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기시즘 실현지 ‘행복낙원촌’사람들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해대교 쪽으로 달리다 보면 발안 인터체인지를 지나게 된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구문천 3리에는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조그만 농장이 하나 있다. 그런데 이 마을은 입구부터 약간 색다르다. ‘효의 고장’ ‘범죄 없는 고장’이라고 동네를 자랑하는 선전물은 시골 도로를 지나는 길에 드문드문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이곳은 ‘돈이 필요 없는 사이 좋은 마을’이라는 푯말을 마을 입구에 세워놓았다. 바로 이곳이 무소유, 무아집의 삶을 몸으로 보여주며 살아가는 ‘야마기시즘 경향(京鄕) 실현지(實現地)’이다.
마을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면 겉모양은 여느 시골마을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10여 동의 양계축사가 늘어서 있고, 그 옆에 커다란 생활집과 식당, 작업공간, 마을회관 등이 모여 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사는 방식은 다른 마을 사람들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우리는 한 식구”
먼저 이곳 사람들은 공동생활을 한다. 물론 각 가정이 쓰는 방은 따로 있지만 한 지붕 밑에 11가구가 모여 산다. 그리고 식사도 함께 한다. 식사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마을 가운데에 있는 식당에 모여 앉는다. 흡사 대학기숙사 같다.
처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대개 공산주의를 연상한다. 그러나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공동생산은 하되 공동분배는 하지 않는다. 공동소유도 아니다. 이곳 사람들은 단지 ‘무소유’라고 이야기한다. ‘공동생활’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일체생활’이라고 한다. 서로 다른 식구들이 모여 사는 공동생활이 아니라, 모두 한 식구로 일체가 됐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에게 몇 가구가 모여 사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한 식구”라고 대답한다.
이 ‘평범하지 않은’ 마을을 이해하려면 우선 야마기시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일본식 이름에 무의식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야마기시즘이라는 표현은 왠지 좋지 않은 느낌을 준다. 일본의 한 종교집단 정도로 오해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그러나 우선 야마기시즘은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밝혀둔다. 이곳 사람들은 오히려 종교에 의존하고 종교적 가치판단에 의지하는 삶을 멀리한다.
그럼 야마기시즘이란 도대체 뭘까. 야마기시즘은 ‘-ism’이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야마기시주의, 즉 야마기시라는 사람이 제창한 일종의 사상적 지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상적 지향이라고 해서 무슨 거창한 체계나 이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야마기시즘은 ‘어설픈 이론화’를 경계한다.
야마기시즘을 소개한 책자를 보아도 야마기시즘의 취지를 “자연과 인위, 즉 천(天) 지(地) 인(人)의 조화를 도모하여, 풍부한 물자와 건강과 친애의 정으로 가득 찬, 안정되고 쾌적한 사회를 인류에 가져오는 것”이라고만 간략하게 밝히고 있다. 결국 야마기시즘이란 야마기시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제안하여 유례가 된 ‘행복일색(幸福一色)의 이상사회’를 지칭하는 다른 표현일 뿐, 야마기시라는 주창자를 숭배하는 의미도, 정연화된 사상체계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야마기시즘 운동을 처음으로 주창한 사람은 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山岸已代藏 ; 1901 ∼1961). 그는 청소년 때부터 어떻게 하면 모두가 하나 되어 사이 좋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상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잠깐 사회주의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 가진 사람의 재산을 억지로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든지 모든 사람이 노동의 생산물을 똑같이 나누는 방식은 ‘악평등(惡平等)’이라 생각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다.
독특한 양계법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야마기시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50년 9월의 태풍 ‘젠’ 때문이었다. 당시 태풍으로 들판의 벼가 다 쓰러졌는데 한쪽 논에서만 벼가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것을 한 농촌 보급원이 발견한 것이다. 신기해서 누구 논인지 알아보니 그곳이 바로 야마기시의 논이었고, 그의 농사법과 양계법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농촌 보급원은 야마기시를 설득하여 농사법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게 했다.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야마기시의 양계법에 공감하다가 점차 이러한 양계법을 낳은 독특한 사고방식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이른바 ‘연찬회(硏鑽會)’다. 이 연찬회를 통해 사람들은 밤을 새워 이상사회와 인간성 회복 등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1956년 교토의 어느 절에 162명이 모여 야마기시즘 특별 강습 연찬회(약칭 특강)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특강(特講)은 매월 2회씩 개최돼 현재 전세계에 걸쳐 2000회를 넘었다. 1958년 7월 야마기시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일본 미에현 가스가야마(三重縣春日山)에서 일체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야마기시즘 실현지’라는 것이 처음 만들어졌다. 현재 야마기시즘 실현지는 일본을 비롯하여 한국, 스위스, 브라질, 타이,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 8개국 50여 곳에 있다.
한국에서 야마기시즘 특별강습연찬회가 시작된 것은 1966년. 1984년엔 실현지가 탄생했다.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에 자리잡고 있어 경기도의 경, 향남면의 향을 따 ‘경향(京鄕) 실현지’라고 부르며, 산안(山岸, 야마기시) 마을, 혹은 산안농장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행복한 마을’이라고 부른다.
마을의 촌장 노릇을 하는 사람은 윤성렬씨(58). 그는 아버지에게 야마기시즘에 관해 들은 후 이상사회의 뜻을 품고 한국에 실현지를 처음 가꾼 사람이다. 윤씨의 부친 윤세식씨(타계)가 1965년 일본 가스야마 세계중앙실현지에서 연수를 받은 것이 한국에 야마기시즘이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당시 야마기시즘은 당국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여러 사람이 모이면 일단 조사 대상이었습니다.특히 자꾸 모여서 이상사회 무소유 등을 이야기하니 이상하게 볼 만도 했습니다.”
윤씨의 전직은 교사다. 그는 젊은 시절 이상적인 공동체 마을을 만드는 데 모든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84년 지금의 자리에 실현지를 마련했다. 야마기시즘을 더욱 깊이 알아보려면 그 실현지인 산안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말 그대로 이곳은 이상을 ‘실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산안마을의 주 수입원은 양계다. 야마기시즘 양계법이라는 특별한 방법으로 닭을 키운다. 일반 양계장에 가면 역겨운 닭 냄새 때문에 접근하기도 어려운데, 이 마을의 양계장에서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닭들도 닭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수탉과 암탉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닭에게 사료를 줄 때는 “사료 왔습니다”, 달걀을 가지러 갈 때는 “집란하러 왔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닭을 사람 대하듯 기르는 것이다. 아니, 기르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닭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야마기시즘 양계법의 핵심은 닭들을 억지로 키우고 억지로 알을 낳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닭들이 자라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크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암탉들이 ‘낳아 주시는’ 고급 유정란은 서울 경기 대구 전주 등 전국 각지로 직접 배달된다. 백화점이나 기타 소매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다들 맡은 일이 있다. 양계부, 공급부, 생활부, 학육부, 채소부 등에 속해 있는데, 이것을 직장이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식당, 이·미용, 육아, 사진, 보건·위생, 세차, 소방 등 각자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세탁하는 사람도 따로 있어 그가 다른 사람의 속옷까지 다 처리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는 강제나 규율이 없다. ‘너는 무슨 일을 하라’고 지시하는 사람도 없고, 빈둥빈둥 논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그래도 노는 사람은 없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을 안에서는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다. 농장 안에서 생산하지 못하는 생필품은 모두 공동으로 구매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활비는 들지 않는다. 마을 한가운데는 조그만 창고가 하나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식품, 면도기, 학용품, 과자류 등이 가득 쌓여 있다. 군대 보급 창고를 연상케 하는데 이곳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지 않다. 필요하면 누구든지 꺼내 쓰면 된다. 창고에 없는 물건이 필요하면 ‘연찬을 통해’ 결정해 사온다. 마치 우리가 어머니에게 옷 사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낭비하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없느냐고 물으면, “여태 그런 사람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어찌 보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필요한 만큼 갖다 써라
특별히 쉬는 날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각자 함양일(涵養日)이라는 것을 정해놓고 쉬고 싶을 때 쉰다. 무소유를 지향하지만 그래도 각자 돈이 필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성인들은 월 5만 원씩을 받는다. 젊은 부부들은 이 돈으로 함양일에 영화를 보러 가든지 외식을 하기도 한다. 돈이 남으면 저축을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쯤 되면 묻는 사람이 부끄러워진다. ‘개인적으로 저축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빙그레 웃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하면 어쩌냐는 질문에도 “더 필요한 적이 없고, 만약 더 필요하면 달라고 해서 쓰면 된다”고 대답한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 따로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 마을은 무슨 특별한 정신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간혹 산안마을을 생태마을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유기순환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자연과 인위의 조화를 지향하지만 생태마을은 아니다. 도인(道人)들이 모여 뜻 모를 이야기만 나누면서 사는 곳은 더더욱 아니다. 현재 산안마을에는 아이들 15명을 포함해 44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전직 교사, 사회운동가, 직장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그저 네 것 내 것 없이 살고 있을 뿐이다.
실현지에 거주하는 데 특별한 자격은 필요없다. 하지만 일단 야마기시즘 회원이 되기 위해선 무소유의 삶에 동의해야 한다. 그들은 이것을 참획(參獲)이라고 하는데, 마을에서 거주하려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야마기시즘회에 내놓아야 한다. 이곳에서 살다가 간혹 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자신이 가져온 재산을 다시 내놓으라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산안마을 아이들에게는 동네 어른들이 모두 자기 부모나 같다. 아이들은 동네 아주머니를 부를 때 현주엄마, 유끼엄마 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현주’ ‘유끼’라는 이름은 그 아주머니의 아이 이름이 아니라 본인의 이름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해서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어른들도 서로 ‘서혜란씨’ 하는 식으로 이름을 부른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할 때도 하나같이 자기 아이들처럼 대한다. 아기가 태어나면 아이 이름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짓는다. 유아들은 마을 안에 있는 태양유치원에서 자란다. 결국 여기서는 모두가 엄마 아빠 삼촌 언니 동생이 되는 셈이다.
“더 좋은 곳 찾지 못했다”
산안마을 사람들은 명절에도 자기 가족을 찾아 고향집으로 가는 경우가 별로 없다. 명절 때면 마을 사람들 모두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마을회관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생일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축하해주고 생일 떡을 나눠 먹는다. 그야말로 대가족이 아닐 수 없다.
사람 사는 동네에 특이한 이력을 갖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만, 산안마을에도 독특한 삶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 많다. 경북대 농대 77학번인 황형섭씨(44)는 농민운동을 하려다 산안마을에 들어왔다. 대학에서 농촌문제연구소라는 서클 활동을 했던 황씨는 대학 동기들과 함께 각자 농촌 마을에 들어가 농민운동을 부흥시켜보려는 계획을 세우던 중 양계법을 배울 요량으로 야마기시즘회를 찾게 됐다.
“처음 특강에 참석했을 때는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특강에는 일본인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우선 야마기시즘이라는 말 자체가 거리를 느끼게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듣다 보니 어느 날은 세상을 저렇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뭔가 어설프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현지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혹시 마을에서 나갈 생각은 해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황씨는 “지금도 매일 하고 있는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가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더 좋은 곳을 찾지 못해 나가지 못하고 있다”며 웃는다. 총각으로 들어왔던 황씨는 산안 마을에서 변정희씨(40)를 만나 딸 둘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야마기시즘의 특징 중 하나는 국경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긴 모든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니 국경이나 인종 같은 것은 전혀 따지지 않으리라. 그래서 전세계에 있는 실현지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은 일본과 가까워 특히 왕래가 잦다. 양국의 실현지에 있는 청년들이 서로 찾아가 잠시 살다 오기도 하고, 결혼을 하여 아예 눌러 앉는 경우도 있다. 윤성렬씨는 이를 보고 “청년들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고 흐뭇해한다.
나가오 유끼(28)는 1994년 산안마을에 어린이 낙원촌 학생 스태프로 참여했다가 유상용씨(38)를 만나 결혼했다.
“처음엔 한국이란 나라에 호기심이 있어 찾아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좋고 한국이 마음에 들어 다시 찾게 됐습니다. 그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요.”
유끼는 이제 한국말을 굉장히 잘한다. 현재 산안마을에는 유끼 이외에도 5명의 일본인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일본 실현지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로 지금은 산안마을 사람들과 한 식구가 되어 오순도순 살고 있다. 물론 한국의 청년이 일본의 실현지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남곡씨(57)는 사회운동을 하다가 야마기시즘 실현지를 찾은 경우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를 하던 그는 1970년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4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국불교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상사회를 모색하던 중 1994년 가족들과 함께 산안마을 식구가 됐다.
산안마을 사람들이 자주 쓰는 용어 중 하나가 ‘연찬(硏鑽)’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 ‘연찬을 통해 결정한다’고 이야기한다. 산안마을 사람들은 실현지의 삶을 ‘연찬하는 삶’이라고 이야기하고, 실현지에서 생활하는 의미를 ‘계속되는 연찬’에 두고 있다. 과연 연찬이 무엇이기에 그럴까. 연찬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도리를 깊이 연구함’이다. 야마기시즘에서 연찬이란 하나의 의문이나 주제에 대해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과연 그럴까”를 생각하며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다.
그저 회의라고 해도 좋고 토론이라고 해도 좋지만,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일도, 화를 내며 덤벼드는 일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원점에 되돌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산안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당히 차분해지고 때론 깜짝 놀라기도 한다. 먼저 이곳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대화하는 태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또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제, 혹은 감정적으로 즉각 반응하는 문제들에 대해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2월3일 밤 8시. 야마기시즘회 회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실시하는 회원 연찬회에 참석했다. 연찬회 시간이 가까워 오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실현지에서 생활하는 사람 몇 명과 치과의사, 대학교수, 약사, 주부, 노동자 등 사회에서 생활하는 회원들이 모여 인사를 주고받으며 떠들썩하다. 오늘 연찬의 주제는 ‘진보의 길 - 타(他)를 침범하는 것의 천박함과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 벽에 붙은 연찬 주제를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침범하는 것이 왜 천박하고 어리석으며, 나아가 이것을 깨닫는 것이 진보의 길이라니, 도대체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마치 불교의 화두를 받은 기분이었다.
참석자들은 먼저 돌아가며 자신의 근황을 소개했다. 그 동안 특별했던 일, 재미있었던 일, 후회하는 일 등을 자연스럽게 털어놓는다. 가정생활, 자녀교육, 회사나 학교 이야기가 오가면서 즐거운 분위기 속에 연찬이 진행된다. 사회자가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발언권을 준다든지, 회의를 이끌고 있다는 분위기는 풍기지 않는다. 상대의 이야기에 웃고,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경험한 다른 사례를 이야기하다 보면 사람의 따뜻함이 저절로 느껴진다. 이러한 연찬회는 특별한 결론을 유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찬을 하다 보면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화를 내지 않고 사는 법
야마기시즘회에는 두 달에 한 번씩 실시하는 ‘특별강습연찬회’를 통해 입문할 수 있다. 특강 주제는 ‘화를 내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사이좋게 즐겁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우리는 상대를 바꿀 수는 없어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꿀 수는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붙들어 매는 것이 무엇인지 가려내 그 밑에 숨어 있는 본래의 자신을 깨닫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야마기시즘 특강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입니다.”
야마기시즘에서 설명하는 특강의 의미다. 이신홍씨(31·김포공항 근무)는 최근 특강을 받았다. 꽉 짜인 회사 분위기에 답답해하던 이씨는 우연한 기회에 야마기시즘을 소개받았다.
“아는 분의 소개로 찾아가기는 했지만 처음 며칠간은 혹시 무슨 종교집단은 아닐까, 어디로 잡아가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5일쯤 지나자 아주 마음이 편해지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깨닫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이제 이신홍씨는 화내지 않고 살려고 애쓴다. 대학생 기자 교수 사회운동가 스님 목사 신부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이 특강을 거쳐갔다. 2001년 2월 현재까지 195회의 특강을 통해 2000여 명의 사람들이 대안적 삶을 느끼고 돌아갔다.
‘사랑의 전화(대표 심철호)’ 사회조사연구소는 최근 한국인의 ‘행복도’에 대한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10세부터 50세 사이의 남녀 487명을 대상으로 전화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사대상의 64.9%가 ‘행복하다’고 응답한 것이다.
그런데 ‘행복하다’와 ‘행복하지 않다’의 이유를 뜯어보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행복의 원인을 ‘가정의 화목’(63.9%), ‘미래에 대한 희망’(15.8%)에서 찾았다. ‘경제적 여유로움’을 행복의 이유로 꼽은 사람은 5.1%에 불과했다. 반면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들은 행복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경제적 어려움’(41.5%)을 가장 먼저 꼽았다.
불행한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불행의 요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행복한 사람들은 그 이유를 ‘경제적 여유로움’에서 찾을 법도 한데, 경제적 여유를 행복의 조건으로 꼽은 사람은 왜 5%에 불과할까? 우리는 여기서, 경제적 어려움은 불행을 느끼게 하는 요인은 될 수 있어도, 일정한 경제적 수준에 오르면 결코 돈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한번 들어 보세요”
또한 행복이란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영국 LSE 대학은 전세계 54개국 국민들의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 제일 가난한 나라로 꼽히는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도리어 가장 행복을 느끼며 산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산안마을 사람들은 식사할 때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접시에 반찬을 놓아준다. “이거 맛있겠지요? 한번 들어 보세요” 하면서 말이다. 받는 사람은 또 상대방의 접시에 그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골라준다. 스스로 행복한 마을, 사이좋은 마을이라 자랑하는 산안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식사 때도 서로 아껴주고 나눠주는 삶을 자연스레 실천하면서 무소유와 무아집의 일체생활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내가 옳다고 강변하며 화내지 않는 삶 속에서, 그들은 새로운 이상사회를 그려내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산안마을을 바라볼 때마다 고개를 드는 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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