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황교익의 味食生活_20

醉月 2012. 4. 6. 10:23

한 그릇 2000원, 국밥집을 아시나요?   
 
청진옥 2대 사장에 따르면 청진동 골목은 과거 땔감 시장이었다고 한다.
장꾼들이 밤새 무악재를 넘어와 짐을 부리고는 새벽에 국밥 한 그릇씩 먹고 돌아갔다.

한민족의 밥상은 밥과 국, 반찬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과 반찬은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는 일에 보조 역할을 한다. 밥상은 국과 반찬을 다 차려내야 할 것이나, 여러 사정으로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의 끼니를 내어야 할 때에는 국과 반찬을 따로따로 한 상씩 차리는 일이 버겁다. 밥 한 그릇 맛있게 먹자고 상을 차리는 것이니, 이럴 때에는 밥을 국에 말아 내거나 밥에 반찬을 올려 내면 간편해진다. 이 음식이 국밥과 비빔밥이다. 한민족의 패스트푸드라 할 수 있다.

조선은 농민의 나라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농사를 지었다. 나다닐 일이 없으니 끼니는 으레 집에서 해결했다. 밥에 국과 반찬을 차려놓고 먹었다. 그 밥에 국을 말거나 반찬을 올려 비벼서 먹었을 수도 있는데, 이 음식을 두고 국밥·비빔밥이라 따로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옛 어른들은 밥을 말거나 비비는 것을 좋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렇게 밥을 먹으면 가난해진다 하여 말거나 비비는 것을 말렸다. 그러니 국밥과 비빔밥은 가정집의 음식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황교익 제공
청진옥의 국밥. 해장국이라는 이름으로 팔리지만 국밥이 제 이름이다.


그래도, 조선에서 국밥과 비빔밥은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 풍속화에서 국밥인 듯한 음식을 볼 수 있다. 장소는 주막이다. 그러니까 집 밖에서 먹는 음식으로 국밥과 비빔밥은 일상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 그릇이 흔한 것이 아니었다. 또 상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주막에서 밥 한 끼 먹을 수 있게 음식을 내자면 국밥과 비빔밥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막 외 이 국밥과 비빔밥이 팔렸을 것으로 보이는 장소는 장터이다. 장터에는 사람들이 모이니 자연스레 음식을 파는 장사치도 있었을 것이다. 시장 사람이 간편히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이 국밥과 비빔밥은 딱 좋았을 것이다. 이 전통은 유구하여 국밥과 비빔밥은 요즘의 시장에서도 주요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조선에서 가장 큰 시장에서 후루룩 말아먹던 국밥


국밥은 장터에서 흔히 보지만 비빔밥은 드물지 않으냐 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인데, 근래에 비빔밥이 장터에서 쇠퇴한 것이 맞지만 예전에는 많았다. 그 유명한 전주비빔밥도 남문시장 좌판에서 비롯한 것이며, 안동 헛제삿밥도 장터에서 광주리에 이고 팔던 음식이었다. 청주 육거리장터에서는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수레에 밥과 반찬을 담아 끌고 다니는 행상이 여럿 있었다. 밥 위에 반찬을 올려 한 그릇의 비빔밥으로 팔았다. 비빔밥이 장터에서 쇠퇴한 것은 반찬을 마련하는 데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대여섯 가지 반찬을 하느니 국 하나 끓여 밥 한 그릇 말아서 내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니, 국밥은 승승장구하고 비빔밥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황교익 제공
종로2가 뒷골목의 오래된 국밥집. 한 그릇에 2000원 한다.
서울 종로에는 국밥집이 많다. 그중에 ‘청진동 해장국’은 전국에서도 유명하다. 이 종로 국밥의 명성에 기대려는 전국의 업자들이 이 이름을 간판에 붙여 더 유명해졌다. 국밥은 전국 어디든 있을 것이며 종로의 국밥에 특이한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다. 소의 여러 내장과 선지, 그리고 우거지가 들어가는 것은 거의 같다. 서울 한복판 종로, 청진동이라는 이름이 주는 어떤 효과를 바라고 하는 일일 것인데, 하여간 종로의 국밥은 전국에서 유명하다.

종로 국밥은 조선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종로가 조선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성을 쌓은 뒤 성안의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는 물건을 조달하는 시장을 열었는데, 이를 시전이라 했다. 지금의 종로와 남대문로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정부는 이 지역에 행랑을 세우고 칸을 지어 상인에게 빌려주고 세를 받았다. 노점을 단속하는 대한민국과는 달리 조선은 좌판과 행상도 허용했다. 물론 그들에게도 세금을 거두었다. 그 당시 성안의 인구가 20만명 정도였으니 종로 시장은 꽤 번잡하였을 것이다. 그 종로의 시장 안에 국밥집이 있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종로 국밥집 중에 가장 오래된 식당은 청진옥이다. 1937년에 개업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종로가 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점점 잃게 되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청진동에는 새벽장이 섰다고 한다.

청진옥의 2대 사장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청진동 골목은 땔감 시장이었다고 한다. 서울의 땔감은 주로 서대문 밖에서 가져왔는데, 지게에 나무와 숯 따위를 지고 밤새 무악재를 넘어와 새벽에 청진동 골목에 부리고는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고 한다. 나무와 숯이 가득 쌓여 있는 시장 골목 여기저기에 가마솥이 걸린 국밥집 풍경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조선에서 ‘개화’란 곧 시장의 재편을 뜻했다. 조선의 문이 열리자 중국과 일본의 상인이 서울의 상권을 장악해갔다. 조선의 상인이 버티고 있는 종로는 버려두고 서울 곳곳에 시장을 열었다. 종로의 시장은 쇠퇴했고 대신에 신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근대적 상가’가 되었다. 


   
ⓒ황교익 제공
1937년 개업한 청진옥은 청진동이 재개발되면서 큰 빌딩의 한 귀퉁이로 옮겼다.


장꾼들이 들락거리던 국밥집은 그 근대적 상가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식당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으로 종로는 폐허가 되었다가 1960~1980년대 산업화 과정을 통하여 오피스 타운이 되었다. 지식 노동자들이 종로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때에는 벌써 종로가 거대한 시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장의 흔적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시장의 흔적이라고 남은 것은 달랑 국밥 하나인데, 그 국밥을 먹으면서 조선의 시장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종로가 또 변하고 있다. 종로 서민의 상징이었던 피맛길은 사라졌고 청진동도 재개발 중이다. 이 와중에 그 오랜 국밥집들이 문을 닫거나 자리를 옮겼다. 1937년 개업한 청진옥은 르메이에르라는 ‘듣보잡’의 이름을 하고 있는 거대한 건물의 한귀퉁이에 겨우 붙어 있다. 거대 자본의 시대에 조선의 장꾼 음식 따위의 가치가 눈에 들기나 하겠는가. 나뭇꾼, 장꾼, 노동자로 이어온 종로 사람들의 삶이 그 거대한 빌딩 아래서 버겁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감자탕엔 왜 감자가 없을까   
 
감자탕은 태생부터 하층민의 음식이었다. 서울에서 노동을 팔던 이에게 돼지 등뼈와 감자는 훌륭한 안주 겸 끼니였다. 그런 음식의 이름을 뼈다귀탕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식명은 주요 재료와 요리법 또는 완성된 요리의 형태 등에 따라 붙이는 것이 관례이다. 음식 이름만 듣고도 그 음식으로 기대되는 맛을 예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관례일 뿐이지 변칙은 항상 존재한다. 닭채소볶음이라 해야 마땅한 음식을 닭갈비라 부르고, 교과서에까지 계삼탕이라 했던 음식을 삼계탕이라 우겨 말하는 식이다.

감자탕도 이 변칙의 음식명인 셈이다. 감자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주요 재료는 아니다. 돼지 등뼈를 푹 삶아서 감자, 우거지 등을 넣고 끓여내는 음식이니, 정확하게 말하면 ‘돼지등뼈감자우거지탕’이라 해야 맞다. 


   
ⓒ황교익 제공
영등포 할매집의 ‘할매’(오른쪽). 주인은 아니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대구로 나가 식모살이를 했으며 서울로 와서 여기 감자탕집에 터를 잡았다. 서울에서 감자탕 먹는 인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감자뼈라는 이름 가진 돼지 뼈는 없어

어느 방송에서 감자탕의 어원을 밝힌 적이 있다며 그 내용이 인터넷에 떠도는데, 이게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감자탕의 주요 재료인 돼지 등뼈를 감자뼈라고 불러서 감자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방송에 나왔다” 하면 무조건 신뢰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이 ‘설’은 엉터리이다.

한반도 사람들은 먼 선사시대부터 돼지를 키웠다.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돼지로 여러 음식을 해먹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흔히 먹는 음식의 재료에 대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이름이 붙는다. 돼지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등뼈를 감자뼈라고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감자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감자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겨우 1800년대 초의 일이다. 또, 이게 일상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그러니까 수천 년 내려온 돼지뼈 이름에 100여 년짜리 감자라는 이름이 끼어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축산 전문가들도 감자뼈라는 이름의 돼지뼈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정육점이나 장터에 가면 돼지 등뼈를 진열해놓고 ‘감자뼈’라고 이름 붙여 파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감자뼈가 있기는 있는 것 아니냐고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감자탕이 유행하면서 ‘감자탕용 돼지뼈’를 파는 가게가 생겼을 것이고, 이 가게 주인들이 ‘감자탕용 돼지뼈’니 ‘돼지 등뼈’니 하는 식으로 표시하는 것보다 ‘감자탕뼈’, 나아가 ‘감자뼈’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고 손님도 쉽게 알아볼 것이라 판단해 그렇게 쓰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감자탕의 유래에 대한 또 하나의 ‘설’이 있다. 강원도에서 유래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강원도에서 감자 생산량이 많았던 것은 맞다. 그러나 감자가 쌀에 비해 많은 것이지 그 총량이 절대적으로 많았던 것은 아니다. 늘 식량이 모자라던 강원도에서 감자가 주식 노릇을 하여 ‘강원도 감자’라는 이미지가 굳어졌을 뿐이다. 또, 감자탕 같은 음식을 조리하자면 돼지 등뼈도 넉넉해야 하는데, 강원도에서 특별히 돼지를 많이 키웠다는 자료가 없다. 돼지를 키우려면 음식물 쓰레기라도 많아야 한다.

강원도처럼 먹을 게 부족한 지역에서는 돼지를 키우는 것이 버거운 일이다. 제주도와 지리산 일대, 강화도 등지에서는 먹이가 마땅히 없어 똥을 먹이며 돼지를 키웠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감자 몇 알에 돼지 등뼈 듬뿍 들어간 감자탕을 보면, 오히려 돼지를 많이 키웠던 지역을 찾아 그곳에서 유래한 음식이라 하는 것이 더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한반도의 옛사람들은 쇠고기를 넉넉히 먹지 못했다. 농사를 도와야 하는 소를 함부로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돼지는 그런대로 제법 먹었을 것이다. 아무것이나 잘 먹고 새끼도 많이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 그렇게 넉넉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돼지를 잡으면 악착같이 살을 발라 먹었을 것이다. 이 ‘악착같이’에서 감자탕의 유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감자탕이 아니라 ‘뼈다귀탕’이었다

돼지를 잡으면 버리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뼈와 털 정도였다. 뼈도 푹 고아 먹었다. 그래도 살이 가장 중요한 부위여서 이 살을 발라내는 데 온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살을 알뜰히 발라낼 수 없는 부위가 있다. 바로 등뼈이다.

이 등뼈는 굴곡이 져 있다. 칼로 등뼈의 살을 아무리 발라내도 발리지 않는 살이 있다. 이 살을 가장 쉽게 먹는 방법은 삶는 것이다. 삶으면 살을 바를 수 있다. 그러니까 ‘돼지등뼈탕’은 돼지를 사육한 먼먼 선사시대 때부터 있었던 음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솥이 있어야 했으니,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음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감자탕에 든 등뼈는 그래도 살이 많은 편이다. 감자탕용으로 살을 좀 남겨두기 때문이다. 예전의 감자탕 등뼈는 발라 먹을 것이 정말 적었다. 겨우겨우 붙은 살을 쪽쪽 빨아 먹었다. 그래서 이 탕의 애초 이름은 뼈다귀탕이었다. 뼈다귀국, 뼈다귀해장국이라고도 했다. 살이 워낙 적으니 그릇에 등뼈를 가득 채워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뼈다귀탕이었던 것이다. 국물을 거의 없이 내는 것도 있었는데, 이를 두고 ‘따귀’라고도 불렀다(소의 등뼈도 이 이름으로 팔렸다).

이 뼈다귀탕에 언제부터 감자가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감자 재배가 부쩍 늘었는데, 그즈음에 지금의 감자탕 모양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일제는 한반도에서 쌀을 빼앗아가면서 한반도 사람들이 먹고살 식량으로 감자와 고구마를 적극 보급했고, 그렇게 해서 흔해진 감자가 뼈다귀탕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황교익 제공
아래 사진 왼쪽이 영등포역 앞 골목의 감자탕집들이다. 간판도 없다. 주변이 온통 재개발되고 있으니 이도 곧 사라질 것이다.


뼈다귀도 그렇고, 감자도 그렇고, 감자탕은 태생부터 하층민의 음식이었다. 설렁탕도 못 먹고, 쌀밥도 못 먹던 사람들의 음식이었다. 어느 특정 지역에서 유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층민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이 음식이 있었을 것이다. 이 감자탕을 서울 음식에 넣자고 생각한 것은 그 하층민이 가장 큰 집단으로 모였던 곳이 서울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농촌을 떠나 서울로 와서 노동을 팔던 이에게 돼지 등뼈와 감자는 안주 겸 끼니가 되어주었으리라.

감자탕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도 서울에서의 일이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서 먹는 게 ‘돼지의 뼈다귀로 끓인 탕’이니, 뼈다귀탕이라는 이름이 자신의 가난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었을 것이다. 감자는, 고향에서 흔히 먹었던 그 감자는 향수를 불러오고, 그래서 내가 먹는 음식이 낯선 도시의 하층민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향에서 먹던 음식이었으면 하여, 감자 겨우 한두 알 든 돼지등뼈탕을 감자탕이라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영등포역 앞의 한 골목에 감자탕집이 모여 있다. 낡고 허름한 가게들이다. 1990년대 이후 프랜차이즈 업자들이 감자탕을 때깔 난 식당에서 먹는 음식으로 재구성하고 있지만, 감자탕의 유래를 생각하면 그런 데서는 진짜 맛을 느낄 수 없다. 가게는 좁아서 노천이다 싶은 곳에 놓인 나무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감자탕이 진짜 감자탕이다. 돼지 등뼈 가운데 박힌 노란 속을 쪽쪽 빨며 ‘뼛골이 빠지는 삶’을 견뎌낸 서울 변두리 사람을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감자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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