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는 평양냉면? “난 서울냉면”
1965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점심때 제일 많이 먹은 음식이 냉면이었다. 정부 단속과 고깃집에서 내는 싸구려 냉면 탓에 냉면집은 설 자리를 잃었다.
우리밀살리기운동을 하는 분들에게는 섭섭한 말이 될 수 있겠지만, 한반도의 자연환경은 밀 재배에 적합하지 않아 애초 밀 재배를 많이 하지 않았다. 또, 한반도에서 밀 재배가 잘 되는 지역이 일부 있다 하여도 예전에는 그다지 많이 심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 민족에게 분식 문화가 아예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밀 대용품인 메밀이 있었다.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생육 기간이 짧아 봄 파종 작물이 망가졌을 때 재빨리 대체 파종을 하여 수확물을 거둘 수 있으므로 한반도 전역에서 재배되었던 작물이다. 단점이 딱 하나 있는데, 메밀에는 글루텐이 없어서 반죽을 하여도 밀처럼 부풀리거나 늘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빵이며 국수 문화가 발달할 수 없는 환경에 한민족이 살았던 것이다.
ⓒ황교익 제공 을지로 한 냉면집의 냉면. 다들 평양냉면이라 하는데,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다. 고기국물 맛과 메밀국수 맛이 어떻게 어우러지는가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
메밀 반죽에 찰기를 더하기 위해서, 지금은 대체로 밀가루를 섞지만, 옛날에는 녹두 분말을 더했다. 이 반죽으로 반대기를 만들어 돌돌 말아 썰면 메밀칼국수가 되는데, 보통은 이런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이 메밀 반죽으로 국수를 내리는 틀도 있었다. 작은 구멍을 송송 낸 분창에 메밀 반죽을 넣고 위에서 눌러 국수를 빼내는 것이다. 큰 마을이라도 이 국수틀이 있는 집은 한 집 정도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이 국수틀이 ‘이동식’이라 동네 사람들이 서로 빌려 썼다는 점이다.
메밀국수는 조선에서는 어디서든 해먹던 음식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일제강점기까지도 밀은 귀하고 메밀은 전국에서 흔했다. 평양냉면, 진주냉면, 춘천막국수 따위로 지명이 붙은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함흥냉면은 감자 전분으로 국수를 내렸는데 지금은 고구마 전분을 주로 쓰니 앞의 메밀국수들과는 따로 분류하여야 한다). 조선의 한양에도 찬 국물을 더한 메밀국수를 파는 주막이 흔히 있었을 것이다. 국수라고 하였거나 냉면이라 하였거나 메밀국수라 하였거나 막국수라 하였거나…. 일제강점기 초기 자료를 보아도 경성에는 냉면집이 꽤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성냉면은 맛에서 명성을 얻지 못한 것 같다. 그때에 벌써 평양냉면은 유명하여 경성냉면과 곧잘 비교되었다.
1926년 <동아일보> 기사 속 평양냉면
아래는 1926년 8월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글이다(앞뒤를 자르고, 표기와 문장을 읽기 쉽게 고쳤다).
“평양 음식으로는 전 조선에서 유명한 것이 세 가지가 있고, 특별히 잘한다는 칭찬을 받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전자는 냉면·어복장국·어죽 등이요, 후자는 맹물·약주상 등입니다. 냉면이란 어디 것 어디 것 합니다만, 평양냉면같이 고명(高名)한 것이 없습니다. 이곳 냉면은 첫째 국수가 좋고, 둘째 고기가 많고, 셋째 양념을 잘합니다. 게다가 양도 많고 값조차 싸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서울에서는 제아무리 잘 만드는 국수라도 밀가루를 섞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순전히 메밀로만 만들며, 쇠고기·돼지고기를 서울보다 갑절씩이나 넣는데, 평양육이 얼마나 맛있는지 형도 이미 아시는 바라 누누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닭고기와 달걀까지 넣으며, 닭 삶은 국물에다가 말아서 갖은 양념을 하니 얼마나 맛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양은 서울냉면의 갑절이 실히 되며 값은 단돈 15전입니다. (중략) 고기 국물이라도 서울냉면 국물은 맹물에 간장을 끼얹은 것 같아서 한 모금도 마실 만하지 않지만 이곳 냉면 국물은 고기 삶아낸 국물 그대로 차게 해서 붓는 것이라 맛이 훌륭합니다.”
글 내용은 내내 평양냉면 자랑이지만, 그 비교 대상인 서울냉면도 당시 경성 사람들이 많이 먹는 음식이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울의 냉면은 광복 이후에도 꾸준히 많이 팔렸다. 냉면집은, 지금과 비슷하게, 대체로 사대문 안에 있었는데,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냉면집의 전통적 입지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65년 서울시가 점심때 식당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직업과 그들이 먹는 음식을 조사한 자료가 있는데, 조사 대상 114명 중 제일 많이 먹은 것이 냉면이고 그 다음이 불고기백반, 설렁탕, 비빔밥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2012년 현재 상황을 보면, 서울에 냉면집이 많지 않다. 을지로에 몰려 있는 몇몇의 오랜 냉면집과 그 외 서울 여기저기에 박혀 있는 냉면집이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렇다면 서울 사람들은 30~40년 만에 냉면을 안 먹게 된 것일까.
ⓒ황교익 제공 을지로의 냉면집 고객은 오랜 단골이 많다. 이들은 보통 ‘선주후면’의 전통(?)을 따른다. 혼자서도 그렇다. |
냉면 전문점은 얼마 없지만, 서울 사람들은 냉면을 무지무지 많이 먹는다. 고깃집에서 먹고, 또 분식집에서도 먹는다.
조선에서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서울의 냉면집은 나름의 독특한 영업 형태를 갖추었다. 불고기와 냉면의 결합, 수육과 냉면의 결합 같은. 또 선주후면(先酒後麵:먼저 불고기와 수육에 술 마시고 나중에 냉면을 먹음)이라는 냉면집만의 ‘스토리’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전통적인 냉면 전문점들은 1970년대 이후 크게 쇠퇴하게 된다. 그 첫째 원인은 ‘위생’이다. 보건당국은 여름 성수기에 맞추어 집중적으로 냉면집 위생 단속을 했다. 매년 여름이면 언론에서는 “대장균 냉면” “콜레라 위험” 따위 기사를 대대적으로 내보냈다. 여름 한철 장사인데, 이런 직격탄을 맞고 버틸 수 있는 냉면집은 드물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냉면집은 다소 특이한 경쟁 상대와 맞서야 했다. 당시 경제 사정이 나아지자 고깃집이 크게 늘었다. 이들 고깃집에서는 냉면을 아주 싸게, 어떤 때에는 공짜로 냈다. 이 고깃집의 싸구려 냉면에 맛을 들인 서울 사람들은 냉면 전문점에서 냉면을 너무 비싸게 파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고, 그렇게 냉면집들은 손님을 잃어갔다.
서울에서 냉면 전문점은 을지로와 그 인근에 몰려 있다. 1946년에 개업한 우래옥이 있고, 1970~80년대에 개업한 필동면옥·을지면옥·평양면옥 등이 있다. 서울에서의 긴 냉면 역사를 상기하면 이들 식당이 문을 연 지는 그다지 오래되었다고 할 수 없다. 또 이 냉면집들은 한결같이 그 맛과 조리법의 전통이 평양에 있음을 강조한다. 손님도 이 냉면들이 평양의 것이라 의심하지 않는다.
1948년 <경향신문>에 실린 독자 투고의 짧은 글이 퍽 인상적이다. 서울시민이 투고한 것인데, 그때만 하더라도 서울냉면에 대한 서울시민의 자부심이 있었을까? “평양냉면. 냉면옥(冷麵屋)에는 흔히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평양냉면이 아무리 맛있은들 삼팔선을 넘어 운반해왔단 말인가요. 서울서 만드는 냉면을 평양냉면이란 새빨간 거짓말.”
앞서 인용한 1926년 <동아일보> 기사에 ‘평양육’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평양 쇠고기’란 뜻이다. 평양냉면이 유명하게 된 것은 이 평양의 소 덕분이다. 일제가 한반도의 소 품종을 통일화하기 이전에는 지역마다 특유의 소가 있었는데, 평양의 소, 그러니까 평양우(平壤牛)가 맛있기로는 한반도의 으뜸이었다. 이 평양우의 가치를 발견한 쪽이 일제였으며, 일제는 이 평양우를 적극 증식하였고 또 본국으로 상당량 수입해갔다. 당시에 평양냉면이 맛있다 한 것은 이 평양우로 우려낸 육수 덕이라 할 수 있다. 이 평양우를 빼면, 메밀이며 그 외 조리법에서 서울을 포함해 한반도 여타 지역의 냉면이 평양냉면만 못할 요소는 없어 보인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에 남은 북녘 실향민들에게 서울에 포진한 평양냉면이 위안의 음식이 될 수는 있지만, 서울에도 오랜 전통이 있음에도 스스로 서울냉면이라 주장하는 냉면 전문점 하나 없다는 것은 정도 600년 전통의 서울에 안 어울리는 일이다(덧붙임:1939년 개업한 한일관은 냉면 전문점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냉면을 스스로 서울냉면이라 부른다).
‘닭 한 마리’ 이름은 누가 붙였을까
닭한마리라는 이름에는 닭백숙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안주로 좋고 끼니로도 훌륭한 이 ‘코스식 만찬’을 달리 부르고 싶었으리라. 닭이 몸에 좋다는 보양 신화까지 담겨 있다.
한국인이 먹는 육류 중에 닭고기가 제일 싸다. 사료 투여량에 대한 증체량에서 소·돼지와 비교해 월등히 효율이 높아서 그렇다. 고기로 먹는 닭을 육계라 하는데, 이 육계를 식당에서 먹는 닭의 크기까지 키우는 데 30여 일이면 된다. 채소보다 더 빨리 자란다고 할 수 있다.
이 싼 닭고기를 한국인은 그렇게 저급한 음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쇠고기와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적어도 돼지고기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다고 여긴다. 보양 음식으로서의 지위에 이 닭고기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다. 통닭·백숙·삼계탕·닭볶음탕 등등을 먹으면 어쩐지 몸에 좋을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한국인이면 다 같이 공유하는 정서일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에서 닭을 키웠지만 양껏 먹을 수는 없었다. 한반도 토종닭은 지금의 육계처럼 빨리 자라는 것도 아니고 산란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는 토종닭을 도태시키고 외래 종자를 이식했다. 그렇다고 일제강점기부터 닭고기를 충분히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규모 양계 농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나마 농가에 조금씩 있던 닭들의 씨가 마르게 되는데, 전쟁통에 눈에 보이는 대로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전쟁 후 미국이 원조품으로 닭을 약 40만 마리 들여와 농가에 공급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 당시 피폐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후 복구기인 1960년대에도 닭은 흔하지 않았다. 사위나 와야 씨암탉 잡아주던 시기였다. 한국인이 닭고기를 보양 음식으로 여기는 것은 그 가난한 시절의 추억이 아직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교익 제공 동대문 닭한마리 골목에 있는 한 식당의 외관. 요즘 손님 절반이 일본인이다. |
1970년대 들어 닭고기 수급 사정은 확연히 달라진다. 나무와 철사망으로 서너 층 높이의 케이지를 길게 지어 닭을 치는 농가가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사육 마릿수만 보아도 1960년대 1000만 마리 정도였던 것이 1970년대 초에 2000만 마리를 넘긴다. 전국 어디든 시장 골목 입구에서 볼 수 있던 닭집들은 이즈음에 생긴 것이다.
닭이 이리 넘쳐나도 닭이 보양 음식이라는 오랜 관념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즈음에 닭고기가 보양 음식이라는 관념이 더 강화되었다. 외식업체 때문이다. 통닭집은 ‘영양센타’라 간판을 붙였고, 닭백숙에 인삼 뿌리 하나 달랑 넣고 삼계탕이라며 팔았다. 여름날에 복달임으로 먹던 개장국이 이 삼계탕과 닭백숙·통닭 등에 밀려났다. 한국인의 보양 음식으로 닭이 우뚝 선 것이다.
한국인의 보양 음식 신화 보여줘
동대문 닭한마리는 한국인의 보양 음식 신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음식이다. ‘닭한마리’라는 그 이름에서부터 뭔가 ‘필’이 오지 않는가. 닭을 통째로 먹으니 기운이 날 것 같은.
동대문 근처는 큰 시장이다. 종합시장일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제일 큰 의류시장이기도 하다. 닭한마리 식당들은 이 시장의 골목 안에 있다. 좁은 골목에 규모 있는 식당만 서넛 된다. ‘닭한마리’를 음식 이름으로 처음 썼다는 식당은 1978년에 개업했다고 한다. 닭한마리의 원래 이름은 닭백숙이다.
원조라고 하는 닭한마리 식당 측의 말에 따르면 닭한마리 작명은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이 식당에서는 닭백숙을 전문으로 내었다. 그 당시에는 인근에 동대문종합터미널이 있었다. 손님 중에 차 시간을 맞추어야 하는 사람도 많았다. 시간 없는 손님들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주문을 했다. “여기, 닭한마리” 하고. 닭백숙인데 두 마리, 세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를 달라는 뜻으로 손님이 “닭한마리” 하고 주문했고 그게 음식 이름이 된 것이라 하였다.
ⓒ황교익 제공 닭한마리 상차림. 손님이 직접 닭을 해체해야 한다. |
단지 손님이 그리 불렀기 때문에 닭한마리가 음식 이름으로 굳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닭백숙이라는 이름과 경합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주인이든 손님이든 닭한마리라는 이름에서 뭔가 독특한 매력을 발견하는 단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닭백숙 그 이상의 무엇이 이 닭한마리에 있었다는 뜻도 된다.
닭한마리는 커다란 양푼에 닭이 통째로 담겨 나온다. 다 익힌 것이지만 가스 불 위에 올려 또다시 끓인다. 깔리는 찬은 김치, 양푼에 넣을 가래떡이 전부이다. 종업원이 가위와 집게를 놓고 가는데, 손님이 직접 이 닭을 ‘해체’해야 한다. 고기가 데워지면 이를 발라서 고춧가루·간장·식초·겨자 등으로 버무린 양념에 찍어 먹는다. 가래떡도 여기에 찍어 먹는다. 국물이 느끼하다 싶으면 김치를 더하면 된다. 고기를 다 먹고 나면 그 국물에 칼국수를 끓여 먹는다. 이것이 모자라면 밥을 넣어 죽을 끓인다. 닭한마리를 먹을 때 보통은 술을 한잔하는데, 고기는 안주가 되고, 칼국수와 죽은 끼니가 된다. 이 가격에 이만한 만족감을 주는 음식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닭백숙이라는 이름은 이 ‘코스식 만찬’의 이름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닭한마리로 최대 만족을 줄 수 있는 이름으로, 손님이 무심코 던지는 “여기, 닭한마리”에 주인이든 손님이든 필이 꽂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닭한마리를 상 위에 놓고 보면, 특히 그 상에 서너 명이 앉았다면, 그 고기의 양은 참 볼품없다. 먹성 좋은 사람이라면 그 닭한마리를 다 뜯어야 만족할 것이다. 이 빈약한 상차림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줄 수 있는 음식 이름으로 닭한마리도 훌륭해 보인다. 닭의 일부가 아니라 닭을 통째 한 마리 다 먹는다는 위안 혹은 허영이 이 이름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여기에 닭이 몸에 좋다는 보양의 신화까지 덧씌워져 있으니 그 만족도는 극에 달하는 것이다.
ⓒ황교익 제공 닭고기를 다 먹고 나면 칼국수를 넣어 먹는다. |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되기도
동대문 닭한마리는 동대문시장 상인들의 음식으로 시작되었다. 이제 동대문시장에 쇼핑을 온 일본 관광객에게도 소문이 나서 지금 손님 절반은 일본인이다. 지난해 봄에는 세계적인 식당 평가서 <미슐랭 가이드> 한국판에 닭한마리 가게가 실려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음식점에 별점을 주는 ‘레드 가이드’가 아니라, 한국의 여러 관광지를 소개하는 ‘그린 가이드’에 실린 것일 뿐이지만, 그 덕에 동대문 닭한마리는 또 한번 유명해졌다.
닭한마리 식당에서는 이제 “여기, 닭한마리” 하고 주문하지 않아도 된다. 단일 메뉴이니 앉으면 상이 저절로 차려진다. 상에 놓인 음식을 보면 참으로 빈약해 괜히 무안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양푼에 김이 오르고 가위를 들고 고기 자르고 식성대로 양념 비비고 하다보면, 그러니까 손님이 음식을 조리하느라 분주해지면 그 무안함은 어느 결에 사라진다. 여기에 술 한잔 마시고 칼국수를 직접 끓이고 하면서 상 위에는 즐거움이 가득해진다.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것과는 다른 즐거움이 있다. 닭한마리 다 먹고 일어설 때면 국물 찌꺼기와 양념이 덕지덕지 붙은 빈 그릇들이 상 위에 가득해진다. 닭한마리로 든든하게 보양을 한 것이다. 서울의 서민은 이런 음식이라도 있어서 팍팍한 삶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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