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2000년 도교문명의 뿌리 칭청산(靑城山)

醉月 2008. 7. 28. 08:00

香煙 그윽한 푸르름 속, 天師의 자취를 좇다

유교가 중국의 국가·사회 질서, 학문과 기술을 통치자의 입장에서 규명하려 했다면 도교는 종교적 요소를 바탕으로 이를 민중의 입장에서 대변해왔다. 이렇듯 민중의 정서가 흠뻑 밴 도교를 모르고는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니 중국문화를 살펴보려는 이들에게 도교의 본산 칭청산을 품은 청두는 더없이 매력적인 여행지다.

 

온통 푸르름으로 뒤덮인 칭청산의 산문

중국의 내륙도시 청두(成都)에는 볼거리가 아주 많다. ‘삼국지’에 유비의 군사(軍師)로 나오는 제갈공명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 중국의 저명한 도교 사원인 청양궁(靑羊宮), 당대의 시인 두보(杜甫)가 한때 머물렀던 두보 초당, 팬더 등 이 지역 특유의 동물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청두 동물원, 3000년 전의 제사 터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해놓은 싼싱뒈이(三星堆) 박물관, 백화점과 부티크 가게들이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는 청두 최고의 번화가 춘시루(春熙路)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교외에는 이보다 더 많은 볼거리가 있다. 인근 100km 이내에 세계문화유산만도 네 곳이나 있는 것이다. 중국 불교 성지의 하나로, 선경(仙境)으로 이름이 자자한 어메이산(蛾眉山)과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높이 71m)인 낙산대불(樂山大佛), 2200년 전의 치수(治水)시설인 두쟝옌(都江堰), 그리고 중국 도교의 고향인 칭청산(靑城山) 등이 바로 그것이다.

 

도교는 신선사상에 뿌리를 둔 중국 자생의 종교로 중국의 역사와 풍토, 지리적 조건하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20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노자(老子)를 개조(開祖)로 하고 장도릉(張道陵, 본명은 張陵·?∼156)을 교조(敎祖)로 하는 도교는 그 역사적 전개과정이 유교와 비슷하지만 내용상으로는 큰 차이를 보여왔다.

유교가 중국의 사회 및 국가 질서, 그리고 학문과 기술을 통치자 혹은 지배자의 입장에서 규명하고자 했다면 도교는 종교적 요소를 중심으로 사회적 질서와 틀, 학문과 기술 등을 민중의 입장에서 대변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 바탕에 민중의 정서를 깔고 있어 도교를 모르고는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때문에 중국문화를 탐방하려는 이에게 청두는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가 된다.

 

‘天賦之國’의 도시

청두는 흔히 ‘천부지국(天賦之國)’이라 불린다. 그만큼 먹을 것이 풍족하다는 뜻이다. 당대의 시인 이백(李白)이 ‘촉도난’이란 시에서 “아아, 촉(蜀)으로 가는 길의 어려움은 푸른 하늘을 오르기보다 더 어려워라”라며 그 지형의 험난함을 읊기도 했던 청두 일대가 먹을 것이 풍족한 땅이 된 데에는 두쟝옌이 큰 역할을 했다.

두쟝옌이란 전국시대 촉나라 태수였던 이빙(李氷)이 아들 이랑(李郞)과 함께 청두 교외를 흐르는 민강(岷江)에 기원전 256년 설치한 수리시설을 말한다. 당시 이곳은 진(秦)나라 땅이라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저력 또한 촉의 풍부한 물자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오늘날 청두시는 그때의 번성함을 되살리려 디지털 기술을 육성하는 하이테크 단지를 오래 전부터 조성해 우수한 인력과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다. 2200년 전에는 치수가 최고의 하이테크였지만, 지금은 디지털 기술이 그에 해당된다며.

 

청두의 여행사에선 두쟝옌과 칭청산을 하루에 둘러보는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대중교통편으로 그 두 곳을 직접 찾아다닌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왕복 교통비와 점심식사, 입장료 등을 포함해 80위안(1만2800원)이었는데,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다.

청두 시내를 한바퀴 돌면서 예약 손님들을 태운 관광버스는 가까운 두쟝옌부터 찾았다. 길이 잘 닦여 있어 차는 마음껏 속력을 냈다. 1시간 뒤에 두쟝옌시에 도착했다. 도시는 꽤 컸다. 버스 정류장 앞 로터리에는 이빙 부자(父子)의 모습을 새긴 커다란 소상(塑像)을 세워 ‘두쟝옌의 도시’임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었으나, 버스는 스쳐지날 뿐 멈추지 않고 곧장 숲이 울창한 산속으로 달려갔다. 강변으로 가야 할 텐데 차는 반대로 산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차가 섰다. 그때에도 강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 안내원이 나눠준 입장권을 들고 숲속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갔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을 향해 들린 날렵한 처마와 검은 기와지붕,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잡다한 인물상과 신상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하늘과 만나는 지붕 위에다 저토록 요란한 장식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는데, 피부가 해맑은 열아홉 살 안내원 덩양(鄧陽)은 그것이 ‘이왕묘(二王廟)’라고 일러줬다. 이왕묘는 이빙 부자를 모신 사당. 세로로 ‘이왕묘’라 쓴 편액은 빙옥상(憑玉祥)의 글씨라고 한다.

   

長城은 공간, 두쟝옌은 시간

 

도도히 흐르는 민강을 바라보고 있는 이왕묘. 2200년 전 수리시설을 설치, 일대를 농경의 적지로 만든 이빙 부자를 모신 사당이다.

수많은 글씨와 식물 문양의 부조, 인물상들이 촘촘히 박힌 사당은 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오히려 무슨 도관(道觀·도교 사원) 같았다. 이런 내 마음을 미리 눈치채기라도 한 듯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건물 앞 벽에는 ‘선경(仙境)’이란 두 글자가 써 있었다. 그렇다면 이빙 부자는 그들이 베푼 선행으로 하여 지금 이 선경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게 사실이라면 살아 생전에 뜻 있는 일을 많이 해둬야 할 것 같다.

 

민강은 그 아래로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강폭도 넓고 물살도 급했다. 강 위로는 ‘안란색교(安爛索橋)’라 쓰여진, 로프로 만든 다리가 놓여 있었다. 발을 그 위에 옮겨놓자 몸이 심하게 흔들려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간신히 다리를 건너 1km 정도 강 하류 쪽으로 내려가자 비로소 ‘바오핑커우(寶甁口)’란 이름의 수리시설이 나타났다.

지금도 물의 흐름을 조절하고 있는 듯 안내원이 가리키는 손끝에선 물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이렇다할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안내원에 따르면 강바닥에 사다리 모양으로 돌을 쌓아놓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 정도의 작업으로 인근 청두를 천부지국으로 만들고 진시황으로 하여금 천하통일을 이루게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반드시 거창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두쟝옌을 만리장성과 비교해 “장성이 드넓은 공간을 차지했다면 이곳은 아득한 시간을 차지했다”고 한 20세기 중국의 문인 여추우(余秋雨)는 두쟝옌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이런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이곳의 물은)영혼이 겹겹이 환희에 빛나는 모습으로 모두 함께 모여 비약의 힘을 겨루며, 활기에 찬 생명으로 솟구쳐오르는 듯하다. 이들의 힘겨루기는 극히 규칙적이다. 튀어오른 물길이 수문에 이르면 빗자루로 쓸어낸 듯이 순식간에 두 갈래로 나뉘어 그대로 뛰쳐나간다. 두 갈래 물줄기는 각기 튼튼한 제방에 부딪히는 순간 금세 온순하게 방향을 바꿔 다시 또 다른 제방에 부딪힌 다음 제방 주인의 명령에 따라 물줄기를 고른다.”

제방 노릇을 하는 바오핑커우 옆의 작은 섬을 지나자 복룡관(伏龍館)이란 사당과 박물관, 다관(茶館) 등이 나타났다. 그곳은 잘 가꿔진 공원이었다. 우리가 타고온 버스는 공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어느 호젓한 식당이었는데, 맛있는 음식이 푸짐하게 나와 모처럼 배불리 먹었다.

‘칭청산’은 집합명사

투어는 계속됐다. 다음 코스는 청두에서 서북쪽으로 65km 떨어진 칭청산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칭청산 관리국, 즉 산문 앞에 서니 칭청산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푸르렀다. 안내원 덩양은 소나무를 비롯, 대나무 등 30여 종의 수목이 이곳에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고 했다.

거기서 산 칭청산 지도를 펴보니 산은 꽤 컸다. 산속에 또 산을 거느리는 등 주위가 120km에 이르는 큰 산이었으니 ‘칭청산’은 집합명사인 셈이다.

관리국 앞에는 산으로 오르는 길이 크게 두 곳으로 나 있다. 하나는 동쪽으로 빠져 월성호(月城湖)를 배로 건넌 다음 거기서 로프웨이를 이용해 상청궁(上淸宮)으로 오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들어가 천연도화(天然圖畵), 오동천(五洞天), 천사동(天師洞)으로 올랐다가 그 뒤로 난 길을 따라 상청궁에 닿는 것이다.

천사동과 상청궁은 모두 해발 1260m의 칭청산 제1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는 칭청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서쪽의 바오화산(寶華山·해발 2113m) 아래에는 만불사와 천교(天橋), 쌍천수렴동(雙泉水濂洞), 백운촌(白云村) 등이 있고, 그 너머엔 도원별동, 칭청산 관리국 제3 초대소 등이 있다. 따라서 며칠을 묵는다 해도 이 모두를 스쳐지나기조차 벅찰 지경이다.

   

민강의 거센 물살이 순하게 바뀌는 바오핑커우 일대

그날 택한 코스는 월성호를 낀 동쪽 루트였다. 자연석으로 쌓은 돌계단 위로 가마꾼들이 다녔다. 길다란 대나무 두 가닥에 천을 깔아 만든 가마를 이곳에선 ‘화간(滑竿)’이라 불렀는데, 사람들이 이용하기 쉽게 곳곳에 거리별 요금표를 세워뒀다. 산문에서 천사동까지는 80위안, 천사동에서 상청궁까지는 70위안, 산 전체를 둘러보는 데는 220위안이었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월성호는 그리 크지 않았다. 계곡 속에 생긴 작은 호수라 그런지 물살이 없어 수면은 거울처럼 잔잔했다. 그 위로 모터선 한 척이 다니면서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배에서 내리자 곧바로 2인승 리프트가 나타났다. 앞을 쳐다보니 경사가 무척 급하다. 케이블카가 아니라 로프웨이가 운행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인 것 같았다.

내 옆자리엔 오랫동안 상하이(上海)에 있는 항공사에서 일하면서 부산과 인천을 한 차례 다녀간 적이 있다는 60대의 중국인이 앉았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심하게 요동치는 리프트에서 두 손이 자유롭지 않아 필담을 나눌 처지가 아니었기에 영어와 몇 마디 중국어를 섞어가며 그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일본에 대한 한국의 자세가 중국의 그것보다 더 당당하다”며 “중국 지도자들은 그 점에서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뜻밖이었다. 그는 단호했다. 중국이 왜 일본군으로부터 당한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칭청산의 本殿 상청궁

그러는 사이 상청궁 역에 닿았다. 몇 사람은 거기서부터는 스스로 알아서 하겠다며 일행과 헤어졌다. 우리는 가파른 길을 따라 곧장 상청궁으로 향했다. 칭청산의 그 많은 도관들 가운데 ‘궁(宮)’이란 말이 들어간 곳으로는 상청궁이 유일한데, 그것은 이곳이 본전(本殿)임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그래서인지 규모가 꽤 컸다. 비탈을 이용해 세운 것이라 입체적이기까지 했다.

입구의 담벼락에는 ‘큰 도는 인위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의 ‘대도무위(大道無爲)’란 네 글자를 새겨 이곳이 도교의 공간임을 알렸다. 초월적인 신의 힘에 의지하기보다는 현실적인 인간의 노력을 중히 여기는 도교에서 ‘무위’를 강조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들이 말하는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절제를 뜻하는 것 같다. 절제란 인간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도교는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게 아닐까.

 

상청궁 안의 제단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그것은 향을 태우면서 나는 것이었다. 향연(香煙) 사이로 희미하게 신상이 드러났다. 신상은 특이한 관을 쓰고 붉은 색이 주조를 이루되 여러 가지 색이 들어간 의복을 걸친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셔터를 누르려는데, 어디선가 “노!”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촬영이 금지돼 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칭청산 그 어디에서도 신상의 촬영은 허락되지 않았다.

진나라 때 건립됐다는 상청궁에는 목각 노자상, 도가의 의술을 베푸는 방, 도교 식당 등이 있었다. 상청궁은 높은 곳인 데다 동향이라 장엄한 일출 장면을 즐길 수도 있다고 설명한 안내원은 우리를 담장 밖으로 데리고 가서는 다짜고짜로 우물을 보여줬다. 우물은 두 개였다. 하나는 네모지고 다른 하나는 둥근데, 샘 안쪽에서 서로 연결돼 있다 하여 ‘원앙정(鴛鴦井)’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녀는 그걸 본 우리의 눈이 휘둥그래지기를 바랐을 것이나 일행의 대부분은 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상청궁 관람이 투어의 마지막 코스라 원앙정을 구경한 사람들은 천천히 경내를 거닐면서 20세기 중국 화가 장대천(張大千)이 선묘로만 그린 선녀화도 구경했다.

투어가 끝나자 나는 일행과 헤어지겠다고 했다. 장도릉이 수행했고, 지금도 여전히 도교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천사동이 투어 코스에 포함돼 있지 않아 혼자서라도 그곳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덩양은 그런 나를 위해 천사동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줬다. 잘 다녀가라는 인사와 함께. 지도를 지니고 있어 불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천사동 향한 ‘현묘’한 길

 

향연(香煙)에 싸여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청궁의 제단

칭청산의 길이 다 그러하지만 상청궁에서 천사동으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좁았다. 다니는 사람도 뜸해 참으로 고요했다. 수행을 위해 남자들에게만 방문을 허용하는 그리스의 아토스 수도원 일대에서 이런 길을 거닐었던 적이 있다. 그때의 기분을 다시 한번 맛본 셈인데, 그것은 도교의 용어를 빌린다면 ‘현묘(玄妙)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오로지 군데군데 붙여놓은 팻말만이 벗이 돼줬다. 팻말에는 영어를 함께 써놓아 외국인들도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했다.

그 가운데에는 이런 글귀들도 보였다. ‘인간과 새는 하늘과 숲을 공유한다(Human being and birds share the sky and woods)’ ‘생태계는 어떠한 오염도 거부한다(The fine ecology refuses any dirt)’. 이런 글귀는 ‘쓰레기를 버리지 맙시다’ ‘잔디를 밟지 맙시다’ 같은, 우리들이 자주 쓰는 직설적인 표현보다 호소력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 표현 역시 도가다운 발상에서 비롯된 듯하다.

 

능선 한가운데선 중년 부부가 오이를 팔고 있었다. 중국의 어느 산에서나 자주 볼 수 있는 이런 광경은, 중국인들은 목이 마르면 찬물이나 탄산음료가 아닌 오이로 목을 축인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따뜻한 차를 즐겨 마시는 그들인지라 맹물을 그냥 마시는 경우란 그리 흔치 않다. 광천수를 들이켜대는 젊은이들말고는.

어느덧 장관대(壯觀臺)와 와운정(臥雲亭)을 거쳐 방녕교(訪寧橋)를 건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대로 괜찮았던 길이 갑자기 폭이 훨씬 더 좁아지고 가팔라졌다. 깎아지른 암벽에 붙여 길을 냈기 때문인데, 커다란 배낭을 맨 나로서는 몸을 쉬 틀 수가 없어 두 손을 바위벽에서 떼어놓지 못했다. 그랬다간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예상외의 복병이 천사동으로 가는 길에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그런 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데 있었다. 가파르지만 않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텐데 좁고 가파를 뿐 아니라 꼬불꼬불하기까지 하니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바로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였다. 그는 몸이 가벼워 쉽게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렇다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나 몰라라 하고 혼자 앞질러갈 정도로 몰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내 손을 잡고는 가만가만 앞으로 끌었다. 그가 버텨준 덕분에 나는 체중을 앞으로 실을 수 있었다. 그러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지만 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험해졌다. 소라고둥 속처럼 좁고 가파른 길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그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하면서 그곳을 겨우 빠져 나왔다. 천사동은 바로 그 앞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장애물 경주를 무사히 끝낸 자에게 베푸는 선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사내와는 거기서 헤어졌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밖에 해줄 게 없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나는 속으로 ‘그에게 복이 있으라’고 기도했다.

 

장도릉의 오두미도(五斗米道)

천사동에서 ‘천사(天師)’란 장도릉을 일컫는다. 천사동은 그가 도를 닦았다는 천연동굴 앞에 세워진 도관인데, 수나라 때(605∼617)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이렇게 꼬불꼬불하고(曲), 가파르고(急), 좁은(狹) 천험(天險)의 땅을 찾아 도를 닦은 이유는 이곳이 동천(洞天)이었기 때문이다.

도교에선 선인이 사는 명승을 동천 또는 복지(福地)라고 부른다. 당말의 도사 두광정(杜光庭)은 ‘동천복지기’에 10대 동천을 적어뒀는데, 칭청산동을 그 다섯 번째로 쳤다.

 

장도릉은 한나라 초기의 책사 장량(張良)의 8대 손으로 키가 구척팔촌이고 짙은 눈썹에 뺨이 컸으며 붉은 두정(頭頂)에 녹색의 눈을 가졌다고 전한다. 힘이 장사라 한번 움직일 때마다 용행호보(龍行虎步), 위무당당했다는 것이다. 일곱 살 때 이미 노자의 ‘도덕경’을 완독했으며, 나이가 든 후엔 수행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그가 ‘도’를 터득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그는 당시의 다른 도가들처럼 추종자들에게 육체의 불멸과 장수를 약속했다. 여기서 ‘다른 도가들처럼’이라고 한 것은 장도릉 이전에도 도를 공부해 자칭, 타칭으로 ‘도사’라 불리는 사람이 많았으며,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교의 교조 장도릉이 수행했다는 천사동 앞에 세워진 삼청전. 내부에는 옥황원시천존 등 3신을 모시고 있다.

그런 이들 중의 하나가 진시황 때의 서복(徐福)이란 자다.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에 그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시황제가 불로장생하기를 원하는 것을 알고 서복은 황제에게 나아가 “동해(즉 황해)에 선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불로장생케 하는 약초가 자라고 있습니다”고 진언했다. 서복의 출생지인 산둥(山東)성은 예로부터 신선사상이 팽배한 지역으로 수많은 도사가 배출됐다.

 

당시 도사의 제일조건은 방술(方術)에 있었다. 방술이란 천문·역산(曆算)·점술·의약·방중(房中)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지식과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다. 서복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동남(童男) 동녀(童女) 수천을 거느리고 동해로 나아갔는데, 그 뒤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고 한다.

 

장도릉은 최초의 교단인 천사도를 창설했다. 그는 또 병을 치료해주고 그 사례로 1년에 쌀 다섯 말(약 3kg)을 받았다. 때문에 민간에선 ‘오두미도(五斗米道)’라 불렸다. 치료비나 종교 헌금의 명목으로 쌀을 거둔 것은 조직의 보전과 신자들의 복지와 후생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교단은 급속하게 커져갔다. 이들의 존재는 ‘삼국지’ 첫머리에도 나온다. 그 시기는 유비가 장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기 직전인데, 황건적에 못지않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천사도에서는 ‘병이란 죄의식의 결과로서, 교주인 천사에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다시 말해 영혼의 정화를 통해 육체의 건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한 방편으로 병자들에게 부적을 만들어줬다. 병자들은 그것을 불에 태워 그 재를 물 위에 띄워보냄으로써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 그때 재를 띄워보내던 곳이 천사동 아래로 흐르는 해당계(海棠溪)라는 개울이다.

 

도사 3분의 2가 여자

장도릉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천사의 자리는 세습되어 그의 아들 형(衡)과 손자 노(魯) 등으로 이어져 지금은 64대 손이 그 일을 맡고 있다. 그 중에서 도교의 기틀을 마련한 초기의 3대를 일러 흔히 ‘삼장(三張)’이라 부르며 흠모한다.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고는 하나 신도들의 대부분은 어리석었기 때문에 종교라기보다는 일종의 ‘교비(敎匪)’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교가 일반 민중뿐 아니라 상류 지식층 사이에도 전파되자 체계적인 교리와 합리적인 학설, 그리고 교양의 뒷받침이 요구됐다. 이런 도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이론적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3∼4세기 무렵 위백양(魏伯陽)과 갈홍(葛洪) 등이 학문적 기초를 제공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북위 때의 도사 구겸지(寇謙之)가 전래종교인 불교의 자극을 받아 의례적 측면을 대폭 강화함으로써 비로소 종교적인 교리와 조직이 정비되기에 이른다.

천사동의 중심 건물인 삼청전(三淸殿)은 옆으로 길게 늘어진 건물이라 24mm 광각 렌즈로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다. 7칸짜리 목조 삼청전에는 도교에서 최고의 신으로 받드는 옥황원시천존(玉皇元始天尊)과 상청영보천존(上淸靈保天尊), 태평도덕천존(太平道德天尊) 등 삼천(三天 또는 三淸境)을 모시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불교로 치면 금당, 즉 대웅전에 해당된다.

 

광엄묘낙국(光嚴妙樂國)의 왕자로서 궁중의 창고에서 보물과 먹을 것을 꺼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등 대단히 자비로웠던 옥황원시천존은 흔히 말하는 옥황상제로서 도교의 개조인 노자, 즉 태상노군(太上老君·일반적으로는 그저 ‘노군’이라고 한다)도 원시천존의 화신이라 믿는다.

옥황원시천존은 삼청전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삼천은 모두 책상에 앉은 자세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게 길렀으며 도포 같은 복장을 걸쳤다. 그 앞으론 꽃과 향이 놓여 있고, 그 좌우에는 태고(太鼓)와 종도 보였다. 그러다 보니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옛이야기에 나오는 광경을 접하는 듯하다.

이처럼 예스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것은 도사들이다. 이들은 두루마기 스타일의 청색 도복에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렀으며, 머리에는 아무런 장식도 무늬도 없는 검은색 두건을 쓰고 있는데, 도무지 말도 없다.

남자 도사뿐 아니라 여자 도사도 여럿 있다. 도교에선 남자 도사를 ‘건도(乾道)’, 여자 도사를 ‘곤도(坤道)’라 부른다. 나이도 천차만별이다. 얼굴이 온통 주름투성이인 곤도가 있는가 하면 피부에 아직 윤기가 흐르는 젊은 곤도도 눈에 띈다.

삼청전의 앞마당인 해만(海?) 한가운데에는 팔괘(八卦)와 간지(干支)가 그려져 있다. 돌을 박아 만든 이 태극도 하나만 보더라도 도교와 주역은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니 건도와 곤도라 부르는 게 아니겠는가. 주역의 팔괘에서 건은 하늘(天)을, 곤은 땅(地)을 나타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천사동에는 여자 도사인 곤도가 15명이나 있어 전체 도사(22명)의 3분의 2로 단연 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古常道觀

 

삼청전 앞마당에는 팔괘와 간지로 이뤄진 태극도가 그려져 있다.

마당 한쪽에는 커다란 수목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밑둥은 하나이나 지상 2m에서부터 수많은 가지가 뻗어나와 마치 다발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천사동 고(古)은행’이란 팻말이 붙어 있고, 그 아래엔 “교조 장천사가 손수 심었다. 높이는 50m이고 지름은 7.06m에 이른다”고 쓰여 있다.

장도릉이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오면서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19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자라고 있다니 놀랍기 짝이 없다. 가을날 저토록 많은 가지에 매달려 있는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면 얼마나 장관일까. 단풍이 빚어내는 황금색은 중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기도 하니 고은행은 천사동의 보물이면서 상징인 것이다.

천사동에는 일상적인 종교활동이 이뤄지는 황제전(皇帝殿)과 돈을 주관하는 신을 모신 재신전(財神殿)도 있다. 재신전 앞으로는 문이 있어 그걸 통해 밖으로 나가보니 긴 돌계단이 이어졌다. 끝까지 내려가 몸을 돌려 천사동을 바라보니 ‘고상도관(古常道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천사동은 고상도관으로도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넓지 않은 고상도관을 한바퀴 둘러보고는 ‘숙박등록처’를 찾았다. 서울을 떠나올 때부터 관광객도 묵을 수 있다는 정보를 알았기에 오후 늦게 이곳으로 오면서도 잠자리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숙박담당은 젊은 곤도였다. 벽에 걸린 표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도미토리 형태의 방은 물론 2인실, 1인실도 있었다. 나는 하룻밤 숙박료가 80위안인 독실을 택했다.

 

장도릉이 1900년 전 이곳에 입산하면서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지금도 자란다. 높이가 50m, 밑둥의 지름은 7m에 이른다.

은행나무 아래 마련된 유객(遊客) 숙소는 3층 구조였고, 곤도가 안내한 내 방은 3층이었다. 전망은 괜찮았다. 방 안에는 TV도 있고 세면장도 있었으나 보일러는 수동식이라 샤워를 하기 위해서는 30분 전에 스위치를 올려 물을 데워야 했다. 숙박담당 곤도는 직접 보일러 작동 시범까지 보였다.

가방을 내려놓고 세수를 한 다음 유객 찬팅(餐廳·식당)으로 갔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외부 방문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메뉴판을 펴들긴 했지만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두부’라는 말이 들어 있는 요리 하나와 밥을 시켰다. 값은 무척 쌌다. 별도의 반찬은 없었다. 배를 채우기 위해 먹어둔다는 식으로 밥그릇을 비웠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매점에서 컵라면 ‘캉스푸’ 하나를 샀다. 찻병의 물이 뜨겁지 않아서인지 그것마저 맛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반쯤 먹다 말았다.

어느새 천사동은 어둠에 싸였다. 처마 아래와 마당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등불만이 주위를 밝혔다. 유객 숙소에도 묵는 손님이라곤 나 혼자뿐이라 더더욱 조용했다.

나는 숙박계를 맡고 있는 곤도를 찾아가 “도교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으니 적당한 사람을 좀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곧 한 청년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30대 초반의 서원명(徐遠明)이라는 사람으로, 건도는 아니었다. 도교를 배우고 있는 예비 건도라고만 자신을 밝힌 그는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아 그런 대로 얘기를 끌어갈 수 있었다. 나는 먼저 “도교에 대해 알고 싶다”고 용건을 밝히면서 그와 문답을 주고받았다.

   

도교는 종교이자 삶 그 자체

 

20세기 중국의 화가 장대천이 그린 선녀화. 상청궁에서 볼 수 있다.

“도사들의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5시에 태고와 종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하루를 시작합니다. 도관을 꾸려가기 위한 여러 가지 노동과 수련이 그들의 일이죠. 이곳을 찾는 신도들에게 독경을 해주는 것도 그들의 노동에 포함됩니다. 아침, 저녁 두 차례 행하는 독경은 주로 20∼30대 곤도들에 의해 이뤄집니다. 독경은 눈으로 책을 보고 입을 벌려 소리를 내는 것이지만, 본질은 마음 속으로 읽는 것입니다.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서죠.”

“도사들은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던데요.”

“그들은 청색 도장(道裝)을 입고 모발을 기르며, 머리 위에는 ‘바오하오(寶號)’라는 모자를 씁니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며 술과 육식도 금합니다.”

“그건 왜죠?”

“도교가 모시는 신 가운데에는 노자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노군’이라 부르죠. 노군께서는 ‘오계(五戒)’를 내리셨는데, 거기에는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음란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 포함돼 있습니다. 금주와 독신은 그에 따른 것이죠. 채식 또한 그에 연유한 것으로, 남녀 도사들은 도관 주위에 채마밭을 일궈 야채를 재배하며 두부도 직접 만들어 먹습니다. 식용유도 자체적으로 생산한 것을 쓰죠.”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중세 유럽 수도원의 생활이 떠올랐다. 와인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일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교가 추구하는 바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모순들이 조화를 이루다

“도교는 중국의 어느 종교보다도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학문이나 사상이라기보다는 종교이자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죠. 그러니 도관은 ‘템플(temple)’이 아니라 ‘팰리스(palace)’로 불러야 합니다. 도교에서도 물론 경전을 연구합니다. 높은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현들의 가르침을 알아야 하니까요. 도교 최고의 대학으로는 중국 도교의 총본산인 베이징의 백운관(白雲觀) 부속 도학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도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도교를 뭔가 이상한 종교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때는 아주 유치하고 음란한 방중술 같은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까?”

“겉으로 보기엔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호 모순적인 요소들이 도교에서는 아무런 문제 없이 조화를 이룹니다. 이는 도교가 갖는 종합적이고도 유기적인 성격에 기인하죠. 그래서 도교는 학문(과학)이 아니라 종교라는 겁니다.

도교가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인간의 운명은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행동, 다시 말해 실천을 중시합니다. 겉으로는 도관이 속세와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늘 관심을 갖고 그 해결책을 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요. 신도와의 소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도교가 현대사회에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생명과 환경에 대한 경시에서 비롯됐습니다. 도교가 지향하는 삶을 산다면 그런 문제는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도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노군이 ‘도덕경’에서 말한 “도(道)는 일(-)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고, 이는 삼(三)을 낳으며, 삼은 만물을 낳는다”는 말을 들려줬다.

도의 의미와 시작의 중요성을 일깨우려는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나는 그에게 감사를 전하고 헤어졌다. 그리고는 304호실 내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귓가엔 물 흐르는 소리와 벌레들의 울부짖음만이 들려왔다. 천사동의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칭청산이 푸르른 까닭

다음날 아침,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몸은 가뿐했다. 그런데 새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지치지 않고 울어대는 걸까. 우는 것이 아니라 새 날이 밝았음을 기뻐하기에 그러는 것일까.

마당으로 올라가니 건도 한 사람이 비질을 하고 있고, 곤도는 등을 거둬들였다. 7시가 되자 신도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그 시간에 이곳에 도착했다면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났단 말인가.

순간, 나는 배낭을 어깨에 멨다. 하산하기 위해서였다. 아침식사는 아래로 내려가 할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오동천과 주위의 경관이 아름다워 사람이 마치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천연도화’란 이름이 붙은, 청대에 건립된 화랑을 지나자 ‘춘선행도(椿仙行道)’란 길이 나왔다. 그 한 모퉁이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權 三 允
● 1951년 출생
● 한국외국어대 무역과 졸업
● 중동지역 등 60여 개국 여행
● 저서: ‘차도르를 벗고 노르웨이 숲으로’ ‘문명은 디자인이다’ ‘나는 박물관에서 인류의 꿈을 보았다’등

“옛날 고상도관에 팽춘선(彭椿仙)이란 큰 도사가 수행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자 그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길 연도에 나무 한 그루씩을 심으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칭청산이 몰라보게 푸르러졌다.”

하산하는 데는 40분이 걸렸다. 산문 앞에서 두쟝옌으로 마이크로버스가 다녔다. 산을 빠져나가자 논길이 나왔는데, 논둑에는 콩과 완두, 양배추 등이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