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사판’ 몰린 조계종과 동국대
● 조계종 총무원 관계자가 조선일보에 정보 제공
● 조계종과 동국대, 동국대 이사회 장악 위해 서로 폭로전
●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전통이 낳은 한국 불교 폐단 ‘문중’
● 지방정부가 중앙정부 먹여 살리는 총무원 구조
● ‘스님은 한 부처의 제자’ 대원칙 무시되는 조계종
● 외화내빈의 불교계…파워엘리트 불자가 드물다
● 신임 총장 개혁으로 몸살 앓는 동국대 교수 사회
● 동국대 이사회, 스님 이사가 과반수
● ‘사찰 경영학’ ‘종단 행정학’ 도입해야
‘이판사판’은 일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몰렸을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이판사판이니 이렇게 하자”며 왕왕 무모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이판사판’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우리식 한자어임은 제법 알려져 있다. 이 말은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에서 나왔다. 이판승은 참선과 수도를 통해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스님이고, 사판승은 절 살림을 하는 스님이다.
불교를 탄압하고 승려를 천시했던 조선시대, 스님이 되는 것은 세상(속세)과 이별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 출가인데, 스님이 되려면 이판승과 사판승 가운에 하나를 택해야 하므로 궁지에 몰린 상황을 가리켜 ‘이판사판’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정아씨 사건 이후 조계종이 이판사판이 된 것 같다. 10월5일 조계종은 전국 본사(本寺)주지회의를 열어 신씨 사건 이후 총무원의 대처가 미흡한 것을 비판했다. 그로 인해 10월8일 총무원 고위 간부인 부·실장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하고 지관(智冠) 총무원장은 두 명을 제외한 전원의 사표를 수리하며 새 지도부를 구성했다.
이판사판 된 조계종
위기에 몰린 조계종은 10월19일 일반에게 개방하지 않는 유일한 사찰인 경북 문경의 봉암사에서 ‘수행 종풍 진작을 위한 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 대법회’를 열어 내부 자정(自淨)과 혁신을 다짐하기로 했다.
17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불교’ 조계종이 왜 이러한 지경에 몰리게 됐을까. 신정아씨 사건의 진실과 신씨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동국대의 상황, 그리고 총무원의 현실을 살펴보면서 이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보기로 하자.
▼ [제1부] 조계종 총무원과 동국대 이사회 사이의 권력 다툼
2002년까지 동국대는 오인갑(녹원 스님) 이사장-송석구 총장 체제를 유지했다. 녹원 스님은 1985~87년과 1990~2002년 도합 14년간 이사장을 했고, 송석구 총장은 1995년부터 2002년까지 8년간 총장을 지냈다.
2002년 동국대 이사회는 서병식(정대 스님)씨를 새 이사장으로 뽑고 이어 교수 직선에서 1위를 한 홍기삼(洪起三) 교수를 2003년 3월 취임할 새 총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서 이사장은 병이 있어 2년 만에 하차하고 김창석(현해 스님)씨가 이사장에 취임했으나 그 또한 2년 만에 물러났다.
그리고 2006년 임용택(영배 스님)씨가 이사장에 취임했다. 홍 총장은 4년의 임기 동안 세 명의 이사장을 모시게 된 것인데, 잦은 이사장 교체는 동국대 이사회의 구성이 불안정함을 의미한다. 홍 총장이 2005년 8월 신정아씨를 조교수로 영입하면서 작금의 조계종 사태가 터져 나왔다. 왜 홍 총장은 신씨를 교수로 영입했을까.
동국대에 적을 둔 조교수 이상 교수는 800여 명인데, 이 가운데 미국의 양대 명문교로 꼽히는 하버드와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2005년 여름 동국대는 교수 특채를 실시했다. 이때 신정아씨와 미술을 논의하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던 변양균(卞良均)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이 ‘자신과 같은 예일대 출신’(변씨는 예일대 석사)이라며 홍 총장에게 신씨를 추천했다. 그해 8월 동국대는 추천자로 거론된 8명의 학자 가운데 신씨를 포함한 7명을 교수로 영입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때 홍 총장은 신씨를 스타 교수로 보고 모셔오는 처지였다고 한다.
기자는 동아일보에 입사할 때 출신 대학에서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 등을 떼 회사에 제출했다. 언론사뿐 아니라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도 이런 식으로 서류를 받아 입사자의 학력을 확인한다.
진실 밝혀낸 大美協과 동국대 吳모 교수
2005년 8월의 동국대도 그와 똑같았다. 그때는 동국대뿐 아니라 다른 대학도 본인이 제출한 서류가 분명하면 별다른 확인 작업을 거치지 않고 교수로 채용했다. 동국대는 예술대 안에 미술학과가 있는데, 9월1일 신씨는 예술대가 아니라 교양교육원의 조교수로 임명됐다.
전국 주요 대학의 미술학 교수들은 대학미술협의회(대미협)라는 단체에 소속돼 있다. 동국대 예술대의 오모 교수도 회원인데, 그는 서울대를 마치고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장모씨에게서 “동국대에서 채용한 신정아씨는 서울대를 다닌 사실도,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실도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일대는 석·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의 이름을 예일대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오 교수는 이 사이트에 들어가 뒤져보았으나 신씨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장씨의 지적이 사실이라고 판단한 그는 학교측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신씨 영입에 적극적이었던 홍 총장이 오 교수를 불렀다.
오 교수가 예일대 홈페이지 자료를 제시하자 홍 총장은 당황하며 그 자리에서 “신씨의 학력이 가짜인지 확인해보라”고 지시했다. 총장의 지시를 받은 실무진은 9월5일 예일대에 신씨 학위의 진위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9월22일 예일대에서 대학원 부원장인 파멜라 셔마이스터 교수의 서명이 들어간 신씨의 ‘박사학위 증명서’와 ‘학위기(졸업증서)’ 두 종류의 서류가 팩스로 들어왔다.
팩스가 도착한 후 홍 총장 등은 더는 신씨의 학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오 교수는 “홍 총장께서는 ‘홈페이지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것 아니냐. 예일대에서 ‘맞다’는 답신이 왔는데 어느 쪽을 믿어야겠느냐’는 합리적인 말씀을 하셨기에 나도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광주비엔날레 예술 총감독 선임 건을 계기로 신씨 사건이 터진 후 확인해보니 팩스로 들어온 이 서류는 가짜였다. 예일대의 대외협력처 관계자는 조사에 착수한 동국대에 “동국대가 받았다는 팩스는 예일대의 서류 양식과 다르고, 셔마이스터 교수의 서명은 위조된 것이다. 그 서류는 예일대 문구점에서 구입한 종이에 만든 위조 증명서다”라는 의견을 보내왔다.
예일대 내 공범은 밝혀지지 않아
그러나 보내온 서류에 찍힌 팩스번호는 틀림없는 예일대 대학원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일대 대학원에는 동국대가 보낸 편지를 받아보고 대학원의 팩스를 이용해 가짜 서류를 보내준 공모자가 있다는 것이 된다. 이 공모자는 누구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과 미국 어디에서도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동국대가 예일대에 문의한 직후인 9월15일 신씨는 미국으로 출국했다가 프랑스를 거쳐 귀국했다. 신씨의 출국과 예일대의 가짜 팩스는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한국은 그렇다 쳐도 예일대 측은 왜 신씨와 내통한 내부 공모자를 추적하지 않는 것일까. 신씨 사건에는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신정아씨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몇몇 지인에게 준 적이 있다. 오 교수를 중심으로 한 대미협 관계자는 이 논문을 입수해, 신씨가 논문집에서 밝혀놓은 지도교수에게 “신정아란 사람을 지도한 바 있느냐”라는 내용의 e메일을 보냈다. 예일대에서 신씨를 가르쳤다는 지도교수는 마침 시카고대로 옮겨가 있었는데 그는 “그런 학생을 지도한 적이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오 교수 등은 신씨가 쓴 논문 제목을 토대로 추적해보았다. 그 결과 똑 같은 제목의 논문이 오래전 버지니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음을 알아냈다. 버지니아대의 박사학위 논문을 구해 신씨 논문과 비교해보니 내용이 똑같았다. 오 교수 등이 진실을 알아낸 것은 2006년 11월쯤이었다.
장윤 스님에게 자료 제공
신씨 사건과 관련해 자주 거명된 스님 가운데 한 명이 장윤 스님이다. 동국대 이사이던 장윤 스님은 미술에 조예가 깊어 대미협 관계자와 가깝게 지냈다. 2007년 초 오 교수 등은 장윤 스님에게 신씨의 이름이 없는 예일대 홈페이지 학위자 명단과 신씨가 지도교수라고 한 사람이 ‘신씨를 가르친 사실이 없다’고 답변한 e메일을 전했다.
지난 2월 장윤 스님은 이를 근거로 동국대 이사회에서 “신정아씨 학위는 가짜다”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이사회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장윤 스님은 주장만 했을 뿐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장윤 스님은 오래전부터 동국대 이사회를 주도하는 측과 갈등을 빚어왔다. 동국대 측은 2년 전 신씨 문제로 예일대와 접촉해 팩스를 받아놓은 만큼 바로 역공을 가했다. 2007년 5월 이사회를 열어 ‘신씨 학위를 가짜라고 주장해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혐의로 장윤 스님을 이사에서 해임한 것이다.
그러자 장윤 스님은 교육부에 ‘이사 해임은 잘못됐다’는 탄원을 내고 이사 해임 무효를 주장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때쯤 미술계에서는 신씨가 가짜 학위로 동국대 교수가 됐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리고 광주비엔날레 집행부 측이 예술 총감독에 내정된 신씨를 허위 학력 기재 혐의로 해임하고 검찰에 고소함으로써 신씨 사건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청와대의 불교신자 모임인 청불회(靑佛會) 회장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 7월 신씨의 가짜 학위 의혹을 제기한 동국대 이사 장윤 스님을 만나 압력성 회유를 하고 과테말라에 출장을 가서도 이 문제로 전화를 했다’는 조선일보 보도가 나오면서 권력이 개입된 비리 사건으로 확대됐다.
이어 동국대 재단 이사장인 영배 스님이 세운 울주군 흥덕사와 2005년 당시 동국대 이사장이던 현해 스님이 회주(會主·법회를 주관하는 스님)로 있는 평창군 월정사에, 변 실장의 압력으로 국고가 지원됐다는 조선일보 보도가 나왔다. 신씨 개인의 학력위조 사건을 캐자 권력이 개입한 비리가 발견됐고, 그것을 따라 들어가자 불교계의 비리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불교계로 불똥이 튈 것 같자 수수방관하던 불교계가 다급히 제동을 걸고 나섰다. 10월5일 조계종은 전국 본사주지회의를 열고 국민에게 유감과 사과의 뜻을 전하면서 동시에 이 사건에 대해 앞서 나가는 보도를 한 조선일보 구독 거부운동과 동국대 이사진 전원사퇴,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관련자 징계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동국대 이사진은 사퇴하지 않고 총무원 간부들이 일괄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수사는 변-신 두 사람을 구속하고 신씨가 몸담고 있던 성곡미술관에 거액의 후원금이 지원된 경위를 밝히는 쪽으로 마무리됐다(10월11일). 불교계가 관련된 진상 규명과 관련자 징계는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지관-장윤 스님 vs 영배-영담 스님
도대체 어떤 암투가 있었기에 조계종과 동국대는 신씨 사건에 대해 그토록 무력하고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일까. 왜 조계종 총무원은 동국대 이사회에 앞서 무너진 것일까. 신씨 사건의 배경에는 지관 총무원장 세력과 동국대 이사장 영배(英培) 스님 세력 간의 갈등이 숨어 있다.
지관 총무원장은 1986~1990년 비구 스님 가운데에서는 최초로 동국대 총장을 지낸 바 있다. 이러한 지관 스님과 영배 스님 세력은 갈등했다.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신씨 채용 직후인 2005년 10월14일 동국대 이사회장에서 불거진 몸싸움이다.
당시 영배 스님은 이사로 있었는데, 이 날 동국대 이사회는 영배 스님의 이사 재선임을 결정해야 했다. 영배 스님의 이사 재선임에 대해 지관 스님과 장윤 스님은 반대했다. 지관-장윤 스님 측은 사람들을 동원해 이사회 개최를 막으려 했다. 이에 대해 영배 스님을 지지하는 세력은 이들의 이사회 진입을 결사적으로 막아내 영배 스님은 이사로 재선임될 수 있었다.
이 몸싸움 직후인 2005년 11월 법장 총무원장의 타계로 총무원장 선거가 치러졌는데 지관 스님은 이 선거에서 1위를 함으로써 32대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이듬해인 2006년 동국대에서는 영배 스님이 이사장에 올랐다. 이러한 영배 스님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이가 현 불교방송 이사장이자 동국대 이사인 영담(影潭) 스님이다.
“동국대에는 못 팔겠다”
정리하면, 지관 스님 계열은 조계종의 종권(宗權)을 장악하는 총무원장에 올랐지만 조계종 내의 중요 포스트인 동국대 이사장과 불교방송 이사장은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반(反)지관 스님 계열은 종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확보한 자리를 잘 지켜낸 것이 된다. 두 세력 사이의 한랭전선이 신씨의 허위 학력 문제로 ‘폭발’했다.
신씨 사건이 터지자 두 세력은 언론에 상대의 약점을 흘리면서 압박했는데, 이것이 도가 지나쳐 불교계 전체가 비리의 온상으로 비칠 것 같자 조계종은 본사주지회의를 열어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이다. 이 폭로전에서 ‘우세승’을 거둔 것은 동국대 이사회 측으로 보인다.
폭로전은 신씨 문제로 우위에 선 장윤 스님 계열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먼저 2004년 동국대가 중앙대 필동병원을 부정한 방법으로 매입했다고 한 사건부터 살펴보자. 중앙대는 2005년 1월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본교 정문 옆에 562병상을 가진 의료원 건물을 완공했다. 이 의료원을 짓기 위해 중앙대는 오래전 서울시 중구 필동에 있는 병원을 300억원에 팔겠다고 내놓았으나 구매자가 없어 가격을 265억원으로 낮췄다.
동국대는 학교 부지가 매우 좁다. 총 면적이 16만5300여m2(5만여 평)에 불과하다. 동국대는 학교 이전은 생각하지 않고, 학교 주변에 나온 땅이 있으면 매입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필동병원의 가격이 265억원으로 떨어지자 학교 측은 매입을 시도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문제로 인해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 일에 관여했던 동국대 관계자의 말이다.
“동국대가 사겠다고 하자 중앙대 측은 ‘학교끼리 어떻게 땅을 사고파느냐. 동국대에는 못 판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래서 양교 입장이 곤란하지 않도록 제3자를 넣어 ‘스리 쿠션’ 방식으로 거래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하면 한 번 낼 세금을 두 번 납부해야 하므로, 동국대 측은 10억원 이상을 더 지출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다시 직거래로 하자고 했더니 중앙대 측은 300억원을 내라고 요구했다.
이 문제로 홍기삼 총장이 중앙대를 운영하는 핵심 인사를 만나 협상을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양교는 274억원에 동국대가 바로 매입하기로 합의했다. 동국대는 매입한 필동병원을 영상센터로 만들었다. 그러자 장윤 스님과 지관 스님, 그리고 유모 동국대 총동창회장 등이 ‘265억원에 나온 필동병원을 274억원에 샀으니, 차액을 리베이트로 챙긴 혐의가 있다’며 홍 총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심각해진 폭로전
이 고발사건은 대검 중수1과장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 수사에 참여해 ‘강골’이란 평가를 받았던 남기춘 부장이 이끄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에 배당됐다. 홍 총장을 비롯한 동국대 수뇌부가 274억원에서 265억원을 뺀 9억여 원을 리베이트로 받고 필동병원을 매입했다면, 이 병원을 판 중앙대 측도 리베이트로 돌려준 9억여 원을 적절히 회계처리해야 한다. 리베이트를 주고받으려면 동국대와 중앙대 양쪽이 짜야 하는데, 이는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반대로 수사하는 처지에서는 양쪽을 모두 조사하기 때문에 혐의가 있으면 금방 단서를 잡을 수 있다. 어려운 수사가 아니었으므로 특수2부는 금방 수사를 마친 듯했다. 그러나 특수2부는 시간을 끌다 2007년 3월 홍 총장이 퇴임하자 비로소 ‘무혐의 처분을 내린다’는 결과를 통보했다. 이 사건에 관여했던 인사의 분석이다.
“대학만큼 투서가 많고 고소 고발이 많은 사회도 없을 것이다. 특수2부는 홍 총장 재임 중에 무혐의 처분을 하면 동국대 측이 고발인들을 무고 혐의로 고소할 것이 분명하다고 본 듯하다. 그렇게 되면 학교가 다시 복잡해진다.
고발인들은 홍 총장만 고발하고 다른 사람들은 진정서에 이름을 나열했는데, 진정서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은 ‘피내사자’라 무혐의 처분이 내려져도 상대를 무고로 고소할 수 없다. 노련한 특수2부는 유일한 피고발인인 홍 총장이 퇴임한 후 무혐의 처분을 내림으로써 동국대 측이 무고로 고소해 내분이 격화하는 것을 피하게 한 듯하다.”
필동병원 건은 동국대 이사회의 완승으로 끝난 셈인데, 신씨 사건이 발생하자 다시 언론에 회자됐다. 주변 시세를 고려할 경우 지금 필동병원의 땅값은 1000억원에 육박한다고 하니 274억원에 매입한 동국대로서는 거래를 대단히 잘한 것이 된다. 또 리베이트를 주고받았다는 증거도 나온 바 없으므로 몇몇 언론에 보도되던 필동병원 건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비슷한 시기에 터져 나온 것이 변 실장의 개입이다. 영장 청구로 밝혀진 검찰 수사 내용은 신정아씨가 변양균씨의 힘을 이용해 기업들이 성곡미술관에 거액을 후원하게 한 쪽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변씨가 불교계를 지원한 것이 적법한지에 대해서는 수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본사주지회의가 있기 전 총무원과 동국대 이사회 측이 벌인 폭로전은 불교계 전체에 대한 수사로 번질 정도로 위험한 것이었다. 총무원 측이 공개한 것 가운데 가장 폭발적인 것은 ‘지난 7월 변 실장이 신씨의 가짜 학위 의혹을 제기한 동국대 이사 장윤 스님을 만나 압력성 회유를 하고 과테말라에 출장을 가서도 이 문제로 전화를 했다’는 조선일보 보도였다.
이 보도로 인해 신씨 학력위조 사건은 권력 비리 사건으로 확대됐고,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변 실장은 수사 대상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변 실장과 장윤 스님은 모두 통화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억울한 공격을 당한 것인데 조선일보 보도를 오보(誤報)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왜 두 사람은 궁지를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것일까.
변양균 실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는데, 그의 대학 동창이자 오랜 친구 가운데 강화도 전등사 근처에 별장을 가진 김모씨가 있다. 전등사 주지이던 장윤 스님은 김씨와 인연이 있었고, 김씨의 중재로 변 실장을 만났다. 장윤 스님은 변 실장에게 전등사에 대한 국고 지원을 요청했다.
변 실장은 영배 스님과도 만나는 사이였다. 그 후 영배 스님을 만난 변 실장은 ‘장윤 스님이 어떤 사람인지’ 물으면서 “장윤 스님이 국고 지원을 요청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장윤 스님과 껄끄러운 사이였던 영배 스님은 좋은 인물평은 해주지 않았지만 “불사(佛事)니까 도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다고 한다.
과테말라 통화의 진실
곧이어 신씨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과테말라에 출장을 간 변 실장이 위기를 느꼈는지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장윤 스님과는 바로 대화할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친구인 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 실장의 전화를 받은 김씨는 변 실장의 말을 장윤 스님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변 실장과 장윤 스님은 직접 통화한 사실이 없다고 하면서도 일절 항의하지 못한 것이다.
변 실장의 전화를 받은 후 김씨는 장윤 스님을 변 실장에게 소개한 것에 대해 속을 태웠다고 한다. 그는 영배 스님에게 전화를 걸어 고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변 실장의 주선으로 흥국사와 월정사에 국고가 지원됐다는 보도가 나오자 영배 스님은 즉각 전등사에도 변 실장의 주선으로 국고가 지원됐다고 맞받아쳤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식의 폭로전은 자칫 전 불교계를 뒤흔들어놓을 수도 있었다. 10월5일에 열린 본사주지회의는 이러한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자리였다. 본사주지회의에서는 장윤 스님 계열이 제공한 정보를 보도한 조선일보 구독 거부 운동을 결의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일보에 정보를 제공한 이는 총무원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계종 내부에서는 금방 확인돼 본사주지회의가 있은 후 총무원 간부진은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본사주지회의는 동국대 이사진의 사퇴를 요구했는데 총무원 간부진이 먼저 무너진 것은 이 때문이다.
총무원장이 동국대 이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조계종 개혁과 관련해 가장 큰 사건은 총무원장 3연임을 노리던 의현 스님을 축출한 ‘94 법난(法難)’이 꼽힌다. 당시 의현 스님은 총무원장 외에 조계종의 의회 격인 중앙종회 의원, 불교방송 이사장과 동국대 이사를 겸하고 있었다.
의현 스님을 축출한 후 조계종은 종헌(宗憲)에 총무원장은 종헌과 국가 법률이 인정한 당연직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자리도 겸직하지 않는다(52조 4항)와 총무원장의 3연임 금지(53조) 조항을 삽입했다. 종헌에 총무원장의 겸직 금지 조항을 삽입한 것은 동국대와 불교방송의 자율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관 스님이 동국대 이사회에 자기 세력을 심으려 한 것은 종헌 정신 위배로 비칠 소지가 있다.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자 동국대 측은 홍기삼 총장이 뇌물을 받고 신씨를 교수로 채용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 염려했다고 한다.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 동국대는 또 한 번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 때문에 학교 측은 홍 전 총장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홍 전 총장은 신씨만을 상대로 2005년 9월5일 학력을 조사하게 한 사실이 밝혀졌다. 반면 금품을 받고 신씨를 채용한 정황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써 ‘변 실장의 부탁이 있었고 예일대 출신인 신씨를 놓치고 싶지 않아 채용했다’는 홍 총장의 진술은 진실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검찰 수사에서도 홍 전 총장 비리는 드러나지 않았다. 홍 전 총장에 대한 조사에 참여했던 동국대 관계자의 말이다.
“홍 총장은 재임 기간 중 필동병원 사건으로 무척 시달렸다. 그로 인해 중도 사퇴까지 고려했는데 주위의 만류로 철회했다. 필동병원의 현 시세가 1000억원에 달해 큰 차익이 발생했다. 필동병원 사건에 관한 한 그는 억울한 처지에 있다. 하지만 신정아씨 건은 조금 다르다. 그는 특별조사까지 시켰기에 신씨 문제도 필동병원 사건처럼 반대세력의 공세로 본 것이다. 홍 총장은 선의를 갖고 신씨를 바라본 것인데, 결과적으로 홍 총장은 신씨에게 속아 넘어갔다.”
신정아씨에게 속은 홍기삼 총장
신씨 사건은 동국대 이사회를 어느 세력이 장악할 것인지를 놓고 다투는 와중에서 터져 나왔다. 이 싸움에 참여한 세력은 승리를 거두기 위해 상대 약점을 공개하는 폭로전을 펼쳤다. 그러다 양쪽은 물론이고 전 불교계가 불똥을 뒤집어쓸 것 같자 황급히 마무리했다.
이 싸움의 와중에 볼모로 잡힌 것이 동국대였다. 조계종단을 이끄는 세력은 동국대를 미래의 지도자를 키우는 전당으로 만들자는 소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 [제2부] 일불제자(一佛弟子)냐, 사자상승(師資相承)이냐
신흥사 폭력사건, 조계사 폭력사건 등 과거부터 조계종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왜 조계종은 종종 심각한 분파갈등을 겪는 것일까.
신씨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문중(門中)’이란 말을 수도 없이 듣게 된다. 문중 간의 갈등과 반목이 조계종 분규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세상을 떠난 출가자에게 왜 문중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한국 불교를 종횡으로 분석해봐야 한다. 한국 불교의 중추인 조계종이 24개 본사(本寺)를 중심으로 한 24교구 체제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4본사 체제는 일제가 전국의 절을 31개 본사를 중심으로 묶은 데서 유래한다. 그런데 광복 후 7개 본사는 북한 지역에 남아, 조계종은 24본사 체제를 갖게 됐다.
그러나 일제가 지정한 남한의 24본사와 지금의 24본사는 약간 다르다. 일제가 지정한 본사에서 봉은사와 전등사, 위봉사(전주) 등 몇몇 절은 탈락하고 용주사, 신흥사, 법주사, 마곡사가 새로 본사로 지정됐다. 24본사는 전부 지방에 있다. 대한민국의 중앙인 서울에는 왜 본사가 없을까.
그 이유는 조선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불교를 숭상한 고려를 무너뜨리며 등장한 조선은 승려를 천민시해 1391년엔 부녀자의 사찰출입 금지령을, 1477년엔 사찰 창건 금지령을, 15세기엔 승려들의 도성(한양)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지방에서 명맥 유지한 조선 불교
승려들의 도성 출입금지령은 400년 이상 지속되다 갑오개혁 때 일본 중인 사노의 권유로 1896년 해제됐으니 한양의 4대문 안에는 절이 생길 수 없었다. 이것이 서울을 무대로 한 본사 탄생을 막은 결정적 원인이다. 지금도 서울의 4대문 안에 있는 절은 조계종의 본원인 조계사뿐인데, 조계사는 승려들의 도성출입 금지령이 해제된 1910년 세워진 각황사에서 유래했다.
한양에서는 철저한 박해를 받았지만 불교는 토착화한 종교이기에 지방에서는 호족의 지원을 받으면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조의 불교는 중세 유럽의 ‘봉건제’처럼 지방별로 고립돼 발전하게 된 것이다.
지방에 위치한 사찰은 유력한 스님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유력한 스님이란 깨달음을 얻어 가르침을 펼쳐오던 큰스님을 일컫는데, 큰스님은 말년에 가장 우수한 제자에게 법(法)을 전해주었다. 스승이 될 만한 자질을 갖춘 제자에게 법을 전해주는 것을 불가(佛家)에서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 한다.
지방별로 고립된 조선 불교는 사자상승에 따라 법을 이은 큰스님이 있는 본사(本寺)와 큰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이끄는 말사(末寺) 체제를 갖췄는데, 이것이 바로 일제 강점기에 31본산 체제를 만드는 근거가 됐다. 사자상승은 숭유억불을 채택한 조선시대 불교가 지방별로 어렵게 생존해간 ‘힘줄’이었다.
조선조의 몰락은 곧 일제 침략으로 이어졌으니, 비로소 숨을 쉬게 된 한국 불교는 일본 불교의 영향을 받는다. 이때 이미 일본 불교는 스님들이 대처(帶妻·아내를 갖는 것)를 해 가정을 갖고 육식을 하고 있었다. 일본 불교에서 스님은 구도자가 아니라 불교를 전달하는 직업인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일본 불교가 들어오자 일부 스님들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일제는 봉건제처럼 나눠져 있던 한국 불교를 하나로 묶기 시작했다. 한일강제합방 이듬해인 1911년 ‘조선사찰령’을 공포하며 1300여 곳의 사찰을 본사-말사 체제인 30개 본산(本山) 체제로 묶은 것이다. 1924년엔 선암사의 말사이던 화엄사를 본산으로 승격시켜 31본산 체제를 완성했다.
그리고 1929년 전국에서 104명의 승려가 경성(서울)의 각황사에 모여 ‘조선불교 선교(禪敎)양종 승려대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전국의 사찰을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됐다.
일본 불교의 영향
31본산(혹은 31본사) 체제가 확립되면서 한국 불교는 새로운 모순을 잉태했다. 전국의 불교를 통솔하는 경성(서울)의 절에서는 일본 불교의 영향을 받아 대처승이 주류를 이루고, 지방의 절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은 비구승(남자 스님)이 중심이 된 2원 체제가 만들어진 것. 이 시기 지방 불교는 왜색 불교에 물들지 않은 한국 불교의 전통을 지키려 했으니 비구승을 중심으로 한 사자상승의 전통이 더욱 강조됐다고 한다.
1937년 경성의 각황사는 태고사로 이름을 바꾸고, 이듬해 조계종을 출범시켰다. 태고사와 조계종은 고려말 태고국사(보우 스님)가 선(禪)·교(敎) 양종을 합쳐 ‘조계’라는 단일 종으로 부른 데서 유래했다. 이로써 한국 불교는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됐으나 ‘대처승 대 비구승’이라는 새로운 갈등 구조를 갖게 되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한국 불교는 전통으로 회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태고사에 포진한 대처승들이 물러서지 않으려고 하면서 비구와 대처 간의 갈등이 본격화했다. 이러한 때 철저한 반일(反日)주의자인 이승만 대통령이 비구들을 지원했다. 1954년 이 대통령은 ‘사찰정화 담화문’을 발표해 왜색 불교를 척결하는 운동을 벌이게 했다.
이 대통령의 담화를 계기로 종단 업무에서 배제돼 있던 비구 스님들이 들어오면서 태고사는 조계사로 이름을 바꿨다. 그 후 조계종에서는 비구와 대처 스님 가운데 어느 쪽이 종단을 이끌어야 하는지를 놓고 오랜 갈등을 빚었다. 이 갈등은 대법원이 ‘비구 스님이 조계종의 주인이다’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막을 내렸다. 대법원 판결로 패소한 대처스님들은 1970년 떨어져 나가 ‘태고종’이라는 종단을 만들었다.
길고 지루한 대처 스님들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선 이들 대부분은 전통을 수호해온 지방의 비구 스님들이었다. 비구승이 조계종단을 회복하면서 ‘문중’이라는 속가(俗家)의 용어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조계종의 종권을 어느 세력이 잡느냐를 놓고 문중간 합종연횡과 대립이 빚어졌다.
조계종에서는 흔히 총무원장을 대통령에, 총무원을 행정부에 비유한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행정부를 중앙정부라고 한다면, 지방자치단체장이 이끄는 시·도청은 지방정부다. 중앙정부의 살림 규모는 지방정부보다 훨씬 더 크다. 지방정부는 재정 자립도가 낮아 중앙정부로부터 교부세 등을 지원받아 지방 행정을 꾸리고 있다.
그러나 조계종에서는 정반대다. 조계종 총무원은 24개 본사가 분담해서 보내온 돈으로 운영된다. 총무원은 지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전국에 24개 본사가 있다는 것은 24개 정당이 있다는 뜻과 같다. 총무원장 선거가 다가오면 24개 본사는 합종연횡을 해 세력을 불리는데 막판에 가장 큰 세력을 만든 쪽이 총무원을 장악한다.
중앙보다 지방이 센 조계종 권력구도
이런 식으로 종권을 잡는 경우가 많다 보니, 신임 총무원장은 선거 때 협조한 여러 본사에 답례를 해야 한다. 협조한 본사의 대표 스님에게 간부직을 나눠주는 것이다. 선거에서 패배한 세력도 무시할 수 없다. 선거에서 승리한 ‘여권’은 강력한 조직이 아니므로 패배한 ‘야권’이 여권의 권력 배분에서 소외된 세력을 흡수해 반기를 들면 총무원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임 총무원장은 야권 대표에게도 적절히 배려한다. 이러한 배려가 잘 이뤄지면 ‘협조적인 야권’이 만들어진다. 신임 총무원장이 압도적인 우세로 당선되면 소수파인 야권에 대한 배려가 줄어들 수 있다. 이 경우 ‘소수이지만 강력한 야권’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똘똘 뭉쳐서 행동력을 발휘할 수 있기에 여권에는 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24개 본사 세력은 균일하지 않다. 국립공원에 위치하고 국보(國寶)를 갖고 있는 본사는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반면 6·25전쟁과 이후의 공비 토벌 등으로 인해 인적이 끊어졌던 본사도 있다. 스님이 거주하지 못함으로써 사자상승의 전통이 끊어진 본사는 인근 본사의 스님이 옮겨와 사세(寺勢)를 일으키기도 했다.
다른 본사의 도움으로 일어난 본사는, 도움을 준 본사의 영향권 아래 있게 된다. 24개 본사 가운데에는 다른 본사에 영향을 준 ‘큰 본사’가 있는데, 그 대표가 바로 범어사와 수덕사다. 범어사에서는 용성(龍城·1864~1940) 스님과 그 제자인 동산(東山·1890~1965) 스님이 오랫동안 주재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두 스님의 제자 가운데 일부가 같은 본사인 해인사, 화엄사, 쌍계사에 상주하며 역시 제자를 길러냈기에 범어사 해인사, 화엄사, 쌍계사는 그 말사들과 함께 같은 ‘범어문중’으로 불렸다.
범어문중 vs 덕숭문중
수덕사는 경허(鏡虛·1849~1912) 스님과 그 제자인 만공(滿空·1871~1946) 금오(金烏·1896~1960) 스님을 배출했는데, 이들의 제자는 법주사, 불국사, 금산사, 마곡사, 용주사 등으로 퍼져나가 거대한 수덕사 문중을 만들었다. 수덕사는 덕숭산 밑에 있기에 수덕사 문중은 ‘덕숭문중’으로 통칭된다.
범어문중과 덕숭문중 가운데 세력이 더 큰 쪽은 범어문중이다. 따라서 총무원장은 범어문중 계열에서 많이 나오고 가끔씩 덕숭문중에서도 배출된다.
조계종을 나누는 문중은 아주 작은 인연에서 비롯된다. 스님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6개월 이상 행자 생활을 한 후 비로소 머리를 깎는다. 이때 머리를 깎아주는 스님으로부터 ‘살생하지 말라’ ‘음행(淫行) 하지 말라’를 비롯 10개로 된 ‘사미계’를 받으면서 ‘사미(沙彌·남자 스님)와 사미니(沙彌尼·여자 스님)가 된다. 이것이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득도이고 출가다.
사미계를 준 스님이 그의 스승이 되는데, 문중은 사미계를 받을 때 결정된다. 머리를 깎아준 스승이 범어문중이면 그 또한 범어문중의 스님이 되는 식이다.
사미계를 받은 스님은 ‘수습 스님’이라고 할 수 있다. 사미와 사미니는 전국 22개 사찰에 있는 ‘강원(講院)’과 동국대 불교대학, 김포에 있는 중앙승가대학에서 4년 정도 기본교육을 받은 후 250개로 된 ‘비구계’를 받아 비구(比丘·남자 스님)와 비구니(比丘尼·여자 스님)가 됨으로써 비로소 ‘정식 스님’이 된다.
불교에서는 스님 나이를 ‘법랍(法臘)’이라고 하는데, 법랍은 비구계를 받은 때를 한 살로 쳐서 계산하는 것이다. 비구와 비구니가 될 때도 비구계를 주는 스님이 있다. 그러나 비구계를 주는 스님은 비구와 비구니의 스승이 되지 않는다.
사미계는 머리를 깎은 절에서 주지만, 비구계는 조계종 차원에서 준다. 조계종 총무원은 존경받는 원로 스님 중에서 ‘계를 전해주는 큰스님’이라는 뜻을 가진 ‘전계(傳戒)대화상’을 선출하는데, 전계대화상이 전국의 강원과 대학에서 기본교육을 마친 비구·비구니 후보생을 한 곳에 모아놓고 비구계를 주는 것이다.
스님은 발 가는 대로 인연이 닿는 대로 돌아다니는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는 수행자다. 따라서 해인사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하여 반드시 해인사 강원에서 기본교육을 받지 않는다. 수덕사 강원으로 갈 수도 있고 김포에 있는 중앙승가대학에서 공부할 수도 있다.
강원에서 기본 교육을 마치면 또다시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공부한다. 화두를 깨치기 위해 참선을 해야겠다면 직지사의 선원(禪院)을 찾아가 수행하고, 계율을 집중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으면 송광사의 율원(律院)을 찾아가 공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스님들은 문중 의식이 약한 편이다. 그러나 많은 스님은 출가한 절이나 그 말사에 머물며 공부하므로 강한 문중 의식을 갖는다.
이판승에서 사판승으로 눈 돌리는 이유
막 비구나 비구니가 된 스님들은 탐구심이 강하므로 도를 깨우치기 위한 공부에 매진하는 ‘이판승(理判僧)’이 된다. 이판승 가운데 일부가 절 살림을 맡는 주지가 되면서 ‘사판승(事判僧)’으로 변모한다. 20~30년 전만 해도 스님들은 서로 주지를 맡지 않으려고 했다는데 지금은 주지를 그 절의 대표로 인식하므로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주지는 사회의 많은 단체와 접촉하게 된다. 이때 불교 행정이 다른 단체에 비해 뒤처져 있음을 알고, 이를 개혁하기 위해 중앙종회 의원이나 총무원 간부, 불교방송이나 동국대 이사회 등으로 진출하려고 한다. 이때부터 주지는 합종연횡에 휩싸이고 문중을 움직이고 기율하는 핵심 세력이 되는 것이다.
시골을 떠나 2~3대째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고향은 원적(原籍)이나 본적(本籍)지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그런데도 편 가르기를 시작하는 선거철이 다가오면 지방색이 되살아난다. 원적·본적에 비유되는 불가의 용어가 ‘재적본사(在籍本寺)’다. 재적본사는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스님에게도 따라다니면서 그를 어느 문중으로 분류하고 그 문중에서는 그를 한식구로 여기는 근거가 된다.
총무원장은 조계종의 대통령이지만 실제적으로 본사 주지를 임명하지 못한다. 본사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주지를 선출하면 추인하는 형태로 임명할 뿐이다. 본사에서 말사의 주지를 결정하면 총무원은 이를 인정해 그를 말사의 주지로 임명한다. 조계종은 완전한 지방자치를 하고 있다. 총무원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은 본사가 없는 서울 인근과 직영 사찰뿐이다. 직영 사찰은 총무원이 직접 주지를 임명하는 절인데, 서울의 조계사와 강화도의 보문사, 갓바위로 유명한 경북 경산의 선본사뿐이다. 이 세 절로 들어온 시주는 바로 총무원으로 올라온다. 다른 절에서는 본사를 거쳐 일부 분담금을 내놓을 뿐이다.
그리고 남는 것이 동국대 이사회와 불교방송이다. 동국대는 전국의 사찰이 염출한 토지를 자산으로 삼아 세워진 대학이므로 본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불교방송과 동국대 이사회에는 총무원장 교체와 관계없이 자체 규정에 따라 임무를 해오던 스님들이 있다. 이들은 규정에 따라 자기 일을 하려고 하는데 신임 총무원장이 들어서서 이들을 교체하려고 하면,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동국대 이사회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세력 교체이기 때문에 문중과 무관한 경우도 많다. 총무원 간부직은 임기가 없지만 동국대 이사는 임기가 있다. 따라서 총무원 간부는 신임 원장이 등장하면서 한순간에 교체할 수 있으나, 동국대 이사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교체를 시도할 수 있다. 동국대 이사회는 총무원의 향방과 무관하게 구성될 수 있다.
베트남 파병 계기로 도입된 軍僧제도
사자상승의 전통을 이어온 데서 발전한 문중은 지금 한국 불교의 대동단결을 막는 존재가 되고 있다. 현대적인 공부를 한 상당수의 젊은 승려는 문중 의식 타파를 대처승과의 결별 이후 조계종이 펼쳐야 할 최대의 개혁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문중의식 때문에 불교가 내분을 거듭하고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아 교세가 약해지고 있다고 걱정한다.
인구 센서스를 하면 불교는 늘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진 종교로 나온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느끼는 불교는 왜소하기 그지없다. 대한민국은 개병제 국가이니 군대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군에는 종교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군목(軍牧)과 군승(軍僧), 신부가 들어가 있다. 지금 군승의 수는 140여 명, 군목은 260여 명, 신부는 90명 정도다.
인구 센서스에서는 1000만 신자를 가진 것으로 나오는 불교가 750만명으로 조사되는 개신교보다 군대에서는 세력이 약한 것이다. 이렇게 된 근본 이유는 군승이 군목보다 더 늦게 시작한 제도라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군목은 광복과 함께 시작된 미군정기에 정착됐다. 또 한국군은 미군과 연합체제를 구축해 군목이 빠르게 확대될 수 있었다.
군승제는 1960년대 중반 베트남 파병을 하면서 도입됐다. 불교 국가인 베트남에서 작전하려면 군승을 도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불교계에서는 군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일본 불교의 도전받는 조계종
크리스마스는 미군정이 시작된 1945년부터 휴일이 됐지만, 부처님 오신 날은 재판에서 승소함으로써 1975년 비로소 공휴일이 됐다. 이러한 형편이니 한국 사회의 파워엘리트 가운데에 불교 신자는 드물 수밖에 없다. 불교계의 청탁이 변양균 실장에게 집중된 것도 그가 ‘참여정부’에 들어간 몇 안 되는 불교 신자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불교는 다르다. 한국보다 먼저 개방했지만 서구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낮다. 대처승이 주류를 이루고 스님들이 육식(肉食)을 함에도 일본 불교는 발전을 거듭했다. 불교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은 지금 한국에서 통용되는 불경 번역서 가운데 일부는 일본에서 일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중역(重譯)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일본에서 절은 세습으로 이어지는 재산 개념의 공간이다. 대처승의 아들이 스님이 돼 불교를 공부하고 아버지에 이어 절을 관리하는 시스템인지라 본사-말사 나 문중 개념이 없다.
일본 불교단체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신도들이 만든 ‘창가학회(創價學會)’다. 창가학회는 70년 남짓한 역사를 통해 일본에서 가장 큰 종단으로 발전했다. 일본 정치판에서 세 번째로 의원이 많은 공명당을 갖고 있는데, 공명당은 현재 자민당과 함께 범여권 연합을 구성하고 있다. 창가학회를 일본어로 읽으면 ‘쇼카갓가이’이고 영어로 적으면 ‘Soka Gakkai’이다. 창가학회는 세계 190개국에 진출해 있어 I(Intetnational)를 붙여 SGI로 약칭한다.
왜색 불교라는 강력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한국에 들어온 SGI는 번창하고 있다. 스님도 없이 신도들이 중심이 돼 불경을 공부하며 수행하는 단체인데도 기하급수적으로 신도가 늘고 있다. 종교는 평화를 강조하지만, 교세를 확대하려다 보면 타 종교와 경쟁할 수밖에 없다. 조계종은 서구 종교뿐만 아니라 일본 불교로부터도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밖으로는 타 종교와 경쟁, 안으로는 문중 갈등으로 인해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는 것이 한국 불교의 현실이다. 반면 가톨릭은 인구 센서스를 할 때마다 비약적인 신자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가톨릭과 SGI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교단들은 사회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사자상승과 반대 개념으로 쓰이는 불가의 말이 ‘모든 스님은 한 부처의 제자’라는 뜻의 ‘일불제자(一佛弟子)’다. 일불제자 개념을 채택하면 조계종은 문중과 계파로 나눠 갈등할 이유가 없다.
찾아오는 불교에서 찾아가는 불교로
조계종단의 탄생은 지역 불교가 아닌 전국 불교의 출범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계종의 대표인 총무원장이 한국 불교의 대표로 부처를 대신해 한국 불교를 발전시켜야 한다. 사자상승을 일불제자로 대체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한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사미계를 통해 스승과 제자 인연을 맺는 전통은 이어가더라도 문중의식은 혁파해야 한다. 이를 위해 총무원은 전국 사찰에 대한 인사권을 확보해야 한다. 사판승의 길로 가는 스님에 대해서는 총무원이 1~2년 단위로 주석하는 절을 바꿔주는 것이다. 제주 관음사에 계신 스님을 설악산 신흥사 주지로 보냈다가 순천 송광사로 발령 내는 식으로 하는 것이다.
본사 배치도 시대에 맞게 재조정해야 한다. 지금의 본사 체제는 산업화 이전에 형성된 것이다. 100여 년 전 ‘한밭’이라고 하던 작은 마을이 지금은 인구 100만이 넘는 대전광역시가 됐다. 그러나 대전에는 대전 신자들을 이끌 만한 큰 절이 없다. 속세를 떠난 것이 불교의 특징이라고 하지만 포교와 보시를 위해서는 신도를 찾아가야 한다. ‘찾아가는 불교’가 되기 위해서는 고찰(古刹) 중심의 본사 제도가 아니라 현실에 맞는 본사 제도를 채택해야 한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총무원 안에서도 중앙집권적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조계사를 중심으로 한 서울 일대의 ‘직할교구’가 그것이다. 서울은 무주공산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절과 암자에 대해서는 총무원이 주지 임명권을 행사한다. 대개는 총무원이나 중앙종회에서 일하는 스님을 주지로 임명한다. 여러 문중에서 나온 스님이 주지를 맡다 보니 서울에서는 사자상승의 문화가 생길 수 없다.
일불제자 체제도 모순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자상승의 전통을 고집하는 사이 조계종은 내분이 반복되고 세력은 약해지고 있다. 반면 중앙집권적 특성을 가진 다른 종단의 발전은 눈부시기만 하다.
‘국사(國師)’ 시스템이 있어 정치에까지 개입했던 고려시대의 불교가 일불제자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시절의 큰스님은 자신의 공부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에도 개입한 사판승이었다. 사자상승의 전통을 가진 한국 불교를 일불제자 체제로 전환하려면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판승이 등장해야 한다. 한국 불교는 사자상승의 전통을 이어갈 것인지, 일불제자로 회귀할 것인지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 [제3부] 동국대를 사회에 희사하라
지난 3월1일 동국대에서는 건학 이후 최초의 공개모집으로 선출한 오영교(吳盈敎) 총장 취임식이 있었다. 오 총장은 종립학교인 대전 보문고 재학 시절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고려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행정고시 12회로 합격해 산업자원부 차관과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사장, 행정자치부 장관, 대통령 정무특보 등을 지냈다.
외부 응모자 없었던 동국대 총장 공모
KOTRA 사장 시절 그는 전직원 연봉제와 목표관리제, 다면평가제 등을 도입해 KOTRA가 공기업 경영평가에서 1위를 받게 한 이력이 있다. 그가 동국대 총장이 된 데는 사연이 있다. 동국대 이사회를 이끄는 영배-영담 스님은 선거를 통해 총장을 뽑다 보니 교수 사회가 분파주의에 빠진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총장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두 스님은 총장추대위원회에 내부와 외부에서 후보자를 뽑아달라고 요구했다. 그리하여 동국대도 외부 인사를 상대로 총장 후보자를 모집하게 됐다. 그런데 마감 시한이 지나도 외부인사는 단 한 명도 응모하지 않았다. 왜 외부 인사들은 동국대의 총장 후보자 공모에 도전하지 않은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대학 총장을 할 만한 경력과 이력을 갖고 있는 파워엘리트 출신 인사 가운데 불교 신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사실 동국대 측은 오영교씨가 외부인사로서 총장에 도전해주길 바랐다. 몇몇 인사가 오씨를 찾아가 “응모해주십사”하는 청원까지 했으나, 오씨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단 한 명의 외부인사도 도전하지 않자 당황한 동국대 측은 비상수단을 마련했다. 교수 출신인 내부 응모자와 이사들의 동의를 얻어 응모 기한을 연장한 것이다.
그리고 오씨에게 다시 사람을 보내 “종립대학을 크게 혁신해달라. 곁에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도와드리겠으니 제발 응모해달라”며 설득했다. 삼고초려를 한 끝에 이들은 비로소 오씨의 지원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삼고초려했더라도 총장추대위원회에서 추대되지 못하면 ‘헛일’이다.
동국대 교수 사회는 법인에서 ‘선거로 총장을 뽑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미 선거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총장 후보자를 뽑기 위한 선거를 실시했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1, 2위를 한 경찰행정학과의 이모 교수와 선학과의 ○○ 스님을 총장 후보로 추천했다. 동국대 측은 교수들이 선거를 통해 추천한 두 사람과 외부에서 공모한 오씨를 이사회에 총장 후보로 최종 추천했다.
이사회는 세 사람에 대한 청문(聽聞)을 실시한 후 만장일치로 오씨를 16대 총장으로 선출했다(2006년 12월12일). 지난 3월1일 취임한 오 총장은 놀라운 개혁을 시도했다. 지원자나 재학생이 적은 과는 폐과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 대상으로 문과대학의 독어독문학과가 꼽히자 독문과 교수들이 반발했다. 오 총장은 유사 학과를 합치겠다며 문과대의 철학과와 윤리문화학과를 통합하자고 했다. 두 과도 당연히 반발했다. 북한학과와 정치외교학과의 통합도 추진했다.
동국대의 간판인 불교대학에도 메스를 댔다. 불교대학은 불교학과로 시작했다가 인도철학과 등을 만들면서 단과대학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종립학교이니 스님을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수용해 승가학과도 만들었다. 그런데 이 학과를 3년 정도 운영해보니 승가학은 학문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이 과의 이름을 선학과로 바꿨다.
그러자 “불교학과 선학과는 어떻게 다르냐” “문과대에 철학과가 있는데 왜 인도철학과를 따로 둬야 하는가” 등의 지적이 나왔다. 이들은 “법은 모든 분야에 적용되므로 법학은 다양하게 분리될 수 있다. 그런데도 법과대학은 단일 과나 단일 학부 제도를 택하고 있다. 불교대학도 불교학부만 두고 나머지 과는 전공으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문중과 계파
불교대학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불교대학으로 편·입학한 학생 가운데 일부는 경영학과 등 인기 과로 전과(轉科)하는 경우가 많았다. 몇몇 과는 하도 많은 학생이 빠져나가 4학년이 되면 6~7명의 학생만 남는 경우가 있었다. 불교대학을 혁신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공감했지만 ‘종립대학의 간판인데…’ 하는 생각에 누구도 손을 대지 못했다.
오 총장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노력을 펼쳤다. 불교대학 내의 모든 과를 불교학부로 통합하고 불교대학으로 입학한 학생은 전과를 허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 대신 불교학부에 입학한 학생에게는 공부에 전념하도록 전원 장학금을 준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재원 부족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문과대의 철학과와 윤리문화학과도 철학윤리학부로 통합되고 독문과와 북한학과는 독립을 유지하되 정원은 50% 줄이기로 했다.
또한 오 총장은 성과를 많이 낸 교수에게는 더 많은 급여를 주겠다며 교수 평가 시스템을 강화했다. 학생이 교수의 강의를 평가하는 제도를 강화하고, 단과대학장에게는 각자의 목표를 설정케 한 후 총장과 그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계약을 맺도록 했다. 총장과 약속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학장은 불이익을 받을 것이 뻔하므로 그는 단과대 개혁과 성과 창출에 노력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개혁에 대해 교수 사회에서는 만만찮은 반발이 나왔다.
이런 차에 신정아씨의 허위 학력 문제가 불거지자 교수 사회가 동요했다. 9월16일 동국대 교수 121명은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진 전원은 사퇴하라’ ‘총장은 사태 해결에 책임을 져라’ ‘조계종은 동국대 운영방식을 쇄신하라’는 3개 항으로 된 성명을 발표했다. 10월12일에는 80여 명의 교수가 모여 총회를 열고 ‘이사진 전원과 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오 총장은 공무원과 크게 다른 교수 사회를 보고 당황했다고 한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먹혀드는 명령이 교수 사회에서는 튕겨져 나오는 것을 보고 실망해 사퇴를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정아씨 사건은 전임자 때의 일이며, 전임자도 좋은 뜻으로 하려다 속은 것이므로 그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설득해 사퇴 의사를 철회했다. 교수 80명의 성명 발표가 있은 후 오 총장은 오히려 정면 승부를 선택했다.
“이사회 문제를 제외한 학교 발전 문제에 관해서는 공개 토론회를 하자”고 교수들에게 역제의를 한 것이다. 오 총장의 한 측근은 “오 총장은 KOTRA와 행자부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개혁이 동국대에서는 먹혀들지 않는 데 당황하고 있다. 그는 공기업과 정부 개혁에서는 성공하고도 대학 개혁에서는 실패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사회 13명 중 9명이 스님
신정아씨 허위학력 공개로 이사에서 해임됐던 장윤 스님은 소송에서 이겨 복직됐으나 바로 사퇴했다. 장윤 스님의 복직과 사퇴는 영배 스님이 이끄는 이사회에 부담을 줬다. 그런 차에 본사주지회의에서 사퇴를 요구하자 이사회는 이를 거부했다. 그런데 동국대 교수들이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동국대 이사회는 거듭되는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동국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이러한 전망을 했다.
“11월 이사회에서는 5명의 스님 이사가 임기 종료를 맞는다. 이들이 연임할지 아니면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될지는 한 달여 전에 결정된다. 내외부에서 책임 추궁을 하는 만큼 영배 스님은 이사장에서 퇴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 이사는 계파간의 협상에 따라 유임과 교체가 결정된다. 조계종의 계파 갈등이 동국대 이사회에 투영되니, 동국대는 안정되지 못하고 발전 속도가 느린 것이다.”
총무원과 동국대 이사회에 대한 권력 배분과 관련해서는 문중보다는 ‘계파’가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계파란 주로 중앙종회에서 활동하는 스님들 가운데 일부가 각자의 생각과 문중에 따라 모임을 형성한 것을 말한다. 영향력이 큰 계파로는 금강회 보림회 일승회 새종책모임 화엄회 등이 꼽히고 있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택한 종교단체에도 계파는 존재한다. 바티칸에서 새 교황을 선출하는 방법이 ‘콘클라베(Conclave)’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콘클라베는 80세 미만의 추기경이 참가해 3분의 2 이상의 지지로 교황을 선출할 때까지 문을 걸어 잠가놓고 계속해서 회의하는 것을 말한다. 만장일치를 얻기 위해서는 계파간에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의견 교환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결국은 계파간 거래다.
따라서 동국대 이사회를 구성하는 데 각 계파가 거래하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동국대 이사회에서의 문제는 계파 간의 거래가 아니라 이사회 구성 자체에 있다.
연세대학교는 기독교에서 세운 대학이다. 연세대 이사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등 4개 교단에서 파송된 4명의 성직자와 동문회의 추천자 2명, 사회유지 4명, 그리고 총장 1명으로 구성된다. 연세대 이사회에서 목회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4개 교단에서 파송된 4명뿐이다. 물론 나머지 7명도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와 관련된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들의 타이틀은 목회자가 아니다.
조계종이 바로서려면…
동국대 이사회는 13명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 9명이 스님이다. 동국대 이사회에서 스님 이사의 수가 전체 이사 수의 절반을 넘으니 동국대 이사회는 조계종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연세대 이사회에는 4개 교단에서 각 한 명의 이사를 파견하나 동국대 이사회는 한 개 종단(조계종)에서 9명의 이사를 파견한다. 때문에 동국대 이사회에는 총무원의 갈등이 그대로 투영될 수밖에 없다.
동국대 이사회와 총무원이 협조적이면 동국대는 안정된다. 그러나 비협조적이면 갈등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동국대 문제를 지켜봐온 사람들은 여기서 “학교는 학교로서 발전해야 한다. 조계종은 동국대를 총무원 산하 기구로 보지 말고 조계종이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헌납한 기관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한다.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조계종은 동국대 발전을 위해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성균관대를 비롯해 최근 발전 속도가 빠른 대학은 하나같이 이사회로부터 큰 지원을 받았다. 고려대 등 몇몇 대학은 대기업으로부터 상당한 후원금을 받아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물론 동국대 재단이사회도 학교에 약간의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지원으로는 학교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는 불교를 믿는 기업인이 적지 않다. 이들의 도움으로 동국대는 일산병원 등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확장을 할 때마다 조계종 내부의 계파 갈등이 투영돼 동국대는 흔들렸다. 조계종은 이사 스님의 수를 절반 이하로 줄이고 동국대가 명문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에 매진했으면 한다.”
위대한 사판승을 위하여
지방할거주의가 팽배한 조계종을 하나로 묶고 동국대를 안정시켜 명문으로 발전시키려면 위대한 지도력을 가진 스님이 나와야 한다. 이러한 스님은 깨달음 분야에서도 큰 획을 긋는 존경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이판승의 능력을 갖춘 위대한 사판승이라야 하는 것이다. 동국대와 조계종 사태를 지켜본 한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스님들은 깨달음을 얻는 데만 정진하기 때문에, 경전만 읽었을 뿐 행정과 경영에 대해서는 공부하지 못했다. 지금의 절은 과거의 절이 아니다. 수많은 스님과 신도가 머무는 공간이고, 불사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스님에게 사찰은 수양의 도량이면서 또한 경영의 대상이다.
그러나 국내 그 어떤 강원에서도 사찰 경영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경영을 배웠다고 해서 경영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불교계는 스님에게 사찰 경영에 대한 강의를 해야 한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종단 행정학이다. 총무원에는 사회의 경찰이나 검찰 기능을 하는 호법부가 있지만, 신정아씨 사건을 계기로 종단이 내분을 겪을 때 호법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조계종은 종헌 외에도 사회의 법률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종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종헌과 종법이 사회의 법이나 관습과 충돌할 때 어떻게 한다는 규정이 없다. 이럴 때 유능한 지도자가 있으면 문제를 풀어 나갈 수 있지만 그러한 인물이 없으면 총무원은 전혀 손을 쓰지 못한다.
조계종은 종단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매뉴얼을 자체적으로 갖출 수 있을 정도로 종단 행정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사찰 경영학이나 종단 행정학을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은, 강원보다는 일반 사회와 호흡하고 사회에서 발전시킨 경영학과 행정학을 접할 수 있는 동국대가 더 적합하다. 동국대를 바로 세워야 조계종이 바로 설 수 있다.”
이제는 사판승의 시대다. 이판사판에 몰린 조계종과 동국대는 발상의 전환을 꾀해 불교 사회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위대한 사판승을 배출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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