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성격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며 수줍음을 많이 탄다.
학창시절에는 사람들이 나라는 존재가 교실에 있는지 없는지 조차 잘 모를 정도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일상생활이 지겹게 느껴졌고 재미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학교 가고 돌아와서 또 밥 먹고 자고 하는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
이러한 것을 평생 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으니만 못하다는 생각에,
나이 40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따로 생일상을 한 번도 차려본 기억이 없다.
산수 숙제를 할 때면 이런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 때문에 분노마저 느꼈다.
어른이 되면 뭔가 다른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그러나 그럴 것 같지도 않았다.
5학년 때 어느 날인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건 하늘에서 죄를 짓고 이 세상에 귀양살이 온 게 아닐까?'
어린 나이에 옛날 얘기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이런 와중에서도 예쁜 여자아이를 짝사랑할 줄도 알았다.
무려 5년간이나 혼자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이런 나의 이중성은 선천적으로 예고된 것이었나 보다.
사춘기에 들어서자 나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에 시달렸다. 어른들은 '그때가 좋은 때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시절로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당시 성에 대한 충동을 억제한다는 것은 마치 지옥의 형벌을 받는 것 같은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사춘기의 또 다른 특성은 죽음에 대해 인식한다는 점일 것이다. 유한한 생명. 사후는 어떻게 될까?
태어나기 이전에는 무엇이었을까?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생에서 얻어야 할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고등학교 시절, 한용운 스님의 시는 이런 나에게 신선함을 가져다주었다.
막연하게 복을 비는 기복적인 종교로만 알았던 불교에 그처럼 거대한 철학 사상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움이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공기 중에 있는 무형의 산소와 수소가 결합되면 유형의 물이 되고 얼음이 되듯이
유형과 무형은 변형된 모습일 뿐 본질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우주 삼라만상의 모습은 인연들의 구성 비율이 이합집산하는 모습의 반영일 뿐 허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대학 1년 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노트에 적어 보았다. 돈, 명예, 권력, 예술, 건강, 사랑 등등...
모두가 살아 있을 때의 일들이지 근원적인 가치는 아니었다.
다만 사랑만은 못해봐서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일단 사랑을 경험해보고 그것마저 아니면 이 세상을 하직하자는 생각으로 서양철학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내 성향에 맞는 철학자가 쇼펜하우어와 까뮈였다.
지독한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 그는 세상을 너무 비관한 나머지 그 고통을 씹고씹는 재미로 죽지도 못하는 이상한 인간이었다.
실존주의 철학자 까뮈. 신의 영역에 들어설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에 분노하여 세상에 주어진 고통의 길을 알면서도 피해가지 않는 것으로, 신에게 반항하는 오기를 부리는 모습이 시지프스 신화에서 잘표현되어 있었다.
집채만한 둥근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 신의 형벌,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
둥근 바위는 결코 정상에서 멈출 수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형극의 길인지 알면서도 그 일을 멈추지 않는 반항하는 죄수의 모습.
그런 그의 철학을 정오의 철학, 부조리의 철학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이란 이렇게 팽팽히 긴장되고 부조리한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밖의 여러 가지 철학, 철학자들. 그들은 단지 인생을 나름대로 정의해 놓았을뿐 그들의 한계를 초월하는 데에는 모두 실패했다.
이들로부터는 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수천년 동안 천재라 불리던 수많은 이들이 구하지 못했던 생과 사에 대한 해답을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이 너무 주제 넘는 짓이었을까?
이 시절의 나는 개똥철학자로 불리우게 되었다.
철학에서 없다면 이젠 종교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천주교를 믿는데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고집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나만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성경책을 들춰보니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낳고 한참 계속해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 짜증이 났다.
누가 누구를 낳은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부모님이 나를 낳은 것에도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것은 당연했다.
건너뛰어 신약을 보니 훨씬 나았다. 여러 상황 속에서 보여지는 예수의 말씀은 보통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없는 현기가 담긴 것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르느냐 하는 것이었지 그분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젊은 시절 무엇을 고민했고 어떤 수련을 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는 듯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서 그런가? 그런 경지에 오르는 사람은 따로 존재한다는 말인가?
훌륭한 경전이긴 했으나 내 갈증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불교로 접근했다. 종교성은 배제한 채 철학적으로만 공부했다.
한자들이 빽빽한 경전을 볼 능력이 내겐 없었으므로 스님들이 소설식으로 풀어 놓은 책들을 보게 되었다.
불교가 이런 것이었던가! 동서고금을 통하여 이런 심오한 철학이 또어디에 있던가!
심즉시불, 색즉시공, 공즉시색, 일체유심조, 육도윤회, 응무소주, 이생기심, 선문답은 또 어떠한가! 알 듯 모를 듯 아리송 모르송...
기가 막힌 매력에 미친 듯이 몰두했다. 깨달으면 부처요, 인간은 신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몇 년 열심히 정진하면 뭔가 이룰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저 중이 되겠습니다."
어머님이 말씀하시길.
"신부가 된다고 해도 안 된다고 할 텐데 중이라니. 나 파묻고 가라."
아아!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여워한다더니 과연... 아버지도 거드셨다.
"너는 그릇이 못 돼."
옛 성인들도 집안과 고향에서는 인정받기 힘들었다던데 혹시 나도 그런 게 아닐까?
거절을 당하고 보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허락을 받았으면 중이 되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모든 욕망을 끊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 몇 년 몰두하면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던 부처의 경지는 공부하면 할수록 더욱멀어져만 갔다.
세상을 몰랐고 인간도 몰랐고 나 자신도 제대로 볼 줄 몰랐던,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철부지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아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 더욱이 실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인지를 그때는 몰랐었다.
아버지의 협박(?)에 못 이겨 웅변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아 발표력이 너무 없다 해서 타고나지도 않은 소질을 계발하기 위함이었다.
첫날, 수강생들의 자기 소개시간이 있었다. 한 여자가 단상에 올라섰는데 주위가 컴컴해지며 그 여자의 온 몸에 후광이 비치는 것이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그림을 보면 머리뒤에만 후광이 비쳤는데 그 여자는 온 몸에 후광이 비치는 것이었다.
그때 허공에서 "이 여자가 네 마누라다. 이 여자가 아니면 결혼하기 힘들다."라는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참으로 이상했지만 신기하게도 생생한 현실이었다. 나는 첫눈에 반했다.
사는 것에 별 의미를 갖지 못했던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미쳤다는 말이다.
미친 놈이 아니고서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못한다. 20살의 남자가 22살의 여자에게 청혼을 했다.
현실적으로 충분히 거절이 예상된 청혼이었다.
상처받은 가슴은 술과 눈물로도 치유될 수 없었고 도피하는 심정으로 지원입대를 하게 되었다
(4년 후 우리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다).
군대 얘기는 길게 하고 싶지 않다. 다듬지 않은 소나무 몽둥이로 맞아 엉덩이가 터져서 살가죽이 팬티와 달라붙은 적도 있었다.
많이 맞았다. 군대에서는 개똥철학자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대할 때까지 나는 단 한 대도 때리질 못했다.
3년 동안의 군 생활을 통하여 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추악함, 잔인함, 교활함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조직의 논리를 어렴풋이 감지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모습들에 물들고 싶지 않았다. 짐승처럼 힘으로 지배되는 굴레에서,
엄격한 통제하에 살아가는 조직에서 가장 빛나게 부각된 것은,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평등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자유였다.
얼핏 저차원적인 듯 보일 수도 있지만 먹을 수 있는 자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자유, 술 마시는 자유, 나다닐 수 있는 자유,
이런 것들이 너무 소중한 것이었다. 하물며 자기 자신의 마음의 굴레를 벗어나 대 자유인이 된다면 그 기쁨은 어떻겠는가!
제대하던 날, 철창을 벗어나는 짐승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군대 문을 뛰쳐나갔다.
도의 근원은 같으므로 유, 불, 선이 하나라 한다.
그래서 사상은 불교로 무장된 채로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한 것이 선도에 접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종로에 있던 국선도 본원에 입회하여 수련을 하면서 그 당시 비매품이었던 <청산거사 일대기>를 빌려 보았고,
<국선도>라는 단전호흡 원리를 기술한 책으로 공부를 했다.
청산거사. 아홉 살 때 절로 심부름 가던 도중 산중도인에게 납치(?)되다시피 해서 시작된 산 속에서의 수련,
고양이인 줄 알고 키운 것이 호랑이였다는 얘기 등등. 운명적으로 도인일 수밖에 없었던 그 인생이 너무 흥미진진했고 부러웠다.
나도 다음 생에서는 산중에 버려진 고아로 태어나 도인 스승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국선도>라는 책을 통해서는 예전에 시시하게 생각했던 음양오행의 원리에 대한 개념을 깨닫게 되면서 한의학,
주역 쪽으로까지 관심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동양의 학문을 미개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큰 착각이었다.
그것은 다섯 가지 기운이 서로 생하고 극하면서 사계의 변화와 같이 순환 변천하는 원리를 밝혀 놓은, 얼핏 단순한 듯하지만
대단히 심오하고 복잡한 우주철학이었다
(훗날 TV에 출연한 유명한 서양철학 교수가 음양오행설을 소박한 고대 학문이라고 경시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
드러난 명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여하튼 국선도에 매료당한 것은 분명한데 도장이 멀다는 둥 시간이 없다는 둥 이런저런 이유로 몇 달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게으름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선도에 한계를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청산거사와 같은 기연을 만나지도 못했고,
어릴 적부터 수십 년간 산중 수도도 못 해본 나 같은 인간이 갈 수 있는 경지란 뻔하지 않을까?
더구나 그런 청산거사도 양신출신은 못했고 출신을 한다해도 그것은 부처의 경지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다.
모든 선도서를 보면 양신출신이 최고의 경지이면서도 그 경지에 이르는 과정이 불확실하여 거의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양신출신보다 더 높은 경지를 바라는 나는 정신병자인가? 꿈속을 헤매는 몽상가란 말인가?
우학도인이 나오는 <단>이라는 책을 보았다. 백발에 길고 흰 수염이 휘날리는 모습이 그럴 듯했다.
흥미 있는 내용이긴 했지만 이분의 경지가 민족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어서 실망스러웠다.
국가의 한계, 지구의 한계를 한껏 벗어나 주와 합일해야 하거늘 축지법이나 둔갑술 등 신통술을 부릴 수 있다해도
결국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번 생에서 윤회를 마감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는 이처럼 추악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나오고 싶지 않았다.
'강증산'이라는 대도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71년에서 1909년까지 39년 동안의 생애를 통해 신을 부려 하늘과 땅을 뜯어고치는 소위 천지공사를 하고 갔다 하는 큰 인물이었다.
보통 신흥종교를 보면 '누구의 계시를 받았다' 또는 '재림 누구'하며 신이나 성현을 빙자하는데 비해
이분은 너무 당당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했다.
증산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양오행, 팔괘(복희팔괘, 문왕팔괘, 정역팔괘), 주역(점치는 주역이 아닌 천지의 기운,
징조를 알기 위한 주역)을 공부해야 했는데 막히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첩첩산중인지라,
J단체에 가서 종정이라는 분의 강론을 들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도의 문고리만 잡고, 문을 열어 젖힌 자는 아닌 듯했다. 내가 판단한 증산은 적어도 석가 이하는 아닌 것 같았다.
공부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고 독학하는 것의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과연 도통한 스승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증산이 말씀했던 대두목(증산은 후에 오실 진인을 대두목이라 표현했다)의 출현만이 희망인가?
나는 내 주위의 '또라이'들에게 말했다.
"도인의 출현소식이 있으면 긴급연락 바란다."
마침 한 친구가 전라도 정읍에 신기한 능력이 있는 할머니가 있다고 했다. 정읍역에 내려 무작정 택시를 탄 후
"보기만 해도 병을 낫게 하는 할머니 집에 가자."고 하니, 기사가 그 집에 데려다 줄 정도로 그 분은 그렇게 유명한 분이었다.
한 여름날 점심 때쯤 부슬부슬 비는 내리는데 나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그 집에들어섰다.
시골 농촌집 마루에 그 분은 하얀 모시 한복을 입고 앉아서 몇몇 노인들이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하소연을 하면
그냥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어떻게 왔냐고 물으셨다.
"몸이 아파서 온 건 아닙니다. 길을 묻고자 왔습니다."
아아! 얼마나 그럴듯한 말인가! 깨우친 스님들의 선문답 한 대목 같지 않은가!(이 정도면 자아도취 증세가 중증에 속한다)
"잘못 찾아왔습니다. 무식한 늙은이가 아는 게 없습니다."
짧게 한마디만 대답하시고 할머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한참을 부스럭대시더니 방안으로 들어오라 하셨다.
정읍이 증산의 활동무대였으므로 증산에 대해 물어보니 그 분의 아버님이 증산 추종자였다 하시며 증산의 기행 이적에 대한 실화를
몇 대목 들려 주셨다.
"증산께서 미륵불이라고들 하는데 그렇습니까?"
"내 생각에는 인정상관이 미륵불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정상관'은 또 누구란 말인가? 우리 나라에는 별 희한한 도인도 많구나.
여처자라고도 불리우는 '인정상관'이라는 여도인은 짐승의 껍질 같은 것을 쓰고 태어나 일곱 살 때인가 그 허물을 벗었다 한다.
또 열 손가락을 꼭 쥔 채 펼 수가 없었는데 큰 공사를 남몰래 한 후엔 손가락이 한 개씩 펴졌다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갓 태어났을 때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던 여처자의 손에 일주일간 맡겨졌었는데 지금의 능력이
그분에 의해 주어진 것 같다고도 하셨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증산은 하늘의 공사를 맡았고 인정상관은 땅의 공사를 맡았던 것 같다. 몇 시간의 평범치 않은 대화 끝에 나는 질문을 했다.
"저는 입산수도하고자 하는데 처자식이 있는 몸이라 마음이 괴롭습니다. 이게 옳습니까?"
"도는 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살아가며 마음을 닦다 보면,
끊어진 전선을 연결하면 전깃불이 바로 켜지듯 때가 되면 바로 열립니다.
천지의 운수로 볼 때 멀지 않은 장래에 그런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나를 이끌어줄 구체적인 수련법은 없었다. 이렇게 막연히 한도 끝도 없이 마음만 닦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숙명적으로 기이한 인연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쫓기는 심정으로,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나는 헤맬 수밖에 없었다. 원효대사가 득도했다고 하는 변산 개암사 뒤의 울금바위에 있는 동굴을 막연히 찾아갔다. 혹시 재수 좋으면 하늘에서 천서를 내려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그 동굴에 천서는 없었고 내 또래의 남자가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와 얘기 나눠보니 그는 농부였는데 전혀 농부답지 않은 말을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 나라는 수리적으로 44수이고 우물 정(井)자이며 기운이 마이산으로 뻗쳤다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는 농부까지도 '또라이'가 있는 도인국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허탈해서 돌아오는 내게 누가 말을 걸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으리라.
"구도과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남녀간의 미팅이라 하겠다. 혹시나 하고 갔다가 역시나 하고 돌아오므로."
대학 재학시 나는 운명의 그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 사연을 얘기로 하자면 소설책 한 권 분량은 충분히 넘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문열이었다면 어떻게 써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졸업 후 취직을 못했는지 안했는지, 백수생활을 2년 동안 하다보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보다못한 아버지의 도움으로 나는 최초의 사회생활을 사장으로 시작했다.
황동 파이프로 침대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창피한 말이지만 그 나이 먹도록 은행에 저금은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부가세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결국 실패가 예정된 무모한 일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접대라는 명목으로 1차 2차 3차 하며 술에 취해 살게 되었다.
20대 후반의 순진한 놈이 50대 능구렁이들을 상대하기란 너무 힘들었다.
그 중 제일 괴로웠던 일은 이들이 꼭 여자를 끼고 술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늙은 말이 콩맛을 더 잘 안다고 히물히물거렸다.
그러다 보니 사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술에 취해 새벽 2시 3시에 들어오면서도 자지 않고 증산의 천지공사를 연구했다.
나에게는 이 시간이 제일 행복했지만, 반면에 진전되지 않는 공부 때문에 절망도 했다. 이러는 나를 보고 아내는 말했다.
"그렇게 공부했으면 판검사가 되었어도 열두 번은 됐겠다. 에라, 이 땡중아."
직원 30명 내외의 조그만 공장에도 세력다툼이 있었고 알력이 있었다.
죽는 줄 모르고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이해관계에 따라, 먹이 따라 싸우는 이 사람들이, 이사회가 싫었다.
언덕 아래로 굴러가는 수레바퀴를 멈추기 어렵듯,
사업이라는 것도 망할 때까지 끝까지 흘러가게 되어 있어서 중간에 청산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이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었다. 팔자니 운명이나 하는 것이 정말 있는 것일까?
어른들이 그런 한탄을 했을 때 너무 무식해 보였었는데. 그런데 이상했다. 얼마 전부터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경제학에 나오는 '보이지 않는 손'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나를 한쪽으로 이리저리 몰고 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내 팔자였는지는 몰라도 3년만에 나는 망했다. 쫄딱 망했다. 보통 사람들은 평사원, 과장, 부장, 이사, 사장으로 진급했지만
나는 사장, 부장, 실장, 과장, 대리순으로 나이를 먹을수록 거꾸로 하락하는 이상한 사회생활을 했다.
이미 정상궤도를 이탈한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조그만 개인회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2년만에 그 조그만 회사가 망하고말았다.
그리고 또 다시 취직한 다른 회사도 망했다. 어쩌면 나는 망조가 든 놈이었는지도모른다. 아마도 백수가 내 천직인 모양이었다.
공장이 망하고 아직 회사에 취직하기 전인 88년 후반의 일이다. 나의 목 오른쪽에 큰 혹이 생겼다.
강남 성모병원 진단으로는 지름이 5cm나 되는 보기 드물게 큰 갑상선 종양이라 했지만 악성은 아니니 수술하면 된다고 했다.
한달 후에 수술을 받기로 예약은 했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체유심조라. 마음 밖의 모든 것이 허상이거늘 병이 붙을 자리가 내 몸의 어디에 따로 있겠는가. 모두 다 집착에서 나올 뿐이다.'
그리고는 한동안 혹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지내던 중 병원으로부터 수술을 받으러 오라는 통지를 받았다.
병원에 가려고 옷을 입을 때였다. 아내가 "어, 혹이 줄어들었네."하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거울을 보니 혹의 크기가 반으로 줄어 있었다. 은근히 자신이 생겨서 수술을 취소했고,
결국 그 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종교인이었다면 은사를 받았느니, 부처님이 도왔다느니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사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그런 일도 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그 당시 <신술(神術)>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천존의 집'.
그곳에는 증산공부를 하다가 온 사람들이 꽤 있었고 무엇보다 그 책의 저자도 있었다.
그들과 많은 얘기들을 나누면서 증산선생의 '의통'이 여기에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천도선법 초창기 수련생이 되어 조상의 막힌 기운을 열기 위해 천도제도 올렸고
칠보로 만든 진리의 상에서만 내린다는 기운을 받기 위해 안간힘도 썼다.
그러던 중, 하루는 밤 12시경에 같이 수련하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이 있으니 지금 당장 도장에 나오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도장에 가보니 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완전 접신된 상태였다.
영화 속의 저승사자를 보면 눈 주위에 시꺼먼 분장을 하는데 그 사람의 모습이 그러했다.
집에서도 그를 이미 포기한 상태라 도를 공부한다는 그의 친구에게 보낸 것이었고,
친구는 진리의 상에서 나오는 기운으로 접신된 영을 몰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그 사람을 도장으로 데리고 왔던 것이다.
그때, 도장에 상주하는 고급간부가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웠는지 몹시 화를 내며 말했다.
"어서 데리고 나가라. 어디서 송장을 끌고 왔느냐."
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이 사람을 치유할 능력이 없으면 가엽게라도 볼 수 있어야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일텐데.
여기도 내가 수련할 곳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접신된 사람은 스무 살 때의 어느 비오는 날 낮에, 우연히 유체이탈을 하게 되어 옆방의 모습을 생생히 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 후론 심령과학, 성경, 선도, 불경 등에 관한 한 거의 통달할 지경이 되어 심지어는 목사하고 성경을 논하더라도 목사가 손을 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공부가 지식을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니어서 바른 마음 공부보다는 신기한 현상 쪽에 집착하게 되어,
그의 말에 의하면 '어둠의 명상수련'을 하게 되었고,
수련을 해도 지하실 컴컴한 곳 또는 지하토굴 같은 곳에서 영을 부르는 수련을 했다 한다.
친구와 나는 그를 여관방으로 데려갔다. 제 정신이 아닌 그는 옷을 홀랑 벗고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짓도 하였고,
형광등을 쳐다보면서 벌벌 떨며 "나는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둥 밤새 소동을 부렸다.
잠시 한눈 파는 사이에 그는 아침에 도망치고 말았다. 우리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연락을 기다렸다.
저녁 때 경기도 광주 경찰서에서 찾았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가서 사정을 들어보니,
이 친구가 앞에서 오는 레미콘 차를 머리로 들이받고도 죽지 않으니까
그 뒤에 오는 봉고 차를 또 들이받았는데 차체만 움푹 찌그러지자 혼비백산한 운전사들은 명함을 전해주고는 도망(?)치다시피 했고,
경찰 스무 명이 이 친구를 잡아왔다고 했다
경찰이 스무 명이나 동원된 것은 차를 찌그러뜨리는 머리로 경찰들 머리를 받으면 수박 개지듯 깨질까봐 머리는 뒤로 제치고
손만 내밀어서 잡아오기 위해서였단다). 결국 이 친구는 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수개월 후 그는 이 세상을 떠났다.
또 한사람이 떠오른다. 천도선법 수련 중에 알게 된 20대 초반의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조상신이 접신 되어 몸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훗날 듣기로는, 2년 후 쯤 결국 그도 죽었다고 한다.
이런 얘기들을 길게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 당시에 나는 내 스스로에게 어느 정도 도취되어 있었다. 10여년을 공부해 오다 보니 한 껍질을 벗게 되고 또 한 껍질을 벗게 되고,
여러 번 벗게 되니까 남들은 인정하지 않았어도 내 스스로 도인인 양 착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잡령에 시달리는 위의 두 사람을 대했을 때 나는 너무나도 무력했다.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파워가 없는 도(道), 머리로만 깨닫는 도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진정한 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기존의 그 많은 종교단체에서도 그 한심한 두 명의 중생들을 건지진 못했다.
수많은 학자, 성직자, 도인들의 주옥같은 말씀들, 석가와 예수의 말씀들, 수많은 해설서들...
모두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성현들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보고 싶지가 않았다. 스스로 성현이 된 자,
스스로 도통을 한 자, 죽어버린 성인들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생생히 살아 있는 말을 하는 자.
그러한 스승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제는 시간이 없는데... 대변혁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데... 큰일이다,
참으로 큰일났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마음은 점점 바빠졌다.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정감록>, <격암유록>, <천부경>을 연구해 보아도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함만 더할 뿐 실질적인 방법을 찾진 못했다.
통일교 경전을 보았다. 성경을 음양오행으로 기가 막히게 풀어 놓았는데,
책을 중간쯤 읽다 보니 본래의 뜻이 묘하게 변질되어 가기 시작했다.
각세도의 <천지대법전>. 육도윤회는 진리가 아닌 고도의 방편이란다. 그 일갈이 멋있었다.
하지만 주문수련에 너무 편중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원불교 전서>. 처처불상, 사사불공, 자타력신앙...
소태산종사. 이런 분이라면 스승으로 모셔보고 싶었다. 청계천 8가 '구통도가'에도 가보고,
안양 '한마음 선원'에도 가보고, 비원 앞 '불무도장'에도 가보았다.
모두 다 수도하는 곳이긴 하나 개인의 성향이 다른 탓인지 내가 정착하기에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증산사상을 연구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의 공부를 토론하는 가난한 단체에서 제 3의 팔괘를 만들어 놓고
대구 팔공산에 올라 자시에 북쪽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등 온갖 몸부림을 쳐보아도 내 마음에 흡족하게 남는 것은 없었다.
결국 나는, 우리는 하찮은 중생일 뿐 그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공상일 뿐인가?
수천 년의 인간 역사에 남는 고작 몇 명의 성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예정되었던 성인일 뿐 아무나 그 경지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일까?
나의 욕심은 그저 과욕일 뿐인가? 그렇다면 남들처럼 이 세상살이에 안주해야 하나?
몇 조각 썩은 고기를 더 먹고자 싸우는 짐승들처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자식의부귀영화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것인가? 유치하다. 더럽다.
재물은 세끼 밥 먹으면 족하고 명예는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으면 족하지 않은가?
내 그릇이 작으면 어떤가?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어떤가?
가고 가고 또 가다 보면 내 분수에 맞는 경지까지는 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결혼은 왜 했던가?
책임지지 못할 가정은 왜 꾸렸던가?
자식이 둘이 된 후에 정관 수술을 했는데도 왜 또 임신은 되어 아내로 하여금 소파수술을 받게 했던가?
이래저래 죄업은 쌓여만 갔다. 아이를 지운 죄로 하늘이 두려웠다.
증산선생의 대두목 즉, 진인공사를 보면 전주 용머리 고개에서 공사를 행했는데
'그분'을 '수원 나그네'라 칭했고 초막에서 난다 했다. 수원이라 함은 경기도 수원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물의 근원 즉, 도의 원천을 비유한 것일까? 왜 하필 나그네라 했을 까?
초막에서 태어난다 하니 찢어지게 가난함을 말한 것 같고, 왜 전주용머리 고개에서 공사를 행했을까? 과연 언제 출세할까?
오행의 중앙자리는 토(土). 토(土)는 치우치지 않는 조화의 자리이니
진인이 나올 때는 무진년(戊辰年 88년) 토(土)가 중첩된 해가 아니겠는가?
아! 진인은 88년에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들리는 건 관심 없는 올림픽 소식 뿐.
나는 또 다시 헛다리를 짚은 모양이었다. 허탈했다. 이제는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교에는 육신통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전생을 본다는 숙명통이다.
'그래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알려면 전생을 봐야 되지 않을까?'
죽기 전에 최소한 전생이라도 봐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사주나 책에 의존하지 않고 또 저급한 영 따위에 접신 되지 않은 청정한 상태에서 그 경지에 가는 방법은,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선도의 양신출신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경지에 이른 자는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위백양, 여동빈, 정북창 등등. 몇몇 선인들이 거론되기는 하나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일 뿐 확인될 수도 없는 일들이었다.
선도서들을 보면 참으로 어렵다. 수련을 접어두고라도 그 뜻만 해석하는데도 평생 공부해도 모를 것 같다.
모든 말이 비유로 쓰여졌고 주역 팔괘로 설명되어졌기 때문이다.
원래 하늘엔 완전한 건이 있었고 땅에는 완전한 곤이 있었으니 건곤이 사귀다 보니 사람의 머리에는 불완전한 리가 있게 되고
아래쪽에는 불완전한 감이 자리하게 되었다.
천지에 합일되는 완전한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리의 가운데 음효가 감의 가운데로 들어가 곤을 이루고 감의 가운데 양효가
독맥으로 수직상승해 리의 가운데로 들어가면 완전한 건이 되어 도에 합당하게 된다.
이를 비유해 용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비유로 말하기도 하는 등 복잡하다.
결국 소주천의 운기 모습을 이론적으로 형상화한 것에 불과한 것 같은데 말이다.
이렇게 철학적이고 이론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이런 어마어마한 우주와 인체의 비밀을 모르고 사는 평범한 인생들이 한심해 보였고
나는 내 자신이 무슨 대단한 경지에 이른 양 교만해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몸은 땅에 의지해 있으면서 머리는 항상 하늘을 보는 모습으로 철저한 이중인격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속으로는 교만하나 겉으로는 겸손과 인정으로 넘치는 교활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스스로 그 겉모습이 자기의 속과 일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다.
<불교신문>을 보니 Y선원에서 매일 두 시간씩 3개월 코스의 혜명경 강좌가 있었다.
찾아가서 보니 여섯 명이 앉으면 꽉차는 방 하나만 달랑 있는 가난한 선원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도를 알고 싶어 왔습니다."
"나도 모릅니다."
말하는 순간, 그의 눈빛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갑자기 옛말이 생각났다. '아! 맞다. 아는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그 이후 3개월 동안 나는 한 번도 결석하지 않은 훌륭한 수강생이 되었으나 그만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조그만 개인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던 나는 강좌를 들으려면 정확한 시간에 퇴근해야 했으므로
그 시간만 되면 일은 제쳐두고 퇴근을 해버리니 하루는 사장이 나를 불러 고함을 질렀다.
"그 따위로 하려면 집어 치워."
"그럼 그만두겠습니다."
나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고, 그 사실을 집사람에게 보고(?)했더니 입만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대책 없는 놈이었다.
Y선원은 참선하는 곳이 아니라 단전호흡하는 곳이었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이 참선이 아니라 양신출신하는 것이라 말하는 곳이었다.
불경에 보면 '마음장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말의 성기가 모습을 감춘다'는 뜻이다.
그 거대한 물건이 아기들 고추처럼 작아질 정도로 우그러진다는 말이다. 즉 체내의 정(精)을 유출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때부터 우리 부부는 각방을 쓰게 되었다. 유혹 받으면 안 되니까.
그러나 억지로 거부한들 무엇하나? 꿈에서 교란하는 걸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도인무몽(道人無夢)이라, 도인은 꿈이 없다고 말했던가?
성에 대한 의식 자체를 말살해야 꿈에서도 나타나질 않을 것이다. 어쨌든 몇 년간 사투 끝에 드디어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게 되었다.
드디어 백일 축기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55일 되던 날에 마누라의 분노 서린 유혹에 넘어가 나는 파계하게 되었다.
실패하는 순간, 나는 겹쳐진 몸 위에서 그대로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후환이 두려워 살짝 곁눈질로 마누라를 쳐다보니 수치스러운 듯, 기가 막힌 듯,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등산광이 산이 있으니 올라간다고 말했듯이, 같이 사는 여자가 있으니 도저히 올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심하게 되었다. '이 울타리를 벗어나 도망가야 되겠다'고.
마침 그때에는 중국으로의 한의학 유학이 한참 유행이었다.
비현실적인 인간이 그래도 한의사가 되는 공부를 한다고 하면 부모님이나 아내가 허락해줄 것 같았다.
결국 결재를 받아냈다. 그러나 내 속셈은 한의학을 배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딴 데 있었다.
증산 관계서적 몇 권, 원불교 전서, 혜명경, 능엄경, 참동계, 태을금화종지 등을 싸가지고
처자식에 대한 경제적인 의무를 훌훌 벗어버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도를 이루기 위한 마지막 승부를 내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책들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서가에는 종교서적, 명상서적, 단전호흡서적 등 책의 홍수였다. 제목들도 거창했다. 그러나 볼 만한 책이 없었다.
책 보기에도 지친 나는 이젠 탐색은 그만하고 정착하고 싶었다. 지식은 단지 지식일 뿐이었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책 제목들을 읽어보다가 아주 건방진 책 제목을 보게 되었다.
<천서>.
<천서>? 이것은 산 속 동굴에서 비밀리에 전해지는 것이지 도심 한복판 서점에 있을 수가 없는데?
책을 꺼내 표지에서부터 사이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상한 글씨가 꼬불탕꼬불탕 쓰여 있었다.
활자도 큰걸 보니 페이지 수를 늘리려고 한 것 같았고 내용을 보니 팔괘도 안 나오고 용호도 안 나오는,
아주 쉽고 유치한 수준이었다. 이런 책은 초보자용이지 적어도 전문가가 볼 책은 아닌 것이었다.
그러나 한 부분을 읽어보니 '이것 봐라?'하는 마음이 들었다.
고상하고 어려운 문자는 전혀 무시하고 쉬운 말로만 풀어쓴 절절한 체험이 바탕으로 깔려있어 신선했다.
일단 책을 구입하여 밤새워 책을 읽다 보니 50페이지 정도밖에 안 남았다.
다 보기가 너무 아쉬워 남겨 두었다가 다음날 마저 읽었다.
책의 맨 앞부분에 저자의 사진이 몇 장 나오는데 너무 젊었다.
하긴 석가, 예수, 증산 같은 성인들도 30세 전후에 도통하셨으니 나이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러나 적어도 흰 수염이 멋지게 나거나, 백발이 휘날려야 되거나, 도포를 입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기준에 맞아야 도인스럽지 않겠는가?
상상 속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 저자의 연락처가 안 나와 있으니 수원의 '우만정사'를 무작정 찾아야 하는 것일까?
일단 출판사에 전화해 보니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주었다. 강남 삼성동에 있는 단전호흡 도장이라고 했다.
'아아! 틀렸다. 여기도 아니구나.'
내가 상상하기로는 산 중턱에 자리잡은 허름한 판잣집으로 저자를 찾아가서 몇 마디 문답 끝에 땅에 엎드려
'사부님,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하는 고전적인 그림을 그렸었다.
그런데 수련비 내고 도심 한복판에서 무드 없는 수련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격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저자가 책을 낸 것은 결국 자기 도장을 선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에 또다시 허탈했고 실망스러웠다.
그 당시의 나는 독서실 운영 1년 만에 3,000만원을 날려 먹고 또 다시 천직인 백수협회 종신회장을 역임하고 있을 때였다.
두 번의 사업실패. 두 번의 회사생활 실패로 인한 스트레스로 오른쪽 4, 5번째 손가락에 마비증세가 왔다.
원래 건강에는 무신경했었으나 속으로는 슬그머니 겁이 났었다. 병원 갈 돈도 없는 형편이었다.
무심한 척 지나가는 말로 어머님께 말씀드렸더니 예상대로 모성 특유의 고슴도치 자식사랑으로 돈을 주셔서
겨우 진찰을 받게 되었다. 진찰 결과, 손가락 마비는 스트레스성, 물리치료 요함. 혈압은 180, 고혈압. 간 이상 발견,
초음파 정밀진단 결과 의사 말로는 간덩이가 부을 대로 부은 놈, 지방간 직전 상태. 몸 속 내장 상태,
60대 노인의 내장상태. 술, 맥주 한잔도 안됨. 담배도 피워선 안됨. 극도의 만성피로 상태. 하루에 하품을 수백 번씩 했다.
도(道)도 못 이루고 그렇다고 돈도 못 이루고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몸만 망가져 인생의 낙오자 신세를 면치 못할 상태가 된 것이었다.
중국에 건너가 내 인생의 마지막 승부를 걸어야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중국 유학 설명회를 가서 들어보니 불법적인 요소가 많았고
사기 당할 염려도 들었다. 그런데 그때, 3개월 전에 보았던 <천서> 생각이 문득 났다. '그래, 도장에 한 번 가보자.
중국으로 가기 전에 아무런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확인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도장을 찾아가 보니 젊은 사범이
나를 맞이했다. 사범은 책의 저자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 좀 뵈러 왔습니다."
"선생님은 가끔 들르실 뿐 지금 안 계십니다. 물어볼 것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시죠."
'건방진 놈, 난 너와 상대할 군번이 아니야.'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겸손하게 질문했다.
육도윤회에 대해서, 증산에 대해서, 양신출신에 대해서 등등... 세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하는 중간에 옆방에서 어떤 사람이 나왔는데 잠을 자다 나왔는지 뒷머리가 눌려진 상태였다.
그때는 그 분이 공포(?)의 선생님인 줄을 몰랐었다. 왜냐하면 사진에는 뒷머리카락이 단정하기 때문이었다.
사범의 배려로 입회도 안 했는데 한 시간 정도 수련을 하고 나서
"선생님을 뵈려면 매달 한 번 회원들의 수련 점검을 해주시니 그때 뵐 수 있다."는 말을 뒤로하고 도장을 나섰다.
집에 와서 단전위치라고 잡아준 배꼽 밑 석문자리에 붙인 파스에 손가락을 대고 호흡을 해보았다.
그 전에 해봤던 단전호흡에서는 아랫배 전체에 넓게 퍼진 뜨거운기운을 느꼈었는데,
이 호흡은 석문자리에 좁게 응집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기존 선도서를 보면 단전을 정확히 표시해 놓지 못했다. 배꼽 밑 두치 또는 세치, 명문 혹은 명문에서 뱃속으로 몇 cm 등.
옷을 입으려면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져야 바르게 되는 것처럼 단전이 석문이라는 사실하나만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일생을 공부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 수련은 체험이기 때문에 아무리 화려한 논리로 설명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여간 기의 응집력을 느끼면서 이 수련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고 한 달에 한 번 선생님과 대면할 수 있다는 노림수로 입회를 결정했다.
딱 3개월만 해보기로 했다. 그 정도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수련 점검일 이었다.
"계속 열심히 하세요."
선생님은 단 한마디만 하셨다. 이럴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이 진정 도인이라면 나를 재목으로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옛날 도인들의 전해오는 이야기가 그렇지 않은가. 실망스럽고 억울하고 약이 올랐다.
'다음달에 어디 두고 보자...' 그러나 다음달도 그 다음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개인면담을 하리라 작정하고 들어가도 속에서만 맴돌 뿐, 도대체 입밖으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수련 5년 째에 접어든 지금도 그렇다. 결국 한 번도 개인면담은 하지 못했다.
수련을 몇 개월 해오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단전호흡에 대해 이론적으로 공부도 해 왔었고 인정도 했었지만 과연 숨쉬는 것만으로 건강해진다는 것이,
더구나 깊은 도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잇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내 스스로 몽상에 빠져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이 수련법이 허구라면,
기존 사이비 단체들이 반드시 해오던 바와 같이 재물을 뜯어내는데 머리를 쓸 것이고 여색을밝혀 문란함을 보일 것이다.
나는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계속 주시해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3개월 동안 누워서 호흡하면서 남보다 두 배, 세 배 더 많이 수련을 했건만 수련점검 결과, 진도는 중간 이하였다.
남보다 더 노력했는데도 중간 이하라면 나의 자질은 재목감이 아니라 부러진 잔가지 정도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자존심이 여지없이 박살나게 된 것이었다. 예정했던 3개월이 지났어도 재물과 여색 쪽에 트집 잡을 만한 일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확실히 이거다 하는 확신도 들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기대감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판단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장기전에 대비해서 아쉽지만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장 근처에 위치한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피라미드 판매회사였다.
할 수 없이 다시 한 군데 면접을 보았더니 퇴근시간이 늦어 도장에 올 수가 없었고,
집 근처 회사에 가보았더니 역시 퇴근시간이 늦어서 안 되었다. 아! 나는 확실히 백수가 타고난 직업인 모양이었다.
사주를 보아도 30대에는 직업이 없고 하는 일마다 망하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결국, 나는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백수의 자리를 지키리라 다짐했다. 수련을 위해서는 직업을 가지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4개월쯤 되었을 때 소위 명현 현상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척추 옆쪽으로 쇠막대기를 심어놓은 것처럼 아파서 똑바로 일어나질 못하고 몸을 옆으로 비비꼬면서 일어나야 했다.
약을 먹거나 바르지 않고 어떻게 되나 가만히 지켜보니 2주 정도 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며칠 후 반대쪽으로 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도 2주 후에 없어졌다.
도장에 다니면서부터 병원 약을 다 버렸다(혈압, 마비, 간 이상). 죽든지 살든지 승부를 내보자는 심정이었다.
손가락 마비가 서서히 풀리더니 절반 이상 회복된 느낌이었고 6개월쯤 되어서 완치되었다.
그러나 혈압은 아직도 정상이 아닌지 뒷머리가 뻣뻣하니 땅겼다.
모든 일에는 방법이 올바르면 올바른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는 법이다.
숨쉬기 운동 같아 보이지 않지만 병이 치유되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면 역으로 숨쉬기 운동이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6개월이 다 되었을 때 수련점검을 받게 되었는데 보통 이 정도면 와식축기, 좌식축기가 끝나게 되어 대맥운기 수련에 들어가게 된다.
드디어 운기수련에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선생님을 뵈었는데
"단전이 왼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다시 누워서 제대로 잡으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순간 나의 눈은 빨갛게 충혈된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딱 벌린 채 수치심, 황당함, 배신감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녁 때,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처량함을 이길 수 없어 소주 한 병을,
그 유명한 두꺼비 진로 소주를 사들고 집으로 들어와서 한두 잔 마시다 보니 볼 위로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너무 분해서, 설움에 복받쳐 한참을 울었다. '그래 나 못났다. 이제 잘난 척하지 않으마.
못났으니 지금보다 더 많이 수련해서 잘난 놈 꽁무니라도 따라갈란다.'
그렇게 나는 혼자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수련은 술, 담배, 고기를 되도록 먹지 말라고 한다. 담배는 백해무익하고 술과 고기는 응집된 기를 흩뜨려 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나쁘다는 이 모든 것들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했다.
어렵게 수련한 게 아까워 담배는 절반으로 줄였고 술은 한 달에 한두 번 소주 한 병 이내로 마셨다.
한 번은 수련 5개월쯤 되었을 때로 기억되는데 술을 마시다가 기분이 좋아 두 병 반을 마신 적이 있었다.
항상 단전에 계란 만한 것이 묵직한 느낌으로 계속 있었는데 그 술 때문에 그 느낌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너무나 아깝고 아쉽고 후회돼서 복구하기 위해 아주 열심히 수련했는데 그 느낌이 좀처럼 돌아오질 않았다.
2주 후에야 어렵게 그것을 되찾게 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술이 무서워지게 되었다.
수련 전의 내 체중은 84kg이었다. 뚱뚱한 편인 만큼 고기를 무척 좋아했다. 도저히 맛있는 음식을 보고는 자제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삼겹살, 순대, 갈비 등 얼마나 군침이 도는 음식인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고기를 먹으면 역겨운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 걸 참는 게 아니라 먹으려 하는데 먹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 계율로써 고기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수련을 통해서 쌓인 청정한 기운이 저절로 그것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었구나.
음식의 양도 예전처럼 배부르게 먹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양이 차면 어렵지 않게 저절로 숟가락을 놓게 되었다.
수련행공도 땀을 뻘뻘 흘리며 요령 부리지 않고 한 결과 체중이 73kg이 되었다. 요새도 우리 마누라는 이렇게 말한다.
"그 많던 살 다 어디 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네. 너무 불쌍해."
그러나 사실 지금도 나는 통통한 편이다.
8개월에 들어서면서 대맥운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간의 이상으로 인한 만성피로 증세가 많이 호전되어 갔다.
지하철 계단을 오를 때 헐떡거리던 숨소리도 진정되었고, 천근만근 무겁던 다리도 가벼워졌다.
전혀 이상이 없었던 허리에 통증이 왔다가 3일만에 흔적 없이 사라지고, 온몸이 소금에 절여진 배추처럼 축 늘어져 노곤하게 되는 등,
크고 작은 여러 명현 현상을 거치게 되었다.
이제는 어디 아픈 데가 생기지 않으면 내가 수련을 게을리 했나 생각할 정도로 명현 현상에 익숙해져 갔다.
몇 개월 후, 수련점검 때의 일이었다. 그날은 선생님께서 도장 수련장 안에서 점검을 하였다.
수십 명의 회원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내 차례가 되었다.
그 동안 쭉 당해왔기 때문에 선생님 앞에만 가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너무 공포스러웠다. 선생님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아! 또 이번에도 틀렸구나.'라는 생각에 낙담한 나머지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회원들이 모두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거린 것은 예상보다 수련이 잘 되었다는 의미였고, 다음 단계인 소주천으로 넘어가라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회원들은 돈도 못 버는 백수가 남들 다 일하는 낮에 나와 저녁 때까지 죽치고 수련을 해도 그 동안 번번히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무척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수련진도가 올라가면서 그런 박수를 받은 사람은 그 후에 아무도 없었다.
수련 점검 후, 집에 가려고 나가는데 한 사범이 차나 한잔하자고 조용히 불렀다.
"그 동안 선생님의 시험에 걸려 있었던 것 같았는데 말을 해줄 수도 없어서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혹시 견뎌내지 못하고 나갈까봐 안타까웠는데 이제 한고비 넘긴 것 같으니 축하합니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사범들의 나이가 어려서 한편으로 얕보기도 했었고 비교하는 마음에 앞서 보고도 싶었었는데...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처음 상담하러 왔을 때 수련까지 해보라며 장시간을 할애해 주었던(건방진 놈이라고 속으로 욕했던) 사범,
그가 아니었더라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수련을 지도해준 사범과 지금 축하한다고 함께 기뻐해 주는 사범,
이들 모두가 나의 도반들이고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이제부터는 이들과 우열을 가리려고 비교하지도 않을 것이고, 나이 어리다고 얕보지도 않을 것이며,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선배로 인정할 것이다.'
도장에 걸려 있는 '불비타인(不比他人)'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조금이나마 깨우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겸손의 의미도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된 것 같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되고 타인의 고마움을 알게 되면서, 진심에서 겸손이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날 나는 그 고마움의 조그만 성의로 떡을 3만원 어치 사 가지고 갔다.
옛날 서당에서 책 한 권을 마치면 책거리라고 하면서 떡을 같이 나눠 먹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우리 도장에는 책거리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른바 나는 책거리의 원조인 셈이다. 도장에 내는 한달 회비가 아닌 최초의 자금 지출이었다.
그 동안 주시해 보았던 이곳에서의 재물착취 공작은 이렇게 귀여운 수준이었다.
드디어 나는 소주천 수련에 들어갔다. 기의 강도가 전과 달랐다. 두 배는 강한 것 같았다.
꿈에 그리던 소주천. 무협지에 나오는 임독맥 유통. 초인의 진입단계. 설레이는 마음으로 화진법 행공을 해보니 너무 힘들었다.
결국 몸살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소주천 수련으로 웬만한 병은 거의 정리되는 것 같았다.
고혈압으로 인한 뒷머리 땅기는 증세도 없어졌고 만성 피로 증세도 거의 사라져 갔다.
예전에는 고속도로 운전 시에 한시간도 못되어 피곤함을 느끼거나 졸음을 견디지 못하곤 했었는데,
이젠 지리산까지 한 번만 휴식하고 운전하여도 끄떡없었고 세 시간 수면 후 다음날 한 번 쉬고 서울에 올라와도 생생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밤에 아무리 많은 수면을 취했어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 상태가 개운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원래 병 체질인 어머니의 유전자 때문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을 뿐, 특이한 병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그랬으므로 이러한 현상을 의식하고 살아오지는 않았었는데 어느 날 아침,
무심한 가운데 몸이 아주 상쾌한 상태인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우연인가 싶어 다음날 또 그 다음날 의식적으로 계속 지켜보아도 개운했다. 이 수련은 근본적으로 선천적인 체질을 개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나는 수련에 점차 매료되어 갔고 점차 골수분자(?)로 변해갔다.
나는 잘 때 꿈을 많이 꾼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하룻밤에 5, 6편씩 총천연색으로꿈을 꾼다. 그 중에는 고약한 꿈도 있다.
가위에 눌리는 꿈이다. 대체로 형체가 안 보이는 검은 기운이 짓누르지만 가끔 흉칙한 모습의 귀신들이 나를 공포스럽게도 했다.
아직도 증산사상에 심취해 있던 나는 꿈속에서도 귀신을 또는 검은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태을주 주문을 외웠다.
그것도 정확하게. 하지만 귀신은 물러가지 않고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귀신이 놀라 도망쳐야 각본에 맞는 것 같은데...
어떤 날은 하루에 세 번이나 가위에 눌리기도 했다. 솔직히, 음산하니 무서웠고 고통스러웠다.
이러한 현상도 소주천 유통 후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특히 남성들의 귀가 번쩍 뜨일 만한 희소식이 있다.
정력 하면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일에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힘이 그 하나이고 생식적인 힘이 그 둘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후자이다.
한의학에서 흔히 정력부족을 신장기능 부진으로 말하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간 기능에서 나온다고 한다.
앞에 얘기한 것처럼 나는 성욕을 원수처럼 여겼었다.
그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마음에서부터 차단하려는 노력을 몇 년 해오다 보니 실제로 사용하려 할 때는 발기가 되지 않았다.
건강한 상태로 성욕에 초연하는 것은 멋진 일일 수 있겠으나 능력 부족으로 초연한 척하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인 것이다.
아! 이제는 미친놈에다 더해서 불구자까지 되어 버리다니.
그런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이 공포가 소주천 수련과정에서 완전히 해결되었다.
사실, 백일축기니 뭐니 하며 앞서 벌인 해프닝도 부질없는 것이었다. 성관계가 약간의 기 소모는 있으되 크게 지장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모를 때는 의견이 분분하여 별 해괴한 이론들이 많은 법이지만 실제로는, 앞서 이룬 자의 한마디 가르침이면 명확히 해결되는 것이다.
노래 가사에도 있지 않은가.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그렇다. 바른 스승을 만난 행운은 내게 너무나도 값진 것이었다. 이때가 결혼한 지 13년.
매년 몇 번씩 처자식을 버리고 도 닦으러 나가겠다는 말을 들어야 했던 아내.
도의 'ㄷ'자만 나와도 진저리치던 아내. 백일축기 한다며 여자를 떠나야 한다는 모멸감을 받아야 했던 아내.
이혼하자며 '도를 택하겠냐, 나를 택하겠냐'며 선택을 강요했던 아내.
13년 동안의 지리하고 고통스러웠던 갈등에서 이제는 완전히 해방되었다.
이제는 처자식을 버려야 한다는 몰인정한 결심을 철회할 수 있었다. 내 가정은 13년 만에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다.
이제는 부부싸움도 거의 없다. 그 동안 잘 견뎌왔던 아내에게 너무 고마웠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수련의 기운은 마음까지 너그럽고 여유 있게 만들어서 상대가 싸우려고 덤벼들어도 화가 나질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마음을 달래주게 되었다. 선생님과 수련법이 나와 내 가정의 은인이었다.
다음 단계인 온양 수련. 이제부터는 기감이니 명현 현상들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수련이 내 생활의 전부였고 하루 빨리 양신출신을 하여 기 차원이 아닌 도 차원에 들어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가야할 길은 멀고 이미 해는 저물어 가니 나그네의 마음은 바쁘기만 했다.
서두르는 마음, 빨리 가려는 욕심이 앞서면 수련 점검 여지없이 철퇴 명령이 내려졌다.
그저 묵묵히 성실히 수련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한 사범이 나에게 넌지시 전해주는 말이 있었다.
선생님이 나에 대해 평하시기를 "처음에 찾아 왔을 땐 교만 덩어리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많이 됐다.
단전이 삐뚤어졌다고 다시 눕게 한 것도 그것을 꺾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내게도 관심을 가져주셨구나.'라는 생각에 그 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서러움과 한이 일시에 풀리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선생님께 더 이상 바라는 바가 없다. 그 한마디에 내가 받을 수 있는 모든것을 넘치게 받았다."고.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 하는 게 사람의 도리이다.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이 될까.
결국 이 수련법을 전파하는데 내가 일조를 하는 것이 선생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지금 나는 백수가 아닌가. 이제는 직업을 가질 때도 되었다.
'도장을 차리자.'
강북에 지원을 내고자 하는 나의 뜻을 선생님께서 허락하셨다. 하지만 당장 가지고 있는 돈이 없으니
운영상 어려움이 충분히 예상되었고 더구나 상술의 재간이 너무 없다 보니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회원으로 수련하면 편할 텐데 이거, 사서 고생하는 게 아닌가?'
좀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때까지도 선생님에 대한 믿음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 동안 여기저기서 하도 많이 속다 보니 빠져나갈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그 동안 선생님을 지켜본 바, 재물이나 여색 등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하기는 하지만 정말 선생님이 그 높은 경지의 도인일까?'
'도장을 차려 놓고 나면 이젠 빠져나갈 구멍도 없는 막다른 골목길이 될 텐데 내 인생을 다 바칠 만큼 지금의 판단에 자신할 수 있는가?'
이런 저런 의심과 생각 속에 시간은 흘렀고, 도장을 낼 만한 자금이 생길 기미도 보이지가 않았다.
도장을 내겠다는 말은 해 놓고 일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선생님은 그것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이 없으셨다.
그렇게 한마디 언급도 안 하시던 선생님이 어느 날 도장을 빨리 차리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셨다.
은연 중에 그 약속에서 빠져 나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알았습니다."라고 해버렸다.
'내 팔자구나. 설사 잘못된 판단이 될지라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으련다
(수련에 대한 믿음은 99%이다. 나머지 1%는 양신출신 후에 없앨 계획이다).'
이렇게 결심을 굳히고 난 후 2개월이 채 안 되었을 때, 나는 빚을 내서 개원을 했다.
사람의 의지가 일을 이루는 것이지 결코 돈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도 얻게 되었다.
대주천 수련 때의 일이다. 나는 양손의 노궁혈과 양발의 용천혈, 머리의 백회혈로,
하늘과 땅과 그 공간의 기운을 내 몸에 통하게 하는 수련을 하고 있었다. 자시에 내 방에 앉아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때 같으면 저리던 다리가 아무렇지도 않더니 점차 다리가 없어져 허공이 되는 것이었다.
신기해서 몸통을 의식해보니 몸통도 사라져 버렸고 급기야는 머리통까지 없어져 버렸다. 다만 단전과 의식만이 존재했다.
하도 신기해 살짝 눈을 뜨고 내 몸을 쳐다보니 다행히 실물은 건재했다.
그 상태가 20분 정도 지속되었는데 마치 우주와 합일된 듯한 매우 황홀한 경험이었다.
또 어느 날 밤이었다. 문득 고독해지기 시작하더니 그 고독감이 점차 심해졌다. 사람이 그리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천지간에 나 홀로 서 있는 듯한 본질적인 외로움이었다. 창문으로 하늘을 보면서 꺽꺽대며 울었다.
마누라 보고 "나 외로워 미치겠."하니 역시 미친놈 바라보듯 쳐다보며 "아직도 사춘기가 안 지났어?"하는 것이었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고독 전문가였다.
고독을 힘겨워 하면서도 그 씁쓸한 고독자체를 즐길 줄 아는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 오래 전의 일이었고,
고독을 고독으로 못 느끼는 달관이 경지에 올라 고독을 졸업한 지가 이미 오래 전인데 새삼스럽게 이게 무슨 꼴이람?
다음날 도장에서 사범에게 물어보니 정신적인 명현 현상이란다.
어떤 한이나 마음의 상처 등이 마음 깊숙히 잠복해 숨어 있다가 뿌리가 뽑혀 나오면서 해소되는 현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론 고독해서 우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은평구 응암동에 도장을 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근엄하게 도복을 입고 앉아 있었지만 하루종일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전화 문의조차 없었다.
처음엔 다 그런 거라고 애써 위안하며 며칠을 지내봐도,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공간에서 마누라가 힘들여 싸준 도시락을 꾸역꾸역 먹으며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는 놈'이라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이 좋은 수련을 고마운 마누라에게 시키지 않으면 누구에게 시키겠느냐 하는 갸륵하고 지고한 마음으로
집사람을 수련시키며 구령 연습을 하게 됐다.
무능한 남편을 먹여 살리느라 직장에 갔다가 퇴근하여 도장에 온 집사람을 상대로,
서로 정식으로 인사하고 체조하며 방정맞게 뛰는 부부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눈물겹게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수련을 성의 없이 건성으로 하면 "그 따위로 하려면 집어치워. 이것이 어떻게 얻은 수련인데 그 가치도 몰라?"
하며 버럭 고함을 쳐서 아내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게 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면서 어렵게 어렵게 한 명, 두 명 회원이 늘어갔다.
하루는 72세이신 아버님이 중풍 초기에 걸려 한쪽 입술이 올라가면서(구안와사) 언어장애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어머님 말씀이 이런 현상이 한 1주일쯤 됐다고 하셨다.
그 동안 수련만 해 왔지 기치료를 해본 적이 없어 내 기파워가 얼마나 되는 지도 모르면서 일단 도장으로 나오시라고 했다.
주위의 친척들은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 무식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치료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큰소리를 쳤다.
"아버지, 제가 낫게 해 드리면 우연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아버지는 사회에 적응하려고 하지 않는 나를 무척 못마땅해하시며 한숨을 쉬던 분이셨다.
이틀을 침을 놓고 기를 넣어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광주 도장에서 수련지도를 하는 고참 사범한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아버지의 상태를 기로 체크해 보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10분 후 하는 말이 "왼쪽 중부혈과 안면 오른쪽에 사기가 몰려 있으니 거기로 기를 넣어라."는 것이었다.
수련의 어느 단계에 들어서면 장소의 멀고 가까움에 구애받지 않고 건강상태 및 마음상태를 알 수 있게 되는데
나는 아주 둔감한 편이어서 아직 자신이 없는 상태였다.
전화 내용에 합당한 수지오행 침술과 기를 넣고 난 다음날로 아버지는 90% 정도까지 원상회복이 되셨다.
지금도 아버지는 솔직히 절반도 못 믿겠다고 말하신다. 가족들도 이렇게 못 믿는데 남들이야 오죽 하겠는가!
사실, 제일 심하게 못 믿는 사람은 아내였다.
아내는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 발이 시려워 한여름에도 양말을 다섯 개나 겹쳐 신고 잠을잣다.
영양제, 비타민, 건강식품, 한약 등을 먹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아내가 수련한 지 8개월쯤 되었을 때
"요새는 양말을 안 신고 자네."하니 그때에서야 그 사실을 알고 신기해했다.
단전에 계란 만한 것이 들어있다고 예전에 말했을 때에는 전혀 믿을 수 없다던 그녀가,
뱃속에 뭐가 꿈틀대며 움직이는 게 전혀 믿을 수 없다던 그녀가,
뱃속에 뭐가 꿈틀대며 움직이는 게 영화 에어리언에서 나오는 우주생물처럼 느껴져 무서워서 호흡을 중단했다는 등 정말
무식한 얘기를 해서 나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
예전에 그렇게 비웃던 나이가 어리신(?) 선생님에 대해서도 내가 어려워하듯 덩달아 어려워한다.
이제 수련인의 모습을 점차 갖춰 가는 모습이 너무 어여쁘다.
단전호흡에 대해서 문의해 오는 많은 사람들 중에 특히 지식인일수록 이렇게 질문한다.
"기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데 이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까?"
요새는 기의 효험이 결과로 많이 나타나게 되니까 첨단기계로 무장된
과학자, 의사들이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나는 거기에서 도출된 결과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개의치 않는다.
현대인들은 과학을 종교로 알 정도로 과학을 맹신하지만 과학의 한계는 너무 명백하다.
달을 왕복하는 우주선을 띄우는 현대 과학이 고도의 수학과 물리학으로써 무장되어 있더라도 간단한 산수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게 현대 과학이다. 숫자만을 셀 수 있을 정도의 산수 실력만으로도 가능한 것들,
예를 들어 사람의 땀구멍의 숫자는 몇 개인가? 사람의 머리카락 수는 몇 개인가? 하는 것들을 현대 과학이 풀 수 있는가?
다른 차원으로 접근해 보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를 않는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라.
사람에게는 육체와 마음이 있는데, 보이지도 않는 자신의 마음을 없다고 부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과학적으로 가슴이나 머리를 X선 촬영을 해보아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된다.
또 '힘이 세다, 기운이 세다.'고들 말하는데 힘이나 기운은 과학적으로 보이게 증명이 되는가?
현상으로서 드러나니까 힘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보이는 물질과 보이지 않는 힘의 결합체인 것이다. 정신만이 존재하면 귀신이요, 육체만이 존재하면 시체이다.
정신과 육체가 공존하는 것이 사람이요, 생명체이다.
또한 우리의 온몸을 돌고 도는 혈관은 유형적인 기운의 통로이고 12정경, 기경팔맥들은 무형적인 기운의 통로인 것이다.
혈관에 이상이 오면 현대 의학이 병의 이유를 알아내지만 기운이 막힌 데서 오는 병은 원인 불명의 병으로 진단할 수밖에 없다.
과학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무생물의 경우에도 이 이치는 마찬가지다. 밥그릇을 상상해보자. 흙이나 쇠로 만들어진 형상을 우리는 그릇이라 한다.
유형의 모습을 갖춘 흙이나 쇠는 그릇의 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그릇을 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능은 그 그릇의 빈 공간에 있다.
실제 그릇의 용도는 무형의 빈 공간인 것이다. 결국 무형의 빈 공간이 그릇의 주인이요,
유형의 물질은 주인을 담기 위한 집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육체도 주인인 정신을 담기 위한 집인 것이다.
이렇게 모든 생물과 사물은 유와 무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어리석게 부정만 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시체인가?
모든 사물에는 중심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인간에게도 힘의 중심점이 있는데 그곳이 석문이라 불리우는 단전이다.
구슬이 진흙 속에 묻혀 있으면 빛을 발하지 못한다.
인간의 단전에는 기운을 끝없이 생성해 낼 수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녹슬고 있다.
발전소에서 각 가정에 전기를 공급하려면 전선이 있어야 하듯, 단전의 기운을 몸 각처로 공급하는 전선이 12정경, 기경팔맥이라는 통로이다. 일반 사람들은 자기 몸 속에 발전소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니, 당연히 기운이 생성되지 않고 따라서 에너지 통로인
12정경, 기경팔맥은 하수도에 찌꺼기가 끼듯 점점 더 막히게 된다. 몸의 상하좌우로 기운이 연결되지 않으니
몸이 삐걱대며 아플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석문에서 발생되는 이 진기는 건강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여기에도 유형과 무형의이치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건강적인 차원의 기운을 유형이라 한다면 정신적인 차원의 기운을 무형이라 할 수 있다.
쥐나 개미 같은 미물도 앞으로 올 재해를 미리 알고 대피하는 예지력이 있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그만 못하겠는가? 정신적인 기운인 영력이 생산되지도 않고 막혀 있기 때문에 둔해지는 것이다.
석문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 석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진기를 온몸으로 유통시켜 몸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영을 밝아지게 하는 것이다.
건강의 회복만을 내세우는 수련법이나 정신적인 깨달음만을 얻게 하는 수련법이 있다면 그것은 최상의 수련법이 아니다.
건강과 정신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뒷면처럼 하나이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기존의 단전호흡 수련은 주로 건강 쪽으로 치우친 명(命)의 수련법이고,
일반적으로 종교적 수련은 정신 족으로 치우친 성(性)의 수련법이어서 완벽한 성명쌍수(性命雙修)의 수련법이 되지 못했다.
바른 수련을 하게 되면 정신과 육체가 같이 닦여지는 것이다.
어떤 원리로 단전호흡이 정신과 육체에 영향이 미치는가 하는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의 몸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다. 이 피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지탱해주는 아주 중요한 물질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의 몸에는 붉은 피보다 더욱 정제된 하얀 피가 있다. 이것이 남자에게는 정액으로 나타나고 여자에게는 젖으로 나타난다.
생명을 창조하는 힘이 있고 생명을 기르는 힘이 있는 굉장한 물질이다.
여자에게 매달 나타나는 생리도 젖이 나오는 동안에는 사라져 버린다. 생리의 붉은 피가 젖의 하얀 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붉은 포도주를 다시 한 번 정제하면 백 포도주가 되는 이치와 흡사한 것이다.
이렇게 귀중한 하얀 피가 생성되는 근원이 단전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얀 피가 단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단전에는 정(精)이 생성되어져 무형의 상태로 존재하다가 음심이 동하면 정액으로,
화가 동하면 주먹의 기운으로, 각각 변하게 된다. 즉 마음의 상태에 응하여 그에 합당한 유형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귀중한 생명력 자체인 정액이나 젖보다 더욱 순화되고 더욱 근원적인 것이 바로 단전에서 생성되는 정(精)인 것이다.
즉 생명의 엑기스가 바로 정(精)이다. 이 정(精)이 충만하다면 건강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정(精)보다 한 차원 더 정제된 것이 바로 기(氣)이다.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되듯,
정(精)을 끓이면 더욱 순도 높은 기(氣)로 화하게 된다. 이런 기(氣)를 우리 몸의 전신으로 보내는 작업이 운기라는 것이다.
이렇듯 기(氣)가 충만하게 되면 어떠하겠는가? 선천적, 유전적으로 가지고 있던 자기의 체질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새로 개조되는 것이다. 이것을 선도에서는 환골탈태라고 한다.
기(氣)로 온몸이 가득 채워지게 되면 기(氣)가 다시 정제되어 빛으로 화하게 된다.
이때의 빛은 태양빛이나 전등불빛 같은 가시광선이 아니라 훨씬 고차원의 빛이다.
즉, 신(神)이다. 이것이 영력이며 태어나기 이전의 마음인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면 마음이 밝아지고,
영이 밝아지고, 신이 밝아진 아주 건강한 도인이 된다. 잘되면 도인이요, 못되어도 건강은 찾을 수 있는 수련이 이것이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과정을 이렇게 지루하게 늘어놓은 것은 내가 건방지게 무엇을 내세우고자함이 아니다.
내가 설명했던 과정 중에서 공감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도를 구하기 위해 나름대로 진지하게 탐색해왔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여기에 정착했다.
나의 그런 노력만이라도 인정해 준다면 섣불리 '아니다'라는 단정을 짓지 말고
여러분들이 이 수련의 진실 유무를 확인해 볼 가치가 있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고등학생 때 일기를 딱 한 번 써본 적이 있었는데 마음의 백분의 일도 표현할 수없어서 다시는 글을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글재주가 없어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제대로 담아 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선생님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나이 마흔에 초등학생이 숙제하듯 끙끙거리며 썼다.
그러나 수련법을 벗어난 깊은 정신세계에 대한,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진정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전혀 말하지 못했다.
기존 단체들과의 마찰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과정에서 적지 않은 구도자들을 만났었다.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서 우리 나라는 과연 도인국이구나 하며 놀래기도 했었다.
그런 사람들은 다 어디에 숨어 있기에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가?
아니 이곳에 나타났어도 그들은 관념의 벽을 허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공부해 왔던 연륜과 나름대로 윤곽을 갖춘 자기의 틀에 대한 자부심이 새로운 진리에 의해 다칠까봐
높은 방어벽을 쌓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도장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아주 확고한 진리의 상이 정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이 무너져도, 천지가 개벽되어도 절대 변할 수 없는 진리다'라고 자신했던 것도 허물어졌다.
무형의 세계에 대한 종교적 지식도,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져보고 '코끼리는 기둥같이 생긴 동물이다'라고 말하듯 단편적인 것이었다.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처럼 그 동안의 단단한 껍질 속에 완고하게 담아두었던 지식과 지혜가 무너지면서
내 자신이 허물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 허망했다.
차라리 이곳에서 떠나 나를 다시 지키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알에서 부화해서 새가 되어 날기 위해서는 알 껍질을 깨야 한다.'
<데미안>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껍질을 개기 전에는 절대 새가 되어 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세계가 부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또 다른 세계로 절대 진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공부가 완성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알 껍질을 깨야 할 이유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배우겠다는 겸허한 자세로 항상 마음의 문을 열어 놓아야 할 것이다.
나는 도장에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수련해 보시죠."
수련 목적이 도통인 사람들에게는 긴 말 할 필요도 없고, 건강을 위한 사람들에게는 한마디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수련을 하고자 하는 조그만 정성만 있으면 건강은 반드시 기대 이상으로 회복된다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중에는 이곳을 병원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
수련은 귀찮고 힘드니까 스스로 수련은 안 하고 침술치료나 기치료만 받으려고 하는 것은 얌체 같은 생각이다.
치료를 받아도 수련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함께 수련하여 건강한 세상,
양심이 살아 있는 세상을 이루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수많은 생을 거듭해 오면서 지금에 이르러 한당 스승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된 엄청난 복연에 가슴이 떨린다.
그 은혜를 항상 가슴에 새기며, 만 분의 일이라도 보은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스승님께 감사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