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발처럼 피어난 제주 동백, 동화 속 장면 같아
협곡·덤불 지나… 다산이 소풍 다닌 강진 용혈로‘모험’
더스테이힐링파크·쁘띠프랑스… 가평서 만난 유럽
여느때보다 화려했던, 오대산·설악산 절정의 단풍
차박·랜선 관광·소리 여행… 일상의 재발견
‘길’멈추자 더 간절해진 자연속 힐링… 내년엔 떠나길
2020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참으로 길고 길었던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를 맞는다 해도 어두운 터널의 끝은 아직 멀었습니다.
시련과 고통은 얼마나 더 계속될까요.
새해의 새날을 기대로만 열 수 없는 이유입니다.
문화일보 Culture & Life가 다녀온 올 한 해의 여정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여행이 멈춘 코로나 시대에 여행을 얘기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 해 동안 다녀온 다섯 곳,
혹은 다섯 가지 여행을 뽑아봤습니다.
돌이켜 보면 생전 처음 맞닥뜨린 감염병의 시대에,
여행의 방식을 고민했던 한 해였습니다.
세밑에 기원합니다. 새해에는 부디 여행이 다시 시작되기를….
기대와 두근거림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고,
환대의 마음으로 손님을 맞게 되는 때가 다시 오기를.
그때는 몰랐다… 제주의 애기동백 숲
한 해가 감염병의 공포로 이렇게 끝나게 될 줄은,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신년의 제주에서 만개한 겹꽃잎의 애기동백(산다화)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소나무도, 대나무도 겨울에 푸르지만, 동백은 꽃으로 겨울을 견딘다. 혹한의 삭풍에도 환한 꽃을 피워내니 기개로 치자면 한 수 위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제주에는 외래종인 애기동백이 크게 늘었다. 동백의 붉은 색은 이제 겨울 제주의 색이 됐다. 엄동을 이겨 꽃을 피워내는 동백꽃에서 새해, 그러니까 2020년의 소망에 대해 생각했다.
남원읍 위미리의 ‘동백수목원’은 동백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마치 하나하나 꽃다발처럼 화려하게 길러내는 곳. 나무의 절반은 광택 나는 이파리의 초록이고, 나머지 절반이 동백꽃의 빨강이다. 애초에 수목원을 차릴 생각으로 조성한 숲이 아니어서 공간은 넓지 않지만, 40년 수령의 동백나무 숲은 초록과 빨강이 어우러져 동화 같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위미리 동백에 견줄 만한 곳이 신흥2리의 동백숲이다. 신흥2리 마을 중심에는 300년 된 동백숲이 있다. 오래된 동백나무와 팽나무, 참식나무 등 난대림 수종이 어우러진 숲은 한겨울에도 초록을 잃지 않는다. 마을 중심의 동백숲은 작지만, 마을 주변에는 지난 2008년부터 2014년까지 7년 동안 새로 심은 3000여 그루의 동백나무들이 일제히 폭죽처럼 꽃을 피워올린다. 더불어 판타지영화 속 비밀의 숲과 같은 경흥농원 주변의 숲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애기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룬 오솔길에 온통 떨군 꽃잎들이 붉은 양탄자처럼 깔린 곳. 미로처럼 이어진 그 오솔길에는 거대한 향나무들이 불꽃 형상으로 자라고 있기도 하다. 이제 다시, 새해를 앞두고 겨울을 이겨 끝내 꽃을 피우는 동백을 생각한다. 위미리와 신흥리에서 다시 동백 꽃소식이 들려오지만, 그 꽃은 예전의 꽃이 아니다. 가서 볼 수 없는 꽃. 우리는 언제쯤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한 그루 나무가 통째로 축하의 꽃다발처럼 피어나는 제주의 동백을 마음 편히 만날 수 있을까.
여행이란 때로는… 전남 강진 용혈
▲ 전남 강진의 덕룡산 아래 용혈. 고려 때 고승 천책과 유배객 다산 정약용의 자취가 새겨져 있는 곳이다. |
전남 강진의 덕룡산 아래 ‘용혈(龍穴)’이 있다. 험준한 산의 바위벼랑 아래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곳. 용혈 아래 고려 때의 고승 천책이 말년에 은거하며 수도했다는 암자가 있었다. 고승의 자취가 흐려진 뒤에 세상에서 잊힌 용혈은 훗날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이 천책이 남긴 책을 읽다가 다시 찾아냈다.
다산은 초당에 머물면서 봄이면 제자들과 함께 용혈로 소풍을 다녀왔다. 덤불에 묻힌 용혈은 다산의 소풍으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산이 용혈을 마음에 두었던 건 경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고, 용혈에 깃들어있는 고승의 수도 정신 혹은, 유장한 문장에 감동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다산이 유배가 끝나고 돌아간 뒤에 용혈은 다시 어둠 속에 묻혔다. 나무뿌리가 숲길을 휘감았고, 입구는 덤불로 뒤덮였다. 그렇게 시간 저편으로 잠긴 용혈은 고전학자 정민 한양대 교수에 의해 다시 꺼내어졌다. 다산과 제자가 쓴 용혈과 관련된 문헌을 뒤지고 용혈을 답사해 책 ‘다산과 강진 용혈’을 펴냈다.
800여 년 전 고려 때의 고승 천책에게서, 200여 년 전 유배객 다산으로, 그리고 다시 정 교수로…. 허물어졌으되 잊히지 않은 고려불교의 수도처는 감동적이었다. 여행은 때로 유장한 역사와 매혹적인 인물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이다. 용혈을 찾아가는 여정은 여행이라기보다는 답사, 혹은 모험에 더 가깝다. 신우대 빽빽하게 자라는 좁은 계곡 사이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20분쯤 오르면 무성한 숲 덤불이 나오는데, 거기에 ‘아래 굴’이 있고, 10분쯤 더 걸어 올라가면 바위벽 안쪽으로 진짜 용굴, 용혈이 있다. 용혈에서는 눈보다 마음이다. 800여 년 전 고려 때 세 명의 국사가 이곳에 은거하며 수행하거나 생을 다하고 입적했다. 그리고 200여 년 전 다산이 천책의 향기를 맡고자 해마다 제자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이들의 발걸음을 따라나선 길이 거기에 닿았다. 여행의 다른 스펙트럼을 경험하고 싶은 이들에게 기꺼이 권한다.
북유럽의 이국적인 경관을 모사한 경기 가평 더스테이힐링파크의 ‘와일드가든’. |
유사 해외여행 목적지… 경기 가평
나라 밖으로 한 발짝도 여행할 수 없었던 지난 1년이었다. 갈 수 없는 곳이라면, 그곳을 가고자 하는 욕망은 오히려 더 강해지는 법. 비행기를 타거나 국경을 넘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유사(類似) 해외여행의 목적지를 찾아 나섰던 건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시시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여권도, 환전도 필요 없고, 번거로운 절차나 언어소통 문제도 없이 국내로 떠나는 유사 해외여행은, 진짜 여행이 주지 못하는 뜻밖의 재미도 있다.
유사 해외여행의 목적지로 제안했던 곳은 경기 가평이었다. 가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북유럽의 경관을 감쪽같이 모사한 ‘더스테이힐링파크’다. 우아한 북유럽식 정원과 웬만한 축구장보다 더 큰 카페와 베이커리, 독특한 느낌의 레스토랑, 숲 속에다 지은 소규모 숙소, 파3 9홀 골프장,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숲 속 산책로, 스파와 아쿠아 시설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그 중 이국적이었던 곳이 정원 ‘와일드가든’이었다. 한 눈에도 북유럽풍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정원인데, 정원의 식물뿐만 아니라 시설이며 조경, 색감, 분위기 등이 전체적으로 북유럽을 지향하고 있다. 특히 정원 한쪽에 돌로 지어놓은 채플은 시간의 깊이까지 느껴져 북유럽에서 뜯어온 문화재급 옛 교회당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 설악산에서 단풍색이 곱기로 이름난 천불동의 오련폭포 일대의 모습. 올가을 설악산을 지나간 단풍이 이리도 아름다웠다. |
가평에는 또 프랑스문화마을을 표방하는 ‘쁘띠프랑스’가 있다. 파리 남쪽 오를레앙을 모사한 쁘띠프랑스는 파스텔 톤으로 구현한 프랑스 마을 특유의 분위기에다 동화 ‘어린 왕자’의 모티브를 입혔다. 프랑스에서 뜯어다 지었다는 전통 건축물을 비롯해 건물 하나하나가 다 이국적이지만, 유럽식 건축의 특징인 계단과 광장까지 적절히 배치해 거의 완벽하게 프랑스의 마을을 재현했다.
취재 당시만 해도 쁘띠프랑스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을 모사한 또 하나의 문화마을 ‘피노키오와 다빈치’를 11월 개관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탓에 공사가 늦어지면서 개관 일정이 내년 3월로 미뤄졌다. 지금 이탈리아 마을의 공정은 90% 남짓. 토스카나 지방의 고성과 저택이 쁘띠프랑스 위쪽의 언덕에 모습을 드러냈다. 취향과 기호를 겨냥해 조성된 이국적 공간이, 이렇게 실제적인 욕망의 대체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코로나 시대의 단풍… 오대산·설악산
문 밖 출입마저 어려운 시절. 오대산과 설악산에서 가장 화려한 단풍색을 담고 돌아왔다. 여행금지의 시대에 혹시나 단풍놀이 행락을 충동질하는 게 아닐까 우려돼 단풍 절정의 끄트머리쯤으로 시간을 맞췄다. 기사를 보고 다녀오고자 해도, 이미 단풍이 다 져버린 뒤로 시간을 맞췄으니 ‘의도된 무(無)소용’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영 쓸모없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가 버린 단풍을 사진으로, 또 글로 읽는 것이 어쩌면 여행을 유보한 이들에게 손톱만 한 위안이라도 되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결국, 2020년 가을 설악산과 오대산 단풍 얘기는, 우리가 발이 묶인 사이에 단풍이 얼마나 화려하게 물들면서 지나갔는지에 대한 대리만족의 목격담이었다.
설악산 천불동 단풍의 절정은 오련폭포였다. 폭포 주변의 치솟은 암봉과 기암괴석, 푸른 담(潭)과 소(沼)가 붉고 노란 단풍의 색감 속에 푹 잠겨있었다. 오대산 선재길의 단풍도 여느 해보다 색이 더 선명했다. 가을, 자연의 아름다움이 새삼스러웠다. 천불동 단풍과 선재길 단풍이 예년보다 훨씬 더 고왔다고 느껴졌던 건 여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으리라. 가기 어렵거나 금지된 곳이 늘 더 매력적인 법이니 말이다. 그런 것이 어디 단풍뿐이었을까. 같은 이유로 여행이 금지된 시대의 가을에는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부러웠고, 가지 못하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새해에도 우리는 어둠의 터널 속을 걷겠지만, 그 끝에 빛이 있음을 알고 있다. 흐트러진 일상은 되찾아질 것이며, 관계는 회복될 것이고, 여행의 시작도 그때쯤이리라. 내년 가을쯤이면 당당하게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그때의 단풍은 지난 가을보다 더 선명하고 아름답게 물들 게 틀림없다. 단풍 속에서 걷거나 쉬는 일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알게 된 이후에 비로소 만나는 가을일 것이니 말이다. 아, 내년의 가을은 얼마나 찬란할 것인가.
코로나가 바꾼 여행의 방식
코로나의 시대. 해외로 가는 길은 닫혔으며, 감염 확산 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국내 여행도 환영받지 못했다. 우리 삶을 통째로 바꾼 코로나는, 여행의 방식도 전면적으로 바꿨다. 비대면 비접촉. 여행의 본질은 대면과 접촉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차에서 내리지 않는 드라이브 여행이나 배타적인 공간을 구축하는 캠핑이 궁리 끝에 시도됐다. 경남 남해의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했고, 여수에서 고흥까지 이어지는 섬을 새로 놓인 연륙교와 연도교로 징검다리처럼 딛고 달리기도 했다.
올 한 해 동안 고민했던 건 코로나 시대 여행의 방향이었다. 집 밖으로 아예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이른바 ‘집콕’ 여행을 제안하며 한 권의 책을 소개하기도 했다. 200년 전 출간된 책 ‘내 방 여행하는 법’은 유럽의 한 사상가가 가택연금 중 무료함을 달래고자 자신의 방에 대한 사유를 담은 글을 모아 펴낸 책이다. 당시 저자의 가택연금 상황이나 지금 감염병 확산 우려에 따른 격리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방 안에서 여행이 가능했던 건 여행을 ‘구경’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유’와 ‘발견’의 영역으로 해독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일상에 매몰돼 자신과 주변의 가치에 둔감해진 이들에게 자기가 사는 곳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지루하게 생각했던 평범한 하루 일상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오스트리아관광청이 추천한 뷰 포인트 중 하나인 케테른 주의 피라미덴 코겔. 뵈르트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100m 높이의 목조 전망탑이다. |
코로나 2차 대유행 전에는 해외관광청들이 관광 재개의 기대 속에서 앞다퉈 선보였던 랜선 여행 콘텐츠를 소개하기도 했다. 특히 오스트리아 관광청이 소개한 목가적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조망명소 6곳은 사진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여행지의 사진으로 접근하는 이른바 ‘랜선’ 여행을 넘어서 여행을 ‘소리’로 추억하며 욕망을 달래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와 ‘아삭’ 하고 튀김을 씹는 소리가 음식에 대한 자율감각쾌락반응(ASMR)을 자극하는 것에 착안한 제안이었다.
태국 방콕 카오산 로드의 소음이나 터키 이스탄불 모스크의 기도 소리, 전남 순천 선암사 경내에서 담아온 새소리와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오디오 클립’을 소개했다. 되돌아보면 한 해 내내 여행이 금지된 시대에 손톱만 한 위로와 추억, 혹은 기대와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 ‘여행’을 기다리며
여행을 마음껏 누릴 수 없는 시간은, 역설적으로 여행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해줬다. 여행이 물리적 이동과 욕망의 소비뿐만 아니라, 동행과의 소중한 추억 또는 여행지에서의 따스한 교유를 의미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여행할 수 없는 시간은, 훗날 여행이 허락될 때 우리가 좀 더 나은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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