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에 돼지갈빗집 많은 이유
1970년대 소갈비구이는 성공한 서울시민의 상징이었다. 성공하지 못한 대다수 서울시민에게도 뭔가 뜯을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한 게 소갈비구이 양념을 한 ‘돼지갈비’이다.
이 글에서 마포는 서울시 마포구 전체를 말하지 않는다. 마포대교에서 애오개까지 대로를 가운데 두고 그 옆의 상업 지역을 아우르는 것이라 보면 된다. 보통 “마포 가서 술 한잔 하자” 할 때의 마포가 이 언저리이다. 돼지갈빗집이 이 구역의 여기저기에 촘촘히 박혀 있다.
조선시대 마포에 나루가 있었다. 지금 마포대교의 공덕동 쪽 입구 자리이다. 서해안 여러 지역에서 한성 사람들에게 필요한 산물을 배에 싣고 와 이 나루에 부렸다. 이 물건들은 애오개를 넘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조선시대 한성의 물류 기지였던 셈이다.
마포나루에 물건이 모이니 객주(客主)가 섰다. 객주가 서니 돈이 돌고, 돈에 술과 여자가 따르니 색주(色酒)가 섰다. 배가 모이니 그 안녕을 빌어줄 무당이 필요했고, 그래서 당주(堂主)도 여기저기 솟대를 올렸다. 조선시대 마포는 꽤 번잡한 상업 지역이었다. 특히 마포의 색주는 유명했는데, 구한말의 옛 노래며 야담에 ‘삼개의 색주’가 자주 등장한다. 삼개는 마포의 옛 이름이다.
ⓒ황교익 그림 마포 돼지갈비는 드럼통 식탁(위)을 고수하는 데가 많다. 옛 서민 생활의 정취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저 드럼통 안에 연탄은 없고 가스를 쓴다. |
1876년 조선이 개항하면서 마포에 외국 상선이 들어와 무역항으로 잠시 번창했다. 1899년 경인선이 놓이면서 무역항 노릇은 제물포로 넘어갔다. 그래도 서울로 통하는 나루여서 일제강점기에도 소금이며 젓갈, 해산물 등을 실은 배가 마포에 닻을 내렸다. 1907년 전차가 마포나루 앞까지 닿게 되었는데, 그 후 거상들이 운집하던 시대는 가고 소상인들이 나루의 명맥을 이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이후 마포는 나루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 휴전선이 한강 입구를 막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마포에 텍사스 골목이 생겼다. 만리동 고개에 있었다. 이른바 색싯집 골목이다. 술과 함께 여자의 서비스가 따랐다. 텍사스 골목 또는 텍사스촌은 한국전쟁 이후 전국에 생겼는데,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로 영업하는 술집이 모여 있는 곳을 이렇게 이르다가 그 비슷한 유흥의 술집이 몰려 있는 지역이면 다 이 이름을 붙였다.
이 글의 앞에 조선시대 마포나루 이야기를 꺼낸 것은 마포 텍사스 골목의 맥이 조선의 색주에 닿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유흥가의 전통, 특히 남자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공유되는 공간의 전통은 의외로 끈질기게 유지되는 특징이 있다. 서울에만도 천호동·이태원·미아리·구로동 따위에 텍사스 골목이 있었거나 지금도 있는데, 그 주변에 ‘일반의 술집’이 몰려 있는 것은 비슷하다. 하여간, 이 텍사스 골목에서 마포 돼지갈비가 탄생했다.
ⓒ황교익 그림 돼지갈비는 이제 여자가 더 많이 먹는다. |
처음에는 ‘돼지불고기’로 불렸을 가능성 높아
한국전쟁 직후 마포 텍사스 골목에는 색싯집이 스무 곳 정도 있었고, 돼지고깃집이 다섯 곳 있었다. 이 집 중 두 곳이, 자리를 옮겼지만 지금도 영업 중이다. 두 집 다 ‘최대포’라는 이름을 쓰면서 서로 원조임을 강조한다. 이들은 처음에 돼지의 여러 부위를 소금구이로 팔았다. 그 음식의 이름을 ‘시오야키’라고 일본어로 불렀다. 그러다 간장 양념한 돼지고기도 팔았는데, 그 시작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간장 양념의 돼지고기 구이를 흔히 돼지갈비라 하지만 그때에도 이 이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돼지에서 갈비는 얼마 되지 않는 부위여서 목살이며 등심 따위를 섞어 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달콤한 간장 양념 맛의 돼지고기 구이이니 처음에는 돼지불고기라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돼지갈비의 역사는 서울 강남의 개발붐과도 연관이 있다. 1970년대 서울은 강남의 땅을 가지고 ‘돈 잔치’를 벌였다. 복부인이 땅과 아파트를 사고팔면서 부를 축적했다. 서울 신흥 부자, 흔히 말하는 서울 졸부가 탄생한 것이다. 이재에 밝은 외식업자들이 서울 졸부의 허영에 부응하는 음식점을 차리는데, 이것이 ‘가든’이다. 가든에서 먹을 허영의 음식으로 소갈비구이가 선택되었다. 소갈비구이는 이미 경기 수원에서 유명한 외식 음식이었다. 수원 소갈비구이는 소금 간을 하였는데 서울 사람은 이 음식을 맛있다 하지 않았다. 서울의 식당에서 당시 흔히 내던 쇠고기 음식은 달콤한 간장 양념을 한 소불고기였다. 이 양념으로 소갈비를 재우고 구웠다. 달콤한 서울식 소갈비구이는 크게 인기를 끌었다.
ⓒ황교익 그림 돼지갈비의 양념이나 소갈비의 양념이나 비슷하다. 캐러멜을 넣어 때깔을 낸다는 차이 정도만 있다. |
1970년대 강남의 가든에서 뜯는 소갈비구이는 성공한 서울시민의 상징이었다. 성공하지 못한 대다수 서울시민은 소갈비를 뜯을 수 없었다. 대신 무엇인가 뜯을 것이 필요했다. “너만 갈비 뜯냐? 나도 뜯는다”라는 대리만족을 줄 음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발견한 것이 돼지갈비이다. 달콤한 간장 양념을 한 것이 소갈비와 같고, 돼지의 갈비 부위도 섞여 있으니 이를 두고 돼지갈비라 이름을 붙여 뜯어도 될 법한 일이라 여긴 것이다. 닭갈비나 고갈비에 비하면야!
마포 텍사스 골목은 우범 지역이었다. 색싯집이 있었으니 남자 여럿이 모여 골목을 드나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초기 마포 돼지갈비는 남자나 뜯었을 것이다. 또 마포에 살던 사람이 돼지갈비를 특히 즐겼으리라 볼 수 없다. 남자의 ‘은밀한 사생활’은 자신의 주된 활동 공간 밖에서 일어나는 편이기 때문이다. 인근에 사는 주민 처지에서는 그런 공간을 들락거리는 일에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마포의 돼지갈비는 처음부터 마포 밖 사람들이 더 많이 먹었을 수 있다.
외식 메뉴의 하나로 돼지갈비라는 이름이 만들어질 즈음인 1974년에 마포 텍사스 골목이 헐렸다. 그러면서 돼지고깃집들이 공덕동 네거리 쪽으로 이전했다. ‘밝은 곳’으로 나온 것이다. 텍사스 골목 안에서 조금씩 쌓았던 명성이 이때에 빛을 발했다. 당시 돼지고기 가격이 싸서 서민이 먹기에 부담 없다는 점이 한몫 했고, 갈비라는 이름도 한몫 했다. 또 마포 밖 사람이 이 마포 돼지갈비를 많이 먹었다는 것이 마포 돼지갈비의 ‘전파’를 도왔을 것이다. 전국의 돼지갈비 식당 이름 중에 가장 많은 것이 마포 갈비, 최대포 따위인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마포 갈비’라는 이름이 전국으로 퍼진 이유
1968년 전차가 없어지고 1970년 마포대교가 놓였다. 그즈음 대교 건너 여의도가 개발되었다. 마포도 그 개발 혜택을 입고 오피스 타운을 낀 상업지구로 재정립되었다. 지하철 5, 6호선이 마포를 지나게 되었다. 낮고 낡은 건물은 헐리고 새로운 고층 건물이 들어섰다. 조선의 물류 중심지였던 마포나루가 그 옛 영화를 다시 이루는 듯이 보인다.
밤이 되면, 마포 돼지갈빗집이 불을 밝힌다. 어느 집이나 돼지갈비 뜯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돼지갈비 타는 연기도 가득하다. 마포에서 일을 하는 사람인지 마포 밖의 사람들인지 알 길은 없다. 아직 드럼통 식탁을 쓰고, 바닥은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꺼도 될 분위기다.
캐러멜을 듬뿍 넣은 돼지갈비가 양은그릇에 담겨 나온다. 갈비 부위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데,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다디단 돼지갈비에 소주를 마시며 노동에 지친 몸을 달랜다. 마침, 그 자리에 마포의 역사를 잘 아는 이가 있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의 신분 질서가 붕괴되었을 때 돈 많은 마포의 어느 객주가 색주에만 만족 못 하고 양반의 애첩 기생을 돈으로 사려 했다는…. 그러나 이 이야기도 조심조심 하여야 할 것이다. 마포의 돼지갈빗집에는 이제 여자가 더 많다. ‘남자의 전성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남자만의 음식도 이제 없는 것이다.
신당동 떡볶이와 ‘써니’
주변에 고등학교가 많은 신당동에 ‘떡볶이 타운’이 조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군사 독재 아래 억압받던 ‘고삐리’들은 신당동 떡볶이 골목에서 해방감을 만끽했다.
정부가 이끄는 한식 세계화의 주요 아이템 중 하나가 떡볶이이다. 정부 예산으로 떡볶이연구소까지 차렸다. 이 연구소에서 세계인의 입맛에 맞춘 떡볶이라면서 개발한 음식을 본 적이 있다. 가래떡에 크림소스니 토마토소스를 넣고 볶은 것인데, 이탈리아의 파스타 조리법에 가래떡을 넣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외국인이 싫어할 것 같은 고추장을 빼고 외국인이 좋아할 것 같은 소스를 첨가하는 방식으로 ‘개발’한 것이다. 또 고추장을 넣지 않는 ‘전통의 떡볶이’가 하나 있었으면 했는지 간장 양념의 떡볶이를 두고 궁중떡볶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리학과 실습 수준의 음식을 정부 예산으로 한 연구 결과라고 내놓으니 보기에 민망했다. 가래떡으로 할 수 있는 음식이란 것이 빤할 수밖에 없는데, 한식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뭔가를 보여주려 하니 이런 억지가 생기는 것이다.
ⓒ황교익 제공 신당동 떡볶이는 떡전골에 가깝다. 공기밥을 비벼 먹기도 한다(오른쪽). 왼쪽은 간장 양념으로 번철에 볶는 떡볶이이다. 가장 고전적인 떡볶이일 것이다. 이제는 귀하다. |
떡볶이라는 이름에는 ‘가래떡을 볶는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새로 개발된 떡볶이를 보면, 팬에서 열심히 볶는다. 볶으려니 이와 비슷한 음식으로 파스타가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 파스타 조리법에 가래떡을 추가해 새로운 떡볶이라며 내놓는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대중이 일반적으로 이르는 떡볶이는 볶지 않는다. 냄비에 넣고 끓인다. 조림이나 탕에 가깝다. 이름을 제대로 붙이자면 ‘떡조림’이나 ‘떡탕’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니 가래떡으로 조리하는 또 다른 전통 음식이 떠오른다. 떡전골이다. 떡전골은 가래떡에 여러 채소와 고기를 넣고 끓이는 탕이다. 설날에 먹는 떡국에 그 계통이 닿아 있는 음식이다. 이것을 한 그릇에 담으면 떡국이다. 예전에는 떡전골을 떡탕이라 불렀고 떡국도 떡탕이라 했다. 떡볶이는, 특히 냄비에 가래떡과 여러 재료를 넣고 끓이는 떡볶이는, 떡국과 함께 ‘가래떡으로 조리하는 탕’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들 수 있다.
철판 위에서 조리되는 ‘포장마차 떡볶이’는 떡조림이라 할 수 있는데, ‘가래떡으로 조리되는 탕’의 방계에 넣을 수 있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떡볶이는 그 이름과 달리 ‘탕이나 조림의 떡볶이’인 것이다. 떡볶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면 한국인의 떡볶이 기호가 보이지 않으며, 결국은 한국인도 낯설어하는 별스러운 떡볶이를 개발해 이를 한국 떡볶이라고 하자며 억지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떡볶이를 두고 벌어지는 이 같은 혼란은 애초 떡볶이라고 부르는 음식이 따로 있었는데 떡전골이나 떡조림에도 이 떡볶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애초의 떡볶이는 가래떡에 여러 채소와 고기를 넣고 간장 양념으로 볶는 음식이었다. 설날 상차림에 오르는 음식이다. 이 떡볶이를 요즘에는 궁중떡볶이라 하는데, 특별히 궁중에서 이를 먹었다는 근거는 없다. 설날의 가래떡 전통은 유구한 것이니 조선에서 왕가·양반·상민 할 것 없이 두루 먹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길거리 음식으로 떡볶이가 등장했다. 전통의 떡볶이가 간소화한 것이었다. 동그란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간장 양념을 한 가래떡을 볶았다. 시장 입구에 이런 떡볶이 좌판이 흔히 있었다. 여기에 어느 순간 고춧가루가 들어가게 되었는데, 매운 떡볶이는 이 좌판의 번철 떡볶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번철 떡볶이는 서울의 재래시장에 일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기름떡볶이라고 부른다.
‘고삐리’를 해방시킨 신당동 떡볶이
신당동 토박이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후 지금의 신당동 떡볶이 골목에 떡볶이 좌판이 셋 있었다고 전한다. 신당동은 한국전쟁 후 피란민이 몰려들어 조성된 동네였고, 그래서 주민은 가난했다. 주변에는 성동고·한양공고·무학여고 등 학교가 많았다. 시장이 가깝고, 또 그 골목에 극장이 있었다. 고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먹을거리 좌판이 있기에 딱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었던 것이다. 떡볶이 장사가 잘되자 신당동 주민은 여기저기 떡볶이 가게를 열었다. ‘떡볶이 타운’이 조성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입소문을 타고 서울의 고등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황교익 제공 신당동 떡볶이집에는 뮤직박스가 아직 있다(오른쪽). 디스크 자키도 있다. 신청곡도 받고 사연도 전해준다. <써니> 세대가 거쳐간 곳이다. |
1970년대 고등학생은 유신 교육의 억압에 놓여 있었다. 일제의 잔재인 교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밀어야 했다. 교련이라는 이름의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 억압 속 고등학생들에게 대학은 곧 해방을 뜻했다. 대학만 가면 (간혹 장발 단속에 걸리기는 했지만) 머리를 기를 수 있었고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칠 수 있으며 연애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대학생의 공간으로 음악감상실, 음악다방이 있었다. 여기에 고등학생은 들어갈 수 없었다. 고등학생에게 음악감상실과 음악다방은 미래의 해방구로 보였을 것이다. 고등학생이 출입할 수 있는 분식집에 뮤직박스를 들인 일은 고등학생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한 뛰어난 상술이었다. 전국의 분식집에 뮤직박스가 만들어지고 장발에 청바지를 입은 디제이를 앉혔다. 신당동 떡볶이집도 이 바람을 따랐다. 떡볶이 하나로 고등학생의 성지가 된 신당동은 ‘해방된 고삐리’로 폭발했다. 떡볶이에 몰래 술을 마실 수 있었다는 것, 남녀 학생이 미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신당동만의 ‘매력’이었다.
2011년 현재 신당동 떡볶이집에는 해방을 갈구하는 ‘고삐리’가 없다. 대입 압박은 여전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대체로 해방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한때 고삐리였던 이들이 옛날의 그 해방을 맛보기 위해 신당동을 찾는다. 휴일이면 이 옛날 고삐리들이 나이 어린 2세의 손을 잡고 신당동 떡볶이집 문을 밀고 들어온다. 극장은 사라지고 떡볶이집은 간판을 바꾸었지만 그 옛날의 떡볶이 맛은 여전하다. 값싼 식재료에 대충 달고 짜고 매운 맛이 전부이다. 친구들끼리 하교하면서 200원씩 모아 한판 걸게 먹던 그 시절 그 떡볶이를 앞에 두고, 그 건너의 2세를 본다. 한때 나에게도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이 있었다고 말하려다 만다. 보니엠의 ‘써니’가 흐른다. 신당동의 청춘도 그 경쾌한 음률을 따라 매끄럽게 흐른다.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북 단양의 선경 속으로 (0) | 2012.03.20 |
---|---|
李龍在의 맛있는 상식_01 (0) | 2012.03.19 |
동양화가 말을걸다_05 (0) | 2012.03.17 |
김동률·권태균의 오지 기행_02 (0) | 2012.03.14 |
함평서 담양까지 영산강 역사기행 (0) | 2012.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