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에는 ‘나주곰탕’이 있다. 맑은 고깃국물에다 토렴한 밥을 말아 뜨끈하게 낸다. 맛도 맛이지만, 숭덩숭덩 썰어 푸짐하게 넣은 고기가 입안을 가득 채우는 만족감이 으뜸이다. 곰탕보다 더 이름난 것이 ‘영산포 홍어’다. 홍어 전문식당이 늘어선 나주 영산포 홍어 거리는, 쿰쿰하면서 알싸한 ‘삭은 홍어’ 맛의 표준을 정해주는 기준점 같은 곳이다. 상다리가 휠 듯 차려 내는 해남 한정식의 진하고 깊은 맛도 어찌 빠질 수 있을까. 바다가 차가워지면서 갓 건져 올린 탱글탱글한 완도 전복은 그냥 썰어내도, 불에 구워내도, 죽을 끓여도 최고의 맛을 낸다. 나주에서 해남으로, 그리고 완도로…. 13번 국도를 타고 남행하면서 남도에서 맛으로는 빠지지 않는 고장을 차례로 들렀다. 여행의 동선을 음식이 결정하는 때가 많지만, 꼭 무거운 음식만 여행을 이끄는 건 아니다. 지역마다 특산물로 만든 가벼운 디저트 혹은 주전부리도 있다. 오늘은 남도의 내로라하는 대표 맛과 잘 어울리는 가벼운 음식을 뒤져가며 얘기해보자. 이른바 남녘으로 떠나는 ‘디저트 로드’다. 달콤한 맛도 맛이지만, 찻잔을 앞에 놓은 앉은 곳의 분위기도, 여행의 두근거림도, 마주 앉은 동행과의 대화도 다 디저트 안에 녹아 들어가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부터의 얘기는 ‘먹는 것’에 대한 게 아니라 여행 중 ‘쉼표를 찍듯 멈춰가는 곳’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사진 위부터 나주 ‘브레드 158’의 나주배 쿠키. ‘브레드 158’의 배 타르트와 배 생과일 에이드. 적산가옥을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며내 랜드마크가 된 39-17 마중의 카페 건물. 나주 배로 만든 음료와 디저트를 맛보는 ‘나주 배 한 상’ 메뉴가 있다. # 나주 佛 피낭시에 딴 ‘배낭시에’ 기발 고택룸부터 드들강 품은 카페도 나주의 특산물은 ‘배’다. 나주가 배로 명성을 얻게 된 건, 배의 생육주기와 강수량, 기온이 딱 맞아서다. 나주 배가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은 건 일제강점기던 1929년에 개최된 조선 박람회에서 나주 배가 수상을 하면서부터. 90년이 넘는 명성에도 그동안 배로 만든 가공식품은 배즙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배를 앞세운 새로운 디저트가 나주에 속속 등장했다. 그 대표가 바로 ‘배낭시에’다. ‘배낭시에’는 나주 영산포의 베이커리 카페 ‘브레드158’에서 만든다. 프랑스의 전통 빵 ‘피낭시에’를 나주의 특산물 배로 조려낸 잼을 얹고 구워내 ‘배로 만든 피낭시에’란 뜻으로 ‘배낭시에’라 이름 붙였다. 피낭시에는 프랑스어로 ‘금융’이란 뜻인데, 증권거래소 인근 제과점 주인이 손님 취향을 고려해 금괴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브레드 158’에는 시그니처 메뉴로 꼽히는 배낭시에 외에도 나주 배 스콘, 나주 배 쿠키, 배 타르트 등이 있다. 과육이 서걱서걱 느껴지는 음료 배 에이드도 있다. 배낭시에는 촉촉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배 스콘은 입안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질감이 인상적이다. 재료도 훌륭하다. 나주 배의 품질은 말할 것도 없고, 버터는 뉴질랜드산, 설탕은 비정제 사탕수수로 만든 것을, 아몬드는 캘리포니아산을 쓴다. ‘브레드 158’의 배낭시에가 나주 디저트의 ‘최신 버전’이긴 하지만, 사실 나주에서 가장 이름난 디저트 카페를 꼽으라면 단연 ‘39-17 마중’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숫자를 이름으로 삼았는데, 브레드 158은 ‘영산포로 158’이란 주소의 번지수를 딴 것. 나주의 의병이자 지주의 가문 고택을 사들여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해 문을 연 ‘39-17 마중’의 ‘39-17’은 고택이 지어진 1939년의 정신을 2017년에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지은 이름이다. ‘39-17 마중’은 네 채의 고택과 너른 마당으로 이뤄져 있는데, 적산가옥 특유의 분위기와 감각적인 현대의 마감이 뒤섞여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카페는 나주 향교와 담 하나를 두고 이웃한 곡식 창고를 리모델링한 건물에 있다. 카페 메뉴 중 눈길을 끄는 게 ‘나주 배 한 상’이다. ‘한 상’이란 이름처럼, 배로 만든 음료와 배 양갱, 배 한과 등을 소반에 차려낸다. 나주 배 한 상의 가격은 2만5000원. 2인용이라고는 해도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한옥 고택 프라이빗룸을 독점하고 방석을 깔고 앉아 밖을 내다보며 차와 다과를 즐기는 걸 생각하면 만족도가 높다. 코로나 와중에도 나주에는 곳곳에 매력적인 카페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그중에서도 눈길이 가는 곳은 남평의 드들강변이다. 나주에는 영산강이 있고, 그 강에 합류하는 지류 지석강이 있다. 지석강의 백미는 화순 능주에서 나주 남평까지 4㎞ 구간. 이 물길에는 따로 ‘드들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시작되는 노래의 곡조가 이곳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드들강변에 디저트 카페 ‘에비뉴 449’가 있다. 상호의 숫자 역시 ‘지석로 449번지’의 지번에서 따왔다. 이곳은 그야말로 드들강의 감성적인 풍경을 창 가득 담고 있다. 차창이 액자가 돼 가둔 강 풍경은 말 그대로 ‘그림’이다. 커피를 비롯한 다양한 음료와 함께 샌드위치와 케이크류 등을 내는데, 손수 만들어 자랑스럽게 내놓는 디저트가 티라미수와 바스크 치즈케이크다. 남평읍의 강변에는 카페 ‘강물 위에 쓴 시’가 있다. 광주 출신의 시인이 운영하는 이 카페는 커피 향보다는 문향(文香)이 더 짙다. 강변의 카페는 무료할 정도로 고즈넉한데 카페 2층의 책꽂이에서 시집을 꺼내 들고 햇볕이 환한 창가 자리에 앉으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누릴 수 있다. 카페는 ‘여행자 플랫폼’ 역할도 하고 있어 여행 정보도 얻어갈 수 있다. 나주에서 요즘 가장 핫한 카페는 ‘GGT POT’이다. 암호 같은 상호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싶었는데, ‘글로리 깅코 티 폿(GLORY GINKGO TEA POT)’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란다. 직역하면 ‘영광의 은행나무 차 주전자’다. ‘그냥 그 뜻 그대로’라는 게 카페 주인의 설명. 이곳의 매력은 단연 은행나무다. 본래 이곳은 광주의 소아과병원 의사가 사들여 50년 넘게 가꾸며 매실 농장 겸 별장으로 쓰던 곳. 은행나무는 울타리로 심었다. 건강문제로 관리가 어려워지자 건설업을 하던 이웃에게 팔았고, 그걸 넘겨받은 이가 8만3000여 평에 이르는 공간을 은행나무수목원으로 단장, 카페를 지었다. 은행잎이 푸른 여름에도, 단풍으로 물든 가을에도 좋지만, 다 떨어진 은행잎이 노란 카펫처럼 깔린 이즈음의 정취도 훌륭하다. 나주 금성산 아래 쇠락한 변두리 유원지 느낌의 작은 마을 경현동에는 평범한 외딴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레트로 카페 ‘미스 박 커피’가 있다. SNS에 최적화된 ‘인스타 감성’이 돋보이는 집이다. 낡은 양옥집 안에는 유럽풍의 앤티크 소품 등으로 가득하다. 상호의 ‘미스 박’은 누구일까. 카페 대표는 ‘우리 어머니’라고 했다. 뭐 커피를 그리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란다. 카페 전반에서 느껴지는 건 이런 ‘맥락 없음’이다. # 해남 해남 쌀로 만든 쫄깃한 고구마빵 빵 맛본 이들 고구마 사갈 정도 해남에 가면 어디서든 받아드는 밥상에 남도 음식의 진한 맛이 배어 있다. 같은 남도 음식이어도 맛으로 해남의 밥상을 가려낼 수 있을 만큼 무겁고 깊은 특유의 맛이다. 최근 해남에도 ‘디저트’가 자리 잡아가고 있다. 특산물을 가공해 만든 디저트가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대체 여기서 장사가 될까 싶은 시골 한복판에 세련되고 감각적인 카페도 하나둘 들어서고 있다. 다양해져 가는 여행지의 모습이 여행자는 반갑다. 여행자들이 땅끝 해남에 가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다. 빵집 ‘피낭시에’다. 해남읍 한가운데 외벽을 파란색으로 칠한 프랑스풍의 건물에 피낭시에가 있다. 16년 전 설탕 공예가이자 제빵사 남편의 요양을 위해 해남에 내려온 이현미(51) 씨가 운영하는 빵집이다. 고구마를 닮은 빵은 자색고구마 분말까지 뿌려 진짜 고구마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감쪽같다. 해남산 쌀로 만든 쫄깃한 빵에다가 달짝지근하게 쪄낸 해남산 고구마를 앙금으로 넣고 구워낸다. 피낭시에에는 고구마빵만 있는 게 아니다. 고구마 타르트, 고구마 스콘, 고구마 콤부차도 있다. 특산물 고구마의 명성에 착안해 고구마빵을 만들었지만, 요즘에는 거꾸로 고구마가 빵의 인기에 힘입는다. 해남고구마의 명성을 믿고 고구마빵을 사가던 이들이, 이제는 거꾸로 고구마빵을 먹어보고 나서 해남 고구마를 사 들고 간다는 얘기다. 해남에서 고구마빵이 인기를 얻자, 유사품이 등장했다. ‘감자빵’이다. 해남에서는 감자 재배도 성한데, 초여름에 나는 수미 품종의 감자가 특히 이름났다. 감자빵은 고구마빵과 마찬가지로 감자모양으로 빚어 감자를 소로 넣어 만든 빵이다. 디저트 카페 ‘다미당’에서 감자빵을 판다. 다미당의 감자빵 역시 밭에서 막 캐낸 감자를 빼닮았다. 감자빵에 이어 다미당이 최근에 개발한 게 밤빵이다. 밤 모양을 빼닮은 건 아니지만, 달콤한 밤 맛이 매력적이다. 해남에는 디저트 카페가 하나둘 생겨나는 중이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해남 송지면의 공방을 겸한 카페 ‘함박꽃’이다. 이 카페는 의외다. 우선 카페가 관광객들의 발길이라고는 전혀 닿지 않는 시골 마을 한복판에 있다는 것도, 카페의 외양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온실 느낌의 철조건물이라는 점도 그렇다. 카페는 제주에서 평생 해양경찰로 재직하다가 은퇴 뒤에 돌아온 아버지가 고향 집 마당에다 차린 것. 장성한 아들은 바리스타로 커피를 만들고, 부인은 카페 한쪽에서 프랑스자수와 한지공예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카페에 앉으면 고향으로 돌아온 가족의 평화로운 생활에 잠시 끼어들어 그 평온을 함께 즐기는 느낌이다. # 완도 전복 통째로 넣은 졸깃한 빵 동남아 휴양지같은 카페 속속 해마다 국제 해조류박람회를 개최하면서 김, 미역, 톳 등으로 확장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완도의 특산물은 누가 뭐래도 ‘전복’이다. ‘완도’라고 말하면 마치 자동완성 기능처럼 ‘전복’이 뒤따라 나올 정도다. 전복에 대한 지배력이 강력한 것은 강점이지만, 그게 너무 강해 완도를 다른 특산물과 연결하기 어렵다는 건 단점이다. 완도에 가면 전복 외에 딱히 차별적인 먹거리를 찾지 못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전복을 넣은 ‘장보고빵’은 말 그대로 혁신이다. 전복을 좀 잘라 넣거나 재료에 배합한 정도가 아니라, 제법 굵은 전복 한 마리를 통째로 넣어 구웠다. 바다 것, 그것도 어패류를 빵에 넣는다니…. 고개부터 젓는 이들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 맛은 상상과는 사뭇 다르다. 마들렌과 유사한 식감의 빵 위에 얹은 전복은 부드럽고 졸깃하고 고소하다. 다른 질감인 전복은 빵과 의외로 잘 어울린다. 장보고빵의 맛은 판매량으로도 증명된다. 전복을 넣어 만든 빵이니 가격이 비싸다. 갓난아이 주먹만 한 빵이 5500원. 그게 주말이면 1000개가 넘게 팔리기도 한다. 관광객이 호기심으로만 사 먹는 건 아니다. 장보고 빵을 사 먹는 10명 중 4명이 완도 사람이다. 전복빵은 완도의 베이커리 카페 ‘달스윗’에서 만들어 판다. 장보고빵을 만든 이는 제과제빵보다 커피에 능한 바리스타 출신. 대학 호텔조리학과를 졸업하고 도시에서 바리스타 일을 하다가, 2011년 카페를 낸 누나를 도와주러 고향 완도에 왔다가 장보고빵을 만들었다. 천안의 호두과자나, 경주의 황남빵, 안흥의 찐빵처럼 ‘완도를 대표할 빵’을 구상하다가 나온 빵이다.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만든 장보고 빵 인기의 바탕에는 SNS 시대의 코드가 있다. 완도에서 전복으로 만드는 건 빵만이 아니다. 완주 상설시장에는 ‘전복 호떡’이 있다. 시장의 ‘완도호떡사랑’은 즉석에서 잘게 썰어낸 전복과 치즈를 반죽 안에 넣고 그 자리에서 호떡을 구워낸다. 호떡 반죽을 하면서 완도 특산물인 비파, 미역귀, 톳, 다시마 등을 섞었다는 설명이다. 완도에는 이즈음 저마다 다른 콘셉트의 카페가 속속 문을 열기 시작했다. 기왕의 완도에서 바닷가 카페로 처음 손꼽혔던 곳이 카페 ‘욜로’다. 완도에서 연도교로 건너가는 섬 신지도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곳인데, 야외 수영장이 있는 펜션에 딸린 곳이어서 휴양지의 느낌이 물씬 느껴진다. 완도읍을 관통하는 대로인 장보고 대로변에 있는 ‘완도네시아’는 작명부터가 눈길을 끄는 카페다. 게스트하우스와 천연비누 공방 등도 함께 운영하는데, 카페에서는 직접 구워낸 머랭 쿠키와 에그타르트, 스콘, 피칸파이 등의 디저트를 판다. 동남아휴양지 느낌의 편안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인근의 ‘ATR’는 온통 화이트톤으로 내부를 마무리해 감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카페다. ATR는 ‘기록할 사월(April to record)’의 줄임말이라는데, 4월에 무슨 일을 기억하자는 것일까. 카페대표의 대답은 ‘뜻밖에도 내 생일…’이라는 것이었다. 바리스타가 섬세하게 취향을 묻고 핸드드립 커피를 내준다. 완도의 관광명소인 구계등 인근의 펜션에 딸린 카페 ‘바하’도 빼놓을 수 없다. 바하는 ‘바닷가에서 하루’의 줄임말이다. 카페 옆에는 뜻밖에도 미용실이 딸려 있고 드레스도 걸려 있다. 투숙객들이 차와 디저트를 즐기며 갖춰놓은 드레스 등을 입고 잘 꾸며놓은 낭만적인 정원에서 기념촬영을 하라는 배려다. ■ 해남서 만난 레트로풍 경양식집 “해남을 돌며 디저트 카페를 찾다가 해남읍에서 뜻밖에 샐러드 바가 있는 괜찮은 경양식집 ‘브뤼셀’을 찾아냈다. 경양식집은 더없이 진지하지만, 도시에서 온 관광객에게는 분위기며 음식이 의도적인 ‘레트로’ 연출로 받아들여진다. 20∼30년 전쯤의 추억을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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