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황교익의 味食生活_16

醉月 2012. 3. 3. 12:31

빈대떡을 '전'이 아니라 '떡'이라 한 이유 

  
 빈대떡을 전이 아니라 떡이라 한 것은 이를 끼니로 먹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빈대떡집만큼 나이 든 늙은 서울 사람들이 지금도 빈대떡에 막걸리를 먹으며 고향집 잔칫날을 떠올린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강남이 번쩍번쩍한 건물들 틈으로 속물의 서울내기를 불러모으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은 사대문 안이 진짜 서울이었다. 사대문 밖 서울의 변두리에 살면서 “시내 나간다” 하면 광화문 네거리를 중심으로 한 종로·무교동·명동 따위의 동네에 마실 나가는 일을 뜻했다. 일거리가 그곳에 있었고, 그 일거리를 나눌 사람들이 거기에 모였다. 그 일거리 정보를 듣기 위해서도 이 광화문 네거리 근처로 와야 했다. 조선 건국 이래로 서울의 허브는 이 사대문 안이었다.

한국전쟁은 서울을 초토화했다. 멀쩡한 건물이 없었다. 일제가 남겨놓은 조그만 근대의 흔적들도 깨져나갔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는 그 상처를 계속 상기하게 하므로 애초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사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 뒤의 서울이, 애초 서울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순식간에 채워졌다는 것이다. 예부터 서울에 살았던 사람이라 하여도 그 폐허를 가슴에 오래 담아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먹고살 일이 더 급했을 것이니.


   
ⓒ시사IN 윤무영
피맛길 재개발로 인해 제일은행 본점 뒤 골목으로 이사한 열차집(오른쪽). 궁중음식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라 하고 피맛길의 그 오래된 빈대떡집은 ‘서울시 선정 자랑스러운 한국음식점’에도 끼이지 못한다.



1980년대에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외식산업의 팽창이 있기 전, 사대문 안의 식당들은 초라했다. 기껏해야 백반에 국밥·설렁탕·자장면을 팔았다. 대로변 가게에 식당을 차린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값비싼 메뉴를 걸어도 사먹을 수 있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당들은 뒷골목에 진을 쳤다. 대로에서 골목으로 꺾어 들면 조그만 식당들이 닥지닥지 붙어 영업을 했다. 사대문 안에는 좁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나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서울의 대로는 양반의 길이었고 이 좁은 골목은 아랫것들의 길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동대문까지 종로대로를 따라 왼쪽으로 난 좁은 길인 피맛길이 그 대표적 골목이다. 피맛길은 ‘말을 피하는 길’이라는 뜻인데, 양반이 탄 말을 피한다는 뜻보다 양반을 말이라 여기고 이런 이름을 붙였을 수도 있다. 많은 양반들이 가마를 타고 다녔다.

사대문 안 뒷골목 식당들은 밥집 겸 술집이었다. 끼니 따로 먹고 술 따로 마실 여유가 없는 소비자를 상대해야 하니 이런 영업 형태는 당연한 일이었다. 국밥에 술국도 있고, 설렁탕에 뼈다귀찜이 있고 하는 식이었다. 이런 음식들 틈에 빈대떡이 있었다. 지금처럼 빈대떡을 전문으로 파는 식당은 없었다. 국밥도 있고 빈대떡도 있고, 백반도 있고 빈대떡도 있고, 족발도 있고 빈대떡도 있고 했다.


녹두가 흔한 한반도 전역에서 먹던 음식


빈대떡은 녹두를 갈아서 부치는 전이다. 돼지기름으로 부친다. 돼지비계를 솥에 넣고 불 위에 올리면 맑은 기름이 나오는데, 이를 부어놓고 빈대떡을 부친다. 빈대떡은 한반도 전역에서 먹던 음식이다. 녹두가 흔했기 때문이다. 녹두는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이다. 특별히 가꾸지 않아도 된다. 야산 귀퉁이 자갈밭에 심어도 된다. 아무렇게나 두어도 잘 자라는 녹두는 조선 민중을 닮았다. 전봉준이 키가 작아 녹두장군이었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빈대떡의 어원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가장 흔한 게 빈대(賓待)떡, 즉 귀빈을 접대하는 떡이란 말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고, 또 빈자(貧者)떡, 즉 가난한 자의 떡으로 빈자떡이라 하다가 빈대떡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흔하다. 가장 근거 있는 것은, 옛 문헌에 ‘빙자’가 보이는데 이게 한자인 餠藷(병저:밀가루나 옥수수·수수 등을 갈아 납작하게 부친 떡)의 다른 표기이고 빙자→빈자→빈대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빈대가 이, 벼룩의 그 빈대이며 빈대 많은 동네에서 이를 즐겨 먹어 빈대떡이라 이름이 붙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설도 있다. 이 여러 설은 거의 말장난 수준일 뿐이다. 빈대떡이란 이름에서 더 흥미롭게 봐야 하는 것은 빈대‘떡’이다. 빈대‘전’이 아니라 빈대‘떡’이다.


   
ⓒ황교익 제공
빈대떡에 막걸리 한잔(오른쪽). 서울의 빈대떡에는 굴과 조개를 섞어 담근 젓갈이 딸려 나온다. 빈대떡 위에 올려 먹는다.



떡의 분류에 ‘지지는 떡’이 있다. 부꾸미, 노티, 화전(진달래전·국화전), 총떡, 권전병, 주악, 산승 등이 그 떡에 들어간다. 주요 재료가 쌀, 찹쌀, 수수, 메밀 같은 곡물이니 그 반죽을 번철에 지져도 떡이라 분류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지지는 떡에는 ‘떡’자가 잘 붙지 않는다. 화전은 아예 ‘전’이다. 빈대떡은,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채소와 고기 등을 넣고 지져내는 방법이나 모양새는 파전이나 김치전·고기전 따위처럼 전의 일종으로 보인다. 제사상에도 전으로 분류되며, 빈대떡집에서도 다른 여러 전과 함께 이 빈대떡을 전처럼 부친다. 빈대떡이 녹두전, 녹두빈대전, 빈대전 따위로 불리기도 하지만 대다수 지역에서 대다수 사람이 빈대떡이라 한다.

조선에서도 녹두는 흔했고 따라서 빈대떡은 쉬 해먹는 음식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장시에서 빈대떡이 팔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빈대떡이라는 명칭은 1920년대 문헌에 흔히 등장하니 조선에서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이를 전이라 하지 않고 떡이라 한 것은 빈대떡을 끼니로 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예부터 떡은 밥과 같은 끼니의 음식으로 여기므로 녹두를 갈아 부친 것이라 해도 끼니의 음식이니 빈대떡이라 불렀을 것이란 생각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서울 뒷골목에서는 끼니로서의 빈대떡이 팔렸을 것이고, 한국전쟁 이후로도 그랬을 것이다. 빈대떡에 대포 한잔의 끼니.

서울 사대문 안 골목골목에는 빈대떡 파는 집이 아직 많다. 피맛길이 재개발되어도 그 골목의 오랜 빈대떡집들은 다른 골목으로 자리를 옮겨 버티고 있다. 빈대떡집의 손님들은 빈대떡집만큼 나이가 들었다. 사대문 안이 진짜 서울이며 광화문 네거리가 아직 서울의 허브라 생각하는 ‘늙은’ 서울 사람들이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신다. 가게는 탁자를 조밀하게 놓아 서로의 말소리가 뒤섞여 소란스럽다. 고소한 돼지비계 냄새와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그 소란과 겹쳐져 잔칫집 같다. 이 늙은 서울 사람들은 고향집 잔칫날의 마당에 앉아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이 고향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빈대떡의 가난이 낭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왕가의 국물을 얻어먹는 맛 ‘설렁탕’   


 설렁탕은 조선 왕이 백성에게 나누어준 음식이라는 설이 퍼져 있다. 왕가의 국물을 얻어먹는다는 영광을, 백성은 즐겼을 것이다.
서울에는 조선 한양의 흔적이 건물로 남아 있다. 조선의 정궁인 경북궁이 북악산 아래에 펼쳐져 있고, 그 정면을 보고 왼쪽에는 사직, 오른쪽에는 종묘가 있다. 조선의 왕은 이 두 곳을 들락거리며 제사를 지내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사직에서는 농사와 관련한 제사를 많이 지냈다. 농사와 관련한 조선 왕의 제사 장소가 또 하나 있었는데, 동대문 근처의 선농단이다. 이 선농단은 제사 외에 조선의 왕이 직접 논밭을 가는 행사를 했다는 특징이 있다. 조선 왕이 백성의 일을 한다는 것은 신분 사회인 조선에서는 큰 이벤트였을 것이다.

구경거리가 없었을 그 당시를 생각하면 2만명에 달했다는 사대문 안의 조선 사람이 이 선농단에 다 모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료를 보면 조선 왕의 이 친경 행사는 그다지 자주 열린 것 같지는 않다. 요즘의 대통령 모내기처럼 정치적 쇼를 하여 민심을 얻을 필요가 없는 세습종신제의 왕이니 친경이 귀찮은 일일 수도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조선 왕가에는 부담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황교익 제공
설렁탕에는 깍두기가 반드시 나온다. 옛날에 동대문 밖에는 무밭이 많았고 그 무가 맛있어서 서울 깍두기가 맛있다 했다. ‘서울 무’라는 무 품종도 있다.

강력하게 남아 있는 설렁탕의 ‘선농단’ 유래설

설렁탕은 이 선농단에서 먹었던 음식이라는 설이 퍼져 있다. 왕의 논밭갈이 행사에 동원된 소를 잡아 큰 솥에 삶아서 그 탕국에 밥을 말아 이 행사에 구경 나온 백성을 먹인 음식이라는 것이다. ‘선농단의 탕’이니 선농탕이라 했다가 설농탕→설렁탕으로 변했다는 설명이 이 설의 뒤에 꼭 따라붙는다.

설렁탕의 선농단 유래설은 한때 그냥 ‘설’이었을 뿐이다. 그 설이 잘못되었다는 근거 있는 주장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음식문화 연구에 대해 탁월한 업적을 남긴 고 이성우 교수는 1982년에 낸 <한국식품문화사>에서 이 선농단 유래설에 대해 콕 찍어서 ‘어거지’라고까지 했다.

“영조(1724~1776)대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몽고어 사전인 <몽어유해>(蒙語類解)에 의하면 몽고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인 것을 ‘空湯’(공탕)이라 적고 ‘슈루’라 읽고 있다. 맹물에 쇠고기를 넣고 끓인다면 곰탕이나 설렁탕의 무리이다. 따라서 곰탕은 ‘空湯’에서, 설렁탕은 ‘슈루’에서 온 말이라고 봤으면 한다. 오늘날의 곰탕과 설렁탕은 동류 이종일 따름이다. 설렁탕을 선농단에 결부시키는 속설은 아무리 생각해도 후세의 어거지 설인 듯하다.”

그러나 설렁탕의 선농단 유래설은 그 근거 없음에도 지금도 강력하게 살아 있다. 설렁탕을 먹을 때면 꼭 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설렁탕 식당 벽에도 으레 이 이야기가 쓰여 있다. 선농단이 있는 동대문구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매년 선농단에서 왕의 친경 행사를 재현하며 설렁탕을 끓여 참가자에게 나누어주는 행사도 하고 있다.

서울 음식 역사를 추적하다보면 봉송 풍습 이야기를 듣게 된다. 조선 왕족이 음식을 남겨 관료들의 집으로 건네주는 일이 봉송(封送)이다. 이 봉송 풍습이 한양 양반가의 음식 문화를 풍성하게 했다는 말이 뒤따른다. 양반들이 왕가의 음식을 맛보고 이를 따라 했다는 것이다(이 풍습은 대한민국에서도 이어받고 있는데, 명절이면 지역의 농·특산물을 대통령의 이름으로 여기저기에 선물한다. 대통령의 ‘봉송’ 물건으로 선택된 농·특산물은 단숨에 명품 반열에 오른다). 그러니 서울 음식을 정의할 때 조선 왕가의 음식과, 조선 왕가의 음식을 본받은 양반가의 음식으로 하자는 주장도 있다.


   
ⓒ황교익 제공
서울 동대문구에서는 매년 봄 선농단에서 조선 왕의 친경을 재현하는 행사를 연다. 이 행사에 가면 설렁탕을 한 그릇 거저 먹을 수 있다.

설렁탕의 선농단 유래설은 설렁탕이 서울 음식이라는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왕의 논밭갈이 행사장에서 나누어준 음식이니 조선 왕가의 ‘영광’과 퍽 밀접한 음식으로 여겨질 법하다. 조선에서 봉송을 받았던 권세가의 후손은 아니었어도, 서울에 살면서 설렁탕 집에 앉아 조선 왕가의 ‘국물’을 얻어먹는 영광이라도 즐기고 싶어 그 근거도 없는 선농단 유래설을 자꾸자꾸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설렁탕(또, 곰탕)이라는 이름이 고려시대 몽골에서 온 말이라 해도 소의 여러 부위를 넣고 끓이는 음식이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2000년 전의 김해 유적지에서 소뼈가 나왔으며 선사시대부터 농경에 소를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그 단순한 조리법을 보면, 한반도 사람들은 먼먼 옛날부터 지금의 설렁탕 비슷한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한반도의 국과 탕은 잡다한 푸성귀를 넣고 끓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설렁탕은 뽀얀 색의 국물에 고기 몇 점이 들어 있다. 푸성귀를 넣고 양을 늘리는 여타의 국이나 탕에 비해 설렁탕의 고기 낭비가 심할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다. 설렁탕의 국물은 흐리고 흐려 제조 단가가 그리 높지 않은 음식이다.

1930년 <동아일보> 기사에 보면 경성 시내 음식점 조합이 음식 가격을 일제히 내리기로 했는데, 냉면·장국밥·어복장국·떡국·대구탕반 등은 15전으로 정한 데 비해 설렁탕은 10전으로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 그즈음 화교의 호떡집이 번창하여 그 많던 설렁탕 집이 문을 닫고 있다는 기사도 보인다.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는 설렁탕이 싸고 흔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설렁탕이 쌌던 이유 중 하나는 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의 기본 속성은 식민지에서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을 빼앗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의 낱낱을 조사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병합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한반도의 농·수·축산물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떡국·장국밥보다 더 쌌던 설렁탕


그 조사에서 한반도의 소(한우라는 이름은 1950년대에 작명된 것이다)가 그들의 눈에 들었고, 그래서 적극적인 소 사육 정책을 폈다. 그렇게 하여 1930년대 말 한반도의 소는 180만 마리에 이르렀는데, 2010년대 국내 한우 마릿수가 평균 250만 마리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라 할 수 있다(당시 한반도 인구는 2000만명을 겨우 넘겼다). 그 당시에는 쇠고기가 돼지고기보다 쌌으며, 그래서 설렁탕도 아주 쌌던 것이다.

그러던 소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 수가 급격히 줄어 1950년대 중반에는 40만 마리도 되지 않았다. 당연히 쇠고기 가격은 올랐고, 설렁탕도 일반 음식 수준으로 뛰었다. 2011년 현재는, 수입 소의 것이면 7000~8000원, 국산(육우가 많다)이면 8000 ~1만원이다. 그 멀건 설렁탕 한 그릇에 깍두기 달랑 하나 내는데 이렇다.

김수영이 1965년에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읊었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 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

수많은 설렁탕 집이 돼지 뼈로 국물을 낸다는 텔레비전의 고발 프로그램이 최근 방송되었다. 쇠고기 가격은 떨어졌는데 깍두기를 담그는 채소 가격이 올랐다고 설렁탕 가격을 1000원씩, 2000원씩 올렸다. 이런 일에 옹졸하게 분개하고 욕하다가도 식당 벽면에 붙은 선농단 행사 사진을 보며 그 뽀얀 국물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조선 왕가의 봉송 전통을 잇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뜬금없는 뿌듯함으로 그 미지근한 국물을 들이켜는 것이다. 서울은 아직, 가끔, 봉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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