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여의주를 얻듯 비상하라
작자 미상 운룡도
▲ 작자 미상 ‘운룡도’ 종이에 색. 103×61.5㎝. 삼성리움미술관 |
새날이 밝았다. 임진(壬辰)년 아침이 열렸다. 새로운 시작이다. 같은 해라도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가 다르다.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임진년은 흑룡(黑龍)의 해다. 용의 몸이 검어서 흑룡이 아니다. 임진(壬辰)의 천간(天干)이 되는 임(壬)이 오행(五行)상으로 물(水)을 뜻하는 북방(北方)을 가리키는데 북방의 색이 검은색(黑)이기 때문에 흑룡이라 한다. 드디어 용이 물을 만났다. 쫄쫄쫄 흐르는 시냇물이 아니라 큰물을 만났다. 용이 승천하기 위해서는 큰물이 필요하다. 임(壬)은 물 중에서도 큰물이다. 큰물을 만나지 못해 잠룡(潛龍)인 채 때를 기다리고 있던 용이 큰물을 만났으니 드디어 물살을 가르고 승천할 수 있을 것이다. 새해 아침에 당신은 용처럼 비상하는 꿈을 꾸며 자신을 위한 용비어천가를 부르라. 새해 아침은 오직 당신만을 위해 문이 열렸으니.
지도자의 최고 덕목은 조화로움
‘운룡도(雲龍圖)’는 검은 구름 속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용을 그린 작품이다. 용은 구름을 휘감은 채 용틀임을 하면서 화려하게 변신한 자유로움을 마음껏 즐기는 중이다. 걸림 없는 하늘을 무대 삼아 힘차게 승천한다. 비속(卑俗)의 껍질을 벗고 단박에 신령스러운 영물(靈物)로 부활한 용이 여의주를 들고 마음껏 조화를 부리고 있다. 화공은 용의 늠름한 몸체가 더욱 눈부시도록 청적황백흑(靑赤黃白黑)의 오방색(五方色)으로 단장을 했다. 용은 우주를 가득 채운 색채에서 에너지를 받아 자유자재한 능력을 과시한다.
‘운룡도’는 용의 해에만 그리는 특별한 그림이 아니다. 용의 영험한 힘을 빌려 사악한 액을 물리치려는 의도로 정초에 세화(歲畵)로 많이 그렸다. 뿐만 아니라 사신도(四神圖), 왕관, 향로, 제기, 기와, 해시계, 나침반, 칼, 범종, 군기(軍旗), 의장기, 도자기 등 다양한 용구에 용의 형상을 활용했다.
기원전 58년에 부여의 해모수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을 시초로 우리 민족의 삶과 신화 속에는 언제든지 용이 있었다. 박혁거세의 왕비는 계룡(鷄龍)의 딸이며, 석탈해는 용성국 왕의 아들이다. 백제 무왕은 지룡(池龍)의 아들이며, 견훤의 출생도 용과 관련되어 있다. 문무왕은 사후에 호국룡(護國龍)이 되었고, 왕건의 할아버지는 용녀와 결혼했다. 불교에서도 용은 호법신(護法神)·호국신(護國神)으로 환영받아 건축·조각·공예·불화에 끊임없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민간신앙에서 용은 용왕굿이나 용왕제, 풍어제나 기우제를 통해 사람들 속으로 강림한다. 농경민족에게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면 타들어가는 가뭄에 비를 불러 대지를 적시고 생명을 살리는 용을 숭배하고 섬긴 이유가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용은 실재하지 않는다. 상상의 동물이다. 십이지(十二支) 중 유일하게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동물이다. 사람들은 상상력으로 용을 만들면서 다른 짐승들의 장점만을 취하여 ‘파워 종결자’를 탄생시켰다. 용은 아홉 가지 동물의 특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머리는 낙타(駝), 뿔은 사슴(鹿), 눈은 토끼(兎), 귀는 소(牛), 목덜미는 뱀(蛇), 배는 큰 조개(蜃), 비늘은 잉어(鯉), 발톱은 매(鷹), 주먹은 호랑이(虎)와 비슷하다. 각 부족 간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합체(合體)’로서의 용이 탄생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용은 ‘파워 종결자’답게 탄생하자마자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봉황(鳳), 기린(麟), 거북(龜)과 더불어 사령(四靈)의 반열에 올랐고 최고의 지배자인 왕에 비유되었다. 임금의 얼굴은 용안(龍顔), 왕의 자리는 용상(龍床), 임금의 옷은 용포(龍袍), 용위, 용거, 용주, 용루로 격을 달리했다.
여러 짐승들의 장점만을 취해 탄생한 용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화로움이다. 용에게 조화로움은 외모와 맡은 역할 양쪽에서 모두 중요한 덕목이다. 왕이나 권력자들이 만백성이 경외하는 용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욕심낸 것은 당연하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만큼 용이 가진 신(神)적인 권위를 가져보겠다는 뜻이다. 동질감을 악용하여 권력을 잡은 뒤 다른 생명체들을 괴롭힐 때 우리는 그를 지도자가 아닌 독재자라 부른다. 독재자의 말로가 어떤지는 세계 역사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거창하게 세계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작은 커뮤니티의 대표가 그렇고 한 집안의 가장이 그렇다. 권위가 사라지고 권위의식만 남은 서글픈 초상화를 우리는 주변에서 언제든지 발견할 수 있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 용이 되는 잉어처럼
신화와 전설과 설화의 지존으로 등극한 용도 한때는 이름 없는 물고기였다. 자수성가하여 하늘과 땅을 자유자재로 휘젓고 다니는 거물이 되기까지 이무기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잠룡으로 살았다. 그래서 나오게 된 이야기가 ‘등용문(登龍門)’ 신화다. 이야기는 중국 황하 상류에 사는 잉어에서 비롯된다. 곤륜산에서 발원한 물이 적석산을 통과하면 용문폭포에 이른다. 복숭아꽃이 필 무렵 용문폭포 밑에는 수천만 마리의 잉어가 모여서 폭포 위로 뛰어오른다. 불가능을 향해 몸을 던지는 물고기의 무모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의 모습을 단순히 물고기의 회귀본능으로 치부해 버리면 과학상식이다.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토리를 엮어 내면 예술이 된다. 잉어의 회귀본능을 백과사전식의 정보제공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그림이 ‘약리도(躍鯉圖·잉어가 뛰어오르는 그림)’와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그림)’이다.
날개 없는 물고기가 오로지 자신의 ‘점프’ 실력 하나만 믿고 천 길 낭떠러지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 몸짓이 얼마나 지난하고 불가능해 보이는가를. 누가 저 평범한 잉어가 용이 될 수 있으리라 예측하겠는가. 경쟁률이 치열한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의 심정이 그와 같을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물려받은 유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잡대(지방의 잡다한 대학)’라고 무시 당하는 지방대 출신이라 학연(學緣)이나 인맥이 받쳐주는 것도 아니다. 그 어려운 장애를 전부 극복하고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그의 성공스토리는 용문을 뛰어올라 용이 된 잉어에 비교될 만하다. 그래서 ‘등용문’이라는 말은 크게 출세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당신은 어떤 여의주를 물고 있는가
등용에 성공한 용이 승천하기 위해서는 여의주가 필요하다. 여의주가 없으면 용은 다시 도룡뇽이나 뱀, 악어 같은 범속한 생물로 추락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여의주가 구슬처럼 작아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운룡도’에서 복주머니처럼 보이는 붉은색 물건이 여의주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물고기나 이무기처럼 비루한 삶을 살다 용처럼 승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여의주가 있어야 한다. 그 여의주는 새로운 계획일 수도 있고 야망일 수도 있고 열정일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고 자비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다. 어떤 빛깔의 여의주든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여의주는 남에게서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마치 조개가 돌멩이를 삼켜 진주를 만들 듯 자기만의 힘으로 움켜쥐어야 한다. 올해 당신은 어떤 여의주를 물고 비상하려는가. 용이 영묘(靈妙)한 구슬을 얻어 넓은 창공을 비상하듯 당신의 1년도 그런 해가 되시기를
‘웃음 바이러스’ 이목을 웃으면 복이 와요
▲ ‘smile 12101~210’ 1333.2x363.5cm, acylic on canvas, 2012 |
삶이 팍팍하고 고달프던 1970년대. 우리는 흑백TV에서 방영한 ‘웃으면 복이 와요’를 보며 웃었습니다. 한자로는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영어로는 스마일(Smile)이라고 하지요. 어려웠지만 누군가의 가슴에 달린 ‘스마일’ 배지를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웃음은 삶의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는 위대하고도 강렬한 힘이었습니다.
요즘은 어떤가요? 예전에 비해 형편은 훨씬 좋아졌는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웃을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눈만 뜨면 험악한 사건이 발생하고 인상 찌푸릴 일만 생깁니다. 소리 내어 엉엉 울어도 시원찮을 판에 우리는 언제쯤 웃게 될까요? 그에 대한 해답을 미소로 답해주는 작가가 이목을입니다.
그는 ‘웃음’이란 소재로 그린 작품을 통해 힘든 상황과 좌절 속에서도 삶의 여유를 잊지 말자고 다독입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에 다른 표정이지만 한결같이 웃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목을의 ‘웃음’을 보고 아주 행복한 사람일 거라고 상상을 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웃음’은 화가로서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력 상실’이라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신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짓는 웃음입니다. 극사실화를 그리던 사람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나빠진 고통스러운 현실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나온 작품입니다. 어려움을 ‘웃음’으로 극복한 작가가 자신만큼 힘든 사람들에게 웃음 바이러스를 퍼트리고자 만든 인생긍정법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오랜만에 마음껏 웃고 싶다면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위치한 암웨이 갤러리(031-786-1199)를 방문해 보세요. 세상에 얼마나 환한 미소가 많은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는 순간 미소를 짓게 되는 ‘SMILE’전은 2월 1일부터 3월 19일까지 계속됩니다
봄이 겨울에서 시작되듯 시작은 어려울수록 좋다
곽희 조춘도
▲ 곽희 ‘조춘도’ 북송. 1072년. 비단에 색. 158.3×108.1㎝, 대북고궁박물원 |
봄이다. 이렇게 추운 겨울인데 봄이라니. 그래도 봄이다. 2월 4일 입춘이 지났으니 봄은 파죽지세로 밀려올 것이다. 봄의 대대적인 ‘상륙작전’ 소식이 전해지면 서릿발같이 흙을 밀어내던 겨울 냉기도 힘없이 무너질 것이다. 철통 같은 냉전 체제가 무너진 들판에는 생명의 씨앗을 거느린 평화유지군이 점령할 것이다. 부드러운 햇살은 땅속에 감금된 새싹의 손을 잡고 지상으로 걸어 나올 것이고, 훈훈한 바람은 굳게 닫힌 꽃대문의 빗장을 열어 붉은 연정을 고백하게 할 것이다. 봄의 침략은 열망을 선동한다. 영세한 삶을 들쑤셔 꽃등을 켜게 한다. 맹목적으로 생명을 향해 질주하게 만든다. 사멸해야 하는 계절의 숙명이 생명 속에서 부활하는 역설. 쓰러지면서 화해하고 멸실되면서 탄생하는 초봄의 살풍경은 그래서 전혀 살풍경하지 않다. 오히려 축제의 마당이다. 열락의 화합을 약속하는 정혼(精魂)의 현장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여전히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싸늘한 겨울이다. 꽃샘 추위도 한바탕 깽판 치듯 휩쓸고 갈 것이다. 그래 봤자다. 봄은 대세다. 계시처럼, 예언처럼 태연자약하게 걸어오는 봄의 진군을 허물어지는 겨울이 무슨 수로 당해낼 것인가.
황량한 북방산수가 숨을 쉰다
중국 산수화를 대표하는 곽희(郭熙·약 1001~1090년)의 ‘조춘도(早春圖)’를 보자. ‘이른 봄’을 그린 작품인데 말이 ‘조춘’이지 아직은 겨울 추위가 삼엄한 ‘만동(晩冬)’이다. 그런데 겨울이라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얼음처럼 단단하던 겨울 산이 헐겁고 느슨하다. 지친 겨울이 새로 도착한 봄의 등에 기대 젖은 몸을 말리는 것 같다. 스스로 독하게 사느라 냉정하게 얼어있어야 했던 시간을 해동시킨다. 봄은 자신 앞에서 속수무책 무너지는 노췌한 겨울을 얼른 품에 안아 위로한다. 급히 달려오느라 발그스레해진 두 팔을 벌려 허물어져가는 겨울을 껴안는다. 그 모습이 무던하다.
‘조춘도’는 꿈틀거리는 황토산을 화면 가득 배치했다. 인간이 미처 봄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이 자연이 어떻게 우주의 질서를 감지해내고 받아들이는가를 보여주려함이다. 아직 겨울 추위를 떨쳐버리지 못한 나무들이 댕돌 같은 가풀막에 뿌리를 박은 채 봄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해조묘(蟹爪描·나무의 잔가지를 게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그리는 기법)로 표현된 두 그루 소나무는 벌써 물기를 머금었다. 뿌리를 통해 땅속의 기운을 맹렬하게 빨아들이는 중이다. 고원(高遠)·심원(深遠)·평원(平遠)의 다양한 시점(視點)의 혼합도 생동감을 더해준다. 중앙에 그려진 산이 상승하는 기운이라면 왼쪽에 펼쳐진 평원은 아득한 깊이감이다. 변화무쌍한 화면 경영이다. 덩어리진 황토산에는 세밀한 필선과 섬세한 질감 묘사로 자연의 위대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단순한 흙산이 펄떡거리는 허파처럼 숨을 쉰다. 먹색의 농담을 적절하게 조절하여 푸석한 산에 초봄의 생명력을 움트게 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안개와 햇빛에 의한 조광 효과는 강한 양감을 되살려 오랜 잠에 빠진 봄산을 흔들어 깨운다.
거대한 자연 앞에 나약한 인간
북송(北宋)의 화원이었던 곽희는 이성(李成·919~967년)과 함께 웅장하고 거대한 북방의 산수를 특색 있게 그려 이곽파(李郭派) 산수화풍을 수립하였다. 이성의 화풍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아 곽희의 이름만을 따서 곽희파 화풍(郭熙派 畵風)이라고도 부른다. 북방산수화에서는 산이 중심이다. 화면 중앙에 천험(天險)한 산이 위용을 자랑하며 높이 솟아 있다. 폭포는 거대한 산수에 묻혀 실처럼 가늘게 그려진다. 압도하듯 웅장한 대관산수화(大觀山水畵) 속에서 거대한 자연과 왜소한 인간이 대조적으로 표현된다. 천야만야(千耶萬耶)한 거대한 자연에 비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은 개미새끼처럼 작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겨우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곽파 화풍은 송(宋)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회하(淮河) 이남으로 남하할 때까지 북송을 상징하는 화풍이었다. 남송(南宋)의 조정에서는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에 의해 인물이 부각되는 근경 중심의 산수화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것을 마하파 화풍(馬夏派 畵風)이라 부른다. 전혀 다른 두 화풍의 전개는 산수를 그리는 화가에게 그를 둘러싼 자연환경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남송대 이후 이곽파 화풍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통이란 하루아침에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법이다. 금(金)과 원(元)대에도 여러 화가들이 이곽파 화풍을 따라 그렸다. 황량한 겨울 산, 언덕 위에 솟은 몇 그루의 소나무, 해조묘법과 운두준법(雲頭皴法·산이 풍화작용으로 침식되어 마치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그리는 기법) 등은 후대 이곽파 화풍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전용되었다. 이곽파 화풍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화가 안견(安堅)의 작품세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조선의 화가가 중국의 곽희파 화풍에서 무엇을 취하고 버렸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 작품이다.
아직도 봄이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거든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림 오른쪽 하단을 보면 뱃사공이 손님을 실은 배를 물가에 대려 하고 있다. 그런데 상류에서 쏟아지는 폭포물이 경쾌한 소리를 내고 흘러내린다. 곽희는 산수화 제작에 관한 이론서인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물을 ‘천지의 피’에 해당한다고 역설했다. ‘피(물)는 두루 흐르되 엉기거나 막히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얼음 녹은 물을 보니 엉기거나 막혀 동맥경화에 걸릴 것 같지는 않다. 생동하는 봄이 피를 두루 잘 흐르게 할 것이다.
눈길을 왼쪽 하단으로 돌려보자. 강가에는 사람들이 배를 타기 위해 서 있다. 강이 얼어 배가 나아갈 수 없는 첩첩산중이고 보면 봄은 물의 결박을 푸는 것에서부터 바뀐 세상을 보여준다. 아무리 완강하던 겨울도 물때썰때를 안다. 물줄기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 보면 바뀐 세상 속으로 나귀를 끌고 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인물들이 개미처럼 작게 그려졌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을 의미한다. 또한 날이 풀려 완연한 봄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터전을 왕래할 것을 예고한다. 인간은 비록 개미처럼 작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지혜롭게 자연을 경영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곽희가 산수화를 통해 감상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바로 자연 속에 있는 듯 천품을 수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계절의 시작은 봄이 아니라 겨울이다. 한 해의 시작이 녹음 무성한 8월이 아니라 1월 추위 속에서 시작되는 의미가 무엇일까. 비본질적인 허울은 전부 벗어버리고 열매, 씨앗 같은 본질적인 것만으로 한 해를 시작하라는 뜻이 아닐까. 사업도 경기가 좋을 때 무리하게 확장하면 경기가 나빠졌을 때를 견디지 못한다. 잎사귀 같은 겉치레를 전부 떨어뜨린 상태에서 투명하게 시작했을 때 새싹이 돋고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불황을 견딜 수 있다.
시작이 어려우면 일하는 도중 아무리 마음이 기우뚱거리고 출렁거려도 꿈쩍하지 않는 초심(初心)을 이어갈 수 있다.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 윤기 없는 마음과 부딪혀 사무치게 외로워도 부챗살을 움직이는 사북처럼 흔들리지 않게 된다. 시작이 어렵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시작은 어려울수록 좋다. 어려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무릉도원이 어딘가 했더니…
임득명 등고상화, 정선 필운대상춘
▲ 임득명 ‘등고상화’ 옥계12승첩 1786년, 종이에 연한 색, 24.2×18.9㎝, 삼성출판박물관 |
안견(安堅·조선 전기)을 비롯하여 이하곤(李夏坤·1677~1724), 원명유(元命維·1740~1774), 이광사(李匡師·1705~1777), 김수철(金秀哲·조선 후기) 등 많은 조선시대 화가들이 무릉도원을 그렸다. 조석진(趙錫晉·1853~1920), 안중식(安中植·1861~1919), 변관식(卞寬植·1899~1976) 등의 근대작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중에서 안견과 안중식은 ‘도원도’를 그린 대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안견은 불후의 명작으로 알려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렸고 안중식은 가장 많은 ‘도원도’를 남겼다. 화가들은 모두 복숭아나무를 그릴 때 꽃잎을 세밀하게 그린 것도 아닌데 척 보면 복숭아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그렸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임득명과 정선이 그린 두 작품을 감상하면서 해답을 찾아보자.
복숭아꽃 흐드러지게 핀 인왕산 자락
누구라도 만나면 환하게 웃어줄 것 같은 봄날. 7명의 선비가 필운대 근처에 있는 언덕에 올랐다. 필운대는 서울 인왕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다. 등산용 짚신을 급하게 꿰어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올라온 이들은 도성 안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 봄날의 경치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 계절은 바야흐로 꽃이 다투어 피기 시작하는 음력 2월. 온 천지가 생명으로 들떠 있다. 이날의 모임을 기념하여 임득명(林得明·1767~?)이 붓을 들었다. 수묵으로 쌀 같은 미점(米點)을 찍듯 고목을 그린 다음 봄빛에 어울리게 연한 담채로 봄꽃과 나무를 그렸다. 그리고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려 ‘등고상화(登高賞華)’라는 제목을 써 넣었다. ‘높은 곳에 올라 꽃을 감상하다’란 뜻이다.
‘등고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름 없는 무명씨들이 아니다. 그림을 그린 임득명을 비롯하여 중인 시인들이 모여 결성한 옥계시사(玉溪詩社)의 멤버들이다. 옥계시사는 1786년 7월 천수경·장혼·김낙서·임득명 등 13명의 중인층 여항 시인들이 옥류동(玉流洞) 옥계(玉溪)에 모여 결성한 시 동인 모임이다. 13인의 동인들은 계절마다 읊은 시 156편을 모아 ‘옥계십이승첩(玉溪十二勝帖)’을 엮었다. 이 시첩에 임득명이 4점을 그려 합장하였다. 그는 옥계시사의 시회 장면을 지속적으로 그렸는데 5년 뒤인 1791년에는 11장의 그림이 담긴 ‘옥계십경첩(玉溪十景帖)’을 완성했다. 그림의 내용은 ‘동인들이 정원에서 모이는 모습이나 산수 속에서 노니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내어 이야깃거리로 삼는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그렸다.
‘등고상화’에 그려진 꽃은 거의 미점을 찍어 놓아 정확히 어떤 꽃인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림 속의 꽃이 복숭아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꽃과 함께 그려진 연둣빛 나무는 버드나무다. 예로부터 인왕산 일대는 봄이 되면 복사꽃으로 유명하여 상춘객들이 반드시 들러봐야 하는 코스였다.
안평대군이 자신의 꿈에서 본 무릉도원과 비슷한 장소를 찾아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은 곳도 인왕산 기슭이었다. 도화동(桃花洞)이란 동네 이름이 생겨난 곳도 인왕산 계곡이다. 유득공(柳得恭)의 시에도 ‘도화동의 복사꽃 나무 1천그루’라는 표현이 있어 인왕산이 복숭아꽃밭으로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필운대에서 맞이한 봄
정선이 그린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을 보면 인왕산 자락에 자라고 있는 나무와 꽃을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임득명이 ‘등고상화’에서 미점으로 봄날의 분위기를 표현했다면, 정선은 각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로 대상을 정확히 묘사했다. 이 작품은 8명의 선비가 필운대에서 봄 경치를 감상하는 모습을 그렸다. 오른쪽에는 선비들의 모임이 열린 필운대가 그려졌고 저 멀리 원경에는 남산과 관악산이 보인다. 남산 꼭대기에는 애국가의 한 구절,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을 확인할 수 있는 낙랑장송이 그려져 있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성에는 꽃과 나무가 빼곡하다. 소나무와 버드나무와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가장 많이 눈에 들어오고 그 사이사이로 집들이 배치되어 있다. 빌딩과 건물이 전부를 차지하고 어쩌다 길거리에 가로수 몇 그루 심어져 있는 현재의 서울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같은 장소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전원적이다. 이렇게 서울이 운치 있는 도시였다니. 도시 위로 안개가 자욱하게 뒤덮여 분위기를 더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야말로 ‘그림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박문수(朴文秀·1691~1756)는 인왕산 일대의 봄 풍경을 ‘희고 붉은 자두꽃 복사꽃 만 가지에 가득 피었네’라고 노래했다. 조선시대 때 인왕산의 봄은 온통 ‘희고 붉은 꽃이 가득한 무릉도원’이었다. 작가들이 그린 그림 속의 나무를 세어보면 소나무, 버드나무, 오동나무, 대나무, 복숭아나무 등이 단연 으뜸이다. 옛 그림을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무릉도원은 어디에 있을까
이제 결론이 나왔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무릉도원을 잘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사는 곳이 바로 무릉도원이었기 때문이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할 수 있었던 비법도 평소에 자주 보던 풍경을 그렸기 때문이다. 임득명이 ‘등고상화’를 그리면서 점 몇 개로 복숭아꽃밭의 분위기를 살려낼 수 있었던 것도, 정선이 한양 풍경을 운치있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도 눈만 뜨면 하르르 하르르 떨어지는 복숭아꽃을 보며 생활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본 만큼 그릴 수 있다. 관심을 기울인 만큼 알 수 있고 맛보는 것만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환경이 중요하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이 1000여년 전에 쓴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읽고 조선의 화가들이 가장 조선적인 ‘도원도’를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일상생활에서 보는 복숭아꽃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무릉도원이라는 것을 안 조선의 화가들은 도원을 찾아 더 이상 환상 속을 헤매지 않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 가까운 곳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복숭아나무를 심으면 그곳이 바로 도원이었다. 내가 몸담고 사는 이곳이 무릉도원이고 극락이고 천당이며 파라다이스고 유토피아다. 아무리 극락이 좋다한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지옥이라면 미래의 행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곳을 무릉도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수많은 화가들이 복숭아꽃이 핀 도원도를 그린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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