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허준구의 新 한시기행

醉月 2013. 8. 12. 01:30

율곡 이이 '금강산 해맞이'
"금강산 구정봉 올라 세상 좁음 알았다"

 
  금강산[金剛山] 해맞이로 한시 기행을 시작한다. 금강산 전체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단발령[斷髮嶺]이라고 하나, 지금은 갈 수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천하 제일의 금강산 일만 이천봉 어느 봉우리에서 해맞이를 한들 장엄하고 신비롭지 않겠는가.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은 약관[弱冠]에 금강산 구정봉[九井峯]에 올라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전략]
 金鷄一鳴登絶頂 [금계일명등절정] 첫 닭 울 때 정상에 오르니
 萬境熹微天尙昧 [만경희미천상매] 경계는 희미하여 하늘은 어두워
 須臾火光漲天地 [수유화광창천지] 잠깐동안 빛이 온 천지에 퍼지자
 不辨滄波與曉靄 [불변창파여효애] 바다 물결, 새벽 안개 분간할 수 없구나.
 朱輪轉上數竿高 [주륜전상수간고]둥근 해 두어 길 솟아 오르자
 一朶彩雲如傘蓋 [일타채운여산개]채색된 구름 일산[日傘]처럼 피어나고,
 靑紅漸分水與天 [청홍점분수여천] 붉은바다와 파란하늘이 시나브로 드러나니
 極目始知東海大 [극목시지동해대] 이제서야 동해 드넓음을 알겠도다

   [후략]

 율곡은 일출을 보기 위해 전날 구정 근처의 선실[禪室 : 스님들이 거쳐하는 깨달음의 방]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첫 닭이 울 때 정상으로 올랐다. 무채색 우주에 빛이 기운을 불어넣자 혼돈의 하늘과 바다는 청홍의 색상으로 정돈되고, 시나브로 동해가 그의 시야에 펼쳐졌다. 율곡은 금강산 구정봉에 오르고서 우리나라가 좁음을 알았다고 하였으며, 세상을 호령했던 진시황도 어린애 같다고 하였으니, 무변광대한 자연의 장엄함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금강산 일만 이천봉, 어느 한 봉우리에 올라 일출을 맞이하는 혜안[慧眼]으로 한 해를 시작해보자.
 
 소양정, 그 겨울의 담박미
 
 풍류[風流]란 무엇인가? 한자의 자의[字意] 대로 풀어보면 ‘바람따라 흘러간다’라고 소박하게 말할 수 있다. 바람따라 흘러가려면 세상사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인간사의 괴롭고 힘든 일들을 벗어던지고 자연과 교감을 하며 그 흥에 겨워 나를 잊는 망아[忘我]의 경지가 가장 멋들어진 풍류라고 할 수 있다. 그 망아의 경지에서 그 감흥을 어찌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 한시야 말로 이러한 감흥을 표출하기에 딱 맞는 형식이 아닐까.
 춘천에서 인간사의 번뇌와 망상을 잊고 자연 속에서 물아일체를 느껴볼 수 있는 풍류지를 꼽아보면, 청평사, 삼악산 등선폭포, 구곡폭포, 소양정을 들겠다. 이 중에 소양정[昭陽亭]은 춘천의 진산 봉의산 기슭에 있어 접근이 쉽다는 이점[利點]이 있다. 소양정의 멋은 저녁 노을이 물들 때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소양정의 방향이 서향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도의 고산[孤山] 뒤로 지는 석양[孤山落照 : 소양 8경의 하나]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正月昭陽亭上行 [정월, 소양정에 올라서]
石翁之後敢容評 [석옹[石翁]의 뒤를 이어 적어본다]
遙村烟闊一人去 [멀리 마을에 연기 오르는데 한사람 떠나가고]
落日沙寒雙鶴鳴 [해지는 모래사장 차가운데 한 쌍의 새는 울어댄다]
山雪江氷更淸絶 [산에 눈 내리고 강은 얼어 말할 수 없이 깨끗해]
天高地逈覺分明 [하늘 높고 땅은 아득하니 모두가 분명하다]
休言春晩勝春早 [늦봄이 올봄보다 낫다고 하지 말게나]
眞味方從淡處生 [참맛은 담박함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소양정[昭陽亭]’
 

이 시의 감상 요점은 겨울 소양정의 맛을 읽어 내는데 있다. 그것은 마지막 귀절 ‘담[淡]’자에 집약된다. 해지는 차가운 모래사장, 눈이 덮인 산과 얼어붙은 강, 끝없이 펼쳐지는 선명한 시야를 ‘담[淡]’자가 감당하고 있다.
 겨울날 소양강을 굽어볼 수 있는 소양정에 홀로 올라 세상사를 잊고 순백색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욕심이 사라져 마음 속 평안함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인생은 참으로 무정하더냐?
깨끗한 마음에는 無情도 가슴아프지 않다

 
  합강정은 숙종 2년[1676년] 현감 이세억이 세운 정자다. 지금으로부터 328년 전이니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할만하다. 강원도지[江原道誌]에 따르면 서강[瑞江 지금의 인북천]이 북에서 흘러오고 기수[麒水 지금의 내린천]가 동에서 흘러와 합류하기 때문에 합강이라 부른다. 강원도 동서의 중심이기 때문에 이곳에 단을 세웠으며, 동서의 수령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물은 깨끗하고 모래는 희며 언덕과 들이 자못 넓어 기관처[奇觀處]라고 기록하고 있다.

 

 峽坼雙流合[협탁쌍류합] 협곡을 헤쳐 나온 두 물줄기 하나되니
 無情如有情[무정여유정] 정이 없던 것이더냐 정이 있던 것이더냐
 紅亭出其上[홍정출기상] 붉은 정자 떠오르듯 드러나니
 표[絲변+票]묘[絲변+目+少]揷空明[표묘삽공명] 맑은 하늘에 까마득히 꽂아 놓은 것이리라.
 列峀丹靑活[열수단청활] 빙 둘러싼 봉우리 울긋불긋 생기 있고
 飛波日夜鳴[비파일야명] 날아드는 물소리 낮과 밤을 울어댄다.
 征途困煩鬱[정도곤번울] 나그네의 곤고한 이내 심사
 到此十分淸[도차십분청]이곳에서 깨끗이 날려보낸다.
<합강정[合江亭], 채팽윤[蔡彭胤]>

 

 이 시의 눈[眼]은 시의 둘째 구에 있는 ‘정[情]’자와 마지막 구의 ‘청[淸]’자이다. 즉, 인생은 참으로 무정한 것이더냐 유정한 것이더냐? 하는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을 염두에 두고 시를 풀이해보자. 협곡을 빠져 나온 두 줄기의 물줄기가 하나가 되어 만났으니, 만나기 전에는 무정하다 만나니 유정하게 되는 것이더냐! 합강의 벼랑 위로 서서히 드러나는 정자는 맑은 하늘에 꽂아 놓은 듯이 보인다.
 그곳에 오르니 열병을 하듯 울긋불긋한 봉우리들이 둘러쳤고, 밤낮으로 유정한 심사를 물소리는 지껄여대며 흘러갔을까? 인생 여정에 지칠 대로 지친 나그네의 답답한 마음을 이곳에서 깨끗이 날려보낸다.
 앞서 한 질문에 시인의 대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청[淸]’자로 집약된다. 깨끗한 마음으로 산다면, 유정에도 무정에도 결코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시인의 대답이다.

 

인생사 이치란 무엇인가
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차는 것이 인생

 
 삼일정[三一亭]은 화천군 사내면 화음동에 있는 정자이다. 삼일이란 삼재[三才]가 하나라는 의미이니 즉,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하나라는 생각이다. 이 얼마나 인간존엄[人間尊嚴]의 발현[發現]인가! 특히 화음동[華陰洞]은 화악산 북쪽에 있는 맑고 깨끗한 계곡으로 그 풍광은 참으로 경이롭다. 이곳에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으니, 자연을 보는 곡운 선생의 안력[眼力]은 높다고 할만하다. 또한 이 화음동에 곡운 선생의 뒤를 이어 조카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도 은거하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理妙元沖漠[이묘원충막] 이치는 묘하여 본래 아득하고 막연하니
 誰摸本色眞[수모본색진] 누가 본색의 진실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人爲天地配[인위천지배] 사람은 천지와 짝을 이루고
 石與棟樑因[석여동량인] 돌은 정자의 기둥을 받치고 있다.
 圓極根樞立[원극근추립] 둥근 태극도를 들보에 세웠고
 方隅卦氣循[방우괘기순] 바른 기둥 모서리에 64괘가 순환하니,
 居然見興壞[거연견흥괴] 어느새 흥함과 무너짐을 보면서도
 慘憺擬圖新[참담의도신] 딱하게도 새로운 도모를 생각한다.
<삼일정[三一亭]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이 시는 물음을 던져주고 그것의 답을 독자에게 찾도록 하고 있다. 그 물음은 ‘인생사 이치란 무엇인가’다. 물음의 답은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본래 하늘과 땅과 짝을 이루는 귀한 존재라는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땅[돌]과 하늘을 이어주는 동량[기둥]으로 이루어진 삼일정[三一亭] 내부에는 태극[太極]과 주역[周易]의 괘가 들보와 기둥에 그려져 있다. 여기에 그려진 태극과 주역의 괘를 통해 인생사 본색[本色]을 찾을 수 있다. 그 인생사 본색[本色]은 흥괴[興壞]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 흥괴는 다름 아닌 ‘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차’는 주역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인생사 본색의 의미를 알면서도, 참담하게도 인간은 새로운 도모를 꿈꾼다. 이 부질없는 욕망은 물러나야 할 때를 놓치고 세계가 내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들어 가장 추하고 비열하게 인간 자신과 역사를 더럽힌다. 이번 주말 삼일정에 누워 자연과 인간의 고귀함을 생각하며 그 인생사 본색을 느껴봄은 어떠할지.

 

 수색 허적의 고석정
자연과 하나되니 상심은 잊혀지고

 
 철원 고석정[孤石亭]은 정자를 포함하여 동송읍 장흥리 한탄강 계곡 일대의 빼어난 경관을 말한다. 특히 이곳은 물줄기를 따라 십여 미터 지면 아래에 형성[전문 용어로는 화강암의 주상절리와 수직절벽]되어 있어 그 광경을 아래에서 내려보는 순간 이상세계를 보는 착각에 빠져 놀라운 탄성을 자아내기에 족하다.
 특히 기암봉이 강 중간에 10여 미터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고, 이 기암봉 위에 상록수인 소나무가 몇 그루 자라고 있으며 중간에 뚫린 굴이 있어 신비감을 보탠다.  이러한 광경을 4줄이나 8줄의 정형시로 담아내기에 부족하였는지 500여 년전 시인은 다음과 같이 길게 노래하였다.

 
 長溪繞山流앙앙[삼수변+ 央] [장계요산류앙앙] 산을 휘감은 긴 계곡의 물줄기 힘차서
 巨石屹立出水長[거석흘립출수장] 우뚝 솟은 우람한 바위를 부딪쳐 흘러간다.
 我陟其上聊相羊[아척기상료상양] 내 그 바위에 올라 이리저리 거니니
 恍若鶴飛而鸞翔 [황약학비이난상]황홀하여 학과 난새가 비상하는 듯하다.
 丹崖翠壁環其傍[단애취벽환기방] 깎아지른 푸른 벽이 둘러쳐졌고
 其底潭心龍必藏[기저담심용필장] 그 밑 여울엔 용이 필시 있으리라.
 隱隱有窟穿其腸[은은유굴천기장] 용의 창자를 뚫어낸 까마득한 굴에
 我欲入之心魂揚 [아욕입지심혼양] 내들어서려니 정신이 아찔하고
 却立?嶢俯蒼茫 [각립초요부창망]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보니
 若墜復稽仍徊徨 [약추복계잉회황] 떨어질까 움찔하며 이내 주저한다.
 奇形異相狀無方 [기형이상상무방] 기이한 모양과 형태 모두가 제각각
 此地盤遊何代王[차지반유하대왕] 이 땅에 노닐던 이, 어느 대의 왕인지
 有碑記刻今則亡[유비기각금즉망] 비석에 새긴 기록 지금은 없어지고
 泰封高麗迭興昌 [태봉고려질흥창] 태봉과 고려가 연이어 번성하여
 緣溪長麓有城隍 [연계장록유성황] 계곡의 긴 산등성엔 성황이 있다.
 人事代謝豈有常 [인사대사기유상] 계속되는 사람의 일에 일정함이 있던가?
 山川遊覽應無 央[산천유람응무앙] 산천유람도 응당 지속될 수 없어라.
 俯仰今古情內傷 [부앙금고정내상] 고금을 생각하니 마음이 서글퍼져도
 我來復値月純陽 [아래복치월순양] 내 다시 찾아오니 한창의 봄날이라.
 紅파[白+芭]翠葉映波光 [홍파취엽영파광] 붉은 꽃 푸른 잎 물에 비춰 흔들리니
 異境幽趣却相忘[이경유취각상망] 신이한 경치에 취해 너와 나를 잊어서
 縱欲歌之安能詳[종욕가지안능상] 시를 지으려 하나 어찌 말로 다하랴?
 長嘯獨倚松樹蒼 [장소독의송수창] 오래도록 푸른 소나무에 기대 휘파람분다.
<수색[水色] 허적. 孤石亭[고석정]>

 

 이 시는 작가의 상상력이 결부된 풍광 →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감회라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에서 시인은 기암봉에 올라 용을 상상하며 고석정의 신비한 모습과 자신의 놀라운 경험을 진술한다. 강과 기암봉 사이에 용을 매개로 하여 엮어내는 상상력과 시인의 놀라운 체험은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동일한 체험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신라의 진평왕과 태봉의 궁예, 고려의 충숙왕이며 시인보다 앞서 살았을 임꺽정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며 생겨나는 마음 속 회한이 뒷부분을 장식한다. 그 회한은 무한한 자연[고석정]과 유한한 인간[시인]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다.
그렇지만 한창 봄날 이곳에서 자연과 하나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모습을 보니 길게 써놓은 시가 무색하다. 그래서 시인은 기암봉 꼭대기에 신기하게 자라는 소나무에 기대여 휘파람을 불뿐이다.

 

 한원진, 벽파정 벽면의 운자로 짓다
다시 올라 세상사 수심 달래고 싶은 범파정

 
 홍천의 자연풍광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적 환경을 지닌 홍천에 누각이나 정자가 없을 수 없다. 조선의 문화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학명루[鶴鳴樓]와 범파정[泛波亭] 기록이 나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홍천에는 이름 있는 누정[樓亭]이 남아있지 않다.
 범파정은 홍천읍 갈마곡리에 있었던 정자였다. 강원도지에는 객관 앞에 있었다고 하고, 홍천현읍지에는 현의 관아 동쪽 2리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범파정은 대동여지도에도 이름이 남아 있으며, 여기에다 남아 있는 문헌들을 덧대어 살펴보았을 때 북쪽에서 흘러드는 군업천과 홍천 동면에서 흘러나오는 성정천이 만나 합수를 이루는 지역 아래이거나 성정천 끝자락 변에 위치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亭下澄江亭上山[정하징강정상산] 정자아랜 맑은 물 정자 윈 푸른 산이라
 曲欄人倚翠微間[곡란인의취미간] 굽은 난간에 기대니 푸른빛으로 물든다.
 幽情遠峀孤雲出[유정원수고운출]깊은 정은 먼 산에서 피어나는 조각구름
 倦意長空獨鳥還[권의장공독조환] 지친 생각은 먼 창공에서 돌아오는 외짝 새.
 塵土幾年愁迫隘[진토기년수박애] 흙먼지 속 몇 년을 근심으로 쫓기다가
 仙區此日喜寬閒[선구차일희관한]선경[仙境]에 선 오늘 여유로와 즐겁다.
 南橋鶴去烟莎綠[남교학거연사록] 남교엔 학이 가고 푸른 향풀은 흐릿하니
 立望淸都창[心변+長]莫攀[입망청도창막반] 서서 청도를 바라보나 슬프게도 오를 길 없어라.
<벽파정 벽면의 운자로 짓다[次泛波亭壁上韻]

 

한원진[韓元震]>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 -1751]은 성리학자로 그 학문적 연원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에 맞닿아 있는 인물이다. 이 시는 남당이 불혹[不惑] 중반기인 45세 때[1726년 11월쯤]에 홍천을 방문, 범파정에 올라 지은 것이다. 이 시는 각 구절마다 한자씩의 시안[詩眼]을 두고 있는데, 시안을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징[澄 : 깨끗함] - 취[翠 : 푸름] - 고[孤 : 외로움] - 독[獨 : 외로움] - 수[愁 : 근심] - 희[喜 : 즐거움] - 거[去 : 떠남] - 창[心변+長: 슬픔]이다. 이를 정리하면 산수[山水]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범파정은 깨끗하여 그곳에 있으면 그 푸른빛이 몸 속으로 스며들어온다. 이러한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니 먼 산에서 피어나는 한 조각 구름이며 창공을 배회하는 짝없는 새와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고독[孤獨]이다. 여기에 흙먼지로 뒤덮인 세상일에 쫓기다가 벽파정에 올라서니, 이곳은 신선이 사는 지역으로 여유가 있으며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이렇게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처지만은 아니어서 현실로 돌아 가야한다. 학이 떠나고 신선세계의 향취도 흐릿해지며 청도[淸都 : 신선세계]는 멀어져간다.
 이 시는 개인의 심사와 범파정의 아름다움을 대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범파정이 지어져 그곳에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홍천의 자연풍광을 감상하며,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한 탐악한 폭군이 아닌 자연의 한 부분임을 깨달았던 남당의 생각을 되새기고 싶다.
 
 성현의 빙허루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닌 것을

 
빙허루[憑虛樓]는 원주시에 있었던 유서 깊은 정자다. 성현[成俔 : 1439 - 1504]이 쓴 ‘빙허루제서[憑虛樓題序]’에 따르면 누는 영가산[永嘉山] 물 사이에 있었고 누의 주인은 소윤[少尹] 김사고[金師古]였으며 박소보[朴蘇甫]의 앞 주인임을 알 수 있다.

 

 冒景常愁跋涉行[모경상수발섭행] 햇볕을 무릅쓰고 다닐 길을 항상 걱정했는데
 登樓偏愛嫩凉生[등루편애눈량생] 누에 오르자 선들바람 불어오니 이보다 좋을까!
 數叢芍藥紅 [수총작약홍번체] 여러 떨기의 붉은 작약 섬돌에 붉게 나부끼고
 萬縷垂楊綠滿城[만루수양녹만성] 만 갈래 수양버들은 성안을 푸르게 채워놓는다.
 乳 傍 初學語[유연방첨초학어] 젖먹이 제비는 처마 끝에서 말 배우며
 流鶯穿樹自呼名[유앵천수자호명] 꾀꼬리는 나무를 쪼며 꾀꼴꾀꼴 제 이름을 부른다.
 一簾疎雨驚殘夢[일렴소우경잔몽] 주렴 밖 성긴 비에 잠에서 깨어나
 起看肥 赴 耕[기간비순부농경] 일어나 살찐 누렁소가 밭 갈러 감을 본다.
 <빙허루[憑虛樓], 성현[成俔]>
 
 위의 시는 성현이 강원도 관찰사 시절에 쓴 것이다. 이 시는 처음과 끝에 화자[시인]가 등장하는 특징을 보이면서, 여러 소재들을 다양하게 나열하고 있다. 선들바람, 붉은 작약, 수양버들, 젖먹이 제비, 꾀꼬리, 누렁소 등이 시의 소재인데, 이 소재들은 화자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시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강산풍월의 법칙 속에 자유로운 반면, 화자는 햇볕을 걱정하다가, 누에 올라 선들바람으로 그 걱정을 떨쳐버리는 아주 평범한 인간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점은 서에서 시인이 밝힌 대로, 자신은 강산풍월을 그리워만 하다가 평생을 홍진에 묻힐 뿐이라고 한 점을 확인시켜준다.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시인이 본 것은 누렁소가 밭을 갈러 가는 모습으로 이는 현실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갈수록 강산풍월과 멀어져가고 있다. 아파트의 등장으로 섬돌의 작약을 잃고, 도시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여 나무가 가져다주는 녹색공간을 상실하고, 제비는 더 이상 도시로 찾아들지 않으며, 꾀꼬리는 어떻게 생겼는지 그 형체를 기억하지 못한지 오래 되었으며, 누렁소가 밭을 갈러 가는 광경은 시골에서조차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우리는 누의 이름처럼 소유하려는 마음을 모두 버리고, 자신의 빙허루에 기대어 강산풍월의 자유를 찾아갈 수 없을까? 혼란스러운 요즘의 세태를 보며 더욱 강산풍월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김창흡의 능허대
세상 욕심을 비워봄은 어떨는지…

 
 강원도지에 ‘능허대[凌虛臺]는 양구군 동쪽 2리에 있으며, 대 앞에 비서암[秘書岩]이 있다’ 기록하고 김창흡[金昌翕]의 시를 소개하였다.
 
 聞爾隱居後谷深[문이은거후곡심] 네가 뒷골 깊이 은거했다 들었는데
 杏花時節一未尋[행화시절일미심] 살구꽃 피는 시절이건만 찾아가지 못했구나.
 稻畦涵白牛起[도휴함백용우기] 해살 가득한 논두렁에 소는 한껏 게으르며
 松壁交靑好鳥吟[송벽교청호조음] 푸르게 둘러친 소나무 벽에 새소리 좋구나.
 訓子耕鋤存至要[훈자경서존지요] 자식에게 농사를 가르침은 지극히 중요하여
 從兄杖會眞心[종형장구회진심] 종형이 찾아와 진심으로 한자리에 모였구나.
 百淵孤僻何由羨[백연고벽하유선] 연못은 세상과 떨어져 있어 무엇이 부러우랴?
 立馬遲回轉陰[입마지회전체음] 말을 세우고 천천히 섬돌 그늘을 거닐어본다.
 <능허대[凌虛臺], 김창흡[金昌翕]>
 
 이 시는 김창흡이 언제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시 속에 등장하는 너[爾]와 종형[從兄] 또한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그 뜻을 음미할수록, 그 시의 맛이 잔잔하게 우러난다.
 첫 구와 둘째 구를 통해 이곳이 은거할만하고 시절은 살구꽃 피는 좋은 봄날임을 알 수 있다. 시에 등장하는 살구꽃은 은거지에 잘 어울리는 상징물이니 좋은 소재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구와 넷째 구에는 여유롭고 한가로움을 나타내는 소재들을 나열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이곳에 빠져들게 한다. 봄 해살이 가득 퍼진 논두렁에 한껏 게으른 소의 모습에는 은거지의 한가로움과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여기에 울울창창한 소나무 벽과 새소리의 조화로움이 보태져 최적의 은거지임을 암시한다. 이에 이미 은거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종형이 방문하여 한 자리에 모였다. 여기에 세상과 떨어진 절경의 연못이 있으니 ‘무엇이 부러우랴?’ 이러한 곳에 화자는 말을 세우고 천천히 섬돌 그늘을 거닐어 본다. 말을 세운 행위는 세상으로부터 일단 자신을 격리함이다. 그리고 섬돌 그늘을 천천히 이리저리 거닐어 보는 행동은 세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되짚어보는 반성의 모습이다. 이는 은거하고픈 심정과 세상으로 다시 나가야하는 현실의 대립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여유롭고 한가함을 누려보고 싶은 마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지닌 본능일 것이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만만치 않을 때 이 본능에 충실하고 싶다. 이런 때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지친 심경을 달래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봄이 익어가는 계절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꽃구경도 좋겠지만, 조용한 자연을 찾아 자신을 조용히 점검하고 되돌아보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워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이 능허대가 상징하는 의미이다

 

권필의 관란정
관란정, 강물 흘러도 충절 남아

 
 관란정[觀瀾亭]은 영월군 서면 옹정리와 충북 제천 송학면 장곡리 경계지점에 있다. 관란은 생육신의 사람인 원호[元昊]의 호로 자의대로 물결을 본다는 뜻이다. 강물은 혹 불어나다가 평온해지며 혹 동심원 무늬를 만들고 혹 햇살에 금빛 물결이 되고 혹 띠를 두른 듯 감싸 흐르고, 혹 화살처럼 급하게 흐르고, 혹 구름처럼 펼쳐지기도 한다. 이러한 물을 보고 있노라면 역사와 인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호는 단종 때에 수양대군이 황보인·김종서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병을 핑계로 고향인 원주로 낙향하고,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이곳에 토대를 쌓고 그 옆에 초가집을 지어 관란이라 하였다.
 
 踏石穿林一徑遙[답석천림일경요] 돌길에 숲을 지나는 아득한 외줄기 길에
 忽看危構勢矜驕[홀간위구세긍교] 홀연 들어오는 벼랑에 누각이 굉장하다.
 煙中樹色分回渚[연중수색분회저] 연기 속 나무 빛에 물줄기 분명하게 돌아들고
 雨外帆風逐暮潮[우외범풍축모조] 비 밖에 바람이 저녁 어스름 몰고 온다.
 二月鶯花渾滿地[이월앵화혼만지] 이월 앵화[봄빛]는 천지에 가득하며
 千峯蒼翠欲摩[천봉창취욕마소] 산봉우리 푸르러 하늘에 닿을 듯.
 主人飽受淸閑福[주인회수청한복] 주인은 맑고 깨끗한 복을 실컷 받았으니
 長把琴尊了夜朝[장파금존요야조] 오래도록 거문고와 잔 잡아 밤낮을 보냈으리.
 <관란정 권필>

 

 권필[1569-1612]의 ‘관란정’ 시는 표면적으로 역사적 사실은 배제하고 풍광 묘사에 주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의 행간에 역사적 의미를 숨겨놓고 있다. 1,2구는 관란정에 이르는 어려운 여정과 누각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는데, 정자가 아주 높은 곳에 있어 교만한듯하지만 자랑[矜驕]스럽다고 하여 그 위상을 말하였다. 3,4구는 단순히 관란정에서 바라본 광경과 분위기만을 드러낸듯하지만, 비바람과 저녁 어스름을 통해 시련의 엄습을 암시하였다. 5,6구에서는 완연한 봄빛과 멀리 높게 솟은 푸른 산봉우리를 그려내어, 역사의 진실은 하늘에 닿을 듯 푸른 산봉우리처럼 봄빛 속에 확연히 밝혀짐을 말하였다. 7,8구에서는 주인을 등장시켜 개인이 역사 속에 어떻게 존재해야하는지를 강조했다. 청한복[淸閑福]은 충절한 삶을 살았을 때 얻을 수 있으며, 금존[琴尊]을 잡는 일은 고고한 삶을 견지해야 가능하다.
 관란정 주위 경관은 매우 빼어나다. 특히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주위 풍광은 압권이다. 그 가운데 강물을 바라보는 행위는 관란정을 이해하는 핵심 포인트이다. 강물은 오늘도 관란정을 돌아 청령포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강물은 흘러도 충절은 남는다.
 
김홍욱의 횡성 벽옥정
창 너머 연못 그림자 반짝이는 벽옥정
 
 벽옥정[碧玉亭]은 횡성군 공근면 학담리에 있었던 정자이다. 횡성군 관련 자료에 따르면 조선 숙종 때 정기광[鄭基廣]이 세웠으며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물이 깊었으며 둘레는 소나무가 울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공근초교 앞 언덕쯤으로 위치를 추정했. 그러나 필자가 찾은 김홍욱[金弘郁 : 1602 - 1654]의 <횡성정참판기광벽옥정[橫城鄭參判基廣碧玉亭] : 원제> 시편을 통해 볼 때, 정기광은 인조 때 사람이며 벽옥정의 위치는 금계천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김홍욱이 1637년 관동[關東] 안렴사[按廉使]로 나갔을 때 이 시를 지었으니, 벽옥정의 연원은 지금으로부터 37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鄭家亭子澗之濱[정가정자간지빈] 계곡 물가에 정가[鄭家]의 정자[亭子]
 九曲灘聲繞四隣[구곡탄성요사린] 구비마다 여울 소리 사방을 둘러친다.
 滿壁松陰秋薄薄[만벽송음추박박] 온통 솔 그늘로 가을이 한창인데
 隔窓潭影晩[격창담영만린린] 창 너머 연못 그림자 저물녘 반짝인다.
 溪山自是留行客[계산자시유행객] 시냇물과 산이 나그네를 붙잡으니
 風月何曾有主人[풍월하증유주인] 풍월주인이 어찌 따로 있으랴!
 堪笑老公成底事[감소노공성저사] 가소로운 늙은이 무엇을 이루었나?
 十年揮汗走紅塵[십년혼한주홍진] 십 년을 땀 흘리며 티끌세상 달렸을 뿐.
<碧玉亭[벽옥정] 金弘郁[김홍욱]>

 

 위의 한시는 전형적인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방식을 취하였다. 첫째·둘째 구에서는 정자의 원경[遠景]을, 셋째·넷째 구에서는 정자의 근경[近景]을 그려냈다. 첫째 구에서 넷째 구까지는 각 구절마다 앞 넉자만을 취하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하다. 즉 정가[鄭家]의 정자 - 구비마다 여울 소리 - 온통 솔 그늘 - 창 너머 연못 그림자로 의미 전달이 완전하다.
 다섯 째·여섯 째 구는 앞 네 구에서 말한 계산[溪山 : 자연]으로 인해 시인이 그곳에 머물지 않을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재치 있게 표현하였다. 자연이 시인을 붙잡으니 풍월주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다. 일곱 째·여덟 째 구에서는 삶에 대한 반성이 엿보인다. 시인은 자신을 가소로운 늙은이라 말하며 무엇을 이뤘나 반문하고, 티끌세상을 그저 달려오기만 한 모습을 되짚어 본다. 이 물음과 대답은 현재에 대한 반성이며 또한 미래에 대한 자기 다짐이다.
 정자[亭子]는 자연풍광이 뛰어난 곳에 있다. 자연풍광이 좋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지친 육신을 달래기도 하고 미래를 구상하기도 한다. 정자는 단순히 음풍농월의 장소만은 아니다. 그곳은 삶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세상을 계획하는 창조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 속에서 역사 속에 묻혀진 정자를 찾아 그 복원을 꿈꾸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우리의 다짐이다

 

성현의 차정선북루운
난간에 의지 '동산 달' 마주하니

 
  태백산맥 중심에 위치한 정선은 아라리의 고장이며 산과 물의 고장이다. 손으로 다 꼽을 수 없는 산들이 겹겹 넘쳐나고 그 산들 사이로 흘러내린 물들은 조양강을 이룬다. 매월당 김시습이 ‘은거해서 살아가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라고 할만큼 산수자연이 아름다운 정선은, 자리잡아 앉으면 정자요 누각이 된다. 이러한 정선의 최고[最古] 누각을 찾아 떠나보자.
 정선의 봉서루[鳳棲樓]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이름이 처음 보이나, 봉서루의 이름을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현재 관련된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승휴[李承休 1224 - 1300]의 시가 있지만 근거가 될만한 내용이 없고, 안축[安軸 1287 - 1348]의 시에서는 정선공관[旌善公館]이란 이름으로, 성현[1439 - 1504]의 시에서는 북루[北樓]라는 이름으로, 이외에 다른 사람의 시편에서는 군루[郡樓], 동헌[東軒]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되었다. 문헌 검토를 통해 풍암정[風巖亭]이란 정자가 정선읍내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 풍암정이 봉서루의 다른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검토한 바를 종합해 볼 때, 봉서루는 동헌에 딸린 객사의 북쪽 누명[樓名]으로 판단된다.
 
 困馬愁穿線路行[곤마수천선로행] 실같은 길을 지친 말로 시름하며 가야건만,
 亂峯絶似重城[난봉참절사중성] 어지러이 산은 깎아지른 듯 겹겹이 둘러쳤다.
 風生巖竇砲車轉[풍생암두포거전] 바람은 바윗길에 대포수레 지나가듯 소리치며
 水抱村墟匹練橫[수포촌허필련횡] 강물은 비단 필로 둘러친 듯 마을을 감쌌구나.
 身世百年雙白[신세백년쌍빈백] 평생에 두 귀밑머리 하얗게 세었으니,
 湖山千里宦遊情[호산천리환유정] 산 따라 물 따라 천리 벼슬길의 마음일세.
 憑欄坐對東岑月[빙란좌대동잠월] 난간에 의지해 동산의 달을 마주하니,
 夜靜詩懷久益淸[야정시회구익청] 밤이 깊어 마음을 풀어내니 오랠수록 맑아진다.
<차정선북루운[次旌善北樓韻] 성현[成俔]>
 
 시는 앞서 경치를 읊고 뒤에서 감회를 읊는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방식이다. 실같이 가는 길을 통해 정선을 찾아드는 여정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주위는 온통 깎아지른 고봉준령들이 겹겹이 둘러쳤다고 하여 원경[遠景]의 실감[實感, vivid]을 더하였다. 그리고 거센 바람과 비단같은 강물을 대비시켜 동적 이미지[청각이미지]와 정적 이미지[시각이미지]를 구사하여 근경[近景]의 실감을 더하였다.
 벼슬살이로 달려온 평생을 되돌아보니 귀밑머리 하얗게 세었을 뿐이다라고 하여 시선은 시인의 외모에 옮겨졌다.
 끝으로 세상의 부귀영달을 꿈꾸며 살다가 온전히 몸을 난간에 기대어 동산의 달을 마주하니, 밤이 깊어갈수록 마음은 더욱 맑아진다[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고 하여 시인의 내면세계로 시선을 끌어들였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마지막 구절의 청[淸]자이다. 누각에 올라 봄바람을 맞으며 세상의 부귀영화를 잊은 채, 시 한 수를 짓는 여유를 부리며 내 자신이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느껴보자

 

한진계의 죽서루
관동 제일 천년 누각 죽서루

 
 죽서루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고 찬사를 받는 것에 이의가 없으며, 고려 명종[1171 ~1197]때 문인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이미 등장하고 있어 천년 누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려시대부터 수많은 시인묵객이 이 누에 올라 시를 썼으며, 겸재 정선도 그 아름다운 모습을 화폭에 담지 않을 수 없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절벽이 천 길이고 기이한 바위가 총총 섰다. 그 위에 나는 듯한 누를 지었는데 죽서루라 한다. 아래로 오십천에 임했고, 냇물이 휘돌아서 못을 이루었다. 물이 맑아서 햇빛이 밑바닥까지 통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도 낱낱이 헤아릴 수 있으니, 영동의 절경이다.”

 

 欄檻崔嵬逈壁開[난함최외형벽개] 난간은 우뚝하고 멀리 벽이 펼쳐지니
 登臨作意一徘徊[등임작의일배회] 누에 올라한 한 번 거닐고 싶어진다.
 千年悉直灘聲在[천년실직탄성재] 천년 실직국은 여울 소리에 있고,
 五月頭陀爽氣來[오월두타상기래] 오월 두타산의 상쾌한 기운이 실려온다.
 返照成樓上畵[반조번성누상화] 누대 그림에 새 들어온 빛이 반짝거리며
 奇雲忽入掌中盃[기운홀입장중배] 기이한 구름은 잔 속으로 홀연 스며든다.
 綠灣更欲探眞面[녹만갱욕탐진면] 푸른 물굽이에서 진면목을 다시 보고자,
 小艇鳴檣傍岸回[소정명장방안회] 노 소리에 장단 맞춰 절벽 곁을 떠돈다.
<竹西樓[죽서루] 韓鎭棨[한진계]>
 
 죽서루는 안에서 바라보는 눈맛[眼味]과 밖에서 죽서루를 바라보는 눈맛을 즐겨야 비로소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이 시는 배에서 바라본 죽서루의 원경[1,2구], 죽서루에서 바라본 주위 풍광[3,4구], 죽서루로 들어온 빛과 구름[5,6구], 배에서 바라본 죽서루의 근경[7,8구]으로 조직되어 있다. 즉 밖에서 바라본 죽서루의 모습[1,2,7,8구]과 죽서루 안에서 느낄 수 있는 풍광과 멋[3,4,5,6구]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배를 타고 오십천을 따라 오면서 멀리서 바라본 죽서루의 모습을 담아내고, 그곳에 올라 거닐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서 자리를 누각으로 옮긴 작자는 여울 소리에 묻어나는 천년 실직국의 역사를 말하고, 상쾌한 기운을 실어 보내는 두타산의 의연한 기상을 노래하였다. 참으로 장쾌하다. 누대 그림에 새 들어와 그림에 반짝이는 빛과 잔 속으로 홀연히 침입해 들어온 기이한 구름을 표현한 대목에서는 현대시를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참으로 절묘하다. 다시 시인은 죽서루의 진면목을 확인하고자, 오십천의 배에서 노 소리에 장단 맞추며 깎아지른 누 아래 절벽 곁을 떠돈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探眞面’이다. 바쁜 세상에 떠밀려 주위의 진면목을 놓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누각에 올라 잃어가고 있는 자신의 진면목을 차분하게 찾아봄은 어떨까.
 
임억령, 이군선등능파대
하늘 기둥 촛대바위 능파대

 
 능파대란 이름은 조선조 때 한명회가 붙였다고 하는데, 이곳은 이전에도 추암으로 불리었다. 능파[凌波]란 파도라는 말로, 이곳에서 동해의 파도를 바라보면 장쾌함과 기이함을 더욱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이곳에 기괴한 형상의 수많은 바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 기괴한 바위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 물음에 과학적 잣대의 답을 요구한다면 인류의 달 착륙으로 달 속의 계수나무와 토끼를 우리의 가슴에서 지워낼 때와 같이 인류의 추억거리를 하나 잃을 것이다.
 
 이군이 어제 대에 올랐다가, 와서는 한참 자랑하여 “세상에 이렇게 기막힌 절경이, 바다에 있는 줄 몰랐습니다. 공자가 기이한 말을 근심했다지만, 드러나지 않을 묘리는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괴석이, 바닷가에 우뚝 펼쳐졌을까요?”라고 하였다. [李君昨登臺 歸來久舌 天下未可知 海內此奇絶 夫子奇書 妙理無不抉 如何是怪石 波上森羅列]


 “내 말을 잘 들어 보게나, 그댈 위해 이야기 할 터이니, 필시 큰 고래가 죽어 고기는 없어지고 뼈만 남았다가 혹 고르게 깎이지 않았거나, 뾰족한 하늘기둥을 잘라다 하늘 모퉁이를 받치려고 깎다가 남은 조각일걸세. 진시왕이 긴 다리를 만들었지만 오랜 세월 풍파에 무너지고 장사[壯士]가 촉순[蜀 ]을 던져 용왕의 굴에서 띄워낸 것이며 천태산의 현성하신 스님께서 띄운 잔이 동해로 넘어온 걸세. 제해지[齊諧誌]에 실지지 못하고 수경지[水經誌]에도 또한 빠졌으니 큰 벼루를 만들어, 갈려나가지도 찢어지지도 않게, 푸른 하늘을 종이 삼아, 대취하여 바다 달에 뿌리려하네.”[我曰稱諦聽 爲子新其說 必是長鯨死 肉爛撑骨節 亦或觸不周 嵯峨天柱折 猶疑補天 餘片存 秦帝作長橋 歲久風濤決 壯士擲蜀
浮出龍王穴 天台賢聖僧 浮杯東海越 齊諧猶不載 水經亦有闕 不如作大硯 不亦不裂 靑天以爲紙 大醉海月
<進士李君善登凌波臺來言石狀奇甚, 林億齡>]
 
 이 시는 ‘능파대의 바위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라는 물음에, 시인이 답하는 형식을 취한 28구의 장편 고시[古詩]이다. 시인은 물음에 기괴한 바위는 배를 삼킬만한 큰 고래가 죽어 남긴 뼈이며 하늘 모퉁이를 받치기 위해 깎다가 남은 조각이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진시왕이 만들어놓은 긴 다리가 오랜 세월 풍파로 무너진 것이라 하고, 힘센 장사가 촉순을 집어던져서 용왕의 굴에서 띄워낸 것이라 하며, 천태산의 현성[賢聖]한 스님이 띄워 보낸 잔이라고 하였다.
 시인은 능파대에 있는 여러 모양의 기괴한 바위들의 생김새에 따라 각각 설명하고 있는데, 하늘 모퉁이를 받치려했다 남은 바위가 지금의 촛대바위고, 촉순으로 설명하고 있는 바위는 해암정 옆에 있는 바위군이고 천태산의 현성한 스님이 띄워 보낸 술잔은 지금의 형제바위이거나 할미 할배바위는 아닐까 한다.
 이곳은 애국가 시작과 함께 나오는 일출지이며 겨울연가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시인이 시의 마지막에서 보여준 장쾌함이야말로 능파대를 가장 멋있게 그려낸 것이 아닐까.
 
안축의 경포범주
고요함 속 자연 이치 담아낸 경포대

 
  고요함 속에 자연의 이치를 담아내는 경포대.[鏡浦臺]
 강릉 경포대[鏡浦臺]의 멋은 무엇일까. 안축[安軸 1287~ 1348]은 ‘담담하게 한가롭고 넓게 트이어 기괴한 형상으로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는 것이 없고 다만 멀고 가까운 산과 물뿐이었다. 앉아서 사방을 돌아보니, 먼 곳의 푸른 바다는 넓고 질펀하여 아득히 물결이 출렁거리고 가까이 경포의 물은 깨끗하고 맑아 바람 따라 넘실거린다. 먼 산은 골짜기 천 겹으로 구름노을로 아련하며, 가까운 산은 봉우리가 십리로 초목이 무성하다. 항상 갈매기와 물새가 있어 대 앞에서 떴다 잠겼다 오고간다. 그 봄가을 이내와 달이 아침저녁으로 가리었다 드리었다하여 계절에 따라 기상의 변화가 일정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雨晴秋氣滿江城[우청추기만강성] 비 개이니 가을 기운 강릉에 가득하여,
 來泛扁舟放野情[내범편주방야정] 조각배 띄워 야취[野趣]를 펼쳐본다.
 地入壺中塵不到[지입호중진부도] 오목한 지세라 세상먼지 이르지 못하고,
 人遊鏡裏畵難成[인유경리화난성] 거울 속 노니는 이 그려낼 수 없어라.
 烟波白鳥時時過[연파백조시시과] 물안개 사이로 흰 새는 때때로 날아가고,
 沙路靑驢緩緩行[사로청려완완행] 모랫길 검은 나귀 느릿느릿 지나간다.
 爲報長年休疾棹[위보장년휴질도] 어른을 위해 노질 천천히 하여주게나,
 待看孤月夜深明[대간고월야심명] 밤 깊어 둥근 달 밝게 비침을 보리라.
 <경포범주[鏡浦泛舟], 안축[安軸]>

 

 맑고 깨끗한 고요함을 일컬어 가을물[秋水]같다고 한다. 그 가을 물은 너무도 맑아 거울같다. 가을호수에는 세상먼지도 이를 수 없으니, 그 속에 노니는 사람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으랴. 그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다. 물안개 사이에 흰 새가 때때로 날아가고, 모랫길로 검은 나귀는 느릿느릿 지나간다. 흰 새들의 경쾌한 비상과 검은 나귀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는 색상과 행위의 대조를 이루면서 경포와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그 가운데 밤 깊어 호수에 비친 둥근 달[孤月 : 둥근 보름달이 뜨면 별들이 짝할 수 없기에 고[孤]라고 한다]을 보려는 사람이 있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된 조화로운 모습[物我一體]이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대간[待看 : 기다려 본다]이다. 내면세계로 침잠하여 자연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고, 그 기다림 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아주 현란한 세계에 이목을 모두 빼앗겨 자연과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둥근 달이 호수에 비추고 마음에 비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멋을 즐겼던 옛 선인들이 새삼 부럽다.

 

김세필의 하조대
하늘땅 배회 동해 잔질하는 '하조대'

 
 하조대[河趙臺]는 양양군 현북면에 있으며 하조대[河趙臺]라는 명칭은 조선조 개국 인물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의 성[姓]에서 따서 만든 정자다. 조준이 1376년경에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를 지냈으니, 이 시기쯤에 하륜과 노닐었을 것이다.
 하조대의 느낌은 강렬하다. 그러함 때문인지, 하조대를 노래하고 있는 시들은 대체적으로 호방한 기상을 노래하고 있다.
 
 祥雲南指一長亭[상운남지일장정] 상운 남쪽 십리 길 쉼터는,
 疊石爲臺入海汀[첩석위대입해정] 첩석 누대로 바닷가로 들어갔다.
 蜃氣接天成殿閣[신기접천성전각] 신기루는 하늘에 닿아 대궐을 이루며,
 浪花環坐浸階庭[낭화환좌침계정] 사방 물꽃이 계단 뜰을 적신다.
 扶疏松竹生淸韻[부소송죽생청운]  무성한 송죽의 맑은 운치 퍼져나가고,
 出沒魚龍見怪形[출몰어룡견괴형] 출몰하는 어룡은 도깨비를 보는 듯.
 徙倚乾坤懷抱在[사의건곤회포재] 하늘땅 배회하며 품은 뜻 있으니,
 杯樽今日酌東溟[배준금일작동명] 오늘 푸른 바다를 잔질하리라.
 <河趙臺[하조대], 金世弼[김세필 : 1473 - 1533]>
 
 거대한 바위들이 쌓여 이루어진 하조대는 바닷물과 맞닿아 높이 솟아 있기에 언뜻 보면 바다 쪽으로 진입해 있는 모양으로 느껴진다. 대 밑으로 세차게 밀려드는 파도는 금방이라도 대에까지 밀려들어올 것처럼 세차다. 시인은 사방의 물꽃[浪花]이 계단 뜰을 적신다고 하였다. 드넓은 바다의 구름[시인이 신기루라고 한 것은 아마도 구름을 말하는 듯하다]은 용궁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바다에 출몰하는 어룡들은 도깨비같이 신기하기만 하다. 여기에 소나무와 대나무의 싱싱한 운치는, 웅혼[雄渾]한 자연 앞에 당당한 시인의 모습을 돋보이게 한다. 시의 마지막에 시인이 등장한다. 시인은 하늘땅을 배회하며 뜻을 품는다고 하였다. 시인은 하늘땅을 배회하며 뜻을 품는다고 하였다. 그 뜻은 다름 아닌 동해를 잔질하겠다는 장쾌한 기상이다.
 동해를 가슴에 퍼 담을 수 있는 기상이라면, 세상의 무엇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며, 무엇을 할 수 없겠는가. 한 번 날개 짓하면 우주 끝으로 날아가는 붕새의 기상과 무엇이 다르랴 .
 이 시의 시안[詩眼]은 ‘酌東溟[작동명 : 동해를 잔질하다]’이다

 

허백의 고성 만경루
힘든 인생 여정 쉬어 갈까나
 

 만경대는 고성 청간정 북쪽 해문안벽[海門岸壁] 있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만경[萬景]이란 만 가지의 경치를 뜻하니, 그 이름만으로도 그 절경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청간역[淸澗驛] 동쪽으로 몇 리에 있다. 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 일어서고 층층이 쌓여 대[臺] 같은데, 높이가 수 십 길은 되며 위에 구부러진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의 동쪽에 작은 다락을 지었으며, 대 아래에는 어지러이 돌뿐인데, 뾰족뾰족 바닷가에 박혀있다. 물이 맑아 밑까지 보이는데 바람이 불면 놀란 물결이 어지럽게 돌 위를 쳐서 눈처럼 날아 사면으로 흩어지니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라고 돼있다.
 
 山水回境靜幽[산수영회경정유] 산과 물이 감아 돌아 지경이 고요하고 그윽한데,
 坐來心迹便淸脩[좌래심적변청수] 앉아 있으니 마음과 몸이 어느새 깨끗해진다.
 五更曉色先虛閣[오경효색선허각] 오경의 새벽빛은 빈 누각에 먼저 들고,
 一葉秋聲滿小樓[일엽추성만소루] 한 잎에 가을 소리 작은 누각에 가득하다.
 逐浪輕鷗知所止[축랑경구지소지] 물결 좇는 경쾌한 갈매기 제 머물 곳 알며,
 投林倦鳥得其休[투림권조득기휴] 숲에 드는 지친 새는 그 쉴 곳 있구나.
 吾今役役成何事[오금역역성하사] 분주한 이내 몸 지금에야 무엇을 이루었나?
 俯仰東西閱數州[부앙동서열수주] 분주하게 동으로 서로 몇 고을 지나왔을 뿐
 <萬景樓[만경루], 허백[許伯 :고려인]>
 
 이 시의 시안[詩眼]은 지소지[知所止]이다. 지소지[知所止]란 멈추어야 할 때 멈출 줄 안다는 말이다. 논어[論語]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과 일맥상통한다. 오늘날 우리인간의 물질적 욕망은 마치 제동장치 없는 기관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물질적 욕망에 쉼 없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에게는 그에 맞는 강화된 자극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시인은 고요한 누각에서 하나의 나뭇잎 지는 소리를 통해 우주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 얼마나 멋있는가?
 
구사맹의 비선대
신선이 자취 감춘 비선대

 
 비선대는 속초시 동명동 속초항 곁에 있는 영금정[靈琴亭]을 말한다. 영금정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두 가지라고 한다. 그 하나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속초항 개발로 파괴된 석산[石山] 정상의 모습이 정자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파도가 석벽에 부딪칠 때면 신비한 곡이 들리는데 마치 석산의 정상에서 거문고를 타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것이다. 영금정의 옛 이름이 비선대이니, 숨었던 신선이 나타나 동해에 푸른 물로 거문고를 타며 새롭게 영험을 나타내려는 것인가 보다.
 
 高臺獨立聳亭亭[고대독립용정정]높은 대 우뚝하게 하늘로 솟구쳤고,
 翠靄雲杳冥[취애동운잡묘명]푸른 구름 붉은 구름 아득한 바다를 감쌌으며,
 天吼石峯連雪嶽[천후석봉연설악]천후산 돌봉우리 설악산에 이어졌고,
 述郞湖水接滄溟[술랑호수접창명] 술랑포 호수[청초호]는 푸른 바다로 흘러든다.
 心隨淨羽雙飛白[심수정우쌍비백] 마음은 새를 따라 쌍이 되어 날아가니,
 目極脩眉一抹靑[목극수미일말청]눈끝의 먼 산은 하나같이 푸른 칠을 한 듯하다.
 留待月明風露夜[유대월명풍로야] 머물며 보름달 기다려 이슬이 내리는 밤에,

   欲招仙侶誦黃庭[욕초선려송황정]신선을 불러 짝하며 황정경을 읊조리고 싶다.
<秘仙臺, 具思孟>

 

 대[臺]라고 하면 사방을 잘 볼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00루, 00정 할 때는 반드시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00대라고 할 때는 건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불분명한 것이 많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00대라고 명명한 곳에는 건물이 확인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확실히 답하기 어렵지만, 00대라고 이름한곳은 한결같이 지세가 높아 사방을 잘 볼 수 있다는 공통적 특징을 지닌다. 비선대에도 건물이 없었을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돌봉우리가 가파르게 빼어나고, 위에 늙은 소나무가 두어 그루 있어서 바라보면 그림 같다. 그 위에는 앉을 만하며, 실 같은 길이 육지와 통하는데, 바다물결이 사나워지면 건널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시의 시안[詩眼]은 ‘초선[招仙]’이다. 비선[秘仙]은 신선이 숨어들었다는 뜻이니, 이 신선을 불러 다시 황정경[黃庭經 : 도교의 경전]을 읊조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시는 도가적 분위기인데, 5,6구는 장자의 붕새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북강원 통천 총석정
돌의 향연 기괴함 극치

  총석정은 지금은 갈 수 없는 북강원 통천군 고저읍 총석리에 있는 정자로 환선정과 마주하고 있다. 관동 팔경의 하나로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육각면체 기둥 4개로 이루어진 사선봉[四仙峰]과 높게 솟은 둥근 마루 언덕, 기괴한 형상의 돌무더기로 이루어져있다.
 이곳은 사시사철 끊임없이 높은 파도가 들이치며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거센 파도를 이기며 수 천 만년을 견디고 서 있는 사선봉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푸른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총석정이 그 눈 맛의 절정이라고 한다.

 

 圓方歷歷象乾坤[원방력력상건곤] 뚜렷한 원과 네모모양은 하늘과 땅을 상징했고,
 苔蘚離離有歲年[태선리리유세년] 두터운 이끼는 세월을 간직하고 있어라.
 鍊出功殊誕矣[연출와공수탄의] 여와[女 ]가 특별히 돌을 녹여 만들어냈거나,
 斧經禹跡亦茫然[부경우적역망연] 우[禹]가 다듬어 놓았을 텐데 아득하기만 하다.
 蒼龍影落波間臥[창룡영락파간와] 푸른 용 그림자 파도 속에 누워있고,
 黃鶴巢高頂上眠[황학소고정상면] 황학은 꼭대기 둥지에서 잠을 자고 있구나.
 早晩帝京求棟礎[조만제경구동초] 조만간 옥황상제 기둥과 주춧돌을 찾아도,
 未應滄海老風烟[미응창해노풍연] 창해에서 비바람 오래도록 견디며 대꾸하지 않았으리라.
  <총석정[叢石亭] 이헌경[李獻慶]>
 
 사선봉은 신라 때 술랑[述郞], 남랑[南郞], 영랑[永郞], 안상[安祥]의 네 신선이 이곳에서 유람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에 두터운 이끼는 수만 겁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시에 등장하는 여와는 돌을 녹여 구멍난 하늘을 메운 신녀[神女]이고, 우는 갈석[碣石 : 산처럼 우뚝 솟은 돌]을 이용하여 홍수 때에 황하의 물을 바다로 잘 들어가도록 한 신화 속 황제이다. 돌을 잘 이용한 이 두 신화 속 인물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여 그 신비로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곳에 창룡[蒼龍]과 황학[黃鶴]이 누워있거나 잠자고 있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시인은 7,8구에서 아주 기발한 상상을 발휘한다. 조만간 하늘나라 옥황상제가 궁궐을 지으려고 기둥과 주춧돌을 찾아도, 비바람 모진 풍파를 견디며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발한 상상력을 제시한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노[老]자이다. 총석정의 멋과 맛은 오랜 세월 파도를 견디며 서 있는 사선봉과 끝없는 망망대해를 바라볼 수 있는 둥근 언덕 마루의 정자이다. 그곳에는 하늘과 땅이 영원히 공존한다.
 
북강원 평강 창랑정
구름도 쉬어가는 푸른 벽려

 
 창랑정은 북강원 평강군 남면 정연리에 있다. 정연리는 한탄강 상류지역으로 동으로 회양군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이 되고, 남서로는 김화군과 철원군을 경계하고 있다.‘강원도지’에 따르면 '수석[水石]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찾아드는 시인묵객들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으며, 감사[監司] 황근중[黃謹中]이 퇴임하여 연양[燕養]하던 장소’라고 하였다.‘평강군지’에는 창랑정을‘선유정[仙遊亭]’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창랑정이라고 부르건 선유정이라고 부르던지, 그 의미는 일맥상통한다.
‘창랑’이란 말의 의미는 굴원의 '어부사'에서 취하여 왔을 것이다. 청렴결백하여 세상과 타협할 수 없어, 멱라수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굴원의 상황을 반영한다.‘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리라.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라고 한 어부의 말이 그것이다.


 風塵遠處盡仙扉[풍진원처진선비] 세상 먼지 닿지 않는 곳에 신선 집이 있으니,
 得地終應似此稀[득지종응사차희] 세상 살 동안 다시는 이런 곳 만나지 못하리라.
   檻外路楓嶽去[함외로영풍악거]정자 밖의 길은 여러 갈래 풍악산으로 이어지고,
 籬前水引玉屛歸[리전수인옥병귀] 울타리 앞으로 물이 흘러 옥병[玉屛]을 돌아간다.
 空洲日轉陰晴樹[공주일전음청수] 사람 없는 모래톱에 나무 그림자 해를 따라 옮겨가고,
 古壁雲沈 衣[고벽운침벽려의] 구름이 쉬어 가는 옛 벽엔 벽려옷을 입었어라.
 見說曲潭添一架[견설곡담첨일가] 굽이치는 여울엔 외줄기 다리가 있으며,
 定敎漁釣不爭磯[정교어조부쟁기] 머물며 낚시 한다해도 자리 다툴 일없구나.
 <登滄浪亭[등창랑정] 南有容[남유용]>
 
 시의 분위기는 선적[仙的] 경계[境界]에 놓여있다. 첫 구부터 속세의 먼지하나 닿을 수 없는 신선의 집이라고 언급하며, 인간세계와는 구별되는 세계임을 강조하였다. 정자 밖의 길은 금강산으로 이어지고, 울타리 앞 물은 옥 병풍처럼 둘러친 벼랑을 돌아 흘러가며, 구름도 쉬어 가는 옛 벽엔 사시사철 푸른 벽려가 둘러쳐져 있다. 외줄기 다리는 굽이치는 여울에 걸쳐있고, 이곳에는 세상사처럼 경쟁하며 싸워야할 일이 없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不爭’이다. 다툼이 없는 세상은 굴원도 꿈꿨을 것이다. 사람 없는 모래톱에 나무 그림자는 해를 따라 옮겨간다 함은 자연의 순환 법칙을 말하고, 구름도 쉬어 가는 정자의 벽면에 자란 벽려는 무한시간을 표상한다. 그러한 법칙에 따라 휴전선도 잘리어 하루 빨리 북녘 산하에 있는 창랑정에 오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북강원 이천 열운정
흘러가는 白雲… 속세 잊은 듯

 
 열운정은 북강원 이천군 이천면 객관 동쪽에 있었던 정자다. 열운이란 구름을 즐긴다는 말이니, 열운정은 구름을 즐길만한 정자를 뜻한다. 조선시대 김수온[金守溫 : 1409 ∼1481]이 이 정자를 사랑하여 이곳에 보름이나 머물며 기문[記文]을 지었다.
 기문에 ‘구름을 몹시도 좋아하여 동터오는 아침에서 해 넘어간 저녁때까지 이 정자에 있었다. 구름이 무심하건만 그 흘러감이 사람에게 다정한 마음을 주는 듯하다. 밤이면 계곡 골짜기에 자욱하고, 동이 터 오면 구름은 또한 열리고 흩어진다. 잠시 떨어졌다, 잠시 합쳐졌다, 혹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흘러간다. 길게 끌어서 뻗어나가면, 흰 비단이 산허리에 걸리고, 높이 우뚝하면 봉우리에 모자를 씌워 놓은 듯하다. [중략] 기상[氣像]의 천만변화를 산과 연못에서 불어낸 숨결이라고 한다면, 곧 사람의 호흡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소개하였다.
 
 亭中何所有[정중하소유] 정자 가운데 무엇이 있는가?
 嶺上多白雲[령상다백운] 고개 마루에 흰 구름 많구나.
 只可自怡悅[지가자이열] 다만 스스로 즐길만하니,
 難與俗人言[난여속인언] 세상 사람의 말로는 드러내기 어려워라.
 <悅雲亭記[열운정기], 金守溫[김수온]>

 
 이 시는 5언 절구의 형태다. 이 시를 평면적으로 읽어버리면 단순하여 묘미를 느끼기 어렵다. 짧은 시의 묘미는 설명하기보다, 암시하여 독자가 그 맛을 찾아내는데 있다.
 시의 첫 구에 질문을 던져놓았는데, 보기 드문 시의 전개방식이고 질문도 유치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둘째 구절인데, 정자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답으로 보기엔 엉뚱하다. 정자에 무엇이 있는가? 라는 질문은 정자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멋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같다. 그래서 고개 마루에 걸려있는 구름을 감상함이 최고의 멋이라는 말을 고개 마루에 흰 구름이 많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흰 구름은 깨끗함, 즉 속세에 물들지 않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셋째 구절에서 스스로 즐길만하다고 하면서, 넷째 구절에서는 세상 사람의 말로는 그 흰 구름을 감상하며 고고함을 지켜내는 그 모습을 드러내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백운[白雲], 자이열[自怡悅]’이다. 이는 속세의 속기[俗氣]를 모두 떨쳐내고 고고한 자태를 지켜나가니 세상 사람이 쉽게 범접할 경지가 아님을 말한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속기[俗氣]를 어느새 떨쳐버린 듯하다. 북한 땅 열운정의 흰 구름은 오늘도 동으로 금강산을 향해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김화읍 열향정[冽香亭]
눈앞에 仙界 속세 기운 정화

 
 열향정은 김화읍[金化邑] 서쪽 골짜기 안쪽에 있었다. ‘강원도지’에 따르면 ‘계곡 왼쪽에 샘이 있어 예전에 약수정[藥水亭]이라 불렀는데, 물맛이 청량[淸凉]하여 매번 그 물을 마시면 답답하게 막혔던 증세가 즉시 나아 사라지는 신묘함이 있다’고 하였다. 김기옥[金基玉]이 쓴 중수기[重修記]에 ‘화강군[花江郡 : 현 김화읍] 남쪽 수[數] 무[武 : 걸음] 쯤에 백전[栢田] 골이 있고 약천[藥泉] 수[水]가 있어 주야로 끊임없이 흘러나오니, 구름을 담아 바위를 씻기는 듯하고 구슬을 씻어 옥을 뿜어내는 듯하다. 가는 물줄기로 시작되었으나, 끝내 만곡[萬斛]의 맑은 여울을 이루어 사람이 그 물을 마시면 달고도 열렬[冽冽]하면서도 향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열향정 명칭의 연유임을 알 수 있다. 중수기[1927년 작으로 보임] 끝에 시를 옮겨본다.
 
 山下有泉泉上亭[산하유천천상정] 산 아래 샘이 있고 샘 위로 정자가 있어,
 捲簾空曠任看聽[권렴공광임간청] 주렴 걷자 탁 트인 시야에 물소리 들린다.
 四時風月通衿朗[사시풍월통금랑] 사철 풍월이 상쾌하게 옷깃에 스며들고,
 一谷烟霞滿袖靑[일곡연하만수청] 계곡 연하는 싱그럽게 소매에 물든다.
 眼際十洲仙可近[안제십주선가근] 눈앞에 펼쳐진 고을은 선계[仙界]라 할 만하며,
 心中千佛俗可醒[심중천불속가성] 마음속 천불은 속세에서 깨어있게 한다.
 巖間注硯焚香坐[암간주연분향좌] 바위 사이에 먹을 갈고 분향하여 앉아서,
 閒寫黃庭未了經[한사황정미료경]한가로이 황정경[黃庭經]을 쓰다 그만둔다.
 <열향정중수기[冽香亭重修記] 김기옥[金基玉]>
 
 열향정은 샘 위에 지어진 정자였다. 그곳에 앉으면 탁 트인 시야와 물소리를 만날 수 있다. 사시사철 풍월은 옷깃에 스며들고, 계곡의 연하는 소매에 물드는 아름다운 곳이다. 눈앞에 펼쳐진 고을은 바로 선계 그 자체이다. 동으로 천불산[千佛山] 천불암[千佛庵]이 있어 속세에 물든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준다. 그뿐인가, 매월당 김시습이 숨어살던 매월대가 옆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한 곳 바위틈에 향 사르고 먹을 갈며 신선세계의 경전인 황정경을 한가로이 쓰고 있으니, 선계가 따로 없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선가근[仙可近]’이다. 이 시에서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곳은 셋째 구와 넷째 구로 보인다. 사시사철 풍월과 연하가 옷에 스며들고 물든다고 한 표현은 세련미와 청아한 멋을 한껏 높였다.
‘열향’에서 열[冽]은 차가우면서 깨끗한 의미를 향[香]은 은은하게 퍼지는 샘물의 품격을 전하니, 이 정자 이름 하나만을 통해서도 김화가 얼마나 고고한 고장인지를 새삼 느낀다.

 

 춘천 고산대[孤山臺]
흐르는 북한강에 名利 던지니…

 
 흐르는 북한강에 명리[名利]를 던지니 고산대[孤山臺]는 우뚝하여라.
 고산대[孤山臺]는 춘천 상중도[上中島] 북쪽 끝 북한강과 소양강의 합류지점에 있다. 고산은 돌로 이루어진 돌출 봉우리로 그 위에 십여 명이 앉을 수 있다. 이곳에 앉으면 사방 30리는 족히 볼 수 있는데, 특히 장양강[북한강], 소양강, 우두산, 봉의산, 봉황대, 백로주[지금은 의암댐으로 볼 수 없다] 등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니 고산은 외롭다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전혀 외롭지 않은 훌륭한 전망대이다. 또한 ‘고산에 떨어지는 저녁 노을[孤山落照]’은 소양 8경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孤山煙浪泛扁舟[고산연랑범편주] 고산 안개 낀 물결에 조각배를 띄우니,
 壁層崖蕩客愁[초벽층애탕객수] 깎아지른 높이만큼 시름이 몰려오네.
 漁笛帶風聲[어적대풍성뇨뇨] 고깃배의 피리소리 바람에 실려 오고,
 江波涵日影悠悠[강파함일영유유] 강에 담긴 해 그림자 길어지는구나.
 錦鱗因餌牽絲出[금린인이견사출] 미끼를 문 물고기 낚싯줄에 달려나오며,
 彩鴨隨派得意浮[채압수파득의부] 물결 따라 채색 오리 마음껏 떠다닌다.
 從此盡抛名利事[종차진포명리사] 이곳에서 세상 명리[名利] 던져버리자,
 一竿明月占派頭[일간명월점파두] 밝은 달빛 한 줄기 강물에 퍼져가는구나.
 <金時習[김시습] 孤山[고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1435∼1493]은 춘천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다. 특히 춘천의 청평사 관련 시편을 많이 남겼으며, 강원도 관련 시편도 다수 남겨놓았다. 김시습은 세상의 부귀영달을 버리고, 숙부 수양대군에게 짓밟힌 어린 단종을 위해 의리[義理]를 다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매월당의 시에는 방달불기[放達不羈 : 자유로워 세상사에 얽매이기를 거부]의 시대정신이 묻어난다. 위의 시편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짙게 배어난다.


 고산은 올라보면 정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전망대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산‘대[臺]’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고산대 아래에 조각배를 띄우니 고산의 높이만큼 시름이 몰려온다며 세상사의 고민을 시인은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곳 주변 분위기를 어적성[漁笛聲 : 고깃배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 - 소양8경 중 매강어적[梅江漁笛]이 있다.]과 강파함일영[江波涵日影 : 물결에 비추는 해 그림자 - 소양8경 중 고산낙조[孤山落照]가 있다]에 담아내고 있다. 이어서 미끼에 욕심을 내다 낚싯바늘에 걸려 올라오는 물고기와 물결에 몸을 맡기고 마음껏 떠다니는 오리의 모습을 상대적 시각에서 그려냈다. 아울러 고산[孤山]에서 세상 명리 던져버리는 행위는 이중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고산은 홀로 서 있는 산이다. 홀로 서기 위해서 세상 명리를 던져버리는 행위는 물질문명과 황금만능주의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많은 것들을 소유할수록 자유로울 수 없다는 평범한 가르침을 보여준다. 그 위에 자연스레 비쳐오는 달빛은 강물을 타고 매월당의 마음을 오늘도 흘려보내고 있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포명리[抛名利]’이다

 

원주 숭화정[崇化亭]
치악산 자락 도심 속 신선세계

 
 도심 속 신선세계였을 숭화정[崇化亭]
 숭화정은 조선전기 민정[閔貞 : 문종 때 인물]이 원주목사로 있을 때 지어진 정자이다. 이숙함[민정의 친구]에게 민정이 숭화정 기문[記文]을 지어달라 부탁한 편지에 ‘원주는 관동지방의 수부[首府]이다.
 치악산의 한 자락이 서쪽으로 잇달아 백여 리를 달려와서 고을의 진산이 되었으니, 모든 읍의 공관[公館]과 창고와 영각[鈴閣]이 모두 이곳에 자리하였다. 진각[鎭閣]의 남쪽 한 모서리에 솟아오른 지역이 있으니 바둑판처럼 평평하면서 매우 시원스럽다.
 두 면은 소나무 전나무가 빽빽한 산을 등지고 한 면은 언덕과 들판이 넓게 펼쳐진 강과 닿아있다. 시원스레 시끌벅적한 세상과 떨어져 있어 노닐고 휴식할만하다. 이에 그 위에 정자를 짓고 관아의 업무가 끝난 뒤에 지팡이 짚고 가서 정자 위에 단정히 앉는다’라고 하였다.
 숭화란 말은 백성을 교화하여 덕을 숭상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민정은 ‘숭화정에서 시서예악[詩書禮樂]을 가르치고 우애충신[友愛忠信]의 길로 백성을 인도하고자’ 하였다.
 즉, 숭화정은 정자의 휴식 기능에 교화[敎化]의 기능이 보태진 공간이었다. 숭화정 관련 시편을 읽어보았을 때 정자의 기능이 후대로 내려올수록 휴식 기능이 강화되고 교화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문화와 교육 도시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원주와 숭화정 건립 목적은 잘 어울린다.
 
 塘蓮十丈愛新叢[당연십자애신총] 연못 연꽃 크기가 열 길로 새로 자란 떨기 사랑스러워,
 塵世遊人涉?風[진세유인섭랑풍] 티끌세상의 나그네 신선 사는 곳으로 건너드네.
 瑤海蒼茫飛閣外[요해창망비각외] 요해[搖海]는 아득하나 높이 솟은 정자 밖이요,
 仙山少塘中[선산표묘소당중] 선산[仙山]은 아련하나 작은 연못 속이라.
 淸遊太守登臨暇[청유태수등임가] 맑은 풍모의 태수는 짬을 내어 정자에 올라,
 乘與騷人醉醒同[승여소인취성동] 시인과 취하고 깨기를 같이하네.
 靑鳥一雙今不至[청조일쌍금부지] 파랑새 한 쌍 지금도 오지 않으니,
 三宵圓夢十洲通[삼소원몽십주통] 삼일 밤 선경[仙境]을 날아다니리라 풀이하네.
 <숭화정[崇化亭] 장시성[張時聖:생몰 미상]>

 

 연못에 새로 자란 연꽃이 사랑스럽고 그곳에 티끌세상의 나그네[화자]가 들어온다.
 그곳은 요해[瑤海 : 신선이 사는 곳]이면서 선산[仙山]이다. 나그네는 그곳 태수와 친구인 모양이다. 함께 올라 함께 술에 취하고 함께 깬다고 하였다. 서왕모의 소식을 전하는 파랑새 한 쌍이 지금도 오지 않는 까닭은 삼일 밤이나 선경[仙境]을 구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였다.
 즉 숭화정이 선경이니 당연히 파랑새가 와야 하는데 오지 않는다고 말하여, 숭화정이 신선세계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취성동[醉醒同]’이다.
 숭화정은 지금의 원주천과 접하여 있었을 터인데, 아쉽게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며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다만 많은 시인묵객이 지금은 도심 속이 된 이곳에 올라 속세의 기운을 씻고, 신선이 된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다. 도심 속 신선세계였을 숭화정에 오를 수 있는 날이 다시 오기를 바라고 바란다.

 

강릉 한송정[寒松亭]
일출 장관… 석양 종소리 묻어나는 仙境

 
 한송정은 강릉의 하시동리에 있던 정자이다. 경포8경 중 녹두일출[녹두정에서 바라보는 일출 : 녹두정은 한송정을 말한다], 한송모종[한송사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 한송사와 한송정은 같은 곳에 있었다]과 연관 있는 정자이기도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쪽으로 큰 바다와 접했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정자 곁에 차샘[茶泉], 석조[石 :돌아궁이], 돌절구[石臼] 가 있으며, 술랑선인[述郞仙人]들이 놀던 곳’이라 하였다.
 
 孤亭枕海學蓬萊[고정침해학봉래] 홀로 선 정자 바다에 빗겨 봉래산 같으니,
 境淨不許栖片埃[경정불허서편애] 깨끗한 지경엔 먼지 하나 들어오질 않으며,
 滿徑白沙步步雪[만경백사보보설] 흰모래로 가득한 길, 걸음마다 눈을 밟는 듯
 松聲淸瑤瓊[송성청패요경괴] 옥구슬 흔들리듯, 솔바람 소리 맑기만 하여라.
 云是四仙縱賞地[운시사선종상지] 이곳이 네 신선 거닐며 차를 마시던 곳,
 至今遺迹眞奇哉[지금유적진기재] 지금까지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구나.
 酒臺傾沒碧草[주대의경몰벽초] 술 마시던 대는 기울어 푸른 풀섶에 잠겼고,
 茶今落荒蒼苔[다조금락황창태] 차 끓이던 부엌 허물어져 푸른 이끼에 덮였어라.
 雙岸野棠空[쌍안야당공정두] 양쪽 언덕 해당화는 부질없이 늘어서서,
 向誰凋謝向誰開[향수조사향수개] 누굴 위해 지고 누굴 위해 피어나는가?
 我今探歷放幽興[아금탐역방유흥] 내 지금 좋은 경치 찾아 마음껏 흥을 쏟아내며,
 終日爛傾三雅盃[종일난경삼아배] 종일토록 쉴새없이 술잔을 기울이네.
 坐知機盡已忘物[좌지기진이망물] 앉아서 세상사 이치를 다 알아 물아[物我]가 하나되니,
 鷗鳥傍人飛下來[구조방인비하래] 갈매기 사람 곁으로 날아 내리네.
 <金克己[김극기] 寒松亭[한송정]>
 
 신선이 살만한 곳이라 봉래산 같고 이곳은 먼지 하나 받아들이지 않는 청정지역이다. 흰모래를 밟고 있노라면 눈길을 걷는 듯하고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옥구슬 소리만큼이나 아름답다. 신선이 거닐며 차를 마셨으며 그 흔적이 남아있으니 참으로 기이하다.
 술을 마시던 대는 기울어 무성한 풀에 묻히고 차 끓이던 부엌은 허물어져 이끼가 덮였다. 양쪽 언덕에 해당화는 부질없이 늘어서서, 보는 이 있건 없건 피었다간 지고 다시 피어난다. 이것이 인생사 아닐까? 시인은 이 좋은 경치를 만나 마음껏 흥을 쏟아내고, 종일토록 술잔을 기울인다. 어느새 세상사 이치를 다 알 것만 같다. 그 순간 사물과 내가 하나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로 몰입한다. 어느 사이 갈매기와 시인은 하나이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知機盡已忘物[지기진이망물]’이다.
 
양양 관란정[觀瀾亭]
태백산맥 병풍·동해 풍광 일품
 
 양양의 관란정은 지금의 동산해수욕장과 죽도해수욕장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관란정은 아마도 동산현[조선시대 양양의 속현]의 관루[官樓]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정자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바다에 있는 죽도가 보였으며, 정자 너머 서쪽을 바라보면 태백산맥의 웅장한 자태가 드러났다.
 탁 트인 바다와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태백산맥의 자태를 동시에 감상하기 아주 좋은 위치이다.
 정자의 이름이 ‘물결을 구경한다’는 의미의 관란정[觀瀾亭]이니, 정자의 일차적 기능은 끝없이 펼쳐진 동해의 파도를 감상함에 있다.
 강원도는 산, 강, 바다의 아름다움을 겸한 고장이다. 자연이 아름다우니 곳곳에 정자를 세우고 한 수의 시로 시름을 달래기도 하고, 한 잔 술로 멋들어진 풍류를 일으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특히 동해의 해안선을 수놓은 정자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그 이름 석 자만을 문헌에 남기고, 글로써만 그 존재를 알리는 정자가 참으로 많다. 양양의 관란정 또한 그 하나이다.


 亭前茅屋掩紫門[정전모옥엄자문] 정자 앞 초가집 사립문이 잠겼는데,
 樹樹梅花雪裏村[수수매화설리촌] 나무마다 매화 피니 눈 내리는 마을이라.
 四面蒼松烟暗淡[사면창송연암담] 사방 푸른 소나무에 자욱한 안개 피어나며,
 數聲柔櫓月黃昏[수성유로월황혼] 노 젓는 소리에 달은 지려하네.
 湖光鏡淨元無累[호광경정원무누] 호수는 거울처럼 깨끗하여 한 점 티끌 없으며,
 海浪雲奔却欲呑[해랑운분각욕탄] 파도는 구름을 날리어 삼킬 듯하구나.
 惟有靑山瞻突兀[유유청산첨돌올] 청산이 있어 우뚝한 모습 바라보니,
 古今蒼翠獨能尊[고금창위독능존] 예나 지금이나 푸른 모습은 너 뿐이로구나.
 <강회백[姜淮伯], 觀瀾亭>
 
 양양의 관란정이 참으로 아름다운 정자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 매화나무가 온통 꽃을 피운 마을은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보다도 환상적이다.
 소나무가 신선세계를 암시하듯 바다 안개 사이로 푸른 모습을 보이니 또한 장관이다. 이어 노 젓는 소리에 달은 바다 속으로 떨어지니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바다로 흘러드는 호수[미상]는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하기만 한데, 바다의 파도는 얼마나 거센지 구름을 삼켜버릴 기세다. 그 거대한 바다의 기상을 바라보며 병풍처럼 둘러친 청산을 마주하니 더없이 든든하다.
 이 시는 정[靜 : 시각] - 미동미향[微動微香 : 후각] - 창담[蒼淡 : 시각] - 노성[櫓聲 : 청각] - 경정[鏡淨 : 시각] - 분탄[奔呑 : 시각] - 돌올[突兀 : 시각] - 창취[蒼翠 : 시각]로 끊임없이 오각을 자극한다.
 정[靜]과 동[動]이 5구와 6구에 안배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지막 7구와 8구에서는 고금청산[古今靑山]의 변함없는 모습을 담아 안정적 마무리를 하였다.

 

 인제 봉미정[鳳眉亭]
봉황의 눈썹 위에 정자 짓다
 

 대동여지도에 봉비산[鳳飛山]이란 이름이 인제 남쪽에 보인다. 지금의 합강리, 남전리, 원대리를 삼각형으로 이어보았을 때 가운데에 산이 위치한다. 강원도지에 따르면 봉미정은 비봉산[飛鳳山] 아래에 있다고 하였다. 비봉산은 아마도 대동여지도의 봉비산과 동일한 산일 것이다. 어느 쪽에 착오가 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강원도지의 기록에 신빙성을 두는 것이 옳을듯하다.
 도내에는 봉황 관련 지명들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이는 강원도의 자연환경이 그만큼 신비스럽고 아름다움을 반증한다. 봉미정[鳳眉亭]이란 이름은 비봉산의 눈[眉 : 눈썹]에 해당하는 좋은 위치에 있었음을 알려주는데, 정자 명칭과 자연을 아우르는 조상들의 감식력[鑑識力]은 참으로 놀랍다.
 
 昔我先君築此亭[석아선군축차정] 예전에 부친께서 이 정자를 지으니,
 嘉名肇錫擬長停[가명조석의장정] 아름다운 이름 오랜 기간 머물며 지었으리.
 楓葉仲秋新月白[풍엽중추신월백] 붉게 물든 단풍잎에 새 달은 밝건만,
 寒江落日暮烟靑[한강락일모연청] 해지는 찬 강에 저녁 연기 푸르러라.
 從古文章無不醉[종고문장무불취] 옛 문장 읽노라면 취하지 않을 수 없어도,
 當今賢達有誰醒[당금현달유수성] 지금 현달함에 깨어있는 자 누구인가?
 登臨亢羹墻慕[등임항근쟁장모] 정자에 올라보니 옛사람이 그리워,
 彷彿洋洋陟降靈[방불양양척강령] 이리저리 배회하니 내 곁에 머무시네.
 <鳳眉亭[봉미정], 李益奎[이익규]>
 
 봉미정은 강원도지에 따르면 진사 이시영[李時榮 : 미상]이란 분이 지은 정자이다. 시를 지은 이익규라는 분은 그의 아들이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지어놓은 정자에 올라 감회를 읊은 것이 이 시다.
 3, 4구의 색감과 정동[靜動]의 대조, 5,6구의 글자의 대구 등이 절묘하다. 단풍잎의 붉음과 가을달의 밝음[흰색], 석양의 붉음과 저녁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의 색감[靑]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고문장[古文章]과 금현달[今賢達]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옛 사람은 정도[正道]에 취하는 반면, 지금 사람이 부귀공명을 위해 두 눈을 부릅뜬 모습을 잘 비교해 놓았다.
 시인은 아버지의 모습이 그리워 정자를 떠나지 못하고 배회한다. 이 장면은 조선시대 후기 최대의 문장가였던 연암 박지원의 시['憶先兄']를 떠올리게 한다. 박지원은 '매번 돌아가신 아버님이 그리우면 우리 형 보았었지'라고 하였는데, 이점은 정자에서 시인이 아버지의 향취를 찾아내 일체감을 느끼는 행위와 일치한다. 시인은 과거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일체감을 느꼈을 것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지금도 아버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는 말이 귓전에 맴돈다.
 
춘천 문배마을 지명유래
문배 나무 많아… 벼랑위 거룻배 지형

 
 춘천시 남산면에 ‘문배’라는 독특한 마을이름과 구곡폭포가 있다. 구곡폭포[九曲瀑布]의 이름은 언제 어떻게 붙여진 이름인지 모른다. 다만 폭포로 가기 위해서는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많이 지나가야 했기에 많다는 의미로 아홉이란 숫자를 딴 것이라 여겨진다.
 문배마을은 구곡폭포 우측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갈 수 있거나, 검봉산을 등산해서 갈 수 있기도 하며 임도를 이용해 차량으로도 갈 수 있다.
 이 마을에 도착해 보면 참으로 이런 벼랑 위에 이러한 펑퍼짐한 지형도 있구나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그리고 문배라는 독특한 마을 이름이 사람으로 하여금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이 마을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문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졌다는 설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말을 들으면 아마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금새 문배주를 떠올릴 법하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이곳에서 빚은 동동주는 집집마다 다른 맛을 내기도 한다. 또한 이곳 지형이 전체적으로 거룻배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마을에서는 관정을 설치 않고 구곡폭포로 흘러드는 물을 식수로 이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구곡폭포의 이름과 문배마을의 이름에 대해서 문헌으로 증명된 적은 없다. 여기에 많은 의문을 지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옛 문헌을 읽다가 실마리가 될만한 내용을 발견하였다.
 이 문헌에 근거하여 구곡폭포는 문폭[文瀑]이란 이름으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 문헌은 을미년[1896년] 의병이 일어났을 때 춘천 의병의 선봉장이었던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 : 1852~1930]의 습재집[習齋集]이다.
 이 문집의 ‘문폭유거[文瀑幽居]’ ‘문폭잡영[文瀑雜詠]’이라는 시의 제목에 문폭이란 지명이 보인다. 특히 앞 시에서 문배마을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시를 분석하여 보면 문배마을과 구곡폭포와의 관련성과 지명의 형성을 알 수 있다. 구곡폭포와 문배마을의 지명유래를 담은 시를 두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먼저 문폭유거[文瀑幽居] 중에서 문배마을과 문폭관련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此地有文瀑[차지유문폭] 이 곳에 문폭이 있으니,
 窈窕何其幽[요조하기유] 깊어서 은거하기 매우 좋구나.
 洞裏晴雷殷[동리청뢰은] 골 안은 맑은 날도 천둥치며[폭포소리],
 日下丹霞浮[일하단하부] 물보라는 햇빛으로 오색 무지개를 만드네.
 四時訪風景[사시방풍경] 사시사철 풍경을 찾아다니며,
 意難收[상양의난수] 거닐면 마음이 설레고,
 逐流到窮源[축류도궁원] 계곡 물 따라 끝까지 가보면,
 有村開平疇[유촌개평주] 마을이 평지에 펼쳐진다.
 泉甘而土肥[천감이토비] 샘물은 달고 토지는 비옥하며,
 山環似巨舟[산환사거주] 산은 거룻배처럼 둥글게 둘러쳤다

 

   구곡폭포의 앞선 이름이 문폭[文瀑]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러면 문폭[文瀑]의 의미는 무엇일까? '문폭'은 마을을 지칭하는 지명이면서 특정 폭포[현 구곡폭포]를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하다. 문[文]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글월' '글자' '문사' '덕' '글재주' '문치' '글 짓다' '무늬' '현상' '문물' '법령조문' '아름답다' '화려하다' '꾸미다' 등으로 참으로 많다. '문폭'에서 문[文]은 '자연계와 인간 사회에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이란 의미로 썼다고 판단된다.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 선생은 '문폭유거[文瀑幽居]' 시편에서 '문폭'에서의 일상사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마을의 풍속이나 일상사, 가정내의 행동거지, 안분지족[安分知足] 등의 내용 등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 사회에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을 말하려 한 것이다. 여기에 다양한 자연 현상을 상징하는 폭포[瀑]와 연계시켜, 자연세계와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결합을 추구하였다.
 즉, 자연세계와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려 했던 생각이 '문폭'이란 지명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 '문폭'의 뒤편이란 의미에서 나온 '문배[文背:등은 북쪽이라는 의미와 뒤편이란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였다]'라는 마을은, 습재 선생이 살고자 했던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습재 선생은 '문폭유거[文瀑幽居]' 시편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早晩結小廬[조만결소려] 조만간 작은 집을 지으면,
 시수미록유:계절마다 사슴이 울고,
 松亭追凉風[송정추량풍] 소나무 정자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苽田引淸溝[고전인청구] 오이 밭엔 맑은 도랑물이 흐른다.
 晩對石壁矗[만대석벽촉] 저녁나절 깎아지른 석벽을 마주하고,

 朝臨雲海悠[조임운해유] 아침이면 넘실대는 운해에 나아가며,
 時誦淵明辭[시송연명사]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조리며,
 盤桓於此區[반환어차구] 이 곳을 거닐어본다.

 

 도연명은 세상의 부귀공명을 버리고 자연에 돌아가 안분지족하며 살다간 대표적 은자[隱者]다. 청정[淸淨]과 고절[孤節], 세상의 더러운 기운을 씻어낸 자연 그대로인 문배에서 도연명처럼 귀거래사를 읊조리며 거닐어보는 행복을 누렸던 150여 년 전의 습재 선생의 숨결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양양의 의상대[義湘臺]
일반인 범접못한 坐禪·소요처

 
 양양 의상대는 낙산사[洛山寺]에 딸려 있는 누대이다. 현산지[峴山誌 : 현산은 양양의 옛 이름]에 따르면, 낙산사는 '신라 신승[神僧] 의상이 창건하였는데, 그 안에 이화정[梨花亭], 관음굴[觀音窟], 의상대[義湘坮]가 있다’고 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의상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친히 보고자, 바다 위 돌 위에 자리를 펴고 정성과 성심을 다하여 이칠일[二七日]하였다. 그러나 관음보살을 볼 수 없어 곧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러자 동해의 용이 의상을 구하여 돌 위로 나왔고 관음보살이 팔을 내밀어 굴[지금의 관음굴] 가운데에서 수정염주를 주었다. 그리고 ‘나의 몸은 친히 볼 수 없다. 다만 굴을 따라 올라가 대나무 두 그루 솟아난 곳이 관음보살의 정수리다’라고 하였다. 이에 불상을 설치하여 봉안한 곳이 지금의 낙산사이다.
 관음굴이 의상대사가 신명을 받쳐 관음보살의 현현한 모습을 보려고 한 장소라면, 의상대는 의상이 좌선[坐禪]과 소요[逍遙]하던 장소이다. 의상대의 현 건물은 1925년 지어졌는데, 이전에 건물이 없었던 것은 그곳이 돌출한 벼랑의 형태를 이미 갖추고 있기 때문에 굳이 정자가 필요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낙산사를 창건할 때 의상이 이곳에 머물면서 좌선하였으며, 원래 암자가 있었으나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강원도지에 따르면, 의상의 소요처라 했다.
 
 西風吹雨過前山[서풍취우과전산] 서풍이 비를 몰아 앞산에 뿌리니,
 洞樹秋光錦葉斑[동수추광금엽반] 마을 나무는 알록달록 가을빛을 담아낸다.
 宿鳥扱林岩路暝[숙조급림암로명] 새가 숲에 깃들이니 바윗길 어두워지고,
 一僧踏白雲還[일공승밥백운환]지팡이 잡은 스님은 흰 구름 밟으며 돌아온다.
  <정식[鄭 ],의상대[義湘臺]>
 
 의상대는 지금처럼 차로 손쉽게 도달할 수 있었던 곳은 아닌 듯하다. 승려 수초[守初 : 1590~ 1668]에 시에 ‘벼랑 위에는 고목이 섰고, 아득히 높은 대는 허공을 찌르고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그런 곳으로 선경[仙境]과 다를 바 없다. 시인이 의상대에 이르렀을 때, 서풍이 비를 몰아 앞산에 뿌리니 마을에 있는 나무들은 가을비에 알록달록 가을빛을 나뭇잎에 담아낸다. 투명한 가을 햇살에 물기를 머금고 반짝이는 가을단풍의 멋을 수채화처럼 그려냈다. 그리고 어느새 시나브로 새들은 제 집을 찾아 깃들이고 험한 길은 어두워진다. 그러나 지팡이 잡은 스님은 경쾌하게 흰 구름 사이로 돌아온다. 험한 바윗길은 시인이 걸어야할 인생 길을 상징한다면, 지팡이 잡은 노승은 어느새 그 인생 길을 달관하여 경쾌하게 거닐 뿐이다.
절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날이 저물면 제 집을 찾아드는 새에 비하여 시인의 인생 길은 끝없는 험한 바윗길이다. 지팡이를 짚었으니 몸이 노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승은 흰 구름 밟으며 돌아온다고 하였으니, 구름에 달 가듯 한다는 경지가 아니고 그 무엇이랴!

 

동해시 애연정
'조상에 대한 精誠' 담긴 정자

 
  애연정은 동해시 송정동에 있는 정자로 남양 홍씨 묘사[廟祠]인 영사재[永思齋] 옆에 있다. 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따르면, 이곳은 최응현[崔應賢]이 살던 옛 집터로 1638년 홍응부[洪應溥]가 이곳에 집을 짓고 송라정[松蘿亭]이라 하였다. 그 뒤 1861년에 후손 홍병각[洪秉珏]과 홍연섭[洪然燮] 등이 건물을 세덕사[世德祠]로 고치고 사당으로 제정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별묘[別廟]로 쓰다가 개축하면서 애연정으로 개명[改名]하였다. 1907년에 중수되었으며, 후손 홍기섭[洪驥燮]이 중수기를 쓰고 이희수[李喜秀]가 서액을 썼으며 이계필[李啓泌]이 애연기然記]를 썼다고 한다.
 
 洞花如夢幾經春[동화여몽기경춘] 꽃 핀 마을에서 몇 해가 꿈 같건만,
 蕭灑孤亭立澗濱[소쇄고정립간빈] 맑고 깨끗한 정자 홀로 물가에 섰구나.
 彩檻層廻雲氣積[채함층회운기적] 채색 기둥 층층이 구름이 쌓여있고,
 華楣高出月痕新[화미고출월흔신] 화사한 서까래 높이 솟아 걸린 달이 새롭구나.
 當年俎豆周旋地[당년조두주선지] 제기[祭器]를 갖춰 제사할만한 이곳은,
 此日漁樵問答人[차일어초문답인] 어부와 나무꾼만이 말벗이 되어준다.
 一理循環終有復[일리순환종유복] 한결같은 이치는 순환하여 반복하며,
 佇看文物更彬彬[저간문물갱빈빈] 우두커니 세상을 바라보니 다시금 찬란하다.
 <趙慶夏[조경하], 然亭[애연정]>
 
 ‘애연 然]’이란 말은 예기[禮記] 「제의[祭義]」편에 보인다. 이는 마음을 다하여 제사를 드리면 마치 옛사람의 모습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말에서 나왔다. 즉, 조상을 향한 정성스런 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애연정’은 휴식공간이라는 정자의 일반적 기능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조상에 대한 정성스런 마음을 상징하는 이곳에서 시인은 지난날을 돌아보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본다.
 계절마다 꽃이 피는 이곳[동해]의 생활은 꿈만 같은데, 세수하고 머리를 곱게 빗은 듯한 맑은 기운의 정자는 물가에 외롭게 서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윽고 조상에 대한 정성스런 마음을 다한다는 애연정에 올라보니, 가깝게는 부모로부터 멀리는 조상에 이르기까지 그리는 마음이 시인에게 새록새록 하다. 그래서 시인은 애연정의 기둥과 서까래에 조상에 대한 정성이 층층이 구름 되어 쌓이고 달빛처럼 새롭다고 하였다. 시인은 애연정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제사할만하며 세상의 부귀[富貴]나 명리[名利]와는 거리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순진무구[純眞無垢]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어부와 나무꾼을 그저 친구하며 지내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곳에서 다시금 생각하니 세상사의 이치는 순환하고 반복하며, 정성스런 마음을 다하여 조상을 모시려 할 때 세상은 찬란한 곳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까지 보여주었다.  
 9월에는 조상을 생각하는 우리 고유의 명절 한가위가 있다. 정자에 배인 조상의 숨결을 느끼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잠시나마 진실한 마음을 충전하여 실천한다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조상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화천 송풍정[松風亭]
자연소리 귀기울여 세상번뇌 잊고
 

 송풍정은 화천군 사내면 곡운계곡[현 삼일계곡]에 있었던 작은 정자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송풍정에 대해 발문[跋文]을 남겨놓고 있는데, 발문에 따르면 ‘화음[華陰] 암동[巖洞]의 높은 곳에 송풍정[松風亭]이 있으니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장쾌하구나! 허공에 가설되어 있는 이 정자만큼 볼만한 것이 없구나. 이 곳은 김수증[金壽增] 선생이 감상하고 기뻐 즐겨하던 곳이나 불민한 나는 영원토록 회한만을 품는구나. 지금부터 이곳에 가서 날마다 정자를 쓸고 닦고 하면서 그 맑은 자취를 밟아보며 그 풍모를 조금이나마 이어보고자 한다.’ 라고 하였다.
 삼연 김창흡은 곡운 김수증의 조카로 곡운계곡에 수차례 머물면서 관련시편을 상당수 창작하였다. 송풍정은 부지암[不知菴], 자연실[自然室], 청몽루[淸夢樓], 무명와[無名窩], 유지당[有知堂], 삼일정[三一亭]과 함께 곡운계곡에 있었다. 김창흡의 다른 시편에 따르면 ‘하도낙서’가 그려져 있는 인문석[人文石]을 송풍정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송풍정은 아마도 지금의 삼일정 앞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계곡의 모양이 예전 그대로라면 삼일정 앞[남쪽방향]에 높게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는 큰 바위가 송풍정의 주춧돌일 것이다.
 
 有石天然礎[유석천연초] 주춧돌은 자연 그대로여서,
 剛方臥澗中[강방와간중] 시냇물 사이에 힘차게 버티고 섰어라
 勘當米老拜[감당미노배] 미불 노인에게 절을 받을만하며,
 不費魯般工[불비노반공] 노반[魯般]의 재주도 필요치 않구나.
 越壑遙聽叱[월학요청질] 계곡에 들어서서 세상의 시끄러움 멀리하고자,
 踰尋巧架空[유심교가공] 교묘히 허공에 걸친 정자로 찾아든다,
 憑軒衆妙集[빙헌중묘집] 난간에 기대니 묘함이 모여들고,
 滿耳卽松風[만이즉송풍] 솔바람 귀에 가득 곧바로 들려오는구나.
 <김창흡[金昌翕], 송풍정[松風亭]>
 
 송풍정의 주춧돌은 어떠한 물리적 힘을 가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이다. 그 자연석 위에 송풍정이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그 아래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그 자연석이 얼마나 대단한지, 괴석을 만나면 그 돌에 절을 하며 좋아하였다는 미불이란 인물이 절을 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무엇이든지 잘 만들었던 노반이란 사람의 기술도 필요치 않을 정도로 잘 다듬어져 있다. 송풍정의 완벽한 자연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을 벗어나 계곡으로 들어서자 세상의 시끄러운 일에서 벗어나며, 그곳에 허공에 교묘하게 걸쳐 있는 정자가 있으니 그곳이 송풍정이다. 이 송풍정 난간에 조용히 기대어 묘한 경지로 몰입하니, 곧바로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만이 귀에 가득하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마지막 구절 ‘순간 귀에 가득한 솔바람’이다. 자연은 말하지 않으면서 위대하다. 조용히 들려주는 그 위대한 소리를 시인은 귀에 가득 채우고 있다.
 
북강원 통천 시중대[侍中臺]
빼어난 勝景에 용왕도 시기

 
 바다와 소나무 숲[松林], 일곱 개 섬.
 시중대는 북강원 통천군 학일면에 있는 정자였다. 통천군 학일면은 조선시대 흡곡현으로 패천리가 중심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시중정[侍中亭]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북쪽 7리쯤에 긴 산등성이 뻗어나가다가 동쪽으로 서렸는데 3면이 모두 큰 호수이다. 호수 물이 넘치고, 물가가 돌고 굽으며 밖으로는 큰 바다가 둘렀으며 작은 섬이 바다 가운데 들어선 것이 일곱이다. 천도[穿島], 묘도[卯島], 우도[芋島], 승도[僧島], 석도[石島], 송도[松島], 백도[白島]라고 부른다. 호수와 바다 사이에 푸른 소나무들이 길을 끼고 있는 곳에 대[臺]를 예전에는 칠보[七寶]라고 이름하였다. 세조 때에 순찰사 한명회[韓明澮]가 여기에 올라 구경할 때에 마침 우의정으로 임명한다는 왕명이 이르렀기 때문에 시중정으로 고쳐서 기쁜 뜻을 표시하였다. 경치가 경포대와 서로 갑을을 다툰다’고 기록하였다. 지금도 이 일곱 섬과 예전의 누대 이름과 관련하여 칠보리가 있다. 일곱 섬 중에 천도[穿島]는 기이하고도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천도에서 총석정이 보이며 다시 총석정에서 금란굴이 보인다하니, 그 경로를 따라 배를 띄워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龍公應妬勝筵開[용공응투승연개] 용왕님도 잔칫상 벌려보고 싶었던가,
 風雨無端過海來[풍우무단과해래] 비바람 거침없이 바다에서 달려든다.
 狼藉盃盤人去後[낭자배반인거후] 사람 떠난 술자리만 어지럽고,
 一天明月照空臺[일천명월조공대] 둥근 달만 휘영청 시중대를 비춘다.
 百丈松圍千臺[백장송위천인대] 백 길 높이 소나무 울타리에 천 길의 누대,
 臺前銀海接蓬萊[대전은해접봉래] 누대 앞 은빛 바다 봉래[蓬萊]와 닿았구나.
 長風一陣起鵬際[장풍일진기붕제] 한 줄기 바람으로 붕새를 일으킬 때,
 使我悠然心目開[사아유연심목개] 유연히 나의 마음과 눈을 열어주는구나.
 <林亨秀[임형수 : 1504 - 1547], 卽事[즉사]>
 
 강원도지에 따르면 위의 두 편의 시가 모두 금호[錦湖] 임형수의 작품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의 문집 금호유고에는 앞 편만이 <즉사[卽事]>란 제목으로 실려있다. 시의 기풍이나 기상으로 보았을 때 뒤편도 금호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첫 수에서 시중대는 용왕님[龍公]도 잔칫상을 벌려보고 싶을 정도라고 하여 그 승경[勝景]의 빼어남을 말하고, 한편으론 용왕이 시기하여 수시로 비바람을 보낸다고 하여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드러냈다. 이어 술자리를 파하고 사람들이 떠나자 휘영청 밝은 달이 말없이 시중대를 비쳐준다고 하여, 사람의 유한성과 자연의 무한성을 대조시켜 시적 감흥을 극대화하였다. 둘째 수에서는 백 길 높이만큼 자란 소나무 울타리에 천 길 높이의 누대가 있다고 하여, 그 누대에서의 눈맛이 어떠할지를 자연스레 강조하였다. 그곳에 올라 보니 은빛 바다는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산과 닿아있다고 하여 신선세계로 통하는 통로임을 암시하였다. 그리고 한 줄기 바람으로 우주를 소요유[逍遙遊]할 붕새를 깨워 일으킬 때, 시인은 우주를 보려고 유연히 마음과 눈을 연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장쾌한 세계관이며 우주관인가! 장자[莊子]의 호방함과 장쾌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에 무슨 사족[蛇足]이 필요하랴!

 

춘천 우두정[牛頭亭]
貊國 숨결 간직한 천혜 절경

 
  우두정은 춘천시 우두산[牛頭山]에 있었던 정자이다. 우두산은 춘천시내 방향에서 소양2교를 건너 소양강댐 방향으로 약 1.2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이 우두산에 오르면 동쪽으로 소양강을 이루고 있는 여울을 굽어볼 수 있고, 남쪽으로 우두벌[일명 학들[鶴野]]이 코앞에 마주하고 있다.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이 동남쪽 사이를 비집고 멀리 바라보이며, 서쪽으로 지금의 상중도 끝에 있는 고산대[孤山臺]가 보였으며[현재:아파트로 인해 고산대는 볼 수 없다] 그 뒤로 화악산이 아득하게 서있다. 소양8경의 하나가 우두모연[牛頭暮煙 : 우두벌의 저녁 연기]이었으나 지금은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뿐이다. 북쪽으로 맥국의 터전이었을 신북읍이 드넓게 펼쳐지고 있으며, 마적산 뒤로 소양강댐의 모습이 가물가물하게 들어온다. 이렇게 동서남북 천지사방으로 조망하기 좋은 곳이었으니 정자가 없을 수 없다.
 우두정은 인조 임금 때 청송 심광수[沈光洙 : 1600∼1665]란 분이 집을 짓고 살면서 정사[精舍 : 정신을 수양하기 위해 세운 집]를 엮고 ‘졸락정사[拙樂精舍]’라고 한데서 출발한다. ‘졸락[拙樂]’이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여 졸렬하게 보이는 즐거움이란 뜻이니 그 주인의 소박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그 졸박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기 이를 데 없으나, 춘천의 관아문인 조양루[朝陽樓]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凌虛咫尺有牛頭[능허지척유우두] 벼랑 지척에 우두벌이 있으며,
 樹老江深千百秋[수로강심천백추] 천백의 세월 간직한 노목과 깊은 강.
 濊貊江山入兩眼[예맥강산입량안] 예맥의 산하가 두 눈에 들어오건만,
 寒霜蘆荻 聲愁[한상노적안성수] 찬 서리맞은 갈대에 기러기소리 슬프구나.
  <李綏祿[이수록 : 1564∼1620], 牛頭亭>
 
 위의 시는 동고[東皐] 이수록[李綏祿]이란 분이 우두산에 올랐다가 지은 시로 보인다. 정확한 제목은 확인할 수 없고 강원도지 우두정[牛頭亭] 조에 실려 그 제목을 우두정으로 하였다. 심광수란 분이 졸락정사를 지은 때가 1637년경이니, 이수록이란 분이 우두산에 올랐을 때 졸락정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는 우두산에 올랐을 때 무엇보다 시야에 들어오는 우두벌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넓은 우두벌은 춘천사람의 삶의 근간을 지탱하는 식량창고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우두벌에 물을 공급했을 소양강은 그 깊이로 세월을 간직하고, 비바람 눈보라 속에 나무들은 늙어감으로 세월을 지켜냈을 것이다. 그러한 나무와 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무한한 자연의 시간 속에서 예맥의 역사 공간이 시야에 들어온다. 시야에 들어온다는 말은 역사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한한 자연과 유한하지만 유구한 역사라는 거대한 공간에 서있는 자신을 자각했을 때 시인은 왜소해진다. 그렇게 왜소해진 인간은 갈대와 다를 것이 없다. 찬 서리맞은 갈대는 역사의 거대한 공간을 자각했을 유한한 인간이 느껴야하는 숙명을 상징한다.


 차가운 서리로 인해 삶을 마감하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갈대와 인간은 일치한다. 그리고 갈대 속에 살아가는 기러기 소리는 슬프기만 하다. 기러기는 철새다. 삶을 다한 갈대의 숲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 울음소리가 인간에게는 슬프게 다가서는 것이다.
 소양강가에 지금은 갈대를 찾아보기 힘들어 아쉽다. 거대한 자연 앞에 유한한 생명의 존재임을 자각할 때 인간은 겸손해진다. 인간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고 한 파스칼의 이야기를 거들먹거리지 않아도 시 한편을 통해 반 천년 전 사람과 교감할 수 있다.
 
 '군자의 기상' 가득한 비경
 
 강릉에 국보로는 객사문과 한송사지 석불좌상이 있다. 한송사지 석불좌상은 국립춘천박물관에 자리하고 있고 객사문은 강릉시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객사[임영관 臨瀛館]는 고려 태조 때에 지어진 것이었으니, 그 유서로 말하자면 천 년 이상의 고건축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29년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초등학교 터로 헐리면서 그 원형을 잃어버렸다. 다만 그 객사를 지키던 문만이 남아 있으니 이것이 객사문이다. 그 객사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누각이 운금루[雲錦樓]다.
 서거정의 기문에 따르면 운금루는 객사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1447년 버려져 못 쓰게 된 누각을 이신효[李愼孝]라는 분이 고을의 원으로 와서 이해 7월에 공사를 시작해 7개월만에 누각이 완성되었다.
 이때 남쪽에서 약간 동북쪽으로 그 자리를 옮겨지었는데, 누각 남쪽에 못이 있었고, 그 못에는 연을 심었으며 못 중간에는 섬을 만들고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운금루라는 이름은 소자첨[蘇子瞻 : 소동파]의 연꽃시[荷花詩]의 ‘하늘 베틀에 구름같은 비단[天機雲錦]’에서 취해왔다. 연꽃은 군자의 덕[德]을 상징한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그 속이 비어 있으면서도 곧기 때문에 군자의 기상을 나타낸다. 이러한 연꽃을 보고 있노라면 티끌세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게 된다.
 
 朱樓高起壓地臺[주루고기압지대] 붉은 누각 땅을 누르고 높이 솟았는데,
 萬柄荷花次第開[만병하화차제개] 연못 가득 연꽃은 차례로 피고 지네.
 日暮微風時一過[일모미풍시일과] 저물녘 실바람 한 번 스치는 때,
 淸香細細入金盃[청향세세입금배] 맑은 향 은은하게 금잔에 스며든다.
 <성석인[成石因], 운금루>
 
 화려한 누각이 힘차게 땅을 누르고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아래 연못에는 진흙을 뚫고 올라온 연꽃들이 자연의 순서대로 피고 진다. 화려한 누각은 인간의 오만함을 상징할 수도 있다. 그러한 누각은 여전히 땅에 기초해 서있을 뿐이다. 여린 연꽃은 속을 비운 채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우고 시절에 맞추어 피고 질뿐이다. 그 누각에 저녁 실바람이 한 번 일렁이자, 연못 가득한 연꽃의 향기가 어느새 술잔에 스며든다. 실바람에 실려온 연꽃 향기는 우주 삼라만상의 이법[理法]을 어느 사이 금 잔에 가득 찬다. 시인은 어느 사이 우주와 일체가 된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次第開’다. 자연이란 말은 저절로 그렇게 됨을 일컫는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온다. 이 자연의 법칙을 연꽃은 거슬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우주의 향기를 담아서 오만한 인간의 금 술잔에 담아주고 있다. 이 위대한 자연의 법칙이 ‘次第開’인 것이다

 

철원 북관정[北寬亭]
北-산·南-평야 눈맛 '일품'

 
 휴전선에 그 터만 외롭게 남았을 철원의 북관정[北寬亭].
 북관정은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 북쪽에 있었던 이름높은 정자이다. 북관정은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도 등장하는데 ‘동주[東州 : 철원]에서 밤을 겨우 지새고 북관정에 오르니, 임금이 계신 한양의 삼각산 제일 높은 봉우리가 보일 것만 같구나. 태봉국 궁예왕의 대궐터에서 지저귀는 무심한 까막까치는 나라의 흥망을 알고 우는가, 모르고 우는가’라고 하였다. 서울의 삼각산이 보일 것이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북관정은 무척이나 눈맛이 뛰어났던 정자였음을 알 수 있다.
 북관정에서 주위의 지세를 살펴보면 북쪽에서 높이 솟은 산 능선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낮아져서 철원평야에 이르러 끝도 없이 넓어진다. 바로 이러한 지세 때문에 북관[北寬]이란 이름이 얻어졌다.
 
 關東防禦一雄州[관동방어일웅주] 관동에서 방어기지로는 최고가는 고을에,
 直上寬亭始撥愁 [직상관정시발수] 곧장 북관정에 올라 비로소 시름을 털어 낸다.
 廣邈弓都千古月[광막궁도천고월] 드넓은 궁예의 도읍지에 천년의 달이 걸리고,
 森嚴鐵府十分秋[삼엄철부십분추] 삼엄한 철원에 가을로 가득하다.
 飛畵凌雲起[비맹화사능운기] 단청한 누각의 날아갈 듯한 처마에 찬 구름 일며,
 老石蒼藤護境幽[노석창등호경유] 이끼 낀 돌에 푸른 등나무 그윽한 경치로 둘러쳤다.
 印面生苔民似鹿[인명생태미사록] 관가는 한가롭고 백성은 사슴처럼 유순하니,
 春風仙吏任邀遊[춘풍선리임요유] 봄바람불면 관리들과 신선처럼 한바탕 놀아볼까!
 <趙羲贊[조희찬], 북관정>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철원을 동주[東州]라고 칭하며 중요시 여겼다. 철원은 개성에서 동해안으로 나아가는 길목이며 군사적 요충지이다. 북관정은 이러한 길목에 위치해서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아 시름을 달래기에 넉넉하였다. 그래서 시인도 곧바로 북관정에 올라서 시름을 털어 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철원평야를 끼고 펼쳐진 궁예의 도읍지에서 맞이하는 가을 달은 시인이 아니라도 고향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으리라. 이어서 늦가을로 달려가는 계절의 변화를 누각의 날아갈 듯한 처마 끝에 일어나는 찬 구름으로 멋지게 처리하였다. 가을걷이가 끝나 여유 있는 관가며 사슴처럼 순박한 백성들의 모습과 돌아오는 봄에 북관정에 올라 신선처럼 즐길 날을 손꼽는 시인의 모습에서 북관정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느낄 수 있다.
 북관정은 철원에서 경원선을 타고 원산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었다. 남북의 사람들이 마음놓고 북관정에 앉아 원산행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해본다.
 
 춘천 봉의루[鳳儀樓]
세상근심 털고 '상상의 나래'

 
 춘천의 관루[官樓] 봉의루.
 봉의루[鳳儀樓]는 춘천 봉의산에 있었던 정자이다. 문헌에 따르면 봉의루는 객관[客館 : 관청에 딸린 건물로 손님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장소] 북쪽에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도의회건물 주변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언제 누구에 의해 지어졌으며 언제 없어졌는지 현재로선 전혀 알 길이 없고, 다만 조선전기의 시편에만 그 이름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요선당[邀仙堂 : 客館]에 딸린 누정이 봉의루로 판단되며, 후에 요선당이란 이름으로 불린 것이 아닌가한다.
 
 平郊渺渺橫蒼烟[평교묘묘횡창연] 편편한 들이 아득한데 푸른 연기 가로질렀고,
 亂山缺處開靑天[난산결처개청천] 어지러이 산이 끝난 곳에 파란 하늘이 열렸다.
 鳳岳高騫起千[봉악고건기천인] 봉악[鳳儀山] 천 길이나 높이 솟아올랐고,
 長河匹練流其前[장하필련류기전] 긴 강은 그 앞을 비단처럼 흐른다.[중략]
 憑欄落日望不極[빙란낙일망불극] 난간에 기대어 떨어지는 해를 한없이 바라보니,
 馭風身世飄飄然[어풍신세표표연] 바람에 몸을 맡겨 훨훨 날아가는 듯.
 英雄古今幾登眺[영웅고금기등조] 고금에 영웅 몇 사람이나 올라 보았던가?
 離筵急管催繁絃[리연급관최번현] 파하는 자리에 피리 소리 거문고 소리 촉급하다.
 溪山烟月自朝暮[계산연월자조모] 산천에 아침저녁 달이고 이내는 스스로 찾아들고,
 人非昔人年非年[인비석인년비년] 사람도 옛사람 아니고 해[年] 또한 그렇다네.[중략]
 人間勝地眞難遇[인간승지진난우] 인간세상 좋은 경치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데,
 何用跨海尋蓬萊[하용과해심봉래] 어찌 바다 건너 봉래산 찾겠는가?
 千村桃李媚顔色[천촌도리미안색] 마을마다 도리[桃李]가 얼굴을 물들이니,
 宦情羈懷兩寂寞[환정기회량적막] 벼슬살이며 나그네로 지친 마음 모두 적막하다.
 肉半消[비육반소빈반창] 살이 빠져 몸은 반쪽에 머리도 희끗희끗,
 勸君莫作遠遊客[권군막작원유객] 그대여 멀리 노니는 나그네는 되지 말게나.
 
 누정의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가 조망[眺望]이다. 봉의루는 어느 누정보다도 조망하기 좋았을 것이다. 시인은 봉의루에서 소양강의 모습이며 앞뜰[현재 근화동과 소양로 일대]을 거침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시인은 세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상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시인은 난간에 기대어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바람에 몸을 맡겨 훨훨 날아다니는 상상을 한다. 요즘 도시에서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며 느끼는 상상이나 희열과는 완전히 다른 장쾌함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시에서 느낄 수 있다. 한편 시인은 바쁘게만 살아가는 요즘 사람에게 삶을 돌아보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가족도 생각하며 여유 있게 살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시의 끝에서 자신의 삶이 벼슬살이와 객지생활로 지쳤다고 하며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아가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시는 성현[成俔]의 <次春川鳳儀樓韻> 이다.

 

영월 금강정[錦江亭]
영월 8景 '빼어난 풍광' 한눈에

 
 금강정[錦江亭]은 영월읍 영흥리 봉래산 밑에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1428년[세종10년]에 군수 김복항[金復恒]이 세웠고 그 뒤로 군수 이야중[李野重]이 무너져 버린 것을 다시 세우고 1792년[정조16년]에 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정자는 동으로 금장강에 접해 있고 남으로 금봉연[金鳳淵]이 자리잡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금장강 밖으로 상덕촌[尙德村]이 있으며 그 남쪽으로 밀적포[密積浦]가 있어 바라보면 그림과 같았다고 한다. 정자 바로 곁에 단종이 죽자 궁녀 한 명과 열 명의 궁노가 몸을 던져 죽은 낙화암[落花岩]이 있으며, 정자 뒤편으로 민충사[愍忠祠]가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정자에서 영월 8경이 역력히 눈앞에 펼쳐진다.
 
 鵑啼山裂豈窮年[견제산렬기궁년] 두견이 울어 산을 찢어내니 어느 해에 그치려나?
 蜀水名同非偶然[촉수명동비우연] 촉과 강 이름 같음도 우연이 아니어라.
 明滅曉迎海旭[명멸효첨영해욱] 달빛 꺼져 가는 새벽 서까래에 아침해 떠오르고,
 飄蕭晩瓦掃秋烟[표소만와소추연] 나부끼는 대 숲에 저녁의 가을 연기 사라진다.
 碧潭楓動魚游錦[벽담풍동어유금] 맑은 못에 단풍 흔들리니 물고기 비단에서 헤엄치듯
 靑壁雲生鶴踏氈[청벽운생학답전] 하늘에 구름이니 흰 학이 양탄자를 밟는 듯,
 更約道人鐵笛[갱약도인휴철적] 다시 도인과 쇠피리 가져다가,
 爲來吹破老龍眼[위래취파노룡안] 쇠 피리 불어 늙은 용안을 뜨게 하자 약속하네.
<이황[李滉], 錦江亭>
 
 시는 퇴계 이황 선생의 시로 안동에서 춘천으로 가던 중 이곳에 들러 지은 듯하다. 시인은 단종의 비극적 삶을 두견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어 시의 서두를 열었다. 그러나 그 울음은 예사롭지 않아 산을 찢어내고 있다고 말하였다. 아울러 그 두견이와 연결된 촉나라의 강[錦障江] 이름과 같다고 하여, 단종의 애처로운 역사적 사실을 중국의 역사와 닮은꼴임을 드러내어 그 슬픔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간다. 달빛 희미해 질 때 아침해는 어김없이 지붕의 서까래 위로 떠오르고, 다시 대나무 숲에 바람이 일고 가을의 저녁 마을 연기는 비로 쓸어낸 듯 사라진다. 이는 무한히 시간의 반복이 계속되고 있음을 아침과 저녁이라는 시간의 대비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그 다음 5, 6구절에서는 회화적 수법을 통해 정자의 아름다운 경치를 잘 표현하였다. 정자 아래의 맑은 강으로 흔들리는 오색의 단풍나무 잎들이 마치 물고기가 비단에서 헤엄치 듯 한다고 하여, 실제 물고기의 움직임과 단풍나무 잎의 움직임을 교묘하게 섞어놓고 있다. 또한 하늘에 흰 구름 일어나는 것을 흰 학이 양탄자를 사뿐사뿐 밟으며 날아가는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퇴계 선생의 뛰어난 회화성의 일면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구절이다. 마지막 7, 8구절에서는 도인[道人]과의 약속을 통해 나이가 들어 이치를 바라보는 시각의 무딤을 쇠피리 소리를 통해 일신해 보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었다. 도학자다운 끝맺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고성 해산정[海山亭]
바다·산·강 아우른 관동 10景
 

 바다 산 강을 아우른 천혜의 정자 해산정[海山亭].
 서쪽으로 금강과 동쪽으로 해금강이 바라다 보이고 남쪽으로 남강이 흘러가는 고성의 해산정[海山亭]은 관동10경의 하나이다. 누정이 대개 강이나 산, 바다 한 곳을 택하여 자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 강과 산 그리고 바다 세 곳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장소에 세워진 누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해산정은 바다와 산, 강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에 海[해]와 山[산]을 취해 이름을 삼았다. 그 바다는 해금강이 있는 바다요, 그 산은 외금강이니 더 무엇을 보탤 수 있겠는가? 거기에 정자 앞에는 대호정[帶湖亭]이 마주하고 있으며 정자 앞을 흐르는 남강은 입석[立石]과 만나고 정자의 뒤편에 거북바위가 장대하게 감싸고 있으니 그 장관을 어찌 문자로 전할 수 있으랴.

해금강·외금강·남강 비경 한눈에 장쾌한 시야·웅혼한 기상 느껴져
 
 向非阿明水[향비아명수] 만약 맑은 물이라 불릴 수 없다면,
 誰敢配金剛[수감배금강] 어찌 금강산 짝이나 할 수 있었으랴!
 山海交環地[산해교환지]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곳,
 乾坤百尺床[건곤백척상] 하늘과 땅이 높고도 아득하다.
 島星移北斗[도성이북두] 섬의 별은 북두로 옮겨가고,
 檻旭近扶桑[함욱근부상] 난간에 붉은 기운 부상에 가까웠네.
 吳楚東南勢[오초동남세] 오와 초가 동남쪽으로 뻗어나간 지세라고,
 能言獨草堂[능언독초당] 오직 두보만이 말할 수 있으리라.
 <曺夏望, 海山亭>
 
 금강산을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삼일포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면, 해산정은 해금강과 외금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자 아래로 남강의 맑은 물이 흘러간다. 시에서 명수[明水]는 제사에 사용하는 정수[淨水]를 말하는데, 남강의 물이 외금강 유점사 쪽에서 발원, 흘러 들어오기 때문에 명수라 하였다. 그곳 정자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땅은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너무나 장쾌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자연에 몰입된 시인은 밤을 지새운다. 어느새 섬 쪽에 있었던 별들은 자리를 옮겨 북두칠성 가까이 가있으며, 난간에는 부상[扶桑 : 해가 떠오르는 곳] 가까이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해가 붉은 빛을 머금고 있다. 이 정자에서 바라보는 시야는 끝이 없이 드넓게 펼쳐진다. 시인은 시의 마지막 7, 8구에서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의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오초동남탁 건곤일야부]’ 구절을 인용하여 시야의 장쾌함을 표현하였다.
 해산정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길이 없고 다만 지금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 시의 작자 조하망은 1682년에 나서 1748년까지 살았는데, 이 시는 그의 만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의 기상이 장쾌하면서 간결하여 웅혼한 기상이 느껴진다. 시안[詩眼]은 7, 8구의 구절에서 느껴지는 장쾌함이다

 

 강릉 해운정[海雲亭]
동해 경포호 해송 한눈에

 
강릉은 바다와 산을 어우르는 천혜의 요건에 누정으로 고운 수[繡]를 놓은 도시다. 강릉에는 손으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누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해운정도 그 중 하나이다. 해운정은 경포호수를 끼고 경포대와 인접한 정자로 선교장과 오죽헌과도 가까이 하고 있다. 해운정은 1963에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그 건축학적 가치를 일찍부터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해와 경포호수의 구름을 감상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던 곳이었음을 정자의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율곡, 솔바람 맞으며 마시는 차향기 노래
1963년 보물 지정… 건축학적 가치 인정

 

 이 건물은 강원도 관찰사였던 심언광[沈彦光]이 1530년에 지은 별당 건축물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3칸[칸수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 수를 말한다]이며 측면은 2칸으로 동쪽 2칸은 대청이고 서쪽 1칸은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자는 바다와 호수가 잘 보일 수 있도록 여러 개의 단을 막돌로 쌓아 놓은 위에 막돌로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올렸다. 특히 건물의 대청문은 네 쪽의 분합문[分閤門]을 2칸에 각각 달아 서까래 끝에 달린 들쇠에 걸어 맬 수 있도록 하여서 경치를 조망할 수 있다.
 
 勝地逢杯酒[승지봉배주] 아름다운 경치에 술잔을 들고서,
 斯遊也不嫌[사유야불혐] 이렇게 즐기는 것도 싫지 않구나.
 那知千里外[나지천리외] 어찌 알았으리요 천리 밖에서,
 得値二難兼[득치이난겸] 겸하기 어려운 두 가지를 갖추었을 줄이야.
 海色初收霧[해색초수무] 푸른 바다는 비로소 안개를 걷어내고,
 松風不受炎[송풍불수염] 솔바람에 더위는 찾아들 수 없어라.
 何須韓吏部[하수한리부] 어찌 이부[吏部]의 한군[韓君]이,
 茗 捧纖纖[명완봉섬섬] 찻잔을 조심조심 받치지 않겠는가?
<李珥, 海雲小亭>
 
 경포호수와 해송 그리고 밖으로 장대하게 펼쳐진 동해가 어우러져 언제나 그 푸름을 간직한 곳에 해운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술잔을 들어 권해줄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율곡[栗谷]도 시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술잔을 들어보는 것 싫지 않다고 하였다. 이웃한 경포대는 규모가 크고 공적 사무로 인해 벌어지는 연회장소로써의 기능을 담당하였다면, 해운정은 집처럼 규모가 작고 사적 회포를 풀어보기 위한 장소로 쓰였을 것이다. 시인은 해운정이 겸하기 어려운 두 가지를 갖추었다고 했는데, 그 두 가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천혜의 자연풍광인 바다와 호수, 그리고 해송일 것이다. 안개가 걷히고 드러나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바다 그리고 푸른 하늘의 구름이 드리운 경포호수, 그리고 상큼한 향을 지닌 솔바람의 향기는 천하의 어느 곳에서도 얻기 어려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술잔이 아닌 찻잔을 기울이며 사색에 빠져들고자 한다. 찻잔에 우러나는 차향기와 솔바람에 묻어나는 바다의 드넓음은 인간세상의 속된 기운을 모두 씻어내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유대관령망친정
고향 떠나는 절절한 심정 노래

 
 강릉의 오죽헌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의 출생지로 잘 알려져 있다.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師任堂] 신씨의 고향집으로 죽헌동에 자리하고 있다. 사임[師任]이란 뜻은 문왕의 어머니 임[任]을 본받겠다[師]고 한 데서 취해왔으니 그 의미를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이 건물은 누정의 기능과는 거리가 있는 조선 중기의 가옥으로 보물 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단종 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이란 분의 집이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주택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후 기묘[己卯] 명현[名賢]인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란 분이 거처하니 이분이 율곡의 외조부다. 이 고택에서 사임당 신씨가 율곡을 낳았는데, 꿈에 흑룡[黑龍]이 침실로 날아들어 그 방의 창살에 활을 걸어놓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방의 이름을 몽룡실[夢龍室]로 하게 되었으며, 집 앞에 오죽[烏竹 : 검은 대나무]이 있었기 때문에 집의 이름을 오죽헌[烏竹軒]이라고 하였다.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임영] 머리가 하얗게 세신 어머니 강릉에 남겨두니,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몸은 서울로 향하나 마음 하나만은 두고 갑니다.
 回首北坪時一望[회수북평시일망] 머리 돌려 고향마을 보일 때마다 돌아다보나,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 발아래 날아들고 청산에 해마저 집니다.
 <師任堂申氏, 踰大關嶺望親庭>


 이 시는 사임당 신씨가 고향 강릉에서 대관령[大關嶺]을 넘어 서울로 가며 쓴 것이다. 제목에서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다본다’라고 적고 있는데, 여기에 친정이 바로 오죽헌을 말한다.
 백발이 된 어머니를 고향에 남겨두고 서울로 향하는 딸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첫째 구에 임영[臨瀛]은 강릉의 옛 이름이다. 그곳에 머리가 하얗게 세신 어머니를 두고 서울로 떠나니 발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둘째 구에서 시인은 자신의 몸은 서울로 향하고 있으나 마음은 자신의 몸에서 분리되어 어머니에게 달려가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몸[身]은 서울로 향하나 유독 마음[情]만은 시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去] 어머니에게 남겨두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찌하랴! 아무리 마음을 두고 떠난다지만, 아흔 아홉 굽이 대관령에 오르니 고향마을에 계신 어머니가 눈앞에 아른거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니? 시인은 어머니가 계신 고향마을[北坪]이 보일 때마다 돌아보지 않고서는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시인은 이러한 마음을 시일망[時一望]이란 표현에 담아내었다. 時는 다름 아닌 고향마을이 보이는 그 때마다[時時]의 의미이고 일망[一望]은 반드시 한 번 이상은 바라다본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사임당 신씨는 잘 보이지 않는 고향마을을 바라보느라 까치발을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고향마을을 바라다볼 수 있는 실오라기 같은 위안도 잠시 뿐이었다. 시나브로 어느 사이 고개를 올라오니 발 아래에는 흰 구름이 날고 그것도 모자라 청산[靑山]에 날마저 저물고 있었다. 이에 시인은 꿈속에서나마 어머니를 찾아갔으리라.
 이 시의 시안[詩眼]은 ‘독거정[獨去情]’과 ‘시일망[時一望]’이다.
 
금강산
국토의 숨결 고스란히

 
 한 번은 통일된 조국에서 금강산에 오르기를
 옛날 중국 사람들은 금강산을 죽기 전에 한 번 보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옛 문헌에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 한 번 보기를 원한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이란 구절이 있을 정도이다. 남북으로 갈리어 살아온 지 벌써 60년이나 되어가고 있으니, 사람으로 말한다면 환갑[還甲]을 맞이한 셈이 아닌가? 몇 년 전부터 관광이란 이름으로 다녀오고 있는 금강산. 어릴 적 꼭 한 번 배낭을 메고 관광이란 이름을 집어치우고 마음껏 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중국 사람들이 고려국에 태어나 한 번 보고 싶어한 심정이 이에 비교될 수 있으랴! 이런 오기 서린 바람이 있어서인지, 관광이란 이름 아래 갈 수 있는 금강산 유람은 계속 뒤로 접어두고만 있다. 우리 한시 가운데 금강산 관련 한시[漢詩]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시편들만 뒤적이며 올 한해도 시작을 한다.
 
 천만 봉우리 눈을 쌓아 놓은 듯 우뚝우뚝 雪立亭亭千萬峯[설립정정천만봉]
 바다 구름을 헤치고 나오는 옥 연꽃. 海雲開出玉芙蓉[해운개출옥부용]
 신이한 빛 일렁이자 푸른 바다 손닿을 듯, 神光蕩滄溟近[신광탕양창명근]
 꿈틀대는 아득한 기운 조화[造化]의 울림인 듯. 淑氣造化鍾[숙기완연조화종]
 우뚝한 산부리는 새의 길도 굽어보고, 突兀岡巒臨鳥道[돌올강만임조도]
 맑고도 깊은 골엔 신선의 자취 숨었어라. 淸幽洞壑秘仙[청유동학비선종]
 동쪽에 나그네라면 뾰족한 정상에 올라서서, 東遊便欲凌高頂[동유변욕능고정]
 우주를 굽어보며 가슴을 씻어보고자 하네. 俯視鴻一胸[부시홍몽일탕흉]
 <權近[1352-1409], 金剛山>
 
 조선시대 수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자신의 평생 재산을 털어 금강산에 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금강산이란 실체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국토의 뿌리가 서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위의 시는 권근[權近]이란 분이 중국 사신을 갔다가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 앞에서 응제[應制]한 것이다. 거대한 중국이란 나라에 사신간 조선의 선비 권근이 당당하게 조선을 대표해 내세운 곳이 금강산이었다.
 그곳은 눈이 쌓인 듯 암벽으로만 이루어진 천 만 봉우리로 우뚝우뚝하고, 그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동해의 일출은 옥부용[玉芙蓉]이 바다 구름을 헤치고 나오는 듯하다고 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출의 장관은 우주만물을 관장하는 조화옹[造化翁]의 작품이다. 이 일출에 걸맞은 조화옹의 작품 금강산이 있으니, 이곳에서 바라보면 새가 날아다니는 길도 굽어보이고, 맑고도 깊은 골엔 신선들이 노닐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금강산이 우리산하 강원도에 있으니, 그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그러한 금강산 정상에 올라 우주를 굽어보며 가슴에 쌓인 묵은 것들을 싹 쓸어냄은 그 어느 것보다 장쾌하리라.
 이 시의 시안[詩眼]은 7, 8구절이다. "동쪽에 나그네라면 뾰족한 정상에 올라서서, 우주를 굽어보며 가슴을 씻어보고자 하네."다.
 
청평사 이자현
탈속·청빈 구도정신 깃들어

 
 탈속[脫俗]과 청빈[淸貧]의 구도정신이 서려 있는 청평사.
 춘천은 물의 자원이 풍부한 도시이다. 소양강과 북한강이라는 커다란 강줄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공지천과 같은 작은 시내도 흐르고 있다.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되는 지점에서 가평쪽으로 흐르는 강을 신연강이라고 하고, 춘천댐 방향의 북한강 줄기를 자양강이라고 하고 화천쪽으로 더 올라간 그곳을 모진강이라고도 한다. 춘천을 감싸고 도는 소양강을 따라 올라가면 왼편으로 춘천의 천년 이상의 고찰[古刹] 청평사[淸平寺]가 자리하고 있다. 그 청평사는 고려 때 명문 거족인 이자현[李資玄]이 들어와 문수원[文殊院]을 짓고 은거하면서 세인들로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이자현은 부귀공명을 모두 떨쳐버리고 세상으로부터 일탈하여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갔으니, 그 정신을 후대인들이 사모하여 추앙해마지 않았다. 이후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서 은거하기도 하였으며,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이곳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기 쉽지 않지만, 아마도 이자현이 추구했던 탈속을 통한 구도정신[求道精神]일 것이다.

 

고려 명문 거족 이자현·김시습 은거 세상 물욕·명리 들어올 틈도 없는 듯

 

 청평 산수는 상수[湘水]의 물가와 같은데, 淸平山水似湘濱[청평산수사상빈]
 뜻하지 않게 옛 친구를 만나보네. 邂逅相逢見故人[해후상봉견고인]
 삼십년 전 함께 급제하였건만, 三十年前同[삼십년전동최제]
 천리 밖에 떨어져 살고 있구나. 一千里外各栖身[일천리외각서신]
 뜬구름으로 골짜기에 들어와 세상일 끊으니 浮雲入洞曾無事[부운입동증무사]
 시내에 비친 밝은 달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明月當溪不染塵[명월당계불염진]
 말없이 오래도록 지낸 곳을 눈으로 보니,目擊無言良久處[목격무언양구처]
 욕심 없고 깨끗한 옛 정신이 확연하구나. 淡然相照舊精神[담연상조구정신]  

<곽여[郭璵]>
 
 이 시는 이자현과 동년급제자[同年及第者]인 곽여가 관동[關東]에 업무로 나왔다가 문수원에 들어와 준 시이다. 첫 구에서 청평산수가 중국의 상수가와 같다고 하며 그 아름다움을 말하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곳에서 뜻하지 않게 옛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삼십년 전에 동년급제한 이자현이었다. 이자현이 모든 것을 버리고 천리 밖 궁벽하고 외진 곳에 살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골짜기에 들어와 세상일을 끊어버리니, 그곳은 시내에 비친 밝은 달도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세상의 물욕[物慾]과 명리[名利]가 비비고 들어올 어떠한 틈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시인은 이윽고 말없이 오래도록 이자현이 지낸 곳을 눈으로 확인하고서, 욕심 없고 깨끗한 옛 정신이 그에게 확연함을 실토하였다. 이는 이자현이 추구하는 구도자의 높은 정신에 감복하고만 것이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마지막 구절 ‘욕심 없고 깨끗한 옛 정신이 확연하구나’이다. 부귀공명을 좇음은 어느 시대이건 변함이 없나보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자유인이 될 터인데, 나눔의 작은 실천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이자현의 그 정신만이라도 마음속에서 지워버리지 않아야 하리라 다짐한다.

 

삼척 오십천
옛사람 '물아일체' 경지 엿보여

 
 삼척시를 가로지르는 하천이 오십천[五十川]이다. 오십천은 삼척과 태백의 경계인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삼척시를 관통하여 동해로 흘러든다. 오십천은 구불구불한 곡류[曲流]하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삼척시에서 그 발원지까지 가려면 마흔 일곱 번을 건너야 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대략의 숫자인 오십으로 그 이름이 정해졌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물 근원이 우보현[牛甫峴 : 지금의 태백시]에서 나오며 죽서루 밑에 와서는 휘돌면서 못이 된다고 하였다. 또한 대동여지도에는 초등학생이 장난을 쳐놓은 듯이 구불구불하게 유현[楡峴 : 백병산을 두고 삼척과 황지를 연결하던 고개]에서 삼척시까지 오십천이 표시되어 있다. 오십천의 구불구불함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마치 실직국의 역사를 그 오십천이 감싸안고 오늘도 흐르고 있는 듯하다.

 

작은 배를 구불구불한 강에 띄웠더니, 小艇泛橫江[소정범횡강]
비 갠 뒤라 물결이 깨끗하고 푸르다. 雨餘波淨綠[우여파정록]
삿대 짚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니, 投東流[투고소동류]
그늘진 벼랑이 깊고도 구불구불하여라. 陰崖邃且曲[음애수차곡]
뱃줄을 푸른 칡덩굴에 얽어매고, 纜繫蒼藤[괴람계창등]
자리에 앉아 발을 강물에 담근다. 坐席濯我足[좌석탁아족]
돌 틈으로 찬 샘이 이루어져, 石寒泉生[석하한천생]
차디찬 얼음 옥구슬을 쏟아낸다. 冷冷瀉氷玉[냉냉사빙옥]
조용하게 거문고 타는 객이 있고, 有客靜彈琴[유객정탄금]
솔바람 산 계곡에 가득하구나. 松風滿山谷[송풍만산곡]
늦어서야 강물에 노를 젓고, 晩來棹中流[만래도중래]
노래 소리 웃음소리 오고 또 간다. 歌笑往而復[가소왕이복]
이러한 즐거움 인간 세상에 없으리, 此樂人間無[차락인간무]
잠이 오면 갈매기와 짝하여 잠을 이룬다. 眠來伴鷗宿[면래반구숙]
배를 타고 남쪽 여울로 내려오니, 乘舟下南灘[승주하남탄]
맑은 이슬이 성긴 대나무를 간지른다.  淸露疎竹[청로뇨소죽]
<安軸[안축 1287 - 1348], 眞珠南江泛舟>

 

 안축이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가 되어 지금의 태백을 거쳐 삼척에 와서 쓴 시인데, 문집의 기록대로 1330년 6월 13일에 지었으니 지금으로부터 675년 전에 지어진 셈이다.
 문자를 통해 세월을 넘나들면서 옛사람의 멋과 사유방식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지혜의 단초도 담고 있다.
 비 갠 뒤 배를 오십천에 띄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그늘진 벼랑에 배를 칡덩굴에 묶어두고 발을 강물에 담그고 그 행위를 통해 돌 틈 사이에서 옥구슬처럼 솟아오르는 샘물을 시인은 느낀다. 여기에 거문고 타는 나그네의 연주와 산 계곡 가득한 솔바람의 연결은 환상적이다. 이러한 가운데 날은 이미 저물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물리적 시간이란 무의미하다.
 시인은 잠이 오면 갈매기와 짝하여 잠을 이루면 그 뿐이다. 새벽이 되어서 남쪽 여울로 내려오니 맑은 이슬이 대나무에 맺혀 빛나고 있다. 청징한 세계[자연]와 온전하게 하나 되어 있는 시인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자리에 앉아 발을 강물에 담근다.’인 ‘濯我足’이다.

 

양양 낙산사
묘경 몰입 온갖 상념 눈녹듯

 
 양양의 낙산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찰 중에 하나다. 낙산사는 의상대사와 관련이 깊은데 고려 승려 익장[益莊]의 기록에 ‘[이곳은] 관음대사가 머물던 곳이라 한다. 신라 승려 의상이 친히 성용[聖容]을 보고자 하여 굴 앞 돌 위에서 지성으로 배례하기를 이칠일[二七日]이나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오히려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바다의 해룡이 돌 위로 붙들고 나왔고 관음대사가 곧 바로 굴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말하기를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서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 위다. 이 땅에 불전을 경영하여라’ 용도 또한 여의주와 편옥[片玉]을 바치는 것이었다. 의상이 과연 대나무가 난 곳에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 불상을 만들어 봉안하였는데 이곳이 낙산사'라는 창건 기록이 전한다고 한다.
 또한 낙산사는 조선의 임금 세조, 예종, 성종, 숙종 등과 관련이 있으며, 특히 세조는 이곳에 친히 행차하였으며, 성종은 낙산사의 편액을 써주었다고 한다.
 
 幸尋妙境住萍 [행심묘경주평종] 다행히 묘경[妙境]을 찾아 부평초 삶을 안주하니,
 澄慮冥觀萬想空[징려명관만상공] 맑은 생각 깊은 관조[觀照]에 온갖 상념이 없어진다.
 浪底月誰分上下[랑저월수분상하] 물에 비친 달 누가 상하를 구분하랴?
 峯端雲自占西東[단봉운자점서동] 봉우리 끝 구름은 동서로 자유롭구나.
 俄瞻假像金堂裏[아첨가상금당리] 잠시 금당[金堂] 속 가짜 상을 바라볼 때,
 已見眞身石窟中[이견진신석굴중]이미 석굴 속 진신[眞身]을 보았노라.
 不待相師齋七日[부대상사재칠일] 상사[相師]의 7일재[齋]를 기다리지 않아도,
  心應願定先通[타심응원정선통] 그 마음 원[願]에 의해 먼저 통했으리라.
  <金克己, 洛山寺>
 
 고려 때 인물 김극기가 지은 것이다. 시인은 첫 구에서 낙산사를 찾아드니 부평초 같은 삶을 안주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곳은 묘경[妙境]답게 맑은 생각과 깊은 관조에 들어갈 수 있어 세상사 상념[想念]을 없앨 수 있다고 하였다. 이어 시인은 ‘물에 비친 달 누가 상하를 구분하랴?’는 기발한 제안을 내놓는다. 이는 佛家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空卽是色 色卽是空]’의 경지이다. 이는 세상사에서 생기는 일체의 허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초탈[超脫]의 경지를 말함이다. 그리고 현실 속 금당 안의 부처님 상은 가짜이고 석굴 속에서 몸을 바다로 던졌던 의상대사의 모습에서 이미 부처님의 참모습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마음의 바람[願]이 이미 간절하면 관음보살도 그 마음을 알아 그것을 이루어준다고 시인은 굳게 믿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관음보살이 이미 의상대사의 마음의 원을 알았던 것인데, 이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물욕[物慾]의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안식처는 어디일까? 그리고 간절히 바라는 원[願]을 이루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의 시를 통해 그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양구
인간이 돌아갈 '자연'으로 묘사

 
 우리말에 ‘살리다’라는 단어가 있다. ‘기를 살리다’, ‘생명을 살리다’, ‘분위기를 살리다’ 등의 말들이 있으며, ‘살림살이’, ‘삶’ 등의 어휘도 살리다와 연관되어 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운명적으로 부딪히고 있는 문제 중 꼭 살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겠는가? 그 대답 중의 하나가 ‘자연’일 것이다. 우리 선조에게서 배울 수 있는 생각 중에 하나가 인간에 대한 존중일 터인데, 그 인간존중의 사고 안에는 철저하게 인간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한 자연회귀 인식이 있다. 이러한 점은 고도로 도시화된 고도의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지금 사람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멀리 자연에서 멀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조선시대 당대의 최고 문형[文衡]을 지낸 성현[成俔]의 아들 성세창[成世昌 : 1481∼1548]은 1522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양구[楊口]를 지나며 다음과 같은 시편을 남기었다.
 
 綠溪危棧馬難行[녹계위잔마난행] 푸른 계곡에 위태로운 나무다리 말이 가기 어려워,
 竟日愁聞水石聲[경일수문수석성] 종일토록 돌 틈에 물소리 시름하며 듣는다.
 歷盡崎嶇身厭困[력진기구신염곤]구불구불한 길 다 지나니 몸은 피곤함에 지쳐도,
 冒穿嵐霧眼增明[모천람무안증명] 이내와 안개를 헤쳐 나오니 시야는 더욱 선명하다.
 人間得福元非福[인간득복원비복] 세상에서 받은 복 진짜 복이 아니듯이,
 道外求生不救生[도외구생불구생] 도 밖에서 얻은 삶은 삶을 구제하지 못하리.
 隨遇一生無所累[수우일생무소누] 일생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려 했건만,
 十年空恨負歸耕[십년공한부귀경] 십 년을 부질없이 맴돌다 전원에 돌아가지 못했구나.
 
 성세창은 정치적 부침이 심한 시기에 살았다. 그 또한 이 정치적 부침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위의 시는 이러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 듯한데, 시인은 첫 구에 위태로운 나무다리를 등장시켜 험난한 인생여정을 은연중 드러내었다. 인생여정은 평탄하여 말을 타고 내달릴 수 있는 그러한 곳이 아니다.
 시인은 돌 틈을 흐르며 내는 물소리의 바른 소리를 듣기엔 아직 세상과의 거리가 가까운 듯하다. 세상의 시름[‘愁’]이 여전히 귓전에 남아 있다. 험난하고 구불구불한 인생여정을 지나자니 몸은 지쳐온다. 그러나 내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이내와 안개[嵐霧]를 헤치고 나오니 시야는 더 없이 선명하다. 이내와 안개는 속된 세상과 자연 사이에 놓여진 경계이다. 그 이내와 안개는 인간이 자연계로 넘어가고자 할 때, 속 된 기운을 씻어주는 역할도 하지만 속된 세상에 남아 있을 때는 이내와 안개는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
 이 경계에서 빠져 나와보니 속된 세상의 부귀영화는 진짜 복이 아니며 세상 속에서 추구하던 삶은 내 삶을 구원해 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세상에서 좇아가고 있는 부귀영화와 삶의 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시인이 선택해야 할 길은 자연으로 돌아가는[歸耕] 것이다.
 성세창이 양구를 지나며 쓴 이 시를 읽으며 양구는 어쩌면 우리에게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연의 본 모습을 잘 간직한 이상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철원 보개산 지장암
俗世 떠나 자연서 내면 성찰

 
 철원에는 도피안사, 심원사, 장안사, 부연사, 일광사, 보연사 등의 유명 사찰이 있다. 그 가운데 도피안사에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63호]과 삼층석탑[보물223호]이 있고 심원사에는 경헌대사비, 취운당비, 석대암사적비가 있다. 이 심원사는 보개산에 자리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상당히 규모가 큰 사찰이었던 것 같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보개산은 금학산과 수정산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의 지도에서는 수정산과 보개산을 찾을 수 없고 다만 금학산만이 표시되어 있다. 이 보개산에는 심원사를 비롯하여 석대암, 지장암, 성주암 등의 사찰이 있었다. 특히 지장암은 목은시고[牧隱詩藁]에 보개산지장사[寶盖山地藏寺]라는 제목으로 전해지고 있다. 목은 이색이 고려말 사람임을 감안해 볼 때, 고려시대에는 지장암도 암자 규모가 아니라 사[寺]의 규모였지 않았나 추측하여 볼 수 있으며, 이 지장암은 신라 헌안왕[憲安王]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 한다.
 
 遊山如啖蔗[유산여담자] 산에 노닐음은 맛좋은 음식 먹는 듯하니,
 最愛入淨境[최애입정경] 정토의 경계에 들어감을 무엇보다 좋아해.
 雲望共無心[운망공무심] 구름 바라보면 함께 무심해지고,
 溪行獨携影[계행독휴영] 시내 거닐면 그림자만이 친구가 되는구나.
 鍾魚林壑空[종어임학공] 숲 속 계곡에 종소리 목어소리 퍼져나가며,
 殿宇松杉冷[전우송삼냉] 불전과 소나무 삼나무 차기만 하구나.
 甚欲辦靑纏[심용판청전] 깊이 좋은 세상만을 얽으며 살고 싶어져,
 臨風更三省[임풍경삼성] 바람을 쐬며 다시금 나를 돌아본다.
 <이색[李穡 : 1328 -1396] 보개산지장사[寶盖山地藏寺]>
 
 목은 이색은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와의 절묘한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특히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서 친명의 입장을 지지하였고, 그의 문하에는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목은이 언제 철원 보개산 지장사에 왔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시에 깊게 배어 있는 인간의 고뇌를 읽을 수 있으니 아마도 정치의 부침이 심했던 말년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된다.
 산에 노닐음은 맛좋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깊이 빠져들수록 그 맛에 흠뻑 취하여 손을 놓기 어려운 것이 유산[遊山]이 아닐까? 그것은 속된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정토의 경계에 있으니 어느 것보다 좋아 할만하다. 그 경계에 들어서니 구름을 바라보아도 함께 무심[無心]할 수 있고, 시내를 거닐면 자신의 그림자만이 친구가 된다.
 이 정도면 의식해야할 대상도 없고 오직 자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준비가 끝난 셈이다. 그리고 산사의 종소리와 목어소리가 숲 속 계곡으로 퍼져나가며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불전과 주위의 나무들에서는 차가움마저 일어난다. 오직 나를 바라보고 있는 존재는 나 이외에 아무도 없다. 그때 시인은 맹자의 말씀대로 본성[本性]인 선[善]으로의 회귀를 강렬하게 느낀다. 그래서 바람을 쐬며 다시금 자신을 되돌아본다.
 
양구 동헌
 
 삼월이 시작되면 남녘으로부터 꽃 소식이 전해온다. 그러면서 농촌에서는 긴 겨울의 기지개를 켜며 농사가 시작된다. 어릴 적 가까운 농촌 들녘에 나가보면 소를 이용해 쟁기로 밭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소가 갈아엎는 밭의 깊이를 보면서 새로운 생명들이 그 밭고랑에서 피어날 생각을 하면 알 듯 모를 듯한 신비감에 휩싸이곤 했다.
 
 嶺嶠東風信馬行[영교동풍신마행] 봄바람 맞으며 산길을 말 가는 대로 가니,
 千紅開遍鳥和聲[천홍개편조화성] 온갖 꽃이 두루 피고 새들도 화답하네.
 買山素計驚時換[매산소계경시환] 산을 사겠다던 본디 계획 시절 따라 바뀌나,
 向闕丹心對月明[향궐단심대월명] 대궐 향한 일편단심 달을 대하니 밝구나.
 七七欲歸花事盡[칠칠욕귀화사진] 칠월칠석 돌아갈 땐 꽃구경 끝났을 테고,
 三三已過客愁生[삼삼이과객수생] 삼월삼진 지났으니 객의 시름 생겨난다.
 耕田夫應相笑[우경전부응상소] 밭가는 농부와 웃음을 나누며,
 不自歸耕反勸耕[부자귀경반권경] 자신은 돌아가 밭갈지 않으며 밭갈이 권하네.
 
 위의 시는 조선 명종 때의 문신 안공신[安公信 : 1496∼1561]이 강원도 권농관[勸農官]이 되어 양구를 지나며 쓴 기행시편중의 하나이다. 치자[治者]의 입장에서 쓰여졌으면서도 담박[淡泊]하면서도 고졸[古拙]한 맛이 있다. 시인은 봄날이 한창인 삼월 이전 봄바람을 맞으며 산길을 말 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꽃구경이 한창이다. 온갖 꽃이 피어났고 그곳에서 새들도 화답을 한다.
 첫 구 '信馬行'을 직역하면 '말을 믿고 간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의역을 하면 '말 가는 대로'가 된다. 시인은 언제고 산을 사서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는 계획을 본디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시절의 변화에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권농관이 되어 그 본디 계획을 접어두고 있다. 나라의 일을 수행할 때에는 충심[衷心]으로 할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대궐 향한 일편단심 달을 대하니 밝구나'라고 하여 그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이어 권농관의 직무를 끝내고 칠월칠석 돌아갈 땐 꽃구경 끝났을 테고[미래], 집을 떠난 나그네의 시름은 삼월삼진을 지나며 이미 시작되었다[과거]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봄날을 맞이하여 끝없이 봄날에 빠져보고 싶은 시인의 욕망과 나라의 공적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의무 사이의 내적 갈등의 표현이다. 시인은 '밭가는 농부와 웃음을 나누며' 인사하지만, 평소 계획대로 고향으로 돌아가 밭갈지 않으며 오히려 농부에게 밭갈이를 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아이러니를 느끼고 있다.
 언제가 고향에 돌아가 편히 쉬고 싶어하는 우리의 모습을 이 시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곳이 바로 우리 강원도가 아닐까!
 
신선세계 물색 인제
청정 자연의 아름다움·멋

 
 <도화원기[桃花園記]>는 어부가 선계[仙界]를 여행하고 그곳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어부가 계곡을 따라 올라가 우연히 닿으니 그곳은 복사꽃[桃花]이 만발하였다. 어부는 우연히 그곳에서 노인들이 두는 바둑 구경을 하고 집으로 귀가하였다. 어부가 집으로 돌아오니 몇 세대가 이미 흘러 아는 사람마저 없었다. 다시 선계로 돌아가려고 찾아갔으나 그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身隨漁子入[신수어자입] 몸이 어부 따라 들어오자,
 物色駭仙家[물색해선가] 신선고을 물색에 놀라네.
 一過淸明雨[일과청명우] 청명에 비 한번 내리더니,
 齊開桃杏花[제개도행화] 살구꽃 복사꽃 모두 피었구나.
 不堪嘗黍酒[불감상서주] 기장술 마시면 견디지 못할 터,
 猶可晨茶[유가철신다] 새벽 차 마심이 좋겠구나.
 更覓來時路[갱멱래시로] 다시금 들어온 길 찾아보니,
 山頭曲線斜[산두곡선사] 산마루에 꾸불꾸불 하여라.
 <이우 1469∼1517] 麟蹄東軒韻>
 
 위의 시는 송재[松齋] 이우가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인제 동헌을 지나며 쓴 것으로 그의 문집인 송재집[松齋集] 권1 '관동행록[關東行錄]'에 전한다. 시인은 홍천[洪川]에서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을 지내고 바로 인제[麟蹄]로 들어왔다. 인제에 도착한 시인의 느낌이 첫 구와 둘째 구에 잘 드러났다. 마치 도화원을 찾아갔던 어부의 안내를 받아 선계로 들어와 그 물색[物色]의 아름다움에 놀란 것으로 시의 시작을 마련하였다. '물색[物色]'이란 인정세태를 포함한 말이니, 인제의 청정자연[淸淨自然]의 멋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청명을 지났으니 4월 초순이라 복사꽃 살구꽃 모든 꽃들이 일제히 피어났다. 시인은 인제로 들어오기 전 길에서 봄꽃을 재촉하는 봄비를 맞았다.
 여행에 있어서 술 한잔을 마심이 오히려 좋으련만 기장술은 마시면 견디기 어렵다. 아마도 시인이 공무[公務]로 인해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 짧은 봄날의 아름다움을 맑은 정신으로 보내고 싶은 탓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새벽까지 잠을 미루어 둔 채 차를 마시려 한다. 이 구절을 술꾼들이 읽는다면 분명 실망하리라.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花無十日紅'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름다움은 잠시 뿐이다. 그 짧은 아름다움을 술로 인해 놓쳐버린다면 너무 허망하지 않겠는가!
 시인은 새벽 다시금 자신이 들어온 길을 찾아본다. 새벽의 희미한 여명아래 걸어온 길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산마루로부터 꾸불꾸불 빗겨 서있는 것이 보인다. 지나온 세월에 대한 뒤돌아봄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파란만장[波瀾萬丈]이며 구절양장[九折羊腸]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그것이 내리막에서 바라보는 공간이라면 꽃들이 만개한 봄날의 하루는 더욱 소중하고 아깝게 느껴질 것이다.
 꽃샘 추위가 실감나는 계절이다. 그러나 아무리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해도 꽃이 만개한 봄날이 머지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차 춘일 소양강행
흐르는 강에 인생 비유

 
 날이 풀려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노라면 옛 추억이 절로 떠오른다는 말이 실감난다. 공자마저도 흘러가는 물을 보고 세월의 흐름을 한탄하였으니, 이는 강물이 흘러가서는 다시 거슬러 돌아오지 않는 속성을 보고 깨닫는 인류의 보편 정서일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소양강은 인제 서화에서 흘러나와 기린을 거쳐 양구 남쪽에서 초사리탄[草沙里灘]을 이루고 소양강댐 위쪽에서 청연[靑淵]과 주연[舟淵]을 만들고 적암탄[狄岩灘]을 지나 소양강을 이룬다고 하였다.
 
 昭陽江草綠如煙[소양강초록여연] 소양강 풀 연기만큼이나 짙어가고,
 昭陽江水碧於天[소양강수벽어천] 소양강 물 하늘보다 푸르러라.
 情興難容宇宙內[정흥난용우주내] 마음에 흥취 우주로도 담아내기 어렵고,
 吟 已入羲皇前[음아이입희황전] 시를 읊조리니 이미 복희씨 이전에 들어섰네.<중략>
 去秊過此秋颯爾[거년과차추삽이] 지난해 이곳을 지날 때 가을 바람 소슬하더니,
 今秊過此春茫然[금년과차춘망연] 올해 이곳을 지나니 봄빛이 끝이 없구나.
 羅綺香熏琥珀枕[라기향훈호박침] 비단 이불 향기에 호박 베개 하였었건만,
 別離聲苦鴛鴦絃[별리성고원앙현] 이별 노래 괴롭게 원앙현[鴛鴦絃]에 실렸구나.
 多情自謂少壯日[다정자위소장일] 정 많은 젊은이라 스스로 이르다가,
 屈指還驚老成秊[굴지환경노성년] 손꼽아보고 늙어버린 나이에 화들짝 놀라는구나.<중략>
 從此 山水窟[종차상양산수굴] 이제부터 산수 깊은 곳을 어정거리며,
 灑然脫落原衢埃[쇄연탈락원구애] 찌들은 거리의 먼지 말끔하게 털어 내리라.
 行險須知世道惡[행험수지세도악] 길이 험해야 세상살기 어려움을 알겠고,
 多荒要去心田萊[다황요거심전래] 거칠게 되고서야 마음의 묵정밭 제거하려 한다.<후략>
 <李達衷[이달충 : 1309∼1384], 次春日昭陽江行>
 
 바닷가의 포구나 강가의 나루에는 사람들의 정한[情恨]이 수없이 배어 있을 것이다. 소양강가의 풀은 봄을 맞아 다시 짙어가고 소양강은 봄 하늘을 받아들여 그 비취색을 더욱 발하고 있다. 이러한 봄날에 일어나는 흥취는 우주의 드넓음으로도 담아낼 수 없으며 여기에 시가 더해지니 마음의 태평성대로 진입해 들어간다.
 지난가을 이곳을 지날 때 가을바람이 소슬하였는데, 지금 이곳엔 봄빛으로 가득하구나. 봄빛만큼 가득 일어나는 춘정[春情]이 있건만, 오히려 이별노래는 원앙이 새겨진 거문고에 맞추어 괴롭게 들려온다. 지금까지 정 많은 젊은이라고 말하고 다녔건만, 지나온 세월을 손꼽아보니 노성[老成]한 나이가 되었음에 화들짝 놀라고 만다. 인생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지금부터라도 산수 깊은 곳을 찾아 들어가 도시에서 찌들어버린 모습을 털어 버려야겠다. 되돌아보니 험난한 인생항로를 통해서 삶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고 마음이 황폐화되고서야 잡초로 무성한 마음을 갈아엎어야 함을 깨닫는다. 한번 지나고 다시 오지 않는 강물처럼 우리네 삶도 연습 없이 한 번에 완성되는 모노드라마임을 깨닫는다

 

次江陵東軒韻
완연한 봄빛·밥짓는 연기
부임 관리마다 "신선세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강릉의 형승[形勝]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산맥은 북쪽에서 왔고 바다가 동쪽 끝이 된다.’ ‘강릉의 산수 경치는 천하에 첫째이다.’ ‘창해[滄海]가 넓고 크며 산골짜기는 천겹이다.’ ‘부상[扶桑]을 당기고 양곡[暘谷]을 잡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산맥은 백두산으로부터 시작된 태백산맥의 등줄기를 이루고 동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으며 빼어난 산과 바다 거기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가 어우르는 자연경관은 세계 어느 곳에다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으니 천하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고 동해에 떠오르는 해는 언제나 정동진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니 해가 떠오르는 곳인 부상[扶桑]과 양곡[暘谷] 모두가 강릉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海山佳氣入新年[해산가기입신년] 바다와 산의 아름다운 기운이 새해 들어서,
 春滿蓬壺洞裏天[춘만봉호동리천] 봄이 봉래산 마을 안 하늘까지 가득하다.
 鰲島雲嵐飛鳥外[오도운람비조외] 오도[鰲島]에는 아지랑이 날아가는 새 밖에 피어나고,
 珠樓歌吹夕陽邊[주루가취석양변] 주루[珠樓]에는 석양볕에 노래와 피리소리 있구나.
 一溪水抱千家塢[일계수포천가오] 한줄기 시냇물은 천 집의 마을을 감싸 흐르고,
 萬樹花含十里烟[만수화함십리연] 만 그루 나무에 꽃은 십리의 저녁 연기를 머금었다.
 鏡浦晴波搖鴨綠[경포청파요압록] 경포에 개인 물결이 푸르게 일렁이는데,
 蘭橈載酒挾飛仙[난요재주협비선] 아름다운 배에 술 싣고 지나던 신선과 함께하네.
 <성현[成俔 : 1439∼1504], 次江陵東軒韻>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기억 속에서 거의 잃어버린 것 중에 하나가 이상세계일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그만큼 편하게 살게 돼 현실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에서 기인 했을지도 모른다.
 물산이 풍부한 강릉은 그 자체로 이상세계였다. 강릉에 부임하는 관리는 예외 없이 신선세계에 비유하였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봄이 봉래산 마을 안 하늘까지 가득하다고 시의 처음을 끄집어냈다. 봉래산은 신선이 사는 곳인데 그곳의 마을 안 하늘까지 봄이 가득하다고 하였으니 그 봄빛의 완연함을 말한 것이다. 이어 오도[鰲島 : 역시 신선이 사는 섬을 말함]에는 봄의 대표적 전령사인 아지랑이가 하늘을 날아가는 새의 너머에까지 피어난다고 하였고, 아름다운 누각[樓閣]에서는 봄볕을 받으며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태평성대는 관리가 거처하는 누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 그루 나무에 핀 봄꽃이 만연한 마을에까지 펼쳐진다. 저녁연기는 다름 아닌 밥짓는 연기를 말하는데, 이것이 십리에까지 펼쳐지고 있다함은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말이다.
 경포대는 어느 사이 봄비가 지나가고 푸른 물결이 일렁인다. 이러한 곳에 나를 알아주는 이와 함께 배를 띄우고 달빛을 받아 넣고 지인[知人]의 가슴 속 달을 받아 녹인 한 잔 술을 마신다면 어떠할까! 봄빛의 세기가 세어질수록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더욱 선명해진다

 

의암 유인석 得眠字
힘 써 쉼없이 칼날 갈아왔으니 누구로 하여금 휘두르게 할까
 
 100년 전 일본이 조선을 병탄[倂呑]하기위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행하였으니,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의 침탈을 막고자 무력으로 항거하였다. 그 의병의 중심에 춘천출신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선생이 있었다.
 의암 선생은 춘천 남면 가정리에서 1842년 출생하여 중국 관전현 방취구에서 1915년 돌아가셨다. 평생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살아가셨으니, 독도 침탈을 유전병처럼 대물림하는 일본의 악날한 행태[行態]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라도 의암 선생의 정신이 더욱 빛을 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亂離天地七旬老[난리천지칠순노] 어지러운 세상의 칠순 늙은이,
 辛苦風霜多少年[신고풍상다소년] 풍상고초 속에 젊은 날 다 보냈구나.
 非居鬱鬱深山裏[비거울울심산리] 울창한 깊은 산 속에 살지 않을 때는,
 卽在茫茫大海邊[즉재망망대해변] 망망한 바닷가에서 살아왔구나.
 望鄕月出巡庭步[망향월출순정보] 달이 뜨면 고향 그리워 뜨락에서 서성이고,
 憂國燈殘?枕眠[우국등장의침면] 등불 쇠잔토록 나라 걱정에 잠 못 든다.
   力頻磨劍如雪[조력빈마검여설] 힘써 쉼 없이 칼날을 눈발처럼 갈아왔으니,
 敎誰向賊直無前[교수향적직무전] 누구로 하여금 적을 향해 칼을 휘두르게 할까?
<유인석[柳麟錫 : 1842~1915] 得眠字>

 

 위의 시는 선생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지어졌을 것이다.
 선생이 74세에 돌아가셨음을 감안한다면 시에서 칠순 노인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그렇다. 선생의 삶은 시에 나타난 그대로 ‘辛苦風霜’이었다.
 1898년 중국으로의 망명으로부터 1915년 돌아가시기까지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1911년 선생은 러시아 유정구, 운현으로 은거와 피신을 하였고 1913년 목화촌으로 거쳐를 옮겼으며 1914년 러시아에서 중국 서간도를 거쳐 요녕성 관전현 방취구로 거쳐를 옮기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인생역정이었다. 시에서는 그것이 ‘울창한 깊은 산 속’ ‘망망한 바닷가’로 간단히 처리되어 있을 뿐이다.
 그 이국 땅에서 달이 뜨면 고향이 그리워 뜨락을 서성이고, 등불의 심지가 다 타도록 나라 걱정에 잠 못 이루셨다. 그러면서 평생을 눈발처럼 하얗게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으니, 선생의 우국충정의 불변하는 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올해는 일본과 우정을 다져나가기로 국가간에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이어 나오는 일본 고위 관리들의 망언과 일본의 제국주의 잔재의 행태를 보면서, 백년 전 우리에게 가해왔던 을사늑약의 역사가 과연 우정의 역사로 바뀔 수 있을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의암 선생께서 그에 대한 답을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과 우정을 쌓아나가려 한다면 우리는 쉼 없이 우리의 칼날을 갈아야 한다.
 일본은 오늘도 독도가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역사교과서에 끝없는 왜곡을 감행하고 있지 않은가?
 12일에는 의암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의암제가 열린다. 을사늑약 100년을 맞아 의암 선생의 정신을 다시 한번 새겨야할 필요성이 피부에 와 닿는다.
 
횡성 강림 태종대
할미 외로운 마음 연못에 울리고
운곡 大義 풍모 지금까지 남았네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에 태종대[太宗臺]가 있으니, 치악산 동쪽이 된다. 강림면은 치악산[稚岳山 : 1288m] 이외에도 남태산[南台山 : 1182m]과 배향산[拜向山 : 808m] 등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산세가 빼어나다. 태종대가 있는 계곡에는 노고소[老姑沼]와 횡지암[橫指巖], 변암[弁巖] 등 사연을 담고 있는 자연물이 많다.
 조선의 3대 임금 태종[太宗]이 그의 스승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을 찾아 가마를 잠시 멈추었던 곳이 주필대[駐 臺 : 지금은 태종대라 한다]다. 운곡은 태종의 스승이었지만, 고려가 멸망하자 이곳에 숨어들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태종은 왕위[王位]와 관련하여 많은 형제를 살육하고 보위에 올랐기에 명망이 높았던 스승을 모시고 정사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스승이 은거하고 있던 이곳을 찾았으나, 운곡은 끝내 그 만남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어가가 머문 곳이 주필대, 운곡의 부탁대로 태종에게 거짓 길을 가리켜준 노파가 몸을 던진 곳이 노고소이며, 노파가 길을 가리킬 때 바위를 비껴 가리키니 그 바위가 횡지암이며, 운곡이 머문 굴이 있으니 그곳이 변암이다.
 
 駐蹕臺惟我局東[주필대유아국동] 주필대는 우리 지역의 동쪽에 있으니,
 隆師王德與天同[융사왕덕여천동] 높은 스승과 왕의 덕은 하늘과 같구나.
 老 孤忠鳴在沼[노구고충명재소] 할미의 외로운 마음은 연못 물소리에 울리고,
 先生大義仰餘風[선생대의앙여풍] 선생의 대의[大義] 풍모가 지금까지 남아 있네.
 五百年光祥日下[오백연광상일하] 오 백년의 빛 상일[祥日] 아래에 있고,
 三千里地覺林中[삼천리지각림중] 삼천리 땅 각림[覺林] 가운데 있구나.
 至今重建臨桑海[지금중건임상해] 이제 세월 흘러 무너진 누대를 다시금 세워,
 永慕飜成泣淚紅[영모번성읍루홍] 영원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번듯하게 이루니 눈물 흘리며 얼굴 붉어지네.

<李相說 : 작자미상, 주필대>
 
 현재의 태종대는 1930년에 강림의 유지가 다시 세운 것이다. 위의 시는 그때에 지어진 시로 판단된다. 시인은 먼저 주필대가 우리 지역의 동쪽에 있다고 말하고[이 당시 태종대가 있었던 강림면 강림리는 영월군 수주면에 속해 있었다] 높은 스승과 왕의 덕은 하늘과 같다고 하여 군사[君師]를 동일시하였다. 이어 노파가 몸을 던진 연못에 노파의 말 못 할 심정이 물소리에 여전히 남아 전해지고 있다 하고, 운곡의 대의는 지금까지 면면히 남아 있다고 하였다. 조선왕조 500년 빛이 상일[祥日 : 대상일 - 여기서는 조선의 운명이 이제 다 했음을 상징하고 있다.] 아래에 있어도, 운곡의 대의 풍모는 삼천리 곳곳을 일깨우는 숲[覺林]과 같다고 하였다. 이러한 운곡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태종대의 중건을 이루고 나니 얼굴에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것으로 시인은 마무리하고 있다.
 지금 일본의 노골적인 군국주의의 부활에 맞서, 운곡의 대의[大義] 정신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강림면에는 의병탑이 아울러 우뚝하게 서 있으니, 운곡의 대의 정신을 면면히 계승한 바이다

 

왕유의 위성곡
아침 비 나려 티끌을 적시더니
푸르고 푸른 버들 색 새롭구나

 
 버드나무는 우리 나라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버드나무는 봄철 꽃가루가 눈병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어느 사이 가로수의 위상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버드나무는 오랜 세월 우리와 정서에 깊이 스며있는 주요한 생명체였다. 특히 버드나무는 이별시에 곧잘 등장하곤 하였는데, 아마도 그것을 대표하는 시가 왕유[王維]의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 일명 위성곡[渭城曲]으로 알려져 있다]이다.
 
渭城朝雨 輕塵[위성조우읍경진] 위성에 아침 비 나려 가벼운 티끌을 적시더니,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유색신] 객사[客舍]에 푸르고 푸른 버들 색이 새롭구나.
勸君更盡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 '그대 다시 한 잔 술 비우시게나,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서쪽으로 양관[陽關]을 벗어나면 아는 이 없을 터니.'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선상에 놓여있다. 그러니 인생의 절반은 만남의 삶이지만 한편으로 인생의 절반은 헤어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헤어짐에는 일시적 이별과 영원한 이별이 있을 수 있으며 이별하는 대상 또한 다양하나, 아무튼 그 이별의 공간에는 인생사의 많은 부분들이 압축적으로 녹아있다.
 이 시는 원씨 성의 친구가 사신으로 안서 지방으로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여, 위성[渭城 :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서 하룻밤을 객사에서 묵고 나서 헤어지는 광경을 노래했다.
 이 시의 압권은 무엇보다도 둘째 구인데, 그 중에서 ‘유색신[柳色新]’이며 ‘신[新]’자가 시안[詩眼]이라고 할 수 있다. 버드나무는 이별할 때 꺾어주는 상징물인데, 아침에 나린 비로 주위의 작은 먼지가 가라앉아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때 눈에 들어오는 버들가지의 색상이 유난히 두드러지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아침을 맞아서야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이별의 느낌을 선명하게[新] 느꼈던 것이다.
 이제 눈앞에 다가온 이별을 어찌하랴? 머나먼 이역 안서[安西 : 현재 신강성 유글족 자치구]로 떠나야 하는 친구에게 술을 권해 이 이별의 아픔을 잊는 길밖에 또 무엇이 필요하랴. 셋째 구의 ‘갱[更]’자에 보내는 친구의 마음이 너무나 잘 드러난다. 여기서 갱[更]은 행위의 반복을 의미하니, 잔을 비우면 다시 채워 마시게 하는 행위의 반복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는 친구 하나 없는 이역 땅으로 나아가는 고단함을 덜어내기 바랐던 것이다.
 버드나무는 이별에 있어 몇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버드나무는 봄철에 가장 빨리 잎을 틔운다. 이는 떠났던 사람이 이 버드나무의 잎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재촉하는 마음 지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버드나무는 생명력이 아주 강한 나무이다. 어디를 가던지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 상대방의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 버드나무는 가늘어 말채찍으로 쓸 수 있는데, 떠나는 사람이 어서 말을 몰고 갔다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황진이 '영반월'
여성적 감수성·동화적 상상력

 
 대한민국 사람으로 황진이[黃眞伊]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송도[松都 : 지금의 개성] 삼절[三絶 :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로 유명할뿐더러 한시와 시조로도 그 이름에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문학작품인 한시[8수]와 시조[6수]는 몇 수 존재하지 않는다. “아아 내일이면 그리워 할 줄 몰랐던가 / 있어 달라 하면 가랴마는 제 굳이 / 보내고 그리워하는 정[情]은 나도 몰라 하는구나” 하는 시조 작품은 황진이의 대표 작품의 하나이다. 이렇듯 현존하는 작품은 대부분 남녀간의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작품은 <영반월[詠半月]>이다. 이 작품은 황진이의 문학적 상상력이 가장 잘 집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동화적 상상력 또한 잘 반영하고 있다.
 
 誰斷崑崙玉[수단곤륜옥] 누가 곤륜산의 옥을 캐어다가,
 裁成織女梳[재성직녀소]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는가?
 牽牛一去後[견우일거후] 견우와 한 번 이별한 뒤로,
 愁擲碧空虛[수척벽공허] 시름에 푸른 하늘에 던졌어라.
 <신출한자> 梳:빗 소, 牽:끌 견, 擲:던질 척, 碧:푸를 벽.
 
 황진이의 이 시를 볼 때마다 어렸을 때 부르던 윤극영 선생의 동요 ‘반달’이 떠오른다.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삿대도 아니 달고 돛대도 없이…’ 달은 참으로 인간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해 주었는데, 현대 과학 문명은 달나라를 점령, 인류가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그 추억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지금으로부터 약 오 백년 전 황진이도 반달을 보고 직녀와 견우의 못다 이룬 사랑노래를 상상해 냈다.
 곤륜산은 중국에 있는 산으로 경옥[硬玉]의 주산지이다. 예부터 옥은 군자[君子]와 부귀[富貴] 장수[長壽]를 상징하였으니, 그 중요성은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곤륜산은 만만한 산이 아니다. 험하여 접근하기 쉽지 않은 산인데, 이곳에서 옥을 캐어다가 직녀[織女:베를 짜던 옥황상제의 딸]에게 빗을 만들어 주었으니 그 사랑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빗은 또 어떠한 도구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곱게 단장할 때 사용하는 필수도구이다. 이러한 빗을 사랑의 징표로 선물을 해준 이는 직녀의 남편 견우 아니던가? 그러나 두 사람은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끝내 견우성과 직녀성으로 떨어져 유폐되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직녀로서는 그 사랑의 징표, 빗이 무엇에 쓰이랴! 직녀는 그 아름다운 옥빗을 푸른 하늘에 던져버리고 만다. 그 던져진 옥빗이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반달이 아니던가! 참으로 황진이의 문학적이면서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착상이다. 황진이의 여성적 감수성과 순수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였으리라.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에게 생존의 법칙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문학적 상상력으로 아이들에게 꿈이 자랄 수 있도록 해주어 싱싱한 가정이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송한필의 우음[偶吟]
가련하다 한 바탕 봄이여
비바람 속에 가고 오누나

 
 '봄'이 '보다'에서 왔다고 한다. 백색으로 일관하던 황량하고 음산한 기운의 겨울을 이겨내고, 대지를 수놓는 초록의 향연이 봄의 서막이다. 그리고 나무에서 싹이 움트고 피어나는 꽃을 보고 있노라면 생명의 신비감을 느낀다.
 한편 도시의 골목길 인도블록 사이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피어있는 민들레를 보노라면 어느 사이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면서, 한편으로 내 자신의 모진 운명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봄은 노랗게, 빨갛게, 하얗게 원색으로 도시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아있다 목련이 지듯이 그렇게 뚝뚝 떨어져 버리고 나면 어느 사이 할말을 마저 하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처럼 작별을 고한다.
 
 花開昨夜雨[화개작야우] 어젯밤 비에 피어난 꽃이,
 花落今朝風[화락금조풍] 아침 바람에 지는구나.
 可憐一春事[가련일춘사] 가련하다 한 바탕의 봄이여,
 往來風雨中[왕래풍우중] 비바람 속에 가고 오누나.
 <우음[偶吟], 宋翰弼[송한필]>

 <신출한자> 昨 : 어제 작, 憐 : 불쌍히 여길 련
 
 위의 시는 조선 중엽[16세기 중엽]을 살다간 학자이며 문장가였던 송한필의 작품이다. 송한필은 뛰어난 문재[文才]에도 불구하고 신분적 제약의 질곡 속에 살아야만 했다. 1589년에는 일족이 노예[奴隸]로 환천[還賤]되는 비극으로 가족이 모두 흩어지거나 떨어져 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성리[性理]에 관해 토론할 만한 사람으로 오직 익필[翼弼 : 송한필의 형] 형제뿐이다’라고 평가하였다 하니, 송한필의 학문 능력도 꽤나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개인의 불행에서 배태된 위의 시는, '可憐'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된다. 꽃은 시인 자신을 암시한다. 꽃은 어젯밤 비에 피어나고 아침 바람에 진다. 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의 변화가 시인이 바라본 인생의 처음과 끝이다. 그렇기에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은 인생은 더더욱 가련[可憐]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可憐[가련]'인데, '憐'의 우측 부분은 炎[염]과 舛[천]이 합쳐진 글자로, 사람이나 동물의 피를 뜻하거나 또는 도깨비불을 뜻한다. 즉 사람이나 동물의 피를 보고 느끼는 인간의 마음 상태를 나타낸 자이다. 이 글자는 시인의 불행한 일생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꽃이 어젯밤 비에 피어나고 아침 바람에 지니, 이는 조락[凋落: 시들어 진]한 꽃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의도나 생각과는 관계없이 비바람 속에 피어나고 지고 말았다. 비바람은 그 시대의 권력을 의미한다. 권력 앞에 무수하게 떨어져 나가고 피어나는 꽃의 운명이 가련하기 이를 데 없음을 나타내었다. 권력 속에는 피바람의 칼날이 항상 도사리고 있음을 ‘憐’자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입하를 지났으니 여름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떨어지는 봄꽃들을 보면서, 우리네 인생에서 꽃을 피우며 살아가는 날은 며칠이나 되는지 셈을 해본다. 그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현덕승 '한거'
유유자적 전원생활 그려

 
 차를 몰고 외곽으로 나서면 쉽지 않게 전원주택을 만날 수 있다. 외양부터 도시의 시멘트와는 거리가 먼 자재들을 사용하고 있어 한 눈에 자연친화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위 텃밭에는 친환경 농산물이 자라고 있는데, 종류도 참으로 다양하여 상추 오이 감자 콩 등이 철 따라 자란다. 70년대 초반에 선풍적 인기를 일으켰던 유행가 중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풍년 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면…’이라는 가사의 ‘님과 함께’가 있다. 노래의 가사를 보면 건강한 노동도 있고 소박한 행복이 묻어난다.
 
 結茅溪水上[결모계수상] 시냇가에 띠집을 지으니,
   影落潭心[첨영낙담심] 처마 그림자 연못 속에 떨어진다.
 醉睡風吹醒[취수풍취성] 취해서 졸다가 바람 불어 깨어나니,
 新詩鳥和吟[신시조화음] 시를 짓자 새들이 화답한다.
 放牛眠細草[방우면세초] 놓아 둔 소는 작은 풀밭에서 졸고,
 驚鹿入長林[경록입장림] 놀란 사슴은 잘 자란 숲으로 들어간다.
 倚杖靑松側[의장청송측] 푸른 소나무 곁에 지팡이 기대고 나니,
 千峰紫翠深[천봉자취심] 봉우리마다 붉고 푸른빛이 짙어라.
  < 閒居, 玄德升 >


신출한자 : 처마 첨 潭 연못 담 睡 잘 수 醒 깰 성 眠 잠잘 면 杖 지팡이 장 紫 붉을 자 翠 비취 취

 위의 시는 조선시대 선조 때 인물 현덕승[玄德升]이 지은 ‘한거[閒居]’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추구했던 삶의 한 부분이다. 벼슬길에 나아갔을 때와 물러났을 때의 삶이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임금과 국가에 충성을 다했고 벼슬길을 물러나서는 유유자적하는 전원생활을 하였다.
 시냇가에 띠풀로 집을 지으니, 띠집의 처마가 못의 가운데로 그림자 진다. 시에 등장하는 ‘潭[담]’은 수심이 깊으면서도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연못을 말한다. ‘心’은 한 가운데를 뜻한다. 그러니 띠집의 처마 그림자가 못의 중심에 온 것으로, 띠집이 연못 아주 가까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한 띠집에서 취하여 졸다가 바람이 불어 깨어나서 시를 지으니 새들이 화답한다. 취기를 깨우는 것은 바람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가한 오후이다. 놓아 둔 소는 풀을 뜯다 졸고 있고, 겁이 많은 사슴은 무엇에 놀랐는지 숲 속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시인은 소나무 곁에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소나무에 걸쳐두고 몸 또한 더욱 푸른 소나무에 기대고 먼 곳을 바라본다. 시야에 들어오는 산봉우리마다 온통 철쭉과 진달래의 향연으로 붉고 또 한편 잎들이 자란 나무들로 인해 신록이 깊어가고 있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마지막 7구와 8구이다. ‘側’은 인간이 자연에 기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深’은 자연에 인간이 동화[同化]되는 과정을 깊이를 보여준다. 사람은 분명 자연의 일부일터인데, 유독 그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역사를 진행해 온 듯하다. 그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는 삶으로의 진행은 도시문명이 발달할수록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항우 해하가[垓下歌]
말마저 나아가려 하지않으니
虞여!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괵국부인, 달기, 이부인[李夫人], 항아[姮娥], 왕소군[王昭君], 식부인[息夫人] 등 이들의 공통점은 중국의 미인이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고 했던가, 이들의 일생은 순탄하지 않았고 행복한 최후를 맞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였기에 한편으로 '경성경국[傾城傾國]' 또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한다.
 초[楚]의 황제였던 항우[項羽]는 중국을 통일할 인재였으나, 그는 독단이 심하고 욕심이 많아서 민심을 얻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한때 항우의 부하였던 유방[劉邦]에게 천하를 내주었다. 그러나 항우는 평생 오직 한 여자만을 좋아하였다고 하는데, 우미인[虞美人]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온다.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
 時不利兮 不逝[시불리혜추불서] 때가 불리하니, 추마저도 나아가려 하지 않는구나.
   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내하] 추마저 나아가려 않으니, 이에 어찌해야 하는가!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우[虞]여, 우[虞]여!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항우가 유방의 군대와 싸우다가 해아[垓下 :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일대]에서 한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를 당했다. 이때 유방의 책사였던 장량과 소하가 꾀를 내어 밤에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면초가[四面楚歌]’다. 항우는 이 노래를 듣고는 초나라 사람들이 모두 한나라에 항복한 것이라 속단하고, 한나라의 계략에 말려들고 만다. 자포자기에 이른 항우는 늘 자신의 곁에서 함께 했던 우희[虞姬]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며, 절망감에 이르고 만다.
 힘은 산을 뽑아 올릴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고도 남을 만하였건만, 이미 자신의 고향 사람들은 이미 한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절이 불리하니, 자신이 타고 다니던 명마 추[?]도 자신의 뜻대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참으로 딱하기 이를 데 없게 된 신세다. 절망감이 극에 달한 항우는 '다시 한 번 추마저 나아가려 않으니 이에 어찌해야 하는가!'하고는, 끝내 오직 자신을 이해해 주었던 여인 우미인을 두 번이나 연이어 부르게 된다. 그리고는 그 절망감을 해치고 나갈 대비책도 없이 무력하기만 하다.
 항우는 노래를 끝내고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명마 추를 보검[寶劍 : 일설에는 그 보검이 천자문에 등장하는 거궐[巨闕]이라고 한다]으로 죽이자, 우희는 항우의 해하가[垓下歌]에 답가를 부르고 그 칼로 역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우희가 죽은 곳에서 꽃이 피어나니, 이 꽃이 우미인초[虞美人草]이다.
 이 항우와 우미인의 사랑이야기는 경극으로 전해지고 아직까지 사랑을 받고 있으며, 바로 '패왕별희[覇王別姬]'가 그것이다

 

왕유 '위천전가'
한적한 시골풍경 노래
 

 도시를 벗어나 교외로 나서면 곧바로 시골 풍경과 만날 수 있다. 그리 오래 전도 아닌 것 같은데, 저녁이면 일을 나가며 풀어놓았던 소를 몰고 등에는 지게에 농구[農具]를 지고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으로 향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시의 생활 패턴은 기계적이다. 인간냄새가 그리울 때면 어느 사이 옛날로 회귀해 버리고 그리고 향수에 빠져 버린다. 인간의 본향이 흙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도시 생활은 여전히 우리에게 편리함이란 이점을 주면서도 여전히 인생의 종착역으로써 적절하지 못하다는 강박 관념인지 모르겠다.
 
 斜光照墟落[사광조허락] 노을은 마을에 비추고,
 窮巷牛羊歸[궁항우양귀] 외진 시골길로 소떼 양떼 돌아오네.
 野老念牧童[야로념목동] 시골 늙은이 목동이 궁금하여,
 依仗候荊扉[의장후형비] 지팡이 짚고 사립문에 서있구나.
 雉 夷苗秀[치구이묘수] 꿩이 울고 보리 이삭은 패고,
 蠶眠桑葉稀[잠면상엽희] 누에 잠이 들면 뽕잎은 바닥나네.
 田夫荷鋤至[전부하서지] 농부는 호미 메고 이르러선,
 相見語依依[상견어의의] 정답게 주고받는 말은 끝이 없다.
 卽此羨閑逸[즉차선한일] 이런 한가로움 부럽구나.
  然吟式微[창연음식미] 쓸쓸히 ‘식미’를 불러본다.
 <왕유[王維:701-761], 渭川田家[위천전가]>

 신출한자 : 墟 터 허, 荊扉 가시 형, 사립문 비, 雉 꿩 치, 울 구, 苗 싹 묘, 蠶 누에 잠, 桑 뽕나무 상, 鋤 호미 서, 羨 부러울 선
 
 시에 초여름의 시골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드러난다. 노을이 땅거미로 바뀌어 가는 시나브로의 순간이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의 결합으로 평이하면서도 담담하게 펼쳐진다. 외진 시골길에 노을이 찾아들자 소떼와 양떼가 귀가[歸家]하고, 시골 늙은인 목동이 궁금하여 지팡이 짚고 사립문에 서 있다. 소떼와 양떼의 외진 길 모습은 움직임이 빠른 동적 이미지라면, 시골 늙은이 모습은 정적 이미지이다. 여기에 꿩의 울음소리에 초여름의 정취가 묻어나면서 보리 이삭이 패는 모습이 등장하며, 누에가 뽕잎을 먹다 잠이 들면서 뽕잎은 어느 사이 바닥이 들어 난다. 시골의 풍요롭고도 자적한 모습이 시각, 청각 이미지를 통해 잘 드러난다. 집으로 돌아오던 농부들이 만나 피우는 정다운 이야기는 끝이 없다.
 시인은 시골의 ‘한일[閑逸]’한 모습에 빠져든다. 그리고 떠오르는 도시 직장생활의 답답함에 세상[도시]이 쇠미[衰微]해졌으니 전원으로 돌아가자는 노래 ‘식미’를 쓸쓸히 불러본다.
 이 시의 말은 쉽고 담박하나 그 의미는 참으로 깊고 유장하다. ‘줄기세포’ 연구로 이제 죽음이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 인간에게 남은 고향은 흙이 아니고 어디가 될 것인가?

 

이상은 '無題'
떠난 님 향한 그리움 표현

 
 佛家에서 쓰는 말 가운데 ‘會者定離[회자정리]’가 있다. 이는 한 번 인연을 맺어 살더라도 언젠가는 이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의미이다. 그 이별이 죽음으로 일어날 때는 정말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 된다. 그래서 이별을 통해 잃기도 하지만 삶의 중요함을 새삼 大悟[대오]하게 된다.
 이별 뒤에는 悔恨[회한]과 그리움, 怨望[원망] 등이 교차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시적 이별을 하고 오는 그리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그러나 체념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그러한 이별의 고통은 요즘 세태에서 만나기 어렵다. 통신기술의 발달로 하루만의 이별도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 번밖에 만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相見時難別亦難[상견시난별역난] 만남이 어려우니 이별 또한 어려워라.
 東風無力百花殘[동풍무력백화잔] 봄바람 힘없으니 온갖 꽃이 시들어라.
 春蠶到死絲方盡[춘잠도사사방진] 봄누에 죽을 때에 실일랑 다 뿜어내고,
 蠟燭成灰淚始乾[납촉성회누시간] 촛불은 재 되고서야 눈물이 마른다오.
 曉鏡但愁雲 改[효경단수운빈개] 아침에 거울 볼 땐 머리 흴까 걱정하고,
 夜吟應覺月光寒[야음응각월광한] 저녁에 읊조릴 땐 달빛 차가움을 알리라.
 蓬山此去無多路[봉산차거무다로] 봉래산 이 곳에서 먼 길이 아닐 터니,
 靑鳥殷勤爲探看[청조은근위탐간] 파랑새 은근히 찾아가 보려무나. 

<李商隱, 無題>

 신출한자: 殘 시들 잔 蠶 누에 잠 蠟 밀 납 淚 눈물 누 探 찾을 탐
 
 이 시의 주인공은 아마도 여자일 것이다. 이별하고 그리워하는 대상이 남편이나 사랑하는 임으로 보이는데, 그 그리움으로 사무치는 情調[정조]를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사랑하는 사람 만날 때도 쉽지 않았는데, 지금 이별하고 나니 그 그리움을 견디기 어렵다. 봄바람이 힘을 잃으니, 온갖 꽃들이 시들어 버린다. 봄이 되어 떠난 임이 다시 봄이 와서 꽃이 시들어가건만 돌아올 희망이 없다. 봄누에 죽을 때에는 실을 모두 뿜어낸다고 했고, 촛불의 눈물은 다 타고 재로 되어야 마른다고 하였다. 이 두 구는 천하에 名句[명구]로 그리움의 정조를 이보다 잘 표현해 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평을 얻었다. 목숨이 끊어지고서야 그치게 될 그리움을 봄누에에 비유하였는데, 실을 뜻하는 글자 ‘絲’는 그리움을 나타내는 ‘思’와 통한다. 매일 밤 타오르며 흘리던 촛불의 눈물 또한 재가되고서야 마른다고 하였으니, 그 숱한 밤을 통해 흘리던 눈물은 재가 되고서야 그칠 것이라 한 것이다.
 아침이면 일어나 거울을 보는 여인은 자신의 구름 같은 검은머리에 흰머리가 생기지나 않았나 걱정을 한다. 한편 공부하러 떠난 낭군은 저녁 책을 읽다가 달을 보고,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달빛이 차갑다고 한 것은 바로 싸늘하게 식어버렸을지 모르는 낭군의 마음에 빗댄 것이다. 먼 곳에 있지도 않으면서 소식이 없는 낭군에게 파랑새를 통해 기별을 넣어볼까 하는 여인의 모습이 마지막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위심시희작
 
 살아가면서‘참 안 된다’고 하는 마음이 몇 번이던가? 아마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군대 속담[?]에 ‘안되면 되게 하라’라는 불굴의 투지를 강조하는 말도 있지만, 좌절이 몇 번 겹치고 나면, 자신감이 상실되기 마련이다. 아무튼 살아가면서 아주 작은 일조차 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 다반사다.
 
 人間細事亦參差[인간세사역참차] 인생사에 작은 일 또한 들쭉날쭉하여,
 動輒違心莫適意[동첩위심막적의] 해보면 마음을 벗어나 뜻대로 되질 않네.
 盛歲家貧妻尙侮[성세가빈처상모] 젊었을 땐 가난하다 아내가 얕보고,
 殘年祿厚妓將追[잔년녹후기장추] 나이 들어 봉급이 두둑하자 기생이 줄을 서네.
   雨음多是出遊日[우음다시출유일] 흐리고 비오는 날만 골라 놀러 나가고,
 天霽皆吾閑坐時[천제개오한좌시] 날이 개여 좋은 날엔 내 한가히 머무는 때.
 腹飽輟飡逢美肉[복포철손봉미육] 실컷 먹고 상 물리자 맛있는 고기 생기며,
 喉瘡忌飮遇深치[후창기음우심치] 목구멍에 병나자 깊은 맛의 술 만나네.
 儲珍賤수市高價[저진천수시고가] 쌓아 뒀던 보배 헐값에 팔자 高價에 거래되고,
 宿疾方전隣有醫[숙질방전린유의] 고질병 낫자마자 이웃에 의원이 있을 줄이야.
 碎小不諧猶類此[쇄소불해유류차] 자질구레한 일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揚州駕鶴況堪期[양주가학황감기] ‘양주가학’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李奎報[이규보 : 1168-1241], 違心詩戱作[위심시희작]>
 신출한자 侮 : 업신여길 모 : 장마 음 霽 : 갤 제 輟 : 물릴 철 飡 : 저녁밥 손 瘡 : 종기 창 : 잔 치 儲 : 쌓을 저 碎 : 부술 쇄 諧 : 화할 해
 
 머피의 법칙이란 말이 있는데, 하는 것마다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종의 징크스 같은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일들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계속 이어져온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규보는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 사람인데, 이러한 인생의 아이러니를 쇄소한 일로 묶어 시로 표출하였다. 시의 첫 구에서 인생사의 작은 일 또한 들쭉날쭉하다고 하면서, 시의 전체적 방향을 암시하고 해보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시를 시작하였다.
 젊었을 땐 집이 가난하다 아내가 얕보고 -원문에 ‘侮’로 되어 있으니, 얕보는 것보다 의미가 사실 더 강하다- 조금 생활이 넉넉해지고 몸이 쇠하자 기생들이 줄을 선다고 하였다. 어디 마음먹고 밖으로 나들이라도 나가면 십중팔구 비가 오고, 그 좋은 날엔 결국 집에서 집 지키는 날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실컷 먹고 밥상 물리자 먹고 싶었던 고기반찬이 생기고, 목구멍이 아파 술을 삼가고 있는데 꼭 그때 맛좋은 술이 생긴다. 집에 잘 모셔두었던 진귀한 물건들을 제 값도 못 받고 헐값에 팔자 이내 시중에서 고가에 거래되며, 고질병으로 실컷 고생했는데 알고 보니 이웃에 좋은 의원이 있었다. 이렇게 작은 일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그 먹고 마시고 놀기 좋은 양주[揚州] 고을에 자사가 되어 억 만금을 벌었다가 신선처럼 학을 타고 신선이 되려는 바람[揚州駕鶴]을 기대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생사 ‘塞翁之馬[새옹지마]’가 아니던가? 논어에 ‘人無遠慮 必有近憂[인무원려 필유근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규정[閨情]
버림받은 여인의 애환묘사

 
 혼인[婚姻]은 두 남녀가 만나 백년해로[百年偕老]를 하겠다는 약속이자 사랑의 결실을 향해 가는 공인식[公認式]이다. 고려나 조선시대나 혼인이 이뤄지고 남편의 외도로 그 결실의 항로가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할 때 여인은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하고, 그저 속앓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러한 과거를 만날 때마다 지금의 남성들은 좋은 세상에 여성이 살고 있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한편 생각해보면 그 길었던 세월을 속앓이만으로 살아야했을 옛 여인들의 모습은 인동초[忍冬草]의 모습 그 자체였을 것이다.
 
 贈君同心結[증군동심결] 저는 님에게 동심[同心]의 매듭을 드렸고,
 貽我合歡扇[이아합환선] 님께선 저에게 합환[合歡]의 부채를 주셨죠.
 君心竟不同[군심경부동] 님의 마음 마침내 달라지더니,
 好惡千萬變[호오천만변] 미움과 좋아함이 천만 번 변하셨죠.
 我歡亦何成[아환역하성] 저의 기쁨 또한 언제나 찾을 수 있을까?
 憔悴日夜戀[초췌일야변] 밤낮으로 그리워하여 초췌해지건만,
 棄捐不怨君[기연불원군] 버리셨다고 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新人多婉[신인다완련] 새 사람 예쁜 구석 많기도 하겠지만,
 婉能幾時[완연능기시] 그 고움이 언제까지 갈까요?
 光陰嫉於箭[광음질어전] 세월은 화살보다 빠른 것을.
 焉知如花人[언지여화인] 어찌 알리오, 꽃과 같은 사람도
 亦有斯皺面[역유사추면] 얼굴에 주름이 있게 될 줄을.


 <李達衷[이달충 : ? - 1358], 규정[閨情]>
 신출한자: 貽: 줄 이 憔: 수척할 초 悴: 수척할 췌 棄: 버릴기捐:버릴연 아름다울 련 嫉 : 빠를 질 皺 : 주름 추
 
 동심결이란 납폐[納幣]에 쓰이는 실의 매듭으로, 두 고를 내고 맞죄어서 매는 방법의 매듭을 말한다. 이는 한 번 조여져서는 다시는 풀리지 않게 하려는 매듭 방법으로 염습[殮襲] 때에도 이와 같이 한다. 즉 동심결이란 혼인에서 장례까지의 절차를 모두 포괄하고 있는데, 이는 혼인하여 죽어서도 그 인연의 끈을 풀지 말자는 의미가 있다. 합환선 또한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부챗살을 가운데 두고 양쪽을 같은 크기의 종이로 마주 붙여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부채이다. 이러한 동심결의 약속과 합환선의 증표도 변하는 남자의 마음 앞에선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다. 사랑을 되찾으려 노력하지만, 젊은 새 여자에게 빼앗겨버린 남편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을까? 오히려 여인은 체념을 넘어서 그렇게 자신을 떠나가 버린 남편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한다.
 인생의 가장 큰 진실 중의 하나가 인간은 늙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무리 고와도 화살보다 빠른 시간을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통해, 시의 화자[여인]는 위안을 삼는다. 그러나 그 깨달음으로 남편이 돌아오기에는 현재의 상황이 절망적이며, 설사 그것을 남편이 깨닫는다 하여도 자신에게로 돌아올지는 미지수 아닌가? 시속 주인공의 가련한 운명을 접하고 나니, 마치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설법을 듣는 듯하다.

 

두보의 강촌[羌村]
 
 이별 뒤에는 만남이 존재하고 만남 뒤에는 이별이 존재한다. 이별은 또 다른 시작이라고도 말한다. 다시는 살아서 만날 수 없는 이별이 있고, 다시는 인연의 끈이 없을 듯 했는데 다시 만나는 인연이 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기본적으로 부부의 만남을 근간으로 한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헤어져 그 생사를 알 수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어떠한 생각이 먼저 떠오르겠는가?


 嶸赤雲西[쟁영적운서] 서쪽 하늘에 드높은 붉은 노을 구름,
 日脚下平地[일각하평지] 햇발은 평지로 쏟아져 내리네.
 柴門鳥雀[시문조작조] 사립문에 새들이 지저귀더니,
 歸客千里至[귀객천리지] 돌아온 손님 천리 길을 왔다내.
 妻怪我在[처노괴아재] 처자식 내 살아온 것 믿지 않다가,
 驚定還拭漏[경정환식루] 놀라움 진정되고서야 눈물을 닦아내네.
 世亂遭飄蕩[세란조표탕] 세상 난리에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生還偶然遂[생환우연수] 살아 돌아왔으니 우연이라 할 수밖에,
 隣人滿墻頭[린인만장두] 이웃 사람 담장에 빼곡하게 머리 디밀고,
 感嘆亦[감탄역허희] 감탄과 탄식을 연발하네.
 夜更秉燭[야난갱병촉] 밤이 깊도록 촛불 밝히니,
 相對如夢寐[상대여몽매] 마주 앉아 있음이 꿈 속 같구나.


 <두보[杜甫]의 강촌[羌村]>

 신출한자 嶸 : 가파를 쟁, 가파를 영 드높은 모양 柴 : 섶 시 떠들썩할 조
 拭 : 닦을 식 遭 : 만날 조 飄蕩 : 이리저리 떠돎


 이 시는 두보가 안사의 난을 피해 가족과 헤어졌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해 집으로 돌아온 정회를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살아 돌아온 화자보다 주위 사람의 반응을 사실적으로 표현, 재회의 기쁨을 두르러지게 드러내고 있다. 한편 그 재회의 기쁨을 표현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깊은 작가의 성찰이 시 곳곳에 녹아 스며 있다.
 시의 시작에서는 서쪽 하늘에 드높은 붉은 구름과 햇발이 평원을 비추고 있음을 묘사하여 귀환의 상서로움을 암시하였다. 이어 사립문 가에 새들이 지저귀더니 이윽고 천리 먼길을 찾아온 손님을 등장시킨다.
 손님이란 화자 자신을 말하는데, 세월이 흘러 가족조차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극적 상봉의 현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처자식은 내가 눈앞에 존재[在]하고 있음에도 믿지 못하겠다[怪]는 태도를 보이다가, 마음이 진정되고서야 기쁨의 눈물을 훔치고 있다.
 세상 난리 통에 죽었을 것이라 믿었던 사람이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살아 돌아왔으니 시인의 말처럼 이것이야말로 우연이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찌 인생이 우연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랴. 간절한 소망이 이러한 우연을 가장하여 행운으로 다가선 것이리라. 아울러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고 돌아온 화자를 염려와 대단함으로 바라다보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따뜻한 인간애가 묻어난다.
 끝으로 현실 속에 마주 앉은 두 부부는 밤이 다하도록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염없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만단정회[萬端情懷]를 꿈속처럼 느끼고 있으니 어떠한 설명이 더 필요하랴.
 
두보 '월야'
달보며 그리는 애틋한 부부 情

 
도시를 비추고 있는 달은 너무나 힘겨워 보인다. 그 빛은 도시의 어느 곳을 비춰주는지 알 길이 없고, 늘 도시의 회색 빛 고층 건물 사이에 그냥 달빛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운 이를 그리워 할 때면, 그 달에 모든 마음을 담아 그 달을 바라보고 있을 상대에게 전하던 그 순수한 인간 정감을 만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의 화려한 불빛이 그 달빛을 빼앗아 간 것일까? 아니라면 물질의 풍요 속에 우리의 정신 유산의 하나인 달을 마음속에서 내던져 버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今夜 州月[금야부주월] 오늘 밤 부주[ 州]에 달을,
 閨中只獨看[규중지독간] 규중에서 홀로 보리라.
 遙燐小兒女[요린소아녀] 가엾은 어린것들은,
 未解憶長安[미해억장안] 장안을 기리는 어미의 뜻을 모르리라.
 香霧雲 濕[향무운환습] 밤이슬이 구름같이 얹은머리 적시고,
 淸輝玉臂寒[청휘옥비한] 맑은 달빛은 옥 같은 팔에 차가우리.
 何時依虛幌[하시의허황] 어느 때 얇은 휘장에 의지하여,
 雙照淚痕乾[쌍조누흔건] 서로를 마주하고 눈물자국 마르게 하려나?


 <두보[杜甫 : 712 - 770], 월야[月夜]>
 신출한자 : 고을이름 부 閨 : 규방 규 燐 : 도깨비불 린 濕 : 젖을 습 臂 : 팔뚝 비 痕 : 흉터 흔
 
 ‘월야[月夜]’는 두보가 756년 8월에 지은 시이다. 756년 6월 안록산의 반란군이 동관[潼關]을 함락하자 당 현종은 서촉땅으로 황급히 도망하자, 그 해 7월 태자 이형[李亨]이 영무[靈武]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지덕[至德]으로 개칭하였다. 이에 두보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거느리고 북으로 도망하고 있다가, 태자 이형이 숙종으로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 자식을 부주 강촌[羌村]에 머물게 하고, 영무로 향하다가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이 시를 짓게 되었다.
 이 시의 화자는 두보가 아니고, 두보의 입을 빌려 읊조리는 아내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아내는 부주에서 홀로 저 달을 보고 있을 것인데, 어린것들은 그 달을 바라보고 있는 어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마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아내는 구름같이 얹은머리를 하고 그 긴 밤을 잠 못 이루고 새벽이슬이 내릴 때까지 달을 바라보고 있으리라. 어느 사이 몸에 비추는 새벽달빛은 차갑게 아내의 몸을 비추고 있을 터인데, 어느 날이 되어야 침상의 휘장에 의지하여 서로를 마주하고 눈물자국을 마르게 할 수 있겠는가?
 달을 매개로 펼쳐지는 아내와 남편의 애틋한 情이 참으로 아름답다.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할 수 있는 정감은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달빛은 우리 인류의 영원한 자신인 것이다.

 

이규보 '송우인지남전거'
대자연 숨쉬는 전원생활 동경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어느 서양 철학자의 말이 있다. 이 말은 인간도 자연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임을 자각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 인류가 지향하고 있는 계량화, 세분화, 물질화, 도시화는 자연의 발견이나 자연에 대한 자각과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진다.
 한시를 읽노라면 옛사람과 지금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을 느끼게 된다. 옛사람은 분명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자각하고 있지만, 지금 사람은 자연을 지배와 파괴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옛사람의 한시 속에는 자연에 대한 동경과 그 자연에 자신을 일체화는 경험이 무르녹아 있다. 이러한 점이 한시를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일 것이다.

 

 浮雲富貴夢悠悠[부운부귀몽유유] 뜬구름 부귀란 꿈처럼 아득한데,
 却向江南卜宅幽[각향강남복택유] 지난번 강남에 살집을 마련했구려.
 白玉黃金隨手盡[백옥황금수수진] 백옥황금 이렇게 저렇게 다 없어질 테고,
 靑山綠水放身休[청산녹수방신휴] 청산녹수라야 몸을 맡겨 쉴만하리라.
 日輸跳送人間老[일수도송인간로] 세월은 사람의 늙음을 재촉하니,
 天幕寬成醉裏遊[천막관성취리유] 하늘 아래 취하여 노닐음도 괜찮으리.
 待我他年婚嫁畢[대아타년혼가필] 장가 시집 다 보내고 갈 터이니 기다리게나,
 結茅隣舍種松楸[결모린사종송추] 이웃에 띠집 짓고 소나무며 오동을 심을 것이니.
 <이규보[李奎報 : 1168-1241], 送友人之南田居>

 

 세상사 부귀란 '논어'에 나오는 글귀처럼 뜬구름 아니던가?
 부귀란 뜬구름 같고 시인에게서 멀어져만 가기에, 언젠가 한적한 전원으로 돌아갈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정작 실행한 이는 자신이 아니고 친구였다.  백옥황금도 이렇게 저렇게 다 쓰여 없어지는 것임을 알고 나니, 청산녹수[靑山綠水]야 말로 몸을 던져 살아갈 곳임을 깨닫는다. 이는 자연이 곧 내가 최종으로 귀의할 곳임을 시인이 깨달은 것이다. 이는 인간의 유한함 속에 오는 무상감과 자연의 무한함 속에 깃들인 영원함의 절묘한 대비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은 부질없이 인간의 늙음을 재촉한다. 노화는 인간이 막을 수 없는 자연이법[自然理法]이다. 자연의 법칙 앞에 인간은 무력하고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시인은 그 자연의 거대한 힘을 깨닫고는, 하늘 아래에서 마음껏 취해 그곳에서 노닐고 싶어한다.
 여기에 시인이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싶은 욕구-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일 수도 있다-가 내재해 있다. 시인이 술을 마시는 행위는 세상사의 물리적 욕구를 없애고 자연 앞에 무한히 왜소하기만 한 인간의 유한함을 잊기 위함일 것이다. 아마 이태백의 심정 또한 이러했을 것이다.
 시인은 먼저 전원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내 부모로써의 도리를 다하고 갈 테니 기다릴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친구의 집 곁에 집을 짓고 소나무며 오동을 심고 함께 살아가겠노라 약속을 한다. 자연과 벗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이라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두순학 '소송[小松]'
人材 못 알아보는 세상 한탄

 
 부쩍 높아진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밤나무에 밤을 따던 일, 빨갛게 익어 가는 사과를 손으로 따보고 싶었던 일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발걸음은 어느 사이 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 있다. 당시 서 있었던 건물은 어느 사이 새 건물로 바뀌어 있고 이순신장군 동상은 교정 한쪽 편에 밀리어 낡은 모양으로 서있다. 그렇게 꿈 많던 어린 시절이 스쳐 지나가면 그들은 무엇을 할까 하는 궁금증이 증폭되고, 내 꿈은 무엇이었던가를 그려보며 지금의 위치를 점검해 본다.
 조선시대 서얼이나 중인들은 재능이 많았지만 세상에 쓰일 수 없었다. 화가 최북[崔北]은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권력자가 무례하게 그림을 요구하자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실명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찌르면서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라고 하였다. 또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는 세상임을 알고는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을 지나다가 “천하의 명사[名士]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으니 만족한다.”라고 하고는 못에 빠져 죽으려 하였다.

 

 自小刺頭深草裏[자소자두심초리] 어려서 풀더미 속에서 머리를 내밀더니,
 而今漸覺出蓬蒿[이금점각출봉호] 지금은 쑥보다 더 자랐음을 점차 알겠네.
 時人不識凌雲志[시인불식능운지] 사람들은 구름 찌를 기개 알지 못하고,
 直待凌雲始道高[직대능운시도고] 구름을 뚫고 나서야 높다고들 말하리라.
  <두순학[杜荀鶴 : 846 - 907], 소송[小松]>
 
신출한자 : 刺 찌를 자, 深 깊을 심, 裏 속 리, 漸 점점 점, 蓬 쑥 봉 蒿 쑥 호, 凌 능가할 능.

 

 이 시는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순학이 지은 것이다. 두순학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하고 마흔 여섯이 되서야 겨우 진사가 되었다. 정치현실에 대한 불만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이해와 동정을 시에 담아 표출하였다. 이 시는 굳은 절조를 상징하는 소나무에 자신을 빗대어 세상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함을 평이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첫 구에는 어린 소나무가 겨우 풀더미 속에서 싹을 내민 모습을 그렸다. 사람으로 본다면 이제 세상에 모습을 내민 정도이다. 그 소나무는 풀보다도 크기가 작아 뿌리까지 뽑힐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시인은 내민다는 의미의 ‘刺’자를 통해 소나무가 세상에 당찬 도전장을 내민 것으로 표출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나타내었다. 둘째 구에서는 어린 소나무가 쑥보다 덧 자라 있음을 표현하였다. 쑥이란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어느 사이 큰 기개를 지닌 소나무가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눈에 띌 정도로 자라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소나무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소나무의 미래에 대해 예측할 안목이 없다. 그렇기에 소나무가 구름을 뚫고 자란 뒤에야 높다고 말을 할뿐이다.
 높은 안목이란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예지[叡智]이다. 오늘도 소나무는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그 가치를 알아볼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명의 잡시[雜詩] 제5수
 
 옛 사람들이 지금 사람보다 짧은 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 잠자리에 들기까지를 생각해보면 그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알 수있다. 평균 수명이란 정말 숫자놀음에 불과한 장난이다. 십리쯤 떨어진 이웃 마을에 가는 일은 지금 우리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래 전엔 계획이 없었다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시내에 나갔다오면 시내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옷가지나 먹을 것 등등의 물품들이 어른의 손에 들려있었다. 특히 시골 고향을 떠나 타향 도시에 나가 공부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다음 도연명의 시는 가슴으로 읽혀지기에 충분하다.

 

 憶我少壯時[억아소장시] 내 젊었을 때를 생각하니,
 無樂自欣豫[무락자흔예] 즐거운 일이 없어도 마냥 즐거웠지.
 猛志逸四海[맹지일사해] 거칠 것 없는 포부는 세상에 떨쳤고,
 騫 思遠 [건핵사원저] 날개를 펼쳐 멀리 날아가려 생각했지.
 荏苒歲月頹[임염세월퇴] 무정한 세월은 흘러만 가더니,
 此心稍已去[차심초이거] 웅비하려던 마음 점점 사라져만 갔지.
 値歡無復娛[치환무부오] 기쁨을 만나도 달리 기쁘지 않고,
 每每多憂慮[매매다우려] 모든 일에 우려만 늘어가며,
 氣力漸衰損[기력점쇠손] 기력은 점차 떨어져만 가니,
 轉覺日不如[전각일불여] 날마다 이전만 못함을 알겠고,
 壑舟無須臾[학주무수유] 고단한 항로는 조금도 멈추질 않는데,
 引我不得住[인아부득주] 나를 끌어들여 쉴 수가 없구나.
 前塗當幾許[전도당기허] 앞길이 얼마나 남았던가,
 未知止泊處[미지지박처] 정박할 곳 어디인지 모르겠구나.
 古人惜寸陰[고인석촌음] 옛 사람 촌음[寸陰]을 아껴 써라 했는데,
 念此使人懼[념차사인구] 이를 생각하니 화들짝 두려움이 일어나네.
 <도연명[陶淵明] 잡시[雜詩] 제5수>

 

 도연명은 벼슬길에 올랐다가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고 낙향하여 귀거래사를 짓고 이름마저 잠[潛 : 숨다]이라 고치고 세상에 다시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한 그에게도 젊은 시절 꿈은 원대하였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 그리 즐거울 것도 없는 것에도 즐거웠고 무엇을 하던 꿈대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젊은 날의 꿈은 어느 틈에 작아지고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감정도 메말라 버린 지금엔 기쁜 일을 만나도 덤덤하여 즐겁지 않고, 오히려 일마다 우려[憂慮]뿐이다. 거기에 기력은 떨어지더니 부지불식간에 이전만 같지 못함을 깨닫는다. 고단한 인생항로를 잠시 쉬어가고 싶지만, 그렇지도 못하다. 그 항로에서 내려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생의 고단함을 내려놓을 정박지는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인생인가? 불완전함에서 오는 인간의 절대 고독이 밀려온다. 그래도 남은 인생, 열심히 살아야겠다. 옛 사람이 '시간을 아껴 써라’ 했지 않은가. 

 

蘇軾,어잠승록균헌시
 
살아가면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 어떠한 경우에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고, 오늘은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하는 정도의 일상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겠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 말은 물질적 풍요보다는 사람다운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다. 물질가치와 정신가치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존재한다.

 

不可使居無竹[불가사거무죽] 대나무 없이는 살 수 없을 걸세.
無肉令人瘦[무육영인수] 고기가 없으면 사람이 야윌 수 있다지만,
無竹令人俗[무죽영인속] 대나무 없다면 사람이 속되고 말걸세.
人瘦尙可肥[인수상가비] 사람 야윈 거야 살찌울 수 있어도,
俗士不可醫[속사불가의] 속된 사람은 의원도 어쩔 수 없다네.
傍人笑此言[방인소차언] 곁에 사람 이 말을 비웃어,
似高還似癡[사고환사치] 고상한 듯하지만 오히려 어리석다고 하네.
若對此君仍大嚼[약대차군잉대작] 만약 차군[此君]을 대하고 고기를 먹는다면,
世間那有揚州鶴[세간나유양주학] 세상에 어찌 양주학[揚州鶴]이 있겠는가?


 <소식[蘇軾], 於潛僧綠筠軒詩[어잠승록균헌시]>

 신출한자 : 瘦 여윌 수 肥 살찔 비 醫 의원 의 傍 곁 방 還 돌아올 환 似 닮을 사 癡 어리석을 치 嚼 씹을 작 那 어찌 나

 

 위의 시를 지은 소식은 우리에게 소동파로 잘 알려져 있다. 시는 사물의 대비를 통해 물질가치와 정신가치 사이에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아주 단순하게 그려내고 있다. 즉, 고기와 대나무라는 상징 매체를 통해 극단적으로 대비하였다.
 화자는 고기 없이 밥은 먹을 수 있어도 대나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여, 보통 사람의 생각과는 아주 다른 견해를 내놓아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유발시키고 있다. 고기가 없으면 사람이 야윌 수 있다지만, 대나무가 없다면 사람이 속되고 말 것이라고 하여 인간의 속물화를 경계하였다. 그러면서 야윈 것은 치료할 수 있지만 속되면 의원도 어쩔 수 없다고 하여, 극단적으로 정신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소동파가 내린 결말은 인간 한계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만다. 주위 사람들이 고상한 듯하지만 오히려 어리석다고 비웃자, 양방향의 좋은 점을 모두 취하려고 한다. 차군[此君 : 대나무의 이칭]을 마주하고 고기를 먹겠다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만다.
 이 대목에서 인간본연의 욕망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인간은 부와 명예, 물질과 정신의 풍요를 동시에 취할 수 있기를 여전히 소망한다. 여기에 인간 한계가 내재해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도 말이다.

 

홍귀달, 廣津舟中早起
새벽녘 자신에 대한 '반성'

 
지혜를 써서 사리를 비추어 본다는 의미의 ‘관조[觀照]’라는 불교 용어가 있다. 지혜를 쓴다함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을 때 사물의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도 관조라고 할 수 있다. 가을은 흔히 남성의 계절이라고 한다. 왜 하필이면 가을을 남성에 비유했을까. 가을 속담 중에 ‘가을 바람은 총각 바람, 봄바람은 처녀 바람’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남성의 생식 능력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의학적으로 남성은 죽음을 앞두거나 그에 준하는 스트레스나 공포를 느꼈을 때 오히려 성욕을 느낀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씨를 남기려고 하는 일종의 본능이라고 한다. 가을은 만물이 시들어 그 생명력을 잃어 가는 계절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생물들이 가을에 그 씨를 맺는다고 한다.

 

舟中晨起坐[주중신기좌] 배에서 새벽녘 일어나 앉아서는,
相對是靑燈[상대시청등] 푸른 등불 마주하고 있자니,
鷄犬知村近[계견지촌근] 닭 울고 개 짖어 마을 가까움을 알겠고,
星河驗水澄[성하험수징] 별이며 은하수 비친 물이 맑구나.
隨身唯老病[수신유노병] 몸에는 오로지 늙음과 병만이 찾아들건만,
屈指少親朋[굴지소친붕] 나를 알아줄 친구는 손에 꼽히네.
世事又 我[세사우료아] 세상일이 또다시 나를 뒤흔드는데,
東方紅日昇[동방홍일승] 동쪽으로 붉은 해가 떠오르는구나.

<홍귀달[洪貴達], 廣津舟中早起[광진주중조기]>

 

 참 의미의 반성은 죽음 앞에서 더욱 가치 있는지 모른다. 논어에서 증자는 ‘새가 죽으려 할 때는 그 울음이 애처롭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선하다’라고 하였다. 즉, 이 말은 예의 회복을 강조한 말인데, 예의 회복이란 바로 인간성 회복이다. 그 인간성 회복이란 바로 예를 갖춘 인간으로의 귀환을 뜻한다. 그 귀환은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배를 타고 있음은 인생항로를 암시한다. 새벽은 만물이 생명체로 다시 움직이기 이전의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때이다. 그러한 때에 등불을 마주하는 행위는 자신을 관조하려는 시인의 의지이다. 그러나 어느 사이 닭이 울고 개 짖어 인간 세상의 문이 열리려고 한다. 그럼에도 아직 가을 맑은 강물에 별이며 은하수가 들어와 앉아있다. 즉, 무한 생명체 자연 속에서 인간은 반성의 칼날을 매섭게 세울 수 있다.
 시인의 시선은 자신의 내면에 맞추어져 있다. 지난 시절을 되짚어보니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은 하나도 없고, 몸은 병들고 늙어가고 있을 뿐이며 자신을 이해해 줄 친구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이 말이 겸손한 말일뿐이겠는가!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유효한 언사이리라! 세상일이 난마처럼 얽혀 있어 정리가 필요한데, 세상일이 어찌 그리 쉽게 정리될 문제인가? 어느새 동쪽 하늘엔 아침 해가 붉게 걸려 있다. 반성을 통해 얻어진 결론은 없다. 다만, 그 속에 이미 삶의 건강성이 숨어 있을 뿐이다. 반성하는 인간은 정말 아름답다.

 

도잠 '음주'
 
불가 용어에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이 있다. 자신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말없이 마음으로만 전달되었다는 뜻이다. 요즘말로 텔레파시가 통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통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각을 조금만 돌려보면 자연과 인간에게 이 말은 더 잘 어울리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에게 끊임없이 무언[無言]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시를 읽고 있노라면,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 얼마나 아름답고 값진 것인가를 부지불식간에 깨닫곤 한다.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사람 사는 곁에 집을 지어도,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말이며 수레소리 시끄럽지 않네.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어찌해야 그럴 수 있소?”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마음이 멀어지니 사는 땅은 절로 외지네.”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따다보니,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한가로이 남산이 시야에 들어오네.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산 기운은 저녁노을로 아름답고,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 날던 새들은 짝을 지어 돌아오네.
此中有眞意[차중유진의] 여기 참된 뜻이 있으니,
欲辨已忘言[욕변이망언] 말하려다 이미 말을 잊었네.
 <도잠[陶潛 : 365 - 427], 음주[飮酒] 20수 중 제 5수>

 

 도잠의 호는 정절거사[靖節居士]이고, 자가 연명[淵明]이다. 도연명은 생활을 위해 81일 동안 팽택[彭澤]의 현령을 지내기도 했지만, 자연을 몹시 좋아하는 데다 쌀 다섯 말 때문에 높은 관리에게 허리를 굽히는 게 싫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와서 쓴 시이다.
 대개 사람 사는 곳이라면 시끄럽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찾는 사람들의 말이며 수레소리가 끊이질 않을 것이다. 요즘 말로 힘이 센 사람들 곁에는 그에 빌붙어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등창이라도 빨아줄 것처럼 몰려들 텐데, 도연명이 세상의 부와 명예를 모두 던져버리고 나니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한다. “어찌해야 그럴 수 있소?” “세상에서 마음을 멀리하니 내 사는 땅이 점점 궁벽해져 찾아오는 이 아무도 없어 그럴 수 있소.”라고 답한다.
 서리 맞고 오히려 더욱 그 곧은 절개를 드러낸다는 국화를 동쪽 울타리 밑에서 따다보니, 어느 사이 남산이 한가로이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서 국화를 따는 행위는 화자의 능동적 동작이지만, 남산이 한가롭게 시야에 들어옴은 의도하지 않은 행위이다. 무관심한 상태, 즉 마음을 비운 상황에서 들어오는 자연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다음 전개되는 산 노을의 아름다움과 하나 둘 짝을 지어 집으로 날아드는 새들의 모습은 이미 화자와 하나가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화자는 여기에 말하려 했던 참된 의미가 있다고 하고서는 말을 하려다가 이미 말을 잊는 경지로 들어간다. 주객의 일체를 이룬 그런 경지는 말로 표현하려 할 때, 이미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그런 상황이다. 노자가 말한 ‘도를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한 경지가 아니겠는가.
 
임숙영 '곡내'
生·死 초월한 부부의 사랑

 
부부 사이에는 촌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가까울 수도 있지만 바로 타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근래에 부쩍 부부사이에 평등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평등이란 말로 표현하기보다 수평이란 말로 대치했으면 한다.
 '평[平]’은 저울을 뜻하는 말이다. 평등이란 저울로 달아서 무게가 똑같음을 의미이다. 그 반면에 수평이란 저울의 양쪽 무게를 조절하여 맞춘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다섯 가지 인륜 도덕 중에 하나로 ‘부부유별[夫婦有別]’이란 말이 있다. 이는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쓰였던 말인데, 어느 사이 ‘별[別]’의 의미를 차별이란 말로 인식하던 때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부부라고 함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에게 바라고 싶은 속내를 시를 통해 살펴보자.

 

大抵婦人性[대저부인성] 대개 부인의 성품은,
貧居易悲傷[빈거이비상] 가난하면 쉽게 슬퍼하며 속상해 하네.
嗟嗟我內子[차차아내자] 아! 나의 안 사람은,
在困恒色康[재곤항색강] 곤궁해도 항상 얼굴빛이 평안했네.
大抵婦人性[대저부인성] 대개 부인의 성품은,
所慕惟榮光[소모유영광] 오직 영광스런 삶을 사모하네.
嗟嗟我內子[차차아내자] 아! 나의 안 사람은,
不羨官位昌[불선관위창] 직책 높음을 부러워하지 않았네.
知我不諧俗[지아불해속] 내 세상과 어울리지 못함을 알아,
勸我長退藏[권아장퇴장] 나에게 오래도록 숨어살자 권했네.
斯言猶在耳[사언유재이] 이 말이 귓가에 아직도 남아있어,
雖死不能忘[수사불능망] 떠났건만 잊을 수가 없구나.
惻惻念炯戒[측측념형계] 애달아 빛나는 충고 생각해보니,
慷慨庶自將[강개서자장] 강개하며 스스로 지키고자 했네.
莫言隔冥漠[막언격명막] 저승에 떨어져 있다고 말하지 말게나,
視我甚照彰[시아심조창] 나를 밝게 비춰 보고 있으니.
[任叔英[임숙영 : 1576 - 1623],<곡내[哭內]>]

 

 이 시는 임숙영이 지은 ‘안 사람을 곡하며[哭內]’이다. 작가는 아내가 보통 여자와는 달리 자신을 적극적으로 이해해 주던 모습을 추억하고 있다. 아내는 곤궁해도 항상 얼굴빛이 평안했으며, 부귀영화를 누리려하기 보다는 남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 주었다.
 남편이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강직한 인물임을 알고는 남편에게 오래도록 숨어살자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아내의 말이 못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애달아 아내의 말들을 생각해보니 남편 스스로도 그 말들을 지켜보려 했다. 참으로 아내의 진심 어린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아는 남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내는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 이승과 저승에 있다하더라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왜 그런가? 그것은 저승에서도 ‘나를 밝게 비춰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부부 사이에 진실한 사랑이 존재하는 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문제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정도라면 영화 ‘사랑과 영혼’의 원본이라고 말 할만하지 않은가! 

 

기준 '丁丑七月禁直詠懷'
이룰 수 없는 그리움 표현

 
 높아진 하늘, 아침저녁으로 제법 차가운 감촉의 기운이 이제 가을의 한 복판에 서 있음을 느끼게 한다. 비행기가 지나간 뒤로 생겨난 하얀 실선이 어느 사이 하늘 저 멀리로 이어져 나가고 그 끝은 어디일까 너무도 궁금하였다. 가을 저녁 무렵 강가에 나가서면 다섯 여섯 마리의 새들이 대오를 이루어 하늘 멀리 사라져 갈 때면 그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늦은 밤 자취방에 들어서서 차마 방안의 불을 켜지 못하고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기만 하였다. 이것이 외로움인가? 아니면 존재에 대한 불안인가? 아니면 그리움인가? 이렇게 그리움이나 외로움을 촉발시키는 매체들이 많은데, 그 매체가 자연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일수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黃鵠千里遠[황곡천리원] 황곡은 천리를 날아가니,
矢 杳何時[시격묘하시] 화살 주살로도 아득하여 미칠 수 없으리.
江鴻戀香稻[강홍연향도] 강 기러기 향긋한 벼가 그리워,
啣蘆遵水涯[함로준수애] 갈대 물고서 물가 너머로 날아가네.
出門望鄕關[출문망향관] 문 나서 고향을 바라보지만,
客子何所之[객자하소지] 나그네 어디로 가야하는가?
蕭蕭楓桂林[소소풍계림] 쓸쓸하게 계림에 단풍 드니,
日夕顔色衰[일석안색쇠] 낯빛은 하루하루 쇠하는구나.
寒雲落空庭[한운락공정] 찬 구름 빈 뜰에 내려앉고,
菊花依短籬[국화의단리] 국화는 키 작은 울타리에 의지해 폈네.
美人隔湘浦[미인격상포] 당신과는 강나루를 사이에 두고,
日夜長相思[일야장상사] 밤낮으로 그리움만 깊어만 가도,
相思不可見[상사불가견] 그리워도 만날 수 없고,
日日秋風吹[일일추풍취] 날마다 가을바람만 불어대는구나.
   <기준[奇遵:1492~1521], 丁丑七月禁直詠懷>
 
신출한자: 鵠 고니 곡, 杳 아득할 묘, 鴻 기러기 홍 戀 그리워할 연 稻 벼 도, 啣 머금을 함, 蘆 갈대 로, 遵 따를 준, 籬 울타리 리, 隔 사이 격.

 

 황곡[黃鵠]은 천리를 날아가는 거대한 새이다. 그렇기에 화살이나 주살로도 황곡을 따라 잡을 수 없다. 기러기도 또한 먼 곳으로 이동하는 새로 갈대를 물고 물가 너머로 날아간다. 여기 등장하는 황곡이나 기러기는 모두 자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라도 날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시인은 이러한 자유로운 두 존재를 등장시켜 자신의 현실과 상반되는 분위기를 극대화하였다. 문을 나서서 고향을 바라보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조차 모른다. 다시 주변을 보니 시간이 흘러 단풍은 들고 있고 자신의 몰골은 점점 쇠하여갈 뿐이다. 어느 사이 아침저녁으로 찬 구름이 빈 뜰에 내려앉는다.
 그러나 아직도 희망이 존재한다. 그것은 찬 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난 국화 같은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국화는 서리의 차디찬 시련 속에 더욱 선명한 모습을 보이는 고고한 꽃이다. 그러한 당신과 강나루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데, 무슨 연유인지 만날 수 없다. 그리움은 깊어 가는데 시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을바람만 끝없이 불어댄다. 시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시를 읽는 분의 상상 속에 남겨 둔다.

 

李達 '關山月'
님 그리는 간절한 마음 표현

 
 어느 사이 가을 한복판인가 하더니, 아침저녁으로 겨울의 곁눈질이 자꾸 신경을 건드린다. 대청봉에 17㎝의 눈이 내렸다고 하는 소식이며, 전방 고지는 모두 영하로 곤두박질했다고 한다.
 봄밤은 그렇게 짧은데, 늦가을 밤은 길기만하다. 이것은 옆구리가 허전한 사람들의 배부른 푸념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아련한 낭만인가?
 기다림에 대해 생각해보면, 사오십 대가 느끼는 그리움과 이삼십 대가 느끼는 그리움은 다른 것인가? 기다림을 참고 견디는 것으로 인식한 세대와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이고 화상으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대가 생각함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러나 기다림이란 말 자체가 지니고 있는 뉘앙스와 포즈는, 기다림 이후에 만날 기쁨의 대비를 통해본다면, 짠한 맛이나 멋은 분명 다르지 않겠는가. 

 

 關山月[관산월] 관산의 달이여,
 月出關山照秦京[월출관산조진경] 관산에 달 떠올라 서울을 비추네.
 郞君遠向秦京道[낭군원향진경도] 님께서 서울 머나먼 길을 가시는데,
 何處登樓見月明[하처등루견월명] 어느 누에 올라 밝은 달을 보시려나?
 郎有心[낭유심] 님에겐 마음이 있지만,
 妾有情[첩유정] 저에겐 정[情]이 있어.
 獨自隨君千里行[독자수군천리행] 홀로라도 님을 따라 천리 길을 가고파서,
 長相思[장상사] 사무치는 끝없는 그리움에,
 淚縱橫[누종횡] 눈물만 하염없네.
 <李達, 關山月> 

 

 이 시는 악부[樂府]의 일종인 횡취곡[橫吹曲]으로 <關山月>의 하나이다. 악부는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민요[民謠]’의 하나이고, 횡취곡은 그 중에 이별의 아픔을 담은 노래의 종류 모은 것이며, <관산월>은 횡취곡에 속하는 제목 중의 하나이다. <關山月>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면, 이는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악부시인 것이다.
 관산은 옛날 진[秦]의 북쪽 변방에 있는 산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서울에서 천리길이나 떨어져 있는 먼 변방이란 의미로 쓰였다. 진경[秦京] 또한 진의 수도라기보다는 통칭 서울이란 의미로 쓰였다. 화자는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진 관산에서 서울로 떠난 님을 그리워하고 있다. 관산의 달은 화자와 님을 연결해주는 촉매역할을 하고 있다. 화자와 님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달을 통하여 연결된다. 즉, 님의 마음[心]과 화자의 정[情]이 공간을 뛰어넘어 만난다.
 그러나 화자는 견딜 수 없어 홀로라도 님을 따라 천리 길을 따라가고 싶어한다.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자 마음을 가눌 수 없어, 그리움에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만다. 그 눈물 속에는 이별의 아픔이 짙게 배어 있다. 이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러한 운명인가? 아니면 기다리면 언제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그런 운명인가? 결론은 독자들의 상상 속에 맡겨두고자 한다

 

白居易 '贈內'
결혼은 이해와 사랑의 조화

 
 봄가을 붐비는 곳 중 하나가 결혼식장이다.  결혼이란 두 집안의 만남이며, 한 가정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옛날과 달리 빠르게 결혼 풍속도도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말아야 할 것 하나를 꼽으라면 무엇을 말하겠는가? 무엇보다도 결혼하는 당사자간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이 믿음의 바탕 위에 설 때 좋은 가정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시를 통해 결혼의 의미를 되짚어보자. 

 

生爲同室親[생위동실친] 살아서는 한 집에서 친하게 지내고,
死爲同穴塵[사위동혈진] 죽어서는 한 무덤에 티끌이 되리라.
他人尙相勉[타인상상면] 다른 부부도 서로에게 아낌이 없거늘,
而況我與君[이황아여군] 하물며 나와 그대에게 있어서야!
黔婁固窮士[검루고궁사] 검루는 참으로 가난한 선비였으나,
妻賢妄其貧[처현망기빈] 아내는 어질어 그 가난을 잊었고,
冀缺一農夫[기결일농부] 기결은 일개의 농부였으나,
妻敬儼如賓[妻경엄여빈] 아내는 공손하게 손님 모시듯 공경했고,
陶潛不營生[도잠불영생] 도잠은 생계를 도모하지 못했으나,
翟氏自 薪[척씨자찬신] 척씨가 스스로 살림을 꾸렸으며,
梁鴻不肯仕[양홍불긍사] 양홍은 벼슬길을 물리치자,
孟光甘布裙[맹광감포군] 맹광은 베옷도 달게 여겼네.
君雖不讀書[군수부독서] 그대 글로 읽지 못했어도,
此事耳亦聞[차사이역문] 이 일을 또한 들었으리라.
至此千載後[지차천재후] 지금 천년이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傳是何如人[전시하여인] 어떠한 아내였는지 전해지고 있다오?
人生未死間[인생미사간] 사람이 태어나 죽기 전에는,
不能忘其身[불능망기신] 그 육신을 벗어버릴 수 없으니,
所須者衣食[소수자의식] 먹고 입는 것은 꼭 필요할 터이나,
不過飽與溫[불과포여온] 배부르고 따스한 것 이상은 아니리라.
蔬食足充飢[소사족충기] 푸성귀에 거친 밥으로 굶주림을 면하면 되지,
何必膏粱珍[하필고량진] 하필이면 고량진미[膏粱珍味]여야 하리?
繒絮足禦寒[증서족어한] 무명 솜옷으로 추위나 막으면 되지,
何必錦繡文[하필금수문] 하필이면 비단에 수놓은 옷이어야 하리?
君家有貽訓[군가유이훈] 친정집에서 내려준 가르침이 있으니,
淸白遺子孫[청백유자손] '청렴결백을 자손에게 물려 주라’는 것이었지.
我亦貞苦士[아역정고사] 나 또한 너무 곧은 선비로서,
與君新結婚[여군신결혼] 그대와 처음 결혼하였으니,
庶保貧與素[서보빈여소] 가난과 소박함을 지켜서,
偕老同欣欣[해로동흔흔] 기쁘게 한 평생을 함께 늙어가기 바랄 뿐이오.
<백거이[白居易], 증내[贈內]>

 

 이 시의 작자 백거이는 37세의 나이에 부인을 맞이하였다.  백거이 또한 곤궁한 삶을 살았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가난하고 소박한 삶이지만, 행복할 수 있음이 부부간의 이해와 사랑임을 잊지 않았다.
 
반첩여, 怨歌行
 
가을 매미와 가을 부채는 모두 버림받은 상징물로 쓰인다. 두 물건 모두 무더운 여름한철 필수품으로 여겨지다가, 가을이 되면 모두 쓸모없는 물건으로 전락된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띠고 있다. 공교롭게도 가을매미와 가을부채를 한자음으로 표시하면 '추선'으로 같다. 가을매미는 '추선[秋蟬]', 가을부채는 '추선[秋扇]'이다.
 고려 때 우리 나라의 부채는 중국인들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사신으로 온 사람이 많은 양의 부채를 요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합죽선[合竹扇]에 그림이나 글을 적어 선물을 하는데, 아주 운치 있고 정겨운 선물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떻게 가을 부채가 버림받은 여인의 상징물로 쓰이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新裂齊紈素[신렬제환소] 제나라 고운 비단 새로 자르니,
 鮮潔如霜雪[선결여상설] 선명하고 깨끗하여 흰눈과 같네.
 裁爲合歡扇[재위합환선] 마름하여 합환선[合歡扇] 만들자,
 團團似明月[단단사명월] 밝은 달처럼 둥그렇구나.
 出入君懷袖[출입군회수] 임께서 출입할 때마다 소매에 넣었다가,
 動搖微風發[동요미풍발] 흔들어 살랑살랑 바람을 일으키네.
 常恐秋節至[상공추절지] 항상 근심은 가을이 와서,
 凉飇奪炎熱[량표탈염열]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빼앗아 가면,
 棄捐협사中[기연협사중] 궤짝 속에 내버려두었다가,
 恩情中道絶[은정중도절] 아끼던 마음마저 중도에 끊어짐이라.
<[반첩여], 怨歌行[원가행]>

 

 신출한자 : 紈 흰 비단 환 潔 깨끗할 결 扇 부채 선 懷 품을 회  袖 소매 수 搖 흔들 요 微 작을 미 飇 폭풍 표 奪 빼앗을 탈  棄 버릴 기 捐 버릴 연

 

 이 시는 한대[漢代] 궁녀의 신분으로 임금의 총애를 입어 첩이된 반첩여가 지었다. 반첩여는 후에 조비연[趙飛燕]에게 총애를 빼앗기고 참소를 당하여 장신궁[長信宮]으로 물러나 태후[太后]를 모시게 되었다. 반첩여는 장신궁에 있는 동안 애절한 심사를 시로 풀어냈는데, '원가행'은 이때에 지은 대표작이다. '원가행'은 자신이 임금의 총애를 잃고 장신궁으로 밀려나와 살게 된 신세를 가을 부채에 비겨서 쓴 작품이다.
 제나라의 고운 비단으로 만들어 진 합환선은 밝은 달처럼 둥그렇다. 그리고 그 바탕은 흰눈과 같이 선명하고 깨끗하다. 그래서 임이 출입할 때마다 소매에 넣었다가, 더위를 쫓으려 살랑살랑 바람을 일으켜 님의 마음을 빼앗아 두었다. 그러나 사랑 받을 때의 근심은 그 사랑을 잃을까 하는 것이다.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 버리면, 부채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궤짝 속으로 던져지고 이내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되어, 님의 마음에서 영원히 잊혀지고 만다.
 쓸모없어지면 버림을 받는 세상은 참으로 냉혹하다. 세상에 쓰일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의 심정과 쓸모없어 버려진 사람의 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하는데,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어려운 이웃을 한 번쯤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李白, 行路難
백절불굴의 시세계 감동적

 
 佛家에서 인생 자체가 고[苦]라고 한다. 그러한 인생에서 때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 몇이나 되겠는가? 그 뜻이 원대하나 받아줄 수 없는 세상에 살아가야 한다면 그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이렇게 뜻은 원대했으나 불우한 삶을 살다간 사람은 적지 않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이백이다. 이백은 때를 만나지 못한 불행 속에서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金樽淸酒斗十千[금준청주두십천] 금술잔에 맑은 술은 한 말에 만냥,
 玉盤珍羞値萬錢[옥반진수치만전] 옥쟁반의 진수성찬도 만냥이라네.
 停杯投箸不能食[정배투저불능식] 잔을 멈추고 젓가락 던지며 마시지 못하더니,
 拔劒四顧心茫然[발검사고심망연] 칼 뽑아들고 사방을 바라보니 마음만 아득해라.
 欲渡黃河氷塞川[욕도황하빙색천] 황하를 건너려 하니 얼음이 가로막고
 將登太行雪滿山[장등태항설만산] 태항산에 오르려니 산에 눈이 가득하네.
 閑來垂釣碧溪上[한래수조벽계상] 한가로이 푸른 시냇가에 낚시 드리우니,
 忽復乘舟夢日邊[홀부승주몽일변] 홀연히 꿈속에서 배에 올라 해 곁으로 나아가네.
 行路難 行路難 [행로난 행로난] 인생살이 어려워라, 인생살이 어려워라.
 多岐路 今安在 [다기로 금안재] 갈림길은 많기만 한데, 지금 어디쯤인가?
 長風破浪會有時[장풍파랑회유시] 큰바람에 물결치는 때가 올 것이니,
 直掛雲帆濟滄海[직괘운범제창해] 그때에 구름에 돛을 달고 푸른 바다 건너리라.
  <이백[李白], 행로난[行路難]>

 

 신출한자 :
  樽 술잔 준 羞 맛있는 음식 수 値 값 치 箸 젓가락 저 拔 뽑을 발
  顧 돌아볼 고 茫 아득할 망 塞 막을 색 垂 드리울 수 釣 낚시 조
  岐 갈림길 기 掛 걸 괘 帆 돛 범

 

 이백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가 호방함이다. 이백의 시에는 호쾌함과 웅장함이 느껴진다. 그는 술을 마셔도 한 번에 삼 백잔[一飮三百杯]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금술잔에 맑은 술이며 옥쟁반의 진수성찬을 마주하고서, 잔을 멈추고 젓가락을 던지며 마시지 못하더니 이내 칼을 뽑아들고 사방을 바라다본다. 그가 처해 있는 현실이 마치 황하를 건너가려 하자 얼음이 가로막고 태항산에 오르려니 산에 눈이 가득한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그렇기에 그 좋아하는 술을 마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낚시를 하다 80이 되어서야 주[周] 문왕[文王]에게 등용된 강태공과 배를 타고 해와 달 주위를 도는 꿈을 꾸고서 은[殷] 탕왕[蕩王]을 만난 명재상 이윤[伊尹]을 떠올린다.
 인생살이 어려워라. 갈림길은 많기만 한데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인생살이야말로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茫茫大海]와 같은 것이리라. 분명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큰바람에 물결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에 구름에 돛을 달고 푸른 바다를 건너가리라. 이 얼마나 호쾌하고 장쾌한가! 인생은 결코 좌절만으로 포기할 수 없는 값진 것이다. 마지막 두 구절에서 이백의 백절불굴의 정신이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유종원 강설
자연과 하나 된 이상적 인간 표현

 
눈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걱정부터 한다. 이렇게 걱정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렇게 오래 전은 아닌 듯하다. 그 주된 이유가 무엇보다 차량 때문인 것 같다.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와 인간이 오랜 세월 지녀왔던 감성의 맞바꿈은 인간이 지녔던 소박한 동화적 심상을 잃게 하였다. 또 한편으로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버림받기에 이르렀다.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던 물아일체[物我一體]란 고고한 멋과 맛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합일정신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면서 한편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지닌 인간의 겸손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의 합일정신을 표출하기에 적절한 양식 중의 하나가 한시이다.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천[千] 산에 새 날지 않고,
萬徑人종滅[만경인종멸] 길에 사람의 발자취도 끊겼건만,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홀로 눈 내리는 차가운 강에 낚시질한다.
<유종원[柳宗元 : 773-819] 江雪[강설]>

 

신출한자 자취 종 蓑 도롱이 사 笠 삿갓 립 釣 낚시 조

 

 이 시는 유종원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데 송[宋]의 범희문은 ‘당나라 오언절구 중에서 유종원의 이 시를 제외하고는 뛰어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오원절구는 고도의 균형과 절제가 요구되는 시형이다.
 이 시를 읽어보면 논어[論語]의 ‘歲寒然後知松栢[세한연후지송백]’이란 구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천산에는 이미 새가 날지 않고 만 갈래 길에는 사람의 자취마저 끊어졌다.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가 홀로 눈 내리는 차가운 강에 낚시질하고 있다. 첫 구의 絶, 둘째 구의 滅은 고요와 정적을 실감나게 해준다. 하늘 길과 지상 위의 길이 모두 끊어진 고립무원의 상태이다. 여기에 유일하게 도롱이에 삿갓을 쓴 늙은이가 등장한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배를 타고 혼자 차가운 강에 낚시를 하고 있다. 셋째 구의 孤, 넷째 구의 獨은 인간이 지닌 고독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寒江雪’이다. 앞서 나열된 ‘絶滅孤獨’의 의미가 이 세 글자에 집약된다. 차가운 강에 눈은 분명 녹아들어 없어지겠지만, 강 주위의 모든 사물에는 백색의 흰눈이 덮일 것이며 늙은이의 삿갓과 도롱이 또한 눈에 덮여 하나의 색으로 채색될 것이다. 이렇게 백색의 순일무잡의 상황으로 들어가는 순간시에 등장하는 늙은이도 자연물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며 늙은이의 낚시 행위는 결코 고기를 잡기 위함도 아니다. 결국 이 시는 화자의 깨끗하고 순결한 정신 상태가 ‘寒江雪’에 집약되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차디찬 겨울이미지는 냉엄한 현실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으로 인해 청징[淸澄]한 정신적 자세를 견지할 수 있는 역설적 상징이기도 하다. 순수하게 자연과 하나 된 인간의 천진한 모습이며 동시에 도시의 물질문명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현대인의 이상향이기도 하다.

 

김도수, 소양가
떠난 님 그리워하는 맘 '애절'

 
 지난 십일월 중순 춘천 소양2교 아래 수중에 거대한 마린걸[marinegirl]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 그 마린걸과 관련된 노래비가 서 있다. 그 노래비를 보면 너무나도 귀에 익어 가르쳐주지 않아도 따라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적혀 있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 열 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나는 어쩌나 / 아-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강은 생겨난 그 순간부터 역사다. 역사 속에는 수 없는 민초들의 삶이 존재한다. 그 민초들의 삶을 보듬고 말없이 흘러가는 생명이 강이다. 그 강에는 알지 못하는 많은 삶이 존재하고 특히 인간에게 이별은 삶의 아픔을 대변하는 고유명사와 같다. 이별이 없다면 슬픔도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터미널이나 공항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지만 예전에 이별할 때 늘 등장하던 장소가 나루터이거나 산마루였다.
 
   願君莫唱西洲曲[원군막창서주곡] 낭군님 서주곡은 부르지 마세요
 願君且聽昭陽歌[원군차청소양가] 낭군님께 소양가를 듣고 싶네요.
 昭陽江水淸且暖[소양강수청차난] 소양강물 맑고도 따스해지면,  
 門前삼삼楊柳多[문전삼삼양류다] 문앞 버들은 모두다 늘어집니다.
 東家女兒顔如玉[동가여아안여옥] 이웃집 계집아이 얼굴이 백옥 같건만,
 月明浣紗江上來[월명완사강상래] 달 밝은 밤이면 빨래하며 강가를 서성입니다.
 夜深驚起 鶴群[야심경기관학군] 물새들 화들짝 깨어선,
 鳴飛直過鳳凰臺[명비직과봉황대] 슬피 울며 곧장 봉황대로 날아갑 니다.
  <김도수[金道洙 : 1699 - 1733], 昭陽歌[소양가]>

 

 시에 등장하는 서주곡은 여성 화자가 떠나간 님을 그리워하며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중국 악부시를 말한다. 여성화자는 이러한 서주곡 대신에 소양가를 들려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의 내용이 소양가로 보인다. 셋째 구와 넷째 구에는 소양가의 배경인 소양강과 문 앞의 버들이 등장한다. 앞 구가 원경[遠景]이라면 뒤 구는 근경[近景]을 보여주는데, 끝없이 순환하는 강과 이별의 상징물인 버들의 대조를 통해 자연의 영원함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의 유한성을 통렬하게 드러냈다. 인간이 무한하다면 이별이란 그리 큰 슬픔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 다음 구에서 소양가의 주인공인 여아가 등장한다. 시인이 여아라고 언급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떠한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은 어린 나이여서 이별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다. 밤이면 빨래를 핑계로 소양강가로 나서야 했던 그 속내가 안타깝다. 밤이 깊어도 그 그리움만을 간직한 채 애꿎은 물새들만 잠 못 자게 하고 있지 않은가!
 춘천에서 서울로 나아가려 할 때 거쳐가야 했던 곳이 석파령인데, 봉황대에서 석파령으로 통하는 길이 잘 보인다. 마지막 구절에서 봉황대로 새가 곧장 날아갔다 함은 떠나간 님의 소식이라도 알고 싶어 하는 화자의 심정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소양강에 세워진 소양강 처녀가 부디 이별의 시련 속에 기다림만을 강요받는 소극적 이미지로만 남지 않기를 바라본다. 

 

송익필 足不足

 세상이 갈수록 빈부의 차가 커지고 있다고 한다.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갖고 적게 가진 사람은 더 적게 갖는다는 말이다. 함께 살아가야 할 처지에서 본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많이 가질수록 행복한가라는 소박한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는데, 논어에 공자의 제자 안연은 아주 가난한 삶을 살았으나 공자도 그의 삶을 부러워하였다. 안연은 한 그릇의 밥에 한 그릇의 국이면 만족하여 행복하였다니 그 비결은 무엇일까. 다음 시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君子如何長自足[군자여하장자족] 군자는 어찌하여 언제나 스스로 족하고,
 小人如何長不足[소인여하장부족] 소인은 어찌하여 언제나 만족하지 못하는가?
 不足之足每有餘[부족지족매유여] 부족해도 만족하면 매번 남음이 있고,
 足而不足常不足[족이부족상부족] 족하여도 만족 못하면 항상 부족하리.
 樂在有餘無不足[락재유여무부족] 즐거움이 넉넉함에 있어야 부족함이 없지만,
 憂在不足何時足[우재부족하시족] 근심이 부족함에 있다면 어느 때에 만족하리.
 安時處順更何憂[안시처순갱하우] 때마다 즐겁고 순리를 따른다면 또 무엇을 근심하리,
 怨天尤人悲不足[원천우인비부족]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한들 슬픔은 끝이 없네.
… <중략> …
 不足與足皆在己[부족여족개재기] 부족함과 족함이 모두 나에게 있으니,
 外物焉爲足不足[외물언위족부족] 외물이 어찌 부족함과 족함이 되겠는가?
 吾年七十臥窮谷[오년칠십와궁곡] 내 나이 칠십에 궁벽한 골짜기에 누워 있으니,
 人謂不足吾則足[인위부족오즉족] 사람은 부족하다 말해도 나는 오히려 족해.
 朝看萬峯生白雲[조간만봉생백운] 아침이면 봉우리에 흰 구름 피어남을 보노라면,
 自去自來高致足[자거자래고치족]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는 높은 운치에 족하고,
 暮看滄海吐明月[모간창해토명월] 저물녘 푸른 바다에서 밝은 달을 토해냄을 보노라면,
 浩浩金波眼界足[호호금파안계족] 드넓은 금빛 파도 일렁이니 눈 맛이 족하도다.
 春有梅花秋有菊[춘유매화추유국] 봄이면 매화며 가을이면 국화가,
 代謝無窮幽興足[대사무궁유흥족] 쉼 없이 피고 지니 그윽한 흥취로 족하도다.
 一床經書道味深[일상경서도미심] 책상 경서엔 도의 맛이 깊어가서,
 尙友千古師友足[상우천고사우족] 천년을 벗삼으니 스승과 벗으로 족하네.
 德比先賢雖不足[덕비선현수부족] 덕은 선현에 비한다면 부족하나,
 白髮滿頭年紀足[백발만두년기족] 백발 가득한 머리에 나이는 충분하리라.
 同吾所樂信有時[동오소락신유시] 내 함께 즐겨온 바가 진실로 때가 있었으니,
 卷藏于身樂已足[권장우신락이족] 몸에 책을 간직하니 즐거움이 이미 족하구나.
 俯仰天地能自在[부앙천지능자재] 천지를 올려보고 내려보고 자유자재이니,
 天之待我亦云足[천지대아역운족] 하늘이 나를 보고 족하다고 말하리라.
 <송익필[宋翼弼] 足不足>

 

 만족과 불만족은 모두가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을 말해준다고 한다. 시의 끝에 '천지를 올려보고 내려보고 자유자재이니, 하늘이 나를 보고 족하다고 말하리라'라고 한 것처럼 한 해를 마감하는 시간에 한 번쯤 되새겨 볼 일이다.
 
이백, 송우인
 
 한 해가 어느새 달포만을 남겨 놓고 아스라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려 한다. 참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실감한다. 그래서 십대에는 시간이 10㎞로 지나가고 삼십대는 30㎞로 지나가고 오십대는 50㎞로 흘러간다 말들 한다.이렇게 세월의 흐름이 빨라지는 것은 바쁨에서 오는 상대적 속도감일까? 이제 연말이라 모임도 많아지고 더욱 뒤돌아볼 시간이 없을 듯하다.
 이럴 때 조용히 앉아 지난 세월 곁을 떠나간 벗을 생각함은 어떠할까. 푸른 하늘이 보이고 하얀 강물이 있어,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고 물위에 어리는 은파[銀波]를 볼 수 있는 그러한 곳에서 말이다.

 

   靑山橫北郭[청산횡북곽] 푸른 산은 북쪽 성곽에 비껴 섰고,
   白水繞東城[백수요동성] 흰 물은 동쪽 성을 감싸 도는데,
   此地一爲別[차지일위별] 이곳에서 한 번 이별하면,
   孤蓬萬里程[고봉만리정] 외로운 그대에겐 만리 여정이구나.
   浮雲遊子意[부운유자의] 떠가는 구름은 나그네의 마음이고,
   落日故人情[낙일고인정] 지는 해는 이 사람의 마음이려나,
   揮手自玆去[휘수자자거] 손 저으며 이에 멀어지니,
   蕭蕭班馬鳴[소소반마명] 쓸쓸하다 얼룩말의 울음소리.
  <이백[李白], 송우인[送友人]>

 

 이 시는 대구법의 구성이 무엇보다 눈에 띈다. 첫 구와 둘째 구에 청산[靑山]과 백수[白水], 북곽[北郭]과 동성[東城]을 먼저 볼 수 있다. 산은 정적[靜的] 이미지인 반면에 물은 동적[動的]이미지이며 여기에 산은 횡[橫]으로 물은 요[繞]로 그 상태를 보태었다. 또한 청[靑]과 백[白]의 색감의 대조와 북[北]과 동[東]의 방향의 대조로 그 구성의 균형을 높였다.
 이곳에서의 한 번[一] 이별은 외로운 나그네에게는 만리[萬]의 여정이다. 만리는 산술적으로도 2,500㎞이니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기 쉽지 않음을 나타내는 반면, 그 헤어짐은 단 한 번만으로 극도로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그대는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쑥대와 같다고 하여 나그네의 고단한 심사를 미리 말하였다. 다섯 째와 여섯 째 구에서는 부운[浮雲]과 낙일[落日], 유자의[遊子意]와 고인정[故人情]이 절묘한 대구를 이루고 있다.
 구름은 바람 따라 떠다니는 속성을 드러내니 여정의 불안정함을 상징하고 붉게 물든 해가 떨어지려 함은 석별의 안타까운 심정을 상징한다. 나그네의 생각과 고인의 마음이 석양 노을만큼이나 붉게 물들어 떠나가나 마음을 남기고 보내나 보내지 않는 두 사람의 일체감을 드러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들어가라 손 저으며 멀어지는[去] 친구의 시각영상과 멀어지며 아득해만 가는 말울음[鳴]의 청각 영상의 결합은 무한한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거[去]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을 뜻한다. 이동하며 멀어짐을 말울음소리의 작아짐으로 드러내고 있다.
 세월은 마치 떠나가는 친구와 같음을 느낀다. 이에 그 세월을 못내 아쉬워 보내지 못하는 화자가 한 해의 막바지에 떨어지는 석양을 잡으려 하고 있는 듯하다

 

이소응, 계묘제석오수
 
 한 해의 끝자락이 서산 마루에 걸려 아쉬운 듯 막바지 정리를 종용하고 있다. 한 해를 마감하며 무엇을 돌아보겠는가?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이 고향이 아닌 타향이라면 어떻겠는가? 지금 한 선현의 시를 통해 한 해의 마무리를 하여보자. 다음 시는 1895년 을미의병운동 당시 춘천 의병대장을 지낸 습재 이소응 선생께서 1903년 한 해의 마지막 날 지은 계묘제석오수[癸卯除夕五首]이다.

 

 我朝五百歲[아조오백세]  우리 조정 오 백년으로,
 仁德厚而深[인덕후이심]  인덕이 두텁고도 깊건만
 척촉怪何物[척촉괴하물]  서성거리니 괴이하다, 어찌된 물건이기에,
 敢違上帝心[감위상제심]  함부로 상제의 마음을 어기었는가?
 憂國蒙難                        나라를 걱정하나 어려움을 만나
 保護天根老[보호천근노] 천근[天根]의 오래됨을 보호하는,
 當年卜此山[당년복차산]  이 산에 올해에 살 곳을 정했네.
 猶將傳習願[유장전습원]  스승님께 전습[傳習]을 원해서,
 感舊幾往還[감구기왕환]  옛날 몇 번을 왕래하였던가를 생각하네.
 卜居九鶴山中歲暮憶先師   구학산 중에 살아가며 세모[歲暮]에 선사를 그리워함>
 구勞生育我[구노생육아]  애쓰시며 나를 길러 주신 부모님,
 藏魂在關東[장혼재관동]  혼백은 관동[關東 : 춘천]에 묻혀 계신데,
 春秋香火事[춘추향화사]  봄가을 향 사르며 제사하는 도리,
 不得與人同[부득여인동]  사람과 더불어 함께 하지 못하네.
 故園親墓恨無人可託         고향 어버이 묘소 돌보아 줄 사람 없음을 한하다>
 誰哉倡道義[수재창도의]  누구인가 의[義]를 창도[倡道]한 사람?
 特立海西風[특립해서풍]  우뚝하게 해서[海西]에 풍교[風敎]를 세웠네.
 洪流擬砥柱[홍류의지주]  홍수에 지주[砥柱]이려니,
 毅恒兩衰翁[의항양쇠옹]  의암[柳麟錫]과 항와[柳重岳] 두 분의 어른이리라.
 憶毅菴恒窩二丈人            의암과 항와 두 어른을 추억하다>
 如何吾輩人[여하오배인]  우리 무리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逢此百艱辰[봉차백간진]  이에 백방으로 어려운 시기를 만났나.
 願各服仁義[원각복인의]  각각 인의[仁義]의 옷을 입어,
 挽回隆古春[만회융고춘]  옛 봄날의 융성함을 만회[挽回]하기 원하네.
 憶諸親黨散居遠鄕            여러 친당[親黨]이 고향 멀리에서 흩어져 살아감을 생각하며

 

 첫 번째 시에서는 자신에 대한 반성을 언급하였다. 조선이 오 백년이란 세월을 인덕[仁德]으로 이어왔건만, 자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나라가 기우는 어려움을 만났는가 라고 하였다. 상제의 마음과 어긋났다고 함이 바로 그러함을 말한 것이다. <국가> 두 번째 시에서는 춘천에서 제천으로 오고가며 스승에게 공부 배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였다. <스승> 세 번째 시에서는 고향에 갈 수 없어 부모님의 묘소 관리도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을 말하였다. <부모> 네 번째 시에서는 평생 선배이며 지기[知己]인 의암과 항와에 대해 말하였다. 어려운 시대에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를 추억하였다. <친구> 다섯 번째 시에서는 자신과 가까운 친척이나 동지적 결속을 유지했던 고향 사람을 추억하였다. <고향>
 군사부[君師父] 일체라고 하였던가? 여기에 친구와 고향을 돌아보며 한 해를 마무리함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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