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삼척을 걷다

醉月 2012. 2. 24. 10:14
강원 삼척 임원항 뒤편 남화산 정상 부근. 길게 바다 쪽으로 내민 야트막한 구릉의 능선을 따라 걸을 때 시선이 닿는 좌우가 모두 푸른 바다다. 마치 바다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매혹적인 길이다.

‘실직국’이라니 혹 ‘실직(失職)’을 먼저 떠올리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직장을 잃는다’는 뜻이 아니라 ‘모두 실(悉)’자에 ‘곧을 직(直)’자를 쓰는 ‘실직(悉直)’이랍니다. 강원 삼척에서 번성하다가 1900여년 전 신라에 복속돼 사라지고 말았다는 고대 국가의 이름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400년 뒤. 삼척에서는 신라 장군 이사부가 나무로 깎은 사자를 배에 싣고 울릉도와 독도를 정벌하러 나섭니다. 거기서 또 200여년의 시간이 지나면 이곳 바닷가 벼랑을 걷던 수로부인에게 소를 몰고 가던 늙은이가 철쭉꽃을 바치며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줏빛 바위 끝에/ 잡으신 손/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헌화가)

그 많은 이야기들이 잠겨 있는 삼척엘 갑니다. 실직국의 전설을 따라서, 신라 장군 이사부의 행로를 따라서, 삼국유사 속 수로부인에게 꽃을 건네던 늙은이를 따라서 걷는 길입니다. 먼 시간 저편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들은 다 삭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고, 수로부인이 건네받았다는 철쭉도 아직 피려면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삼척을 찾아가는 것은 마치 역사의 행로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삼척의 길은 늘 그렇듯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입니다.

삼척에는 도처에 길이 얽혀 있습니다. 근래에 만들어진 ‘관동팔경을 따라가는 녹색경관길’이 있고, ‘해파랑길’이 있으며 ‘산소길’이 있습니다. 여기다가 구불구불 해안을 달려가던 옛 7번 국도도 있습니다. 서로 만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이 길은 모두 다 타박타박 걷는 길입니다. 파도가 힘차게 일어선 해안을 걷기도 하고, 고즈넉한 바닷가 마을 언덕을 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신화와 같은 역사와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관통합니다. 숨가쁘게 오르는 산길도 있고,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해안길도 있습니다.

삼척의 그 길들을 하나하나 짚어봤습니다. 한때 번창했던 포구의 영화를 굽어보는 자리에 올라서 시야 가득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 능선길을 걷기도 했고, 이제 막 얼음이 풀린 계곡을 따라 물소리를 들으며 산중의 길을 따라 오르기도 했습니다. 지자체가 저마다 이어 붙여 경쟁적으로 만들어낸 길의 행로를 지도 삼아서 따르긴 했으되, 다 걷고 나서는 곧 그게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봄볕이 기웃거리고 있는 이즈음 삼척에서는 해안가나 숲길 어디서든지 그저 걷기 시작하면 그게 길이 되는 까닭입니다. 지도 한 장 없어도 그저 해안을 따라 내키는 대로 걷기만 해도 삼척에서는 훌륭한 도보여행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강원도의 도보길 ‘산소길’이 이어지는 삼척의 쉰움산 정상 부근. 정상의 암반에는 바위를 아이스크림 스푼으로 떠낸 듯한 수많은 구멍들이 있는데, 빗물이 고여 찰랑이는 구멍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50개의 우물이 있다’고 했다. 쉰움산이란 이름도 ‘쉰개의 우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 가야 할 길을 찾다

고성, 속초, 양양, 강릉, 동해, 삼척…. 동해안을 끼고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강원도의 땅을 꼽아보자면 이렇다.

이들 지역에는 유독 ‘도보여행 코스’가 많다. 아마도 동해안의 짙푸른 바다와 포구를 따라가는 길만큼 화려하고 낭만적이며 걷기 좋은 길이 또 없기 때문이리라.

이곳의 도보 길을 하나하나 꼽아보자. 우선 ‘관동팔경 녹색경관길’이 있다. 관동팔경의 명소를 잇겠다며 국토해양부가 지자체와 협력해 만들어낸 길이다. 부산 오륙도부터 고성의 통일전망대까지 무려 688㎞를 잇는 국내 최장 트레일코스 ‘해파랑길’도 이곳을 지난다. 이건 문화체육관광부의 작품이다. 또 강원 땅을 속속들이 짚는 ‘산소길’도 여기 있다. 이 길은 강원도가 낸 것이다. 여기다가 국도 직선화로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앉아 도보 여행자를 받아들이고 있는 옛 7번 국도도 새로 낸 길 아래 밑그림처럼 앉아 있다.

이렇게 길은 4개지만, 각각의 도보길은 지자체에 따라, 혹은 주제에 따라 길 이름이 다시 나뉘고, 그렇게 붙여진 이름의 길은 또다시 너덧개의 코스를 거느린다. 그러니 이곳에는 어림잡아 50∼60개에 육박하는 도보 코스가 놓여 있는 셈이다.

그 길이 다 제 나름의 코스를 갖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른 이름의 길들이 서로 만났다가 흩어지길 반복한다. 심지어 어떤 구간은 길이 다 겹쳐지면서 산소길이면서 해파랑길이고, 또 관동팔경길이기도 하다. 빼어난 길을 골라주겠다고 나선 이들이 오히려 길을 얼키설키 헝클어버린 형국이다. 이쯤되니 길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고, 한편으로는 ‘아예 내버려 두는 편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나 뒤엉켜버린 길의 이름을 가린다 해도, 지금 걷는 길이 어떤 코스인지 알지 못한다 해도, 동해안을 따라가는 도보길은 저 스스로 빛난다. 그 길의 이름이 어떤 것이든, 그 코스가 몇번째이든 무슨 상관일까. 봄볕 속에서 바다를 끼고 있는 언덕을 오르내리고, 한적한 해변의 백사장 길을 타박타박 걷다보면 바다가 보여주는 풍광과 작은 포구마을의 소박한 정취를 두루 만나게 된다.

해안을 따라 걷는 도보여행의 목적지로 삼척을 추천하는 이유는 이쪽의 바닷길 경관이 빼어남에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아 포구마다 소박하고 정겨운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삼척의 바다는 강릉의 정동진처럼, 속초의 대포항처럼 닳고 닳지 않고, 고성의 가진항이나 공현진처럼 서늘하지도 않다.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번잡스럽지 않지만 쓸쓸하지 않다.

게다가 삼척에는 길에 잠긴 이야기가 어느 곳보다 더 깊다. 이쪽의 해안가에 고대국가 실직국이 번성을 누렸고, 신라장군 이사부가 울릉도 정벌을 나섰으며, 소를 탄 늙은이가 수로부인에게 헌화가를 부르며 꽃을 바쳤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릉의 것으로 전해지는 능이 있고, 태백산에 버금가는 영험함이 깃들었다는 쉰움산도 있다.

삼척의 해안길을 걸으면 차로 지나칠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을 만나게 된다. 파도가 이루는 결을 어느 쪽에서 보아야 가장 빛나는지, 어촌마을의 블록 담 위의 빨랫줄에서 생선이 잘 말라가는 풍경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손님 끊긴 해안가 구멍가게의 난로는 또 얼마나 훈훈한지….

해안가를 타박타박 걸으면서 보아야 할 것들이 어디 바깥의 풍경뿐일까. 빠르고 느리지 않게 균일한 속도로 걷다보면 시선은 자연스레 자신의 내부로 향하기도 한다.

삼척의 해안 송림 사이로 달리는 해양레일바이크. 바다를 끼고 철로를 달리는 정취가 제법이다.


# 삼척에서 바다를 보는 가장 아름다운 길

삼척에서 도보코스로 첫 번째로 꼽을 만한 곳이 바로 동해시 추암의 촛대바위쯤에서 시작해서 삼척해변덱길을 지나서 정라항에 이르는 구간이다.

촛대바위로 유명한 추암은 동해와 삼척의 경계쯤에 있다. 추암해변의 절경이야 이미 알려진 것. 해변을 지나면 곧 신라 때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하러 배에 나무로 깎은 사자를 싣고 삼척에서 출발한 신라장군 이사부를 기리는 ‘이사부 사자 공원’을 만나게 된다. 이사부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울릉도나 독도에 대한 전시물은 하나 없고, 도자기들과 난데없는 유리공예 작품들만 전시된 기념관이 다소 실망스럽긴 하지만, 기념관의 유리창을 통해 굽어보는 해안의 경치만큼은 뛰어나다.

길은 몇걸음 만에 곧 신라향가 ‘헌화가’에서 늙은이가 꽃을 바친 수로부인을 기리는 ‘수로부인 공원’으로 이어지고 이때부터 삼척이 자랑하는 ‘새천년 해안도로’가 시작된다. 이 길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난 1999년에 해안가의 절경지대를 깎아내 만든 길이다.

삼척시가 가장 낭만적인 해안도로를 내려 물색하다 택한 길이라니 그 정취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애초에 도로를 낼 때 바다 쪽에는 보도를 놓지않아 차로 지날 때마다 아쉬웠던 곳인데, 관동팔경 길을 조성하면서 최근 바다 쪽 길 옆으로 나무덱과 보도를 놓는 공사가 마무리됐다. 기암괴석이 깔린 갯바위를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면서 걷는 운치 넘치는 길이 놓인 것이다.

새천년해안도로를 지나 정라항까지 걸어도 좋겠고, 내친 김에 죽서루까지 들렀다가 삼척교를 건너 오분리의 해안까지 가서 이사부가 배를 띄워 울릉도로 출발했다는 곳에 세워진 출항기념비를 만나고 돌아서도 좋겠다.

두 번째로 추천할 만한 길이 해신당 공원에서 임원항을 잇는 구간이다. 관동팔경길 중에서 ‘임원 해맞이공원길’이라 따로 이름 붙여진 이 길은 바다에서 한발짝 물러선 부드러운 능선을 오르내리는 길이다.

동해안 일대에서 조망이 좋은 곳을 찾는 요령 한 가지. 보통 해안가의 군부대나 초소 부근이 가장 경관이 빼어나다. 해안을 감시하는 군부대나 초소는 시야가 시원스레 트여 있는 곳에 세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초소나 군부대가 있는 곳치고 뛰어난 경치를 갖지 않은 곳이 드물다. 그런데 이 길이 바로 해안초소를 거느린 군부대의 복판을 가른다. 능선의 마루에 올라설 때마다 솔숲과 시누대숲 사이로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이 길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남화산이다. 남화산은 임원항 뒤편에 솟아 있는 자그마한 봉우리. 임원항에서 정상까지는 나무덱으로 길이 놓여 있고, 정상에는 전망대와 다양한 조각작품들이 세워져 있다.

해안 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나무덱길을 걷노라면 마치 양쪽으로 펼쳐진 바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임원항은 한때 울릉도를 오가는 여객선이 취항하던 곳. 예전보다 못하다지만, 이즈음도 일대의 수산물들이 다 이곳으로 모여든다. 해신당 공원에서 출발해 남화산 공원에 올랐다가 임원항으로 내려서 갓 잡아올린 싱싱한 생선회 맛을 보는 것도 좋겠다.

# 쉰움산… 오르지 않고 걷는 산

삼척에서 세 번째로 추천할 만한 걷기 코스는 쉰움산을 오르는 길이다. 도보여행에 웬 등산이냐 싶지만, 이 길은 강원도에서 조성한 ‘산소길’의 한 구간이다. 쉰움산의 해발고도는 683m로 이웃한 두타산과 청옥산에 비하면 거의 반토막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산길이 워낙 유순해 해발고도에 비해서도 훨씬 더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아무래도 산을 오르는 것이니 땀이야 좀 나긴 하지만, 천천히 다녀와도 왕복 2시간30분쯤이면 넉넉한 구간이라 ‘걷기코스’로 분류하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다. 본격 등산을 하는 이들이 간혹 찾기도 하지만, 쉰움산만 오르는 이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두타산과 청옥산을 함께 이어붙여 긴 산행을 한다.

쉰움산이란 이름은 ‘쉰 우물’에서 나왔다. 산정에 바위에 물이 고이는 50개의 우묵한 구멍이 마치 ‘쉰개의 우물’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산세는 별 특별할 게 없지만 7분 능선쯤의 암봉과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가 자못 기괴하다.

그래서일까. 예부터 쉰움산은 태백산에 버금가는 영험함이 깃들어 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무속인들이 무시로 드나들면서 바위 아래서 기도를 하거나 치성을 들인다. 산 곳곳에 불상 모양의 돌에다 명주실을 감아놓은 흔적이며, 촛불을 켜놓았던 자취가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쉰움산의 들머리에는 절집 천은사가 있다. 고려 때의 문신 이승휴가 국왕의 실정을 간언했다 파직당한뒤 이곳에 내려와 머물며 ‘제왕운기’를 저술했다. 제왕운기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쓴 책. 단군을 등장시키는 등 삼국시대 이전의 상고사를 한국사에 포함시켜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받는 책이다. 어찌보면 두타산이 거느린 작은 봉우리에 지나지 않은 쉰움산이 스스로 이름을 갖고, 나아가 태백산과 마찬가지로 영험함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은 암봉의 범상찮은 모습도 모습이지만, 그 산 아래 천은사에 단군을 우리 역사로 끌어낸 이승휴가 머물렀다는 데 힘입은 덕도 있을 터다.

절집 천은사는 근래 다시 복원되고 중창된 절집이라 이렇다할 볼 것이 없다. 그러나 현대식 건물로 지은 공양간 뒤편 돌확에서 넘쳐 흘러내리는 물맛만큼은 일품이다. 산자락 어디쯤의 계곡물을 받아낸 것일 텐데,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 깊은 단맛을 낸다.

쉰움산의 중턱쯤에는 마치 기와집 처마처럼 길게 뻗어나온 거대한 바위를 돌기둥 하나가 버티고 선 독특한 모습의 은사암도 있다. 또 정상의 건너편 능선에는 겸재의 금강산도를 연상케 하는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도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즈음 쉰움산에서는 귀가 가장 즐겁다. 얼음장 아래로 막 풀리기 시작한 계곡 물소리, 그리고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맑아지는 새소리가 고요한 산길을 걷는 내내 따라온다.

# 가는 길 = 삼척가는 길은 간명하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갈림목에서 동해고속도로 갈아타고 동해나들목으로 나온다. 여기서 7번 국도를 따라 내려오면 곧 삼척이다. 낭만적인 정취가 있는 새천년해안도로 쪽을 걷겠다면 동해의 추암 쪽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동해종합버스터미널이나 동해역에서 추암해수욕장으로 가는 버스가 수시로 있다. 걷기가 끝나는 정라항에서는 삼척역으로 버스가 운행한다. 임원항으로 이어지는 남화산 공원을 걸으려면 7번 국도를 따라 신남의 해신당 공원까지 내려가 해안길에서 시작해야 한다.

# 묵을 곳·먹을 곳 = 새천년해안도로에는 100실 규모의 호텔펠리스(033-575-7000)가 있다. 시설도 나무랄 데 없지만, 해안도로를 내려다보는 위치가 특히 빼어나다. 모텔 중에서는 한국관광공사가 ‘굿스테이’ 숙소로 지정한 정상동의 문모텔(033-572-4436)을 추천한다.

삼척의 맛집이라면 당연히 싱싱한 회다. 펠리스호텔 부근의 펠리스 횟집(033-573-8810)이 전망도 좋고, 시설과 음식이 깔끔한 편이다. 삼척에는 물회도 제법 이름났는데, 맹방해수욕장 남쪽 끝의 덕산해변의 덕산횟집(033-572-1314)과 정라항의 신화횟집(033-574-3810)이 쌍벽을 이루는 집이다.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_08  (0) 2012.02.29
동양화가 말을걸다_05  (0) 2012.02.28
황교익의 味食生活_15  (0) 2012.02.19
여수 거문도의 봄마중  (0) 2012.02.17
봉화 절집 여행  (0) 201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