2월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보리밟기, 연날리기, 장담그기, 두부만들기
3월 냉이달래캐기, 쑥떡만들기
4월 감자, 옥수수심기, 짚공예, 인절미만들기
5월 모종심기, 감꽃목걸이 만들기
6월 손모내기, 우렁이넣기, 감자수확, 감자떡만들기, 삼림욕체험, 보리베기, 여치집만들기
7월 천연염색, 물고기잡기, 종이배띄우기
8월 옥수수잡기, 미꾸라지 잡기, 우렁이 잡기
9월 고구마수확, 소여물주기, 메뚜기잡기, 도토리 밤줍기
10월 감따기, 곶감 만들기, 솔방을 줍기
11월 논두렁축구, 김치 담그기, 홍시 따기, 메주 만들기
12월 보리밟기, 연날리기, 가래떡 구워먹기, 감자 고구마 굽기

이상의 이야기들이 논두렁에서 냇가에서 논에서 밭에서 감나무에서 이루어진다.
마을에는 친환경체험교육관이 있어 숙박(1인당 만원)이 가능하다. 식당도 옥천에서 생산하는 친환경식재료로 음식을 조리해서 먹는다. 한끼당 5,000원 정도면 절기에 맞는 훌륭한 유기농 식사가 가능하다.

▲ 친환경농업체험교육관과 유기농식당, 6인실 룸과 욕실

50인실 정도의 대형 강의실도 있어 다양한 교육프로그램도 가능하다.

감이 한해살이 가족들은 감나무 관리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 이외에도 개별단위로 마을을 방문하여 시골놀이의 즐거움을 맛볼수 있다. 사교육과 입시에 주눅이 들어 추억이 메말라있는 아이들에게 근사한 충북 옥천 외갓집을 선물하는 의미도 크다.

내가 감을 좋아하는 이유는

감나무에는 새가 집을 짓지 아니하고
벌레가 생기지 않고
그늘을 만들어 주고
명이 오래가며
단풍이 아름답고
낙엽은 거름에 좋고
열매는 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많은 이야기를 주렁주렁 달아주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안병권 고향보따리에서는 농촌경제에 도움이 되면서 지역에 기반한 문화상품(체험, 교류, 전통문화상품)을 다양한 각도에서 찾아보고 소개할 예정이다.

감나무이야기를 마치려고 하니 어쩐지 계하리 마을 전체를 다 팔아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개념 있는 친환경마을, 연기 나는 마을 계하리와 20여 도시가족들이 펼쳐갈 2010년 활기찬 감살이 인연을 기대하면서 글을 맺는다.



 

이 맛에 사람들이 광천 토굴 새우젓을 찾는구나!

"그동안 그렇게 많은 생산현장을 다니고 고향보따리에서 또 작목을 찾고 농가를 찾아다니고 인터뷰 하거나 이야기를 만들다 보면 생각이 중복되거나 지루하지 않으세요? 그 작목이 작목이고 모두가 엇비슷하지 않나요?"

꽤 많은 사람들이 묻는 질문이다. 또 앞으로 해결하면서 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중심으로 본다. 작목(作目)이나 아이템을 기준으로 쫒아다니거나 통상 '원조'나 '최고', '명품', '브랜드', '퍼펙트' 등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금방 싫증이 나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반복성에 의존하게 된다.

이전에 만났던 것과 지금의 것, 그리고 다음의 것들이 구별이 되지 않는다. 구별을 하려고 하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더 들어가서 에너지가 금방 소진이 된다. 어떨 때는 정말 기진맥진해지기도 하고 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

그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 접근하는 방식이고 대부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틈에서 차이를 만들려고 하니 힘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다름'과 '다름'이 너무나 분명하게 존재하면서도 소통이 가능하다.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다름'이 눈에 보인다.

나도 달라지고 그가 가지고 있는 상품도 달라지고…. 하여튼 그 과정을 거치면 그와 다른 사람들과의 구별이 명확해진다. 그렇게 구분이 되고 나면 상품이나 아이템은 사실 그 컨셉에 자연스레 맞춰진다.

내가 풀어가려고 하는 '이야기농업'은 바로 그 '다름'과 '다름'사이에 나름대로의 규칙성을 부여하여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이야기는 우리나라 밥상의 기본 물목의 하나인 '새우젓'이야기이다.

9년전, 그리고 4년전인가 한번 더 토굴새우젓을 밀착 취재하고 거래도 했다. 새우젓에 대한 책을 구했고 백과사전을 뒤져서 기본자료를 챙기고 인터뷰 준비도 하면서 구상에 들어갔다. 열흘전쯤 홍성지역 관련 지자체에 공식적으로 농가 추천 요청을 해놓은 상태였다.

따르릉! 전화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젊은이다. 의아했다. 나는 오래된 이야기가 녹아있는 새우젓 인생을 찾았는데 이렇게 젊다니…? 하지만 일단 소개는 받았다. 추천한 분들의 내용도 있을 테니 고향보따리 사이트 주소를 알려주고 차분하게 살펴 본 후에 전화를 달라고 요청했다.

"저 홍성에 이정우입니다. 고향보따리 사이트 잘보았습니다. 참 차분하게 잘된 시스템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저~ 저희가 자격이 되나 모르겠습니다. 안선생님 하시는 컨셉에 제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젊은 친구고 새우젓 관련 자료도 안가지고 있는듯해서 이야기 파트너로 긴가민가 싶었는데 스스로 자격이 부족하다고 고백 하는게 아닌가? 부족하다고 고백하는 젊은이의 솔직함이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틀뒤에 광천에서 보자고 약속을 잡았다.

다음다음날 나는 새우젓 장사꾼 이정우를 만나러 가는게 아니라 예의 바르고 진솔함이 느껴지는 젊은이를 만나러 서해안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그와 나 사이에 펼쳐질 예상되는 지점들을 살피고 광천 젓갈시장에서 만났다. 여러번 다녀오고 거래도 해본 시장이지만 갈때마다 새롭다.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까 기대가 되었다.

발효식품 문화는 세계 어느곳을 막론하고 그 지역 자연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발달되어왔다. 아주 덥거나 혹은 계절의 변화가 일정한 지역에서 고단백질과 염분을 장기간 안정적으로 공급받고자 하여 출발하고 발달하게 된것이다. 유럽의 치즈가 그랬고 우리의 김치와 젓갈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젓갈은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전통 수산발효식품으로 어패류에 소금을 가하여 염장함으로써 부패미생물의 번식을 억제하고,자가 소화효소 또는 미생물이 생산하는 효소에 의해 육질을 분해시켜 숙성시킨 식품으로 독특한 감칠맛을 지니게된다. 이 '감칠맛'은 우리음식을 다른나라 음식과 구별되게 하는 첫번째 기준으로 작용한다. 영어로는 표현이 어려운 개념이 된다.

또한 젓갈은 신선한 원료와 소금만으로 손쉽게 가공할수 있는 제조방법의 단순용이성 때문에 일시적으로 대량 어획되는 어패류의 효과적인 저장수단이기도 하다.

발효식품의 특징중의 하나는 속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다른 음식들과 어울리되 그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최대한 살려주면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와인과 어울리는 치즈, 돼지고기에 안성맞춤인 새우젓을 보더라도 서로를 부인하지 않고 맛을 이끌어 낸다.

새우젓은 '간'이기도 하고 '맛'이기도 하다.

한가지가 동시에 독립적인 두가지 역할을 하는 먹을거리는 흔치않다. 우리음식의 성패를 결정짓는 '간'의 역할을 하며 그 자체로 '맛(味)'인 경우는 새우젓이 유일하지 싶다. 간장이나 된장은 물론 '간'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맛'이라 하기에는 '간'의 느낌이 많이 남는다.

▲ 우리집에서 즐겨먹는 '생새우젓 참기름무침'이다. 청양고추와 새우젓의 만남은 환상궁합이다.

난 새우젓 매니아다. 유년시절, 어머님이 새우젓에 갖은 양념(파, 고춧가루, 마늘, 깨소금, 참기름)을 하여 밥지으실 때 한가운데 공기에 담아 눌러 쪄내시곤 했는데 그 맛과 색택을 잊을 수가 없다. 밥 수증기에 찜 당한 새우젓은 또 하나의 맛을 덤으로 미리 전해 주었다. 밥김에 섞여 나오던 새우젓 익어가던 냄새...
그 덕분에 밥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했다. 물론 굳이 밥에 찌지 않아도 '갖은 양념 생새우젓 참기름무침' 그 자체로도 일품이다.

우리 집은 요리에 새우젓을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맛은 순하고 우리들의 몸과 추억과 어긋나지 않는다. 좋은 음식은 먹고 나서 속이 편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새우젓은 같이 쓰이는 요리의 재료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는 듯하면서 전체의 맛을 결정하는 특성을 가진다.

애호박과 새우젓, 콩나물해장국과 새우젓, 계란찜과 새우젓, 말간 두부새우젓찌게, 돼지수육과 새우젓...

세상에나 세상에나

새우젓은 다른것들에게
아무 말 없이
자기 자리를 내어주고
곁을 주고
영광을 내어준다.

애호박
순두부
돼지고기 보쌈
콩나물 해장국.....

상대방을 거부하거나
밀어내지 읺는다.

하지만
요리의 성패를 결정하고
고유의 맛을 내게 하는 것은
새우젓이다.

새우젓은
그 자체로 '간'이면서
동시에 '맛'이기 때문이다,


새우젓 공부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먹는 바다새우는 대하, 보리새우, 꽃새우, 젓새우 등이다. 대하는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로 굽거나 매운탕용으로 제격이고, 보리새우는 말려서 다시 국물용으로 많이 쓴다. 이중에서 크기로 보면 젓새우가 가장 작다. 하지만 먹는 양으로는 젓새우가 제일 많다. 새우젓으로 먹기 때문이다. 젓새우는 바닥이 뻘인 서해안 얕은 바다에 서식한다. 잡는 즉시 배위에서 소금을 뿌려 통에 담는데 이 염장된 젓새우를 어느 지역에서 가져가 어떻게 숙성시키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 2001년 홍성 광천장에서

새우젓장수 아저씨께 부탁해서 한마리씩 구별해 보았다. 아저씨는 두리번거리더니 상자박스 하나를 북 찢어서 내 앞에다 놓는다. 그 위에 새우젓을 한 마리씩 꺼내어 도열한다.

볼펜으로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제일 큰놈이 육젓에서 나온 놈,
그리고 중간치는 오젓, 작은 새우는 세화젓,
붉은 큰놈은 북새우, 중간 놈은 독새우,
작은 놈은 아저씨도 자신이 없는지 민물새우인 새뱅이와 모양만 비슷하단다.

젓갈도 크기에 따라 가지가지다.
유월에 잡힌 놈이 가장 실하고 통통하다 하여 육젓이라 하고 가장 좋은 젓갈로 친다.

하지만 유월에 잡혔다고 다 육젓은 아니다. 가장 큰놈을 골라(4~5cm) '육젓'을 담고 그 다음 큰놈들을 골라 '오젓'을 담는다. 가장 잔챙이로 만든 것이 '세화젓'으로 일반적으로 돼지고기를 찍어 먹거나 양념으로 쓴다.

육젓은 가격이 비싸 밥반찬으로 좋으며 김치 담기에는 좀 부담이 크다.
간간히 새우젓에 섞여있는 붉은 큰 새우는 북새우라 하고 조금 작은놈은 독새우라하며 아주 작은놈은 생김새가 거의 민물새우와 흡사하다. 다만 색깔이 붉은 색을 띨 뿐이다.
그날, 세상에서 가장 알기 쉽게 새우젓을 공부했다.
스승님은 실전의 고수였다.^^

광천 독배마을 토굴

원래 새우젓은 조랭이(새우젓항아리)에 저장하는데 여름에 부패하면 '고랑젓'이 되는 경우가 많아 새우젓사람들의 고민거리였다. 이 고랑젓이 생기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예전 타지에서 광산업을 한 경험이 있는 윤명원씨가 시험적으로 금광폐광에 새우젓을 넣어 두었다. 한여름을 넘겨 김장철에 가보니 고랑젓이 되지 않고 잘 숙성되어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새우젓이 고랑젓이 되지 않는 것만 해도 좋은 일인데 일정한 온도에서 맛까지 익어가고 좋아지니 새우젓 사람들에게는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 새우젓이 숙성되고 있을시기에 찍은 모습 & 여러갈래 토굴 내부

1960년대에 처음 토굴을 파기 시작하였는데 지금 있는 토굴 대부분은 그 시절에 판 것이다. 토굴은 돌이 많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곳이 좋은 곳인데 기계의 힘을 빌지 않고 사람의 노동력으로 팠다. 지금은 인건비가 높아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 암반자체에 습기가 많은 것은 동굴내의 온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해안가라 암반이 그리 단단하지 않고 물기가 많아 착굴이 용이했다. 거기다가 바닷가 해풍이 들고나고 동굴내 온도도 추우나 더우나 15℃내외를 유지한다.

▲ 제32호 토굴입간판과 토굴입구 모습

이정우군은 32호 토굴을 사용한다. 토굴안으로 들어가 보면 생각보다 훨씬 깊고 다양한 갈래로 갈라져 있는것에 놀라고 년중 15℃내외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동굴의 기능에 감탄하게 된다. 전남 목포와 신안 지도에서 입찰 받은 염장새우젓을 이곳 광천 토굴로 가져와 소금(1년 동안 간수를 뺀것)으로 덧간을 한다. 염도를 25도로 맞추고 숙성에 들어간다. 토굴에서 숙성을 하게 되면 매일 한번씩 눌러보고 살피는데 처음에는 말간 국물이다가 익어가면서 쌀뜨물처럼 뽀얀 국물로 변해간다. 숙성이 완료되면(15일~30일) -4℃ 냉동 창고로 옮겨져 보관이 된다. 그 상태에서 년중 판매를 한다. 너무 오래 숙성이 되면 곤죽이 되서 상품성이 떨어지게 된다.

독배마을과 광천재래시장 새우젓업체들은 모두 이곳 토굴을 개인 소유하거나 임대해서 사용한다.

▲ (왼쪽)광천교(구장터다리), 예전에는 이 물길로 배가 들고 났다고 해서 뚝방길에서 한참을 들여다 보며 옛날을 상상했다. (오른쪽)덕신상회 냉동창고 건물(파란색벽과 회색문)과 인접한 집이 가수 장사익님의 생가(하얀담 녹색지붕)라 하니 느낌이 새롭다. 장사익님이 부른 '찔레꽃'이란 노래가 가슴에 메아리 친다.

독배마을 당산에 오르고 싶어 정우군과 함께 당제를 지내는 옹암영산당에 올랐다. 신령스러워 보이는 오래된 나무들이 옹암의 역사를 묵묵히 감당하고 있었다.

1975년 옹앙포 항구 폐쇄이전에는 당제를 지냈다. 포구가 닫히고 나서 한참 동안 제를 지내지 않았다. 1985년에 옹암리 노인회가 중심이 되어 당제를 복원하였다. 항구 폐쇄이후 마을사람들에게 잦은 불행이 찾아들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구당사로부터 100m 떨어진 남쪽 산등성이에 가로 5m 세로 10m의 영산당을 지었다.

▲ 옹암영산당 뒷켠에 신령스런 나무 2그루가 있다. 오랜 나이로 공룡등가죽처럼 생긴 피부를 가진 나무에게 예를 갖추고는 기념사진 찍은 필자

▲ 마을의 당제를 지내는 옹암영산당 전경이다.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안을 볼 수가 있는데 필자가 올라가던 날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에서 펴낸 책 『홍성독배마을』에서 그 안을 살필 수 있었다. 중앙에 본당조부모도를 봉안하였고 좌우에 오방대장군신도와 산신령도를 봉안하였다.

▲옹암영산당에서 바라본 독배마을 전경이다. 이정우군이 어릴적에는 천수만이 막히기 전이라 흰색 건물뒤로 흐르는 냇가로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들었다고 기억한다. 그때가 광천 독배마을 옹암포구의 전성기였으리라.

형님먼저 아우먼저

경희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회사생활을 하던 정우씨는 2003년도에 아예 도시생활을 접고 광천으로 내려와 아버지가 하던 가업을 이어받았다.

▲ 좌로부터 형님(41세), 할머니, 어머니, 이정우군(37세)과 광천재래시장내 덕신토굴새우젓상회 3남2녀중 정우군이 넷째다. 할아버지가 점포 바로 이 자리에서 건어물가게로 시작하여 아버지가 이어받았고 정우군이 꿈을 키워가고 있다.

장차 꿈이 무엇인가?

의외의 대답이 나온다.
아! 예 한가지 목표가 있어요. 형님네가 사는 것을 확실하게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력을 만드는데 있어요. 몸이 불편한 형님내외분이 아이들하고 늙어서도 같이 살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것입니다.

형님?

예! 매장 한 켠에 좋은 얼굴로 앉아있던 형님을 소개해준다.

▲ 이승렬(41세),이정우(37세) 형제

형님이 지체장애가 있어요. 3살 때 열병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장애가 발생했어요. 할아버지, 아버지가 형님을 고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시고 가산을 탕진하다시피 했어요.

뭔가 나름 거창하거나 큰일을 이루겠다는 꿈들이 일반적인데 젊은 사람의 컨셉에서 장애가 있는 형님과 그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일을 한다는 이야기는 나에게 두번째로 신선했다.

우애 좋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추수를 끝내고 나니 형님은 신접살림난 아우네가 아무래도 더 살림이 빠듯할테니 자신의 볏가마를 지고 아우네로 실어다 놓습니다. 아우는 아우대로 형님네가 식구가 많으니 살림이 더 필요하지 싶어 밤에 볏가마를 싣고 형님네에다 가져다 놓습니다. 그런데 번번히 이상합니다. 분명 실어 내갔는데 볏가마가 줄어들지를 않아요.

어느 날밤 다시 서로 살림을 걱정하던 두 형제는 각자의 볏가마를 지고 가다 중간에서 마주칩니다.
형님! 아우야! 그랬구나! 둘이는 얼싸안고 감동해서 울고 말았습니다.

이정우, 이승렬군 형제는 볏가마 대신 새우젓 조랭이를 서로 나누고 있었다.
그 곁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든든한 후원군으로 두형제를 지원하고 있다.


이야기를 하는데 손끝이 갈라진게 보인다. 얼마나 일을 많이 하면 손끝이 갈라지나?
웃는다. 이거 지금은 아주 양반이란다. 5월부터 한참 바빠지면 손마디가 아리고 아프다. 당연히 손이 거칠어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37살 새우젓 노총각과의 이야기는 잔잔하게 재미를 더해갔다.

최고의 이벤트_새우젓 드럼통 공동구매

육젓은 맛은 좋지만 너무 부담이 되는게 사실이라고 이야기 하니 한가지 귀뜸을 해준다.
6월이 되고 7월이 되어 새우젓철이 돌아올 때 전남신안에서 입찰을 봅니다. 그때 입찰가가 나와 응찰하면 입찰딱지가 붙어요 거기에 수수료 0.05% 붙고 상하차비 및 운임이 붙고 약간의 인건비가 붙은 상태에서 새우젓 매니아 20분이 드럼째 공동구매를 합니다. 광천으로 내려와 현물을 보고 값을 지불하고 토굴 숙성과정에 들어갑니다. 숙성이 되어 나오면 똑같이 공동구매한 고객들께 나누어 완 포장하여 택배로 보내드립니다.

▲목포와 신안 지도에서 입찰하여 막 도착한 새우젓드럼이다. 이 상태에서 바로 소금간(덧간)을 하여 토굴에서 발효를 시켜야한다.

새우젓은 드럼에 사진처럼 불룩튀어 나올 정도로 담는다. 실중량이 220~230kg이 나가지만 200kg으로 계산해서 20명이나 10명에게 나눠 드리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소매가격이 아니고 도매로 살수 있고 중량도 혜택을 보니 보통 육젓시세보다 40%이상 저렴하게 구매하는 매니아들이 있다. 거의 오젓 가격에 육젓을 구매하게 된다. 고객들은 그렇게 구입한 것을 가지고 김장도 담그고 년중 제대로 된 새우젓을 즐긴다.

안병권고향보따리에서도 올 6월이나 7월무렵 대대적으로 새우젓공동구매를 소개하고 추천하려고 한다.

이정우씨네 새우젓이 맛이 좋다고 소문난 이유중의 하나는 '제물 새우젓' 때문이다.

고객들에게 나누어줄 때 먼저 새우젓 건더기를 인원수대로 똑같이 나누고 이어서 국물도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 이유는 새우젓은 처음 염장되어 숙성될 때의 자기물(제물)에 담겨있어야 1년내내 제 맛을 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제물이 부족해지니까 소금으로 '자가염분'을 만들어 쓴다. 25도 이상을 가니 제물보다 짜게되고 맛이 이어지질 않는다.

매장에서 소비자들이 무심코 "새우젓 물 더 주세요"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말이 제일 무섭다고 한다. 대신 건더기를 듬뿍 더 담아드리면서 무마를 하곤 한다. 국물먼저 다 소진되면 나머지 새우젓이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새우젓과 광천토굴새우젓 자료를 공부하고 이야기를 구상하면서 우리농촌과 어촌이 너무 이쁘고 지혜롭구나 하는 마음을 감출수가 없다. 모든 곳에 역사가 있고 사람들의 수백년 애환이 묻어있고, 그곳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먹거리의 '고유함'이 사람들의 지혜와 어우러져 자연과 함께 흘러 다니는 곳, 바로 우리의 농어촌인 것이다. 광천 토굴새우젓은 먹거리를 넘어서서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역사이고 문화다. 그리고 우리 몸에 내재화된 맛인 것이다.

이정우 이승렬 형제의 '형님먼저 아우먼저'살아가는 방식도 토굴에서 잘 숙성되고 익어가는 새우젓처럼 잘 버무려지고 단련되어 그 가족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솔직하고 담백한 새우젓 총각 이정우군의 건승을 빈다.


버섯이 꽃등심 맛이구나!

작년 봄이런가 그 무렵 부터 난 한 여인을 은근히 좋아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에 관한 책을 보는데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지극정성으로 우정을 나눈 여인이 있어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도대체 누구길래 당대의 재사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았을까?

유희경, 이귀, 허균 등 당대의 내노라하는 뭇 남정네들과 사랑하고 우정을 나눈 여인, 그녀가 애지중지하던 거문고와 함께 묻히고 나서도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누워있는 부안 매창뜸을 찾아 의미를 놓고 마음을 놓고 가게 만드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매창공원내에 누워있는 이매창을 꽃이 활짝핀 프레임으로 들여다 보았다.

부안기생 계랑(桂娘,1573~1610), 스스로 붙인 호가 매창(梅窓)이다. '매화가 핀 창'이라는 뜻이니 별호마저 그녀의 삶을 고스란히 받쳐준다.

꽃다운 18살 나이에 20여살 연상인 예학의 대가이자 시인인 유희경과의 애끓는 사랑은 38살 짧은 생을 살다간 그녀의 일생을 관통한 키워드가 된다. 그 사랑은 고고한 기품으로 몸과 마음의 정절을 간직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했다.

"거문고를 끼고 시를 읊조리는데 그 재주에 놀랐고 정감어린 대화가 좋았다"고 허균은 기록했다.

그녀가 남긴 시의 면면을 접하다 보면 400년전 그 당시에 어쩌면 이렇게 현대적인 감각으로 세상을 들여다 봤는지 예사롭지 않다.


취하신 님께

이매창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요.


기생, 시인으로 시대를 앞서서 품었던 그녀다운 멋진 배포와 기개에 난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숙한 교태는 우아함으로 나타나고 녹록하지 않은 몸과 마음도 슬몃슬몃 육간대청에 내려 놓기도 했다.

▲ 이매창의 묘소(왼쪽), 명창 이중선의 묘소(오른쪽)

거기다가 또 한 사람의 여인이 그녀 곁에 누워있다. 명창 이중선(李中仙)의 묘다. 1920년대 실의에 빠진 겨레의 혼을 소리로 달래고 가락으로 부추기다가 몸과 마음을 한바탕 불사르고 1932년 부안읍내 어느 집 골방에서 겨우 서른을 넘긴 꽃다운 나이에 이슬처럼 사라져갔다.

중선의 언니 이화중선(李花中仙)은 당대의 최고 명창으로 특히 춘향가의 '사랑가'를 잘 불러 사람들의 얼을 사로 잡을 때 중선은 애절한 '흥타령'과 '육자배기' 가락으로 우리의 한을 달래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천재들은 요절하는가? 중선 묘소에도 두 번 절하고 320여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나란히 누워있는 두 여인을 그리워했다.

다정도 병인양
매창의 님그리는 절절함이
섬섬옥수 거문고소리를 타고

명창 이중선의 흥타령이
그 마음을 타고 오르내리니

2010년 어느 봄날,
부안 매창뜸에서
나그네 발길은 꽁꽁 묶이고 만다.

채석강의 아름다움

같은 형질이나 동일한 물성이 만나서 만들어 내는 것보다 서로 다른 성질이나 기운이 만나 만들어 내는 기기묘묘함이 더 강하다. 그래서 그런가 아무리 절절히 원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과 이루어진 조화로움이 한결 다이나믹하다. 바다와 육지라는 서로 다른 기운이 맞닿아 만들어 내는 해안은 어느 곳 하나 절경 아닌 곳이 없다. 그냥 그 자체로 이미 예사롭지 않은 데 부안 격포의 채석강은 세월과 자연이 만든 최고중의 최고였다


지형은 선캄브리아대의 화강암, 편마암을 기저층으로 한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이다. 바닷물에 침식되어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파도 치는 소리가 절벽에 부딪힐때 선연히 느껴지는 깊은 울림이 있다. 저 앞에서 알랑거리는 저 사람들이나 나나 위대한 자연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새삼스럽다. 주변의 백사장, 맑은 물과 어울려 풍치가 더할 나위 없다.

은근히 사모하던 여인 이매창을 만나고, 명창 이중선을 보고 변산반도의 바닷가를 굽이굽이 돌아 채석강을 섭렵하고 나니 어절씨구 부안을 다 품은듯하다. 직소폭포를 비롯 이매창이 연인과 친구들과 거닐었을 곳곳을 다 보지 못했지만 안 봐도 절경임이 분명할 터...

낯설지만 친근하고 기특한 풍경

부안에서 변산방면으로 10km쯤 달리면 하서면 석상리 마을 한가운데에 2,200여평의 최부진 두원농장이 있다. 무농약인증 입간판을 옆으로 하고 표고농장으로 들어서려는데 웬 젊은이(?) 둘이 부지런히 몸을 놀리며 작업에 열중이다.

▲ 표고버섯농사중 제일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다. 무거운 나무를 들어올려 작업대에 올려서 구멍을 뚫어야 한다.

올해 최윤빈(중3), 최윤(중1)되는 농장주인 아들 형제다. 일요일이라 엄마하고 할머니하고 다 출동해서 아르바이트중이란다. 입을 앙다문 녀석들의 일맵시를 기특해하며 최부진 강성숙 내외와의 첫만남은 이어졌다.

대부분 아이들은 자기 부모님의 직업이 농부라고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아빠가 버섯도 생산하고 전주에서 버섯가게도 운영하는 것을 기꺼워 한다. 아빠엄마가 일이 힘에 부칠때는 일손을 도와 농장에서 하루 종일 품을 보탠다 하니 여간 기특한 친구들이 아니다. 최부진씨가 아이들 농사 또한 잘 지은듯하다.

이렇게 두원농장 식구들이 총 출동하여 매달리고 있는일은 표고버섯이 살 집(참나무원목 종균접종)을 마련하는 일이다. 년중 제일 힘들고 고단한 일중의 하나다.

참나무원목을 들여야 하고 구멍 뚫어서 종균을 심는다. 100평 하우스에 약 1,800여개의 참나무원목이 들어간다. 원목 하나당 구멍을 굵기에 따라 90~150개를 뚫고 하나하나 종균을 심어 넣어야 하는 일이다. 표고버섯도 농작물처럼 연작피해가 발생한다. 땅에서 재배되는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연속적으로 표고를 재배하면 소출도 적고 벌레가 끓고 농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확하고 나서 1년을 그냥 묵힌다. 쉬도록 한다. 하우스도 사람과 마찬가지, 땅도 마찬가지... 쉴 때 쉬어야 한다.

하여튼 4~5동 원목을 배치하려면 근 1만개의 참나무 원목이 소요되는 것이고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들이고 구멍 뚫고 종균을 심어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 된다. 그렇게 종균을 심어 놓으면 당해연도부터 수확 하는게 아니다. 물도 주고 온도도 맞춰주며 자식 키우듯 하루하루 보살피며 1년을 숙성(부숙)시켜야 한다. 그래야 표고가 피기 시작한다.

버섯들은 잠자는듯 하지만 주인의 발자국 숨소리를 듣고 자라난다. 고요한 아침,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하루가 다르게 소록소록 커가는 버섯의 몸짓이 경이롭기만 하다. 언제 고생했는가 모르게 힘이 난다. 그 맛에 표고농사를 짓는것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다 신기하지... 사람 다른 것 마냥 똑같이 생긴놈이 하나도 없다. 다 저마다 제 성질 가지고 자라나고 살아간다. 밤하늘 별들이 들어와 박힌 모습이다. 밝은 놈, 어두운 놈도 있고 큰놈, 작은놈, 갓 나온 녀석, 어른티가 나는 친구... 작은 우주공간이다.

19년차 이제야 표고 농사의 맥을 알겠다

1989년 원래 변산이 고향이던 최부진씨는 농사짓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다가 도회지로 나갈 결심을 한다. 자그마한 키에 야물고 단단해 보이는 자기와 똑같이 생긴 아버지가 어느날 포도주를 한잔 따라주시며 "둘째 너는 나하고 같이 살꺼로 봤는데..." 하시며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거리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내 다시 돌아올테니 조금만 참으이소" 그렇게 인사를 하고 구미로 가서 도회지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딱 2년만에, 우연의 일치지만 2년전 떠난 그날에 다시 변산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1991년부터 표고농사를 시작했다. 부안에 시설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이 몇 안될때였다. 농사로 돈도 제법 벌자 사업욕심이 났고 바로 사기꾼들이 붙었다. 홀라당 다 털어먹고 1996년경에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최부진씨는 첫인상이 야물기 그지없다. 작달막한 몸집이지만 탱글탱글, 단단하기 그지없다. 2,000평되는 하우스도 파이프구조 세우는 것만 사람을 샀고 비닐도 혼자 씌우고 냉장창고도 스스로 알아서 지었다. 어느 해에는 17,000여개의 통나무를 11톤 차로 매일 2대씩 받아서 혼자 다 처리했다. 시골에서는 만능재주꾼이 되지 않으면 안 돌아간다. 필자의 어림짐작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야기 나누는 중에도 "드릴 날을 갈아주세요" "이것좀 해주세요..." 일꾼들의 주문이 그치질 않는다.

참나무 원목을 구하는 일도 노하우가 묻어난다.
보통 18년~22년 나이를 먹은 참나무를 선택하고 양지와 음지의 중간지대에서 자라난 친구들을 선호한다. 원목을 구할 무렵 정식 허가받은 벌목현장으로 달려가 나이테를 보고 자라난 지형을 보고 나무를 선택한다. 그러고 보면 참나무와 그니도 인연은 인연이다.

무농약으로 농사 짓는다는 것

▲ 두원농장 최부진 강성숙내외, 부안에서 4H활동 선후배로 만나 1995년 결혼했다.

2002년도에 부안군에서 두 번째로 친환경인증을 받았다.
참나무에 깍지벌레가 침입하고 때로는 민달팽이가 애써 길러놓은 버섯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그는 걱정하지 않는다. 아침 일찍 달팽이가 좋아하는 상치를 바닥에 깔아놓으면 달팽이들이 올타구나 올라앉는다. 그럼 그 놈들을 걷어내면 된다.

10년이 넘으면 그 분야 나름의 대가가 된다는데 19년을 표고와 씨름하고도 이제야 감이 잡히고 농사짓는 맛을 알겠다는 고백에서 겸손과 내공이 동시에 묻어난다.

매일아침 출근하면 밤사이의 표고이야기와 어제와 다른 새로운 모습들이 눈에 선하게 들어오면 마냥 신기하다. 어떤 녀석은 정말 자태가 아름다워 따기가 아까운 경우도 많다. 그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 해인가는 저녁 먹고 아내와 같이 버섯을 따러 들어갔는데 어찌나 많이 달렸는지 새벽이 와도 헤어나지를 못했다. 아내가 안보이길래 찾아보니 하우스 한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든 모습이 보였다. 고생고생 세상에...

"안선생님! 오늘 작업하는 것 보셨지요? 저거 하나하나에 일년 내내 몸과 마음이 가 있어서 저 아이들을 떠날 수가 없어요. 사람 사는 꼴도 정신 없구요. 보면 깎아달라는 이야기 못하시겠지요? ^^ 난 절대 싼값에는 안 팝니다."

버섯(菌)

▲ 우리집 식탁메뉴중 자주 즐기는 버섯구이

버섯은 포자번식을 한다. 바람에 의해 날리다가 습기와 온도가 맞는 조건에서 촘촘한 그물처럼 얽혀있는 실모양의 덩어리로 변하는데 이게 균사체(菌絲體)다. 이 그물에서 버섯의 자실체(子實體)가 자라는데 이게 우리가 버섯으로 알고 따먹는 보이는 부분이다.

버섯이 살기 위해서는 갖가지 유기물질이 필요한데 풀이 많은 곳에서 자라고 병들거나 죽은 나무가 버섯의 주식이 된다. 그러니 버섯은 '숲의 청소부'역할을 한다. 풀의 잔여물이나 잔가지 등을 먹어치우므로 '천연 부엽토'의 생성과정을 도와 숲을 비옥하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다.

버섯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식용, 약용으로 널리 이용되어왔는데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버섯을 '신의 음식(food of the gods)'이라 했고 동양에서는 영지버섯을 불로장생의 영약이라고 생각했다.

<동의보감>에서는 표고를 '입맛을 좋게 하고 구토와 설사를 멎게한다'고 했고 미국FDA에서는 표고버섯을 10대 항암식품으로 권장하고 있다. 표고는 생표고도 맛이 좋고 용도가 다양하지만 일단 말려두었다가 물에 잘 불려서 조리하면 맛과 향이 쫄깃하며 감촉이 좋아 색다른 질감을 맛볼 수 있다.

▲ 표고버섯 꽃등심

표고를 백화고 흑화고로 구분을 하는데 백화고를 상등품으로 친다. 최부진씨는 아주 잘생긴 거북이등처럼 쩍 갈라져 하얀 속살이 보이는 친구들을 보면 아까워서 그냥 놔둔다. 먹기가 아까워서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어보면 보기와는 딴판이다.

고생하며 자란 사람들이 진국이고, 크게 성취하는 경우가 많다. 완도의 지주식김처럼 밀물썰물 온갖 방해와 다투며 어렵게 자란 녀석들이 맛있고 영양가가 높은 것과 같다. 표고가 필 무렵에 적당한 습도와 온도가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데 가물어서 습이 부족해버리면 표고는 고생시작이다. 습(濕)은 없고 바람만 분다. 표고는 커져야겠는데 조건이 안따라준다. 방법이 없으니 등짝을 갈라치는 것이다. 그러니 찢어지지...

그런 백화고는 식감도 좋고 보기도 좋고 맛도 일품이다. 무엇보다 쫄깃거리는 향기는 고품격 그 자체다. 그런 녀석들을 최부진씨는 '꽃등심'이라 부른다.

▲참나무원목의 굵기와 길이에따라 90~150개 정도의 구멍을 꿇는다.

▲밀기울,톱밥,균사체,효소가 들어있다. 참나무구멍에 하나씩 넣는다.종균을 심은후 1년의 숙성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주고 온도 맞춰주고...

▲나무는 부식이 되어가고 그만큼 세월은 익어간다. 밤하늘의 별처럼 표고가 핀다. 천차만별 우주쇼다.하얀속살은 우리의 입맛을 돋군다.

꾸는 꿈은 무엇인가?

최부진씨의 꿈은 대형 버섯전문 생산유통시스템을 병합 운영하는 것이다. "버섯 하면 아! 그 사람 최부진! 그니 것이 최고야" 소리를 듣고 싶다. 농민이 살아남는 길은 생산과 판매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하고 진화 하는 중이다.

운명은 개척하기 나름이라며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요즘은 '드럼'에 빠져 지낸다. 드럼의 타악적 성격이 갖는 리듬에 흠뻑 빠져 지낸다.

일하랴 배우랴 사람들 만나랴
생산부터 유통까지,
버섯에서 드럼까지,
매장에서 인터넷쇼핑몰까지...

당차고 야무진 사람을 만났고 표고버섯의 풍미를 입안 가득 즐겼다. 한 사람의 집념이 가져오는 변화는 여러 측면으로 가치 있는 일이 되고 있다.

표고버섯을 따보든, 따보지 않든, 즐겨 먹거나 안먹거나 우리는 언제나 그 존재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기회를 만나기도 한다. 경이로운 자연의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표고버섯 또한 그 나름의 오묘한 삶의 원리에 기반하여 생명을 꾸려간다. 그러면서 보는 즐거움을 주고, 독특한 향기를 주고 고유한 맛을 우리에게 내어준다.

사람들은
송도삼절로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를 꼽고
부안삼절로 유희경, 이매창, 직소폭포를 꼽는다.
고향보따리에서는 이매창, 채석강, 최부진표고 이 셋을 '신(新) 부안삼절'로 이름 짓는다.

농업은 역사고 문화이며, 자연이고 먹을거리이기 때문이다.

 

신선도 탐낼 경북 울진군 근남면의 자연을 고아만든

저는 친환경이 고향인 울진 농가에서 수수쌀로 태어나 왕비천하늘 조청 댁으로 팔려갔습니다. 아주머니는 아상(我想)이 센 놈은 본인이나 남에게도 이로움을 줄 수 없다고 방아에 넣어 아작을 내셨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뜨거운 찜 솥에 넣어 쪄서 엿질금이라는 중매장이를 통해 푹 삶아진 도라지와 함께 하룻밤 동침을 시켰습니다.

몸도 마음도 하룻밤 새 녹아 버려 진액으로 변했고, 다시 가마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장작불에서 10시간이상 달여지고 또 달여져 존재감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존재감조차 없어진 내가 됐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생겼습니다.

모두가 나를 '수수도라지조청'이라 부르게 된 것 입니다. 이름을 지어준 아주머니는 내가 만인의 품속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몸이 되어 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 주셨습니다.


하늘조청,
그 조청의 이름을 짓고 잘 살도록 두손 모아 기도해준 울진 아주머니 이원복씨를 만나고 왔다. 신선들이 사는 곳, 혹은 세상에서 제일 속편한 곳을 찾으라면 바로 이런 곳이겠구나 생각했다.

좋은 물, 좋은 불, 좋은 바람.
멋진 나무, 살아있는 흙, 깊은 산속, 자연으로 만든 먹을거리.
거기에다 읽고 싶은 책으로 영혼의 허기를 달래고 따뜻한 차 한잔으로 몸의 허기를 달래는 경지, 뭐 이 정도면 신선이 노니는 곳쯤 되겠다.

경북 울진군 근남면 구산3리, 왕비천하늘조청을 돌아 보면서 바로 그 경지에서 서성거리며 내가 신선인지 신선이 난지 헛갈렸다.

울진 가는길


관동8경중의 하나인 망양정에 올랐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과 더불어 가히 사람들이 여덟가지 절경이라 이름붙일만 했다. 바다의 기운을 온전히 받아낼수 있어 좋았다. 망양정은 성류굴 앞으로 흘러내리는 왕피천을 끼고 동해의 만경창파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세워져 있고 그 경치가 관동8경중에서 제일가는 곳이라 하여 조선시대 숙종이 관동제일루라는 친필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망양루에 올라 세상을 바라본다. 내가 농촌이야기를 풀어가는 동안 누리는 큰 즐거움중의 하나, 농장 근처 문화유적이나 절경을 찾아가 잠시 내 몸을 그 품 안에 온전히 내려 놓는것이다. 허겁지겁 뒤따라 오던 내 영혼도 내 몸 옆에서 잠시 쉬어 가도록 안배하는 것이다

바닷속에 용궁이 있다면 서해, 남해, 동해중에 아무리 봐도 동해바다 저곳에 있을게 분명하다. 맑고 깨끗하고 깊은 바다, 단순하게 그냥 바다만의 의미는 아니지 싶다. 아주 많은 바닷속 이야기가 있다.

울진에서 포항으로 달리다 성류굴 안내 팻말을 보고 접어들면 왕피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입구 초입에 잔잔한 호수같이 시작되는 계곡이 보인다. 거의 다 왔나 싶었는데 아뿔사 여기서부터 굽이굽이 첩첩산중 한참을 돌아 오르고 내려서고 또 여러 번 반복을 해서야 겨우 마을이 보이고 왕비천 하늘조청 안내판이 보인다. 여기는 공장이고 또 들어온만큼 더 들어가야 조청을 만드는 그 사람이 사는 곳이다.

▲ ⓒ프레시안

티없이 맑은 물이 흐르고 인적 드문 산골에 달콤한 향기가 진동한다
오지의 마을사람들과 끈끈한 정을 이어주고 오랜 '기다림의 미학'을 깨닫게 해주는 왕비천 하늘조청, 그 조화속으로 들어간다.

조청25시


새벽4시
하루전 물에 불린 수수를 찜통에서 찐다. 찌는 동안 조청의 또 다른 재료인 도라지, 무, 조릿대 등을 4~6시간 가마솥에 넣고 푹 끓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몸에 이로운 영양소가 우러나오게 된다.


오전10시
도라지, 무우, 조릿대 등을 건져내고 우러난 물에 수수밥과 엿기름을 넣고 난 다음 8~12시간 정도를 삭히게 된다. 이때 온도조절이 아주 중요하다.


다음날 오전 10시
숙성이 된 조청을 짜고 난 다음 다시 가마솥에서 8시간 가까이 졸이게 된다. 화력이 좋고 불조절이 용이한 참나무로 온도조절을 하기 때문에 일일이 젓지 않아도 조청이 타지 않는다.


조청이 다 고아져서 퍼내고 나면 무쇠 솥바닥에 조청누룽지가 눌어붙는다. 이거 긁어먹는 맛은 아무나 못 누리는 특권이다. 맛있다. 달지 않은 깊은 맛이다. 한 번 두 번 입에 물다보면 몇 번이 입에 가는지 모르겠다. 질리지 않는 은근한 단맛에 몸이 매료되는 것이다.

▲ 하늘조청은 바다, 땅, 산, 불의 기운이 모아 고아진 보약이다

오후6시
이틀간의 기나긴 과정을 거치게 되면 비로소 달콤쌉쌀한 조청이 완료된다. 전통재래방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많은 양의 조청을 생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맛은 아련한 기억속에 자리한 그 옛날 어머니가 해주셨던 조청의 맛을 느낄수 있도록 정성을 다한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이원복씨의 친정은 강원도 정선이다. 정선에서 어릴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조청 맛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부산에서 불화(佛畵)를 그리면서 20년을 살았다. 생계수단이기도 했고 창작활동이기도 했다. 불교의 이념을 담아내는 불화를 그린다는 것은 '혼자'를 의미했다.

밤을 새우며 혼자 그리고, 생각하기도 혼자 해야 하고 우주와 자연을 대하기도 혼자 하는 일이다. 그러던중 그림을 그리러 왕피천 이곳에 들렸다가 너무나 맘에 들어 눌러 살기로 작정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어머니의 조청을 만들고 싶어진 것이다. 그때 마침 폐교된 초등학교가 교육청 공개입찰로 나왔길래 제일 비싼 응찰가격을 써내서 낙찰 받았다. 내가 살집이기에 당연히 선택해야 했으므로 최고가를 써낸 것이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흘렀다.

이 동네는 얼마나 골짜기가 깊은지 6.25때도 전쟁이 났는지도 모르고 지낼 정도였다. 전쟁이 한참일때 사람들이 이곳으로 하나 둘 피난을 오고 나서야 소식을 들었을 정도라고 하니 영화 '동막골' 버전의 다른 모습이다.

이곳 사람들은 마음먹은 만큼만 지어먹고 산다. 크게 욕심내지 않고 딱 자기 먹고 살만큼 농사짓고 풍요로운 자연속에서 마음이 부자로 산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이원복씨의 조청맛을 눈여겨 보던 울진군 농업기술센터의 권고로 조청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지금은 불화 그리기는 손을 놓은 상태다.


참나무

이원복씨와의 대화에서 참나무 이야기가 참 많이 나왔다. 지난번 표고버섯이야기에서도 참나무의 물성과 성질에 대하여 느낌이 하나 가득 했었는데 이번에도 또 참나무가 주인공 노릇을 톡톡히 한다.

참나무는 새 생명을 잉태시키는 성질이 있다. 자신을 태우거나 썪혀서 다른 것의 근본이 된다. 썩어가며 표고버섯을 잉태했고 조청의 무쇠솥 아궁이에서는 스스로를 태워가며 자기 역할을 다한다. 조청은 무쇠솥 아궁이를 운영할 때 장작불보다 숯불로 온도 조절을 하는게 중요한데 다른 나무들은 2시간 이상을 숯으로 가져가기 어렵다.

또 나무 타는 냄새는 나되 나무자체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 이는 음식을 조리하는데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보통 나무는 음식에 나무 맛이 배기 마련이다.

참나무재로 머리를 감으면 비듬도 안 생기고 잿물로는 항아리를 닦는등 환경친화적인 물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한방의 대표적 처방중의 하나인 경옥고를 고을때는 땔감으로 뽕나무 뿌리만 쓴다. 그래야 제대로 약 성분이 기운을 타고 흘러 다닌다. 조청을 고을때 참나무를 쓰는 이유도 같다.

'타닥타닥' '타다닥타닥'
제 한몸 희생해가며 타고 있는 참나무를 보고 있으면 근심과 시름이 한 순간에 물러가고 잠시나마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사색의 시간도 가질 수 있다.

도라지, 조청, 조릿대

▲ 해안가 야산에서 조릿대를 채취하는 이원복씨

도라지수수조청는 바다의 기운과 땅의 에너지와 산의 정기들이 다 모여서 만들어진다. 무와 도라지는 왕피천 마을분들에게 농사를 권해서 짓고 조릿대는 해안가 야산에서 얻는다.

도라지 1~2년생을 쓰면 맛이 아리고 약성이 불충분해서 하늘조청은 5년근 이상 도라지를 40%이상 반드시 사용한다. 그래야 맛이 순화되고 약성이 활성화된다. 수수는 대부분 현미의 개념으로 쓴다. 박피만 살짝 한다는 의미다, 수수하면 생각나는 붉은 빛깔, 그 붉은색 내는 성분이 항암작용에도 좋다고 한다. 아기의 돌, 무병장수의 상징으로 수수팥떡을 내세운 것을 보면 수수의 가치가 새삼스럽다.

한가지 아주 신기한 일은 수수조청을 그렇게 이틀 동안을 녹이고 졸이고 다른 놈들과 섞여서 나오는 진액인데도 먹어보면 웬지 꺼끌꺼끌하다는 느낌이 든다. 만져보면 액상인데 입속에서 느끼는 조화속이다.

자연 선순환

▲ 부산물 발효퇴비장 & 무쇠솥 가마 굴뚝

왕피천의 바람과 참나무는 에너지로 타서 자연으로 돌아가고, 찌고 졸이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잘 발효시켜 미생물발효퇴비를 만든다. 도라지밭이나 무밭에 밑거름으로 쓰니 버릴게 하나 없다. 자연의 순환고리 안에서 사람도 작물도 모양만 변할 뿐 비우면 채워지고 채워지면 비워가면서 조청을 만드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 마을 주민들에게는 수수 무우등 원료작물을 재배하게 하여 소득보전에도 도움을 주고 받는다. 왕피천 산골인심이 조청속으로 저절로 녹아 드는 효과를 보고 있다. 세속에 찌든 계약 관계에서 나오는 조급함, 얍삽함, 안타까움, 서러움... 그런 느낌들은 들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부르고 당기고 마음 가는 대로 손이 가고 손가는 대로 마음이 따라간다. 그렇게 보기 좋은 모습으로 왕피천 사람들은 산다.

앞으로의 꿈

전통방식으로 시간과 농촌의 기운과 정성으로 만드는 조청 만들기는 사업적 개념으로 크게 키우고 말고 하는 컨셉은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다만 바라는게 있다면 우리의 어린아이들이 다 이런 조청을 먹고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꿈을 피력한다. 하늘조청은 발효식품으로 위장, 대장에 좋고 항생제로 몸의 면역력이 저하된 경우 몸의 기를 북돋아주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지금의 조청공장을 리모델링할 생각이다. 공장은 물이 얼마나 좋은지 이끼도 안끼고 약수 이상 간다. 리모델링을 해서 체험공간을 넓히고 도시가족들이 직접 참여하고 만들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서 아주 낮은 가격으로 가정에서도 손쉽게 쓸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 조청을 먹여야 하기 때문이다.

종합영양제 조청

조청은 두뇌건강에 좋은 필수음식이며 아이들의 학습시기에 가장 적합한 음식이다. 벌꿀은 제한된 꽃으로만 밀원을 조성한다면 조청은 흙속에 있는 영양소를 고스란히 받아낸 뿌리와 줄기, 잎과 열매, 꽃에서 얻어낸 종합영양소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조청은 우리고유의 음식을 장만할 때 좋은 토속적인 풍미와 맛을 살릴 수 있다. 한과나 약과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물론이고 과자를 만들때 쨈 대용이나 각종 요리시 양념으로 사용하면 좋다.

조청은 정제과정을 거치지 않으므로 각종 영양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 우리의 안전한 먹거리다. 조선왕실에서는 왕세자가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조청을 먹었으며 과거 보는 선비들의 짐보따리에는 조청단지가 필수품이었다.

가마솥 3개에서 나오는 조청의 양은 그리 많지는 않지만 1박2일의 '짧지만 긴 기다림'끝에는 언제나 짜릿한 달콤함이 있다. 그니가 짧은 시간안에 많은 양을 만들 수 있는 현대식 기계들도 많이 있지만 이런 재래방식을 고집하는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어릴적 어머니가 강원도 정선에서 해주셨던 그 조청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어머니의 옛 손맛을 따라 갈 수는 없지만 저처럼 그 맛이 그리운 분들과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지금이 내게 가장 큰 보람이다."

차 한잔의 여유


집 바로 아래가(학교운동장 아래)왕피천 천연계곡으로 장관을 이룬다. 봄물이 살짝 오른 나뭇잎과 물빛이 나그네 마음을 사정없이 잡아 흔든다.
"이런 데서 차를 마시면 오염을 마시는거 같아요 ^^. 주변이 워낙 깨끗하니까요."

이런저런 이야기 주고 받다가 50대에 막 들어선 내가 "지나보니 나이 50은 죽어도 안 오는줄 알았습니다." 했다. "나이 50은 자기가 뛰어 넘는 것입니다" 바로 받는다.

무릎을 탁치며 "맞네요, 정말 그렇군요." 그리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깊은 자연속에 묻혀 사니 내가 나이를 먹었는지 나이가 나를 먹는지 구분이 안되고 잊어먹고 살게 된다. 1957년생, 개념 있는 그녀의 상황풀이는 곳곳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작년에 친정어머니가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막내야 막내야!" 막내딸 이원복씨를 영혼에 품으시고는 하늘로 가셨다. 엄마의 뜻을 막내가 이어 받는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내려온 손맛을 놓치고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조청에는 어머니의 '얼'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그 고백이 안병권고향보따리에서 하늘조청 이야기를 다루고 소개하는 이유이고 결과이다.


아무 때나 따지 않는 봄의 미인

매실의 계절이 돌아왔다.

살아있는 것들은 그때그때 맞추어 제철에 나오는 먹거리를 먹어야 한다. 몸이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배고파서 먹는게 아니라 몸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먹는 것이다. 그 절기에 제철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자연과 내 몸이 상통(相通)하는 일종의 '제례(祭禮)의식'이다.

매실이 절기로 갖는 의미는 추운 겨울을 이겨낸 첫 결실이기도 하고 새해 새봄 입맛을 돌게 하는 기분 좋은 첫번째 자극이다. 매실이 담고 있는 사연도 많은 사람들이 연중행사의 하나로 생매실로 술도 담고, 엑기스도 만들고 짱아찌도 담는다. 또 겹겹이 사연도 많아 필자의 생각과 궁합이 맞아 떨어지는 결과물중의 하나다.


전남 광양 옥곡 매실농장

따르릉!
"금년에는 생매실을 언제 공급하시나요?"
"예, 6월 20일이 넘어야 합니다."
"아니 다른 데는 보통 5월이나 6월초면 이미 끝나버리는데…"
"우리는 완전히 나무에서 제 본성대로 익은 다음에 수확을 해서 보내드립니다. 그래야 매실 본연의 맛을 드러내거든요. 송구스런 이야기지만 고객들이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내려가서 뵙지요."
며칠 전의 단호한 응답을 기억하고 기대감을 가지고 광양에 내려갔다.

▲ 좋은 쇠는 뜨거운 화로에서 백번 단련된 다음에 나오는 법이며, 매화는 추운 고통을 겪은 다음에 맑은 향기를 발하는 법이다. <주역>

매화는 엄동설한 속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뿜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설중매(雪中梅)를 통하여 꺾일지언정 굴하지 않는 선비의 절개를 느끼게 하고, 희고 맑은 색과 야하지 않고 은은한 향기는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여겼다.

매화는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유교적인 가치관으로는 군자(君子)를 상징하고
불교에서는 부처의 화신(化身),
도교에서는 신선(神仙)으로 보았다.

민간에서는 주렁주렁 열리는 매실의 풍요로움을 다산(多産)의 컨셉으로 보았다. 겨울의 추위를 이기고 가장 먼저 피는 봄의 전령으로서 '선구자'를 상징했고 봄바람을 타고 오는 미인(美人)을 상징하기도 했다.

매실을 왜 망종 이후에 수확하나?

망종은 양력으로 6월 6일경이다,
매실은 꽃이 핀 후 열매가 결실되어 조금씩 자라게 되는데 5월 중순이 되면 제법 매실이 모양을 갖춰 겉으로 보기에 별차이가 없어 보인다. 매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크기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씨가 여물고, 표면의 솜털도 벗겨지게 된다. 색깔이 연두색에서 짙은 청색으로 그리고 나중에 완숙되면 노란색으로 변하게 된다.

▲ 5월 3일, 어린 매실(왼쪽사진)은 솜털이 보송보송 여린 빛이 역력했다. 조금더 자라면 청매실이 된다(오른쪽사진)

흔히 청매실이 몸에 좋다고 선호하는 소비자들 때문에 푸른 매실은 다 청매실인줄 아는데 사실 청매실이란 품종은 없고 매실이 노랗게 익기 전의 상태를 '청매실'이라고 부른다.

매실씨에는 청산배당체(아미그달린)가 들어있다. 이 친구는 살구씨, 복숭아씨, 은행, 푸른콩에도 일부 들어 있는데 우리의 장내효소와 결합하여 시안산화합물을 형성하여 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이다. 하지만 장내효소와 결합하지 않도록 아미그달린만 추출하여 혈액에 주사하면 암세포만 골라 죽이는 성질을 갖고 있다 하여 연구가 활발하다고 한다.

흔히 항간에 매실의 독 운운하는 것은 바로 이 아미그달린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미그달린은 풋매실에는 씨뿐 아니라 과육에도 다량 함유되어있다. 그러니까 매실과육에도 있던 아미그달린이 매실이 점점 자라나면서 매실씨에만 남게 되는 것이다. 매실이 완전히 익어 씨가 단단해지면 매실과육에는 아미그달린이 남아있지 않게 된다. 아미그달린은 설탕과 소금이나 알코올에 의해 분해되면 식중독을 일으키지 않고 우리 몸에 유리하게 흡수되게 된다.

무릇 모든 과실은 제대로 익어야 제 성분을 내고 효능을 발휘하는 바, 풋매실의 과도한 아미그달린 섭취보다는 안전하게 제대로 익은 매실씨에 의해 얻는 아미그달린 효능이 더 안전할 것이다.

거기다 5월 달에 수확한 매실에 비해 6월 중순 이후에 수확한 매실 구연산 함량이 무려 14배나 많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우리가 매실을 먹는 가장 큰 이유가 '피로회복과 체질개선'이라고 한다면 완숙된 매실 즉 '망종 이후의 매실'을 먹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이옥분 여사는 망종 이후 시기를 잡아 수확을 하여 나누는 것이다. 좋은 값을 받고 아니고를 떠나 물 흐르듯 순리에 맞춰 제대로 된 매실을 공급해야 '오래가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함초롬 이슬 머금은 매실농장


전남 광양 옥곡IC를 빠져 나오면 집은 옥곡 중학교 인근에 있고 함초롬이슬머금은 매실농장은 한참을 더 올라가 해발 500m높이에 있다. 예전에 다랑이 논이었던 곳까지 알뜰하게 매실을 심어 오늘의 농장을 일구어냈다.

함초롬농장은 그 지역 제일꼭대기에 자리잡아 오염원이 전혀 없고, 바람과 햇빛의 혜택을 골고루 받을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 농장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제일 나이 많이 먹은 40여년된 매실나무다.사람이나 나무나 나이는 그냥 먹는게 아니다. 중후한 맛, 묵직함이 느껴진다.

▲ 농장 산꼭대기 정상부근에 있는 삼형제바위는 방문객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해준다. 차근차근 사이 좋은 삼형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묻어있을까?

오래오래 가는 일

▲ 풀과 나무가 같이 큰다. 무농약인증농가 표지판

생산과정에서 농약을 치지 않고 풀이 다 자라나면 베어서 나무 밑에 놓아서 거름되게 한다. 풀도 농장의 한식구로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크도록 배려하고 손작업으로 베어내 밑거름으로 쓰는 것이다. 또 일체의 오염원이 없는 산꼭대기에 위치한다. 충분히 익혀서 따므로 맛과 향도 덩달아 좋은 편이다. 하늘,바람,구름,땅,햇볕…. 높은 산 위에서 마주하는 자연의 풍성함은 함초롬 매실의 품질로 고스란히 전이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익은 것을 골라 따야 하므로 이 험한 농장비탈을 오르내리며 일일히 사람 손으로 선별하여 딴다. 따낸 것을 딸들하고 죽 늘어 앉아서 선별작업을 하는데 딸애들이 참 옹골차다. 푹신한 포대에 매실을 부어 깔아놓고 기준크기에 미달하거나 상처 있는 것들은 하나하나 골라낸다. 한번만 하면 될텐데 딸애들은 한번 더 뒤집어서 똑 같은 작업을 한번 더 하면서 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귀하에 해야 고객들이 알아주고 우리들의 일을 오래오래 할 수 있도록 하거든, 엄마!"

▲ 수확철이 되면 시집간 딸들이 총 집합이다. 하나하나 빈틈없이 고르고 또 고른다.

식초나 가공상품 만들 때는 4~5년이 걸려도 기다려서 만든다. 화학첨가물을 넣어 인위적으로 맛을 만들어 내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런 행동들은 오래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옥분 여사와의 대화에서 자주 나온 '오래가는 일'이란 말과 뜻이 오래 남는다.
상품이 차고 넘치는 지금 세상에서 작지만 잔잔한 감동으로 '소비자들의 마음'과 직거래하려는 몸짓인 것이다.

산에서 나는 약재(산야초)에도 애정을 쏟아 고객들이 어디어디가 아프다 소식이 들어오면 농장에 자생하는 약초를 캐서 보내준다. 고객은 감동해서 뭉클한 심정을 전해오기도 한다.

7남매이야기

엄마는 늘 밥상머리에서 틈나는대로 책을 읽었다. 그런 자연스런 분위기가 보이니 초등학교 동생들은 쉿! TV 꺼! 힐끗힐끗 엄마 옆에 앉아서 죽 책을 본다. 7남매가 2년 터울이라 옷물림, 책물림이 자연스러웠고, 여러 손을 거친 책은 아주 헌책이 되서 부엌 아궁이 불쏘시개로 쓰곤 했다.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면서 엄마는 그 책을 하나하나 읽고 계셨다.

아이들은 그런 엄마가 너무 멋있었다. 엄마는 공부하란 이야기를 한마디도 안했다. 그렇게 그 애들은 스스로 알아서 공부들을 했고 7남매 모두 원하는 곳에서 자기하고픈 공부들을 한껏 마칠 수 있었다.

- 둘째딸 문미경씨 회고 -


▲ 이옥분 문희주 부부와 7남매가족들

이옥분 여사는 위로 딸 여섯을 두고 막내로 아들 하나를 낳았다.
산꼭대기 마을에 살면서 워낙 가난한 살림에 비단장사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대구 섬유시장에서 비단을 끊어 남편은 등짐을 지고, 엄마는 머리에 이고 뒤로는 애 하나를 업고 양손에 방물꾸러미를 들고 경상도로 전라도로 비단을 팔러 다녔다. 꼬물꼬물 조무래기들을 먹여 살려야 했고, 학교를 보내야 했고 악착같이 살아내야 했다.

부모가 장사하러 돌아다녀야 하므로 아무래도 학교근처에 있어야 그나마 남은 아이들이 조석을 끓여먹고 학교 가기가 수월타 싶어 학교근처로 집을 옮겼다. 그런 이유이기도 했지만 맹모삼천지교의 심정으로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공부를 제대로 하도록 해야겠다는 마음도 일견 가졌다.

"애들은 애들대로 나하고 애 아빠는 애 아빠대로 온 식구가 고생 많이 했지요.
우리는 우리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

그 살아온 이야기를 죽 하는데 필자인 나도 눈물이 퀭했다.
이야기 나누다가 퀭해지면 옷깃을 여미고 다시 이야기 나누고 그러다가 또 마음 쨘해지고…

필자의 어머니도 고등어(생선) 행상, 과일 행상, 인삼 행상으로 나와 내 여동생을 키워냈다. 유년시절에 우리 집은 대전시 태평동에 살았다. 석양이 뉘엿거릴 무렵 뚝방길 저쪽 지는 해를 등뒤로 엄마가 하루 종일 고단한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이면 왜 그리 기분이 좋았는지…. 철이 없어도 한참 없을 때다. 지금은 홀쪽 하시지만 당시만 해도 몸이 좋으신 편이었다.

이거 팔아서 얼마 남고 저거 팔아서 얼마 남고…. 새끼들 눈에 밟힌다며 장사가 잘된 날 즐거워 하시던 엄마가 생각이 나서…. 팔다 남은 갈치쪼가리로 엄마가 끓여주신 갈치조림이 얼마나 맛나던지….
엄마는 비린내를 아주 싫어하시는데 그때는 장사까지 하셨으니 엄마의 생활력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이옥분 여사, 농장 일을 이어받을 준비하는 둘째딸 미경씨, 그리고 나.
셋은 이야기 하다 말고 콧날이 시큰거리고 눈시울이 빨개졌다. 각자는 엄마가 그리웠고 사무쳤고 이옥분여사는 애들이 생각났을 터….

안병권의 고향보따리에서 눈시울이 뜨거운 채로 현장 인터뷰하기도 처음이다.

닭을 키우는 엄마

농장 길을 올라가는데 이옥분 여사가 닭모이 걱정을 한다. "그럼 먼저 주고 올라가시죠, 뭐. ^^"
그랬더니 반색을 한다.

이옥분씨는 오래 전부터 닭을 키웠다. 처음에는 사위들 오면 주려고 키웠다. 사위가 여섯이나 되니 '사위사랑은 장모'라 씨암탉 잡아서 주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자식들이 또 제 자식들을 낳고 나서부터는 닭들이 낳는 알을 손자손녀들에게 먹이는 재미에 30여년째 닭을 키우고 있다. 아이들에게 먹이고픈 심정 그대로 '장모의 사위사랑 닭 키우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이 닭들에게는 매실을 먹인다. 그래서 그런가 잔병치레 안하고 건강하고 실하게 자라나 자기들의 역할을 다하는 닭이 된다.

▲ 장닭과 암탉들을 방사하여 키운 계란이다. 필자에게도 한 판을 주시길래 얼른 받았다. 그 집 사위가 되는 기분으로…^^

엄마의 꿈

▲ 이옥분 여사와 둘재딸 문미경씨

이옥분여사는 사람은 배운만큼 넓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수준에 맞는 친구를 사귀게 된다고 믿는다. 해서 몸소 몸으로 책을 읽고 사람사는 도리를 보여주며 아이들을 키웠다. 대학은 입학만 시켜주마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주의 였다.

농장꼭대기까지 걸어서 올라갈 때다. 아이들 이야기좀 해주십사 청했다.

큰애는 말이 없이 과묵하고 진중하고
둘째는 활발하고 민감한 편이고
셋째는 더하고…..
넷째는 대학연구실에 있고
다섯째는 고교선생님으로 지가 시켜버릇하며 야물다
여섯째는 약사로 일하고
막내는…

한마디 한마디
한아이 한아이
고스란히 품고 있었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2005년도 전까지는 매실을 생산해서 순천장에 내다팔고 알음알음 전화로 주문 받아서 팔고, 농협 같은 기관을 통해 출하했다. 그러던중 힘없는 농민상대로 물량과 가격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을 경험하고 나서 한바탕 뒤집어 엎었다. 그리고 발길을 이내 끊고는 소비자들과 직접 거래하는 방식을 찾았다. 해서 셋째딸이 공부하여 농장홈페이지를 개설했다. 그게 2006년도의 일이다.

그 덕분에 점점 외연이 넓어져 이제는 제법 많은 고객들이 함초롬 이슬머금은 농장을 알아주게 되었고 광양기술센터에서 2010년 그렇게 소원하던 매실가공시설지원자금을 내려 보내줘서 지금 착공을 하고 시설준비가 한참이다.

그리 크지 않은 시설이지만 평생 꿈을 이룬 것 같고, 이옥분 여사의 꿈과 희망을 매실에 버무릴수 있어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사업을 크게 키우거나 외부지원에 의존하는 컨셉이 아니고 그저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농장도 발전하고 아이들도 잘살고 고객들도 덩달아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꿈이다. 그니의 말대로 '오래 하는 일'을 하고 싶고 '오래 하는 일'이 되고픈거다.
금년 가을 무렵부터는 이옥분 여사는 매실가공상품들을 세상에 공식적으로 뽐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의 어려서부터 꿈이 고아원을 차리는 일이다. 엄마는 조건 없이 도움을 주고 싶어한다. 지금도 새마을 부녀회일원으로 노인들 목욕시키시고 지역 행사에 발벗고 나선다. 내게 다소 해가 되더라도 상대방이 불상타 싶으면 도와줘야 직성이 풀린다.

어렸을 때 기억이다. 어느 날 엄마가 미용실에서 젊은 아가씨를 만났다. 집도 없고 갈데도 없는 그녀가 측은해서 집으로 데려왔다. 먹이고 재우겠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애기(여동생)를 맡겨놓고 매실밭에서 일을 하다가 집에 와보니 애도 없고 그 아가씨도 없었다. 느낌이 이상해서 맨발로 그 높은 집에서 뛰어 내려와 마을입구까지 내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가씨가 애기를 데리고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의 손에는 집의 시계와 패물이 들려있었다.

엄마는 호되게 혼을 내고 아이의 손을 나꿔챘다.

- 둘째딸 미경씨의 회고 -


하지만 엄마는 시계와 패물은 그녀의 손에 그냥 들려서 보냈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그녀가 불쌍했던것이다.


엄마는 항상 자식들보다 먼저 간다.
진자리 마른자리 살피고
모든 근심걱정 감싸 안고 저만치 앞서 간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엄마의 저 마음을 따라 잡을 수는 없다.

지난 40여년….

매실을 머금고
자식을 머금고
함초롬이 이슬 머금은

엄마가 저만치 간다.

오순도순 둘러앉은 따뜻한 저녁밥상의 주인공

2002년도 서천 어느 농촌어메니티 농장에서 벌어진 마을축제에서 안동지방에서 오신 분들의 탈춤공연을 본적이 있다. 전문적인 춤꾼들이 아니고 아마추어들이었는데 오히려 그분들의 그런 맛이 내게는 훨씬 더 유쾌했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슬며시 구경하다가 하회탈의 매력에 빠져들어 뒤로 넘어 가는 줄 알았다.

보면 볼수록 가까이가면 갈수록….

능청스러움이 도를 넘어 어떤 경지에 이르고, 까딱까딱 건들건들, 몸놀림 탈놀림이 내 눈을 유혹하는데 아주 즐거운 추억이었다.

빤히 쳐다보는 것 같은 데 아니고 아니다 싶으면 빤히 쳐다본다. 탈의 얼굴 윤곽이 실물로 점점 보여지다가 어느 순간 멈칫거린다. 그러다가 슬며시 다시 살아서 움직이고….

탈과 얼굴 사이 공간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여운은 실재와 허상이 구분이 안되는 묘한 울림을 주기도 했다.

▲ 안동하회탈춤

탈춤은 익명에 가린듯하면서 너무나 현실적이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속내를 적나라하게 볼수 있었다. 그 이후 멀게만 느껴졌던 안동하회탈의 의미와 안동이라는 의식적인 공간은 상당히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다가 요즘 들어 이야기농업의 인연으로 또 하나의 '안동'이 훅하고 밀려오기 시작했다. 안동 간고등어 때문이다.

고등어 추억

유년시절, 나는 대전시 태평동에 살았다. 엄마는 언제부터인가(필자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광주리 행상을 시작하셨다. 머리에 또아리 하나 얹고 큰 고무다라이를 이고 가가호호 다니면서 과일이며, 생선을 주로 팔았다. 그 기억속에 생선으로는 '고등어'와 '갈치', '이면수', '꽁치'가 주종을 이루었다. 값도 싸고 맛도 있고 그런 종류들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반고등어가 기본품목이자 주력상품이었다.

비린내가 날까봐 비닐로 촘촘히 동여맨 고동색 고무다라이. 엄마는 운전사 눈치를 보아가며 잘사는 동네였던 상평으로 머릿짐 행상을 다녔다. 그 시절 태평동은 상평, 중평, 하평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상평은 대전조폐공사 다니는 직원들이 많아 잘사는 동네로 소문이 났다. 하평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 살았다. 우리 집은 하평에 살았다. 내가 좋아하던 친구들이 상평에 많이 살았던터라 엄마가 그 동네에서 장사 하는것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저녁 햇살 뉘엿뉘엿, 마을 뚝방길에 나가 연을 날리며 저 멀리 엄마 돌아오는 길을 기다리곤 했다. 식구들 모습은 아무리 멀어도 다 안다. 영락없이 엄마다 싶으면 쏜살같이 달려갔다.

다 성장해서 어느 날인가 "엄마! 왜 그때 광주리 행상을 시작 하신거죠?" 여동생과 내가 물었다. 우선 먹고 사는 일이 어려웠고 계기가 된 것은 어느 날인가 열린 옆집 잔치였다고 한다. 엄마가 가서 일손을 거들고는 작은 갈치쪼가리 몇 개 얻어오셨다. 채반에 담아 햇빛에 꾸들꾸들 잘 말려서 기름에 튀겨 놓았더니 나하고 여동생이 얼마나 맛있게 먹던지….

아마 옆집강아지 고기 뼈 탐하듯 했던 모양이다. "어휴! 저것들이 비린 맛을 본지가 오래 되서…." 마음이 아프셨다.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밑천을 빌려 장사를 시작하시게 된 것이다. 애들을 먹이기 위해서. 밑지지만 않으면 애들 먹이는 것으로 족하지 싶었다. 그래서 엄마 돈에서는 항상 비린내가 났다.

국민생선 고등어

2009년 우리나라 수산물 매출액의 26.5%를 차지한 고등어는 국민생선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에도 나오고 시에도 나오고 가요에서도 주인공이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가수 김창완의 노랫말이 가슴을 울리곤 했다.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남쪽 바다로부터 올라와 일부는 서해로 가고 일부는 동해로 가고 제주도 근해에서 생활한다. 수만마리가 떼를 지어 서식하는데 제주도 근해는 바닷속 조류의 흐름이 빠르다. 고등어는 새우를 주로 먹는데 빠른 물속에서 먹이를 잡아 먹으려니 얼마나 바쁘게 움직여야 하겠는가? 운동량이 많아지니 몸이 유선형으로 날렵하게 된다. 그러니 고기가 맛이 있을 수밖에.
흑산도 앞바다로 올라간 놈들은 먹고 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아서 통통하긴 한데 살이 물러서 맛이 떨어진다.

또 절기로 보면, 5월 무렵 산란을 하는데 그 무렵에는 비린내가 심하고 뱃살이 없다. 기름기가 없어지고 살이 홀쭉해지는 것이다. 해서 봄 고등어는 별로다. 산란 후에는 겨울을 나기 위하여 부지런히 먹이를 먹고 지방을 비축하기 시작한다. 기름기가 흐르고 윤기도 나고 고기의 맛도 좋아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겨울고등어다. 겨울철 제주 연근해산 고등어를 최고로 친다.

정약전 선생은 <자산어보>에서 벽문어(碧紋魚),●고등어(皐登魚)라고 기록했다. <경상도 속한지리지>에 고도어(古都魚)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길이가 두자 가량이며 몸이 둥글다. 비늘은 매우 잘고 등에는 푸른 무늬가 있다. 맛은 달고 시고 탁하다. 국을 끓이거나 젓을 담글 수는 있어도 회나 어포는 할 수 없다. 밝은 것을 좋아하는 성질이므로 불을 밝혀 밤에 잡는다.

먹거리는 '문화'다. 먹거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지역이라는 고유함은 사람들이 살아야 의미가 있다. 먹을거리와 문화와 지역 그리고 역사는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사람도 이어지고, 문화도 이어진다. 여기에 하나 더 매우 창발적인 사람들의 생각이 모아지면 인식과 상식 사이의 공간을 허무는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기도 한다. 안동 간고등어처럼….

안동이라는 경북 내륙의 깊은 산골에 간고등어라는 먹거리가 출현하여 세상을 맛깔지게 만들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제주 근해산 겨울고등어가 부산 공동어시장을 거쳐서 안동으로 올라와 간고등어로 변신하기까지….

안동은 경상북도 중앙에 위치한 내륙지방이다. 이는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지리적인 조건과는 애당초 거리가 멀었다. 안동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해안지역인 영덕 강구항으로부터 해산물을 운반해와 먹었는데 바로 이 대목이 안동 간고등어가 출현 하게 된 배경이 된다.

▲ 영덕에서 안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황장재와 임동 챗거리장터의 현재 모습이다.

아쉬운 것은 고개마루에도 옛 챗거리 장터에도 간고등어나 해산물 물산이 이루어지던 곳이라는 안내판 하나 없다. 이곳에 작은 조형물이라도 조성하여 달콤짭쪼롬 했던 '간고등어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보여준다면 많은 사람들이 추억에 젖고 기념촬영도 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 받을수 있을텐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이 틀 무렵 부지런한 고등어 달구지, 등짐장수들은 강구항을 출발한다. 황장재를 넘어 날이 저물어서야 진보 신촌마을에 도착한다. 하루 종일 걷고 나니 몸은 천근만근, 어느새 봉놋방 구석에서 새우잠을 잔다. 다음날 새벽밥 먹고 다시 출발하면 저녁나절 임동 '챗거리장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냉동차가 없던 시절이므로 더 놔두면 고등어 내장이 썩기 시작할 무렵 바로 그 시점이다. 장꾼들은 여기서 고등어의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하고 맑은 물에 씻어 왕소금을 뿌렸다.

보관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챗거리에서 하룻밤을 묵어 이튿날 동이 트면 안동까지 10여리를 더 걸어야 했다. 고등어는 영덕 강구에서 챗거리까지 오는 동안 선선한 바람과 좋은 볕에 먹기 좋은 상태로 발효되고, 상하기 바로 직전에 소금을 뿌린 뒤 하룻밤을 재우고 안동으로 가다 보니 안동에 도착할 즈음엔 소금간이 잘 배어 짭쪼름하고 감칠맛이 나는 간고등어가 되어있었다.

간고등어 생산과정

▲1차 해동 : 영하40℃에서 급속 냉동된 고등어를 해동실에서 22시간 해동 (영상15℃ 유지) 2차 해동 : 18℃의 물에 2시간 동안 해동
▲ 해동된 고등어는 갓 잡은 것과 진배없이 싱싱하다.고등어의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한 후 흐르는 물에 1마리당 30초가량 세척
▲ 잘 손질 세척된 고등어를 5% 염도의 물에 1시간 동안 담가서 1차로 습식염장을 한후 고등어를 건져서 물빼기 공정에 들어간다.
▲ 간잽이가 천일염으로 염장한다. 고등어의 크기에 따라 소금의 양이 틀려진다.
▲ 챗거리장터에서 배를 갈라 염장을 한후 하룻밤을 재우고 안동까지 오는 시간이 하루 걸렸다.그 원리 그대로 염장을 하고 영하3℃에서 24시간 숙성시킨다(육질을 쫄깃하고 깊은 맛을 내게 하는 과정)

▲ 용도별, 크기별로 진공포장하고 마지막으로 금속탐지기 통과

고객들은 상품을 받아서 그대로 조리해 먹을 수 있다. 맛있는 생선을 손질 안하고 바로 요리할 수 있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듯하지만 큰 차이다.

50년 간잽이 이동삼

▲ 이동삼 선생과 이야기중인 필자

(사)안동간고등어생산자협회 사무실에서 50년 간잽이 이동삼 선생을 만났다. 워낙 가난했던 집안, 15살 나이에 어물 행상단을 따라나선 이동삼은 그후 50여년을 고등어 간잽이로 살았다. 강구에서 안동까지의 그 치열했던 삶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근면성실로 한우물을 파서 지금은 '간고등어간잽이 대한명인인증'도 받았다. 또 그의 인생역정은 안동간고등어를 안동 최고의 문화상품으로 만든 캐릭터로 진화했고 문화아이콘이 되었다. 현업에서 공장장으로 생산라인을 관리하고 있다.

가만히 이 선생의 손을 잡았다. 이 손….
왼손으로 고등어를 들면 자동으로 무게와 질감이 느껴지고, 오른손으로는 동시에 그 고등어 크기에 맞는 양의 소금이 집어진다. 고등어의 뱃속에 살포시 뿌려대는 소금 알갱이는 한알 한알 속살의 결을 따라 제 갈 길을 정확히 찾아가 앉는다.

그 정도 경지에 오르기까지 반 백년, 그 지나온 세월을 존경한다 말했고 고단하게 풀어온 삶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서 기쁘다고 이야기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며칠밤을 새도 당신의 인생 다 이야기 못한다며 아쉬워한다.

이동삼 간잽이는 현재 후계자들을 키우고 있다. 대를 잇는 간잽이들이 있어야 안동 간고등어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단순한 잇기의 관점이 아니라 '진화하고 변화하며 점점 커가는 대물림'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50년 간잽이 이동삼선생의 손을 잡고 그 기를 온몸으로 받았다.
세상은 참 신기하다.
역사 없는, 과정 없는 결과는 없거늘…. 일약 단숨에 뭔가를 이루려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50여년을 바쳐 어떤 일을 한다는게 참 답답한 노릇이겠지….

뜻잽이

남안동IC를 빠져나오면 경북 안동시 일직면 송리인데 그곳에 안동 간고등어 본사겸 공장이 있다.
송리 들어가는 입구 조탑동에 290여년된 느티나무가 반갑게 맞이하고 곧이어 동화작가 권정생선생이 사시던 생가 팻말이 보인다. 오른쪽의 조탑동 5층전탑도 색다른 양식으로 눈길을 잡아 끈다.

▲ 조탑동 오두막(약7평)이 곳에서 25년을 살다가 지난 2007년 5월 17일 하늘로 가셨다.문 위에 붙어있는 이름이 애잔하게 여운으로 남는다. 소박한 유품은 안동시 명륜동에 위치한 권정생 어린이문화재단 전시실 오두막집 방안 모습을 재현한것이다.

'좋은 동화 한편은 백번 설교보다 낫다'며 아이들의 세계를 아주 멀리 높게 바라보시고 보듬으며 평생을 아동문학에 일로 매진하시고 훌쩍 떠나신 권정생 선생. 선생께서 지은 여러 책에는 안동과 간고등어에 대한 에피소드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안동에 살면서 안동의 뜻을 그만큼 알기쉽게 친근하게 아로새긴 사람도 드물 것이다.

생가를 돌아보고 기념재단을 돌아보면서 병들어 아픈 몸, 생활은 소박했지만 생각은 하늘보다 넓었던 사람, 자연과 아이들을 대했던 그분에 대한 느낌은 한마디로 의로운 뜻 길라잡이 '뜻잽이'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나하나 뜻이 아닌게 없다.

일직교회 종탑 옆에는 이런 팻말이 붙어있다.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 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가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 권정생 -


그 소외 받고 아픈 이를 위해 한겨울에도 장갑을 끼지 않고 종을 친 사람, 작은 교회 종지기 권정생이다.

권정생의 유언장
(부분생략)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 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세 때 22세나 23세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일 쓴 사람 권정생

[권정생 선생 유언장 일부]

평생 쓰신 글로 십수억의 재산을 만드셨지만 자신은 평생을 병든 몸으로 안동의 한 오두막에서 모든 속세의 명예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페이스로 살다 갔다. 평생 병고에 시달렸는데 어쩜 그리 아름다운 마음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는지….

마을사람들은 그분이 그렇게 유명하고 학식이 높은 분일줄 몰랐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눈치를 챘다고 한다.

권정생 선생은 재산 전체를 북한 어린이들을 돕는데 사용하라고 유언을 남겼고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이 그 뜻을 받아 일을 하고 있다. 선생은 정녕 안동의 '뜻잽이'였다.

얼잽이

'얼'은 '줏대 있는 정신(精神)'을 일컫는 말이다.

지난 5월초 안동 간고등어 초창기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생산과정의 정밀함과 손맛을 이해하는 심성, 시스템, 지향점 등을 살펴보았다. ㈜안동간고등어 조일호 대표이사와 (사)안동간고등어 생산자협회 오상일 회장과 전 임직원들에게서 가볍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뭐라고 해야 하나? 팀워크… 그것도 맞고, 자부심… 그것도 맞는 말이다. 안동 간고등어는 상품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文化)로 현재 진행형이다. 그들이 만든 문화에 대한 확신은 여러 컨셉으로 표현되고 연결되고 있었다.

▲㈜안동 간고등어 생산공장과 고영학 홍보이사,조일호 대표이사, 오상일회장, 조정연 홍보팀장

'상도를 따르라
어디서든 부지런 하라
빈손으로 시작하라
밑지는 장사도 하라'


이같은 다짐이 사무실 벽에 걸려있다. 이야기농업 필자의 컨셉과도 맥을 같이하는 터라 얼마나 반갑던지….

강구항에서 안동까지의 역사적이고 고단했던 고등어의 여정을 이해하고 그 자연스러움을 생산 과정에 반영했다. 최초로 진공포장방식을 채택하여 수산물을 하나의 '품(品)'으로 격상시킨 일맵시와 안동의 전통과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려는 ㈜안동간고등어 사람들의 생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 생각은 아주 '오래된 습관' 간고등어를 '새로운 기준'으로 재탄생 시켰고, 또 하나의 안동문화로 우뚝 서게 했다. 이 문화는 다른 문화요소들과 어우러지며 또 다른 생활문화로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구어낸 지난 10년의 이 결과는 '얼'이 없으면 안되는거다. 방문을 마치고 올라오는데 "음! 이건 얼잽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한 분야에서 어떤 경지에 오른 뜻을 지닌 '잽이'….
그렇게 안동에는 뜻잽이, 간잽이, 얼잽이들이 있었다.

이 모든게 다 안동의 품안에서 안동사람들로 인해 이루어진 일들이다. 앞으로도 안동의 가슴에서 그들은 더 뜨거워져 가고 성장해 나갈 것이다.

안동간고등어 한 손

▲ 낙동강과 안동 하회마을

하나인 듯 둘이고
둘인 듯 하나….
안동간고등어 한 손

낙동강과 하회마을, 서로 껴안아 한 손
안동의 역사와 문화, 서로 보듬어 한 손
권정생과 아이들, 서로 품어서 한 손이다.

바다와 육지도 한 손
그러고 보니 세상은 다 한 손이네.

안동간고등어 한 손으로 인하여

너와 나
우리모두 한 손이 된다.

정 나누고 마음 나누며
그렇게 포개고 기대고
의지하며 살자


무주 구천동 이슬ㆍ햇살 먹고 자란 복분자와 오미자

사람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사람이 의도한대로 재배되고 가꾸어지는 먹거리가 아니고 자연그대로 식물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생명의 의지를 담아 자란 건강한 먹거리를 지향하는게 환경친화적인 농업이다. 그 과정에서 건강하고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과 어울림'이 당연히 생겨난다. 소비자이기도 하고, 생산자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한 관계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살아있는 먹거리'와 '좋은 먹거리'를 구별하는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의 인연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에너지가 된다. 이 힘은 농업이 우리에게 건네는 또 하나의 큰 선물이기도 하다.

내게도 이런 개념 있는 농부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일은 단조롭기 쉬운 내 삶을 아주 다이나믹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 금척마을(금평리)들어가는 입구와 산에서 바라본 마을전경

▲ 주봉인 옥녀봉을 중심으로 안온하기 그지없는 평온한 마을 그 자체다

우리나라는 산은 산마다 마을은 마을마다 나름의 이야기들이 있다. 무주에서 설천을 지나고 나제통문(羅濟通門)을 통과하면 대덕으로 가는 길이다. 그 각각의 '다름'으로 이루어진 자연의 조화를 마음에 새기며 달리다 보면 덕유산 자락 무주 무풍면 금평리 금척마을 안내판이 보인다. 그곳에 구천동복분자가 있고 '행복한 관리자' 조현숙 최인수 부부가 산다. 마을 산골길로 한참을 올라간다. 제 맛들은 계절이 방문객의 눈을 호사하게 만들 무렵 유기농 복분자 농장, 오미자 농장이 나타난다.

여러분의 행복한 관리자가 되어

"일 할 수 있는 육체를 가졌다는 건 신의 축복이다"
펄벅 여사가 쓴 '대지'중에 나오는 말이죠!

이 말을 처음 만났을 때
산다는 것에 대해 환희를 느꼈던 나의 젊은 시절 이후
순수한 농사꾼으로 살아오면서 굽이굽이 어려운 세풍도 많았지만
육체의 노동이 가져다 주는 보람과 즐거움은
농사꾼의 고단함을 넘어선 행복이고 희망 이였죠.

"사람이 어찌 떡으로만 살 수 있으랴"
농사꾼이 어찌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만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요?,
농부의 손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거두는 매일 매일의 생활이 신비롭고 기쁘기만 한걸요.

흙과 씨름하며 한 낮의 뙤약볕에서 흘린 짠 냄새가 나는 땀방울을
해그름 황혼녘 살랑이며 불어오는 박하사탕 같은 산들 바람이 시원스레 씻어주며
행복이란 보따리를 가슴 벅차게 안겨 줄 때
나는 또다시 산다는 것에 대해 환희를 느끼곤 한답니다.

작은 씨앗들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들을 길러 내는
흙의 경이로움,
아무리 더러운 것이라도 기꺼이 그 품에 품어주는
흙의 너그러운 용서와 사랑,
이러한 흙에서 한 생명으로 태어나 흙을 만지며 한 몸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나는 흙과 함께라서 참 행복합니다.

농사짓는 일에 어떤 특별한 기술적인 기법은 없지만 흙을 아프게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지켜온지 20년 세월...

혼자서 걷는 것 같아 외롭다고 느꼈던 길에
벌써 흙을 사랑하는 여러분들과 함께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 산천에서 나는 여러분들의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책임지고 있는
행복한 관리자입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가는 여러분들 평안 하십시오.

[무주에서 조현숙 최인수]


복분자, 오미자…
자연이 우리에게 내려주는 축복이다. 다만 그 축복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관리자에 불과하다. 자연의 주인, 작물의 주인으로 행세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구름속을 산책하듯 행복한 관리자 노릇을 기꺼이 하는 것이다.

복분자 이야기

옛날에 한 부부가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중 늘그막에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너무 병약하였다. 좋다는 약은 죄다 구하여 먹여 보았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나가던 스님이 산딸기를 먹이라고 권하여 날마다 복분자를 부지런히 먹였더니 정말 놀랍게 아들은 매우 튼튼해졌다. 그 아들이 얼마나 건강하고 힘이 좋은지 소변을 보면 소변 줄기가 요강을 뒤엎어 버릴만큼 세었다. 그래서 하도 신기한 나머지 이 약재의 이름을 '뒤집어진다'는 뜻의 '복(覆)'과 항아리인'분(盆)'을 합해 '복분자(覆盆子)' 즉 요강을 뒤엎는 과실이라고 지었다 한다.

변강쇠가 먹으면 큰일날 일이다. ^^

한의학적으로 복분자는 맛이 달면서 시고 성질은 따듯하다. 인체의 전신에너지원인 양기를 보하고 비뇨생식기능을 향상시켜 요통, 정력감퇴, 조루증에 효능이 있다.

약리학적으로는 복분자는 당질의 소화를 억제 혈당조절에 유의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색소성분인 안토시아닌(anthocyanin)은 항산화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체내에 쌓인 활성산소를 제거하여 노화와 암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혈관계질환의 예방에도 좋다.

2002년도 토종 가시복분자를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유기농이 뭔지도 모르지만 복분자는 물에 씻을 수 없는 작물이므로 여하간 농약이나 다른 화학물질을 농장에 투입하는 것은 무조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생하길 3년여 드디어 2005년도 유기재배인증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받았다. 흔치 않은 유기농 복분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 복분자 농장이 9,000여평 되고 오미자 600여평 짓고 토종선인장(천년초)농사를 1,000평 짓는다.

생기찬 양새참 이야기

양새참이 힘들기도 하지만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길래 양새참이 무엇인지 물었다.
"아! 일꾼들 오전 10시경 새참하고 오후3~4시 무렵 새참을 합쳐서 그리 부른답니다."
유기농으로 농사짓는다는거 만만치 않다. 그저 돈만 투입하면 되는 일이면 좋으련만 천만에... 사람의 손발이 한없이 움직여야 되는 일이다.

생기찬복분자는 잡풀들과의 싸움이다. 그들 나름대로 다 존재의미가 있는 풀들이겠지만 농사짓는 입장에서는 수확의 타당성을 가름하는 중요한 문제이니 대응해야 한다. 제초제를 쓰면 순식간이겠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김매기를 해야한다.

3월부터 8월까지 처음 작업부터 시작하여 김매기하고 수확하기까지 온 비용이 인건비다. 하루 10여명씩은 기본이고 수확하거나 특별한 날에는 곱절, 세곱절로 투입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구천동복분자 농장의 고용지수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60대 아주머니는 젊은 축에 속하고 대부분 70대 할머님들이다. 점심을 싸오라고 하면 비닐에 아주 조금만 시늉을 하는 정도로 가져온다. (대신 점심값은 별도로 지급) 옆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조금 가져온다.

"왜 그러시지요? 배고프실텐데..."
"아 글쎄, 그 양반들이 제가 해드리는 양 새참 때문에 일부러 밥을 조금 싸오세요. ^^"

조현숙씨는 간단하게 빵, 라면, 국수 같은 것으로 새참을 차리지 않는다. 정성이 안 들어가고 내 농장 일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꼭 밥이나 죽 혹은 든든한 간식거리로 오전오후 새참을 꾸려낸다. 대부분 70대 또는 80살이 넘은 노인분들이므로 이도 성치 못하시고, 식당에서 시켜드리면 조미료 때문에 맛이 안 난다. 콩죽, 깨죽, 팥죽, 찹쌀죽 같은 죽 종류도 좋아하고, 때론 닭을 푹 고아서 드리기도 하고….

우리네 전통 늘 먹던 먹거리들을 챙겨드린다. 기가 빠지지 않도록 최선의 배려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네 한 식구 하루 한끼 해먹는 것도 이러니 저러니 고민인데 새참 두 번 식구 세 번 상을 차려 내는 것은 상상만해도 아찔한 노릇이다.


노인네들이 그 새참들이 맛을 내고 마음을 알아서 든든하게 배를 채워주니 싸오는 점심에는 무관심할 수밖에...
그러다 보니 인근 지역에 소문이 나서 복분자 농장에 일을 하고 싶어 목을 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일부에서는 은근히 로비도 들어온다.

아들자랑, 딸자랑, 사위자랑, 손자자랑, 이길새라 질새라... 야무진 입을 통해 모이자마자 자동으로 지방 방송은 시작되고, 영감님들 흉보고, 울다가, 깔알 깔알!!!... 별일도 아닌듯 한데 숨이 넘어가도록 웃다가 사소한 말끝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다투는가 싶으면, 한쪽에선 이미 한자락 목청높혀 멋진 가락이 시작된다.
이른 새벽부터 챙겨 나왔을 그 부지런함이 저녁이 되도록 지치지도 않고 이 소리 저 소리 이어지고 엮여서 또 말이 되어 이어지고, 움직이고 살아있고 살아가고...

그들 모두의 삶을 우리 복분자 밭에다 다 쏟아 놓곤 저녁이 되면 그들의 놀이판이었던 복분자 농장을 버려두고 훌훌 떠나버리죠. 이렇게 어리디 어린 어른들의 노시는 모습에 입이 둔한 조현숙씨는 그저 삐죽이 웃어 주고만다.

일꾼들끼리 때론 사소한 말다툼을 하기도 하고 다시는 안볼 것 같이 그러다가 이내 다시 하하호호한다. 노래도 부르고 이웃집 이야기들 나누고 그 세계에서는 온 동네가 이야기꽃으로 피어난다. 그러면서 힘겨운 밭작업(김매기,수확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분들의 삶에 인생사가 다 녹아있음을 느낀다. 서로가 서로에게 70인생 제대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복분자 농장의 농사일기는 이어져간다. 그런 그분들의 모습이 보기 좋고 정겨워 더욱 한 식구 같은 생각이 든다며 고마워한다.

복분자 재배과정


3월중순 : 해동시작 무렵, 복분자 전지하고 가지를 유인하여 덧줄에 묶어주기
아무리 알려줘도 자기들 고집대로 하고야 마는 할머니들 때문에 속깨나 썩지만 할머니들 고집대로 하시게 내버려두는게 결국 일시키는 방법이된다. 골짜기가 시끌시끌 초봄부터 술렁거린다.

4월 : 벌레출현, 잡초발생
벌레발생을 막아주고 뿌리의 튼튼한 활착을 위해 목초액과 효소액을 살포하고 잡초예방 김매기와 부직포를 깐다. 빨간 줄기에 뾰족한 새순이 나오는 시기.

5월 : 풀과의 본격적인 전쟁
풀과의 전쟁. 에이고...! 가시가 많아서 내 이쁜 얼굴 다 잡는다 다잡아! 할머니, 아주머니들 투정소리가 들리기 시작이다. 풀깍기작업이 한창이고 잎은 무성하게 자라고 딸기꽃은 하얗게 일어난다.

낮에는 벌들의 왕성한 잔치가 한바탕 소란스럽고
밤에는 반딧불이들의 은밀한 통정(通情)이 이루어지고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리고….

▲사람이나 식물이나 제때 제짝을 찾아 혼인하는게 좋다. 왼쪽은 수정이 안된꽃이고 오른쪽(붉으스럼한 빛)은 수정이 된 꽃이다. 복분자는 오른쪽에 열린다. 6월초 하얀 빛깔이 고고하고 예쁘기는 한데 웬지 처연해 보였다. 모두 다 열매를 품고 있는데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그 또한 그 친구에게는 운명이겠지. 그래도 한껏 자기를 드러내고 살다가 지기를 바란다.

6월 : 기도하는 마음으로 엄숙하게 숨죽여 가만가만 기다리기
초록빛 파아란 열매로…
수줍은 아가씨 얼굴처럼 뽈거래한 열매로…
한껏 그리움에 사무친듯 빠알간 심장의 열매로…
그리움에 기다리다 기다리다 까맣게 속이 타버린 검붉은 열매로…
마침내 아침햇살에 보석처럼 탐스럽게 빛나는 열매로 익어간다.

7월 : 날이 갈수록 장마와 무더위에 지쳐 일 하는 재미도 점점 식어가고...
수확의 마무리단계

행복한 관리자 조현숙 최인수 부부


두사람은 1987년도에 결혼했다. 고향이 다 이곳 무주이고 3대째 터를 잡아 살고 있다.
큰애가 딸이고 작은애가 아들이다.

마음 아픈일은 몇 년 전까지 농가부채만 늘어가고 생활이 어려워 딸아이가 대학에 붙었을 때 등록금을 댈 형편이 안되서 1년을 쉬라고 이야기했던 것이었다. 명분은 더 좋은 대학을 가라는 이유를 대면서. 그때를 생각하면...
조현숙씨는 살아온 내력을 이야기 하면서 순간순간 회한에 젖는다. 우리네 농부들의 애환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거치고 살아왔다.

조현숙씨는 손이 크다. 가지고 있는 것은 한껏 퍼주는 스타일이다.
아버님이 교육자셨고 어릴때부터 사람들이 집에 많이 드나들었다. 친정엄마가 당신이 가지신 것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드리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모든 것은 이웃과 나누어야 복이 온다. 주는 이, 받는 이 모두에게 복이 온다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옥수수 좋아하세요? 묻길래 아! 예 특히 와이프가 아주 좋아합니다. 무심코 대답했다.

잠시 현장 돌아보고 오는 사이에 마당에서 뭔가 큰 솥에서 열기가 피어난다. 수확해 놓았던 옥수수 한솥을 찐 것이다. 아이스박스에 한 가득 넣고 가져가시라며 트렁크에 넣어준다. 아주 화끈하게…. 참내…. 옥수수 선물을 받아도 큰 솥으로 한솥을 따끈따끈하게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그렇게 그녀는 마음도 나누고, 정도 크게 나눠주고, 오는 이, 가는 이 마냥마냥 축복을 빌어 마지 않는다.

어떤 맛으로 농사를 짓느냐고 물었더니
"ㅎㅎ 아! 돈들어 오는 맛에 농사를 지어요. 상품이 팔려나가 돈이 들어오는 날은 한없이 기뻐요.
속물 같지요? ^^ 그리고 아침햇살에 이슬을 머금은 복분자를 보면 꼭 보석 같아요. 어찌 그리 이쁜지..."

복분자 엑기스 만들기

▲ 맛에 취하고 색깔에 취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분위기에 취한다.

소비자들은 맑은 햇살 가득한 날 창가로 가서 복분자차를 마신다. 복분자의 빛깔이 말간 햇살에 제 성질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없이 깊어 보이는 붉은빛... 번잡하고 소란했던 일상이 스르륵 차분하게 분위기가 잡힌다.
지난 가을 두 내외가 내온 정감 어린 감 2개와 복분자 차 한잔이 나그네의 마음을 맛깔 나게 만들었다. 참 맛있다.

복분자는 6월 하순부터 7월 초순경까지 약 10여일 동안 수확하는데 생과(生果)는 따자마자 급냉실로 옮겨져 저장된다. 급냉동시켜 생과를 찾는 소비자들에게 택배로 보내고 나머지는 전량 원액으로 가공된다.

▲ 몇십년 이상된 숨쉬는 항아리에 복분자(왼쪽)와 오미자(오른쪽)가 들어있다.

큰 옹기(한개에 복분자 생과 180kg정도 들어간다)에 복분자를 가득 넣고 창호지로 뚜껑을 해 숨을 쉬게 만든다.
복분자와 설탕을 6:4의 비율로 쓴다. 대개의 가공품들이 설탕과1:1로 섞는다. 구천동복분자도 초기에는 1:1로 쓰다가 유기농재배이므로 설탕을 줄이는게 오히려 제 맛이 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얻어 40%로 조정했다. 그랬더니 맛과 향이 한결 업그레이드 되었다. 유기농 복분자의 향취가 한결 깊어져서 만족스럽다.

▲ 유기농설탕, 복분자엑기스 작업과정, 공장내부설비, 구천동복분자 브랜드 '생기찬'

설탕도 일반설탕이 아니고 국제유기농운동연맹(IFOAM)에서 유기농인증을 받은 브라질산 유기농 갈색설탕을 쓴다. 설탕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으므로 100%원당을 수입해 소비하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유기농복분자에 걸맞는 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구천동복분자의 원칙 때문이다.

꿈이 무엇인가?

현재 만여평 되는 농장을 20,000평 정도로 키우는게 목표다. 바른 먹거리는 바른마음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먹거리의 선택은 소비자나 생산자나 모두에게 '하나의 인격(人格)'이다. 신념이 없으면 못하는 일이다. 계산적인 마음에 침몰해버리면 유기농사는 절대로 이루어 질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싶다. 사람은 부자나 가난한 이나 하루 세끼 먹는다. 사업이 진행 되서 우리도 세끼먹는데 지장이 없을때가 되면 노인들을 모시고 싶다. 거창하게 시설을 크게 짓고 어쩌고 하는 컨셉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오시는 노인네들을 보살피고 삶을 만족스럽게 살아가시도록 해드리고 싶다.

물론 애기들도 받아들여서 어른들과 애들이 함께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방편이 서면 더 좋겠다. 사람에게 서로 의지하며 사는 마음만큼 큰 즐거움은 없다고 생각한다. 농장 안쪽으로 멋진 풍광에 평평한 공간이 있어서 그곳을 매입해서 거기에다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다.

조현숙씨는 사이버대학에서 현재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고 있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말아달라는 그 내외의 요청에 뜻이 읽혀져 고개가 숙여졌다.

필자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기분 좋은 이야기 중의 하나는 어렸을 때 돈이 있는 분들이 고아원을 차려서 오갈데 없는 아이들을 보살핀다는 소식을 접할때였다. 나라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개인이 스스로를 나누는 삶으로 헌신하는 모습은 내게는 로망이었다.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면 저렇게 살아야지 생각했었다.

그런 꿈을 꾸고 있으므로 구천동복분자에서 농장일꾼(놉)을 대하는 모습은 고용자와 일꾼의 관계를 넘어선다. 친정엄마 모시듯 어른들의 입맛과 마음과 기분, 몸의 상태를 최대한 배려하여 일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 벼룩벌레의 흔적이다. 벼룩벌레는 톡톡 튀는 녀석인데 흡착을 하게 되면 잎의 세포가 죽어 노랗게 변색이 된다. 잎의 광합성작용이 어려워지게되니 여러가지 지장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농장초기에는 이 녀석들이 어찌나 극심했는지 말도 못하지만 유기농7년차, 이제는 땅도 살고, 작물도 대응하고… 자연의 조절로 작물생산량에 지장이 없을만큼 자연스러운 범위내에서 서식하다가 소멸해간다. 생태계 조절능력이 살아있는 구천동복분자 농장의 가치가 새삼스럽다.

대덕산 정상이 우뚝 솟아 정면으로 보이는 집에서 여러 느낌들을 주고 받았다. 먹을거리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현실의 부당한 유혹과는 타협하지 않는 단호함이 묻어나지만 소비자들,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지역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다정다감한 두 내외의 삶에서 구름속을 산책하는 행복함이 느껴졌고 생기찬 옹고집이 느껴졌다.

유기농 재배 넘 쉬워요

왜냐구요?
안할것 안하면 되고
벌레가 있음 벌레도 살고

복분자도 그냥 살아있을 만큼만 살아있음 되고
수확이 떨어지면 덜 수확하면 되고

잡초가 생기면
또 어린 어른들 놀이판 만들어 드려 김매면 되고

그저 들여다 보며
지켜보며 바라보며 기다리며...
굽이굽이 세풍에 맡겨놓으면 되지요

참쉽죠~~^^
욕심만 나한테서 30cm 떨어진 곳에 살며시 내려 놓으면 돼요


청국장의 영양은 그대로지만 먹기는 쉬운

새로운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만드는 일은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동기에 의해서 행하는 것일까? 모든 새로운 것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태어난게 아니다. 그 시점까지 매우 주의 깊고 사려 깊게 세상을 들여다 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관된 관점으로 사물의 흐름을 살피는 사람의 눈에서 인식이 되고 그 자각속에서 '새로움'은 잉태되는 것이다.

'최초는 영원하다. 최초란 오직 한번만 존재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이안해리슨이 쓴 책 《최초의 것들(The Firsts)》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 오색청국콩

필자는 지난 4월부터 6월중순까지 경남 함안농업기술센터와 함께 '함안이야기농업학교'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이야기농업'을 주제로 특강과 실습을 하는 과정에서 농가 현장을 둘러보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5월 어느 날 함안 법수면에 위치한 토우리명가를 방문하였다. 차 한잔 나누고 전통발효식품 체험관을 살피는데 알록달록 다섯가지 파스텔색깔이 눈길을 잡아 끈다.

"이게 뭐지?"

오색청국콩이었다. 입에 넣어보니 구수한 청국장맛과 콩맛, 단맛이 달달한게 어우러져 먹기에 아주 좋았다. 마치 초코볼 같은데 맛은 훨씬 풍미가 깊었다. 독하지 않은 단맛과 가볍지 않은 구수한 맛은 초코렛맛이 따라올 바가 아니었다.

그 맛에 매료되어 토우리명가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청국장(淸麴醬)

된장의 하나로 전시에 단기숙성으로 단시일내에 제조하여 먹을 수 있게 만든장이라하여 전국(戰國醬), 또는 청나라에서 배워 온 것이라하여 청국장(淸國醬)이라고도 한다. 콩을 삶아 질그릇에 담고 짚으로 싸서 따뜻한 방에 두면 납두균이 번식하여 진이 생긴다. 이때 볏짚이 지닌 균의 활성이 좋고 나쁨에 따라 맛이 달라지게 된다. 콩이 잘 떴으면 마늘,생강,굵은 고춧가루, 소금등을 섞고 절구에 잠깐 찧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쓴다. 청국장은 주로 고기, 두부, 고추 등을 넣고 끓여서 찌개를 만들어 먹는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국장은 물에 불리고 삶은 대두(메주콩)를 따뜻한 곳(40℃ 정도)에 두어 발효시켜 담근다. 바실루스(bacillus)라는 막대기 형태의 세균이 발효의 주역이다.

바실루스 균주가 증식하면서 균체로부터 단백질 분해효소가 만들어 진다. 대두의 단백질을 분해하여 아미노산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대두에 비해 청국장의 소화 흡수율이 훨씬 높아진다. 아미노산이 더 분해되면 암모니아가스가 된다.

청국장 발효 특유의 냄새중 하나가 바로 이 암모니아 가스이다. 암모니아 냄새로 인해 잡균의 증식이 억제되는 효과가 있다. 청국장 발효가 일어나면 대두가 갖고 있던 원래의 유익한 물질과 더불어 대두에는 없었던 새로운 물질들이 만들어 진다. 고분자핵산, 갈변물질, 단백질분해효소(혈전용해제), 끈적끈적한 점질물질 등이다.

또한 대두가 분해되면서 그것을 먹이로 미생물이 증식하고, 각종 항암물질, 항산화물질, 면역증강물질과 같은 생리활성물질이 만들어 진다. 청국장을 먹는다는 것은 결국 수백억마리의 청국장 발효균주, 각종 효소, 생리활성물질을 먹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청국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발효식품으로서의 영양적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다만 끓일 때 나는 냄새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내게는 그 냄새가 입맛을 돋우는데 사람마다 미각의 차이인듯 하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 얻은 큰 즐거움중의 하나는 장모님의 청국장이었다. 매년(20년 가까이) 평택 장모님이 온갖 정성을 다해 만들어 주시던 청국장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이야 워낙 연로하셔서 못하시지만 몇 년 전 까지 참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어른이 청국장 보내주실 때 장만 보내셨겠는가? 딸자식, 사위자식 온 식구들이 건강하게 잘 살아가길 비는 마음도 바리바리 함께 꾹꾹 눌러 보내셨을 것이다. 그렇게 장모님의 정성을 받아먹고 살았으니 큰 복이지 싶다. 두부, 김치, 돼지고기 살짝, 어느 날인가는 그냥 갖은 양념으로 청국장만 걸죽하게 끓여서 맨밥위에 얹어 쓱쓱 비벼먹기도 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

청국장은 노화방지, 당뇨병, 변비, 빈혈예방에 도움이 되고 청국장의 주재료인 콩이 항암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청국장을 열을 가하지 않고 먹는 것이 생리활성 물질이 파괴되지 않아 우리 몸에 훨씬 유익하다는 연구들이 잇따르자 말린 청국장이 한때 흐름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먹기가 불편하다는 세간의 평들이 있어 토우리 전금자 여사는 간편하고 맛있게 끓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5분 청국장을 개발하였다.
멸치, 다시마, 새우, 양파, 버섯으로 맛을 낸 국물에 콩을 삶아 청국장으로 발효시키고 동결건조하여 만든 기술은 특허출원까지 마쳤다.

이 5분청국장은 냄새도 덜하다. 찌개 전체를 5분청국장으로 해도 되고 된장찌개나 각종 찌개를 끓일 때 입맛에 맞게 보조 양념장 개념으로 적당량 첨가하면 영양만점에다 맛까지 아주 우수한 간지나는 찌개가 된다.

▲ 말린 청국장콩이다. 여기에다 갖가지 옷을 입히면 오색콩이 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말린 청국장콩에 감귤, 땅콩, 홍국, 클로렐라 등을 코팅한 오색콩을 개발했다. 초코볼처럼 만들어져 먹기 좋다. 단맛도 일정 정도 가미가 되어 영양간식으로 손색이 없다. 아이들이 먹기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맛이다.

넘어지지 않는 오뚜기

▲ 함안은 부여나 경주에 비견되는 유서깊은 역사도시다. 함안 도항,말산리 고분군 전경이다. 아라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100여기의 대형고분들과 1,000여개의 소형고분들이 즐비하다.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비옥한 들판, 아라가야의 왕릉 고분군과 수박, 하우스참외(메론)가 망망대해를 이루는 경남 함안이 그녀의 고향이다. 고향을 떠나 학업과 직장생활, 결혼, 슈퍼마켓운영 등으로 15년간 힘든 도시생활을 접고 1980년에 남편의 고향인 이곳 함안 법수면에 정착했다. 어느 인생 구구절절하지 않으랴만 토우리명가 전금자여사의 살아온 일생 또한 파란만장 그 자체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인생, 사는것 자체가 사건이요, 고단함이요, 눈물샘 자극하는 파노라마 그 자체다. 여러 농가를 다니며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꼭지를 틀면 한결같이 눈물바다…. 그러면 나도 마찬가지….
찡한 사연 하나하나 고비고비, 인생구비 목숨구비 가슴을 저미니 말이다. 그래도 결론은 사람의 일생은 살아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니 다가오는 시간들을 아주 정성스럽게 맞이하고 보낼 일이지 싶다. 그래 내 인생도 그리 살자고 매번 다짐하고 마음에 새기곤 한다.

▲ 살아온 인생, 눈물로 회한에 잠기는 전금자여사(좌측), 어렵고 긴 터널 지났어요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우측)

큰아들을 10살 때 물에서 잃어버리고….
오래된 일이지만 생각만해도 어미가슴에 묻어버린 자식에 대한 회한으로 인터뷰 내내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남편은 20여년을 온갖 병으로 시달리다가 결국 7년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애 셋을 낳고 살던 시골 아낙에게 닥친 삶의 무게는 천근만근 감당하기 어려웠다. 남편은 늘 중한병으로 아파서 병 수발해야 했고, 아이들 키워야 하고, 먹고 살아야 했다.

"참으로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 나왔어요"

평생을 여자몸으로 혼자 사업도 하고 농사도 짓고 애들도 키우다시피 하니 온갖 구설수가 따라붙고 이런저런 일들로 이유를 붙이며 사람들은 흘낏거린다. 만만하게 보고 우습잖게 보기도 하고…

▲ 손은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을 고스란히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녀의 손에서 거칠지만 세상을 이겨낸 힘이 느껴진다. 손마디 하나도 사고로 잃어 버리고, 마디마디 울퉁불퉁 남자손 같지만 그 안에 흐르는 강인한 생명력에 경의를 표했다. 저 손으로 맛을 내고 간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땅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정성으로 두손을 모아 하늘에 빌었다.

하지만 전금자 여사는 당당하게 일을 만들기 시작한다. 하여 오늘날의 토우리명가를 일구어냈다.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두가지다.
하나는 전금자씨 보고 '간이 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쌍하다'는 말이다.

그럴때 마다 "왜 니들이 나를 불쌍하다 하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불쌍하지 않다. 너희가 보태준게 무어냐? 나는 내 인생 초지일관 최선을 다해 살았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넘어져도 넘어져도 또 일어날 것이고 아니, 아예 안 넘어질 자신이 있는데 왜 나를 불쌍하다 하느냐 다시는 그런 소릴 말아라"

여자의 몸으로 일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고는 "그 여자 참 간이 크네" 라고 참견을 하면 "니가 내 간 큰 것 봤나?" 라고 맞받아 치곤 했다. '간이 크다'는 말은 업신여기는 말이었다. 남자들이 하면 아무 일도 아닌 것도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여자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을 괜히 빈정거리며 시비 거는 시선이 분명했다.
아이들 데리고 먹고 살겠다고 열심히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이런저런 시선들이 부담스러웠고 불쾌했다. 그래서 더 당당하게 받아치면서 "내 어찌되는지 두고봐라"고 일갈하며 지내왔다.

"내 성질 참 더럽지요?^^" 이야기를 하다가 내게 묻는다.

혼자 몸으로 가족 꾸려야 했고 온갖 풍파 이겨내야 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웃음 짓는다. 그렇게 옹골차게 살지 않으면 세상이 인정해주질 않아서다.

1996년부터 5명의 농업인들이 합심하여 좀더 맛있는 장을 만들기 위해 자체 개발한 밀쌈장, 메주쌈장, 찹쌀고추장, 청국장 등을 시판했다.

5분 청국장 세상에 태어나다

어느 날인가 농업기술센터 생활개선 계장이 전금자 여사 집에서 저녁을 먹고는 "이 맛있는 청국장을 누구나 집에서 쉽게 물만 부어 끓여 먹을 수 있는 청국장을 개발하면 잘 팔릴 것 같은데요. 전사장님이 한번 개발해보세요" 라고 말하는게 아닌가?

그날 저녁 청국장 끓일 때 쓰는 육수에 콩을 삶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랐고, 그 새벽에 집에 있는 멸치와 다시마, 양파, 버섯 등을 넣고 육수를 내고 그 물에 콩을 삶아 보았다. 그렇게 5분 청국장은 태어났다.
2001년 5월말 '5분 청국장'이 탄생했고 이것은 전국 아이디어 벤처농산품 전시회에서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이런 반응에 힘입어 농협 경남도지부 하나로마트에 납품하게 되었고 신문에 '5분청국장'이 소개되고 주변의 권유로 특허출원까지 마쳤다.
이후 제품의 품질향상을 위해 청국장 건조방식을 '열풍건조'에서 '동결건조'방식으로 업그레이드 했고, 5분청국장의 인기에 힘입어 된장과 간장 고추장까지 매출이 올라가는 행운을 누렸다.

▲ 좋은 콩 종자를 골라 직접 농사를 짓는다. 농약을 치지 않고 생산해서 정성스럽게 도리깨질을 한다.

토우리의 특장점

모든 장(醬)의 원료인 콩은 직접 농사를 짓는다. 부족한 물량은 인근 지역에서 계약재배방식으로 수매를 한다. 1등품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다. 좋은 콩은 모양에서 차이가 난다. 보기에 좋고 야물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 농사짓고 수매를 한다
종자중에서도 '생산량이 많이 나오는 놈'보다 '장맛이 좋은 놈'을 골라서 재배한다. 또 콩알의 빛이 좋아야 하고 약을 치지 않고 재배한 것들로 준비한다.
'소비자맞춤형 장'을 개발중에 있다. 전통과 고유의 맛을 유지해야 하지만 동시에 소비자들의 기호와 요구에 부응하는 맛과 컨셉도 추구하는게 토우리의 방침이다.

장맛을 결정하는 요소는 소금과 물이다. 5년 이상 간수를 뺀 천일염을 쓴다. 또 물은 참숯으로 정화작업을 거친 정갈한 물을 사용한다.

장담그기 철 전경 한가지.
빈장독 옆에 참숯과 물이 가득한 항아리, 그 옆에는 빈독 다시 참숯항아리… 일렬로 대열을 이룬다. 물이 정화되면 퍼서 옆 빈독으로 옮긴다. 다시 빈독이 되고 빈독은 참숯과 밑물로 채워지고….
좋은 소금과 정화된 물, 그리고 전금자 여사의 손맛과 하늘의 도움으로 토우리명가의 장은 익어가고 세월도 익어간다.

▲ 토우리명가 전통식품 발효체험관 앞마당


도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토우리명가의 우리콩 전통 장담그기는 인기가 많다. 토우리명가는 장담그기철 이전에 미리 도시민들의 주문예약을 받는다. 그 물량을 토대로 한해의 장담그기, 메주쑤기가 결정이 된다.

도시민들은 매년 회원에 가입하여 회비를 내면

가. 본인만의 장독을 가질수 있다.
나. 메주빚기, 장담그기, 숙성 등 전단계에 걸쳐 직접참여 혹은 체험이 가능하다.
다. 원할 경우 농사체험과 농촌문화체험도 가능하다.
라. 장담그기는 물론 청국장, 고추장, 밀쌈장 담그는 방법도 배운다.
마. 모든 발효식품은 체험하고 가져갈수 있다. 평소 장독관리는 토우리에서 해준다.
바. 회비를 내면 간장과 된장을 합당하게 공급받는다.

▲ 45년된 간장의 맛에 취하고, 그 뜻에 감동하고, 그 이야기에 매료되다. 일종의 씨간장인데 입안 혀끝에 닿는 느낌은 맛이 아니라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금자 여사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이기 때문일까?


장익는 소리를 들으며

엄청난 긴 터널을 지나온 내 인생

도시민들의 요구에 맞는 제품을 만들어
전통의 맛을 널리 전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것을

늘 같은 자리에서
나를 지켜주는
장독에게 약속합니다

살아있는 미소가 명품을 만들고
남에게 폐끼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장익는 장독에
눈을 감고 귀를 대봅니다

제 삶도 그 안에서 행복하게 익어갑니다.


'우리 친정엄마'라는 별명을 지키며 가꾼다

세상에 최고 맛있는 음식은 몇 가지나 될까? 아마도 '세상의 어머니 수' 만큼이라는 말이 가장 근접치에 다가서는 답이 아닐까 싶다. 오십을 넘어가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내 아이들의 아버지', '부모'의 컨셉보다는 여전히 내 생각과 판단을 지배하는 것은 어머니 아버지로 부터 내리 받은 위치와 존재감이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추세로 보면 아마도 평생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받은 느낌과 뜻 속에서 살다가 갈 것으로 보인다.

입맛, 추억, 가르침, 헌신, 내리사랑….
그로 인해 풍부해진 내 인생,
그로 인해 살맛 나게 살아가는 지혜를 얻게 된 내 인생….

그게 인생이라면 당연히 기꺼이 받아들일 일이지 싶다.

▲ 우리 집 아침상 메뉴중의 하나. 미숫가루를 우유에 타서 먹기도 하고, 가루로 내와 복분자 갈은 것과 함께 소스로 활용하기도 한다.

감자, 고구마, 가지, 당근, 단호박… 제철에 나오는 먹거리를 중심으로 은근한 불에 한참을 구워내면 표면은 쫄깃거리고 속은 알맞게 익은 아주 괜찮은 맛, 아주 낯익은 맛이 나온다. 여기에 죽염 살짝 찍고, 후식으로 토마토 정도 나올라 치면 근사한 아침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식구들의 아침은 가벼우면서도 실속 있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여기다 한가지 더, 미숫가루가 추가되면 완벽한 맛의 조화와 영양을 섭취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야! 진짜 아침 제대로 먹었네" 탄성이 나오게 마련이다. 미숫가루는 다른 것들과 어울려 전체를 완성시키는 존재다. 덕분에 공복감이 없는 근사한 아침이 완성된다.

언제봐도 정겨워… 미숫가루

▲ 쌀아지매 황토방선식(미숫가루)
찹쌀·멥쌀 또는 보리쌀을 쪄서 말린 다음 다시 볶아서 가루로 만든 식품으로 녹말이 호화(糊化)되어 물에 분산이 잘 되고 소화도 잘 되며 볶는 과정에서 고소한 향미가 생긴다.

미숫가루는 미수(米水)라고도 한다. 찹쌀·멥쌀·보리쌀·콩 등을 찌거나 볶아서 가루로 만든 식품으로 주로 꿀물이나 설탕물에 타서 차게 마신다. 주로 여름철 음료로 이용하며, 다식과 암죽을 만들 때에도 쓴다. 찹쌀 외에 보리·콩·율무 등 서너 가지를 섞어 만들면 맛도 좋고 영양가도 풍부해진다.

어려서부터 자주 미숫가루를 먹어서 그런지 미숫가루를 보거나 연상을 하면 항상 정겨움이 느껴진다. 여름에 더울 때는 얼음 동동 띄워서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한 물에 타서 식사대용으로 마시곤 하던 추억의 미숫가루. 우리에게 대표적인 추억의 하나인 것이다.

며칠 전 미숫가루를 냉동고 알알이 얼음을 몇 개 띄우고 마시려는데 불현듯 훅...!
옛날 생각이 났다.

아! 그랬지...!
그냥 엄마 생각이 나서 전화 드렸다. 막상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길래 "더위 먹지 마셔~" 딴 이야기만 엉뚱거리다가 끊었다.

유년시절은 대전시 태평동에서 살았다. 지금이야 아파트촌으로 시내 한복판 번화가가 되어 내가 다닌 태평국민학교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지만 40년 전에는 아주 변두리촌이었다. 당시 집집마다 냉장고 TV, 세탁기가 없던 시절이었고 여름에 얼음을 구하려면 동네 '어름집'에 그릇들고 가 한덩어리 사와서 바늘로 콕콕 찍어 조금씩 깨서 미숫가루에 타먹었다. 얼음 당번은 맏이인 나였고 둘째(두살아래)와 막내여동생(5살아래)은 아직 어렸다.

집이 가난하더라도 큰 부담없이 보리가루나 곡물가루 볶고 갈아서 만든 미숫가루는 종종 먹을 수 있던 간식이자 별미였다. 손님이 방문하였을때도 말간 유리컵에 미숫가루한잔 내오면 그만이었다.

6학년 여름 어느 날, 엄마는 중간 크기의 스텐양푼에 미숫가루를 타고 내가 뛰어가 사온 얼음을 쪼개 넣고 골고루 잘 저어서 가루가 엉키지 않게 한참을 저으셨다. 우리 3남매는 평소 단맛보기 힘든 터라 아주 맛나게(게걸스럽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얼음 크기가 제 각각이라 미숫가루를 다 먹고나면 나머지 크고 작은 얼음덩어리를 입에 넣고 오도독 깨트리거나 녹을때까지 이리저리 굴리던 뒷맛도 괜찮았다. 엄마는 설탕대신 단맛 내는 '뉴슈가'를 타주셨다. '뉴슈가'는 아주 단맛이 독해서 조금만 넣어도 달디단 맛을 냈다. 바깥은 찌는듯 폭염이었지만 엄마랑 미숫가루 파티 때는 마냥마냥 천국이었다.

쨍쨍쨍 셋이서 숟가락 부딪히는 다툼도 있고 작은 아우성도 벌어지곤 했다. 엄마가 장사(생선장수) 나가시는 날에는 주섬주섬 내가 어설프게 미숫가루를 찾아 동생들과 타먹기도 했다. 그 해 여름에는 내가 핸드볼 선수생활도 하던터라 시합에 자주 나가게 되어 며칠 만에 들어오기도 했다. 그럴 때 엄마가 여러가지 챙겨 주셨고, 미숫가루도 그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우리 3남매가 같이 미숫가루 먹는 것은 그 해 여름이 마지막이었다.

내 국민학교 졸업식을 달포 정도 남겨놓은 어느 겨울날, 둘째가 시름시름 앓다가 병으로 하늘나라로 날아갔다. 부모님은 내게 병명을 알려주지 않았고 나도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아이의 증상이 뇌염(?)이 아니었나 싶은데…. 그후로도 어머니에게 묻지 않았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의 마음에 비할 바가 못되었기 때문이다.

방학이 끝나 개학식 조회를 서면서 교장선생님이 아우의 죽음을 전교생들에게 알리고 명복을 빌 때 울었고, 대전중고등학교(중고등학교가 한울타리안에 있다) 다닐 때 그 아이가 잠시 입원해있던 병원 '녹색십자가'가 생각이 나서 학교 가는 길에 있는 병원들 앞을 지나기가 싫어서 몇 년을 뒷길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내 형제끼리 나눈 그리움 중에 특별하게 기억나는 것은 한 겨울 '태평동 하평 뚝방길에서 연날리며 엄마 기다리던 일'하고 여름에 '미숫가루 타먹던 일'이 생각난다.

여하튼 이후로도 미숫가루는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대학 다닐 때 자취생활 6년 동안 비상식량으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거 한 봉지 크게 구입해 코딱지만한 찬장안에 잘 모셔두는 날이면 나나 룸메이트 친구녀석이나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엄마가 자취생 아들에게 보내주신 고향보따리 한켠에서도 늘 한몫을 차지한 녀석이었다.
▲ 자연속에서 엄마아빠와... 아주 많은 이야기가 담긴 풍경

우리 아이들이 아주 어릴때였어요.
그땐 저희가 들에 일하러 나가면 할머니가 손주들을 봐주시면서 (옛날초가집의) 부뚜막이 있는 부엌에서 찬장속에 숨겨두었던 미숫가루를 스텐레스 밥그릇에 타서 아이들한테 간식으로 주곤했었지요.

그때 우리 큰아이가 4살쯤 되었을때였는데 점심때가 되어 들에서 일하고 돌아왔는데 부엌(나무문)앞에 큰돌위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스텐레스 그릇에 무엇인가를 들고 입가 가득히 하얗게 묻은 상태로 맛나게 먹으면서 저를 보고 반갑다고 소리치면서 엄마도 미숫가루 먹어보라며 내미는데 왠지 색깔이 노란 것이 이상하다 싶어 맛을 보니 아.뿔.사. 볶은 콩가루를 물에다 타서 그리도 맛나게 먹고 있었지요.

할매가 타주던 것을 보았던터라 할매가 마루에서 잠시 잠드신 사이에 부엌에 들어가서 콩가루를 미숫가루로 생각하고 그릇에 타서 두 형제가 그리도 맛나게 먹고 있던 것이 쑥떡을 묻혀먹던 달짝지근한 볶은 콩가루 였답니다.

온통 얼굴에 풀칠이 되어서 맛나다며 입맛을 다시던 그 아이들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답니다. 그땐 간식꺼리가 유일하게 미숫가루가 최고였었거든요. 지금은 두 아이들 모두 군대도 제대하고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 그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답니다. [쌀아지매추억]


인터넷 친정엄마

경북 예천군 개포면 가곡1리에 '우리 친정엄마(고객들이 붙여준 컨셉)'가 있다.
올해 40대 중반을 갓 넘어선 정옥례씨가 그 주인공이다.

올해 영농 26년차, 인천에서 만나 결혼하고 시어머님이 편찮으셔서 5년만 병구완 해드리고 올라오자며 내려간 시댁이 경북 예천이다. 그 예천에서 지금은 70여 마을농가와 인근농가가 연합하여 친환경농사를 짓고 알콩달콩 사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전국 4,000여명 고객들의 친정엄마로 살아간다.

쌀아지매란 이름 때문에 사람들은 선입견을 갖는다. 나이도 많고, 억척스럽고 약간은 뚱뚱하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

▲ 쌀아저씨 남기호, 쌀아지매 정옥례
대한민국의 농업적 현실, 그것도 특별한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볼거리가 풍부한 마을도 아닌 곳에서 한 농가가 전자상거래를 통하여 자신이 생산한 것뿐 아니라 인근지역의 농산물까지 판매를 감당하기에 이른다. 체험학교를 비롯하여 '찾아오는 농촌의 전형'을 만들어 내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드라마틱하여 호기심의 천국이 되고 말았다.

몇 년 전 '도시와 통하는 농촌쇼핑몰'이란 책을 쓰면서 마음속에 품었던 '도시민과 소통하는 컨셉'과 너무나 정확히 일치하는 쌀아지매의 활동을 눈앞에서 마주하는 일은 아주 큰 즐거움이었다.

또 농촌쇼핑몰이 갖는 유의미한 가치를 실재로 느끼게 해 주는 요소가 많아 쌀아지매를 공부하면 할수록, 현장에 내려가 살펴보면 볼수록 배울 것이 많았고, 비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픈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친정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고향보따리

어느 날 60대 중반을 넘긴 어느 고객이 울먹거리면서 전화를 했다. 쌀아지매가 바리바리 야물게 꾸려서 보내준 상품 보따리를 풀어보고, 그 안에 앉아있는 마음이 느껴지는데 영락없이 젊었을 때 친정엄마에게서 받은 마음 그대로라 엄마 생각난다면서 전화를 한 것이다. 20여년이나 어린 쌀아지매에게서 친정엄마의 뜻을 얻은 것이다.

보통의 여자들, 엄마들에게 친정엄마는 어떤 의미일까?

20대 30대 새댁의 친정엄마 다르고, 40대 엄마의 친정엄마 다를 것이다. 쌀아지매보다 나이 많은 50대 60대 엄마들은 이미 그 자신이 친정엄마임에도 불구하고 쌀아지매를 보고 친정엄마의 정감을 느낀다. 참 신기한 일이다.

나이를 먹어도 엄마는 영원한 엄마고 엄마의 그 마음 앞에서는 마냥 작아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엄마는 참 '감성적인 홀로그램'이기도 하다. 살아계시든 아니든,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세대가 한 바퀴 흘러 내가 죽을 때까지 엄마의 뜻은 남는다.

엄마가 이뻐서일까? 아니다 예쁜거로 치면 영화배우 탤런트 따라 갈수야 있겠는가? 그런데 그 엄마가 그리 좋은 이유는 마음일께다. 자식에게 무엇이든지 주고픈, 일방적인 마음 때문에 딸자식들은 감동 먹고, 시큰하고 잊은 듯 부지불식간에 뜨거워지는 것이다. 엄마로 인해,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내 삶은 영원한 공명을 울리는 것이다. 친정엄마의 주파수에 맞춰서….

친정엄마가 보내주는 고향보따리에 담긴 마음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다.

▲ 필자가 주문해서 받아든 황토방선식(미숫가루), 곳곳에 쌀아지매의 손길, 마음길이 느껴진다.
황토방선식(미숫가루)

쌀아지매 미숫가루는 자연농법으로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재배한 12가지 곡물을 원료로 한다. 보리15%, 현미찹쌀15%, 현미15%, 기능성현미10%, 흰콩10%, 찹쌀5%, 율무5%, 서목태5%, 수수5%, 흑임자5%, 약콩5%, 속청5%를 쓴다.

주문이 들어온 뒤 바로 볶아서 생산을 한다. 미리 생산해 놓을 수도 없다 흑임자 같은 원료가 같이 들어가 있으므로 산화되거나 산패되기 쉬우므로 언제나 최선의 상태에서 준비하는 것이다. 최상의 곡물로 만들어서 고객들에게 보낼 때 곱게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망설이듯 망설이듯 정성들여 보낸다.

토종잡곡류에는 몸 안의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도와 몸 속에 쌓이는 해로운 물질을 몸 밖으로 빼내는데 효과가 있다고 하니 기분까지 산뜻하게 해주고, 입맛도 추억에 젖게 만드는 미숫가루의 매력에 빠질만도 하다.


필자가 지난 5월 예천 기곡리 쌀아지매가 사는 마을을 방문했을 때 논둑이며 밭둑이며 온통 풀밭이었다. 자연스런 논의 풍경, 모나지 않는 밭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제초제를 쓰지 않으므로 논밭에서 인간의 욕심으로 크는 벼와 작물에 해충이 생기면 자연스레 풀밭에서 천적이 생긴다. 마을전체가 환경친화적인 컨셉으로 농사를 짓는다. 마을과 이웃마을까지 합하여 77농가가 연대를 하여 다양한 결과물을 생산해낸다.

미숫가루의 활용

아무리 맛이 있고 의미가 있는 거라도 아침식사 대용이나 건강간식으로 여름 내내 쓰다보면 자칫 애물단지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요즘에는 철을 안 가리고 년중 활용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망설여질 때 있는 법이다.

입자가 고우므로 여러가지 제과 제빵의 재료로 쓸 수 있고, 찹쌀경단에 미숫가루 옷을 입히기도 하고 칼국수 반죽할 때 미숫가루를 5 :1 정도 섞어 면을 만들면 시원한 육수와 잘 어울려 한끼 식사 너끈히 뒷받침한다.

미숫가루는 다른 요리와도 궁합이 맞는 편이다. 다른 재료에 자연스럽게 묻어가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전체적인 맛을 업그레이드 시킨다. 겉절이 김치 버무릴 때 한 큰술 뿌려주면 매운맛이 살짝 줄어들면서 감칠짭짜롬한 맛이 난다. 어느 삼겹살집에서 미숫가루를 활용한 소스를 내온 집이 있었다. 기름기에 물리는 느낌이 한결 덜했다.

마땅한 끼니꺼리가 없을 때에는 죽처럼 되게 만들어서 '이거 밥이다'하고 먹어도 좋다. 미숫가루는 시간이 지나면서 속이 든든해진다.

만인의 추억이 스며있는 먹을거리 미숫가루
사람사람마다 수십가지 추억으로 녹아있고 애환으로 살아나는 미숫가루….
그러고 보면 세상에 미숫가루 이야기는 끝이 없는 무한대일 것 같다.

어쩌면 앞으로도 살아있는 동안 가까이 여미고 만나야 할 존재….

쌀아지매의 황토방미숫가루로 인하여 내 아이들과 추억의 끈을 잇고, 살아온 지난날을 반추해본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감을 기꺼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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