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영지 순례]2000년 전 인도 진신사리가 신라로 온 까닭
▲ 아도화상 전래 사리를 지니고 있는 단양 방곡사(왼쪽)의 묘허스님. photo 조용헌 |
이 세상에 채담가(採談家)라는 직업도 있다. 이야기를 채취해서 먹고사는 직업이다. 채취는 꼭 석탄이나 광물질만 하는 게 아니다. 땅만 파야 하는 게 아니다. 인간의 이야기야말로 채굴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인간의 머리와 입, 그리고 심장이야말로 채담의 대상이다. 전남 장성의 백양사에서 의연(義然·60)스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리(舍利) 이야기다. 고승이 죽어서 장작불에 화장을 하면 뼈가 타고 남는 게 사리이다. 쌀알 크기만 한 것도 있고 콩만 한 크기도 있다. 수정처럼 맑은 사리도 있고 그보다 탁한 사리도 있다. 죽은 고승의 어느 신체 부위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사리의 색깔과 질감이 다르다. 해골의 양쪽 눈썹 부위인 미간 부분을 백호(白毫)라고 하는데, 백호에서 나오는 ‘백호사리’는 유리처럼 투명한 색깔이다. 일반 뼈에서 나오는 사리를 ‘골(骨)사리’라고 한다. 골사리는 흰색 우윳빛이다. 붉은빛 사리는 ‘육(肉)사리’이고 푸른빛 사리는 ‘근(筋)사리’라고 한다. 검은색 사리도 있다. 이는 ‘발(髮)사리’다. 털에서 나오는 사리이다.
문제는 이 사리에서 영험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영험이 없으면 그냥 죽은 사람의 유물에 지나지 않지만, 부처님 진신사리나 도가 높은 고승들의 사리를 지니고 있으면 재수가 있거나 특별한 종교적 가피(加被)를 받는다는 점이다. 가피는 불교에서 말하는 ‘신비 체험’을 일컫는다. “제가 묘허(妙虛·77)스님을 만나서 사리를 5과 얻었습니다. 불사를 하려면 반드시 사리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사리는 절의 탑이나 불상 속에 넣어 둡니다. 그래야 그 절에 영험이 생긴다고 봅니다. 묘허스님에게 얻어온 사리 5과를 자동차에 싣고 서울에 도착했는데, 도착해서 보니까 그 사리가 17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죠. 아니 5과가 어떻게 2시간 반 동안에 17과로 증가할 수 있는가 하고 말이죠.” “그게 정말입니까? 자동차로 달리는 2시간30분 만에 12과가 새로 생겼다는 말입니까?” “사리에는 3가지 영험이 있다고 합니다. 사리가 늘어나는 증과(增果)의 영험이 있고, 두 번째는 방광입니다. 빛을 발하는 것이죠. 세 번째 영험은 은몰(隱沒)입니다. 있던 사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이죠. 이 3가지 사리의 영험은 불교 경전에도 나와 있고 불가의 절집에서 수천 년간 내려오는 전통적인 상식입니다.” “묘허스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리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어디에서 나온 사리이기에 증과되는 영험이 있다는 말입니까? 이거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쉽게 믿기 어렵네요.” “고구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가지고 온 사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와서 절을 3군데 세웠다고 합니다. 선산 도리사, 백련사, 그리고 직지사입니다. 묘허스님이 가지고 계신 사리는 아도화상이 백련사를 세울 때 불상 안에 모셔 두었던 복장사리(腹藏舍利)입니다.”
고구려 아도화상이라고 하면 신라 19대 왕인 눌지왕 때 신라에 들어와 불교 사찰을 세운 인물이다. 눌지왕 재위가 417년에서 458년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대략 1600년 전쯤에 신라에 들어왔던 사리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서 깊은 아도화상 전래 사리가 어떻게 묘허스님에게 들어가 있단 말인가? 그 사연이 궁금했다. 묘허스님은 어느 사찰에 있는 스님인가? 의연스님의 답변으로는 단양 방곡사(傍谷寺)라는 절에 있다는 것이다. 당사자를 만나려면 단양 방곡사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도화상이 전한 비법의 약술
방곡사는 소백산 자락에 있었다. 절 앞으로는 수리봉, 신선봉, 황장산이 있고, 멀리 월악산이 보이고, 그 오른쪽에는 도를 즐긴다는 도락산이 포진하고 있는 도량이었다. 절 뒤에 있는 바위 봉우리 3개가 간단치 않게 보였다. 상당히 기가 센 터에 자리 잡은 사찰이었다. 절 앞은 작은 계곡이 감아돌고 계곡 주변이 푹 꺼져 있어서 비보가 필요한 도량인데, 탑과 불상으로 이 허결(虛缺)한 부분을 보강해 놓고 있었다. 묘허스님은 77세 노장스님이었지만 눈에서는 아직 총기가 뿜어져 나오는 분이었다. 나이가 들었지만 오랫동안 기도와 참선을 하면서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 오신 분들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가 풍겼다. 아우라를 보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보이는 법이다. 이런 분들은 만약 중요한 인물이 찾아오면 미리 꿈이나 계시를 통해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냄새는 절대 풍기지 않는다. 그런 냄새를 풍기면 도가 부족한 것이다. 수행을 많이 한 선승(禪僧)을 만날 때는 만나자마자 곧바로 핵심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서론이 길면 잡설이다.
“어떻게 아도화상 사리를 소지하게 된 것입니까?” “이것도 인연이겠죠. 지금부터 120년 전쯤, 그러니까 1900년 초반쯤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백련사가 어떤 사건으로 불에 타게 되었습니다. 경북 선산군 도개면(道開面)에 위치했던 절입니다. 선산 도리사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사찰이 불에 소실될 때 백련사 스님이 불상 안에 복장(腹藏)으로 모셔져 있던 사리만을 급히 챙겨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사리가 스님들에게 전해져 오다가 성암강백에게 전해졌고, 1968년 무신년에 제가 성암강백으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제가 보관해온 세월이 52년이 되었군요.” “아도화상 창건이라면 신라 최초의 사찰급인데, 이런 유서 깊은 사찰인 백련사가 어떤 사건으로 불에 탄 것입니까?” “술 때문입니다.” “술이라니요?” “아도화상이 고구려에서 신라로 들어올 때 약술 빚는 법도 가지고 왔습니다. 스님들이 방바닥에 앉아서 장시간 참선을 하려면 오래 앉아 있어야 합니다. 오래 앉아 있으려면 허리가 튼튼해야 하고, 허리가 튼튼하려면 신장을 비롯해서 오장육부가 튼튼해야 합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약술 비법도 가지고 왔죠. 이 아도화상이 가져온 술이 대대로 백련사에 이어져왔습니다. 1900년 무렵 백련사 스님이 이 술을 한잔 먹고 절 밑의 동네로 내려왔는데, 구한말에도 불교가 천대받던 시절이라 아이들이 스님을 보면 놀려 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중 중 까까중’ 하고 말이죠. 술김에 이 스님이 놀려 먹던 아이를 쥐어박았다고 해요. 쥐어박은 게 심해서 이 아이가 크게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서 당시 해당 지역의 현감인 비안현감이 백련사를 폐사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절에다 불을 지른 것이죠. 그래서 절이 폐사된 것입니다.” “아도화상이 가지고 왔다는 그 술이 궁금해지네요. 그 술에 어떤 약재가 들어가는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나도 25세 때 사리를 3대째 보관해오던 성암강백을 시봉하면서 전수받았습니다. 약재는 총 32가지가 들어갑니다. 32가지 약재를 제대로 구해서 담그려면 요즘 돈으로 약 1억원 정도가 들어갑니다. 그만큼 귀한 약재가 들어가는 것이죠.” “32가지 중에서 핵심 약재는 어떤 것입니까?” “동충하초, 해마, 해룡, 웅잠아 등이 들어갑니다. 이 약재들도 구하기 쉽지 않죠.” “웅잠아는 처음 들어봤는데요. 어떤 성질의 약재입니까?” “수컷 누에 나방을 가리키는데, 수나방은 암나방과 교미를 1만번 정도 할 수 있답니다. 이 수나방이 교미하기 직전의 상태, 즉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하는 과정의 상태를 잡아다가 약재로 쓰는 것이죠. 교미를 해버리면 약효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묘허스님에게 아도주(酒)를 한잔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시자 스님에게 부엌에서 술병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투명한 빛깔의 술이었다. 처음 볼 때는 고량주 같은 느낌이었는데, 술을 코끝에 갖다 대니까 냄새가 독특했다. 약재 냄새가 났다. 약재 냄새도 일반 한약재와 달리 잘 맡아보지 못한 독특한 냄새였다. 하지만 역한 느낌은 나지 않았다. 목에 삼킬 만했다. 소주컵으로 두 잔을 마시니까 아랫배로 힘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왔다. 참선도 일단은 몸이 건강해야 하는 것이다. 몸이 허약하면 정신 집중이 되겠는가.
백련사 사리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그 다음에 드는 의문이 있었다. 아도화상이 어떤 연유로 이 사리를 신라에 가지고 들어온 것일까? 즉 아도화상은 이 사리를 어디서 구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묘허스님은 총체적인 사연을 꿰고 있었다. 중국 북위의 수도가 낙양이었을 때 백마사(白馬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아도는 이 백마사에서 16세부터 19세까지 3년간 승려생활을 하였고, 중국에서 고구려로 귀국할 때 백마사에 모셔져 있던 사리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외국 승려가 당시 수도였고 내로라하는 절이었던 백마사에서 귀중한 사리를 가지고 올 수 있었을까? 귀중한 보물을 외국 승려에게 쉽게 줄 수 있단 말인가. 당시 아도화상의 친아버지가 북위의 재상 정도 되는 고위직에 있었다고 한다. 자기 아들이 고구려에 돌아가는 여행 일정도 위험이 뒤따르는 것이었다. 고대의 육로 여행은 산적, 질병, 굶주림이 언제든지 들이닥치는 위험한 일이었다. 귀국길에 안전을 보장할 수 있도록 귀한 사리를 재상의 직권으로 아도에게 주도록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고위직에 있었으니까 그 ‘백’으로 사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 아도화상이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진신사리.
아도화상과 위나라의 재상 아버지
그렇다면 고구려 출신인 아도가 어떻게 위나라의 재상인 아버지를 둘 수 있었는가? 이것도 의문이다. 아도의 아버지 이름은 아굴마였다. 아굴마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 고구려에서는 중국의 사신을 모시기 위해 처녀인 고도령을 배치하였다. 위나라 사신 아굴마와 고구려 처녀 고도령 사이에 아기가 생겼다. 아굴마가 사신 임무를 끝내고 귀국할 무렵 고도령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신을 했는데,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할까요?”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아도로 하시오. 나의 성 ‘아’와 고도령의 이름 ‘도’를 따서 ‘아도’라고 지어 놓읍시다.” 그리고 아굴마는 나중에 아이가 자신을 찾아올 때 신표로 삼으라고 자신이 끼고 있던 지환(指環)을 빼서 고도령에게 주었다. 지환은 아마도 옥으로 만든 반지였을 것이다. 아도는 자라면서 ‘아버지가 없는 아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나무도 뿌리가 있는데 왜 나는 뿌리가 없을까? 마침내 어머니에게 물어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13세 때 중국 사신을 따라서 낙양으로 찾아갔고, 옥반지와 아도라는 이름을 대고 아버지 아굴마와 상봉하였다.
아굴마는 재상급의 고위직에 있었다. 그러나 아굴마는 현지에서 본부인과 자식들이 이미 있는 상태였다. 아도는 상황이 난처했다. 그 타개책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 백마사는 낙양의 가장 큰 절이었다. 중국 최초의 절이기도 하였다. 후한 시대인 서기 68년에 세워진 중국 최초의 사찰이다. 인도 승려들이 경전과 불상, 사리를 가지고 올 때 백마에 싣고 왔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 백마사였다. 후한의 2대 황제인 명제가 꿈에 몸에서 금빛이 나는 부처를 보았다고 해서 짓게 된 사찰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황제가 명령을 내려 지으라고 했다는 사찰이었던 만큼 백마사에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을 가능성이 높다. 부처님 진신사리는 부처의 분신이다. 사리가 존재하는 곳은 부처가 거기에 임재해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사리가 있는 곳은 신도들의 꿈에 영험한 징조가 나타난다. 비유하자면 기독교에서 예수의 유골 일부를 모신 교회를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비중이 있는 백마사의 사리를 고구려 승려 아도가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엄청 희유한 일이다.
아도가 창건한 3개의 절
아도는 아무리 머리를 깎고 세속을 떠나는 승려가 되었지만 생부가 있는 낙양에서 생활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다. 고구려로 돌아왔다. 아들이 낙양 백마사에 가 있는 사이에 아도의 어머니 고도령은 불교에 심취하여 많은 기도와 염불을 통해 앞을 내다보는 신통력을 지니게 되었다. 원래 종교적 자질이 있는 데다가 이역만리에 아들을 보내놓은 어머니는 밤낮으로 안전을 위한 기도를 했을 것이고, 그 기도의 감응으로 예지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백마사의 사리를 보고 고도령은 “고구려는 이미 불교가 들어와 있으니 너는 신라에 들어가서 불법을 퍼트려라”라는 의견을 아도에게 준다. 아울러 신라에 가거들랑 ‘눈 속에 도화꽃이 핀 곳’ ‘산중 연못에 연꽃이 빛을 발하는 지점’에 절을 지으라고 부탁한다. 어머니의 이런 예시를 받고 신라에 들어와 아도가 세운 사찰이 경북 선산의 도리사(桃李寺)이다. 복숭아 도(挑) 자이다. 이때가 눌지왕 417년이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구미시 해평면이다. 도리사가 있는 뒷산을 넘어가면 청화산이 나온다. 이 청화산 중턱의 연못에서 연꽃이 피어 방광하였다. 여기에다 지은 절이 바로 백련사(白蓮寺)이다. 그리고 아도가 도리사에서 저 멀리 산을 보고 ‘저기쯤이 수도할 도량이 들어설 자리’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절이 직지사(直指寺)이다.
아도가 창건한 3군데의 사찰 가운데 백련사만 폐사가 되었다. 하지만 절은 폐사됐지만 귀중한 사리는 현재 남아서 신통을 보여주고 있다. 증과, 방광, 은몰의 신통이다. 종교 신앙은 ‘신비 체험’이 바탕이 된다. 이론이 아니다. 어떤 방법으로 신비 체험을 할 수 있느냐? 이것이 관건이다. 그 신비 체험을 해줄 수 있는 성물(聖物)이 바로 진신사리이다. 2000년 전에 인도에서 넘어온 진신사리가 백마사와 아도화상, 그리고 백련사, 묘허스님을 거쳐 필자에게까지 그 위력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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