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햇살 아래 유채꽃 흐드러진 들판이나 순백의 백사장 너머로 환하고 푸르게 반짝이는 바다. ‘봄날의 제주’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풍경입니다. 하지만 실상 제주의 봄날을 대표하는 건 비(雨)입니다. 봄날 제주에는 유독 비가 잦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기상 통계를 들춰 보면 4월 한 달 서귀포에 비 온 날이 평균 열흘이 넘었습니다. 같은 기간 비가 내린 날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은 것이지요. 확률만 따지면 2박3일로 제주여행을 떠난 여정에서 하루쯤은 비를 만나게 되는 셈입니다. 제주의 봄장마를 두고 주민들은 ‘고사리장마’라고 했습니다. 고사리 새순이 한창 나올 때 내리는 비라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역시 봄에 비가 많이 내리는 이웃 일본에서는 봄장마를 두고 ‘쓰유(梅雨)’라고 한답니다. 이 역시 매화가 피어나는 봄 무렵에 내리는 비라고 해서 이렇게 불리는 모양입니다. 모처럼 제주까지 멀리 떠난 여행에서 고사리장마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궂은 날씨가 야속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 내리는 봄날 제주의 정취를 제대로 즐길 줄만 안다면 내리는 비가 오히려 행운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보통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비가 내리면 제주 전역에 허다하게 들어선 실내 박물관이나 전시장 등을 찾아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지만 않는다면 가볍게 우산을 들거나 우비를 입고 한라산의 중산간 지역이나 바닷가를 찾아 나서는 게 백 배쯤 더 운치있습니다. 안개비가 몰려다니는 중산간 도로를 따라 삼나무숲 사이로 드라이브하는 맛, 우산을 쓴 채 남원 큰엉해안 산책로에서 바라보는 촉촉한 제주 바다 풍경, 평소에는 건천(乾川)이었다가 비가 오면 한라산 자락을 내려온 물을 콸콸 쏟아내는 무수천계곡의 기암괴석, 호텔 정원에서 바비큐를 구우며 텐트 안에서 듣는 빗소리, 해안가 카페의 통창 너머로 비 내리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맛…. 이 모든 것은 비가 오는 날이 아니고서는 만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제주에서 왈츠곡의 피아노 소리처럼 경쾌하게 내리는 봄비 소리를 들으며 찾아가볼 만한 곳들을 두루 돌아봤습니다. 마침 취재를 위해 제주에 당도한 날도, 그 이튿날도 비가 내렸습니다. 제주에 머무는 내내 비가 내렸지만, 제주에서의 여정은 맑고 화창한 날보다 오히려 더 운치있고 낭만적이었답니다.
# 고사리장마에 큰엉산책로에서 굽어보는 절경 제주에는 해마다 이맘때 봄장마가 있다. 이름하여 ‘고사리장마’다. 강수량은 많지 않지만 사흘이 멀다 하고 비가 쏟아진다. 모처럼 떠난 여행에서 빗줄기를 만나게 되면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겠지만, 그게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특히 제주에서 만나는 봄비는 오히려 여행을 한층 더 윤기있고 촉촉하게 만들어 준다. 비가 내리면 제주 난대림 수목의 초록빛은 더 짙어지고, 안개비로 가득한 한라산 중산간의 정취도 한층 운치있다. 통창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 한잔을 앞에 두어도 좋겠고, 우비를 입고 해안 오솔길을 가볍게 산책하는 맛도 그만이다. 제주에 나긋나긋하게 내리는 봄비는 이처럼 여행자들의 감성을 한층 더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게 해준다. 비 오는 날의 명소로 첫손으로 꼽을 만한 곳이 바로 서귀포시 남원읍의 큰엉산책로다. 큰엉은 ‘큰 바위 동굴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언덕’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올레길 5코스가 이 산책로를 지나지만, 올레길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큰엉산책로는 빼어난 경관으로 제주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이 높았다. 큰엉산책로는 높이 20m를 오르내리는 해안가 절벽을 따라 이어져 있다. 비에 젖어 더 검게 윤이 나는 현무암 절벽 아래로는 깊은 동굴이 입을 딱 벌리고 있고, 동굴 입구에는 넘실거리는 옥빛 파도가 흰 포말로 부서진다. 안개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바위 절벽에 바다, 그리고 해무까지 겹쳐진다. 이런 광경을 보러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까지도 비가 내리는 날이면 우산을 받쳐 들고 이곳을 찾아 가벼운 산책을 즐긴다. 그래서 큰엉산책로는 제주에서 비 오는 날에 더 붐빌 정도다. 빗줄기가 가늘다면 아예 남원읍에서 출발하는 올레길 5코스를 다 걸어도 좋겠고, 빗줄기가 굵다면 금호리조트 쪽으로 들어 우산 하나 들고 산책로의 하이라이트 구간만 돌아본대도 좋겠다. 올레길 5코스는 큰엉산책로를 지나서 위미리의 조배들머코지까지 이어진다. 조배들머코지는 위미리 해안에 있는 기암거석으로 한때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이 지역에 큰 인물이 날 것을 우려한 일본인들이 세도가 집안을 감언이설로 꼬드겨 바위를 부수는 바람에 거석 밑에서 승천을 기다리던 용이 붉은 피를 뿜으며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협곡을 걷는 맛 아는 이들이 드물지만 제주에는 다른 곳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경관을 품은 협곡이 곳곳에 숨어 있다. 화산이 분출하면서 용암이 흘러간 자리가 그대로 기기묘묘한 협곡이 돼 버린 곳이다. 안덕계곡, 아흔아홉골, 용연, 방선문계곡 등이 그런 곳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빼어나고 독특하면서 기괴한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의 무수천계곡이다.
무수천을 이루는 물은 한라산 정상의 서북벽과 장구목 일대에서 시작해 어리목을 지나 이곳으로 흘러든다. 육지의 계곡은 대부분 산자락과 산자락이 만나는 해발고도 높은 쪽에 발달돼 있는데, 제주의 무수천계곡은 갑자기 평지의 땅이 푹 꺼지면서 이뤄져 있다. 직각으로 꺼진 계곡의 좌우 벽은 까마득한 벼랑이고, 그 아래 계곡에 뒹구는 집채만 한 바위들은 모두 화강암이다. 화산 분출 때 흘러내린 현무암은 물살에 다 깎이고 그 아래 단단한 화강암이 드러난 것이다. 바위는 마치 만물상을 방불케 한다. 자그마한 돌이 물살에 돌면서 바위를 깎아내 곳곳에 마치 아이스크림 스푼으로 떠낸 듯 둥글고 매끄러운 흔적을 남겼다. 얼마나 오랜 시간들이 이토록 단단한 돌들을 매만졌던 것일까. 무수천계곡의 하이라이트는 광령교에서 창오교까지 이어지는 구간. 비가 내리는 날이라면 길섶을 따라가며 수석을 닮은 기암괴석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감상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겠고, 맑은 날이라도 계곡으로 내려가 맑은 소를 이룬 구간에서 풍광을 즐겨도 좋겠다. # 초록의 난대림 사이를 걸어서 만나는 폭포 천지연폭포는 예나 지금이나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필수 관광코스로 꼽히던 곳. 지금도 제주를 한번이라도 가봤다면 천지연폭포를 못 봤을 리 없겠다. 그러나 천지연폭포는 맑은 날보다 비 오는 날에 찾아가는 것이 제격이다. 우선 폭포까지 걸어 들어가는 들머리의 운치부터 빼어나다. 길섶에는 유채꽃이며 제비꽃이 수줍게 피어났고, 바닥에는 선혈처럼 붉은 동백꽃이 뒹굴고 있으며 길가의 몇 그루 매화나무에는 분홍빛 환한 꽃도 달렸다.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비에 젖은 초록의 난대림으로 들어 새소리를 들으며 걸어 들어가는 맛도 좋고, 길 끝에서 피어나는 안개로 허리를 휘감은 폭포의 자태도 볼 만하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천지연폭포는 물줄기도 여럿으로 갈라지고 내리꽂히는 물살도 한층 힘차다. 북적거리던 관광객들도 비가 흩뿌리면 띄엄하니 고즈넉한 숲길 끝에 비밀처럼 숨어 있는 폭포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모험의 기분도 만끽할 수 있다. 제주에는 비가 아니라면 보지 못하는 풍경도 있다. 비가 내린 뒤에야 비로소 장쾌하게 물을 쏟아내는 엉또폭포다. 엉또폭포는 웬만한 비에는 물줄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강수량이 적어도 70㎜쯤은 돼야 폭포다운 위용을 보여준다. 봄철의 고사리장마 기간에는 강수량이 이쯤 되는 날이 드문 편이니 비가 내리는 동안이나 비가 그치자마자 찾아가야 한다. 비가 그친 뒤 반나절만 지나도 물줄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니 서둘 일이다. 만일 비가 적게 내려 쏟아지는 폭포수가 없더라도 실망할 것은 없다. 물줄기가 장쾌하게 쏟아질 때보다는 영 못하긴 하지만, 까마득히 올려다보이는 폭포 주변의 석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만으로도 입이 딱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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