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영월과 경북 영주 사이에 있는 고치령 정상에 홀로 서 있는 산령각. |
고고학은 땅속에서 유물을 발굴한다. 땅속의 유물을 통해서 고대인의 생활양식을 발견해 내고 추론해 낸다. 고고학 전문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사는 것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한다. 구석기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의 생로병사는 변한 게 없기 때문이다. 1만년 전에도 늙고 병들어 죽고 억울하게도 죽고 생존의 압박에 쪼들려 살았다. 그때라고 편하게 산 것이 아니다. 이 압박과 고통은 지금도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변한 것이라고는 포장지와 디자인뿐이다.
수천 년 전 조상들의 삶이 우리와 비슷하다고 확인하는 순간 거기에서 어떤 안도감이라고나 할까, 그 어떤 항심(恒心)이 발생한다. 현세의 고통을 초월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는 힘을 길러준다. 과거와의 대화에서 우러나는 힘이라 하겠다. 그래서 고고학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학문이다. 고고학에는 유물을 중시하는 학파도 있지만 정신의 고고학도 있다. 정신의 고고학이란? 인간의 정신, 신념체계 내지는 종교신앙의 뿌리를 탐색하는 작업이다. 뿌리를 알아서 뭣하게? 뿌리를 알면 좋은 점이 줄기와 이파리,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열매까지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뿌리의 모양에 따라 줄기와 이파리가 결정된다.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말도 있지만 더 나아가면 ‘뿌리를 보면 안다’가 더 확실하다. 근기(根機)라는 말이 이래서 있다. 근원적인 기틀, 즉 ‘뿌리의 형태 또는 모양새’라는 뜻이다. 그 사람을 평가할 때 ‘근기가 어떠냐’ ‘상근기이다’ ‘하근기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문제는 이 근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뿌리를 눈으로 봐야 하는데, 이게 어렵다는 점이다. 뿌리는 땅속에 묻혀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삽으로 땅을 파보아야 뿌리의 형태가 보인다.
한국 사람의 종교신앙적 뿌리는 무엇인가. 이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정신의 고고학까지 들먹이게 되었다. 결론을 이야기하면 산신령(山神靈) 신앙이다. 한국인의 고유 신앙은 산신령교이다. 대략 1만년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산신령 위에다 시루떡을 쌓았다. 불교가 들어왔고, 유교가 들어왔고, 기독교가 들어왔다. 불교는 들어오면서 기존의 잡다한 토속신앙을 전부 몰아내 버렸다. 몰아내는 와중에서 유일하게 살려둔 것이 산신령이다. 절의 한쪽에다가 조그마하게 산신각을 만들어 놓았다. 흥미로운 점은 부처님 모셔 놓은 대웅전 법당 위에다가 보통 산신각을 두었다. 건물의 이름에 붙는 전각(殿閣)에서 위계를 보면 ‘전(殿)’이 더 높다. 그다음에 ‘각(閣)’이다. 대웅전, 관음전, 문수전, 미륵전 등의 불교 신격의 건물 명칭에는 ‘전’이 붙지만, 산신령은 ‘각’ 자를 붙여서 산신각이다. 토착신앙인 산신신앙의 뿌리가 원체 깊어서 완전히 쫓아낼 수는 없고 절 한쪽에 셋방살이를 들이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대목은 셋방살이의 위치가 법당의 터보다도 더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셋방살이니까 문간 쪽에 자리 잡아야 할 것 아닌가. 대개 산신각은 법당 뒤로 계단을 올라가서 커다란 바위 밑에 있다. 산신각에서 보면 다른 법당 건물들이 아래로 보인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신령의 비중을 의미한다. 절에서 건물을 짓는 불사를 할 때 산신각을 가장 먼저 짓는 것이 순서이다.
왜 대웅전부터 짓지 않고 산신각을 먼저 짓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30년 전쯤 불사를 지휘하던 80대 노장 스님께 필자가 했던 질문이다. “산신이 자기 건물을 먼저 짓지 않으면 굉장히 기분 나빠하지. 산신이 삐딱하게 틀어 버리면 절의 불사가 안 돼요. 산신이 먼저 결재를 해야 절을 짓는 공사가 순조롭게 이어지고, 절을 지어 놓아도 절이 잘돼요. 그러려면 산신각을 제일 높은 지점에 짓고, 다른 건물보다도 먼저 지어 놓아야지. 불사는 산신각부터 시작하는 거여.” 당시 이 말을 듣고 필자는 상당히 놀랐다. 불교 속에 감추어져 있는 산신의 파워를 확인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겉으로는 별 볼일 없는 건물에 모셔져 있는 것 같지만, 내부적으로는 산신 파워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 소백산과 태백산 경계에 있는 고치령 산령각에는 양쪽 산신을 나란히 모셔놓았다.
불교·유교에 숨은 산신
산신각을 새로 신축할 때도 타이밍이 비상하다. 12지 가운데 호랑이 해에 맞춰서 짓는 경우가 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이다. 호랑이는 산신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호랑이 해에 건물을 짓는 게 격에 맞는다고 본다. 그리고 짓는 달도 음력 정월달인 인(寅)월이다. 인(寅)은 호랑이다. 그리고 공사 첫 삽을 뜨는 날짜도 육십갑자 중에서 인일(寅日)에 잡고, 공사 시작하는 시간도 새벽 5시 반쯤인 인시(寅時)에 잡는 모습을 보았다. 연월일시를 모두 인(寅)에 맞춘다. 호랑이 시간대에 맞추는 셈이다.
주술적 파워를 증강시키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방식이다. 터의 좌향(坐向)도 인좌(寅坐)에 놓는다. 인좌는 풍수 패철상으로 놓고 보면 정남쪽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진 방향이다. 남서향을 가리킨다. 그 터의 풍수적인 물형도 복호혈(伏虎穴)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터의 앞발에 해당하는 지점에 산신각 터를 잡고, 그 좌향도 인좌이고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공사를 착공함으로써 천·지·인 삼재를 일렬로 맞추는 셈이다.
불교는 그렇다 치고 유교에서 산신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유교의 핵심 의례는 제사이다. 제사와 산소, 이것이 양대 축이다. 조상의 묘에 가서 제물을 차려 놓고 인사를 드리는 게 유교가 지닌 특성이다. 그런데 묫자리 위쪽에는 보통 조그만 반석이나 넓적한 돌이 있다. 여기에 약간의 제물을 떼어다가 놓는다. 조상에게 인사 드리는 제물이 주 종목이지만 부차적으로 약간의 제물을 따로 마련해서 이 돌 위에 놓는 것이다. 이 돌 위의 제물은 산신령 몫이다. 산신에게도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여긴 셈이다. 암암리에 산신을 인정하고 산신의 파워에 순응한다는 징표이다. 명당의 기운을 관장하는 주신은 산신이다. 이 산신에게 인사를 잘 드려야만 조상 묫자리에도 좋은 기운이 들어온다고 믿었다. 조상 묫자리가 좋아야 그 혜택이 후손들에게도 미친다. 유교의 핵심의례가 풍수지리에 바탕한 묫자리 점지이다. 죽은 자의 묘를 음택(陰宅)이라고 불렀다. 죽은 자의 집이다. 집은 양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집에서 나오는 기운이 산 자의 출세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 조선시대 유교의 묫자리관(觀)이었다. 이 비중 있는 묫자리관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바로 산신이었던 것이다.
묫자리를 잡는 지관들이 숭배하는 신격도 역시 산신이다. 영험한 명당터를 잡을 때는 마른 명태와 술을 들고 가서 그 자리에서 반드시 간단한 제사를 지낸다. 이를 치표(置標)라고 한다. 치표할 때 지관들이 드리는 인사의 대상은 산신이다. 산신이 허락을 해야만 명당을 쓸 수 있다고 믿었다. 묘를 이장할 때 공(空)달(윤달)에 하는 풍습이 있다. ‘공달’은 왜 공(空) 자가 들어가는가? 공달에는 산의 산신령이 다른 데로 출장을 간다. 옥황상제에게 인사 드리기 위하여 자리를 비우는 달이다. 산신령이 출장 갔을 때 묘를 쓰면 부작용이 없다고 본다. 산신령이 주재하고 있으면 결재를 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산신이 된 사람들
우리나라 상고사를 보면 단군이 죽어서 산신이 되었다고 나온다. 단군이 ‘당골’로 변하였다고도 한다. 애국자도 죽어서 산신이 된다고 믿었다. 이 나라 국토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애착이 있는 임금과 대감이 죽으면 산신이 되었다. 고려 최영 장군도 산신이 되었고, 전북의 운장산에는 송구봉이 산신이 되어 있고, 충남 서대산에는 송시열이 산신이 되어 있다고 한다. 계룡산 등운암의 산신각에는 여자 산신이 그려져 있다. 그 여자 산신 밑에 갓을 쓴 유생이 손가락만 하게 그려져 있다. 여자 산신 밑에서 갓을 쓴 유생이 공손하게 경배하는 모습이다. 사찰의 산신각에 가면 대개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가 호랑이 옆에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큰 틀은 같으면서도 부분적으로는 산신각마다 모두 다르다. 이 산신도를 그린 화공들은 자기 생각대로 대강 그린 게 아니다. 목욕재계하고 그린 산신도들이다. 그 절에서 기도를 열심히 하면 꿈에 산신령이 나타난다.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모습을 보고 그린 그림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꿈에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화공이 임의대로 산신도를 그려 버리면 그런 산신각은 효험이 없다. 꿈이 약간씩 차이가 있으므로 산신령의 모양과 포즈, 그리고 호랑이 모습들도 약간씩 다르다. 산신도를 그리는 화공들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필자가 근래에 본 산신각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고치령 정상에 아담하게 홀로 서 있는 산령각(山靈閣)이었다. 고치령은 강원도 영월과 경북 영주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조선은 산길을 타고 고갯길을 넘어 다녀야만 하는 나라였다. 고치령은 수많은 고갯길 가운데 터널이 뚫리지 않아 아직 남아 있는 고개이다. 조금 왼쪽으로 더 가면 또 하나의 고개인 마구령(810m)도 있다.
고치령은 해발 760m. 태백산과 소백산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의 고개이다. 이 고개 정상에 산신각(산령각)이 독립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불교 사찰에 끝까지 흡수되지도 않고 원래 그 신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감동적이었다. 건물 크기는 한 칸 집 정도나 될까. 산신각 안에는 소백산 산신과 태백산 산신을 같이 모셔 놓았다. 양백지간(兩白之間)의 산신인 셈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 형세인 한반도에서 원래 자기 모습 그대로 원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간난신고(艱難辛苦)의 길이었다. 그 천대를 받고 멸시와 풍파를 겪으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유지한 모습을 보니 뭉클한 감정이 올라왔다. 아마도 양백지간의 고치령고개를 넘나들었던 보따리장수, 약초꾼들, 송이버섯 캐서 팔던 화전민들, 떠돌이 산적들이 숭배했던 산신령이었을 것이다. 고치령의 고갯길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민초들 사이에서 영험이 있다고 소문 났기 때문이리라. 무거운 짐을 메고 이 높은 고갯길을 넘나들었던 수많은 조선의 민초들. 우리 조상들이 이 고개 정상에 오면 한숨 돌리고 여기에 정좌하고 있는 산신령에게 자기 인생의 애로 사항도 호소하고, 탈 없이 고갯길 넘어가게 해 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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