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 정상으로 향하는 목조 덱에 조성해 놓은 전망대. 여기 서서 고개를 들면 첩첩한 지리 능선이, 고개를 숙이면 지리산의 발치를 적시며 흘러가는 섬진강의 물굽이가 바라다보인다. 장엄한 일출을 기대했지만, 이날은 아침 해가 한 뼘쯤 떠오른 뒤에야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
지리산 최고 경관으로 꼽히는 ‘노고단’ 산책하듯 어슬렁 성삼재 주차장서 1시간쯤 오르면 해발 1507m 정상 35만여평 고원 구릉서 일출 감상… 끝없는 연봉 펼쳐져 천왕봉서 1000년 넘게 소원 받아줬다는 산신 ‘성모 석상’ 지금은 중산리 초라한 절집 천왕사에 모셔져 있어 고통스러웠던 한 해 끝자락… “모두 무고하기를” 기도 돌이켜보면 참으로 지긋지긋한 한 해였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연초부터 발목을 잡고 한 해의 끝까지 따라왔습니다. 올해가 보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서해안 어디쯤에서 해 지는 풍경 아래 한 해를 보내는 감상과 소회를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올해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다 지쳐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감염병의 재확산으로 또다시 길고 어두운 터널의 입구에 들어섰으니 말입니다. 조마조마하며 보낸 한 해가 너무 지긋지긋해서일까요. 지나간 시간을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즐거운 일도, 기념해야 할 일도 왜 없었겠습니까만, 올 한 해는 감염병이 짓누르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다 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넓은 품의 지리산이었습니다. 저무는 해보다, 뜨는 해를 보고 싶었습니다. 고통스러운 날들이 너무 오래 계속돼서 ‘희망찬 새해’라 쓸 수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 위로받고 싶다면…지리산
지치고 힘든 마음을 위로받고 싶다면 ‘지리산’이다. 지리산이야말로 깊고도 넓은 품을 가진 ‘모성의 산’이다. 지리산에서 가장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은 노고단(1507m)이다. 노고단이 ‘쉬운 코스’가 된 건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 지리산 횡단도로(지방도 861번)가 열리면서부터다. 이 도로를 타면 굽이굽이 산자락을 타고 해발 1102m 성삼재까지 가뿐하게 오를 수 있다. 성삼재 주차장에서 신발 끈을 묶고 출발하면 노고단 정상까지는 1시간이 채 안 걸린다. 주차장에서 2.6㎞를 걸어 고도를 400m만 올리면 노고단 정상에 닿는 것이다. 겨울산행의 준비물은 빠짐없이 챙겨야 하지만, 이 정도라면 굳이 산행이라 할 것도 없다. 지리산 동쪽 끝이 천왕봉이라면 서쪽 끝은 노고단이다. 동서로 100리의 거리를 두고 천왕봉과 노고단이 마주 보고 있다. 가기가 쉬워지면서 만만해진 탓에 몰라봐서 그렇지, 노고단은 오래전부터 주봉인 천왕봉, 그리고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3대 봉우리에 꼽혔다. 노고단에 가려면 저 아래 구례의 화엄사부터 거칠고 가파른 산길을 네댓 시간 걸어 올라가야 했던 시절, 노고단은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그때 노고단은 지리산에서 최고의 경치로 꼽혔다. 1972년에 정해진 ‘지리산 10경’ 중 첫 번째인 제1경이 ‘노고단 운해’였으니, 지리산 경관의 중심이 바로 노고단이었던 셈이다. 붉게 타오르는 가을의 피아골 단풍도 노고단 운해를 이기지 못했고, 화려한 세석의 철쭉도 제5경에 머물렀다. 천왕봉 일출은 제8경으로 밀려나 말석을 겨우 면했다. 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지리산 최고 경관인 노고단을 뒷짐 지고서 산책하듯 다녀올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큰 혜택인 것인지…. 지리산 횡단도로를 놓고 환경 훼손 논란이 있고, 다시 길을 닫아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노고단을 가깝게 가져다준 것만큼은 사실이다. # 지리산의 전설, 구례 연하반
우 씨를 비롯한 구례중학교 교사와 지역 주민을 주축으로 구성된 연하반 산악회가 출범한 건 1955년 5월 5일. 정부가 빨치산 완전 토벌을 선언한 게 그달 23일이었으니 빨치산 토벌보다 산악회 결성이 앞선다. 빨치산 토벌로 지리산 입산 금지가 풀리자 지리산을 드나들던 연하반은 곧 지리산 종주 등반로 개척에 나섰다. 1957년 첫 시도는 안개로 길을 잃으면서 실패했고, 이듬해 재도전에서 연하반 회원들은 4박 5일 만에 화엄사에서 노고단에 올라 천왕봉까지 가서 중산리로 내려오는 종주 코스를 개척했다. 지금의 지리산 종주 코스는 연하반이 그때 개척한 그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리산 등산 지도를 처음 만든 것도 연하반이었다. 1962년 5월 종주 등반을 하면서 코스별로 시간을 기록하고, 보폭을 60㎝로 정해 걸음 수를 계산해 거리를 쟀다. 이렇게 순전히 발로 만든 ‘지리산 등산안내도’를 등사기로 밀어 무료로 배포했다. 이듬해에는 종주 코스에 이정표와 안내 리본을 매달았고, 지리산 등산지도 1000장을 제작해 각 산악단체에 배부했다. 그때까지 이름이 없었던 봉우리인 비목령, 노루목, 삼도봉, 덕평봉, 칠선봉, 연하봉 등의 이름을 지어 등반 지도에 표시한 것도 연하반의 공로였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다들 ‘그저 지리산이 좋아서’ 했던 일이다. 연하반의 가장 혁혁한 공로라면 두말할 것 없이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이끌어 낸 것이다. 지리산에서 발생하던 대규모 도벌을 막고자 동분서주하던 연하반은 이화여대 교수의 국립공원 제도 도입 제안에 착안해 지역 주민들을 설득해 국립공원 지정을 이뤄냈다. 제1호 국립공원인 지리산국립공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지역 산악회가 지리산 보호 차원을 넘어 우리나라에 국립공원이란 제도 도입을 만들어낸 셈이었다. # 노고단에 올라 일출을 기다리다 성삼재 휴게소를 출발한 건 가는 초승달이 뜬 캄캄한 새벽이었다. 새벽 별빛을 생각했는데, 밤하늘에 구름이 많았다. 맑고 눈부신 일출을 기대했는데…. 생각처럼 되는 일이 없다. 랜턴 하나에 의지해서 노고단을 향해 출발했다. 탐방코스는 차로나 다름없다. 넓고 부드럽다. 숨 한 번 차지 않는 순하디순한 길이다. 이따금 질러가는 경사구간이 있었지만 그래 봐야 동네 뒷산 수준을 넘지 않는다. 타박타박 내 발소리와 함께 걷는데, 어둡고 적막한 겨울 숲속에서 이따금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 소리가 들렸다. 길이 편하니 자연스럽게 생각이 끼어든다. 여느 해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세밑과 새해를 맞는 자세를 생각한다. 창궐한 감염병으로 타인에 대한 공포로 마스크를 쓰고 살아온 한 해는, 돌이켜 생각하는 것도 내키지 않을 정도로 지긋지긋했다. 앞으로도 별다르지 않은 날들이 한동안 계속될 것이니 보름도 채 안 남은 새해에 대한 기대나 설렘도 없다.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그걸 희망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 노고단은 기도하는 곳이다. 노고단은 봉(峰)이나 산(山)이 아니라, 제(祭)를 지내는 ‘단(壇)’의 이름을 갖고 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걸어보면 그걸 실감하게 된다. 노고단 정상은 35만여 평의 드넓은 고원 구릉 위에 솟아 있다. 지리산 서쪽 끝인 노고단 정상에서 보면 해가 솟는 동쪽으로 지리 연봉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곳에 서보면 노고단이 지리산 산신에게 제를 지내는 제단의 역할을 한 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노고단대피소는 코로나19로 아예 출입문을 모두 닫아걸었다. 찬바람을 피할 곳은 화장실뿐이다. 노고단 일대가 일출 직전의 푸른 기운으로 가득 찼다. 대기 중의 수분이 나뭇가지마다 얼어붙어 피어난 서리꽃이 환했다. 노고단 정상으로 오르는 나무 덱에도 성에가 끼어 마치 금속처럼 빛났다. 노고단 정상 직전이 섬진강 전망대다. 해 뜨기 전의 여명 속에서 흐릿하게 섬진강 물줄기가 보였다. 지리산 10경의 제10경이 ‘섬진청류’다. 그게 바로 여기서 본 섬진강 물줄기를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노고단에서는 지리산 10경 중 두 개를 볼 수 있는 셈이다. 노고단 정상에 올라 돌탑 앞에 서서 일출을 기다렸다. 지리 능선 위로 뜨겁게 솟는 장엄한 해를 기대했는데, 두꺼운 구름 사이로 미지근한 해가 떴다. 반야봉과 삼도봉만 모습을 드러냈을 뿐 중봉과 촛대봉, 천왕봉은 탁한 대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실망스러웠지만 매사가 어찌 뜻대로만 될까. 짙은 구름에 가려 해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새날은 어김없이 시작되는 법. 마찬가지로 기다리지 않는다 해도 봄은 온다. 다시 시작되는 한 해에 우리가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거기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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