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글부글 부대찌개, 널 오해했구나
부대찌개가 한국전쟁 후 미군 부대의 잔반으로 끓인 음식에서 비롯되었다지만, 지금 음식과는 많이 다르다. 고난의 시기를 이겨낸 민족적 자부심이 이 음식 안에 담겨 있다.
용산의 외국군 주둔 역사에는 오랜 ‘전통’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왜군은 한양을 점령하고 용산에 대륙 침략을 위한 보급 기지를 두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청의 군대가 용산에 진을 쳤다. 일제강점기 내내 용산은 일본군의 땅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 땅에 미군이 다시 들어오고 1953년 정전협정 직후 미군은 용산에 눌러앉았다. 2016년 이후 용산의 미군은 평택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미군은 용산 외에도 부산·인천·원주·춘천·동두천·수원·의정부·진해 등등 한반도 곳곳에 기지를 두고 있다. 이들 기지도 단계적으로 통합, 이전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미군은 주둔지의 물건을 잘 쓰지 않는다. 웬만한 것은 미국에서 다 가져온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채소류도 냉동하여 가져오는 정도이다. 이 물건은 주둔지 밖으로 빠져나오기 마련이고, 그 물건들로 인해 주둔지의 생활이 미국화하기도 한다. 콜라·커피·피자·초콜릿·햄·소시지·치즈 등이 한국의 일상 음식으로 재빨리 자리 잡은 것도 미군 덕(?)이 크다.
ⓒ시사IN 조우혜 서울 서대문 네거리에 있는 한 부대찌개집의 외관이다(위). ‘존슨탕’이라는 이름이 간판에 적혀 있다. |
한국전쟁은 온 국민을 빈민으로 전락시켰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미군 부대에서 좋은 물건이 빠져나와도 이를 살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들이 쓰다 버린 것을 가져다 귀하게 썼다. 거지도 미제 깡통을 들면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다. 미군 부대에서 몰래 나오는 먹을거리도 그들이 먹다 버린 것이었다. 잔반, 즉 음식물 쓰레기였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에는 온갖 것이 들어 있었다. 고기 덩어리도 있고 햄·소시지 등도 있었을 것이다. 케첩에 버무려진 샐러드도 있었을 것이고, 빵 조각도 있었을 것이다. 담배꽁초도 있었을 것이고, 휴지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솥에 넣고 끓여서 먹었다.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음식의 이름은 ‘꿀꿀이죽’이었다. 그래도 잘 팔렸다. 그때는 너나없이 가난했고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이 꿀꿀이죽은 1960년대 말까지도 팔렸던 것으로 보인다.
꿀꿀이죽 묘사한 1964년 <경향신문> 기사
부대찌개는 미군 부대의 잔반을 가져와 끓였던 꿀꿀이죽에서 비롯했다고 흔히 말한다. 과연 그럴까? 언어란 묘하여, 그 언어가 이르는 실체가 장기간 보이지 않게 되면 머릿속에 그 실체와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래서 젊은 세대에게 꿀꿀이죽을 설명하면 요즘 흔히 먹는 부대찌개 정도의 음식이겠거니 여기게 된다. 나도 꿀꿀이죽을 먹어보지는 못했다.
조금 리얼하게 꿀꿀이죽을 묘사한 글이 있다. 1964년 <경향신문> 1면 왼쪽 톱 기사이다. 기사 제목은 ‘허기진 군상’이며, 드럼통에 담긴 꿀꿀이죽을 사가는 사람들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먹는 것이 죄일 수는 없다. 먹는 것이 죄라면 삶은 천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돼지 먹이로 사람이 연명을 한다면 식욕의 본능을 욕하기에 앞서 삶을 저주해야 옳단 말인가?” 그러면서 30원어치이면 여덟 식구가 먹을 수 있다는, 꿀꿀이죽을 사가는 한 여인네의 인터뷰가 붙어 있다. “쌀 30원어치로 죽을 끓여 여덟 식구가 풀칠하면 점심때 식은땀이 쏟아진다.” 기사는 이어진다. “담배꽁초, 휴지(무엇에 썼는지도 모름) 등 별의별 물건이 마구 섞여 형언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이 반액체를 갈구해야만 하는 이 대열! 그들은 돼지의 피가 섞여서가 아니다. 우리의 핏줄이요 가난한 이웃일 따름이다….”
ⓒ황교익 제공 부대찌개에는 소주가 으레 따른다. 라면에 햄, 소시지를 안주로 소주 한잔 하고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게 ‘코스’이다(위). |
그러면 지금의 부대찌개는 언제, 또 어찌 만들어졌을까. 미군 기지가 가까운 지역, 또 미군 부대 물건이 유통되는 시장 근처의 식당에서 처음 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서울에서는 용산, 남대문시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의정부 부대찌개가 유명한데, 여느 향토 음식처럼 한 식당의 명성이 한 지역으로 확장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대찌개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이 음식이 자신이 창안한 음식이라는 관념이 있었을까. 부대찌개의 조리법을 보면 대부분 김치가 들어가는데, 돼지고기 대신 햄과 소시지를 넣은 김치찌개 정도의 음식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재료를 넣고 끓이는 우리의 찌개 문화에 이 햄과 소시지 정도는 별스러운 재료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니, 애초에 이 햄과 소시지가 들어간 찌개의 이름은 김치찌개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김치 없으면 부대찌개 맛 많이 비어
1980년대 중반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그러니까 미군 부대의 것과 맛이 같은 햄·소시지가 국내 기업에서도 생산되었다. 이 햄과 소시지는 찌개를 끓일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경제 사정은 아주 좋았다. 덩달아 외식 산업이 급팽창했다. 그중에 부대찌개도 툭 불거졌다. 스토리가 좋았다. 한국전쟁의 애환이 담겨 있는 음식, 미군 부대에서 그 재료를 가져왔을 것이라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음식명, 그리고 1966년 방한한 미국 대통령 존슨의 이름을 따 한때 ‘존슨탕’이라 불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풍문까지 붙었다. 1990년대에 들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부대찌개를 탐닉했다. 이제 햄과 소시지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름이 부대찌개이기만 하면 미군 부대를 바로 떠올리게 되고, 한때 가난했던 그 시절을 ‘추억’까지 하게 되고, 마침내는 그 음식에 한국인의 영혼이라도 담겨 있는 듯 여기게 되었다.
ⓒ황교익 제공 이태원 바다식당의 부대찌개와 소시지구이. 바다식당 창업자는 독일 이민 생활을 하면서 끓여 먹던 찌개를 식당에 내었다 한다. |
부대찌개에 햄·치즈·통조림 콩 등등 서양의 음식 재료가 들었다 하지만 그 맛을 보면 김치찌개의 일종이다. 이태원 등에 김치를 넣지 않은 부대찌개가 일부 있기는 하지만, 이는 별종이다. 부대찌개는 김치 맛에 의존하고 있고, 또 김치가 없으면 맛이 많이 비게 된다. 신김치의 개운한 산미와 칼칼한 매운맛에 햄·소시지의 단맛과 짠맛이 보태진 음식인 것이다.
누구든, 부대찌개를 먹는 자리에서는 그 유래에 대해 한마디씩 하게 되어 있다. 그때에 꿀꿀이죽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하겠지만, 그 꿀꿀이죽의 실체를 머릿속에 그리는 것까지는 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꿀꿀이죽이라는 말에 깊은 향수까지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한국전쟁 후 고난의 시대를 이겨낸 민족적 자부심이 이 부대찌개 냄비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용산의 부대찌개 집에서 마주치는 미군들에게 이 부대찌개의 역사에 대해…, 아니다. 미군이 이 땅에서 다 떠나고 난 다음에, 갈라진 이 땅이 통일되고 난 다음에, 부대찌개의 ‘전설’을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때 너희의 쓰레기도 먹었다고.
족발 골목은 왜 장충동일까
보양 음식의 으뜸인 ‘족’에 서민적이고 친숙한 ‘발’이 붙어 족발이 되었다. ‘체력은 국력’이던 시절, 별다르게 체력을 키울 방법이 없던 서울 시민은 족발 한 접시로 위로받았다
족발은 돼지의 앞뒤 발과 그 바로 위 관절 부위까지를 말한다. 족이 발이고 발이 족이니 같은 뜻의 말이 한자어와 한글로 반복되어 있다. 이 족발이라는 단어는 소에는 쓰지 않는다. 소의 그 부위는 ‘우족’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족발은 ‘각을 뜬 돼지의 발, 또는 그것을 조린 음식’으로 나와 있다.
대체로, 한자로 사물을 이르면 고급하고 한글로 이르면 저급하다는 관념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한자는 귀족적이고 한글은 서민적이다. 한글로 쓰면 친근하다. 돼지의 앞뒤 발과 그 바로 위 관절 부위를 이르는 단어가 족발인 것은 이것으로 조리된 음식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가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돈족 또는 돼지 다리라 이르지 않고 족발이라 부르는 까닭에서 족발을 소비하는 한국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황교익 제공 장충동의 어느 족발집. 족발을 쌓아두고 칼질하는 모습을 바깥에서 볼 수 있게 해놓았다. |
사물의 이름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언중의 마음이 묻어 있다. 특히 음식 이름 중에 ‘재료+조리법’으로 구성된 일반의 단어가 아닌 것에는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의 정서가 강렬하게 박혀 있기 마련이다. 족발도 여기에 해당한다. 돼지 다리를 그냥 돈족이라 하면 보양 음식의 으뜸 자리에 있는 우족의 명성에 손상을 줄 수 있다. 족은 족인데 우족보다는 모자란 족. 그래서 급이 낮은 ‘발’이라는 한글 낱말을 덧붙이자 생각한 것은 집단 무의식이었을 것이다. 보양 음식의 으뜸인 ‘족’에 서민적이고 친숙한 ‘발’을 붙이면서 언중은 아주 만족하였을 것이다. 서민의 보양 음식 이름으로 이만한 것이 또 있겠는가.
집에서 해먹는 족발 보양 음식은 탕이 대부분이지만 바깥에서 먹는 족발 보양 음식은 조림이다. 간장을 기본 양념으로 푹 조린 것인데, 족발이라고 하면 대개 이 음식을 뜻한다. 찝찌름한 간장 맛에 설탕의 단맛, 생강의 싸한 맛, 그리고 가끔은 여러 한약재의 향이 더해져 있다. 조선의 문헌에는 이런 음식이 없다. 그러나 문헌에 없어도 실제 있었을 수는 있다. 일부 지방의 제사 음식 중에 간장으로 조리는 닭찜이 있는데, 이 조리법에 닭 대신 돼지고기나 족발을 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제사 음식은 음식 문화의 화석이라 할 수 있다. 큰 변화 없이 전해지는데, 닭찜도 그럴 것이다).
오향장육을 입맛에 맞게 재창조
‘재료+조리법’을 따라 작명을 하자면 돼지다리 간장조림이다. 별스러운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음식이니 조선의 누군가가 지금의 족발과 유사한 음식을 먹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쉽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돼지고기가 귀했을 터인데, 그 족발로 조리된 후 양이 크게 주는 조림을 해먹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어쩌다가 해먹었을 것 같은 음식 정도로는 문화가 될 수 없으며, 이를 붙잡고 연구하는 것도 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시사IN 조우혜 족발집 간판이 늘어선 장충동 거리. 장충체육관이 없었으면 장충동 족발도 없었을 것이다. |
족발의 조리법과 맛에서 거의 유사한 음식이 한반도에 있다. 중국 음식점의 오향장육(五香醬肉)이다. 오향장육은 오향(五香)에 간장(醬)을 더한 국물에 돼지고기(肉)를 조려낸 음식이다. 오향은 다섯 가지 향신료, 즉 초피·팔각·회향·정향·계피를 말한다. 오향장육과 족발은 그 맛이 흡사하다. 오향 중에 한국인이 싫어하는 몇 가지 향신료만 빼면 딱 그 맛이다. 장충동 족발의 원조 격에 드는 한 할머니도 여러 인터뷰에서 “중국집의 족발 음식을 보고 이를 따라 하였다”라고 말한다.
우리 땅에 화상(화교 상인)이 들어온 것은 임오군란(1882년) 이후의 일이다. 처음에는 인천에 집단 거주하다가 서울로 들어왔다. 화상은 세계 어디를 가나 음식 장사를 잘 한다. 화상의 음식점은 온갖 요리를 내는 스타일이 주류이나 별나게 단품 요리를 내는 식당도 있다. 오향장육 전문점도 여기에 든다. 오향장육에 하나 추가되는 것은 만두 정도이다.
이 오향장육 전문점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 오향장육 한 접시에 배갈(고량주) 한잔 마시고 만두로 마무리를 하는 선술집 형태이다. 2011년 서울에 남아 있는 오향장육 전문점은 아직 이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이 오향장육이 우리의 족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화상의 오향장육은 족발로 하지 않는다. 살코기로 한다. 오향장족이라는, 족발로 하는 음식이 일부 중국집에서 팔리고 있으나, 이건 근래에 한국인의 기호에 따라 개발 또는 확장된 것이다. 한국의 족발은 오향장육의 조리법을 일부 따라 했지만 고기 부위를 달리하면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재창조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장충동에 족발집이 10여 곳 된다. 저마다 원조라고 주장하는 이 집들의 개업 연도는 1960년대 중·후반이다. 장충동에 족발집이 크게 번진 것은 1970년대이다. 이즈음 장충동에만 족발집이 번창한 것은 아니다. 재래시장 곳곳에 이 족발집이 섰다. 그 까닭은, 족발이 싸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 양돈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족발은 차츰 흔한 음식이 되었는데, 특히 돼지고기를 일본에 수출하면서 그 부산물인 족발이 시장에 왕창 풀렸다. 족발은 일본인이 잘 먹지 않는 부위이니 한반도에 남은 것이다.
ⓒ황교익 제공 장충동 한 식당의 족발이다. 장충동 족발이라 하여 특별난 것은 아니다. 족발 맛은 한반도 어디서나 거의 비슷하다. |
보쌈·삼겹살·돼지갈비 따위와 족발의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보양’이라는 관념이다. 그런데 족발에 콜라겐이라는 단백질이 좀 더 많다는 것 외에는 이게 몸에 특별히 좋은가 하는 근거는 없다. 식당 주인이, 한의사가,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동의보감>에 족발이 나와 있는데” 하면 그게 ‘진리’이다. 1960~70년대는 ‘체력은 국력’이었던 시절이었다. 그 중심에 장충체육관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체육 경기는 이 장충체육관에서 거의 다 열렸다.
볼거리, 즐길 거리 없던 그 시절, 장충체육관은 서울시민의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특히 김일이 나오는 프로 레슬링이라도 한 판 벌어지면! 경기 후 ‘체력은 국력’이라고 더욱더 굳게 믿게 된 서울시민은, 별다르게 체력을 키울 방법이 없던 서울시민은 체육관 건너편의 족발집에나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족발 한 접시가 앞에 놓이면 또 누군가 “<동의보감>에 말야” 하고 설을 푸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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