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산수. 충북 단양의 풍광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연에서 삶의 도리를 찾았답니다.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알았던 것이지요. 청청한 소나무에다 선비들의 절의를 비유한 이인상의 그림 ‘설송도’나 소나무가 추운 겨울이 돼야 홀로 푸른 가치를 안다는 뜻을 담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는 선비들의 그런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유교 산수의 정점은 단양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단양팔경으로 대표되는 명승지들은 예로부터 선비들이 발걸음이 잦았던 곳입니다. 지금 봐도 빼어난 단양의 산수는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아마도 ‘궁극의 자연 풍광’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윽하면서도 풍류가 넘치는 단양의 풍광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평생을 추구하면서 닮고 싶었던 삶의 모습이었겠지요. 단양의 명소마다 옛 선비들이 새긴 글이 남아 있고, 충청도 연풍현감으로 발령받은 단원 김홍도가 단양의 명소를 ‘병진년 화첩’에 그려 남긴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단양의 팔경 중에서 봄의 문턱에 이른 이즈음에 가장 뛰어난 풍광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옥순봉이 아닐까 싶습니다. 봄비 내린 뒤 솟아나는 옥빛의 대나무순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도 봄과 잘 어울리거니와, 남한강의 강물에 발목을 담그고 겨울을 견뎌낸 고결한 선비처럼 우뚝 솟아 있는 풍모도 그렇습니다. 도담삼봉이나 사인암 같은 단양의 팔경이 모두 그렇듯 옥순봉은 예나 지금이나 멀찌감치 두고 보는 한 폭의 수묵화 같은 대상이었습니다. 옛사람들은 강변에 배를 띄워 풍류를 즐겼을 것이고, 강물을 가둔 충주호가 들어선 지금도 관광객들은 유람선을 타고 입을 딱 벌린 채 옥순봉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물러서서 마치 수묵화를 감상하듯 올려다보기. 예나 지금이나 옥순봉을 보는 방법이 대부분 그랬습니다. 하지만 옥순봉은 이쪽에서 건너다보는 풍광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익숙한 시선을 거두고 죽순처럼 솟은 옥순봉을 두 발로 딛고 올라 일대의 풍광을 굽어봤습니다. 아슬아슬 깎아지른 암봉에 서서 근육질의 바위산들이 쪽빛 호수와 어우러져 펼쳐지는 모습은 가히 선경이라 이름할 만했습니다. 까마득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뒤틀며 청청한 푸른빛을 뿜어내는 고고한 소나무의 자태도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단양팔경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를 대표하는 곳이었다면, 단양 쪽 소백산 둘레의 산허리를 감아도는 ‘소백산 자락길’은 세속을 버린 은둔 혹은 민중들의 고된 삶이 녹아 있는 길입니다. 정감록에서 ‘능히 난리를 피할 곳’으로 꼽은 이른바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잇는 길이기도 하고, 마포나루에서 배에 실어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을 지고 넘던 이른바 ‘염로(鹽路)’이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 화전민들이 고된 삶을 유지하며 생계를 의탁했던 마을을 잇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제 막 긴 겨울에서 깨어난 숲속의 촉촉한 흙길에서 오래전 이 길을 걸었던 이들의 발자국을 겹쳐가며 걷는 맛이 참으로 그윽합니다.
# 단양에서 유교 산수의 아름다움을 보다 충북 단양은 아마도 우리 땅에서 수묵화와 가장 닮은 풍경을 품고 있는 곳이리라. 그윽한 산수에다 옛 선비들의 풍류가 한데 어우러져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곳. 그곳에는 붓질이 지나간 자리마다 적요한 시간이 담겨 있다. 이른바 ‘유교 산수’의 아름다움이다. 충북 단양을 대표하는 풍광은 물어보나마나 단연 ‘단양 8경’이다. 단양의 8경 중에서 으뜸으로 꼽는 곳은 제1경으로 꼽히는 도담삼봉. 8경 중 첫머리를 차지한 것만 봐도 그렇고, 다른 데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의 경치를 그려내고 있어서도 그렇다. 이른 새벽, 물안개가 주위 풍경을 다 가릴 무렵 수면 위로 뜬 도담삼봉이 펼쳐보이는 그윽한 풍광은 그대로 한 폭의 수묵화다. 고요한 물그림자와 장군봉에 얹혀진 작은 정자 삼도정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빼거나 덜어낼 것이 없다. 하지만 막상 당도한 도담삼봉 앞에서 실망을 느끼고 돌아서는 이들도 적지 않다. 화려한 이미지로 대했던 모습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늘 떠들썩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멀리 아파트며 고층건물들까지 시야에 들어오니 도담삼봉이 마치 액자에 갇힌 그림처럼 옹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겠다. 사실 단양의 명승지들은 그것 자체의 모습보다 고즈넉한 주변의 풍광과 한데 어우러질 때 비로소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그 앞에 선 이의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졌을 때라면 금상첨화다. 그런 시선으로 본다면 도담삼봉의 앞머리에 감히 제4경의 옥순봉과 제3경의 구담봉을 올려놓을 수도 있겠다. 옥순봉과 구담봉은 유람선을 타야 제 모습을 볼 수 있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번잡스러운 풍경들이 다 가려지고 옥빛 호수에 무릎을 담그고 까마득하게 치솟은 암봉의 자태를 올려다보면 탄성을 넘어 마음 한쪽에 저절로 시심(詩心)이 고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록 도담삼봉의 경치처럼 한눈에 사람을 확 휘어잡는 매력은 없지만 옥순봉과 구담봉은 보면 볼수록 그윽하기 이를 데 없다. 옥순봉에는 옛 선비들의 흔적이 도처에 있다. 퇴계가 단양군수 부임 시절에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 새겨넣었다는데, 충주댐 건설로 수위가 높아져 아쉽게도 지금은 볼 수 없다. 단원 김홍도는 연풍현감으로 임명받아 옥순봉을 비롯해 도담삼봉과 사인암 등을 그려 넣은 ‘병진년 화첩’을 남기기도 했다. # 익숙한 시선을 바꿔서 바라보기
옥순봉과 구담봉은 숲길을 걸어 정상에 당도할 수 있다. 충주호 유람선이 뜨는 장회나루에서 36번 국도를 타고 옥순대교 쪽으로 가다보면 옥순봉과 구담봉으로 오르는 탐방로의 들머리가 있다. 여기서 고즈넉한 숲길을 따라가면 옥순봉과 구담봉에 당도할 수 있다. 1시간쯤 부드러운 산길을 오르면 T자 형의 갈림길을 만나는데 왼쪽으로 가면 옥순봉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구담봉이다. 갈림길에서 옥순봉과 구담봉까지는 각각 20분 남짓이 걸린다. 두 봉우리 중에서 하나만 다녀오겠다면 단연 옥순봉이다. 깎아지른 벼랑의 암봉 끝에는 푸른 소나무들이 무성하다. 봄의 기운이 아직 당도하지 않았는 데도 소나무의 초록 기운이 어찌나 성성한지 계절을 잊을 정도다. 벼랑에서 바라보는 충주호의 물굽이는 가히 절경이라 할 만하다. 옥빛 물 위에 뜬 유람선이 물살을 길게 끌고 미끄러지는 모습도 더없이 낭만적이다. 여기다가 충주호를 넘어가는 옥순대교의 모습도 아름답고, 물 건너편의 가은산과 가늠산, 말목산의 사면으로 펼쳐지는 바위의 근육들도 힘차기 이를 데 없다. 저기 물 건너 아래쯤에는 평생 퇴계를 못잊어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기녀 두향이 묻혔다는 강선대가 있다. 단양군수 시절 퇴계와 인연을 맺은 관기 두향은 퇴계가 풍기군수로 부임받아 떠난 뒤에도 팽생을 못잊었다. 그러다 퇴계가 세상을 뜨자 몇날며칠을 통곡하다 곡기를 끊고 세상을 떴다. 그러면서 두향은 퇴계와의 추억이 깃든 강선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옥순봉에는 선암계곡이 지척이다. 봄볕에 얼음이 풀린 계곡에는 제법 물소리가 힘차다. 하선암부터 중선암, 상선암을 거쳐 특선암까지 이어지는 계곡에는 맑은 물빛과 물소리가 줄곧 따라온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마음에 드는 곳을 택해 옛 선비들처럼 너럭바위에 앉아 풍경을 완상하며 봄볕을 즐기는 맛도 그만이겠다. # 소백산 자락의 깊은 산중을 걷는 맛 단양은 빼어난 풍광 때문인지 옛 예언서나 설화 등에서 ‘비범한 땅’으로 인정받아왔다. 단양은 소백산을 끼고 있다. 소백산이라면 대개 부석사나 죽계계곡을 품고 있는 경북 영주 쪽을 먼저 떠올리지만, 단양 쪽 소백산의 산세며 풍광도 못지않다. 예언서인 정감록이며 격암유록에는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로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이른바 ‘양백지간(兩白之間)’을 꼽는데 지도를 펴놓고 보자면 딱 단양의 동북쪽쯤이다. 단양이란 지명에 깃든 이야기도 범상치 않다. 단양은 ‘연단조양(練丹調陽)’에서 유래됐다고 전한다. 여기서 연단은 ‘신선이 먹는 환약’이고, 조양이란 ‘햇빛이 골고루 밝게 비치는 땅’을 말한단다. 그러니 고을 이름만으로도 단양이 얼마나 복된 땅으로 인식됐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단양 영춘면의 온달산성과 남천계곡 위쪽의 소백산 자락에 ‘구룡팔문(九龍八門)’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도 있다. 여덟 봉우리 속에 아홉 개의 문을 찾아 열게 되면 새 세상이 온다는 이야기다. 단양 쪽의 소백산 자락에는 예로부터 화전민들이 터를 잡고 살아왔다. 땅 한 뙈기 없어 끼니조차 잇기 어려워 산으로 든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관리들의 수탈과 난리를 피해 십승지지를 찾아온 이들도 있었을 터다. 깊은 산으로 들어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던 이들이 깃들었던 땅에 근래 들어 ‘소백산 자락길’이 놓였다. 전체 8개 구간 중 단양에는 4구간부터 7구간까지의 도보코스가 지난다. 소백산 자락길 중에서 가장 추천할 만한 길이 6구간 고드너머재와 영춘면사무소를 잇는 13.8㎞의 산길이다. 보발재로 더 알려진 고드너머재 쪽에서 출발해 해발 600m를 오르내리는 산중 임도를 따라 온달산성 쪽으로 내려서는 이 길에는 ‘온달·평강 로맨스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산허리를 따라 굽이굽이 걷는 길 위에 서면 건너편의 산자락 능선들이 온통 격랑을 일으키며 장쾌하게 펼쳐진다. 능선들이 첩첩이 겹쳐져서 그려내는 장면은 말 그대로 ‘압도’의 느낌이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이 있는가 하면 치솟은 낙엽송 사이로 부드럽게 휘어진 길도 있고, 산중 마을의 묵은 밭을 가로지르는 농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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