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걸다_06

醉月 2012. 3. 23. 12:37
중국의 시골 목수 피카소를 이기다

 

▲ 치바이스, 석문24경, 체루취적도, 1910“선생님, 정말 이 그림을 사실 계획이십니까?”
   
   “그렇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베이징예술전문학교 교장 쉬페이홍(徐悲鴻·1895~1953)이 지인의 초대로 전시장에 갔을 때였다. 전시장에는 베이징 화단을 대표할 만한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었는데 한결같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어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실망한 그는 서둘러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사람들 눈이 거의 닿지 않는 구석에 걸린 그림 한 폭이 눈에 띄었다. 새우 몇 마리가 헤엄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는데, 소재도 참신하고 능숙한 붓놀림이 마치 물속의 새우가 금세 튀어나올 것처럼 기운생동했다. 흥분한 쉬페이홍이 구입 의사를 밝히는 붉은 띠를 걸려고 하자 곁에 있는 지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은 것이다.
   
   “작가가 나이도 많은 데다 베이징 화단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골 목수 출신입니다. 그런 사람의 작품을 사시겠다니 선생님답지 않으십니다. 선생님 명성에 누가 될 수도 있으니 다시 한번 신중히 고려해보시지요?”
   
   “무슨 소린가? 나는 이 작가를 우리 대학의 교수로 초빙할 생각이네.”
   
   1929년 가을의 일이었다.
   
   
   치바이스와 쉬페이홍
   
   그로부터 82년이 지났다. 눈밝은 쉬페이홍의 천거로 시골 목수에서 일약 베이징 화단의 총아로 부상한 치바이스(齊白石·1864~1957)는, 2011년 세계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작가가 됐다. 그의 작품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는 베이징의 자더(嘉德)경매에서 5720만달러(약 718억원)에 낙찰됐다. 2위는 원(元)나라 때 화가 왕멍(王蒙)의 ‘치천이거도(稚川移居圖)’가 차지했고, 쉬페이홍의 ‘구주무사낙경운(九州無事樂耕耘)’은 6위였다. 이는 파블로 피카소(7위)와 구스타프 클림트(8위), 에곤 실레(9위)와 앤디 워홀(10위)보다 훨씬 뛰어난 성적이었다. 현재 세계 미술시장에서 중국 미술품의 가치가 어떠한가를 반영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중국 작가들이 유럽과 미국의 ‘수퍼스타’를 물리치고 당당히 세계 미술계의 상층부로 급부상한 원인은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가치와 희소성 외에 구매자의 증가를 들 수 있다. 중국은 경제성장으로 신흥 부자들이 증가하고 예술 인구가 확대됐다. 높은 소득수준으로 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된 부자들은 부동산과 주식투자를 넘어 자신의 품격을 과시할 수 있는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 여기에 중국 경제의 가능성을 예측한 서양인들의 관심과 투자도 한몫했다. 중국 미술품은 이제 중국 내수시장을 넘어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최고가를 경신한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를 살펴보자. 축(軸)으로 된 이 작품은 가로 1m, 세로 2.66m로 두 그루 나무 위에 매가 그려져 있다. 작품의 좌우에는 간략한 전서체로 ‘인생장수 천하태평(人生長壽 天下太平)’이라고 적어 놓았다. 화제(畵題)를 전통적인 옛 그림과 달리 그림에 버금갈 만큼 크게 쓴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화제에 비하면 그림은 오히려 소략하고 담담하다. 이는 그림이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됐다기보다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춰졌음을 말해준다. ‘장수’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보통 사람들의 염원이라면, 천하가 ‘태평’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은 ‘영웅’의 몫이다. 영웅은 매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송백고립도’는 치바이스의 작품성을 뚜렷이 보여주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점잖다. 지나치게 전통적이고 과거 형식에 안주한 듯한 혐의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의 작품은 ‘송백고립도’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생명력이 넘치고 참신하다.
   
   
   독학으로 그림 공부
   
▲ 작년 세계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로 팔린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
치바이스는 후난성(湖南省) 상탄현(湘潭縣)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어 목공이 됐다. 그의 아버지는 허약한 아들에게 농사 대신 목공일을 익히게 했다. 그는 16세 때 나무에 꽃을 새기는 목공기술을 배웠고 20세 전후에는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힘든 노동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계속했다. 전각에도 관심이 있어 내로라하는 전각 전문가들을 찾아다녔다. 10여년 동안 전국을 여행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50세에 베이징에 정착했다. 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서 얻은 감흥을 붓으로 표현할 줄 알았다. 고화(古畵)에서 습득한 문인화의 깊이에 민간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생동감과 경쾌함이 더해졌다. 배추, 무, 오이, 죽순 등 창작의 소재는 친숙한 일상생활에서 나왔고 표현기법은 언제나 새로웠다. 심지어는 쥐나 올챙이도 등장했다. 그는 특히 새우 그림을 잘 그렸는데, 한번은 물을 길으러 가던 아낙이 그의 그림 앞을 지나가다 새우에 넋을 잃고 취해 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보수적인 베이징 화단에서는 치바이스를 받아주지 않았다. 파격적인 형식과 색감으로 무장한 시골 촌뜨기의 그림은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강고한 화단에서 철저히 외면받고 비난받았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쉬페이홍이 그를 발견할 때까지 10년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새로운 화법을 모색했다. 쉬페이홍이 구습에 물들지 않은 치바이스의 작품을 보고 ‘중국 화단의 막중한 짐을 질 수 있는 한 필의 천리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60년 동안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밀고 나간 고집스러운 창작력 때문이었다.
   
   
   쉬페이홍과 젊은 그들
   
▲ 쉬페이홍의 ‘우공이산’(부분), 1940
치바이스가 아무리 뛰어난 작가였다 한들 그를 알아주는 쉬페이홍의 안목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시골 목수’ 출신 무명씨의 작품을 산 쉬페이홍은 삼고초려 끝에 치바이스를 교수로 모셨다. 치바이스의 나이 66세 때였다. 먼 훗날 치바이스는 쉬페이홍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그대다.” 쉬페이홍의 발굴로 천의무봉의 솜씨를 발휘한 작가는 치바이스만이 아니었다. 우쭤런(吳作人), 장자오허(蔣兆和), 류보수(劉勃舒) 등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쉬페이홍의 도움으로 기량을 펼칠 수 있었다. 쉬페이홍이야말로 현대 중국미술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장쑤성(江蘇省)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쉬페이홍 역시 어려서부터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목격하며 자랐다. 수해로 13세 때 고향을 떠나 유랑생활을 한 그는 그림을 팔아 생활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서양화 복제품을 접하게 됐는데 동양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화려한 색채와 구도, 명암법에 의한 생생한 묘사에 깊이 매료됐다. 20세에 상하이로 떠난 그는 한 클럽에서 아편 침상으로 쓰던 곳에서 잠을 자고 그림을 그렸다. 말 그림을 잘 그려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 그는 일본 유학을 다녀와 베이징예술대학의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베이징예술대학은 신문화운동의 주역인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교장이었는데 관료적이고 보수적인 학술 풍토를 혁신하기 위해 후스(胡適), 루쉰(魯迅), 천두슈(陳獨洙), 쉬페이홍 같은 젊은 교수들을 채용했다.
   
   1927년 가을에 쉬페이홍은 32세의 나이로 프랑스에 유학을 떠나 8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중국적 소재를 서양화법으로 그렸다. ‘비사실적이고 여기(餘技)적인 접근’을 배격하고 정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철저히 사실주의적인 시각에서 그릴 것을 주장한 그의 회화관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서양화라는 그릇에 동양의 내용을 담는 ‘중서융합(中西融合)’의 태도를 버리고 수묵으로 전환했다. 그의 대표작 ‘우공이산(愚公移山)’은 서양화의 명암법과 해부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동양화의 필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는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는 특정한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각각의 장점만을 취할 줄 아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더불어 가능성이 있는 여러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할 줄 아는 참다운 교육자였다. 삶의 철학을 예술작품으로 구현해내고 다시 젊은 세대에게 전해준 쉬페이홍에 의해 현재의 중국 현대미술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치바이스 이후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미술시장은 지금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 홍콩과 마카오, 대만에 이르기까지 주요 대도시에는 곳곳에 갤러리가 성업 중이다. 세계의 화상들은 ‘중국 현대미술 4대 천황’인 왕광이, 장샤오강, 팡리쥔, 웨민쥔의 작품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이들의 작품은 한국의 화랑가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개혁개방시대(1976~1989)를 거치면서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세계로의 전환을 경험한 젊은 작가들은 개인과 사회의 대립과 갈등, 인류 문명에 대한 비판과 고민을 중국적인 그릇에 담아 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중국 현대작가들의 작품에서 다른 나라 작가들이 함부로 모방할 수 없는 ‘중국’만의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20세기 초에 살았던 1세대들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외래문화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전통을 지키고자 했던 1세대의 고집이 있었기에 그 바탕 위에서 2세대는 마음껏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었다. 이것이 2세대의 작품값보다 1세대의 작품값이 더 높게 책정되는 근본 이유다. 이것이 또한 담담한 필치의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가 최고가를 경신하게 된 비밀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길, 장다첸과 리커란
   
▲ 리커란의 ‘이강산수’, 1963
중국의 전통적인 산수화를 강렬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붓으로 표현한 장다첸(張大千·1899~1983)은 1930년대부터 치바이스와 더불어 ‘남장북제(南張北齊·남의 장다첸, 북의 치바이스)’로 일컬어질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화가로, 서예가로 그리고 시인이면서 수장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 그는 중국을 떠나 여러 나라를 체류하다가 말년에 대만에 정착했다. 그는 당(唐)대부터 시작되는 화려한 청록산수의 전통을 현대인의 감성에 맞게 혁신했다. 말년에 그린 ‘도원도(桃園圖)’의 화려한 색상과 감각적인 발묵법은 전통 산수화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돼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 답안으로 제시될 정도였다.
   
   중국 현대 산수화의 거장 리커란(李可染·1907~1989)은 치바이스나 장다첸과는 전혀 다른 길에서 중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했다. 16세에 상하이사립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우창숴(吳昌碩·1844~1927) 계열의 그림을 배웠다. 21세 때는 차이위안페이가 설립한 서호국립예술원에서 린펑미엔(林風眠·1900~1990)을 만나 형상의 과학적인 관찰과 소묘의 사실적인 묘사방법을 배워 철저한 현장 스케치를 실천했다.
   
   그에게 쉬페이홍과 치바이스와의 만남은 큰 자극제가 됐다. 치바이스의 필(筆)을 논하면서 ‘그의 선이 마치 현(弦)과 같다’고 감탄했다. 그는 오대(五代) 송(宋)대부터 전해오는 산수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그의 ‘이강산수’는 강한 먹빛과 힘찬 필치로 먹을 되풀이해서 쌓듯이 칠하는 적묵법(積墨法)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장다첸이 화려한 봄 산을 그렸다면 리커란은 녹음이 무성한 여름 산을 그린 듯 강렬하다. 그래서 리커란은 현대 화가 중에서 먹을 가장 잘 쓴 화가로 평가받는다.

 

春花가 몸을 열면 선비들 가슴에 꽃불이 일고…
이유신 포동춘지(浦洞春池)

▲ 이유신 ‘포동춘지’ 30×35.5㎝, 동산방

“3월에 남쪽에서 매화 핀다는 소식이 들리면 시간되는 사람끼리 모여 바로 출발하지요.”
   
   한 달 전에 수술을 하고 폄적(貶謫)당한 사람처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지인이 전화를 해서 솔깃한 제안을 내놓는다. 매화 구경이라니. 얼마 만에 들어보는 꽃 같은 소리인가. 완강한 겨울에 갇혀 오는 봄이 믿기지 않을 때면 섬진강에 갔었다. 죽지 않고 살아 나니 이번에도 갈 수 있겠구나.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서는 매화꽃이 펑펑 피어나기 시작했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안개처럼 피어있던 매화꽃이 시큼한 향기를 뿜으며 어른거렸다. 매화꽃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마음 맞는 사람끼리 나누는 대화는 얼마나 풍성할 것인가. 생각만으로도 벌써 마음속에 온기가 밀려든다.
   
   
   봄꽃 위로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거든
   
   계절은 바야흐로 봄. 복숭아꽃, 살구꽃이 ‘꽃대궐’을 이루는 화락(花樂)의 시간이다. 천지가 꽃으로 붉게 달아오르는 봄날, 집안에만 무심히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다. 봄에는 조금 들떠도 좋다. 꽃을 핑계 삼아 한 사람이 연통(連通)을 돌리면 지인들이 주르르 엮이게 되어 있다. 계절에 민감한 친구가 돌린, 번개팅을 알리는 쪽지는 이러하다.
   
   ‘오늘 저녁 유시(酉時). 봄꽃 위로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장관을 감상하시려거든 포동(浦洞)의 물가로 오시라. 회비는 무료. 흥에 겨워 시 한 수 읊을 수 있으니 지필묵 휴대 바람. 춘화(春花)가 난분분(亂紛紛)하니 곳간에 숨겨둔 곡주 한 병씩 들고 와도 모두 용서됨.’
   
   아침에 돌린 간찰(簡札)을 받고 여덟 명의 지인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다 한들 ‘만화방창 호시절’에 어이 아니 오겠는가. 번개팅이라 선약이 있는 친구 둘은 애석하게도 참석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후일담을 들으며 두고두고 아쉬움을 달랠 것이다. 좋은 장소에 좋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오늘만큼 행복한 날은 없으리라.
   
   포동의 물가에 반가운 얼굴들이 모였다. 생명 있는 풀과 꽃이 향기로운 체취를 흩날리면서 오늘 모인 사람들을 환영한다. 연못 속의 물풀은 미처 얼굴의 물기를 닦지도 못한 채 뛰쳐나왔다. 노을 속에 붉게 상기된 복숭아꽃은 굳이 설렘을 감추려는 기색도 없이 손님을 맞는다. 살구꽃도 뒤질세라 발목까지 발그스레하게 상기되어 시인의 눈앞을 어슬렁거린다. 가지마다 돋는 은밀한 속정. 춘화(春花)가 몸을 열어 지분 냄새를 풍길 때마다 선비들의 가슴에도 열꽃이 돋는다. 부끄러움은 나중 일. 무슨 수로 가슴속의 꽃불을 끌 수 있으랴. 꽃과 살 섞고 망가지는 것이 우선이다. 격정이 지나고 난 자리에는 흥분한 시(詩)편들이 널려 있다.
   
   
   저녁 노을 진 포동의 저물녘
   
   그날의 정경을 탁월한 붓질로 전해주는 이유신(李維新·18~19세기)의 재주 때문에 그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상자의 마음이 봄빛으로 물들 것 같다. ‘포동의 봄 연못’을 그린 이 작품은 ‘포동춘지(浦洞春池)’라는 제목으로 기념되었다. 그림 위쪽에는 그날의 정경을 묘사한 듯한 천원(泉源)이란 사람의 제시가 적혀 있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畵中有詩), 시 속에 그림이 있다(詩中有畵). 제시를 살펴보자.
   
   ‘물 맑은 포동의 물가(水淸浦洞漵)
   꽃향기 가득한 포동의 저녁 노을(花香浦洞霞)
   풀밭에서 시 짓고 술 마시며(詩樽芳艸上)
   물도 보고 꽃도 보고(看水又看花)’.
   
   봄 풍경을 그린 ‘포동춘지’는 ‘귤헌납량(橘軒納凉·여름)’, ‘행정추상(杏亭秋賞·가을)’, ‘가헌관매(可軒觀梅·겨울)’와 같은 화첩에 들어 있다. 네 작품 모두 윤필(潤筆)로 계절의 변화과정을 서정적으로 전해주는 명작이다. 이 화첩은 사계절을 한 화첩에 담은 ‘사계산수화(四季山水畵)’ 중에서 가장 싱그럽고 운치 있는 작품이다. 그림을 보는 순간 그림 속의 장소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그의 참신한 색감과 화풍은 신윤복(申潤福)에서 김수철(金秀哲)로 이어지는 이색화풍(異色畵風)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가을, 서울에 있는 한 화랑에서 이 작품들이 전시되었을 때 넋을 잃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다만 겨울 풍경인 ‘가헌관매’가 출품되지 않아 매우 아쉬웠다. 소장처를 알 수 없어서라고 하는데 다음 기회에는 꼭 출품되었으면 좋겠다.
   
   이유신은 조선 후기의 여항(閭巷) 문인화가다. 자(字)는 사윤(士潤)이고 호는 석당(石塘)인데 가계와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항문인 유재건(劉在建·1793~1880)이 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그에 관한 간략한 기록이 실려 있어 그가 중인 출신의 문인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산수화로 간략한 구도와 담담한 색의 사용이 특징이다. ‘포동춘지’는 이유신의 물기 젖은 화풍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작품이다.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백(李白·701~762)은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천지는 만물이 잠시 쉬어 가는 여관이고, 시간은 긴 세월을 거쳐 지나가는 길손이다. 덧없는 인생은 꿈같이 허망한데, 우리가 즐긴다 한들 얼마나 되겠는가? 때문에 옛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밤에도 노닌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었구나!’
   
   계절도 즐기고 몸도 돌보라는 ‘경고’처럼 몸에 생긴 종양을 떼기 위한 수술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병원 창밖으로 탄천을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한기로 가득한 1월의 시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사람과 웃으며 걷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꼭 딴세상 사람들처럼 생소했다. 문득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보였다. 내가 언제 저 사람들처럼 마음 편히 냇가를 거닐면서 즐겨본 적이 있었던가. 인생이 꿈처럼 허망하게 지나갈 텐데 나는 너무 노예처럼 일만 하고 살았구나. 옛사람들처럼 촛불을 밝혀 술자리를 벌인다 한들 무에 그리 자책할 만큼 인생을 낭비하는 사치가 될까. 좋아하는 사람들과 꽃그늘 아래서 만나 술잔을 부딪치며 부드럽고 따스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야 말로 진정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기쁨이 아닌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내게 다시 삶이 주어진다면 일중독에서 벗어나 하루에 한 번씩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흘러가는 바람 속에 얼굴을 적셔 보리라. 꽃피는 밤이면 보고 싶은 사람에게 불시에 전화를 걸어 무조건 만나자고 억지도 부려 보리라. 어둠에 묻혀 산책하는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거듭 중얼거렸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나이에 삶의 진리를 꿰뚫어볼 줄 알았던 황진이는 얼마나 통찰력이 뛰어난 시인인가. 이제 나는 청산리 벽계수가 되지 않겠다. 앞만 보고 달려가서 바다에 도착한 후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알고 후회하는 거친 물살이 되지 않겠다. 밝은 달이 빈 산에 가득할 때 잠시 쉬어가는 사치를 잊지 않으리라. 달밤을 거닐면서 벽계수 같은 친구가 있다면 읊어줘야겠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가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명월(明月)이 만공산(滿公山)하는 장관을 건성으로 보고 살았다면 그대여, 가끔은 고개를 들어 달을 쳐다보는 여유를 가져 보시라

 

달빛 매화가 선비의 지조를 말하다
20년간 매화에 취한 작가 송필용

▲ 달빛매화41 40x80cm, oil on canvas, 2011매화꽃이 피었습니다. 백매화, 홍매화가 다복하게 피었습니다. ‘이젠 끝났다’는 헛소문을 잠재우듯 늙은 몸을 열어 환한 꽃을 피웠습니다. 생명에 대한 그리움이 일제히 꽃등을 켜고 달빛을 비추는 봄밤에는 사멸해가던 희망이 기운차게 일어서는 숨소리로 왁자지껄합니다. 겨울도 아니고 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계절에 고목에 핀 매화는 경이롭습니다. 그래서 매화는 희망입니다.
   
   송필용은 20여년 전부터 전남 담양의 작업실에서 매화를 그렸습니다. 담양의 소쇄원, 면앙정, 송강정에서 시작된 탐매 여행은 선암사와 섬진강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작가는 긴 여행길에서 만난 매화의 아름다움을 쉬지 않고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매화 속에 투영된 옛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작가보다 먼저 그 길을 걸으며 가사문학의 세계를 풍성하게 했던 양산보, 정철의 발자취였습니다. 발자취를 따라 걷는 동안, 조선시대 문인들이 ‘매화도’ 속에 담고자 했던 선비정신이 송필용 작가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송필용 작가의 매화 그림은 농염하고 화려합니다. 붉은색이나 청색 바탕에 흐릿한 달빛을 배경으로 서 있는 매화는 맑고 선명하면서 기품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송필용 작가가 매화 그림에서 보여주고 싶은 뜻은 단순히 겉모습만이 아닙니다. 매화의 정신입니다. 봄이 시작되기도 전에 추위를 뚫고 가장 먼저 피어나는 매화는, 세상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 지조를 지킨 군자나 은일지사에 비유됩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의 꽃을 피우겠다는 의지를 상징합니다. 송필용의 달빛 매화는, 이리저리 치여 사느라 자신이 누군지조차 잊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옛 선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전해줄 것입니다. 송필용의 ‘달빛 매화’전은 서울 종로구 송현동 이화익갤러리(02-730-7818)에서 3월 20일까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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