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가모니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조선 중기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인 ‘성모암’은 평화로운 에너지가 흐른다. photo 조용헌 |
고승의 묘가 아니다. 진묵대사를 낳은 어머니 묘를 모시고 있는 이 암자를 성모암(聖母庵)이라고 한다. 전라북도 일대에서는 이 진묵대사 어머니 묘를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라고 불러왔다. 자손이 없어도 천년 동안이나 이 묘 앞에 향불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과연 그 예언대로 400년이 넘게 이 묘 앞에는 향불이 피워져 있다.
그런데 성모암은 그 터가 너무 평범하게 생겼다.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 산세가 웅장하게 볼 만한 곳도 아니다. 그야말로 만경(萬頃)평야 한가운데 있는 조그만 암자이다. 김제·만경평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평야이다. 경상도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곳 만경평야의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보면서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한다. “어떻게 이리 뻥 뚫린 들판이 있단 말인가!” 호쾌한 풍광이다. 특히 가을 나락이 익어갈 무렵의 황금색 만경 들판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풍요와 호탕함을 느끼게 해주는 풍광이다. 중국의 ‘장자’ 고향이 이처럼 넓은 들판이 있는 곳이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들판에서는 호방한 생각을 하는 사상가가 배출된다. 더군다나 이 만경 들판에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작은 동산 같은 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들판도 아니고 산도 아닌 동산 높이다.
성모암은 이 비산비야의 얕은 둔덕인위앙산에 자리 잡고 있으니 언뜻 보아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곳에 명당이 있을 줄은 보통 사람이 짐작할 수 없다. 너무나 심한 평범함이라고나 할까. 완벽한 위장이다. 어찌 보면 아주 시원찮은 곳이다. 이러한 비산비야에 대명당이 있다고 한다. 대명당은 대인과 같다. 대인은 보통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도 없고 그 마음 쓰는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바둑 4급이 9단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 것인가! 전성기의 이창호 바둑이 바로 이러한 평범한 수를 쓰는 기풍이었다. 우리나라 사찰의 명당자리를 속속 꿰고 있는 혜담(71)스님이 이렇게 권했다. “조 선생, 이 성모암 자리를 꼭 한번 가보시오. 아직도 그 묫자리에서 불기운 같은 에너지가 샘솟고 있어요. 그 묘에 가서 참배하면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과연 성모암에 들러 묘 주변에서 1시간 동안 머물러 보니 다가오는 에너지가 범상치 않다. 아주 평화로운 에너지다. 열 받은 사람도 그 열을 가라앉힐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온다.
이 묫자리를 잡은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진묵대사(震黙大師·1562~1633)이다. 출가해서 불교승려가 되었으니 제사를 지내줄 자손이 나올 수 없고, 그 대신에 이런 천년향화지지를 잡아서 많은 사람이 어머니에게 꽃과 향을 올리도록 조치한 셈이다. 고승이 지녔던 불교적 신통력과, 아무리 출가를 했어도 남아 있는 유교적인 효심이 결합된 사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묵대사는 어느 정도의 도력을 지녔기에 천년 동안 향불을 올리는 터를 보는 안목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요즘 돈 많이 들여 명당자리를 잡아도 10년도 안 돼서 그 앞에 아파트단지, 또는 고속도로가 생기거나 아니면 터널이 뚫려서 터가 망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성모암의 묘는 현재까지 400년간 그 효과가 지속되고 있다. 대단한 일 아닌가. 어떻게 이러한 비산비야에 대명당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현재 성모암의 주지인 묵암스님이 들려준 전설은 이렇다. 진묵대사가 말년에 전북 완주군에 있는 봉서사(鳳棲寺)에서 수도할 때다. 대사가 봉서사 나한전(羅漢殿)에 100일 기도를 드리러 가면서 100일 동안은 문을 열지 말라고 주지에게 부탁하고 들어갔다. 문을 열지 말라고 했지만 주지는 하도 궁금해서 98일째 그만 나한전의 문을 열고 스님이 어떻게 하고 계신가를 보았다. 스님이 미동도 없이 앉아 계신 게 아닌가.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고 하니 대사가 죽은 줄 알고 그만 화장해 버리고 말았다. 이때 대사는 법신(法身)이 밖으로 빠져나가 있는 중이었다. 죽은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유체이탈 중이었던 것이다. 그걸 몰랐던 봉서사 주지가 대사의 육신을 불로 태워 버리고 난 이후에 대사가 자신의 육신으로 되돌아가려고 보니 몸이 없어졌다. 몸이 없어지면 돌아갈 집이 없어진 셈이다. 달마대사에게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대사의 법신이 여기저기 나투(現)시는데, 그 나투시는 곳 중의 한 군데가 바로 성모암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래서 여기 오는 신도들이 기도를 많이 하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것이다.
진묵대사는 1562년생이다. 임진왜란 시작이 1592년이다. 대사가 30세 무렵에 임진왜란을 만났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에 30세이면 이미 자기의 사상체계를 갖출 나이다. 하물며 어렸을 때부터 신장이 따라다니면서 시중을 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진묵대사 같으면 이 시기에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앞으로의 국운이 전개되는 방향을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군에 의하여 국토가 피비린내를 풍기는 상황에서 당대의 도인 진묵은 어떤 처신을 하였을까. 당대의 어른 스님이었던 서산대사는 승병을 지휘하였다. 전쟁에 적극 가담한 것이다. 그러나 진묵이 전투에 적극 가담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왜군과 싸움하는 것보다 불교의 불살생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일까.
나라를 구할 것인가, 불상생을 지킬 것인가
진묵은 후일 자신의 계보를 정할 때 “내가 굳이 계보를 대자면 서산의 맥이지만, 서산은 명리승(名利僧)이다”라고 언급한다. 당대의 서산대사를 명리승이라고 냉정하게 규정한 것이다. 명리승이라면 명리를 탐하는 승려라는 뜻 아닌가. 이건 엄청난 비판이다. 한국 불교계에서 누가 감히 서산대사를 명리승이라고 못 박을 수 있단 말인가. 반대로 승병으로 전쟁에 참가하였던 참여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진묵은 비겁하다고 매도당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목숨 걸고 싸우는데 너는 산속에서 편안하게 자기 목숨 지키고 있는 거 아니냐?” 1980년대 독재정권과 싸울 때도 이러한 논쟁들이 있었다. 진묵은 조선왕조가 망하고 흥하는 것보다도 불살생과 같은 불교적 가치, 현세의 살생 너머에 포진하고 있는 초월적 정신세계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불교 전통에는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의 흐름도 있다. 출가 승려는 이미 세속을 떠났으므로 세속의 권력자인 국왕에게도 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출세간의 승려는 세간과 거리를 둔다는 입장이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는 서산대사의 입장만 옳다고 생각해온 경향이 있고, 참여를 안 한 쪽에 대해서는 비겁하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그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불교의 업감연기론(業感緣起論)에 의하면 중생의 삶은 카르마(業)에 의하며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고, 이 업이 환생을 거듭하면서 계속 이어진다는 관점이다. 업감에 의한 계속되는 연기를 끊으려면 한쪽이 쉬는 수밖에 없다. 이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의 우주관과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지면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진묵대사가 만경 화포리 태생이고 그가 수도한 사찰들이 대개 호남권에 있었기 때문에 전라남북도에는 진묵에 관한 민간 전설들이 전해진다. 필자가 10대 후반 시절에 들었던 진묵에 대한 전설은 삼례(三禮)라는 지명과도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 때 호남에 들어왔던 왜군들은 호남대로를 따라 삼례에 집결하였다. 삼례는 전라 우도와 좌도가 모이는 합류 지점이다. 삼례에서 북쪽으로 북진하려고 보니까 그 20~30리 앞에 봉서사가 있었고, 봉서사 일대에서는 하늘로 서기(瑞氣)가 뻗치고 있었다. 당시 왜군들도 천기(天氣)를 보는 술사(術士)를 데리고 다녔다. 전투에서 군대가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진을 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왜군의 술사가 “저쪽으로 진군하면 안 된다. 서기가 하늘로 뻗치고 있다는 것은 저쪽에 큰 성인이 머무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진묵대사가 머무르고 있던 봉서사 쪽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돌아갔다. 그 대신에 삼례에서 왜장이 봉서사 쪽을 보고 큰 절을 세 번 올렸다고 해서 ‘삼례(三禮)’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구전이다.
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을 낸다
진묵대사는 ‘소석가(小釋迦)’라고 불릴 만큼 석가모니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그만큼 신통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그 사람을 대도인으로 존중하는 이유는 신통력을 눈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통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해져 온다. 아들을 못 낳은 어떤 여자 신도가 진묵스님에게 와서 “아들을 하나 갖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진묵은 “곡차를 가지고 오라”고 답변하였다. 스님이 무슨 술을 좋아한단 말인가 하고 불만을 품었지만 아들 낳을 욕심으로 그 여자 보살은 술을 가지고 오긴 왔다. 바가지 같은 그릇에 술을 가득 담았는데, 그 술 가운데에 쌀겨를 하나 띄워서 가지고 왔다. 쌀겨를 보고도 이걸 걸러내지 않고 한 입에 그대로 들이켠 진묵은 “내가 보살에게 아들을 하나 점지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술을 먹고 500 나한이 모셔진 나한전에 들어갔다. 진묵대사는 나한들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누가 저 보살의 뱃속으로 들어가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서 1년 후에 그 여자 신도는 과연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아들 눈을 보니까 쌀겨 같은 점이 눈동자에 박혀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 진묵이 길을 가는데 어떤 요염한 여인이 유혹하였다. 그 여인의 유혹에 선선히 응하였다. 진묵이 그 여인을 품에 안고 있었는데 마침 그 옆에 감나무에서 잘 익은 홍시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그 홍시를 본 진묵은 품고 있던 여인을 팽개쳐 버리고 그 감을 주우러 갔다는 일화이다.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경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뜻이다. 그 여인이 오라고 하니까 그냥 간 것이고, 불그스레한 홍시가 떨어지니까 여인의 품을 벗어나 감을 쫓아간 것이다. 이 진묵대사가 잡은 어머니의 묫자리가 바로 성모암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