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근원, 학문의 근본
그렇다면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지과학, 인공지능의 놀라운 발달 속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왜 인간인가.
인간의 마음만큼 우리와 친근하면서 또 그토록 오랫동안 신비의 대상으로 여겨진 것도 없을 것이다. 감각의 파노라마가 연출되기도 하고, 온갖 느낌이 교차하기도 하며, 때로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기도 하는 마음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마음의 현상이란 두뇌에 기반을 두고 있을 게 분명한데, 도대체 신경세포의 물에서 어떻게 마음의 포도주가 만들어지는 것일까? 마음은 물질과 근본적으로 다른가? 다르다면 물질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신비의 베일을 벗기고 마음을 물질계에 포섭할 수는 없을까? 모두 철학의 초창기부터 철학자들을 괴롭혀온 질문들이다.
현대 심리철학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를 꼽는다면, 그것은 물질과 정신의 관계, 또는 물질계에 정신을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심신문제(心身問題, mind-body problem)라 할 수 있다. 고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심장이 아니라 두뇌에 있다는 것을 안다.
어쨌거나 우리는 마음이 심장이든 뇌이든 신체기관 어딘가에 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에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철수가 하숙집에 있다’고 말할 때와 같이, 마음은 두뇌와 다른 것이지만 두뇌 속에 어떤 방식으로 깃들어 살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나의 엄지는 나의 손에 있다’고 말할 때와 같이, 나의 마음은 두뇌의 한 부분, 또는 두뇌와 동일한 것이란 말인가?
심신문제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요소가 있다. 첫째, 정신은 물리적 사건과는 전혀 다른 성질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토마토를 볼 때 나의 정신에는 빨간 영상이 맺힌다. 그리고 바늘에 찔리면 불쾌한 통증이 유발된다. 정신에는 이런 경험적 감각에 대응하는 의식이 존재한다. 또한 나의 심리상태는 외부의 사실을 표상하는 성질도 갖고 있다. 내가 ‘비가 온다’고 믿을 때, 믿음이라는 나의 심리상태는 외부의 사실을 일정한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마음의 특성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 한다. 또한 나의 마음은 여러 문제를 현명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지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의식·지향성·지능의 세 특성은 물질에선 쉽게 찾아지지 않는 정신의 고유한 특성들로 간주된다.
주목해야 할 둘째 요소는 정신과 물질은 서로 긴밀하게 원인과 결과로 얽혀 있다는 점이다. 내가 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 나의 손은 올라간다. 마음이 손의 움직임이라는 자연계의 사건을 야기하는 것이다. 또 자연계의 사건이 나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바늘이 내 피부를 찌르면, 나의 마음에 고통이 생겨난다.
정신은 물질계의 어디에 위치하는가
심신문제의 숙제는, 정신의 특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정신을 물질계에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양자의 인과관계를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의 두 조건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물질의 서로 다른 외형적 특질들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정신과 물질을 서로 상이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양자가 서로 원인과 결과로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비슷한 종류의 것들은 인과관계를 설명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전혀 다른 유형의 경우 그들이 어떻게 인과관계를 맺는지 설명하기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반면에 정신과 물질을 동일한 유형의 것으로 간주하면, 양자의 인과관계는 설명하기 쉬워진다. 그러나 이럴 경우 정신과 물질에서 나타나는 상이한 특질들을 설명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다. 정신과 물질이 다름이 없는 것이라면 의식·지향성·지능 등 정신의 고유한 특성으로 보이는 것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제 이러한 구도로 심신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기존의 이론들을 되돌아보자.
마음과 신체 또는 물질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심신문제를 현대철학에서 논의되는 형태로 전면에 부각시킨 최초의 철학자는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의 차이는 해소될 수 없는 것이며 그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이원론을 주창한다. 데카르트는 정신의 본질적 특성은 ‘생각함’인 반면, 물질의 본질적 특성은 ‘공간을 차지함’이라고 주장한다. 정신은 생각하는 한도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물질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정신은 사유하는 한 공간을 차지함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신의 영역과 물질의 영역을 확고히 구분한다. 마음과 물질에 관한 그의 이론은 오늘날 심리철학자들에 의하여 실체이원론(substance dualism)이라고 불린다.
이원론이란 정신과 물질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도대체 실체이원론이란 또 무엇인가? 이는 ‘실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만 이해하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 눈앞에 장미가 한 송이 있다고 하자. 이 경우 우리는 앞에 일정한 한 사물이 있고 이 사물은 여러가지 성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 있는 저 사물은 나무가 아니라 꽃이며, 진달래가 아니라 장미이고, 노란색이 아니라 붉은색이며, 길이가 1미터가 아니라 30센티미터 정도다.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하나의 대상과 그에 속한 여러 성질들(‘꽃잎’ ‘장미임’‘붉음’ ‘30센티미터 정도의 길이임’ 등)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대상은 그 자체가 성질이 아니며 성질들을 담는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성질들을 담는 그릇을 철학자들은 기체(substratum) 또는 실체(substance)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제 우리는 정신과 물질에 관한 실체이원론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장미꽃의 예처럼 물리적 성질들을 담는 물리적 실체가 있듯, 정신적 성질들을 담는 정신적 실체가 있으며, 정신과 물질은 이러한 실체의 차원에서 다르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러한 정신적 실체에 해당한다.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어, 모든 정신적 사건들은 이 영혼의 영역에서 전개되며 영혼은 모든 정신적 성질들을 담는 그릇으로 그들의 존재론적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정신적 실체로 영혼을 받아들임으로써, 정신은 물질과 독립해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을 갖게 됐다. 정신적 성질과 물리적 성질은 각기 그릇을 달리하기 때문에 물리적 성질들이 모두 사라져도 정신적 성질들은 영혼이라는 독자적 그릇에 담겨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주장과 같은 실체이원론은 정신과 물질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 정신과 물질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양자가 근본적으로 다른 대상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정신과 물질을 ‘대상의 차원에서 구분하는 방식으로’ 칼로 자르듯 나눌 때, 양자가 인과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을 설명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는 데에 있다. 정신과 물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그릇에 속한다면, 내가 손을 들고자 하는 정신적 욕구가 손을 드는 물리적 행위를 야기하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욕구는 정신적 실체에 속하며 손을 드는 행위는 전혀 다른 물리적 실체에 속한다고 할 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현대 물리주의의 반격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송과선을 그 답으로 내세운다. 우리 두뇌에는 송과선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정신과 물질이 만난다. 우리의 정신적 사건들은 물질적 농도를 갖고 있지 않으나, 송과선에서 정신적 사건이 농축화돼 물리적 사건으로 화한 후 물리계와 만난다. 그리고 물리적 사건은 그곳에서 희박화해 정신적 사건으로 변형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 편의 공상과학소설을 연상케 한다. 그만큼 궁색한 설명이다. 실체이원론이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오늘날의 과학에 따르면, 물리계는 하나의 폐쇄되고 완결된 체계다. 이러한 생각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 물리계의 에너지 또는 운동량 보존의 법칙이다. 즉, 물리계 내의 운동량은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체이원론에서와 같이 정신계를 물질계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별도의 영역으로 간주하면, 정신에서 물질로 이어지는 인과적 작용은 결국 운동량 보존의 법칙을 위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별도의 영역인 정신이 물질계에 인과적 영향을 끼쳐 특정한 사건을 야기한다는 것은 물질계에 있던 기존 운동량의 합이 증가함을 의미하며, 이는 운동량 보존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은 정신과 물질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붕괴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철학자들은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설명을 추구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아직 마음에 관한 과학이 시작도 되지 않은 단계에서 마음과 물질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논의하였다. 이후 마음과 물질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심리철학적 논의는 300년 이상이 경과해 마음에 관한 과학이 발전한 상태에서 다시 제기된다.
과학이 발전한 단계에서의 심리철학적 논의는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이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과학이론이 상당히 발전한 단계에서는 마음을 과학의 객관적 설명의 영역에 포섭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마련이며, 이는 결국 마음을 자연계에 포섭시키고자 하는 경향으로 드러난다. 즉, 마음을 물질계의 일원으로, 철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물리주의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 이론이 행동주의와 동일론이다.
행동주의는 처음에는 마음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이론이라기보다는 심리학의 한 방법론으로 제시되었다. 행동주의 이전의 심리학 이론은 내성심리학 또는 구조주의 심리학이라 불리는데,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내성적으로 고찰해 여러 심리상태들 사이의 규칙적 연관성을 설명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그 이론들은 곧 문제점을 드러낸다. 내성이란 기본적으로 주관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에, 이런 주관적 관찰에 기반을 둔 심리학 이론은 그 객관성을 의심받게 된다. 아울러 내성심리학을 옹호하는 심리학자들 사이에 마음의 기본적 구조에 대한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이견이 나오게 됐으며, 주관적 관찰에 근거한 만큼 내성심리학은 그 이견을 조정하지 못하고 표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관적 성격을 띠는 내적인 심리상태를 학문적 논의의 영역에서 완전히 배제하고자 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 움직임은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킨다. 이들은 심리학이 기본적으로 행동을 예측하고 설명하는 이론이며, 이 이론은 내적 심리상태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도 구성될 수 있으며, 또 그리되어야 객관성과 과학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주어진 자극 또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이 야기되는가만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자극과 행동 사이의 규칙적 관련성을 밝히기만 하면, 이를 통해 행동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심리학 연구의 한 방법으로 제안된 행동주의에 공감한 철학자들은 행동주의를 마음의 본성에 대한 이론으로 발전시킨다. 행동주의의 정신은 인간을 주어진 환경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과 같이 반응하는 한 기계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이러한 기계에 대하여 “고통을 느낀다” “기뻐한다” 등의 표현을 사용해 그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 이때 그 기계가 고통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은 피부의 손상과 같은 자극을 받을 경우 그 자극을 피하려는 방식 또는 비명을 지르는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이렇게 인간을 기계와 다름없는 것으로 보면, 일정한 심리상태에 있다는 것은 일정한 자극에 대해 일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성향이 있다는 의미로 환원된다. 심리상태 자체를 자극에 대한 일정한 반응 성향으로 정의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주의는 명백히 극단적인 물리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한 심리상태에 있음은 일정한 자극과 반응 사이의 성향과 같은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심리적 성질은 설탕의 용해성과도 같은 그런 성질의 것이 된다. 설탕의 용해성은 물에 넣을 경우 녹는 성향이며, 사람의 고통은 찔렸을 때 비명을 지르는 성향이다. 이런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없고, 심리적 성질은 설탕의 성질과 유사한 물리적 성질이 된다.
이렇듯 다소 극단적인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말한 대로 이전의 심리학적 전통이 갖고 있는 주관주의적이고 비과학적인 성향에 대한 반발이 그 한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모든 학문을 자연과학의 틀 속에 편입시키고자 한 당시의 통합과학 바람이 또 하나의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혁신적이고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행동주의는 그만큼 급격하게 쇠퇴의 길을 겪는다.
반론 : 욕구와 믿음을 간과했다
행동주의의 많은 문제점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두 가지로 요약 가능하다. 첫째는 그토록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던 행동주의가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구체적인 과정에서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둘째 문제는 인간의 심리상태는 단순한 자극과 반응의 관계로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갈증이라는 심리상태를 보자. 행동주의에 따르면, 갈증이라는 욕구는 대체로 ‘물을 보았을 때, 그 물로 접근하여 섭취하려 함’으로 정의될 것이다. 그러나 갈증 상태에 있는 사람이 모두 그러한 성향을 보이지는 않는다. 물을 보았을 때 그 물로 접근하여 섭취할 것인가 아닌가는, 그 사람이 그 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 물에 독약이 있다고 믿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 물이 안전하다고 믿으면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즉 어떤 욕구가 어떤 특정한 행동 방식을 초래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항상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어떤 일정한 믿음을 갖고 있을 때 그 일정한 방식대로 행동할 것인가는, 그 사람이 어떤 욕구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내가 보고 있는 버스가 국회로 가는 버스라고 믿을 경우, 그 믿음이 바로 그 버스를 타는 행위와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국회로 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으면 그 버스를 탈 것이고, 그런 욕구가 없으면 그 버스를 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고찰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행위 방식은 항상 믿음과 욕구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한 버스가 일정한 곳으로 간다는 믿음과 그곳에 가려고 하는 욕구가 동시에 있을 때에만 나는 그 버스를 탄다. 믿음 하나만으로는, 혹은 욕구 하나만으로는 행동이 초래되지 않는다. 이러한 고찰은, 사람의 심리상태란 항상 연계되어 자극과 행동을 매개하기 때문에, 개별적 심리상태를 다른 심리상태에 대한 언급 없이 순수한 자극과 행동을 통해서만 정의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동주의는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체계를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할 수 없었다.
행동주의 다음으로 제시된 강력한 물리주의적 견해는 심신동일론이다. 동일론을 이해하는 한 방식은 신경생리학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미래의 신경과학자가 두뇌에 대한 완성된 지도를 작성하여, 인간의 모든 심리상태에 대응하는 두뇌의 상태를 밝혔다고 하자. 고통은 1번 두뇌상태이고, 눈이 온다는 믿음은 127번 두뇌상태이고, 물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는 746번 두뇌상태이고, 등등. 이 경우에 우리는 각 심리상태는 그에 대응하는 두뇌상태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심신동일론은 바로 이러한 입장이다. 이 입장은 행동주의를 괴롭힌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각 욕구와 각 믿음에 두뇌상태들을 대응시키고 있으므로, 주어진 환경에서 일정한 행동이 믿음과 욕구의 합작으로 산출되는 과정을 쉽사리 설명할 수 있다. 한 행동은 각기 믿음과 욕구에 대응하는 두뇌상태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시작되며, 이것이 중추신경계를 통해 근육을 자극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심리상태들의 결합을 과학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일론은 두뇌 과학의 발전으로 이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자명하면서도 도전의 여지가 없는 이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이론은 컴퓨터 과학의 발전이 마음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끼치면서, 그리고 이에 고무된 마음관을 철학자들이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하면서 중대한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반론 : 왜 꼭 인간의 두뇌인가
이런 예를 한번 들어보자. 당신이 영화 ‘E.T.’의 주인공이 되어 어느날 외계에서 온 존재를 만나게 됐다. 그 존재와 친해지고 나중에는 대화까지 나눌 수 있게 된다. 대화를 통해 당신은 그 존재가 고향에 가고 싶어 슬퍼하며, 어머니가 보고 싶어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외계인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가? 당신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갖고 있으며, 믿음과 욕구 등 당신과 유사한 온갖 심리상태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는가? 비록 그 외계인이 우리 인간과는 다른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할지라도, 외계인도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은 그 외계인이 고도로 정밀하게 만들어진 로보트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로 적용 가능하다. 고도의 로보트가 우리와 대화를 하고 합리적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행동한다고 하자. 그 로보트 또한 우리와 유사한 믿음과 욕구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위의 예는 동일론에 심각한 도전이 된다. 동일론은 마음과 인간의 두뇌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인간의 두뇌와 같은 것을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위의 예들은 인간과 같은 두뇌를 갖지 않고서도 마음을 가질 수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위의 외계인의 예는 한 존재가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가는 중요치 않음을 보여준다. 외계인과 로보트는 모두 인간의 두뇌와는 다른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들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마음의 본성을 인간 두뇌와의 동일성에서 찾으려는 것은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것이다. 마음의 본성에 대한 해답은 외계인, 로보트, 인간에게 공통적인 어떤 것으로부터 찾아야 하는 것이다.
기능주의 : 마음은 프로그램의 체계일 뿐
그렇다면, 이들의 공통점은 어디에 있는가? 외계인의 예를 통해 동일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공통점을 두뇌 또는 중앙 정보처리 장치의 물질적 성분이 아니라, 그 장치의 구조에서 찾는다. 우리는 왜 외계인이 고통이라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고통상태는 당신의 다른 마음상태, 행동, 상황과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외계인의 내부적 상태 역시 자신의 다른 내부적 상태, 행동, 상황과 관계를 맺고 있다. 관계를 맺는 방식이 양자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양자 모두 유사한 마음상태에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심리상태를 바로 그 심리상태이게 만드는 것은 그 상태를 이루는 물질이 아니라, 그 상태가 전체적인 체계 속에서 하는 기능 또는 역할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기능주의로 현대 심리철학에서 마음에 관한 정론의 지위를 오래 누려왔으며, 지금도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물과 책상의 예를 통해 기능주의의 입장을 좀더 정확히 이해해보도록 하자.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들 중에는 그 본성이 그 사물을 이루는 물질의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것들과 그 사물이 하는 역할에 의해 규정되는 것들이 있다. 물은 전자의 전형적인 예다. 물이 물인 이유는 H2O라는 물질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음료수로서의 역할을 하는지, 수영장을 채우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H2O라는 물질로만 되어 있으면 물이다.
반면에, 한 사물이 책상이기 위해서는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여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으면 된다.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지, 철로 만들어져 있는지, 혹을 돌로 만들어져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유전자도 마찬가지다. 한 물질이 유전자이기 위해 중요한 것은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잘 하는 것이지, 그것이 DNA로 이루어져 있는가 아니면 다른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가가 아니다.
기능주의는 심리상태를 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책상과 같은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기능주의에 따르면, 한 심리상태가 그 상태일 수 있는 이유는 체계 내에서 일정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지, 특정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기에 외계인도 로보트도 인간과 같은 마음상태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주의가 컴퓨터 과학의 발전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리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인공지능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통해 인간의 여러가지 인지 기능을 컴퓨터에 구현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계속 발전하여 복합적인 인지 기능을 구현하는 체계가 만들어지면, 그 체계가 인간의 마음과 같은 것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다시 마음이란 프로그램들의 체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낳게 했다. 이에 따르면, 한 존재가 어떤 심리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은 복합적인 프로그램 내에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상태가 있는가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지, 그 프로그램이 어떤 물질적 소재를 통해 구현되는가와는 전혀 무관하다. 이렇게 컴퓨터 과학의 발전과 그에 고무된 생각에 의해 ‘마음은 프로그램의 결합체’라는 생각이 나왔으며, 마음을 인간의 두뇌와 동일시하는 입장은 인간중심적이라는 비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기능주의에 대한 두 가지 반론
기능주의는 기존의 행동주의와 동일론의 장점을 모두 포섭한 이론으로, 마음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단지 철학자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인지 과정에 관심을 갖는 컴퓨터 과학자(특히 인공지능 종사자), 인지심리학자, 신경과학자 사이에서도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기능주의적 관점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학문들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인지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됐다. 이렇게 시작해 이제 5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인지과학은 학제간 연구가 하나의 유행처럼 퍼진 20세기 후반의 학문적 토양에서도 가장 활발하고 생산적인 영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혁신적이면서 새로운 학문의 토대를 제공한 기능주의에 대해서도 몇 가지 반론이 존재한다. 앞에서 설명했듯 마음에 관한 이론은, 마음의 특성들인 지향성·지능·의식을 모두 잘 설명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음과 물질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기능주의는 마음의 특성 및 마음과 물질의 인과관계 두 측면 모두에서 반론에 부딪히고 있다. 이 반론들은 아직 기능주의를 붕괴시킬 정도로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고 있으나, 결국엔 기능주의를 몰락시킬 수도 있는 강력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마음에는 물질계에서 찾아지지 않는 특성들이 있음을 보았고, 이 중에서도 지능·지향성·의식이 가장 중요한 특성들임을 확인했다. 기능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능과 지향성은 기능주의의 틀 내에서 설명 가능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의식의 현상은 기능주의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고 주장한다.
당신이 고통이라는 심리상태에 있을 때, 당신은 단지 다른 마음상태들과 일정한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을 뿐 아니라 특정한 ‘느낌’을 갖는다. 즉 고통이라는 심리상태는 인과적 측면뿐 아니라, 일정한 느낌을 동반하는 현상적 측면을 갖는다. 이 두 측면 중 당신은 어느 것이 고통에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마 당신이 나와 같다면, 당신은 느낌의 측면이 고통에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 없다면, 그 상태가 어떤 인과적 역할을 하든지 고통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론 1 : 의식의 신비는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에 해당하는 의식의 측면은 기능과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스펙트럼 전도의 경우 이 상황을 잘 드러낸다. 철수와 영수가 있다고 하자. 이들은 모든 인지적 기능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들 둘은 태어나면서부터 붉은색 색감과 파란색 색감이 서로 전도되어 있다고 하자. 철수가 붉은색을 경험할 때 영수는 파란색 색감을 경험한다. 색의 용어를 적용하는 것은 교육의 산물이고, 이들은 동일한 교육을 받았으므로 모든 상황에서 붉음과 파람을 판단하는 데 정확히 일치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느끼는 색감의 차이는 인과적 과정을 통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철수의 붉은색 감각상태와 영수의 파란색 감각상태는 인과적 기능으로는 정확히 일치하지만, 동반하는 감각적 경험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예는 정신의 측면 중 감각적 경험이라는 부분이 인과적 기능으로 잘 설명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실 위에서 제시한 의식의 문제는 기능주의자뿐 아니라 모든 철학자, 과학자들의 골칫거리다. 기능이 되었건 물질적 소재가 되었건, 물질계의 영역으로부터 어떻게 의식이라는 신비로운 현상이 형성되는가 하는 것은 과학적 논변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철학적 논변도 지금껏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기능주의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위의 예에서 철수와 영수가 모두 사람으로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경우와 철수와 영수가 하나는 사람이고 하나는 로보트라고 할 경우를 비교해보자. 스펙트럼 전도의 가능성이 후자의 경우에는 더욱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양자 모두 동일한 물질과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면, 어떻게 양자 사이에 스펙트럼 전도가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반면, 양자가 서로 상이한 물질로 되어 있고 단지 인과적 구조만 같다면 그러한 전도가 있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말하면, 스펙트럼 전도와 그에 따른 의식의 문제는 동일론보다는 기능주의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의 인과가 기능주의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는 기능주의가 이원론적 성격을 갖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다시 책상의 예를 들어보자. 한 사물이 책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하는 기능과 관련된다. 한 사물을 책상이게 만드는 것은 그 사물의 구조 및 기능과 관련한 것이며, 이러한 기능적 성질은 그 책상을 이루는 물질적 성질과 구분된다. 나무로 만들어지든 철로 만들어지든, 그것이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기만 하면 그것은 책상이 된다. ‘책상임’이라는 성질은 그것을 구성하는 재료의 물리적 성질과 구분되는 별개의 성질이다.
기능주의에 따르면, 일정한 심리상태의 본성 역시 그 상태가 하는 기능적 역할에 의해 정의된다. 어떤 소재로 만들어지든 그 상태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만 하면 그 심리상태가 된다. 따라서 심리상태의 본성은 물질적 성질과 구분되는 별개의 성질로 정의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능주의는 심리상태에 대한 이원론적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이원론에 대해 제기되는 흥미로운 문제가 있다. ‘손을 들어야겠다’ 하는 의지가 손을 드는 행동을 야기한다고 하자. 모든 심리상태가 그렇듯, 이 의지는 어떤 두뇌의 신경상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일 게다(책상이 특정한 소재로 만들어지듯). 이 경우 우리는 손이 올라가는 행동의 인과적 과정을 신경생리학만으로도 완결되게 설명할 수 있다. 두뇌상태에서 시작해 중추신경계를 거쳐, 근육의 수축작용, 팔의 올라감에 이르는 결과까지 모든 인간의 행동은 이렇듯 물리적 차원에서 완결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물리적 상태와 구별되는 별개의 것으로서의 심리상태는 행동을 야기하는 과정에서 어떤 추가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가? 혹시 인간의 심리상태는 실제 아무런 인과적 영향도 끼치지 못하면서 그런 것처럼 보이기만 하는, 그림자와 같은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인간의 의지가 행동에 실제 영향을 끼치는 바가 없다면, 인간의 자유의지, 책임, 자발성 등 ‘인간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들은 모두 증발해버리고 만다. 우리는 규정된 물리적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와 같은 존재일 뿐, 주체적 행동이란 허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반면 인간 정신이 그 행동에 추가적인 인과적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심리상태를 물리상태와 구분되는 것으로 인정하면서, 이 심리상태가 물리상태에 독자적인 인과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물리계의 폐쇄성 또는 운동량 보존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물리계는 항상 일정한 운동량을 지닌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원리인데, 물질상태와 구분되는 심리상태가 행위에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이 원리를 위배하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정신과 물질의 인과문제는 기능주의에 대해서만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을 물질과 구분되는 것으로 보는 모든 이론에는 같은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항은 글의 서두에서 제시한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해명코자 하는 이론이 처한 딜레마적 상황을 다시 생각케 한다. 심리적 상태가 갖는 특성들을 설명하는 이론들은 때로 그 자체가 갖는 비물질적 특성 때문에, 때로 기능주의의 강력한 위세로 인해 이원론적 경향으로 기운다. 지금껏 보아왔듯 이 경우 정신과 물질의 인과관계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반면 정신을 물질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일원론적 접근을 시도할 경우 정신과 물질의 인과관계를 어려움 없이 설명할 수 있다. 정신은 물질과 같은 것이므로, 정신에서 물질로 이어지는 인과관계는 물질과 물질 사이의 인과관계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정신의 속성들, 그 중에서도 의식과 같은 현상들이 어떻게 물리적 상태로부터 생겨나는가를 설명해야 하는 과제에 부딪힌다. 이 문제 역시 만만치 않으며 아직까지 어떤 이론도 이를 성공적으로 설명해내지 못했다.
심리철학, 인간의 본질을 향한 탐구
지금까지 정신과 물질의 인과관계와 그 특성적 차이라는 두 축을 통해 양자의 관계를 해명코자 하는 기존 이론들을 살펴보았다. 이 문제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상태로 많은 논의가 진행중이다. 이렇게 서로 얽혀 있는 정신과 물질의 관계 문제, 의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 정신과 물질의 인과관계의 문제 등은 모두 현대 심리철학의 핵심 논점들이다. 또한 물질과 정신의 관계 또는 물질계에서 정신을 어느 위치에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지 형이상학적 주제가 아닌, 우리 인간의 주체성 내지 정체성 문제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현대 영미철학에서 심리철학이 가장 중요한 분야로 주목받고 있으며, 아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탐구하는 데 천착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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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자체의 중요성 외에 심리철학이 많은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현대 심리철학이 인지과학, 자연과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두뇌과학(신경생리학), 인지심리학, 인공지능은 전례 없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중요한 철학적 함축을 갖는 갖가지 실험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 실험들은 철학적 반성을 요구하며, 철학자들은 그 작업에 기꺼이 참여하고 있다. 첨단 과학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본성,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를 철학적으로 반성하는 심리철학은 오랫동안 우리의 관심거리로 남을 것이며, 지금이야말로 심리철학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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