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걸레로 닦아 낸 차가운 금속성 도시. 공업 도시 울산을 생각할 때 혹시 이런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으셨는지요. 거대한 유류탱크와 수많은 파이프, 거대한 공장들이 뭉실뭉실 뿜어내는 연기. 울산이야말로 ‘집약’과 ‘압축’의 공업화가 이뤄진 도시입니다. 석유화학단지와 자동차공장으로 대표되는 울산은 우리 산업의 성장 신화를 이뤄 낸 동력이었습니다. 궁핍과 가난의 빈손에서 출발한 신화가 여기 있습니다. 울산은 성장의 신화 외에도 수많은 신화 혹은 전설이 깃든 공간입니다. 아득하게 먼 시간의 저편부터 울산의 앞바다에는 물기둥을 뿜어 대는 거대한 고래들이 회유하고 있었고, 배를 탄 채 석기와 청동기를 들고 그 뒤를 쫓던 선사인들이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40여년 전 고래를 뒤쫓던 포경선의 추억도 있습니다. 한때 고래잡이로 흥청거렸다던 포구는 포경이 금지되면서 공업 도시 복판에 섬처럼 남았지만 그 시절의 흥미진진한 무용담은 아직도 소주병 쓰러진 대폿집에서 뜨겁게 살아 있습니다. 울산에는 죽어서 호국룡이 되겠다던 문무대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있고, 처용의 신화도 남아 있습니다. 1200여년 전 신라 헌강왕이 행차하다 폭풍우 속에서 마주쳤다는 용왕의 일곱째 아들 처용. ‘삼국유사’에서는 그가 울산 개운포의 자그마한 바위섬에서 걸어 나왔다고 했습니다. 비바람을 몰고 온 용왕을 달래기 위해 헌강왕이 지어 주었다는 절집 망해사. 그 자취 역시 뚜렷합니다. 여기다가 언양에는 신라 소지왕이 병들어 약으로 쓸 복숭아꽃이 한겨울에 피어났다는 화장산의 석굴도 있습니다. 울산을 가는 것은 이런 신화를 찾아가는 여정에 다름 아닙니다. 울산의 검푸른 바다를 회유하는 거대한 고래 떼의 자취와 포경의 흔적, 밤늦도록 신라의 밤거리를 노닐던 처용, 그리고 한겨울에 복숭아꽃 환하게 피었다는 석굴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오랜 시간을 건너온 신화와 전설은 우리가 얼마나 깊고 뜨거운 뿌리를 이 땅에 내리고 있는지 비로소 알게 해 주었습니다. 봄날의 이런 여정이 혹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울산 작괘천의 물가에 그림처럼 들어선 정자 작천정으로 드는 길에는 벚나무들이 이제 막 꽃을 틔워 그윽한 풍류를 빚어내고, 반구대암각화를 만나러 타박타박 걸어가는 길가에는 초록 잎을 피워 낸 버드나무와 태화강의 물줄기가 어우러져 봄날 최고의 풍경화를 그려 내고 있었습니다. 그 풍경만으로 올봄 울산으로의 여정은 놓칠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 그림 속에서 만나는 선사인들의 고래잡이 태화강 상류의 물 건너편 전망대에 설치된 제법 배율 높은 망원경도 소용없었다. 고래 55마리를 비롯해 300여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반구대암각화. 그림이 있다는 높이 3m 너비 10m의 석벽을 찾아 망원경으로 한참을 들여다봤지만, 그림은 희미해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하기야 수천년 전 선사인들이 쪼아서 새긴 그림이 겪었을 풍화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거리에서 선명하게 보일 리는 만무했다. 그저 반구대암각화로 드는 길 초입의 암각화전시관 모형과 관광 안내 입간판 속 탁본에서나 그 섬세함과 다양함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전시관에서 들여다본 암각화 속 서로 다른 다양한 고래와 동물들의 모습이 어찌 이리 생동감 넘치는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저편에 살던 선사인들이 어찌 이런 정교한 그림들을 그려 냈는지, 무슨 목적으로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인지…. 물음에 물음이 꼬리를 문다. 사실 선사시대의 암각화를 일 년 내내 제한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곳은 반구대암각화 말고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프랑스는 암각화 유적이 있는 몽베고의 접근로를 봉쇄하고 7, 8월 두 달만 개방한다. 족히 서너 시간은 걸어 들어가야 하는 길인데도 두 달 동안 3만명의 관광객이 몰린다. 미국도 안내인 없이 캘리포니아 내 암각화 유적으로의 접근을 아예 불가능하게 했다. 반구대암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장면은 생생하게 묘사된 수십종의 고래와 배를 타고 그 고래를 사냥하는 선사인들의 모습이다. 거기서 봐야 할 것이 단지 그림 솜씨만은 아니다. 그림이 드러내는 것은 선사시대의 생생한 삶의 모습이다. 거대한 크기의 고래를 잡는 일이란 다른 물고기잡이와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고도의 협업과 분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누구는 배를 저어야 하고, 누구는 먼바다를 주시하면서 고래를 찾아야 하며, 누구는 창을 들고 고래와 맞서야 한다. 각기 저마다의 임무가 주어졌을 것이며, 고래 등에 올라타 창을 깊이 박는 위험천만한 일을 감행했거나 고래를 잡는 데 공이 큰 이들에게는 더 많은 대가가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사냥과 분배까지 역할과 대가에 대한 합의가 없다면 고래잡이는 나설 수 없는 일이었을 터. 그러니 암각화의 고래잡이 그림이야말로 선사인들의 사회가 지금과 그다지 다를 것 없을 정도로 체계화돼 있었다는 증거로 봐도 좋겠다. 돌도끼나 돌칼, 혹은 청동기를 들고 있던 수천년 전의 시간 저편에 말이다.
# 반구대 가는 길의 낭만적인 봄 풍경 반구대암각화를 보러 가는 길에서는 태화강의 물길과 까마득한 석벽이 한데 어우러지는 빼어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강변의 습지에서 자라는 버드나무의 연두색 새순이 나오는 이즈음이라면 더 그렇다. 암각화박물관쯤에 차를 대고 강변을 따라 20분 남짓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야 하는 그 길은 별생각 없이 들어선 이들의 의표를 찌른다. 길의 풍경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낭만적으로 그려 낸 유화(油畵)다. 새잎이 나는 나무들이 그려 내는 연초록빛, 무리 지어 자라는 소나무의 묵직한 초록, 부드럽게 휘어지는 맑은 강물, 그리고 물가를 향해 내민 거북 모양 바위인 반구대의 풍광이 한데 어우러지는 풍경이라니…. 여기다가 천변에 세워진 반구서원과 정몽주 유허비의 고즈넉한 모습까지 더해진다. 천변에 멈춰 선 채 문득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이른바 ‘이발소 그림’을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면서 반구서원 뒤편으로 그윽하게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낭만적인 풍경만을 조각조각 모아 정형화해 그린 ‘이발소 그림’. 반구대암각화로 가는 길이 지금 이렇다. 너무도 낭만적이어서 비현실적이 되는 풍경. 그런 풍경이 그 길에 있다. 그 길에서 지나게 되는 반구서원의 자리는 고려 말 충신 정몽주가 언양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고, 훗날 조선시대 문신 이언적과 정구도 발걸음을 했다는 곳이다. 이런 인연으로 언양 지방의 사림들이 이 자리에 서원을 세웠다. 우뚝 선 바위 벼랑과 그 아래로 물길을 끼고 있는 서원 옆에는 정몽주의 유허비가 서 있고, 물 건너편에는 거북이가 웅크린 채 물을 마시는 형상의 바위인 반구대가 있다. 암각화를 보러 가기 위해 들어선 길이지만, 길 끝에 암각화가 없다 해도 일부러 찾아들 만한 길이다. 오로지 그 길만을 목적으로 삼는다 해도 좋다는 얘기다. # 장생포 앞바다에서 살아 있는 신화가 된 고래 암각화에 등장하는 고래의 자취는 근대까지 이어진다. 일찍이 울산의 장생포 앞바다는 ‘경해(鯨海)’라고 일컬어졌다. ‘고래 경(鯨)’자를 썼으니 ‘고래바다’란 뜻이다. 이런 이름은 근대의 고래잡이, 즉 포경이 이뤄지던 시절에 붙여진 게 아니다.
근대 포경이 이뤄졌던 중심지는 울산의 자그마한 포구인 장생포다. 지금은 공업 도시의 유류탱크와 공장에 포위돼 고립되다시피 했지만, 고래잡이가 이뤄지던 때만 해도 세상 어느 곳 부럽지 않은 풍요로운 마을이었다. 장생포의 근대 포경 역사는 구한말부터 시작된다.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장생포 앞바다에는 고래가 넘쳐 났다. 러시아의 포경회사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1896년 러시아 포경선이 하루 7마리의 고래를 잡았다는 기록이 있고, 1903년에는 1주일 중 며칠 조업을 쉬고도 12마리를 잡아 처치 곤란했다는 자료도 있다. 1911년부터 고래잡이가 허용됐던 1985년까지 70여년 동안 2만2168마리의 고래가 한반도 연안에서 잡혔다. 그러나 1986년 고래잡이가 중단되고 장생포의 시계는 멈췄다. 고래 보호의 명분이야 당당했지만 한순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21척의 포경선과 7척의 고래운반선, 2척의 고래처리선은 개조되거나 버려졌다. 고래잡이에 종사하던 선원과 중매인에게 딸린 가족 1775명이 하루아침에 생계를 잃었다. 장생포에만 42곳이나 됐다는 할매집이며 참고래집, 왕고래집 같은 고래고기집들도 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났다. 고래잡이의 추억은 선술집에서 불콰하게 취한 늙은 포경선의 포수나 선장의 무용담 속에서만 간혹 떠올려질 뿐이었다. 포경이 이뤄지던 시절 장생포의 고래는 사냥의 대상이거나 생업의 방편이었지만, 고래잡이가 금지되고 추억만이 남아 있는 지금 고래는 ‘신화’가 됐다. 특히나 포경이 금지된 후 수십년 동안 한 번도 거미줄 같은 어선의 그물에 걸리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단 한 차례도 목격된 적이 없다는 귀신고래야말로 그 신화의 정점에 있다. 쇠락한 장생포 앞바다에서 따개비를 등에 다닥다닥 붙이고 바다 위로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켜 뒤채는 귀신고래를 만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고래를 잡던 전설 속의 포수도, 망태에 올라 먼바다의 고래를 귀신같이 찾아내던 1등 세라(세일러·선원)도 다 늙어 버렸지만, 장생포 앞바다에 잠겨 있는 고래의 신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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